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의 마음엔 무엇이 있나
등록 :2018-03
가톨릭 씨튼연구원 원장 최현민 수녀 인터뷰
- “신도 기둥 일왕만 절대적 선악보다 절대복종 우선”
- 일본인 마음 밑바닥 99% 채우는 게 종교 넘어 삶 자체인 토착종교 신도
- 신사참배의 뿌리는 원령신앙 더러움 씻고 죽은 자 한 푸는 제사
- 일본 불교, 깨달음 따로 보지 않고 수행하는 지금 이대로가 깨달음
- “상대방 정신세계 모르면 피상적일 뿐”
- 불교·개신교 수도자 등과 종교간 대화 “
- 광화문 촛불시위 때 마음에 돌덩이
- 이 지경 될 때까지 종교는 뭘 했는지…
- 영성적으로 불교에 빚졌지만 의문도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
일본 종교 강의하는 최현민 수녀 ‘일본 종교를 알아야 일본인이 보인다’란 강좌가 서울 성북동 씨튼영성센터에서 열린다. 강사는 씨튼연구원 원장인 최현민(59) 수녀다. 일본은 그리스도교 인구가 1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하고 신도(神道)와 불교가 주류 종교로 자리한 나라다. 그런데 그 일본의 종교 강좌를 가톨릭 수녀가 하다니 신기하다. 그러나 최 원장은 지난 25년간 불교와 일본 종교를 붙들고 놓지 않은 이 분야의 고수다. 그는 서강대 종교학과에서도 이 분야 강의를 한 지 오래다. 최 원장이 12일 첫 강의를 시작으로 12월까지 매달(7~8월 제외) 둘째주 월요일 오후4~6시 진행할 ‘일본 종교와 일본인의 실체’를 미리 들어보았다.
“일본인의 마음 밑바닥을 99퍼센트 채우고 있는 것은 토착종교 신도다.
신도는 일본인들에게 종교를 넘어 삶 자체다. 이를 알지 못하면 주변국들이 그렇게 질색을 하는데도 일본 총리가 2차대전 전범의 위패가 있는 야스쿠니신사를 왜 기어코 참배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
최 원장은 신사참배의 근거로 애니메이션 <원령공주>의 모태인 ‘원령(怨靈)신앙’을 설명했다. “일본 신화에서 일본열도를 만들었다는 신인 이자나기와 이자나미는 남매이자 부부인데, 불의 신을 낳다가 죽어 황천에 간 이자나미를 만나러 간 이자나기가 처참한 몰골의 아내이자 여동생의 모습을 보고 도망쳐 나와 ‘황천의 더러움’을 씻기 위해 정화하는 모습이 나온다.
일본인들의 축제인 마쓰리의 정화의식도 여기서 유래했다. 일본인들이 목욕에 집착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일본은 비명횡사하거나 한을 품고 죽은 원령들이 산 사람을 괴롭히고 재앙을 불러온다고 두려워하기에 제사를 지내줘야 한다고 믿는다.”
“수치심의 문화, 할복도 서슴지 않아”
“수치심의 문화, 할복도 서슴지 않아”
따라서 죽은 자가 무슨 짓을 했든 그 선악이 중요한 게 아니고, 해코지를 못하게 제사로 달래준다는 것이다. 그는 “루스 베네딕트가 쓴 <국화와 칼>에서 서양은 ‘죄의 문화’이고, 일본은 ‘수치심의 문화’라고 했다”며 차이를 설명했다.
“죄의 문화에선 선악이 중요하다. 우리나라의 미투운동에도 그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선악보다 주인에 대한 절대복종을 거스르는 것을 더 수치스럽게 여긴다. 그러니 세계대전의 책임자인데도 왕에게 책임을 묻지 않고 끝까지 지지하고, 그의 명예가 더럽혀지면 자신이 할복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최 원장은 인접국이지만 한국과 중국, 일본의 종교적 심성에도 큰 차이가 있다고 한다.
“중국은 ‘천명(하늘의 명)을 받는다’는 천(天·하늘) 신앙이 뿌리깊다.
유교로 넘어와서는 천인합일(하늘의 마음과 사람의 마음이 일치)하는 것을 인격의 완성으로 보았다.
주자에 이르러 ‘천’이 ‘이’(理)로 변형된다.
우리나라는 단군신앙이 있어서 고조선 때부터 고유의 천(하늘) 신앙을 가졌다.
우리나라에서 실학자들이 자발적으로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안에 절대성에 대한 신앙이 있어서였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신도만이 절대적이다.
따라서 절대성을 지닌 유일신 신앙은 살아남지 못했다.
초창기에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것은 그리스도를 잘못 이해해 수많은 외래신 중 하나로 여겨서였다.”
최 원장은 “일본에서는 신도의 기둥인 일왕이라는 절대성 외에는 그 어떤 것의 절대성도 인정되지 않는다”며 “신도가 현세의 삶을 중시하는데 죽음 의례가 없었기에 불교에서 이를 차용했고, 유교도 국학과 고학으로 변형했다”며 “엔도 슈사쿠(소설가)의 말대로 일본은 그 어떤 것이 외래에서 들어오든지 변조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외래의 어떤 것도 변조할 수 있는 힘”
“외래의 어떤 것도 변조할 수 있는 힘”
“상대방의 정신세계를 모르면 피상적인 대화에 그치고, 거짓 평화만이 지배해 진정한 평화로 나아갈 수 없다.” 최 원장이 종교간 대화에 심혈을 기울여온 것도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다.
그는 지금도 불교·개신교의 수도자 및 학자 10여명과 대화모임을 이어가고 있다.
이 모임은 전임 원장으로 유학 전공자인 김승혜 수녀가 1994년 시작했다. 초기부터 모임 간사를 맡은 최 원장은 김승혜 수녀가 ‘사랑의 씨튼 수녀회’ 총장으로 4년 전 부임해 미국 본원으로 떠난 뒤 모임을 주관하고 있다.
그는 1년 전 ‘광화문 촛불시위’에 나갔다가 돌덩이가 마음에 던져져 소용돌이치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사랑과 자비, 정의, 평화를 추구하는 종교의 인구가 50퍼센트나 되는데 나라가 이 지경이 되기까지 과연 무엇을 했느냐는 물음이 멈추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종교간 대화모임의 주제는 ‘참여와 명상, 함께 가능한가’이다.
그는 “영성적으로 불교에 너무 많은 것을 빚졌고, 불교는 제2의 고향 같은 곳”이라고 고백하면서도, 25년간의 탐구에도 풀리지 않은 의문도 진솔하게 물었다.
“불교의 ‘십우도’(깨달음으로 가는 길을 그린 그림)에서 마지막엔 하산해 세상 속으로 들어가 깨달음과 자비를 실천하는 것으로 나온다. 불교는 지혜와 자비가 둘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현실에선 출가자와 재가자를 양분하고, 출가자는 늘 깨달음만 지향하고, 보살행은 재가자의 몫으로 돌린다. 그들은 언제 깨닫고 중생들을 구제하러 나오는가.” “그들은 언제 깨닫고 구제하러 오나” 그는 “사랑의 씨튼 수녀회 영성의 뿌리인 빈첸시오 아 바오로 성인(1581~1660)의 경우 자비행의 실천을 통해 더욱 깊은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역동성을 보여줬다”며 “현재 세상의 문제와 함께 고민하고 아파하며 지금 여기에서 어떤 모습으로 함께 나누며 살아가느냐가 중요한 것 아니냐”고 말했다.
그것은 그가 2004년 일본 난잔대학 종교문화연구소에서 연구할 당시 꺼풀이 벗겨지는 체험의 계기를 준 <정법안장>의 저자 도겐 선사(1200~1253·일본 조동종의 개조)의 깨달음과도 일맥상통한다.
“선불교는 ‘돈오’(頓悟·단박에 깨달음)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도겐 선사에 오면 그런 얘기가 없다. 도겐은 깨달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수행하는 지금 이대로가 깨달음이라고 했다.
따라서 지금 여기가 바로 깨달음의 자리인 것을 깨닫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따라서 ‘무엇보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 아니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