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31

김남수 (1915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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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수 (19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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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수

작가 정보
출생 1915년 5월 12일
일제 강점기 조선 전라남도 광주군 하남면 안청리
대한민국 광주광역시 광산구 안청동)
사망 2020년 12월 27일 (105세)
대한민국 전라남도 장성군
직업 침사
언어 한국어
종교 유교(성리학)
필명 호(號)는 구당(灸堂)
활동기간 1943년~2020년
장르 저술
부모 김서중(부), 최임곡(모)
형제 김기수(형)
웹사이트 뜸사랑


김남수(1915년 5월 12일 ~ 2020년 12월 27일)는 대한민국의 침술사, 기업인이다.


목차
1생애
2약력
3저서
4각주
생애[편집]

1915년 5월 전남 광산군 하남면(지금의 장성군)에서 태어난 김남수 옹의 아호 구당은 말 그대로 ‘뜸(灸)을 뜨는 집(堂)’이라는 뜻이다. 부친 김서중씨로부터 11세부터 뜸과 침을 배웠다는 구당은 대가 없이 주민들에게 무료 시술을 했다. 그때 비롯된 아호가 구당이다. 일제시대 1943년 침사(鍼士·침을 놓는 사람) 자격증을 딴 구당은 구사(灸士·뜸 놓는 사람) 자격 없이 침과 뜸 시술을 병행했다. 구당은 28세 나이인 1943년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에서 남수침술원을 열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구당이 한의학계에서 가장 논쟁적인 인물로 떠오른 것은 침술원을 연 지 65년 만인 93세에 이르러서였다. 2008년 방영된 공중파의 추석 특집프로그램이 계기가 된 것이다. ‘구당 김남수 선생의 침뜸 이야기’가 두 편을 거쳐 방송됐고, 시청률은 20%가 넘었다. 해박한 뜸과 침 이론으로 중국 베이징 침구골상학원 객좌교수와 녹색대학대학원 석좌교수, 경희대 체육대학원 강사 등을 지내며 후학을 양성했다. 침뜸 보급을 위해 정통침뜸연구소 원장과 남수침술원 원장, 대한침구사협회 입법추진위원회 위원장 등으로 활동했다. 이 과정에서 <나는 침뜸으로 승부한다>를 비롯해 <뜸의 이론과 실제> <침뜸 이야기> <침사랑 뜸사랑> <침뜸의학개론> <경락경혈학> 등 저서를 다수 남겼다. 최근 저서 <무극보양뜸>에서는 “뜸은 최고의 건강 장수 비법이자 의료비 대란을 잠재울 최고의 의술”이라며 “조상 대대로 전해온 뜸을 누구나 쉽고 자유롭게 뜰 수 있도록 규제를 풀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http://www.hani.co.kr/arti/area/honam/976263.html#csidxe25845be4819cb38e651322952bc6b1 ). 그는 일제강점기에 침사 자격증을 땄지만 한의사들이 ‘무자격 의료 행위’라고 제소하면서 위기를 맞기도 했다. 헌법재판소는 2011년 11월 “침사 자격만으로 뜸 시술을 하는 것은 사회통념상 용인할 수 있다”며 그의 손을 들어줬다. 그는 꾸준한 뜸 교육으로 제자 5천여명을 배출했고, 그들과 함께 국내외에서 150만여명한테 무료 시술을 했다. 국민 건강에 공헌한 이런 공로로 대통령 표창(2002년), 국민훈장 동백장(2008년),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자원봉사상 금상(2012년) 등을 받기도 했다. 100세 되던 해인 2015년부터 고향 장성으로 내려와 서삼면 금계리에 '구당뜸집' 내 '구당침술원'을 열고 팔, 다리가 불편한 환자를 대상으로 무료 진료를 펼쳤다. 김 옹이 만든 무극보양뜸은 기혈과 음양오행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남자의 경우 기해·관원 등 12개 혈자리에, 여자는 수도(좌우), 중극 등 13개 혈자리에 뜨는 뜸법이다. 향년 105세 나이로 2020년 12월 27일 오후에 숙환으로 별세하였다.
약력[편집]
전라남도 광산군 하남면 출생
부친 김서중(金瑞中)으로부터 형님 김기수(金己洙)와 함께 한학 및 침구학 전수[1][2]
1983년 남수침술원 개설(신고번호 제92호)
서울맹학교 교과서 제정위원 및 심의위원
중국 북경 침구골상학원(현 북경중의약대학) 객좌교수
녹색대학원 자연의학과 석좌교수
미국 사우스베일로대학교 명예 동양의학 박사(2009)
미국 로드랜드대학교 명예 자연치유학 박사(2012)
세계침구학회연합회(WFAS) 각주단 집행위원, 교육위원, 침구의사고시위원
세계중의약학회연합회(WFCMS) 각주단 집행위원, 국제침구의사고시 한국 대표
사단법인 대한침구사협회 입법추진위원장, 봉사단장
사단법인 허임기념사업회 설립 이사장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2002)
국민훈장 동백장 서훈(2008)
미국 애틀랜타 리버데일 호스피탈 암센터, 암환자 침뜸시술 임상연구 (2009~2010)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 ‘자원봉사상’ 금상 수상(2012)
중국 UN MDGs 새천년개발목표 특별공로상 수상(2013)
現 구당침술원 원장(2013)
現 한국정통침구학회 회장, 정통침뜸교육원 원장
現 뜸사랑 봉사단 단장
現 정통침뜸연구소 소장
現 사단법인 효행봉사단 단장
現 계간 구당 발행인
現 한국정통침구학회 원격평생교육원장
現 세중연(WFCMS) 무극보양뜸 국제연맹 총재
저서[편집]
《무극보양뜸》구당 김남수 선생이 창안한 무병장수 의학, 정통침뜸연구소
《나는 침과 뜸으로 승부한다》, 정통침뜸연구소
평생 건강을 위한 침뜸 이야기,정통침뜸연구소
『뜸의 이론과 실제』,정통침뜸연구소
『침구사의 맥이 끊어지면 안 된다』,1998.12.15
『침구사를 키워 인류를 구해야』,1999.10.15
『생활침뜸의학』,1999.11.30
『침사랑 뜸사랑, 아∼ 내사랑』,정통침뜸연구소, 2002.9.7
『침뜸의학개론』, 『경락경혈학』, 『장상학』, 『병인병기학』,
『침뜸술』, 『취혈자침실기』, 『침뜸진단학』, 『경락학』 등
각주[편집]

 보도 자료 리스트
 김남수는 1915년 5월 12일 전라남도 광산군 안청리에서 김해김씨 문경공파 7세손인 부친 김서중과 모친 최임곡의 2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무극보양뜸을 통해 본 구당 김남수의 의학사상’, 뜸사랑 침뜸의학 전상희 교수 지음). 그는 2008년 KBS 추석특집으로 방영된 ‘구당 김남수의 침뜸 이야기’에서 사회자가 “94세가 맞느냐”고 묻자 “나이는 많지만 몸이 건강해서 충분히 일할 수 있다. 6시에 기상해 오후 5시까지 11시간을 서 있다. 이는 침뜸 때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해김씨 문경공파 대동보에 나타난 그의 출생일은 1922년 5월 12일로, 그가 말하는 나이와 차이가 난다. 그는 ‘주간동아’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1915년생이 맞다. 무슨 이익이 있다고 나이를 속이겠는가. 족보는 본인이 만든 것이 아니므로 거기에 대해 말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의 설명대로 1915년생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해도 “열한 살 때 선친에게서 침술을 배웠다”는 그의 말은 오류에 빠진다. 그동안 김남수는 “처음에는 침을 어깨 너머로 배웠지만 어느 정도 눈이 트인 뒤엔 정식으로 교육을 받았다. 아버지의 침술교육은 그야말로 살아 있는 교육이었다”고 밝혀왔다(‘침사랑 뜸사랑 아~내사랑’).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열한 살 때부터 의원인 부친에게서 한학과 침구학을 전수받았다”고 거듭 주장했다(서울신문 2008년 9월 29일자 등). 하지만 제적등본에 나타난 구당의 선친인 김서중 씨의 사망 시기는 1915년 2월 28일. 두 기록을 비교하면 그가 태어나기 3개월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에게 침뜸을 가르친 셈이 된다. 이에 김남수는 “호적 기록이 잘못된 것이다. 본인이 선친에게서 배운 것이 분명한데 부친의 사망신고일까지 파헤쳐서 말한다면 답변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고향에 가서 알아보기 바란다”고 반박했다. 1910년생인 김기수 씨가 다섯 살이 된 해는 1915년이다.


고대문명연구소 정기포럼 (2021.08.28) - 힌두교사 깊이 읽기, 종교학이 아닌 역사학으로 (이광수)

우리나라 농업은 종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 농촌&농업 < 무안오늘 < 기사본문 - 무안타임스

우리나라 농업은 종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 농촌&농업 < 무안오늘 < 기사본문 - 무안타임스

우리나라 농업은 종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글 / 금창영 전국귀농운동본부 상임대표
입력 2021.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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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답은 자연의 치유와 균형...생물다양성 높이는 순환농법으로 바꿔야
기후위기 시대에 맞는 전문가는 연구실 박사들이 아니라 현장의 농민
2016년부터 6년째 경운하지 않고, 기계를 쓰지 않는 논농사를 짓고 있다.

나는 농부다. 50대의 나이지만 마을에는 어렸을 때부터 농사경력을 쌓은 어르신들이 넘쳐나니 비교하면 보잘 게 없다. 하루하루 어떻게 버티고 있지만, 농사는 언제나 최악의 경우를 곡예하듯 피해나가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농부는 어떤 존재일까? 귀농을 준비하는 이들의 부러워하는 눈빛과, 자식들이 도시에서 직장에 다니고 있음을 자랑으로 여기는 동네 어르신들이 생각하는 농부, 그 사이에 어중간하게 있지 않을까?

농부라는 직업이 기술이나 능력이 없어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것은 아닐테지만, 그렇다고 경제적 이득을 생각하지 않고 묵묵히 공생의 삶을 살아가지도 않는다. 돈이 안되거나 육체적 한계상황이 이어지지 않는다면, 대부분 즐겁고 흥미로우며 보람도 있으니 그저 이어갈 뿐이다.

기후위기? 아무리 우리나라 농업이 국제경쟁력이 없고, 소득이 낮으며, 농민들 간의 소득격차가 벌어진다고 해도, 큰 욕심 부리지 않으면 그런대로 살만하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우리사회에 기후위기나 기후재앙이라는 말이 떠돌기 시작했다. 날씨나 기후라면 농사짓는 우리가 가장 신경써야 할 분야 아닌가?

사실 날씨가 예전같지 않다는 말은 농민들에게 너무도 익숙하다. 농사라는 것이 50일 이상 비가 내리고, 20일 이상 폭염이 이어져도 그것을 극복하는 일 아니겠는가? 그리고 정말 기후위기가 왔다고 해도 농민에게 이렇다 할 대책이 없다. 그저 봄이 되면 밭 갈고 씨 뿌리고, 가을에 수확하는 것이다. 더불어 농사란 자고로 경험에 기반하기에 변화를 주는 것이 익숙하지 않다. 1년에 벼농사 한 번 짓는데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라고 한다면 무책임한 것이다.

하지만 그냥 모른척하기에는 온통 난리들이다. 세계 곳곳에서 산불이 이어지고, 이상기온이 일반적인 상황이란다. 지구가 불타고 있고, 인류는 생존을 걱정해야 한단다.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농민으로서, 아이를 키우는 부모로서 지금 생활에서 변화를 줘야한다는 생각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다보니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생겨난다.

IPCC나 1.5도, 해수면 상승 등 이런저런 어려운 이야기는 모르겠고, 온실가스 때문에 지구가 더워진다는 것은 알겠다. 그렇다면 온실가스를 줄이는 것이 중요한데 뭔가 이상하다. 우리나라는 공식적으로 농업에서 나오는 온실가스가 전체 온실가스의 3%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유럽은 25%라고 하고, 미국은 30%라고 말한다. 차이가 나도 이건 너무한 것 아닌가? 이것이 첫 번째 의문이다.

두 번째는 탄소이야기이다.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하겠단다. 탄소배출을 줄이는 저탄소 농법이라는 것이 자주 거론된다. 농사에서 배출하는 온실가스와 관련해서 우리나라는 2010년을 전후해서 연구와 여러 가지 시도가 있었다. 그중에는 ‘농업부문 온실가스 감축사업’ 이라는 것이 있다. 이름에서 말하는 것처럼 인증도 주고, 감축량을 판매하여 수익을 올리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것은 그 분야가 고효율 보온자재, 순환식 수막재배, LED조명 교체, 지열히트펌프 이용 등이다. 당연히 이런 사업은 시설재배에 적용된다. 그렇다면 그 시설을 만드는 과정에서 생기는 온실가스에 대한 지적은 왜 없는 것일까?

세 번째는 농촌진흥청에서 탄소중립을 위해 농민들에게 권장하는 일이다. 토양개량제를 뿌리고, 퇴비는 부숙해서 사용하며, 벼 중간 물떼기 기간을 늘리고, 플라스틱과 비닐을 수거하고, 농기계를 주기적으로 점검하란다. 한쪽에서는 인류멸종을 이야기하는데, 정말 이렇게만 해도 탄소중립이 가능한 걸까?

네 번째는 기후위기에 이어 나오는 말이 식량위기다. 이해할 수 있다. 가뭄이나 장마가 이어지면 식량생산량이 줄어들테고, 그렇다면 불안할 것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우리는 지금까지 악착같이 생산량을 늘리는 농사를 지어왔다. 그것은 친환경농업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얼마나 생산량을 늘려왔으면 산지에서 폐기하는 일이 일어나겠는가? 어쩌면 지금의 농사방식이 기후위기와 관련이 있을텐데, 그럼에도 농사에서는 식량위기만 생각하며 지금처럼 생산량을 늘리는 농사를 지으면 되는 것인가?

여기저기서 기후위기와 관련한 세미나에서부터 간담회나 시위가 이어진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기후위기 시대에 어떤 농사를 지을 것인가와 관련한 전문가에 정작 농민은 포함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농촌현장에서 버티고 있는 당사자가 전문가이지 이런저런 사례를 책이나 이야기를 통해 알고 있는 이가 어찌 전문가일 수 있는가?
식물은 기후위기를 극복하는데 도움을 주는 존재이다. 그러니 최소한으로 작물이 자라는 주변만 풀을 정리하고, 나머지 부분은 그냥 둔다.

아! 그들은 위기라고 생각하지 않는구나.
나는 앞에서 말한 몇 가지 의문을 푸는 것이 기후위기 시대에 어떤 농사를 지을 것인가와 관련한 답을 찾는 기본이며, 핵심이라 생각한다. 우선 정부나 농업연구기관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살펴보자. 왜 그들은 3%를 이야기하고, 온실가스 감축사업을 시설 중심으로 고민하며,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농업으로 스마트팜을 1순위로 이야기할까?

한마디로 농업의 역할은 국민들에게 안정적으로 식량을 공급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후위기에 이어 식량위기가 올 것이니 안정적인 식량생산방식은 무엇일까? 답은 스마트팜이다. 간단하다. 노지농사에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토마토를 한평에서 190kg씩 생산할 수 없다. 그러니 여기저기서 30억에서 60억, 많게는 300억씩 스마트팜을 지원하는 것이다. 물론 스마트팜만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더워지는 날씨에 적응이 가능한 새로운 작물을 개발하고, 새롭게 등장하는 병충해에 대해 연구하며, 이모작이 가능해지는 지역이 늘어날테니 그에 대한 연구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이 모두 생산성 향상과 관련한 것들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날씨가 따듯해지면 오히려 기회일 수 있다고 인식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중부지방에서 감귤을 생산하면 되고, 사과는 북부지방으로 올라가고, 남부지방에서는 열대과일을 생산하면 된다. 염려할 것이 없다.
그렇다면 왜 시설을 중심으로 온실가스 감축사업을 지원할까? 간단하다. 데이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업은 데이터에 근거해서 만들어진다. 새로운 사업을 하기 위해 필요한 근거는 대부분 데이터라는 이름을 가진 통계이다. 사업의 지속여부도 데이터를 통해서 판단된다. 그러니 지열히트펌프를 노지농사에 지원할 수 없다. 설치가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노지에서는 순도가 보장되는 데이터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래서 스마트팜에 더 집착하는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물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시설을 만드느라 여러 가지 자재들이 들 것인데, 그것으로 인해 늘어나는 온실가스는 생각하지 않는가? 또한 농민들은 말할 것이다. 농사의 결과가 어찌 지열히트펌프를 설치한 결과라고만 볼 수 있는가? 농사는 자고로 해와 비, 땅의 상태, 병해충 등 다양한 조건의 결과이지 않는가? 물론 그들도 이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애써 무시한다. 왜냐하면 경우의 수가 너무 많아 통제되지 않거나 연구를 시도하기에는 효율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300평에 감자농사를 짓는다면 그저 감자를 심고, 수확하는 것과 관련한 통계만 내는 것이다. 그러니 3%이다. 하지만 농사는 그렇지 않다. 어떤 거름을 넣을까에서부터 경운은 어떻게 하고, 씨감자는 어떤 것을 쓰고, 멀칭은 어떤 것으로 하며, 관수는 어떻게 하고, 어떤 방법으로 수확하고, 얼마가 나왔으며, 도시민의 식탁으로는 어떻게 이동하는지도 다 다르다. 더불어 얼마만큼 버려지는지도 알 수 없다. 이 많은 경우의 수를 어찌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니 3%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이것을 의미 있는 데이터라고 할 수 있기는 한 걸까? 하지만 세상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들에게 전문가라는 칭호를 준다. 변수가 워낙 많아 정확하게 수치를 계산하기 어렵다고 이야기하는 이들에게는 주목하지 않는다.
정리하면 이렇다. 소위 농업관련 전문가들은 농업부문에서 나오는 온실가스가 전체 온실가스의 3%라고 생각한다. 에너지부문이나 일상생활에 비해 적은 수치다. 그러니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유럽은 농업의 과정뿐만 아니라 유통과 소비까지 분석해보니 25%라고 하는 것이고, 미국은 축산과 관련한 온실가스가 더 많으니 30%라고 하는 것이다. 3%밖에 되지 않으니 나오는 대책이라는 것이 퇴비를 부숙해서 사용하고, 농기계 점검을 자주 하라는 것이다.
만약 연구가 계속되어 우리나라도 유럽이나 미국처럼 농업과 관련한 온실가스 배출이 전체의 20%가 넘는다는 결과가 나온다면 이건 그들에게 큰일이다. 그들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오로지 생산성과 효율성만을 생각하는 농업을 전파하고, 생물다양성이나 생태계보호는 생산량이 줄어들지 않는 선에서만 염두에 두도록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이제 농업은 꽤나 진입장벽이 높은 직업이 되었다. 처음 농사를 시작하는 이들의 대부분이 시설에 관심을 기울인다. 이미 우리나라 하우스 면적은 세계 3위이다. 156,655,675평. 하지만 계속해서 늘어날 것이다. 일본이 10,890,000평이니 우리가 14배나 많다. 시설은 극도의 생산성을 추구하는 농사방식이다. 더불어 시장이 요구하는 상품성에 대응하기 적절한 방식이다. 하지만 열악한 노동조건을 전제로 한다. 그럼에도 시설이 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나라 농민의 처지가 일본보다 열악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농민들은 이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노지농사도 마찬가지다. 언젠가부터 당근이나 양파, 배추, 감자, 콩 등 대부분의 작물에 물을 주는 것이 일반적이다. 당연히 수확량과 상품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지금까지 농민들은 품질이 좋으며 안정적으로 공급가능하고 가격도 저렴한 농산물을 생산하기 위해 다양한 위험과 싸워왔다면, 이제부터는 일상적인 기후위기와도 싸워야 한다. 밭농사는 외국인노동자가 없이는 어렵다고 말하고, 논농사는 모든 기계를 가지고 5만평은 넘어야 먹고 살 수 있다는 말이 나오는 시절이 된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 농업은 누가 보아도 불붙은 기관차가 전속력으로 종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모습이다.

이미 그 해답은 우리가 알고 있다.
 
그것은 사실 특별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농사현장에서 계속해서 그 해답을 접하면서 살고 있다. 해답은 바로 자연이다. 자연은 지금까지 스스로 치유해왔고, 스스로 균형을 유지해왔다. 자연이야말로 우리가 모범으로 삼아야 할 지속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자연을 근거로 회자되는 농사법 몇 가지만 거론하면 다음과 같다. 자연농법, 자연재배, 예술자연재배, 보존농업, 재생농업, 공생농법, Zero budget natural farming, 농생태학, 퍼머컬쳐 등이다.

이름은 다양하지만 사실 들여다보면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생물다양성을 높여야 한다. 섞어짓기, 돌려짓기, 사이짓기, 소량다품종농사. 농기계사용을 최소한으로 한다. 외부에서 사오는 것을 줄이고 내부의 순환체계를 강화한다. 비닐멀칭을 줄인다. 씨앗을 받아서 농사짓는다. 녹비작물을 심어야 한다. 땅을 건강하게 만든다. 경운하지 않는다. 토양을 체계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표토가 드러나지 않게 한다.
그렇게 농사가 되겠는가? 그렇게 해서 먹고 살 수 있겠는가? 생각이야 좋지만 현실성이 너무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만. 모두 좋다. 그럴 수 있다. 어찌 모든 사람의 생각이 같겠는가?

생각이나 처지가 다르니 각자 실천의 모습도 다를 수밖에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농민에 대해 말로는 국민들의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공익적인 일을 한다고 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개별사업자다. 본인이 판단해서 그 결과를 본인이 책임질 수밖에 없다. 더불어 농민들의 생각과 처한 상황이 제각각이다. 그러니 군대나 학교처럼 통일되고 단일한 모습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결국 농민들은 생존과 관련한 문제이니 항상 새로운 것보다는 익숙하거나 검증된 것을 선택하는 보수적 존재가 된다.
 
하지만 정책입안자들의 의식부족, 농민들의 의지부족, 소비자들의 인식부족을 탓하면 우리의 역할이 끝난 것인가?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고 전 사회적으로 이 문제와 관련한 이야기가 난무하지만, 실제 움직임이 없음에 한탄하거나 원망한다고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러니 각자가 본인의 논과 밭에서 본인이 납득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갈 뿐이다. 기후위기 시대에 어떠한 농사를 지어야 할지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전문가는 연구실에 있는 박사들이 아니고, 현장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농민이다.

글 / 금창영 전국귀농운동본부 상임대표

2021/08/30

선교의사 알렌(Horace N. Allen)의 의료 활동과 조선인의 몸에 대한 인식 고찰* 이영아**

kjmh-20-2-291.pdf

291
의사학제20권제2호(통권제39호)2011년12월 KoreanJMedHist20ː291-326Dec.2011
ⓒ대한의사학회 pISSN1225-505X,eISSN2093-5609 

선교의사 알렌(Horace N. Allen)의 
의료 활동과 조선인의 몸에 대한 인식 고찰*
이영아**
1. 머리말
2. 선교의사들의 조선 전통 의학과의 접촉
3. 알렌의 의료 행위
4. 알렌의 조선(의학)과 조선인의 몸에 대한 인식
5.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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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2010년 TV드라마 <제중원>과 이것의 원작이 된 소설 『제중원』(이기원, 2009)이 발표되면서, 개화기 조선에 유입된 서양근대의학에 대한 사회적 관 심이 커졌다. 제중원은 고종에 의해 한국에 세워진 최초의 서양식 근대병원 이며, 이를 설립하는 데에 큰 기여를 한 인물이 선교의사였던 알렌(Horace 
N. Allen)이다.
그는 한국에 체류하거나 한국 관련 일을 수행한 약 20년(1884~1905)의 시
간 동안 꾸준히 작성한 일기와 편지글을 통해 그 시기의 한국의 정치, 외교, 사회, 문화, 의학에 대한 중요한 기록을 남겼다. 그러므로 그의 일기와 선교
1) 
 
 *  이 논문은 2009년 정부(교육과학기술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NRF-2009-351-A00276]
**  명지대학교 방목기초교육대학 인문교양학부 주소: 서울시 서대문구 거북골로 34 명지대학교 방목기초교육대학 (12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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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외교활동을 하면서 작성한 방대한 양 )의 공적·사적 편지의 내용, 그 리고 그가 미국으로 돌아간 뒤 조선에서 지냈던 시간들을 회고한 기록들은 특히 정치·외교나 사회·문화적 측면에서 조선의 공식 문서나 기록의 빈틈 을 메워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는 사료이다.
특히 본 논문에서는 알렌이 조선 입국 초 의사로서 활동했던 시기의 조선인 의 몸, 위생, 질병 등에 대한 태도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알렌은 1884 년 9월 조선에 입국했을 때 선교사이기 이전에 먼저 ‘의사’로서 정의되어 미국 공사관의 부속의사 및 유럽, 일본의 공사관 공의(公醫)로 임명되었다(민경배, 1991: 95). 그리고 1884년 12월 갑신정변 당시 민영익을 치료해 준 인연으로 1885년 4월 설립된 제중원에서 의사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주위의 다른 선교 사 및 의사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 선교사직을 그만두고 1887년 8월 주미 한 국공사관 서기관으로 임명되면서 외교관으로 변신하게 된다. )
1884년부터 1887년까지의 알렌의 선교 및 의료 사업 기간은 한국사적으 로 여러 가지 면에서 의미 있는 시기이다. 조선 정부가 서양식 근대병원을 처 음 세운 시기이며, 이와 함께 서양의 문물과 기독교에 대한 호의적인 태도가 생겨가기 시작한 시기이다. 알렌은 이 기간 의료 활동을 통해 조선인의 몸을 직접적으로 대면하였다. 개화기에 조선을 찾았던 많은 서양인들처럼 동양의 한 인종으로서 조선인을 바라보기도 하였고, 환자로서 조선인의 몸을 관찰하 고 치료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과정을 일기, 편지, 그리고 회고록 등을 통 해 기록으로 남겼다.
그런데 알렌은 의사로서, 선교사로서뿐 아니라 고종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 으로 주미 한국공사관 서기관직을 역임했으며, 훗날에는 주한 미국공사관 공 사로도 활동했다. ) 그만큼 한국과 미국 사이에서 중요한 가교 역할을 했던 존 재이다. 이처럼 알렌은 제중원의 설립에 큰 공헌을 한 인물이자, 구한말의 한 미외교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기 때문에, 기존 연구에서는 그의 치적사 업들에 대한 관심에 집중되어 왔다. ) 알렌을 연구하는 것은 단순히 개화기에 한국을 방문했던 선교의사 중 한 명을 살펴보는 정도의 일이 아니라, 한국사 에서 개화기라는 격동의 시기의 중심부를 이해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역으로 알렌이라는 역사적 인물과 그의 기록들에 대한 섬
세한 텍스트 분석을 방해하는 요인이기도 했다. 즉, 그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생각과 태도로 일상에서 조선인들을 보고, 대하고, 치료해왔는지에 대한 관 심은 극히 적었던 것이다. 김윤성이 「개화기 개신교 의료선교와 몸에 대한 인 식틀의 ‘근대적’ 전환」에서 여러 선교의사들의 몸에 대한 인식을 다루는 가운 데 알렌의 논의가 포함된 경우를 제외하고는(김윤성, 1994), 알렌은 정치사 적ㆍ외교사적ㆍ의료사적 ‘행위’를 한 인물일 뿐 어떤 조선(인의 몸)에 대한 ‘ 시선’을 가진 인물로서 연구되지 못했다. 이에 본 논문에서는 알렌을 ‘대문자 의 역사’라는 ‘거시적’ 담론 속 존재가 아닌 조선이라는 동양을 방문하여 생활 한 한 명의 서양인으로서 살펴보고자 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그가 가진 선교 사, 의사, 그리고 외교ㆍ정치가로서의 위치가 참조될 것이다. 하지만 더 중점 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것은 그가 남긴 기록들이다. 그가 ‘글’을 통해 조선과 조선인, 특히 조선인의 몸을 어떻게 대하고 바라보았는지를 ‘미시적’으로 분 석하고자 한다. 
‘몸’의 문제에 집중하여 본 논문을 전개하려는 데에는 이 시기의 ‘몸’에 대 한 담론이 가지는 중요성에 대한 확신에 근거를 두고 있다. 몸은 인간과 세계 를 매개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는 몸 안에서, 몸을 통하여 세계를 경험한다. 몸은 문화에 의해 정교화되고 사회적 관계 속에서 전개되는 하나의 가능성이
다. ) 따라서 몸은 언제나 특정한 사회적ㆍ환경적 맥락 속에서 존재하는데, 그 안에서 몸은 능동적인 행위자이면서 또한 모든 사회적 계기와 그 역사에 의해 서 형성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1900년을 전후한 시기 조선인의 몸에 대한 인식은 서구의 문물이나 서양인의 방문 등을 통해 전면적으로 바뀌게 된다. 이 시기 조선의 ‘근대화’는 여러 방면, 분야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졌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격변을 보인 부분이 몸에 관한 인식 부분이다. 의학, 위생, 체육교육, 섹 슈얼리티, 인종, 우생 등의 근대화 문제는 근대적인 국민국가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선결되어야 할 요소였다.7)
따라서 이 시기 조선 땅에서 마주친 조선인과 서양인이 각기 바라 본 ‘우리’
와 ‘그들’의 몸에 대한 인식이 어떠하였는가를 고찰함으로써 ‘몸의 근대화’의 과정을 논의해볼 필요가 있다. 몸을 묘사하는 과정은 어떤 경우에서건 온전 히 객관성을 띨 수는 없다. 여기에는 대상을 보는 주체의 시선이 언제나 개입 될 수밖에 없으며, 서술을 하는 목적과 주체가 처한 상황에 따라 주관적 평가 가 포함되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담론을 대할 때에는 ‘누가’, ‘무엇을’ 그리고 ‘왜’ 묘사하는지 항상 질문해야 한다(존 퓰츠, 2000: 21). 이들의 ‘충돌’과 ‘융 합’, 혹은 ‘경쟁’과 ‘승/패’의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근대적인 몸’이 오늘날의 한국 사회의 몸에 대한 강박에까지 많은 부분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도 이러 한 연구는 시의적 가치를 지닌다. 
먼저 조선인 쪽에서의 몸에 대한 인식은 선행 연구인 「1910년대 조선인의 타자의 몸에 대한 시선 고찰」을 통해 기왕에 살펴본 바 있다(이영아, 2010a). 따라서 이번에는 서양인 쪽에서의 당시 조선인의 몸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기 위해, 조선과 매우 오랜 기간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서양인이자 몸에 대한 감 각이 가장 예민할 수밖에 없는 직업인 의사로서 알렌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았 다. ) 제국주의의 열풍이 불었던 당대에, 선교를 목적으로 내한한 서양인·백 인이자 의사로서의 알렌이 보고, 진료한 조선인의 몸은 과연 어떠했을까? 그 리고 그 몸을 대하는 알렌의 태도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이었을까?
2. 선교의사들의 조선 전통 의학과의 접촉
비서구사회에 서구 근대의학을 이식하는 가장 중요한 매개자가 되었던 것 은 의료선교사들이었다. ) 1876년 조일수호조규가 체결되고 일본에 의해 부 산, 원산, 인천 등이 개항된 이래로 1877년 제생의원이 부산에 설립되면서부 터 서양식 병원들이 조선에 세워지기 시작했다. 이미 미국공사를 통해 알렌 에게 이듬해 봄부터 의료사업을 허락할 뜻을 비쳤던 고종은 갑신정변 때 알렌 이 민영익을 치료한 것을 계기로 1885년 봄 광혜원(제중원)을 설립하게 되면 서 본격적인 서양 선교의사들의 조선인을 상대로 한 진료활동이 시작되었다.
조선정부는 1885년 4월 재동의 고 홍영식의 옛집에 근대적인 서양식 의술 을 시행하는 병원 제중원을 세우고, 알렌에게 진료를 맡겼다. 제중원의 설립 에는 조선시대 일반 백성들에게 국가가 의료를 베풀던 기관인 혜민서의 역할 과 함께 서양 의술의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도 수행할 목적이 있었다. 1885 년 5월부터 6월까지 한 달간 스크랜턴이 알렌을 도왔으며 6월에는 헤론이 합류하여 알렌과 같이 진료를 맡았다. 이들은 개원 이후 1년 동안 1만460명 의 환자들을 대상으로 진료한 실적을 『조선정부병원 제1차년도 보고서(First 
Annual Report of the Korean Government Hospital )』로 기록하였다. 이와 같은 기록은 서양인이 조선인을 진료한 결과를 토대로 작성된 것으로서 그들 이 파악한 조선인의 몸과 질병이 어떠한 특징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 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그리고 스크랜턴은 보다 자유로운 선교활동을 하기 위해 1885년 민간진 료소인 시병원(施病院, Universal Relief Hospital)을 설립하여 진료를 하였 는데, 역시 『연차 보고서(Annual Report of Methodist Episcopal Church for 
1886 )』를 통해 조선인에게 흔한 질병이 무엇인가 등에 대해 기록을 남겼다. 또한 1887년에는 여성 환자들을 위해 보구여관(保救女館)을 세워 여의사 하 워드(Meta Howard)를 통해 진료하도록 했다. 그후 로제타 셔우드(Rosetta Sherwood), 커틀러(Mary M. Cutler) 등도 여의사로서 보구여관에서 활동했 다(조이제, 2007).
그런데 서양의 선교의사들이 조선인을 진료하면서 남긴 기록 및 의학행 위들에는 조선의 몸 문화 및 의학에 대한 긍정과 부정의 두 시각이 모두 드 러난다. 예를 들어, 1890년에 내한한 영국성공회 소속의 의료선교사 랜디스 (Eli Barr Landis)는 조선 전통의료에서 사용하는 치료약재들을 긍정하는 모 습을 보였다. ) 그는 당시 한국에 있던 서양인들 중에 가장 한국어를 잘하는 사람으로 평가 받을 정도로 한국어에 능통했으며 한문에도 밝아 조선의 다양 한 문화, 풍속에 대한 소개 글을 발표하고 동의보감의 영역(英譯)을 시도하기 도 하였다. 33세의 나이에 요절하면서 동의보감을 완역하진 못하였으나 그 가 제일 먼저 번역하여 중국학 잡지 The China Review에 소개한 부분이 「탕 액편(湯液篇)」이라는 사실(여인석, 2007: 10-1)은 그가 조선의 전통의학 중에 서 가장 인상 깊게 생각했던 부분이 조선의 전통적 치료약재에 관한 것이었 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보구여관의 의사였던 로제타 셔우드는 온돌형식의 병실이 당시 한
국 환자를 위해서는 가장 좋은 병실이라고 생각하였다(이방원, 2008: 39). 그 이유를 “첫째, 온돌방은 따뜻하고 잠자기에 편안하다. 둘째, 방 전체가 하나 의 침대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환자가 침대 밖으로 나올 염려가 없다. 셋째, 온돌방은 청결하여 소독하기 쉽고, 요를 쉽게 살균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선 교병원에서 사용하기에 경제적이다” )라고 하였다. 반면, 조선의 전통 의료방식에 대해 불신하거나 폄하하는 경우도 많았다. 서양인 의사들은 한국인들이 질병에 대해 무지하며 비(서양근대)과학적인 치 료방식을 채택하기 때문에 조선인들이 죽거나 고통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 신들의 서양근대의학 대신 뜸, 침 )의 치료나 비위생적인 환경, 콜레라의 유 행에 고양이 그림으로의 퇴치, ) 부적, ) 굿 등의 미신에 의존하는 조선인들에 대해 서양 선교의사들은 동의하지 못했다. ) 그들에게는 한국인이 사용하던  
민간요법과 미신은 이해하기 힘든 치료방법이었기 때문에, 한국인들을 ‘계몽’ 하면서 치료하려 했다(이방원, 2008: 48).
이처럼 서양의 선교의사들은 어떤 면에서는 조선의 전통의학과 생활환경 에 대해 인정하려는 태도가 있었던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침, 뜸과 같은 전통 적 치료법이나 위생불량 등을 비판하는 모습도 보였다. 알렌의 경우도 조선 의학에 대해 이러한 양가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아래 인용문에서와 같이 조선의 전통의학에 ‘좋은 아이디어들’이 있다는 점을 언급하기도 하고, 조선인들은 쌀밥을 주식으로 해서 치아의 성장이 좋은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 으며, 인삼의 발한(發汗)을 유도하는 작용에 대해 흥미를 보이기도 하였다.
토착 의료진들은 치료법에 대해 몇몇 좋은 아이디어들을 가지
고 있다.(The native faculty have some good ideas in regard to treatment.)16)
쌀밥 식사는 이의 성장에 좋은 것 같다. 한국인은 거의 누구나 
훌륭하고 진주와 같이 흰 이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아침에 조심 스럽게 이를 닦는데 청정제나 솔 대신 손가락 위에 소금을 놓고 이 에 비벼댄다.17)
조선의 약전(藥典)은 주로 인삼으로 알려진 식물의 뿌리에 의존 한다. 인삼은 발한을 필요로 하는 조선 사람의 모든 병에 만병통치 약이다. 조선은 뛰어난 인삼으로 유명하며 최근 일본이 조선을 점 령하기 전까지만 해도 인삼은 왕실의 부수입의 하나였다. … 미국 산 인삼은 활성이 없는 데 반해 조선의 인삼은 탁월한 발한성 때문 에 귀중하게 여겨진다. 나는 인삼을 먹고 발진한 외국인과 조선 사 람들을 본 적이 있다. 중국인들은 이 약초의 위대한 가치를 최음제 로 이용하는 것 같다. 내가 민영익을 치료할 때 체온이 올라가자 부 상한 부분이 붉게 타오르는 것 같이 보였기 때문에 특히 유의해서 
 
린이에게도 예방접종을 하지 못했다”며 화를 냈음을 언급하고 있다.
16) H. N. Allen and J. W. Heron, First Annual Report of the Korean Government Hospital (Seoul, 1886), p.7.
17) H. N. 알렌, 신복룡 역, 『조선견문기』 (서울: 집문당, 1999), 181쪽.
살펴보았지만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많은 질문을 한 끝 에 그의 가족이 빨리 낫게 하기 위해 당치도 않은 인삼을 복용시켰 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대해 나는 나의 말에 분명히 복종하 지 않는 한 치료를 전부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나의 말이 너무도 강경했기 때문에 그 후부터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나쁜 징 후가 없어진 후 나는 전보다도 더 인삼에 대해 탄복하게 되었다. )
그러나 알렌 역시 전통의학의 치료법에 대해 부정하거나 우려를 나타내기
도 하였다. 그는 침을 놓는 것의 비위생성, 고약을 바르는 것의 무의미함 등을 언급하며 전통의학은 그가 보기에 효능이 없거나 오히려 환자에게 해로운 것 으로 여겼다. 그래서 다음의 인용문에서와 같이 무면허 의료행위로 침을 놓 다가 환자가 즉사를 한 경우, 민영익을 치료할 때 자신의 외과수술과 달리 전 통의사들은 고약을 바르려 했던 것 등에 대해서는 매우 위험한 치료방식이라 며 거부감을 드러냈다. 
조선의 의학 체계는 주로 중국의 의학 체계이며 중국에서 들어 온 것이다. 뜸을 자주 놓기 때문에 조선 사람을 벗겨 보면 어떠한 통증을 고치기 위해 뜨거운 뜸을 놓은 자리가 없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침도 뜸만큼 자주 놓는데 때로는 침이 더러워 원래의 병보다 더 심한 병을 일으킬 수가 있었다. 언젠가 나는 침을 사용하여 매 우 슬픈 결과가 일어난 경우를 본 적이 있다. … 한의사를 높이 평 가하지 않는 이 나라에서는 교육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의료 행위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 잘못되어 침이 골수 를 꿰뚫어 젊은이는 입에서 거품을 뿜으며 쓰러져 죽고 말았고, 몇 시간 내에 그의 어머니도 충격으로 죽고 말았다. )
제가 몇 차례에 걸쳐 수술을 한 것이 이곳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
을 주었습니다. 제가 처음 부름 받고 왕자(민영익)를 치료할 때 그 자리에 있었던 약 13명의 현지 의료인들이 특히 영향을 받았습니 다. 저는 정중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상처 안에 그들의 검정 왁스( 고약-역자 주)로 채우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그들은 제가 동맥을 묶고 상처를 꿰매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습니다.(1885년 2월 4일 자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 
3. 알렌의 의료 행위
이처럼 조선의 전통적인 의료 방식과 관념에 대해 한편으로는 그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려를 나타냈던 알렌은, 조선인을 어떠한 의료방 식과 관념으로 치료하였을까? 글의 서두에서 언급하였듯 알렌은 조선에 서 양의 근대의학을 도입시키는 데에 큰 공헌을 한 인물이다. ) 조선 최초의 근 대식 정부 병원을 설립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고, 그의 존재가 이를 추진하는 데에 큰 동력이 되었다. 즉 그는 개별적인 치료행위 외에도 조선의 서양 근 대 의학 시스템, 지식, 기술을 수용할 기틀을 마련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 할을 담당하였다. 그렇다면 서양의 근대적 의사로서 그의 구체적, 개별적 의 료행위는 어떠했을까? 
그는 자신에게 찾아온 환자가 불치 환자일 때 무척 슬퍼하였으며, 완치되 기를 바라며 간절히 기도까지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치료할 수 없는 환 자를 보며 안타까워하고, 자신의 극진한 치료를 통해 환자의 회복을 기원하 고 성취해내는 그의 모습은 여느 의사들과 다를 바 없는 숭고한 것이었다.  
이곳에서 우리가 일을 하는 가운데 가장 슬픈 것 중 하나는 우
리에게 계속 오는 많은 수의 불치 환자였는데, 눈병의 상당수가 이 부류에 속했다. 두 눈이 완전히 손상된 남자가 외국인 의사가 그 를 완치시킬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하고 찾아 왔을 때 “우리가 당신 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라고 말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
나는 어제 밤에 다 죽어가는 김판서의 아들을 진료하기 위하여 
불려갔다. 나는 그가 3일간 소변을 보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약 3 시간 진료끝에 드디어 나는 소(小)카테테르(도뇨관)를 통해 소변 을 빼내는 데 성공했다. 나는 몇 방울의 오줌을 빼내었고, 그리고 이에 관련된 약을 조제해 주었다. 나는 그가 오늘을 넘기지 못하고 죽을 것 같아서 아주 정성껏 그를 위해 기도했다. 초조와 불안의 아 침나절을 지난 후 내 기도는 감응을 받아, 정오 경 환자의 형이 내 게 와서 하는 말이 환자는 차도가 좋아져서 소변도 잘 나온다는 것 이다.(1885년 3월 22일자 일기) )
그러나 그는 때로는 조선인 환자들에게 오늘날의 의료윤리에 대한 ‘상식’ 과는 다른 태도를 취하기도 했다는 점 역시 주목을 요한다. 이를테면 그는 일 종의 ‘의료사고’를 낸 뒤에도 환자가 그 사실을 잘 인지하지 못하면 자신의 과 오를 시인하며 사죄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환자들의 무지와 맹목에 편승하는 태도를 취하기도 하였다.
나는 의과 대학에 다닐 때 이 빼는 방법을 배우려고 했다. 그러 나 내가 얻은 유일한 방법은 적합한 집게를 골라 이를 깊게 꼭 집 어 비틀면서 ‘귀중한 생명을 위해 잡아 뽑는’ 것이었다. 하루는 어 떤 사람이 이가 몹시 아프다고 불평을 하면서 찾아 왔다. 그 사람 을 빨리 돌려보내기 위해 아픈 이를 뽑아 버리자고 권했다. 그렇게 권하면 환자들은 곧 가 버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놀랍게도 당장에 동의하는 것이었다. 처방을 수 행하기 위해 나는 능력을 다해 한 번에 이 두 개를 뽑아 버렸다. 그 날 늦게 내가 병원 문을 닫기 전에 그 사람이 온 것을 보고 나는 기 가 꺾이고 말았다. 내가 아무렇지도 않은 이 하나를 썩은 이와 같 이 뽑아 버리고서는 호되게 욕을 먹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 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의 처의 이 몇 개를 뽑아 달라고 처 를 데리고 온 것이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때까지 한국인으로 그 렇게 아프지 않게 한꺼번에 이를 두 개씩이나 뽑는 사람을 보지 못 했다는 것이다. 그 이후로 나는 많은 이를 뽑게 되어 오히려 이 뽑 는 일을 점점 좋아하게 되었다. )
위의 인용문은 알렌이 제대로 된 치과치료 교육을 받은 적이 없어서 한 환 자의 건강한 생니를 뽑아 놓고도 환자가 그 사실을 개의치 않자 오히려 자신 감을 갖고 발치(拔齒)하는 일을 즐기게 되었다는 일화이다. 그는 자신이 했던 의료 실수에 대한 정보를 환자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았으며, 그런 채로 지속했던 의료행위에 대해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다음 인용문은 알렌이 제중원에서 1년간 근무한 뒤 작성한 『조선정부 병원 제1차년도 보고서』의 ‘입원 환자에 대한 기록’에 나오는 구절인데, 여기 에는 특히 눈에 띄는 대목이 있다. 큰 사지 절단 수술은 환자의 거부로 하지 못했고, 그 대신 손가락, 발가락, 그리고 음경을 환자에게 충분한 상의 없이 절단했다는 것이다. 이는 현대의 의료윤리의 관점에서 봤을 때는 쉽게 납득 하기 힘든 일이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수술 후 “환자들은 항상 그 결 과에 만족했다”고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큰 사지 절단 수술을 하지 못한 것을 무척 유감스럽게 생 각한다. 절단이 필요한 환자가 여러 명 왔지만, 다리를 잃을 것이 라는 말을 듣고는 더 이상 듣고 싶어 하지 않아 했다. 죽어서 고통 에서 해방되지 않았다면 아마 아직도 앓고 있을 것이다. 손가락, 발가락 및 음경을 절단한 경우 우리는 환자와 길게 상담하지 않고, 그들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진정으로 알아차리기 전에 절 단했다. 환자들은 항상 그 결과에 만족했다. )
알렌의 1885년 4월 10일자 일기에 따르면, 제중원에서 자신이 환자를 처 음 진료한 첫날 환자 총 20명 중 절단수술을 해야 할 환자가 3명이었으나, 그 들은 모두 절단수술 받기를 거부하였다고 한다. 『효경』에는 “우리의 몸, 머리 카락, 피부 등은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므로, 감히 함부로 훼손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다” )라는 구절이 있다. 또 『소학』에는 “증자가 말하기를 신체는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니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몸으로 행하면서 감히 공 경하지 않을 것인가?” )라는 가르침이 들어있다. 이처럼 전통적인 유교 사회 에서 몸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체(遺體)이기 때문에, 자식은 몸에 대한 도덕적 책임감, 즉 “전신(全身)”의 개념을 효의 근본으로 실천한다. ) 근 500 년간 부모님께 효도하기 위해서는 몸의 털끝 하나 함부로 건드려선 안 된다 고 믿었던 조선인들에게 몸에 칼을 대는 일은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 을 것이다(이영아, 2008: 25-8). 물론 살기 위해서였지만, 때론 신체부위를 절 단하거나 큰 흉터를 남겨야 하는 외과수술을 받는 일은 쉽지 않은 것이었다.
그런데 『조선정부병원 제1차년도 보고서』에서 입원환자 분류표에는 45세 의 남성으로 음경상피종양(epithelioma penis)을 앓고 있던 환자가 음경절단 술(amputation)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음경절단술을 알렌과 헤론 에게서 받고 24일간의 입원기간을 거쳐 ‘good’이라는 치료결과로 퇴원했다. 본 논문에서 이에 대해 현대의 관점으로 윤리적 판단을 내린다는 것은 가능 하지도 않거니와 논점에도 벗어나는 일일 것이다. 중요하고 흥미로운 지점은 그러한 일을 할 수 있었던 알렌의 사유구조이다. 그는 어떻게 그러한 행위를 감행할 수 있었을까? 
4. 알렌의 조선(의학)과 조선인의 몸에 대한 인식
알렌이 기본적으로는 환자를 극진히 치료하고 그것을 통해 서양의학과 기
독교의 힘을 증명하고자 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의 의료행적들에는 몇몇 실수나 과잉진료 등의 흔적도 남아있다. 특히 조 선인의 몸에 대한 관념의 중심을 차지하는 효(孝)의식과 전신(全身) 개념(최 근덕, 1992: 171)에 배치되는 절단술 등의 의료행위도 감행했던 사실들에 대 해서는 보다 면밀한 해석이 필요하다.
1)조선및유교문화권의‘전신(全身)’개념에대한알렌의이해 그가 절단술을 행할 때 조선인에게 있어서 신체의 일부가 잘려나가는 것이 
가지는 치명적인 의미를 의식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겠다.
어떤 사람은 파상풍으로 팔이 엉망이 되었는데도 그것을 절단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었다. 그 중국인 장군은 외 팔이 군인으로서는 아무 쓸모가 없었고 불구의 몸으로 고통을 받 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는 이유로 권하는 수술을 받지 않았다. 앞서 말한 대로 그는 파상풍에 걸려 자기 고집대로 죽고 말았다. )
위의 인용문은 조선 내에서 있었던 청일간의 무력충돌 때 생긴 중국인 부 상환자가 절단술을 거부했던 것에 대한 회고이다. 알렌은 전쟁에서 파상풍 을 입은 환자에게 절단술을 권유했으나 환자는 ‘외팔이 군인’으로 사느니 죽 겠다며 거절했었다는 것이다. 중국인 군인 역시 서양의학의 절단수술에 대한 믿음보다는 자신의 군인으로서의 사명감 혹은 신체의 일부가 잘려나가는 것 에 대한 공포가 더 컸기 때문에 절단수술을 거부했던 것이라 볼 수 있다. 그 런데 그의 이러한 선택에 대해 알렌은 “자기 고집대로 죽고 말았다”며 비판적 인 어조로 서술하고 있다. 
서양의 근대의학은 몸을 하나의 기계로 여기면서 유기체로서의 몸, 하나의 
완결된 몸보다는 각 부분들의 해부학적 기능성을 더 중요시한 것이 사실이 다. 근대에 들어 등장한 실증적인 해부생리학의 지식은 인간을 신체와 정신 으로 구분하고, 실증적인 인체 내부의 관찰을 중시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직 접 ‘관찰’해 보니, 인간의 몸이란 하나의 ‘잘 만들어진 기계’와도 같다는 생각 에 미치게 된다(다비드 르 브르통, 2003: 29). 그리고 이 과정에서 몸은 하나 의 완결되고 유기적인 총체가 아니라, 분할되고 파편화된 부분들로 인식되게 되었다. 이처럼 몸을 계속해서 분할할 수 있는 ‘기계’로 생각한 사상가가 바로 데카르트이다. 신체의 절단이 가능한 이유도 몸이 하나의 기계이자 물질이기 때문이다. 몸은 한꺼번에 하나로서 주어진 총체가 아니라 분해되고 재결합될 수 있는 부분들의 결합체이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 자유롭게 부분을 떼어내거 나 수정, 조작할 수 있다. 이러한 사고에 따르면 몸의 한 부분을 없앤다거나 조금 고친다고 해서 전체의 통일성이 깨진다거나 존재 자체가 바뀌어버리지 는 않는 것이다(김종갑, 2008: 132-6).
이러한 맥락에서 알렌이 환자의 몸의 일부가 잘려 나가는 것이 가지는 (동 양 혹은 조선의) 한 인간 존재에게 있어서의 의미를 간과했을 수 있다. 그러 나 다음과 같은 그의 회고에 따르면 그가 몸의 일부가 사라지는 것이 큰 의미 가 없다고 생각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내가 조선에서 제일 처음 집도한 수술은 호랑이의 공격을 받은 
어떤 조선 사람의 팔을 잘라 내는 꼭 필요한 절단 수술이었다. 팔꿈 치 바로 위에 있는 뼈가 호랑이에게 물려 살이 썩고 있었다. 그러나 상처의 회복이 잘 되어 그의 친구들도 의아할 정도였다. 호랑이의 상처는 의사의 치료로 나을 수 있었지만 그는 (훗날 죽어서-인용 자 주) 그의 팔이 없는 채로 조상들에게 가게 될 것이다. )
그가 처음으로 절단수술을 한 환자가 상처는 회복되었으나 “팔 없는 채로 
조상들에게 가게 되었다”라고 언급한 것은 곧 그것이 조선인 환자에게 얼마 나 큰 타격이라는 사실을 그도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나을 수 있었지 만’, 즉 ‘생명은 건졌지만’ 팔을 잃는 ‘장애’가 생긴 것이며, 전통적인 유교윤리 를 따르는 조선인의 입장에선 그것이 조상에게 엄청난 불효를 저지르는 일임 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 그가 신체의 절단이 조선인 개인의 삶에 아무런 지 장도 끼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단, 앞서 인용한 『조선정부병원 제1차년도 보고서』의 ‘입원 환자에 대한 기 록’에서 ‘큰 사지 절단’은 할 수 없었으나, ‘손가락, 발가락, 음경’의 절단 수술 을 환자의 동의 없이 행했다고 말한 사실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즉 그가 ‘ 큰 사지’에 대비되는 ‘신체의 작은 일부’로서 손가락, 발가락과 음경을 동위에 놓는 신체관을 가지고 있었다고도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볼 경우, 그가 조선인들에게 단발(斷髮)을 요구하였듯,30) 신체의 부위에 따라 훼손되 어도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이 있다고 여겼고, 손가락, 발가락, 음경 등은 전자 에 속한다고 여겼던 것이라 판단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알렌의 의료행위들을 모두 해명할 수는 없다. 절단술
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큰 사지 절단 수술을 하지 못한 것을 무척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하고, 비록 신체의 ‘작은 부분’이나마 환자에게 충 분한 설명을 하거나 동의를 구하지 않은 채 절단수술을 감행할 때에는 이 수 술방법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즉 ‘성공’에 대한 확 신이 없다면, 그러한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수술을 했을 리 없는 것이다. 그 런데 사실 알렌은 의과대학을 나왔으나 1년제를 졸업하였기 때문에(민경배, 
1991: 82) 일기나 선교본부의 엘린우드(F. F. Ellinwood)에게 보내는 편지에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30)  “조선어 교사가 오늘 오후에 나의 한문본 성서를 빌렸을 때 … 성서를 읽으려면 먼저 상투 를 자르라고 경고했더니 그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마침내 상투를 자르는 모험을 강행했다. 성서가 그로 하여금 단발의 결심을 굳히게 했던 것이다.”(1885년 1월 29 일자 일기)
서 자신의 의학에 대해 자신감 없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제중원이 설 립된 뒤 스크랜턴이나 헤론이 제중원 진료를 도와주길 바랐던 이유도 그 때 문이었을 것이다.
박사님이 나중에 저를 다시 조선으로 파송하게 된다면, 저는 외 과분야에서 졸업 후 과정을 밟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 저 는 조선에 오기 전에 경험이 전혀 없었고, 순전히 독학으로 공부했 기 때문에 이 제중원과 같이 전국적인 영향력이 있는 병원에서 시 술해야 할 큰 수술을 다룰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일을 회피하고 있습니다.(1887년 1 월 3일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 )
스스로 고백하고 우려하였듯, 알렌은 외과분야에 대한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 순전히 독학으로 공부(self-taught)하였기 때문에 오히 려 큰 수술은 ‘회피하고’ 있는 정도였다. 
2)알렌의서양의학및외과수술에대한확신 그럼에도 그가 환자를 대상으로 과감한 절단 수술을 감행할 수 있었던 것 은 이것이 19세기, 즉 서양의 근대의학이 ‘과학성’, ‘객관성’으로 이해되고, 이 러한 서양 근대의학의 새로운 ‘성격’에 외과수술이 가장 크게 기여를 했던 시 대였기 때문이었다.
묄렌도로프 집에 당도해 보니 환자가 이미 출혈이 심했고 계속 
피를 흘리고 있어서 심각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는 나의 과감한 치 료방식에 크게 반대하는 14명의 조선인 의사들에게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1884년 12월 5일자 일기) )
제가 몇 차례에 걸쳐 수술을 한 것이 이곳 사람들에게 좋은 인
상을 주었습니다. 제가 처음 부름 받고 왕자(민영익)를 치료할 때 그 자리에 있었던 약 13명의 현지 의료인들이 특히 영향을 받았습 니다. 저는 정중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상처 안에 그들의 검정 왁스 (고약-역자 주)로 채우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그들은 제가 동맥을 묶고 상처를 꿰매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습니다. 그들은 병원 계획 에 관심을 갖고 병원에 수용이 되는 숫자만큼 와서 교육을 받으려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 민영익은 저에게 이렇게 말 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당신이 위대한 의사라고 생각합니
다. 그들은 당신이 미국에서 왔다는 것을 믿지 않으려 하죠. 이번 일을 통해서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1885년 2 월 4일자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33)
꽤 많은 한의사가 병원을 이용했는데, 모두 치료 결과에 만족 해하는 것 같았다. 그중 몇 명은 서양의술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
했다.34)
알렌의 서양의학에 대한 자부심은 그가 갑신정변 당시 자상을 입은 민영익 을 치료하면서부터 확보된 것이었다. 민영익을 살려 낸 ‘외과수술’이라는 새 로운 의료방식은 조선 사람들로서는 매우 경이적인 것이었다. 알렌은 “피가 흐르고 있는 측두골 동맥을 관자놀이로 이어 명주실로 봉합하였고, 귀 뒤 연 골과 목 부분, 그리고 척추도 모두 봉합”했으며, “팔꿈치에서 팔뚝까지 약 8인 치의 깊은 상처도 명주실로 네 바늘 꿰매었다.” 이것은 조선에는 없는 치료법 이었다. 이 수술로 민영익이 회복되자 조선인들은 알렌을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이라고 여길 정도였다. 
 
measures”이다. 따라서 위와 같은 번역이 더 적절하나, 김원모의 번역본에는 “이곳에 치료 하기 위하여 모인 조선인 의사들은 나의 뛰어난 치료 솜씨를 기다리고 있었다”라고 오역을 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여인석, 「한말과 일제시기 선교의사들의 전통의학 인식과 연 구」, 『의사학』 16-2, 2007에서도 지적된 바 있다.
33) H. N. 알렌 저, 김인수 역, 『알렌의 선교 외교편지(1884-1905)』 (서울: 장로회 신학대학교 부 설 한국교회사연구원, 2007) 38-9쪽.
34) H. N. Allen and J. W. Heron, First Annual Report of the Korean Government Hospital (Seoul, 1886), pp.7-8.
오늘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약간의 생리학 지식을 민영익에게 설 명함으로써 그의 관심을 끌었다. … 그는 인체해부도를 보고는 경 탄의 소리를 연발하면서, 이들 기관이 인체 내의 어떤 부위인가를 확실히 알고 싶다고 했다. 나는 외국의 의사들은 적어도 세 사람 의 죽은 시체를 직접 해부실험을 거친 후에라야 개업의의 면허를 받게 되며, 내 자신도 이러한 과정을 거쳤다고 그에게 이야기하자, 그는 생리학 책을 털썩 떨어뜨리고는 마치 내 눈에서 망령이 기어 나오지 않나 해서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는 게 아닌가. 그는 인체 내부에 생긴 혹을 어떻게 치료하는가에 대해 물었다. 이에 나는 물 통 크기의 복부종양도 제거 수술할 수 있으며 심지어 인공항문을 만들어 끼어줌으로써 장의 수축을 없앨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같 은 문답은 그에게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그 관심은 너무나 심대해 서 … (1885년 2월 21일자 일기) )
위 인용문에서 민영익에게 자신이 인체를 해부해서 본 경험이 있다는 사
실, 그리고 그 경험이 있어야만 의사 면허를 획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알렌의 모습에서 서양의 근대 의학교육 체계에 대한 자부심이 엿보인다. 또 한 서양의사들은 종양 제거, 인공항문 조성 등의 외과수술이 가능하다는 이 야기를 통해 알렌은 서양의학기술의 우월성을 확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알렌 등 서양의사들이 자신들의 의학에 대해 이와 같은 자부심을 가
질 수 있었던 것은 해부학과 외과수술 방식 때문이었다. 알렌은 자기 개인의 의사로서의 숙련도나 지식보다 서양 근대의학의 특성 자체에 대한 신뢰를 바 탕으로 이러한 수술을 감행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당대 서양 근대 의학의 자기 확신은 압도적인 힘이 있었다. 
미셸 푸코가 말한 바와 같이 19세기 중엽 이후 서양에서는 외과 수술이 의 학의 객관성과 과학성을 대표하게 되었다. 질병의 내적/외적 원인을 밝히려 는 의학적 지식은, ‘객관성’이라는 이름 아래 질병의 원인에 대한 ‘실증적 시 선’을 요구하게 되었고, 질병은 인간 몸과 의학적 시선이 마주치는 곳으로 끌 려나와 재편성되기 시작하였다(미셸 푸코, 2006: 32-3). 질병은, 해부대 위에 서, 현미경 속에서, 인간 몸의 안팎에 자리잡는 것으로 공간화되기 시작했으 며, 의학적 지식으로 분류되고 정복될 수 있는 물질적 대상으로 사물화, 실체 화되기 시작한 것이다(김윤성, 1994: 19). 서양의 근대의학은 질병을 ‘보고’ ‘ 말하려’ 했고(병리학), 이를 통해 기왕에 존재해 온 ‘보임’과 ‘보이지 않음’을 나누던 지식의 경계가 변화했다. 이 과정에서 인간의 몸의 내부를 들여다보 기 위한 기술(해부학)이 발달하고, 정교한 수술 솜씨를 갖추게 되면서 서양의 학이 ‘과학적’이라고 믿게 되었다. 이것이 근대의학이 말하는 객관성이다. 외 과수술과 같은 구체적 행위만이 객관성을 보증할 수 있다는 생각이 만연하고, 의학적 시선은 객관성이라는 조건 안에서 형성되는 진리를 담는 저장고이자 명증성의 근원이 되었다(미셸 푸코, 2006: 17-9).
3)알렌의조선인의몸에대한‘오리엔탈리즘’적시선 그런데 이처럼 서양의학이 그 가치와 우월성을 인정받을수록 서양의 근대 의학 지식을 지닌 알렌과 조선인 환자 사이에는 수직적인 관계가 성립될 수밖 에 없다. 지식은 곧 권력이기 때문이다(콜린고든, 1995). 자신들의 치료법을 아직 모르는 조선인들과 이를 익힌 서양인 의사는 권력관계에 있어서 평등할 수가 없었다. 나아가 이러한 수직적 관계는 그가 조선을 미개한 나라로, 조선 인을 무지한 존재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알렌은 특히 조선인의 몸과 위생에 대해서는 인색한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조선인들은 굉장히 게으르고 더럽습니다. 중상류층이 흰 도포 와 큰 챙이 있는 작업모를 쓰고 여유 있게 활보하는 것을 보면 그 들이 깨끗하다고 생각하겠지만 말입니다. 조선인들은 할 수만 있 다면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해서 그들이 일을 끝마칠 때까지 계속 일 을 하도록 시키자면 이곳 외국인들이 보통 애를 먹는 게 아닙니다. 그들은 조선산 막걸리에 취해 있고 외국 술도 매우 좋아해서 20% 의 관세에도 아랑곳없이 많은 양의 술이 조선에 들어와 있습니
다.(1884년 10월 1일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 )
이곳은 인건비는 싸지만 일꾼들이 매우 느리기 때문에 비용이 많이 듭니다. 이 사람들은 여자의 일을 하는 데 훈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인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다른 외국인들은 급사들을 고용해 식탁 시중을 들게 했는데 그들이 차차 하인 역할을 하게 될 겁니다. 그들은 너무나 더럽고 게으르고 확실한 도둑들이라 결코 큰 기대는 할 수 없겠지만 말입니다.(1884년 10월 8일 엘린우드에 게 보낸 편지) )
그들의 몸에서 계속 고리타분한 똥냄새가 풍기고 있었고, 그들
은 선실에서 끊임없이 줄담배를 피우고 있어서, 이 담배냄새에다, 목욕하지 않은 고린 체취, 똥냄새, 오줌 지린 내, 고약한 냄새가 나 는 조선 음식 등이 뒤섞여 온통 선실 안은 악취로 가득했다.(1887 년 12월 26일 일기) )
위와 같이 알렌은 조선인은 더럽고 게으르며 행동이 느리고 무절제한 생 활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이드(Edward W. Said)의 ‘오리 엔탈리즘’론에 따르면 서양은 자신들 이외 지역(특히 동양)을 ‘여성적=감성 적=수동적’인 존재로 여겨왔으며, 이와 동시에 ‘미개척지=야만적=정체적’인 문명으로 간주해왔다(에드워드 W. 사이드, 2000). 그는 푸코의 ‘지식/권력의 연계관계’의 개념틀을 차용하여, 서구 제국주의의 지배 담론을 통하여 구성된 오리엔탈리즘의 허상을 폭로하고, 이러한 담론 뒤편에 도사리고 있는 권력의 지를 파헤치려고 하였는데, 육체/정신, 여성/남성, 처녀지/개발, 빈곤/자본, 야만/문명 등의 이분법적 대비를 통하여 타자와 나를 구분 짓는 일은 오리엔 탈리즘적 사고의 변종이라고 하였다(이승환, 2004: 21). 4)당대몸에대한‘오리엔탈리즘’적시선의보편성
알렌 뿐 아니라 언더우드(H.G. Underwood), 게일(J.S. Gale), 비숍(I.B. Bishop), 에비슨(O.R. Avison) 등 조선을 방문한 대다수의 선교사들이 알 렌과 비슷한 언급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 그것이 조선인들의 실제 모습 일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가 조선을 낙후된, 미개한 국가라고 생각하 는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알렌 개인만의 문제는 아니 었다. 이처럼 미개한 인종을 동일한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차등을 두어 대하 려 한 태도는 알렌뿐 아니라 문명화된 국가에서 온 대부분의 서양인들, 심지 어는 서양인들의 눈에 ‘비문명국’일 뿐인 조선의 지식인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조선 사람들은 청결의 문제에서는 많은 비난을 받을 것이다. 한 
영국인은 조선에서는 가장 깨끗하다는 사람이 그가 본 가장 더러 운 사람이었다는 말을 하였다. 그가 뜻하고자 한 것은 조선 사람들 이 지구상에서 가장 더러운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
미국인은 제아무리 게으름을 피우게 되더라도 노동은 고귀하다 는 것을 뼛속 깊이 느끼고 있다. … 그러나 조선에서는 그와 정반 대되는 견해가 존재하고 있다. … 일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런 양심 의 가책을 받지 않는다. )
평균 이상의 신장과 힘든 일에 견딜 수 있는 튼튼한 체력을 지닌 한국인들은 우수한 종족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정신면으로 시선을 돌리면 우리는 다른 면을 보게 된다. 우수한 체력에 비해 정신력은 그에 못 미치는데, 그들은 분명 최상의 자질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마치 너울처럼 심한 무기력증에 빠져 있다. 동방인 몽고계와 남방 인들의 교접에 의해 생겨난 탓으로 한국 민족 또한 너무나 다른 두 개체간의 잡종 혈통에 가해지는 조기 절멸의 생물학적 법칙의 가 혹한 운명을 피할 길이 없는 것 같다. 육체적으로는 아닐지 모르나 지금 한국인들은 정신적으로 쇠잔한 상태이다. )
사람으로 생겨나기는 다 마찬가지언마는 현금 지구상 인류간에
는 온갖점에 비상한 층등이 잇슴을 보겟도다. 구주각국의 인류가 긔 만 더할수업는 인지와 천혜의 결과로 「문명」이라는 맛조흔 술에 취흥이 잠잠하야 좁은 세계를 넓게 헵쓸고 단이는가하면 아 불리가 아미리가내지며 남양군도의 토인중에는 우리가 수백년 좀 더드리켜 수천년이전에 경험이 잇는 극히 유치(幼稺)한 극히 참혹 한 금수나 얼마틀리지안이한 상태가 지금 지도 온젼히 남어 잇 스니43)
조선인들은 『독립신문』의 1899년 2월 23일자 논설에서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등을 문명국으로, 일본, 이탈리아, 러시아 등을 개화국으로, 중국, 페르 시아, 터키와 함께 조선 스스로를 반개화국으로,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일대 를 야만국으로 구분하였다(박승희, 2008: 77). ‘반개화국’의 국민인 조선인들 은 위의 글에서와 같이 인간에게 종족, 인종 등에 따라 ‘층등’이 있다는 점을 인정했으며 아프리카, 아메리카, 남양군도, 호주 등의 ‘야만인’들은 ‘금수(禽獸)’와 다르지 않다고 여겼다. 그만큼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오리엔탈리즘 이나 인종주의는 단순히 서양만의 인식 태도라기보다는 심지어 동양인들에 게까지 내면화되었던 세계의 사상적 조류였다고 할 수 있다(이영아, 2010a). 따라서 동양을 방문한 미국의 선교의사인 알렌 역시 이러한 사유틀로부터 자 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생각이 의료행위를 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데에 있 을 것이다. 문명화되지 않았다는 것이 곧 그들의 생명이나 몸이 문명국 사람 의 그것보다 하찮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음에도 제국주의 시대의 선교사 알렌 은 그 사실을 종종 간과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의료행위를 하는 데 있 어서 미개한 동양인에게 시혜를 베풀러 온 문명화된 서양인의 오리엔탈리즘 적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사고에 의해 알렌은 자신들보다 ‘낮은’ 등급 인 조선인 환자의 몸을 대할 때 과감하고 위험한 치료마저도 감행하였던 것 이라 판단된다.
5)알렌의선교사업외의성취욕망-보론
마지막으로, 알렌이 선교사로서가 아닌 정치가, 외교가, 사업가로서 가졌 던 야망도 그의 행적을 설명하는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다. 알렌은 1887년 한 국의 외교관리로서 주미 한국공사관 서기관으로 임명되어 제중원을 떠난다. 1889년 9월 알렌은 다시 한국 선교사로 나왔으나, 1890년 7, 8월경 주한 미국 공사관 서기관이 되면서 선교사직은 사임하였다. ) 한국 최초의 외국인 선교 사 알렌은 한국 사정에 밝았기 때문에 세관이나 미국 회사에서 함께 일하자 는 제의를 계속 받고 있었다. 1885년 7월 19일자 편지에 의하면, 묄렌도르프 는 그에게 세관병원 설립과 좋은 집과 연봉 5000달러를 제의했다. 1886년 5월 
13일자에도 미국 무역회사로부터 좋은 직위를 제의받았다. ) 그런데 사실 당시미국 선교사들에게는 조선의 정치문제에 개입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주재국 국내 문제에 전혀 개입하지 않는 것이 본국 정부 에 대한 국민의 의무로 되어 있다. … 정치적 문제에 개입하는 일도 없어야 한 다”는 것이 당시 주한미국 공사로부터 선교사들에게 내려온 지침이었다(백낙 준, 1979: 255). 선교사들도 당시 미국 신학계의 주류였던 경건주의ㆍ복음주 의적 신학교육을 받았고, ‘사회부재의 영혼구제, 정치무관의 정숙주의’를 노 선으로 삼았다(조영렬, 1990: 4).
그런데 알렌은 조선 정부의 사업과 정치에 매우 깊숙하게 연관을 맺고 있 었다. 그는 자신의 일기 서두에 “본 일기에는 공식적이고도 정치적인 성격을 띤 내용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고 스스로 밝히고 있듯, 알렌의 조선에서의 생활은 공식적, 정치적인 것이 많았다. 예를 들면, 1884년 12월 26일 일기에 는 갑신정변의 전개과정, 당시 발표된 황제의 포고령, 정변 직후의 내각 개편 등에 대해, ) 1885년 2월 16일자 일기는 조선 정부의 권력구조에 대해48) 매 우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또한 앞서 언급한 바, 그가 일기를 통해 조선 정 부나 외국 공사의 세관, 미국의 회사 등으로부터 받고 있는 여러 제의들을 기 록해 둔 것도 그만큼 그가 선교사직 외의 사업이나 관직 등에 관심이 컸음을 의미한다. 
그가 헤론이나 스크랜턴 등과 불화를 겪은 것도 그의 이와 같은 외부 활동 과 연관이 있다. 알렌은 자신의 일기와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스크랜 턴이나 헤론에 대한 험담, 혹은 그들과의 불화에 대해 자주 언급하고 있다. 알 렌의 입장에서 서술된 것이기 때문에 객관성을 띠기는 어려우나 그 갈등의 주 된 양상이 선교행위에 대한 ‘진정성’, ‘순수성’과 관련된 문제였던 것으로 판단 된다. 예를 들어, 1885년 6월 28일자 일기에서 알렌은 “스크랜턴은 심술궂은 인간이고 병원 일을 너무나 소홀히 했기 때문에 나는 그가 병원사업에 적임자 가 아니라고 판단, 그 대신 다른 사람을 임명해줄 것을 요청했던 것이다”라고 말하고, 1885년 9월 1일 일기에서는 “우리는 헤론 박사와 아주 놀랄만하고도 짜증나는 의견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다. … 이러한 감정적 대립은 헤론의 가 장 완고한 행동을 촉발시키고 말았다. 이로 인해 나는 드디어 선교부를 떠나 겠다고 사임 의사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 헤론부인은 이 기회를 놓칠세 라, 내가 선교사업을 맡을 적임자가 아니라고 비난하면서, 다만 이를 선교부 사임의 구실로 이용, 돈벌이에 나서려 한다고 통박했다. 이같은 모욕적인 발 언은 정말로 그리고 당연히 나를 격분시켰고. … 이리하여 나는 마침내 뉴욕 의 선교본부에 부산에서 새 선교사업을 개척해 보겠으니 부산 전근을 요청했 다.”라고 적고 있다. 이러한 부분들은 선교사업을 하는 과정에서 알렌의 행위 들이 동료 선교의사들 사이에서도 문제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음을 시사한다.
이처럼 선교사 외의 외부적인 사업들에 관심을 둔 그의 행동이나 생각은 
그의 강한 ‘인정욕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중국에서의 생활에 적 응하지 못한 알렌은 조선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호감을 가지고 있었는데(민 경배, 1991: 93) 그가 중국에 비해 조선을 좋아한 이유가 다음과 같은 부분에 서 드러난다.
조선 사람들은 매우 친절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한국에서 받은 환영에 매우 기뻤다. 우리가 중국에서 사는 동안 그들은 외국 사람 들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 그 반대로 조선에서는 외국인 들이 양반과 마찬가지로 존경을 받았다. 중국에서는 우리를 감시 할 개를 배치하곤 했지만, 조선에서는 개가 뛰어나와 우리에게 짖 으면 반드시 개를 꾸짖고 짖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어떤 때 혹 시 군중 속에 휩쓸리게 되어도 떠민다든지 거칠게 대하지 않고 반 드시 지나갈 통로를 비켜주곤 한다. )
즉 조선 사람들이 자신들을 ‘환영’해 주었고, ‘존경’해주었다는 점이 그로 하여금 조선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갖게 만들었으며, 조선과 깊은 인연을 맺을 결심을 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는 알렌의 ‘인정 욕망’의 한 모습을 보여주 는 예이다. 알렌은 사람들에게 환영받고 인정과 존경을 받는 것에서 자신의 성취동기를 찾는 성격이었던 것이다. 앞서 인용한 민영익과 관련된 일기들 에서도 항상 그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조선인들이 어떻게 놀라고, 감탄하였 는가에 대한 서술을 빼놓지 않고 있다. ) 덧붙여 다음과 같은 그의 생각은 그 가 의사로서보다 제중원의 설립과 운영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 여주는 예이다. 
 
특수한 사례 한 가지를 언급한다. 증례 1은 첫 번째 입원환자이 자 최초의 수술환자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위험한 경우였다. 훈 련받지 않은 조수들에 의해 클로로포름 마취가 행해져야 했으며, 그래서 생긴 나쁜 결과는 새로 세워진 병원에 타격을 줄 수 있었 기 때문이다.51)
『조선정부병원 제1차년도 보고서』에 적힌 위의 수술은 다행히 사고 없이 성 공했고, 환자는 빠르게 회복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럼에도 “훈련받지 않 은 조수”들이 마취를 했다는 것은 의료사고 위험성이 높았음을 의미한다. 충 분한 임상 훈련이 되지 않은 자들에 의해 마취를 행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 이다. 알렌 역시 ‘그것은 위험한 경우였다’고 서술하였듯 이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다음 구절, “그래서 생긴 나쁜 결과는 새로 세워진 병원에 타격을 줄 수 있었기 때문”에 위험했다는 것은 그의 관심이 어디에 먼 저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즉, 알렌이 일차적으로 걱정한 것은 ‘환자의 생명’이 아니라 ‘병원의 존립’이었던 것이다. 
그가 병원 설립 사업이 더뎌지자 “나는 하루 속히 병원 건물이 마련되길 바 라는 마음에 병원 건물이 준공될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말하면서, 매일 찾아 오는 환자들을 돌려보냈다”(1885년 3월 18일 일기)는 것도 그의 그러한 의중
 
관이 인체 내의 어떤 부위인가를 확실히 알고 싶다고 했다. 나는 외국의 의사들은 적어도 세 사람의 죽은 시체를 직접 해부실험을 거친 후에라야 개업의의 면허를 받게 되며, 내 자 신도 이러한 과정을 거쳤다고 그에게 이야기하자, 그는 생리학 책을 털썩 떨어뜨리고는 마 치 내 눈에서 망령이 기어 나오지 않나 해서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는 게 아닌가.”(1885년 2월 21일자 일기); “오늘 아침 민영익은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당 신이 위대한 의사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당신이 미국에서 왔다는 것을 믿지 않으려 하 죠. 이번 일을 통해서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1885년 2월 4일자 엘린 우드에게 보낸 편지) 등.  
51)  H. N. Allen and J. W. Heron, First Annual Report of the Korean Government Hospital (Seoul, 1886), pp.30-1; H. N. 알렌 저, 신복룡 역, 『조선견문기』 (서울: 집문당, 1999), 182 쪽.
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그는 병원의 설립이라는 가시적 성과를 위해 조선인 환자들의 건강상태에 대한 걱정은 부차적인 문제로 취급했다. 
결국 그는 길지 않은 선교의료 활동을 마친 뒤 미국과 조선 사이에서 경 제ㆍ외교적 이권을 획득하는 데에 더 열중했다. 그만큼 알렌은 권력 지향적 이고 상승욕망이 강한 야심가였다. 그런 그에게 조선인을 치료하는 일은 조선 정부와 친분을 쌓고, 병원을 설립하고, 조선과 미국 간의 외교 관계 수립의 주 도세력이 되는 등의 자신의 야망을 위한 한 ‘과정’이었을 수도 있다.
5. 결론
 본 논문에서는 알렌이 조선에 입국하여 초기 제중원 등에서 의료 활동을 
했던 1884~1887년을 중심으로 그가 남긴 일기, 편지, 그리고 정부병원 보고 서, 회고록 등을 살펴보았다. 알렌은 조선에 서양의 근대문명이 수용될 수 있 는 기틀을 마련한 인물이다. 그는 조선 정부가 근대식 병원을 설립하는 데에 많은 동력을 제공하였고, 선교사들의 입국과 정착 등을 도우면서 조선에 기독 교가 수용될 수 있도록 하는 데에도 큰 기여를 하였다. 또한 제중원 설립 후 1 년 동안 그는 헤론 등의 의료진과 함께 1만460명의 환자를 진료하였다. 뿐만 아니라 1900년대 초 세브란스 병원이 설립될 때에도 그는 주한 미국공사 자 격으로 미국선교부 측과 한국정부 사이에서 조율하는 데에 많은 역할을 담당 했다. 따라서 그가 개화기 한국 사회에 끼친 영향은 적지 않으며 한국 개화기 의 역사에 있어 중요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그의 의사로서의 태도에 있어서는 그를 무조건적으로 옹호하기 힘 든 부분들이 존재한다. 그는 사실 충분히 숙련된 의학기술을 지닌 의사가 아 니었다. 단지 1년의 약식 교육과정을 마쳤을 뿐 제대로 된 임상 수술 경험도 없는 초보적인 의사였다. 그럼에도 그는 의료행위를 행할 때 거침이 없었다. 그는 조선인의 손가락, 발가락, 음경 등에 대한 신체 절단술을 행하면서 환자 에게 충분히 설명하는 과정이나 동의를 구하는 절차를 생략해 버렸다. 그리고 생니를 뽑는 등의 의료적 과실을 저질렀을 때에도 이를 은폐했다.
그의 이러한 행적들에 대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는 서양근대의학의 
객관성, 과학성이라는 권위에 대한 알렌의 굳건한 믿음에 일차적으로 근거하 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알렌에게는 19세기 중엽 이후 해부학, 외과수술 등에 의해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 서양근대의학의 지식과 기술, 그리고 시스템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비록 개별 의사로서 본인의 의술에 대한 확신은 부족 했지만, 집합적 의미의 ‘서양의사’로서의 조선의 전통 의학에 대한 우월감은 강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의사-환자 사이의 관계를 수직적인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이것은 더 근본적으로는 조선의 전통 의학뿐 아니라 조선인 전체에 
대한 우월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불결하고 무지하며 게으른’ 조선인들 에게 한편으로는 동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비하하는 태도를 보였다. 대부 분의 비서구지역을 방문한 서양인들이 지닌 오리엔탈리즘적 태도를 알렌 역 시 견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의사-환자로서뿐 아니라 서구인-비서구 인, 혹은 문명인-야만인으로서의 수직적 관계에 대해서도 당연하게 여겼다. 때문에 그는 조선인 환자들에게는 의사로서 친절하고 정직한 태도를 취해야 할 필요성을 그다지 강하게 느끼지 못했다. 문명인으로서 야만인들에게 ‘시 혜’를 베푼다는 입장에서, 의학지식 독점자로서의 권력을 행사할 뿐이었다.  
더불어 알렌은 사실상 선교사ㆍ의사로서의 활동기간보다 정치가ㆍ외교관 으로서의 활동기간이 훨씬 더 길었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그는 길지 않 은 선교의료 활동을 마친 뒤 미국과 조선 사이에서 경제ㆍ외교적 이권을 획 득하는 데에 더 열중했던 권력지향적이고 상승욕망이 강한 야심가였다. 그런 그에게 조선인을 치료하는 일은 조선 정부와 친분을 쌓고, 병원을 설립하고, 조선과 미국 간의 외교 관계 수립의 주도세력이 되는 등의 자신의 야망을 위 한 한 ‘과정’의 의미가 더 강했던 듯하다. 그래서 숙련되지 않은 조수들에게 마취를 맡겨 ‘위험’한 경우에 처했을 때에도 환자의 생명보다 병원에 대한 존 립을 먼저 걱정했고, 조선 정부에게 병원 설립의 재촉을 요구하며 진료를 거 부하기도 했다. 알렌에게 있어서 의료행위는 자신의 사회적, 정치적 목표를 위한 수단의 의미가 더 강했던 것이 아닐까 한다. 
색인어: 알렌, 선교의사, 의료 활동, 신체인식, 개화기, 조선, 오리엔탈리 즘, 서양근대의학
투고일 2011. 11. 1.         심사일 2011. 11. 3.       게재확정일 2011. 1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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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StudyonHoraceN.Allen'sMedicine andRecognitionofKoreanBody
LEE Young Ah*


Je Jung Won(濟衆院) was the first modern-style Government hospital built by the Korean King Ko-Jong(高宗) in April 1885, and it was the medical missionary Horace Newton Allen(1858~1932) who made one of the greatest contributions to the establishment of the hospital. 
Allen was an American missionary. He graduated from Ohio Wesleyan University with a degree in theology in 1881, and completed one-yearcourse at Miami Medical College. In Korea and America he worked as a physician, a missionary, an American diplomatic minister to Korea and a Korean minister's secretary to America. While acting as a mediator between Korea and America, he knew and recorded the domestic and foreign situation of Korea during Gaehwagi(開化期 : the civilized and enlightened age). Thus to study him is to understand Korea's Gaehwagi as well as to research American medical missionaries.
During his stay in Korea(1884~1905), Allen steadily wrote diaries and letters about Korean politics, diplomacy, society, culture, and medicine. Thus his public/private record through diaries and letters(the quantity of these materials amounts to several thousands) supplements the Korean 
 
*  Bangmok College of General studies in Myongji Univ., Namgajwa 2-dong, Seodaemungu, Seoul, Korea, (120-728) 
Tel: 82-2-300-0878 / E-mail: coolya112@naver.com
early modern era's historical record. However, until now these materials have received little scholarly attention from researchers except for a few historians of missionary work between Korea and America, or of Korean modern medicine. I intended to use these materials to suggest a new perspective on the study of Korean Gaehwagi.
Allen, along with John W. Heron, who came to Seoul on June 21st 1885, treated about 10,460 Korean patients in the first year of the opening of JeJungWon. They made "the first annual report of the Korean Government Hospital". This report explained how Allen and Heron regarded and treated Korean patients.
Allen's diaries, letters and other writings offer a realistic view of how the western people actually recognized the Korean people at that time. As a western doctor, Allen had an ambivalent attitude toward Korean medical concepts and systems. On the one hand, he thought that medical idea, some food and drug of Korean is valuable.
He said that the native Korea faculty had some good ideas with regards to treatment. And he held Korean rice, ginseng, and so on in high regard. However, he did not rate Korean acupuncture and Korean traditional ointment at all.
In addition, he sometimes cured Korean patients dangerously and with imprudence. The amputation of patients' body, no matter how little, must ask the permission of the patients themselves. Especially, the sense of Korean filial duty(孝) couldn't accept amputation of body at those times. The artificial change of body meant to hurt parents' body, because at those times Korean people thought that my body was my parent's possession. But Allen did it without enough explanation or persuasion. Moreover he didn't feel guilty for the behavior at all. Besides, he seemed to be proud of it in the above mention. Such careless or unethical behavior cannot be excused. 
On the other hand, he had made mistakes in treatment according to his record. He pulled out some healthy teeth of patients who had a bad toothache. But he didn't explain nor apologize the mistake. Besides, he refused treatment of patients until the hospital would be opened in order to push Korean government to prepare hospital quickly.
Why or how did he do that? The first answer available to the question, he might be so confident of his medical knowledge and skill that he didn't feel the need to ask the patients' thought and will. However, as stated above, his medical study was just one year. And he worried about his inexperience of surgery.
Thus the first assumption seems to be false. He wasn't confident of his medical knowledge. The fact that nevertheless Allen treated Korean patients at his will, is still blamable. 
The second assumption is that he regarded western modern medicine as the only correct and proper approach. He didn't have many experiences, but his west modern medicine made him proud of its achievement. After middle 19th century of modern times, Micheal Foucault said at The Birth of Clinics, western modern medicine believed itself scientific on the ground that west modern medicine could have pathology and surgery. Allen might also trust the scientific ability of western modern medicine. So he might think that he didn't need to explain 'modern and scientific' medicine of West to people in 'premodern and non-scientific' medicine of Korea. 
The third answer is his 'Orientalism'. He thought that Koreans were dirty, lazy, and barbarous and, therefore, he made a clear distinction between Caucasian and Korean. He set his affection on 'Cho-Seon(朝鮮)' and made efforts to cure Korean patients and establish the first western Government hospital in Korea. However he, as a westerner, could not free himself from ‘Orientalism’ and ‘Imperialism’. Thus, he might ride so roughshod Korean patients. 
In fact the ‘Orientalism’ was not only Allen’s thought. Many western visitors thought Korean as an ‘Orient’. The West regarded themselves as civilized and the East as uncivilized or barbarous, therefore the West thought that the East should be modernized with the help of the West. This thought rationalized their imperialism and colonialism toward the East. 
In addition, he seemed to have some ambition in politics and diplomatics. He wanted to be a high-ranking official, so his goal of his life was political or economical power rather than medical missionary.
Keywords :  Horace N. Allen, medicine, missionary, body, Cho-Seon(朝鮮: Korea), Gaehwagi(開化期 : about the year 1876-1910, that is the civilized and enlightened age), Orientalism, western modern medicine
 

한국학중앙연구원, 구한말 선교사 알렌이 남긴 문서 3천 8백여건 대공개 - 교수신문



한국학중앙연구원, 구한말 선교사 알렌이 남긴 문서 3천 8백여건 대공개 - 교수신문

한국학중앙연구원, 구한말 선교사 알렌이 남긴 문서 3천 8백여건 대공개

이승주
승인 2021.08.10

- 1884년부터 21년간 조선에서 활동한 미국인 알렌이 남긴 방대하고 세세한 자료
- 세로로 쌓았을 경우 2.7m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분량 3,869건, DB화 및 공개
- 동시대 서양인이 남긴 자료 중 가장 우수한 컬렉션, 한국 근대사 사료로 중요도 高
- 건양대 김현숙 교수 연구팀에 3년간 연구비 지원한 한국학진흥사업의 결실
- 한국학진흥사업 성과포털 누리집 통해 누구나 무료로 자료 열람 가능

한국학중앙연구원(원장 안병우)은 구한말 선교사 알렌(Horace N. Allen, 1858~1932)이 조선에서 활동하면서 기록한 3,869여건의 문서를 DB로 구축하여 연구자 및 일반국민에게 공개한다고 밝혔다.
이 자료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이 건양대학교 김현숙 교수 연구팀에 3년간 연구비를 지원하여 정리한 것으로, 의료 선교사로 알려진 알렌의 활동이 의료분야를 넘어 문학, 경제, 외교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이루어졌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알렌(Horace N. Allen, 1858~1932)

미국인 의료 선교사 알렌은 개항 초기인 1884년 9월부터 1905년 6월 까지 약 21년 간 조선에 체류했다. 그는 조선에서 의사, 선교사, 경제인, 외교관, 정부 고용인, 고종의 참모, 번역가, 작가 등 여러 직업을 섭렵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다양한 분야에 관여하였다. 이때 생성된 다수의 문서들을 ‘알렌 문서’라고 부른다.

알렌 문서 생산자인 알렌은 주한 미국공사관의 전권공사라는 직위를 역임하기도 하였으며, 고종의 최측근으로 정권핵심에 있으면서 주미한국공사관 설치, 춘생문 사건, 아관파천, 독립협회, 하와이 이민 등 한국 근대사의 핵심적인 사건들에 관여하고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 점에서 그가 남긴 방대하고 세세한 자료는 한국 근대사의 사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1884년 상하이의 상하이 머큐리(Shanghai Mercury)사에서 간행된 『한국에 대한 기록(Notes on Korea)』라는 제목의 책

금번 공개하는 3천6백여 건의 알렌 문서는 알렌이 1924년 뉴욕공립도서관에 기증한 자료를 전량 수집하여 일반 대중과 연구자가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데이터베이스화한 것이다.
해당 문서를 세로로 쌓으면 2.7m에 달할 정도의 방대한 양이며, 여기에는 주한미국공사관 서류를 비롯한 각종 공문서와 지도, 사진, 신문 기사 등을 비롯해 알렌의 일기와 서신, 메모, 원고 등의 개인 문서도 포함되어 있다.
이는 동시대 서양인들이 남긴 자료 중에서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또한 주제의 다양성 측면에서 최고로 평가받는 우수한 컬렉션이다.

알렌이 조선에 들어온 직후 갑신정변이 일어났는데, 정변 세력에 의해 죽을 뻔한 민영익(명성황후의 조카)을 치료하여 조선 조정의 신임을 얻었다. 이후 경인철도 부설권 및 평안도 운상광산 채굴권을 미국에 주도록 주선하였고, 심지어 직접 광산용 목재 조달에 관여하는 등 경제인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이 DB에서 “금광”, “광산”을 검색하면 300건이 넘는 문서들이 검색된다. 당시 열강이 금광 채굴에 많은 관심이 쏠려 있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자료들이다.
1889년에는 영어권 독자들에게 「흥부전」 등의 한국 문학을 알리고, 1893년 시카고만국박람회에 조선 악공들을 데려가 한국 음악을 소개하였으며, 한국 문화 전반에 대하여 논문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러한 관심은 그의 컬렉션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음악에 대한 글, 도자기의 목록, 한국과 세계의 고지도, 미술과 문학에 대한 미발간 저술 등이 그것이다.

알렌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조선에 체류한 서양인 중 TV 드라마 등을 통하여 일반에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의 컬렉션은 연구자 뿐 아니라 일반 대중의 관심을 유도할 수도 하다.
백두산 천지의 모습을 담은 촬영일자 미상의 사진

알렌 문서에 포함된 애국가 악보와 각종 초대장, 여권, 사진, 고지도와 고서, 미국공사관의 회계 장부, 알렌 개인의 가계부 등은 소설과 드라마, 연극, 영화 등 새롭고 유익한 문화 콘텐츠를 기획하고 생산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안병우 한국학중앙연구원장은 “서양인들이 남긴 한국 관계 문헌들은 한국학 연구에 있어 조선인이 아닌 외국인의 시선으로, 다양한 정보와 통찰을 제공해 왔다. 알렌 문서는 역사학, 정치외교학, 의학, 민속학, 문학, 신학, 미술사, 음악사 등 제반 분야에서 근대 전환기 한국을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토대가 될 것”이라고 이 자료의 의의를 강조하였다.

자료들은 영어 원문과 내용 요약문으로 서비스 되고 있으나 향후 번역하여 이용의 편의를 도모할 예정이다. 해당 자료는“한국학진흥사업 성과포털 누리집(waks.aks.ac.kr)”에서 누구나 열람할 수 있다

※ 검색방법 : 한국학진흥사업 성과포털 누리집 검색창에서 ‘알렌’ 입력 → 하단 ‘연구과제(1)’ 클릭 → ‘홈페이지’ 클릭 → ‘자료보기’ 클릭 → 좌측 ‘문서분류’에 따라 검색하거나 검색창에 직접 입력하여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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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atorAllen, Horace Newton, 1858-1932Call numberMssCol 49Physical description9 linear feet (7 boxes, 20 v.); 10 microfilm reelsLanguageMaterials in EnglishPreferred Citation

Horace Newton Allen papers, Manuscripts and Archives Division, The New York Public LibraryRepositoryManuscripts and Archives DivisionAccess to materialsRequest access to this collection.Portions of this collection have been digitized and are available online.

Horace Newton Allen (1858-1932) was an American missionary, diplomat and physician. Collection consists of correspondence, diaries for 1883 to 1903, writings, speeches, and other papers reflecting Allen's career as a clergyman, medical missionary in Korea, secretary of the Korean Legation in Washington and of the American Legation in Korea, and United States Minister to Korea. Includes papers relating to foreign commercial concessions in Korea, the attempt of the Korean emperor to enlist American aid against Japan, and the Russo-Japanese War. Also, miscellaneous papers relating mainly to Korea including photographs, clippings, copies of Korean and Japanese newspapers, and other printed matter. Correspondents include Samuel L. Clemens, John Hay, and Horace Porter.



BIOGRAPHICAL/HISTORICAL INFORMATION


In 1883 Allen, who was born in Ohio, went to China as a medical missionary for the Presbyterian Church. In 1884 he went to Korea, where he remained until 1905. In Korea he served as medical officer to the U. S., British, Japanese, and Chinese legations in Seoul; medical advisor to the Korean royal family; Secretary of the American Embassy in Seoul; Minister Plenipotentiary and Envoy Extraordinary to Korea. He also served as Secretary of the Korean Legation in Washington. Allen was the author of several books about Korea.

SCOPE AND ARRANGEMENT


The papers cover Allen's career in Korea during the periods of Chinese-Japanese conflict in Korea, the Russo-Japanese War, the winning of foreign concessions in Korea, and the establishment of the Japanese protectorate over Korea in 1905. Included are: Allen's correspondence (largely outgoing), and copybooks, 1884-1916 (the bulk covering his Korean period); manuscripts of speeches, articles, and other writings by Allen largely on Korean topics; a few manuscripts on Korea by others, including Rear Admiral S. B. Luce, Ellen C. Parsons, and unknown authors; reports, letters, and legal and other documents, 1895-1906, relating to foreign commercial concessions in Korea; clippings of newspaper articles by or about Allen and Korean topics; letters and other documents relating to the Russo-Japanese War; photographs of the American and British legations in Seoul, circa 1899, five views of the ceremonies opening the Japanese railway connecting Seoul and Fusan, 1905, fifteen views of the American gold mines in Korea, four views and a plan of Allen's summer house in Chemulpo, 1899, the Japanese Peace Commission on its way to Portsmouth, New Hampshire, 1905, and other Korean views; four diaries, 1883-1903; copies of books about Korea by Allen and others; issues of Korean (or relating to Korea) newspapers and periodicals, 1892-1923; miscellaneous documents, including accounts of Allen's household and of the legation, invitations, Korean poetry and artwork, passports, a copy of the Korean national hymn, and a volume containing records of dispatches to the U. S. State Department.

The Horace Newton Allen papers are arranged in fourteen series:
Incoming Correspondence
Outgoing Correspondence - Letters by Allen
Documents relating to foreign commercial concessions in Korea
Letterpress Copybooks


(on spine "Press Copy Books").
Writings and Speeches by Allen
Writings by Others
Press clippings
Photographs
Memorabilia
Account Books
Books
Newspapers and Periodicals
Diaries
Diaries  4 volumes in slipcases
r. 10
#1  1883-1887
r. 11
#2  1887
r. 11
#3  1897-1898
r. 11
#4  1903



Manuscripts/Maps (not microfilmed)

ADMINISTRATIVE INFORMATION

SOURCE OF ACQUISITION

Gift of Horace N. Allen, 1924

PROCESSING INFORMATION

Compiled by Richard Salvato, April 1974; Revised by Julie Miller, August 1987; 2000

KEY TERMS
NAMES
Allen, Horace Newton, 1858-1932
Hay, John, 1838-1905
Porter, Horace, 1837-1921
Twain, Mark, 1835-1910
Korea. Legation (United States)
United States. Legation (Korea)
SUBJECTS
Diplomatic and consular service, American -- Korea
Missions, Medical -- Korea
Russo-Japanese War, 1904-1905
PLACES
Korea -- Commerce
Korea -- Diplomatic and consular service -- United States
Korea -- Foreign relations -- Japan
Korea -- Foreign relations -- United States
Korea -- Pictorial works
Korea -- Religious life and customs
United States -- Foreign relations -- Korea
OCCUPATIONS
Clergy
Diplomats
MATERIAL TYPES
Diaries
Photographs

USING THE COLLECTION

LOCATIONManuscripts and Archives Division
Stephen A. Schwarzman Building
Fifth Avenue at 42nd Street, New York, NY 10018-2788
Brooke Russell Astor Reading Room, Third Floor, Room 328

ACCESS TO MATERIALSRequest access to this collection.

ALTERNATIVE FORM AVAILABLE

Entire collection available on microfilm; New York Public Library; *ZL-309

Horace Newton Allen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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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race Newton All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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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article is about the Protestant missionary. For the 1919 Brooklyn Robins baseball player, see Horace Allen (baseball).

Horace Newton Allen

2nd United States Minister to Korea
In office
October 1, 1901 – June 9, 1905
President William McKinley
Theodore Roosevelt
Preceded by Himself (as Consul)
Succeeded by Edwin Vernon Morgan
United States Consul General to Korea
In office
September 13, 1897 – October 1, 1901
President William McKinley
Preceded by John Mahelm Berry Sill
Succeeded by Himself (as Minister)
Personal details
Born April 23, 1858
Delaware, Ohio
Died December 11, 1932 (aged 74)
Toledo, Ohio
Political party Republican
Spouse(s) Frances Ann
Children 2
Education Ohio Wesleyan University (B.S.)
Miami Medical School
Profession Physician, diplomat


Horace Newton Allen (April 23, 1858 – December 11, 1932) was a missionary, physician, and American ambassador to Korea. He was the first Protestant missionary in Korea, arriving there on September 15, 1884.[1]

After treating Min Young-ik, a royal relative injured during the Gapsin Coup, Allen became close to the king of Joseon, Gojong. At his suggestion, Gojong founded the first western hospital, Chejungwon (now known as Severance Hospital). Allen was in charge of the core function of the hospital. A year after the establishment of the hospital, Allen started a medical school, which was the first formal medical education in Korea.[2]

Due to Allen's relationship with the emperor and other officials, Allen became part of the United States Legation to Korea. He was appointed as secretary in 1890 and was promoted to US minister and consul general in 1897. However, Allen was recalled in 1905, over disagreements with the United States government regarding the Taft-Katsura Agreement.[2]


Contents
1Biography
2Legacy and honors
3Publication
4Popular culture
5References
6External links
Biography[edit source]

Horace Newton Allen was born in Delaware, Ohio on April 23, 1858. He received his Bachelor of Science at Ohio Wesleyan University in 1881. He studied medicine at the Miami Medical School in Cincinnati, Ohio, graduating in 1883.

Allen was appointed a medical missionary and sent to China by the Board of Foreign Missions of the Northern Presbyterian Church and arrived in Shanghai on October 11, 1883. After a while, he decided to serve in Korea, which had just opened its doors to the western world. After obtaining the mission board's permission, he went to Korea on September 20, 1884 to explore. As government law prohibited foreign religion at the time, he was appointed medical officer of the United States Legation to Korea in Seoul, thus hiding his true identity. He went back to Shanghai to bring back his wife Francis "Fannie" and their son, Harry to Korea on October 26.

On December 4, 1884 the Gapsin Coup, a coup d'état staged with the help of the Japanese army by a handful of elite progressive officials,.took place, The progressive government collapsed in 3 days as the Chinese army entered Seoul and defeated the Japanese army. This event started with the assassination attempt on the life of the queens nephew, Min Young Ik, who was hosting a banquet to celebrate the opening of the nation's first postal office with dignitaries including foreign diplomats and he was inflicted with 7 severe sword wounds. Dr. Allen was summoned and treated Min's near mortal wounds, applying western medical methods against the objection of 14 of the court's medicine men. It is noted that wounds soon became infected and Dr. Allen treated the infected wounds with "baked mud" to absorb pus and wash away with water and it took 3 months before Dr. Allen's treatment on him was completed.[3]

Upon hearing the wide spread rumor that a foreigner with bushy red beard revived a dead prince, many people flocked to his house. He seized this opportunity to serve Korean people and submitted to the Foreign Ministry "A proposal of founding a hospital for the government of His Majesty in Seoul Corea" with an introductory letter by J. C. Foulk, charge de' affair of the U.S. Legation. The king Gojong granted his proposal readily and a western hospital named Gwang hye Won (廣惠院, House of Extended Grace) was opened in a traditional Korean estate on April 10, 1885. The name quickly was changed to Chejungwon 제중원 the House of Universal Helpfulness. The hospital had 5 separate in-patient rooms, eye treatment room for extraction of cataracts, vaccination room for smallpox, etc. A year later, Dr. Allen, John William Heron and Horace Underwood opened a medical school "Medical and Scientific School of Royal Corean Hospital and admitted 16 medical students.[3] The adjoining school building had a large class room, a chemistry lab and 2 dormitory rooms.

It is noteworthy that since September 1894 the Board of Foreign Mission started to operate the nation's first western hospital and medical school in Korea and in September 1904 Chejungwon built a new ultra modern brick building outside the South Gate with help from Louis Severance, a philanthropist in Cleveland Ohio, moving patients from "the old to new buildings" on September 23. The invitation to the dedication of the building read "the New Chejungwon/Severance Hospital". For a while after the transition the popular daily newspaper Donga Ilbo called the new hospital "New Chejungwon" and government official document also referred the new hospital as Shin Chejungwon (New Chejungwon). The newly renamed Severance Hospital was the direct descendant of Chejungwon.[4]

The Severance Hospital and Medical school on June 5, 1962 moved to a new location in Sinchon after building a huge medical complex which included the Eighth U.S. Army Memorial Chest Hospital as an integral part and a separate unit ($400,000 worth of building material and $70,000 for medical equipment as American Forces Aids to Korea Program 1955). This institution now is called Yonsei Health System, part of Yonsei University after union with Yonsei University on Jan 5, 1957.[5]

Allen's post Chejungwon activities related to Korea are; King Gojong of Korea asked Allen to help open the Korea Legation in United States of America and Allen led a 12-man delegation to Washington D. C. in November 1887 and established the Korean Legation in January 1888 when Minister Park J. Y presented appointment letter to President Cleveland. Allen helped operate the Korean Legation and carried out diplomatic activities (his position was "foreign secretary" "참찬관" ).

Upon his return from America he started working in July, 1890 as Secretary at the United States Legation in Seoul and left 15 years later in June 1905 as the Envoy Extraordinaire and the Minister Plenipotential before his successor Morgan closed the United States legation in November 1905.

Allen was decorated 3 times by King Gojong and the last one, the highest Tae Guk Order was donated to Yonsei Health System in 2015 by his great granddaughter Lydia Allen.

He died in Toledo, Ohio on December 11, 1932. He was buried in Woodlawn Cemetery in Toledo. Allen and his wife, Francis Ann "Fannie", had two sons, Horace Ethan "Harry" who in turn had 3 sons and Maurice who left no children. There are 5 surviving great grandchildren.

Dr. Allen's contribution to Korea:[6] 1. Introduction of western medicine to Korea. 2. Opening the door to the proselytization of Christianity to Korea 3. Industrialization of Korea; arranging building a railroad system, trolley, electric company, etc. by American companies. 4. Faithful supporter of King Gojong and Korea.
Legacy and honors[edit source]
Gojong awarded him the highest decoration, Taeguk.


Publication[edit source]

Allen's writings introduced Korean literature to the English-speaking world. His publications include:
Korean Tales, (1889)
A Chronological Index of the Foreign Relations of Korea from the Beginning of the Christian Era to the Twentieth Century, (1901)
Supplement, (1903)
Things Korean, (Seoul, 1908)

Popular culture[edit source]
Portrayed by Sean Richard in the 2010 SBS TV series Jejungwon.
Portrayed by Lorne Oliver in the 2018 tvN and Netflix TV series Mr. Sunshine.
References[edit source]

  1. ^ Kang, Wi Jo (2016-09-13). "The Legacy of Horace Newton Allen". International Bulletin of Missionary Research. 20 (3): 125–128. doi:10.1177/239693939602000308. S2CID 171878262.
  2. ^ Jump up to:a b Yeo, In-Sok; Yoon, Do Heum (2017). "Allen (Horace N. Allen, 安連, 1858–1932)". Yonsei Medical Journal. 58 (4): 685–688. doi:10.3349/ymj.2017.58.4.685. ISSN 0513-5796. PMC 5447096. PMID 28540978.
  3. ^ Jump up to:a b Allen's Diary
  4. ^ letter by Dr. Jesse Hurst and 이하영 서신 규장각
  5. ^ documents from letters to Dr. Ernest Weiss from U. S. Eighth Army
  6. ^ Allen, Horace Newton (1908). Things Korean: A Collection of Sketches and Anecdotes, Missionary and Diplomatic. F. H. Revell Company.
External links[edit sour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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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ianity in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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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ted States ambassadors to Korea and South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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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ity control

Categories:
1858 births
1932 deaths
People from Delaware, Ohio
American Presbyterian missionaries
Presbyterian missionaries in Korea
Ambassadors of the United States to Korea
19th-century American physicians
American political writers
American male non-fiction writers
Christian medical missionaries
Ohio Wesleyan University alumni

이만열 장로/교수 대담 - "관악교회" 총 18회

이만열 장로/교수 대담 - "관악교회"
대담 이만열 교수/장로의 삶,신앙,학문 V

알라딘: 사회는 왜 아픈가 - 자발적 노예들의 시대 이찬수

알라딘: 사회는 왜 아픈가
사회는 왜 아픈가 - 자발적 노예들의 시대   
이찬수 (지은이)모시는사람들2020-12-10

328쪽

책소개

인간 개인은 물론 사회가 평화보다는 폭력과 갈등, 안전보다는 위험과 위기에 더 자주 더 오래 노출되는 현실의 원인을 짚어 보고 그 대안을 제시하는 책이다. 사변적이고 이론적인 글들이 아니라 저자가 직면하는 삶의 매순간, 구체적인 사회 현실(사건)을 통해서 저자가 생애 전체에서 일관되게 추구하는 행복한 삶, 평화로운 사회로의 전진을 모색한다.

나를 포함한 사회가 아픈 근원적인 원인을 성찰하고 인간적인 얼굴을 한 대안들을 40개의 다양한 사회의 제 부문과 요소, 인간관계 들을 통해서 제시한다. ‘사회의 아픔’의 원인과 대안에 관한 과학적인 접근을 시도하되 저자의 종교적 감수성 덕분으로 그 근저에 ‘사회적 영성’의 심층 맥락을 굳건히 자리매김하고 있다.


목차
책을 내며

제1부 사회는 왜 아픈가
1. 공감이 신앙이고 공생이 구원이다: 평화학이 던지는 질문
2. 연기해야 연극이 된다: 평화들의 조화와 신율
3. 그러나 위험하고 피로한 사회: 자발적 노예들의 시대
4. 예수도 폭력을 썼다: 폭력과 비폭력의 경계
5. 동성애를 혐오하는 이들에게: 혐오와 차별의 천박한 내면
6. 우리도 난민이었다: ‘내로남불’의 난민론
7. 인권은 나의 권리인가: 자권(自權)과 타권(他權)
8. 더 큰 폭력이 더 큰 원인이다: 이스라엘-IS-미국
제2부 세상[世]을 어떻게 넘을까[越]
9. 평범함이 모이면 무력해지는가: 도덕적 개인과 비도덕적 사회
10. 예외가 일상이 되다: 일상의 속살
11. 권력의 목적은 권력이다: 호모 사케르
12. 왜 배가 바닷속으로 들어갔는가: 그들이 세상[世]을 넘는[越] 방식
13. 폭력이 왜 권력이 되는가: 국가와 주권
14. 왜 정치인은 국민을 파는가: 정치와 종교의 모순들
15. 권위는 누가 주는가: 대통령이라는 거대한 호칭
16. 서로 주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증여론
17. 나도 때론 정치하고 싶다: 함께 느리게
제3부 무엇을 내려놓아야 할까
18. 누구를 위한 자유인가: 자유무역협정
19. 자유도 돈으로 사는가: 우리 시대의 장발장
20. 나는 두통을 소유한다: 소유와 존재
21. 오리는 아플 권리도 없는가: 생매장과 살처분
22. 사람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가: 사형제도
23. 핵발전은 필연인가: 통제 불능의 문명
24. 자연이 공격해온다: 재난과 인공지진
25. 이자를 금하라: 금융경제와 이자놀이
26. 아이도 국가를 위해 낳는가: 저출산 혹은 저출생
27. 학교는 왜 아픈가: 대학의 종말
제4부 한국과 일본은 왜 꼬였나
28. 한국의 시간을 복원하라: 한국 속의 일본
29. 동해는 동쪽인가: 푸른 바다 또는 평화의 바다
30. 일본은 왜 우경화할까: 영혼의 정치학
31. 평화를 내세워 전쟁할 것인가: 책임없는 평화주의
32. 왜 다케시마를 고집할까: 평화헌법 9조에 노벨 평화상을
33. 호국영령도 여러 가지다: 일본 군국주의의 기초
제5부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34. 왜 사람을 쫓아낼까: 아프지만 이긴 사람들
35. 법은 왜 상처를 줄까: 법력, 금력, 권력
36. 왜 자기도 모르는 짓을 할까: 종교의 앵똘레랑스
37. 김 교수는 왜 아팠을까: 악의 발생에 대한 상상
38. 왜 큰 것을 숭배할까: 박사학위에 대한 나의 고백
39. 깨어 있어야 하는가: 중취독성(衆醉獨醒)
40. 나는 무슨 공부를 해 왔나: 심층학의 가능성

접기
책속에서
P. 25~27 평화조차 의도와 목적이 자기중심적으로 설정되어 있으면, 평화라는 이름으로 폭력이 발생한다. 평화라는 말을 가장 많이 하는 종교들이 도리어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데서 잘 볼 수 있다. (중략) 한마디로 ‘자기중심적인 평화(ego-centric peace)’를 내세운다. 이것이 현실이다. (중략) 평화라는 이름으로 평화를 이루려면 그 자율은 타자를 포함하는 자율이어야 한다. (중략) 성경에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다.”(갈라디아서 3,28)는 선언이 나온다. 타자를 긍정하면서 타자를 살리는, 그런 의미에서 하나됨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연기해야 연극이 된다: 평화들의 조화와 신율)  접기
P. 31 자본주의는 더 많은 자본을 생산하기 위해 인간에게 주체적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것을 요구한다.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더 많은 성과를 닦달하듯 요청한다. (중략) 사람들은 자신을 착취해 성과를 극대화하기 시작했다. 성과 사회의 본질이 개인의 자유를 능가해 온 셈이다. 신자유주의는 자발적으로 자기를 착취해 더 많은 성과를 산출할 것을 요구하는 시대적 흐름이다. 자발성의 이름으로 스스로를 속박하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노예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그러나 위험하고 피로한 사회: 자발적 노예들의 시대)  접기
P. 56 타자로부터 동의를 받으려면 자신을 설명할 뿐만 아니라 타자와 타협하고 수용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타자가 동의할 수 있을 정도의 자기 개방성을 담보해야 한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정체성의 확립 과정이 폭력적이지 않을뿐더러 정당성을 얻는다. 자신 안에 있는 폭력성을 인정하면, 폭력성을 혐오하기보다는 폭력에 분노하며 폭력을 줄이는 길에 나서게 된다. 혐오와 폭력은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거나 외면하는 데서 비롯되는 일이다. (동성애를 혐오하는 이들에게: 혐오와 차별의 천박한 내면)  접기
P. 64 인권에서 더 중요한 것은 사실상 ‘남[他]’의 권리이다. 자신의 권리만 주장하다가, 결국 갈등으로 치닫는 경우를 종종 보기 때문이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경쟁적 성과사회라는 구조적 갈등을 그대로 전제하기에 제기되는 것이다. 나만 내세워서 인간의 권리가 확보되는 것이 아니다. 남의 권리[他權]도 볼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인권은 나의 권리인가: 자권(自權)과 타권(他權))  접기
P. 97~98 권력은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지 타자를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권력은 인간을 버림으로써 존재하는, 인간에 대해 폭력적인 성향을 보인다. 권력의 집합체로서의 국가도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기 힘들도록 되어 있다. 국가는 거대한 틈, ‘공(空)-간(間)’이다. (권력의 목적은 권력이다: 호모 사케르)

저자 및 역자소개
이찬수 (지은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서강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니시타니 케이지(西谷啓治)의 불교철학과 칼 라너(Karl Rahner)의 철학적 신학을 비교하며 박사학위를 받았다. 강남대학교 교수, (일본)WCRP평화연구소 객원연구원, 코세이가쿠린 객원교수, 난잔대학 객원연구원, 성공회대학교 대우교수,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를 지냈고, 한국문화신학회 회장으로 일했으며, 한국평화종교학회 부회장, 인권연대 운영위원 등으로 봉사하고 있다.
그동안 종교학, 죽음학, 평화학 등과 관련해 77권의 단행본(공저/역서 포함)과 88편의 논문을 출판했는데, 평화학과 관련한 책으로는 『평화와 평화들』, 『한국인의 평화사상1.2』(공편), 『평화의 여러가지 얼굴』(공편), 『아시아 평화공동체』(편저)를 비롯해, 『세계평화개념사』, 『아시아공동체와 평화』, 『평화의 신학』, 『세계의 분쟁』, 『평화인문학이란 무엇인가』, 『녹색평화란 무엇인가』, 『폭력이란 무엇인가』, 『재난과 평화』, 『탈사회주의 체제전환과 발트3국의 길』, 『사회주의 베트남의 역사와 정치』, 『양안에서 통일과 평화를 생각하다』, 『동아시아의 대동사상과 평화공동체』, 『근대 한국과 일본의 공공성 구상 1.2』, 『우리 시대 혐오를 읽다』 외 여러 권의 공저서와 번역서들이 있다.
국가보훈처 산하에 있으면서 한국보훈복지의료공단에 소속된 보훈교육연구원장으로 취임한 이래 평화 및 복지국가의 형성에 기여하는 보훈 연구와 교육이 될 수 있도록 뒷받침하고 있다. 접기
최근작 : <통일로 가는 보훈>,<보훈의 여러 가지 얼굴>,<사회는 왜 아픈가> … 총 53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지금 우리는 아프다!
개인의 정서적(코로나 블루), 육체적(코로나19 팬데믹) 아픔은 물론이고 경제적이고 사회적(거리두기)인 차원에서도 아픔이 일상화, 보편화되었다. 사람과 사회뿐만 아니라, 동식물(ex. 조류독감, 생물대멸종)도 아프고, 나아가 지구 전체가 심각한 질병(ex. 기후위기, 지구온난화)에 빠져 있다. 이 아픔은 지금-여기에서 예외적이고 도드라지는 것은 아니다. 인류가 의식을 갖게 된 순간부터 아픔은 우리 삶의 일부이기는 했다. 그러나 ‘늘 아프다’고 해서 아픔을 당연시하고, 묵묵히 견디기만 하면서 살 수는 없는 것이 인간이다.

우리는 왜 아픈가?
아픔을 야기하는 것을 폭력이라고 이름 지을 수 있다면, 우리가 아픈 까닭은 ‘폭력은 지속적이고 일상적인 데 비해, 평화는 간헐적이고 예외적’이기 때문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맑고 깨끗한 하늘과 바다가 돌아온 것처럼, 우리는 “대체로 흐린, 그러나 가끔 맑은” 세상(사회) 속에서 살아간다. 대체로 흐린 우리 사회와 우리의 삶의 속살은 위험, 피로, 폭력, 혐오, 차별, 아동폭력, 성폭력, 방치와 방임, 난민, 세월호, 국가 폭력, 정치와 종교, 생매장, 살처분, 사형, 핵발전, 문명과 통제, 재난, 이자, 학교의 종말, 전쟁, 법과 상처, 금력, 권력, 숭배, 중독 같은 세포들로 점철된다. 그런 가운데 우리는 몸도 아프고 마음도 아프고, 나도 아프고 너도 아프고, 이겨도 아프고 져도 아픈 가운데 살아간다.

사회는 왜 아픈가?
개인적 질병과 사고로 인한 고통이 아니라면, 우리가 아픈 까닭은 대체로 우리가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생겨난다. 얼마간의 아픔은 (개개의) 타인으로부터 오거나, 타인과 나를 비교하는 데서 오고, 대부분의 아픔은 사회적인 차원에서 (직접적/간접적) 주어진다. 개인(국민) 국가의 주인이면서 국가권력의 통제에 종속되듯이, 우리(개인)는 사회를 구성하는 주체이면서, 사회에 종속된다. 사회로부터의 일탈은 일시적이고 예외적이며, 사회에 순응하고 예속되는 것이 일상적이며, 보편적이 되는 것이다.
개인의 아픔이 대체로 개개인의 생존 욕구, 자기 확장의 욕망으로부터 비롯되고, 사회적 갈등과 고통이 그 개인들의 욕망 대 욕망의 부딪침으로 야기되는 것이라는 것만 놓고 보면, 아픔의 근본적인 원인은 개인의 욕망인 것 같지만, 특히 근대의 ‘성과(자본 확장) 중심주의 사회 및 경제 시스템’이 자리 잡으면서, 개인의 욕망조차도 사실은 사회적인 산물이라는 점이 점점 명확해지고 있다. 개인의 일탈(갈등, 폭력, 살인-사형)조차도, 사회적 책임을 묻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개인의 모든 폭력에 면죄부를 주는 일이 아니며, 그렇게 되지도 않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누가, 왜 아픈가?
오늘날 사회는 근대 시기의 정치사회로부터 경제사회로 전이되어 왔다. 사실상 사회는 경제사회가 형성되면서부터 비롯되었다. 정치권력이 경제권력을 좌우하던 아주 짧은 시기가 있었으나 대체로는 경제권력이 실질적으로 정치권력을 좌우하는―현 단계에서는 ‘신자유주의’라고 불리는―체제가 현대 사회 근본 체제이다. 개인의 아픔이든, 사회의 아픔이든 자생적이며 불가항력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 내적 - 인간(을 비롯한 모든 ‘아픈 것들’) 외적”인 것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개인의 책임은 그 전제 위에서 아픔의 근본 원인에 무지한 채 종속되거나, 그것을 알면서도 그 체제의 양지에 서는 쪽을 선택하여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순간 생겨난다. 무지해서 수용하든 자발적 선택으로 수용하든 “자발적인 노예가 되기로 선택”한 것은 매한가지다.

아픔은 어떻게 이길 수 있는가?
이 책 『사회는 왜 아픈가: 자발적 노예들의 시대』는 저자가 “사회의 병리 현상을 관찰하면서, 때로는 사회 구성원인 나 자신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며” 써 나간 사회비평 에세이이다. 사회가 아픈 이유를 차근차근 성찰하되, 스스로 그 일부로 자리매김하여, 인간의 얼굴을 한 실천적 대안들을 치열하게 모색한다. 특히 기독교 목사이며, 평화학의 전공자이자 평화운동가로서, 그 자신이 겪은 해직의 아픔을 객관화하고, 사회적 아픔들을 주관화하여 공감하면서, 평화의 폭넓은 의미 속에서 그 대안들을 찾아나간다.
결국 저자가 끝내 도달한 해결의 종점, 혹은 해결의 출발점은 인간의 정신성 ? 사회적 영성의 차원이다. 국가나 사회 차원의 정책적 대안은 그다음의 문제이다. 인간(개인) 자신의 아픔도, 사회의 아픔도(사회의 주체로서 개인), 그리고 이 지구상의 아픔도 결국은 인간이라는 근원적 존재로부터 해결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인간 ‘외적 존재’로부터의 해결은 생각만 해도 끔직한 일이다. 그것은 이른바 ‘강한 인공지능의 괴담’ 같은 것을 상상하게 하기 때문이다.)

아픔은 어떻게 치유되는가?
저자는 말한다. 자기중심적인 평화 대신에 타자를 포함하고 긍정하는 평화를 추구할 때, 성과 중심 사회 체제에 내몰리다가, 스스로 내달리는 자발적 노예 상태를 거부할 때, 타자와 협의하고 타자의 동의를 수용할 때, 타의 권리보다 타자의 권리 ? 우리의 권리를 앞세울 때, 국가권력에 자기 자신의 근본적인 존엄과 천부의 권리를 위임해 버리고 스스로 종속되기를 거부할 때, 국민의 이름으로 자기 권력을 강화하고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는 정치와 종교의 본질을 꿰뚫을 때, 소유의 충동과 욕망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하여 내려놓고 비워줄 때, 자유라는 이름의 자본이 던진 미끼를 좇아 돌진하는 어리석은 길에서 돌아설 때, 문명이 시작되면서 인간의 아픔도 시작되었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 인간의 삶의 매 순간에 저질러지는 실수와 과오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할 줄 알게 될 때, 정죄하는 자로부터 정죄 받을 줄로 알고 조신하며 조심하는 사람으로 거듭날 때, 끊임없이 ‘큰 것’을 좇아 밖으로 나도는 마음과 몸을 우리-나 안으로 끌고 들어와 스스로 심층적인 공부를 계속해 나갈 때 우리의 아픔은 치유될 수 있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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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아프다, 사람이 아프다, 내가 아프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경쟁사회에서 자신도 모른체 사회의 폭력적인 구조와 자본의 확대를 위해 자발적인 노예의 삶으로 살아가게 한다. 중층적으로 이루어진 사회의 아픔을 파헤치고, 자기중심적 욕망들을 극복하기 위한 성찰적 길을 제시하고 있다. 
전철후 2020-12-21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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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칼 마르크스의 인간해방과의 만남

   2020년은 지구의 아픔을 인류가 함께 느끼던 시간이었다. 울리히 벡(Ullich Beck)은 『위험사회』에서 전 지구가 세계화로 들어서면서 산업화·근대화가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주지만 동시에 새로운 위험요소를 불러오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위험들은 일국적 차원에 그치지 않고 세계가 하나의 사회로 통합되면서 ‘위험의 세계화’가 되어가고 있음을 말한다. 코로나19가 이를 대변해 주고 있다. 코로나 19로 인해 그동안 신자유주의 체제에 익숙해진 인간은 어쩔 수 없이 패러다임 전환의 시기를 겪으면서 많은 몸살을 앓고 있다. 그리고 그 아픔의 원인이 무엇이며, 어떠한 결과를 양상하고 있는지 드러나기 시작했다. 신자유주의의 거대 구조는 자유 경쟁이라는 이름으로 구조적 폭력을 개인 안에 자율적으로 내면화시키는 방식으로 그 폭력을 감내하는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구성원 각자가 자본이 가하는 폭력의 피해자이면서도 그 폭력을 자발적으로 내면화시킨다. 폭력을 당하면서도 그 폭력을 폭력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나아가서 폭력을 확대·재생산해 낸다.

    최근 이찬수교수(보훈교육원 원장)는 『사회는 왜 아픈가: 자발적 노예들의 시대』라는 저서에서 신자유주의 시대의 폭력의 원인과 과정 그리고 욕망을 제어하고자하는 정신적 가능성을 통찰력 있게 살펴주었다. 저자는 십수년 동안 사회의 병리 현상을 관찰하면서, 때로는 사회의 구성원인 저자 자신을 비판적으로 성찰해 갔다. 사회의 구성원인 저자 역시도 비판적 대상의 일부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수용하는 자세를 가진다. 사회가 아픈 이유를 성찰하되 단순히 객관적 비평문에 머물지 않고, 가능한 인간의 얼굴을 한 실천적 대안을 담아내고 있다. 저자는 사회도 개인적 욕망들의 합집합에 머물지 않고 거대한 욕망을 돌파할 수 있는 심층의 영역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했다. ‘사회의 영성’(Spirituality of Society) 내지는 ‘사회적 정신의 심층’이라고 해도 좋을 긍정적 영역을 말하고자 했다.

    저자는 사회가 아픈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서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중심성들이 충돌하는 현장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라 한다. 자기중심적 욕망들의 각축장이 되게 만드는 사회는 상대를 딛고 넘어서라며 경쟁적 성과를 끊임없이 부채질하며, 결국 개인인은 저마다의 자기에게 유리한 선택을 하게 한다. 그 경쟁은 더 많은 업적을 낳고 재화를 산출하며, 기존 사회의 구조를 확대시키고 다시 정당화시킨다. 그러면서 개인은 자기가 만든 사회에 종속된다. 문명을 만든 인간이 문명의 법칙에 예속되어 가는 것이다. 이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노예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라 한다. 저자가 말하는 이 사회란 사적 혹은 가정적 영역이었던 ‘이코노미들’이 중층적으로 뒤섞여 다차원적으로 뻗어가고 잇는 유기체적 집단이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사회에 대한 통찰은 집단의 구성원들이 저마다의 욕망에 기반 해 정치를 이용하거나 그 통제에서 벗어나려 시도하면서, 끝모를 자기변화와 확장을 계속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 과정에 나타난 성과 지향의 신자유주의는 사회를 ‘질환’이라 할 수 있을 영역으로 이끌고 있으며, 사회적 아픔의 구조적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이러한 자발적 노예들의 성과사회는 자기 주도적으로 자유롭게 일한다고 하지만 보이지 않는 강제가 작용된다. 성과사회는 신자유주의의 경제시스템에서 ‘자본’을 확장시키는 근본 동력으로 작용하고, 그 시스템이 요구하는 자유 경쟁은 심신의 피로 뿐만 아니라 아픔도 더 수반하게 한다. 저자는 사회가 왜 아픈지 답을 하려면 경제의 문제도 되물어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 문화와 사고 형태, 그리고 신념은 경제활동이 수행되는 방식과 관련이 있다. 칼 마르크스(Karl Marx)가 지적 하듯이 신자유주의 체제를 양산해 낸 근대화는 생산력을 획기적으로 증대시켰으나,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 구조의 모순과 인간 소외 현상을 발생시키고 있다. 산업적 생산방식은 인간으로 하여금 폭력을 가하게 하거나 파괴하게 하며, 자기 자신과 자기가 만든 산물과 자연으로부터 소외된 인간들은 결국 타인으로부터도 소외된다.

    특히,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으로 인한 계급구조의 모순과 인간소외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는 인간해방을 지향한다. 종교적 차원에서 인간해방은 신과 인간의 세계와의 관계를 인간 자신에게로 복귀시키는 것이라 한다. 인간 자신에게로의 복귀는 자신도 모르게 내면화된 자기중심적 사유를 멈추고 “성찰” 할 줄 아는 인간이다. 저자 역시도 노예로부터의 해방되기 위해서는 성찰을 통해서 기존의 흐름을 중단하면서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피로사회에서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성과사회에서 피로에 지친 인간에게 평화는 과연 무엇일까? 자유경쟁 속에 내몰린 인간이 진짜 자유와 평화라는 이상을 구현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던진다. 종교의 역할은 이러한 자유경쟁에 속박되는 모순을 멈추고 해체시키며, 보이지 않는 갈등과 구조적 폭력의 희생자를 해방시킴으로써 적극적인 평화를 구현해 내는 길이다.

    마르크스는 1844년 『헤겔법철학비판』에서 “철학이 프롤레타리아트에게서 물질적 무기를 발견하듯이 프롤레타리아트는 철학에서 지적(知的) 무기를 발견한다. 철학은 오직 프롤레타리아트의 철폐에 의해 실현될 수 있고 프롤레타리아트는 오직 철학의 실현에 의해 철폐될 수 있다.”라고 말한다. 여기서의 철학은 개인의 이해관계와 공동체의 이해관계가 조화를 이루고, 고통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존재들이 자신들의 진정한 자아를 표현하는 유물이다. 『사회는 왜 아픈가: 자발적 노예들의 시대』는 지금 시대의 사회의 총체적 변혁이 내재적 사회영성의 인간해방을 낳을 것이라는 철학적 길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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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철후 2021-01-13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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