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연구의 현황과 학문적 유통
- 이론연구에서 운동으로...‘인간 안보’ 개념 강조돼 -
평화학(Science of Peace)이란 용어가 처음 사용된 건 1930년대의 독일학자 발트드 리히트에 의해서다. 그리고 이것이 평화연구(Peace Rearch)란 말로 정착된 건 1950년대 이후 냉전기에 스칸디나비아 지역학자들의 뛰어난 연구들을 거치면서다.
그러나 국내에 평화학이 하나의 학문으로 본격적으로 고개를 들이밀기 시작한 것은 그보다 훨씬 후인 1980년대 초반이다. 오슬로 국제평화연구소를 중심으로 요한 갈퉁 같은 평화학의 거목들과 실천적, 이론적 교섭이 쌓여가면서 평화를 인식론, 역사론, 국제관계론, 운동론(교육론) 등 여러 가지 계통을 세워 다뤄야 할 학문으로 간주하려는 경향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삶의 모든 국면에서 '구조적 폭력'을 추방하는 적극적 평화를 주장한 갈퉁의 대표적 주저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들녘 刊)도 지난 2001년 국내에 번역 소개된 바 있다.
1990년대 이후 저변확대
이처럼 평화학은 학문의 역사가 짧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국내 평화연구는 그 저변이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 특히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 이후 남북 평화체제 모색을 중심으로 한 국내정세론 및 국제관계학적 평화연구가 많이 이뤄지고 있으며, 전쟁과 테러의 위협이 국내의 삶에 밀접해지면서 관련 학술, 문화행사도 빈번해지고 있다. 그 과정에서 평화에 대한 학술적 접근도 체계화 양상을 띠고 있다.
하지만 평화학의 학문적 생산과 소통망에 대한 점검은 이뤄진 바가 없다. 이것은 아직까지 개별적 평화연구들이 충분한 상호텍스트성을 갖지 못했다는 걸 말해준다. 평화연구에서 중복과 동어반복이 많은 것도 이런 학문적 관계망이 형성되지 않은 영향이 크다고 할 것이다.
사실 사회과학을 표방한 큼지막한 연구소에서는 직간접적으로 평화문제를 다루고 있다. 예를 들면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나,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연세대 동서문제연구소, 일민국제관계연구원 등이 국가간 교섭, 갈등, 지역분쟁, 평화체제와 관련된 연구를 내놓고 있다. 그리고 한림대 민족통합연구소, 원광대 통일문제연구소 등 민족통일 관련 연구소들도 마찬가지다. 국내 대부분 평화연구는 이런 식으로 동아시아나 남북관계의 특정한 정치적 상황을 개선하고자 하는 정책 연구가 주류를 이뤄왔다.
연구자 집단
1984년 경희대 평화복지대학원이 처음 생겨나면서 보편적 평화가 전면에 내걸리기 시작됐다. 평화복지대학원은 평화학 전공의 석사과정을 개설해 매 학기 석사를 배출하고 있으며, 이들 인력을 부설 연구소인 국제평화연구소를 통해 흡수, 평화연구를 재생산하는 구조를 정착시켜가고 있다. ‘Peace Forum'과 '평화연구'라는 학술지도 지속적으로 펴내고 있다.
지난 1989년 설립된 고려대 평화연구소(소장 최상용 고려대 정치학과 교수)는 본격적인 평화연구의 메카라 할 수 있다. 12명의 전임 연구인력으로 학술세미나와 학술지 '평화연구'(11호 발간)를 내는 등 체계적으로 활동한다. 주요연구영역을 보면 '평화문제 일반에 대한 철학적·이론적·역사적 연구', '한반도 평화통일의 조건과 방법 연구' 등 보편적 연구와 특수과제를 구분해서 설정하고 있는 게 눈에 띈다. 좀더 작은 단위로는 한국평화학회 회장을 역임한 하영선 서울대 교수(외교학)가 이끄는 국제관계연구회의 활동이 눈길을 끈다.
평화연구의 새로운 패러다임
냉전이 끝나면서 안보학이 인류라는 새로운 단위를 중심으로 패러다임적 재구성을 취하면서 평화학과 만나고 있다. 바로 '인간 안보'(human security)라는 개념을 통해서 말이다. 국제적, 국가적 차원의 평화에서 인간 개개인의 평화연구로 나아가는 게 평화학의 최근 추세라 할 수 있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평화학을 인권연구와 만나게 하고, 운동적 차원과 결합시킨다. 실제로 냉전 이후 평화학의 큰 특징 중의 하나로 평화교육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한국인권재단과 극동문제연구소가 협력해서 펴낸 '한반도의 평화와 인권(전2권)'(사람생각 刊)이 대표적 사례다. 시민단체에 의한 학술적 성과도 이쪽으로 분류가 가능하다. 평화네트워크 정욱식 대표가 최근 펴낸 '2003년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는 남북 평화체제의 현안에 초점을 맞춘다.
한편 기독교계나 불교계의 평화이념을 연구하면서 이를 '영성적 평화'를 추구하는 문화운동으로 발전시켜나가는 양상도 있다. 지난 2001년에 기독교계 대학교수들과 종교계 인사를 중심으로 '한국평화학회'도 만들어져서 활동중이다.
평화교육
평화교육을 보면 경희대 평화복지대학원의 평화안보학과 안에 평화학 석사과정이 있다. 그리고 2001년 전남대에 5·18연구소가 주축으로 민주, 인권, 평화를 전공하는 석박사과정이 생겼으며, 지난해에는 '단월드'(단학선원)가 천안에 국제평화대학원대학을 세워 평화 교육의 본격화를 외쳤다. 여기선 해외 평화관련 학자들을 객원교수로 적극 유치하고 향후 국제평화연구소를 세울 예정인데, 일단 단학선원이 준 종교집단으로 인식돼 있어 그 이미지를 벗으려고 노력중이다. 이 밖에 원광대 정치외교학과, 부산대 정치외교학과, 동국대 국제관계학과, 한신대 국제관계학과, 서울대 외교학과 등이 평화학을 전공과목으로 개설하고 있다.
대표적인 학자와 남은 과제들
국내 평화연구와 평화학을 상징하는 인물은 단연 리영희 한양대 석좌교수다. 리 교수는 평화를 억압당한 국내의 구조적 상황을 냉철하게 분석하고 고발해온 선구적인 연구자다. 그 아래의 중진급 연구자로는 정치사상 영역에서 평화연구를 오랫동안 해온 최상용 고려대 교수가 손꼽힌다. 이재봉 원광대 교수는 평화사상을 비롯 폭넓은 분야로 이동하며 논문들을 펴냈고, 이삼열 숭실대 교수는 평화이론 쪽에서 가장 선봉에 선 학자다. 그리고 평화체제와 군축에 관계된 연구에서는 이삼성 한림대 교수, 박건영 가톨릭대 교수, 이철기 동국대 교수 등이 몇편의 주목할 만한 논문을 쓰고 있다. 평화교육에서는 강순원 한신대 교수가 많이 거론된다. 그 외에 김명섭 한신대 교수, 이신화 고려대 교수, 김기정 연세대 교수 등 프로젝트성 연구로 평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는 학자들이 늘고 있는 상황이라 평화연구자들의 저변은 계속 확대되고 있다.
평화학은 가치중립적 순수학문이 아니라 현실에 개입하는 실천적 학문이다. 김명섭 한신대 교수는 국내 평화연구에서 "영성적, 문화적, 환경적 측면의 평화, 몸의 평화, 이공계 연구와 평화학의 접맥, 전쟁유산의 평화적 활용, 여성과 평화" 등이 과제로 남아있다고 밝힌다. 평화운동가로 '멋진 통일운동 신나는 평화운동'(책세상 刊)을 쓴 김창수 씨는 "본격적인 평화연구가 부족하다는 얘기가 팽배해 있다. 우리나라의 전통 평화사상들을 좀더 체계화시키면서 서구의 이론하고 접목시키는 노력을 해야한다. 지금은 외국이론 소개 수준이고, '소극적/적극적 평화' 등의 개념도 모두 서구에서 만들어진 개념이다. 그리고 평화학이 굉장히 빨리 발전을 하고 있는데 우리나라가 처해있는 안보적 상황 때문에 이를 적극적으로 소화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개념들을 한국적 상황에 맞는 개념으로 정립해야 한다. 그리고 평화학이란 옷을 입은 안보·군사연구도 빨리 없어져야 평화학이 명확한 방향을 설정할 수 있다"라고 평화학의 과제를 주문했다.
[교수신문] 2003년 08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