2016/03/29

일본 학자들, <제국의 위안부> 놓고 격론..찬반 교차 | 다음뉴스

일본 학자들, <제국의 위안부> 놓고 격론..찬반 교차 | 다음뉴스



일본 학자들, <제국의 위안부> 놓고 격론..찬반 교차

경향신문 | 도쿄|윤희일 특파원 | 입력 2016.03.28. 19:07

[경향신문] 일본에서 활동하는 학자 10여명이 28일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룬 박유하 세종대 교수의 책 <제국의 위안부>를 놓고 격론을 벌였다.
이날 일본 도쿄(東京)도 도쿄대 고마바(駒場)캠퍼스에서 열린 토론회에서는 <제국의 위안부>가 ‘일본군의 책임은 과소화하고 전후 일본의 반성은 과대 평가했다’는 부정적 평가와 ‘한·일 관계의 악순화에 어떻게 대응할지를 고민하고 있다’는 긍정적 평가가 교차했다.
일본의 위안부 분야 연구를 이끌어온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 주오(中央)대 교수는 이 책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나타냈다. 요시미 교수는 일본군 위안부와 일본 병사의 관계를 ‘동지적 관계’로 본 부분에 대해 “위안부 여성들이 절망적 상황 속에서 얼마나 살아남고 싶었는가에 대한 시선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살아남기 위해 특정한 병사의 비호를 원한 경우가 있었는데 그걸 두고 위안부와 병사가 동지적 관계였다고 하는 것에는 매우 큰 오류가 있다”고 지적했다.
세종대 박유하 교수의 저서 <제국의 위안부>. 윤희일 특파원
세종대 박유하 교수의 저서 <제국의 위안부>. 윤희일 특파원
요시미 교수는 책에 인용한 피해자 증언에 문제가 있다고 비판하면서 연구서로서 실격이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오노자와 아카네(小野澤あかね) 릿쿄(立敎)대 교수는 “책의 문제점은 ‘애국’, ‘자긍심’ 등 조선인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에서 나온 말들을 문맥을 무시한채 자의적으로 기록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정영환 메이지가쿠인(明治學院)대학 준교수는 “일본군의 책임은 과소화하고 전후 일본의 반성은 과대 평가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 일본어판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 일본어판
니시 마사히코(西成彦) 리쓰메이칸(立命館)대 교수 등은 책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제국의 위안부>가 위안부 피해자들과 일본군의 관계를 ‘동지적 관계’로 평가한에 대해 “일·한 대립의 패러다임을 넘어 전쟁 수행의 협력자 역할을 강요당한 남녀 모두 피해자였을지 모른다는 새로운 인식의 가능성을 시야에 넣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을 내놨다. 그는 “이 책을 단서로 해서 전향적으로 논의할 것이 많이 있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기미야 다다시(木宮正史) 도쿄대 교수는 “위안부 문제로 인해 일·한관계가 악화했는데 그 악순환에 어떻게 대응할지를 저자가 생각한 것 같다”고 평가하면서 “박 교수의 문제제기는 일본 사회에서 어느 정도 유효성이 있다”고 평가했다.
기미야 교수는 “(군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는데 대해) 일본만 탓할 것이 아니라 한국도 다가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듯 하다”고 해석했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한국 검찰이 박 교수를 기소한데 대한 비판 의견도 제시됐다. 아사노 도요미(淺野豊美) 와세다(早稻田)대 교수는 “학문의 자유가 걸린 문제가 재판정에 오른다고 하면 사회의 진화·발전이 멈춘다”는 의견을 냈다.
<도쿄|윤희일 특파원 yh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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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토론회의 기록을 봐야 문맥 파악을 제대로 할 수 있을 것인데, 이 기사에서 인용된 대로라면, <제국의 위안부> 옹호자 분들의 발언은 "학자적 입장"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전형적인 망언에 더 가깝습니다. 예를 들어 이런 발언을 재음미해보시죠:
"["동지적 관계"와 같은 표현은] 일·한 대립의 패러다임을 넘어 전쟁 수행의 협력자 역할을 강요당한 남녀 모두 피해자였을지 모른다는 새로운 인식의 가능성을 시야에 넣기 위한 것" (西成彦씨).
"남녀 모두"가 누굴까요? "녀"라면 성노예화 당하신 피해자 할머니들일텐데, 납치/인신매매의 피해자가 되어서 군복 입은 강간범들에게 수년간 감금과 정기적인 성폭행을 당하신 분들을 "전쟁 수행 협력자 역할을 강요 당했다"라고 표현한다면 이게 "학자적 입장"이 아니고 사법처리쯤 돼야 할 망언입니다. 이런 표현들을 들으실 때의 할머니들의 마음을 한 번 상상해보시죠. 이런 게 성폭행 사건 시의 전형적인 2차 가해입니다. 그리고 "남"이라면 일군 군인들을 이야기한 셈인데, 비록 징병제에 걸려서 병영에 끌려갔다 해도 남경학살과 같은 대형 반인륜 범죄를 저지른 말단 군인들까지는 - 비극적 사연이 있다 해도 - 분명히 "피해자"는 아닙니다. 전범들이죠. 백로서아 같은, 파쇼 침략 시절에 인구의 4분의 1을 학살로 잃은 곳에서 마을들을 주민들과 함께 전소시킨 Wehrmacht의 군인들이 비록 징병됐다 해도 분명 전범이듯이 말입니다.
파쇼 독일의 군인들과 저들이 성폭행한 피지배/피침 지역의 여성들을 동렬에 놓고 "모두 피해자"라고, 만약 독일 어느 대학 교수가 망언했다면 아마도 그다음 날은 그 학생들부터 들고 일어났을 것입니다. 1960년대말-70년대초의 일본과 달리 오늘날 일본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아, 아쉬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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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hrs
Vladimir Tikhonov (박노자)는 '일본 군인은 절대 가해자, 위안부는 절대 피해자' 라는 전제에서 눈꼽만치도 진전하지 못한다. '독일이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다.' 라며 비교하는데,
나치 독일은 절대 다수 국민의 지지 속에 그 대표자인 히틀러가 일으키고 전쟁 내내 온 국민의 지지 속에 이루어 진 것임에 반해, 제국 일본에서는 상당수의 일본인들조차 천황과 군부의 전쟁에 반대하고 사형/투옥되는 상당수의 양심의 목소리가 있어왔고 제국일본 군부의 일본 민중과 식민지인들에 대한 탄압 및 강제적 징병이 있어왔다는 걸 왜 무시하는지 모르겠다.
박노자의 주장은 광주항쟁에 있어서 국군 사병은 '무조건 가해자' 라는 것은 조금의 다른 해석도 용납될수 없는 진리라는 주장과 같다. '일부 사병들은 자신들의 행동에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상부 명령을 어길 수 없었다.' 라는 말을 한 사람에 대해 "독일이었으면 처벌대상" 이라고 비난하는 건데..
제국일본 군부의 폭력은, 가장 큰 희생자는 여성, 그것도 돈없고 힘없는 여성이지만, 사회 하층 남성역시 희생자였다는 (제국주의의 폭력은 돈없고 힘없는 여성만이 희생되는게 아니다. 너희 남성들도 희생될수 있다.) 그 말이 그렇게 "독일이었다면 처벌되었을" 망언인 건지 의문이다.
게다가 박유하 교수는 강제로 끌려간 군인이나 위안부나 '똑같은' 희생자라는 주장을 한 적이 없다. 가장 큰 희생자는 분명 여성, 그것도 식민지 출신의 돈없고 힘없는 여성 (위안부)였다는 걸 분명히 했고. 다른 계층, 남성의 희생도 있었다는 걸 말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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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보식이 만난 사람] "'위안부 할머니 보상 문제' 해결되면 말할 거예요… 내 靑春 보상해달라고" : 조선일보 - 사회 > 최보식이 만난 사람

[최보식이 만난 사람] "'위안부 할머니 보상 문제' 해결되면 말할 거예요… 내 靑春 보상해달라고" : 조선일보 - 사회 > 최보식이 만난 사람

[최보식이 만난 사람] "'위안부 할머니 보상 문제' 해결되면 말할 거예요… 내 靑春 보상해달라고"

최보식 선임기자 | 2015/07/20 03:00
일본 다카마쓰 공항에 나와 있는 인파 속에서 우스키 게이코(67·臼杵敬子)씨를 단번에 알아봤다. 한 번도 만난 적 없었지만 보는 순간 저 사람이구나 싶었다. 낡은 운동모를 쓴 그녀는 하늘색 셔츠와 바지 차림에 고무 샌들을 신고 있었다.

"우연히 뛰어들었는데 25년이 흘렀어요. 이렇게 오래 끌 줄은 몰랐지요. '위안부 할머니 보상 문제'가 해결되면 할머니들에게 말하겠어요. 이제 내 청춘(靑春)을 보상해달라고(웃음)."

그녀는 일본의 전후(戰後) 책임을 확실히 하는 '핫키리(ハッキリ)회'를 만든 인물이다. 일본 도쿄지방법원에서 13년간 끌어왔던 태평양전쟁 희생자 보상 청구 재판을 뒷바라지했고, 위안부 할머니 문제 해결을 위해 일본 현지에서 온몸으로 싸워왔다.
우스키 게이코씨는“한국 위안부 할머니 문제로 2년간 입국 금지된 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최보식 기자
"한국 유족은 대부분 시골 노인이었지요. 나리타 공항에 도착해 시내로 들어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바닥에 앉아 오징어 안주로 소주를 마셨으니까요(웃음). 우리 회원들이 깃발을 들고 '이쪽으로 오시오 저쪽으로 오시오' 하며 군대 스타일로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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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문화와 정서가 달라, 일본인 눈에는 이해가 잘 안 되지요?

"우리는 유족회에 '경비 문제가 있으니 가능하면 많이 데리고 오지 말라'고 했지요. 하지만 한국에서는 서로 '내가 가야 해결된다'며 한 번에 50명까지 왔어요. 그때 JAL 항공료가 더 쌌어요. 그걸 타고 오겠다고 해서 그 시간에 기다리고 있으면 '일본과 싸워야 하는데 왜 일본 비행기를 타야 하나. KAL로 바뀌었다'는 전화가 와요(웃음). 골치 아팠지만 재미있었어요."

그녀는 대학 시절 좌파 운동권이었다. 니혼대 예술학부를 중퇴한 뒤 프리랜서와 방송 작가를 했다. 1976년 유학 중인 친구를 방문하기 전까지 한국에 대해 전혀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

"한국까지 비행기로 두 시간밖에 안 걸리는 데 놀랐어요. 이렇게 가까운 한국을 왜 전혀 모르고 있었을까 했어요. 그 뒤 일본인의 '기생(妓生) 관광'을 취재하면서 역사적으로 위안부 문제도 있었다는 걸 알게 됐지요. 일본의 TV 방송에서 '일제 36년 전후 36년' 같은 프로를 만들 때는 작가로 참여했지요."

그녀는 서른네 살에 연세대어학당에 입학했고, 그때 사귀었던 한국의 한 여성 주간지 편집장을 통해 위안부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1984년이었어요. 배애자 할머니는 서울 삼각지에 있는 건물의 옥탑방에 살고 있었어요. 위안부로 미얀마까지 끌려갔다가 해방을 맞았다고 해요. 하지만 한국에 돌아오지 않고 사이공(호찌민)으로 넘어가 거기서 한국 남자와 결혼했어요. 하지만 위안부였다는 사실이 드러나 이혼당했어요. 그 뒤 베트남 남자를 만나 살았어요. 베트남전쟁에서 사이공이 함락됐을 때 아이 다섯을 데리고 한국 대사관에 들어갔대요. 베트남 난민들 사이에 끼여 한국으로 돌아온 거예요. 파란만장한 삶이었어요."

그녀에 의해 위안부 할머니의 존재가 일본 TV 방송에 처음 소개됐다. 배애자 할머니는 1988년 세상을 떴다.

"사회적으로 지원 단체가 없었을 때였죠. 제가 개인적으로 얼마간 도움을 줬을 뿐. 이분이 살아 있었다면 김학순(1994년 도쿄지방법원에서 일본군위안부 존재 사실을 최초로 증언·1997년 별세) 할머니보다 먼저 '1호 할머니'가 됐을 겁니다."

그녀는 1990년 일본 신문에 '태평양전쟁 희생자 유족회가 일본 후생성을 찾아 한국인 군인·군속 명단을 요구했다'는 1단짜리 기사가 실린 걸 보고, 한국에도 유족회가 있었구나 하고 놀랐다. 그해 6월경 다른 일로 서울에 가 있었는데 일본의 한 방송국에서 '유족회가 부산에서 서울까지 도보 행진을 하고 있으니 당신이 취재해달라'고 연락이 왔다. 그는 도보로 올라오는 유족들을 만나러 충청도로 찾아갔다. 도착하니 3명밖에 없었다.

"일본 TV에서 취재한다고 하니 다음 날은 몇 백 명이 됐어요(웃음). 이분들과 인터뷰하니 '우리 아버지가 끌려갔는데 어떻게 됐는지 생사를 모르겠다' '아직도 못 찾고 있다' '보상금은 한 푼도 받지 못했다'고들 했어요. 생사 확인은 전후 처리의 기본이잖아요. 전쟁이 끝난 지가 언제인데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고, 한일협정(1965년)으로 배상 문제가 다 끝났다고 했는데 왜 이런 말이 나오는지 쇼크를 받았어요."

―당시 이를 확실하게 하지 않았던 한국 정부가 문제가 있었던 것이지요.

"일본 정부가 더 문제가 있었어요. 모든 명단을 갖고 있으면서도 후생성 창고에 처박아놓고 90년대까지 공개하지 않았으니까요. 역사적으로 일본 전쟁 때문에 희생됐는데, 그때까지 생사 확인도 안 해주는 것은 정말 양심이 없는 거죠. "

1990년 말 유족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재판하겠다며 도쿄에 갔다. 그런데 유족들 안에서 이견과 충돌이 생겼다. 변호사를 구하지도 못했다.

"나는 취재를 갔다가 부탁을 받고 유족 몇 명을 우리 집에 재워줘야 했어요. 그러면서 주위 친구들에게 '우리는 전후 보상이 다 끝났다고 했지만 한국은 이제 시작이다. 재판을 위한 변호사 선임과 실태 조사 경비가 필요하다'고 알렸어요. '핫키리회'가 그렇게 만들어진 거죠. 열 명으로 시작해 나중에는 400명쯤 됐어요."

―일본 정부를 상대로 재판하는 한국인을 위해 돕겠다는 것은 국가 이익에 반하는 행위가 아닌가요?

"양심과 인도주의가 더 큰 가치이지요. 지금과는 다르게 한국 유족회에 심정적으로 동조하는 사람이 많았지요. 일본 정계와 언론계 안에서도 반성 분위기가 있었어요."

태평양전쟁 유족회 대표들은 재판이 열릴 때마다 1년에 4번쯤 도쿄에 갔다. 항공료는 한국에서 부담했고, 일본 체류 비용은 핫키리회에서 맡았다. 그녀가 보여준 회원 자료집 '핫키리 뉴스'에는 유족회 숙박비, 활동 내용, 피해자들 육성 증언, 일본 후생성에 생사 확인을 위해 보낸 질의서와 답변서 등이 꼼꼼하게 나와 있었다. 다섯 권이나 되는 이런 두꺼운 기록을 보면서 '정작 피해자인 한국은 하지 않았던 일을 일본의 보통 사람들이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재판의 원고는 40명이었고 이 중 위안부 할머니 9명이 있었어요. 여성 문제 관점에서 위안부 할머니만 주목받았어요. 하지만 전쟁 피해자 유족회에는 남편을 잃은 부인과 유복자도 있었어요. 한국 운동 단체에 이분들도 공평하게 신경을 써달라고 부탁했어요."

1991년 유족들이 도쿄지방법원으로 가는 장면. /가쓰야마 히로스케 제공
―그 재판에서 패소(敗訴)했지요? 제가 알기로는 1992년부터 2004년까지 끌었는데.

"한일협정에서 정부 간 보상이 끝난 마당에 이길 수 있다고 애초 생각하지 않았어요. 재판 동안 우리는 전후 처리 보상에 대해 일본 정계에 로비하고 사회적으로 알리는 일을 진행했어요. 그 과정에서 일본 정부가 태평양전쟁 희생자 명단을 공개하겠다고 밝혔고, 위안부 할머니 보상을 위해 '아시아여성기금'도 설립됐으니까요."

―'아시아여성기금'을 통한 보상은 "일본 정부가 법적 책임을 회피하려는 속임수"라고들 했지요?

"일본 정부는 직접 할머니들에게는 1엔이라도 보상금을 줄 수 없다는 입장이었어요. 당시 나는 국회 앞에서 보름간 시위했어요. 결국 정부는 할머니들의 의료·복지 지원 사업비 명목으로 '아시아여성기금'에 300억엔을 내놓았어요. 국민 모금 200억엔보다 많은 액수였죠. 사실상 정부 돈이 할머니 보상금에 들어갔던 셈이지요. 당시 하시모토(橋本龍太郞) 총리도 성금을 냈고 보상금을 받은 할머니들에게 사과 편지를 전했어요."

―일본 정부는 '군(軍) 위안소는 민간 업자가 상업적으로 운영한 것'이라는 입장이지요. 그래서 법적 책임을 질 수 없다는 것인데.

"설령 민간 업체를 통해 모집했다 해도 사용자는 일본 군대였습니다. 일본 정부와 국민의 책임은 피할 수 없는 겁니다."

―그렇다면 일본 정부가 '아시아여성기금'을 앞세운 것을 어떻게 봅니까?

"살아 있는 일본 노인 중에는 전쟁에 참전해 위안부와 관계있는 분들이 있어요. '우리 아버지·할아버지가 무슨 짓 했느냐'를 국민도 알고 반성해야 한다는 거죠. 국민 한 명 한 명 반성하지 않으면 정부가 반성하지 않아요. 그래서 저는 모금에 찬성했어요.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으로 알려진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도쿄대 명예교수도 아시아여성기금 위원이었어요."

―얼마를 지급했나요?

"한국·대만 할머니에게 200만엔(당시 1400만원)이 지급됐어요. 식민지 인도네시아에 살다가 끌려간 네덜란드 위안부 할머니는 대부분 받았어요. 한국 할머니는 61명만 받았어요."

―한국의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에서는 아시아여성기금의 돈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지요?

"그 돈을 받으면 당신들은 정말 매춘부라는 걸 인정하게 된다는 식으로 말했지요. 저는 한국 운동 단체가 양반 의식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양반 의식이라면?

"프라이드(명분)가 강하다고 할까. 자신들의 기준으로 볼 뿐, 그동안 어렵게 살아왔던 피해자 입장을 모르는 것 같았어요. 할머니들은 언제 죽을지도 모르니 빨리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달라는 쪽이었어요. 우리가 이분들을 돕는다 해도 '받아라 받지 말아라' 할 권리가 없어요."

―선생이 할머니들에게 그 돈을 받으라고 회유했다는 주장도 있던데요?

"저는 '받으세요'라고 한 적이 없어요. 일본 정부에 돈을 더 많이 내놓으라고 압박하는 게 제 역할이었어요."

―이 문제로 정신대대책협의회 측에서 법무부를 통해 선생을 2년간 입국 금지시켰다고 들었습니다.

"관광 목적인 무(無)비자로 한국에 들어와 할머니를 만난 게 비자 규정을 어겼다는 통보를 받았지요. 참담한 기분이었어요. 보조를 맞췄던 한국 운동 단체와는 결별했어요. 하지만 제가 해야 할 몫이 남아 있어 이 일을 그만둘 수는 없었어요. 무슨 인연인지 모르나 이 일에 매달려 제 청춘은 다 흘러가버렸어요."

땀이 흘렀다. 습하고 더운 날씨였다.

New Policies Allow Australian Homeowners To Go Solar And Even Sell Back Energy! | Comparison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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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Policies Allow Australian Homeowners To Go Solar And Even Sell Back Energy!

New Policies Allow Australian Homeowners To Go Solar And Even Sell Back Energy!
Last updated: December 21st,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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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ke advantage of the Small-scale Renewable Energy Scheme and the Solar Feed-in Tariff to not only go solar, but also get paid for your excess energy!

Thanks to the little-known Small-scale Renewable Energy Scheme, homeowners in specific areas are getting $1,000's in technology certificates, which helps offset the cost of purchasing and installing a Solar Energy System on your house.

Plus, the Solar Feed-In Tariff allows you to actually SELL the excess energy you generate back into the grid. Yes, you get paid!

These programs, available in specific areas, are a huge win/win for Australian families.


How Does it Work?

The government would like as many people as possible to switch to solar. Here's why: Solar is cheaper, and better for long term economic strength. Here's how “going solar” can affect what you pay:


Dramatization
But the problem is the cost of going solar is prohibitive. That’s why the Small-scale Renewable Energy Scheme was enacted – to help homeowners like you pay for solar. Then, to make it even better, the Solar Feed-In Tariff allows you to automatically get paid for the excess energy your solar system generates.

Imagine that – you getting paid for energy!

But you want to act now – we don’t know how long these programs will remain in effect.

How Do I Find Out if I Qualify?

It's 100% free to see if you qualify, and takes about two short minutes.


Step 2: Once you go through a few questions, you will find out if your area qualifies, and how much "going solar" can mean to your wallet!







- See more at: http://comparisons.org/new-policies-allow-australian-homeowners-to-go-solar-and-even-sell-back-energy.php?aff=1235&sub=AUS_Solar&pub=AUS-Solar-O-LEAD-Desktop&nan_pid=1848033527#sthash.TgGioBWr.dpuf

(25) Yisang Sohn - 한겨레 지면에 실린 서경식 교수와 와다 하루키 교수의 논쟁을 요약하자면, 서 교수는 일본...

(25) Yisang Sohn - 한겨레 지면에 실린 서경식 교수와 와다 하루키 교수의 논쟁을 요약하자면, 서 교수는 일본...

한겨레 지면에 실린 서경식 교수와 와다 하루키 교수의 논쟁을 요약하자면, 서 교수는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반면, 와다 교수는 피해자에 대한 실질적인 "보상"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운동노선은 사실 같은 동기에서 시작됐다. 한 쪽은 적대적 세계관에 기초하고 다른 한 쪽은 공생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같이 가야만 한다. 그러나 전자는 후자를 이해하려 하지 않으며 반동 취급한다. 후자에게 전자는 현실적인 결과를 만들어 낼 생각이 없이 떼쓰기만 하는 귀찮은 존재다.

Alastair McIntosh -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Alastair McIntosh -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Alastair McIntosh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Alastair McIntosh
AlastairMcIntosh.jpg
by Dominique Carton, Oct 2010
Born1955
EducationUniversities of Aberdeen(BSc), Edinburgh (MBA),Ulster (PhD)
OccupationWriter, academic and activist
ReligionQuaker
Spouse(s)Vérène Nicolas
Alastair McIntosh is a Scottish writer, academic and activist.
He was brought up inLeurbost on the Isle of Lewisand is married to Vérène Nicolas. He is involved with Scottish land reform especially on Eigg and campaigned successfully against the Harrissuperquarry in Lingerbay. He is a fellow of the Centre for Human Ecology, an Honorary Fellow of the Schumacher Society, and helped to set up the Govan based GalGael Trust of which he is Treasurer and a non-executive director. In 2006 he was appointed to the honorary position of Visiting Professor of Human Ecology at the University of Strathclyde (Department of Geography & Sociology)[1] - the first such post in Human ecology in a Scottish university.
Alastair also features on Nizlopi's mini album 'Extraordinary' on the track titled 'Homage To Young Men'.[2]

Education[edit]

He holds a BSc in Geography, submajoring in moral philosophy and psychology from the University of Aberdeen (1977), a financial MBA from the University of Edinburgh (1981), and in 2008 the Academy of Irish Cultural Heritages (of which he is a Visiting Fellow) at theUniversity of Ulster approved the award of PhD by Published Work based on Soil and Soul and twelve supporting publications presented with a short linking thesis, 'Some Contributions of Liberation Theology to Community Empowerment in Scottish Land Reform 1991-2003'.[3]Parts of this were published in 2008 as Schumacher Briefing No. 15: 'Rekindling Community: Connecting People, Environment and Spirituality'.

Publications[edit]

His best-known work is his 2001 book Soil and Soul: People Versus Corporate Power. In 2006 he published his collected poetry, Love and Revolution. His 2008 book on the psychology and spirituality underlyingclimate change "Hell and High Water: Climate Change, Hope and the Human Condition" was described by Michael Russell MSP, Minister for the Environment in the Scottish Government as "a profoundly important book, just as Soil and Soul was a profoundly important book."[4]

Bibliography[edit]

  • Healing Nationhood: Essays on Spirituality, Place and Community, Curlew Productions, May 2000, ISBN 1-900259-95-8
  • Soil and Soul: People versus Corporate PowerAurum Press, October 2001, ISBN 1-85410-942-1
  • Love and Revolution: Collected Poetry, Luath Press, September 2006, ISBN 1-905222-58-0
  • Hell and High Water: Climate Change, Hope and the Human ConditionBirlinn, June 2008, ISBN 1-84158-622-6
  • Rekindling Community: Connecting People, Environment and Spirituality, Green Books, September 2008, ISBN 1-900322-38-2, Alastair McIntosh and colleagues in association with WWF International and the Centre for Human Ecology
  • Spiritual Activism: Leadership as Service, by Alastair McIntosh and Matt Carmichael, Green Books (UK), September 2014, ISBN 9780857843005. Published in North America by UIT Cambridge Ltd., October 2015, ISBN 9780857843005

See also[edit]

References[edit]

External links[edit]

Kinship with Creation, Susannah Kay Brindle Alistair McIntosh - Shop Online for Books in Australia

Kinship with Creation, Susannah Kay Brindle Alistair McIntosh - Shop Online for Books in Australia



Kinship with Creation

Two Quakers Share Their Views

By Susannah Kay Brindle, Alistair McInto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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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mat: Paperback, 40 pages

Published In: United Kingdom, 03 May 2002

Contents & Introduction attached
Contents; Page; Introduction 1; The Questions: 1. How did you come to your beliefs? 2; 2. How do non-indigenes relate to the place inhabited by indigenous peoples? 6; 3. Are there Quaker insights on the right relationship between indigenous peoples and non-indigenes? 10; 4. Is there a conflict between nature religions and Christianity? 11; 5. Is it feasible for non-indigenes to develop a sense of belonging to the land? 14; 6. How can Quakers' understanding and discernment be applied to ecological relationships? 17; 7. Should or can the Quaker concept of ministry be extended to listening to the natural world? 20; 8. Is there too much emphasis on the supposed wisdom and lifestyle of indigenous peoples? 22; 9. Is there much cooperation in nature? Have we something to learn here? 24; 10. Is our rejection of Nature linked to our fear of death and of being recycled in the natural process? 26; 11. Is Genesis 1:28 to be blamed for Christianity's general exploitative attitude to the rest of creation? 29; 12. Is it possible to respect indigenous peoples when one holds a position of power and privilege over them by land-ownership? 30; 13. Does the land itself have a spirit through which God communicates with us? 32; 14. Is our first step towards knowing God knowing Nature? 34; Appendix from Susannah 37;

Introduction;

Having read Alastair's book 'Healing Nationhood' (the second one had not been published then) and Susannah's James Backhouse Lecture, 'To learn a New Song', it seemed that each had a similar theme, that of the relationships between people, the land and God. Alastair comes from a Scottish background, with ancestral memories of the clearances, and Susannah works with and feels a close empathy with the Aboriginal peoples of Australia. Both the Scottish crofters and the Australian indigenous peoples depend on the land and on a close knowledge of its productivity, seasonal changes, variations in weather, soil, and flows of water.

Alastair and Susannah are exceptional people, due to their experiences and their ability to reflect on these and to work out a theology for themselves. They bring a fresh new perspective which is not often heard now, especially as so many of us are urban dwellers, sometimes totally cut off from the natural world.

Therefore, in Quaker Green Action, we felt it important to give more publicity to both these writers and asked them to contribute their answers to a series of questions around the issues of people, their land and God. They are both Quakers, and they explain how they came to their beliefs in their answers to the first question Some of their views may be found to be challenging, and, as Alastair says, he can be a turbulent friend, as we suspect can Susannah.

So they are not necessarily the views of Quaker Green Action (if, indeed, it can be said to have collective views!), and not necessarily those of the Society of Friends (although again, our views on some matters are quite divergent).

However, both authors make one think, and they may in fact be ahead of their time. The ecological challenge is with us today as never before, and anything we can learn about right living on the land is important.

Indigenous people can provide valuable insights, both practically and spiritually. Not having access to resources from outside they have to live by their skills on the land as they find it. Their spirituality is bound up with the natural world so they can appreciate small changes, which the uninitiated would not notice, and find meaning in them.

Quakers are perhaps more open to the ideas expressed in this booklet than some other denominations of the Christian faith and QGA hopes that it will inspire and challenge readers to think more deeply about our relationships to the rest of creation.

Testimonies - Peace - Religious Society of Friends (Quakers) in Australia Inc.

Testimonies - Peace - Religious Society of Friends (Quakers) in Australia Inc.

Testimonies - Peace

Quakers and Peace
By Jenny Stock, South Australia

Quakerism was born during a period of intense civil and spiritual turbulence, 17th century England. and it is no accident that it is for the Peace Testimony that the Society of Friends is, perhaps, best known. A basic text for Quakers is the oft-quoted 1660 declaration to Charles ll which was both a statement of belief in non-violence and an assurance that the Society of Friends was not a subversive element. It reads, in part,

Our principle is, and our practices have always been, to seek peace …

All bloody principles and practices we do utterly deny, with all outward wars, and strife, and fighting with outward weapons, for any end, or under any pretence whatsoever, and this is our testimony to the whole world …

We do certainly know, and so testify to the whole world, that the spirit of Christ which leads us into all Truth will never move us to fight and war against any man with outward weapons, neither for the kingdom of Christ, nor for the kingdoms of this world.

Over time, and under different circumstances, Quakers have re-iterated this testimony, and resisted, corporately and individually, pressures to ‘fight for their country’ and engage in other forms of coercive behaviour. We have endured, especially in times of national strife, accusations of cowardice and disloyalty, and been subject to imprisonment, fines and seizure of property. While the legitimacy of conscientious objection to war has been recognised in some Western countries, Quakers continue to work for the cause of the thousands who are still persecuted for their pacifist beliefs in many parts of the world.

This refusal to take up arms, to kill, injure and destroy, stems from two main sets of beliefs. First is the obvious ethical one stemming from our Christian roots, a faith which continues to command that we regard all people as ‘brothers and sisters in Christ’, members of one human family, to be treated with respect and compassion, but that we ‘love our enemies’ and do good to those who treat us badly. The second is a pragmatic one - that violence is abhorrent in its immediate effects, has a multitude of unintended and long-term consequences and demonstrates rather the dubious proposition that ‘might is right’.

A modern and re-statement of the Quaker peace testimony by NZ Friends in 1987 begins with these words:

We totally oppose all wars, all preparations for war, all use of weapons and coercion by force, and all military alliances; no end could ever justify such means.

We equally and actively oppose all that leads to violence among people and nations, and violence to other species and to our planet.

Refusal to fight with weapons is not surrender. We are not passive when threatened by the greedy, the cruel, the tyrant, the unjust.

We will struggle to remove the causes of impasse and confrontation by every means of nonviolent resistance available.

It is the case that the absolute prohibition on bearing arms has over time been one that not all Friends have felt able to maintain, and a small number of Friends have participated in some select armed conflicts, as the lesser of two evils. But there is a common recognition that, to use a popular Quaker expression, there is ‘that of God’ in everyone, that no-one is beyond the pale, that within every individual there is at least a spark of the divine lying at the heart of the way Quakers (and many other Christians and adherents of other religions) try to act. It is always our aim to discover, respond to and encourage ‘the promptings of the spirit’ in ourselves and in others, to appeal to the best, rather than inflame the worst, in other people. This path can be difficult, take time, and lead to accusations of being ‘soft’ on those perceived as evil, unworthy or deviant.

Early Quakers also recognised that prevention of conflict was paramount; Hence the Quaker pre-occupation with activities designed to bring potential foes to the table, in mediation, conflict resolution and low-key diplomacy. In peace and disarmament talks, the old League of Nations, the United Nations and similar bodies, Quakers have sought to follow their founder, George Fox, who told the authorities in 1651 that he ‘lived in the virtue of that life and power that took away the occasion of all wars’. If conflict does break out, Quakers do not retreat in despair, but are active in attempts to end the fighting and to bring the parties together. At the same time, they work to relieve the suffering of all those caught up in the conflict, combatants and civilians, ‘allies’ and enemies alike.

Social Justice

And because for Quakers peace is far more than simply the absence of war, the cessation of hostilities means only the start of the long process of the re-building of lives, of societies and of institutions designed to maintain the peace. The basis for enduring peace means that damage must be repaired, grievances heard, injustices remedied so that passions cool and the cycle of violence is broken. Protection of the weak and restraint of the strong are necessary to avert setting in motion future conflicts that will in the long run be costly to all, ‘winners’ and losers alike. In scale such conflicts range from domestic violence to armed conflict between nations, but the principles of prevention are the same - the removal of obstacles to the free exercise by all people of their basic human rights, as individuals and as members of particular groups based on their gender, ethnicity, religion or social class.

Hence, the parallel concern amongst Quakers for Social Justice, an essential precondition for truly harmonious societies. Peace is not secure in the absence of justice, and societies rent by conflict do not deliver justice to their citizens. This is so at the international level as well.

‘The quest for peace and justice needs to begin with the interests and needs of the weakest and most vulnerable’, the people ‘often most severely damaged by violent conflict and the insecurity that flows from it. Too much of the war against terrorism is being articulated by privileged elites for their purposes rather than for and on behalf of impoverished people who experience daily existential terror at being unable to satisfy their basic human needs.’ (Kevin Clements, 2002)

As William Oats wrote in 1990,

The biggest threat to the future of humanity is not the atomic bomb [or ‘terrorism’], but the provincial mind, the limited outlook, the myopia which prevents us from seeing beyond our immediate interests … especially in our attitudes to people who are different from ourselves in colour, in religious creed, in political affiliation, in educational opportunities, in abilities.

Acceptance of others is not merely tolerating others. It is an affirmation of the importance of variety and difference’, avoiding the ‘primitive reaction to the fact of difference’- fear.

Because we are human, we are only too aware of the potential for fear of the unknown and for reactions of violence within ourselves as well as in society. In our worship we nurture the spirit within, conscious that peace begins in the human heart. If we are to effectively address the wrongs of the outer world we must also maintain right relationships within our own families, workplaces and social groupings. Only then will we be patterns and examples to others, letting our ‘lives speak’.

Quaker Peace Activism
The Religious Society of Friends (Quakers) have been advocating peace for 350 years. We sent delegations to the Sultan of Turkey, to Hitler, and (most recently) to John Howard asking them to reconsider their actions.

We have driven ambulances and fed the starving on both sides in many conflicts. We send people into the midst of conflicts all over the world, to help find out what is REALLY going on and to do whatever presents itself to help build a peace that 'takes away the occasion of all wars'.

Issues of national security and international trade relations are complex and difficult, but it is hard to see how they can be helped by a military engagement (from an article by David Johnson, of the Australian Campaign Against the Arms Trade).

Quakers make their opposition to war known through peaceful protests and silent vigils in public places. Regular vigils are held in capital cities, and all are welcome.

Brisbane, first Friday of each month, 5–6pm in King George Square.
In Melbourne, every Monday midday, on the steps of the old General Post Office in Burke Street.

Quakers are involved in many peace organisations and activitie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