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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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겐의 생태영성
2009.6월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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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겐(道元)의 생태영성

최 현 민


오늘날의 생태문제는 그저 자연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생태문제는 우리가 맺고 살아가는 관계들에 대한 총체적 물음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생태적 물음은 우리의 생명줄인 자연을 비롯하여 삼라만상과의 관계가 얼마나 어긋나 있는지를 성찰케 하는 현대인들에게 던져진 화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늘 우리는 도겐의 생태영성을 통한 그 해법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기로 한다.

1. 도겐의 생애

도겐 기겐(道元希玄, 1200-1253)은 일본 중세 가마꾸라(鎌倉)불교 창시자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흔히 일본 조동종(曹洞宗)의 창시자로 알려진 그는 일본불교사에서 핵심을 이루는 인물 중 하나이다.

귀족 출신으로 태어난 도겐은 1202년 3세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 후 5년 뒤인 1207년에 어머니마저 잃는 어려움을 겪었다. 모친상을 당한 도겐은 세상의 무상함을 느꼈고 이러한 무상체험은 후에 그가 출가하는 동기가 되었다. 도겐은 13세에 천태종의 중심지인 히에이산(比叡山)으로 출가했으나 자신이 품은 문제의식을 해결해줄 스승을 찾지 못하자 1223년 송나라로 건너갔다. 거기서 그는 천동산(天童山) 여정(如淨)선사(1163-1228)를 만났고 그 밑에서 참선수행중 깨달음을 얻고 귀국했다.

『정법안장(正法眼藏)』 95권, 『영평광록(永平廣錄)』 10권, 『영평청규(永平淸規)』 2권, 『학도용심집(學道用心集)』 1권, 『보경기(寶慶記)』 1권, 『보권좌선의(普勸坐禪儀)』 1편 등의 저서를 남김.

2. 도겐의 문제의식-천태본각사상(天台本覺思想)

대승불교는 상좌불교와 달리 모든 이가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대승교의가 성립되려면 모든 이가 부처가 될만한 근거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 근거로서 말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불성사상이다.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모든 중생은 불성이 있다”는 <열반경>의 가르침은 바로 모든 인간에게 성불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그러나 불성을 지니고 있다고 해서 모두가 부처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닦아야 한다. 그래서 불성에 근거한 수행론이 나왔고 그 대표적인 논서가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이다. <대승기신론>은 대승불교의 개론서라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대승불교의 핵심이 이 안에 다 들어있다.

<대승기신론>이란 제목에 「대(大)」란 것은 당체(當體)를 말한 것이며「승(乘)」이란 것은 인간의 본성은 眞如인데 탐(貪), 진(嗔), 치(痴) 등 번뇌에 가려져서 나타나지 못하니 이것을 미(迷)라 한다. 이 迷에서 오(悟)에 나아가는 힘을 乘이라 한다. 곧 큰 수레로 자도(自度), 타도(他度)해서 많은 중생을 건네는 것이 「乘」의 뜻이다. 「기신(起信)」이란 것은 인간의 마음에 대승이 갖추어져 있으니 이것이 중생의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다. 이 자성청정심을 반조(反照)해 찾는 것을 「起信」이라 한다. 佛性이 번뇌에 덮혀서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구슬을 연마하면 더욱 빛남과 같이 信心을 발해서 연마 수행하면 佛性을 얻어보게 되니 이것이 「起信」의 뜻이다. 「論」이란 것은 모든 보살들이 부처님의 설하신 바 경전을 해석하여 述作한 것을 「論」이라 한다.

<대승기신론>에선 모든 중생은 각(覺)과 불각(不覺)을 다 지니고 있다고 본다. 깨달음을 자각치 못한 불각의 상태를 살다가 깨달음이 서서히 움직여 각에로 나아간다.

각이 모든 중생에게 본래부터 있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본각(本覺)이라고 하고, 또 무명의 습기 때문에 가려 있어 나타나지 않을 때는 불각(不覺)이라고 하며, 한 번 어떤 계기를 만나서 그 본바탕이 드러나기 시작할 경우에는 시각(始覺)이라고 부른다. 시각(始覺)은 불각의 상태에서 본각을 향해 나아가는 수행상의 과정이다.

그러나 일본 천태종에서는 이 본각사상이 비약발전하여 ‘중생심이 곧 본각진여’임을 현실에 적용시켜 일상의 모든 소작, 욕망까지도 佛의 산 자태라고 긍정하게 되었다. 또한 생멸 변화하는 현상계 즉 본래 깨침의 세계로 봄으로써 중생 그 자체가 佛이라는 중생즉불론으로 나아가게 되었고 속세, 속사, 번뇌 등 현실의 있는 그대로를 긍정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와 같이 ‘중생의 모습 그대로’를 부처로 봄으로써 성불은 필요없게 되고 성불의 관념도 부정되었다. 현상적으로 범부가 佛이라고 볼 때 성불하기 위한 수행은 무용하게 되기 때문이다. 즉 천태본각사상은 본각에 대한 믿음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수행을 등한시하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현실 그대로의 중생이 곧 부처인데 굳이 수행할 필요가 있는가 라는 것이다. 도겐은 이러한 천태본각사상에 의문을 품고 중국으로 건너가서 스승 여정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

그럼 도겐은 무엇을 깨쳤고 가르쳤나? 지관타좌(只管打坐)이다. 다만 오로지 앉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본래부처이므로 다시 수행이 필요치 않다는 천태본각사상에 대해 일으켰던 의문에 대한 답이다. 지관타좌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좌선함이 아니라 좌선 그 자체가 목적이다. 깨달음은 먼 미래에 얻어지는 그 무엇이 아니라 지금 여기 내가 앉아있음 그뿐이다. 목적의식에 오염도지 않은 수행이므로 이 수행을 不染汚修라 한다.

따라서 지관타좌는 수증불이(修證不二)요 본증묘수(本證妙修)인 것이다. 그는 이것이야말로 석존으로부터 正傳되어온 불법임을 확신했다. 2500년의 불교사 전체를 하나로 꿰뚫어 석가모니불로부터 마하가섭을 거쳐 보리달마에서 천동여정을 거쳐 자신에게 이르른 정전(正傳)불법에 대한 도겐의 확신은 그의 사상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이와 같이 도겐은 천태본각사상에 대한 비판을 통해 본래 붓다의 정신과 가르침으로 되돌아가고자 한다. 그의 사상 안에 일관하게 있는 것은 부처에로의 귀의, 부처의 본래 가르침으로의 돌아감이다. 그것은 바로 수행을 회복하는 길이다. 수행의 자리가 곧 깨침의 자리임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지금 여기가 깨달음의 자리이지 여기를 떠나 깨달음이 먼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다. 좌선은 깨달음의 수단이 아니라 좌선 자체가 깨달음인 것이다. 이러한 도겐의 가르침은 당대의 문제에 대한 해법만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의미를 지니고 있다.

3. 「山水經」 안에 드러난 도겐의 생태영성

도겐은 『정법안장(正法眼藏)』「山水經(산수경)」의 서두에서 부용도해(芙蓉道楷)선사의 靑山常運步, 운문(雲門)선사의 東山水上行을 언급하고 있다.

" “푸른 산은 언제나 걷고 있고 석녀는 야밤에 아이를 낳는구나"
"산이 걷기도 하고 흘러가기도 하며 산이 산의 아이를 낳을 때도 있다.

"청산은 항상 운보(運步)하고 있다" 는 시각은 보통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 우리는 보통 산은 그대로 있고 내가 걷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도겐은 “산의 운보를 모르는 자는 나의 운보도 모르는 자”라고 말한다. 산이 걷고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보통 산은 가만히 있고, 사람이 산위를 걷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도겐은 “산의 걸음이 사람의 걸음과 같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산의 걸음을 의심해선 안된다. 청산의 운보는 그 빠르기가 바람보다도 빠르지만 山中人은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다. 山外人도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한다. ...만일 산의 운보를 의심하면 자기의 운보도 모르는 자이다”고 말한다.

산의 걸음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산의 실상을 깊이 성찰할 때 가능하다. 겉보기에는 단단해 보이는 산도,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르마들의 흐름 안에 끊임없이 변화되어 간다는 의미이다.

산은 산 아닌 것으로 되어 있다. 산은 흙 대지 바람 공기로 되어있다. 산이 되게 해주는 요소 중 어느 한 가지도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변한다. 그 변화의 실상이 바로 산의 실상이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이 바로 무상(無常)의 진리라고 가르치셨다.

무상이란 영원불변한 것은 없고 모든 것은 찰라생 찰라멸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무상의 진리를 깊이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과 주변사물에 집착하며 살아간다. 산의 실상을 깨닫는다는 것, 그것은 산의 무상함을 깨닫는 것이고 이 깨달음은 곧 나의 무상함과 세상의 무상함으로 이어진다. 도겐은 이를 ‘산의 걸음’으로 표현했고 산의 무상을 모르면 곧 나의 무상을 모른다고 한 것이다. 운문(雲門) 대사는 이를 東山水上行(일체의 동산은 물위를 가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동산은 아주 흔한 산이름으로 일반적 산을 지칭한다. 수상행(水上行)은 물위를 움직인다는 뜻으로 산의 흐름, 산의 움직임, 산의 변화를 말한다.

도겐은 청산상운보 석녀야생아(靑山常運步 石女夜生兒) 동산수상행(東山水上行)을 언어의 틀을 초극한 선문답으로 보기보다는 도해(道楷)화상의 언어적 기표 속에 담긴 의미를 그대로 수용한다. 이와 같이 도겐은 선문답의 언어적 의미성을 그대로 수용함으로써 선적 언어가 이심전심의 초월적 의미만을 지시하는 껍데기가 아니라, 본래적 의미를 함축한 언어로 살아나게 한다. 도겐은 靑山의 걸음을 깨달을 때 靑山 안에서 고불(古佛)을 만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산수(山水)는 고불(古佛)의 현성(現成)"이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산수(山水)는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경전 곧 산수경(山水經)인 것이다.

4. 도겐의 무상관과 무상불성

1) 무상관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어제 본 사람이 오늘 있지 않은 일을 겪을 때 우린 세간의 무상을 느낀다. 무상은 부처님의 핵심적 가르침-연기, 무상, 무아- 중 하나이다. 부처님께서는 존재의 실상을 무상으로 보셨다.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불교는 諸行無常의 가르침을 기반으로 하여 초목총림, 산하대지, 인간의 心身 등 존재하는 모든 것이 찰라생멸하면서 흘러간다고 본다.

사람들은 이 변하는 것에 집착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슬프게도 우리가 집착하는 것들은 가만히 있지 않고 변한다. 집착은 더 큰 집착을 낳음을 우리는 사회 안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부조리 현상을 통해 보지 않는가? 자본주의 사회의 가치관은 더 많은 소비를 권장하고 더 많은 것들은 소유하라고 부추긴다.

더 많은 소유를 위해, 더 편리한 삶을 위해, 더 좋은 건물을 짓기 위해, 더 많은 음식을 얻기 위해, 개발이라는 명목하에 더 많은 공장을 만들어 자연을 파괴하고 지구온실가스를 내어 지구온난화를 가져온다. 자본주의 사회 안에 얽히고 설킨 이 모든 과정들은 그 뿌리로부터의 근원적 치유없이는 불가능하다. 집착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와지지 못한다면, 우리의 생활방식이 변하지 않는다면 생태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 그러나 집착을 놓아버림은 자연 보호를 위한 차원을 넘어 우리 자신의 궁극적인 자유를 위해서이다.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서 제자 행창(行娼)은 혜능에게 『열반경(涅槃經)』의 불성상주(佛性常住)의 뜻을 묻는다. 그러자 혜능은 “無常이 곧 佛性이다”라고 응한다. 이 때 행창이 “『열반경』에서는 불성이 常이라고 하는데 (6조)화상께서는 무상이라고 하니 이는 경전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습니까”라고 반문한다.

도겐은 “무상은 불성”이라는 혜능의 말을 언급하면서 常을 불성으로 아는 이들은 무상을 알 수 없다고 말한다. 도겐은 ‘무상은 불성’이며 ‘常은 未轉’이라고 한다. 이것은 마치 석존께서 법륜을 돌려 법을 전하듯 정법은 불조(佛祖)에 의해 전해지는 것인데 常으로서의 불성은 전해진 불법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즉 무상불성이야말로 부처에서 부처에로, 조사에서 조사에로 전해져 내려온 정전불법(正傳佛法)이라는 것이다. 사실 불교사 안에서는 불성을 常한 것으로 보아온 경향이 있어왔으며, 이러한 불성이해가 동아시아불교 안으로 흘러왔다. 도겐의 심상상멸(心常相滅)에 대한 비판은 바로 常으로서의 불성에 대한 비판인 것이다.

2) 심상상멸론(心常相滅論)의 비판

중국불교계에 선종이 발달하면서 선종은 불심종(佛心宗)이라고 불리울 만큼 마음을 중시해 왔다. 이같은 경향은 “身是無常 心性是常”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몸을 무상이라 보고 마음을 常이라고 봄으로써 심성상주(心性常住)로 해석하는 견해로 나아갔다. 道元은 이러한 심상상멸론을 주장하는 인도의 선니외도(先尼外道)를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인도에는 외도가 있으니 先尼라 부른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영지(靈知)는 환경이나 사물과는 달라 역겁에 상주(常住)한다. 지금 현재 있는 모든 환경도 영지의 측면에서 보면 진실한 것이 아니다. 그것〔모든 실체들은 영지와 같이 상주하지 않고 생멸하기 때문이다.(『정법안장』「卽心是佛」)

영지사상에 대한 비판은 곧 심상상멸론(心常相滅論)에 대한 비판이며 이는 곧 천태본각사상에 대한 그의 비판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도겐은 『정법안장』 중에 남양혜충(南陽慧忠, ? -775)을 자주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은 남양혜충이 당시 중국에 선니외도적인 견해를 지닌 사람들을 비난했음과 관계가 있다.

唐의 대증국사(大證國師) 혜충화상이 어느 僧에게 물었다.
師; 어디서 오는가?
僧; 남방에서 왔습니다.
師; 남쪽에는 어떤 선지식이 있는가?
僧; 많은 선지식이 있습니다.
師; 어떤 것을 가르치고 있는가?
僧; 그 곳의 선지식들은 당장에서 학인들에게 제시하기를 “마음이 곧 부처요 부처는 깨닫는다는 뜻이다. ...이 몸에는 생멸이 있지만 心性은 시작이 없는 옛부터 일찍이 생멸한 적이 없다. 몸이 생멸한다 함은 용이 뼈를 바꾼 것 같고 뱀이 껍질을 벗은 것 같으며 사람이 헌 집을 나서는 것과 같다. 몸은 이렇듯이 무상하나, 性은 변함이 없다(常)”고 하였습니다. 남방에서 말씀하신 것이 대략 이렇습니다.
師; 만일 그렇다면 그들은 선니외도(先尼外道)와 다를 바가 없다.

혜충이 남방종지를 비판한 것은 그들이 ‘몸은 생멸하지만 심성(心性)은 생멸하지 않고 영원한 것’이라는 이원론인 선니외도적 견해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선니외도에서는 마음과 육신을 구분하여 용이 뼈를 바꾸고 뱀이 허물을 벗어버리는 것이나 사람이 옛집을 나와 새로운 집에 들어가는 것과 같이, 무상한 신체와는 달리 상주불변하는 불성이 있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상으로서의 불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3) 불성현현(顯現)에 대한 자각

무상이 불성이라는 것은 지금 우리가 처한 이 자리, 곧 '지금 여기'가 불성이 顯現하는 자리임을 의미한다. 이를 깨달을 때 불성이 현현치 않는 자리는 없을 것이다. 위산이 제자 앙산을 향해 "오묘하고 청정하고 맑은 마음(妙淨明心)을 그대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라고 묻자 앙산은 "산과 강과 대지와 태양과 달과 별입니다"라고 답했다. 산 강물 대지 태양 달 별 자연이 그대로 묘정명심(妙淨明心)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연 안에서 청정한 마음을 본다는 것은 그 안에서 불성의 현현을 볼 때 가능하다. 각 개체 안에서 불성의 현현을 볼 수 있을 때 나의 불성과 자연의 불성이 둘이 아님을 자각케 된다. 이것이 의정불이(依正不二)요 신토불이(身土不二)이다.

승조(僧肇 384-414)는 <조론(肇論)>에서 "천지여아동근(天地與我同根) 즉 '하늘과 땅과 나는 한 뿌리“라고 말한다. 하늘과 땅과 인간은 같은 뿌리이며 만물은 나와 한 몸이라는 것이다. 이를 깨달을 때 자연에 해를 끼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에 해를 끼치는 것이요, 자연살림은 곧 자기살림임을 자각하게 된다.

도겐은 <정법안장 세정(正法眼藏 洗淨)>에서 화장실에서 행하는 모든 작법에 대해서 말한다. 수행자는 화장실에서의 세정작법이 단순한 행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불도의 수행이라는 것이다. 자기몸을 깨끗이 하는 것이 곧 불국토를 깨끗이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불도 수행자는 자기 몸과 마음만 깨끗이 할 것이 아니라 국토와 자연환경도 청정히 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자신과 자연은 본래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연오염의 결과는 결국 우리자신에게 되돌아온다. 신토불이에 대한 자각은 우리 몸인 대지를 우리가 더렵혔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을 갖게 한다.

5. 지금 여기를 사는 지혜

우리의 탐욕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어디에 시선을 두고 살아가는가? 질주하는 현사회 속에 우리도 허둥되며 빠른 걸음을 옮긴다. 현대인들은 그 질주하는 속도감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뒤떨어진 사회의 낙오자, 시대의 낙오자가 될 것 같은 두려움을 지니고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지금 조금 고요히 멈추어서 보자. 우리는 질주해오면서 얻은 것보다 혹 잃는 것이 더 많지 않았나? 사소한 것들을 얻기 위해 보다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살아오진 않았나? 빠른 경제성장, 효율성의 가치가 현재를 지배하고 있다. 길게 늘어서 2-3시간동안 조문을 기다린 사람들은 바로 현재 우리를 지배하는 가치가 뭔가 잘못되었음을, 우리가 지금 뭔가 잘못 가고 있음을 느낀다.

우리 주변을 한번 두리번거려 보자. 나 뿐 아니라 내 주변사람들 아니 많은 세상사람들이 나와 비슷한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산업화를 통한 발전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준다고 말한다. 물론 발전이 생활의 편리함과 풍요로움을 가져다 주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편리함과 풍요로움을 통해 우린 진정 행복한가? 만일 富가 진정한 의미의 행복을 안겨다 준다면 부자들이 가난한 이들보다 더 행복해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한 현실을 우린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행복은 적어도 부에서 비롯됨이 아니며, 부가 낳은 산업화 자본주의의 가치관이 행복을 안겨주지 않음을 말해준다.

현재를 산다는 것은 현재에 족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다. 다시 말해 마음의 욕망을 내려놓고 知足하며 살 줄 아는 마음이다. 미래에 대한 걱정과 과거에 매여 사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를 충실히 사는 마음’이다.
도겐은 불도(佛道)는 결코 정지되어 있는 무엇도, 도착해야 할 무엇도 아님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참된 불도는 깨침이라는 하나의 정착지가 있어 그 곳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를 목적지로 알고 살아가는 데 있다. 등산할 때 단지 얼마나 빨리 정상에 도달하느냐 하는 목표를 지니고 등반하는 사람은 산을 오르는 과정 중에 주변의 것들이 주는 행복을 놓쳐버릴 것이다.

행복을 순간순간 만끽하며 등반하길 원하는가? 오직 정상에 도달해서 느끼는 단 한 번의 행복을 원하는가? 이것은 수행의 측면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우리가 깨달음이라는 정점만을 추구한다면 깨달음의 정상을 향해가는 과정은 苦의 연속일 뿐일 것이다. 그리고 추구하는 깨달음은 너무도 도달키 힘들다. 아니, 그 정상에 간 이들은 많지 않다. 그래서 초기불교는 오직 붓다는 한분뿐이시고 나머지는 모두 아라한이라 하지 않았는가? 도겐은 깨달음은 정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럼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1) 미혹과 깨달음

도겐은 <현성공안(現成公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기를 몰아가서 만법을 수증하는 것을 ‘미혹’이라 하며 만법이 나아와서 자기를 수증하는 것을 깨달음이라 한다. 미혹을 크게 깨닫는 것은 제불(諸佛)이고, 깨달음에 크게 미혹한 것은 중생이다. 나아가 깨달음 위에서 깨달음을 얻는 자가 있으며, 미혹 중에서 다시 미혹하는 자가 있다."

도겐은 불도(佛道)의 근본인 미혹과 깨달음에 대해 이렇게 정의를 내렸다. 나와 만법의 관계맺음 속에 미혹과 깨달음(迷悟)이 있다는 것이다.〈자기를 몰아가서 만법을 수증하다〉는 것은 자신이 노력하여 좌선하고, 불법을 깨닫는 것이기에〈미혹〉이라고 한다. 즉 「내가 좌선한다」, 「내가 견성(見性)한다」, 「내가 무아로 된다」, 「내가 부처가 된다」고 할 때 나라는 我가 하는 것이므로 미혹인 것이다. 진정한 깨달음은 내가 사라진 상태에서 이루어진다. 즉〈만법이 나아와서 자기를 수증〉하는 것이다.

이는 ‘내가’ 좌선하고, ‘내가’ 깨달음을 구한다는 의식을 버림을 의미한다. 즉 道元에게 있어 깨달음은 자기가 주체가 아니라 만법에 의해 자기가 움직여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미궁에서 깨달음에로 나아감이란 자기가 주체가 되어 만법에로 나아감이 아니라, 만법에 나아가 자기를 수증하는 것으로의 방향전환을 말한다. 그렇다면 이같은 방향전환은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가? 자기중심으로 살아가는 중생이 어떻게 만법중심에로 전향할 수 있는가?

2) 신심탈락(身心脫落)

도겐은『학도용심집(學道用心集)』에서 참선학도(參禪學道)를 통해 신심을 탈락함으로써 아집(我執)으로부터 자유로와질 수 있다고 말한다. 신심탈락에서의 신심(身心)은 주체적인 자아를 의미한다. 아만(我慢)에 차있는 주체적인 자아를 탈락하는 것을 도겐은 ‘자기를 잊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불도를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배우는 것이다. 자기를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잊는 것이다. 자기를 잊는다는 것은 만법으로 실증되는 것이다. <現成公案>

불도를 배운다는 것은 경전이나 교리를 배우거나 수행의 방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배우는 것이라는 도겐의 말은 우리가 생각해온 배움의 의미를 다시 생각게 한다. 자기를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실현해가는 것이 아니라 아집을 버림으로써 자기를 잊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를 잊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기를 잊는 길은 자기가 주체가 되어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만법에 의해 실증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자기의 신심을 탈락하고 자기와 만법의 상호 연관성을 자각하여 만법에 의해 자기를 수증해 가는 것을 말한다.

도겐은『학도용심집』에서 “내가 능히 법을 움직일 때 나는 강하게 되고 법은 약하게 된다. 법이 들어와서 나를 움직일 때 법은 강하게 되고 나는 약하게 된다. 불법은 바로 이 두 구절에 있다. 지금 참선을 배우는 자는 이를 전수하여 참된 길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법에 의해 내가 움직여가려면 아집(我執)으로부터 자유로와져야 하며 자기의 신심을 탈락해야 한다. 신심이 탈락될 때 깨달음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게 된다. 깨달았다는 흔적이 남아 있다는 것, 곧 깨달았다는 인식 안에는 아직 ‘내가’ 남아 있다. 다시 말해 깨달은 주체인 ‘내가’ 남아있는 것이다. 그 인식마저 사라진 세계가 곧 도겐이 말하려는 신심탈락의 세계이다. 진정한 의미의 佛이 되었을 때에는 자기가 佛이 되었다는 의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한 의식이 없기 때문에 佛임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도겐은 『정법안장수문기(正法眼藏隨聞記)』에서 學道를 배우는 자가 지녀야 할 첫째 마음은 아견(我見)을 버리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아견을 버린다는 것은 자아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난다는 의미이다. 아무리 故人의 어록이나 일화를 잘 알고 늘 철석같이 좌선을 한다고 해도 자아에 대한 집착으로 아견을 버리지 않는다면 천만번 태어나도 불조의 道를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이상의 도겐사상을 통해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을 결국 문제는 우리 자신에게 있으며 우리 자신이 집착하고 있는 것을 놓는 일, 그것이 바로 생태문제를 풀어갈 수 있는 해법임을 알 수 있다. 결국 생태문제는 우리 자신의 욕망이 낳은 결과물이며, 따라서 생태문제는 욕망을 줄여가고 소족함에서만 풀어질 수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소욕지족(少慾知足)의 지혜를 배우자.

생태적으로 살기 위해 의식만 갖고는 쉽지 않다. 확실한 동기와 의미 목표가 없으면 탁상공론이 되기 쉽다.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부터 오는 깊은 회심이 선행되어야 한다. 문제는 어떻게 나를 돌이켜 산하대지로 돌아가게 하느냐이다. 어떻게 산하대지를 청정법신인 부처로 볼 수 있는가? 도겐은 이를 위해 우리의 참회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바라옵건대 저와 일체중생이 금생으로부터 세세생생에 걸쳐 정법을 듣게 되기를 원하오며 정법을 들을 때에는 그 정법에 대하여 의심하거나 불신하지 않게 되기를 원하오며 진실로 정법을 만났을 때는 세간법을 버리고 불법을 수지하기를 원하오며 그리고 마침내 대지와 유정이 모두 함께 成道하기를 원하옵니다."

우리는 지금 참회해야 하고 새롭게 발심해야 한다. 우리의 몸인 지구를 더럽힌 것에 대해 참회해야 한다. 자력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할 때가 많다. 그러므로 자력의 끊임없는 정진노력과 더불어 타력인 부처님의 본원력에 의지하여야 한다.

본래 청정성을 회복하는 길--그것은 우리의 일상생활의 삶을 되돌아봄에서부터 출발한다. 생태회복은 바로 내 주변, 내 삶의 태도를 변화시킴에 있다. 불국토를 청정케 하는 길이다. 우리는 도겐의 가르침을 통해 이를 배울 수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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