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2- 함석헌
프로필
정발남
2005. 8. 15. 6:25
이웃추가본문 기타 기능
p 275
그러는 때에 갑자기 김교신이 흥남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왔습니다. 만
나지는 못해도 그래도 깊은 밤 혼자 일어나 앉아 어둠 속에서 남 못 듣는 대화
를 해도 그와 했는데 이제 그마저 갔다니 그럼 누구와 말을 하지? 혼잣말도 못
한다면 어떻게 살아가지? 그러고 나서 겨우 112일이 지나서 해방이 됐습니다.
해방이 됐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무엇보다도 먼저 생각난 두 이름 중 하나는
그였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해방이 될 때에 매 마음은 무척 외롭고 슬펐습니다.
어느 때 가서는 틀림없이 망할 줄 알던 일본 제국이지만 그렇게 갑자기 그 날이
올 줄은 참 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해방의 소식
내게는 라디오도 없었습니다. 비밀 뉴스의 줄도 없었습니다. 그 점에서는 정말
시골 농사꾼이었습니다. 용암포에서 일부러 사람을 보내어 내게 알려주는 순간
나는 정말 어깨에 똥통을 메고 밭에 거름을 주고 있었습니다. 나는 정말 농부로
서 해방을 맞았습니다. 또 농부답게 놀라지도 부르짖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그
래, 기쁜 소식이구나” 했을 뿐입니다. 그 날로부터 꼭 100일이 되던 11월 23일
신의주학생사건이 터지던 날, 그것과는 정반대로 공산당으로부터 죽음의 선고를
받던 순간도 꼭 같이 그러했지만, 내 마음은 그저 담담했습니다. 왜 그랬는지 나
도 그 이유를 모릅니다. 그저 그것이 나였습니다.
용암포 사람들이 나를 나오려고 했을 때 나는 잠깐 놀랐습니다. 평상시 나를
아는 척도 아니하던 사람들이 왜 나를 부를까? 그럼 아는 척은 아니해도 나를
알고 있었던가? 알면서도 아는 척 아니하던 사람들이 이제 아노란 것은 무슨 뜻
에서일까? 처음에 축하식에 나오라는 것을 “나도 기쁘지, 아니 기쁘겠냐? 그렇
지만 나는 내 식대로 축하한다고 그래라” 하고 나가지 않았는데 다시 돌아와서
기
p 276
어이 나와야 한다고 할 때는 나도 더 사양할 수가 없어졌습니다. 나는 잠깐
생각했습니다. 시개가 바뀌는 대목인데 이 때에 몸가짐을 어떻게 할까? 내 옆에
는 어머니를 내놓고는 의논할 집안 어른도 없고 친구도 선생도 없습니다. 모든
것을 내 생각으로 결정해야 합니다. 한번 결정하는 것이 크게 훗일에 관계되는
중대한 순간입니다. 마음속에 “이들이면 이런 경우 어떻게 할까? 하고 내가 존
경하는 몇 이름을 불러일으켜 생각해보았으나 역시 이럴 것도 같고 저럴 것도
같고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 내 양심으로 하리라 하고 결심을 했습니다. 내가
나를 조금 압니다. 정치는 내게 적당한 것이 아닙니다. 정치적인 급류에 말려들
어가는 일입니다. 어찌할까? 그것이 내 문제점이었습니다.
생각 끝에 나는 심부름을 온 내 생질, 6.25 때에 공산당에게 총살을 당한 최창
복을 보고 말했습니다. “나를 나오라는 것은 나를 이용하자는 뜻이다. 그 뜻을
내가 안다. 남에게 이용당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만 알고 당하면 어리석은
것은 아니다. 또 이런 때는 이용을 당해도 좋다. 당하는 수밖에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해준 다음 나는 물러서면 그만이다” 하고 거름통을 놓고 따라 나
갔습니다. 그러나 나는 알고도 몰랐습니다. 또 나는 모르고도 알았습니다. 사실
그밖에 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지금도 그때나 마찬가지입니다. 나더러 지금도 이용당한다고 합니
다. 그렇습니다. 이용이람 이용입니다. 그러나 이용당해도 좋습니다. 전체에는 이
용당해도 좋습니다. 전채는 모든 사람을 이용합니다. 쓸 때는 쓰고, 다 쓰면 사
정없이 버릴 것입니다. 이용당해도 그런 줄을 알고 당하면 좋습니다. 다만 한 가
지 문제입니다. 내가 전체를 마주 이용하잔 생각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입니
다. 내 편에서 만일 조금이라도 이용되는 대신 나도 또 전체를 이용하잔 생각이
있으면 도둑입니다.
나는 그 죄를 범하지 않으려는 노력을 예나 이제나 변함없이 하고 있노 라는
증언만은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어찌 감히 온전히 깨
p 277
끗하다 할 수야 있습니까? 그러나 적어도 의식적으로 그 죄를 범하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한 것은 내게는 약한 마음을 주신 것입니다. 나는 약
해서 감히 큰일에 엄두를 못 냅니다. 이 나의 약점이 항상 나를 건져줍니다.
단번에 받은 새 시대의 세례
나는 몰랐습니다. 내 안다는 것이 어리석은 것이었음을 용암포 제일교회 뜰에
들어서는 순간 곧 느꼈습니다. 역사의 거센 물결은 나를 삼키기 시작했습니다.
나가니 벌써 모든 것이 짜여 있었습니다. 축하식을 인도하라는 대로 단에 올
라선즉 나도 생각 못했던 말이 나왔습니다. 어둡도록 행진을 했습니다. 곳곳에서
30년 40년 동안 궤짝 농짝 밑에서 잠을 자던 태극기가 나왔습니다. 열아홉 살에
3.1 운동 만세를 부르던 날 이후 27년 만에 처음 시원한 날을 보았습니다. 가슴
밑바닥에 쌓였던 묵은 시름의 가스가 다 나왔습니다.
그리고 나서 보니 사람은 그 사람들 그대로인데, 내가 고랑을 차고 거리를 지
나가도 모르는 척 지나가던 그 사람들 그대로, 내가 애써 친구가 되려 해도 곁
을 주지 않던 그 사람들 그대로인데, 이제 나는 나와 그들 사이에 아무 어색함
도 막힘도 없는 것을 느꼈습니다. 우리는 다 훨훨 벗고 한 바다에 들어 뛰노는
것이었습니다. 그만 아니라 저기 언덕에 있는 일본 사람, 어제까지 밉고 무섭던
그들이 도리어 어떻게 잘못되어 다치기나 할까 걱정스러웠습니다. 단번에 우리
는 새 시대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또 다 안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 속았습니다. 또 몰랐습니다. 역
사가 나를 속일 리도 없고 민중이 나를 속일 리도 없지만 나는 속았습니다. 해
방축하회를 마치고 내 밭으로 돌아간다고 했더니 못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약했
던가, 그들이 강했던가. 나는 생각도 못했던 용암포읍 임시자치위원회의 회장 자
리에 앉히움을
p 278
입었습니다. 나는 임금 자리를 피하다 못해 굴 속에는 타 죽은 초나라 왕자만
못했습니다. 앉히는 것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며칠 지나서 용천군 자치위원장 자
리에 앉혔습니다. 또 얼마 있어 월말이 될 때 신의주로 끌려 올라가 평안북도
임시자치위원회의 문교부장 의자에 앉게 됐습니다.
내가 약하다면 약했고 밝지 못하다면 밝지 못했습니다. 권력의 야심은 없었습
니다. 나 스스로는 없다 해도 남 보기에는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감히 눈같이 희
었노라 고는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가지만은 있습니다. 새 역사의 어떤 매
력이 나를 매혹시켰다면 시켰습니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는 별별 잡것이 다
떠서 돌고 있습니다. 저것을 어떻게 청산할 수 있을까? 의심이 들기 시작했습니
다.
자면서도 꾸고 깨면서도 꾸던 새 역사의 꿈에 찬 바람이 차차 불기 시작했습
니다. 그런 때에 안의 인텔리 젊은이들로 조직된 우리청년회란 것이 있었습니다.
그들도 내게 가까이 왔고 나도 있는 힘을 다해서 그들을 이끌어보려 했습니다.
그러는 때에 갑자기 소련군이 진주해 왔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세상이 뒤집혔습
니다. 그 때는 위원의 대부분이 공산당이 돼 버렸습니다. 그 중에는 이유필씨의
품속 칼이라던 그의 비서도 들어 있었습니다. 해방의 감격은 어디로 사라지고
시가에는 공포기분이 꽉 차게 됐습니다.
그 다음 이야기는 다 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나는 이제 물러갈 때가 온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위원장께 그 말을 했더니 이 노인이 나를 붙잡는 것이었습
니다. “그만둔다 해도 같이 그만둡시다” 했습니다. 노인이 보기에 불쌍했습니
다. 그래서 하루 이틀 하는 동안 학생사건이 터졌습니다. 학생사건에 대하 여는
이미 자세히 쓴 것이 있으니 다시 되풀이 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여간 그 때문
에 나는 소련군 감옥에 갇히어 50일 있다가 갑자기 나가라 해서 나와보니 집은
허허 바다 속에 깨어진 널조각같이 외롭고 쓸쓸해졌습니다. 밖에 인기척만 있어
도 깜짝깜짝 놀라야 했습니다. 이웃이 내 감시자
p 279
가 됐습니다. 아는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그저 울움이 복받쳤습니다.
한 해를 지낸 후 또다시 붙들려가서 한 달을 있다가 나왔습니다. 그것을 본
내주위의 친구 들은 나를 그 이상 더 머물지 못하게 남으로 가라 권했습니다.
더구나 박승방 같은 분은 전혀 나 하나를 월남 시키기 위해 박천서 용천까지 왔
습니다.
1947년 2월 26일 "내 생각은 말고 어서 가거라." 문간에 기대서 하시는 어머님
의 마지막 음성을 마지막이 될 줄은 알지도 못하고 들으며 그와 같이 떠나 월남
길에 올랐습니다. 평양에 잠깐 머물러 기회를 엿보다가 다시 떠나 해주를 거쳐
서울에 온 것이 3월 17일 이었습니다. 박승방 씨는 나를 데려다 주고는 다시 고
향으로 돌아갔는데 그 이후는 소식을 알 길이 없습니다.
실패된 해방의 의미
8.15는 실패람 실패입니다. 일제 밑에 종살이하던 민중은 해방의 이름은 얻었
으나 실지는 없었습니다. 주인이 바뀌었을 뿐이지 자유는 여전히 없습니다. 그러
나 실패이면서도 얻은 것이 있습니다.
첫째,씨알의 불사성이 드러난 것입니다. 일제 말년에 그 정치가 강용하는 대로
모든 것을 내놓는 것을 보고 우리는 거의 죽은 줄로 알았습니다. 그들은 그 말
을 내놓고 글을 내놓고 모든 고유한 풍속을 내놓고 심지어 제 성까지도 내 놨습
니다. 그러나 해방이 한번 올 때 그들은 마치 흐린 물결 속에서 올라오는 바위
처럼 그 본래의 모습을 가지고 일어섰습니다. 마치 일제 36년은 없었던 것 같았
습니다. 그래 그들 스스로 제 속에 죽지 않는 생명이 있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이것은 큰 소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 남북으로 갈라져 있어 완전한 자유
를 얻지 못한 상태에 있으면서도 비관하고 낙망하지 않을 수가 있게 됐습니다.
혹은 말하기를 수십 년 서로 다른 체제 밑에 있어 온 것을 어떻게
p 280
하느냐 걱정하지만 나는 결코 그것 두려워할 것 없다고 합니다. 민중은 마치
물 같은 것입니다. 지극히 유약해서 칼로 자르면 아무 저항 못하고 잘리는 듯합
니다. 그러나 칼을 뽑는 순간 곧 다시 하나가 됩니다. 몇천 백 년을 있어도 그
본성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것이 이번 해방으로 증명이 됐습니다. 오늘의 민중은
벌써 옛 날의 민중이 아닙니다. 민중은 제도나 이데올로기보다 강합니다. 제도나
이데올로기는 민중을 선하게 못하는 대신 근본적으로 타락도 시키지 못합니다.
바위에 부서지는 빗방울이 도리어 바위를 부수듯 이 칼에 맥없이 찍히는 민중이
도리어 그 칼을 삼켜 녹여버리고 맙니다. 정치는 힘에 살지만 민중은 믿음에 삽
니다. 믿음은 모든 상처를 씻어 낫게 합니다. 정치는 재생하는 법이 없지만 씨알
은 부활합니다. 우리는 8.15의 깨진 꿈 속에서 도리어 씨알의 새로 날 모습을 그
려낼 수 있습니다.
8.15해방의 실패로 인해 얻은 둘째 소득은 국가주의의 멸망의 선언입니다. 우
리 남북 분열의 조악의 책임은 루스벨트에 있는 것도, 처칠에 있는 것도, 스탈린
이나 장개석이나 그 밖에 누구에게 있는 것도 아니고, 국가주의에 있습니다. 국
가주의가 있는 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유주의나 공산주의나 그 체제,
이데올로기에는 차이가 있어도 개인을 그 노예로 삼는 국가주의인 데서는 다름
이 없습니다. 자유주의나 공산주의나 그 체제, 이데올로기에는 차이가 있어도 개
인을 그 노예로 삼는 국가주의인 데서는 다름이 없습니다. 모든 권력은 필연적
으로 자기보다 강한 대적을 불러일으키고야 맙니다. 그러므로 국가주의가 있는
한 평화는 있을 수 없습니다. 38선의 비극은 멸망해가는 국가주의의 고민입니다.
아직 그 죄악을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했지만 그것을 확인하게 된 것은 큰 수확
입니다. 이 의미에서 우리는 불행 중에 있으면서도 큰 역사적 사명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셋째는 전체주의 시대의 동틈을 느낀 것입니다. 우리 해방의 실패는 곧 민주
주의와 공산주의의 실패입니다. 그 책임을 져야 하는 두 진영이 결국 그것을 성
취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취 못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낡아빠진 개인적 영
웅주에 잡혀 있기 때문 입니
p 281
다. 이제 인류는 이미 개인적 성장의 시대를 지나 전체의 시대에 들기 시작했
습니다. 이제 역사는 이미 개인 완성의 역사가 아니고 전체적 하나됨의 역사입
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의 모든 강국들이 치명적인 큰 문제가 있는 줄 알면서
도 해결하지 못합니다. 해결은 모든 중간적인 집단인 국가주의의 입장을 버리고
전 인류를 하나의 생명체로 아는 전체주의의 자리에 서서만 가능합니다. 국가주
의는 개인의 완성을 재촉하는 채찍이라는 데서만 그 의미를 가질 수 있었습니
다. 이제 그 시기는 이미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 전체주의는 히틀러 무솔리니 식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가짜 전체주의였
습니다. 모든 가짜는 참 것의 예고입니다. 그들은 새 시대를 막연하게 느끼면서
도 구식적인 사고방식을 면치 못해 폭력으로 그것을 이루어보려 했습니다. 그러
나 전체는 폭력으로는 올 수 없었습니다. 개인이 완전히 자라 그 자유를 충분히
발휘하는 가운데 자진해서 하는 사랑에 의해서만 도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모
든 나라, 특히 신흥국가라는 나라에서 독재주의가 유행되고 있지만 그것은 히틀
러 무솔리니의 바퀴 자리를 다시 가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것으로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실패의 원인을 여기까지 파 내려가지 않고는 앞에
희망의 빛을 볼 수 없습니다.
일제시대에 내가 감옥에 드나드는 것을 보고 민중은 멍청하게 바라보고 있었
고, 해방이 되자 언제부터 친했던 것같이 가까이 오더니, 공산당이 나오는 것을
보고는 다시 멀찍이 섰고, 소련군 감옥에 가는 것을 보고는 “저 사람은 감옥
가는 것이 일이야”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그들을 믿고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 이상 더 개인적 영웅
주의에 서서비판하는 눈으로 민중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판으로 민중
속에 들어가지는 못합니다. 민중을 믿지 않고는 전체를 알 수 없는 것이 마치
신을 믿지 않고는 신을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병아리가 제 알을 깨고 나오듯이 씨알이 저를 깨고 나오는 날이 올 것입니다.
깨기 전엔 씨알입니다. 깨면 전체입니다.
p 282
내가 겪은 신의주학생사건
그날의 소식
해방이 되던 1945년 8월 15일 나는 집 앞 채마밭에 거름을 주고 있었다. 오후
쯤 해서 내 생질 최창복이가 용암포로부터 자전거를 몰아서 들어와서 일본이 무
조건 항복을 했고 우리나라 독립이 되게 됐다는 소식을 알려주었다. 이날까지
36년 꿈에 그리던 그날이건만 막상 듣고 나니 그저 벙벙, 갑자기 흥분이 되는
것도 날뛸 생각이 나는 것도 아니었다 메고 있던 거름통도 내려놓지 않고 그저
"그래,그날이 오긴 왔구나"할 뿐, 주던 거름 마저 주려 했다. 그랬더니 창복이 말
이 용암포의 여러분들이 나와서 축하식을 같이 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그보다도 하던 일들 어서 마치고 조용히 앉아 앞으로 할 일을 생각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도 기쁘지 아니 기쁘겠냐마는 나는 축하를 해도 내 식으로 할
터이니 그대로들 하시라고 해라" 해서 내보내고는 다시 거름주기를 계속했다. 그
런데 얼마 후에 나갔던 창복이가 다시 헐떡거리며 오더니 하는 말이, 여러 사람
이 그래서는 아니된다고 꼭 나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벌써 다 모여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더이상 거절할 수도 없고, 이런 일은 도무지
p 283
지 첨이었다. 나는 생각해봤다. 왜 그들이 나를 찾을까?
나는 보통 때 나와 세상 사이에 적지않이 거리감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더구
나 1943년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일년 동안의 미결수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후
부터는 더욱 그랬다. 일본의 압박은 날로 심하지, 앞으로 다시 교사질을 할 희망
도 없지, 그래서 농사를 하지만, 내가 아무리 농꾼이 되려 해도 그들이 나를 자
기네 동무로 알아주려 하지 않았다. 서로 어울리지를 않았다. 거리에는 한 달에
한 번 이발을 하러 나가는 것뿐이었으나 누구 하나 아는 척해주는 사람이 없었
다. 돌아가는 말대로 "경찰서 형무소살이만 밤낮 가는 사람"을 아는 척해서 좋을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조금도 그들을 원망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혼자 마음이 늘 외로웠다. 그래 별다른 생각이 없이 그저 땅을 파는 것이 내 일
이었다.
이제 세상이 나를 보잔다. 무엇 때문일까? 생각 끝에 나는 알았다. 축하식도
하고 이제 앞으로 새 일이 벌어지는데 누가 그것을 이끄느냐, 그것이 그들에게
문제였을 것이다. 일본 쪽에 가까이 해서 나다니던 사람은 자연 나설 수가 없지.
그렇다고 기독교 사람이 나오면 천교도 측이 허락 아니하지, 천도교가 나오면
기독교가 따르려 하지 않지, 이런 관계여서 요구되는 것은 순전히 중립적인 인
물이었다. 이것이 평소에 벌로 가까이 다니지도 않던 나를 나와야 한다고 강요
하는 이유였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니 그럴 만하다고 수긍 되는 점이 있기도 해
서 나가기로 했다. "그래, 나를 이용하잔 것인데 이런 때는 이용당해도 좋다. 모
르고 당하면 어리석지만 알고 당하는 것은 괜찮다. 할 만큼 해준 다음엔 나는
물러난다. 내가 정치를 아느냐?" 창복이에게 그렇게 말을 해주며 따라나갔다.
나가니 상상과는 딴판이었다. 지금 인천에 와 있는 이기혁 목사가 있던 제일
교회 끝이 터질 지경으로 사람이 모였는데 일은 벌써 자기네가 다 짜 놓은 것이
므로 사양의 여지가 없었다. 무슨 말을 했던지 지금 기억이 나지 않으나 좌우간
내가 나서서 식을 주장했고 시가행진을 늦도록 했고, 그 자리에서 어쩔 수 없이
용암포
p 284
자치위원회의 위원장이 돼버렸다. 내 이름에 장자가 붙은 것은 이것이 첨이었
다.
그래서 할 일 해주고는 곧 내 밭으로 돌아온다던 것이 예상과는 달리 아주 잡
혀버렸다. 그래 계속해서 용천군 자치위원회가 조직됨에 따라 그 위원장으로 올
라갔다. 하고 싶다기 보다는 마음이 약해서 버리지 못해 맡은 일인데 세상은 참
우스운 것이어서 자리에 앉으니 저마다 와서 평소부터 잘 알았다는 것이요, 존
경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무식한 사람은 아니 그런다. 그 마음 내가 알지. 그러
는 것은 소위 행세한다는 사람들이다. 세상이 요렇구나 속으로 혼자 가엾이 생
각하며, 정말 일을 의논할 만한 친구 하나 없이, 나도 아무 구상이 없는 일 맡아
놓으니 앞이 막막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래도 또 재미있는 일도 있었다. 이 부락 저 부락을 돌면서 보노라면 평소에
는 나와는 먼 것 같은 사람들이 갑자기 친구가 된 것을 느꼈다. 이날껏 억누름
밑에서 죽지를 펴지 못하던 민중이 활기를 띠고 굉장히 대담해졌다. 그리고 바
다 물결같은 선심이 어디서 나왔을까 나라를 위해서라면 눈알이라도 빼내람 빼
날 듯한 기세였다. 더구나 보고 좋은 것은 일본 사람에 대한 태도였다. 사실 나
는 전에 만보산사건도 보았기 때문에 혹시나 일본이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옅은
흥분에 어떤 보복적인 소동이라도 일어나지 않을까, 첫날 용암포로 끌려나갈 때
도 그것부터 걱정스러웠는데, 그런 일이 하나도 없었고, 거리를 지나가다 일본
아이들이 그냥 마음놓고 전과 같이 나와 노는 것을 볼때는, 마음은 정말 착한
백성인데 하고 흐뭇한 생각이 들었다.
평안북도 자치위원회
그러는 동안에 두세 주일이 지나가고 아마 9월초였다고 기억되는데 신의주로
부터 평안북도 자치위원회를 조직하니 군대표를 뽑아 보내라는 통지가 왔다. 회
의 끝에 나와 부위원장으로 있던 이용흡
p 285
과 두사람이 가기로 했다. 이제 일의 규모가 커지는 것이었다. 위에서 말한 대
로 수염을 기르고 미투리를 신고 농사꾼으로 남은 날을 살자던 사람이니 사회에
아는 사람이 있을리가 없었다. 신의주에 가니 거기는 이미 서울에 왔다갔다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시국의 대체 형편을 좀더 짐작할 수도 있었으나, 아는 사람이
없으니 그저 일이 돼가는 것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신의주 자치위원 중에 나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오산 있을 때 학부형으로 한
두 번 만난 사람으로서 이름이 이황이라고 했는데 신문기자 노릇을 한 일이 있
었다고 한다. 그가 이끌어낸 이로서 이번에 평안북도 자치위원회의 위원장이 될
분이 이유필씨, 호를 춘산이라고 했다. 나는 첨으로 만났으나 세상에 이미 잘 알
려져 있는 듯했다. 상해 임시정부에 오래 있었고 일본 관리한테 잡혀 3년인가
징역을 마치고 나와 신의주 맞은편 안동에 살고 있었다고 했었다. 몸집에 뚱뚱
한 데 붉은 낯빛이고 인후해 뵈는 인상이었다. 긴 투쟁의 역사를 가졌으니 믿을
만한 데는 다시 말할 여지가 없으나 조직된 후 언젠가 이야기를 하다가 "우리는
이 자치위원회를 지켜 치안을 유지하다가 중국에서 정부가 돌아오는 날 고스란
히 그것을 가져다 바치면 된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는 정치에 경험이 없는 나로
서도 "너무도 단순하구나, 구식적인 생각이로구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각 고을 대표가 모여 회의 결과 평안북도 자치위원회를 조직했는데 위원
장에는 그 이유필 선생이 됐고 부위원장은 백용구라는 사람이 됐다. 그는 좌익
적인 사상을 가지는 사람이었다. 그때 신의주에는 이미 공산주의 단체가 있었으
나 그리 강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자치위원회와의 사이에는 얼마쯤 마찰이
있는 것으로 보였고, 백이 부위원장으로 되는 것도 그러한 관계에서 된 듯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문교부장의 책임을 맡게 됐는데, 생각하면 이것이 내 잘못
의 시작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일본에 굽혀본 일도 타
p 286
협해본 일도 없지만 정치적으로 반항해보잔 생각은 해보지 못했고, 또 스스로
내 성격을 보아도 정치에 적당치 않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문교부장
말이 나왔을 때 내 마음은 결코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몰라도 그
들은 나를 아노라고 강권도 했고, 또 용암포 자치위원장이 된 이래 시국에 접해
보는 동안 "이왕이면 평소에 생각하던 것을 한 번 실험해 보는 것도 좋지 않으
냐" 하는 생각도 있어서 끝내 사양하지 않고 받아버렸다.
한 달 동안 열심이람 열심으로 일했다. 내가 아는 한으로는 믿을 만한 뜻 있
는 사람으로 교육진영을 짜려 했다. 어느 날까지 그 상태가 계속될지, 일의 결과
가 어찌될지 아무도 알 사람이 없었지만, 그래도 모두들 일을 해보려고 활발히
움직였다. 모르지, 정말 그랬는지 그때 벌써 속으로는 딴 생각을 했는지 모르지.
하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러던 9월말경에 가서 갑자기 놀라운 소식이 들어왔다. 소련군이 들어온다는
것이다. 어느 날인가 날짜를 기억 못하는데 그날 마침 위원들이 모여 정무회의
를 하고 있었는데, 누가 들어와서 소련군이 시내로 들어온다고 전해주었다. 그
소리를 듣더니 회의하던 사람들이, 소의 무슨 부장 무슨 부장 하는 것들이 서로
의논할 겨를도 없이 오다간다 소리 없이 제각기 다 뛰쳐나가 버리고 자리에는
위원장과 나 두 사람이 앉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튿날 아침 청사에서 서로 만나니 하룻밤 새에 대변동이다. 거의 다 공산당
이 돼버렸다. 이유필 선생이 비서격으로 신임하는 청년이 하나 있어서 일본서
무슨 전문엔가 다녔다고, 내가 보기에도 가장 똑똑한 지식 청년으로 보였고, 그
도 무슨 부장인가 맡고 있었는데 그 사람조차 공산당 편으로 돌아버렸으니 이
위원장의 심경이 어떠할까 짐작할 수 있었다.
소련군이 들어오자마자 온 시내는 공포 분위기에 싸이게 됐다. 첫째로 한 것
이 상점 약탈이었다. 시계,만년필은 닥치는 대로 "다와이"(내라)다. 그 담은 여자
문제다. 어디서 여자가 끌려갔다, 어디서
p 287
무슨 일이 있었다 하는 소리가 날마다 들려왔다.
위원회로서 소련군 장교들을 환영하는 모임을 하기 위해 의논을 하는데 부위
원장이라는 사람의 첫번 소리가 미인계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몹쓸 데를
왔구나 후회하는 생각이 났지만 이제 갑자기 빠져나갈 수도 없었다. 한 손에 무
슨 알코올 병을 들고 한 손에는 냉수컵을 들고 마셔대는 소련군, 인간으론 보이
지 않고 짐승으로만 보이는 공산당 위원들, 나라가 뭔지 아냐 모르냐 물어보고
싶은 재재거리는 기생들을 번갈아 보며 그 자리엘 앉았자니 살아 있는 것 같지
를 않았다. 연회가 끝나갈 무렵 보안부장 한웅이란 자가 피스톨을 꺼내어 쐈다.
일동이 놀랐으나 뛰어 일어선 사람은 없었고 천장을 향해 쐈으니 사람이 상하지
는 않았다. 위협하는 것이었다. 옆의 소련 장교가 빙그레 웃고 빼앗아버렸으나
인간의 짓이라 할 수 없는 일이고, 누가 봐도 그들 사이에는 뒷면에 무슨 오고
감이 있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부터도 못했지만, 누구도 그 자리에서도 그
후에도 거기 대해 항의를 한 사람이 없었다.
이튿날 일본 사람을 모두 한 수용소로 모으고 여자를 순번으로 징발해내어 소
련 군인에게로 보내기로 했다. 일본 여자들도 그것을 승락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삶이란 뭐냐 또 한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일이 다 말할 수도 없지
만 그날 부터 일은 자꾸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들려오는 것은 그저 하룻밤 새
생긴 공산당원의 횡포뿐이다. 정체 알 수 없는 특무대란 것이 생겼다. 그저 횡행
천하다. 그러니 해방으로 인해 왔던 그 감격, 그 바다같이 넓어졌던 민중의 마
음,서로 믿고 서로 협력하고 서로 일하려던 그 열심을 다 달아나버리고, 있는 것
은 공포,불안,분개,낙심뿐이었다.
소련군 사령관이 오자마자 환영식을 했는데 그 자리에서 그는 분명히 말하기
를 "우리는 당신들에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고, 당신들이 원하는 대로 어떤 형
태의 정부를 세워도 자유입니다" 했다. 그러나 그것은 말뿐이고 사실은 소련 일
생으로 기울어지는 것이었다. 벌써 거리마다 레닌,스탈린 초상이 나붙지, 거리
이름을 레닌
p 288
가 스탈린 광장으로 고치지, 학교에서 소련말을 가르치기 시작하지, 그러더니
평양에서 5도연합회의가 열린다고 통지가 왔다. 위원 일동이 평양을 나갔다. 내
가 조만식 선생님을 뵈온 것이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아무 말씀도 아니하고 가
만 앉았는 그 모습이 말할 수 없이 괴로워보였다. 분과로 모여 토의도 하고 했
는데 이제 하나도 그것을 기억할 수 없다. 한마디로 해서 모든 것이 우리 생각
과는 어긋나는 것뿐이었다.
5도회의에서 돌아온 후인가 그전인가 잘 알수 없으나 최용건이가 신의주를 왔
다. 그는 같은 용천 출신이요,오산학교에서 한반에 있었으므로 잘 아는 처지다.
한반에 있다가 스트라이크를 하고 학교를 나갔고 그후 다시 학교에 돌아왔다가
또 스트라이크를 하고 나가서는 이날껏 중국에 가 있었다. 들리는 말에 연안군
에 있었다고 했다. 어느 만큼 애국운동을 했는지 알 수가 없지만 공산군 편으로
나라에 돌아온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어느 날 동창 몇이 모이기로 했었다.
그러나 만나고 난 후 나는 실망했다.
나라를 떠나 몇십 년 만에 돌아온 사람으로서 정말 나라를 위할 생각이 있다
면 우리와 의논하지 않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청하기 전에 제가 먼저 우
리를 찾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제 모처럼 환영한다고 만났는데 한 마디 말
이 없었다. 전날 학교에 있을 때에 지나본 것으로 보아 첨부터 그리 큰 것을 기
대는 아니했지만, 그리고 따져 말해서 그동안 몇십년 독립군 노릇을 했는지 알
수는 엇지만, 하여간 오늘 조국을 위해서 들어왔으면 옛친구 아니고는 나라의
실정을 알 길이 없을 터인데, 그것을 하려하지 않았다.
나는 사실 첨부터 주의해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한 말이 없었다. 그러므
로 그때 벌써 나는 믿지 못할 사람으로 단정해버렸다. 그는 조만식 선생님이 안
아서 길러낸 사람이다. 그런데 자기 말대로 선생님을 달래기 위해 열아홉 번 찾
아뵀노라고 했다. 그렇게 듣고 나면 그래도 종시 고개를 돌리신 선생님의 위대
함에 감탄하는 대신 최용건의 속살이 무엇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김일성의 이
름도 그
p 289
때부터 차차 나돌기 시작했다. 그때는 아직 이북 정부가 수립되지 않은 때요,
이제 그것을 하려는 참이었다.
'우리청년회'의 조직
내가 문교부장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우리청년회'가 조직되었다. 아마 지
금 이만갑 교수도 그때의 한 사람이 아니었던가 생각하지만 그 회원들의 이름을
알 수는 없고 다만 회장이 김성순이었던 것만은 기억한다, 한마디로 그들은 신
의주 내지 평북의 인텔리의 정예분자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상적 경향을
말하면 대체로 민족주의적,자유주의적인 것이었다.
신의주 용천 일대는 땅이 평평하고 기름져 전국에서 유수한 쌀고장이므로 일
반으로 자작농이 많은 비교적 넉넉하게 사는 곳이었다. 그렇기에 일제 때 전국
적으로 유학생이 다른곳보다 엉뚱하게 가장 많은 곳이 이곳이요, 기독교가 가장
왕성한 곳도 여기였다. 동양서 제일 크다는, 어떤 사람은 세계에서 제일이라는
영락교회는 사실 신의주 용천교회다. 한경직 목사 자신이 용천에 오래 있었고,
그 교인이, 지금은 물론 다르지만, 서울서 첨으로 설 때는 주로 그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그렇듯 구한국 말년 이래 지식, 사상이 가장 진보된 곳이 이 지방
이었다. 이제 이 우리 청년회는 그러한 층의 새로 오는 새 역사의 부름에 대해
일어나는 자각운동 혹은 행동의 첫걸음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회를 조직하면서 청년들이 나한테 왔다. 회장이 와달라 했으나, 나는 대답하기
를 나는 당신들의 활동은 전적으로 지지하지만, 도리어 그러느니만큼 내가 직접
회장이 되면 하고 싶은 일도 못한다. 그러니 직접 나서는 것보다는 뒤에서 응원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 그들도 이해하고 내가 고문이라는 이름을
띠고 이따금 만나곤 했다.
가족은 운명을 같이하는 단체지만 가족끼리는 도리어 의식적
p 290
인 단결은 없다. 의식적인 단결은 도리어 그 가족을 멸망시키려는 도둑편에서
먼저 한다. 그러나 도둑의 단체가 생기면 가족도 자연적인 정의의 하나됨만으로
도 아니되고 의식적으로 단결해 부서를 짜고 활동해서만 그 도둑의 단체를 이길
수 있다.
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사실 민족주의적, 자유주의적인 사상은 우리의 역
사적 단계에서 전체를 이끌어갈 수 있는 정상적인 이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특히 계급적 대립이 심하지 않았던 이북, 이북 중에서도 평안도 지방은 그렇다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거기 공산군대가 들어왔다. 권력에 대해 야심있는 분자
가 거기 달라붙었다. 이리해서 일종의 어거지 혁명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러면
사회 양심이 멍청하고 있을 수 없다. 사회의 안전한 발전을 위협하는 그 세력에
조직적으로 대항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의식적으로 어느 만큼 자각이 됐었는지
모르나 역사적인 의미를 판단할 때 우리 청년회와 하룻밤새 만들어진 사이비 공
산당 사이에는 충돌은 운명적인 것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의 비인도적인 회표가
늘어가면 늘어갈수록 그 충돌은 표면화해가고 격화되어갔다.
공정하게 전체의 역사적인 운명을 생각해서 그 어느 편이 이겼어야 할 것이냐
하면 물론 우리청년회가 발전하고 마음껏 활동했어야 할 것이다. 물론 그들에게
문제가 없지 않다. 그들은 일반으로 자작농 이상의 가정에서 났으니만큼 부르주
아적인 사상 경향을 청산치 못했으니 앞으로 그것을 하지 않고는 역사가 요청하
는 혁명을 지도해갈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그들에게 하나의 큰 과제였던 것
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소련 세력에 등을 대고 하는 비양심적인 무리에게
사회를 맡길 것이냐 하면 적어도 공정한 양심이 죽지 않은 사람인 담엔 그렇다
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아, 슬픈것은, 역사는 반대 방향으로 나가고
말았다.
학생사건에 우리청년회가 어느 만큼 관계됐느냐 그것은 알 수 없다. 내가 아
는 한으로는 직접적인 어떤 관계가 나타난 것은 없다.
p 291
회장 김성순이 사건 후에 시베리야로 끌려간 것은 물론 공산주의자들이 그렇
게 의심했기 때문에 된 일이겠지만, 내가 아는 한으론 없다. 일이 터지기 전 바
로 하루 이틀 전이라고 기억되는데, 밤에 모임이 있어서 내가 가서 밤 늦도록
이야기하고 왔는데 그때에 그런데 관한 아무런 소리도 기미도 없었다.
법적인 책임은 없다 하더라도 도의적으로 사상적으로는 영향이 있지 결코 없
다 할 수 없을 것이다. 선배들의 생각이나 하는 일은 후배 학생들에세는 크게
작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직접적인 관계야 있건 없건 신의주학생사건
이라는 하나의 큰 역사적 사건의 진원지를 찾는다면 우리청년회를 내놓고 말 할
수 없을 것이다.
용암포사건
어떠한 큰 사건도 도화선 없이는 되지 않는다. 4.19가 마산사건으로 인해 터졌
고 마산사건은 또 대구사건 때문에 일어났던 것같이 신의주학생사건에 앞서 가
는 것이 용암포사건이다.
용암포는 내 고향이지만 나는 그때 신의주에 가 있었으므로 그 자세한 것을
모른다. 한마디로 해서 그것을 그때 내 뒤를 이어서 군위원장으로 있던 이용흡
의 횡포 때문이다. 그는 독일 유학도 했다고 하나 올바른 지식이 있는 것 같지
도 않고 일제시대에 무엇 했다는 것이 없이 해방 후 불쑥 나타나 이리저리 뛰어
다니는 사람이었는데 성질이 온건치 못했다. 그러나 소련군이 오기 전까지는 그
렇지도 않았는데 그 온 후부터 아주 사납게 굴기 시작했다. 군위원장 자리에 있
으면서 마땅치 않은 일이 많아 민중의 원망이 많았는데 그것이 쌓여가다가 분개
한 학생들의 질문인가 데모인가 무슨 그 비슷한 일이 있어서 그것을 지독히 비
인도적으로 탄압해서 사회의 격분을 일으켰다.
민중이란 약하다면 참 약한 것이다. 그렇게 불상사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때마침 앞에서 말한 최창복이가 왔기에 내가 "그래도
p 292
우리 마을 사람들이야 아니 그랬겠지" 했더니 그 대답이 "뭐요, 우리 동리 사
람들이 한층 더한 걸요!"했다. 듣고 참 슬펐다. 사랑을 하자 해서 아니라, 나도
모르는 새 부르주아 의식에 젖어서가 아니라, 해방될 때까지 나는 그래도 인간
적으로 그들을 대하노라 했고 그들도 나를 믿는다고 생각했는데.
하기는 당초에 공산당이 들어오면서부터 한 수법이 그렇다. 동리안에서도 아
무리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의 눈으로 봐도 "그건 사람이 아니다"라는 쪽지가 붙
은 사람들을 골라서 흡수해가지고 혁명이라는 이름 아래 갖은 악감정을 불어넣
어가지고 소위 민청이니 여청이니 하는 것을 조직해서 평지풍파로 없는 계급적
감정을 일부러 만들어서 간 데마다 사회를 파괴시켰다. 그것이 그들의 소위 계
급투쟁의 과학적 방법인 것을 내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인간 양심을 이렇게 약하단 말이냐. 인심유위,도심유미란 말은 아는 줄 알았더니
알고도 몰랐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생각있는 사람들의 격분을 일으켰는데 거기 또 하나의 불
똥이 떨어졌다. 법원점령사건이다. 일제 때 쓰던 재판소를 그냥 재판소로 써 왔
었는데 공산당이 위원회에 청원이나 교섭을 하는 일도 없이 하룻밤 새 불법으로
마구 점령을 해버렸다. 그렇게 해서 공산당의 하는 일은 나날이 거만하고 사납
고 폭력적이 돼갔다. 그것이 일을 일으킨 가장 가까운 원인이었다.
11월 23일
그렇게 일이 점점 고성낙일이 돼가는 것을 보고 나는 더 있고 싶은 마음이 없
었다. 어느 날 이 위원장을 보고 사면할 뜻을 말했다. 그는 내 손을 잡으며 "여
보 그만두어도 같이 그만두도록 합시다" 했다. 말을 듣고 영감을 보니 참 불쌍했
다. 비서 최영춘이 있어서 돕기는 하나 공산주의자들이 최영춘을 미워하
p 293
는 것이 보통이 아니다. 나는 본래 춘산 선생을 안 것도 아니고, 여기서 만난
것이지만 이 어려운 때에 차마 그를 혼자 버려두고 갈 수가 없었다. 간다 해도
나도 평안을 찾아가는 것도 아니고 어디 평안한 곳이 있을 리도 없지만, 이 어
려운 자리에 늙은이를 더구나 자기를 지지하고 돕는다 했던 놈들한테 배신당한
이를 차마 나는 모르겠소 하고 갈 수가 없었다.
또 그보다도 더 어려운 것은 내 손으로 끌어서 교육계에 세웠건 모든 사람들,
그들이 나를 믿고 왔다 해야 할 터인데 이제 어떻게 그들을 사지에 두고 나만
나가느냐? 그 중에도 마음에 걸리는 것이 김희철씨였다. 내가 오산을 떠난 후
오산에 가 있었건 일이 있고, 그 후 알게 되어 대번에 서로 마음이 허락되어 일
을 같이 해보자고 이끌어왔는데 이제 내가 물러서면 그의 입장은 더 어려워질
것이 뻔한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 이리해서 한 번 났던 생각을 누르고
하루하루를 지냈다. 공산당 놈들도 내게 대해 정면으로 뭐라 하지는 못했다. 사
상적으로 원수로 알 것이야 물을 필요도 없는 일이지만 내가 조금도 사사로운
생각을 품지 않는 것을 저희도 그러고 세상이 다 아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
었을 것이다. 그런데 잡는 시기가 왔다.
11월 22일, 그러니까 사건 전날 어디서 보도가 들어오는데 시내에 있는 고등
학생들이 일제히 일어나 위원회와 공산당 본부에 질문을 하러 들어오려 한다고
했다. 그래서 곧 학교 교장에게 내가 직접 전화를 걸어서 그러게 하면 큰일이
날 터이니 잘 타일러서 미리 막도록 하라고 했다. 그것은 내가 공산당의 소가지
가 어떤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학생들이 절대로 잘못 아니지, 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해서 죽일 수는 없었다.
이튿날 23일 아침, 그때 나는 위원회에 올라온 이래 친척되는 함국현씨 집에
서 자고 먹고 있었는데, 후일에 하는 말을 들으면 아침에 밥을 먹으려다가 젓가
락으로 상위에 방아를 찧더라는 것이다. 일은 다가오고 나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생각에 답답해서
p 294
그랬을 것이다. 출근을 해서 좀 있다가 정오쯤 되니 학생들이 들어온다는 소
식이 들렸다. 청사 안이 긴장하고 사람들이 이리갈까 저리갈까 당황해하기 시작
했다. 총소리가 몇 방 땅땅 하고 났다. 방을 뛰어나와 정문 앞을 나가니 저기 학
생들이 돌을 던지며 오는 것이 보였다. 보안부장 한웅이란 놈, 그 부하 차정삼이
란 놈이 "쏴라! 쏴라" 다급하게 하는 소리가 들렸다. 다다다다 학생들은 티끌을
차며 도망했고 문 앞까지 들어왔던 몇이 거꾸러졌다.
그 광경을 보고 저기 멀거니 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건만 아무도 가까이 오려
하지 않았다. 청사 안에 직원도 여러 백 명이건만 어디 갔는지 뵈지도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사무실로 뛰어들어가 문교부 직원 몇을 데리고 나왔다.가보
니 셋이 넘어져 있지 않나, 까만 교복에 모자를 쓴 채 엎어진 것도 있고 자빠진
것도 있었다. 쓸어안아 일으켰다. 죽었구나! 죽었구나! 26년이 지난 오늘 이 글을
쓰면서 쏟아지는 눈물을 막을 길이 없어 글자를 완전히 이룰 수 없지만 그때는
눈물도 나올 수 없었다. 아직도 따끈따끈한 몸인데 눈을 번히 뜨고 말이 없었다.
왜 죽었냐? 왜 죽었냐? 둘은 번써 숨이 끊어졌고 하나는 아직 숨 기절이 있었으
나 가망이 있어 보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는 몇이서 병원으로 안고 갔다. 그 이
름들이 무엇이었는지 오늘까지도 모른다.
병원에서 돌아와 도청 정문에 오니 한 사람이 앞을 막아서더니 "이것만이요,
더 큰것을 보겠소? 갑시다" 했다. 직감적으로 알기는 했지만 비겁하게 회피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럽시다"하고 따라가니 간곳은 문제의 공산당 본부였다. 뜰에
썩 들어서니 몇인지는 알 수 없으나 까만 교복을 입은 것들이 여기저기 쓰러져
있었다. 그때 인상으로 한 이십명은 될까?
소련 군인이 뜰에 꽉 차 있었다, 그러더디 내가 온 것을 보고 한 사람이 일어
서서 연설을 시작했다. 그것은 한국 2세로서 소련 군인인 사람이었다. 그보다 며
칠 전 소련군 교육고문이 찾아와서 면회를 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이 사람이 통
역으로 왔었다. 그때는 자기
p 295
부모는 함경도서 났다는 이야기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아주 친절히 하고 갔는
데 오늘은 태도 일변이다. 러시아 말을 내가 모르니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모르나
그 태도와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흥분해서 하는 것으로 보아서 나를 이 사
건의 장본인이라고 하는 듯했다. 그 소리를 듣더니 소련 군인의 총칼이 일시에
쏵 하고 내 가슴으로 모여들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이상한 것이 마음이 그렇게 평안할 수가 없었다. 정신이 똑
똑했다. 지금도 그때의 내 모양을 그리라 해도 그릴 수 있다. 숨결이 높아졌다는
기억도 겁이 났다는 기억도 없다. 열인지 스물인지 알 수 없는 총부리와 칼과
피스톨이 내 가슴에 방사선형으로 와 닿았을 때 번듯 내 속에 비친 말은 "오늘
은 이렇게 가게 되는 구나!" 하는 것이었고, 그 다음 순간 "이왕 죽는 것이면 비
겁하게 해선 못쓰지" 하는 것이었다.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 자리에 그
대로 서 있었다. 군인들의 얼굴을 본 기억도 없다. 그래도 하나님이란 생각, 믿
는다는 생각, 옳은 도리라는 생각, 평생에 배우고 지켜온 것이 내 속에 살아 있
었다. 스스로도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었다.
소련 장교로 뵈는 한 사람이 나서더니 그 총칼 떠밀어 제쳤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다음 순간 그 물결은 다시 밀려들었다. 또 떠밀었다. 또 쫓겨갔다가 또
밀려들었다. 그렇게 하기를 몇 차례 한 후 장교는 이겼다. 군인들이 저만큼 물러
섰다. 그 순간 다른 물결이 닥쳐왔다. 이번에는 우리나라 공산당원들이 하는 뭇
매질이었다. 또 선채로 맞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가 외쳤다. "이렇게 해서
좋으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옷이 찢어지고, 매질은 계속됐다. 나는 그대로
버티고 서 있었다. 아픈 감각도 없었다. 마지막에 강한 타격이 뒤통수에 와닿자
나는 머리가 띵해 의식이 없어지는
p 296
것을 느꼈다. 내가 정신을 잃는구나 하는 것까지는 기억하는데 그후는 알 수
없다. 얼마 후에 정신이 드니 나는 여러 사람에게 들리어 방안으로 들어가는 것
이었다. 찬물이 끼얹어지고 마시라는 대로 마시고 나서 정신이 들어보니 둘러선
사람 중엔 알 수 있는 얼굴도 한 둘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노인희라는 청년이었
다. "아, 선생님 안됐습니다" 어쩌구 하는 말을 했다. 그 순간에도 "진심으로 하
는 말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는데 소련 장교가 하나 왔다. 먼저 그 사람인지 다른 사람인지 알 수 없
으나 나서라는 것이었다. 총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고 나더러 앞서 가라는 것이
다. 반항하고 싶지 않았다. 가라면 가지, 떨리지도 않았다. 도망할 생각도 나지
않았다. 다만 비겁하게 굴어서는 사람이 아니란 생각은 여전히 지구의 인력처럼
맘속에 작용하고 있었다.
사실 나는 그때 당하고도 다 잊었는데 후에 그 광경을 봤던 사람들이 말을 해
주니 그것이 어떻게 아슬아슬한 장면이었던가를 짐작 할 수 있지만, 나는 그때
는 조금도 겁나는 생각이 없었다. 남이 말해주는 데 의하면 총을 재어 들고 앞
서 가라는 것으 자칫하면 마지막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나는 그런 줄은
모르기도 했고 죽기는 첨부터 다 죽은 것으로 결심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망갈까
어쩔까 하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그래서 그랬는지 총살은 아니 당하고,
그때 거기 와 있다가 같이 붙들린 내 일가 매제되는 조공술과 같이 둘이서 시내
에서 한 5리나 되는 비행장까지 끌려나와 유치장으로 들어가게 됐다.
그랬다가 어슬어슬 해가 저무는 무렵 나만이 다시 끌려나와 철도 호텔로 갔
다. 무엇하려는 것인가 영문을 모르고 있는데, 좀 있더니 소련군 사령관한테로
데리고 갔다. 이 위원장도 거기 와 있었다. 저녁을 먹으라고 가져다주나 먹을 마
음이 없었다. 가만 앉아서 생각에 저 영감이 강경한 태도로 항의하여야 내가 나
갈 수 있는데, 그가
p 297
한 마디 말도 없었다. 조금 있다가 그들은 자기 곳으로 가고 나는 끌려 도 경
찰부 유치장으로 들어갔다.
쉰 날
살문이 육중한 소리로 내 귀에 덜컥 하고 닫히고 감방 안에 주저 앉으니 모든
일이 꿈만 같았다. 해방이 됐다기에 이제 밝은 날이 오는 줄 알았는데 이게 무
슨 일이냐? 내게 잘못이 없으니 마음은 평안하고 몸도 감옥살이는 여러 번 해봤
으니 별로 겁날 것이 없었다. 이것이 나의 다섯번째의 감옥 길이다. 첫번은 1923
년 일본에 처음 갔을 때 동경 지진통에 한국 사람 모조리 학살할 때에 끌려가서
하룻밤 자고 나온 것이고, 두번째는 오산에서 1930년 남강 선생 돌아가신 후 난
데 없는 ML당 사건의 연루자라는 이름으로 정주경찰서에 가서 한 주일 있은
것, 세번째는 1940년 평양 송산리에 농사학원 하러 나갔다가 계우회 사건에 걸
려 들어가 대동경찰서에 1년 있은 것이고, 네번째는 1942년 성서조선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와서 1년 있은 것이다.
이번은 그날 당장 죽지 않은 것도 다행이람 다행이지만, 이제 다시 나갈 길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공산당이란 법도 도덕도 없는 세계아닌가? 저희에게 맞지
않으면 인정도 도리도 없다. 그래서 첨부터 나가려니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다
만 잊을 수 없는 것은 어머니 일이다. 속이 그리 약한 분은 아니요 의리도 알고
신앙도 깊은 분이니 노상 어쩔 줄 몰라 하지야 않겠지만, 그전에도 내가 감옥에
갔을 때는 자기도 얼마나 심한가를 알아본다고 여울 반 밖에 나가 새워보는 마
음에 오늘 또 이렇게 된 것을 보고 그 마음이 어떠할까? 더구나 아버지는 내가
대동경찰서에 있는 동안 세상을 떠나서 이제 믿을 건 나뿐인데, 그 내가 이렇게
됐으니 이제 집 일을 어떻게 꾸려나갈까? 평생에 시란것을 써본 일이 없다가 이
름이나마 시라 하여 쓰고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을 이때 어머니 생
p 298
각 때문에 한 것이었다. 허락되지 않은 조건 아래서 한없는 느낌을 표현해보
자니 자연 시라는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얼마 동안은 가족까지도 일체 면회를 허락하지 않았다. 간수는 소련 군
인이 하나 있을 뿐인데 그리 까다롭지는 않았고 최영춘이 들어 있었는데 그는
노래를 잘 불러서 밤이면 서로 노래를 불러가며 스스로 위로하기도 했다.
아무도 면회 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밖의 소식을 알 길이 없었는데
한 주일도 더 지나서 비로소 첫 면회를 받았다. 본래 우리청년회와 비슷하게 여
자청년회가 있었는데 그것을 이끌어가는 사람이 계명선,김일선 두 분이었다. 계
명선씨는 나와 연갑되는 용암포 사람이고 김일선 씨는 전라도 사람이지만 어린
시절에 계명선씨께 배운 일이 있는 관계로 늘 같이 살며 용천지방에 많이 와 있
었다. 청년회를 조직하자 내가 문교부에 있는 탓으로 자주 왕래가 있었는데, 소
련 사람들은 공공단체는 상당히 존중하는 줄을 아는지라, 그 권리를 가지고 사
령부에 대들어 나를 면회할 허가를 얻어가지고 온 것이었다.
가족도 엄두를 못내는 생지옥에 여자들의 몸으로서 거기까지 들어온 것을 보
니 그 고마움을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후 얼마동안을 며칠에 한 번
씩 꼭꼭 먹을 것을 사가지고 왔다. 왔다 간 후에 그것을 되풀이되풀이 생각해보
고 또 올 날을 기다리는 것이 나의 단 하나의 위로였다. 몰래 들여준 연필과 종
이조각으로 기다리는 며칠 동안데 생각한 것을 적었다가 온 때에 그것을 주어
보내곤 했다. 어머니 생각, 나라 생각에서 시작해서 여러가지 느낌을 썼으나 그
들에 대한 따뜻한 정을 느낀 것을 적은 것이 가장 많았다.
심문은 소련 사람이 했는데 그것이 가관이었다. 말이 통해야 심문을 하지. 통
역이란 것이 하르빈서부터 데리고 온 일본 갈보인데 그들의 소련말 실력 정도는
알 수 없으나 도대체 그 지식 정도가
p 299
형편없었다. 역사 지리 해도 그것이 무엇인지를 모를 정도다. 그러니 거기다
내 운명을 맡기고 심문을 당하는 내 신세란 우스운 것이었다.
그래도 일제시대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심문 조서를 꾸미는 데는 내 머리를
썼다. 일본 형사만 해도 이따금은 인정에 호소해서 나를 이해시킬 수 있는 일이
있다. 그러나 이들에겐 첨부터 불가능할 것을 알았다. 그렇기 때문에 물적 증거
가 있지 않는 한은 딱 잡아떼기로 했다. 그것이 효과가 있어 그랬는지 김일선
씨 말대로 김일성이 그때 바로 나서려 하는 때이므로 민심을 얻기 위해 정치적
으로 해서 된 일인지 알 수 없으나, 하여간 다시 나오려니 생각은 하지도 못했
는데 꼭 50일을 지나고 갑자기 나가라는 바람에 나왔다. 사실 김일선,계명선 두
분은 그때 그 불편 위험한 상태에서도 평양까지 왔다갔다하며 내 구명운동을 했
다.
최영춘 씨는 참 좋은 분이었는데 종내 나오지 못하고 시베리아로까지 끌려갔
는데 그 후 어찌 됐는지 알 길이 없다. 그가 나오지 못하게 된 데 대해서는 이
런 이야기가 있다. 하나는 공산당놈들이 집어먹은 것 때문이라는 것, 사실 그는
아무 죄도 없었다. 다만 이유필 씨를 진심으로 도왔다는 것뿐이다. 그런데 우리
나라 공산주의자들이 소련 사람한테 나쁘게 보고를 해서 그러했다는 것이다. 그
리고 또 한 가지는 심문을 다 한 다음 무엇이나 할 말이 있거든 하라고 하니,
이가 그것을 곧이들어 이날까지의 공산당의 잘못된 행길을 일일이 들어 말했다
는 것이다. 나도 그것은 그 자신의 입으로부터 심문받고 나온 후에 들은 기억이
있다.
물론 그의 말은 다 사실이지 거짓말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가 그것을 심문 관
리에다 말했다는 것은 잘한 일이 아니었다. 경찰이나 헌병은 아무리 인정미를
뵈는 듯해도 거기 넘어가서는 아니된다. 언제나 심문대에 앉을 때는 저 사람과
나는 이해가 근본적으로 서로 다르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아무리 그럴듯
한 소리를 해도 농담이라도 그것은 결국은 나를 잡자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최영춘
p 300
씨 경우도 혹시 그렇지 않을까? 하여간 지금까지도 잊지 못하는 아까운 사람
이다.
갑자기 턱 내놓으니 어디로 갈까? 아무리 가까워도 미안한 일이 되지 않을 데
로 가야지. 그래 여자청년회로 갔다. 내 마음은 순 인간적인 열린 마음으로 갔을
뿐이었다. 한 주일을 유하고 용암포 집으로 내려갔으나 나는 다른 사람들이 그
것을 색안경으로 보리라는 생각은 도무지 못했다.
간수의 눈을 피해가며 휴지 조각에 몇 수씩 적어 내보낸 글이 나와보니 그대
로 정서가 되어 책으로 매여 있었다. 삼백 수가 넘었다. 곧 인쇄를 하자 하며 제
목을 묻기에 생각 끝에 '쉰 날'이라고 했다 있는 날 수가 쉰이니 쉰날이요, 격에
도 맞지 않는 정치한다 나섰다가 잡혀가 썩고 썩다가 왔으니 쉰 날이요, 내혼은
그동안 편안히 쉬었으니 또 쉰날이다.
살아난 줄 알았으나 나와 보니 산 것이 아니었다. 1946년 1월 11일에 나왔는
데, 그해 12월 24일 바로 크리스마스 저녁 때 마침 내 맏딸 은수가 첫 아기를
낳게 됐고 집에 아무도 없기 때문에 내가 가 있었는데, 난데없이 보안대 사람이
오더니 또 가자는 것이었다. 그래 끌려가서 또 한달을 있었다.
또 놔주기에 놔주는 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내보내는 대신 한 주일에 한 번씩
보안서에 오라는 것이었다. 첨에는 멋모르고 갔다. 지방에 어떤 사정이 없느냐
묻는 것이었다. 별일 없다고 몇번은 넘겼으나 나중에는 화를 내고 아주 사람의
이름을 지명하면서 그 사람의 뒤를 밟아 보고하라는 것이다. 그제서야 아, 스파
이질을 하라는구나 알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때 이유필씨 후임으로 위원장으
로 있던 내 존경하는 선배인 백영엽 목사 아닌가? 그것은 죽어도 못할 일이었
다. 에라 아주 쉴 곳으로 가자, 38선을 넘을 결심을 했다.
1947년 2월 26일 문간에 기대서 "내 생각 말고 어서 가거라!" 하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뒤에 두고 떠나서 영 돌아갈 수 없는 길인
p 301
줄은 모르고 그래도 머지않아 일이 바로 되겠지 하며 나를 이남으로 넘겨주기
위해 일부러 박천서 이백 리 넘는 길을 걸어온 박승방씨의 뒤를 따라나섰다. 그
렇게 온 이곳이 이렇게 쉴 곳이 못될 줄은 알지도 못했다.
그날에 총을 맞아 죽은 혼들인들 어찌 평안히 쉴 수 있을까?
p 302
하나님의 발길에 채어서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내가 퀘이커 모임의 회원이 된 이후 옛날의 신앙 친구들로부터 “왜 퀘이커가
됐느냐?” “정말 됐느냐?”하는 질문을 종종 받습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싱긋
이 웃고 맙니다. 옛날 중국 시인 이백의 시구에;
문여하사처벽산
소이부답심자한
이란 것이 있습니다. 서울을 마다하고 두메산골에 와 사는 시인을 보고 너는
어째서 번화한 서울을 버리고 이런 궁벽한 산골에 와 사느냐 묻지만, 자기는 싱
긋이 웃을 뿐이지 아무 대답을 하지 않는다, 대답 아니하는 것은 내 마음이 스
스로 한가하기 때문이다. 무엇에 끌려서 이래야겠다 저래야겠다 하는 것이 없다,
그저 그러고 싶으니 그렇게 하는 것뿐이라는 말입니다.
내 심정도 말하자면 그러하단 말입니다. 퀘이커가 됐음 어떻고 아니 됐음 어
떻습니까?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대답 아니하는 것 혹
p 303
은 못하는 것이 정말 내 대답입니다.
그래도 내 심정을 몰라보고 계속 추궁해 묻는다면 내 대답은 “됐담 된 것이
고 아니 됐담 아니 된 것이고”입니다. 됐다 할 수도 없고 아니 됐다 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됐다” 해도 그들은 오해할 것이고 “아니 됐다
” 해도 그들은 오해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됐다” 해도 거짓말쟁
이가 되고 “아니 됐다” 해도 거짓말쟁이가 됩니다. 혹은 반드시 한 가지 모양
으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을 스스로 좀 아는 나이기 때문에 구태
여 밝혀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오해 받게만 마련이기 때문에 받아도 좋
다 하는 것입니다. 거기가 마음이 한가하다는 데입니다.
“정말 됐느냐?” 하고 묻는 것은 됐다면 큰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러나 되기는 새삼 무엇이 됩니까 사람들은 겉에 나타나는 현상을 보고 됐다 아
니 됐다 해서 기뻐했다 슬퍼했다 하지만, 소위 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퀘이커가 됐다 해도 내가 나 이상이 될 것 없습니다. 내가 퀘이커가 아니 됐다
해도 내가 나 이하가 될 것 없습니다. 이래도 나요, 저래도 나입니다. 내가 나이
기 때문에 이렇게 할 수도 저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 내가 나대로인데 무
슨 문제가 될 것 있습니까? 나는 무엇이 돼서 된 것이 아니라, 됨이 없이 되어
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소위 된다는 것이 그리 크게 문제될 것 없습니다.
나는 되자는 것이지 되자는 목적과 그것을 위해 하는 힘씀이 없다면 나는 사
람이 아닙니다. 되고 되고 한없이 끝없이 되자는 것이야말로 사람입니다. 돼도
돼도 참으로 될 수는 없는 것을 돼 보자고 시시각각으로 기를 쓰고 애를 쓰는
것이 삶이란 것입니다. 내가 퀘이커 모임의 회원이 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나는 퀘이커가 된 것은 아닙니다. 사실이라 하지만 사는 결코 실은 아닙니다. 나
타나 뵈는 것이 참은 아닙니다. 도대체 퀘이커는(퀘이커만 아니라 모든 참이 다
그렇지만) 돼서 될 수 있는 것입니까? 만일 돼서 될 수 있는 것이 퀘이커라면
나는 퀘이커는 되지 않았을
p 304
것입니다. 돼서 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돼서 무엇을 합니까? 될 수 있는
것보다 될 수 없는 것이 참으로 문제입니다. 될 수 없기 때문에 되자고 애를 쓰
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될 수 없는 것이 되자고 애를 쓰는 동안에 되어진 것이
나라는 것이요, 또 퀘이커일 것입니다.
나는 퀘이커가 되자고 이 세상에 온 것은 아닙니다. 퀘이커만 아니라 무엇이
되자고 온 것도 아닙니다. 종교가 나 위해 있지 내가 종교 위해 있는 것이 아닙
니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예수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
면 알고도 모른 말입니다. 옳고도 잘못입니다. 예수가 아닙니다. ‘나’입니다.
누구의 나란 말입니까? 아니, 아니, 누구의 나도 아닙니다. 나의 나, 너의 나 하
는 나는 작은 나, 거짓 나입니다. 누구의 나도 아니요, 그저 “나는 나다” 하는
그 나가 큰 나요, 참 나입니다. 그 나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이 나는 그 나를 위해 그 나로 인해 있습니다. 나는 그 나 안에 있습니다. 혹
은 그 나는 내 안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무엇이 되자는 것이 아닙니
다. 무엇은 비록 그것이 지극히 큰 종교의 체계라 하더라도 그것이 내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 온 우주를 얻고도 제 생명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
으리요? 나는 그저 살리시기 때문에 살았습니다. 누가 살리셨습니까? 그 자체가
살리신 것입니다. 그가 살렸기 때문에 내가 살았고, 내가 살았기 때문에 살려고
하고, 살려고 하기 때문에 그를 찾습니다. “찾으라, 그러면 만난다” 했습니다.
누구를 만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만난다고 했습니다.
퀘이커들은 하나의 조직적인 운동이 되기 전에 맨 첨부터 누가 지어준 것 없
이 스스로 자기네를 ‘찾는 자’라고 불렀답니다 마는 나도 퀘이커의 일을 알기
전부터 나 스스로는 역시 찾는 자라고 했습니다.
p 305
나는 실패한 사람
왜 퀘이커가 됐느냐고. ‘왜’를 묻지만 왜란 것이 없습니다. 물론 생각하는
인간에 까닭이 없을 리 있습니까? 까닭을 묻는 것이야말로 사람입니다. 하지만,
까닭을 물으면 누가 능히 대답을 합니까? 또 대답할 수 있는 것이 까닭이 될 수
있습니까? 참 까닭이 되는 것, 즉 모든 물건 모든 일의 밑뿌리가 되는 것은 대
답으로 보여줄 수는 없습니다. 보여줄 수 없기 때문에 바로 까닭이 됩니다. 삶의
까닭을 누가 압니까? 죽음의 까닭을 누가 압니까? 남의 삶 남의 죽음, 즉 참 죽
음이 아니고 추상적인 삶, 죽음의 까닭은 설명할 수 있지만 내 삶 내 죽음의 까
닭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럼 그 첨이 그렇고 나중이 그런데 그 중간을 말해서 무
엇합니까? 왜 됐느냐 물어도 소용없습니다.
그럼 까닭은 아예 묻지 말아야 합니까? 아닙니다. 아니 물을래 도 아니 물을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까닭을 묻는다고 꼭 대답을 해
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싱긋이 웃고 대답 아니하는 것이 참 대답 아니었습니
까? 그와 마찬가지로 또 대답을 하는 것은 꼭 물어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
음 없이 하는 대답이 있습니다. 대답 못할 물음이야말로 참 물음이요, 물음 없이
하는 대답이야말로 참 대답입니다. 아닙니다, 물음으로 대답하고 대답으로 묻는
것이 참입니다. 하나님과의 대화는 그런 것입니다.
나는 이 날까지 걸어온 내 생애를 돌아보며 스스로 내린 하나의 판단이 있습
니다. ‘나는 실패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날껏 해본 일은 여러 가지입니
다. 그러나 이루어 놓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생각이 없던 어릴 적은 말할 것
없고, 스스로 나라는 생각을 할 줄 알게 된 때부터라도 이렇게만 되자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되자던 나와 된 나와의 사이에는 너무도 거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실패의 사
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는 나이면서도 또 나는
p 306
역시 나였습니다. 나 스스로 나를 버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상은 내게 반드
시 없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어리석은 줄을 알면서도 스스로 나는 이상주의자
다 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 이상을 실지로 실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모른다기보다도 어느 의미로는 도리어 너무 알아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안과 밖이 어떻게 먼 것, 나와 남 사이가 어떻게 떨어진 것, 앞이 어
떻게 될 것이 너무도 빤히 뵈어 주저주저하게 됩니다. 그러노라면 주위의 사정
이 나를 몰아쳐서 가야 할 데로 가고야 말게 합니다. 가놓고 보면 역시 그럴 수
밖에 없었구나 하게 되지만 그것은 결코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생각했던 것은 하나도 실현해본 것이 없고 나간 것은 한 발걸음도 내가 내켜
디디었다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를 “이날껏 하나님의 발길에 채어오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퀘이커가 된 것도 아마 잘돼서 됐다기보다는 잘못돼서 된
것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분명히 피할 수 없는 발길에 챈 느낌이 거기 있습니
다. 두려움과 화평, 슬픔과 감사, 부끄러움과 자랑의 뒤섞인 것이.
까닭이 있다면 있습니다. 그러나 설명은 못합니다. 할 필요도 없습니다. 까닭
은 내 까닭이지 누구의 까닭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나와 하나님과의 사이의
일이지 누가 알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나와 너는 믿을 사이지 알 사이가 아닙
니다. 믿으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기 위해 알자는 것은 거꾸로 입니
다. 믿음은 영혼의 지성소 안에서의 일입니다. 거기는 말이 있을 수 없습니다.
침묵 속에 하는 생명의 불사름이 있을 뿐입니다. 나는 생명의 지성소 안에는 시
조차도 없다고 합니다. 하물며 질문, 설명이 있을 수 있습니까? 설명은 현상계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발길은 지성소 휘장 안에 있지 휘장 밖 현상계에 뚫고 나오
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그 발길에 챈 사람이 어떻게 말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
것을 말하는 것은 죽음보다 더 부끄러운 일입니다.
나는 어려서 장난을 하다 손가락을 다쳐서 피를 내고는 싸매주려
p 307
는 어머니한테 보지 말고 싸매달라고 했다고 어머니가 말해주었습니다. 내 영
혼도 그럴 것입니다. 나를 발길로 차는 것도 하나님이지만 또 그는 눈을 감고
싸매주기도 합니다. 어디 보자 하고 바로잡는 것은 싸맬 줄을 모르는 사람입니
다.
나는 지성소에도 들어가지만 또 이웃 속에서도 사는 인간입니다. 어떻게 말을
아니할 수 있습니까? 지성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아니 믿으려다가 벙어리가 되
어 나온 사가랴처럼, 나는 부끄럼을 무릅쓰고 서투른 시늉으로라도 내가 지난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만 나는, 조지 폭스가 말하는, “각
사람의 속에 있는 하나님의 것에 응답”할 수가 있습니다.
바닷가 감탕물 먹던 어린시절
나는 1901년 3월 13일 평안북도 용천군의 황해 바닷가 조그만 농촌에서 태어
났습니다. 그때 우리나라는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파산상태에 있었고 정신적으
로도 극도로 타락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어려운 때일수록 민중을 건져줄 종교가
필요하건만 그것이 없었습니다. 예로부터 오는 유교도 불교도 선도도 있기는 있
었으나 모두 굳어진 의식, 비뚤어진 전통뿐이지 산 믿음 건전한 도덕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사회에는 무지와 미신과 가난과 부패가 가득 차 있었습니다. 상류계급은 지위,
권력, 지식을 이용하여 민중을 억누르고 짜먹기만 일삼았고 무지 무력한 민중
은 모든 것을 운명 팔자로 체념하고 자포자기에 빠져 있었습니다. 희망을 가지
고 생활을 개조해보려는 의욕은 어디 가도 없었습니다. 불교는 목탁을 들고 동
냥을 다니는 ‘중놈’으로 표시가 되었고, 유교는 고린내 나는 상투의 썩어진
선비로 표시되었고, 선도는 산간 주막의 요술쟁이로 표시가 되었습니다. 산엣사
람은 호랑이 승냥이 때문에 떨고, 저자 사람은 보다 더 사나운 양반 벼슬아치
때문에 떨었으며, 낮에는 얼굴과 손바닥에 박혀 있는
p 308
팔자에 얽매어 우는 백성이요, 밤에는 구석마다 골짜기마다 씨글거리는 귀신
에 눌려 떠는 나라였습니다.
일반이 다 그런데 나는 이상하게도 첨부터 활발한 새 교육을 받으며 자랄 수
가 있었습니다. 그 첫째 이유는 내가 났던 그 지방에 있었습니다. 본래 평안도는
한국의 ‘이방 갈릴리’여서 여러 백 년두고 ‘상놈’이라 차별대우를 받아왔습
니다. 고장으로 하면 우리나라 역사가 시작된 밑터라고 할 곳이요, 사람의 기질
로도 ‘푸른 산 날쌘 호랑이’라는 이름이 표시하듯이 조상의 옛 모습을 더 많
이 물려가지고 있다고 할 것인데 이상하게도 버림을 받아왔습니다.
우리 역사에 인간 이성을 가지고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모를 일은 이것입니다. 어쨌거나 그렇듯 천대받아온 곳인데 그 중에서도 용천,
용천에서도 내가 났던 마을은 더 심했습니다. 그야말로 ‘스불론, 납달리’ 같아
서 ‘바닷가 감탕물 먹는 놈들’이라 해서 머리도 못 들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불행이 도리어 복이 됐습니다. 밑바닥이니만큼 그 심한 정치적 혼란의 망국
시기에 있어서도 거기는 탐낼 것이 없는 곳이니 평화가 있었습니다. 너도 나도
다 상놈이니 계급 싸움이 있을 리 없습니다. 나는 양반 상놈이란 말은 들었지만
양반도 상놈도 보지는 못했습니다. 종이 어떤것인지 몰랐습니다. 이래해서 나는
타고난 민주주의자가 됐습니다. 한 70호 되는 마을 안에 기와집은 꼭 둘이 있었
는데 하나는 우리 종가집이요, 또 하나는 서당이었습니다. 열세 살까지 나는 우
리 동리 안에서 술집을 못 보았고 갈보란 것은 열다섯이 지난 후에 장거리에 가
서야 보았습니다.
가난하고 업신여김을 받았으니만큼 새로워지는 데는 앞장을 섰습니다. 그것이
둘째 조건인 기독교의 들어옴입니다. 이 ‘죽음의 그늘진 땅에 앉은 사람들’속
에 일찍부터 ‘큰 빛’이 들어왔습니다. 이 무식한 마을 사람들이 어떻게 진보
적이었던 것을 나는 지금도 기억합니다. 내가 일곱이나 여덟 살 때라 생각합니
다. 그러니 한일합방이 되기 전입니다. 마을 사람이 많이 기독교 신자가 됐는데
그들은
p 309
옛날의 ‘구습’을 타파하기 위하여 그 중 하나로 정초에 세배 온 아이들을
보고 옛날처럼 장가를 갔답네, 아들을 봤답네 해서 축복을 하는 대신, “우리나
라 독립을 했답네” 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감탕물 먹는 곳의 청소년은
난 곳의 이름이 ‘사자섬’이었던 것같이 가장 씩씩한 기운을 가졌었습니다. 나
는 그 대열 속에서 자랐습니다.
셋째는 우리 집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글자를 하나도 모르는 소작농이었
습니다. 그러나 글은 몰라도 무식하지는 않았습니다. 농사 이치에도 밝았고 사람
사귐에도 밝았고 의리에도 밝았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러일전쟁 때 일본군의 한
부대가 이 마을에 적전상륙을 했는데 마을 사람들은 그때 벌써 바닷가에 나가
손을 잡고 일자진을 쳐서 비폭력 반항을 했고, 그 군인들이 여자를 겁탈하려 들
자 혼자서 몽둥이를 들고 나서 가엾은 양들을 위기일발에서 구한 것은 우리 할
아버지라고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한의업을 했고 말년에는 어머니와 같이 마을에 교회와 학교를 세워
전도와 교육에 힘썼는데 나는 장성할 때까지 그들이 누구에게서나 한 마디 시비
듣는 것을 보지 못했고 우리 집안에서는 다툼소리가 난 일 없습니다. 우리 집에
서는 굿을 한 일도 점을 치러 다닌 일도 없었습니다.
그 때 내가 받은 교육은 한마디로 하나님과 민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때 그것을 ‘신학문’이라고 했습니다. 이 신학문이 가르쳐준 ‘신문명’은
두 개의 얼굴을 가지는 스핑크스였습니다. 기독교와 민족주의입니다. 이것은 그
때, 적어도 세속적으로는, 꼭 요구에 알맞은 것이었습니다. 그때에 서양 사람이
불러서 ‘은둔자의 나라’라고 하던 이 나라는 봉건제도의 낡은 껍질을 벗고 새
시대에 들어가야 하는 때였기 때문입니다.
한국에 기독교가 빨리 번져나간 원인은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으나 그 중
에서 잊을 수 없는 하나는 그것이 민족주의를 타고 왔다는 사실입니다. 유교 불
교의 썩어진 웅덩이에 빠져 있던 사람들에
p 310
게서 영혼의 구원이라는 소식은 듣고 가만 있을 수 없는 자극을 주는 소리였
지만 일본의 압박을 물리치고 나라를 독립시키려면 그들의 선진국인 서양 여러
강국이 믿는 기독교를 믿어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나도 강해서 그 때문에 교회에
들어왔던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 교회는 장로파였으므로 거의 청교도적인 엄격한 신조의 교육을 받았습니
다. 나는 그것을 지금도 고맙게 생각합니다. 사실 그 썩어진 망국 시기에 있어서
그러한 기독교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었더라면 사회적 양심은 완전히 파멸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때에 교회는 정말 희망의 등대였습니다. 그러므로 극히
적은 수의 사람을 제하고는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까지도 반드시 교회에 대해
악의를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대신 후에 끼친 폐단도 없지 않습니다. 오
늘날까지도 이상하게 우리나라 기독교는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마는 그 유래는 당초부터 기독교와 민족주의 내지 군국주의가
함께 왔던 데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열세 살까지, 그때 일본 사람의 간
척사업회사가 들어옴으로써 이 순박한 농촌의 평화와 순결이 깨지게 될 때까지
는, 지금까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순진한 기독교 소년이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민족과 국가를 사랑하는 것밖에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옛날같이 글공부하여 과거 급제하고 입신 출세한다는 것을 나는
몰랐습니다. 학문이나 예술이란 것도 후에 가서야 생각하게 됐지 그때는 몰랐습
니다. 그러나 잘못된 종교 교육이 어떻게 자라나는 마음에 해가 있다는 것도 생
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일을 지키지 않으면 아니된다, 제사 음식이나 피를
먹어서는 아니된다 해서 무섭고 걱정되던 것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고, 부흥회를
하여 사람들이 모두 죄를 회개한다고 울고 가슴을 치고 하는데 나는 눈물도 아
니 나오고 맹맹해서 괴롭던 생각, 억지로 울어보려 해도 아니되어서 어쩔 줄 몰
라 했던 것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됩니다. 그때만 아니라 후에 장성한 다음에
도 나는 남이 하는것같이 산에 올라가 밝혀가며 기도해보려 애쓴 적도 있으나
잘 되
p 311
지 않았고, 통성기도라 해서 벌집 쑤셔놓은 듯이 떠드는 것을 들으면 불안한
생각만 났고 손뼉치며 할렐루야 찬송하는 것을 보면 연극같이만 보였습니다. 아
마 그런 점으로 보면 나는 타고난 천성이 퀘이커로 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마 어려서 받은 충격 중에 가장 큰 것은 열 살 때 나라가 망했을 때 받은
것일 것입니다. 우리는 소학교에서부터 ‘대한제국 독립만세’를 부르며 나무총
을 메고 군사교육을 받았습니다. 나는 행진할때는 북을 치는 고수였습니다. 그때
는 지금 같은 동화 만화는 없었고 아이들은 모여 앉으면 서로 얻어들은 민족 영
웅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대 운동회라 해서 몇십 리 안팎의 학교가
모두 모여 나팔을 불고 북치며 연합 운동을 할 때는 정말 춤이 으쓱으쓱 나왔습
니다. 먹지 않아도 기운이 났고 입은 것이 없어도 자랑스러웠습니다. 오늘에 비
하면 기술적으로는 퍽 유치해도 훨씬 더 교육적이었습니다. 오늘같이 정치가 학
생을 원수같이 아는 것은 꿈에도 생각못할 일입니다. ‘학도생’이라면 네 자식
내 자식의 구별이 없이 그저 눈의 동자같이 귀여워했고 산신당의 나무같이 위했
습니다. 세상이 참 달라졌습니다.
그렇게 자라나던 희망의 어린 순에 하루아침 서리가 내렸습니다. 나라가 망했
다는 것입니다. 예배당 안에 어른들이 모여들어 엉엉 울며 하나님을 부르던 광
경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고 이 글을 쓰는 이순간에도 눈물을 닦아야 합니
다. 그때부터 공포심이 마음을 덮게 됐습니다. 이때까지 서울서 사다가 아껴가며
읽던 교과서를 감추어야 합니다. 순사가 와서 빼앗아가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듣
는 것은 월남이 어떻게 망하던 이야기, 일본 사람이 우리나라 노동자를 속여서
멕시코에 팔아서 거기서 어떻게 쇠사슬에 매여 밤낮 울며 짐승 대우를 받으며
일한다는 이야기, 이제 일본이 우리를 모두 화륜선에 싣고 저 태평양 복판에 가
져다가 빠뜨려 죽인다는 이야기, 그런 소리뿐입니다. 밤이 되어 자려고 불을 끄
면 그 그림이 자꾸 눈에 보여 잘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우리는 낙
망하지는
p 312
않았습니다. 예배 시간이면 누구나 으레 잊지 않고 “나라 위해 일하다가 철
창에 들어가 있는 동포”와 “해외에 나가 있는 지사들”을 보호해달라 빌었습
니다.
나라가 망한 뒤에는 사람들의 생각도 풀이 죽었습니다. 우리 아버지도 나를
장래에 의사로 만들기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려면 일본말로 교육하는 공립학교에
가야 합니다. 나는 이때까지 사립 기독교학교에 다니는 자존심을 꺽고 공립학교
에 가야 했습니다. 현실주의가 내 천성을 억누르기 시작한 것은 이것이 처음입
니다. 보통학교를 마치고 평양에 고등보통학교로 간즉 점점 더 달라졌습니다. 그
래서 어떤 때는 기독교를 아니 믿는 척도 하고, 속으로는 그것이 가책이었고 이
제는 일본의 지배를 벗어나기는 도저히 불가능하고 부득이 학문길로나 나가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3, 1운동과 오산학교의 영향
이대로 만일 갔다면 나는 의사가 됐던지 그렇지 않으면 다른 무슨 공부를 하
여 일본 사람 밑에 있어 그 심부름을 하는 한편 나보다는 못한 동포를 짜먹는
구차한 지식노예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3, 1운동이 일어나 크게 달라
졌습니다. 민족의 자각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의 젊은이로서 그 운
동의 영향을 입지 않은 사람은 아마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운동은 물론 표면으
로는 실패에 돌아갔습니다. 세계 큰 나라들의 정의감을 믿고, 일어나 만세만 부
르면 독립이 될 줄 믿었던 것이, 되지 않았으니 실패라 할 밖에 없습니다. 본래
그 이리떼에 정의가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그것을 믿었던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기대했던 독립은 비록 얻지 못하였어도 깨기 시작한 민중은 낙심하지 않았습
니다. 운동은 속으로 파고들기 시작했습니다. 신문, 잡지, 책, 강연회를 통해 문
화운동이 맹렬한 형세로 일어났습니다. 그
p 313
러므로 당초에는 한국 사람은 북만주로 몰아내고 사람 살 만한 이 반도 안에
는 자기네 민족을 이주시키자는 소위 무단정책을 세웠던 일본이 날로 깨어가는
이 힘을 칼만으로는 누르지 못할 줄을 알고 정책을 다소 완화시켜 이른바 문화
정치를 하게 됐습니다. 민족의 정신은 어느 정도 올라가는 것이 있었습니다. 나
도 그 영향을 입었습니다.
그때 중학교 3학년 끝에 그 운동에 참여하고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 돌아온 나
는 운동이 가라앉아 학생들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때에도 다시 갈 수가 없
었습니다. 어제 뿌리치고 나왔던 일본 사람 앞에 다시 갈 수가 없었습니다. 어제
뿌리치고 나왔던 일본 사람 앞에 다시 가서 잘못됐다고 빌고 들어가기가 차마
할 수 없어서였습니다. 그때 다시 봇짐을 싸가지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수리조
합의 사무원이 됐다, 마을 소학교에 선생이 됐다 하며 이태를 지나는 동안에 속
이 썩을 대로 썩었습니다. 될지 모르는 문제 때문에 번민하기를 시작했습니다.
나는 그보다 전에 열일곱 살 때에 부모가 시키는 대로 나보다 한 살 아래인 내
아내와 결혼했고 시집을 오는 날은 나는 공부에 결석하기가 싫어서 자기 혼자
우리 집으로 오라 했었는데 이 두 해 동안 우리는 잠자리에서 같이 운 적이 많
았습니다. 그래도 앞에 어떤 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몰랐습니다.
1921년 봄에 입학 시기도 벌써 지난 때에 가서, 아버지는 집안 형편이 어려운
줄을 알기 때문에 감히 다시 공부를 계속하겠다는 말은 내지도 못하고 있는 나
에게 갑자기 다시 학교에 가라는 허락을 했습니다. 준비도 아무것도 없이 서울
로 올라왔으나 벌써 개학날은 다 지났고 평생에 떼쓸 줄 모르는 나는 사무실 접
수계에 가서 물어보고 안된다면 그래도 물러나와서, 그렇게 하기를 몇 학교 하
다가 결국 멋없이 집으로 내려가는 수밖에 없이 됐습니다. 그때 뜻밖에 내 집안
형님이 되는 석규 목사를 만나게 됐습니다.
그는 우리 마을에서 맨 처음으로 서울 배재학당에 올라와 신학문을 공부했던
이요, 우리 마을에 기독교를 맨 처음으로 끌어들인 이요, 나를 특별히 보고 규칙
으로 하면 열두 살이 되어야 하는 학습
p 314
을 아홉 살에 서게 했던 사람입니다. 재주가 썩 있는 이는 아니지만 성격이
곧았습니다. 그래서 한학자인 그이 아버지가 아들을 평해서 우직이라, 어리석은
것이 곧은 법이라 했습니다. 그 일형이 아저씨는 인물로 났던 이입니다. 그런 시
골 구석에 났으면서도 글 잘 알고 글씨 명필이고 체통 크고 기백 있어 농민혁명
에 지도자 노릇했습니다. 그 때 남들이 다 잠자고 있는 때에 그는 가산을 팔아
신학문을 공부시키기 위해 큰아들은 서울에, 작은아들은 일본 동경에, 사촌은 노
령, 미국에 보냈습니다. 나는 글이 귀한 것을 그에게서 알았고 점잖은 것이 어떤
것임을 그에게서 보았습니다. 우리 가문이 온통 그 지방에서 민족주의 애국운동
의 중심이 되게 된것은 주로 그의 영향이었습니다.
하여간 그 석규 목사를 뜻밖에 서울서 만났는데 내 이야기를 듣고는 그의 우
직식으로 여러 말할 것 없이 정주 오산학교로 내려가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
는 늦게 늦게 스물한 살에 남 같으면 대학 졸업을 할 때에 중학교 3학년엘 들어
갔습니다. 사람 많은 데는 무서워서 가지도 못하고, 어른보고 인사하고 싶은 마
음은 있어도 부끄러워 못하며, 바닷가에서 자랐으면서도 물에 들어가면 돌이요,
서울에서 늙으면서도 아직도 으리으리한 상점엔 들어가 물건도 못사는 나에게
어느 것은 하나님의 발길 아닌것이 있으리만, 이 오산학교에 간 것이야말로 하
나님의 발길에 채어서 된 일입니다. 그때까지 오산학교 있는 줄 알지도 못했습
니다. 그러나 이제부터의 내 나가는 길은 지금까지 뜻하지 않았던 곳으로 가게
됩니다.
오산학교는 남강 이승훈 선생이 세우신 학교입니다. 처음부터 이 학교는 글을
가르치기 위해, 입신 출세하는 길을 닦기 위해 세운것이 아니었습니다. 학문을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당시에 얻을 수 있는 학문을 앞장서서 가르치기도 했
습니다마는, 그것은 보다 높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었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
었습니다. 이것은 오로지 사람을 만들고 나라를 건지기 위해 세운 학교였습니다.
물론 이것은 시대의 물결에 따라서 된 것이었습니다. 남강 선생은 전 반
p 315
생을 장사로 지내다가 사업에 실패한 후 평양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의 연설을
듣고 깨닫는 바 있어 뜻을 결정하고 이 학교를 세워 세상을 떠날 때가지 몸과
마음을 바쳐 이것을 경영하며 교육에 힘썼습니다.
도산의 연설이 무엇입니까? 태평양을 끊고 건너오는 새 시대의 사조였습니다.
도산은 그때 민족주의 민주주의가 한창인 미국으로부터 돌아와 넘어지기 직전이
나라를 보고 가슴이 타서 그 연설을 한것입니다. 시대의 부르짖음이었기 때문에
그것은 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대의 대세만 가지고는 일은 되지 않습니다.
거기 반드시 인격이 있어야 참 창조적인 운동이 일어납니다.
시대를 말하면 물결 높고 바람 강한 바다 같습니다. 인격을 말하면 거기 뜨는
배입니다. 바다는 힘 있지만 그 힘은 반드시 사람을 살리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
다. 죽이기도 합니다. 그 힘이 정말 사람을 살리는 힘이 되려면 튼튼하고 정밀하
게 된 기계를 가지는 배가 있어야 합니다. 시대의 바람이 어떻게 사람을 죽이고
나라를 망치나 알려면 오늘의 사회를 보십시오. 근대화라는 거센 시대 물결에
죽고 병신되는 혼은 얼마나 많으며 나라의 정신은 얼마나 망가지고 있습니까?
인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격이 무엇입니까? 역사를 바로 이해하고 시대를 바
로 이용할 줄 아는 지혜와 능력을 가진 심정입니다. 그 심정이 어디서 나옵니
까? 공에 살자는 정성에서 나옵니다. 서양을 보고 온 사람이 안창호만이 아니로
되 어째서 안창호의 연설만이 감동적이었습니까? 그의 인격 때문입니다.
오산학교가 된 것도 시대의 영향이지만 그것은 남강의 인격 아니고는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 때에 비 뒤에 버섯처럼 또 쓰러져버린 많은 학교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합니다. 오산학교는 남강의 인격이 나타난 거이었습니다. 그렇기 때
문에 단순한 학문만이 아니요, 정신이었기 때문에 그것은 힘이 있었습니다. 그는
오산학교를 경영한 것이 아니라 오산을 살았습니다. 학생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학생과 같이 자랐습니다. 선생과 학생이 조밥 된장국에 한 가족이 되
p 316
어 같이 울고 웃던 창초의 그 오산학교는 그때 민족운동, 문화운동,신앙운동의
산 불도가니였습니다. 그때 그 교육은 민족주의, 인도주의 기독교 신앙이 한데
녹아든 정신교육이었습니다.
그가 “이승훈이 와석종신할 줄 알았더니 이제 죽을 자리 얻었다”하며 무릎
을 치고 일어서서 동서남북으로 분주하여 3, 1운동을 일으키자 일본 사람은 그
를 잡아 감옥에 넣었고 학교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러나 정신은 칼에 찍히고 불
에 타는 법은 아닙니다. 정신은 불사조입니다. 오산학교는 잿더미 속에서 다시
일어났습니다. 내가 갔던 때는 옛 모습은 거의 없었습니다. 집도 옛 집이 아니고
임시로 지은 초라한 초가에 책상도 걸상도 없는 마룻바닥에 학생들이 모여 있고
선생도 옛날 선생이 아니요 새로 모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오산의 전통
이 붙어 있을 데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그 흙 속에 냄새가 남아 있었
고 뒷산 솔바람 속에 그 울림이 있었습니다. 나는 이때까지 어디서도 맛보지 못
하던 무엇이 거기 있음을 느꼈습니다. 이것이 정말 참 교육인가 했습니다.
나는 어느 사인지 모르게 이 담에 의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버렸습니다. 어려
서부터 국문을 배웠지만 한글의 의미를 나는 이때까지 몰랐는데 여기서 처음으
로 그것을 알기 시작했습니다. ‘초등소학’, ‘유년필독’에서 을지문덕, 강감
찬, 이순신 하는 민족의 영웅 이야기를 들었지만 이날껏 한국, 한국 민중, 한국
문화, 한국의 마음을 생각해본 적은 없었습니다. 이제 한국의 모습이 어렴풋이
어른거리는 것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찾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이때까지 관립학
교에 다닌다고 자부하던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무슨 죄라도 진 것 같았습니다.
오산 2년 동안에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생각하는 인생’을
뒤늦게나마라도 시작한 것입니다. 생각하는 소질이 내게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열 살이나 된 때인지 사랑에 오셨던 일형이 아저씨가 일러주던 말씀에서 힌트를
얻어 사람이 하는 것 없
p 317
이 썩어서는 못쓴다는 글을 지어 바쳤더니 선생이 굉장히 칭찬을 해주던 기억
이 있고, 구약 창세기의 천지창조 이야기를 배웠는데 그럼 하는 땅 있기 전엔
무엇이 있었을까? 허공일 것이다. 그럼 허공도 있기 전에 어떤 것일까 생각해도
알 수 없어서 하다가만 기억이 있습니다. 후에 와서 생각해면 내가 왜 더 파고
들지 못했던가 하는 생각도 있지만 나는 그 정도밖에 못되었습니다. 그래도 날
뛰기보다는 생각하는 편이었는데 키워줌을 받을 기회가 별로 없었습니다. 공부
를 중단하고 두 해 동안 번민할 때에 포플러에 기대고 서는 밤도 많았고 숲속으
로 바다로 지향없이 헤매던 날도 많았지만 무언지 아직 꼬집어 문제를 잡지는
못했습니다.
오산에 오니 거기 유영모 선생이 교장으로 오셨습니다. 말로 하기는 어렵습니
다마는 인생이란 생각, 생명이란 생각, 참 이런 것이 모두 다 그때에 시작됐습니
다. 톨스토이 이야기, 노자의 이야기를 선생님에게서 첨으로 들었습니다. 일본말
은 보는 때이므로 일본 책으로 로맹 롤랑, 베르그송, 입센, 블레이크 등을 깊이
알지도 못하면서 읽은 것도 이때였고 타고르의 ‘기탄질리’를 보는 동시에 웰
스의 ‘세계문화사대계’를 학생 경제에도 맞지 않게 사서 읽었습니다. 이들이
다 오늘까지 잊지 못하는 스승이요 벗이 됐습니다. 더구나 이 나중 것은 내게
큰 영향을 주어서 나로 하여금 역사에 취미를 가지게 됐고 세계국가주의와 과학
주의 사상을 가지게 했습니다.
이 오산 시절부터 나는 옛날같이 남을 따라서 미리 마련된 종교를 믿기보다는
좀 더 깊고 참된 믿음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시작됐습니다. 거기서 유선생님의
영향이 크고 또 그 시대의 까닭도 있습니다. 기독교와 민족주의가 한데 든 것은
첨에는 좋은 듯했으나 나중에 그 폐단이 차차 나타났습니다. 독립의 희망이 있
을 때 그것은 놀라운 형세로 올라갔지만 일본의 통치가 아주 어쩔 수 없는 것으
로 굳어지면서 겉으로 보기에 어느 정도 부드러운 문화정책을 쓰게 되자 지난날
의 지사라던 사람들이 많이 변절 타협을 하게 됐습니다. 그러는 반면 종교는 점
점 현실에서는 멀어져 오는 세상주의
p 318
로 굳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젊은이도 많이 그랬지만 나는 그것이 싫어서
교회에 차차 가기가 싫었고 점점 비판적이 되어갔습니다.
동경 유학시절
그러다가 1923년 봄 나는 대학 공부를 하러 일본 동경을 갔는데 그해 9월 초
하룻날 큰 지진이 일어나 동경시의 3분의 2가 하룻밤사이에 다 타버렸습니다.
그때 일본은 전쟁 이후의 불경기에 빠져 있었는데, 이 틈을 타서 사회주의자들
의 혁명이 일어날까 두려워하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민심수습책으로 무죄한 한
국 사람들을 희생시키기로 간악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일부러 떠도는 말을 만들
어 퍼뜨려서 한국 사람이 폭동을 계획하며 강도, 방화를 하며 우물에 독약을 친
다고 했습니다.
한일합방이 된 후 생활고에 몰리는 우리 노동자는 일본으로 많이 갔습니다.
성질이 단기한 일본 민중은 그 책략에 속아 흥분했습니다. 일본도와, 대창과 몽
둥이를 들고 한국, 사람을 닥치는 대로 죽였습니다. 여름방학이라 학생은 많이
고향으로 돌아갔고 주로 희생된 것은 불쌍한 노동자였습니다. 못하도록 금하는
것을 우리 사람들의 손으로 조사한 것만도 5천 명에 달했습니다. 나는 한 주일
동안을 꼬박 문 밖에도 못 나갔고 방안에 있었습니다.
그 피비린내나는 회오리바람이 지나간 뒤에도 몇 달 동안은 한국학생은 하숙
을 들기도 어려웠습니다. 길가에 나가노라면 장난하는 어린이들의 놀음소리에도
한국 사람 사냥을 하고 있을이만큼 살벌한 기분이었고, 학교 선생이 교실에서
한국 학생이 있는데도 내놓고 나도 조선 사람 사냥을 했노라고 자랑삼아 이야기
를 했습니다.
일본은 불살생을 강조하는 불교의 나라요 동경 안에는 기독교도가 상당히 있
었습니다. 상당한 신학교도 여럿 있었습니다. 나는 하룻밤을 경찰서에 잡혀가서
새고 왔습니다. 그것이 나의 감옥 길의 입학식이었습니다. 하룻밤 기나고 나오기
는 했지만 이제 일본 민족
p 319
이란 어떤 민족인지 알았다기보다는 인간이란 어떤 것인지를 보았고, 종교, 도
덕도 어떤 것인지 똑바로 나타났습니다.
나는 번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를 가지고 정말 우리 민족을 건질 수 있
느냐고 정치란 것이 이런 것일진데, 그 악당을 물리치는 것은 종교, 도덕으론 도
저히 될 수 없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나라를 해방시키려면 혁명밖에는 길이 없
고 혁명을 한다면 사회주의 혁명 이외에 길이 없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민족주
의 진영이 썩어져가는 것을 보면 혁명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렇다고 내 신앙을 버리고 도덕이니 인도주의니 하는 것은 전혀 무시해버리는 사
회주의에 들어갈 수는 차마 없었습니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습니다. 많은 우리나라 학생이 사회주의로 기울
어져 머리를 기다랗게 기르고 지팡이라기보다는 몽둥이를 들고 거리를 활보했습
니다. 사회주의자들끼리 민족의 차별 없이 일본 사람 조선 사람이 서로 동지 노
릇을 하는 듯이 보였습니다. 내 친구도 나를 설득시켜 사회주의로 끌어가려고
기회만 있으면 힘을 썼습니다. 나는 오래 고민했습니다. 그러던 때에 뜻하지 못
했던 빛을 만났습니다.
1924년 나는 동경고등사범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오산서 떠날 때는 한때 미술을
해볼까 하는 생각을 했던 때도 있습니다. 나는 거기 상당히 취미를 가졌었습니
다. 그러나 우리나라 형편을 살펴볼 때 교육이 가장 시급하다는 생각에 교육으
로 결정했었습니다. 조선 사람이라면 하숙도 잘 아니 주려 해서 얼굴도 못 들고
다니던 겨울도 지나가고, 새로 입학한 기쁨에 교회를 찾아가려 나섰던 어느 일
요일, 나는 나보다 한 반 위인 김교신이 이치무라의 성경연구회에 나간다는 것
을 알게 됐습니다. 우치무라 선생의 이름은 오산 있을 때 유선생님에게서 이미
들어 알았습니다. 어느 날 우치무라 선생의 시를 소개해주시다가 그의 유명한
백치원에서의 일화를 이야기하셨습니다.
p 320
우치무라 선생이 펜실베이나 주 어느 백치원에 있었던 일이 있는데, 거기 아
주 악질적인 백치인 대니라는 아이가 있어서 어느 일요일에 잘못을 많이 저질렀
으므로 규칙으로 하면 마땅히 저녁 아니 주는 벌을 세워야 했으나 거룩한 날에
차마 할 수 없음을 생각해서 자기 밥을 대신 그에게 주고 자기는 굶었으므로 그
것이 그 백치원의 전 학생을 감동시켰고 그 할 수 없던 대니로 하여금 해가 가
도 아니 잊고 “그는 위대한 사람이다”하게 했다는 것이었는데, 나도 그것을
듣고 감명깊어 잊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그가 살아 있는 인물인지 아닌
지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우치무라가 살아 있어 성경 강의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
었을 때의 나의 놀람, 또 기쁨! 물론 위대하다고만 들었지 그의 신앙 사상이 어
떤 것인지는 알지도 못했고, 다만 존경하는 선생님이 소개해주신고로 무조건 믿
고 존경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후 곧 김교신의 소개로 그 모임에 나가게
됐습니다.
세상에서는 그를 무교회주의라고 했습니다. 그는 훗카이도 대학 출신으로 “
얘들아 야심을 가져라”(Boys be ambitious)로 유명한 윌리엄 클라크(William
S. Clark)의 영향으로 기독교 신자가 된 사람입니다. 미국 앰허스트 대학에서 신
학공부를 한 일이 있었고, 그의 ‘나는 어떻게 크리스천이 됐는가’하는 책은
여러 나라 말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일본으로 돌아와서 처음에는 교회에서 일도
했으나 강직한 사무라이 기질에 자유독립의 정신이 강했던 그는 교회안에 있는
형식과 거짓에 견딜 수 없어서 뛰쳐나와 독립 전도를 시작했는데, 교회 아니고
도 믿을 수 있다 한다고 해서 무교회란 이름이 붙었습니다. 아무 형식, 의식 없
이 단순히 모여서 하는 예배인데 그 특색은 성경을 중심으로 삼고 십자가에 의
한 속죄를 강조하는 아주 전통적인 신앙인 데 있습니다.
한때는 신문기자로 이름을 날린 일도 있고 천황의 칙어에 대해 경례를 정중히
하지 않았다 해서 국적으로 몰렸던 일도 있습니다. 저서도 퍽 많고 지금 일본의
정신적 지도층에는 그이 제가가 많고
p 321
우리나라에서도 표면으로 무교회라고 시비는 하면서도 그의 책을 읽는 사람은
상당히 많습니다.
내가 처음으로 갔던 날 그는 에레미야 강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본래 애국심
이 강한 그는 “이것이 참말 애국이다”하면서 신앙을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당
장 그 자리에서라고는 할 수 없으나 나는 지금도 그날의 인상을 잊지 못하며 계
속해나가는 동안 오랜 번민이 해결되고 나는 아주 크리스천으로 서서 나갈 것을
결심했습니다. 나는 이따금은 우리가 일본에게 36년간 종살이를 했더라도, 적어
도 내게는, 우치무라 하나만을 가지고도 바꾸고도 남음이 있다고 생각하기도 합
니다.
우치무라의 영향을 벗어나서
동경고등사범을 졸업하고 나는 곧 오산에 돌아와 선생 노릇을 시작해서 1938
년 봄 그만둘 때까지 만 10년을 있었는데 그때가 내 인생에서 황금시대라 할 만
한 시절입니다. 취임하는 날 나는 ‘요한복음’10장의 선한 목자의 구절을 읽고
시작했습니다. 있는 정성을 다 붓고 싶은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러나 몇 날이 못
되어 나는 역사교사가 된 것을 후회했습니다. 그것은 소위 역사란 것은 온통 거
짓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사를 정직하게 볼 때 비참과 부끄럼의 연속인 것
을 부인할 수 없는데 그것을 어떻게 가르쳐야 옳은가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사실대로 말하자니 어린 마음에 자멸감 자포심만 날 터이요, 남이 하는 식대로
과장하고 꾸미자니 양심이 허락치 않고, 나는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었습니다.
나는 생각하고 생각했습니다.
내게 버리지 못할 것이 셋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민족이요, 둘째는 신앙이요,
셋째는 과학입니다. 민족 없이는 나 없으니 나는 민족적 전통을 지킬 의무가 있
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내 신앙적 양심
p 322
을 짓밟을 수 없습니다. 나는 또 현대인으로서 실험을 토대로 하는 과학을 존
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앙이나 민족 전통을 위해 과학적 진리를 구부리는
것은 비겁한 일로 보였습니다. 사사 생각 없이 진리 그 자체를 위해서 연구에
몰두한 과학자가 낡은 전통이나 교회 신조에 복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만일 지
옥엘 가야 한다면 나는 그까짓 종교나 민족은 버려도 좋다고까지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그 세 가지 조전을 다 만족시키면서 어떻게 하면 역사 교육을 할 수 있
을까? 나를 가르쳐줄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나 스스로 해결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날 어떻게 된 것인지도 모르게 문득 이런 생각이 떠 올랐습니다.
“고난의 메시아가 만일 영광의 메시아라면 고난의 역사가 영광의 역사 될 수는
어찌 없겠느냐?” 나는 십자가의 원리를 민족에 적용하기로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십자가의 의미는 훨씬 더 깊어지고 커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사건마
다에서 전체에 대한 의미를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용기를 얻어 교
수를 계속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나의 고난의 역사입니다. 나는 우리
역사의 기조를 고난으로 잡고 그 견지에서 모든 사건을 해석해보기로 했습니다.
우치무라 모임에 다닐 때 한국 학생이 여섯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섯이
선생의 모임 후에는 우리끼리 또 모여서 우리말로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몇 해 계속되다가 다들 졸업을 하고 본국으로 나오게 되
려 할 때에 여섯이 의논하고 동인제의 잡지를 내기로 했습니다. 이름은 성서조
선이라고 했습니다. 여섯이 다 귀국한 후 첨에는 경비와 글을 분담해가면서 내
다가 나중에는 김교신이 전담하여 거의 개인 잡지처럼 됐습니다. 중학교 선생
노릇을 하면서 한 것이지만 김은 본업보다 부업이 더 크다고 하면서 전력을 기
울여서 했습니다. 나중에 일본 관헌에게 발행금지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오산 10
년 동안 나는 대체로 십자가 중심 신앙에 충실한 무교회
p 323
신자였습니다. 그러나 차차 변동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본래 여섯이 신앙 동지
였을 때 우리는 다 교파적인 것을 싫어하며 무교회주의란 말도 잘 쓰려 하지 않
았습니다. 그러나 무교회도 어느덧 자기 주장을 너무하여 하난의 교파 아닌 교
파가 되어가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어쨌는지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느껴졌습니다. 나는 그것이 싫었습니다. 우리는 아니 그러노라고 해도 밖으로부
터 신앙교만이라 고답주의라 하는 평을 받는 일이 있었습니다. 또 차차 사람 수
가 늘어감을 따라 그 중엔 우치무라를 존경하는 나머지 아주 숭배자가 되어버리
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나는 거기 반동을 느꼈습니다. 나는 내가 그러고 싶지 않
은 것은 물론 남이 그러는 꼴을 보아도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는 차차 의식적으로 선생 모방을 피하고 나는 나대로 서는 자리에 가려고
힘을 썼습니다. 첨에는 모임의 형식, 예배 절차, 성경 해석하는 태도, 회비 받는
주머니의 모양까지도 우치무라 식을 본땄는데, 하는 줄도 모르게 그렇게 했는데,
후에 가서 생각해보니 도무지 사람답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선생의 책
을 참고하는 태도조차도 고쳤습니다. 덮어놓고 참고하기를 그만두고, 나로서 성
경본문을 놓고 씨름을 하여서 일단 내 생각의 초점이 잡힌 후에야 그 책을 열기
로 했습니다. 성경 해석의 참 맛을 조금 알고 어는 정도 확신이 서기 시작한 것
은 구 후부터였습니다. 그러고 나면 “나는 모든 것에 있어서 우치무라가 표준
이다”하는 사람보다는 나 자신이 선생에 더 친근하다는 자신이 생겼습니다.
또 한편 독서의 범위를 넓혀가도록 힘썼습니다. 언젠가 우치무라 선생이 자기
제자들보고 “자네들은 밤낮 성서 성서 하지만 나처럼 이렇세 넓게 보지 않으면
안돼”하던 말이 늘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는 넓게 독서하는 분이었습니
다. 그러므로 그의 성경 해석은 깊이가 있었습니다. 기독교에 말라붙는 사람은
기독교도 깊이 모르고 말고, 성경에 목을 매는 사람은 성경도 바로 알지 못하고
맙니다.
p 324
그러노라니 의문이 차차 생겼습니다. 전에는 문제 없는 것 같던 것들이 문제
가 됐습니다. 그 중 중요한 것을 말한다면 그 하나는 자주하는 인격을 가지는
이상 어떻게 역사적 인간인 예수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주여!”할 수 있느
냐 하는 것입니다. 그 담은 자유의지를 가지는 도덕 인간에게 대속은 어떻게 이
루어지는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복음주의 신앙의 대답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그
전에 선생이 해주었던 말을 잊어서가 아닙니다.
다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지만 내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그거 아무래도 논리
의 비약이 있는 것 같습니다. 깊은 체험보다는 감상의 도취인 것같이 뵈는 것이
있었습니다. 사실과 상징과를 혼동하는 것이 있다고 보였습니다. 자기를 완전히
부정한다느니, 그리스도에게 완전히 항복한다느니, 자기가 죽는다느니, 완전히
새로 났다느니, 하는 말을 지금도 모르는 것 아닙니다. 그렇지만 어딘지 거기 서
로 분명치 않으면서도 서로 묻지 않기로 말없이 약속한 묵계가 있어 슬쩍슬쩍
넘어가는 것 같은 것이 있습니다.
감정형으로 된 사람들은 감격한 나머지 그대로 넘어갈 수가 있겠지만 파고드
는 사색형의 사람에겐 그것만으로 아니됩니다. 그러면 사색하는 것은 신앙적 태
도가 아니라고 정죄합니까? 그렇다면 가장 좋은 신앙은 아무것도 비판할 줄 모
르는 어린이의 것일 것입니다. 체험은 이성 이상이지만, 모든 체험은 반드시 이
성으로 해석이 돼야 합니다. 해석 못된 체험은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은 이 세계
에서는 행동하는 도덕 인간인데 이성에 의한 해석으로 파악되지 않고는 실천이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해석을 거부하는 신비주의는 모두 미신에 떨어져버리
고 맙니다.
남은 모르지만 나는 대속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대속이란 말은 인격의 자
주가 없던 노예시대에 한 말입니다. 대신은 못하는 것이 인격입니다. 그러므로
인격 없는 자에게는 대속이란 말이 고맙게 들릴 것이나 자유하는 인격에는 대신
해주겠다는 것이 도리어 모욕으로 들릴 것입니다. 대속이 되려면 예수와 내가
딴 인격이 아니
p 325
란 체험엘 들어가고야 됩니다. 그러면 그것은 벌써 역사적 예수가 아닙니다.
그런데 대속을 감정적으로 감조하면 그 체험에 들어감이 없이 대신해주었다는
감정에만 그치기 때문에 인격의 개변, 곡 죄의 소멸은 없이 그저 기분으로만 감
사하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에 있어서 그러한 감상적인 대
속 신앙은 아무 실효가 없습니다. 대속이 참 대속이면 지난날의 진 빚을 물어주
는 것만이 아니라, 앞으로 빚을 아니 질 능력 곧 새 인격을 주어야 할 터인데,
죄를 아니 짓게 돼야 할 터인데, 실지에 있어서 그런 사람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서은 하나의 주관적 도취에 지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끝이 없는 문제지만, 나는 생각하다 생각하다 내 딴으로는 풀어버렸
습니다. 나는 역사적 예수를 믿는 것은 아니다, 믿는 것은 그리스도다, 그 그리
스도는 영원한 그리스도가 아니면 아니된다, 그는 예수에게만 아니라 본질적으
로는 내 속에도 있다. 그 그리스도를 통하여 예수와 나는 서로 딴 인격이 아니
라 하나라는 체험에 들어갈 수 있다. 그때에 비로소 그의 죽음은 곧 내 육의 죽
음이요, 그의 부활은 곧 내 영의 부활이 된다, 속죄는 이렇게 해서만 성립이 된
다. 그러므로 역사적 예수가 내 죄를 대신해 죽었다 해서 감사하게 여기는 것은
하나의 자기중심적인 감정뿐이요, 도덕적으로는 높은 지경이 되지 못한다. 그것
으로는 죄 곧 죄성이 없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대체로 이러한 판단을 내
려버렸습니다.
이것이 우치무라의 신앙과 다른 것은 물론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어쩐
지 선생에 대한 반역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강한 것이 내속에서 나를 몰아치고 있었습니다. 차라리 선생을 배반할 수는 있
어도 나는 나 자신을 배반 할 수는 없었습니다. 나는 사제의 의리라는 감정에
몰려 내 양심을 속일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나는 그것을 구태여 남
에게까지 요구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새삼스러이 나는 무교회는 아니라,
p 326
우치무라의 제자는 아니라 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제자는 생각이 반드시 선
생과 같아야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생각이 아무리 달라
졌더라도 나는 아무 사사로운 마음에서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담 가서 다시
달라질지는 몰라도 적어도 지금은 진리에 충실하고자 하는 데서 나온 변화였습
니다. 그럴 뿐 아니라 내 믿는 바로는 이렇게 나는 나에 충실하는 것이 도리어
우치무라의 정신이요, 그를 스승으로 대접하는 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대로
몇 해가 지나갔습니다.
생명의 전 과정이 교육
교사 노릇을 하고 있는 10년 동안 나는 나 개인의 장래와 나라의 장래를 생각
할 때 언제나 교육,종교,농촌, 이 셋을 하나로 붙여서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일본
의 압력 밑에서 모든 자유를 잃고 있는 우리에게 살길은 오직 두터운 신앙을 밑
바닥 또는 마지막 목적으로 삼는 교육으로 씨알을 깨워내는 데만 있다고 생각했
기 때문입니다.
그때 형편에 있어서 우리의 첫째 할 일은 민족의 해방이었습니다. 남들이 다
봉건제도의 낡은 껍질을 벗어제치고 근대식의 민주국가로 민족 문화로 발전을
하고 있는 때에 우리만이 그것일 이루지 못해 남의 식민지가 돼버리고 말았으
니, 우선 그 종의 멍에부터 벗지 않고는 아루런 발달도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
다. 이것만은 그때 누구나 뜻이 있는 사람은 다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
나 그 민족 해방을 어떻게 하면 이룰 수 있느냐가 문제였습니다.
나라가 망하던 전후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한 것은 무력혁명이었습니다. 그러
나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실력은 없었습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몇천 년을
줄곧 밖에서 쳐들어오는 대적 때문에 부대껴온 나라요, 그때는 또 서양서 오는
군국주의 침략주의 때문에 참 어려운 때였는데 어쩌면 그렇게도 국방 생각을 아
니했을까? 나
p 327
라가 망해도 참 더럽게 망했습니다. 별로 반항다운 반항 하나 못해보고 썩어
진 담 무너지듯 소리도 없이 폭삭 했습니다. 그 망국은 싸우다가 힘이 모자라서
망한 것이 아니고 씨알과는 완전히 떨어진 벼슬아치 놈들이 흥정해서 팔아먹음
으로 망한 것입니다. 이 글을 쓰는 오늘 영친왕의 장례라고 신문, 라디오가 떠듭
니다마는 영친왕이 무슨 빌어먹을 영친왕입니까? 그것이 이 땅과 씨알을 온통
일본 손에 팔아넘기는 대신 받았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 대적은 쳐들어온 놈보
다 구차한 돈과 지위를 받고 우리를 종으로 부릴 도둑을 불러 들였던 그놈들입
니다. 그러나 팔아먹은 놈은 벼슬아치여도 고생하는 것은 팔려 넘어가는 씨알인
데 그 씨알이 멍청하게 있었습니다. 왜 그랬나? 나라는 자기네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이 아직 깨지 못한 데입니다. 다 팔려 넘어간 다음에야 비로소 깨기 시작
했습니다. 이미 늦었습니다. 늦었지만 옳습니다. 늦었지만 아주 틀린 것 아닙니
다. 어려울 뿐입니다.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 났습니다. 하다가 나라 안에서 할
수 없으니 만주, 시베리아로 가서 계속 하려 했습니다. 산업으로만 아니라 정치
적으로도 황무지였던 거기서 마음대로 땅을 갈아먹으며 실력을 기르고 중국, 러
시아의 힘을 빌어 일본과 한번 맞서보자는 생각이었습니다.
비장이람 비장한 생각이지만 어림없는 일이었습니다. 청일, 러일의 두 큰 전쟁
에 이기고 난 일본 군대를 동양에서는 당할 놈이 없었고, 또 씨알을 기를 생각
은 아니하고 군인으로 그나마도 남의 군인을 빌어서 나라를 찾자는 것은 결코
역사의 앞뒤를 살펴서 하는 깊은 것이 못됩니다. 그때는 사실 지사라는 사람들,
오늘 말로 하면 지도적인 엘리트들의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했고, 나라 안의 일
반 사람들도 목을 늘여 그 ‘해외’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
었습니다. 잘못된 것이었기 때문에, 그때는 나라 사랑으로 알고 했어도 후에는
민조긔 비극이 여기서 인연이 되어 오게 됩니다.
오늘의 민족의 허리를 조르는 죽음의 38선은 사실 이때부터 금이
p 328
가기 시작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외국 군대 힘을 빌자는 생각이 아니었던
들 중국과 러시아파가 갈리지는 않았을 것이고, 러시아에 갔던 사람들이 없었던
들 이북 괴뢰정권이라는 소리는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무력혁명에 희망이 없는 줄 깨달은 다음에 한 것은 국제정세에 타보려는 노력
이었습니다. 3,1운동이 그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무력혁명이 아니고 정치적이
었다는 데서, 더구나 씨알이 그 주체가 됐다는 점에서 전보다 한 걸음 나간 것
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실패 했습니다. 씨알이 주체는 됐으나 그것은 알이 든 씨
알이 되지 못했습니다. 일본의 제국주의를 무너뜨릴 만한 혁명의 이론도 조직도
가진 것이 없이 다만 세계의 정의감에 호소를 했을 뿐입니다. 우리 속에 힘의
가능성이 있는 것은 알았습니다. 그것은 큰 수확입니다. 그러나 가능성은 길러내
서만 실지의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정의의 법칙을 믿은 것은 옳습니다. 잘한 것
입니다.
그러나 거기 속은 것이 있습니다. 세계의 열강이라는 나라가 결코 정의의 사
도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다 우리의 압박자인 일본의 선생이 군국주의 제국주의
의 나라들입니다. 세계대전은 그 제국주의 실해의 결과였습니다. 세계를 서로 제
각기 제가 다 먹으려다가 충돌이 돼서 너도 못 먹고 나도 못 먹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제국주의를 결코 버린 것은 아닙니다.
이상주의 윌슨의 말은 옳습니다. 유럽의 씨알들은 그를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그 지배자들은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윌슨 자신 실패하고 멋없이
돌아가는 판입니다. 윌슨을 손아귀에 넣고 주무른 제국주의자들은 서로 타협하
고 나는 이것을 먹는 대신 너는 그것 먹어 좋다 식으로 세계 몇억의 약소 민족
을 자신들은 얼굴 하나 말 한 마디 내놓을 기회 없이 지도 위에서 갈라먹고 말
았습니다. 그것이 파리강화외의였습니다. 도둑이 존경하는 것은 정의가 아니고
도둑질한 실력입니다. 동야의 모든 민족이 석가를 내고 공자, 노자를 냈건만 존
경받은 것은 인도, 중국이 아니고 자기네에게 강도
p 329
질을 배워 상당한 실력을 발휘한 일본 하나뿐이었습니다. 죽을 땅으로 끌려가
는 양인 한국의 비명을 아는 척할 리가 없었습니다. 일본은 이제 조선, 만주를
맘대로 먹어도 좋다는 승낙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속은 것이 있습니다. “대한독립 만세!”하는 것은 우리는
결코 일본의 지배를 원치 않는다 하는 말인데, 그렇다면 그것을 실천했어야 할
것입니다. 만세 부르는 그날은 물론 그만큼 실천한 것이지만 실천은 거기 그쳐
서는 아니됩니다. 그 부르짖음이 정말 참 부르짖음이 되려면 그날로 일본 관청
에 출석하기를 그만두고, 일본 사람이 가르치는 학교에 가기를 그만두고, 세금
바치기를 그만두었어야 할 것입니다. 그랬다면 만세가 만세로만 끝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문명한 나라에 저으이가 없지 않습니다. 그 지배자에게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씨알에게는 있습니다. 사실 문명한 나라의 힘있는 것은, 그 군대에 있지 않습니
다. 그렇게 보이지만 그 사실 아닌 것이 전쟁으로 증명됐습니다. 정말 정의믄 일
하는 씨알에 있습니다. 그것이 전쟁 동안의 참혹에서 견딤과 전쟁 후의 부흥에
서 증명됐습니다. 우리는 그 지배자를 보고 호소할 것이 아니라 그 씨알에 대해
했어야 할 것입니다. 씨알은 일하는 씨알, 참의 씨알이므로 말만 아니라 사실로
만 호소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공연히 우사으이 표시인 깃발만 흔들지 말고 실
지로 정의를 지킴으로써 오는 피와 땀으로 계속 부르짖었던들 세계의 씨알은 가
만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꾸로 씨알은 내놓고 그들을 짜먹는
지배자들을 보고 했으니 될 리가 없었습니다.
실패는 섭섭하지만 실패처럼 값어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생
각하게 합니다. 만세를 부르면 독립이 될 줄 알았다가 그대로 아니되는 것을 본
다음에야 한국의 씨알은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생각함은 곧 알듦입니다. 3,1운
동 이후 우리 민족이 허탈감에 빠지지 않고 자라기 시작한 것은 깊이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오늘의 씨알들이 깊이 반성할 점입니다. 국민투표 이후 왜
p 330
이렇게 맥이 빠집니까?
생각해 얻은 결과는 한 마디로 교육입니다. 살길을 가르치는 데 있다 하는 것
입니다. 전에 무력으로 반항함으로, 세계 대세에 주목하여 정치적으로 호라동함
으로 살 수 있을 줄 알았던 데 비해 훨씬 깊이 들어간 것입니다. 가르쳐야 한다
할 때 폭력보다는 정신의 힘 있는 것을 안 것입니다. 정치보다 문화에 더 생명
이 있는 것을 안 것입니다. 내 발등의 불부터 끄려 할 것이 아니라 모두가 다
같이 쓰고 사는 집에 당긴 불부터 꺼야 하는 것을 안 것입니다. 사람이 있어 역
사를 낳은 것이 아니라 역사를 내다보고 거기 참여하는 데서 사람의 살림이 나
오는 것을 안 것입니다. 나라 팔아 먹은 것이 이완용, 송병준이가 아니라 우리
자신들인 것을 안 것입니다.
나라가 어느 한 몸 두놈, 어떤 계급의 것이었을 때 그들이 팔아 먹을 수 있었
을는지 모르나, 나라가 우리 것인 담에 우리가 아니 파는데 누가 팔 수 있느냐?
일본이 빼앗은 것 아니라 우리가 도둑을 불러들인 것이다. 스스로 불러들이지
않는데 들어오느 도둑이 어디 있느냐? 설혹 있다손치더라도 지킨 채로 죽었음
죽었지 어찌 빼앗긴다는 법이 있느냐? 빼앗을 수 없는 것이 나라다. 나라는 정
신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렴풋이 그 짐작이라도 하게 된 것입니다.
넓고 깊은 의미에서 생가할 때 사람의 하는 모든 일이 결국 교육입니다. 사람
의 일만 아니라 생명의 전 과정이 곧 교육입니다. 진화는 곧 생명의 자기 키움
이요 자기 고쳐감입니다. 정신을 곧 생명의 저 돌아봄이란다면 하나님은 자기
교육을 영원히 하시는 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3,1운동 이후 교육열이 올
라간 것은 결국 씨알이 스스로 깨고 스스로 자기를 키우기 시작한 것입니다. 당
연한 과정이요 바로 된 일입니다. 그런데 그 교육을 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당
연이람 당연한 일이지만 이것이 마지막 일이니만큼 하지도 못하고 아니하지도
못하고 그 어려움을 말로 할 수 없습니다.
무기를 빼앗으면 그것은 내놔도 좋습니다. 정치를 못하게 하면
p 331
그것을 못하고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육을 못하게 한다면 어짜합니까?
아니하면 짐승도 못됩니다. 짐승도 제 새끼를 가르치기는 합니다. 하자니 그 정
치와 그 폭력에 맞서야 합니다. 그러면 죽음을 의미하는 것뿐입니다. 그러고 보
면 일제 마지막에 성을 일본식으로 고쳐라 했을 때 거의 모든 사람이 다 그 명
령에 복종하면서 자녀의 교육 때문이라 했던 것은 그럴 만한 일입니다. 성을 갈
다니, 사람으로선 할 수 없는 일인데, 사람은커녕 짐승 버러지는 더구나도 아니
하는 일인데, 죽지 못해 그 비겁한 짓을 하면서 그 구실을 교육에 가져다 댔습
니다. 그런 때에 쓰는 것은 절대적인 것일 터인데 교육은 그만큼 중대하단 말입
니다. 그것 때문이라면 짐승도 아니하는 짓을 하고도 용서를 받을 법하다 해서
한 말입니다. 그들도 성 갊이 곧 그렇게 시키는 교육인 줄 모르지 않았겠는데
그 모순을 할이만큼 교육은 무서운 것입니다.
식민지 시대의 교육의 어려움
교육이야말로 하나님의 발길질입니다. 절대입니다. 하는 줄 알면서도 하고 하
는 줄 모르면서도 합니다. 찬성하면서도 하고 반대하면서 하게 되는 것이 교육
입니다. “나는 바담풍 해도 너는 바람풍해라”하는 말이 얼마나 그것을 잘 표
시합니까? 금하려 해도 금할 수 없습니다. 살림 그 자체, 정신 그 자체가 가르치
는 것이요 또 배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교육은 누구나 할 수 있고, 어
디서도 할 수 있는 것이요, 또 아무도 할 수 없고 어디서도 할 수 없는 것입니
다. 나는 교육자가 되려고 사범학교 갔을 때 그런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갔습니
다. 못했으니 갔지 했다면 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이 이십이 넘었고 이미 남의
아비가 된 때이니 생각이 없을 수는 없었습니다. 생각을 하고 갔기에 지금도 직
업심리에서 교사가 된 것은 아니란 말은 할 수 있습니다.
시대의 다름도 있겠지만 그래도 인생으로서의 내 앞날 또 씨알의
p 332
하나로서의 책임을 생각하면서 골랐지요. 새처럼 먹고 살아갈 일을 위해 하지
는 않았습니다. 쉽게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나는 취미가 비교적 여러 방면이람
여러 방면입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은 멀리서 영문과를 했느니 철학과를 했느
니 추측을 할 만큼 그런 데도 생각이 있었담 있었고, 미술은 더구나도 해봤으면
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여럿 중에서 가장 흥미의 점수가 적은 것부터 떼버리
는 방법으로 목적을 결정했는데, 내가 내 개성을 정말 바로 알았던가 몰랐던가
그것은 별문제로 하고, 마지막까지 아쉬울 정도로 남아 았었던 것은 미술, 곧 서
양 그림이었습니다. 이제 와서 공정히 생각해보면 그럴 만큼 그림에 소질이 있
었나 하면 그렇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그때는 하고 싶은 개인의 취미대로 하란
다면 아마 미술로 갔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때 생각에 당시의 우리나라
형편으로 보아 시급한 것은 교육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 길을 택했습니다.
물론 무슨 깊은 설명이 있다거나 누구의 지도 조언을 들어서 한 것은 아닙니
다. 아버지도 어렸을 때 나를 의사로 만들려고 공립하고에 보냈다가 후에 자기
가 지내보니 의사 직업이 반드시 좋지 않다해서 그것 할 것 없다는, 느나마도
꼭 명령은 아니고, 말을 한 다음에는 제 할 일 제가 어련히 알아서 하려니 모든
일에서 믿어주셨기 때문에, 나도 별로 의논도 하지 않았고 그 밖에 어느 선생이
나 친구에게 의견을 물은 것도 없이 결정한 것이었습니다. 다만 사회 일반의 생
각 돌아가는 형편은 상당히 작용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이따금은 차리리 의사, 더구나 한의라도 됐더라면 하는 생각을 하느
때가 있고 옥에서 나와서 명의라고 소문 듣던 주인 없는 약국에 앉아 교사 노릇
은 이미 할 수 없이 된 자신과 물러가는 날 있을 것 같지 않은 일본 세력을 보
며 장애를 생각할 때 이제라도 한의를 배워야겠다 하는 생각에 의학입문, 동의
보감, 맥경, 본초를 읽기까지 했고, 사실로 어떤 때는 한의사이십니까 하고 묻는
것을 당해도 보지만 소질로 하면 의사가 될 수 있었던지도 모릅니다. 또 하면
어지간히 할 것도 같습니다.
p 333
그것은 실없는 이야기고, 하여간 그러면서도 지금도 역시 중요한 것은 교육이
라 하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사가 되는데 하는 생각에
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사가 되는데 노상 생각없이 된 것은 아니
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교단에 서니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랐습니다. 오래는 못돼
지만 그래도 남강 선생의 말년 두 해를 모셨는데 그 남강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는데 어찌합니까?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어려워”하고는 한숨을 쉬시곤
했습니다. 왜 그렇게 어려웠던가? 그 설명을 좀 해보기로 합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어려서 받던 교육처럼 효과적인 교육은 없었습니다.
교육시설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교재가 잘 정돈돼서도 아닙니다. 교사가 훌륭해
서조차도 아닙니다. 그때에 무슨 시설이나 교재가 있으며 그런 시골 구석에 무
슨 훌륭한 교사가 있습니까? 그래도 선생과 학생이 하나가 되어 산 교육이 되어
갔습니다. 그 까닭이 어디 있나 하면 그 시대 공기에 있습니다. 선생이 가르치고
아이들이 배운 것 아닙니다. 역사 자신이 가르치고 역사 자신이 배웠습니다. 잘
가르쳐도 나라요 못 가르쳐도 나라입니다. 교육은 되게만 되어 있었습니다. 그때
도 시설 부족, 교재 부족, 교사의 부족을 알지 모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살아 있는 전체 그 자체가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내 집 자식이 아닙니다. 우리 ‘학도생’이지. 누가 잘해 상을 타도 시
기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잘못해 벌을 받아도 업신여기거나 아주 몹쓸 놈으로
버리지 않습니다. 나는 지금도 다른 것엔 몰라도 거기는 향수를 느낍니다. 그런
시대의 분위기, 민족이 하나로 감격하던 그런 시대정신이 또 한번 왔으면! 그때
에 잘해서 민족의 틀잡지 못한 것이 한입니다. 전체적인 감격없이 교육은 아니
됩니다.
그것이 깨지고 교육이 잘못되기 시작한 것은 합병하고 일본 사람의 손으로 교
육을 하게 되던 때부터입니다. 벌써 전체는 없습니다. 교사도 그것을 알고 아이
들도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p 334
그것은 거짓입니다. 교육이 될 리 없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아주 아니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그 전체, 혹은 나라, 혹은 역사가 적어도 아이들 편에는 깨지
지 않고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본 교사(혹은 일본 노릇을 하는 조선 사람 교사)가 일부러 우리에게는 해로
운 것을 가르쳐도 아이들이 그 근본 천성, 혹은 속에 있는 전체의 명령에 의해
자동적으로 바꾸어놓기 때문에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어떻게 어린아이도 그것
은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는 원수로 아는 일본 사람에게 아이들을 보내면
서도 안심할 수가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닭한체서 오리 알을 까내는 셈입니다.
어리석은 암탉이 아무리 불러도 소용이 없습니다. 부르면 부를수록 오리새끼는
물로 갑니다. 그럼 일본 사람은 그것을 모르나? 모를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아
니 가르칠 수가 없습니다. 모이를 아니 주고는 알을 빼앗아 먹을 수 없듯이 교
육 아니하고는 지배할 수 없습니다.
가르쳐놓으면 지배를 벗어버릴 힘이 자동적으로 생깁니다. 선한 것이 마지막
에 이기고 마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본 시대 초기의 교육도 효과가
없지 않았습니다. 지배자를 심판할 지혜와 그것을 쳐부술 능력을 다른 사람 아
닌 지배자 자신이 가르쳐줍니다. 그것이 또 그들에게 손해 아닙니다. 남을 지배
하는 것이 잘난 것이 아니라 아니하는 것이 잘난 것입니다. 이것이 악한 자가
악을 해도 제 악으로 인해 악이 없는 자리에 가도록 마련이 되어 있는 것이 하
나님 증거입니다.
교육이 정말 하기 어려워진 것은 공산주의가 들어오면서부터입니다. 공산주의
가 나빠서 아닙니다. 물론 나쁘지만 나쁜 것만 가지고 내가 잘못되지는 않습니
다. 공산주의 사상 때문이 아니라 그로 인해 민족분열이 생긴 때문입니다. 그럼
일본 제국주의는 못했던 민족분열을 공산주의는 어떻게 하게 됐나? 일제도 전연
안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도 ‘갈라놓고 지배한다’는 것을 모를 리 없습니다.
될수록 갈라놔서 개인의 무리로 만들어서 전체를 없이 해놓고 다스리려고 애를
썼습니다. 한국 역사를 일부러 비뚤어지게 써가지고 가르친것
p 335
도 그것이요 교육이랍시고 실업 교육만을 한 것도 그것입니다. 사람이 살려면
일해야 하지만 일은 결과에 매달리는 것이기 때문에 일에 열심하면 할수록 전체
는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전체는 나와 남의 하는 모든 일을 묶어 한 의미로 살리는 생각 속에만 삽니
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될수록 기술, 그나마도 고등한 것은 아니고 낮은 기술
을 가르쳐서 자기네의 심부름하는 자격을 가지게 하는 한편 생각하는 기회를 없
이하려 했습니다. 그러고는 더구나 나쁜 것은 중류 이상의 일부 사람에게는 약
간의 지위도 사업도 할 수 잇는 길을 열어 출세할 수 있게 만든 것입니다. 그때
일본은 고도의 자본주의로 들어가려 하는 때이므로 어느 정도 그렇게 하는 것이
자기네에게 유리했습니다. 그렇게 한 결과 어떤 현상이 나타났느냐 하면 전에
지사라 민족주의 지도자라 하던 많은 사람이 약해져서 타협을 하고 일본 세력
밑으로 들어가게 되고 사회에 유산자 무산자 하는 계급현상이 일어나게 됐습니
다.이리해서 전에 총칼 앞에서는 하나로 서던 민족이 이제 돈과 세력 앞에서는
갈라지게 됐습니다. 그렇게 되면 공산주의를 부르지 않아도 들어오게 되는 것입
니다. 그래도 이때까지는 대체로 민족주의 시대기 때문에 그 민족 감정이 지배
적이어서 분열이 그리 심하지 않았고 교육도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당초에 지사들이 북만주, 시베리아 눈바람 속을 헤맸을
때 다 사랑하는 한배 나라 건지자는 생각에서 그랬지 다른 야심이 없었을 것입
니다. 그러나 씨알을 주인으로 삼고 그것을 길러서 하잔 생각보다도 급한 마음
에 정신보다는 방법으로 기울어져 밖의 힘을 빌어 가지고 일을 해보잔 생각을
했을 때 전체는 깨지고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중국 힘을 비느냐? 러시
아 힘을 비느냐? 이것이 비극의 시작입니다. 러시아 힘을 빌려 할 때 그들은 그
러시아가 레닌, 스탈린의 공산주의 나라 될 줄 몰랐는지 모릅니다. 또 공산 러시
아가 된 후에라도 사상적으로 공명해 한국을 공산화하자는 생각보다는 한때 그
힘을 빚자는 생각에서만 했는지
p 336
모릅니다. 사실 일본을 제어할 힘은 그밖에 없었으니, 또 설혹 공산화시킬 생
각이었다 하더라도 그 때문에 오늘같이 이렇게 남북으로 분열이 될 줄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후에 와서 역사를 돌아보는 사람은 그 당시 사람의 맘 속에 생각했던
것만 보아서는 아니됩니다. 생각 못했더라도 그 속에 숨어 있던 것을 집어내야
합니다. 그렇게 볼 때 밖의 세력을 전략적으로 이용하려 했던 이들 지사들의 일
은 많이 비판을 받아야 합니다. 힘을 빌려는 사람은 벌써 전체를 어느 정도 잊
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본위로 빠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흥정을 하는
김에는 흥정 맡은 내가 거기서 먹는 것이 있고 싶습니다. 그러면 파가 갈지리
않을 수 없습니다.
순전히 전체를 위하는 마음에서 남의 힘 의지란 있을 수 없습니다. 뒤집어 생
각하면 환합니다. 한국 독립을 위해 원조를 하는 중국이나 러시아가 정말 우리
위해 희생적으로 의용군을 줄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서로서로 흥정이요 이
용해먹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과는 첨부터 뻔한 것입니다. 외국 세력으로 독
립이란 논리가 서지 않는 말입니다. 설혹 됐다 해도 그것은 나라의 독립이 아닙
니다. 어느 정권이 선 것뿐입니다. 반드시 그 후에 그 국민은 그 정권과 싸워서
정말 독립을 다시 싸워 얻어야 할 것입니다. 동쪽의 일본 역사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남의 이야기를 하려고 이 말을 하는 줄 압니까? 오늘 우리 일이 그것
아닙니까?
하여간 그것이 인연이 되어 해방 후 38선이 생겼습니다. 물론 국제정세 때문
이지만 국제정세만 따져 가지고는 역사는 없습니다. 인격의 본질이 도덕적인 데
있는 이상 환경에 핑계가 성립되지 않는 모양으로, 역사를 국제관계에만 밀 수
없습니다. 아무리 미, 소 두 세력이 왔더라도 우리가 정권을 잡는 것보다도 전체
를 건지는 것을 더 중하게 생각했더라면 차라리 공동 신탁통치 밑에 있으면서라
도, 두 정권으로 갈라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치론을 하잔 것 아닙니
다. 문제의 초점이 전체의 분열에 있는데 그 분열의 쫓아온
p 337
유래를 찾는다면 공산주의를 끌어들인 데 있습니다. 일본시대는 강제로 억눌
러도 민족이 하나로 통일되어 있기 때문에 고통이면서도 어지럽지는 않았는데
이제 공산주의가 들어온 후는 민족이 정신적으로 분열이 됐습니다.
그것이 신간회 만들던 무렵부터 시작입니다. 물론 시대적인 까닭이 있습니다.
벌써 문족주의 시대는 지나서 사회혁명 단계에 들어왔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
입니다. 그러나 잊어서 아니되는 것은 우리는 민족해방을 못한 채 사회혁명 단
계에 들어왔기 때문에 남의 나라와 사정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둘을 겸해서 치
러야 합니다. 역사에서 건너뜀은 허라 아니됩니다. 그런데 초기에 들어온 공산주
의자들은 ‘조국 러시아’라고 내놓고 부를이만큼 얼빠지고 부식한 사람들이었
습니다. 그들더러 오늘의 중공, 소련 관계를 좀 보라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들은
민족진영을 무너뜨리려 갖은 수단을 다 썼습니다. 물론 민족시대는 지나갔습니
다. 그러나 민족해방을 못하고는 사회해방은 아니됩니다. 오늘까지도 그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일본의 지배를 못 면한다면 나라 안의 사회문제를 해결하고 싶어도 아니돕니
다. 지금도 그런데 하물며 총독정치시대에 있어서겠습니까? 물론 민족주의 지도
자들 밉습니다. 썩었습니다. 그들이 썩지 않았던들 공산주의자들이 그렇게 무책
임하게 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민족의 분열이 그렇게 일어나고 보니 교육을
도저히 할 수가 없었습니다. 선생 선생끼리도 학생 학생끼리도 믿을 수 없습니
다. 압박하는 일본에 대해 그전같이 대항할 수가 없습니다. 이를 본 것은 일본
제국주의뿐이었습니다. 시대가 이레ㅎ게 바뀌었으니 말이지 만일 그대로 나갔다
면 공산주의 자신도 망해버렸을 것입니다.
교육과 종교와 농촌을 하나로
사람은 죽으면 다 좋은 사람이 돼버리고 역사는 지나가면 다 빛나는 투쟁이
돼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좋기도 하지만 또
p 338
그래서만은 아니되는 점이 있습니다. 3,1운동 찬양하는 사람은 많아도 거기 어
떻게 잘못이 있었던 것은 말하려 하지 않습니다. 광주 학생사건은 더구나도 그
렇습니다. 오늘 와서 말하니 다 용감한 투쟁이라 하지만 그때에는 교육하려는
사람은 참 애 먹었습니다. 민족적인 차별에 분개하여 일어섰던 학생의 일은 장
하지만, 공산주의자들은 그것을 이용해서 사회질서를 온통 파괴하려 했습니다.
정말 무산 계급을 해방시키려면 한국이 일본의 종살이에서 전체로 해방되는 일
없이는 될 수도 없고 된다 해도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계급투쟁이란
이름 아래 민족의 전통도, 사회의 질서도, 도덕도 온통 부수자는 것입니다. 또
지도자는 무슨 이데올로기의 이론이 있고 방침이 있어 그런다 가정을 하더라도
그 서전을 듣고 움지이는 학생은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반항하는 것입니다. 그
렇다면 그 이론이 설혹 옳다 하더라도 그 움직인 학생들은 이용당한 것이지 혁
명을 한 것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은 정말 살부회를 꾸미라하고 선생들은 없애
버리라 했습니다.
나는 자본가의 착취를 반대하고 눌린 씨알을 해방하자는 데서는 누구보다 뒤
지고 싶지 않지만 그들의 도덕을 전연 무시하고 시기와 미움과 싸움과 원수 갚
음과 파괴만을 일삼는 데는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유물론도 털어놓고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면의 진리가 있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계급 없는 사회 건설하
자는 데 반대 있을 까닭 없습니다. 계급투쟁까지도 어느 정도 용납할 수가 있습
니다. 그러나 그 투쟁방법은 악인 것을 말하기에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내
사랑하는 학생들을 부추겨 내게 반항시켰습니다.
나는 또 좋습니다. 남강 선생에까지 맞섰습니다. 그것이 어디만 아니라 전국적
인 현상입니다. 대세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대세에 못 견디어 비겁해지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나는 싸워야 했습니다. 교사 노릇을 그만두고 싶은 생각도
그때는 하지 않았습니다. 난동 치는 학생한테 매도 맞았습니다. 하지만 학생들이
나를 미워하지 않는 것은 뻔합니다. 미워할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선전에 넘어
가
p 339
서 그럽니다. 그러니 나도 그들을 미워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
들을 설득시킬 확신이 있나 하면 없습니다. 그런 때에 남강 선생님은 배울 만했
습니다. 동맹휴교 뒤처리를 하게 되면 그 처벌에 있어서 젊은 교사들은 대개 강
경론인데 선생님은 그때에 “안 돼, 그렇게 하면 아니돼. 말을 먹여도 물고 차는
상사말을 먹여야 멕일 맛이 있지, 시리죽은 것을 멕여 뭘 해!”했습니다.
그래서 교육을 그만둘 생각은 아니하지만 하고 있는 그 교육에는 확실히 근본
적으로 잘못이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공산주의를 극복 못하는 것이 교육일
까? 근본적으로 고쳐 생각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점에서는
남강 선생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옛날에 선생 학생이 하나로 어울려 울고 웃고를
같이하는 오산학교을 세원던 그가 몰라서 그럴 리는 없지만 3,1운동 결과 징역
을 마치고 감옥에서 나온 후는 대체로 총독부 교육방침에 순응을 하면서라도 하
자는 생각에 반대도 있는 것을 무릅쓰고 관청 거래를 하며 승격운동을 했습니
다.
그리고 누가 조언을 해드렸는지 영국 옥스포드 말씀을 해드려서 장차 오산을
옥스포드 같은 교육도시로 만들 꿈도 꾸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그렇게 되는
것을 보고는 아주 새로운, 새 교육을 설계 해보려고 생각을 시작했는데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선생님을 일고 난 나는 어머니 잃은 아기 심정이었습니다. 나의
둔한 것을 스스로 책망했습니다. 왜 일찌부터 좀 선생님을 힘써 배울 생각을 못
했던가? 정신이 조금 들어 배워야겠다 하는 때에 훌쩍 가버리셨습니다. 바로 이
글을 쓰는 5월 9일입니다. 1930년.
나 혼자서 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미지근하게나마 한 생각이 교육과
종교와 농촌을 하나로 연결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의 바닥을 이루고 그것이
점점 자라 한 점으로 초점을 이루는 곳에 창조적인 생명의 불꽃이 섭니다.
(1970)
제 3부
나의 어머니
간디의 참모습
남강 선생님 영 앞에
육당, 춘원의 밤은 지나가다.
p 343
나의 어머니
어머니의 성은 김씨, 이름은 형도입니다. 어머니도 우리나라 대개의 여자가 그
랬던 것같이 인생의 절반을 넘기도록 이름을 가지지 못했는데 그 이름은 일본한
테 나라가 망하고 총독정치 밑에서 호적을 전부 새로 갈 때 여자도 모두 이름이
있어야 한다해서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얻으신 것입니다.
나는 지금도 동리 어른들이 사랑방에 모여 네 집의 여자들 이름을 떡 빚듯이
모조리 지어 붙이던 그때 광경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형자는 아버지 이름이 형
택이었기 때문에 거기서 한 자를 따온 것이고, 도자는 왜 붙였는지 모르나, 어머
니의 일생으로 보아 잘 맞는 글자라 하겠습니다. 글은 몰랐지만 어머니는 과연
도리에 밝으셨고, 또 중년 후부터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었기 때문입니다.
1898년 음력 2월 19일 평안북도 용천 진고지 농갓집 둘째 딸로서 남쪽으로 30
리나 떨어져 있는 사점에 역시 가난한 소작농의 외아들인 같은 나이의 아버지와
결혼하여 7남매를 낳아 맨 위와 아래 둘을 낳자마자 곧 잃어버리고, 우리 2남 3
녀를 키워 장성시켰습니다.
여자로서 보통 키였고 미끈하고 균형잡힌 체격에 침착한 몸가짐
p 344
이었고, 얼굴은 미인이라기보다는 말고 점잖은 타입이었습니다. 말적고, 감정
에 자기를 잃는 일 별로 없고 의지는 굳센 편이었습니다. 두되는 퍽 명석했던
분으로 아마 요즘 세상에 나셨다면 누구한테 뒤지지 않는 지식인이 되지 않았을
까고 생각합니다. 손재주도 좋으셔서 가난한 살림이면서도 명절 때 내 옷차림은
동무들 속에서 뛰어나서, 동리 부인들이 몰려와 일부러 그 바느질 솜씨를 구경
하며 감탄하던 것을 나는 지금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명절날 밤엔 흔히 밤을
밝히면서 바느질을 했고 나도 곧잘 옆에서 지켜보곤 했습니다. 결코 남에게 떨
어지는 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에 나 같은 불효는 없습니다. 나는 아버지, 어머니 두 분 다 임종을 못했
습니다. 아버지는 1940년 내가 평양 시외 송산리에 공등농사학원을 맡아 나갔다
가 그해 8월 계우회 사간이 터져 대동경찰서 유치장에 1년 들어가 있는 동안 세
상을 떠나셨기 때문에 맏상주 노릇도 못했습니다. 경찰서에서 돌아와 보니 집안
은 말이 아니됐고 어머니가 한없이 불쌍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있는 정성을 다
해 남은 해를 모셔보려 했는데 한 해를 지나니 이번에는 성서조서 사건이 또 터
져 서울로 잡혀와야 했습니다. 그래 서대문 형무소에, 1년을 있다가 돌아와 땅을
파먹는 농사꾼이 되어 해방이 됐습니다. 해방이 됐어도 나는 일할 생각이 없었
는데 세상은 나를 끌어 내세워 신의주학생사건의 책임을 지고 소련군 형무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몇 번을 죽었습니다. 우선 사건 나던 그날 소련 군인의 총과 우리 공산당원의
몽둥이에 맞아서 죽었다 살아났고, 다음은 그 감옥에서 영원히 죽어, 나오려니
생가은 못했고, 50일을 있다가 뜻밖에 놔 주기에 살았나보다 하고 집에 와 있으
니 1년 만에 또 크리스마스 밤에 잡아가서 이번은 정말 마지막인가 했는데 한
달 후에 또다시 나왔습니다. 그러니 그동안 어머니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마흔다섯이 되도록 시라고는 한 줄도 써본 일이 없던 내가 노래를 쓰게 된 것
은 감옥 안에서 어머니 생각을 하면서 시작된 것
p 345
이었습니다. 시를 쓰자 해서 쓴 것이 아니라, 어머니 생각을 하니 자연 내 마
음 자체가 애절한 시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내 앞에서 영원한 슬픔
의 형상으로 서 계십니다.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맨 먼저 느끼는 것은 ‘끊임없이 올라가자는’뜻의 사람
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머니만 아니라 우리 집 전체가 그렇다 해야 할 것입니다마는 그래도
어머니의 노력 없이는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내가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이 아니라 감탕물 먹는 바닷가였습니다. 우리나
라의 맨 서북 모퉁이, 압록강이 황해로 들어가는 바로 그 지점, 아주 구석지고
하잘것없는 농사꾼들이 사는, 천대받는 곳 이었습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위대한
사람들이 살고 남긴 찌꺼기, 모든 더러움을 씻어내려 영원한 어머니 가슴인 바
다 밑에 가라앉혀 이룩된 것이 감탕흙인니다만 어머니도 그 속에서 났습니다.
아마 그랬기 때문에 다시 더 가라앉을 데가 업기 때문에, 올라오려 했을 것입니
다. 그러나 모든 짓밟힌 것이 다 올라오려는 정신을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그때 그 지방에 살던 사람을 다 생각해봐도 인간다운 의식을 가지고 꿈틀거려
본 것은 몇이 못됩니다. 대부분 그저 감탕 속에 꿈지럭이다가 사라지고 말았습
니다. 그 점에서 보면 어머니는 이름없이 났다 이름없이 갔지만 결코 보통이 아
닙니다. 보통이 아니라고 무슨 지배의식이라도 가졌던가? 아닙니다. 도리어 그보
다는 일반이 그렇게 눌린 속에서 내로다 하는 생각조차 못하기 때문에 그 무지
함이 마치 내려가는 기압이 수은주를 올리듯 몇 되지 않는 깬 마음을 일으켰을
것입니다.
어머니는 오십이 될 때까지 글자는 한 자도 몰랐습니다. 아버지는 소작농의
집에 났으면서도 일찍부터 한의술을 배워 의사로 일생을 마치면서 흙은 만져보
지도 못했습니다. 어머니는 사십대까지 글자대로 손톱 발톱이 닳도록 일하는 농
부였습니다. 그러나 그저 썩지 말자는 생각은 강했습니다. 그러므로 글이 없을
뿐이지 지식은 없지 않았습니다. 나는 행동의 세세한 지도에 관해서는 어머니께
받은 기
p 346
억이 많습니다. 처음으로 절하기를 배우던 데서부터 옷고름을 매고 대님을 묶
고 수저를 들고 놓는 것을 자세히 가르쳐주시던 것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퍽 감격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내가 여남은 살 되던때 일인데, 그
때 아버지는 하시는 약국 관계로 집을 떠나 외가에 가서 계셨는데, 내가 어느
날 외가에 가게 됐습니다. 유달리 수줍음이 많은 나를 붙잡고 어머니는 단단히
일러주시는 것이었습닌다. 여러 사람 있는 데라고 부끄럽다고 아버지한테 절을
아니해서는 못쓴다, 사람의 자식이 그래서는 못쓴다 하셨습니다.
솔직한 말로 상놈들이 사는 지방이라, 양반들이 하는 모양으로 어려서부터 원
숭이 가르치듯 까다롭게 틀에 박힌 인사를 가르칠 줄을 몰랐습니다. 그렇기 때
문에 집안끼리에서 인사란 별로 없는 것이 일반 풍습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그것
을 잘 아시기 때문에 내가 행여 버릇없는 자식이 될까 염려하셨던 것입니다. 나
는 그때 벌써 글의 지식으로는 어머니 위에 섰었던 만큼 그것이 한없이 고맙고
존경스럽게 생각되어 속으로 기뻐서 평소의 약점을 이기고 가서 하라는 대로 깍
듯이 했습니다. 그때부터 우리 어머니는 보통이 아니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1918년에 내가 태어난 사점을 떠나 어머니의 고향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갔는
데 그동안 아버지의 약방이 잘 되어 좀 넉넉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때까지 그 지
방에서는 10리 20리 가야 하나 있을까 말까 하던 두루거리 큰 기와집을 사가지
고 간 것입니다. 이때 어머니는 퍽 기뻐하셨고, 그때까지 하던 김매기를 그만두
고, 아주 판박힌 중류 살림의 어엿한 주부가 되셨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나는 집에서 40리 떨어진 양시에 가서 첨으로 남의 집 밥을 먹
으며 공립 보통학교을 졸업했고, 평양에 나가 관립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
3학년을 다 마치게 됐다가 3, 1운동에 앞장서서 학교를 나오게 됐고, 결혼을 했
고, 이태 동안 공부가 중단된 것 때문에 속을 썩이다가 오산학교에 들어가 일생
을 통하여
p 347
큰 전환점이 됐고, 1923년 일본 동경으로 유학을 가게 됐습니다.
동경서 학교을 마치고 돌아와보니 집 살림도 많이 늘어 움직일수 없는 중류층
이 되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놀랄 것은 아버지, 어머니가 기독교 신자가 되신 것
입니다. 그뿐 아니라 집 옆에 교회와 학교을 세우고 아버지는 장로가 되셨고 어
머니는 권사가 되신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나는 교회 안에서 자랐지만 아버지, 어머니는 신자가 되지 않았습
니다. 거의 온 동리가 다 믿는데도 교회에 가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반대
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두 분이 다 그저 남 따라 무엇을 하기에는 너무
도 자주적이었고 이성적이었습니다. 내가 난 이후 나는 우리 집에서 다툼이 있
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언성을 높이고 감정을 써서 말을 하거나 상
스러운 욕을 하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도, 아버지 어머니
도 다 그러했습니다. 어느 면으로는 아주 찬 사람들 같았습니다. 그러난 속을 보
면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동리에서 누구와도 잘 사귀며 지냈고 어려운 사람
을 동정하는 면에서도 우리 집이 늘 앞섰습니다. 나도 자란 우에야 알았지만 그
미신 많던 시절에 우리집에서는 귀신 사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집의 누구
가 점을 치러 다니거나 무당을 불러 굿을 하거나 하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 했
습니다. 이것은 누구보다도 어머니가 이성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감
사합니다.
그런 분들이 어떻게 종교을 믿게 됐을까? 우리는 부자끼리도 모자끼리도 별로
토론이 없는 것이 보통입니다. 제각기 마음대로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 믿
어 말하기 전에 벌써 합의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든다면 전문학교에 들
어갈 때도 아버지나 어머니가 너는 무얼 하려느냐, 무엇을 해라 한 일도 없고
내가 또 무엇을 전공할까요 물은 일도 없습니다. 그랬어도 잘못된 것 하나 없습
니다. 그렇기에 내가 기독교가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부모님도 믿으셨으면 하
는 생각을 하면서도 언제 한 번 권해본 일 없습니다. 아버
p 348
지 어머니가 신앙에 들어가신 것은 누가 권해서가 아니라, 소위 말하는 복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생각해서, 사람으로서 마땅히 할 것을 하기 위해
서 한 일입니다. 생각이 많으셨던 것을 내가 압니다. 그 말 없으신 분들도 때때
로 말 끝에 내비치신 것을 들었습니다.
첫째는 인생의 마지막 구절에 들자 공을 위해서 어떤 봉사를 해야겠다는 생각
에서입니다.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양심이 아주 날카로운 분이었습니다. 그런 시
골 구석에 태어났으면섣 말년에는 명의라는 소눔이 나서 서울, 만주 북지에서까
지 환자가 왔던 일이 있는데도 돈 모을 생각은 아니하셨습니다. “돈을 모으려
면 그거 못하겠느냐? 그러나 사람이 그래서는 못쓴다.” 어머니는 더구나 그런
것만 아니라 깊은 영적 체험까지 얻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조금도 그 정신과 같
은 태도를 나타내시는 것을 못 보았습니다.
둘째는 자녀 교육을 생각해서, 그 중에서도 나를 생각해서 하신점이 많습니다.
나는 열입곱 살에 나보다 한 살 아래인 내 아내와 결혼했습니다. 전혀 부모님
의견에 따라 했습니다. 어느 때 평양 있는 내가 아버지가 결혼하면 어떠냐고 묻
는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그때 나는 이미 무조건 관습대로 따르는 지경은 지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형편을 보아서 부모님 의견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
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잘한 일은 못됩니다. 그 후 오래지 않아서 나는 결혼을
너무 이르게 했다는 후회가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지식청년 사이에 유행했던
이혼 같은 것은 그때도, 그 후도 생각해본일조차 없습니다. 아내는 전연 교육을
받은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 내가 졸업을 하고 돌아오기 전에 그에 대한
준비를 해두어야 한다고 생각하셨던 듯합니다. 그때 두 분이 교회에 나가시며
며느리까지 데리고 나가셨고 아버지, 어머니가 손수 며느리 교육하기를 시작하
셨습니다. 이리해서 어머니는 해방 직전까지 그 지방 여성계에서는 지도적인 인
물이 되신 것입니다.
끝으로, 내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내
p 349
사상의 밑돌을 어떻게 어머니가 나주셨나 하는 이야기입니다. 어머니는 본래
인자해서 나는 억울한 꾸중을 듣거나 매를 맞거나 한 일은 한 번도 없습니다.
단 하나 예외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머니 잘못은 아닙니다. 아마 서너 살
때의 일이 아닐까, 하룻밤은 자다가 깨니 갑자기 까닭을 모르게 짜증이 났습니
다. 그래서 일어나 앉아 울었습니다. 그랬더니 아버지가 자다 말고 웬 지둑이냐
고 꾸짖으셨습니다. 그때 내 생각에도 아버지 어머니가 잘못해 주었다는 것 아
니었습니다. 그때의 감정을 나는 지금도 못 잊습니다. 후년에 학교에 선생이 된
다음의 소감으로는 그때 내 혼은 어떤 영혼의 엉클어짐이 있어 그러지 않았을
까, 그때에 만일 누가 그것을 잘 풀어주었다면 나는 혹시 좀 더 위대한 혼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때도 어머니는 나를 억지로 틀어막지는 않았습니다마는 그 어느 때도 나를
마구 다루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런던 내가 크게 한 침 맞은 일이 있습니다.
7, 8살 때의 일 아닐까 생각합니다. 나는 본래 맏아들이었으므로 자연 특권이 붙
어 있었습니다. 위에 고모도 있고 누님도 있었지만 먹는 데서는 언제나 내가 제
일 위입니다. 가난한 농촌 살림에 맛나는 간식 자료가 있을 리는 없고, 누룽지나
채마밭의 오이나 옥수수가 최고입니다.
어는 늦어가는 가을날 궁굼한 생각에 채마밭에 들어가니 다 늙어가는 넝클 밑
에 오이가 하나 달렸는데 아직 어려서 먹을 나위가 없었습니다. 그래 며칠 기다
렸다 따먹으리라 하고 보아두었습니다. 그런데 그럴 만한 날이 되어서 가보니
없습니다. 우리 집에 불문율로 당연히 내 차지인 것을 감히 누가 먹었을까? 알
아보니 내 바로 밑의 여동생이 따먹었다는 것입니다. 그 여동생은 우리 5남매
중에서도 좀 못난 편이서 모든 것에 남한테 뒤지기를 싫어하시는 어머니가 그
때문에 속도 적잖이 썩였습니다.
물론 내가 언제 내 것이다 선언한 일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순전히 나의 특권
의식에서 나온 횡포였습니다. 그래서 그 불쌍한 것을
p 350
나는 구박을 했습니다. 나는 어머니도 당연 내 편을 들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어머니는 부드럽게 미는 듯하면서도 단연한 목소리로 “얘 그건 사람이 아니냐?
” 했습니다. 나는 부끄러웠습니다. 지금도 그때 그 어머니의 모습을 나는 못 잊
습니다.
“그건 사람이 아니냐?”
그 음성은 늘 살아 있어 내 속에 몇 번을 부르짖어졌는지 모릅니다. 나는 이
제 자유와 평등사상을 내놓고는 살 수가 없습니다. 나는 싸울 사상을 부르짖고,
스스로 타고난 민주주의자라 하기도 합니다 마는 나는 그 밑바닥의 반석은 어머
니가 놓아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 어머니가 지금은 어디 계실까? 1947년 2월 26일, 영원한 마지막이 될 줄은
모르고 월남의 길을 나서던 날 어머니는 대문에 기대 나를 보내주셨습니다. “
내 생각은 말고 어서 가거라!” 하셨습니다. 내가 감옥에 가 있을 때 추운 겨울
밤 잠은 아니 오고 견딜 수 없어 물레질만 하셨다는 어머니, 그것도 부족한 듯
해 “이 추운 밤 저 애가 불도 없는 감옥에서 자니 얼마나 추울까? 나도 저처럼
견뎌보자”는 생각에 밖에 나가 밤을 새워보았다는 어머니가 자기 생각은 말고
가라니 그 가슴이 어떠했겠습니까? 나를 살리기 위해서는 자기는 죽음보다 더한
고통도 참으시겠단 말 아닙니까?
나는 어머니 생각을 하면서 어머니의 슬픔의 물레에서 끝없이 풀려나오던 실
같은 내 생각을 여기서 끊고 나도 이 시대의 아들 딸들을 향해 부릅니다.
내 생각은 말고 어서 갈 길 가거라!
p 351
간디의 참모습
1월 30일, 오늘은 지금부터 17년 전, 1948년 간디가 세상을 떠나던 날입니다.
그는 그의 조국 인도를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사항해왔고, 그 민족을 압박자의
불의와, 스스로의 죄악과 그 둘의 합한 결과로 오는 불행에서 해방시키려고 하
는 고통과 갖은 위험을 다 겪으며 일생을 두고 싸워왔습니다. 그런던 때 우리
경우와 마찬가지로, 하늘이 무심치 않고 또 그의 일생의 힘쓰고 애씀이 헛되지
않아, 제2차 세계대전 후, 해방의 기운이 돌아왔습니다.
그는 그 평생의 확신이요 맹세이었던 진리와 비폭력의 원리를 토대로 그 위에
빛나는 ‘하나의 인도’를 세우려고 최후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참과 대국을 내다보지 못하고 옅은 감정과 권력욕에 취하는 회교도와 힌두교도
는 민족의 역사적 대업은 잊어버리고 서로 미워하고 서로 싸우기만 하여 곳곳에
서 학살과 항화와 약탈과 강간의 끔찍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는 이것을 하나
로 화해시키려고 그 둘 사이에 나서 무기한의 단식까지를 해가며 힘쓰다가 마침
내 어리석은 종파주의자의 총알에 맞아 무참하게 쓰러졌던 것입니다.
어려운 고비를 당하여서 그것을 어떻게 이기고 넘었던가, 그러한때의 간디의
모습을 그려보라는 부탁을 받고 이리저리로 바쁘게 돌
p 352
아다니다가 정작에 붓을 들고 자리잡고 앉는 날이 하필이면 오늘인것도 생각
하면 이상합니다. “이 사람을 보라!” 하며 한 형상이 가는 길 위에 막아서는
듯한 느낌이 있습니다.
간디의 일생은 파란 많은 일새이요, 그의 남겨놓은 공적도 가지가지로 많습니
다. 그것은 마치 히말라야같이 자꾸만 올라가는 길세요, 올라갈수록 더 험하고
험할수록 그 보여주는 시야가 더 넓습니다. 그것은 운명의 탓이라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확실히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습니다. 그의 자서전을 읽는 사람은
곳곳에서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그렇지 않았다”“하나님의 원하시는 것은 그
것이 아니었다”하는 구절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의미로 하면 그
의 그 파란 많은 일생은 하나님의 경륜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그것은 그가 스스로 지은 것입니다.
그는 믿음의 사람이지만 또 의지의 사람이요, 행동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자서전의 제목을 ‘나의 진리 실험의 이야기’라고 한 데서 잘 알 수 있습
니다. 그러므로 그의 당한 모든 어려움은, 빨리 닫는 사람이 평지에서도 풍파를
만나는 모양으로 스스로 일으킨 것이었습니다. 우연히 온 것 같은 데 있어서도
그는 그 까닭을 자기 속에 찾습니다. 그러므로 ‘대우주는 소우주 속에’라는
것이 그의 신조였습니다.
행동의 사람인 그는 자연 용기를 귀히 알았습니다. 그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비겁이었습니다. 그는 비겁을 첫째 죄악으로 알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상생,
비폭력을 절대 주장하는, 그러면서도 대적을 미워함 없이 죽을 각오로 대할 실
력이 없거든 차라리 폭력을 써서라도 힘껏 대적해 싸우다 죽을지언정 결코 구차
하게 살려고 도망하거나 빌붙지는 말라고 합니다. 그가 스물다섯 살 청년으로
남아에 갔을 때 마차를 타고 여행을 하려다가 차표는 당다히 가지고도 유색인종
이라 해서 발판에 내력 앉으라는 모욕을 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거기 응하지 않
자 차장은 그를 마구 끌어내리려고 주먹으로 치고 발로 찼습니다. 그래서 그는
팔목이 빠져라 하고 마차
p 353
채를 붙잡고 놓지 않아서 종시 이겼습니다. 그때에 벌써 대영제국이 백만 대
군을 두고도 인도에서 물러나야만 하는 역사는 시작됐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결코 만용을 믿는 사람은 아닙니다.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그가 일의 핵심을 뚫어보는 통찰력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먼저 그 문제
의 요점이 어디 있는지를 집어내기에 힘씁니다. 남아에서 인도 사람들이 선거권
을 위해 싸울 때, 보어전쟁에 참가할 때, 제1차 세계대전 때, 인도인 지원 위생
병을 모집해 내던 때, 1919년에 큰 비폭력 반항운동을 일으켰다가 히말라야적
오산이라 하고 퇴각을 명할 때, 제2차 세계대전 때에 인도 국민의 태도를 결정
할 때가 다 그러한 실례입니다. 그런 때 얼핏 보기에 잘못하는 것 같고 반대 의
견이 많았지만 결국 나중에 가서 보면 그가 바로보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리고 이 놀라운 통찰력, 바른 판단은 어디서 왔느냐 하면 반드시 천재적인 천분
이라기보다는 그의 참을 사랑하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그 다음 겸손입니다. 모든 위대한 인격이 다 그러한 것같이, 이도 모순된 성격
의 소유자였습니다. 잔신으로 하면 그렇게 자신이 강한 사람이 없건만 그러면서
도 또 지극히 겸손했습니다. 그것은 그의 선배에 대한 태도에서 잘 알 수 있습
니다. 그는 어려서도 자기는 어른에 대해서는 무조건 존경을 했노라 하지만 남
아에서 처음 본국으로 돌아올 때는 이미 상당한 실력을 얻은 때요 사회적으로
움직일수 없는 지위를 얻은 때입니다.
그가 돌아오자마자 그 순간부터 한 일은 각 지방의 모든 선배를 찾아본 일입
니다. 그것도 결코 의례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존경해서 또 더구나
자기 앞에 놓인 일을 성공적으로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들을
다 우상같이 숭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결점도 잘 알고 자기와 다른 점도
잘 알고 자기의 지킬 것은 어디까지 지키면서 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그가
정치면에서 가장 존경했던 것은 고칼레였는데, 그가 고칼레에 대하는
p 354
심정을 보면 실로 눈물없이는 볼 수 없습니다.
간디는 어떤 새로운 생각이 났을 때는 혼자서 하려 하지 않고 반드시 친구에
게 내놔서 그 의견을 구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와같이 겸손하고 조금도 교
만한 기색이 없었기 때문에 그 주창한 일이 이란이 얼핏 따르기에는 매우 어려
운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의 협력과 온 국민 대중의 지지를 얻을 수
가 있었고, 생명을 내걸고 싸운 대적에게서도 결코 미움을 사지 않았습니다.
그의 가졌던 모든 미덕 중에 가장 크고 가장 밑이 되는 것은, 그가 자기 일새
을 참에 대한 실험이라 했고, 자기의 운동을 진리파지(사티아그라하)라 이름했더
니만큼, 역시 참입니다. 그는 이것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했고 모든 어려움을 이
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때껏 세상에서 보통 “하나님은 참이다”하던 말을 뒤
집어 차라리 “참은 하나님이다”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의 참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면 한이 없습니다. 그러나 특별히 우리가 어떤
위기에 빠진 때를 위해 말을 한다면 이 한 가지를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는 결코 무슨 술책을 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 중에
가장 큰 것의 하나는 “수단이 옳아야 옳다”는 것입니다. 일반 세상에서는 목
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목적만 옳으면 수단도 저절로 옳은 것
이 된다”하는 것이 그 상식입니다. 그러난 간디는 분명히 절대적으로 주장합니
다. 목적이 문제 아니라 수단이야말로 문제라고, 그리고 실지로 술책을 쓰지 않
고 참대로 하면 일은 실패될 것만 같지만 사실로는 그것이 이기는 길이요 가장
가까운 길이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이 그의 생애입니다.
위에서 간디의 모습은 히말라야 같다 했습니다만는 그 이모저모를 그리자면
한이 없을 것입니다. 산의 참모습을 단번에 보려면 그 절정에 서야만 하는 것같
이 참모습도 그 마지막 장면에 단적으로 잘 나타나 있습니다. 가슴 앞에 다가들
어 들이대고 쏘는 권총 알을 세 방이나 바로 맞아 쓰러지는 그는 한 마디 유언
을 할 겨
p 355
를도 없었습니다. 그를 ‘마하트마라 존경하고, 바부(아버지)라 사랑하고, 그에
게서 한순간의 다르샨(감격)을 얻기 위해 천리를 멀다 아니하고 따라오는 그들
이 그렇게 어려운 때를 당하여 갑자기 잃어버리게 되는 지도자를 놓고 그렇게도
듣고 싶었을 마지막 유언이건만도 그것은 할 수가 없었습니다. 있은 것은 오직
한마디 “아이,라마”뿐이었습니다. “오,하나님”하는 말입니다.
말이라기보다는 한 마디 부르짖음이지만 사실은 그것이 그의 유언이요, 그 이
상 더 그의 참모습을 드러낼 말은 없습니다. 그가 그렇게 갑자기 죽음을 당하지
않고 병으로 인하여 정신이 똑똑한 가운데 천천히 숨이 지면서 모든 제자 동지
를 불러놓고 지나온 일생 앞에 올 세상을 생각하면서 마음껏 정성껏 있는 말을
다했다 하더라도 그 뜻을 요약한다면 이 한마디에 지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는 결코 말이 아니었습니다. 신조조차도 아닙니다. 그것은
곧 그의 숨이요, 얼이요, 그의 자아, 곧 그 자신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살고 힘
쓰는 모든 일의 목적은 자아의 실현 곧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맞댐, 다른 말
로 해서 ‘모크샤’에 이름 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말할 때는 “사
람은 그 앞에서 자기글 낮추기를 제 발 밑에 티끌보다 더 낮게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러는 그로서 어떤 때는 자기는 아직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려면 멀고 멀었지만 그래도 “때로는 잠깐 그 모습을 어렴풋이 보는
때가 있다”하는 것을 보면 그의 힘씀이 대개 어떠했고, 그 혼의 이른 지경이
어디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갑자기 죽임을 당했다 했지만 결코 갑자기 죽은 것이 아닙니다. 겉으로 남이
보기에 그렇지 자기로서는 결코 불의에 죽음이 온 것 아닙니다. 자기 편에서 스
스로 죽음을 향해 나간 것입니다. 이 점에서 그는 예수와 비슷합니다. 그날이 오
기 며칠 전에 예배 시간에 그가 말을 하고 있을때 폭탄을 던진 사람이 있었습니
다. 다행히 맞지는 않았으나 굉장한 소리가 났고 모든 사람이 놀랐습니다. 그때
p 356
그는 조금도 놀람이 없이 “저거 뭐요? 나 모르지만, 걱정 마시오. 말씀이나
들으시오”했습니다
이튼날 모든 사람이 그가 그 순간에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해서 칭찬을 올렸을
때 그는 자기는 그 폭발소리를 군사연습으로 알았으니 자기가 칭찬받을 것은 없
다 하면서, “내가 정말 그러한 폭탄에 맞아 쓰러지면서도 내 얼굴에 웃음을 띠
고 그렇게 한 사람을 향해 미워하는 생각이 없다면 그때는 칭찬을 받을 만하지.
아무도 그 폭탄을 던진 청년을 나삐 보지 마시오. 그는 잘못 생각하고 한 거지.
그는 아마 나를 힌두교에 대적이나 되는 것으로 알았던 것이오”했습니다.
그러고는 이제는 위험하니 예배 시간에 오는 사람들을 이상한 사람은 좀 검문
을 하자는 의견이 나오는 것을, 검문을 하면서 예배가 무슨 예배냐고 물리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 전날 폭탄을 던졌다가 실패하고 잡힌 자의 동지가 아무
어려움없이 권총을 품속에 넣고 간디 앞에 나와 인사를 하고는 쏠 수가 있었습
니다. 그러므로 그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줄 알면서도 두려워함이 없이 그리
로 향해 간 것입니다.
죽음을 향해 두려워하지 않고 나갔으니 죽음을 이긴 것입니다. 죽음을 이기는
사람이 못 이길 위기나 난관이 있을 리 없습니다. 과연 간디는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같이 살아서보다 죽은 후에 더 많은 더 큰일을 했습니다. 그를 쏘는
사람은 비폭력주의를 쓰다가는 힌두교도는 회교도한테 망해버릴 것 같고 그 대
신 그 하나만을 없애버리면 모든 힌두교도는 한데 뭉쳐 회교도를 쳐 없엘 것 같
아서 그런 짓을 했지만 결과는 생각했던 것과 반대였습니다. 그 무섭고 슬픈 소
문을 듣자 여려 폭력단체가 스스로 해체를 해버리고, 전에 진리파지운동에 대해
반신반의를 하던 사람, 그 보다도 반대를 하던 많은 사람이 그의 주의를 찬성하
고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온 세계가 그의 죽음을 슬퍼했고 날이 갈수록 그를 존경합니다. 한 사람 간디
가 죽은 대신 억만의 간디가 생긴 것입니다. 그것이
p 357
이긴 것 아닙니까? 모든 위기가 무서운 것은 결국 그 뒤에 숨어 있는 죽음의
사자 때문인데, 죽음을 이기는 것은 피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능히 죽어 보여줌
으로만 할 수 있습니다. 예수도 그렇게 해 이겼고 간디고 그렇게 해서 이겼습니
다.
그랬기 때문에, 참으로 이겼기 때문에 처칠조차도 그 죽음 앞에 절하고 조의
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처칠이 무엇입니까? 무너져가는 대영제국
의 마지막 충신이었고 역사의 쓰레기통에 들어가려는 폭력주의의 낡은 정치사상
의 한 상징입니다. 그 처칠은 일찍이 간디가 원탁회의를 하기 위해 런던에 갈
때 “그 반나체의 비렁뱅이 중놈”을 어찌 우리 폐하의 어전에 서게 하느냐고
약이 올라 반대했고 2차 세계대전 때에 인도는 절대로 독립을 주어서는 아니된
다고 간디를 잡아 감옥에 넣도록 지시했던 사람입니다. 그것을 생각하고 오늘
인도를 볼 때 세계는 참 달라진 것을 알수 있습니다. 처칠은 물론 위대합니다.
그러나 간디는 보다 더 위대합니다. 사람들이 처칠을 잊을 날이 올 것입니다. 간
디를 잊을 날은 없을 것입니다.
간디는 무엇으로 죽음을 이겼습니까? 그의 믿음으로 이겼습니다. 그것이 “아
이, 라마”입니다. 그는 평생에 ‘라마나마’를 외었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때,
걱정이 되고 용기가 줄려 할 때, 그저 “라마, 라마, 라마, 라마”하고 외운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것을 어렸을 때 자기 집 늙은 식모한테 배웠다고 합니다. 그는
겁이 많아서 밤에는 밖에 나가지를 못했는데 그 식모가 그럴 때 라마의 이름을
부르면 무서움이 없어진다 해서 그대로 했고 그랬더니 과연 효과가 있었다는 것
입니다. 돌아갈 무렵에는 정치관계에서 떠나 시골 가서 불쌍한 농민들에게 자연
요법을 가르쳐주었는데 그 중 하나가 이 라마나마를 외는 것이었습니다.
1942년 인도 국민회의는 간디의 지시에 따라 저 유명한 ‘인도를 떠나시오’
운동의 결의를 했습니다. 그때는 여러 모로 보아 도저히 반항운동을 일으킬 수
없는 때였습니다. 그러나 인도 민중의 의사를
p 358
묻지도 않고 인도를 전쟁으로 끌고 들어간 영국에 대해 분개한 간디는,
세계의 모든 나라가 다 반대를 하더라도, 온 인도가 다 일어나서 나를 잘못이
라 하더라도 나는 나서련다. 인도를 위해서 또 세계를 위해서.
나도 지금 우리나라가 순수한 비폭력의 정치 불복종운동을 하기에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군사가 준비되지 못한다고 도망을 가는 장
군은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내게 가장 귀한 비폭력의 무기를
주셨는데, 만일 내가 오늘의 위기에서 그것을 쓰기를 꺼린다면 하나님은 나를
용서 않으실 것이다.
하고 나섰습니다.
그는 날마다 저녘때면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한 번은 지방을 돌
다가 길이 늦어져서 밤 늦게 도착해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자게 되었습니다.
비서들은 먼저 자리에 들고 간디는 회를 마치고 한시나 되어서 들어와 자리에
눕더니 조금 있다 곧 일어나 어둠 속에 앉아 밤새도록 울며 회개하는 기도를 하
더랍니다. “하나님은 이날껏 나를 잊으신 일이 없는데 나는 조금 바쁘다고 예
배하기를 잊었으니 어찌합니까?”하면서.
죽음도 무서워 아니한 간디, 원자폭탄이 만일 떨어지면 “나는 폭탄을 떨어뜨
린 당신을 미워하지는 않습니다 하는 얼굴을 보여주며 죽고 싶다”하던 간디 속
에서는 그러한 단순한 신앙이 있었던 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1965)
p 359
남강 선생님 영 앞에
정치란 무엇입니까? 역사란 무엇입니까?
선생님, 오늘 1979년 2월 4일 예순 돌을 맞는 삼일절을 앞두고 같지 못한 제
자 석헌은 슬프고 답답하고 외로운 마음을 금할 길 없어, 감히 붓을 들어, 살아
계신 하나님 품 안에 계시면서 이 나라를 지키시고 계신 선생님 영 앞에 정성을
모아 지나간 것과 지금 있는것과 앞에 내다뵈는 것에 관하여 한 말씀 사뢰려 하
옵니다.
아, 생각하오면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선생님께서 잊을 수 없는 1930년 5월 9
일 아침에 마음 막힌 저희들을 학교 뜰에 모아놓으시고, 말씀을 하시다 하시다
못해 아니 끊어지는 말씀을 불덩이를 삼키듯이 끊으시면서, “너희들이 그렇게
깨닫지 못한다면 나는 이제는 다시 말하지 않을 것이다” 하시고는 말씀을 딱
끊으시고, 울부짖는 저희들을 두시고 아주 떠나가 버리신 것이 어느덧 반 세기
가 거의 다 되어갑니다.
계실 때에 가르쳐주신 말씀 지키지 못했고, 떠나가신 다음 남겨 놓으신 뜻 잇
지 못한 죄인이 어찌 감히 입을 열어 지컬일 수 있겠습니까마는, 여기 또 마지
못한 곡절이 있습니다. 계실 때에 보여 주시던 그대로의 헤가림과 어여삐 여기
심을 가지시고 살펴주시기
p 360
비옵니다.
잡지사 ‘뿌리깊은 나무’는 그 이름을 뿌리라 붙인 것이 뜻이 있어 한 줄로
아옵는데, 이제 그들이 이 못난 사람들의 잘못으로 인해 그어진 38선이 마침내
는 겨레의 몸과 마음 위에 영원히 아물지 못하는 상처를 남겨놓고 말지나 않을
까 걱정하는 나머지, 그것을 합장시키는 지극히 작은 바늘뜸의 하나로, 부족한
저더리 이북에 있는 마음에게로 보내는 편지를 한 장 쓰라는 부탁을 보내왔습니
다.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이라 생각되었으므로 두 번 생각함 없이 선뜻 대답 했
습니다. 그런데 정작 붓을 들어 쓰려니 앞이 캄캄해졌습니다. 붓을 대지 못하고
앉았다 일어섰다 하는 동안에 약속했던 한 달이 다 지나가고, 연기한 날짜마저
다 되어 이 밤이 새버리면 끝이 나게되니 몸 둘 곳이 없습니다.
선생님, 결코 쓸 말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해방이 됐는데, 부끄럼과 고통의 종
살이가 끝났는데, 그러나 또 기쁨과 감격에 들뛰며 춤추던 가슴이 채 가라앉기
도 전에 그 가엾은 미끼를 옷을 바꿔 입혀서 다시 제 울타리에 넣으려는 흉악한
곰과 독수리의 서로 끌고 당기는 싸움에 민족의 허리가 끊어졌는데, 그러자 또
어리석은 민중이 죽음으로 땅을 지킬 생각은 못하고 제각기 살기 찾아 남으로
북으로 부모 형제 처자가 서로 헤어졌는데, 또 헤어진 비참함도 부족하다는 듯
이 그 부자 형제가 총칼을 들고 서로 죽였는데, 또 전쟁은 그만두었다면서 30년
이 지나도록 하루도 쉴 날이 없이 전쟁을 하고 있는데, 또 원수된 형제는 지구
의 구석구석을 돌며 서로 집안의 흉을 드러내는 것을 자랑으로 알고 있는데, 또
동족을 서로 죽임으로 미친 마음 이제는 이성도 잃고 양심도 마비되어 권력과
돈만 알아, 없는 놈은 악독하게 날이 섰고 있는 놈은 퇴페의 진창에 빠졌는데,
어떻게 쓸 말이 없겠습니까? 할말은 너무 많아 가슴이 터질 지경입니다.
선생님,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하고 개도 보고 짖을 달이 있어야 하지 않
습니까? 아무리 잘 비비는 소도 대고 비빌 담이 없는
p 361
데 어떻게 합니까? 사람이 없습니다. 건너다보고 말할 마음이 없습니다. 어디
다 대고 호소를 하고 넋두리를 해야겠습니까? 누구를 건너다보고 울어야겠습니
까? 인비목석이라지만 마음이 죽으면 돌과 나무만도 못합니다. 한숨을 쉬면 나
뭇잎도 흔들릴 줄 알고, 통곡을 하면 먼 산도 메아리라도 울려 보낼 줄을 압니
다. 그러나 제게는 창가의 나뭇잎만한 마음도, 건너 산의 바윗돌만한 심정도 생
각나는 것이 없습니다. 제 마음은 답답합니다.
선생님, 제가 얻어 들은 것이 있다면 오산을 내놓고 어디서겠습니까? 친구가
있다면 오산 물 먹은 것들 속에서가 아니고 또 어디서겠습니까? 그런데 거기서
아무리 찾아도 하나도 마음 가는 사람이 없으니 어떻게 합니까? 물론 저의 부족
때문인 것을 압니다. 그러나 또 시대의 바람이란 것도 있지 않습니까? 더구나
모든 것에 사사로이라는 것이 없으시고 또 생각없이 하신다는 일 없으신 선생님
께서 일찍이 이 저를 특별히 불러 말씀해주신 것이 있음을 자나깨나 기억하고
있는 저로서겠습니까? 제 마음은 답답하고 슬프고 외롭습니다.
선생님, 이것이 제 못남 때문입니까? 시대의 변천 때문입니까? 정치란 무엇입
니까? 역사란 무엇입니까? 오늘 오후 성경모임, 그것은 마치 선생님이 생존해
계시는 동안에 선생님을 모시고 학교 교실서 한줌만큼 되는 학생들을 데리고 했
던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마는, 이 명동 한복판에서 하는 그 모임을 마치고 돌아
와 모든 것을 제쳐놓고 이 밤이 새기 전에 약속의 글을 써야 한다고 스스로 다
짐을 하고 앉았을때에, 제 모습은 마치 저 유명한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의 시에
그려진 장나꾸러기나 뱃군한테 잡혀 갑판 위에 퍼득이는 신천옹같이 불쌍했습니
다.
선생님, 저는 이 새가 좋습니다. 신천옹이라 이름한 이유는 이놈이 날기는 잘
해 태평양의 제왕이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고기를 잡을 줄은 몰라서 갈매기란 놈
이 잡아다가 이따금 흘리는 것을 얻어먹고 살기 때문이랍니다. 그래 일본 사람
은 그 새를 아호도
p 362
리, 곧 바보새라고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이유는 이 바보새란 이름 때문입니
다. 어쩌면 제 사는 꼴도 바보새 같다 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해방 후의 제 살림은 그렇습니다. 마음은 푸른 하늘에 가 있으면서 밥
벌이할 줄은 몰라 여든이 다 되어 오는 오늘까지 친구들의 호의로 살아가니 그
아니 바보새입니까? 제가 이북 하늘을 바라보며 가슴속에는 여름 구름산같이 떠
오르는 말을 품으면서도 말해줄 어느 얼굴 하나를 못 찾아내서 방바닥을 치며
퍼득이는 것도 이 하늘바라기와 갈매기의 관련 비슷한 무슨 미묘한 모순이 있어
서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선생님, 이것은 또 웬일입니까? 그렇게 말은 할 것이 있는데 바라보고 할 얼
굴을 못 찾아내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제 머릿속에 갑자기 어디선지 '남강 선
생 영 앞에' 하는 소리가 살별처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저 자신 놀랐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분명 선생님의 영이 바보처럼 가엾이 퍼득이는 제 꼴을 보시다
못해 오셔서 계시해 주신 것이라고 밖에 생각이 되지 않습니다.
"이 자식아, 말할 데가 없으면 왜 나한테 못하느냐?"고 말씀입니다. 그렇습니
다. 선생님은 살아 계신 영입니다. 일순간에 무지한 뱃군놈의 갚판 같은 이 서울
의 학대와 모욕을 다 잊고 태평양의 상공을 날게 됐습니다. 이제 "둥지 안에 누
워 자는 고운 새끼를 먹일것 얻노라고 해가 맞도록 골몰하게 다니던 늙은 비둘
기"의 "훨훨훨 날아와서 벅벅 구르르"하는 인자한 눈동자와 음성이 들려옵니다.
이제 오산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썩었습니까?
선생님, 먼저 유언을 실행 못한 죄부터 말슴드려야겠습니다. 선생님은 가시면
서 그 끊어져가는 가쁜 숨을 가지시고도 "나 죽거든 이 뼈다귀 쓸데없이 묻어
썩히지 말고 생리 표본으로 만들어 학생들 공부하는데 쓰게 해라" 하셨습니다.
일생을 두고 학교와 겨례를 위해 그저 바쳐만 오셨던 선생님이신데, 돈 있으면
돈 바치셨고, 땅
p 363
있으면 땅 바치셨으며, 살 남았으면 살을, 마음 남았으면 마은을 바치셨는데,
그러다가 나중에는, 남들은 그것 위해서는 있는 것을 다 팔아서라도 산다는, 이
름까지 바치셔서, 남이야 욕을 하거나 오해를 하거나 상관 않으시고 오직 스스
로의 정성에 만족하시면서 그저 자라나는 것들 키워주시는 한 가지만을 생각하
셨는데, 이제 그것조차 못하시게 되는 마지막 순간이 오니 그럼 이 남은 말 못
하는 뼈다귀로라도 부르짖어야 한다 하시는 생각에서 하신 것이었습니다.
저희들은 그 정성에 녹아 이를 윽물어 인정을 참고라도 그 말씀대로 하려 했
습니다. 그러나 악독한 일본 관리는 그 백골에마저 자유를 허락치 않았습니다.
그래 할 수 없이 저희들은 그 말씀하시던 백골을 옆에 모시지 못하고 유리 항아
리에 넣고 방부제를 더해서 봉한 후 황성산 턱 밑에 그것을 묻고 날이 오기를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15년 세월이 흘렀습니다. 바람이 그 솔가지
사이에 불기만 하면 선생님의 음성 같았고, 눈이 그 풀위에 덮이기만 하면 풍진
에 흩날리는 선생님의 허연 수염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남강의 백골이
땅 속에서 운다"고 했습니다.
과연 하나님이 무심하시지 않아 해방의 날이 왔습니다. 어찌 선생님을 잊을
수 있었겠습니까? 이제 정말 그날이 왔으니 그 우는 백골을 청천백일 아래 내놓
고 말씀을 듣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것은 역사의 움직임이었습니다.
앞문으로 승냥이 내보내니 뒷문으로 더 흉악한 곰이 들어왔습니다. 저희들은 일
제 때 모양 또다시 울음을 속으로 삼키고 쓴웃음을 지어야 했습니다.
선생님, 이제 자유자재하시는 영이신 아버지, 아버지는 다 아시고 다 보시지
요. 이제 오산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썩었습니까? 그 유언은 어디로 갔습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다 죽고 다 썩었습니다. 그러나 생명은 영에 있지 육에 있지
않습니다. 아무 놈도 대답해주지 않는 때에, 어느 얼굴도 나타나는 것이 없는 때
에 선생님의 영은 빛으로 뚫으셨고 말씀으로 저를 흔들었습니다. 제석산 황성산
은 무너질람 무너지라 하시고 장군바위는 녹으려거든 녹으라 하십
p 364
시오. 선생님의 정성 그 엉킨 정신은 영원히 살 것입니다.
현실을 보면 한심한 점도 많습니다. 이북에는 이제 오산학교란 것 있을 것 같
지도 않습니다. 여기는 오산학교란 것이 있습니다. 아마 선생님이 와보신다면 깜
짝 놀라실 것입니다. 사실 육이오 전쟁 이후 부산에서 오산학교를 시작한다 할
때 저는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이 있고 그 때가 허락되는 때라면 해서
좋습니다. 그렇지 못할 때는 그 이름은 아니 쓰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입
니다. 전쟁중에서라도 교육은 해야 한다는 것은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오산이란
이름을 붙이는 것은 오산을 사랑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거기서는 오산 정신을
살려내지 못할 것은 뻔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산을 내세우는 것
은 선생님을 팔아 이득을 얻자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과연 제가 걱정했던
대로 오산은 지금 아무 정신 없는 사람들 집단입니다. 이북에서는 선생님의 백
골이 울고 있는 대신 여기서는 선생님의 동상이 울고 있습니다.
선생님 살아 계실 때 일본 사람에게 끌려 제주도에 귀양살이 하셨지요. 지금
선생님의 동상이 어린이 공원이라는데 가서 혼자 우시고 계십니다. 선생님 마음
이 무었입니까? 늙은 비둘기로 춘원이 잘 표시했습니다. 둥지 안에 자라는 고운
새끼를 못 잊어 동분서주하시던 선생님의 마음이 머무실 곳은 ''지붕 위에 지저
귀는 참세 무리' 같은 뜨거운 가슴의 학생들 사이이지 구경꾼들의 먹고 내버리
는 쓰레기 사이가 결코 아닙니다. 얼마 아니되는 더러운 돈과 똥 묻은 명함에
팔리는 놈들, 어린아이도 알 만한 그 판단도 못하고 있습니다. 첫번 동상을 세우
던 때의 일을 저는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떤 자세로 하자는가 말씀드렸더니 "
나는 평생에 나음나음 나가는 것이 좋으니 걸어나가는 모양으로 하라" 하시어서,
그것은 만들 수가 없다 했더니, 선생님께서는 항상 말해주고 싶은 것이 내 심정
이니 "말하는 모습으로 하라" 하셔서 그렇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제막식이 다가오자 어디서도 참을 살리려 하시는 선생님은 "식을
p 365
하는 날에는 관청 손님 오고 해서 형식적인 말이나 했디 정말 내가 너희에게
하고 싶은 말 못한다" 하시면서 그 전날에 학생들을 그 동상 앞에 모아 놓으시
고 그 잊지 못할 똥 잡수시던 말씀을 해주시면서 봉사정신을 강조하셨습니다. "
지금 여기 내 동상을 세워준다고 하지만, 어째서 그것이 서게 되는지 아느냐?
내가 똥 먹었기 때문이란 말이야" 하시는 말씀으로 시작하셔서는, 오산학교 초창
시기에 모든 것이 다 부족하고 그저 열씸 하나로만 꾸려나가는데 뒷간이 아주
허술했다, 추운 겨울날이면 쌓이는 똥이 얼어 산봉우리같이 자라 올라간다. 나중
에는 가 앉는 사람의 엉덩이를 찌를 지경이 된다. 그런데도 변소 사용하러는 다
가지만 그것을 치우려는 사람은 없다. 그래 선생님이 그것을 보시다 못해, 손수
도끼를 들고 뒷간 밑으로 들어가 그 황금산 꺼내시는데, 그러노라면 이따금 튀
어나는 그 금 부스러기가 입속으로 들어가는 일이 있다. 그러면 선생님은 그저
태연히 퉤해서 뱉어버리시고는 또 도끼질을 계속하시는 것이었다는 그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선생님, 세월이 얼마나 간들 그 광경을 젯가 어찌 잊을 수 있습니까? 또 언젠
가는 학생들 앞에서 삼일 운동을 일으키시고 감옥에 가셨던 말씀하시면서, 감방
안의 변기를 손수 닦으셨더니 처음에는 젊은이들이 "선생님이 그것을 하셔서 되
겠습니까?" 어쩌구 하더니 나중에는 그것은 저 선생님이 하시는 것이거니 하고
내맡겨두더라는 것, 그래서 선생님께서 날마다 손으로 그 변기를 닦으시면서, "
하나님, 이후에 놓여 나가서도 일생을 두고 이 민족의 똥통이나 닦을 수 있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하고 기도하시었다는 말씀을 하신 것도 잊지 못하고 기억하
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선생님 동상, 사랑하는 학생들은 다 빼앗기고 혼자 무
심한 구경꾼 속에 울고 서 계시니 가슴 아파 견딜 수 없습니다. 선생님, 한 말로
그 쥐 무리, 여우 무리를 꾸짖어 내몰지 못하는 이 저를 어떻게 하시렵니까?
그것만입니까? 동문회에서 오산 칠십년사를 엮는다고 합니다. 역사의 사가 어
떤 글자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역사를 쓰면 어떻
p 366
게 합니까? 칼 끝으로 아무리 참을 인자를 써도 거기서 나오는 피는 그것이
악이라고 말을 하지 않겠습니까? 빌라도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건만 역사 위
에서 죽은 것은 빌라도와 그의 로마제국이었지 예수가 아니었습니다. 요새는 세
상이 온통 거꾸로 뒤집혔습니다. 새털을 무겁다 하고 천근은 가볍다 하며, 정의
는 감옥에 가 있고 악은 옥좌에 않았습니다. 그러나 천지가 천지의 위치대로 있
지 못하고 지천이 됐을수록 길하다는 주역의 해석은 진리입니다. 이 우주는 죽
은 것이 아니라 산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때에 역사의 붓을 드는 것은 팔아
먹으려는 심정으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 기성회 방에다가 교원들을 모아 놓으시고, '난상공의' 하
자고 하시면서 말씀을 하시다가는 "어려워!" 하시면서 긴 한숨을 내쉬시던 모습
을 지금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때 그 심정을 살펴드린다고 했던 저로서도
이제 와 생각하면 어림도 없는데, 하물며 그것조차도 모르는 것들이, 더러운 욕
심이 그 눈구석에 박혀 있고 어리석은 교만이 그 콧날 위에서 춤추는 것을 제가
다 뚫어보고 있는데, 그래 감히 어디라고 장난을 한단 말입니까?
동네 썩은 된장은 학교에서 다 치운다고 하던 때, 선생, 제자가 한 덩어리로
어울려,
백두산의 자란 범은 백두호라고
부엄 중의 부엄으로 울리느리라.
우리들은 오산에서 자라났으니
어디를 가든지 오산이로다.
라고 부르던 때의 일을, 그 이야기를 들을지언정, 그 공기를 마시고 그 냄새를
맡은 사람이 지금 어디 있습니까?
선생님, 슬픕니다. 지금은 어두움의 권세 밑입니다. 고난의 역사를 말한 저로
서도 이 고난의 길이 이렇게 길 줄은, 그 사나움이 이
p 367
렇게 지독할 줄은 미쳐 몰랐습니다. 선생님, 잠깐 후이면 내가 올것이다 하신
그의 그 잠깐은 얼마나한 기한입니까? 선생님은 이제 다 아시는 자리에 가 계시
지 않습니까?
선생님, 오늘날 이 씨알은 의심에 빠졌습니다.
또한 모처름 해방이 됐는데 통일정부를 세우지 못하고 남북으로 분열이 되고
만 것은 큰 잘못이란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삼일운동에서 선생님이 하셨던 것
을 저희들은 못했습니다. 그때 선생님은 어떤 조직을 가지신 것도 없었고 무슨
방책을 세우신 것도 없이 그저 단순이 외치심으로 민족 전체를 불러일으킬 수가
잇었습니다.
선생님께서 법정에서 증언하셨듯이 그저 하나님의 의로우신 명령이라 믿으시
고 거기 순종하실 뿐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 선생님
들도 무슨 가지신 것이 있었다면 그렇게 씨알 전체를 동원시킬 수는 없었을 것
입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셨기 대문에 하나님만을 믿으셨고 , 하나님만을
믿으셨기 대문에 씨알을 믿으실 수 있었고, 씨알을 믿으셨기 때문에 씨알도 제
할 의무를 제 스스로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랬기 대문에 그것이 역사를 변경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때는 정치인들은 나설 생각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해방 때의 씨알의 감격은 삼일운동 때나 마찬가지었습니다. 그것을 가졌으면
참 혁명할 수 잇었습니다. 그 감격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때 씨알은 누구나
나라를 위해서라면 제 눈알이라도 뽑아 내놓을 의협심, 봉사심에 떨고 있었습니
다. 그것을 저는 해방 날 미투리를 신은 채 끌려나가 한 달 동안을 읍 자치위원
장, 군 자치위원장의 완장을 두르고 다니며 그들과 서로 어깨를 비비대보아서
압니다. 오늘날 제가 기회 있는대로 씨알 소리를 하게 된 것도 그때에 얻은 체
험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님, 그 아까운 감격이 한 달이 못 가서 다 없어지고
p 368
사람과 사람이 서로 눈치를 보고, 이빨을 부리앗게 됐으니 어지합니까? 그 흉
악한 변동을 누가 가져온 줄 아십니까? 소위 정치하겠다고 나선 사람들이었습니
다. 씨알은 실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실망한 사람, 사람 믿지 않습니다.
예나 이제나 누가 부탁 아니하는데 스스로 나서서 정치해 주겠다는 사람들의
변함없이 꼭 같은 버릇은 씨알을 과소평가하는 일입니다. 그들은 첫마디부터 "무
지한 백성들"입니다. 사람은 술 주고, 계집 주고, 매수하고, 이간질시켜야 듣는
것으로만 압니다. 공자님이 나라하는데 가장 필요한 세 가지 조건으로 내놓은
중 끝까지 지켜야 하는 믿음이란 바로 이 씨알을 근본이 착한 것으로, 스스로
제 할 것을 할 줄 아는 것으로 믿어주는 일인데, 그들은 언제나 반대로만 알고
있습니다. 잘못은 여기서부터 시작됐습니다.
씨알이 실망하고 의심하고 주저하기 시작하자 정치배들은 조직으로 묶고, 간
사한 말로 꾀고 폭력으로 강제하고 위협했습니다. 그런데 그때에 정신차린 씨알
들이 일어나 그 간사한 정치배의 운동을 막았어야 했는데 못했습니다. 그것이
천추의 한입니다. 그 책임은 지식인으로 자임하는 저희들이 져야지 누가 합니
까? 물론 전문 정치인들은 당시의 복잡한 국제적 관계를 들어 그것을 하나의 공
상이라 비난한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론은 인간 역사를 영
원한 되풀이의 노예사로 묶어 놓습니다.
악덕 의사는 환자에게서 병이 아주 떨어지는 것이 소원이 아니라, 두고두고
의사 노릇하는 것이 목적이고, 정치 전문가의 목적은 정말 자유하는 씨알에 있
는 것이 아니라 두고두고 다스려 먹는 것이 목적입니다. 정말 의사인 예수는 단
번에 고쳤고, 고치면서도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했다" 했지, 내 의술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역사의 병도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가는 역사에 기적이 없
다고 주장합니다. 기적이 일어나면 저는 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말
참 정치는 기적으로만 됩니다. 어제까지 악인이던 것이 오늘 선해지니 기적입니
다. 그것은 기적을 믿음으로만 됩니다. 해방을 당
p 369
하자 전 민족이 신앙 기분에 충만했었는데 당파주의의 정치가들이 그것을 고
의로 깨쳐버렸습니다.
선생님, 오늘날 이 씨알은 의심에 빠졌습니다. 이기주의의 약음에 빠졌습니다.
이제 얼마나한 고난을 겪어야 또 다시 믿는 마음이 돌아올 지 모르겠습니다.
부드러운 봄바람되어 한 번 불어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가장 참혹했던 육이오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선생님, 남북이 서로 갈라
져 그렇게 찌르고, 쏘고, 죽고, 죽을 뿐 아니라 죽으면서도 욕지거리를 하며, 이
를 갈며 죽을 줄을, 그때만 아니라 아직까지도 그러는 줄을 선생님은 아셨습니
까? 모르셨습니까? 모르셨을 것입니다. 모르시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 나라 사람
으로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선생님, 이것 보셔요. 제 귀로 들은 것입니다. 붉은 군대가 신의주에
썩 즐어오니, 하룻밤 사이에 공산당이란 것이 장마철 두엄더미에 중버섯 돋듯
일어났습니다. 그러고는 독사처럼 대가리를 들고 무엇을 아는 척하는 것들이 입
을 열면 그저 하는 소리가 "거저는 안돼, 이제 피 많이 흘리고야 됩니다" 하지
않습니까? 그것들이 1945년 8월 15일 낮엔들 그런 소리 할 기미나 알았던 것들
입니까? 전수히 어디선가 만들어내서 퍼드리는 것이었습니다. 미쳤습니다, 끔찍
했습니다, 허무했습니다.
예로부터 전쟁이란, 내막을 알고 보면, 그런 것일 것입니다. 씨알이란 어리석
은 것입니다. 착하기 때문에 어리석습니다. 어리석기 때문에 속습니다. 속기 때
문에 가르칠 수 있습니다. 할 수 없는 것은 약아빠져서 누구의 말 들으려 하지
않는 변질된 씨알입니다. 그것은 이미 제 바탕을 잃고 악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가라지들을 가지고는 나라를 할 수 없습니다. 할 수 없는
법인데, 그것이 하늘이 내신 천리인데, 그것을 무시하는 것이 소위 세
p 370
상을 이끌고 간다는 것들의 버릇입니다.
역사상의 모든 위대한 사건이었다는 것이 그 막 뒤를 들춰보면 다 그런 것인
지 모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세상이 허망해져서 살 생각이 없어집니다. 그럼
그렇다고 다 내집어 동댕이치고 말 것이겠습니까? 물론 아닙니다. 그럴수록 살
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 지혜는 따를 수 있어도 그 어리석음은 따를 수가 없다"
한 것 아니겠습니까? 선생님 감히 지껄였습니다마는 하도 답답해서, 그러면서도
믿을 수 있게 해주신 것이 고마워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해야겠지만
어디다 대고 하겠습니까? 그래서 바보새처럼 퍼득인 것이고, 그래서 선생님 영
을 부르는 말씀입니다.
꼭두각시 노릇을 할 때는 몰라서 했다 하더라도, 하고 난 다음엔 그것이 꼭두
각시 노릇인 줄 알았어야 꼭두각시의 신세를 면할 것인데, 이제 그 연극이 지나
간 지 30년이 되어도 일향 모르는 것 같으니 답답한 일입니다. 연극을 본래 연
극인 줄 알고 하여야 연극의 의미가 있지, 연극을 진짜로 아는 놈은 짐승이자
사람이 못됩니다. 그런데 지금도 그 전쟁을 정말 우리가 한 일로 알고 있고, 그
래서 자랑도 하고, 원망도 합니다.
선생님, 옥중에서 삼국지를 읽으시고 그 의에 깊이 감명하셨노라 하셨던 것
기억합니다마는, 그 삼국지의 저자가 그 첫머리에 뭐라 했습니까? 세간다소사,
도부소담중이라, "세상 크고 작은 일 온통 웃음거리에 붙여버리자" 하지 않았습
니까? 크고 작은 일 한데 묶어 허허 웃고 말면 사람이고, 국민일 수 있는데, 어
떤 나라 정치인들은 그것을 진짜로만 알고 있습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전쟁 아니할 수 없겠지만, 시간이 지나가면 정신이 들어 너
도 나도 잘못이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하고 화해의 기운이 돌아야 할 곳인데, 아
직도 그렇지 못하니, 이곳이 정말 전쟁보다도 더 참혹한 일입니다.
p 371
1972년에는 양쪽이 앉아서 시작한 남북회담이 지난해는 한쪽만 앉아 천장만
쳐다보는 회담으로 전락되더니, 올해에는 미국과 중공의 관계, 중국과 일본의 관
계 개선에 따라 우리 남북대화도 재개된다고 해서 시작이 됐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저만 아니라 생각있는 대부분의 사람은 그리 큰 기대를 가지지도 않았습
니다. 양쪽 진영의 심중을 누구나 거의 다 짐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얘기
했던 대로 별 신통한 진전이 없습니다. 그러나 시대는 확실히 변하고 있습니다.
다만 사람이 문제입니다. 양쪽의 씨알들이 깨진 않는 한 참 화해는 올 수 없습
니다.
냉전 이래 전 세계를 두루 살펴보아도 시원한 소식이 들려오는 것이 없었는데,
근래에 미 대통령 카터가 오랜만에 정치의 도덕화, 인권외교를 부르짓고 나왔습
니다. 고마운 일이라 할만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정치인들은 도리어 그것을
비웃으려 하고, 심지어는 그것이 실패되기를 기다리는 경향이 있으니, 실로 한심
합니다.
선생님, 해방 후의 역사가 더욱 심한 수난의 행진이기는 합니다만 거기는 매
우 뜻있는 것도 없지 않습니다. 하나는 기독교의 전파입니다. 아시다시피 해방
전까지는 기독교가 이북에는 성했으나 이남에는 아주 드물었는데, 이북이 공산
화되면서 많은 기독교 신자가 남으로 넘어왔고 또 전쟁 때문에 피난민이 되어
각지에 아주 골고루 퍼져 나갔습니다. 게다가 미국과의 관계가 깊어짐에 따라
교회는 아주 급속도로 늘어나가 지금은 종탑이 서지 않은 촌락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후일에 가서 통일의 기운이 올 때에 이것이 큰 역할을 하리라 믿습니
다. 또 말에도 큰 관계가 있습니다.
본래 우리나라는 지방 사투리의 차이가 그리 심한 나라는 아니지만, 이곳도
피난민으로 인해 가지가지 사투리가 골고루 섞이게 됐습니다. 이것도 앞날을 위
해서는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아마 그보다도 재미있는 것은 냄면, 비빔밥의 전
파입니다. 평양냉면, 함흥냉면을 이젠 제주도에 가서도 먹을 수 있습니다. 전주
비빔밥이 두만강가까
p 372
지 간지도 모릅니다. 전쟁의 참 의미는 여기 있는지도 모릅니다.
선생님, 노자의 말에 상선약수라, "썩 잘하는 이는 물과 같다"는 말이 있습니
다. 씨알이야말로 물입니다. 씨알이 가는 곳에 화해되지 못한 문제는 없습니다.
무슨 큰 걱정이나 하는 듯, 수 십년 서로 자른 체제, 이념 밑에 살와왔으니 어저
느냐 하는 말을 하지만, 그것은 씨알을 그저 지배해야만 되는 줄 아는 그릇된
정치관념애서 나오는 말입니다. 칼로 물을 자를 수 없다면 씨알은 더욱 그렇습
니다. 칼을 넣은 동안 잘라진듯 하나 뽑는 순간 그것은 곧 우수수하는 한숨 부
드러운 봄바람이 되어 만경대에 한 번 불어주시기 바랍니다.
멀리서 바란 기상, 봉이요 영이러니
선생님, 마지작으로 제 말씀 한 마디 올리겠습니다. 선생님 한 번 유도장에 학
생 모아 놓으시고 '교육의 본능'이란 제목으로 긴 말씀 하신 일 있지 않습니까?
그래 본을 설명하시면서는 납천이 유기공장의 놋그릇 만드시는 그 본을 실제로
드셨고, 능을 말씀하시면서는 언제 신의주 건너 안동 갔더니 졸업생 한 사람이
정성으로 과일 한 바구니를 사가지고 와서 마음이 매우 기쁘셨다고, 그것이 능
히 나타난 것 아니냐 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본래 저희 책 본다는 놈들이 본능이라 할 때는 동물들에게서 보는 타고난 버
릇을 가리켜 하는 밀이기 때문에, 처음엔 선생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저
런 제목을 내거시나 하고 매우 의아하게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말씀하시는 것
을 다 듣고 나서는 저희들이 많이 감탄했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드님이신 본래
신선한 사내인지라, 교원실로 물러 나와서는 큰 소리로 익살을 부리며 "교육의
본능이 뭔지 알어? 본은 납천이고 능은 안동에 가 있단 말이야!" 해서 저희들이
모두 손뼉을 치고 웃은 일이 있습니다. 이
p 373
제 제 이야기도 조그만 능의 하나로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근래에 제 하느 일은 씨알 풀이를 하는 것입니다. 씨알 소리 선생님 귀에는
처음이실 줄 압니다. 백성이라는 '민'자를 우리말로 새로 만든 것입니다. 유영모
선생님이 '대학' 풀이를 하시면서 "대학지도, 재명명덕, 재천민, 재지어지선"을
우리말로 옮겨서
한 배움 길은 밝은 속을밝히는데 있으며, 씨알 어뵘에 있으며, 된 데 머무는
데 있다.
하신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씨알이란 말이 참 좋기 때문에 1970년 제가
조그만 월간 잡지를 시작하면서 그 제호를 '씨알의 소리'라 한 데서 시작됐습니
다.
는 '민'자를 우리말로 새로 만든 것입니다. 유영모 선생님이 '대학' 풀이를 하시
면서 "대학지도, 재명명덕, 재천민, 재지어지선"을 우리말로 옮겨서
한 배움 길은 밝은 속을 밝히는데 있으며, 씨알 어뵘에 있으며, 된 데 머무는
데 있다.
하신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씨알이란 말이 참 좋기 때문에 1970년 제가
조그만 월간 잡지를 시작하면서 그 제호를 '씨알의 소리'라 한 데서 시작이 됐
습니다.
민을 보통 백성이라 하는데 그것도 한문입니다. 순전한 우리말로는 무엇일까.
나라를 세운 지 4천 년이상 우리말로도 백성에 해당하는 말이 있었겠지 없을 리
가 없습니다. 그러나 한문에 눌려 다 잃어버리고 이제 그것을 찾아낼 길이 없습
니다. 지금 우리가 쓰는 말 중에서 골라 한다면 어떤 것일까, 그래서 '씨'라는
말과 '알'이라는 말을 한데 붙여서 씨알이라 한 것인데, 그 알은 본래 정신, 혼,
영을 의미하는 얼이라는 말과도 같은 것일 것이므로, 하늘, 하눌, 하날에서 보듯
이, 모든 모음의 기본되는 음인 '아래 아'로 쓴 것이 좋을 것이다 해서 씨알로
쓰기로 한 것입니다.
민대로 써도 좋지만 민자는 이미 더러워졌습니다. 말은 그저 단순한 말 뿐이
아니고 거기 역사가 붙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같은 말도 그때의 제 역사적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하여서는 새 것을 골라 쓸 필요가 있습니다. 같은 민이라
도 인민 할 때는 공산주의의 강조가 들어 있고, 국민 할 때는 국가주의의 냄새
가 강하게 들어 있고, 민중 할 때는 사회적인 의미의 강조가 들어 있습니다. 그
래서 모든 기성관념의 때를 벗어나기 위해 좀 서툴지만 이 새
p 374
말을 골라 쓴 것입니다.
한 시대에는 제 말을 가집니다. 우리가 우리의 역사적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서는 기성 어떤 사상이나 체제의 때도 묻지 않은 새로운 철학을 가질 필요가 있
다고 생각하면서, 저도 아직 아무것도 모르지만 하여간 천하는 천하로 하여금
스스로 다스리게 하는 것이 근본이기 때문에 씨알 앞에 내놓은 것입니다.
이제 겨우 7, 8년 밖에는 되지 않습니다마는 상당한 정도로 인식이 되기 시작
했습니다. 이것으로 인하여 오늘의 이 나라에 있어서는 가장 양심적인 동지들을
만나게 되는 것은 참으로 마음에 흐뭇한 일입니다. 형편없이 못난 것이지만 선
생님께서 기뻐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끝으로 38선을 넘어온 후 희망 낙망의 썩어지는 물결 속에서 선생님을 생각하
며 불러본 노래나 불러드리고 글을 맺으렵니다.
멀리서 바란 기상 봉이요 영이러니
그 안에 들어보니 품이요 동산이라
솟는 샘 미시고 나선 시원한 맘뿐이니.
옆에서 듣는 소리 범이요 용이러니
무릎에 앉아보니 봄비요 어이로다
절절한 그 음성에는 녹아든 맘뿐이니.
마주 서 쬐는 얼굴 번개요 우레러니
가슴에 안겨보니 벌이요 풀무로다
뜨거운 불길에 들언같이 탄 맘 뿐이니.
p 375
육당,춘원의 밤은 지나가다
춘원에게 갈 날 오고
씨알 육당에 찬 밤
소금 안 든 우림을
불 가도록 먹으라네
씨알아, 네 속 움직다
'네 맘먹어' 함인가.
이것은 지난해 11월 23일 밤 사상계사의 주최로 열렸던 육당, 춘원의 밤을 보
고 돌아오는 길에 좀 분한 생각이 들어서 장난으로 한 소리이다. 나 같은 것이
분했댔자 당랑(버마재비)의 도끼지만, 본래 당랑이 그런 것이다. 그 도끼가 나무
를 찍잔 것도 호랑이를 잡잔 것도 아니요, 생의 대도로 못 지나갈 것이 지나가
는 날 거부의 한 손을 높이 들어보잔 것이 그 뜻이다. 그래서 제 몸에는 격에도
아니 맞는 큰 도끼다. 상징이다.
생의 대도 위로 역사의 바퀴를 움직여 가자는 사람들은, 천하에는 당랑의 도
끼 같은 의견도 있는 줄을 좀 알아야 할 것이다. 이 사회가 어느 면으론 말썽이
많아 걱정이면서도, 또 어느 면으로는 너무 말이 없어 걱정이다. 민중의 손을 당
랑의 도끼로 알고 정치니
p 376
학문이니 하며, 그 위를 막 밟고 찍고 건너가지 않나? 대성 석가는 눈에 뵈지
않는 벌레를 밟는 것을 피하기 위해 여름엔 여행을 그만두고 우안거를 하며 공
부를 했다는데.
생은 당랑의 도끼다. 거부하는 것이 생이다. 그리고 차는 아무리 커도 깨지는
날이 있을 것이요, 당랑의 뒤에는 끊일 줄 모르는 당랑이 있다. 말해보자. 누가
이기나 보자.
봄 동산에 갈 날이 왔다. 육당,춘원은 이 동산에 한 때 문화의 꽃을 피운 존재
들이다. 그러나 갈 날이 다 가면 어떻게 하나? 가면 보내야지. 올 줄, 갈 줄 아
는 것이 사람이다. 올 때에 오고, 갈 때엔 가야 한다. 오는 사람 맞을 줄 알고
가는 사람 보낼 줄 아는 것이 사람이다. 육당,춘원의 밤을 만든 것은 가는 이 보
내자는 일 아닌가. 육당,춘원에게 갈 날이 왔다. 올 때에 왔고 말할 때 말했으며,
잠잠할 때 잠잠했고 갈 때 갔나?
단풍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여름에 들어서는 못쓰는 것이요, 모란이 아무리 좋
아도 덜어질 때가 깨끗하지 못하면 보기 싫다. 사람은 오기도 하고 힘있게 살기
도 해야지만, 더구나 갈 때를 알아 잘 가야 하는 것이다. 석가의 이름 하나를 선
서라 하지 않나? 잘간 것이다.
봄보다는 가을이 더 중하고, 옴보다는 감이 더 귀하다. 장례요, 추도요, 기념이
요, 그 것은 다 가는 이를 잘 보내자는 일이다. 그러려면 우선 가는 이가 갈 때
에 선뜻 일어나 뒤에 남김이 없이 깨끗이 잘 가야 하는 것이다. 보내는 자가 또
그 모양을 잘 보아야 하는 것이다. 갈 때가 되었는데도 갈 생각을 못하면 어서
가라 재촉을 하고 미급한 준비를 해드려 가게 하는 것이 예이다. 또 떠난 후는
서서 그 가는 뒷모양을 지평선에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는 것이 잘 보내는 것
이다.
그러나 또 한 가지 보내는 나의 처지도 알아야 한다. 내가 슬픔을 당했는데
춤추며 보내는 것도 예의가 아니요, 내가 기쁜데 가는 그에게 기쁨을 나눠주지
않는 것도 일이 아니다. 오늘 우리는 봄날
p 377
을 당했나? 갈 날을 당했나? 인생을 즐길 사람들인가? 생각을 하고 반성을 하
고 회개를 할 사람인가? 우리야말로 갈 날을 당하지 않았나? 그럼 육당,춘원의
밤에 육당,춘원의 가는 모양은 잘 나타났던가? 우리 처지답게 잘 보냈던가?
육당,춘원의 인생으로서의 살림은 스스로 된 것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그이들
자신과 조물주와의 사이의 일이지 우리가 알 바가 아니다. 우리가 가는 것을 보
내지 않으면 안되는 육당,춘원은 사회인, 역사인으로서의 그들이다.
우리는 오늘의 우리로 서서 그 가는 모양을 바라보아야 한다. 보내는 것은 영
원히 사는 역사의 전당에 두기 위해서이다. 보존할 한 푼 값어치가 없는 사람이
라면 보낼 필요가 없다. 육당,춘원은 보낼 분들이지 유야무야로 가는 줄 모르게
버려둘 존재들이 아니다. 그러나 보존을 하려면 기름이 없을 수 없다.
썩을 부분은 없애고 썩지 않을 부분만을 두어야 할 것이다. 보내는 날엔 비판
이 없을 수 없다. 미술품을 잘 보관하는 사람은 늘 서재에 두고 조석으로 보고
만지는 이다. 미술의 값은 알지도 못하는 부자가 한낱 자랑으로 미술품을 사서
쌓아두어도 그것은 몇 날이 못 가고 썩을 것이다. 인물은 늘 오늘의 입장에서
다시 비판하고 다시 씹어서만 살아 있을 수 있다. 육당,춘원의 밤엔 무엇을 했
나?
마침 12년 전 1957년 11월 23일은 해방으로 좇아오는 감격과 희망의 빛으로
빛나는 강산에 이리떼처럼 밀려드는 공산당의 횡포에 분개하여 신의주에서 어린
학생들이 정의와 자유를 지키자고 붉은 주먹을 들고 총칼에 대들었다가 푸른 피
를 땅에 부은 날이다. 그들은 그 피로 생명의 역사 페이지에 도장을 찍고 갔다.
참 잘 간 그들이다. 그러므로 지금도 그들의 간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날 나는 그때의 그 침울한 공기 속에서 역사적 돌진을 하던 그 모양을 황혼이
짙은 하늘가에 그리면서, 그들의 죽음과 이 두 분의 생애와의 사이에 어떤 연결
을 시켜보면서, 발걸음을 재촉해 강연 장
p 378
소인 서울대학교 문리대 강당으로 갔다.
가서 보니 시간은 아직 전인데 청중은 벌써 다시 더 들어설 여지가 없이 꽉찼
다. 본래 문리대 강당으로 장소를 정한 것을 보고 사상계사가 오산을 하지 않았
나 했었다. 후에 들은 말이지만 사상계사가 그 모임을 열 계획을 할 때에 그런
것을 하지 말라는 지시가 있고 해서 성과가 시원치 않으리라는 여러 사람의 사
적인 충고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 것을 알고도 주최한 사상계사의 일은 용단이
라면 용단이지만 잘 알지 못한 것이 있다. 이 사회의 공기, 민중의 기분, 젊은이
의 마음을 잘 몰랐었다. 육당, 춘원의 이야기라면 청중이 많을 것은 정한 일이었
다.
온 사람은 대개 학생이었다. 그 사람들이 다 무엇을 위해 왔을까? 학문 연구
나 도덕적 교훈이나 예술의 연마만을 위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만을 위해서
는 그들이 쓴 책이 있다. 두세 시간 강연으로 새로 얻는 것이 있다 하여도 그것
은 한계가 뻔히 정해진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큰 군중이 움직이는 데는 개인
적인 무엇 이외의 동기가 있다. 육당, 춘원이 문제가 아니라, 그들을 통해 어떤
커다란 무엇에 부딪쳐 보잔 것이 그들이 의식하는, 또 의식하지 못하는 밑의 동
기이다.
인도에서는 어떤 유명한 인물이 오는 경우에는 군중이 모이는 일이 많다는데
그것을 설명하는 자의 말을 들으며면 동기는 다르샨(darshan)에 있다고 한다. 다
르샨을 번역하면 '축복','감격'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 다르샨은 반드시 그 인
물의 말을 듣거나 직접 만나서 되는 것이 아니요, 그저 그 장소에 가서 멀리서
한 번 바라만 봄으로도 된다고 한다. 간디나 네루가 온다고 하면 그 얼굴을 한
번 보기 위해 몇십, 몇백 리 밖에서 와서 온종일 땅바닥에 앉거나 누워 기다리
는 군중 때문에 옮겨 설 수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 사람들이 말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고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그저 멀리서 그
모습을 한 번 보고는 기쁨에 넘쳐 돌아간다고 한다.
p 379
인도만일까? 어디든지 군중은 그런 것 아닌가? 군중은 감격을 찾는 것이다.
감격이 무엇이 감격인가? 자기가 아무리 작고 못생겼어도 자기와 큰 전체로 하
나로 통하는 시간에 일어나는 생명의 물결이 곧 그것이다. 간디의 얼굴만 보고
도 그저 좋아 눈물을 흘리는 군중은 자기 속에 간디를, 간디 속에 자기를, 둘을
다 하나로 만드는 진리를 가진 것이다. 제 못생김을 잊는 것이 민중이다.
일전에 서독에 가 있는 어떤 친구에게서 소식이 왔다. 그는 편지에서 "독일 사
람은 대단히 이성적이면서도 어떤 때는 참 어리석어 보인다. 크리스마스라, 부활
절이라 하는 명절이 오면 그저 모든 사람이 털고 일어나 막대한 돈, 막대한 시
간을 써가며 미친 듯 떠드는데, 그것은 우리로서는 상상도 못할 것이다"라고 썼
다. 그러고는 이 것을 참말 어리석은 일(Die Dummheit)인데, 사실은 이 어리석
음 때문에 독일은 있지 않나? 우리 한국 사람은 너무 약은 사람들 아닌가? 그
때문에 아무것도 안되는 것 아닌가? 이런 소감을 말하였다. 동감이었다. 우리 민
족은 확실히 약은 민족이다. 그러나 그래도 민중인 이상은 약지만은 못하다. 백
사장에 30만이 나가지 않았나? 신익희가 잘나서는 절대로 아니다. 민중 스스로
의 무엇에 끌려서지, 민중은 저를 모르는 것, 어리석은 것, 그러므로 저를 찾는
것, 찾아 만난 시간에 어쩔 줄을 모르고 감격하는 것, 그 감격이 역사를 짖는다.
이성만이 민중을 지도한 일은 없다. 감격을 준 자가 민중을 얻었지.
나는 길을 뚫고 들어가 가득히 당내에 찬 씨알 속에 한 알로 끼었다. 육당은
왜 육당이라 했는지 모르지만 육은 땅의 수다. 이 땅은 씨알의 땅, 씨알은 이 땅
의 주인. 시냇물 한 방울이 바다 속에 들어가는 모양으로, 나는 들어가기 전엔
미리 느끼지 못했던 어떤 커다란 물결 속에 한통치고 든 것을 느꼈다. 그 큰 강
당 전체가 한 개의 폐엽이 되어 너울너울 숨을 쉬는 듯 했다.
이 사람들 왜 이렇게 왔을까? 다르샨을 찾은 것도 사실이지만, 또 다른 것도
있다. 해방 후 민중이 육당,춘원에 대하여는 좀 찬
p 380
데가 있었다. 그들의 문화상의 공적을 말하면 큰 것이 있는 것을 세상이 다
알고, 자유를 얻는 날 달려가서 그들을 꽂다발로 묻어드리고 싶은 점도 없지 않
았지만 그럴 수 없는 점이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일제 말년 쯤 그들과 타협을 하고 굴복한 점이 있다는 것 때문
이다. 이 때문에 민중은 그들에게 대해 엉거주춤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
는 동안 한 분은 이북으로 납치가 되고, 한 분은 아주 세상을 떠났다. 그들은
위에서 말한 대로 가는 줄 모르게 갈 분들이 아니다. 무엇으로나 분명한 인사가
있어야 할 것이다. 육당,춘원의 밤이라는 데 민중은 그 궁금한 것을 풀자는 것도
한 동기였을 것이다.
그런데 강연은 도무지 기대했던 것과는 달랐다. 사회로부터 폐회에 이르기까
지 여덟 분이 말을 하였는데, 그 말은 다 사실이요, 거짓말은 하나도 없었지만
맛은 짜릿한 것도 따끔한 것도 없는 아무 맛 없는 말이었다. 식은 숭늉이 목구
명을 넘듯이 강연회는 무난히 미끈히 원만히 됐다면 됐다고 할 것이나, 그 대신
뱉어버리고 싶은 생각이 몇 번 몇 번 났다. 이 청중이 이것 들으러 왔을까? 다
르샨이고 감격이고는 털끝만큼도 얻어볼 수 없었다. 강사가 감정을 가진 분들인
가, 시비판단을 아는 분들인가 의심이 날 지경이었다.
우리는 지식을 얻으러 간 것이 아니었다. 보고서 낭독을 하려고 우리를 오라
했나? 우리를 동업회사의 사원으로 아나? 우리는 정신을 찾아서 간 것이다. 산
혼의 부르짖음을 들으러 간 것이다. 육당,춘원이야 누가 모르느냐? 네가 혼이 있
나 보자는 말이다. 내가, 우리가 지금 산 호흡이 있는가 해서 간 것이다.
밤새도록 말한댔자 육당,춘원이라는 두 마리 생선이 살고 간 마른 뼈다귀를
우려 먹는 것 밖에 다를 것이 없지 않은가? 그러나 우려 먹어도 소금이 들어야
맛이 나지 않나? 가장 중요한 소금을 아니 넣었으니 어떻게 먹으란 말인가? 그
것이 민중 대접인가? 소금이 무엇이 소금인가? 말하는 그대들의 마음 아닌가?
그대의 알짬되는 인생관, 사회관, 인격의 주체되는 것을 내어놓음 없이 무슨 인
물을
p 381
기념 소개하겠단 말이며, 이 민중더러 무엇을 얻어먹으란 말인가? 자기의 생
명을 위대한 자리에 내어놓음 없이 남에게 선을 할 수 있나? 민중의 지도자가
될 수 있나?
나의 편견인지 몰라도 나 보기엔 그 날 밤에 한 것은 육당,춘원의 비석 세운
것 밖에 없다. 비문은 언제나 둥그스럼한 법이다. 보나마나한 글이다. 육당,춘원
은 그렇게 비석이나 세우고 그만둘, 또 비문을 써도 그렇게 쉽게 무난히 쓸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또 오늘 우리가 그처럼 고인의 무덤이나 꾸미고 있을이 만
큼 한가하고 무사하고 좋은 세월 만난 사람들이 아니다. 죽은자는 저들 죽은 자
로 장사케 하라! 살려는 너는 나서라! 나서서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싸우고 정복
하고 찾고 이겨야 한다.
육당,춘원은 그대로 있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것이 있고, 무조건 존경하기에는
너무도 미운 것이 있는 분들이다. 제사꾼들은 가라 해라! 민중은 거짓은 하지 못
한다. 그렇다. 그들은 외상거래는 아니한다. 그들은 가난한 고로 외상은 없다. 외
상거래는 저 '있는 사람','가진 자' 들의 일이다. 줄 테면 아주 주고 안 줄테면
차라리 욕을 하고 돌아설 것이지, 주마 주마, 줄 듯 줄 듯 하면서 안주고, 급기
야 오라고 해서 가면 부도수표를 준단 말인가? 밤새도록 한 강연이 새 역사를
일으키려는 일꾼인 민중의 정신엔 아무 영양을 주는 것 없는 형식적인 말뿐 아
닌가? 소금을 왜 아끼나? 소금을 아끼자는 것이 아니고 녹아버리어 짠 맛을 내
잔 것 아닌가? 그대들은 왜 민중 속에 녹아버리려 하지 않나? 왜 자기를 아껴
지키려고만 하나? 그러려거든 왜 오라 했던가?
소금이 아니 든 국을 밤새 먹으려니 힘이 들지 않나? 밤은 깊어 불이 가게 되
는데, 마음은 점점 급해 이제나 저제나하고 소금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데, 한
알만이라도 떨어만지면 한 그릇 국이 다 살아날 줄을 아는데, 소금은 종시 아니
떨어지고 말았다.
불을 붙이러 갔었는데 불은 종시 붙지 않아 장작을 도로 지고 돌아와야 했다.
무거운 마음이요 무거운 걸음이었다. 불씨가 이렇게
p 382
없나? 우리가 못생겼어도 움찔움찔해도 장작인데 우리에 불꼬ㅊ을 주기만 하
면 타련만 그 불씨 하나를 아니 주고 마니!
춘원은 기독교였다가 불교로 돌아갔다 하고 육당은 불교였다가 카톨릭으로 갔
다 하니, 그러면 어째서 그렇게 된 것을 밝혀주면 이 어두운 씨알의 가슴에 불
빛이 되지. 밝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이 그저 그렇다고만 하니 우리 듣기엔 점점
어두워지는 일뿐이다. 처음엔 기독교였다가 후에 불교가 되니 전날엔 장난이었
나? 잘 몰랐던가? 그럼 그 때에 한 말은 무엇인가? 처음엔 불교다가 나중엔 카
톨릭이라니. 그럼 전의 불교는 버렸나? 아니란 말인가? 육당, 춘원의 심경을 의
심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 앞에 그 생선을 내어놓는 이상에야 왜 분명한 요리의
칼을 아끼는냐 하는 말이다. 이 역사의 단계에 서서 할말을 왜 아니하고 말까?
세조가 불교 장려를 했다고 해서 칭찬만 해가지고는 역사는 밝아지는 것이 없
다. 단종을 내 쫓고 모든 충량을 죽이고 임금이 됐으나, 그 죄가 무서워서 행여
벗을까 하는 심리를 해부해본 다음에야 비로소 알려지는 것이 있다. 보이지 않
는 것을 밝히잔 것이 역사지 나타난 일만을 소개하는 것이 무슨 역사인가? 육
당, 춘원의 마음은 역사의 한 구절이다.
나는 강당 문을 나오면서 “소금이 아니 들었구나!”“점잖음이 사람 죽는구
나!”했다. 강연이 그렇게 생기없는 것이 된 원인은 강사들이 점잖으려 했기 때
문이다. 그들은 우리 사회에서 모두 하늘에 걸린 달 같은 존재들이다. 그들은 다
쌀아놓은 인격이 있고 닦아놓은 지반이 있고 거느리고 있는 세계가 있는 분들이
다. 그러니 자기를 위해서만 아니라 남을 위해서도 주책없이 흥분을 하거나, 가
볍게 비평을 하거나 얕은 말의 선전을 해서는 아니되는 점이 있을 것이요, 또
고인에게도 미안할 만한 결점에 관한 말은 아니하는 것이 좋기도 할 것이다. 그
러나 이 민중을 볼 때, 이 다르샨을 찾아 어리석음을 잊고 몰려드는 군중을 볼
때, 그렇게 점잖고만 있을 수 있을까? 점잖은 것은 지나가는 신사요, 사랑하는
자가 위급한 데 빠짐을 당한 자는 체면, 예모, 안전을 다 잊고 달려들 것이다.
우리에게 신사는 소용없다. 우리 형님이 필요하고 동생이 필요하지.
p 383
대체를 굽어볼 때 분명하지 않은가? 나라가 망하는데 내 세계가 어디 있으며,
사회가 온통 결딴이 나는데 지반이 무슨 지반이 있으며, 국민이 없어지는데 인
격이 무슨 인격이 있나? 역사가 이렇게 된 단계에 점잖은 자가 누군가? 그것은
보수주의적인 특권계급의 의식이다.
의분은 왕왕 처지를 잊게 하는 것이요, 사랑은 매양 체면을 버리게 한다. 이
사회에 대한 의분이 있고, 육당, 춘원을 참으로 아껴하는 맘이 있다면 어떻게 목
도 한 번 아니 떨리고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육당, 춘원의 밤에 눈물도 콧물도
아무 예리한 비판도 깊은 음미도 없이 지나갔다는 것은 무슨 일인가? 강사들도
너무 점잖았고 청중도 너무 점잖았다. 강사의 말에 불이 없으면 청중 중에서라
도 불이 터져 "집어치워라!" 소리가 나왔어야 할 터인데 그것도 없었다. 우리는
하룻밤 제사를 지내고 말았다.
점잖으려는 심리의 밑에는 무엇이 있나? 현실 문제에 접촉하지 말자는 심리가
있다. 오늘 우리 사회는 거꾸로 가고 있다. 언론의 자유가 점점 없어져간다.
우리 민족을 본래 약은 민족이라고 위에서 말했지만, 약아진 것은 부대껴온
역사 때문이다. 민중이 너무 속아 왔다. 그러므로 좀처럼 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또 의사 발표를 하려 하지 않는다. 의사 발표를 했다가 너무 비참한 수
난을 당한 민족이므로 될수록 속을 주는 말을 피한다. 그것이 약아진 것이다. 해
방이 됐다는데 웬일인지 또 속을 내어놓고 말을 할 수 없어진다. 민의 자리에서
보면 이까짓 역사에 아까울 것이 없건만, 그래도 아까워서 잃을까 두려워 말을
피한다. 그러므로 여론은 점점 더 죽고 횡포자는 더욱더 마음대로 한다. 일명을
잊고 바른말을 하는 어리석은 인물을 가지는 민족은 살 것이다. 그러나 저마다
약아서 말을 아니하는 민족은 개 돼지가 될 것이다. 벌써 다 되고 있지 않나?
p 384
그날 밤 두 시간 반이나 넘는 시간에 여넓 명사가 말을 했는데 민중어고 민권
이고 민 소리는 한 번도 아니 나왔으니 어떻게된 일인가? 마이크가 좋지 못했으
니 내가 잘 듣지 못한지도 모르나, 그 수천 군중이 박수 한 번 딱 소리도 낸 것
없으니 내가 잘못 본 것도 아닐 것이다. 이집트 고분에 가서 미이라에 관한 강
연을 한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고 산 민중을 놓고 일제 밑에 압박을 받고 착취
를 당하고 코를 끌려다니던 재주는 천하 어디 가도 자랑을 할 만한 재주, 마음
성은 어디 가도 내어놓을 만한 어진 마음성들을 가지면서 그 참혹한 살림을 했
던 육당, 춘원을 이야기하는데 어찌 그럴 수 있을까?
그러나 또 까닭이 있다. 강사들이 말하기 어려워하는 것은 두 분이 다 문제를
가지기 때문이다. 총독부의 사료 편수관이 됐고 학도병 나가라는 권유 강연을
했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이것을 잘했다 할 수는 없으니 말을 끄집어내면 그것
에 대한 비판을 안할 수 없고, 하면 고인에게 욕이 될 것 같고, 이러므로 될수록
그 문제는 건드리지 말자 해서 그 말은 안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픈 데 건드리지 않고 고치는 의사가 어디 있으며 병 고쳐주지 않고
인술이 어디 있나? 그것 하자고 연 밤에 그것 아니했으니 무슨 의미인가? 살았
을 때 얼굴 딱지지 세상을 다 떠난 다음에 낯이 어려울 것도 아무것도 없지 않
은가? 또 우리는 누구의 사정을 보러 모였던가? 또 사랑이 무엇이 사랑인가? 살
아서 우리가 그것을 말려드리지 못하고 또 죽은 후에 그 비판조차도 못하면 무
슨 사랑인가? 또 설혹 그것이 결점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한 번 죽이고 다시 살
려낼 만한 재주가 없던가? 재주가 무엇이 재주인가? 성의가 재주지.
사람을 모아놓고 할말을 안한 것은 속인 것이다. 소금 아니 넣었기 때문에 속
음이다.
왜 속았나? 왜 속였나? 강사들이 무슨 악의가 있어서 그런 것 아님은 말할 필
요도 없다.
p 385
그럼 속이잔 것 아닌데 왜 속임이 됐나? 둘 사이에 떨어짐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나무라고 싶은 것은 그것이다. 왜 있는 것을 다 빼앗기고 할말을 하는
민중의 입장에 서서 해주지 않았나? 우리는 사실 우리 말을 들으러 간 것이었
다. 우리가 육당, 춘원에 대해 하고 싶으면서도 못하는 말, 발표 능력이 없어 못
하고 제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몰라 못하는 말을 해주는가 해서 갔었다. 우리가
말하지는 못하여도 들으면 우리 말임을 알기는 한다. 그러면 우리 마음이 열려
힘을 얻는다. 그것을 위해 갔다.
그런데 우리 말을 해주지 않았다. 민중은 속았다.
민중이 무어냐? 본래 속는 것이다. 정치로 속고, 교육으로 속고, 종교로 속고,
역사가 민의 역사라면 그것은 속음의 걸음이다. 저 민중은 패 속임직하다. 하기
때룬에 감히 지도자라 나서고 교사라 나서고 신의 사자라 하고 나서지, 민중이
뚫어보는 눈을 가진줄을 안다면 한 놈도 나설 놈은 없을 것이다.
아니다. 민 그 자체가 스스로 속임 아닌가? 생이 곧 스스로 속임인데, 그렇기
때문에 감히 속이려 드는 것인데, 누구를 원망할것 없다.
씨알아, 네가 스스로 눈을 감지 않는데 네 눈을 가릴 자가 누구란 말이냐? 네
가 스스로 입을 다물지 않는데 누가 네 입을 틀어막는단 말이냐? 네가 참을 참
대로 보는 것과 그것을 그대로 말하는 것밖에 또 무엇을 아낄 것이 있는 듯해
너는 눈을 감고 입을 다물었느냐? 그러나 속고 나면 속았구나 하는 것이 민중이
요, 속았구나 하면 분하다 분하다 못해 내가 잘못이지 하는 것이 민중이다. 그러
나 스스로 속였구나 할 때 속 움직임이 있다.
거기서 새 역사의 걸음이 시작된다.
소금 먹을 생각을 말고 네 마음을 먹어라. 네 마음이 소금이다. 맛이 씨알 제
속에 있다. 생명력이 씨알
제 자체를 깨침에 있다. 목숨을 아꼈더니 아낌이 죽음이었구나. 이 한 목숨 아낌
을 타서 너희가 나를 속였지, 내가 이젠 속지 않는다. 속지 않는다 할 때 나는
p 386
깨치고 그 깨달음으로 참 생명을 얻는다. 네 마음을 먹어라, 스스로 결심해라!
너는 네 마음을 먹고 사는 것이지 밥을 먹고 사는 것 아니다, 지도자가 네게 살
길을 주는 법은 없다. 네 마음이 스스로 너를 살린다. 문제는 네게 있지 남에게
있지 않다. 수천의 젊은이가 달려간 것은 육당, 춘원을 알러 간 것이 아니었다.
자기를 알러, 제 소리를 들으러, 제 초상을 보러 갔던 것이다.
민중이 제 초상을 보고 제 음성을 듣는 말은 무서운 말이다. 그것을 위해 민
중은 헤매고 안타까워하고 더듬고 넘어진다.
성격을 세워라! 모든 문제는 민중의 성격을 다듬는다는 한 점에 집중된다.
사회의 지도자들이 육당, 춘원의 밤을 열면서도 아무 준 것이 없었던 것은 그
뜻이 너 스스로 해라 하는 데 있다. 사실 성격을 누가 줄 수 있을까? 줄 수 없
는 것이므로 못 준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성격을 세우기 위해 육당, 춘원을 사
정없이 씹어먹어야 한다.
육당, 춘원이 무엇인가? 한퇴지의 말을 빌어 하면 잘 운 사람들 아닌가? 이
나라가 기울어지려 할 때, 이 민중이 고난에 빠지려 할 때, 그 불평을 잘 울라고
하늘이 세웠던 이들 아닌가? 그들은 참 잘 울었다. 그 소년잡지, 그 청춘잡지,
그 역사, 그 단군론, 그 백두산 참관, 그 백팔번뇌, 그 무정, 그 개척자, 그 단종
애사, 이순신, 원효, 이차돈, 그것이 다 이 민족을 위해 울고 이 나라를 위해 슬
프게 힘있게 우렁차게 운 것 아닌가? 민중은 한때 그들 안에서 자기의 가슴에
사무친 불평을 시원히 울어낼 수 있었다. 우리가 그들의 공로를 찬양하는 것은
그들이 우리 마음을 잘 알아서 우리가 있으면서도 잘 발표하지 못하는 것을 대
신 잘해 주었기 때문 아닌가?
그런데 이제 민중이 그들 위해 분해하고 아끼고 의아해하는 것은 그렇게 울던
그들이 내처 힘있게 울지 않고 중도에 그 소리가 그만 막혀버렸기 때문이다.
p 387
울음이 사람을 움직이려면 그 폐부와 간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면 안된다.
곧 깊은 데서 나와야 한단 말이다. 뼈에서 흔에서 나와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는
꽂꽂이 서지 않으면 안된다.
인지생야직이라, 사람은 곧은 것이 그 천성이다. 그러므로 꽂꽂이 서서만 하늘
숨을 마실 수 있다. 하늘 숨을 마셔서만 참 맑고 날카롭고 힘있는 '울음을 울 수
있다. 절조란 다른 것 아니고 곧음이다. 만일 자기를 굽히면 옳은 울음이 나올
수 없다. 장자가 굴복자는 기익언약회라 한 것은 이것이다.
머리를 숙이고 허리를 굽히고 가슴을 우그리고 배를 눌러 남한테 구부린 자는
맑고 힘차고 우렁찬 소리를 낼 수 없다. 육당, 춘원이 독립운동을 하고 민족정신
을 위해 싸울 때는 정천입지로 곳곳이 섰었다. 그러나 총독부 사료 편수관으로
들어가고 향산팡랑으로 글을 쓰고 강연을 하는 때는 아무래도 굽혔다. 굽혔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그 소리가 맑고 날카롭고 진동적일 수가 없었다. 동
정하려면 동정할 수도 있고 작다면 작은 일이라 할수도 있지만, 그전에 진두에
서서 총칼을 무릅쓰고 울던 그 사람과 후의 그 사람을 대조해볼 때 우리는 이
사람에게 어찌하여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주먹으로 땅을 치고 싶고 보면
역사의 페이지를 찢고 싶음을 금하지 못한다.
아, 칠십 인생이 이렇게 어려운가? 육 척 못되는 몸이 이리도 무거운가? 육당,
춘원의 밤에 이 비분도 아니 울리려면 뭘 하자고 수천 민중을 모았던가? 울어야
할 사람이 울던 울음을 끊기고 만 이 설움, 이 통분을 한 번 못 울어 본단 말이
냐? 울어야 할 통분을 울지 못하면 터지든지 그렇지 않으면 썩어진다. 그럼 이
지도자들은 점잖게 상아상에 앉아서 이 민중을 썩히고 말려나? 육당, 춘원 울라
고 하늘이 천분을 주어 내보낸 울음꾼이 왜 마지막까지 울지 못했나?
일본 제국주의의 칼에 맞아 죽으면서, 백조가 죽을 때 가장 슬픈 노래를 부르
듯이 마지막 노래를 불렀더라면 민중이 감동되어 한 번
p 388
크게 울었지. 그랬다면 해방이 돼도 이렇게 더럽게는 안됐지. 죽었더라면 살아
서보다 더 힘있게 더 길게 울었지. 정포은은 지금도 얼마나 힘있게 우나? 성삼
문은 지금도 얼마나 절절하게 우나? 독립선언문을 썼으면 왜 제퍼슨이 되지 못
했나? 문장을 썼다면 왜 일찍이 시일야방성대곡을 썼다가 일본 사람에게 짓밟힘
을 당하고 신문사를 혈리우던 그같이 되지 못했나? 그들은 아직 울고 그 신문은
아직 살아 있지 않나?
일본의 지배하 40년 종살이의 역사에 운 사람이 이 밖에도 없지 않으나, 그
어느 모로 보든지 이 두 분과 견줄 이가 없었다. 그런데 이들이 이렇게 됐으니
그 분함을 무엇으로 말할까? 우리가 이런 푸념을 하는 것은 고인을 폄하하기 위
해서가 아니요, 그 공로를 몰라서가 아니다. 그들의 공로가 잊을 수 없이 크고
그들을 존경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며 우리 분함을 둘 데 없어 하는 말이다. 그
러나 한은 거기서만 그치는 것 아니다. 그들은 왜 끝내 곧 추서서 울지 못했나?
그것을 그들의 개인적인 책임에만 돌리는 것은 너무도 옅은 일이다. 정말 책임
은 민중 자신이 지지 않으면 아니된다. 개인은 민중의 한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큰 재목을 구하려면 깊은 삼림 속에 가야만 하는 것이요, 큰 고기를 잡으려면
넓은 바다에 가야만 하는 것이다. 아무리 자라는 힘이 한 그루 한 그루의 뿌리
에 있다 하여도 숲 없는 사막에서 재목을 구할 수는 없는 것이고, 아무리 사는
힘이 한 마리 한 마리에 있다 하여도 물이 없는 들판에서 고래를 기를 수는 없
는 것이다. 민중 없는 위인은 없다. 위인이 민중을 만드는 것 아니요 민중이 위
인을 낳는다. 민중의 기도와 지지와 따름이 없이는 아무리 천분을 가
가 육당, 춘원이 그렇게밖에 되지 못한 것은 이 민중의 역량이 그것뿐이기 때문
이다. 육당, 춘원의 생애는 하나님의 이 민족에 대한심판이다. 너희 성의와 너희
지혜와 너희 용기가 요것뿐임을 알아라
p 389
하는 판결문이다. 그러므로 민중은 자기 가운데 서는 인물에게서 자기 상을
읽어내어 반성해야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칭찬만 하면 그것은 우상 숭배요, 개
인적으로 비평만 하면 그것은 자기를 속임이며, 자기를 낮추는 일이다. 민중은
인물을 떠받들 뿐만 아니라 비판할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이요, 엄정하게 비평할
줄만 알 뿐 아니라 용서할 줄도 알아야 한다.
자기발견의 정도가 낮은 민중일수록 우상적인 숭배에 빠지거나 그렇지 않으면
가혹하고 도량 좁은 제재를 한다. 그래 가지고는 사회는 건전한 발달을 할 수
없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인물 대접할 줄을 모른다. 그것이 우리의 국민적 성
격의 큰 결함이다. 재목은 가꾸어서만 있듯이 인물도 가꿔야만 한다. 우리나라가
쇠한 큰 원인의 하나는 인물 빈곤이다.
사화, 당쟁 이래 조금 역량이 있는 인물은 모조리 죽여버렸다. 경제력의 피폐
는 인적 자원의 피폐와 병행한다. 이조 말련에 와서 나라가 아무 반항의 힘 없
이 고스란히 망했던 것은 이 때문이요, 오늘날도 아직 그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
였다. 재목 하나를 얻으려 하여도 백 년은 길러야 하는데 인물을 얻으려면 적어
도 수백 년을 단위로 삼고 기르지 않고는 큰 것은 바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나라는 당분간 큰 인물 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럴수록 칠년지병에
구삼년지애로, 이제라도 어서 길러야 할 터인데 그렇지 못하고 예날 하던 버릇
인 서로 배제하는 풍이 아직도 있으니 한심하지 않은가?
나무 빈 산이 씨가 나지 않는 것은 아니나 큰 나무가 없는 고로 우마의 침입
을 입어 자랄 수 없듯이, 우리나라가 인재가 나지 않는 것 아니나 크게 되지 못
하고 싹 나다가 마는 현상을 늘 보는 것은 이 때문이다. 큰 삼림 속에서야 큰
재목이 자라고 큰 인물 밑에서야 큰 인물 자란다. 육당, 춘원도 이렇게 된 민족
적 희생의 하나라야 할 것이다. 우리가 기르지 못했다. 민중이 정말 받들었다면
그 육당 그 춘원인들 무시하고 갔을까? 시비를 개인적으로 돌릴 것 아니라
p 390
민중이 스스로 회개를 해야 할 것이다. 육당, 춘원은 드물게 얻든 옥이다. 그
러나 거기 그만 금이 갔다. 그것은 옥을 아는 자 없었던 죄다.
우리의 잘못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그들이 약해질 때 눈물로 그 길을 막고
돕지 못했던 것이요, 그 다음 또 하나는 쾌히 용서해 다시 발을 펴게 하지 못한
것이다. 해방이 안됐다면 몰라도 이미 됐으니 낡은 문서는 선뜻 청산을 하고 진
심으로 맞았으면 새 울음이 나왔지 아니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민중이
엉거주춤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않는데 그 아까운 혼들은 다시 기운을 펼 기회
를 잃었다. 이것이 분하지 않은가? 이것이 부끄럽지 않은가? 책망할 것은 우리
자신이었다. 민의 세대 아닌가? 우리 일 아닌가?
그런데 육당, 춘원의 밤을 열었으면 그것이라도 했어야 할 터인데 그것도 못
했다. 말했던 명사를 나무랐으나 그 잘못 역시 우리 얼굴로 떨어져온다. 청중이
정말 청중이었다면 그 강연이 중단되든지 산 말이 나오든지 했을 것이다. 식은
숭능 삼킨 것은 뜨뜻미지근한 민중 자신의 마음이다. 어떤 광대도 관중 보아가
며 재주를 하는 법이다. 너희 따위는 이것밖에 볼 자격이 없다 하니 싱거운 연
극도 끝까지 두루 뭉쳐서 맞추는 것이다.
이젠 육당, 춘원은 다 지나갔다. 그들은 우리 고난의 역사의 마지막 밤에 나와
울고 갔다. 이제 그 밤은 갔다. 날이 밝는다. 이제 그들이 다시 돌아와서 우리
울음을 울어줄 수는 없다. 이제 우리는 오늘의 아픔 슬픔을 울어야 한다. 옛날같
이 누구더러 울어 달랄 것도 누구를 따라 울 것도 아니다. 우리가 앞장을 서서
울어야 할 것이다. 오랜 압박과 착취의 정치는 이 민중에게서 울음까지를 빼앗
아 버렸다.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모든 울음은 참 뜻에서의 우리 울음 아니었다.
민중이 힘껏 따라 울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제는 울어야 하는 때가 왔다. 아직도 자고 있는, 피폐가 되고, 질식이 된 채
있는 이 민중이, 그 압박자들이 단말마적인 악독을 부려, 먹을 것을 주노랍시고
겨를 주고 흙을 주어도 그대로 먹고,
p 391
가르친다고 차 굴리고 껍질을 벗겨도 꿈쩍도 못하고 있지만, 때는 이미 어쩔 수
없이 밝았다. 이제 신음하는 소리 한 마디만을 질러도 저들이 질겁을 하고 도망
을 할 시간이 다가온다. (1959)
p 393
제 4 부
압록강
조국암행기
남한산성
행주산성
한 동발목의 이야기
늙은이의 예날얘기
p 395
압록강
압록강에 가자. 장마 걷히어 골짜기 시냇물 맑고, 구름 뚫려 지평선에 먼 산의
모습이 푸르기 시작하는구나. 새 가을이 온다. 내 고향 산천엘 기야 지. 내 집,
공산당한테 쫓기어 내버리고 나온 내 집은 압록강가에 있다. 백두산서 시작해
천 리 넘는 길, 굽이굽이 흘러온 그 강이 마침내 황해바다로 들어 가는 길, 서로
싸우는 건지 큰 가슴에 얼싸 만기는 건지 내 모르지만, 밤낮을 울고 노래하고
출렁거리고 뒤흔드는 바로 그 사품에서 단물 싼물을 다 마셔가며 자라난 것이
나다.
쇠사슬에 매여 이리저리 팔려 다니면서도 짐숭같이 부림을 당해 밤낮 울면서
도 켄터키 강가에 태어났던 오막살이를 못 잊어,
온 세싱이 다 재미없고
늘 슬플 뿐일세
내 늘 원은
내 집에 보내주오.
하던 검둥이 모양으로, 내 생각은 자나깨나 압록강가를 오르내린다. 꿈을 꾸어
도 그 언덕 그 강변에서 꾸는 그 압록강엘 기야지, 그 고
p 396
향엘 돌아가야지, 겐터키의 오막살이를 못 잊고 밤마다 밤마다 꿈속에라도 갔
기에, 감정만도 아니요, 기억만도 아니요, 의지만도 아닌 그 삶 때문에 마침내
해방의 날이 와서, 검둥이의 오늘이 있는 것같이 나도 가야 한다. 꿈속에서라도
그 강가엘 가야 한다.
고향이 뭐냐? 그것은 자연과 사람, 흙과 생각, 육과 영, 개체와 전체가 하나로
되어 있는 삶이다. 거기엔 나남이 없고, 네 것 내 것이 없고, 다스림 다스림 받
음이 없고, 잘나고 못남이 없고, 나라니 정치니 법이니 하는 아무것도 없고, 하
나로 조화되어 스스로 하는 삶이 있을 뿐이다. 나는 압록강의 아들이다. 내가 나
고 파먹고 자라난 용천 일대가 압록강과 황해의 서로 만나는 데서 이루어진 살
진 앙금 흙인 것같이 내 생각도 그 강 그 바다 대화 속에서 얻은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 강가의 보금자리를 잃고 나온 지 스무 해가 되는 오늘에도
압록강 생각만 하면 내 가슴속에서 그 물결의 뛰놂과 아우성을 느낀다.
압록강은 장관이다. 우리 집이 붙어 있는 그 뒷산에 오르면 깎아 세운 낭떠러
지가 서 있고, 그 밑으로 강이 흐른다. 이것이 억만 년 물과 묻의 싸움의 기록이
다. 물은 제가 이겼노라 할지 모르지만, 이긴 것은 물도 바위도 아니요, 그 장관
이 오직 남아 있을 뿐이다.
그 낭떠러지를 딜곶, 되령곶이라 부른다. 한문자로 써서 미곶 혹은 진곶, 도룡
곶이다. 미도 진도 다 미리 곧 용을 표시하는 말인데, 용천 일대에서는 지명에
용자가 붙은 데가 많다. 가장 높은 산이 용골산이요, 그 서쪽에 용아산, 그 남쪽
에 미마산, 그 옆에 용바위, 모두 용이다. 그 까닭을 알 수 없으나 이것은 압록
강을 상징한 것 아닌가? 되령곶에서 용을 잡았다는 전설이 있고, 지금까지도 가
뭄이 심할 때는 그 바위에 피를 바르면 비가 온다는 말이 있는 것은 이 자연과
사람의 싸워오던 것을 말하는 것 아닐까?
봄에 그 벼랑에 서서 보면 유초도 버들발, 황초평 갈밭에 푸른
p 397
물결이 넘치는데 그 전너로 만주의 산천, 인가 촌락이 손가락으로 헤일 듯이
보이고, 여름이 와서 큰물 나면 굼실거리는 물결에 강과 바다가 어우러져 싸운
다. 그 바람에 상전벽해란 말 그대로 살진 논밭이라 자랑하며, 갈아먹던 땅이 보
는 눈앞에서 철렁철렁 떨어져 들어가버린다.
그것을 강락이라 하는데, 그 강락이 사람의 욕심과 지혜를 비웃기나 하듯 금
년은 이쪽메서 뜯어다 만주 편에 붙이었다가, 명년은 또 만주에서 혈어다가 이
쪽에 붙이었다 한다. 가을 들어 들에 익은 곡식의 황금 물결 일고 꺼지며, 바다
에 고기잡이꾼의 노래 높았다 낮았다 하는 것 들으면 평화의 삶 또 한 번 느끼
게 되고, 겨울이 되어 하늬바람 한번 냅다 불면 그 넓은 강 얼어붙어 국경이고
뭐고 없어진다. 만주와 반도가 하나다.
강을 보는 사람은 그 하류에만 있지 못한다. 원천흔혼 불사주야라고, 자연 그
근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압록강 보면, 백두산 천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내 발밑에서 하늘 땅을 울리며 만주와 반도를 두 나라로 나누어, 건
너갈수 없이 하는 이 무서운 물은 어디서 온 거냐? 천지에서 넘쳐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 시작할 때에 실낱 같은 것이나, 그것이 끊임없이 흐르면 여기 이른
다.
강은 흘러 빠지면서 다합이 없는 것이요 변하면서 변하지 않는 것이며, 막히
면서 뚫고야 마는 것이다. 인산지수라고 옛사람이 말하지 않았나? 백두산이 이
민족의 덕을 표시하는 거라면, 압록강은 그 슬기를 표시하는 것이다. 하나는 그
삶의 체를 말하는 것이라면, 하나는 그 용을 말하는 것이다. 만주와 반도 사이를
흐르는 압록강이야말로 이 나라의 역사를 상징하는 그림이다.
그러나 압록강의 근원을 말해서 백두산 천지만을 말하는 것은 무식한 옛날 소
리다. 한 사람이 전제 독재하고 만 사람이 복종하던 때, 천재가 생각을 해내고
모든 범인은 그 생각을 빌어서 살던 때의 이야기다. 어째서 압록강의 근원이 백
두산 천지냐? 실로 개마고
p 398
지와 남만주의 모든 골짜기 골짜기의 물을 다 모아서 된 것이 압록강이다. 근
원은 어느 한 점에 있지 않고 전체에 있다. 민중의 시대요, 대중의 세기다.
압록강가에 서서 보는 것이 뭐냐? 신의주 안동이요, 의주 구련성 이다.
이쪽에 백마산이요, 저쪽에 금석산이다. 압록강가에 서서 듣는 것이 무엇이냐?
만주와 반도의 대화다. 그와 같이 이 역사는 만주와 반도에 살던 허다한 민중의
대화의 산물이다.
압록강의 물결 들여다보면 거기 지금도 고주몽의 얼굴이 비쳐 있음을 볼 것이
다. 유화 부인이 뭐며, 고기떼가 다리를 놨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 강가에서 그
린 혼의 비전 아니겠으며, 잔고기떼같 이 이름 없는 민중, 대중 아니겠나? 고기
가 다리를 놓으면 압록강의 사나운 물결이 문제가 아니듯이, 민중 속에 들어 민
중의 뒷받침을 받으면 시대의 어려움에 문제 없이 새 나라에 가는 길이 열릴 것
이다.
강이 어찌 강에만 있느냐? 사람의 마음을 거치지 않은 순전한 객관적 자연이
란 없다. 저 산도 내 혼의 해석을 받은 산이요, 이 물도 내 혼의 선택을 입은 물
이다. 압록강은 역사를 가진 압록강이다. 그 물은 우리 억만 조상의 피와 땀이
녹아들어 있는 물이요, 그 울림속에는 그들의 한숨과 울부짖음이 들어 있다.
압록강을 보면서 의주를 잊겠느냐? 의주를 가면서 통군정에를 어찌 아니 오를
수 있느냐? 이름도 통군정. 그 위에 앉아 만주벌판을 건너다보며 거기서 오는
바람을 쐬며 봉수먹이의 물결 소리를 들어보라. 거기 임경업의 하늘에 사무친
원한이 있으며 ‘우리 사또님’의 민중의 소리가 있지 않나? 압록강을 보며 역
사의 숨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 한국 사람이 아니요, 한국에 낳았으면서 한국
사람이 아니람, 사람이 아닐 것이다.
압록강가 통군정에 올라 역사의 웅얼거림 들어보지 않으려나? 압록강이 뭐냐?
이 역사의 고소장이다. 우리의 다하지 않은 책임
p 399
을 추궁하는 것이 압록강이다. 백두산을 우리나라의 제일 높은 산이요, 나라의
터가 열린 성지라 하며, 압록강은 우리나라 가장 큰 강이라 어린아이들에게 가
르치지만, 그것이 어찌 우리나라 산이요, 강이냐? 우리 것이란 것은 우리와 남이
다 같이 그렇게 인정하여야하는 것이다.
만주에 가서 물어보라. 그들은 그것을 자기네 것이라 할 것이 아닌가? 제 나
라를 지키지도 못하고 이떻게 평안한 마음으로 우리 것이라 생각하고 있을 수
있을까? 그러므로 압록강은 우리를 죄로 정하는 고소장이라 한다. 그 앞에 서면
우리의 다하지 못한 역사적 책임, 깨져나간 역사적 비전 때문에 부끄러워하고
슬퍼하고 주먹을 쥐고 결심해야 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
우리 역사의 비극은 국경이 되어서는 아니되는 압록강이 국경이 된 데서 시작
된다. 마치 모가지에 들어간 칼자리와 마찬가지다.
역사가 고소하는 것이라면, 또 약속하는 것도 있다. 내가 말하는 것은 낡아빠
진 민족주의, 국가주의의 고취가 아니다. 비겁하고 스스로 속이는 민족은 못산다
는 말뿐이다. 이제라도 압록강가에 가서 역사의 부르짖음을 들어보자. 장래의 희
망이 있다. 신의주 가서 그 철교 보라. 구릉포 가서 그 발전 댐 보라, 그것을 만
들던 일본 제국주의 어디 있나? 그들은 장자 오는 역사 위해 무대 준비를 하고
간 것뿐이다. 오늘의 공산주의자와 그 억지의 정치도 마찬가지다.
그 철교가 무엇인가? 만주와 반도를 정치적으로 읽어매는 것 아닌가. 그 발전
소가 무언가? 경제적으로 그것을 하나로 연결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 조상의 잘
못으로 인하여 떨어져서 동양 천지에 불만의 원인이 되게 했던 것은 다시 이어
져서 한 삶의 무대로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사람의 정신뿐이다.
바른 정신 가지기만 하면 조상의 옛터에 평화롭게 살 수 있을 것이다. 만주와
반도의 맑은 물, 흐린 물을 다 모아 가진 파란곡절을 거듭한 후 황해에 들어가
서 한통 치고 마는 압록강 모양으로 이 역사도 세계가 하나 되는 내일에 이를
것이다.
p 400
압록강에 가자. 가서 새 역사의 약속을 듣자.
새 약속을 믿어서만 죄를 면할 것이다. (1966)
p 401
조국암행기
민중의 마음속을 읽어봄
옛날 임금이란 것이 있어서 나라를 다스릴 때에 임금과 백성의 거리는 참 멀
었다. 이른바 구중궁궐이라, 집도 집이지만 더구나 층층이 되는 계급제도의 벼슬
아치, 요샛말로 해서 인의 장막에 둘러싸인 담엔, 아래서 민중이 사는지 죽는지
아우성을 치는지 실로 알 길이 없었다. 그래서 어진 임금이 백성의 고생하는 모
양과 벼슬아치들의 잘하고 못하는 실정을 알고 싶을 때는 몰래 곧고 바른 사람
을 뽑아 나라의 방방곡곡을 돌게 하여 조사를 하였다. 그것을 암행어사라 했다.
암행이란 아무도 모르게, 관리의 행색을 나타내지 않고, 평민처럼 때로는 거지처
럼 허술하게 하고 다니기 때문이다.
암행어사가 내렸다는 소문이 한번 나면 평소에 백성을 마구 짜먹고 긁어먹던
숭냥이 같고 살쾡이 같던 벼슬아치 놈들이 모두 벌벌 떨었고, 짐숭처럼 천대를
받고 천지에 호소할 길이 없이 원통 억울을 당하던 백성들은 가뭄에 단비같이
축하하고 손뼈을 쳐서 시원을 부르짖었다.
세상은 발달하여 임금 따위는 없어졌고 반대로 백성이야말로 나
p 402
라의 주인이라 하며, 그 주권을 대표하는 대통령을 민중의 심부름꾼이라 말로
는 하지만, 정치와 백성 사이가 멀기는 마찬가지요, 민중이 억울한 고통을 당하
고 있기는 예나 이제나 다를 길이 없다. 다름이 없을 뿐 아니라 몇 갑절 더하다.
옛날은 학문과 기구가 덜 발달한 소박한 시대라 모든 것이 자연의 추세대로 되
어갔다. 어진 놈도 어진 제 인격과 재주로 하고 모진 놈도 모진 제 인격과 재주
로 하기 때문에 선이 있으면 누구나의 본성 속에 있는 선한 성질에 따라, 그것
이 곧 인정이 되고 때로 악이 있어 세상을 휘두르는 일이 있어도 그 악한 것이
곧 드러나 바로 잡히게 마련이다. 그래서 이른바 인심이 천심이다. 인격의 힘이
거의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자금은 달라졌다. 극도로 발달된 과학과 조직의 시대
기 때문에 악도 과학적 . 조직적으로 되었다. 까다롭고 복잡한 법률 조문과 가지
가지의 ‘카드’와 물리 . 화학 . 심리 . 생리 . 사회 갖가지 전문지식 기술을 선
용, 악용한 선전과 조작과 정보로 되기 때문에 일박 민중은 죽으면서도 죽는 줄
알지도 못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한 번 악이 세력을 쥐면 좀해서는 그것을 물리
칠 수가 없어졌다. 프랑스대혁명 같은 것은 이제는 옛날 이야기다. 이런 때야말
로 한 번 민중의 참 사는 모습, 고생하는 모습, 싸우는 모습, 자라는 모습을 아
는 재주가 없을까? 그래서 새해에 한 번 나라의 곳곳을 돌아 그 보고 듣고 만져
본 것을 가지고 이 글 위에서 독자와 만나보기로 하고 이름을 붙여 ‘조국암행
기’라 했다. 암행이라 하지만 나는 암행어사는 아니다. 아무도 나를 어사만 아
니라 무엇으로라도 임명할 사람은 없다. 누구의 임명을 받고 시킴 을 받을 나는
아니기 때문이다. 또 나는 벼슬아치의 잘잘못을 들추어내자는 것도 아니다. 벼슬
아치만 아니라 누구의 잘못이라도 남의 잘못을 뒤로 가셔 몰래 보고조사하는 것
은 나의 천성이 허락하지 않는다. 나는 죽으면서 유언이라도 하게 된다면 대대
에 굶어죽을지언정 형사나 정보원은 되지 말라고 하고 싶은 사람이다.
p 403
또 암행이라면 몰래라는 뜻이 아니다. 세상에 몰래라는 것이 어디 있나? 더구
나 제 집안 식구도 믿을 수 없어진 사상적 .도덕적혼란시기요 비밀 정보원을 몇
십만으로 세고 있다는 이 정보망 속에서 몰래란 것이 어디 있을까? 청천백일하
에 드러내놓고 보는 일이요 듣는 일이다. 암행이라는 것은 사회의 앞면이 아니
고 뒷면이라는 뜻에서요, 통계숫자를 보는 것 아니라 사람의 마음속을 읽어본다
는 뜻에서다. 또 그것은 관청과는 아무 관련이 없이 민중 편에서라는 뜻이다. 본
래 옛날의 암행어사에 있어서도 그 좋은 점, 강한 점은 몰래라는 것보다도 민중
이라는 데 있었다. 민중의 모양을 하고 민중 속에 들어 그들의 소리를 들어보고
그들의 마음이 되어보잔 것이었다. 그러므로 어진 일이다. 밝은 임금, 어두운 임
금 하지만 어떤 것이 밝은 것이고 어떤 것이 어두운 것인가? 전체를 돌아봄 민
중과 통하면 밝은 것이고 민중과 통하지 못하면 어두운 것이다. 맥이 발끝까지
통하면 성한 사람이요 목에서만 할락거리면 죽는 사람 아닌가? 그래서 장자가가
말하기를 보통 사람은 목구멍으로 숨을 쉬지만 참 사람은 발꿈치로 숨을 쉰다고
한 것인가? 나라의 발꿈치는 어디요 목구멍은 어딘가? 대통령 . 장관 . 국회의원
하는 것이야말로 목구멍이요 두메산골 바닷가 강변에 풀처럼 모래처럼 깔려 있
는 민중이야말로 발꿈치 아닌가? 목구멍으로 숨이 드나드니 거기가 중요한 듯해
거기서만 할락거 리면 죽듯이 나라가 정권 쥔 손에서만 놀면 망한다. 숨이 발꿈
치에 까지 드나들듯이 정치가 민중에게 확 뚫렸을 때 나라는 튼튼하다. 나는 이
나라의 발꿈치 밑구멍을 좀 만져보고 싶단 말이다. 누가 임명한 것도 아니오 누
가 시킨 것도 아니오 나 스스로 떨치고 나서는 거지만 나는 내가 가장 자격이
있다 생각하고 이것은 이
p 404
때에 꼭 내 일이라고 생각한다. 상놈의 집안에 나서 상놈으로 자랐으며. 가난
하게 나서 이날껏 돈과는 인연 멀게 살았으니 순 알짜 민중 아닌가? 씨알 중의
씨알 아닌가? 이날까지 벼슬이라고는 해본 일이 없고 아무 당파에도 든 일이 없
으니 자격이 있지 않은가? 공부를 했어도 아무 전문가가 되지 못했으니 보통 사
람의 상식적인 의견을 알아들을 자격이 있지 않은가? 학교엘 다녔어도 학벌을
내세울 것이 없고, 종교를 믿었어도 어느 교파에 붙어 있지 못했으며, 사탕물 같
아서 교사고 목사고 시인이고 군인이고 들어만 가면 녹아버려 제 본성도, 제 사
명도 다 잃어버리는 정치단체는 콧김을 씌어본 일도 없으니 참 민중의 친구요
그들과 통사정을 할 수 있지 않은가? 이리하여 나는 나섰다. 새삼 거지 옷을 입
을 필요도 없고 행색을 바꿀 것도 없다. 하늘을 집으로 삼고 바람을 옷을 삼는
참 거지는 못됐으나 거기 가깝다고는 할 것이요, 행색은 본래 타고난 허줄이니
그대로 괜치 않을 것이다. 술을 마시는 것도 아니오 노래를 잘하는 것도 아니오
이야기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나 성질이 본래 청탁을 가릴 줄을 모르고, 웬일인
지 여관에 들면 불목지기가 “나, 선생님 좋아요" 하고, 목욕탕 가면 옷지기가
“나, 할아버지 잘 알아요” 하고, 길가에 지나가노라면 코흘리개들도 “할아버
지, 할아버지” 하고 따라오니 이만하면 어디 가서라도 못 섞일 데가 없을 것이
다. 그러니 이것은 드러내놓고 하는 암행이다. 팔도강산을 돌아보자. 그렇다, 이
것은 돌아보는 걸음이다. 첫째, 오던 길 돌아봄이다. 자기반성이다. 가는 것이 중
요하되 가기만 하고 돌아볼 줄 모르면 헤매기 쉽지 않은가? 때로 때로 오던 길
을 돌아보아야 그 어디까지 왔으며 방향이 어찌 되고 제 선 자리가 어디임을 알
수 있다. 삶은 길 감이요 역사도 길 김이다. 그러기에 도라 하고 진보라 하지 않
던가?
p 405
인생과 역사에는 늘 반성이 있어야 한다. 정치는 가만두기만 해도 못쓰고 내
몰기만 해도 못쓴다. 가만두면 썩어지고 내몰기만 하면 짐승 된다. 5 . 16 이후
의 정치는 확실히 민중을 생각할 겨를없이 내몰자는 정치 아닌가? 그러다가는
짐승에 떨어지고 만다. 몰리다 몰리다 보면, 짐을 싣다, 수레를 끌다, 그러다가
도살장으로 가는 것밖에 없을 것이다. 인간성을 인정할 때 순종은 덕이 되지 그
렇지 않을 때는 순종은 도리어 죽음 가져오는 죄악이다. 채찍을 맞고 멍에를 불
지르면서라도 서서 돌아볼 필요가 있다. 민중으로서의 자기발검을 하자는 말이
다. 한일조약이 나라를 그르치는 조약인 줄 알면서도 왜 그것을 막지 못했나?
민중이 스스로 깨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인정이 있고 이성이 있고 도덕이
있으나 그것만으로 역사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역사는 반드시 역사적 민중으로
서의 자각이 있어야 한다. 소에게 힘이 있되 자기 의식이 없으면 그 힘이 도리
어 저를 죽을 데로 이끌어간다. 소가 만일 제 코에 꿰인 것이 무엇이요 제 목에
철린 줄이 무엇이요 제 뒤에 섰는 사람이 무엇을 하는지를 알았을진대 도살장으
로 들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람이 집을 이루고 직업을 갖고 자녀를 낳고 교
육을 하나 그런 줄만 알고 그 교육이 무엇을 목적하는 교육이며 그 정치가 어떤
노선을 걷는 젓임을 모르면 제 발로 걸어 죽을 데로 가는 소와 무엇이 다른가?
지배자의 시키는 대로 국민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참 국민이 아니라, 그것이 도
대체 무엇을 뜻하고 어디를 지향하는 것임을 알아서만 참 국민이 될 수 있다.
둘째, 이것은 방방곡곡을 돌아봄이다. 앞만 보지 말고 뒤만 보지말고 사방을 돌
아봄이다. 팔도를 다 봄이다. 전체를 돌아봄이다. 전체의식을 가지도록 하잔 말
이다. 지혜가 어디 있고 도덕이 어디 있나? 전체에 있다. 이것은 대중의 시대다.
‘매스’의 시대, ‘매스콤'의 시대다. 생각하는 사람이라지만 그 사람은 이제
개인이 아니고 덩어리로 된 사람이다. 대중의식이다. 의식 주체로서의 대중이 깨
어서만
p 406
역사는 나갈 수 있다. 이 의미에서 현대는 질적으로 달라지기 시작한 인간이
다. 후진국이니 근대화니 하는 말을 하지만 후진의 원인은 다른 데 있지 않고
대중의식, 덩어리 생각의 떨어진 데 있는 것이요, 근대화의 요점은 다른 것 아니
고 결국 전체로서 생각하게 하는 조직과 훈련에 있다 할 것이다. 이 점에서 우
리는 정말 떨어지고 있다. 얼마나 많은 지식인이 납은 개인주의적인 인생관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도덕가가 옛날의 제자리 걸음을 시키고 잘못
된 데로 이끌려 하고 있나? 이것이 우리 사회의 어지러움의 근본 원인 아닐까?
민중으로 하여금 한 덩어리로 생각하게 해야 한다. 생각하여 보라. 해방 이후 역
사가 이렇게 어려워진 것은 5 . 16 군사정변에서부터인데 군사정변이란 무엇인
가? 정치에 아무 경험도 없고 사상의 각별한 훈련도 없는 한줌 되는 군인이 어
떻게 정권을 빼앗는 데 성공했을까? 대체 아무 소양 없는 단순한 군인이 감히
그런 엄두를 벌 수 있었다는 것이 무엇인가? 소위 선진국이라는 나라에 그런 일
이 있을 수 있을까? 될 수 없는 일이다. 왜 그런가? 그 나라들은 틀이 잡힌 나
라다. 그러므로 설혹 야심의 망상을 하는 것들이 있다 하여도 안정되어 있는 사
회임을 알기 때문에 감히 그런 엄두를 내지 못한다. 안정됐다, 틀이 잡혔다는 것
은 무엇인가? 결국 국민의 생각이 비교적 잘 통일되어 있다는 말 아닌가? 그 나
라에도 정치적 문제도 있고 개조를 필요로 하는 일도있지만, 감히 단순한 군인,
곧 다시 말해서 폭력밖에 가진 힘이 없는 사람들이 감히 나설 생각을 못하는 것
은 그 사회의 통일된 의식은 자기네의 폭력만 가지고 깨치기에는 너무 강한 줄
을 잘 알기 때문 아닌가? 그렇다면 뒤집어서 우리나라에서 정치에 문제가 있을
때 다른 사람은 아무도 감히 나설 생각을 못하고 군인만이 했다는 것은 우리 사
회에는 군인이 가지고 있는 조직밖에는 그 사회의 살 못된 세력을 깨칠 만한 힘
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대중의 통일된 의식이 없단 말이다.
p 407
조국암행기 407 단순한 생각을 가지는 군인이 감히 정치에 간섭할 기회를 준
것이다. 그러나 군인, 다시 말해서 폭력으로 나라를 바로잡으려는 것은 설혹 그
동기가 의협심에서 나왔다 가정하더라도 그 한 일은 역사를 바로잡지 못하고 도
리어 더 그르치는 일이 된다. 왜냐하면 그전에 있던 악도 결국은 폭력주의에 지
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이것을 혁명이라 인정하지 않고 정변
이라 폭동이라 하는 까닭이 거기 있다. 피로 피를 씻으면 더 진해질 뿐이다. 아
무 여론의 뒷받침이 없이 단순히 우승한 폭력만을 믿고 나오면 구악의 세력으로
하여금 너는 뭐냐 하는 생각에 도리어 자가의 악행을 변호하고 정당화하는 기회
만을 준다, 이것은 결코 이론이 아니고 사실이다. 군사정권 이후 정계가 더 타락
하고 어지럽고 정권싸움이 더 노골적으로 되고 한동안 목을 움츠리고 떨-17 있
던 자유당의 잔당으로 하여금 감히 큰 얼굴을 하고 대보 활보 당당히 나오게 만
들어주지 않았나? 그뿐인가, 사실상 합작하고 있지 않나? 이것은 다 민중이 죽
은 것으로 알기 때문에 백주에 나온 귀신들의 작폐다. 귀신은 사람이 깨면 도망
치게 마련이다. 팔도강산을 돌아보잔 것은 민중을 동원시키기 위해서다. 무엇으
로 민중동원이 되나? 민중이 대중이 되나? 무리가 덩어리가 되나? “매스콤'으
로다. 민중이 서로 교통함으로다. 신문이 있고 라디오가 있지 않느냐 하겠지만
대적에게 점령이 된 통신망은 '매스콤’을 깨치고 분리시킬 뿐이다. 정거장에 기
차칸에 방송은 무엇을 말하나 자세히 생각하며 들어야 한다. 이러므로 암행어사
는 필요하다. 셋째, 이것은 죽게 된 젓을 돌아보아줌이다, 강산은 여전한 듯하지
만 사람은 죽었다. 사람은 살았지만 정신은 죽었다. 그리고 사람은 정신이 살았
어야 사람 아닌가? 그럼 사람이 죽게 됐는데 아우도 돌아보지 않으면 되겠는가?
인정은 인정에서만 살아나고 동정은 동 정으로만 불러일으킬 수 있다.
p 408
그 죽은 상태가 어떠한 것을 아는가? 학생들이 데모 하고 군인 . 경관이 악착
같이 때리고 짓밟았다. 그러는 것을 3천만 인간이 보면서도 가만 두었다. 이것이
사람 살아 있는 사회인가? 공정한 판단을 할 때 학생들의 데모를 어찌 망동이라
할 수 있을까? 또 설혹 망동이라 가정을 하자, 그 책임을 누가 져야 할까? 사람
들은 본래 그러기로 결심하고 나선 사람이니 말할 필요도 없지만. 후생을 가르
치고 이끌고 가는 교육가 종교가 중에 누구 하나 그것은 내 책임이라고 지고 나
섰던 사람이 있었나? 없었다. 마음으로는 있었는지 모르나(많이 있었을 줄 믿는
다) 그러나 적어도 실지로 나선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나서지 않고는 역사는 없
다. 씨앗 하나도 껍질을 터치고 나서지 않고는 남이 없는데 하물며 도덕적 정신
적인 인간에서일까? 부끄러운 일이지만 우리에게 없었다, 또 그 책임은 못 졌다
하더라도. 그 행동이 옳은 것이 못되고 잘못된 젓이라 할수록 그 때문에 맞고
넘어지고 깨지고 거꾸러진 것을 볼 때 사람의 마음이 있다면, 그 당한 희생자를
위해서라도, 더구나 격분하여 도를 넘은 군인 . 경관의 인간성을 위해서라도 그
것을 중지시키도록 힘을 썼어야 할 것이다. 하필 야당 사람을 바라볼 필요 없다.
평상시에 분업이요 각기 책임이지 비상시에는 분업 없다. 전원이 총출동하여 불
끄고 물 막아야 하는 모양으로 이런 비상시에는 정치가만 바라보고 있을 것이
아니오, 나라의 운명이 관계되고 민중의 정신이 위태하다 할 때는 누구나 자기
일로 나서야 할 것이다. 그런데 학생이 그렇게 참혹한 변을 당하는 것을 보고
민중은 움직이었던가? 없었다. 학생만이 이중으로 희생이 됐다. 자라나 는 후대
가 희생이 되는 것을 뻔히 보고 섰는 민중, 그것이 산 민중일까? 또 생각해볼
까? 가는 곳마다 그 ‘올해는 일하는 해’ 소리에 구역질 나서 견딜 수 없다.
물론 국민은 노래가 있어야지. 하지만 참을 노래해야지 어찌 거짓을 노래해서
나라가 될까? 1965년 저물어가니 그 노래 아니 듣게 되어 시원하다. 그 마음 그
정책이 그대로 있는
p 409
이상 새해 되면 그보다 더 구역질 나는 노래 또 만들어낼지 모르지만 우선 그
것은 그만둘 터이니 시원하다. 일이 무슨 일인가? 일년 두고 한 일이 무엇인가?
논 갈고 밭 갈고 고기 잡고 석탄 캤지만 얻은 것은 무엇인가? 생활고뿐 아닌가?
그리고 그것이 노래 잘 부르지 않아서인가? 그보다 일년 동안에 한 일이라고는
평화선 팔아먹은 일, 수산자원 빼앗겨버린 일, 조상의 피땀의 결정인 문화재 내
팽개친 일, 이것이야말로 국민적인 일 아닌가? 일하는 해가 아니고 잃은 해였다.
그런데 입으로는 그 노래를 신이 난 듯 부른다. 정말 신이 났나? 정말 났다면
미친 것이요 아니 난 것을 난 척했다면 바보다. 어차피 정신은 죽은 민중 아닌
가? 그 죽은 민중을 돌아보잔 말이다. 죽었다 했지만 정말은 죽은 것이 아니오.
자는 것이요, 잃어버린 것이다. 정말 죽었다면 돌아보아도 소용이 없다. 그러나
생명은 죽지 않는 것이다. 정신은 불사체다. 죽을래도 죽을 수 없는 것이 정신이
다. 잃어버렸다 했지만 잃어버린 것도 아니다. 잃어버릴래도 잃어질 데가 없다.
나 자신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로 말하 연 잊어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찾으면 된다. 팔도강산을 돌아보잔 것은 그 잊은 것을 깨우치기 위해서다. 구하
라, 그러면 얻을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만날 것이다. 반드시 얻고 반드시 만날
것이다. 그것은 그 찾는 것이 나 자신 속에 있고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자, 그
럼 이제 새해부터 이 자는 민중, 이 흩어진 씨알, 이 않는 대중을 돌아보고 돌아
보아 깨우고 가르쳐주고 일으켜 하나로 묶어보자. 맥이 통하도록 해보자. 민중의
눈알아 굴리라 굴리라, 굴릴수록 커지고 딴딴해지고 힘이 나, 바위라도 닥치는
대로 부술 거다. 팔도강산을 가만가만 살살 돌아보자. (1966)
p 410
남한산성 역사의 옛터, 옛사람 1968년 6월 2일, 예배를 마치고 나서, 오후에
내 그림자와 대화를 해가면서 병자호란의 옛터인 남한산성에 오르기로 했습니
다. 해가 서산에 기웃한 다음 쓰라렸던 역사의 옛 자취를 찾아보는 것이 어쩐지
자신의 생애의 그림인 것도 같았습니다. 관광버스를 타러 세종로로 가면서 생각
했습니다. 5월이 다 지나 가고 이제 6월이로구나, 5월 지나가니 시원하다. 꽃 피
는 5월에 무슨 죄가 있으리마는 곳곳에 써붙인 ‘5.16혁명기념'이란 글귀 보면 '
오월비상'이라는 말이 연상되어 나빴는데, 그것 아니 보게 되니 좋지 않은가, 했
습니다. 사실 4 . 19 다음에 5 . 16이 온 것을 생각하면 마치 피던 꽃에 강서리
를 친 것 같은 느낌이 납니다. 지난 4.19날도 수유리 기념탑에 갔다가 학생들을
만났더니, 그 먼저 묻는 말이 “왜 금년엔 '4.19의 날'이라고 써 붙였는지 아십
니까? 선생님 소감은 어떻습니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나는 별 이상한
생각 없다. 그것을 이상히 생각하는 것은 너희의 지나친 신경과민이 아니냐?”
하고 대답을 했지만, 이제 와 생각하면 역시 그들이 옳았습니다. 4.19를 4.19의
날이라 불렀으면 5.l6도 5.16
p 411
의 날이라 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혁명이라는 말을 천하가 다 인정하는
4 ' 19에서는 일부러 떼버리고 5 . 16에 다만 커다랗게 붙인 것은 마치 “우린
떡 아니 해먹었어요” 하는 듯 더욱더 냄새가 납니다. 젊은 마음은 역시 날카로
웠습니다. 후생이 가외입니다. 그래 그런지, 5 . 16 때문에 첫머리에서부터 틀리
게 보아서 그런지, 세종로 네거리에 요새 세운 충무공의 상을 보아도 좋은 느낌
이 들지 않았습니다. 내 마음이 비뚤어져서 나오는 잘못된 생각이 아니냐, 반성
도 해보았습니다마는 그렇다고 하고 짚지도 않았습니다, 제일에 크기가 너무 지
나치게 크고 또 그 자리도 적당치 않습니다. 친근하게 존경하고 싶은 생각은 나
지 않고 위압을 당하는 것 같은 느낌만 강합니다. 그저 크기만 하면 자랑이 아
닙니다. 맨 복판이면대접이 아닙니다. 아름다움은 전체에 있습니다. 저 설 자리
에 서야 하고 제 무게를 모자라지도 않게 지나치지도 않게 가져야 합니다. 대들
보는 위에 있어야 하지만 주추는 밑에 있어야 합니다. 기둥이 모퉁이에 서자 않
고 어간에 들어와서는 방안이 있을 수 없고 문살이 가늘지 않고 지나치게 굶으
면 햇빛이 들어올 수 없습니다. 엄자룡을 궁중으로 부르면 대접이 아닙니다. 광
무제는 친구라는 생각에 했겠지만, 도를 같이 담다가 채찍을 들 마음이 났으면
그때 벌써 친구 자격은 잃은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개선을 축하하는 만세소
리에 취해 임금 될 생각을 했으면 착각을 한 것입니다. 저는 위대해지자는 생각
에 그랬겠지만 군인임을 잊고 남의 자리를 탐내 커지려 할 때 이미 길은 세인트
헬레 나로 놓이기 시작했습니다. 6 . 25 이후 나라 형편이 어려우므로 그러는 것
도 무리가 아니라면 아니라 할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군인이 일마다에서 판을
치고 기회를 자주 만들어 군사열을 고취하고 무력숭배를 일으키려 하는 것은 나
라를 위해 한심한 일입니다. 한해 어떻게 되어 열매가 아무리 많이 달렸다 하더
라도 그 가지만을
p 412
두고 다른 가지를 모두 잘라버리면 나무는 옳게 자라지 못하고 결국 죽게 됩
니다. 나무 전체의 균형을 보아 주지, 곁가지를 고르게두고 너무 지나치게 열었
으면 따버리기까지 해서 긴 생각을 해야 길이길이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군
인은 아무리 위대해도 결코 나라의 주간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민중의 공론에
의하여 되는 젓이 없이, 도깨비처럼 어둠 속에서 쑥 나왔다가 훌쩍 사라지는 세
상이므로 누구의 의견으로 어찌 돼서 되는 일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근래에 충무
공을 지나치게 내세우는데는 확실히 불쾌할 정도의 우상숭배의 심리가 들어 있
는 것이 들여다보입니다. 충무공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그의 정신을 오는 세대속
에 살리자는 것보다는 그를 팔아서 군인숭배를 시키자는 심산이 들어 있습니다.
그 증거의 하나로 들 수 있는 것은 임경업 장군에대한 태도입니다. 나라의 운명
이 달렸던 큰일인 점으로 하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다를 것이 없고, 그 덕과
공에서 하면 충무와 충민이 서로 더하고 덜 할 것이 없는데, 충무를 그렇게 찬
양하는 사람들이 충민은 별로 말하지 않고 버려둡니다. 그 이유는 아마 다른 것
없고, 한 분은 나타나 보이는 빛나는 공이 있는데 한 분은 분하게 실패한 장군
으로 끝마쳤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덕이나 공은 결코 그 성공 실패에 있지
않습니다. 때로는 정말 높은 정신은 도리어 패군지장에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팔아먹는 데는 역시 눈에 띄는 결과가 있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충무
를 찬양하면서도 충민을 버려두는 것 아닐까? 그 이용 가치를 노린 것입니다.
두 분을 위해 다 슬픈 일입니다. 두 분은 다 거듭 순국한 것입니다. 한 번은 몸
이 죽었지만 지금은 정신이 죽음을 당하고 있습니다. 충무를 정말 숭배할진대,
몸소 일선에서 총탄에 쓰러지는 그 정신을 그대로 따랐어야 할 것입니다. 부귀
를 다 마음대로 누리면서 찬양이 무슨 찬양입니까?
p 413
주고받는 잡담이 귓결에 들렸습니다. “너 저거 뭔지 알아?" “뭐야, 충무공
상이지.” “아니야,” “그럼 너 말해봐." “저거 청와대 문지기야, 무섭지!”
어린 후손을 위압하자는 충무공은 아니었을 터인데, 왕양명 의 "노회"라는 시의
글귀가 생각났습니다. 노회사생고역방 객래계마해의상 탁근비소환련이 직간불요
종이상 아무리 당당한, 구름을 스칠 수 있는 나무라도 그 서는 자리를 잘못 만
나면 딸 대접을 받게 됩니다. 말을 가져다 매고 옷을 벗어 거는 듯한 억울한, 시
끄러운 대접을 받게 되는 충무를 위해 분한 생각을 가지면서 관광버스 회사에를
들어갔습니다. 가서 보니 요새는 남한산성 가는 버스는 없다는 것입니다. 까닭을
물었더니 손님이별로 없어서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그것도 이상했습니다. 그
렇게 많은 구경꾼에 역사의 옛 자취, 더구나 나라의 운명이 하마 끊 어졌다 이
어진 이 자리를 찾아가는 사람이 적다, 그럼 다들 어디로 놀러가나? 정말 놀러
만 가는 것인가? 가뭄이 심하면 험한 골짜기를 찾아 들어야 할 것 아닙니까? 지
혜를 얻으려면 무식한 사람을 찾아가야 할 것 아닙니까? 큰 냇물에 가서 될 것
이라면 가뭄이랄 것이 없습니다. 학식 있는 사람에게서
p 414
들을 수 있는 것이라면 이날껏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역사가 험한 고비에 가
고, 속에 기운이 지친 때거든 지나간 날의 어려웠던 역사의 고비를 다시 찾아보
아야 할 것입니다. 생각이 나야 막힌 데를 뚫고 나갈 수가 있고, 보아야 생각이
나옵니다. 옛 자취는 그래서 찾는 것입니다. 국파산하재 성춘초목심이라고. 두보
는 울지만 나라는 망하고 산과 물만 남았다는 것 아닙니다. 전생 나서 만호장안
이던 서울이 쑥밭이 됐다는 것 아닙니다. 거기까지 갈 져를 이 없습니다. 적병이
눈에 뵈고 칼소리가 귀에 들리기 전에. 산이 산으로 뵈고 물이 물로만 꾀며 풀
과 나무가 풀과 나무로만 만져지 게 될 때 나라는 벌써 없습니다. 나라는 산 하
나입니다. 역사는 숨쉬는 것입니다. 가를 수 없이 하나요 산 것이 나라요 역사입
니다. 땅과 사람과 주권이 합해서 나라가 된 것이 아닙니다. 나라가 깨져서 땅으
로 사람으로 주권으로 갈라지는 것입니다. 나라 내놓고 산과 물이 따로 있을 수
없고 나 내놓고 풀과 나무가 혼자 자랄 수 있는 것 아닙니다. 전쟁이 나서 나라
가 깨지는 것이 아니라 나라가 깨졌으므로 난리가 나는 것입니다. 생각하여 보
십시오. 씨 뿌리고 거두는 농사꾼에게 산천초목이 따로 있습니까? 시 읊고 그림
그리는 예술가에게 거기 서 있는 자연이란 것이 따로 있겠습니까? 산 살림이 있
을 뿐입니다. 과학자에게 있어서까지도 역사를 빼어놓은 자연은 있을 수 없 습
니다. 그래서 관광버스는 못 타게 됐으니 불편이람 불편하게 됐으나, 그 대신 구
경꾼에 섞여 놀러가지는 못하게 됐습니다. 시내버스로 천 호동을 나가서 거기서
여주.이천행 버스를 타고, 광지원에 내려서 거기서 다시 산성행 버스를 타기로
했습니다. 승객은 모두 구경꾼이 아니고 생활전선의 일선에서 싸우는 생활전사
그야말로 참 군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살고 살리자는 군인입니다. 거기 비하면
소위 국방 맡았다는 군인은 죽이고 죽는 가마 군인입니다. 이제 그들은
p 415
오늘의 군인인 대신에 나는 300년 전 병자호란 싸움을 싸우는 옛 군인입니다.
그들과 마주 앉으니 이제야 옛날이 대화 아닌 대화를 하며 가는 것이 있습니다.
차 속에 앉아 생각을 하는 것인가? 생각속에 담움질을 하는 것인가, 내가 역사
를 들여다보는 것인가? 역사가 나를 응시하는 것인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생각,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처럼 이상하고 그처럼 재미있는 것은 없습니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글을 쓴 지 꼭 10년이 됩니다. 생각해서 쓰노라
했지만, 그야말로 생각 없이 썼다가, 생각 더 깊이 하라고 인생대학으로 보내 스
무 날 퇴수 를 하고 나왔습니다만 그런 자가 10년이 되는 오늘엔 알았느냐 하
면. 역시 생각이 모자랍니다. 그동안도 줄곧 생각을 하리라 했지만 역시 채 못하
는 것은 생각입니다. 아닙니다. 생각은 언제나 시작뿐입니다. 문지방 앞에 서는
것이 생각입니다. 생각은 시작이요 생각은 나중입니다. 내가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생각이란 것이 없습니다. 하고 나면 내 것이 아니고 나를 그 속에
빠치는 것이 생각입니다. 생각하므로 살았지만 또 생각으로 죽습니다. 생각이야
말로 격전입니다. 누구와 무엇 때문에 싸우는지도 모르는 싸움입니다. 자랑 끝에
불난다지만 생각 끝에 싸움입니다. 아닙니다. 싸우면 생각하게 됩니다. 요새 대
낮에 잠꼬대가 붙습니다. 우리는 “싸우면서 건설한다” 합니다마는 그것은 무
의미한 말입니다. 괴테의 말대로 개념이 없는 곳에 바른 말이 쑥 들어간 것입니
다. 그것은 거짓말이지만 싸움으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중국 문
화는 전국시대에서 나왔고 유럽의 오늘은 종교전쟁에서 나왔습니다. 나는 생각
을 해보자고 남한산성에를 갑니다. 아닙니다. 내 생각이란 없습니다, 내가 생각
을 하는 것 아니라, 생각이 나를 낳았습니다. 붙잡습니다. 죽이고 또 살려냅니다.
생각은 부활입니다. 불사조입니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했는데, 이 백성은
생각을 했습니까?
p 416
아니했습니까? 4.19는 생각입니까? 그렇습니다. 분명 생각입니다. 살았습니다.
그럼 5.16 그것도 생각입니까? 군인은 생각을 죽여버려야만 될 수 있습니다. 생
각을 해보면 우리만이 아닙니다. 월남전쟁을 하고 징을 죽이고 케네디 형제를
죽이는 미국 국민도 생각을 한다면, 참 무섭게 하는 국민입니다. 죽은 로버트의
골 속에서 무엇이 나오겠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마다 만나면 하는 인사가 “요
새는 글 아니 쓰십니까?”에서 “더 쓰셔요, 더 오래 사셔요" 하는 말이지만 그
사람들은 생각을 해서 하는 말일까? 생각 없이 하는 말일까? 누구와 싸우란 말
입니까? 누구를 죽이란 말입니까? 눈은 건너편에 앉은 아저씨를 바라보면서 마
음은 내 그림자와 이렇게 대화를 하는 동안 버스가 광지원에 왔습니다. 있다던
산성행 버스는 없습니다. 또 고쳐 생각을 해야 하게 됐습니다. 새 싸움이 벌어집
니다. 성을 팔아넘기고 구차한 목숨 하나를 건지자고 허방지 방 한강을 건너 남
한산성으로 달려가던 인조와 그 밑을 따르는 벼슬아치들이 울며불며 가던 길을,
나도 가야 합니다. 해는 벌써 서산에 넘어가고 어둠이 내리는 초여름 골짜기를
개구리떼의 군악을 들으며 나는 이젠 뵈지도 않는 내 그림자와 손을 잡고 걸어
갑니다. 역사의 주인은 이름없는 민중 음력 5월 초이레 달이 공줌에 떴습니다.
지금을 제 철로 피는 찔레꽃의 질은 향기가 품속으로 스며듭니다. 때때로 길가
초막 호롱불밑에서 웃는 웃음소리가 들려옵니다. 300년 전 있었던 피어린 그 비
극은 있었던 것 같지도 않습니다. 땅에는 평화요 하늘에는 영광입니다, 하지만
내 가슴속에는 말소리와 칼소리와 사람의 울부짖음이 들렸습니다. 문득 골짜기
마다 나무숲마다에서 청태종의 군사가 달려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모가지 잃은
귀신이 제각기 아우성을 치는
p 417
것 같았습니다. 여자의 울음, 아이들의 부르짖음, 늙은이의 통곡이 뒤를 이었
습니다. 그러고 보면 저 나무란 나무, 풀이란 풀이 다 치솟아 오르는 피 같았습
니다. 걸었는지 달렸는지 걸음은 발에 맡기고 생각은 5천 년 역사의 물결 속을
쨌다 가라앉았다 하는 동안 20리 길이 다 되고 산성에 들어가서 찾노라 찾은 여
관이 이름도 백제장 인데, 가서, 산목련이 소복한 미인처럼 고개를 수그린 문간
에 선 때는, 이미 아홉시가 지났었습니다. 복잡할 줄 알았던 여관에 손님은 하나
도 없고 옛 전장다운 고요속에 하룻밤을 지내게 된 것은 쓸쓸하면서도 다행이었
습니다. 몸을 씻고 산나물로 시장기를 멈춘 후에 산성 안은 밝은 아침에 돌기로
하고 자려고 자리에 누우니, 형영이 서로 돌아보는 것이었습니다. 역시 싸움은
힘들고 싸움보다도 더한, 생각하기는 더 힘드는 것이었습니다. 몸은 평안을 구하
는 것이었습니다. 문득 날카로운 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귀를 기울였습니다.
소쩍새 아닙니까? 소쩍새라 들으면 소쩍이고 접동이라 들으면 접동입니 다. 불
여귀라는 저 새. 옛사람의 노래를 불러보았습니다. 공산이 적막한데 슬피 우는
저 두견은 촉국흥망이 어제 오늘 아니어늘 지금에 피나게 울어 남의 애를 끊는
고. 단종의 자규시도 읊어보았습니다. 저렇게 우는 것은 누구일까? 새가 아닙니
다, 여기서 원통한 모욕을 당하던 인조일까? 아닙니다. 먹을 것이 다 되고 힘이
다 되고 꾀도 다 되고 다 되어 40일을 버티던 마지막 끝에 할 수 없이 문을 열
고 나가 항복을 하려는 마당에 그래도 마지막 정신을 가다듬어보려 애를 썼던
사람을 내 손으로 잡아 원수에게로 보내던 그, 그때에 단 한 사람으로 났던 임
장군을, 억울한 줄을 뻔히 알면서도 권신들의 하는 일에 못견디어 난장에 맞아
죽게 두던, 그 겁쟁이,
p 418
그, 그 약한 그가 울 리가 없습니다. 그럼 그때에 모든 정처의 책임을 졌던 최
명길인가? 그 밖의 만조백관이라는 것들인가? 아닙니다. 그것들은 다 역사의 흐
름 위에 떴던 거품이지 역사의 주인이 아닙니다. 우는 이가 있다면, 살아 있는
흔이 있다면 그것은 민중입니다. 이름도 없이 풀처럼 났다 풀처럼 버힘을 당하
는, 그러면서도 또 나는 민중입니다. 이 앞으로도 역사를 맡아야 하는 민중입니
다. 어린 시절에 역사를 배울 때 인조가 오랑캐라고 멸시해왔던 청태 종 앞에
무릎으로 기어나가, 세 번 절해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조아리는 그 예를 하여 항
복을 했다는 말을 듣고 분을 참지 못해 하던 것을 기억하지만 이제는 그런 생각
아니합니다. 소위 정치한다는 것 들에게 이 이상 속지 않으렵니다. 욕을 본 것이
있다면 민중이요 원통한 이가 있다면 이 민중입니다. 나라의 주인공이면서도 짐
승 대접을 받고 어려운 때가 오면 아낌없이 팔아넘김을 당하던 민중이야말로 비
통한 역사의 주인공입니다. 항복했다, 업신여김을 당했다 하지만 그런 것도 아닙
니다. 민중은 저를 판 일도 없고 짐승처럼 긴 일도 없습니다. 죽이면 죽고 버리
면 버림을 당하면서도 차마 자기를 버리지 못하는 무명의 민중이 그대로 있었으
므로 홍수 같은 그 전쟁이 지나간즉 다시 삶이 피어날 수 있었습니다. 다시 나
라를 할 수 있고 한국이라는 문화를 낳을 수 있었던 것은 정치가가 썩어지고 비
겁한 반면에 민중은 겸손히 끈질기게 용감하게 그냥 살아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
다. 청태종이 강하고 영웅이어서 패배를 했던 것은 아닙니다. 나라의 주인공 민
중을 버렸기 때문에 민중에게 버림을 당하고 약해졌던 것입니다, 아침에 수어장
대에 올라갔습니다. 산성 안이 빤히 내려다보였습니 다. 이제 슬픈 역사의 자취
는 어젯밤의 꿈처럼 볼 수 없고 눈에 가득한 것은 푸른 생명의 물결뿐이었습니
다. 저기가 서울인가, 저기가 송파요 삼전도인가? 청태종은 지금 어디 가고 만주
족은 어디로 갔
p 419
는가? 당년에 아우성을 지르며 달려들던 만주군의 뼈와 살이 다시 피어난 것
이 저 어린 솔들인가? 역사는 거룩하고 생명은 거룩합니다. 당년에 서로 목을
찌르던 원수도 이제 긴 역사의 빛에 비추이면 저 나란히 서는 소나무 . 떡갈나
무 모양으로 새 시대의 한 역사를 메고 대화를 하면서 나갑니다. 산을 내려오자
니 아침 이슬이 옷을 적셨습니다. 저 밭에는 옛날에 무수한 군인이 죽어 묻히지
않았을까? 제때를 만난 함박꽃이 흐들흐들 피어 웃었습니다. 그 한 밝은 마음이
야말로 민중의 마음입니다, 떠나려는 순간에 최 전도사가 그 합 박꽃을 한 아름
가져다주었습니다. 역사의 오는 시대는 이렇다는 말인가, 생각을 하면서 돌아오
는 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1968)
p 420
행주산성 행주산성 가는 길 행주산성을 가느라 그 길을 물어도 똑똑히 아는
사람이 별로 없 었습니다. 행주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았는데, 그것이 임
진왜란 때 3대첩의 하나인 큰 싸움이 있었던 곳이요, 도원수(iRW) 권율이 그것
을 지휘했고 '행주치마'의 유래가 거기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 것 같은데,
이제 정작 거기를 가보겠다고, 어디 가서 무슨 차를 타고 어떻게 가느냐 물으니,
하나도 자신 있는 대답을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신문사 사람도, 잡지사 사람
도, 유명한 관광버스 회사 사람도,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역사를 가르친다는 사람
조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는 것은 입에서 귀로 귀에서 입으로 돌아다니는 이
야기의 행주와 행주치마지, 실지 땅에 돋아 있고 역사에 뿌리박고 있어 살아 있
는 행주산성이 아니었습니다. 그럼, 지식이란 다 그런 것 아닐까요? 안다는 것은
결국은 이야기 속에 사는 것 아닐까요? 역사 지식은 더구나 더 그럴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 세상이란 물 위의 마름처럼, 바람 속의 하루살이처럼 떠돌아가
는 이야기의 물결 위에 떠서 돌아가는 살림입니다. 지식은 힘이라는 말이 있습
니다마는 힘이라고 다 같고 다 좋은 것 아닙
p 421
니다. 능동이냐 피동이냐가 문제입니다. 움직이는 거냐, 움직임을 받는 거냐?
움직임을 받아서 움직이는 것은 힘있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움직여야 참 힘
이 있는 것입니다. 행주산성 가는 길을 분명히 말해줄 사람은 몸소 행주산성에
를 올라갔던 사람이 아니고는 될 수 없습니다. 그것도 여러 해 전이 아니고 요
새에 올라갔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는 세상인데! 아닙니다. 정말
똑똑히 확신을 가지고 말해줄 사람은 행주산성에 사는 사람뿐입니다. 그 사람을
만나야 하는데 그 사람을 만나기가 쉬울 리가 없습니다. 물결에서 물결로, 물결
을 차 헤치면서 나가 서만 헤엄질이 될 수 있듯이, 들은 말에서 또 새 말로 말
을 버리면서 보다 확실한 말로 찾아다녀야 했습니다. 그렇게 하기를 며칠 한 후
에 비로소 서울역에서 경의선 차를 타고 능곡역에 내리면 거기서 산성이 불과 2
킬로미터인데 차에서 내려서 눈을 들면 거기 산성이 물을 것 없이 환히 보인다
는 지식에까지 이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럼, 이날까지는 이야기의 행주로 아무
부족이 없이 해올 수 있었던 내가 왜 기어이 산성을 내 발로 디뎌보기 전에 마
지않는다는 것입니까? 움직이기 위해서입니다. 무엇을 움직이란 말입니까? 이
역사의 수레바퀴를 말입니다. 지금 이 수레바퀴가 진흙탕에 빠졌습니다. 말에다
채찍을 더해도 더해도 말이 힘을 쓰지 못합니다. 부득이 탔던 내가 자리에서 내
려와 바퀴살에 어깨를 대고 밀어주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지 않는 한 이 수레
는 사람째 말째 실은 보물째 이 속에 빠져들어 한가지로 다 망하는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 수렁은 밑을 모르는, 멍청하고만 있으면 점점 빠져드는 무관심의수
렁입니다. 그런데 그러려면 어디 벋디디고 기를 씀 수 있는 돌부리를 만나야 할
것입니다. 그 돌부리가 남한산성이요 행주산성입니다. 그것은 벌써 여러 백 년
전에 비슷했던 경우에 우리보다 전의사람들이 거기다 발을 벋디디고, 역사를 건
졌던 일이 있는 이름이 있는 바위이기 때문입니다.
p 422
자는 사람을 깨우려면 귓가에 대고 요란한 종을 울려야겠는데, 멍청한 국민을
움직여 역사의 싸움을 싸우게 하려면 지난날의 참혹하고 비참했던 싸움 이야기
를 해주어야겠는데, 그러려면 내가 그것을 겪어봤어야 하지! 나는 지금 그 이야
기의 지식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직접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본 후에 말을 하려고 행주싸움에 참여하려 나서는 것입니다.
누가 나라를 지키는 사람인가
남쪽에서 온 새는 앉아도 남쪽 가지에 앉고 북쪽에서 난 말은 북에서 오는 바
람소리만 들어도 소리를 질러 운다고, 경의선 열차를 타고 앉으니 버리고 쫓겨
온 압록강가 내 집 생각이 아니 날 수 없었고, 38선, 6, 25 생각을 다시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오늘이 6월 28일인 데서이겠습니까?
1947년 3월 17일 이른 새벽 38선을 기어넘어 희미한 첫 광선에 토성역을 발견
하던 때의 감격, 거기서 자유에의 첫 열차를 타고 이 서울에 와서 내리던 때의
가슴의 울렁거림! 그 자유의 나라가 이런 따위 부자유의 나라가 될 줄은 몰랐습
니다. 그 후 봄바람 가을비에 동서남북을 떠돌아 오늘까지 오면서도 뒤안의 늙
은 참배나무 서 있는 내 집을 잊을 수는 없었는데, 그 집이 있는 북쪽으로 가는
기차를 타는 것은 처음입니다.
북행! 이놈의 운명의 북행을 언제나 해보느냐? 왕건이 하려다 못했고 윤관이
벼르다가 겁쟁이놈들 올무에 빠져 못했고, 최영이 발은 내디뎌보았지만 못생긴
군인놈한테 다리를 들려 넘어지고 말았고, 애처로운 효종으로 하여금 청강에 비
듣는 소리에 쉬게 하고 분한 이완으로 하여금 달 속의 계수나무를 보고 울게 했
던 이놈의 역사적 과제, 내 잃은 옛집을 찾는 것은 어느 날일까?
6월 28일 바로 오늘이었습니다. 25일 전쟁이 터지던 날은 일요일
p 423
이어서 그때까지 정기적으로 하던 종교강화를 하려고 아침에 오류동에 들어오
다가 서울역에서 비로소 그 소식을 들었는데, 물론 듣고 놀랐지만 그리 이상하
지도 않았습니다. 이북에 있을 때부터 앞날 일을 말하게 되면 말마다 “피 흘려
야 됩니다”하던 그들 공산주의자의 말을 처음부터 들어왔던 터이고, 오자마자
군도부터 닦기 시작한 소련군의 짓을 보고 있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정부라는 것이 그렇게 준비가 없었던 줄은 몰랐습니다. 모르겠습니다. 혹
은 어떤 이들이 말하는 모양으로 미국 군부에서 그 정보를 다 알면서도 여론을
전쟁하는 데로 이끌기 위해 일부러 거기까지 이르도록, 내버려두어서 일을 만든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본의 진주만 폭격도 미국 군부가 모른 것 아니라 다
알고 있으면서도 내버려두어서 불집이 일어나도록 했다고 하는 세상인데 어떻게
합니까? 군이란 그런 것이요, 정치니 전쟁이니 하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속는
것은 민중뿐입니다.
그래 소식을 듣고 모임에 가서 『이사야』30장을 읽고 헤어지고, 이튿날 약속
했던 대로 연세대 기도회 시간에 가서 말을 하고 하루 쉬어 28일에 다시 할 예
정이었던 것을, 있는 동안에 형세가 차차 험악한 것을 알았기 때문에 중지하고
오류동으로 돌아와서 27일 밤 두시가 지나도록 라디오에만 귀를 기울이고 있었
습니다. 이제 생각하면 어리석었습니다. 테이프 레코드를 되풀이 돌리게 하고 저
희는 벌써 도망간 것을 모르고 정말 그 말대로 서울을 절대 버리지 않고 죽기로
지키는 줄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28일 아침이 되니 소식이 오는데 간밤에 서울
은 함락이 됐다는 것이고 정부는 벌써 남쪽으로 내뺐다는 것입니다.
이승만 정권만이겠습니까? 정치란 다 그런 것입니다. 말은 다 좋게 나라 일이
지만 정치하는 사람들이 결코 나라 생각 아니합니다. 정치하는 못된 사람들이
나라 일 해주려니 믿었다가는 큰일납니다. 나라 잃고 나 망합니다. 말이야 물론
공을 세우지만, 현란한 꽃일수록 씨가 없듯이 그것은 실속 없는 속이는 말뿐이
고, 속을 노골적으
p 424
로 말한다면 힘드는 일은 아니하고 남의 수고한 결과를 빼앗아 거들거리고 먹
고 마시고 입고 놀고 권세를 마음껏 휘둘러보자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백 가지
이론을 할 것 없이 이날까지 모든 민족의 역사는 민권의 투쟁의 역사요 자유의
역사입니다. 옛날같이 핏줄로되던 사회는 몰라도 적어도 이 기술문명 기업국가
에 있어서는 옛날 관념의 ‘나라를 위해서’라는 생각을 완전히 빼고 생각하지
않으면, 정치업자들한테 완전히 속고 맙니다.
그러고는 더구나 분한 것이 내빼기는 저희가 먼저 내빼고 전쟁이 끝나고 돌아
오면 피난하지 않았던 사람을 부역행위라 해서 욕하고 벌한 것입니다. 그것은
저의 비겁과 무식했던 것을 가리기 위해서 한 악독한 정책이었습니다. 그것이
정치적입니다.
참 의미에서 누가 정말 나라를 지켰습니까? 이 나라 땅을 갈아 그 흙으로 내
살을 만들고 그 바람으로 내 생각을 만들어내며, 죽은즉 다시 그 흙 그 물로 돌
아가며, 거기서 아들 딸을 낳고 사는 사람이 정말 나라를 지킨 것입니다. 한국적
인 생활이 있대도 그들에게 있고 한국적인 생각이 남아 있대도 그들 민중에 있
습니다. 자기네의 권력 유지에 필요하다 생각하면 언제든지 외국 군대를 끌어들
여도 좋고, 외국 정치업자와 흥정을 해도 좋고, 그 흥정의 결과 일부 민중을 팔
아넘겨도 좋고, 외국 장수와 민중에게 해로운 거래를 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
은 정치가입니다.
엄정한 의미에서 정치인에게 조국은 없습니다. 조국은 조상의 땅, 살림, 방, 말,
정신을 차마 못 버려 도망할 생각도 못하고 고생을 견디다가 죽어 그 받았던 것
을 도로 갚는 못난 민중에 있습니다. 나라일 한다면서, 나라의 주인인 민중을 업
신여기고 의심하여 너희는 나쁜 것을 먹고 입으면서 견디어라 하고 거리에 나온
즉 민중을 보기 싫어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고 겹겹이 무장하여 공포기분을 내
는 것이 무엇보다도 더 우리와는 이해가 서로 반대되는 사람들이요 우리의 대적
인 것을 스스로 외쳐 알려주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또 전쟁이 있어서는 아니됩니다. 통일하기 위
p 425
해 전쟁은 불가피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속이는 말입니다. 전쟁으로
통일 절대 아니됩니다. 전쟁을 말하는 목적은 “통일이 안되더라도 정권은 내가
쥐어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럴듯하게 접을 붙여 속이자는 말이지만 절대
속아서는 아니됩니다. 외국 세력에 끌려 마지못해 동포가 서로 싸우면서도 눈물
한 방울도 아니 떨어뜨리고 정말 ‘승리’를 했다고 자랑하며, 공로 훈장을 만
들어 서로 걸어주며 으스대는 것들, 그것을 밑천으로 정권을 쥐는 것들, 한번 쥔
다음에 민중의 불평이 아무리 있어도 외국의 힘을 빌어 만 년 집정을 하겠다는
것들이 결코 나라 생각 통일 생각 하는 사람들 아닙니다. 통일은, 배후에 어떤
세력이 있어 끌려서 대진을 하게 됐더라도, 서로 바라보는 순간, 너와 내가 그럴
사이가 아니었지, 네 손에 차라리 내가 죽더라도 내가 어찌 너를 죽일 수야 있
겠느냐 하는 마음이 다 같이 들지 않는 한 있을 수 없습니다.
이북에서 쳐내려온 자나 쳐들어간 자나 서로 제국주의에 또는 공산주의에 복
수한답시고 살인.강간을 맘대로 하는 그것들이야말로 나라의 도둑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전쟁이 무슨 명목으로나 절대 나서 아니되겠지만 설혹 불행하여 또 전쟁
이 나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이번에는 18년 전 모양으로 어리석게 그들을 믿고,
속아 행동할 마음이 없습니다. 내 노력한 것을 빼앗아가고 내 인격을 짓밟고 내
자유를 침해하며 못살게 구는 데는 무슨 좌우 적백의 구별이 있겠습니까?
행주산성에 올라보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에 차가 능곡에 닿았습니다. 정말 눈을 드니 행주
산성이 물을 것 없이 알아볼 수 있게 서 있습니다. 그러나 알고 싶은 것은 겉이
아니오 속입니다. 행주대첩의 자취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싸움의 산 모습을 보
고 싶었고 그 모습이 아니라 그 의미를 알고 싶었습니다.
p 426
아무래도 학교 선생님들이 가장 잘 아실 것 같아 국민학교를 찾아 들어가서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보다도 그 동리에 사시면서 권율 장군을 제사하는 행주
서원의 원장으로 계시는 서강영 선생을 소개해주시면서 그가 아주 자세한 것을
아시니 그리 찾아가라 했습니다. 그래서 바로 산 밑에 있는 그의 집으로 가서
물었더니 75세의 노인이신데도 아주 꼿꼿하고 앞서 길을 인도하여 산꼭대기까지
올라가면서 여러 가지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유감인 것은 자세한 것을 기록한
책자가 있어서 그것을 빌려주시겠다고 찾았으나 마침 쉽게 찾아지지 않아서 그
냥 듣고만 온 것입니다.
행주대첩의 원인은 첫째는 그 지리에 있는 것을 산꼭대기에 올라서면서 알았
습니다. 소위 행주산성이란 얼핏 보기에 요것이었던가 할이만큼 자그마한 산입
니다. 이름을 덕양산이라고 한다는데 산에서 옛날 백제시대의 기왓장 조각이 나
온다는 것을 보면 사람 사는 역사가 오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강가에 나가
서 마치 주먹을 불끈 쥐어서 내민 것같이 나앉은 산인데 높기는 그리 높지 않으
나 강가에서는 그 벼랑이 아주 험해서 옛날 싸움에 있어서는 지키는데 상당히
도움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뒷녘에는 지금도 내리라는 동리가 있고 서노
인 말에는 옛날에는 천 호가 넘은 때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남쪽 옆이
서원이 서 있는 곳인데 거기는 포구여서 옛날에는 대단히 번성했다 하고 지금은
그렇지 못하나 아직 행주 웅어잡이로 유명하고 웅어 생선을 먹으러 오는 손님을
상대하는 요정들이 몇 집 있었습니다.
산에 올라 보면 앞은 한강인데 그 강을 건너 건너편에 김포평야와 김포 개와
산이 서 있고, 그 뒤로 멀리 부평 안암산이 높이 서있는 것이 보이는데 그때에
일본군은 그 산에 집결하고 있었습니다. 산 뒷면은 들입니다. 그래서 산은 마치
섬같이 들과 강 사이에 오뚝 서 있습니다. 지금은 다 논밭으로 개간이 됐으나
그때는 강물이 많이 들어왔고 뒤에 가는 일선이 있어서 육지와 연락이 됐다고
합니다. 거기 올라서면 파주, 서울, 김포, 부평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p 427
있으므로 군사의 움직임을 일일이 알 수 있고 겸하여 큰 강을 꼈으니 지키는
데는 매우 유리했을 것입니다.
이 지세를 알아보고 거기 진을 쳤던 권장군은 확실히 잘 보았던 것이라 하겠
습니다. 그때 장군의 생각은 서울을 회복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전라감사로 있으
면서 의병을 모아 여러 차례 전공을 세우고 올라오는 기세였습니다. 그러나 명
장 이여송이 벽제에서 일본군에게 패하고는 기운이 죽어 감히 크게 공격하려 하
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보고 그냥 두어서는 아니된다는 권장군의 생각이어서 서
울을 향해 진군을 했는데 그것을 안 일본군은 주위에있는 3만의 큰 군사를 모아
단번에 그것을 무찔러버리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마난 것이 행주싸움인데
그때 거기 모인 우리 군사는 4천 명이라기도 하고 어떤 기록에서는 1만이라고도
하나 산성의 크기로 보아 많은 군사가 있으려 해도 있을 여지가 없습니다. 더구
나 성도 돌이 아니고 토성에다가 목책을 두르고 대진을 했고 첫날 목책의 한 부
분이 무너져서 한때 위태했었으나 겁나서 물러서려는 군졸을 권장군이 목을 베
어서 군사들을 독려했으므로 다시 용기를 얻어서 싸우는 중에 마침 대적의 장수
요시카와가 부상을 했기 때문에 일본군은 물러가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지리가 험한 것도 그 이긴 원인의 하나겠지마는 아무래도 그보다 더 큰 원인
은 사기에 있습니다. 그때 전쟁 기술에서 한다면 우리와 일본은 대가 되지 않았
습니다. 그들은 벌써 조총을 가지고 무장한 군대였고, 우리는 옛날식의 활과 칼
과 창뿐이었으니 어림이 없습니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그때까지 국방이란 생각
을 도무지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율곡이 군사 10만만 기르자는 것을 듣지 않았
던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지만, 바야흐로 일어나는 당파싸움과 썩어진 유교
때문에 정치가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일본군이 부산 앞바다에 올
때까지 아무 방비 없이 모르고 있었고 상륙한 지 한 달이 못되어 서울이 함락이
되었고, 비가 죽죽 오는 밤에 임금이란 것이 초초한 행색으로 도망을 간즉 궁중
에 달려들어
p 428
불을 지르고 도둑질을 한 것이 적군도 물론 적군이지만, 평소에 학대받던 일
반 백성이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은 역시 나라의 주인입니다. 첨에는 아무 방비 없는 데 들어온 도
둑 앞에 어쩔 줄을 몰랐으나 차차 반항하는 정신이 일어나 사방에서 의병이 일
어났습니다. 임진왜란에 있어서 대서특필할 일은 이것입니다. 일본군을 물리친
것은 임금의 심부름꾼인 벼슬아치나 그 군인이 아니고 일반 백성이었다는 것.
그 나라를 지키자고 맨주먹을 가지고 일본도와 조총의 위험에 대항하여 노한
양같이 일어난 민중의 의기가 아니라면 덕양도 없고 권율도 없습니다.
택국강산입전도
생민하계락초소
빙군막화봉후사
일장공성만골고
옛날도 이런 소리를 하는 시인이 있었습니다. 들판이고 산이고 온통 전쟁판이
됐구나, 백성이 어찌 농사하며 삶을 즐길 겨를이 있겠느냐? 전쟁하고 공을 세워
벼슬한단 말 하지 마라. 장수가 하나 공을 세우려면 1만이나 많은 뼈다귀가 쌓
여야 한다.
역사가 늘 도둑맞는 역사입니다. 일해서 번 것을 지키고도 공은 언제나 도둑
맞습니다. 무장지졸이란 말이 있습니다. 그말도 옳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옳
은 것은 독불장군이란 말입니다. 장군이란 것이 없으면 민중 속에 통일이 한때
없을 수 있지만 필요를 느끼면 언제나 민중은 사람을 골라 내세웁니다. 그러나
민중이 없으면 아무리 힘과 재주가 있는 놈이라도 어찌 장군 노릇을 할 수 있습
니까? 군사 많이 가지고 무기 충분히 가지고 한 싸움은 또 몰라도 안시성 싸움
같이 행주싸움같이 한줌밖에 안되는 적은 군사를 가지고 적의 큰 무리를 이기는
싸움에서 그 힘
p 429
은 전혀 졸병의 스스로 하는 용감한 정신에 있습니다. 어찌 감독을 해서 하고
꾀로써 합니까? 목숨을 잊고 오로지 나라를 위한 의기에 불붙은 모든 마음에서
되는 것입니다.
전공을 말함에 대장 아무개, 원수 아무개를 말할 뿐이고 정말 주인인 민중은
왜 말하지 않습니까? 억울합니다. 아닙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억울해할 줄
모르는 것이 민중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인입니다. 쿠데타 해놓고 서로 제가
해먹겠다고 주류파 비주류파 싸우는 것은 주인이 아닌 증거입니다. 공은 공 생
각하지 않는 민중의 것입니다.
생성하는 생명의 신비
산에 올라가면 비각이 있습니다. 비석 글자가 모두 볼 수 없이 닳아져버렸습
니다. 돌의 질이 나빠서 그렇다는 것이고 그 옆에 근래에 새로 세운 큰 비석과
그것을 개탄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물론 역사와 자취와 그 사실을 잘 기록해 보
존해야지요. 하나, 그것도 역시 낡아빠진 정치가 군인들의 생각입니다. 돌에 새
긴 것만이 기록입니까? 그것은 아무리 깊이 새겨도 또 없어지는 날이 올 것입니
다.
이날까지의 역사는 임금과 귀족의 역사건만도 자연의 법칙을 거스를 수 없습
니다. 지워지지 않는 기록이 있습니다. 뼈에 새기고 피에 새긴 기록입니다. 민중
그 자체가 기록입니다. 정신빠진 자들 민중의 심장에 새길 생각은 아니하고 거
기 새겨진 것 읽을 생각은 아니하면서 돌에 쓰고 책에 쓰면 무엇합니까?
사슴의 자랑은 뿔에 있습니다. 족제비의 자랑은 꼬리에 있습니다. 임진란의 뿔
과 꼬리는 무엇입니까? 이순신이요 권율입니까? 아닙니다. 아닙니다. 강강수월래
가 그 뿔이요 행주치마가 그 꼬리입니다. 행주치마가 있는 한 행주싸움의 정신
은 잊을 리 없고, 이 나라 이 민중이 망하지 않고 있는 한 행주치마는 없어질
리 없습니다. 세계의 전적 기념비도 많고 용감한 싸움 이야기도 많지만 이 행주
치마
p 430
에서 더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인류가 언제부터 옷을 입은지 모르고 그 옷의 철학을 쓴 것이 칼라일이지만
그 문호의 의상철학도 행주치마는 몰랐습니다. 칼라일이 살았더라면 가르쳐주었
을 것이고 가르쳐주었더라면 무슨 더 깊은 철학을 썼는지도 모릅니다.
치마가 무엇입니까? 음부를 보호하잔 것입니까? 여자의 미를 드러내잔 것입니
까? 그렇지 않으면 무슨 종교적인 의미가 있습니까? 아마 그런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치마의 정말 의미는 행주산성에서 가장 잘 나타났습니다. 자기로서는 여
자로서의 인격적 정결을 지키고, 한 집안을 위해서는 생명선의 정결을 지키며,
일할 때는 땀을 마셔주고, 슬플 때는 눈물을 닦아주는 이 치마는 생성하는 생명
의 신비의 상징입니다. 아기를 싸서 키우는 그 폭 속에서 작게는 마음이 자라났
고 크게는 나라가 자라났습니다. 그 치마가 이제 나라가 위태할 때는 나라를 지
키는 방패가 되고 악을 무찌르는 무기가 됐습니다. 평화라면 여자의 몸에 걸친
치마에서 더 평화가 어디 있습니까? 하지만 그것이 짐승보다 더 흉악한 대적을
막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라의 뿌리가 여기 있습니다. 한없이 약하면서 한없이 강하면서
오직 사랑 오직 봉사에 사는 아내와 어머니의 성격을 나타낸 것이 이 치마 아니
겠습니까? 가장 위급할 때에 생명을 건지는 것도 이 신비의 능력에 있단 것을
가장 극적으로 드러낸 것이 이 행주치마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에 서울 거
리를 휩쓰는 치맛바람, 입었다기보다는 바람에 날아가다가 죽은 가지에 걸린 것
같은 미니는 어찌 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오늘도 행주 같은 역사의 결정적인
고비가 돌아오면 틀림없이 또 나올 행주치마를 믿습니다.
해가 한강 위에 저뭅니다. 어린 솔포기가 던지는 그림자마다 꾸부리는 치마
입은 형상 같습니다. 돌, 돌, 돌, 손톱이 빠져 피가 납니다. 발자국마다 피가 고
입니다. 치마가 다 뚫어졌습니다. 살이 드러납니다. 엎디어 가슴으로 대신합니다.
쓰러집니다. 또 일어납니다.
돌, 돌, 돌. (1968)
p 431
한 동발목의 이야기
인생은 한 호흡 사이에 있다
나는 외진 바닷가에서 났으면서도 일찍부터 신학문과 기독교 교육을 받고 자
랐습니다. 서당에 오르기 전에 천자는 집에서 다 뗐고, 국문도 다 배웠습니다.
그때가 개명한다고 한창 서둘던 때라,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국문 배우노라 열
심히었는데, 내가 하룻밤 동안에 그것을 다 따로 배웠다고 칭찬해주던 것을 지
금도 기억합니다.
이제 쓰기를 연습했다고 사판에 목필을 가지고 서당에 갔는데, 그해에 그 삼
천재가 사립 기독교 덕일소학교로 변해버렸습니다. 신식학교가 되기는 했지만
예로부터 오는 그 여러 가지 전통은 없어질 수 없었습니다. 꿇어앉아야 했고 선
생님 드나드시는 앞문으로 우리들이 다니면 그것은 큰 잘못이었고 다리를 뻗고
앉으면 글이 그리 다 빠져나가는 것이었으며 책을 거꾸로 놓거나 엎어놓아도 못
쓰고, 타고 넘어도 아니됐습니다. 글쓴 종이로 코를 풀거나 밑을 닦으면 사람질
을 못한다고 엄중한 훈계를 받았습니다. 그런 것들은 단순한 교훈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종교적 계율이어서 신성불가침의 권위를 가지고 자라나는 인격의 테두리
를 이루어가는
p 432
것이었습니다.
나는 자유를 무엇보다도 더 존중하면서도 그러한 교육은 참 좋았다고 생각합
니다. 지금은 너무 법도가 없어서 걱정입니다. 한마디로 해서 오늘의 사회는 돼
먹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법도 중에서도 가장 깊이 내 마음속에 뿌리가 박혀있는 것은 “
반자불성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하는 말입니다. 글자를 쓰기 시작했으면 반
드시 완성해야지 쓰다 말고 내버리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급
해지면 끼적끼적해서 온전히는 못 쓰더라도 글자 형지라도 만들어놓고 일어서야
했습니다. 지금 사람들이 보면 거의 무의미하다 할지 모르지만 나는 거기에 크
게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그 가르침의 유래를 찾아본다면 아마 글이 퍽 귀하고 드물던 옛날에 시작됐을
것입니다. 글을 읽고 쓰는 일에 매우 소중한 책임감을 느끼는 데서 선생이 그
후계자에게 그렇게 가르쳤을 것입니다. 거기 문화 창조자로서의 옛사람의 정성
과 지혜가 들어 있습니다. 모든 것을 그저 방편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오늘과는
참 다릅니다. 물론 그렇게 함으로 인해서 거기 특권적인 의식이 생기고 독점하
는 폐단이 생긴 점도 있지만 그것을 잊어서도 아니되지만, 그것이 아니었더라면
글은 오늘날까지 전해오지 못하고 말았을지도 모릅니다. 그 가장 심한 예가 아
마 히브리 사람들의 율법책일 것입니다. 그들은 그 글을 베낄 때에 전 사람이
잘못해서 떨어뜨린 먹점까지도, 아마 분명히 잘못돼서 그리 된 것인 줄 알면서
도, 그대로 그려넣었습니다. 어리석은 일 같지만 그것이 아니었더라면 구약성경
은 오늘까지 전해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나에게 있어서 더 중요한 것은 그 글자에 대한 효과보다도 “사람 아니다”하
는 그 아래 구절에 있습니다. 거기 인격 교육이 들어 있습니다. 나는 거기서 두
가지 교훈을 봅니다. 하나는 마무름에 대한 주장이고 하나는 의미에 대한 주장
입니다. 일생에 마무름을 못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고 그 마무름을 하려면 전체
의 의미를 깨닫지 못
p 433
하고는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근래는 나는 거리의 골목길을 드나들면서 이
골목에서 내 그림자가 슬쩍 사라져버리는 날이 멀지 않지, 하는 생각을 하는 때
가 많습니다. 나도 내 인생에 마무름을 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사람의 삶은 한정이 있습니다. ‘일생’입니다. 그 일생을 어떻게 잘 쓰느냐가
문제인데 내 생각으로는 될수록 잘게 토막을 쳐서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철저
히 하려면 석가의 가르침같이 “인생은 한 호흡 사이에 있다”해야 할 것이지
만, 한 호흡마다는 몰라도 날마다는 잘라서 사는 것이 옳다고 합니다. 하루하루
를 날마다 마무름을 하도록 말입니다. 기도로서 시작해서 기도로서 끝맺는단 말
입니다. 잘됐건 잘못됐건 마무름은 짓도록 하잔 말입니다. 그러나 구슬이 서 말
이라도 꿰어야 구슬입니다. 하루하루를 아무리 야무지게 마무름을 했다 하더라
도 그 하루하루가 서로 떨어진 것이어서는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을 하나로 꿰
는 큰 마무름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전체의 의미입니다. 믿음입니다.
동발목의 신세
그런데 내 일생은 어떠했던가? 나는 나를 비판해서 ‘동발목’이라고 생각하
는 때가 많습니다.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일을 많이 하는것 같지만 정말 한 일
없지 않으냐 하는 말입니다. 동발목이란 놈이 온 장안에 아니 가는 데가 없습니
다. 이 집도 내가 지었고 저 집도 내가 지은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지은 네 집이 어디 있느냐? 모든 집 지음에 다 관계하면서도 집은 하나도 짓지
못한 것이 동발목입니다. 내 일생도 그렇단 말입니다. 이때까지 남의 일뿐이지
내 일을 한 것이 없단 말입니다.
스물여덟에서 서른여덟까지 인생의 가장 좋은 때를 오산서 지냈는데, 그것은
내 일이 되지 못했습니다. 갈 때에,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 목숨 버린다”는
성경 구절을 읽고 오산에서 죽을 생각으
p 434
로 갔는데 거기서 나왔으니, 10년을 남의 일 해준 것 아닌가? 농사를 하면서
라도 오산에 머물자 했는데 그것도 두 해밖에 못 있고 떠났으니, 그것도 남의
일, 송산농사학원에야말로 전력을 다해 하자고 갔었는데, 불과 반 년에 유치장으
로 끝났으니 그것도 남의 일로 되고 말았습니다.
해방 후 정치에 관계할 때는 첨부터 남의 일로 알고 시작한 것이지만 할 것을
해주고는 물러서자던 것이 그렇게 못되고 완전한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으니 그
것은 남의 일도 못되고 도둑놈의 일밖에 해준 것이 없습니다.
스물다섯이 될 때까지 장로교 신자로 자랐는데 그 교회를 떠나 무교회로 갔고
무교회에 머물기를 30년이 넘도록 했는데 거기도 못있고 퀘이커로 갔습니다. 퀘
이커로 갔으면 그것은 내 있을 곳이라하고 못을 박나 하면 그런 것도 아닙니다.
농장을 하다가 농장을 못 이루었지, 젖소를 기르다가 목장을 못 만들었지, 토
끼를 쳐서 토끼로 성공을 못했고 직조를 해서 직조로 업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이 마지막 10년은 더구나도 남의 일이란 생각이 많습니다. 이 모임에 참여, 저
모임에 참여, 이 잡지에 글, 저 잡지에 글, 교회에서 오람 교회에 가고 학생들이
오람 학생 모임에 가고 참 바쁜 살림입니다. 그러나 거기 내 살림이 있던가? 내
일을 한 것이 어딘가?
이 동발목의 말로는 무엇일까 하고 남 다 자는 밤에 혼자 앉은 때도 많습니
다. 동발목의 신세야 뻔하지 않습니까? 집을 지을 때는 그것 없이 아무것도 아
니되는 것 같아 중요시되는 것 같지만 집이 다 되면 사정없이 뜯어 내동댕이치
는 것이고 그러기를 거듭하는 동안에 차차 썩고 상처나면 나중엔 그것도 못하고
어느 아궁이로 들어갈 것밖에 없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며 한산의 시를 읊조려
봅니다.
천생백척수, 전작장조림
p 435
가석동량재, 포지재유곡
년다심삼경, 일구피점독
식자취장래, 유감주마옥
나는 백척수도 못되고 동량재란 말은 가져다 댈수도 없습니다마는 그래도 나
도 하늘이 낸 것은 사실이고, 하늘이 낸 이상 내게 명한 것이 있을 것은 틀림없
는 일입니다. 그런데 생각을 정성스럽게 하지 못하고 쓸데없는 욕심의 도끼와
톱으로 이 생명의 나무를 날마다 찍고 있는 것이 슬프고 부끄러운 일입니다.
물론 나는 생각없이 이리 뛰고 저리 뛴 것 아닙니다. 돈을 위해서 한 것도 권
세를 위해 한 것도 아닙니다. 노상 인기에 넘어가서 한 것도 아닙니다. 양심도
그런 정도는 압니다. 그렇지만 정말 참에까지 갔을까? 나도 ‘일구피점독’ 겉
살은 날로 썩지만, ‘연다심삼경’ 그래도 속에는 아직 단딴한 썩지 않은 것이
있는 것을 압니다. 남이야 나를 뭐라거나 나는 나대로 내 속에 나만이 하나님과
마주 서는 지성소가 있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지켜내나, 살려내
나가 문제입니다.
마무름을 못한 인생은 헛 산 인생
많은 일을 하자 할 때 내 일은 잊고 남의 일을 하지 않을까? 일을 해보려 할
때 나를 일에 팔지 않을까? 『사람은 얼마만한 땅이 필요한가』라는 소설을 썼
을 때 톨스토이도 그런 생각이 있어서 쓴지도 모릅니다. 죽고 나면 결국 시체를
묻는 여섯 자 되는 땅밖에 소용이 없는데 그것을 모르고 사람들이 요것도 아깝
고 조것도 넣었으면 좋겠다고 큰 둘레를 그리다가 나중에 정말 마무름을 해야
할 장면에 가면 급해져서 심장이 터져 죽고 맙니다. 마무름을 못한 인생은 헛
산 인생입니다.
p 436
그렇다고 일찍부터 조그만 성공에 만족하란 말은 아닙니다. 사람은 원대한 정
신에 살아야 합니다. 성공을 못하더라도 무한한 이상에 살다 거기 죽는 것이 참
삶입니다. 마치 만년눈의 히말라야 영봉을 기어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오르다오
르다 눈 속에 죽어도 좋습니다. 발로는 못 디디어도 가슴에 안고 죽는 그 영의
봉우리가 살아서 부르짖어서 뒤이어 올라오는 수많은 용자를 티끌 속에서 불러
내고야 말 것입니다. 그 의미에서는 성공자보다 실패자 만세입니다.
마무름을 하라는 것은 사업에서 하는 말이 아니고 의미에서 믿음에서 하는 말
입니다. 사람은 죽기 전에 혹은 죽음으로 그 삶의 글자의 긋기를 맞추어야 합니
다. 반자불성을 해서는 사람이 아닙니다. 인생에 의미가 있을까, 없을까 하다가
죽어서는 아니됩니다. 사업에 성공하면 그 성공을 통해서, 실패하면 그 실패를
통해서 하나의 글자를 써놔야 합니다. 남이 보면 인생에 보람이 있더라, 역사에
의미가 있더라 하도록 분명히 글자를 맞추어야 할 것입니다.
누가 나를 평해서 다섯 번 변했다 하더랍니다. 그렇게 보였는지도 모릅니다.
사실 나는 될수록 자주 변하고자 노력합니다. 나는 역사 없는 인생에 살고 싶지
는 않습니다. 인생은 참이어도 삶은 횡단면밖에 못됩니다. 횡이 있으면 종이 있
습니다. 인생의 야무진 구슬은 역사의 의미의 줄에 꿰어서만 정말로 살아납니다.
그런데 역사적이려면 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라는 것이 생명이기 때문입니
다.
나는 미래에 살고 싶지 과거에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것이 남들에게는 아
무 주장이 없는 것으로 보였는지 모릅니다. 그럴 것 같아서 내 입으로 ‘동발목
’이라 한 것입니다. 나와 하나님과 마주 설 때 나는 결코 나를 동발목이라 하
지 않습니다. 비록 작아도 나도 내 지성소의 기둥입니다. 그렇지만 세상 눈에 그
렇게 뵐 듯하기 때문에 그렇게 반성해보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 없어도 못살
지만 또 이웃 없이도 못삽니다. 그것이 내가 어떤 때 “나는 지
p 437
옥 가기로 결심했다“ 말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보내는 지옥 아닙니다. 세
상이 보내는 지옥이지 하나님께서는 지옥 없습니다.
나는 변할 때도 정신 빠져서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날까지 나는 나 자신으
로서는 영원문의 기둥에 맨 실마리를 놔버리노라고는 아니했습니다. 헤맸지요.
그렇습니다. 많이 헤매고 많이 다치고 피 흐릅니다. 그러나 놓쳐버리지는 않았습
니다.
나는 이제 내 해가 지평선에 뉘엿뉘엿 닿는 것을 봅니다. 내가 욕심이 너무
많았던 것을 뉘우칩니다. 뉘우쳐도 주저앉을 수는 없습니다. 땀 흐르면서도 울면
서도 피 흘리면서도 나는 달려야 합니다. 지난날의 내 잘못을 이제 다시 없앨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나무의 혹처럼 무서운 눈으로 나를 뚫어봅니다. 그래도
나는 기를 죽일 수는 없습니다. 죽게 달리는 순간에도 그 무서운 눈을 유머로
달래주기를 잊어서는 아니됩니다.
나는 동그라미를 그려야 합니다. 내 마지막 숨을 내 첫숨에 가져다대야 합니
다. 그 순간 내 피곤한 심장은 터질지 모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모자라는 여섯
자를 내 시체로 메워서 겨우 동그라미를 완성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내가 얼마
나 넓은 땅을 차지했나가 문제가 아닙니다. 동그라미가 됐나 못됐나가 문제입니
다. 하나의 동그라미만 되면 거기 하나의 빔, 하나의 무가 있습니다. 동그라미의
작고 큰 것에 상관없이 빔이요 무이기 때문에 무한합니다. 거기 하나님이 계실
것입니다. 나는 반자불성을 면할 것입니다.
이따는 모릅니다. 지금 생각으로는 『씨ㅇ^5,3456^ㄹ의 소리』로 그 동그라미
를 그려보잔 것입니다. 엊그제 전주, 금산 강연 갔다오면서도 잔촉이란 생각을
내 입 속에 씹으면서 세 시간 고속도로를 달리는 줄 모르고 달렸습니다.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1971)
p 438
늙은이의 옛날얘기
동네 느티나무 밑의 할아버지
나를 여기다가 모셔다 놓고, 이 추운 날 따뜻한 방안도 아닌 바깥에다 앉혀놓
고, 자꾸만 할아버지 할아버지 하고 불러대니, 옛날얘기나 하나 하렵니다. 할아
버지들은 옛날얘기는 잘 하는 것이고, 또 사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다움, 할아버
지의 할 일은 옛날얘기 하는데 있습니다.
옛날얘기라면 그저 웃음거리나 되고 사실은 아닌 허튼 소리고, 재미는 있으나
실용가치는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알지만,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그 옛날얘기야말로 철학이 들어 있고 교훈이 들어 있으며 없어서는 아니되는,
곧 실용가치가 있는 말입니다. 이것은 실용이 아니면서 실용이되는 것입니다. 세
상이 이렇게 실리주의로만 나가서 무슨 돈 버는 방법, 권력 움켜쥐는 수단에 관
한 말이라야 모두들 귀가 바싹해서 들으려고 하지만, 사실 그것은 모르고도, 그
보다도 몰라야만 사람질할 수가 있어도, 할머니가 아랫목에서, 할아버지가 동네
느티나무 밑에서 하는 이 옛날얘기를 못듣고는 사람질할 수 없습니다.
옛날얘기란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먹어서 소화되어서 씨ㅇ^5,3456^ㄹ의
p 439
얼굴에 화기로 나타난 학문, 도덕, 종교의 체험담입니다. 그러면 혹시 길거리
에 범람하고 가정에 소용돌이를 치는 소설, 영화, 라디오, 텔레비전이 있지 않으
냐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렇기에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위입니다.
조작입니다. 작업심리에서 일부러 만들어낸 것이지 자연스럽게 되어 나온 것이
아닙니다. 자연스러워야 선입니다. 자연의 법칙은 적당히 일을 하면 쉬는 동안
에 자동적으로 피로회복이 되고, 레크레이션, 즉 원기의 소생이 저절로 되게 되
어 있습니다.
기계를 만들어서 노동을 피하고 지나치게 한가한 시간이 많기 때문에 심심 지
루를 느끼고, 그것을 풀려 인위적으로 짜릿짜릿한 오락을 만들기 때문에 그 죄
값에 오락이 오락이 아니라 도리어 몸과 정신에 해독이 되고, 한편으로는 지나
친 고역에 지쳐 인생 파괴를 당하는 무리로 사회악이 쏟아져 나옵니다. 나는 옛
날에 속하는 사람이므로 아직도 비교적 자연에서 덜 떨어진 생활을 합니다. 그
렇기 때문에 심심을 모르고 적적을 모릅니다. 텔레비전 필요없고 연속극 소용없
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보다는 훨씬 더 몸과 정신의 건강에 자신있습니다.
하여간, 일 잘됐습니다. 근대식으로 장식한 강당에는 못 들어가고 쫓겨났으니
만큼 자연에 가깝고, 문명병 들지 않았던 옛날에 가깝습니다. 느티나무 밑으로
알고 옛날얘기나 합시다.
정란의 목각 얘기
옛날 후한 때에 정란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부모를 일찍 여의였습니다. 그래
남들은 다 부모가 계셔서 봉양을 할 수가 있는데 자기는 그렇게 할 수 없는 것
을 평생 유감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생각 끝에 나무를 아로새겨 사람 모양으
로 만들어놓고 그것을 진짜 어머니로 알고 섬기기로 했습니다. 밤이면 그 목상
한테 가서 정성으로 “어머님 안녕히 주무셔요”하고 아침이면 또 “안녕히
p 440
주무셨습니까?“ 해서 허락하는 기색이 보여야 가고, 근처에서 무슨 물건을
빌리러 오면 ”저 아무개가 무엇무엇을 빌리러 왔는데 주랍니까?“하고 품해서
허락하는 안색이 나타나 뵈야 빌려주었습니다.
하루는 근처에 사는 장숙이라는 사람의 아내가 와서 정란의 아내보고 무슨 물
건을 좀 빌려달라 했습니다. 정란의 아내는 그 목각한테 들어가 품했더니 안색
이 좋지 않으므로 빌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장숙의 아내가 목각보고 꿇어
앉아 얘기하는 꼴이 보기 사나워 욕을 퍼붓고 작대기로 목각을 두드려패고 달아
났습니다. 정란이 돌아와서 나무사람이 낯빛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아내더러
까닭을 물으니 아내는 사실을 말했습니다. 정란이 분김에 장숙의 아내를 칼로
찔러 죽였습니다. 그래 관가에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그래 그 목상 어머님께 하
직을 고하러 들어갔더니 그 목상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렀습니다. 관리가 그
것을 보고 정란의 지극한 효성이 신명에까지 통한 것을 보고 놀랍게 여겨 그 죄
를 다스리지 않고, 그 형상을 그림으로 그려 표창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역
사에 유명한 정란의 목각이라는 것입니다.
이 얘기는 왜 하느냐 하면, 여러분이 나를 여기 끌어다놓고는 할아버지, 할아
버지 하는 것을 볼 때 내 마음속에 여러분이 아마 할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
이 대단히 간절한가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아닌게아니라 집에는
늙은이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늙은이는 기력이 다 쇠하여 일도 할 수
없고, 여러 가지로 붙들어드려야 하니 물질적으로 손해되고 정신적으로 걱정거
리 될 수 있는 일이 많지만, 그래도 집 아랫목에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앉아 있
어야 합니다. 말 한 마디 아니해도 좋습니다.
턱 앉아 있기만 하면 됩니다. 쥐 안 잡는 고양이란 말이 있습니다마는, 늙은이
야말로 말 아니하는 복신입니다. 각별히 교훈, 참고될만한 말 한 마디 아니해줘
도, 있는 존재 그 자체가 복이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생의 싸움 다 싸우고
자기가 길러낸 그 자손을 말없는 사랑과 믿음으로 지켜보고 있는 그 자체가 곧
천지의 근본되
p 441
는 생명의 상징이요 선조 대대의 피 땀으로 엮어진 역사의 살아 있는 표시이
기 때문입니다. 자연히 존경과 감사가 갑니다.
모든 가족이 그를 바라보고 공경하고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있을 때 그 집은
자연히 화목이 되고, 모두 기쁜 감정에 차 있기 때문에 하는 일마다 잘되고, 가
다 혹시 서로 맞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곧 쉽게 풀리고 다시 하나 되
어 나갈 수가 있습니다. 반대로 그러한 정신적 감사 공경의 대상 되는 늙은이가
없을 때 그 집의 가족들은 중심이 없기 때문에 의견이 서로 엇갈리고 이해가 서
로 충돌되어 불화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가화만사성’이라고 화목이 못되면
돈 있고 학문 있고 세력 있는 것이 도리어 화가 됩니다.
내 눈에서도 눈물이...
한 가정만 그런것이 아니라 나라도 그렇습니다. 나라는 더합니다. 왜냐하면 가
정은 작으니만큼 할아버지 할머니가 없어도 서로서로의 얼굴과 음성 속에서 부
모 조부모의 모습을 보아 잊었던 화목을 그래도 쉬이 되찾을 수가 있지만, 나라
는 서로 육친의 관계가 먼 많은 사람이 모여있으니만큼 화목이 더욱 어렵습니
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에는 반드시 주의 사상의 여하를 막론하고 일반 국민들
로부터 신임 존경을 받는 늙은이가 있어야 합니다. 반드시 정치인일 필요 없습
니다. 도리어 정치인이 아니어야 일반 국민의 신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정치가
반드시 국민생활의 전부는 아닙니다. 정치보다는 사회적인 면이 더 중요합니다.
사회개혁이 됐으면 쉽게 정치개혁을 할 수 있지만 사회혁명을 못해 가지고서는
올바른 정치개혁이 있을 수도 없고, 설혹 일시 된다 해도 반드시 무너질 것이고
사회악을 더하게 만들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의 늙은이는 결코 정치가가 아닙니다. 인간과 민족의 총합
적인 슬기와 신념을 상징하는 사상과 덕행의 인물이어
p 442
야 합니다 맹자가 문왕을 말하면서 ‘늙은이를 잘치는 이’ 라고 했을때의 그
늙은이가 곧 그것입니다 맹자는 또다른데서는 그것을 큰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
큰 사람은 정기이물정이라고 자기를 바르게 하면 천하가 바르게 된다고 했습니
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그러한 나라 늙은이의 지지를 얻는다면 나라는 틀림없이
잘됩니다 왜냐하면 나라 늙은이가 그를 지지할때 국민은 자연 그에게로 갈 것이
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늙은이의 지지를 잃어버릴때에 그 정치가는 실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늙은이는 곧 민족양심의 대표이기 때문입니다 그 가장 좋은
실례가 사울에게 있습니다 사무엘의 축복을 얻었을때 그는 이스라엘의 왕이 되
어ㅆ지만 그것을 잃었을때 그는 망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그러한 늙은이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정되어 있지 않습니
다 할아바지 할머니가 없어서 화기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집안 같습니다 안정 안
되었기 때문에 단속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더 되지 않습니다 공공정신 없고 사
람들이 거칠고 생각이 야비하고 인정의 두터운 것이 없습니다 국민의 마음이 불
안과 의심에 떨때에 일을 할 수 있는 힘은 죽어버리고 악을 행할 수 있는 힘만
이 발동합니다 젊은 아버지들이 매양 실패하는 것은 욕심과 법도만 알고 사람속
에 숨어있는 선한 힘을 발동 시킬 수있는 넓은 도량과 믿어주는 마음이 부족하
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할아버지가 있어야 교육이 바로되고 국민은 정치가만아
니라 나라 늙은이가 있어 정치와 국민사이에 서서 신뢰와 온화의 공기를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해방이후 오늘날까지 국민적 동맥은 경화일로로만 왔습니다 이러
다가는 언제 경련이나 중풍현상이 돌발할지 알 수 없습니다
요새 일어나는 근로자 문제를 보면 참으로 걱정 스럽습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의식하시고 했는지는 모르지만 정란의 목각같은 이 나를 불러다 놓고 여러 가지
말을 하고 또 나더러 말을 하라는 것은 이러한 걱정속에서 답답해서 하시는 일
이라고 나라 늙은이를 찾느라고 하시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나는 비록 나누같
이 둔한 것
p 443
이더라도 여러분이 정말 정성으로 나라 늙은이를 대하는 심정으로 하신다면 돈
이나 힘이나 법으로가 아니라 인정과 도리의 아름다운 것을 찾아서 하신다면
내눈에서도 눈물이 나롤지 누가 압니까? 그러나 또 반대로 그런 정성을 가지신
분들이 더러 있더라도 무지한 장숙의 아내같은 사람이 너무 많으면 가엾은 정란
을 옥으로만 보내고 말지 모릅니다
나라에 왜 늙은이가 없나
그러면 나라의 늙은이는 왜 없어졌습니까? 그원인을 생각해 보는 것이 중요합
니다 나이 많은 사람이 없단 말은 아닙니다 사람이 사는 세상인 이상 나이 많은
이가 없을리는 없습니다 지금은 예날에 비해 먹는 음식의 영양도 많고 약도 좋
고 운동 위생의 정신도 높아지고 한 탓으로 장수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나이 많은 것이 늙은이는 아닙니다 사람은 동물이 아니고 정신입니다 정신연령
이 높아야 늙은이입니다
그럼 사회에 어째서 정신년령이 높은 늙은이가 없습니까? 정신에 대한 대접이
없기 때문입니다 늙은이는 마치 해묶은 느티나무나 밤나무와 마찬가지입니다 늙
은이와 늙은 나무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느티나무 밑에서 하는
옛날얘기란 말을 했습니다마는 할아바지들이 있으면 늙은나무 있고 늙은 나무
있는 마을이면 늘은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동네안에 늙은 나무는 왜 있습니
까? 사람은 그늘을 처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일도 하지만 또 쉬임도 찾
습니다 내 생각도 하지만 후손생각도 합니다 현실의 살림도 하지만 또 상상의
나라도 찾습니다
그것을 위해 필요한 것이 해묵은 밤나무 느티나무의 퍼진 가지그늘입니다 그
그늘 밑에서 나온것이 호랑이 수염처럼 내뻗은 하
p 444
얀 눈썹밑에 인자와 위엄과 뚫어보는 날카로움이 한데 어린 관선을 쏘는 눈을
가지고 빙그레 웃는 늙은이입니다 그는 그 늙은 나무 그늘 밑에서 나왔지만 또
그자신이 하나의 그 늙은 나무입니다 그리하여 그 마음이 그늘밑에 많은 어린
혼을 달래 줍니다 혼의 자람을 원해 새벽의 엄숙, 대낮의 황홀, 저녁의 장엄을
찾는 젊은 생명들이 있는 한 그 늙은이는 언제나 느티나무처럼 축복의 팔을 벌
리고 서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들의 가슴에서 그 찾음이 말랐을 때 그 늙은 정
신의 나무도 말라버릴 수 밖에 없습니다
젊은이마다 도시의 맘몬의 졸병으로 끌려가는 이때에 마을의 느타나무는 찍히
어 장작개비 밖에 될 수 없고 마을의 느티나무가 찍히는 알 앉을 그늘을 잃은
마을의 혼은 두견새로 변해 뒷동산으로 날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늘긍 ㄴ나무
찍히우고 거기 깃들었던 혼 산으로 도망갈 때 마을에 남는것은 주고받기와, 시
비와, 깔고앉음과 깔리움밖에 있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한 시대의 변천으로 오는 점도 있지만 나라의 늙은이가 없어진데는 또 지
난날의 잘못으로 인해서 되는 점도 있습니다 사람을 너무 많이 죽엿습니다 나는
우리나라의 어려움의 근본 원인은 인물 못 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크게 난
사람이라야만 큰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자꾸 죽였으니 큰 인물이
어떻게 납니까?
사람을 자꾸 죽이면서 나라가 잘되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세상
에 우리같이 어려운 민족은 없습니다 다른 나라와 싸워서 전쟁에 죽은 것은 그
만두고 제 나라안에서 서로 당파싸움으로 죽인 인물이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날
우리가 당한 나라안, 나라밖의 모든어려움은 결국 그릇이 크지 못한 데서 오는
것이라 할 것인데 그것은 결국 이씨네 500년의 나쁜 전통에서 내려오는 타성이
라 해야 할 것입니다 한마디로해서 양반 정치의 때를 벗지 못했습니다 슬픈 일
입니다
p 445
새 역사는 위대한 혼에서
5.16사건이 일어나던 그해에 그 사건 후 조금 있다가 돌아간 장준하씨가 사상
계에다가 그 사건을 비판하는 글을 쓰라 해서 썼던 일이 있는데 당시 모 부서의
장으로 있던 사람이 장준하씨를 보고 나를 가리켜 “ 정신분열증 들린 할아버지
”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그 사람만 아니라 어느 누구가 뭐라한다기
로 까딱이나 할 내 마음은 아니지만 듣고서 참 불쾌했습니다
그때 자타가 다 알기를 그 사건의 가장 앞장에 선 대표인물이라 했는데 그가
감히 나를 보고 그의 나이로나 학식으로나, 경력으로, 사회의 여론으로나 감히
그렇게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또 아무것도 아니라 하더라도 자기의 앞날을 생각
해, 자기의 선자리를 생각해 무엇보다도 자기가 스스로 하겠다고 누가 시키지
않은 것을 자임하고 나선 그일의 중대성을 생각해서라도 감히 그렇게 경솔할 수
가 없습니다
이것은 개인의 인격문제가 아니라 한 민족, 한 시대의 문제입니다 민족의 정
신이 얼마나 타락이 되었으면 그렇게 무식할 수 있을까? 그런 무식이 어디 있
습니까? 나무의 밑둥을 베이면서 어떻게 스스로 자랑할 수 있습니까? 나는 그
말한 그 개인을 시비할이만큼 한가한 사람 아닙니다. 그 말이 나온 이 세대가
슬퍼서 하는 말입니다.
역사가 뭔지 인생이 뭔지 모르는 생각입니다. 전체 없이 개인도 없고 전통없
이 역사도 없습니다. 전통을 가능한 한 살리려고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무엇이
그리 잘난 것이며 과거를 온전히 죽이면서 어떻게 미래를 살릴 수 있습니까? 이
되지 못한 세대는 그 사람의 입을 빌어 자기심판을 한 것입니다. 내가 양반정치
의 때를 아직도 못 벗었다 할 때는 이것을 맘속에 두고 하는 말입니다. 사람 대
접을 아니한 정치가 그 말로가 어떻다는 것을 스스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p 446
할아버지가 아랫목에 턱 자리잡고 앉았는 집이라면 까부는 손자가 있을리가
없고 나라의 늙은이가 광명천지에서 옛날예기를 유유히 하고 있는 나라라면 정
치인이 판을 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면 더구나 유능한 인물을 나
와 같지 않다는 생각에 죽이면 그 피는 땅이 마셔버리지만 그 악한 생각과 양심
의 가책에서 오는 고민의 독소는 내 영혼의 고갱이를 먹어버립니다. 그리하여
그것이 10년, 20년만 가는 것이 아니라 수십대, 수백대도 내려갑니다. 그러므로
그 병의 독균이 오고오는 세대의 자손의 혼을 비틀어 기형이 되게하고 간질이
되게하고 변태심리가 되게합니다 허튼 말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역사를 보면 어떤 민족 무조건 예찬주의자도 그것이 밑이 점점 빨아
진 것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인데 그 이유는 이 민족적 죄의식의 결과입니다.
이것은 항상 죄의식에 떨었고 거기서 속함을 받기 위해 아침 저녁으로 속죄제를
드리지 않고는 못견디었던 이스라엘 민족이 고난의 역사의 길을 걷기는 하면서
도 역사상 다른 어떤 민족에서도 유래를 볼 수 없을이 만큼 풍부하게 위대한 혼
의 인물을 낳았다는 사실에 견주어 볼 때에 더욱 확신이 갑니다. 아주 깊은데서
통회하지 않고는 겉으로 경제로 기술로 어떤 발전을 한 다해도 이 민족은 결코
위대한 인물을 낳을 수눈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위대한 혼없는 새 역사
를 낳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마지막으로 하나 더 말할 것은 사람들이 갈수록 더 실리주
의만 추구하고 정치가 그것을 계획적으로 더 장려한다는 사실입니다 속담에 “
원두한이 삼 년에 삼촌을 몰라본다” 했습니다 모든것이 자연 발생적으로 되던
옛날도 그랬거든 하물며 이 계획적 조직적인 시대에서겠습니까? 실리주의에 설
때 늙은이는 무용지물입니다 원인을 다 만들어 놓고 결과가 나타나는 것을 보고
야 비로소 놀라서 이제 새삼 충효를 부르짖지만 그 원인을 제거하지 않는 한 그
것은 소용없는 일입니다 각 가정에서 늙은이를 내쫓는데 나라의 어느 구석에 늙
은이 있을 자리가 있겠습니까? 경로당 정도
p 447
가지고는 절대로 노인문제 해결 안됩니다. 제 주체도 못하는 늙은 이가 어떻
게 나라의 늙은이 노릇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이 문명 전체의 문제요. 인류 전체의 마음의 문제입니다. 인생관 국가
관이 근본에서 달라져야 합니다 본과 말은 하나입니다 밑이 끝이요 끝이 밑입니
다 얼파가 곧 오메가요 오메가가 곧 알파입니다 천지가 하느님의 창조에서 시작
됐다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자연이 근본이라면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중간의 것은 한번 소
꿉으로 해본 것이었습니다 늙은이는 늘 그인 이입니다 하나님의 모습을 그려보
는 것이 늙은이입니다 그것을 쓸데 없는 일로 알았던 실리주의 문명을 버리고
다시 근본을 찾는 날 여원의 늙은이는 그 영원의 느티나무 그늘에 앉아 수많은
손자들을 데리고 가정이요 나라요 하던 그 영원한 소꿉의 옛날얘기를 계속할 것
입니다 (1997)
p 449
제 5 부
우리의 살길
해방의 날에 새 세대에게 주는 말
젊은 여성에게 주고싶은 말
젊은 세대에게 주는 말
실림살이
p 451
우리의 살길
좁은 문
우리 살길은 어디 있을까? 살길을 묻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모든 시간,
모든 일이 다 실ㅁ인데 어디만, 어떤일에만, 언제만 삶이 있을 수 있는 것 같이
살길이 어디 있느냐 묻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삶이 전체요 생각은 부분인데
삶이 생각을 낳지 생긱이 삶을 이끌어갈 것 아닌데 생각으로 알 수 있는 것처럼
물음은 어리석은 일이다
살길 묻는 사람 한가한 사람이다. 정말 살 생각은 없는 사람이다. 삶은 급한
것이다. 감옥에서 뛰쳐나온 놈이 길을 묻고있을까? 대적에게 쫓기는 사람이 길
을 물을 것인가? 산 사람 제 살길 묻지 않을 것이요. 채 살지도 죽지도 않은 사
람, 바닷물결에 밀려 들어왔다, 나가ㄲ다, 강변에서 노는 마름 조각같은 마음이
살갈 묻고 있는 것이다
살길을 묻는 사람 내 가는 길의 방해꾼이다. 각자 도생으로 사람이 다각기 제
살길 제가 찾는 것인데 저만이 아는 것이요 제 길도 미처 못찾는 것인데 살길
묻고 있으면 저는 내 방해
p 452
꾼이요, 나는 제 방해꾼이다. 길 묻고 있는 동안에 아마 호랑이에게 먹혀버릴
것이요, 적군의 총알에 넘어갈 것이요, 섰던 땅이 꺼져 둘 다 죽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살길 묻는 사람도 어리석은 사람, 거기 대답하는 것도 어리석은 사
람, 그러나 이미 물을이 만큼 어리석었고 또 물음을 당할이 만큼 어리석었다 내
각 어질었다면 그런 실없는 질문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되논 어리석음을
도망할 길도 없고 어리석은 척 대답해 보리라.
그것은 참 좁은 길이요, 참 험한 길이다. 그러나 하는 수 없다. 이것 밖에 또
다른 길이 없기 때문이다. 절대로 없다 이길로 가면 사는 것이요, 반드시 살것이
요, 그 대신 이길 아니 가면 망한다. 반드시 망한다.
그럼 그길이 무슨 길일까?
모든 사람이 다 죽어버리고 하나만 남는 일이다. 둘만남아도 아니된다. 단 하
나만 남아야 한다. 그러면 모든 사람이 다 죽고 한 사람만이 남는다면 이 나라
이 겨례는 반드시 산다. 다른 나라는 몰라도(그것도 따지고 들어가면 마찬가지로
꼭 같지만)적어도 이 나라 역사는 그 보여주는 것이 결국 이것이다. 둘만 있어도
못산다는 것, 나밖엔 아무도 있을 수 없는 것이 우리 역사다.
둘만이 남는대도 단 둘이니만큼 대적이 분명하기 때문에 반드시 저쪽을 없애
려 지혜와 힘을 다 쓸것이므로 둘 다 죽고야 말 것이다 악으로 했거나 선으로
했거나 역사는 결국 삶은 하나에만 참은 하나 함에만 길은 하나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으리라 ” 한 예수의 말씀은 이것을 가르
p 453
친 것일 것이다 예수의 이 말씀을 진리로 알고 믿어 오느라 한 것이 이미 50
년 이었어도 아직 안 것이 아니었다 이제 나라일이 이지경 되고 세계 형편 저모
양되고 내 꼴 이에 이르러서야만 다시 생각을 했고 다시 생각하니 그 뜻을 비로
소 조금 알게 된 것 같다
좁은 문이란 하나만이 들어갈 수 있는 문이요 함한 길이란 두발로도 설 수 없
는 한 오리 핏길일것이다 그것은 출세의 길이 아니요 부귀공명의 길은 물론 아
니지만 문화창조의 길도 아니다 면장 하나만 낸다 해도 서로들 제가 하겠다 머
리싸매고 또 제머리 싸매는 것은 또 좋아도 남의 머리는 반드시 까야 되는 것으
로 방망이 들고 나서는 사람이 열도 스믈도 되는 민족으로서는 꿈도 못꾸는 길
이다
단적으로 말해볼까? 이제라도 우리가 살려면 통일이 되어야지 남북이 하나로
되지 않고는 절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은 알지. 그것은 누구나 다른 말이 없을 것
이다 하나 남북이 통일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나? 백 가지 이론, 천가지 수단
을 다 그만두고 어린 아이도 다 알것이 남한만이 우선 완전히 하나로 통일되지
않고는 아니될 것이다
여기서 국민의 뜻과 힘이 하나가 되지 못하고는 투표요 교섭이요 내세워서 일
을 하게 할 대표자 뽑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것도 저때의 대통령 선거, 민의원 참의원 선거 모양으로 돈 써가며 속여가
며 하려나 ? 공산당도 이 미국 사람 밑 닦을 값어치도 못되는 지전에 팔리는 그
런따위 물건으로 아나? 그렇게 알고 그런 인물들을 또 이번도 대표라, 교섭원
이라 뽑아세우고 이런 꼴로 통일이나 했다가는 유엔 아니라 유엔 할아버지 같은
세력이 김시를 한다 하여도 일잔 서로 만나만 놓으면 이 이론도 주의 주장도 아
무 훈련도 없는 민중이 그 강력하고 지독한 조직에 부디ㅊ혀 풀어져 나가기가
물속에 흙덩이를 던짐같이 쉬운것을 짐작 못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것을 다들
알지, 잘 알지, 그렇기 때믄에 편지 거래하재도 아니, 물자 교류 하재도 아니, 전
기 주마해도 아니,
p 454
투표해 보자 해도 아니, 그저 아니 아니로만 우겨 나간다.
제 실력 없는 것을 아는 것은 어진 일이다. 어리석게 넘어가는 것보다는 비겁
한 듯은 하나 일체 거부하는 것이 차라리 낫다 하지만 어므날까지 그럴수가 있
을까? 그렇게 실력이 없고서야 어떻게 정치를 할 수 있을까? 그럼 실력 어디서
나나? 영웅주의는 지나간지 오래다. 실력은 민중의 뜻인 통일에서만 나오지 않
나? 민중이 하나로 되기만 하면야, 중공인들 소련인들 못 당할까? 주지즉불기승
주라 아무리 악독해도, 아무리 잘 죽여도, 하나로 된 민족을 다 죽이는 재주는
없다 천지에 정의의 법칙이 시퍼렇게 살아 있다 그럼 왜 그것을 하려하지 않나?
그러기에 신문 잡지에 떠드는 통일론처럼 보기에 답답한 것은 없다
한 나
통일은 마치 어느 정치가가 와서 해주기나 할 것처럼 무슨 이론으로나 할 수
있는 것처럼 무슨 재주로나 할 수 있는 것처럼 하는 그 말들은 다 한 손에 묶어
쥐고 “고양이 목에 방울”이라고 해도 좋다
그 의논을 하는 동안에 어서 주린 농가에 밥이라도 한 그릇 먹여 불평을 풀어
주어라 토론 못해 통일 못 하느냐? 실력이 문제다 전 국민이 하나가 되는 힘이
다. 달아야 방울이지 달지 못하는 것이 무슨 방울이냐? 저는 달려 하지 않고 누
가 달면 될 거라는 말은 더 미운 소리다 남북이 절반 절반이요 수로는 여기가
더 많으니 정말 하나 되어 바른 살림을 하기만 하면 우리가 북을 향해 얼굴을
돌이키기 전 그 힘에 끄려 저절로 올것이다 그럼 2천만을 어떻게 하면 한 뜻으
로 만드나? 그러기 때문에 다 죽고 한 사람만 남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 독재자인가? 아니다 남을 다 죽이고 억느르고 내가 하는 것이 독재지,
머든 ‘내’가 다 스스로 죽어서 ‘한 나’가 일어서는 것
p 455
은 독재가 아니다 우리가 다 죽어 ‘한 나’가 된 ‘한 사람’이 하는 ‘한
나라다. 그것이 정말 대한민국이다 한 민족의 목적은 한 사람 되자는 데 한 사
람 내세우자는 데 있다 마치 모든 뿌리가 다 땅속 깊이 죽은 듯 묻히면 한 줄기
가 우뚝서고 그 한 줄기안에 억만 가지와 잎과 꽃과 열매가 다 잇어 한 나무를
이루며 동. 서. 남. 북의 사나운 바람이 불어도 넘어지기는 고사하고 하늘
에 울리는 음악만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죽으면 ’한 나라‘가 선
다. 죽어야 선다.
이 나라가 무슨 나라냐? 싸움하는 나라지. 이 겨례가 어떤 겨례냐? 서로 갈라
지는 겨례지. 이 나라가 싸음해서 이 꼴 된 나라 아닌가? 둘만 있어도 싸우는
민족.
그렇게 몇백년을 내리 싸웠으면 이긴 놈은 다 어디가고 망하기만 했나? 싸음
은 밖에 대해 하는 것인데 우리는 우리끼리 했다 우리는 밖에는 못 나가고 방
구석에서 현제끼리만 싸우는 겁쟁이 였다. 겁쟁이 였으므로 방 구석에서 현제
싸움만 햇고 형제끼리 싸움만 했으므로 점점 더 비겁해 졌고 남이 우리를 업신
여겼고 죽여도 좋다고 판단 했다 안에서 싸우려거든 안의 안인 제 속에서 싸웠
으면 차라리 됐지 하지만 그럴만한 참이 없었다 그러고는 서로 하나가 되어 ‘
한 나’가 됐어야 할 제 지체끼리 싸웠으므로 약해질 수 밖에 없었다
임진란에 백성의 호위하나 없이 비를 죽죽 맞으며 물에 빠진 쥐처럼 임진강을
건너
p 456
의주로 도망한 그가, 나라 일 그 꼴 된 원인이 딩파 싸음에 잇음을 아는데 그
피난을 가서도 그 버릇은 아니 놓기 때문에 한 슬픈 호소 아닌가? 그런데 종시
고치지 않았다 그때만인가 ? 부산 가서도 아니 고쳤지, 지금도 아니 고쳤지, 우
리는 싸움 속에서 시집 장가를 가고, 싸움 속에 밭을 갈고 시비 속에 글을 읽고,
시기속에 아기를 만들고 기른다
이제 갈라짐은 우리 성격이 되고 싸음은 우리버릇이 되었다 우리 핏대 속에
분열이 흐르고 우리 신경속에 음해가 떨고 있다 그러므로 다 죽고 '한 나‘만
남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의미론 6.25도 좋고 이북이 저 혹독한 독재의 종살
이 밑에 고생하는 것이 차라리 좋기도 하다 진시황의 만리장성이 그때는 학정이
있어도 후일 중국에는 큰 도움이 됐듯이 오늘 저 시련으로 인해 수백 년 역사의
곶ㄹ이 떨어진다면 이 다음 새 역사 지을 자격이 거기서 나롤지 누가 알까?
여기서야 이 미국 자본주의의 찌꺼기를 던져주는 것을 서로 다투어 먹노라 끼
고 있어 그 것이 이빨틈에 끼어 썩고있는 밥티 모양으로 모든 인간관계, 사회조
직 속에 틈틈이 끼어있어 썩고 있는 데 그 병이 더하면 더 했지 어찌 낫기를 바
랄 수 있을 까? 4월 혁명을 했어도 여전히 사회에 맑은 기분이 없는 것은 이 끼
어 썩고있는 '달러‘ 때문이다
외국사람이 우리를 본다면 오랜만에 종살이를 면하고 새 역사를 지을 기회를
선물로 받은 우리를 밖에서 본다면 할 일이 하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정치업자 눈은 잠자리 눈처럼 복안인가. 무엇이 그리 토론할 제목도 많고 대가
리 내댈 쌈거리도 많고 건질 명분도 무엇이 그리 많고 따질 이유도 무엇이 그리
많아 일처리는 하나 아니하고 만년 국회만 열고 있을까 물어보면 이유야 다 잇
겠지 하지만 그것을 죽게 된 민중의 눈으로 보면 일본말마따나 방귀같은 이론이
아닐까. 사람이 방금 죽는데 '장발장'이 있다면 예복이고 지위고 전과고 생각할
겨를 없이 마치 바퀴밑
p 457
에 어깨를 들이댔을 거야! 국민의 기분대로 한다면 “제발 이젠 싸움은 그만
두고 사람 살려주오! 500년 서로 갈리는 바퀴에 치었어요”
우리나라에 인물없는 것을 한탄하지만 그것은 무식한 민중에게 하는 소리지
나라 맡은(누가 맡기기나 햇나? 백주에 저희가 날치기를 했지!)사람들에게서 하
면 임물이 너무 많아 걱정이다
저마다 나라를 맡겠다는 것 아닌가? 나라는 하나인데 맡겠다는 사람 많으니
네 갈래, 다섯 갈래로 찢어질 것만은 정한 릴 아닌가. 그런 아까운 인물들..... 하
나님이 만일에 하신다면 요새 우주선도 발달하는 이 시대에 저 항성계로나 하나
씩 실어 보내어 거기서 왕노릇이나 하게 하고 이 못생긴 백성들은 저희 끼리 민
주주의로나 실아갔으면 좋을 것인데 그렇게도 아니되고 이 좁은 큼에서 그 많은
영웅이 씨름하니 애매한 송사리만 못실 지경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만둬라! 개성의 선죽교 지금에 가 볼 수 없고 노량진 머
리의 ㅎ다섯 줌 흙 말하는 것 없고 안국동 남산의 동상 티끌만 쓰고 잠잠히 서
있으니 살길 묻고 말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다
사람의 아들
모세는 과연 잘난 사람이었다 그는 새 나라를 경영함에 있어 옛날 애급서 종
살이 하던 것들을 빈 들에서 다 말리어 죽여버렸다 묵은 버릇 새 나라에 물들까
해서 한 일 아닌가? 그러기에 애굽의 누룩 종자까지 가지고 오지 못하게 했지
그 뿐인가? 자기 자신까지 요단을 건너지 않고 이쪽에서 죽기까지 기다렸다 왜?
한 사람을 민중에게 주기 위해서다
그랬기 때문에 어제까지의 심부름 젊은이가 오늘 나서면 손에 칼하나 잡지않
고 나팔만 불어 대적의 성을 무너뜨릴 수가 있었다. 하나님의 이적이라 하지 마
라. 한 사람을 가진 민중의 힘은 그런
p 458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기적 아닌가. 그러고 보면 이스라엘 역사를 꿰뚫는, 어느
의미론 인류의 역사의 중축이 되는 ‘메시야’란 것은 다른 것 아니요 모든 사
람이 다 죽어서 일어서게되는 ‘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 뜻을 이 날껏 몰
랐었다
한 사람 안에서야 전체가 살게 되므로 그를 구세주라 한다 예수는 그것을 깊
이 깨달은 이요 그대로를 산 이다. 사울도 모든 사람을 다 없애고 세운 한 사람
이었고 다윗도 온 백성을 보지 않고 세운 한 사람 이엇다 또 모든 민족의 모든
지도자가 다 그것이건만 다 힘이 되지 못했다 협짭꾼이 돼버렸다.
그들은 다 모든 사람이 죽어서 한 사람이 일어서는 것은 알았어도 또 그 한
사람마저 죽어야 하는 줄은 몰랐다 그 한사람이 죽어서 전체가 도로 살아남을
몰랐다 예수는 메시아 곧 한사람을 바로 알았으므로 그 마저 죽어야 사는 것암
을 알았으므로 그렇게 살았다 그러므로 그 사람은 참으로 한 사람일 수가 있었
다 그러므로 그 사람은 ‘나’를 바로 쓸수 있었다 그리하여 능히 “내가 길이
요, 진리요, 생명이라” 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죽은자의 말을 산 자들이 알리가 없었고 산 자의 말을 죽은자들이 알
리가 없엇다 “내가길이요” 하니 어리석은 그들이 “예수가 곧 길이요, 예수가
곧 진리요, 예수가 곧 생명이다”하며 “천하인간에 다른 이름으로는 우리가 구
원을 얻을 수 없고 오직 이 이름으로써더” 하니 ‘예수’로 알아들었다
그러나 어디 예수의 뜻이 그러했을까? 그는 다만 ‘나’라 했을 뿐 이다
내가 누굴까? 모든 사람의 다 즉음으로 서게되는 내가 예수일까? 그러므로 그
는 내논 살림을 하게되면서부터 예수라는 이름을 스스로 부르지 않았다 다만 ‘
사람의 아들’이로다 했지 모든 사람이 죽어서 내가 있으면 또 내가 죽어 전체
가 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을 실행한 것이 그다. 그리고 그는 참 나라의 임금이
라 했고 하늘나라가 너희안에 있다고 사람들보고 말하였다 그것이
p 459
그가 인류에게 보여준 살길이었다 우리가 바로 알아 듣는다면 이렇게 말할 것
이다 내가 뭐냐? 끝없이 나감이 나요 진리를 함이 나요 삶이 곧 나다 내이름이
뭐냐? 길이 내 이름이요, 참이 내 이름이요. 생명이 내 이름이지 구원이 뭐야?
이름을 얻음이다 이름이 어디있느냐? 이름은 천지에 하나 뿐이다 내몸에 붙인
이름을 버리고 ‘그 이름’을 받을때 나는 영원한 존재가 된다
씨가 떨어진 자리에서만 싹이 나고 알이 깨진 담에야 닭이 나온다면 죽는 자
리, 죽는 시간에야 내가 살아날 것이다 씨는 나무를 위해 죽은 것이요 알은 닭
을 살리기 위해 죽은 것이다 나는 사람이 되기 위해 전체를 살려내기 위해 날마
다 자기를 십자가에 내주는 ‘그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날나다 죽어야 할 것
이다 벌써 죽었으면 벌써 살았을 것이다
님이여 살길을 찾는 나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살길을 가르치려는 나는 더 어리
석은 자입니다 만번 죽어 마땅합니다
죽지 못한 죄에 대한 벌 받음이 이 어리석음이요 이 고집이요 이 헤맴 이욕심
입니다
말 못할 것을 말하려는 죄를 용서하옵소서!
아벨처럼 죽음으로 영원히 말하게 합소서!
삼손처럼 죽음으로 무한히 이기게 합소서!
예수처럼 죽음으로 영원히 용서해 나가게 합소서!
p 460
해방의 날에 새 세대에게 주는 말
국민성격을 닦아 세우는 일
해바이 된지 33년이니 이제는 그 후에 난 세대가 완전히 사회의 중견이 됐습
니다. 앞으로의 나리의 운명은 그들의 생각에 달렸습니다 그들은 과연 씩씩하고
올바른 성격을 가지고 있을까?
나는 1948년 간디가 어리석은 완고파에게 암살을 당한 후에 그의 죽음에 대하
여 쓴 스탠리 존슨 목사의 책에서 읽었던 한 구절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는 간디를 끝까지 분열되지 않은 하나의 인도를 건설하려고 노력을 하다가
희생이 된 사람이라고 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새로 세워진 나라의 국회의원
을 한 사람 만나 당신들이 하는 일이 무엇이냐 하고 물었더니 그는 대답하기를
‘국민 성격을 닦아 세우는 일’이라고 했고 셋째 사람을 마나 또 같은 질문을
했더니 그도 또 마찬가지로 ‘국민성격을 닦아 세우는 일’이라고 했다고 했습
니다. 존스는 그러기 때문에 인도는 문제가 많지만 장래가 유망하다고 덧붙여습
니다.
인디라 간디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독재정치를 시작했다가 반대
p 461
에 부딪쳐 쫓겨나고 새 정부가 그 뒤처리를 시작할 때는 남의 일로만 생각되지
않아 조마조마한 생각으로 지켜보았는데 데자이의 정부가 아주 침착하게 하면서
어느 나라같이 잡아라, 가두어라, 해치워라 식으로 하지 않는 것을 보고 고마운
심정에서 위에 말한 존스목사의 말을 또 한번 생각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개인
에서와 마찬가지로 나라에서는 성격을 다듬어 세우는 것이 가장 먼저 하여야하
는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국민성격은 어떻게 닦이어지느냐 하면 마치 금강산의 찢어진 화강암들
이 긴 세월, 비바람 속에 버티고 섰는 동안 만물상을 아로새겨내듯이 나고 죽고
죽고는 또 나는 허다한 씨알이 사적, 공적, 또 내적,외적 허다한 사건들을 겪으
며 삶을 퍼나가는 동안에 다듬어지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큰 역사적 사
건을 어떻게 치러나가느냐 하는 데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해방절의 의미는 큽니다. 이것은 단순히 잘했다못했다, 얻었다
잃었다, 기쁘다 슬프다, 자랑스럽다 부끄럽다의 차원이 아니라 아주 나라로서 죽
었던 살아난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늘 말을 하는 사건입니다 얼글 위의
조그만 상처는 며칠 몇 달에 나으면 그만이지만 치명적인 상처나 죽을 병을 앓
고 난 자국은 일생을 두고 말을 하는 것이고 건강 문제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신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법입니다
해방절이 말하는 의미는 그런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은 기억할 뿐 아니
라 늘 되씹어야 하는 사건입니다 인격수양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반성입니
다 증자의 “오일삼성오신”이란 말은 너무도 유명한 말이지만 사실을 말한다면
어찌 세가지 뿐이겠습니까? 천가지 만가지로 한 일을 되씹으며 일 생각해보고
저리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역사는 한 번 읽고 마는 것이 아니라 늘 다시 읽고 다시 읽어
야 하는 것이며 읽을 뿐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고 음
p 462
미해야 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내 정신이 자랄 뿐 아니라 나라가 자랍니다. 그
렇게 하여서 자라는 모든 사람의 생각과 정신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형
식으로 서로 작용하여서 국민성격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랬다저랬다
하는 정도를 넘어서서,이유를 스스로 알고서 하는 뚜렷한 방향이 잡힌 원리가
될 때 그것은 하나의 역사적 국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잊지
않는다는 것은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을 말하는는 것 아닙니다. 기억에는 있어도
그것이 내 생각,내 믿음, 내 인생철학,내 국가관 사회관에 아무런 영향도 미친
것이 없다면 그것은 잊어버린 것입니다. 예를 든다면 일찍이 내가 남의 종살이
를 했다는 기억은 아무리 있어도 그것을 부끄럼으로 알지도 않고 잘못으로 알지
도 않으며,이째서 그런 일이 있게 됐더라도 모른다면 그것은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잊어버린 사람은 잘못을 되풀이합니다.
우리 민족은 놀라운 민족
그런 의미에서 나는 우리 역사는 잊어버림의 역사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재주
가 부족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경험을 되살릴 줄을 모릅니다. 파고드는 정신,
한번 생각한 것을 기어이 관철하고야 만다는 끈질긴 의지가 모자라지 않는가 합
니다. 조상이 피땀으로 개척한 남북만주의 그 살진 옛터를 한번 빼앗기면 그만
이었지 도로 찾을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윤관의 원정,김종서의 개척이 있지 않느냐 할지 모르지만 압록강 두만강 언저
리에서 어리대다 말았지,그 이상을 나가지 못했습니다. 일제시대에 한 민주 이민
과 만주제국 건설을 말하는 이가 있을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남의 강제에 못 이
겨 쫏겨난 것이요,남이 하는 강도질의 앞잡이 노릇을 한 것이지 결코 나라땅 찾
자는 생각,무너진 역사 바로잡자는 뜻에서 한 역사적 활동이 아닙니다.
p 463
그것은 차라리 아니했던 것만도 못한 비겁한 죄악입니다.그것이야말로 역사적
원한을 잊어버린 바보의 짓입니다.나 자신이 제국주의의 강도질로 망국노의 신
세가 된 것을 알고 분히 여길진대,이제 또 나와 같은 운명에 떨어지는 만주 민
족을 착취해 먹겠다고 그 일제의 손톱 발톱이 됩니까? 이 수치스러운 죄악이 다
역사 망각의 병에서 나온 것입니다.
일찍이 동북아시아의 만주 시베리아 평원에 드나들었던 민족이 하나 둘만 아
닙니다. 아마 자세히 세어본다면 열 손가락에 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최근까지 300년이 넘도록 중국 민족을 정복하고 지배
했던 만주족조차도 이제 남아 있는 종자가 없습니다.그들은 힘으로는 중국을 정
복했지만 문화적으로는 도리어 그들에게 정복당하여 끓는 솥에 뛰어들었던 눈덩
어리의 신세가 돼버렸습니다.거기다 비한다면 우리 민족은 우리 스스로의 일이
지만 실로 놀라운 무엇을 가진 민족입니다. 그 무엇을 무엇이라 이름할지는 가
벼이 말할 수 없으나 모든 고난을 견디고 이기고 남은 그 무엇이 우리에게 있
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중국 민족은 역사의 먼동트기부터 우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엄청나게 큰 민
족입니다. 땅이 그렇듯이 국민성격도 대륙적입니다. 체통있고 고상하고 덕도 있
지만 또 교만하고 탐욕적이고 횡포하기도 합니다. 최근으로는 6.25때 그 인해전
술로 우리가 체험해본 것입니다. 위에서 끓는 솥이라 했습니다만 역사시대 이래
그 끓는 솥 속에 사라진 민족의 수가 얼마일까? 일일이 세기 어렵습니다.그런데
선악 양면으로,거의 절대적으로 강압적인 세력 밑에서 주체성을 잃음이 없어 오
늘까지 온 우리 운명을 생각하면 스스로 놀라움에 자리를 고쳐 않지 않을수 없
습니다.그러나 또 다시 한 번 뒤집어 생각해볼 때 그러한 경탄할 만한 바탈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부인할 수 없는 취약성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
입니다.
도대체 그 끓는 엄청난 솥의 솟구쳐오르는 끓는 거품이 우리 머리 위를 덮어
씌우기를 몇 번이나 했습니까.이기고 났노라고 자랑의
p 464
머리를 흔들기에는 그 고난은 너무도 심한 것이었습니다.그런데 우리는 그것
을 그때그때 모면은 했지만 그것을 근본적으로 해결해보려는 태도를 가져보지
못했습니다.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장점이 약점이 됐습니다.
한 번 이기고 난 것이 다음 재난을 부르는 원인이 된 셈입니다.이것은 우리
성격의 근본적 결함 아닐까? 내가 중국과 우리와의 관계를 생각할 때 그 모양을
곤륜산 꼭대기에서 굴러내려오는 바위와 그 앞에 놓인 알로 표시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해방의 감격 어디갔나
대체를 보는 사람이 지혜있는 사람입니다. 바로 보기만 하면 절대 잊어지지
않습니다.우리가 오늘 기념하는 해방의 날은 위에서 말한 그러한 배경 앞에 놓
고 보아야 합니다.
굴러가는 알처럼 몇 번을 아슬아슬한 지경에 가면서도 번번이 빠져나가곤 했
던 그 역사가 아주 미끄러져 한 때 물속에 빠져버린 것이 1910년에 일어났던 망
국이라는 사건입니다.생각해보십시오.그것이 얼마난 사리에 어긋나고 비통한 일
인가. 동북아시아의 여러 민족이 서로 겨루고 서로 다투는 오천년 역사극에서
그 의미를 한등에 짊어지고 홀로 살아남은 여 주인공이 대사를 외기도 전에 무
대에서 떨어졌으니 그것을 어느 가슴이 아니 통분해 하겠습니까?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구원되어야 한다는 부르짖음을 어느 입이 아니할 수 있
습니까?이것이 해방의 복음이 어떻게 하여서 오게 됐느냐 ,또 앞으로의 나갈 길
이 어디로 놓였느냐 하는 것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역사적 문맥입니다.
해방이 왔을 때 전 민족이 어떻게 감격했느냐 하는 것을 후에 난 세대는 모르
는가 봅니다. 그것을 그렇게 만든 죄는 기성세대에 있습니다.성공이거나 실패거
나 기쁨이거나 슬픔이거나,그것을 길이 기억하는 데,그리하여 그것을 다음에 하
는 창조활동의 원천으로 삼는
p 465
데 그 의미가 있습니다.
기억이 사람입니다. 기억 못하는 것은 짐승입니다.조상 제사할줄 모르는 것은
사람이 아닙니다. 정치,예술은 조상 제사에서 나왔습니다.기억이 오래 못 간다는
것은 마음의 옅은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나는 무엇보다도 아쉬운 것은 해당 당
시의 민족적 감격이 사라져버린 일입니다.새 역사 창조는 그것만으로야 되는 것
인데 그것이 장마에 하루아침 돋아났던 버섯처럼 맥없이 사라졌습니다.
자람의 한 매듭을 짓는 역사적 창조는 냉랭한 이론이나 숫자의 벌려놓음만으
로는 되는 거 아니라,권모술수로 되는 것 아니라,반드시 국민적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무엇보다도 그래야,그러한 가운데서야 국민이 하나됨을 얻을 수 있습니
다.하나됨 없이 서로 경쟁하는 이기심,기업심,타산심 가지고는 그러한 역사 창조
는 아니됩니다.오늘 같은 이러한 심리,이렇게 메마르고 이렇게 믿을 수 없고,이
렇게 퇴폐적인 심리에서는 절대로 역사의 향상,진보는 없습니다.돈,돈,돈,멋지게,
멋지게,그러다가 로마는 망한 줄을 모르십니까?
해방이 되던 날 온 민족인 잘난 사람,못난 사람,죽일 놈,살릴 놈,어진 이,바보가
일시에 없어졌습니다.그저 살아 있는 것은 하늘 뿐이요,‘우리 민족’뿐이었습니
다.마치 푸른 하늘의 구름산처럼 주인도 없이,시키는 이도 없이,그저 한덩어리로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습니다.크고,작고,두드러지고,오므라진 허다한 봉우리들이다
그저 하나,전체의 영광에 빛날 뿐이었습니다.그것은 시요,찬미요,기도요,철학이었
습니다.
민족전통의 정신을 찾자
그런데 그것이 열흘이 못 가고 산산 부서져버렸습니다.어째서입니까?잊어버린
것입니다.어제까지 하던 고생,그 받던 업신여김,그 당하던 억울,그 호소할 데 없
던 심정,그 답답했던 가슴을 잊어
p 466
버렸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게 됐습니까? 새로 눈이 뜨였기 때문입니다.무슨 눈?현실주의,이기주
의,나,내 것에 눈이 다시 뜨인 것입니다.그러니 그러한 소소하고 어지러운 욕심
의 눈이 다시 뜨이니,일제 밑에서 공동으로 같이 당했던 억울한 고난과 슬픔은
다 잊어버리고 소소하고 어지러운 사사감정만 다시 살아나게 됐고,그러니 저녁
노을같이 찬란했던 평화와 장엄의 빛,하늘에서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해방을 기념한다 할 때마다 젊은 세대에게 반드시 알려주고 싶은 것은 이 감
격이요,이 감격을 올 수 있게 했던 그 해방 전야의 고통과 슬픔입니다.그런데 그
것을 할 수 없습니다.나는 늘 말하지만 우리 기성세대는 릴레이 경주에서 배턴
을 넘겨주지 못하고 엎어진 사람들입니다.마땅히 이 슬픔과 부끄러움과 이 기쁨
을,생활을 통해 전해드렸어야지요.그래야 역사입니다.그런데 그것을 못했으니 그
미안함을 말로 할 길이 없습니다.
역사는 가차없습니다.넘어진 사람은 아무리 넘어졌어도 뒤에 이어 뛰는 사람
은 반드시 그 배턴을 찾아들고 뛰지 않으면 안됩니다.전통 없이는 새 창조 있을
수 없단 말입니다.그러기 때문에 기성세대가 아무리 실패하였다 하더라도 새 세
대는 제 손으로 그 전통을 찾아내어야 합니다. 아버지가 빚을 지고 죽었으면 그
빚 알아내서 깨끗이 해결하는 것이 아들 노룻 하는 일입니다.그러면 거꾸러졌던
아버지를 일으켜 세울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아들은 아버지를 살려내잔 것입니다.죽은 아버지를 피하면 저도 사
람되기를 잃어버립니다.역사는 가혹한 것입니다.그러나 그 가혹 속에 살려내는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잃어진 배턴은 반드시 그 주변 어디에 있을 것입니다.그
주변이 어디입니까?정치 주변입니다.당초에 역사를 살려내는 그 감격을 소멸시
켜 국민을 더러운 이기심,현실주의에 빠져놓은 것이 누구의 소행이냐 하면 정치
인들이 한 것입니다.
오늘 사회의 중견이 되는 새 세대는 불행히 생활로는 못 배웠더
p 467
라도 해방 이후의 정치과정을 잘 살피면 그 떨어져 있는 배턴,곧 민족전통의
정신을 찾아낼 수 있을것입니다.
분리해야 할 정부와 민중
며칠 전 조선일보에 동경에 특판원으로 가 있다는 이도행이라는 기자의 ‘일
의 한국관이 달라졌다’라는 글이 실렸습니다.나는 그 글을 읽으며 여러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더구나 나는 5.16정권의 첫날부터 오늘까지 민주투쟁을 해오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첫째,‘한국관’이라‘반한’이라 하는 말을 썼는데 그 ‘한’이란 어떤 뜻으
로 쓴 것일까?그것은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것인가,아니면 지금의 정부를 가리키
는 것인가?정부 없는 나라는 없지만 정부가 곧 나라를 참으로 대표한 일은 세계
어디서도 한 번도 없습니다.그 둘은 분명히 구별해서 말하여야 합니다.
나는 일본을 말할 때는 두 개의 일본을 생각합니다.하나는 메이지유신으로,청
일전쟁,러일전쟁,태평양전쟁으로, 일본 정부로 대표되는 일본이고,또 하나는 일본
민중으로 대표되는 일본입니다.그리고 그 어느 것이 참이냐 하면 민중의 일본이
참입니다.그러므로 우리나라를 먹었던 것은 러일전쟁을 했던 군국주의,제국주의
의 일본이지 일본 민중이 아닙니다.물론 군국주의자들이 한국 땅에 와서 청일,러
일 전쟁을 하도록 가만두었고,태평양전쟁에 한국 사람을 강제로 징용하게 가만
보고 있었다는 의미에서 일본 민중도 참여했다고 할 것이지만,그 책임을 묻는
자리에 가면 결코 일본 민중이 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양편이 다 평화적인 민
중으로 있을때 거기는 아무런 침략도 배척도 있을 수 없습니다.
민중을 속이고 강제하여 전쟁을 하게 하고 침략하게 한 것은 군국주의의 정치
가와 거기 붙어먹는 재벌들입니다.한일관계를 말할때 더구나 오늘같이 민중의
생각이 다양하게 되는 때에 있어서는
p 468
더욱 그렇습니다.대개의 경우 지배자들은 자기네의 침략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전체의 이름을 도둑질하지만 이제는 ‘무지막지한 백성’이라던 옛날과는
다르니 그 점은 분명히 구별해 말하여야 할 것입니다.특히 한일관계에서 그렇습
니다.
김대중으로부터 시작된 일본인들의 한국에 대한 관심은 문세광,긴급조치,한일
유착 등 몇가지 해묵은 규탄의 재료들로 그들의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반감과
혐오감을 스스로 증폭시키며...
하는 말은 두 나라 사이를 크게 잘못 만드는 잘못 사용된 말들입니다.김대중,
문세광,긴급조치 등을 못마땅히 생각하고 비판하는 일본인이 있다면 그것은 자
기나라를 위해 또 인도주의를 위해 하는 말일 것이지 무엇 때문에 한국 사람에
대해 반감,혐오감까지를 일으키기까지 할까.납득이 안 가는 말입니다.그러므로
그때의 ‘한국사람’은 ‘한국정부’로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그런데 그것을 혼
동하면 실수건 고의로건 그것은 크게 잘못된 말입니다.‘내가 국가다’하는 루
이 14세때라면 몰라도 지금은 될 수 없는 말입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이런 것이 다 역사,특히 해방과 그 전야의 역사를 잊어
버린 데서 오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입니다.나는 친일주의자도 아니지만 배
일주의도 아닙니다.나만 아니라 제대로 있는 씨알은 누구나 다 그럴 것입니다.일
본 사람을 미워할 수 는 없지만 일본을 한때 지배했던 군국주의,제국주의는 미
워하고 거기에 대해 싸워야 합니다.해방 직전 일제 말년에 우리 모양이 어떠했
는지 젊은 세대들은 아십니까?
잊을 것,잊지 않을 것
첫째,식량이 없었습니다.하루에 2홉 3작으로 제정해 배급하는것으로 살아가려
니 밥을 밥같이 먹을 수 없었습니다.못 하나,양철
p 469
판 하나를 구하려 해도 어디 가 살 곳이 없었습니다.경제가 갈진했습니다.
그런제 오늘 이 소비경제랍시고 낭비하는 꼴을 보면 정신 있는 국민이라 생각
이 되지 않습니다.그리고 무슨 경로를 밟아 누구의 손으로 왔든간에 돈이 생기
고 물건이 생기면 좋아합니다.그것이 역사의식 있는 민족이겠습니까?그러니 되
기야 빚으로 됐거나 참 생산으로 됐거나 물량이 풍부한 듯 하면 자유고 정의고
인심이고 다 팽개치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 하겠지만 사람은 역시 사람입니다.늘
그렇지는 못합니다.진리는 틀림없이 승리하고야 마는 것입니다.꼭 사슬을 져야
노예가 아니라 자유하는 정신을 잃어버린면 그때 벌써 노예입니다.이것을 염녀
지간에 두는 것이 종살이의 비참을 보지는 못하고 해방된 하늘 아래 난 세대들
의 할 일입니다.
끝으로 가장 중요한 것이 잊지 않으려면 반드시 잊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말
입니다.옛글에 ‘성인은 그 잊을 것을 잊고,그 잊지 않을 것을 아니 잊으며 소인
은 그 잊지 않을 것을 잊고,그 잊을 것을 아니 잊는다’하는 말이 있습니다. 잊
을 것은 무엇이고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나요,잊지 않을 것은 전체
입니다. 잊을 것은 몸이요,잊지 않을 것은 정신입니다.욕심은 될수록 잊어야 한
는 것이고,진리는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둘은 서로 배제하는 것입니다.그러므로 다 같이 할 수 없습니다.나
생각하면 전체 잊어버리는 것이고,전체에 살면 나는 자연 잊어지는 것입니다. 욕
심은 제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나라한다니 그것은 거짓말입니다.나 자신을 억제
할 줄 모르면서 자유를 위해 싸운다니 빈말입니다.참 나라를 사랑하십니까?그러
면 내 뜻대로 할 생각 마십시오.
이제 나라를 잡아당겨 한다 할진대,내 그 되지 않음을 볼 뿐이다(혹,내 그 마
지못함을 볼 뿐이다).
나라는 성스러운 그릇이라 할 수 없느니라.
p 470
하는 이는 깨지고,잡는 이는 놓친다.
장욕취천하이위지 오견기불득기
천하신기 불가위지
위자취지 집자실지
노자의 말입니다.아닙니다.어느 개인의 말이 아니라 부국강병주의로 백성들을
어지럽게 하는 때에 역사가 입을 빌어 외친 경고입니다.
잊을 것을 잊어버립닛오.그러면 역사의 음성이 생생히 깨어나 명령을 해줄 것
입니다. (1978)
p 471
젊은 여성에게 주고 싶은 말
젊은 여성이라면?
생김생김을 관계말고,태어난 집안의 높고 낮음을 생각 말고,돈이 있어나 없거
나,지식이 많거나 적거나,재주가 깊거나 옅거나,그 차이를 도무지 보지 말고,그저
젊은 여성이기만 하다면?
스물에서 마흔까지,살갗에 꽃이 피어나 있으며,숨에 향기가 들어 있고,목소리
에 사람의 혼을 어루만지고 흔드는 보드라움과 맑음이 있고,눈동자에 영원을 향
해 애타는 속삭임이 들어 있는 때라면?
그것은 거룩한 생명의 아름다움과,사랑스러움과,신비로움이 볼 수 있게 나타난
것이다.
젊은 여성의 할 일은 그 받아 가지고 있는 것을 어떻게 스스로 깨달아 잘 쓰
느냐 하는 데 있다.
잘 쓰면 심청이요,잔다크요,마리아지,잘못 쓰면 양귀비요,클레오파트라요,살로메
지.
트로이를 온통 멸망을 시켜 잿더미가 되게 한 것은 이 생명의 선물을 잘못 쓴
젊은 여자였고,티벨하 옆 조마구 같은 일곱 언덕에 일곱 갈래로 갈라져 싸우는
사나운 사나이들을 한데 녹여 한 로마시를 만들어,유럽 역사의 마루가 되게 한
것도 역시 이 생명의 선
p 472
물을 바로 쓸 줄 안 젊은 여자들이었다.
단테가 지옥 길을 더듬으며 드디어 천국엘 올라가려 할 때 앞장을 선 것이 젊
은 베아트리체 아니었던가?
루터가 워름쓰의 기왓장보다도 더 많은 악마와 싸우려고 불을 뿜으려 할 때에
그의 가슴속에 불씨를 던져주었고,그 불이 꺼져가려 할 때마다 뒤에서 켜질을
해 일으켜준 것이 그의 젊은 아내 아니었던가?
여자는 풀무요 용광로이다.
산을 빼는 항우가 우미인 앞에서 녹아버려 영웅답지 못하게 질질 울었다 해서
가 아니요,사자를 찢는 삼손이 데릴라 앞에서 혼이 빠져 믿음의 사람답지 못하
게 뒹굴었다 해서가 아니다.
모든 쇳물,모든 녹슨 파쇠가 반드시 한 번 풀무 속에 들어가 가지고야 찌끼를
벗고 새 쇠가 되어 나오듯이,모든 역사 모든 문화의 낡은 찌꺼기와 썩음을 벗겨
치우고 새 시대를 짓는 새 사람은 반드시 여자의 탯집속에서만 나오기 때문이
다.
역사의 갈려 새로워짐은 반드시 새 세대로야 되는 것인데,새 세대의 양심의
틀거리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잡힌다.모든 혁명은 여자의 탯집 속에서 시작된다.
여자는 아기를 낳는다.
역사를 이어가는 생명의 고리는 여자라는 풀무 속에서 저 거룩한 대장장이의
신비의 손으로 이어진다.역사의 새벽부터 밥을 짓는 것은 여자의 일이었다.모든
창작과 건설의 근본이 되는 건강과 힘은 밥 짓는 여자의 솜씨에 달려 있다.
짐슴의 지경을 겨우 면하던 한 옛적부터 옷을 짓는 것은 여자의 일이었다.쉬
임없이 자라나는 영원한 생명에다가 늘 새 형식을 주어 길러온
p 473
것은 저의 힘이었다.
문화의 첨부터 빨래는 여자의 일이었다.새롭고 또 새롭고,낡고 더러운 것 속에
서 새롭고 깨끗한 것을 끄집어내는 끊임없는 새롬의 근원이 저에게 있다.
이것들을 하기 위하여 생명이 저에게 깃으로 준 것이 그 몸에 피어 있는 아름
다움이요,그 목소리에 들어 있는 사랑스러움이요,그 눈동자에 깃들어 있는 신비
롬이다.
왜 그런가?
예로부터 착함과 슬기롬과 날쌤을 천하에 뚫린 세 덕이라 하지만,그 덕을 다
갖추고라도 거기 만일 아름다움,사랑스러움,신비로움이 없다 해봐!그럼 인생이
어찌 됐을까?
또 요새 사람들이 자유와 정의를 목소리를 다투어 서로 부르짖지만,그 두가지
권리를 다 보장받았다 하더라도 거기 만일 조금이라도 아름다움,사랑스럼,신비롬
이 들어 있지 않다 해봐!그럼 이 세상이 어찌 됐을까?
그런데 길을 가노라면 하늘에서 받은 그 귀한 자격을 제 손으로 다 뜯어 망가
치우고,여성 아닌 여성,여성도 남성도 아닌,사람도 짐승도 아닌,흉칙하고도 가엾
은 형상들이 어찌도 그리 많은가?
풀무가 깨졌으니 역사는 장차 어찌 되는 것일까?
소젖,염소젖을 먹이면서 되기는 사람의 아들이 되어 달라니 그런 법도 있을
까?
밥을 짓는 손이 찬데 그 밥이 따뜻할 수 있으며,그 밥을 먹고 살이 찔까?
옷을 짓는 손이 보드랍지 않은데 그 바늘땀이 고울 수 있으며,그 옷이 몸에
맞고,입어서 맘이 편할까?
빨래하는 손이 깨끗치 못한데 그 빨래에서 때가 빠질 수 있으며,입어서 맘이
가쁜할까?
p 474
역사는 이제 큰 변화를 하려 하고 있다.
새 사람을 기다린다. 새 도덕 새 종교를 목말라 기다리고 있다.사람들의 마음
은 거칠어질 대로 거칠어지고,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지고,얇아질 대로 얇아졌다.
이 속알 다 빼먹고 내버린 녹슨 통조림 통 같은 오늘 사람을 한데 녹여 그 찌
끼를 다 제하고 번쩍이는 쇠 같은 새 사람을 만들어 줄 용광로는 어디 있을까?
종교가들은 그들의 구주가 서방정토에 있다 하고,구름을 타고 온다 했다고,서
편만 바라고 있고 공중만 쳐다보고 있겠지만...
하늘과 땅의 사이가 되는,형상없는 형상인 구름 어디 있을까?
모든 빛깔과 선이 다 녹아 엷어질 대로 엷어져 뚫려 비치는 영광만인,모든 욕
심과 번뇌가 다 식어버리고 오직 평화만인 서편 하늘은 어디 있을까?
젊은 여성의 뱃속,혼 속 아닐까?
이 인간의 살림의 모든 기쁨,모든 슬픔,모든 이상,모든 소망,모든 실망,모든 눈
물이,다시없이 약하고 다시없이 느낌 많은 여성의 그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신비
론 혼의 용광로를 거쳐,끓을 대로 끓고,탈 대로 탄 후 무한을 향해 피어올라,영
원의 찬 바람을 만나 식으면 그것이 정말 구름이다.그 속에 새로 올 세대의 가
지가지의 환상과 꿈이 들어 있다.
젊은 여성의 가슴속에 서리서리 서려있는 이 구름을 타고서야말로 인자는 올
것이다.아미타불의 나라는 열릴 것이다.새 시대의 주인은 올 것이다.
우리나라 3백만 젊은 여성들,아들을 낳아주! 새 세계를 지을 혁명가를 낳아주!
아멘,아옴.(1961)
p 475
젊은 세대에게 주는 말
혼돈에도 절망하지 말라
오늘 이 시대의 특색은 가는 곳마다 말세감이 짙은 것이다.세상이 다 돼간다
라는 것이다.그런 느낌은 사실은 생각하는 인간에게는 언제나 있는 법이다,삶의
성질상 그럴 수 밖에 없다.시간은 언제나 말세적이다.
소위 평상시라는 때,태평시대라는 때에는 어느 일부의 매우 민감한 사람들,곧
예언자,선각자 하는 사람들에게만 국한되고 일반 사람은 이른바 태평의 꿈속에
서 안심하고 산다.노아는 절박감에 몰려 방주를 묻는 망치질에 바쁜 때에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들고 사고 팔면서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어느 시간이 오면 모든 사람이 그 다 됐다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그
것이 말세다.지금은 아직 그러한 전반적인 불안 공포에 빠지지는 않았지만 그런
생각이 상당히 퍼져 가고 있고 깊어져 가고 있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인가?
삶의 틀거리에 흔들림이 온 것이다.삶은 하나의 틀거리를 가지고 있다,우리가
말해서 ‘세상이..’‘사람이...’‘이 우주에’
p 476
하는 것은 이것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이것은 우리의 생각하는 능력 때문에
있는 일이다,우리가 보통 말할 때는 사람,동물,식물,무생물,물질,정신,이제,옛날,하
지만 이 삶은 혹은 이 우주에는 그런 갈라진 것은 없다.우리는 하나의 우주에,그
보다도 하나의 우주를,살고 있다.인생 없는 우주도,우주 없는 인생도 없다.창조물
내놓고 창조자가 따로 있을 수도 없고 창조자 내놓고 창조물이 따로 있을 수도
없다.그저 하나의,하나인 삶이 있을 뿐이다.생각을 하자면 시간이요,공간이요,정
신이요,여러 개의 차원을 그릴 수 밖에 없지만 생각하게 하는 그 ‘한 생각’에
는 그런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없다.
우리가 말해서 옳게 살아간다 할 때는,엄정한 의미에서 그런 것은 없지만,마치
봄 속에서 나와 천지와 만물이 봄을 사는 모양으로 그 하나의 틀거리 속에 살지
만,꽃이 피고 질 때는 봄의 오고감을 느끼는 모양으로,어느 때에 가면 그 우리를
낳고 살리고 있게 하는 그 하나의 틀거리의 이루어짐,무너짐을 느끼게 된다.그
무너지려는 흔들림을 느끼는 것이 소위 말세다.인도 사람들은 그것을 우주의 밤,
우주의 낮으로 표시했다.
그런 흔들림이 올 때는 우리는 세상이 어지러움에 빠졌다고 한다.지금은 어지
러운 시대다.아마 그 시작일 것이다.어지러움은 반드시 앞으로 더 심해질 것이
다.일엽지추라,떨어지는 오동잎 속에 가을을 보는 것이 예언자다.
어지럽다는 말 속에는 두가지 뜻이 들어 있다.하나는 거기 지켜야 하는 무엇
이 있다는 뜻이요,또 하나는 지킬 능력이 없다는 뜻이다.지켜야 하는데 지킬 능
력이 없다.지킬 능력은 없는데 지켜야 한다.여기 고민이 있다.지금은 고민하는
시대다.
지키긴 무엇을 지키란 말인가?질서다.나는 여기 서고 너는 저기 서며 너는 이
렇게 하고 나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아니되는 어떤 차례가 있다.그것을 깨달아
지켜야 한다는 말이다.그것을 우리는 가치체계라고 한다.흔들림은 이 가치체계의
무너짐에서 온다.오늘
p 477
우리 사는 사회가 불신,불안,불평에 빠졌다는 것은 이 가치체계 곧 모든 사상
행동이 표준이 없어지게 된 데서 오는 것이다.그러나 가치체계가 무너졌기 때문
에 흔들림과 어지러움이 왔지만,동시에 그 무너짐 뒤에 우리는 강하고 엄한 다
시 세우라는 명령을 듣는다.그것을 들을 줄 아는 것이 사람이다.
그것은 이 삶이 자라는 삶이기 때문이다.위에서 틀거리를 가지는 삶이라 했지
만 그 틀거리는 자라는 틀거리다.집이라기보다는 몸이라 해야 할 것이다.몸은 자
라는데 집은 자라지 못한다.몸이 자라는 것은 삶이 곧 자라는 삶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이 자라는것이고 보면 세상에 자라지 않는 것은 하나도 있을 수 없다.
집도 자라지 않는대 했지만 참 뜻에서 자란다.오늘의 건축은 5만 년전의 굴과
나뭇가지에 틀었던 둥지에서 자라나온 것 아닌가.
과학은 이 우주가 자라는 우주라고 한다.종교에서도 깊이 보면 하나님도 자라
는 하나님일 것이다.절대고 보면 그 속에 변도 불변도 다 있을 것 아닌가.변과
불변이 합하면 자람이다.변하면서도 변치 않는것,변치 않으면서도 자꾸 변하는
것,그것은 자라는 자다.동서양을 비교해보면 재미있다.동양은 덧없는 것을 보았
는데 보수적인 역사가 나왔고 서양은 영원불변하는 것을 보았는데 진보적인 역
사가 나왔다.그런데 또 진보적인 역사는 막다른 골목에 들게 됐고 보수적인 역
사는 거기 비약을 가르쳐주게 됐으니 재미있지 않은가.진보도 보수도 없고 영원
한 자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어떤 자람도 매듭이 없을 수는 없다.그 매듭이 곧 말세다.여기 심판이
있고 구원이 있다.적멸이 있고 왕생이 있다.이것을 비유해 말하면 마치 릴레이
경주와 같다.배턴을 건네주는 순간 하나의 달음질은 끝이 나고 하나의 새 달음
질이 시작된다.그러나 그것은 두 개의 딴 달음질이 아니라 한나다.그 너와 나 새
것과 낡은 것,전체와 부분을 하나로 만드는 신비가 곧 배턴이다.
지금 우리는 그 역사의 배턴을 제대로 넘겨주지 못하고 떨어뜨린
p 478
셈이다.넘겨주는 전 세대가 잘못했는지 넘겨받는 새 세대가 잘못했는지 말하
기 어려우나 옳게 연락되지 못하고 떨어진 것만은 사실이다.역사인 이상 둘이
다 같이 책임져야 할 것이다.늙은 세대는 새 세대를 책망하고,새 세대는 늙은 세
대를 나무라기만 해서는 역사적 책임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젊은 눈으로 보면 늙은 세대는 무책임하게 보일 것이다.그러나 아무리 잘못했
다 하더라도 역사적 전통없는 세대는 없다.다만 변동이 너무 급격하였기 때문에
태평한 시대에서같이 재빠르게 그 손에 쥐어주지 못하고 넘어지는 바람에 떨어
뜨렸을 것이다.그러므로 젊은 세대가 정말 역사의식이 있다면 옮겨 받지 못했더
라도 그 주변에서 스스로 찾아내야 할 것이다.찾으면 반드시 발견할 것이다.지재
노화천수변이지,어디 그 부근에 있을 것이다.어려움이 있대야 옅은 물가 같은 것
이요 갈밭 속 같은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그것을 바로 주지 못하고 넘어졌고
찾노라 두리번거리니 혼란은 혼란이지만 결코 역사의 끝,인생의 허무는 아니다.
책임을 서로 밂 없이 선과 악을 너와 나의 공동 책임으로 알아 전체를 건지는
것이 사람이다.
그러므로 이 역사의 배턴 건네주고 받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 이해다.
혼란기일수록 더욱 그렇다.
사람의 삶에는 두 면이 있다.인생과 역사다.변천의 걸음이 느렸던 옛날 전통사
회에 있어서는 삶은 거의 고정적인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인생이라는 그 단면만
을 보고도 살 수 있었다.3천년,4천년 전 사람이나 오늘의 나나 근본에서 다름이
없기 때문에 그 전 사람의 경험을 그대로 내 것으로 살려 쓸 수 있었다.거기서
는 가치체계는 분명한 것이요 따라서 무시할 수 없는 권위를 가지고 내게 임했
다.그러나 지금은 변동이 급격함에 따라 사회구조가 거의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그러므로 그들이 지키던 그 질서가 거의 우리에게 소용이 없어졌다.오늘의 어지
러움의 원인은 여기 있다.이것이 넘어짐으로 배턴을 옮겨 넘겨주지 못하고 떨어
뜨렸다는 것이다.
p 479
떨어뜨렸지만 사회가 너무 변했기 때문에 어디서 그 잘못을 찾아서 바로잡아
야 할지를 모른다.세대 사이의 단절이 여기서 일어난다.
배턴은 어떻게 해서라도 찾아 들지 않으면 아니된다.배턴 없이는 뛰어도 뛴
것이 아니다.지나간 역사를 살림 없이 새시대의 창조는 절대로 없다.여기 이데올
로기나 행동의 표준의 조건이 있다.역사를 살림 없이 인생을 살릴 수 없다.지난
날은 또 므르나 적어도 오늘은 역사적 참여 없이 인생은 있을 수 없다.그것이
고생을 하면서라도 반드시 그 주변을 두루 살펴 떨어진 배턴을 찾으라는 이유
다.
이것을 공자의 말을 빌어서 한다면 온고지신이다.옛것을 찾아서 새것을 안다.
어째서 따스하다는 온자에 찾는다는 뜻이 있는지 모르지만 참 재미있다.알을 품
어서 따뜻해지지 않고는 병아리가 나올 수 없는 모양으로 역사를 그 의미가 밝
아지도록 뜨거운 마음으로 찾으란 뜻일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창세기 첫머리에 천지창조의 기사의 뜻과도 통한다 할 수
있다.원시의 혼돈위에 거센 바람이 불었다고도 번역하지만 또 하나님의 영이 그
위에 골똘히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도 번역할 수 있다.혼돈을 품고 깊이 생각하
는 가운데서는 창조가 나왔다.
오늘의 젊은이에게 우선 하고 싶은 말은 늙은 세대가 혼돈할수록 너는 절망하
지 말고 그것을 품어 따뜻해지도록까지 생각하하는 말이다.그러면 이 알 수 없
는 혼란뿐인 듯하던 현실이 결국 갈꽃이 피어 흐느적거리는 하나의 옅은 강변
같아 역사의 흐름을 타고 저어갈 수 있는 배는 거기 멀지 않게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권위의 무너짐
종교의 깊은 체험을 할 때에는 늘 심한 진동이 반드시 있는 것을 본다.석가모
니가 설법을 하려 할 때는 그 청중이 앉은 데가 육종
p 480
으로 진동한다는 말이 있다.육종이란 앞뒤 좌우 위아래란 말이다.그렇게 진동
하면 하나도 견디어날 물건이 없다.예수의 제자들이 모여서 기도할 때 감옥에
갇혔을 때도,그 자리가 크게 흔들린다고 했고,구약의 예언자들이 그 계시를 받을
때도 하나님의 보좌가 진동한다는 말이 있다.
그 뜻이 무엇일까?나는 그것이 낡은 권위가 무너지고 새 권위가 나타나는 것
을 뜻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말하자면 새 역사의 창조를 상징하는 것이라는 말
이다.
사람은 권위에 산다.의미에 살고,보람에 사는 인간이기 때문에 또 권위가 없을
수 없다.사람이 저와 꼭 같은 사람을 하나님이라,임금님이라 섬기기도 하고,종이
라,죄인이라 부리고 벌하기도 하는 것은 생각하면 알 수 없는 일이기도 하지만,
그 원인을 찾으면 인생도 역사도 절대의복종을 요구하는 권위 없이는 될 수 없
다는 데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 권위의 임하는 곳은 양심이다.태평시대라 하는 때는 거의 의식을 하지 못할
이만큼 한결같이 권위에 평안히 복종하고 있는 때다.그 사실 없이는 평화요 문
화발달이요는 있을 수 없다.분명히 의식은 못하지만 그 권위는 결코 그것을 구
체적으로 나타내는 정치나 종교의 우두머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고 거룩
한 권위다.천자라는 칭호와 혁명이라는 말이 그것을 잘 증명한다.임금은 하늘이
자기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 세운 것이기 때문에 천자 곧 하늘의 아들이라 했다.
그러나 그 뜻을 잘 나타내지 못하고 악한 일을 할 때는 그에게서 그 명을 빼앗
아서 다른 적당한 사람에게 준다고 생각했다.그래서 혁명 곧 천명을 새롭게 한
다 했다.
그러면 새 명을 받을 사람은 어떻게 고르나?덕 곧 인심이 돌아가는 것을 보아
서 한다고 했다.그렇기 때문에 혁명기에는 반드시 권위의 흔들림이 온다.영원한
그 권위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 권위는 반드시 인간적인 어떤 사람 제도를 통해
작용하기 때
p 481
문이다.권위는 본래 전체의 의지와 개인의 양심 사이에 흐르는 정신의 운동이
기 때문에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유로 자발적으로 되는 것이다.그러므로 사람이
그 권위를 가장 온전히 느꼈을 때 즐겁고 고상한 찬송이 나온다.모든 빛나는 예
술은 여기서 일어났다.
그 권위를 대표하던 마음이 그 자격의 가장 근본적인 덕인 겸손을 잃어버리고
자기 중심의 욕심이 동하기 시작할 때는 자동적으로 그 자격을 잃게 되고 그러
면 그 결과로 제 재주와 힘을 써서 억지로 그것을 놓지 않으려 하게 된다.그러
므로 언제나 어디서나 말세가 될 때의 공통하는 현상은 권위주의다.참 권위는
평화 속에 스스로 되는 것인데 이것은 그 깨어지는 것을 이미 알기 때문에 인위
로 기술적으로 유지해보려는 노력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권위주의는 반드시 구속적이요 강압적이다.한마디로 무리
혹은 무도다,그러면 자연 인심의 반항이 없을 수 없다.반항하기 때문에 더욱더
구속적이요 강압적이요 부조리적이 될 수밖에 없다.그러면 더 많은 반항을 불러
일으키고 그러면 또 더 강제적이되고 그렇게 해서 점점 더 경쟁적으로 격심해져
서 나중에는 전면적인 동란에 빠져버린다.그것이 정치적으로는 난세라는 것요,종
교적으로는 하나님의 심판이다.오늘 이시대는 그 극점을 향해 가속도적으로 달
리고 있다.이런 시대의 특색은 사람들이,지배자나 피지배자나,불행인 줄 알면서
도 망하는 길인 줄 알면서도,어떻게 하지 못하는 점이다.그러므로 운명적이다.
시대가 바뀌고 나면 인력이 아니고 하늘의 명령이었다는 느낌이 강하다.그렇
게 해서 새 시대 준비가 이루어진다.이것을 다시 말하면 영원한 권위를 다시 체
험하는 것이 필요하게 된다는 말이다.이런 의미에서 이것은 새로 틀거리를 세움
곧 재건 혹은 재형성이다.
오늘 흐린 물결처럼 세계를 휩쓰는 젊은이의 반항은 이렇게 설명해서만 그 의
미를 알 수 있다.히피요,마리화나요,스튜던트 파워요,심지어는 비행기를 납치를
하고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을 잔인하게
p 482
죽이는 폭련단에 이르기까지 외양으로 보념 아무 이유 없이 그저 파괴하기 위
해서 파괴하는 허무주의 같지만, 그 속을 깊이 생각해보면 결국 기성체제와 권
위에 대해 반항하자는 것이다.
왜 반항하나? 그 자체가 이미 생명적이 아니요, 그 권위가 벌써 참 권위가 아
니기 때문이다. 그들을 결코 몰라서 그렇다 할 수 없다. 다 현대에서 받을 수 있
는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다. 교육 받은 결과 그것이 쓸데없는 것, 그것이 결
코 자기네가 느끼는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풍조가 당초 일어날 때에 ‘성난 젊음’이라고 했다. 정당한 이름이었다. 성났
다. 왜 성났나? 못마땅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을 결코 허무주의요, 종교를
모른다고 해서는 아니될 것이다.
인간인 다음에 그들이라고 인간의 근본 성격을 잃었을 리 없다. 도리어 강한
종교적 요구가 있고 새 질서 새 가치에 대한 저도 모르게 애타는 요구가 있는데
기성질서와 권위가 그것을 만족시켜주려 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 반항이라 해
야 할 것이다. 다만 처음으로 흐르기 시작한 급류가 제 길을 잡기 전은 우선 흐
린 물을 일으키고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직 새로운 틀거리의
비전을 붙잡지 못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들은 젊은 세대니만큼 낡은 가짜 권위의 종이 아니다. 그들의 눈에는 국가
라는 것도 민족이라는 것도 문명도 하나도 영원한 권위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다 가짜다. 전에 의미를 가졌었는지 모르나 뭔지 모르게 앞에 오려는 역사에 대
한 직감에서 볼 때 그것은 다 어리석은 것이요, 의미 없는 것이요, 하나도 자기
네 의문에 대답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듯 실망시켰느냐
하는 것은 여러 가지로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알기 쉽게 우선
이것만은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그 실망은 결코 자연에 대한 것은 아니요 인간 자신의 하는 일에 대한
것이라는 것이다.
둘째, 그 잘못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은 문명 발달로 인해 얻은 여유의 시간을
바로 쓰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p 483
셋째, 전쟁 문제다.
인간은 이날껏 물질주의 문명의 길을 달리면서 문명이 발달하면 자동적으로
인간은 이상적인 행복의 지경에 이를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젊은 세대
의 눈에는 그렇지 않았다. 산업주의로 인해 한편으로는 선진국이라는 나라가 있
는 대신 반면에 인류의 대부분은 후진국이라면서 인간 이하의 살림을 하는 데
빠지게 됐다. 그 선진국이라는 나라에서도 노동과 노동의 결과로 얻은 소득과
그 소득을 써서 얻은 행복의 분배는 결코 전체의 입장에서 공평하게 된것이 아
니고 거기 모순이 많다. 그러고서 무엇이 이성적이냐 무엇이 행복이냐 하는 것
이다.
그 다음은 그러한 산업주의는 필연적으로 세계적인 전쟁을 일으켰다. 각 나라
들은 서로 국가주의의 입장에서 이기려고 경쟁을 했다. 그 결과로 핵무기전쟁에
까지 이르렀다. 그리하여 문명의 힘을 최고도로 이용하여 인간의 대량 학살을
당연한 것으로 알고 하고 있다.그러니 무엇이 종교요, 무엇이 도덕이요, 무엇이
인도요 도리냐 하는 것이다. 이 문명의 사도인 기성세대는 별 이상한 생각 없이
그 일을 하고 있지만 젊은 세대의 눈에는 그것이 이상했다. 가만 있을 수 없었
다. 그 심각한 의문을 발표해낸 것이 이른바 성난 젊음이다.
새 종교교육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젊은이는 세계구원을 스스로 자기의 사명으로 지고 나
서지 않으면 아니된다. 떨어진 배턴을 기어이 찾으라는 것은 이 때문이다. 링컨
이 “우리는 역사에서 도망할 수는 없다”한 것을 명언이라 하지만 과연 역사는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고 무시하려 해도 무시해지지 않는 것이다. 도망할 곳이
없다. 처음부터 무조건으로 긍정으로 시작하지 않으면 아니되는 것이 삶이다. 무
조건 긍정은 무엇인가 믿음이다.
p 484
그러므로 그 자체 안에 절대의 권위가 있다.
기성 권위에 반항하는 것으로만이 아니라 자체 안에 절대의 권위를 발견함으
로만 인생은 있고 역사도 있다. 그렇게 보면 기성세대도 역사의 배턴을 내버리
려 해도 내버릴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시냇물이 제 길을 찾아서만 시내가
될 수 있듯이 오늘의 젊은이도 제길을 스스로 찾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기성세대에 반항함으로만은 아니될 것이다. 그 의미에서 젊은이는 새
종교를 체험해내야 할 것이다. 물론 그것은 낡은 틀거리가 이미 하나님을 모시
는 성전이 될 수 없어서 이렇게 말세가 됐으니만큼 지금 있는 종파와는 매우 다
른, 아마 거의 종교라 할 수 없을이만큼 다른 것일지 모른다. 비신화니, 하나님
은 죽었느니, 하나님 없는 종교니 하는 말은 아마 이래서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있는 종교를 모르고 전혀 무시하고는 될 수 없을 것이다. 있는
것은 하나도 없어질 수 없고 없음이 역사를 둘로 나눌수도 없다. 간디가 재미있
는 말을 했다. 하나님은 전능하기 때문에 무신론자의 무신론까지도 될 수 있다
고. 그것이 종교다. 새 종교는 그런 태도라만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말은 이미 있는 종교가 재집권을 할 수 있단 말은 아니다. 참의미에서 재
집권이란 있을 수 없다. 할 것을 다한 다음에는 더 머물면 그짓이 있고 악이 있
을 뿐이다. 모든 강아지는 다 제 뼈다귀를 하나씩 물고 간다. 신생해야만 된다.
종교는 사람을 통해서는 되지만 사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세상에 사람이 만들어낸 종교가 많이 있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그
것은 참 종교, 곧 삶의 새 틀거리를 체험시켜주는, 역사를 자라게 하는 종교는
되지 못한다. 가짜 종교다. 지식이 발달한 오늘에는 종교를 손쉽게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세계를 건지지 못할 것은 그 자체가 증명하고 있다.
p 485
종교는 전체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생각해내는 것이 아니라 알아듣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는 귀가 필요하다. 귀 아닌 귀다. 예수가 귀 있는 자
는 들으라 한 것, 불경이 여시아문으로 시작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사람의 생각
이 지교로 흐르기 전에 사람은 듣는 사람이었다. 근대 사람은 듣기보다는 말하
는 사람이다, 들은 것 없이 말하려 하기 때문에 거짓말이다. 여기 현대 종교가
권위를 잃어버린 이유가 있다.
지금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결코 전체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아니고 중간에
서 조작한 말이다. 공중에 권세 잡은 자가 이 세계를 다스리고 있다. 세대의 단
절이란 곧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반항인데 그것은 공중에 권세 잡은 자가 하는
협잡임을 알았기 때문에 일어나는 반항이다. 아들로 아버지께, 아버지로 아들께
돌아가게 하는 것은 전체의 말씀뿐이다. 아버지는 곧 전체의 모습이요 아들도
전체의 모습이다. 불불상영이라, 아버지가 아들 안에 자기를 보고 아들이 아버지
안에 자기를 보는 데 전체가 있다.
그 새로운 종교는 어떤 것이냐? 그 개혁은 어떻게 이루어질 것이냐 하는 문제
가 나온다. 종교가 인간의 말이 아니요 전체의 말인 이상 아무도 그것을 말할
자격은 없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것을 미리 말할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이런
말은 할 수 있는 것이다. 근세가 나오려 할 때 우선 고전의 연구가 시작되어 그
것으로 학문 사상의 혁명이 일어났고, 그 다음은 새로 연구 발명한 것을 실지
산업에 적용하는 데서 산업의 혁명이 일어났고, 그 다음 종교개혁이 일어나서
그 신생운동을 완성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 앞으로 올 신생운동으도 무슨 양
식으로나 역시 그 안에 학문과 산업과 종교의 혁명을 다 포함함으로써 되지 않
을까? 그리고 이 세 가지 혁명은 이미 시작돼 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생각할 것은 학문의 혁명이다. 그것은 오늘의 모든 급격한
변동이 주로 과학의 발달과 거기 따른는 사상의 변천에 따라서 왔기 때문이다.
에덴동산의 타락부터가 이성의 잘못 사용
p 486
에서 온 것이라 할 것이겠지만 현대인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해야 할 것이
다. 이성이 제 주인을 발견해야 한다.
옛날 사람 더구나 동양에 있어서는 이성을 결코 가장 안심하고 따라갈 길잡이
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차라리 직관에 의한 신비로운 체험에 의해서
전체의 초의식을 통하는 길을 더 존중했다. 그런데 서양 근세에 들어 과학 연구
가 성해지면서부터 인간 자신에 대한 것까지도 과학적인 방법으로 하기 시작했
다. 그로 인하여 옛날에 모르던 것을 밝힌 것도 많고 사람을 여러가지 미신에서
해방시킨 점은 많으나, 반면에 또 사람을 순전한 과학의 대상으로만 보기 때문
에 크게 잘못된 점도 많다. 오늘의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는 거기서 나온다.
이제 와서야 겨우 잘못을 차차 알게 됐으나 그동안 아주 급속도로 진행되는
문명의 발달에 따라 자동적으로 완전에 이를 수 있는 것처럼 망상하던 버릇, 더
구나 그것이 권력주의와 결탁되어 있기 때문에, 또 극단의 전문화, 특수화해가는
데 따라 종합이 어렵기 때문에, 문명 전체가 혼란에 빠질 위험이 뵈는 틈을 타
서 폭력에 의한 강제적인 통제라도 멸망보다는 낫다는 사이비 지혜 때문에 좀
해서는 그것을 고치기가 쉽지 않다. 미래의 열쇠를 쥐는 젊은이는 이점에 특히
진실되고도 용감한 각오를 하여 세계관, 인생관의 일대 혁명을 한다는 비장한
결심을 해야 할 것이다.
새 인류의 씨알
가장 깊이 명심해야 하는 것은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생명이 억
만 년 진화의 길을 걸어 오늘에 이르렀고 스 선두에 섰지만 우리의 우리된 까닭
은 생각하는 데 있다. 생각하고 생각한 결과 우리는 지금 정신이라 영이라 하는
점에까지 이르렀고, 우리가 나기 전과 같이 진화를 자연과정에만 맡겨두지 않고
우리 생각하는 힘을 이용해서 의식적으로 계획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단계에 이
르렀다.
p 487
그만큼 우리 책임은 크다. 우리는 우리 인간 존재의 근본 성격이 책임감이란
것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인간은 스스로 우주진화의 책임을 짐으로만 제 할 일
을 할 수 있다.
우리가 오늘 위기에 빠졌고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에 반항하고 나서는 것을 말
했지만, 우리는 그 원인이 온전히 우리의 생각이 잘못된 데서 나온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지만 생각하는 능력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마
치 바위 틈에서 온천이 쏟아지지만 그 뜨거움이 바위에서 나지 않는 것과 마찬
가지다. 우리가 생각할 줄 아는 것은 하나임이 생각이시기 때문이다. 생명 그 자
체가 생각하는 생명이다. 거기서 인간이 나왔다. 나왔지만, 마치 온천이 지심속
의 열 때문이지만 지심 그대로는 아닌 것처럼 우리가 생각하지만 그 생각이 생
명 그 자체의 크고 거룩한 그 생각대로는 못된다. 우리 생각을 내놓고 그이의
생각에 가는 길은 없지만 우리 생각이 곧 그이의 생각은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
다.
요점은 어떻게 해서 찢어진 바위 틈같이 좁고 더러운 우리 마음이 스스로의
좁음과 더러움으로 자기를 나타내려는 그 ‘한 생각’에 손상을 입힘 없이 그
자신 그대로를 쏟아낼 수 있게 하느냐 하는데 있다. 예로부터 많은 어진 마음들
이 이 점을 알아 힘써 왔다. 그 결과 오늘에 이르렀다.
이 수백 년 이래 서양 문명은 잘못된 길을 걸어왔다. 그 가장 중요한 점은 우
리 생각의 근본이 되는 그 크신 생각을 잊고 생각은 마치 자기네가 하는 것처럼
알아서 교만해진 점이다. 그 결과로 작은 데서는 발달하는 것이 있는 듯한 대신
큰 것 근본되는 것을 잊은 점ㅇ이 많다. 그 결과로 이 우주는 죽은 우주로 하나
의 물질로 떨어져버렸다. 근본을 잃은 인간의 생각은 마치 근원이 끊어진 샘처
럼 점점 흐리고 작아지게 됐다.
그 결과가 오늘의 물질주의, 국가주의, 차별주의다. 그 결과 젊은의 반항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인간의 자아분열이다. 이것이 낫지 않는 한 인간의 운명은 결
정된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생각해보라.
p 488
생각의 힘은 여러 가지면서도 통일되는 데 있다. 통일이 못되면 생각은 자기
를 망쳐버리는 것을 우리는 알지 않나? 개인이 미쳐도 큰 일인데 인류 전체가
미칠 때 어떻게 되겠는가? 그리고 미치지 않으리라고 누가 단언하겠는가? 생각
의 가장 귀한 점은 스스로를 억제 통제할 줄 아는 데 있다. 그러므로 오늘 환란
을 당하는 것은 우리 전에 있던 모든 위대한 사람들의 한 일이 우리가 아니고는
완성될 수 없게 하기 위하여서라고 했다. 그것이 믿는 마음이요 그 믿음이 세계
를 건지는 마음이다.
인간의 생각이 가장 활발하고 맑은 때는 젊은 때다. 젊은이는 감격적이요 이
상적이다. 그것은 젊은 때에야말로 전체의 의지가 가장 왕성하게 나타나기 때문
이다. 예로부터 세상을 건지는 위대한 종교는 모두 젊은 혼에 의해서 일어났다.
오늘의 젊은이는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정신은 감응하는 것이다.그래서 주역에 적연부동 감이수통이라고 했다. 아무것
도 없는 듯한 가운데 전체의 뜻에 통할 수가 있다. 전체는 어진 것이요 거룩한
것이다. 제일을 스스로 결정하는 이다. 우리는 우리 생각을 밝히고 가라앉혀 거
기 초점이 잡힐 때 그 거룩하고 어진 뜻에 통할 수 있다.
또 알아야 할 것은 그 거룩한 뜻은 틀렸다 볼 때는 사정없이 잘라버린다는 말
이다. 한때 지구 위에는 굉장한 식물이 번성했던 일이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
이 멸종돼버렸다. 자연과학은 환경의 변동 때문이라지만 그것은 알고도 모르는
말이다. 그것은 아무 설명도 되는 것이 없다. 마음은 결코 그런 것만으로 만족하
는 것 아니다. 알 수 없는 까닭을 캐고캐고 죽으면서도 캐는 것이 마음이요, 그
마음 때문에 영의 고지에 오를 수 있다.
환경의 변천 때문이라는 어반중한 설명으로 우리 마음을 속여서는 아니된다.
있을 때 뜻이 있어 됐으면 없어질 때도 뜻이 있을 것이다. 또 한때는 굉장히 큰
파충류가 지구의 주인 노릇을 했지만 그것도 멸종돼버렸다.
p 489
까닭이 뭘까? 그 거룩한 뜻은 왜 그것을 냈다가 없애버렸을까? 이런 모든 수
수께끼의 풀리는 단 하나의 길은, 그것으로는 전체가 자기의 뜻을 드러낼 수가
없어서였을 것이라고 하는 것밖에 없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그의 큰 뜻에 합치 않으면 망할 것이
다. 그의 큰 뜻이 뭔가? 우리로서 감히 말할 수 없지만 이 우주를 더 자라게 하
여 완성하는 지경에 가는 것이라고 할수야 있지 않을까? 생명에는 중지도 있을
수 없고 실패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진화의 절정에 섰다 하더라도, 책임이 중대하니만큼
잘못이 있을 때는 사정 없을 것이다. 지공무사다. 그런 교만한 생각에 빠져 인간
자기만을 알지 자기 근본을 생각하지 않는 인간, 그 결과 정신분열을 일으켜 제
지체가 제 지체와 싸우는 그 믿음이 능히 전체의 큰 영원한 뜻을 알아낼 수 있
을까? 영원한 권위에 반항한 인간이 능히 스스로 하나님이 될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면 이 인류는 이러다가는 멸종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 망상일까? 아닐 것이다. 과학적임을 자랑하는 그 자신들이 솔직히 손을 들
고 자기네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이 현대의 고백 아닌가.
그럼 그때에 어떻게 해야 할까? 온 세상이 다 그릇된 문명 향락에 취해도 한
사람 노아가 있어 그 망하는 세상을 건졌다. 이 이야기는 영원히 적용될 이야기
일 것이다. 누구나가 건지자는 용기를 내야 할 것이다. 진실된 기도를 해야 할
것이다. 믿어야 할 것이다. 죽음 가운데서 영원한 삶을, 혼란 가운데서 의미를
믿어야 할 것이다.
이 점에서 나는 씨알을 내세우고 싶다. 전 인류는 망할지 몰라도 새 인류의
씨알은 여기서 나와야 할 것이다. 진화는 언제나 그 길을 걸어왔다. 전 종족을
사정없이 버리는 것은 어느 모퉁이에 뵈지않게 새 씨알을 기르기 위해서다. 자
비의 하나님은 또 엄격한 심판의 하나님이다.
p 490
학자들의 말이 일치해서 비관적인 것은 주의할 만한 일이다. 인구는 불과 몇
십 년 내 에 폭발할 거라지, 천연자원은 끝이날 거라지, 권력 국가들은 회개할
생각을 아니하지, 핵무기는 점점 더 무서운 것이 생기지, 그 말로는 어찌될까?
그것은 생각하는 마음을 한 점으로 몰아치는 일 아닐까?
그 한 점이 뭐냐? 새 인류의 씨알이다. 그런 시점에서 젊은이의 대부분이 향
락에 취한다는 것은 기막히는 일이다. 멋이 뭐냐? 멋으로 인생이 건져지느냐. 엔
조이가 뭐냐? 엔조이로 역사가 건져지느냐. 그것이 젊은이의 본 뜻이 아닌 것을
안다. 방향을 못 찾은 반항심의 역정에서 나오는 것임을 안다. 그리고 동정한다.
그러나 역정으로 이 세계를 건지지 못한다. 겸손해야, 겸손만이 거룩한 뜻에 이
르는 단 하나의 길이다.
젊은 마음이 생각을 하는 것은 참 귀한 일이다. 그러나 그 생각이 전체의 거
룩한 큰 뜻을 깨닫지 못하고 제 열정과 재주에만 취할때 무서운 위험이 온다.
우리 조상은 거기 대하여 많은 쓰라리고도 무시무시한 경험을 가졌다. 그러므로
옛날의 지혜의 핵심은 삼가라는데 있다. 삼간다는 것은 자기의 받아든 것이 무
한히 귀하고 위대한 것을 알아, 책임감과 용기를 가지기는 하면서도 거기 거룩
하고 신비로운 생명의 지성요소가 있어서, 감히 그 문턱을 넘어서는 아니되고
무한히 찾으면서도 참아야 하는 것을 알아, 계시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태도다.
구약 창세기의 선악과 이야기는 이것을 가장 엄숙하게 가르치는 말이다. 그러나
창세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뜻은 옛날 모든 원시사회에서 내려오
는 모든 설화 속에 공통으로 다 들어 있는 경계의 교훈이다.
문명이 놀랍기는 하면서도 한 가지 크게 잘못한 것은 자연은 무엇이나 다 마
음대로 써서 좋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다 써도 좋은데 거기 써서는 아니되는 것
이 분명히 있다. 그것은 아니 씀으로 씀이 되는 것이다. 오늘 인류에게 큰 경고
장을 내리는 가지가지의 공해 곧 오염은 맨 첨의 정신의 더러워짐에서 나왔다.
p 491
따 먹어서는 아니되고 무한히 감사하고 씹어보는 마음으로 바라보아서만 먹음
이 되는 것을, 만지고 따먹는 것이 곧 더럽힘이다. 오늘의 젊은 마음이 할 일은
이 더럽힘을 제해버리고 이날껏 짓밟아 거칠어진 동산 속에서 아직도 남아 있는
세계로 통하는 오솔길을 찾아내는 데 있다.
꽃이 아무리 피어도 수정이 못되면 열매를 못 맺듯이 전체의 뜻으로 수정이
못된 마음은 쓸레 마음이다.
젊은은 전체의 위대한 영으로 수정이 돼야 한다.(1973)
p 492
살림살이
늘 하늘을 우러러보자
우리 할 일이 무엇이냐? 얼 힘을 키우는 데 있다. 먹고 입고 자고 깨고 아들
딸을 낳고, 직업을 갖고 지식을 캐고 성격을 다듬고 예술을 지어내며, 나라를 하
고 세계 문화를 쌓고 도덕을 행하고 종교를 믿어서, 결국 얻는 것은 얼의 힘을
키워간다는 하나뿐이다. 마치 무슨 직업을 했거나 결국은 돈으로 되어 저금통장
에 남게 되는 것이요, 그 돈을 가졌으면 어떤 큰 일이라도 또 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람의 얼이란 것은 온갖 힘의 물둥지다. 모든 냇물이 흘러서는 물둥지에 고
이고 또 고였다가는 흘러나서 여러 갈래의 냇물이 되듯이, 사람이 하는 모든 일
은 마지막에 한 번은 반드시 정신으로 바뀌어져 생명의 물둥지를 이루게 되고,
거기서야 또 모든 것이 나올수 있다. 개인에 있어서도 그렇고, 세대에 있어서도
그렇고, 지식이나 기술이 직접 이 일에서 저 일로, 이 사람에서 저 사람에게로
넘어가는 수는 없고, 반드시 한 번 정신으로 되어 가지고야 간다. 이것을 이해
라, 혹은 깨달음이라 하고 덕이라 한다.
보이는 물건은 물어서 알아 없어지고 원리만이 붙잡혀졌기 때문에
p 493
이해라는 것이요, 일을 깨치고 깊은 뜻에 다다랐기 때문에 깨달음이요, 한 행
동은 지나가버리고 정신의 힘만이 내 것으로 되었기 때문에 덕이라는 것이다.
덕은 득이라, 얻음이다. 얻는 것은 정신이지 물건일 수 없다. 그것은 나는 정신
이기 때문이다. 아무것을 먹어도 소화가 되어야, 삭아서 없어져야 살이 될 수 있
듯이, 모든 것은 녹아서 정신으로 되어서만 내 것, 곧 나가 될 수 있다.
냇물이 맑고 많으면 물둥지가 크고 맑을 수 있고, 물둥지가 커서 맑은 물이
가득 고이면 천하를 씻어 아름답게 할 수 있고, 깨끗하고 싱싱한 것을 길러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얼 힘을 키우는 것이 우리 일이라는 것이다. 한 방울
한 방울 물이 곧 그 시내요, 한 줄기 한 줄기의 실개천이 바로 그 물둥지이듯
이, 우리의 다루는 한 물건 ㅏㄴ 일이 나의 정신적 재산이요, 내 아득한 정신 하
나가 곧 우주적 재산이다.
오늘 내가 있고 내 머리에 생각이 솟는 것은 전에 억만 생명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요, 억만 마음이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내 몸은 무한의 바다의 한 물결이
다. 내가 일어선 것은 내가 일어선 것이 아니요, 이 바다가 일으켜세운 것이다.
그러나 나는 또 나 스스로 하는 것이 있어 그 운동에 한 가닥 더하는 것이 있을
수 있다. 나는 이 자리에서 잠깐 일어났다 꺼질 것이나, 내가 전하고 일으키는
이 운동은 저 바다를 끊고 건너갈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왕이다, 돈만 있으면 지식 있는 놈의 지식 사서 쓸
수 있고, 칼 든 놈의 손 칼 든 채 잡아 부릴 수 있다. 그만인가, 덕이 높은 성인
까지 사서 앞세우고 다닐 수 있다. 그러므로 무식 걱정 마라, 힘 없는 걱정 마
라, 잘못한 걱정 마라, 돈 벌어라, 그저 돈만 벌어라. 그러나 생명의 세계에서는
얼이 임금이다. 그러므로 무슨 일에 있어서나 무슨 방법으로도 얼을 길러라. 얼
만 길러라, 얼에서 모든 것이 나온다. 얼이 모든 것이다.
얼이 무어냐고 묻는가? 얼은 얼이다. 얼은 얼이라 해서 못 알아 듣는 것은 얼
빠진 사람이다. 얼이 빠지면 사람 아니다.
p 494
얼은 제 이름만 부르면 곧 일어난다. 강아지도 제 이름 부르면 일어설 줄
아는데 얼이 제 이름 모르겠나? 얼은 한 끝이기 때문에, ‘그것’이기 때문에
가르쳐주지 못한다. 다만 부를 뿐이다. 얼을 어떻게 기르느냐고 방법을 묻나?
방법 없다. 얼은 스스로 하는 것이다. 무엇에 지음을 받는 것도 아니요 어떤
원인에서 나온 것도 아닌, 그 스스로가 모든 것의 원인이 되고 까닭이 되는 것
이 얼이다. 그러므로 얼 기르는 데 방법이 따로 있지 않다. 있자 하면 있어지고,
없자 하면 없어지는 것이 얼이다. 얼은 맑은 것을 생각함으로 스스로 맑아지고,
더러운 것을 생각함으로 스스로 더러움이 된다.
우리는 5천 년 역사에 실패의 언덕길을 굴러내려온 민족이다. 지금까지의 문
명에 있어서는 살고 죽는 운명이 민족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므로, 결국 모든 문
명의 근본은 민족적 정신의 힘에 달려 있다. 그런데 우리는 삼국시대 이래로 밑
돈 뽑아 먹는 살림만을 해왔지, 정신의 밑천을 더 불리지 못했다. 가무는 때의
화천 물둥지 모양으로 점점 쭈그러지고 졸아들었다. 물이 적으면 발전을 크게
할 수 없고 발전 못하면 공장이 돌 수 없듯이 민족적 생명력이 줄어들면 문화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고려시대 이후 내려올수록 정치, 경제, 학문, 예술, 교육, 종
교 각 방면에서 점점 떨어져 내려온 것은 이 때문이다.
밖으로 보면 어느 정도의 발전이 있는 듯이 보이는 것도 있다. 기차, 기선, 자
동차, 전신, 전화, 비행기, 라디오, 학교, 극장, 병원 하는 것이 모두 전에 보지 못
하던 것이다. 그러나 물둥지의 면적이 넓어진 것이 반드시 물이 많아진 것은 아
니듯이, 겉모양의 발전이 참 문화는 아니다.
문화는 욕심의 만족을 시키기 위한 편리기관이나 시설이 늘어가는 데 있는 것
이 아니요, 훌륭한 인격을 낳는 데 있다. 물둥지에 모래가 흘러들어 얕아지면 얕
아질수록 점점 더 넓어지지만, 그것으로 물이 불었다 할 수는 없고 발전은 점점
더 할 수 없어만 간다.
p 495
발전이 힘있게 되려면 물둥지의 밑에 메인 것을 깊이 가시어내어 파란 물이
밑을 알 수 없이 깊이 고이어야 하지 않나? 큰일을 하는 것은 제도나 기계가 아
니라 위대한 인격이요, 위대한 인물을 낳는 것이 정말 참 문명이다. 사일구요,
오일육이요, 떠들어도 결국 따지면 이 물 문제에 맺히고 마는 것이 오늘날 우리
일 아닌가? 0.4짜리가 만 명이 모여 만 번 혁명을 하고 회의를 한들 무엇이 나
올까?
우리나라 일은 맹자의 말을 빌어 하면 “칠 년 된 병에 삼년 묵은 쑥 구하기
”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라도 어서 묵히기 시작하는 것이 가장 어진 일이다.
쑥도 묵어야 하지만 인물은 더구나 그렇다. 하룻밤 동안에 영웅이 되고 경세가
가 되는 법이 어디 있느냐? 어서 참고 기르기 시작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 살림
살이의 목표다.
산을 구경하는 비결은 상봉 꼭대기만을 바라보는 데 있다. 일단 정신을 거기
다만 쏟고 온몸의 힘을 다해 거기 이르려고 애를 쓰노라면, 그러는 동안에 자연
가지가지 꽃도 보고 새 소리를 듣게되고 샘물을 마시기도 하고 굴 속을 들여다
보게도 될 것이요, 한번 그 꼭대기에 서게 될 때 온 산의 모양을 단번에 다 볼
수 있게 될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렇지 않고 모든 구경을 다 하자는 생각부터
하여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면 결국 헤메기만 하고 아무것도 보지 못할 것이다.
한 점을 얻는 자는 전체를 얻는다. 그 한 점이 무엇이냐? 그것이 정신이다. 얼
이다. 우리 교육의 목표는 위대한 얼의 사람을 길러낸다는 한 점에 집중되어야
한다. 생명의 운동은 송곳 같은 것이다. 될수록 뾰족해야 힘있는 작용을 한다.
뾰족하다는 것은 될수록 욕심 없이 보이지 않는 한 점만을 겨누어야 한다는 말
이다. 할 일이 많다고 이론의 완전을 얻으려고,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한다고 하다가는 결국 아무것도 못할 것이다. 산의 산 됨이 절정에 있듯이, 그리
고 절정을 얻으려면 모든 것을 버려야 하듯이, 생명의 절정은 정신이요 정신은
바로 모든 것을 잊는 데 있다.
p 496
누구를 기르면 위대한 사람이 될까? 참 사람은 누구가 아니다. 나다. 내 살림
바로 하는 것이 인물 기름이요, 민족적인 생명력 회복함이다. 나는, 지금의 이
나의 하는 꼴은 역사적 가시나무 떨기의 좀 먹은 잎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잘 따서 발 밑에서 썩히면 이 내가 돋 장차 오실 ‘그이’의 한 가는 뿌리다.
5천 년 역사 살림이 겉으로는 얻은 듯하나 속으론 곯았다. 수는 늘었으나 사
람이 줄었다. 이것을 모두 바로잡아 키워내야 한다. 어떻게 할까? 무엇을 하기
전에 먼저 마음부터 먹어야 한다. 무슨 마음인가? 영원무한한 것이 마음이다. 생
명이 줄고 얼이 빠진 것은 나를 쭈그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먼저 나를 펴라.
영원무한에까지 펴라. 나는 영원한 것이요 무한한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이 나는
작고 형편없는 듯하지만 저 영원무한에서 잘라낸 한 토막 실오라기다. 그러므로
보이는 것은 작지만 그 나타내는 전체, 그 밑, 그 뜻은 무한히 크고 무한히 긴
것이다. 한 가지로 우리 불행의 근본 원인은 우리 스스로를 업신여기는 데 있다.
펴야 한다. 기운을 쭉 펴야 한다. 구부린 놈이 옳은 말을 할 수 없다. 돈 앞에
서거나 칼 앞에 서거나 지식 앞에 서거나 도덕 앞에서까지라도 나를 잃고 구부
려서는 아니된다. 뻗쳐야 한다. 뻗치고 숨을 발꿈치에까지 가도록 쉬어야 한다,
나다, 내가 하나님의 콧구멍이요 우주의 숨통이다.
나를 영원무한한 얼에서 잘라낸 것이라 할 때 한없이 작은 듯하지만 작으면서
도 이것은 독특한 것이다, 막막 우주에 나는 나뿐이지 둘도 없다. 그러므로 이것
은 다시 없이 귀한 것이다. 다시는 없는 것이 정말 귀한 것이다. 인생의 참이라
거나 꿈이라거나, 하나님이 있다거나 없다거나, 그 무슨 이론을 하거나 이 ‘나
’라는 나를 부인할 수 없고 나는 나만인 것을, 무엇을 주고도 나를 바꿀 수 없
는 것을 아니라 할 수는 없다.
살림은 나의 불멸성, 무한성과 비상성, 독특성을 믿음으로 시작된다.
p 497
온 들의 곡식을 길러내는 여러 냇물의 근원은 물둥지에 있고 그 물둥지의 근
원은 산골짜기 무수한 흐름에 있지만 그 산골짜기 시내의 근원은 또 어디 있나?
비에 있다. 나라 모든 일은 인물에서 나오는 것이요 인물은 민족적인 생명력
에서 나오는 것인데, 그 민족적인 생명력의 근원을 따지면 비가 하늘에서 내리
듯 역시 하늘에 있다. 그러므로 정신의 힘 기르려면 하늘을 찾아야 한다. 비는
하늘에서 내리는 비지만, 나무를 심어야 비가 잘 오는 것이요, 나무 심지 않으면
하늘에 구름이 모이지 않고 또 비가 온다 하여도 사납게 한꺼번에 내려서 홍수
가 되어 도리어 파괴만을 많이 하듯이, 정신의 근본이 하늘이지만 사람이 하늘
을 바라야만 그 정신이 사람에게 임하는 것이요, 바라는 마음이 만일 없으면 그
하늘의 정신이 도리어 악령의 작폐로 되어버린다.
나무는 땅이 하늘 향해 올리는 기도요 찬송이다. 하늘에서 내린 것에 제 마음
을 넣어서 돌린 것이 숲이요 꽃이다. 그러면 그럴수록 하늘은 더 부드럽고 기름
진 것으로 준다. 숲이 우거질수록 점점 더 기후가 온화하고 윤택해 가고, 나무를
벨수록 더욱 더 메마르고 사나워진다. 우리 정신도 마찬가지다.
머리 위의 저 푸른 하늘은 우리 정신의 숲이다. 예로부터 하늘을 친하지 않고
된 시도 철학도 종교도 과학도 없다. 땅의 숲이 보이지 않는 물과 땅의 힘과
더하여 나타나듯이 우리 머리 위에 저 푸른 하늘은 보이지 않는 참 하늘의 표시
다. 상징이다. 보이지 않는 그 얼을 우리 마음이 받아 나타낸 것이 저 푸른 하늘
이다. 땅에서 보이는 것 중에 하늘을 가장 잘 나타낸 것이, 다시 말하면 가장 크
고 가장 높고 가장 맑고 영원무한한 것을 나타내어, 우리로 하여금 거룩을 느끼
게 하는 것이 저 하늘이다. 그러나 하늘이라는 무슨 물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유리 눈이 그렇게 보는 것이다. 아니다. 운이 보는 것 아
니다. 마음이 느끼는 것이다. 무엇이 있어서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스
스로 자기 속에 있는 높음 깊음 맑음 거룩함 끝없음을 그 허공에서 느끼는 것이
다.
p 498
하늘 우르름이, 곧 그 영원무한한 운동이 스스로 나온 근본에 돌아감이다.
정신이 돌아감이다. 반사다. 복초다. 노자가 “만물운각귀기근”이라 했지만
소위 우리 정신이란 것은 전체인 얼에서 나온 운동이 돌이켜 그 나온 근본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한 것도 큰 일이지만 그 지은 물건
이 스스로 제 생각으로 그 근본을 돌이켜보게 된 것은 생명의 역사에서 크나큰
일이라 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그 사상부터가 한 개 우주
적 얼이 반사다.
유한한 것이 무한이 되는 것은 돌아감으로야만 된다. 지구가 큰것 아니다. 구
체로 생겼기 때문에, 사람이 영원무한을 알게 됐다. 영원이 뭔지, 무한이 어떤
것인지, 말로 할 수 없지만, 어쨌든 사람은 영원무한을 생각하는 물건이다. 회의
론자가 무어라거나 유물론자가 무어라거나 인간 중에 단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
이라고 했으면 그것은 벌써 부정할 수 없는 우주적 사실이다. 생각은 이미 나온
생각을 없애지 못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놓고 무슨 생각이나 해라. 생각하는
것은 네가 아니다. 너는 물이 솟는 바위 틈뿐이다.
생각으로 하여금 마음끗 나오게 하여라. 흐린 생각이라, 악한 생각이라 걱정
말라. 바닷속에 아무 물이 들어가도 그 절대의 맑음을 흐릴 수 없다. 흐림도 맑
음의 한 부분이다. 그렇게 믿음이 맑힘이다. 하늘을 한없이 높이, 끝없이 넓게
우르러잔 것은 그 속에 나를 잊고자 해서다. 참 그것이 되면 나를 잊을 것이다.
나를 참 잊으면 참 그것이 될 것이다.
몸은 언제나 꼿꼿이 가지자
사람이 저를 아는 데 있어서 가장 먼저 할 것은 몸 생김의 뜻을 생각해보는
일이다. 모든 형상은 뜻이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p 499
옛사람의 머리가 둥근 것은 하늘을 보뜬 것이요, 발이 평평한 것은 땅을 본뜬
것이라 한 말이 웃을 말이 아니다. 눈, 코, 귀, 손, 발이 다 쌍으로 된 데도 뜻이
있어야 할 것이요, 육체적 생명의 근본 되는 먹을 것이 들어가는 것과 정신적
생명의 양식인 말이 나오는 것이 한 구멍으로 되었고, 더러운 찌꺼기를 내보내
는 것과 새 생명의 창조를 하는 것이 역시 하나로 되어 있다는 데도 반드시 무
슨 뜻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다 그만두더라도 사람이 두 발로 꼿꼿이 서게 생겼다는
것만은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사람에게서만 보는 현상이기 때문
이다. 생명의 진화를 말하는 사람들이 매양 그 여럿 속에 공통된 점을 들어 힘
써 말하나, 사실 의미있는 것은 여럿 속에 공통되어 있는 점보다 그 어떤 것에
만 독특하게 있는 점에 있다.
처음이 나중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중이 처음을 결정한다. 처음이 어떤
것을 따라 나중 결과가 결정되는 것은 물질에게서 하는 말이고 정신의 세계에
들어오면 달라진다. 그와 반대로 목적되는 것이 먼저 있어서 그것에 따라 그에
앞선 것들이 결정된다. 정신이란 다른 것이 아니고 목적이 처음부터 들어 있는
운동이다. 두 발로 일어선 것은 사람만이라면 그것은 나중에 나타난 현상이니만
큼 처음부터 그 목적이 생물진화의 긴 역사 속에 들어 있었다고 보아야 옳은 일
이다.
사실 생물의 신체구조의 변천을 단순히 환경의 변천에 대해 맞추어감으로만
보아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많으나, 마지막에 일어서자는 목표를 둔 운동으
로 보면 환히 풀려나가는 것이 있다. 아메바에서부터 사람에 이르기까지 일관한
계통 있는 운동이다. 물론 그 계통이란 우리의 의식작용같이 요렇게 작은 것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사람의 의식은 놀랍지만 정신 전체에서 보면 그리 큰 것이 아니다. 의식은 정
신의 옅은 끄트머리에 지나지 않는다. 근래의 심리학은 사람
p 500
의 인격의 고갱이가 되는 것이 의식보다는 잠재의식 혹은 무의식에 있다고 하
지 않던가? 잠재의식이니 무의식이니 하는 것은 할 수 없이 붙이는 이름이다.
의식은 정신의 일부이지만, 그것으로 전체를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의식할 수 없
다고 정신 아닌 것은 아니다. 일관한 계통이 있다는 것은 그런 뜻에서 하는 말
이다. 분명히 설명은 할 수 없으나 있는 것은 사실이다, 목적이 있다고 가정하면
여러 가지 수수께끼가 풀릴 수 있으나, 없다고 하면 점점 더 풀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두 발로 일어서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위험한 일이요 무리한 일이다. 무슨
환경이 그런 것을 요구했을까? 무턱대고 변천되어가는 환경에 임시 임시 맞추어
가잔 것 아니라 목적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무리를 하면서도, 모함을 하면서도
그리 내몬 것이다. 생각해보라, 아기가 완전히 서기 되기까지에 얼마만한 고생을
하나? 두 발로 서는 인간을 하나 내기 위해 생물 전체는 억천만 년에 걸쳐 얼마
만한 희생을 냈는지 모른다. 그럼 그 처음부터 잠재하여 있는 목적이란 무엇인
가? 다른 것 아니고 두골의 발달이란 것이다. 두골의 발달과 일어서는 것과의
사이에는 깊은 관게가 있다. 동물에서 보아도 몸이 땅에서 떨어질수록, 곧추서는
데 가까워올수록 두골이 커간다. 사람도 두골이 등뼈 위에 똑바로 와서 놓인 때
에야 맑은 생각이 나는 것은 사실이다.
여기다가 허리와 목의 생긴 것을 겸하여 생각해보면 그 뜻이 더 분명해진다.
허리와 목은 잘록하게 가늘어졌다. 모양 내는 여자는 허리를 가늘게 하여 곡선
미를 낸다 하고 목을 날씬 빼어 아양을 부리기에 쓰지만, 사실 뜻을 말하면 그
렇게 쓰란 것 아니다. 그것은 두골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두 발로 곧추 일어
서 백 근 넘는 몸을 늘 고이고 있자니 늘 불안정이다. 또 쉬지 않고 걷고 달려
야 하니, 언제 어떻게 거꾸러질지를 모른다. 그러므로 허리를 잘록하게하여 운동
이 자유자재하여, 어느 때 넘어져도 몸의 위 절반을 일으켜 부딪치지 않도록 하
게 한 것이다.
p 501
그래야만 가슴속에 들어있는 중요한 내장이 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
다도 더 중요한 것은 두골이다. 그러므로 목에서 또 한 번 잘록하게 하여 그것
을 보호한 것이다.
사실 우리 몸이 나무통같이 생겼다면 두골이 벌써 언제 깨졌을지 모른다. 다
행이 허리와 목이 잘록한 탓으로 그것을 면하여 왔다. 그래서 일의 가장 중요한
것을 말할 때는 요령이라 한다. 요는 허리요, 령은 목이다.
꼿꼿이 서는 것은 그렇게 의미가 크다. 그러므로 살림을 바로잡으려면 그것부
터 해야 한다. 설 때면 두 다리에 힘을 꼭 주고 서서 휘청휘청 밖에서 오는 힘
에 밀려 넘어지지 않도록, 스스로 서지못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 하늘 땅 사이
에 “나는 나다”라고 서야만 사람이다. 자주독립니다. 사람이란 하늘 땅을 연락
을 시키잔 것이다. 그러므로 땅의 힘이 내 발로 올라와 머리를 통해 저 까만 하
늘에 뻗는다 하는 마음으로 서야 한다. 그래 1만 5천 리 지구 중심까지 울림이
내려가도록 힘있게 디디고 서자는 것이다. 또 앉을 때면 산처럼 부동의 정신으
로 앉아야 한다. 그러면서 아랫배에 힘을 주어야 한다. 옛사람들은 거기를 기해
라, 단전이라 해서 정신수양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게 여겨 왔다.
기해란 원기의 바다라는 말이요, 단전이란 약밭이란 말이다. 옛날 사람이 신선
이 되어 장생불사하겠다고 약을 많이 찾은 일이 있는데, 그 신선되는 것이 다른
데 있는 것 아니요 이 아랫배에 정신을 모으는 데 있다 해서 하는 말이다. 알약
을 가지고 단이라 한다. 그래서 될수록은 눕지 말자는 것이다. 눕는것은 맥이 풀
린 것을 뜻한다. 아무리 괴로워도 자는 때, 아픈 때를 제하고는 눕지 말도록. 지
금은 문명이 발달한 대신 사람들의 정신의 힘은 척 약해졌다. 10리를 가도 꼭
타고만 갈 줄 알고, 앉는 것도 부족해 안락의자나 소파를 만들어 가지고 반은
누워서 살려 한다. 그렇게 편리만을 따르고 어려움을 견디어 정신을 기르자는
생각을 아니하므로 사람들의 마음이 약해졌고, 마음이 약하므로 인정이 얇
p 502
아진다.
우리가 새 역사를 지으려면 어려움을 많이 당해야 할 것인데, 어려움에 견디
려면 평소에 꿋꿋이 서는 정신을 길러야 할 것이다.
닭 울기에 일어나 하루 살림 준비를 하자
사람은 일찍 일어나야 쓴다. 아침에 해가 올라오도록 자는 사람이면 그 사람
이 무슨 일을 한다거나, 어떤 자리에 있다거나, 슨 책을 본다거나, 그가 어떤
사람이냐, 다시 물을 필요 없다. 아무도 일찍 일어나기가 싫어졌거든 기운이 풀
린 줄을 알아야 할 것이요, 기운이 아주 풀리면 죽는다. 숨이 붙어 있어도 죽은
사람이다. 모든 잎과 꽃이 새벽에 피고 모든 새가 새벽에 깨듯이, 사람의 정신도
새벽에 가장 맑게 갠다. 그러기에 예로부터 위대한 정신의 사람은 다 일찍 깼다.
우리는 밤낮이 이어 바뀌는 지구에 산다. 그러므로 자고 깨며, 일하고 쉰다.
한정이 있는 사람의 힘이므로 졸곧 일만 할 수는 없고 쉬어야 한다. 쉬는 것이
사는 일이다. 숨 쉰다고 한다. 쉬는 것이 생명 회복함이다. 그러므로 자는 것이
절대 필요하다. 그러나 밤의 뜻은 자기만 하잔 것 아니다. 자기만 위한 것이라면
캄캄만 했으면 그만이겠는데 밤 하늘에는 빛나는 별이 수없이 많다. 낮에는 해
하나를 보지만 밤에는 몇억만의 해가 비친다. 낮에는 유한의 세계가 보이지만
밤에는 영원무한의 세계가 열린다. 낮은 일을 한때지만 밤은 생각을 할 때다. 누
구의 말같이 밤은 자기 위해서만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밤 중에도 모든 티끌과
시크러운 떠들음이 다 자고 맑은 하늘에 별이 빛나는 새이 더욱 좋다. 그러므로
일찍 자고 일찍 깨어, 생각을 기ㅌ고 맑게 하여 정신을 기르는 것이 필요하다.
경험으로 비추어보아 저녁 열시쯤에 자고 새벽 네시까지는 깨는 것이 가장 좋
다.
사람은 자연의 아들이란 말이 있다. 우리는 햇빛 아래 공기를 마
p 503
시고 바람을 쏘이며, 동식물을 먹고, 물을 마시고, 그것들로 옷을 만들고, 집을
짓고 산다. 그러나 우리가 자연물을 이용만 하고 그것을 기를 줄을 몰랐다면 자
연을 잘 알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연을 모른다면 하나님도 모를 것이다.
자연이 우리 생활의 자료도 되지만 우리 정신교육의 교과서도 된다. 곡식과 가
축은 우리의 고급 학년의 교과서다. 사람의 정신이 크게 발달하기 시작한 것은
곡식을 가꾸고 집짐승을 기르기 시작하면서부터다. 그러므로 문화를 서양말로
‘culture’라 한다.
우리는 곡식에서 믿음과 다시 남을 배웠고, 소에게서 끈기와 겸손을, 말에게서
날쌤과 민첩을, 개에게서 충성과 경계를, 고양이에게서 꾀와 조심을, 돼지에게서
깨끗과 안분을, 그리고 닭에게서 때와 깨달음을 배웠다. 그들을 통해서 우리는
자연계와 떨어질 수 없이 정신적으로 한데 붙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새벽 세시
면 우는 소리, 그것 없이는 우리 종교 철학은 없었을 것이요, 우리 사회생활은
어려웠을 것이다. 길게 목빼어 우는 그 울음은 곧 우리를 부르는 영원의 소리다.
그들은 우리 역사 행진의 나팔꾼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깰 때는 우리도 깨야 한
다.
사람은 자연의 아들이지만 자연의 아들만이 아니다. 자연대로만 아니고, 미리
계획하고 준비하는 살림이어야 한다. 옛날 주공은 밤새 나라 일을 생각하며 좋
은 생각이 나면 앉아서 밝기를 기다렸다고 했다. 나라 일을 생각하면 좋은 생각
이 나면 앉아서 밝기를 기다렸다고 했다. 또 우리 몸은 약한데 정신은 한없는
것이므로 그것을 아껴 쓰고 규모 있게 다듬어야 한다. 일찍 일어나거든 우선 팔
다리와 모든 기관을 고루 놀려, 자는 동안 막혔던 피와 기운이 풀려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 몸을 정신의 집, 하나님의 성전으로 알면 더구나 그래야 한다. 우선
깨끗이 쓸고 닦고 정돈을 하여야 하루 살림이 바로 될 수 있다. 건강의 비결은
잘 돌림에 있다. 천지도, 사람몸도 끊임없이 돌아가는 것이 그 근본 법칙이다.
천체의 돌아감, 일년 사철의 돌아감, 하루 밤낮의 돌아가므 우리 피 신경의 돌아
감, 생
p 504
각의 돌아감이 잘 돌아가려면 빠질 것이 잘 빠져야 한다. 개천이 막히면 나라
가 망하고, 시국창이 막히면 집이 망하고, 오줌 똥 땀구멈이 막히면 사람이 죽
고, 신문 잡지가 망하면 정신이 죽는다. 그러므로 몸에도 정신에도 닦는 것이 일
이다. 수양이다.
몸의 준비가 다 되면 정신의 준비다. 고요히 앉아 생각을 하여 천지창조 전부
터 영원 미래에 이르는 무한 우주를 거니는 마음의 산책을 날마다 게을리 아니
해야만 한다.
내 몸 거둠을 내가 하자
몸과 마음에는 떼지 못하는 관계가 있다. 인격은 몸 마음이 하나된 것이다. 그
러므로 내 스스로 내 몸가짐을 단정히 하여야 한다. 우주가 무한하다 하여도 그
중심은 나요, 만물이 수없이 버려져 있다 하여도 그것을 알고 쓰는 것은 나다.
내가 스스로 내 몸의 귀함을 알아야 한다. 욕심의 하자는 대로 끌려 내 몸을 허
투루 다루는 것은 내 몸을 천대함이다. 중심이 되고 주인이 되는 이 몸, 이 마음
을 허투로 하면 우주와 만물은 차례와 뜻을 잃고 어지러워지고 맞부딪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몸조심이란 곧 몸 공경이다. 다른 사람보고 허리를 굽실굽실 비겁하게 굴복
아첨하는 것은, 이것을 지어준 하나님을 욕함이요 이것을 지키고 길러준 역사를
업신여김이다. 거울에 비치는 네 얼굴을 보라. 그것은 백만 년 비바람과 무수한
병균과 전쟁의 칼과 화약을 뚫고 나온 그 얼굴이다. 다른 모든 것 보기 전에 그
것부터 보고, 다른 어떤 사람 사랑하기 전 그 얼굴부터 우선 사랑하고 절해야
한다. 그런다면 다른 것 보고 절하고 마음 팔 생각 아니 날 것이다.
이 사람이 누구냐? 우주의 주인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 손발이 뭐 하잔 거냐?
만물의 임금 노릇 하잔 것이다. 만물의 임금이 경망하게 행동해될까? 점잖아야
지. 그를 홀대해 될까? 정중히 모셔야지.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정성 있는 대접
인가? 손수 함이다. 귀한 어른
p 505
대접은 심부름꾼 아니 시키는 법이다. 네 몸 대접 네가 해라. 옷, 신발, 모자,
책상, 네 방, 네 손으로 치워야 한다. 제 신발도 닦지 않는 청년이 이 다음 사회
봉사, 인류공헌이라니 곧이 들리지 않는 말이다.
데모크라시가 하늘에 있느냐, 땅에 있느냐? 별을 따는 것이 자유가 아니요 바
다 밑을 더듬는 것이 평등이 아니다. 사람 대접함이다 나라가 서울 있느냐, 시골
있느냐? 서울도 시골도 있지 않고, 네 옆에 있다. 나라 사랑하거든 네 옆의 사람
부터 존경하라. 네가 만물의 왕이라면 그도 만물의 왕이다.
네 부엌에서 밥을 짓는 식모는 네 식모가 아니요 영원한 님의 아내다. 너를
섬기기 위해 세상 온 것 아니라 ‘그이’를 모시러 온 것이다. 남의 신부 더럽
히지 마라. 사람은 정신에서와 재주에서는 차이가 있으되 몸은 똑같이 가지게
만든 것은, 높은 정신적 일에는 부득이 다름이 있겠으나 제 몸 위한 기본적인
노동은 누구나 다 하란 말이다. 이 문명이 이렇듯 인류의 불행이 된 것은 애당
초 우리 조상이 잘못 생각하고 사람에다 높고 낮고를 붙이고 정신적 활동이란
이름 아래 기본노동까지 피하고 남을 시킨 죄 때문이다. 남을 종으로 부리면 너
는 정신적 불구자가 된다. 네 몸 거둠 네가 하는 것이 데모크라시의 첫 걸음이
요 하늘나라 준비다.
먹고 입음을 간단히 하자
정신생활이 없으면 사람 아니다. 그러나 정신생활 하려면 어쩔 수 없이 육신
생활은 될수록 간단히 하는 수밖에 없다. 이상으로 하면 육신과 영혼은 서로 하
나되어 조화된 살림을 하게 생긴 것이지만 실지에 있어서는 욕심은 늘 지나치기
쉬운 것이고 정신은 늘 눌리기 쉬운 것이다. 그래서 옛사람이 “인심유의 도심
유미”라고 했다. 정신적 가치를 찾는 도심은 깜박깜박 있는 듯 없는 듯 미미한
것이지만 그것을 지키고 키우는 것이 사람의
p 506
일이다. 자라는 모란의 연한 순이 꺾이고 말면 영 꽃을 볼 수 없듯이 우리 마음
의 끝에 피는 연한 꽃망울인 양심이 한 번 꺽이면 다다. 사람이 동물의 지경을
벗어나 요 미미한 한밤중의 등잔같은 마음 하나를 피워내기에는 참 길고 긴 세
월이 들었다. 생명진화의 장래는 오직 요 연한 끝에 달렸다. 그러므로 때로는 떡
잎을 제치고 가지를 자르면서도 그것을 키워야 한다.
예로부터 어느 정도의 금욕 극기 없이 정신적 생명을 크게 키운이는 없다. 그
러므로 누구든 맛을 모르고 누구나 부드러운 것을 모르리오마는 힘써 욕심을 눌
러서 간단히 하기를 힘써야 한다. 장자가 “기기욕심자천기천”이라고 한 것은
진리다. 그러므로 공자도 “사람이 뭐 하지 않는 것이 있고야 하는 것이 있다”
했고 “선비가 도에 뜻했다면서 좋지 못한 옷, 좋지 못한 밥을 부끄러워한다면
말할 나위도 없다” 하기도 했고, “선비는 먹는 데 배가 부르도록 하고, 있는
데 평안하도록 하기를 구하지 않는다”하기도 했다.
의, 식, 주는 간단주의가 좋다. 가짓수도 적게, 질도 낮은 것으로, 분량도 될수
록 아껴서 하는 것이 마땅하다. 옛날 당태종은 명군이란 말을 듣는 사람인데 정
무를 보면서도 밤늦게 글읽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며 신하가 보고 “요새 임
금께서 얼굴이 빠지셨습니다” 하니 대답이 “내가 빠졌으면 백성이 살찌지 않
았겠느냐? ”했다고 한다. 먹고 입음 간단하게 하면 몸은 살이 찌지 못할 지 모
르나 혼은 살이 찔 것이다.
또 아껴서는 무엇하나? 남을 돕는 것이다. 세상에 불구자, 약한 사람, 병든 사
람이 있는 것은 성한 사람의 심정을 시험해보고 기르잔 것이다. 어머니 사랑은
병신 자식에게 더한 법이요, 자식의 효성은 부모가 병든 때에 자란다. 사람은 서
로 돕게 생긴 것이다. 그러하므로 속사람이 자란다. 본래 물것은 내 것이 아니
다. 내가 벌었어도 내 것 아니다. 직접은 나라의 것이요 한 걸은 더 나가면 하나
님의 것이다.
p 507
나라 없으면 내가 힘 있고 재주 있어도 돈은 못버는 것이요, 하나님이 허락하
지 않으면 벌었어도 내가 못 가진다. 그러기에 부는 건강에서 온다고 한 러스킨
의 말은 옳다. 내 것이 내 것 아니다. 따라서 남을 돕는 것은 각별한 선인이라기
보다는 마땅한 의무다. 그것 아니하고, 내가 번 것 내 마음대로 쓴다 하면 도둑
이다. 내가 나라의 것, 하나님의 것을 도둑하면 또 도둑이 내게 온다. 그러므로
도둑질한 놈만 아니라 도둑맞은 놈도 죄가 있다. 도둑질했다는 놈은 작은 도둑
이요, 도둑맞았다는 놈은 큰 도둑이다. 세상은 작은 도둑 때문 아니라 큰 도둑
때문에 못산다. 큰 도둑 없으면 작은 도둑 저절로 없다. 먹고 입고 남은 것은 남
의 것이다. 남의 것이므로 남았다고 한다. 남의 것인 줄 알면 어서 돌려야 한다.
또 살림을 낮게 하면 좋은 것이 또 있다. 친구가 많아진다. 살림을 고등하게
하면 소위 유산가, 유력가라 해서 적은 수의 잘사는 사람끼리는 좋아하나 친구
가 적다. 친구는 수수하게 살아야 많다. 세월이 평안하다 할 때는 모르나 한번
혁명이 와서 뒤집히는 날은 친구가 어떤 것임을 알게 된다. 민중을 친구로 삼아
야 한다.
술 담배를 마시지 말자
술 담배에 대하여는 의논이 많겠지만 이유 물을 것 없이 아니하는 것이 좋다.
천하 사람이 거의 다 아니하는 사람 없으니 한번 아니 할 만하지 않은가? 끊기
어려운 것이니 기어이 끊어볼 만하지 않은가? 참기 어려운 것을 하나 작정하고
일생 참노라면 정신이 늘 긴장할 수 있고, 정신이 긴장하면 켕긴 거문고 줄 같
아 바람결에도 음악이 난다. 술 담배 마시면 정신은 풀어졌지, 긴장하지 못할 것
이다.
508
하루 한 번 땀을 흘리자
생명은 신진대사, 즉 묵은 것은 나가고 새것은 자꾸 들어오고, 그리해서만 씩
씩하게 살 수 있다. 그러므로 쉬지 않고 활동해야만 된다. 몸 속에 묵은 찌꺼기
가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으면 머리가 아프고 기분이 나쁜 법이요, 마음이 문을
닫고 들어앉아 묵은 생각을 되풀이하고 있으면 정신이 시드는 법이다. 생명에
가장 요긴한 조건은 청신한 기운이다. 그러나 사람 마음에는 한편 무산 안일을
원하는 마음이 있으므로 좀 잘못하면 조개처럼 제 스스로 뿜어낸 물건이 껍데기
로 굳어져 그만 그 속에 같혀버리게 된다. 침체한 기분, 압박에 눌려 위축되는
기분, 조그만 평안에 만족해 그대로 잦아지고 말려는 기분, 실패에 낙심해 슬픔
에 갇혀 제 심장을 깎아 먹고 살려는 기분, 그런 것은 다 몹쓸 독소를 품는 공
기다.
그러므로 힘써 늘 자주 가라앉는 분위기를 깨쳐 마음속에 생기는 가스를 흩어
버려야 한다. 거이기라고, 사람은 그 있는 환경에 따라 기분이 변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날마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기운을 발산시켜야 한다. 그러는 데는
일하는 것이 가장 좋다. 창세기에 하나님이 죄 범한 인간을 보고 가장 먼저 준
명령이 일하라는 것이었다. “네가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이다”했다.
그것은 벌이라기보다 교육이었다. 죄를 범한 양심이 그렇지 않고는 살아날 수
없기 때문이다. 잠가져서 슬픔이 후회에 갇혀버리는 것처럼 나쁜 것은 없다. 일
을 적당히 하면 거기 저절로 예술적인 창작욕 완성용이 만족되는 것이 있으므로
마음이 시원하고 기운이 나는 법이다. 노동에는 오락과 되살림이 저절로 들어있
는 법이다. 지금 오락이니 되살림이니 하고 새삼스러이 떠드는 것은, 일하지 않
고, 해도 잘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일하면 육체의 먹을 것만 생기는 것
아니라 정신도 양식을 취하게 된다.
개인으로나 나라 일로나 앞길이 캄캄해 맥이 풀리는 때면 괭이를 들고 나가
땅이라도 파는 것이 좋다. 제 땅이 없으면 남의 땅이라
p 509
도, 그것도 없으면 운동이라도 하여 땀을 한 번 쑥 빼는 것이 좋다. 땀이 빠지
면 근심도 빠진다. 그러면 저절로 원기가 난다. 이마에 땀을 흘리며 마음이 수그
러질 사람 없다. 시험에 낙제했을 때, 사업에 실패했을 때,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반을 당했을 때는 철봉이라도 하고 마라톤이라도 해라. 생명은 적극적이지 소
극적이 아니다. 나는 이왕 못살아도 남이나 잘살도록이라도 하자는 마음이 있어
야 한다. 다른 것으로 다 못해도 씩씩한 얼굴 보고 시원해 마지 않을 사람 없을
것이다. 화장을 한 것보다 얼마나 효과적일까?
생명의 건강법에는 틀어막는 것보다 내어쓰는 것이 더 중요하다. 같은 땀이라
도 이마에 흐르는 땀은 왕관 위의 진주 같으나 등골에 흐르는 땀은 마음을 죽이
는 독약이다. 잘못하여 양심에 가책이 될 때는 한출첨배라, 얼굴은 파랗게 질리
고 등살에 땀이 흐른다. 일하는 사람 아니 그렇다. 롱펠로의 말대로 온 세상을
정면으로 들여다보자.
굽실굽실 길다랗게 늘어선 머리털에
그 얼굴 빛 익힌 가죽 같고
이마에 정직한 땀 흘려
제 먹을 것 제 벌고
어느 쥐게 한푼 진 것 없으니
온 세상을 정면으로 들여다보더라.
날마다 글 읽기를 잊지 말자
얼굴에도 빛이 있어야지만 마음은 더구나도 빛이 나야 한다. 속이 밝아야 밝
은 사람이다. 그리고 속에 빛이 나는 것은 글 읽기로야 된다. 아무리 닦은 거울
도 닦지 않고 두면 흐려버린다. 공중에는 눈에 보이지 않아도 많은 티끌이 있기
때문이다. 마음을 둘러싸는 분위기도 그렇다. 그러므로 그냥 두면 흐린다. 자주
자주 닦아야 한
p 510
다. 마음을 닦는 데는 글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
옛사람은 공부한다는 사람이 사흘만 글을 아니 읽으면 입에 가시가 난다고 했
다. 그 대신 부지런히 공부하면, 사흘만 있다 만나도 눈을 비비고 봐야 알아볼이
만큼 달라진다고 했다. 모색이란 말이 있다. 산골짜기의 길이 끊지 않고 사람이
다니면 그 길이 호젓이 있으나, 며칠만 사람의 발이 끊어지면 그만 풀이 자라
막혀버려 길을 알 수 없어진다. 우리 마음에도 길, 정로가 있다. 그대로 사람이
자꾸 가면 그 길이 막히지 않고 훤하지만, 그만 며칠이라도 다니는 사람이 없으
면 죄우의 풀 같은 욕심이 우거져 길이 막히게 된다. 욕심은 풀처럼 퍼지는 힘
이 강하므로 쉬지 않고 다녀서만 금할 수 있다. 길은 발길로야 낸다. 이따금 낫
으로 베는 것보다 날마다 한 번씩이라도 다니는 것이 낫다. 산길로 가는 것은
나무꾼이거니와 마음길로 다니는 것은 누군가? 친구들이다. 살아 있는 친구, 또
책속에 있는 옛 친구, 친구 오기 끊어지면 사람은 버린다. 살아 있는 친구는 세
상 일에 걸리고 먼 거리가 있으니 뜻대로 아니 되지만 옛친구는 책만 펼치면 곧
온다. 내 마음속을 꼭 바른 길만 걷는 옛어진 이들, 공자, 맹자, 노자, 장자, 석가,
예수, 피타고라스, 소크라테스 하는 이들이 날마다 찾아오
글은 날마다 끊지 않고 읽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아무리 바빠도 “이따
가 틈을 내어 잘 하지” 하는 생각 말고 부족한 대로 날마다 끊지 않고 하여야
한다. 집안 청소를 이따가 잘한다고 미루는 집은 늘 더럽고 지저분한 법이고, 대
강대강이라도 날마다 털고 쓰는 집이 언제나 깨끗하다. 그러므로 많이 읽을 필
요 없다. 마음의 양식도 몸의 양식 모양으로 잘 씹는 것이 중요하다. 씹지 않은
밥보다는 씹지 않고 통으로 삼킨 글은 더 손해다. 소화불량되면 관격이 되어 당
장 죽든지, 설사가 나서 있던 것까지 훑어 가지고 나가든지
p 511
한다. 조금 먹고 잘 소화하는 것이 상책이다. 밥에 체한 사람은 먹어도 먹어도
살은 아니 찌고 파리하기만 하고, 글에 체해 아는 체하는 사람, 읽기는 많이 읽
어도 아무것도 모른다.
산 벗을 택해 사귀듯 글 속의 벗도 택해야 한다. 책은 골라 읽어야 한다. 책으
로 고르고 고른 책 중에서도 골라 읽어야 한다. “진신서 불여무서” 책을 다
읽는 다면 책 없는 이만 못하다, 맹자의 말이다. 책을 고르는 데에는 독창성을
표준으로 하는 것이 좋다. 그 사람 제가 본, 제 소리가 있는 책, 스스로 얻는 것
이 있는 책이다. 남의 것 빌어서 설명한 것은 아니 봐도 좋다. 그러므로 책은 고
금으로 택해야 한다. 옛 고전과 현실 문제를 다룬 책이다. 중간의 것은 뽑아도
좋다. 박학 연구는 별 문제, 이것은 마음의 양식을 두고 하는 말이다.
때때로 산과 바다에 가자
인자요산, 지자요수라지. 높고 거룩하고 영원 불변하는 것을 배우기 위해 산에
가야 하고, 깊고 넓고 신비롭고 자라고 활동하는 것을 배우기 위해 바다에 가야
한다. 산과 바다는 생명의 정화처이다.
평야에서는 세속문명이 발달하고 산과 바다에서는 정신문명이 발달한다. 애급
과 메소포타미아와 중국 평원에서는 정치와 경제와 법률과 제도가 발달했고, 인
도와 시나이 반도와 희랍에서는 종교와 예술이 발달했다. 사람은 늘 속화를 막
아서만 참 사람이 될 수 있다. 그것을 위해 자연에 가까이 해야 한다. 지구 위에
들판뿐이고 높은 산, 깊은 바다가 없었다면 사람은 짐승의 지경을 못 면했을 것
이다.
집에 앉아 산을 보니
산이 내 집 산이러니
p 512
산에 올라 집을 보니
집이 내 집 같지 않아
이후엔 집 살림을 말고
산 살림을 하리라.
그러나 또 사람은 현실에 사는 사람이다. 현실을 알기 위해서는 인간사회를
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를 알려면 백두산, 금강산, 동해, 서해를 보아야지만 그
보다도 산 역사는 이 사람에 있다. 민중이야말로 산 역사다. 그러나 사람은 타성
이 있으므로 제 있는 현실에서는 도리어 현실을 모른다. 그러므로 때때로 여행
을 할 필요가 있다. 남을 보아야 나를 안다.
산 물건을 죽이지 말자
힘있게 살려면 위대한 정신의 힘이 있어야 한다. 모든 문화는 정신의 힘에 나
타난 것이다. 그러면 그 정신의 힘은 어떻게 하여서 길러지나? 사상과 행동에
의해서다. 산골짜기의 실 같은 냇물이 모이면 물둥지가 되고, 큰 물둥지를 이루
면 모든 사람의 깊이 생각하는 것과 도탑게 행하는 것이 모이면 놀라운 민족적
인 정신의 물둥지가 된다. 그러므로 생각하고 행동하기를 힘쓰지 않으면 안된다.
생각의 근본은 어디 있다? 나에 있다. 사람은 내가 뭔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
다. 문제의 문제는 나다. 문제의 문제는 나다. 나란 것은 무엇인가? 나는 왜 사
나? 그런 것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중심이 된다. 네 자신을 알라 하는 말은 그
래서 나온다. 내가 뭔지 분명치 않으면 생각이 일정치 못하여 마음이 이랬다저
랬다 하고 마음이 이랬다저랬다 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것이 인생문제라
는 것이다. 사람이 저를 참으로 알아 제 뿌리가 깊을수록 자신이 있는 법이다.
자신 없이는 못산다.
p 513
사람은 저도 생각하지만 또 저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 대하여도 생각하지 않
을 수 없다. 이 우주의 근본은 뭐냐? 그 뜻은 뭐냐? 그 뜻이 분명해지기 전에
우리는 안심할 수 없다. 우리는 제가 중심이기도 하지만 또 전체가 나와 아무
상관이 없고 나를 위협하는 때에 사람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은 나와
세계 사이에 산 관련이 있는 것을 안 후에, 즉 나와 세계가 하나인 것을 안 후
에야 비로소 안심할 수 있다. 모든 위대한 정신적 창작은 거기서 나온다. 그것을
세계관, 인생관이라 한다.
이 세계, 이 인생에 대하여서는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으나 가장 위대한
것은 이것을 한 개 산 생명체로 보는 사상이다. 그것이 종교요 도덕이다. 인간이
처음으로 자기와 세계에 대해 눈을 떳을때 그들의 가슴은 말할 수 없는 놀람과
불안과 애탐에 사로잡혔다. 그래 생각하고 생각했다. 그런 결과 도달한 것이 이
우주는 한 뜻의 나타난 것이다 하는 생각이었다. 한번 그 생각이 들자 사람은
놀랄 만큼 발달했다. 옛날 문명의 근본은 동서양을 말할 것 없이 우주의 통일성
을 꽉 믿은 점이다. 하나님이라, 부처라, 브라만이라, 진리라, 생명이라, 이름은
가지가지로 불려져도 사실은 하나다. 그 하나ㅡ이 바탕을 공자는 ‘인’이라 했
고 예수는 ‘사랑’이라했고 인도교에서는‘희생’이라 했고 불교에서는 ‘자비
’라 했다. 인류는 몇천 년 이 정신, 이 믿음 속에 자랐다. 그 생각이 아니었다
면 세상은 말할 수 없이 참혹한 싸움의 계속이었을 것이요 벌써 멸망했을지도
모른다. 인류 역사에 전쟁이 끊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만큼 올 수 있었던 것은
이 우주를 하나로 보는, 그 근본을 도덕적인 것으로 믿은 이 사상 때문이다. 그
종교, 그 도덕이 어떻게 값 있고 힘 있었더냐 하는 것은 요새
다윈이 생물의 진화를 말하고, 그 원인이 생존경쟁에 있다는 소리를 한번 하
자, 그것은 바야흐로 일어나려는 민족사상과 합하여 온 세계에 퍼져 사람들의
인생관을 일변시켜 버렸다. 하나님도 우주의 뜻도 사랑도 다 없어지고, 이 세계
는 서로 살기를 다투는 경쟁판으
p 514
로 변해버렸다. 통일도 생명도 다 없어지고, 이 우주는 마음대로 먹을 한 개
물질의 무더기뿐이다. 그리하여 서로 힘과 재주를 다하여 경쟁하고, 심정이니 정
신이니 하는 것을 도무지 생각하지 않고 오기를 한 백 년 한 결과는 오늘같이
됐다.
백 년 동안에도 이렇거든 이것이 더 오래 가면 어찌 될까? 그리하여 이제 와
서야 거기 대해 심각히 생각하게 되었다. 슈바이처 박사 같은 분이 ‘생에 대한
존경’을 부르짖고 우리가 윤리적인 인생관에 돌아가지 않으면 망한다고 힘써
말하는 것은 이것이다.
사상도 사상이지만 실천 없는 사상은 오래 가지 못한다. 윤리적인 세계관을
힘있게 가지려면 일상생활에서 실천을 해야 한다. 그것이 불살생, 산 물건을 해
치지 말자는 것이다. 의식주에 필요한 것은 부득이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은 될
수록 피하는 것이 옳다. 한 개 한 개의 생명은 다 우주적 큰 생명의 나타난 것
이다. 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것은 우리 몸의 한 부분이다. 작게 보니 너와 나
지, 크게 보면 너와 나가 없다. 다 하나다. 에이치.지.웰스는 순전한 생물학적인
생각만 하면서도 “Men may die, man never die"라고 했다.
불교에서 진리를 깨닫는 데 먼저 피아관을 버릴 것을 주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현대에 있던 사람 중에 가장 위대했던 이는 간디요, 현대사에 가장 위대
한 일은 그가 지도했던 진리파지 운동이라 할 것인데 그가 절대 주장한 것은 ‘
아힘사’ 즉 불살생이었다.
옛사람은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했다. 자연주의적이고 과학적인 사상이
퍼지면서 그것은 미신으로 되어버렸다. 한편으로하면 그것은 인간의 자기중심적
인 편견을 제해버려서 좋다. 그러나 그것은 과연 옳은 것일까? 과학적인 입장에
서도 인간은 생명진화의 최고봉이다. 전체의 뜻을 결정하는 것은 끝이다. 현대문
명의 큰 결점은 책임감 의무감이 없어진 일이다. 그러므로 이 혼란이다.
이제라도 문명이 구원되려면 인간이 진화의 모든 책임을 자기에
p 515
게 있는 것으로 윤리적인 입장에서 책임감을 느끼고 서는 일이다. 만물은 이용
해 먹기 위한 것만 아니다. 대접하고 생각하여 깨달아야 하는 하나님의 사자요
편지다. 그러므로 돌보고 보호한다는 정신으로 대하여야 한다. 그렇다면 얼마나
다른 문화가 나올까? 평화주의는 이제 긴급한 문제다. 남의 생명을 먹고야 사는
이 생명일 수 없다. 남 죽이지 않고 나 스스로 사는 것이 영이다. 하나님은, 즉
진화의 목표는 영이다. 영이 되기 위해 불살생을 연습해야 한다. 이 다음 그 지
경에 가고야 말 것이다.
빚을 지지 말자.
이 세상은 돈의 세상이다. “일만 악의 근본이 돈을 사랑하는 데 있다” 고
벌써 2천 년 전 사람이 말했다. 예수는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해서
하나님과 대립하여 이난을 그 지배하에 넣으려는 대적을 세울 때에 ‘마몬 곧
돈으로 했다. 돈은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
인류의 문명을 돈이 발명되면서부터 빨리 발달된 것은 사실이다. 세상을 바로
잡을 생각을 할 때에 반드시 잊어서 아니되는 것은 돈 문제다. 돈을 이겨야 사
람이다. 이 다음 우리 세계는 돈이 아니고 사는 세상이어야 한다. 돈은 내가 마
음대로 쓸 수 있어서만 그 참값이 나타나는 것이다. 내가 돈을 쓰는 것이 아니
고 돈이 나를 지배하는 것 가지고는 참 문명이라 할 수 없다.
지금은 돈의 지배 아래 있는 문명이다. 아직 어리다. 그리고 돈의 지배를 면하
려면 빚을 지지 않을 각오를 해야 한다. 글ㅁ어죽어도 빚은 아니 진다 한 담에
야 돈을 이겼다 할 수 있다. 하늘나라가 어떤 곳인지 몰라도 적어도 한 가지만
은 분명한 것이 돈 없는 나라인 것이다. 돈이 뭐냐? 물질적 향락의 약속이다. 예
수, 석가는 돈을 몰랐다. 그러므로 진리의 왕, 세존, 조장어부, 구세주가 될 수 있
었다.
p 516
시골을 지키자
옛사람은 뜻을 찾았고, 지금 사람은 맛을 찾는다. 그러므로 옛날에는 시골에
살았고, 지금은 도시문명이다. 그러나 몸도 마음도 사람이 너무 많이 모이는 것
은 건강에 반대된다. 살과 살이 닿으면 썩는다. 입과 입이 마주치면 시비가 난
다. 도시가 죄악의 온상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도시에서 보는 것은 인간의
지혜와 힘이고 시골서 보는 것은 자연의 힘과 지혜다.
도시에서는 사람이 점점 교만해지고 시골에서는 점점 겸손해진다. 도시에서는
꾀가 있지만 시골에서는 슬기가 있다. 정치와 법은 도시에 있고 도덕과 종교는
시골에 있다. 시골이 뿌리요 도시는 꽃이다. 꽃이 너무 커지면 가지가 꺾어지는
법이요 뿌리가 깊으면 온 나무가 다 무성하다. 도시가 발달한 것은 돈 때문이요
경쟁주의 때문이다. 바벨탑이 하늘에 닿을 듯하다가는 무너졌다. 도시문명은 필
연적으로 멸망일 것이다. 평화사상, 협조사상이 늘어갈수록 지방자치는 늘어갈
것이요 그러면 시골이 문화의 중심이 될 것이다.
도시는 제국주의 자봄주의 독재주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지배하는 자는 도
시에 있다. 자유를 사랑하면 시골에 있어야 할 것이다. 거기는 산 조화가 있기
때문이다. 아름드리 나무와 작은 풀꽃과 얼크러지는 넝쿨이 한데 어우러져 하나
를 이루어 각각 마음껏 사는 것이 시골이다. 인격의 목표가 개성의 독특한 발달
에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이루자는 것이 문명이라면, 이후의 문명은 도시집중을
그만 두어야 할 것이다. 시골에 돌아가 자연의 대조화에 살면 지금 인간을 시달
리게 하는 모든 문제는 저절로 떨어질 것이다. 지금 시골이 발달 못하는 것은
도시의 착취 때문이다.
이 열두 가지는 반드시 어려운 것들이 아니요, 반드시 고상한 도덕교훈이라
할 수도 없다. 소위 죄우명도 아니다. 다만 날마다 할 수 있는 몇 가지를 세워
지켜보자는 것이다. 비교하자면 길을 가는
p 517
데 앞 마을의 포플러나무를 목표로 하는 셈이요, 산에 올라가는데 그 어느 바
위를 바라봄과 같다. 그것이 꼭 가야 하는 마지만ㄱ 목적도 아니요, 그것만 하면
다 된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렇게 작정하고 지켜보자는 것뿐이요, 반드시 모
두가 아니라도 할 수 있는 것을 해보자는 것이다.
하늘을 보라 해서 하늘에 무엇이 있는 것도 아니요, 술을 마시지 말라 해서
술에 반드시 죄가 있는 것 아니다. 그러나 우선 목표 없이는 못 나가는 법이요,
잘못하는 것이 인간인지라 잘못하면서도 지키는 것이 없어서는 아니 되겠으므로
하는 것뿐이다.
그 하는 내용에보다 그 하는, 무엇을 해보자는, 가만 있지는 않는, 지켜보는
그 마음에 있다.
그것이 생명이다.
생명은 지속이다. 끊이지 않고, 끊어졌다가도 다시 잇는 것이 생명이다. 또 한
번 해보는 것이 생명이다. 지지 않는 것이 이김이다. 져도 졌다 하지 않는 것이
이김이다. 놓지 않는 것이 믿음이다. 살려니 되려니 믿음이다. 없어도 믿는 것,
없으면 만들기라도 하자는 것이 믿음이요, 그 믿음이 생명이다. 하나님이 나를
만들었는지 누가 아니냐? 다만 내게는 하나님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수양에는
‘오래’가 비결이다. 아무 효과가 있는 것 같지 않아도 믿고, 그 하는 일을 유
일의 소득으로 알고 그저 계속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도다. 길 가는 밖에
길이 따로 있고 목적이 따로 있는 것 아니다. 하는 그 마음, 그것이 곧 목적이요
수단이요 하는 자다. “구즉통”이라, 오래 하면 뚫린다.
베르그송의 순수지속은 이것일까? 바울의 믿음은 이것일까? 참선의 선은 이것
일까? 모른다. 그들의 생각했던 것이 문제 아니다. 내가 할 뿐이지.
내가 아는 것은 내가 줄을 하나 잡았을 뿐이다. 윌리엄 블레이크가 황금 실꾸
리라 했것다. 누가 던진지 모른다. 내가 없는 중에서 뽑아낸 줄인지, 옛날 허영
심 많은 임금이 속은 것 같은 하무의 줄
p 518
인지도 모른다. 하여간 내가 한 줄을 돕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요점은 그것을
돕는 일이다. 사실이 아니고 꿈이면 나중에 허무가 달려 나와도 나올 것이다. 실
재보다도 허무를 잡으면 더 큰, 더 참된 소득 아닌가.
무는 유보다 크다. 무한히 돕는 놈, 지키는 놈한테는 견딜 자가 없다. 놓지 않
는 야곱에게는 하나님도 못 견딘다. 그렇다. 하나님과 영원, 무한, 절대와 씨름을
하잔 것이 생명이요 도다. 씨름하는 밖에 씨름하는 자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요,
이기는 자 밖에 진 자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이것을 알면 5천 년 역사 바로
잡는 것은 여반장이리라(1953)
2018/04/21
오강남. 도덕경 - 개정판, 원문 영어 번역문 수록
알라딘: 도덕경 - 개정판, 원문 영어 번역문 수록
늙은 선생. 새창으로 보기
가넷 ㅣ 2016-01-16 ㅣ 공감(3) ㅣ 댓글 (0)
어렸을 적에는 노자를 신선으로, 노자가 남겼다는 도덕경의 신비한 비밀을 간직한 서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어떤 매체의 영향 탓이였는지는 모르겠다. 오강남 역본을 고르게 된 건 2009년도인데 막 대학을 졸업하고 난뒤에 취업 준비 내지는 시험준비로 괘나 불안한 당시였는데, 구입하고는 잠시 읽다가 덮어두었다. 영 내키지 않았던 탓이다. 기억으로는 오강남 역본의 장자를 읽고 나서 세트로 구입해버렸던 것 같은데, 우화라서 재미있기라도 한 장자와는 달라서 재미가 없었다. 그러다가 한참 지나서 이제야 일독을 하게 되었는데 그래, 예전에는 읽어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 같다. 지금에서야 그나마 내게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81장으로 이루어진 이 도덕경(물론 다양한 노자가 있다는 건 안다)은 하나 다 내게 들어온 건 아니다. 취사 선택하며 마음을 다졌다. 종종 이해못할 구절들이 많았고... 아니, 거의 이해를 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역자의 해설이 도움을 주기도 했지만, 그냥 억지로 갖다 붙힌 느낌도 없지 않았고, 그냥 짜증나는 잔소리를 들은 기분이 들었다.
가장 인상 깊은 건 도의 길은 하루하루 없애 간다는 것이었다. 알듯 말듯한 이야기지만, 언젠가는 이해할 날이 오지 않을까? 도서관에서 <노자도덕경하상공장구>를 빌려왔다. 바로 읽을까 했지만, 조금 기간을 두고 천천히 읽어나가기로 했다. 뭐 급할 것이 뭐가 있나. 그 외에도 해제주의자의 도덕경인 <사유하는 도덕경>, 왕필의 주,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노자>, <백서 노자>를 구입해두었다. 강신주의 <노자 혹은 장자>도 구입해두었다. 이건 태학사에서 나온 두 권이 있는데 책무덤에 같혀 버려서 찾을 길이 없다. 나중에 정리할 때나 볼 수 있겠지. 이 책에 대해서는 많은 비판이 있는 것 같지만, 일단 초심자에게는 흥미로운 이야기라서 구입했다. 강신주 박사의 노자에 대한 이야기는 일전에 지식인 마을이라는 총서에서 나온 <장자&노자>를 통해 접한 바 있기에 그렇다.
---
도덕경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서...
집중과단순함 ㅣ 2015-07-23 ㅣ 공감(1) ㅣ 댓글 (0)
수년 전 알라딘에서 오강남 풀이 도덕경을 구입하고 읽고서는 구절구절 마음에 와 닿는 내용이 많아 그 후로도 여러 차례 볼 정도로 애장도서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본문과 해설을 같이 보다가 나중에서 본문만 보는 게 좋더군요. 그 이유는 오강남 저자의 해설이 기독교과 도덕경을 관련지으려는 의도가 곳곳에서 보였기때문입니다. 물론 여러 참고문헌을 참조하고 저자의 생각을 추가한 결과이겠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견강부회식 해석이더군요. 전체적으로 폄하하는 것은 아니고 여전히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처음 접하는 독자에게 추천할 만한 책입니다.
여러 지은이의 도덕경을 보기도 했는 데, 돌이켜보면 제대로 된 해설은 많지 않았습니다. 동양철학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도덕경을 서양서적의 해석을 참고하는 문제와 저자들의 한자중국문화의 이해부족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좀 더 관심있는 분들은 동양문화와 철학 전반에 대한 깊이있는 공부와 한문해석을 통해 제대로된 도덕경의 의미를 찾으시길 바랍니다.
------
탁월한 인간의 다면성 새창으로 보기
밍교 ㅣ 2014-07-26 ㅣ 공감(0) ㅣ 댓글 (0)
우리 사회는 냉소의 시대이다.
최악 속에서 힘겹게 차악을 골라야하는 상황들이 이어지자, 사람들은 최선이 없다며 냉소하기 시작했다.
러셀이 한 말처럼 힘이 없는 자는 냉소한다.
그리고 냉소하기 때문에 더 힘이 없어질 것이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지나치게 똑똑하고 냉소적이고 무력해졌다.
과연 대의민주주의 사회에서 일반 시민이 냉소하지 않고 참여하는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원하는 지향을 향해 촉구'하는 것 외에는 없는 것 같다.
촉구하는 여론을 형성하여 그로써 지배 세력을 압박하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우리 사회가 그 후 작동해야 할 정치가 작동하지 않는 사회라는 것이니, 냉소가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문제라고 보는 나 역시 냉소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누구나 지친다.
누구나 뭘 해야 할 지 모른다.
그러다 사람들은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대다수는 ‘아직 죽지 않은 자’로서 계속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주류의 질서를 선택하고,
여전히 다른 삶을 꿈꾸는 소수의 사람들은 주변의 작은 삶들을 긍정하며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골몰한다.
전자는 성공하지 못하고 그저 ‘아직 죽지 않았을 뿐’이고,
후자는 그 미덕과 더불어 선명한 한계를 갖는다는 점에서,
나는 더 이상 생각을 어떻게 전개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문제의식을 가졌다.
이런 맥락 속에서 도덕경을 읽으며, 나는 노자가 나에게 새로운 세계를 향한 지향을 보여주는 데에는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노자는 두 가지 길 중 첫 번째 길을 제시하며, 아직 죽지 않은 자로서 영원히 죽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지 탁월하게 보여준다.
그 길이 옳건 그르건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존재하기 때문에 도이고, 그렇기 때문에 행해야 하는 것이다.
천지는 불인하고, 세상은 이미 이러하고, 사람들은 선악의 너머에 존재한다.
이는 세계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이지만, 나의 냉소에 하나의 근거로 더해질 뿐이다.
이 세상의 수많은 책들은 일종의 칼날같은 것이라면,
나의 세계관을 깨트려주는 칼이야말로 나에게 소중하고 유용한 연장일 것이다.
그러나 그 칼이 나와 결이 같아 그저 스며들기만 한다면 그것은 그저 자기 확인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논어는 모순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세상을 보는 방식의 변화를 촉구했다.
그 속에는 공자가 원하는 세계가 있었다.
도덕경은 노자의 뛰어난 우주관과 정확한 현실 인식에도 불구하고, 그 칼끝이 제국의 정당화로 향한다.
그 속에는 노자가 원하는 세계가 없다.
그저 이미 존재하는 세계, 그리고 그 속에서 생존하기 위한 사투가 들어있다.
노자를 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절대자가 다스리는 세계, 그리고 그 절대자마저 언제 죽을 지 모르는 치열한 세계에서 그의 글은 생명력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그 글이 지금 나에게 어떤 생명력을 지니는지 생각해보는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제국에 살고 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도덕경은 생생한 생명력을 가질 수 있고,
제국의 너머를 바라는 누군가에게는 권모술수로 읽힐 수 있을 것이다.
시대의 냉소와 무기력을 넘되 처세로 나아가고 싶지는 않은 나에게, 노자는 힌트를 주지 못했다.
오히려 세계의 변화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인간의 본질이란 얼마나 견고한 지,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통찰할 줄 아는 인간의 지성 역시 얼마나 유구한 지에 대해 좀 더 깊은 고찰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원문과 함께 참고로 본 이 책은 나와 전혀 다른 해석을 보여주면서,
형이상학적인 왕필식 해석을 하는데, 그 점이 참고는 되었으나, 그렇게 설득력 있진 않았다.
특히 한 장에서 여러 모순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오랜 세월 계속된 편집의 이유인지, 노자 본연의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그 점에 대한 명확한 생각없이 그 생각들을 연결해버린다.
참고는 되지만, 역시 원문을 읽는게 좋을 것이고,
원문을 읽지 못한다면 번역문 정도를 참고해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공감 Thanksto 찜하기
도덕경 [오강남] 새창으로 보기
그랜드슬램 ㅣ 2013-01-07 ㅣ 공감(0) ㅣ 댓글 (0)
상선약수 (上善若水)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
노자님의 말씀을 압축한다면 상선약수라고 말할 수 있다.
수 백,수 천년된 고전이 현실의 사람에게 보약이 되고 제대로 된 길을 가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지금 나도 정확한 답은 모르겠으나
한 가지는 정확히 말할 수 있다.
조금씩,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것,어제보다 성숙해진 마음과 행동,실천을 하고 있다는 것이 책을 읽는 이유이자 고전을 독서하는 이유다.
하루 아침에 깨닫고 나아지지는 않는다.
"가장 휼륭한 것은 물처럼 되는 것입니다.
물은 온갖 것을 위해 섬길 뿐,
그것들과 겨루는 일이 없고 모두가 싫어하는 낮은 곳을 향하여 흐를 뿐입니다.
낮은 데를 찾아가 사는 자세,
심연을 닮은 마음"
나도 물처럼 살고 싶다.
흐르는 물처럼 잔잔하게 살고 싶다.
공감 Thanksto 찜하기
노자, 초월자 새창으로 보기
kikaider ㅣ 2012-06-26 ㅣ 공감(1) ㅣ 댓글 (0)
사실 이 책은 읽은지 꽤 된 것인데, 그 누가 老子의 道德經을 한 번 읽고 이해할 수 있을까? 지금도 수시로 꺼내 한 구절씩 읽으며 그 깊은 뜻을 새기는데, 읽으면 읽을 수록 정작 노자의 의도와는 자꾸 멀어지는 느낌이다. 읽을 때마다 다르게 다가오는 구절들과, 시대를 넘어 그 상황에 맞게 재해석되기를 반복하는 고전 중의 고전, 노자. 물론 나의 한자 실력이 노자만큼 된다면 그와 직접 대화하면서 질문하고 잘못 해석한 부분에 대해 교정을 받겠지만, 불행히도 노자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더보기
공감 Thanksto 찜하기
내마음의 발췌 새창으로 보기
탕자 ㅣ 2011-06-15 ㅣ 공감(1) ㅣ 댓글 (0)
“세상이 어떻게 존재하느냐 하는 것보다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신비스럽다.”- 비트겐슈타인 (22쪽)
성인(聖人) ? 도덕경에서 약 30번 정도 사용되며, 어원적으로 귀가 밝은 사람, 귀가 밝아 보통 사람이 감지하지 못하는 것도 잘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27쪽)
중국에서 최고의 인격신으로 모시는 하늘님(上帝) ?37쪽
“말이 많으면 좋지 않다”고 가르치는 것은 도덕경뿐 아니라 거의 모든 종교에서 가르치는 교훈이다.(41쪽)
가장 훌륭한 것은 물처럼 되는 것입니다(상선약수上善若水). 물은 도의 최고 상징이다.(52쪽)
부유하든 가난하든 재산에 대한 ‘집착’이 있으면 인생의 더 깊은 면에 눈을 돌려 보지 못하고 평생을 그저 돈 생각만 하다가 마쳐 버릴 위험이 있다.(59쪽)
전통적으로 동양에서는 인간이 혼魂과 백魄으로 이루어졌다고 믿었다. 혼은 정신적인 면을 관장하고, 백은 육체적인 기능을 주관한다고 보았다. 몹시 놀란다는 표현으로 ‘혼비백산’이란 말이 있지만 문자 그대로 혼이 날아가고 백이 흩어지면 사람은 죽어 버린다.(62쪽)
동양에서는 예부터 오행五行의 원리에 따라 오복이니 오륜이니 오관이니 하는 것처럼 많은 것을 다섯가지로 분류하는 습관이 있었다. (69쪽)
토마스 아퀴나스-신에 대하여 알 수 있는 유일한 사실은 우리가 신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것뿐(78쪽)
아놀드 토인비-종교라 했을 때 내가 뜻하는 것은 …. 자기 중심주의를 극복하는 것이다.(100쪽)
도덕경은 도道를 체득함으로 자유를 구가하는 삶을 살 수 있는 능력德을 갖도록 가르쳐 주는 말씀經이다.(107쪽)
종교란 궁극적으로 구원을 목표로 하는데, 구원이란 온전함(wholeness)을 회복하는 일이다.(114쪽)
노자,장자에서는 이 ‘혼돈’을 모든 것의 시원으로 본다. 통전적, 통일적 실체로서 모든 가능성을 그 속에 머금고 있는 ‘완전한 무엇’이다.
사회의 통념이나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 삶의 깊은 의미를 찾아 이를 추구하는 참삶(how to live)의 문제는 뒷전으로 물러나고, 오로지 사회에서 떠받드는 고루한 윤리체계를 비판 없이 받아들여 겉으로 나타나는 행위만 매끈하게 꾸미려는 처신(how to behave)의 문제가 주관심사가 되어 버린 사회.(181쪽)
구슬처럼 영롱한 소리를 내려 하지 말고 돌처럼 단단한 소리를 내십시오(184쪽)
임금이 자기를 과인寡人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낮추어 부름(186쪽)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진리는 역설”이라고 했다. 진리는 상반되는 듯한 두 명제를 동시에 포괄하기 때문이다.(194쪽)
아힘사 ? 간디를 통해 유명해진 이 말의 본뜻은 ‘아무에게도 해를 주지 않음’이다. 정치적인 용어로는 ‘비폭력’, ‘무저항’이라고 한다.(202쪽)
자기 주장, 자기 줏대만을 고집하는 사람은 섞일 수가 없다. 자기를 진정으로 비운 사람만이 어느 누구와도 진정한 의미의 교류가 가능하게 된다.(204쪽)
신학자 니버의 기도
“하느님, 제가 바꿀 수 없는 것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의연함을 주시옵고,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꿀 수 있는 용기를 주시옵고,
그리고 이 두가지를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208쪽)
기독교 신자 가운데 특히 열성적인 교파 신도를 만나도 자기가 세상의 모든 진리는 독점하고 있는 양 무슨 질문이 나와도 척척 박사처럼 잘도 받아넘긴다. 이런 식으로 미리 다듬어지고 학습된 말재주에 능하다고 정말 달변이라 할 수 있을까?(212쪽)
17세기 유럽에서는 과학적 사고의 중요성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내면 세계를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에 대항하여 내면 세계로 우리의 관심을 집중해야 한다고 하는 사상가가 나오게 되었다. 대표적인 이가 파스칼, 몽테뉴, 존 던, 칸트 같은 사람이다.(221쪽)
중국에서는 도가道家와 도교道敎를 구별한다. 도가에서는 생사에 집착함이 없이 자유스러운 참삶(eternal life)을 주된 가르침으로 삼는 반면, 도교에서는 보약,금단,부적,요술,방중술 등 어떠한 수단을 쓰든지 장생불로(長生不老)하고 될 수만 있으면 신선이 되어 죽지 않는 불멸을 이상으로 가르친다는 점이다. (233쪽)
어느 의미에서 우리의 삶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기간을 소비하면서 죽어 가는 것이다.(234쪽)
도와 덕은 물론 본질적으로 같지만 도가 본체론적인 면을 가리킨다면, 덕은 도에서 나오는 내재적 창조력이나 그 작용을 가리키는 말이라 할 수 있다…. 도가 개인이나 개체 안에서 작용할 때 그 힘을 구체적으로 지칭하여 덕이라 한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237쪽)
남부러울 것 없이 살고 있는데도 뭔가 허전하고 모자란 듯한 느낌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우리가 이렇게 내면적인 세계, 도에 접하기 전에는 영원에의 목마름이 충족될 수 없다. “주님, 우리의 마음은 당신 안에 안주하기 전에는 안정을 찾을 수 없습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242쪽)
덕德-도에 입각하고 도를 터득했을 때 얻어지는 신선하고 활기찬 생명력, 도의 활성화에서 나오는 약동적인 힘을 뜻하는 것.(250쪽)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합니다.(知者不言,言者不知)-도덕경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지고 많이 인용되는 구절 가운데 하나(257쪽)
도데체 도를 따른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며 정확하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 구체적 첫걸음이 바로 근검 절약.(273쪽)
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작은 생선을 조리하는 것과 같습니다. 작은 생선을 구울 때는 우선 칼로 배를 따서 내장을 뺀다든가 뼈를 추린다든가 하지 않고 통으로 굽는다. 젓가락으로 이리저리 들쑤시지 않는다.익을 때까지 가만히 놓아 두고 지켜보고만 있어야 한다….완전히 내팽개쳐 두는 것은 아니다.(275쪽)
고대 사람의 생각으로는 세상에 사람을 못살게 하는 것이 두 가지인데 하나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움직이는 귀신이요, 다른 하나는 보이는 세계를 다스리는 위정자였다.(277쪽)
큰 나라는 강의 하류…….유가에서는 하류를 천히 여기고 상류를 좋아하는 데 반해 도가에서는 하류를 상류보다 좋게 여긴다.(281쪽)
책을 한 권 쓸 때 ‘360쪽짜리 책 한 권’이라 생각하는 대신 ‘하루 한 쪽’ 하는 식으로 생각하면 일이 더 쉬워질 수 있다.(289쪽)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 일만은 이루고 말리라는 강한 집념과 집착 때문에 실패했을 경우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좌절감과 실의에 빠질 수 밖에 없다.(295쪽)
도덕경에서는 루소를 비롯한 자연주의 정치철학자와 마찬가지로 이른바 국민을 교육한다는 것은 결국 국민이 본래 가지고 있던 순박한 본성을 후패케 할 뿐이라고 한다.(299쪽)
불초不肖는 ‘같지 않다’는 뜻인데, 확대된 뜻으로 불초소생이라 할 때와 마찬가지로 부조의 덕망이나 유업에 미치지 못할 정도로 미흡함, 똑똑지 못함, 쓸모없음 등을 가리킨다.(309쪽)
간디에게 많은 영향을 준 톨스토이가 예수님의 가르침 가운데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마태5:30)고 한 것을 가장 중시했다는 사실은 흥미로운 사실이다.(315쪽)
조셉 캠벨에 의하면 위대한 정신적 영웅은 이렇게 일반 사람이 이해하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에 그들에게 돌아가기를 거부하는 refusal to return의 단계를 거치게 된다고 한다.(324쪽)
사실 진리는 단순하고 담백한 것이다.(324쪽)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있으면 손가락에 우리의 전적인 관심을 집중시킬 것이 아니고 그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달을 보아야 한다. 상징 자체에 붙들리는 것이 아니라 상징의 일깨움을 따라 상징이 상징하는 바를 알아본다는 것이다.(324쪽)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것이 가장 훌륭합니다.(知不知上)
알지 못하면서도 안다고 하는 것은 병입니다.(不知知病) (327쪽)
공자님은 “아는 것은 안다고 하고 알지 못하는 것은 알지 못한다고 하라. 그것이 곧 아는 것이다.(논어2:17)라고 했다.(327쪽)
도덕경에서 말하는 용기란… 의연함과 침착함을 유지함으로 상대방을 압도하고 상대방 스스로가 더 이상 함부로 건드릴 수 없다는 것을 알도록 하는 것,…(336쪽)
긴 안목으로 보면 하늘이 그렇게 엉성하게 일을 처리하지 않는다. 그러니 상대방의 잘잘못을 가지고 당장 너무 조급하게 반응하지 말라. 결국은 하늘의 정의가 강처럼 흐르게 될 것이라는 하늘에 대한 신뢰감을 가지고 살라는 것이다.(337쪽) 사필귀정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죽음보다 더 큰 가치, 자기가 믿기에 궁극적으로 의미 있는 일이라고 여겨지는 일을 위해 자기 목숨을 희생할 각오가 되었을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한 경우이다.(339쪽)
도가적 입장에서 보면 살아가는 데 어떤 목표를 정하고 삶을 그 목표를 추구하기 위한 수단으로 희생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못 된다…. 행복은 나비와 같다…..행복은 고양이 꼬리에 달린 방울과도 같다.(345쪽)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가지고 싶어지는 것이 사람의 마음(353쪽)
깊은 원한은 화해하더라도 여한이 남는 법입니다.(358쪽)
기도는 하늘이 남보다 나를 더 잘봐주기를 바라서 드리는 주문이나 편법이 아니다. 어떤 면책권이나 치외 법권적 특권을 얻어 내기 위한 수단도 아니다. 기도는, 넒의 의미의 종교는 내가 하늘의 뜻에 내 뜻을 맞추고 하늘의 길에 내 발걸음을 맞추기 위한 자기 낮춤, 자기 비움의 작업이다.(361쪽)
진리의 말은 아름답지 못하다고 한다.(368쪽)
진리의 말은 변론이 아니라고 한다. 양쪽을 다 같이 포용하는 말이기 때문에 사물을 이것이냐 저것이냐로 분명히 딱 쪼개고 끊는 논리적인 변론일 수가 없다. 변론을 잘 한다는 것은 어떤 사물에 대하여 자기가 가진 제한된 생각이나 고정 관념을 평소 달달 외우고 있던 틀에 맞추어 독단적으로 그리고 일사천리로 주장하는 일이다…. 어느 종교에서 열성파 신자가 자기의 주장을 뒷받침할 성서 구절만을 달달 외워서 타교파 사람을 공박하는 따위와 같은 것이다.한 가지 생각, 곧 자기가 가진 생각만 옳고 다른 생각은 모두 틀렸다고 보는 입장이기 때문에 우선은 무지의 특권인 확신을 가지고 힘차게 말할 수 있다. (369쪽)
사랑이나 진리 같은 정신적인 것은 나누어 주면 줄어드는 산술 법칙이 아니라, 나누어 주면 줄수록 오히려 더 많아지는 역설의 법칙이 적용된다.(370쪽)
공감 Thanksto 찜하기
외유내강 새창으로 보기
모래바다 ㅣ 2011-06-14 ㅣ 공감(3) ㅣ 댓글 (0)
이 글을 쓰기 전 몇 개의 리뷰를 읽어보았다. 대부분은 오강남의 도덕경에 대하여 매우 긍정적인 평가였다. 그러나 더러는 노자의 사상을 왜곡해서 한심하며, 이 책에 높은 점수를 주는 사람들을 싸잡아 비판하는 평가도 있었다. 나는 전자에 속한다. 동양 철학을 전공하는 전문가도 아니고 이 책에서 느낀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칠 생각도 없기 때문에 이 책이 도덕경을 180도 왜곡 했다 한들 나는 그것을 별로 중요한 관점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도덕경을 하나의 자기 계발서라고 생각하고 읽었다.
사상에 관련된 책을 이번에 처음 읽어 보았다. 나는 철학에 철자도 모르는 사람이며, 노자에 대해서도 역시 전혀 알지 못했다. 오강남의 도덕경 81장을 다 읽은 지금 역시 도와 덕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겠다. 분명히 다른 여러 가지 번역본에 비해 오강남의 도덕경은 일반인이 읽기 쉽게 집필 되어 있다고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아직 내가 세상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지 쉽게 마음속으로 다가 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 책이 '어떠한 리뷰' 에서 말하듯이 대통령이나 왕이 아닌 그냥 '평범한 일반인' 에게 전혀 쓸모 없는 것이냐? 그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그 이유를 설명해 보려한다.
나는 공대생이다. 지금 현재 학생이라는 나의 신분에 가장 필요한 덕목은 '노력' 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노력이 마음만 먹는다고 되는 것은 아니었다. 짧은 인생이지만, 지금까지 경험해본 바로는 '노력'은 편안하고 안정된 마음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마음이 안정되지 않고 근심에 쌓여 있으면 어떠한 노력도 하고 싶지 않다. 그러한 의미에서 나는 '도덕경'을 매우 높게 평가 하고 싶다.
나는 성격이 근심이 많고 대인관계를 썩 잘 해내지 못한다. 겉으로 봐서는 사람들과 매우 원만한 관계인 것처럼 보이지만 내 마음속으로는 항상 불안하고 불편하고 욕심이 많다. 그러던 중 등교 길에 '도덕경' 을 읽기 시작했다. 신기 하게도 한 장 한 장 읽어 나가면 마음이 매우 편안해지고, 근심 걱정이 사라졌다.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모든 것을 '내려놓음' '무소유'에서 비롯되는 마음은 결코 아니었다. '도뎍경' 에서도 "아무것도 가지려 하지마라", "완전한 비움"처럼 무소유와 비슷한 말이 있다. 하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그것과는 다른 것 같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일까? 확신할 수는 없지만 왠지 다음과 같은 것을 갖게 되어서 인지 싶다. 바로, 항상 상대적인 평가로 고통 받고 남들보다 우위서지 못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절대적'으로 나 자신을 판단할 수 있게 해주는 잣대를 갖게 된 것이다. 이 것을 어떠한 구절에서도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읽다 보면 나는 언제나 이러한 마음이 든다. 그래서 '외유내강' 이라는 중국인들의 가치관이 도덕경에서 출발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81 개의 전장이 구구절절 마음에 와 닿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도덕경은 왕, 재상을 위해 쓰여진 것 이기 때문에, 보통 사람에게는 전혀 필요 없거나 혹은 안 읽는 것보다 못한 것 같은 그러한 구절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걸러가며 읽으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시대가 바뀐 만큼 적용할 수 있는 문장도 바뀌었으니 그것을 판단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는 내 짧은 견해를 늘어놓았고, 이제 결론을 맺어야 할 것 같다. 분명히 도덕경 이라는 밥상에는 여러 반찬 들이 많이 차려져 있다. 중요한 것은 독자가 얼마나 자신에 게 필요한 영양가 있는 반찬을 골라서 먹느냐 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반찬은 안 먹으면 그만인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이 있다. 도덕경에는 매우 영양가 있고 주옥같은 반찬들이 곳곳에 많이 차려져 있다는 것이다.
'물'과 같이 되라. 물은 누구와도 겨루려 하지 않는다. 그저 낮은 곳으로 흘러갈 뿐이다. 하지만 물은 만물을 존재하게 한다.
총 : 29편
리뷰쓰기
나를 비워 나를 완성시키는 도덕경 새창으로 보기
doorumgil ㅣ 2010-02-06 ㅣ 공감(2) ㅣ 댓글 (0)
도가사상의 원조인 노자의 저술로 알려진 도덕경, 그냥 '무위자연'으로만 배웠던 노자를 알기위해 도덕경을 일독하였다. 많은 도덕경 번역서가 있지만 읽기 쉽게 풀어쓰고 분량도 적당한 현암사판 도덕경을 선택하였다.
도덕경이 시종 강조하는 것은 무위와 비움이다. 없음으로 있음을 만들고, 하지 않음으로써 함을 만드는 역설의 철학이다. 이는 다시말해서 있음과 함의 주류를 비판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혼란했던 춘추전국시대의 문제점을 노자는 부국강병을 달성하기위하여 법률을 제정하고 예법을 강조하는 인위적인 작위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보았다. 애초부터 주류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으로 탄생한 소수자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이것은 노자의 핵심적 역할이자 한계라고 생각한다. 현재의 진보정당이 현실에 대한 비판이나 현실문제에 대한 환기의 역할을 하지만 수권정당으로는 어려워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의 느낌이 든다
5천자 정도의 간결한 격언집으로 이루어져서 그런지 몰라도 해석하기에 따라 의견이 분분해질 수 있다는 생각이다. 가령 36장의 '오므리려면 일단 펴야합니다. 약하게 하려면 일단 강하게 해야 합니다. 폐하게 하려면 일단 흥하게 해야 합니다. 빼앗으려면 일단 줘야합니다.' 라는 부분은 법가에서 정적을 치는데 필요한 정략적 음모로 읽힌다. 이구절은 원래 만사 흥망성쇠나 생주이멸을 뜻하는 것이라 역자는 말하는데 그 본질적인 면보다 세상사람들에게 권모술수의 처세술로 더 많이 알려진 것이다. 도덕경을 우리가 그동안 익숙한 자구해석이나 이분법적 사고로 바라볼때는 인생의 처세술이나 뜬구름 잡는 명상록으로 밖에 볼 수 없는 것 같다. 내용을 자구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하나의 <도>라는 이미지로 크게 받아들여 깨우쳐야 하는데 쉽지않은 일이다.
도덕경이 이야기하는 큰도가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동안 남들과 비교하며 욕심과 소유욕의 굴레에서 스트레스를 받던 나를 돌아보고 무언가 계속 서두르며 눈에 보이는 양적인 쌓임을 성취라 자족하던 조급한 발걸음을 한박자 늦춰야 겠다는 고민을 잠시나마 하게된건 도덕경을 읽은 후 큰 소득이었다.
더불어 비교종교학자인 오강남 교수가 번역하여 그런지 성경구절과 비교하여 풀이한 구절이 여러곳에 나열되어 있는점이 특징이다. 산은 하나인데 어느 방향에서 오르느냐에 따라 내용과 과정이 달라진다는 종교 다원주의에 대해서도 생각할 여지를 만드는 부분이라 하겠다.
공감 Thanksto 찜하기
처음 읽는 도덕경 새창으로 보기
스파피필름 ㅣ 2009-05-30 ㅣ 공감(1) ㅣ 댓글 (0)
도를 도라 하면 더 이상 도가 아니라는 그 유명한 도덕경의 구절을 난생 처음 읽어봤다. 사랑을 사랑이라 말하는 순간 사랑이 아니게 되는 것처럼 이라고 농담을 해본다. 시절이 하 수상하여 마음이 어지럽다. 단순하고 명료한 무언가를 생각하고 집중하고 싶은데 딱히 그럴만한 대상이 없다. 한마디로 마음 둘 곳이 없구나. 하여 잡은 이 책.. 총 81장으로 되어있고 한 장당 서너 페이지로 하루에 한장씩 읽어도 마치 마음이 정화되는 것처럼 차분해진다. 무위, 상선약수와 같이익히 알고 있는 개념도 글을 통해 다시 확인하니 새롭다. 살아가면서 점... 더보기
공감 Thanksto 찜하기
21세기, 노자에게 듣다 새창으로 보기
minerva ㅣ 2009-05-17 ㅣ 공감(1) ㅣ 댓글 (0)
노자에게 듣다, 듣기가 어려운 부분은 살면서 배워 나가기로 하고, 일단 듣는다. 노자는 시적인 은유로 직설적이지 않고 에둘러 가르침을 준다.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영원한 도, 부를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라는 전제하에 아무것도 하지 않음에서 함을 발견하고, 없음의 쓰임에서 있음의 이로움을 역설하며, 하고서도 드러내려 내세우지 않는 깨달은 자의 자세를 말한다.
1장
말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며
부를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이름이 없는 것이 하늘과 땅의 시작이며
이름이 있는 것은 모든 것의 어머니.
항상 욕망이 없다면 그 신비스러움을 볼 수 있으며
항상 욕망이 있다면 그 분명함을 볼 수 있다.
이 둘은 한 근원에서 나왔으나 이름만 다를 뿐,
그 같음을 어둠이라 부른다.
어둠 속의 어둠이어라 모든 신비의 문이여!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名, 天地之始;
有名, 萬物之母.
故 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
此兩者同,
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도덕경 1장은 많은 흥미로움을 주는데, 우선 ‘말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라는 말이 함의하고 있는 뜻은 무엇인가 생각해볼 만한 문제다. 말로 표현되면 이미 도를 떠나서 다른 무엇이 된다는 뜻 같기도 하다. 나는 ‘도’를 도 말고도 다른 것으로 대체해 본다. 내가 이루려는 목표, 사랑 등으로. 문맥이 통하기에 더 생각해 본다. 우리는 쉽게 사랑을 말하고, 쉽게 자신의 꿈을 말한다. 본질적으로 그것은 말로 설명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라는 게 노자의 입장이다.
도를 꿈을 사랑을 한 가지로 보는 나는 그것을 어떻게 일상 생활 속에서 이룰 것인가,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가, 셋이 함께 가야 행복할 텐데, 욕심을 낸다. ‘부를 수 있는 도는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임의로 이름을 지어 부르는 모든 대상들 또한 유한자로서 영원하지 못하다. 개체를 반복해서 이어가더라도 더 이상 그 이름은 아닌 것. 이름지을 수 있는 것은 그것이 한정하는 것으로 영원하지 않다. 영원하기 위해 도를 행하되 그 자체로서 충만하고, 이름을 짓되 그 자체로서 충만하면 될까? 이름을 짓기 시작한 때부터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도 생각할 수 있다.
욕망이 없고있음으로 하여 신비로움과 분명함을 볼 수 있다. 흔히 빛을 경외하며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빛을 빛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둠이다. 그런 논리로 욕망이 없기 때문에 신비로움을 볼 수 있고, 반대로 욕망이 있기 때문에 분명함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둘의 근원은 어둠, 어둠 속의 어둠, 그것은 모든 신비의 문이라 일컫는 것에서 밝은 면과 그것을 그것답게 하는 어둠을 함께 보는 눈을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논리가 인생무상으로 흐르지 않고, 굳건히 자신의 길을 걷는 성인의 모습으로 투영되는 것은 노자의 사상이 그만큼 원대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제로서 오히려 우리들에게 삶의 목표를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러이러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결코 이루어질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루려면 성인의 경지에 도달하는 정도로 해야 한다, 그러니 그런 것을 꿈꾸지 말라, 아니 말하거나 부르기 전에 이런 전제 정도는 알고 출발하라. 다소 어감이 딱딱해졌더라도 이해하시길. 아마도 노자는 좀 더 부드럽고 자상한 면모를 지녔으리라.
오히려 하지 않음으로써 하는 무위자연을 역설하고 있는 노자는 어느 누구보다도 시대를 앞서 산 철학자일 것이다. 전편에 흐르는 마음결로 사상은 철학자, 절대자, 군주, 백성들의 구체적인 삶까지도 들여다보는 혜안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무위자연은 아마도 모든 것을 끝까지 열심히 해낸 자의 역설 같이 느껴진다. 다 하고 나서도 그 다함을 드러내지 않는 태연함, 속속들이 체험하고 나서 느끼는 여유로움은 아니었을까.
공감 Thanksto 찜하기
도덕경 듣기. 새창으로 보기
누구개 ㅣ 2009-01-05 ㅣ 공감(1) ㅣ 댓글 (0)
아담한 사이즈와 읽기 쉬울 것 같은 편집(대중적으로 씌여졌음에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나의 어리석음 때문이다.) 때문에 서점에 가면 늘 현암사의 시리즈들을 훑어 봤던 기억이 난다. 물론 그 중에 읽은 것은 두세권에 불과하지만.
주말에 술먹고 하루 신세를 진 친구 방 한 구석에 그 현암사의 도덕경이 꽂혀 있었다. 빨간 책들 사이에 외롭게 있는 것같아 기왕 진 신세라는 생각에 '안 읽으면' 달라고 했다. 선듯 내주는 친구.
고마운 친구^^.
긴 휴가를 맞아 다시금 읽어 봤다.
대학때, 그리고 사춘기 시절 도가와 관련한 책들을 간혹 읽곤 했었다.(이 책도 서점 한구석에 앉아서 다 읽었었다.) 초탈한 도인들을 사뭇 경외하고 한편으로는 부러워하면서. 다시 읽어 본 도덕경, 정확히는 주석자가 다시 '읽어준' 도덕경은은 예전의 느낌과는 많이 달랐다. 단지 '도를 도라고 하면 도가 아니다'는 '최소한 도는 '도를 도라고 하면 도가 아닌 것'은 일러준다'는 식의 말장난에 가까운 이해를 위한 책읽기는 아니었다.
그것은 첫번째로 주석자가 그 뜻을 우리 삶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풀어낸 것에 크게 빚지고 있다는 생각이다. 말을 위한 말, 논쟁을 위한 논쟁이 아니어야 한다는 도덕경의 가르침을 도덕경의 해설에서 부터 실천하고자 노력한 느낌을 받았다. 물론 그만큼 그 참 뜻을 밝히기 위해 이전의 다양한 해석들을 읽고 읽었을 것이리라. 또 그 문구를 언어적 해석이 아닌 자신의 삶에 대입하여 성찰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한다. (물론 지식과 경험이 일천한 나는 도덕경은 물론 해설까지도 짐작할 뿐이지만 말이다.)
두번째는 10여년이라는 세월이 읽기의 깊이를 다르게 해주었다는 생각이다. 그간 얼마나 지혜로워지고 얼마나 지식이 쌓였겠는가. 하지만 그간 부딧친 사람들, 사건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만난 (알지 못했던) 나 자신들. 그런 경험과 혼란들이 다시 읽는 도덕경을 더 깊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주었다고 믿는다.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하고 아는 자는 말하지 않는다. 언어와 대상과의 인식론적이고 본질적인 간극만을 다루는 것은 아니다는 생각이다. 그것은 대상을 명명하기 위해, (혹은 그렇게 하는 것이 일반적 사고의 관성이거나) 만들어진 이분법적이고 정태적인 언어적 시스템과 그 기반인 인간의 일차원적인 욕망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이고자 함이 아닐까?
옛 선인들의 깊은 통찰과 본질에 대한 탐구는 시대를 초월한다. 아마도 그것은 죽어서 쌓여있는 지식이 아니라 살아 있는 직관으로만 파악할 수 있는 인간 본질/자연 그 자체에 대한 것이기 때문일테다. 오랜만에 다시 읽어본 도덕경. 두고 두고 읽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괜한 흥분에 '장자를 읽다'라는 책까지 사버렸다. ^^.
-------
총 : 29편
리뷰쓰기
도덕경 새창으로 보기
Jeanne ㅣ 2007-06-05 ㅣ 공감(3) ㅣ 댓글 (0)
학교 다닐 때 쓴 것.
(당연히 잘 쓴 글은 못되고) 재밌다.
난 참 재밌는 아이야... ^__^
비교가 맞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잠언이 인생에 대한 각론이라면 전도서는 총론이라고 생각했다. 비슷하게 비교하자면 공자의 논어는 잠언에 해당하고 노자의 도덕경은 전도서에 해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두 사상이 거의 동시대 즉 춘추전국 시대의 어지러운 사회 상황 속에서 각기 다른 방법으로 ‘대책’을 제시한 차원의, 같은 외부적 동기에서 나온 사상이긴 하지만 말이다. 본서를 읽으면서 순수하게 묵상하게 되는 부분도 많았지만 머리가 상당히 복잡해져 무언가를 논하기엔 정리가 힘든 상태였었는데 강의를 들으면서 더욱 복잡해졌다. 또한 본서가 어떤 비범한 명상이나 체험, 인물따위에서 비롯한 산물이 아닌, 유교의 사상이 교조화된 시대에서 그에 대한 반발의 사회적 ‘의도’에서 저술된, 그런 선도적 목적과 개혁의 노력이내재되어 있다는 점이 text를 그 자체로 깊이 묵상하는데 방해가 되었다. 많은 의문점과 결론지어지지 않는 복잡스러운 생각들을 대충 정리해보고 싶다.
우선 ‘도’의 본질과 포스트모더니즘을 어떻게 결부지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처음에는 포스트모더니즘과 도가사상은 언뜻 보면 유사성이 있는 듯 하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도가사상은 올바른 정치와 삶의 자세를 위한 절대불변의 도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절대적 진리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는 포스트모더니즘과는 다른 것이 아닐까. 하지만 또 다르게 보면, ‘불가지론’으로 정의될 수 있는 노자의 도에 관한 기본 생각은 우리가 진정한 진리를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진리는 말로 표현 할 수 없으며 어떤 식으로든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표현 되어질수 가 없다. 그것은 ‘無’이다- 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이것은 포스트모더니즘과 유사점이 있다. 후자가 진리자체를 거부한다는 데에 차이가 있을 뿐 현대인들도 진리가 혹시 존재한다 할지라도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표현 되어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자는 거부의 의사가 담긴 결론이고 도가 사상은 그것을 깨달아 체득할 것을 가르치는 것에 차이가 있다.) 또 다른 면에서 장자가 꿈을 꾸어 나비가 되었는데 자신이 진정 나비가 되었던 것인지 나비가 된 꿈을 꾼 건지 혼동하는 이야기에서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는 포스트모더니즘과 흡사한 사상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는데…내가 차원(dimension)을 적절하게 연결(match)하지 못하는 것 같다.
또 한가지로는 ‘절대신’으로 대표될 수 있는 관념주의 문화의 다른 시대/장소의 사상과 접목시켜볼 때이다. 각 문화에서 도덕과 윤리의 기준에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AD 4세기 무렵을 기점으로 시작된 관념주의 단계의 서구사회에서는 신에 대한 봉사의 형태가 지역의 문화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기독교와 이슬람교를 비롯하여). 여기에서 관념주의란 어떠한 절대적 가치의 실재를 믿는 것을 말한다. 그 가치가 절대적 신에게서 부여되었으며 그러므로 신적권위를 갖는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그 자체로 악한 것’과 ‘그 자체로 선한 것’이 존재한다. 하지만 ‘절대’라는 수식어와 모순적인 ‘다양성’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어 멕시코의 아즈텍 부족은 신에게 정결한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살아있는 사람의 심장을 꺼내어 -지극히 반인륜적인- 바쳤다.[1] 신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가혹한 대가를 치뤄 왔던 것이다. 노자는 서구인들이 믿었던 이 ‘절대적 가치’를 ‘도’라 하지 않을 것임은 당연하다. ‘절대적 가치’라 이름 지어지지만 지역문화에 따라 다양성을 지녔던 그 모순은 그 ‘절대적 가치’가 진정 ‘절대적 가치’가 아님을 스스로 시인하는 것인가? 둘을 접목시켜보자면 노자가 더 우위에 있는 것을 ‘도’라 명명한 것이라고 이해되어지는데 -그는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은 도라 하지 않는다 – 이 논리에 의하면 하나님은 진정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는 절대적 신이 아닌 그러한 존재라고 한 역사적 시기와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에 의해 상정되었던 ‘道보다 하위인’ – 도라고 불릴 수 없는 – 하나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물론 둘을 비교하기에 도가사상은 종교를 포함하는 보다 포괄적인 철학이라 할 수 있고 삶에 관한 지혜를 중심으로 하지 인간의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종교는 아닌 것으로 이해된다. (내가 전혀 비교 불가능한 차원의 양자를 무식하게 연계지은 것인가?)
마지막으로 ‘절대불변의 법칙’과 ‘창조주의 창조질서’와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하여.
그가 말하는 ‘도’는 신이 아닌 만물의 움직임의 근거이다. 말없이 만물을 생성화육하게 하는 저 자연 속에 숨겨진 보이지 않는 힘이다. 그는 그것을 ‘절대불변의 법칙’이라고 일컫는다. 계절의 변칙 없는 주기와 해가 지고 달이 뜨는 우주의 생리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진실로 절대불변의 법칙이라 할 수 있다. 기독교는그것을 하나님의 창조질서로 이해한다. 포스트 모더니즘이 절대적 진리란 것은 없다고 말하지만 인간의 영역을 초월하는 우주의 ‘법칙’, 즉 질서가 존재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지 않은가? 그것은 우리가 근거 없이믿는 미신이 아니라 감각적으로 – 감각시대를 사는 ‘감각’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사람들이 - 증명할 수 있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인지함으로써 인간이 무엇을 추론할 수 있을까. 인간이 자연을 한정된 범주에서나마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 하에 과학이 발전해왔다. 하지만 과학이 자연이 어떻게 존재하고 작용하는지 훌륭히 설명해 내었을지 몰라도 궁극적으로 왜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했다. 또한 아무리 객관적 진리라고 외쳤던 과학 조차도 실험자의 의도와 해석에 좌우된다는 그 실망은 가히 파격적이었을 것이라생각된다. 과학에의 실망은 각자가 인지하는 세계가 각자의 진리라고 말하는 진리관으로 이어진다. 노자가 말하는 ‘영원불변의 법칙’ 그리고 엄연한 실제적 자연의 질서에 대해 이 시대의 사상은 어떤 결론을 내리나. 책을 다 읽진 않았지만 화이트헤드의 <이성의 기능>에서 이해한 바를 언급하자면 그는 그것은 모든 생물학적 현상을 완벽하게 물리적 현상으로 환원할 수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유기체인 생물은 어떠한 목적인(이성이 기능하는 출발점) – ‘산다’, ‘잘산다’, ‘더 잘산다’로 간략화되는 - 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동물의 진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우리의 몸 속에서 발견되는 목적적 인과에서 유추하여 우주에도 그러한 힘이 있다고 결론짓는다. 대충 이러한 논리로 결국에는 창조론을 터무니없다고 여기고 무신론적인 우주관을 제시하는 것 같다.
힌두교에서 말하는 ‘해탈’이 인간의 육체와 실재하는 자아를 완전히 벗어난 형이상학적 초탈을 의미한다면 노자가 말하는 이상적 경지는 고요히 흐르고 낮은 곳에 처하길 즐기는 물과 같이 감정적(인격적)으로 겸손하며 사심 없는 담담한 내적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힌두교가 현상적/경험적 세계의 모든 것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을 연습하는 철학이라면 본서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두는, 애써 바꾸려 작위하지 않는- 그렇게 행동해야 할 근거를 인식할 것을 가르치는 학문이라고 이해했다.
<실은 노자는, 성인은 천지의 무위자연의 법칙을 몸소 인간에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성인이 하는 일은 하늘의 도와 일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7장 解義 중>
비록 역자의 해의이긴 하지만 이 구절에서 나는 노자의 사상이 초기 기독교에게 영향을 미친 스토아학파와유사하다고 생각했다.(좀 단편적인 비교이긴 하지만) 후자역시 인간이 inexorable law에 도달하려 train할 수있고 철학의 목적은 자연의 법을 understand, obey and adjust 하기 위함이며 현명한 사람은 우주의 법(질서)에 mind가 부합하는 사람이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제9장이 제시하는 미덕은 ‘중용’인 것 같다. 조금 부족하게, 겸허하게 빈 공간을 남겨두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이 태도는 어디에 적용해 볼 수 있을까. 물을 조금 부족하게 받아놓고 쓰는 사람은 현명하며 아낄 줄 알고 최선을 추구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누군가가 물이 넘치도록 틀어놓은 채로 사용한다면 그는 헤프고 마음이 섬세하지 않으며 차분한 성품을 지니지 못한 사람으로 비칠 것이다. 밥을 먹을 때에도 조금 부족하게 먹는 것이 육체의 건강에는 물론 정신 건강에도 좋다. 욕망에의 절제 없는 개방, 즉 방종은 인간의 마음을 퇴폐적으로 만든다. 칼을 잘 다루어 보지 않은 사람은 칼을 갈 때 무조건 쓰임의 효율성만을 생각하여 더욱 날카롭게 갈 것이다. 그럴수록 예리하여 잘 자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칼을 많이 다루어본 사람은 적당히 날카롭게 갈 것이다. 부러지거나 꺾어지기 쉬울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한 면만 바라보고 극단으로 치우쳐 행동하는 것은 대부분 좋은 결과를 낳지 못한다. 무엇이든 여러가지 면을 신중히 고려하여 적정 線을 파악하고 이루어가야 함이 마땅하다.
<건전한 정신이란 몸과 마음을 도에 집중하여 기가 흩어지지 않고 유화함을 체득하여 순수하고 꺠끗함에 이른 상태를 말한다. 마음에 더럽혀짐이 없이 도에 집중된다면 심오한 경지에 이를 것이며, 그 맑은 눈으로 자신을 반성하여 흠이 없을 수 있을 것이다. -10장>
‘영아와 같은 상태’라고 표현하였다. 어린아이는 세상을 많이 경험하지 않았고 머리가 자라지 않았으므로 순수하게 세상을 인식한다. 모든 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며 복잡한 술수로 처세할 줄 모른다. 배운 것을 의심하지 않고 거짓이란 것을 알지 못한다. 더러움으로 물들지 않은 그 마음은 흠이 없다.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면 그의 삶은 참으로 순전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될 것이다.
20장은 철학적 가르침과 더불어 탄식과 푸념 섞인 듯한 표현이 감상을 자극한다.
<세상의 여러 사람들은 기뻐 웃으면서 소나 양의 맛있는 고기를 즐기는 듯,…나만은 홀로 휑하게 빈 가슴으로 평안하고 고요하게 있네..나른하고 고달파서 돌아갈 곳 없는 사람과도 같네…>
33장은 그 어느 장보다도 받아들이기 평이하고 귀감이 되는 교훈이다. 앞의 장들이 추상적이고 대의적인 반면 본 장은 비교적 소시민적이고 개인적인 교훈도 준다.
<남을 이기는 사람은 지혜 있는 자이지만, 자신을 아는 사람은 더욱 명철함이 있는 자이다. 남을 이기는 사람은 힘이 있는 자이지만, 자신을 이기는 사람은 더욱 강한 사람이다.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넉넉하고, 근면 역행하는 사람은 뜻이 있는 자이다…>
전혀 새로운 내용은 아니지만 정말 멋진 교훈이라고 생각했다.
남들이 가르치는 이익과 손실에 대하여 나도 또한 가르친다. ‘남들은 강한 것, 있는 것이 이익이라고 가르치지만 나는 약한 것, 없는 것이 유익하다고 가르친다.’ –42장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그칠 줄 알면 위태하지 않다 –44장
날뛰어 움직이면 추운 것을 이기고, 고요히 있으면 뜨거운 것을 이긴다. –45장
고요함을 찬양한 내용이다. 일상에서 발견되는 현상으로 아주 재치있게 비유하였다.
나는 착한 사람을 선으로 대한다. 나는 착하지 않은 사람도 또한 선의로 대한다. 그렇게 하면 모두가 선인이 된다. 나는 믿음성이 있는 자를 믿는다. 그러나 나는 믿음성이 없는 자도 또한 믿는다. 그렇게 하면 모두가 성인이 된다. –49장
모든 사람을 이렇게 대함으로서 그들을 진정 그렇게 변화시키는 사람은 정말 ‘성인’이라 할 수 있는 위대한힘을 지닌 사람이다.
사욕이 생기는 구멍을 막고 사욕이 들어오는 문을 닫으면 몸이 다할 때까지 노고하지 않을 것이지만, 그 구멍을 열어 놓은 채 거기에서 생기는 일들을 잘 처리하려고 하면 몸이 다하도록 구제되지 못할 것이다. –52장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그 구멍을 막고, 그 문을 닫으며, 그 날카로움을 꺾고, 그 분(忿)을 풀며, 그 광채를 부드럽게 하여 티끌과 함께 섞여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을 심원×신비한 동일이라고 한다. –56장
사욕이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문을 닫고 그리하여 날카로운 것을 둔하게 만들어 질박함을 지키고, 분노하는격정을 풀어 누그러지게 하여 다툼의 근원을 없애 버린다. 특히 남의 눈에 드러나 보이는 광명을 흐리게 하여 티끌과 함께 있으면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해의>
언어적 표현 자체가 문학적 감흥을 주는 장이다. 메시지 또한 그렇다. 외우고 싶은 구절이다.
큰 나라가 작은 나라에 겸허하게 저자세를 취하면 작은 나라가 거기에 붙게 되고 –61장
크면 클수록 높으면 높을수록 저자세를 취하라는 가르침.
훌륭한 전사는 무용을 부리지 않고, 싸움을 잘 하는 자는 성내지 않으며, 적에게 가장 잘 승리하는 자는 적과 대전하지 않고, 사람을 잘 쓸 줄 아는 사람은 그 사람 앞에 몸을 낮춘다. 이것을 다투지 않는 덕이라 하고, 이것을 남의 힘을 쓰는 길이라고 한다. –68장
백번 싸워 백 번 이기는 것이 최선이 아니고,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는 것이 가장 잘
싸우는 것이다. –孫子
한 번 생각하고 반응하는 나에게 두 번 생각하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한 발짝 물러서는
여유로움…그 진부한듯한 교훈을 새롭게 깨닫게 해준 것이다.
알면서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 상덕이다. 알지 못하면서 안다고 하는 것은 병이다.–71장
사람이 살았을 떄는 부드럽고 연약하지만 죽으면 곧고 강하다. 초목도 살았을 때에는 부드럽고 연하지만죽으면 말라서 야물다. 그런 까닭에 굳고 강한 것은 죽음의 속성이고, 부드럽고 약한 것은 삶의 속성이다. 그런 까닭에 군사가 교만하여지면 멸망하고, 나무가 강하면 꺾여진다. 강대한 것은 아래에 있고, 유약한 것은 위에 있다. –76장
가장 경탄을 자아내는 장이다. 그 비유의 절묘함과 유약함의 힘.
산다는 것, 그것은 자연스러움 그 자체다. 생명의 태어남이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작위’로 삶을 메우려 한다. 욕심, 쾌락, 야망…을 위해서 노력을 아끼지 않는, 삶의 목적에 대한 진지한 성찰없이 물질과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며 사는, 그리고 자기PR시대로 자신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드러내기를 추구하는 현대인들과 그런 경향을 자연스레 많이 답습하는 나. 그런 나에게 이 어찌보면 진부하면서도 실천하기엔 낯선 그런 교훈들이 ‘도덕경’이라는 권위로 인한 새로운 뉘앙스로 내게 깊이 생각해보고 좀 더 여유로움을 지니게 하는 소중한 가르침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가볍게 생각해본 것을 덧붙이자면 노자가 제시하는 정치는 작은 생선을 삶는 것처럼 백성들을가만히 놔두는 것이다. 법령을 자주 변경하거나 많이 만들어내서 국민의 생활을 지나치게 간섭하고, 제한하고, 명령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이다. <60장> 하지만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저 ‘멍청’하고만 있는 정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어려운 일은 그것이 쉬울 때에 처리하고, 큰일은 그것이 미세할 때에 해결하라. 천하의 어려운 일은 반드시 쉬운데서부터 일어나고, 천하의 큰일은 반드시 미세한 데서부터 시작된다. –63장
대충의 그림은 그려지지만 과연 이 사상은 현대의 정치에 어떤 효용성과 의미를 지니는가. 도무지 적용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토록 범죄가 갈수록 잔인하고 극악해질뿐더러 수단방법도 과학기술의 무궁한 발전에 부응해 고차원적인 시대에, 또한 원조교제 등 윤리체계가 무너지는 시기에 무위 자연의 사상은 괴리감만 줄 뿐이다. 아마도 도덕경의 저자들이 현 세대를 보게 된다면 경악을 금치 못할 것 같다. 백성들이 너무 지혜로와서…
[1] 감각의 문화
-------------
공감 Thanksto 찜하기
쉽게 접근할 수 있어서... 새창으로 보기
평범 속의 비범 ㅣ 2006-05-13 ㅣ 공감(10) ㅣ 댓글 (0)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해주어서 좋군요. 나름의 뜻을 새겨서 보여주는 것도 좋구요. 다만 원문의 포인트가 될 수 있는 것은 약간 어렵더라도 새겨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공감 Thanksto 찜하기
이럴수가 OTL 새창으로 보기
風月樓主 ㅣ 2005-02-24 ㅣ 공감(28) ㅣ 댓글 (1)
이런류의 리뷰를 쓰시는 분들께서 흔히 혼동하시는 것이 있다.
이런 책의 좋은 주옥같은 구절들은 원전에서 있는 것이며, 아무리 좋은 번역이라도 원전을 훼손하거나 자신만의 주관이 너무 들어가는 것은 해석을 도와주기도 하지만 오히려 새로운, 자신만의 깨달음 등을 방해하곤 한다는 것이다. 요컨데, 이런 책에서 중요한 내용은 얼마나 보기 좋은지가 아니라 원본에 충실한지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문열씨의 삼국지에 낮은 평가를 주시는 분들이 많으시다.)
그런 의미에서 알라딘 초이스! 와 현암사라는 이름에 넘어가 판본 확인도 안한 나도 잘못이지만 이 책은 더욱 대단하시다 _-b 오탈자는 애교요, 나름대로의 의역에 다른 판본을 보지 못했다면 이것이 정론인양, 옳은 해석인양 넘어가 볼뻔 했다. 마음을 비우고 도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도덕경을 보면서 자꾸 슬금슬금 화가 치밀어 책을 엎은적은 이번이 처음인거 같다. 장자도 오강남씨의 저서를 비싼 돈주고 사서 봤는데 그녀석까지 제대로 된 판본인지가 의심스러울정도다.
쉽게 들고 다닐수 있는 이동성. 잘된듯해 보이는 번역내용. 이런것이 전부는 아니다. 처음 본 판본이 해석은 철저히 배재된 채로 원문과 번역만을 실은 것이었기 때문에 이런 거부감이 더욱 할런지 모르겠다. 화려하지만 몸에 맞지않는 옷을 입은 듯한 그런느낌. 그런 찝찝함이 책을 끝까지 읽지 못하게 한다. 다른 판본이나 구해서 다시 구매해야겠다.
공감 Thanksto 찜하기
상식의 도덕경 새창으로 보기
노자읽기 ㅣ 2004-10-29 ㅣ 공감(2) ㅣ 댓글 (0)
가장 쉽고, 편하고 무난한 해석본을 보고 싶다면, 단연 오강남의 도덕경이다..책이 작고, 편집도 깔끔하고, 단단한 겉 표지에, 내용도 쉽게 잘 만들어진 책이다..이것이 기독교 종교 철학자의 솜씨라는 점 또한 흥미롭다. 그런데 쉬운 만큼 오역은 게 중 심한 것 같다. 특히 13장의 경우는 매우 독창적(?!)이다.
공감 Thanksto 찜하기
물 흐르듯이 편안하고 자연스러움을 느낀다. 새창으로 보기
md1221 ㅣ 2003-11-23 ㅣ 공감(2) ㅣ 댓글 (0)
중.고등학교 도덕 교과서에서 가볍게(?) 훝고 지나갔던 노자의 사상에 대해서 접할수 있었다.
교과서에서는 무위자연...뭐 이정도 기억이 난다. 사상 자체가 뭐랄까 좀 신비하고 다른 사상과는 독특함이 느껴지는거 같아서 기회가 되면 한번 책을 보고자 했는데 원전과 설명이 곁들여져 있어서 괜찮았던거 같다.
도덕경은 80장이 약간 넘는 분량이고 1장은 대략 1페이지 정도로 구성되어 있다. 몇몇 장은 약간 고루하고 설명을 읽어도 잘 와닿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전반적으로는 내용이 훌륭하다.
원전만 읽으면 무슨 내용인지 잘모르고 수박 겉핡기 식으로 넘어 갈 수도 있지만 다음장에 그장의 설명이 같이 나오니 내가 모르고 넘어간 부분에 대해 많이 알수 있다.(물론 저자의 주관이 약간씩은 들어간듯 하다)
소위 요즘 범람하는 성공, 자기계발 쪽의 도서의 내용과 상반되는 내용이 많아 신선하기도 하고 책을 다 읽고 나면 마음이 착 가라앉으면서 편안함을 느낄수 있을것이다.
소장하고 있다가 속상하거나 스트레스 받을때 읽어도 도움이 될듯 하다.
공감 Thanksto 찜하기
------
총 : 29편
리뷰쓰기
도덕경 새창으로 보기
kje0525 ㅣ 2003-11-08 ㅣ 공감(1) ㅣ 댓글 (0)
역자는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의 비교 종교학 교수로 있는 오강남이다. 그는 서두의 '독자들에게'라는 글에서 '이렇게 신나는 책을 읽어보지 못하고 일생을 마치는 사람은 김치찌개의 맛을 모르고 한평생을 마치는 사람보다 훨씬 더 불쌍한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 책을 다읽고 난 뒤의 내생각도 그와 같다.
'장자'는 '도덕경'과 함께 노장 사상의 성전이랄 수 있겠는데, '도'를 말하지 않으면서도 '도'를 내비취고 있는 책이다. 사실 오강남 풀이의 이책은 장자 전문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학자들에게 장자가 직접 쓴 것으로 알려진 내편 7편과 그외에 외편과 잡편에서 자주 거론되는 몇몇 내용들을 담고 있다.
나는 요즘 '낭만주의는 해방이다'라는 명제를 생각해 내고 그기서 나의 사상적 단초를 마련할려고 하고 있다. 직감을 통해 경험과 논리의 협소함을 초월하고 우주의 총체성에댜한 통찰을 얻는 것은 분별지에 속박당한 주객해체의 억압적 담론을 해방할 수 있는 힘이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된 것이다. 이 힘은 주체 중심의 왜곡된 낭만주의를 넘어 나와 나 이외의 모두를 궁극적으로는 하나로 인식할 수 있는 화엄의 경지를 열 수 있을 것이다.
'장자'에서 특히 2장의 '제물론'은 물(인식의 대상인 객체)를 고르게 한다는 뜻이다. 이 장은 모든 분별지의 극복을 통해 있음의 없음과 없음의 있음이라는 상식적이면서도 충격적인 역설을 보여주고 있다.
획기적인 변혁과 그로써 얻을 수 있는 자유는 '도의 경지'를 일컫는 것이다. '도'는 말도 아니고 개념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그 무엇....? 그렇다. 도는 해방이다. 도를 해방이라고 규정한 것 자체는 내가 도를 구속한 것이 되지만 도는 분명 해방이다. 해방 그것이 도인 것이다.
'장자'는 심오한 책이다. 개념지어질 수 있는 피동형의 책이 아니라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면서도 모든것을 말하는 역설 그 자체의 책이다. 이 역설의 경지는 진리일까? 도일까? 나늠 말하지 못할뿐이다.
공감 Thanksto 찜하기
도덕경.. 새창으로 보기
mem1980 ㅣ 2002-12-08 ㅣ 공감(0) ㅣ 댓글 (0)
얼마전 그것도 2년이나 됫군 도올 김용옥 선생이 티비에 등장해 노자에 대해서 강연을 했엇고 한때 노자 센세이션이라고도 할수있을만한 일들이 벌어졌었다. 그때 노자관련 서적이 인문 베스트에 많이 들어가 있엇다. 그 이후에 다시 도올선생이 나오고 다시 동양 고전에 대해서 말한다. 그러한 노자가 과연 어떠하길래 그렇게 떠들어 대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또 동양 고전에 대해서 무지한 나 자신에 대해서도 좀 궁색한 면이 있엇기에 이책을 구입햇다. 책을 읽는데 무슨 도덕책을 읽는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제목도 비슷하다. 하지만 먼가 안에 깊은 뜻이 담겨져 잇는것 같다. 근데 아직은잘 모르겟다. 더 열심히 읽어봐야겟다. 즉 한번바서 잘 모르겟다 이거다. ^^;
공감 Thanksto 찜하기
노자의 도는 空이 아니다 새창으로 보기
jd5024 ㅣ 2003-04-18 ㅣ 공감(0) ㅣ 댓글 (0)
사람들은 자주 착각을 한다. 노자의 도는 공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채워서 없애는 것을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느낌이 좋다.. 수많은 번역서가 있지만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책의 향기가 조금씩 달라지는 것 같다!! 매번 언제 읽어도 새롭다..1분중 0분께서 이 리뷰를 추천하셨습니다.
공감 Thanksto 찜하기
언어의 한계를 넘어 진리를 이해하는 사유체계로 새창으로 보기
곽지희 ㅣ 2002-08-14 ㅣ 공감(0) ㅣ 댓글 (0)
도덕경은 당시 주류의 사상에 비판적이고 대안적인 흐름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환경오염, 인위적이고 상업적인 자본의 횡포, 빈부의 차 현재의 많은 문제점들의 원인들도 지적해줄 수 있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점들에 대한 환기를 할 뿐이지 현실적으로 전복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도덕경에서 나타나 있듯이 도, 무위는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애쓰지 않지만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다. 나는 도덕경의 사상이 현실적인 대안이라는 점 보다는 새로운 사유체계를 이루어 줄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었다.
도와 덕에 관한 경전은 말중심의 사유체계에서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커뮤니케이션 방식으로 말하고 있다. 도에 대한 정의는 그 서술하는 즉시 한계에 봉착하게 되며, 따라서 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도가 아니라는 진술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를 설명하는 방식에 있어서 로고스 중심주의적 사유체계는 적절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사유체계로 도를 이해하는 것이 좋을까?
도는 오히려 언어 중심의 사유체계를 뛰어넘는 이미지 중심의 사유체계로 커뮤니케이션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이 보인다. 왜냐하면 이미지도 또한 개념적 또는 추상적인 의미 규정과는 달리 대상을 구체적으로 감각적으로 재현해 낸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지를 정의할 때에 우리는 논리적 사유방식, 즉 로고스 중심주의적 사고로 이미지의 하나의 측면만을 말하겠다는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미지는 규정이나 논리에서 벗어나 있다고 여겨지는 것을 붙잡아야 하며, 이미지에 대해 정의 내리는 주체에 따라 그 의미가 다양하게 변하는 어려운 점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이미지를 로고스 중심적인 사유체계로 정의하는 데에 따르는 어려움은 도를 정의할 때 가지는 어려움과 유사한 점이 발견된다.
특히 이미지는 명백하게 현존하는 인식이나 사물의 재현도 아니고 그렇다고 단순히 부재하는 것의 표현도 아니다 . 몽젱은 “이미지는 절대 존재와 아무 관계가 없으며 또한 비존재와도 아무 관련이 없다. 이미지는 현존하지 않는 절대 존재의 독특한 표현 양태이다. 이미지는, 부재와 현존을 맺어준다. 게다가 이미지는 우리에게 이 부재를 현존케 하고, 그 부재의 현존을 하나의 기호관계로 뚜렷하게 해준다.”고 했다.
인간이 현재 세상에서 그 무언가 결핍을 느끼고 그 무언가를 표현하려 한다면 그것은 이미 하나의 이미지인 것이며, 인간은 언제나 결핍을 느끼는 존재하는 의미에서 언제나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노자가 도덕경을 통해서 도와 덕에 대해서 무언가를 전달하려고 했다면, 그것은 단지 언어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도에 대한 이미지의 공유일 것이다. 도에 대해서 다 말할 수는 없지만 그 과정에서 전달될 수 있다는 점. 이것은 이미지 중심의 사유체계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접합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미지는 그것이 관련되는 모든 영역(실은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이지만) 즉 논리, 미학, 윤리, 교육, 정치, 형이상학, 예술, 철학에서 하나의 근본토대를 차지하고 있다 .
이미지와 상상력이 서구의 합리주의내에서 경시 받아오다가 이제서야 인류의 공통분모로 그 위상이 올라가고 있다 . 도의 성격, 즉 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도 있는 말로 표현할 때는 어렵지만 상상력으로는 받아들일 수 있는 그 신비함은 언어 중심주의가 아니라 이미지 중심주의라는 대안적인 새로운 사유체계와 닮은 점이 많으며 이렇게 이미지중심주의로 전환하며 이해할 때, 그 본래적인 진의가 전달될 수 있어 보인다. 또한 그 동안 주류에서 외면되어 왔던 인류의 공통분모인 이미지와 상상력의 의미를 도라는 궁극의 진리로 극대화 시켜주는 것 같다.
공감 Thanksto 찜하기
이제는 노자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때 ^^ 새창으로 보기
shinny2002 ㅣ 2003-08-07 ㅣ 공감(1) ㅣ 댓글 (0)
오강남 교수의 책을 몇 권 읽으며 그의 편견없는 종교, 철학의 식견에 감탄을 하곤 했다. 몇 해 전 도올의 노자와 21세기를 몇회 보면서 좀 의아하기도 하고 이상하단 생각이 들어 노자에 대한 서적을 몇 권 읽었던 적이 있다. 도올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오히려 그를 계기로 노자를 제대로 이해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으니까. 그의 도덕경 해설로 뭇사람들이 노자에 대해 관심을 갖을 수 있었다는 것 만큼은 고마운 일이다.
고등학교 윤리책에서 배운 단 한 줄의 노자 '노자의 무위자연설' 그 때 윤리선생님의 해설을 생각하면 기막힌 한숨뿐이다. 지금 생각해도 말도 안되는 해설을 하셨었는데, 차마 내 모교의 선생님을 욕되게 하고 싶지 않아 생략하겠다. 그만큼 노자에 대한 평가가 왜곡돼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고, 이제라도 노자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에 다행이란 생각이다. 빠르게 소용돌이 치는 사회와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불안한 세상에서 그의 말씀 하나 하나는 등대처럼 절실하고 안타깝다. 지금이야말로 자연으로 돌아가 용서를 구하고 화해를 시도해야할 때가 아닌가.
---
총 : 29편
리뷰쓰기
[도덕경], 외로운 투쟁과 나눔의 미학 새창으로 보기
페르 ㅣ 2002-01-03 ㅣ 공감(1) ㅣ 댓글 (0)
원문을 통한 [도덕경]읽기와 해석은 많은 인내와 한자 실력을 필요로 했다. [도덕경]을 읽는 일은 그만큼 많은 시간이 필요했지만 그 내용과 느낌 점에 있어서는 마음의 양식을 채울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EBS를 통해서 간간이 강좌를 들어보기도 했지만 강사의 견해가 많이 들어가 큰 도움은 되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다. [대학],[중용],[논어]의 잠언들(나는 이 책들을 인생의 잠언 집이라고 명명한다.)
배울 때는 상당히 지루한 경향이 있었지만 (물론 개인적인 욕심과 한문강좌를 수강하면서 시험이라는 필요에 따라서 잠정적인 외우기에 불과했는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도덕경]은 인간의 가치관과 자연관, 사회 그리고 나의 관계를 생각해 보게 하는 고서라고 본다. 특히 [도덕경]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세계를 지향하는 현대인의 자연관(미국과 유럽)에서 새롭게 부각되고 대두되면서 지대한 관심사가 되어 근래에 와서 더욱 빛을 발하고 있는 책이다.
[도덕경]-제1장 道可道, 非常道(도가도 비상도)
-모든 수식어를 불허하는 이 한 문장은 나를 [도덕경]에 빠지게 하는 문구였다.
-(명가명, 비상명)
希言自然(희언자연) 말이 없는 것이 자연이다.(제 23장)
知人者智, 自知者明(지인자지,자지자명)-남을 아는 것은 지혜이지만, 자신을 아는 것은 명철함이다.(제33장)
無執故無失(무집고무실)(제 64장)-집착이 없으니 상실이 없다.
노자가 말하는 자연관과 인간사의 뚜렷한 차이점은 자연은 집착이 없고 말이 없는 것이라고 한다. 자연은 넘치면 덜어낼 줄 알고 사람은 넘치더라도 그 욕심이 끝이 없으니 시사하는 바가 이렇듯 크다.
만물과 더불어 되돌아 갈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대순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
반자도지동-즉 되돌아감이 도의 근원이다. 도는 일체 존재하는 것들의 근원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노자가 말하는 도=자연이라는 성립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도덕경]에서 보여주는 자연관은 이렇듯 순수한 원리를 통해서 아낌없이 주는 것이 자연이라고 본다. 그 동안 우리의 패러다임은 개인보다는 집단을 위주로 형성되어온 가치관이었다면 현대는 개인주의 경향이 새롭게 대두되고 있다.
이단시되어 온 [도덕경]의 가치가 새롭게 재평가되어지고 있음을 눈여겨보아야 할 시점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자칫 각박한 현실 속에 살고 있다고 생각되어지는 사람들에게 조금의 여유라도 주지 않을까?
아무튼[도덕경]은 새로운 가치관의 틀에서 새롭게 대두되고 있다. 세계가 변화하고 세계관이 이동하는 현시점에서 우리의 새로운 지침서로 부각하고 있는 [도덕경]은 나에게 많은 가르침은 준책이다.
세상은 나뿐만 아니라 자연과 더불어 사는 공동체의 공간이다. 이 공동체의 공간에서 인간은 어떻게 행동해야하고 대자연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독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또한,인간 실존에 대한 성찰과 더불어 현시대에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의미 그리고 가치있는 삶의 방법을 모색해 나가기위한 의미 있었던 시간이었다.
공감 Thanksto 찜하기
국내 최고의 도덕경 주해 새창으로 보기
정기립 ㅣ 2001-08-22 ㅣ 공감(1) ㅣ 댓글 (0)
도덕경은 동양 최고의 경전이다. 원전의 본문은 겨우 원고지 25매 분량밖에 안되지만, 한자 한자에 담긴 함축성과 상징성, 그리고 그 의미의 깊이와 넓이 때문에 후대의 주석가들이 쓴 주해서만 해도 종류가 수천가지나 되며 해석방법도 천차만별이라고 한다.
국내에도 많은 종류의 노자 도덕경 주해서가 있었지만, 이 책이 그 중에서 가장 탁월하다고 느낀다. 역자 오강남씨는 최근 '예수는 없다'라는 책으로 큰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분으로, 캐나다에서 종교학을 전공하였고 도덕경 번역을 18년전부터 준비하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책 구석구석에 역자의 세심한 정성이 배어있는 듯하다. 역자는 우리말 번역을 모두 경어체로 썼다. 심원한 우주의 진리를 먼저 터득한 고대 사상가가 그것을 반말로 전달하리라고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것부터가 설득력이 있고, 실제로 번역된 본문을 읽어보면 친근감과 그윽한 감동이 느껴진다.
이 책이 국내에서 나온 도덕경 주해서 중에 최고라는 것은 번역된 본문만 읽어보아도 바로 느낄수 있다. 이전에 나온 번역들처럼 우리말 문장 자체가 의미를 알기 힘들어서 몇번씩 읽어야 하는 경우가 별로 없다. 그냥 술술 읽혀지면서 의미가 통한다. 이 점이 이 책의 최고의 장점이다. 역자는 거기다가 자기나름의 느낌과 이해를 토대로 충분한 분량의 친절한 해설까지 덧붙여 놓았고 그 내용또한 알짜배기이지만, 나는 굳이 그것까지 읽어볼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역자가 18년 전부터 도덕경 풀이를 준비한 노고의 결실이라 하겠다.
누군가가 도덕경을 읽고 싶다고 말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이 책을 추천해 줄 것이다. 이미 선물도 많이 했다. 역자는 캐나다에서 오래 체류하며 공부한 분인 것으로 안다. 아마도 캐나다라는 나라의 환경이 이 책의 열매에 기여하지 않았을까? 중국만큼 광대한 영토를 가졌으면서도 인구가 고작 3000천만에 불과한 나라... 밑에 있는 미국에 비해서 사람들이 그다지 경쟁없이 욕심부리지 않고도 살수 있는 나라, 그야말로 무위의 실천이 가능해보이는 나라. 노자의 사상을 실천하면서 산다는 것이 과연 어느민족 누구에게나 가능할까 하는 의문을 남겨본다.
늙은 선생. 새창으로 보기
가넷 ㅣ 2016-01-16 ㅣ 공감(3) ㅣ 댓글 (0)
어렸을 적에는 노자를 신선으로, 노자가 남겼다는 도덕경의 신비한 비밀을 간직한 서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어떤 매체의 영향 탓이였는지는 모르겠다. 오강남 역본을 고르게 된 건 2009년도인데 막 대학을 졸업하고 난뒤에 취업 준비 내지는 시험준비로 괘나 불안한 당시였는데, 구입하고는 잠시 읽다가 덮어두었다. 영 내키지 않았던 탓이다. 기억으로는 오강남 역본의 장자를 읽고 나서 세트로 구입해버렸던 것 같은데, 우화라서 재미있기라도 한 장자와는 달라서 재미가 없었다. 그러다가 한참 지나서 이제야 일독을 하게 되었는데 그래, 예전에는 읽어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 같다. 지금에서야 그나마 내게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81장으로 이루어진 이 도덕경(물론 다양한 노자가 있다는 건 안다)은 하나 다 내게 들어온 건 아니다. 취사 선택하며 마음을 다졌다. 종종 이해못할 구절들이 많았고... 아니, 거의 이해를 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역자의 해설이 도움을 주기도 했지만, 그냥 억지로 갖다 붙힌 느낌도 없지 않았고, 그냥 짜증나는 잔소리를 들은 기분이 들었다.
가장 인상 깊은 건 도의 길은 하루하루 없애 간다는 것이었다. 알듯 말듯한 이야기지만, 언젠가는 이해할 날이 오지 않을까? 도서관에서 <노자도덕경하상공장구>를 빌려왔다. 바로 읽을까 했지만, 조금 기간을 두고 천천히 읽어나가기로 했다. 뭐 급할 것이 뭐가 있나. 그 외에도 해제주의자의 도덕경인 <사유하는 도덕경>, 왕필의 주,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노자>, <백서 노자>를 구입해두었다. 강신주의 <노자 혹은 장자>도 구입해두었다. 이건 태학사에서 나온 두 권이 있는데 책무덤에 같혀 버려서 찾을 길이 없다. 나중에 정리할 때나 볼 수 있겠지. 이 책에 대해서는 많은 비판이 있는 것 같지만, 일단 초심자에게는 흥미로운 이야기라서 구입했다. 강신주 박사의 노자에 대한 이야기는 일전에 지식인 마을이라는 총서에서 나온 <장자&노자>를 통해 접한 바 있기에 그렇다.
---
도덕경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서...
집중과단순함 ㅣ 2015-07-23 ㅣ 공감(1) ㅣ 댓글 (0)
수년 전 알라딘에서 오강남 풀이 도덕경을 구입하고 읽고서는 구절구절 마음에 와 닿는 내용이 많아 그 후로도 여러 차례 볼 정도로 애장도서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본문과 해설을 같이 보다가 나중에서 본문만 보는 게 좋더군요. 그 이유는 오강남 저자의 해설이 기독교과 도덕경을 관련지으려는 의도가 곳곳에서 보였기때문입니다. 물론 여러 참고문헌을 참조하고 저자의 생각을 추가한 결과이겠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견강부회식 해석이더군요. 전체적으로 폄하하는 것은 아니고 여전히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처음 접하는 독자에게 추천할 만한 책입니다.
여러 지은이의 도덕경을 보기도 했는 데, 돌이켜보면 제대로 된 해설은 많지 않았습니다. 동양철학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도덕경을 서양서적의 해석을 참고하는 문제와 저자들의 한자중국문화의 이해부족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좀 더 관심있는 분들은 동양문화와 철학 전반에 대한 깊이있는 공부와 한문해석을 통해 제대로된 도덕경의 의미를 찾으시길 바랍니다.
------
탁월한 인간의 다면성 새창으로 보기
밍교 ㅣ 2014-07-26 ㅣ 공감(0) ㅣ 댓글 (0)
우리 사회는 냉소의 시대이다.
최악 속에서 힘겹게 차악을 골라야하는 상황들이 이어지자, 사람들은 최선이 없다며 냉소하기 시작했다.
러셀이 한 말처럼 힘이 없는 자는 냉소한다.
그리고 냉소하기 때문에 더 힘이 없어질 것이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지나치게 똑똑하고 냉소적이고 무력해졌다.
과연 대의민주주의 사회에서 일반 시민이 냉소하지 않고 참여하는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원하는 지향을 향해 촉구'하는 것 외에는 없는 것 같다.
촉구하는 여론을 형성하여 그로써 지배 세력을 압박하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우리 사회가 그 후 작동해야 할 정치가 작동하지 않는 사회라는 것이니, 냉소가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문제라고 보는 나 역시 냉소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누구나 지친다.
누구나 뭘 해야 할 지 모른다.
그러다 사람들은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대다수는 ‘아직 죽지 않은 자’로서 계속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주류의 질서를 선택하고,
여전히 다른 삶을 꿈꾸는 소수의 사람들은 주변의 작은 삶들을 긍정하며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골몰한다.
전자는 성공하지 못하고 그저 ‘아직 죽지 않았을 뿐’이고,
후자는 그 미덕과 더불어 선명한 한계를 갖는다는 점에서,
나는 더 이상 생각을 어떻게 전개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문제의식을 가졌다.
이런 맥락 속에서 도덕경을 읽으며, 나는 노자가 나에게 새로운 세계를 향한 지향을 보여주는 데에는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노자는 두 가지 길 중 첫 번째 길을 제시하며, 아직 죽지 않은 자로서 영원히 죽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지 탁월하게 보여준다.
그 길이 옳건 그르건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존재하기 때문에 도이고, 그렇기 때문에 행해야 하는 것이다.
천지는 불인하고, 세상은 이미 이러하고, 사람들은 선악의 너머에 존재한다.
이는 세계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이지만, 나의 냉소에 하나의 근거로 더해질 뿐이다.
이 세상의 수많은 책들은 일종의 칼날같은 것이라면,
나의 세계관을 깨트려주는 칼이야말로 나에게 소중하고 유용한 연장일 것이다.
그러나 그 칼이 나와 결이 같아 그저 스며들기만 한다면 그것은 그저 자기 확인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논어는 모순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세상을 보는 방식의 변화를 촉구했다.
그 속에는 공자가 원하는 세계가 있었다.
도덕경은 노자의 뛰어난 우주관과 정확한 현실 인식에도 불구하고, 그 칼끝이 제국의 정당화로 향한다.
그 속에는 노자가 원하는 세계가 없다.
그저 이미 존재하는 세계, 그리고 그 속에서 생존하기 위한 사투가 들어있다.
노자를 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절대자가 다스리는 세계, 그리고 그 절대자마저 언제 죽을 지 모르는 치열한 세계에서 그의 글은 생명력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그 글이 지금 나에게 어떤 생명력을 지니는지 생각해보는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제국에 살고 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도덕경은 생생한 생명력을 가질 수 있고,
제국의 너머를 바라는 누군가에게는 권모술수로 읽힐 수 있을 것이다.
시대의 냉소와 무기력을 넘되 처세로 나아가고 싶지는 않은 나에게, 노자는 힌트를 주지 못했다.
오히려 세계의 변화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인간의 본질이란 얼마나 견고한 지,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통찰할 줄 아는 인간의 지성 역시 얼마나 유구한 지에 대해 좀 더 깊은 고찰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원문과 함께 참고로 본 이 책은 나와 전혀 다른 해석을 보여주면서,
형이상학적인 왕필식 해석을 하는데, 그 점이 참고는 되었으나, 그렇게 설득력 있진 않았다.
특히 한 장에서 여러 모순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오랜 세월 계속된 편집의 이유인지, 노자 본연의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그 점에 대한 명확한 생각없이 그 생각들을 연결해버린다.
참고는 되지만, 역시 원문을 읽는게 좋을 것이고,
원문을 읽지 못한다면 번역문 정도를 참고해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공감 Thanksto 찜하기
도덕경 [오강남] 새창으로 보기
그랜드슬램 ㅣ 2013-01-07 ㅣ 공감(0) ㅣ 댓글 (0)
상선약수 (上善若水)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
노자님의 말씀을 압축한다면 상선약수라고 말할 수 있다.
수 백,수 천년된 고전이 현실의 사람에게 보약이 되고 제대로 된 길을 가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지금 나도 정확한 답은 모르겠으나
한 가지는 정확히 말할 수 있다.
조금씩,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것,어제보다 성숙해진 마음과 행동,실천을 하고 있다는 것이 책을 읽는 이유이자 고전을 독서하는 이유다.
하루 아침에 깨닫고 나아지지는 않는다.
"가장 휼륭한 것은 물처럼 되는 것입니다.
물은 온갖 것을 위해 섬길 뿐,
그것들과 겨루는 일이 없고 모두가 싫어하는 낮은 곳을 향하여 흐를 뿐입니다.
낮은 데를 찾아가 사는 자세,
심연을 닮은 마음"
나도 물처럼 살고 싶다.
흐르는 물처럼 잔잔하게 살고 싶다.
공감 Thanksto 찜하기
노자, 초월자 새창으로 보기
kikaider ㅣ 2012-06-26 ㅣ 공감(1) ㅣ 댓글 (0)
사실 이 책은 읽은지 꽤 된 것인데, 그 누가 老子의 道德經을 한 번 읽고 이해할 수 있을까? 지금도 수시로 꺼내 한 구절씩 읽으며 그 깊은 뜻을 새기는데, 읽으면 읽을 수록 정작 노자의 의도와는 자꾸 멀어지는 느낌이다. 읽을 때마다 다르게 다가오는 구절들과, 시대를 넘어 그 상황에 맞게 재해석되기를 반복하는 고전 중의 고전, 노자. 물론 나의 한자 실력이 노자만큼 된다면 그와 직접 대화하면서 질문하고 잘못 해석한 부분에 대해 교정을 받겠지만, 불행히도 노자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더보기
공감 Thanksto 찜하기
내마음의 발췌 새창으로 보기
탕자 ㅣ 2011-06-15 ㅣ 공감(1) ㅣ 댓글 (0)
“세상이 어떻게 존재하느냐 하는 것보다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신비스럽다.”- 비트겐슈타인 (22쪽)
성인(聖人) ? 도덕경에서 약 30번 정도 사용되며, 어원적으로 귀가 밝은 사람, 귀가 밝아 보통 사람이 감지하지 못하는 것도 잘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27쪽)
중국에서 최고의 인격신으로 모시는 하늘님(上帝) ?37쪽
“말이 많으면 좋지 않다”고 가르치는 것은 도덕경뿐 아니라 거의 모든 종교에서 가르치는 교훈이다.(41쪽)
가장 훌륭한 것은 물처럼 되는 것입니다(상선약수上善若水). 물은 도의 최고 상징이다.(52쪽)
부유하든 가난하든 재산에 대한 ‘집착’이 있으면 인생의 더 깊은 면에 눈을 돌려 보지 못하고 평생을 그저 돈 생각만 하다가 마쳐 버릴 위험이 있다.(59쪽)
전통적으로 동양에서는 인간이 혼魂과 백魄으로 이루어졌다고 믿었다. 혼은 정신적인 면을 관장하고, 백은 육체적인 기능을 주관한다고 보았다. 몹시 놀란다는 표현으로 ‘혼비백산’이란 말이 있지만 문자 그대로 혼이 날아가고 백이 흩어지면 사람은 죽어 버린다.(62쪽)
동양에서는 예부터 오행五行의 원리에 따라 오복이니 오륜이니 오관이니 하는 것처럼 많은 것을 다섯가지로 분류하는 습관이 있었다. (69쪽)
토마스 아퀴나스-신에 대하여 알 수 있는 유일한 사실은 우리가 신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것뿐(78쪽)
아놀드 토인비-종교라 했을 때 내가 뜻하는 것은 …. 자기 중심주의를 극복하는 것이다.(100쪽)
도덕경은 도道를 체득함으로 자유를 구가하는 삶을 살 수 있는 능력德을 갖도록 가르쳐 주는 말씀經이다.(107쪽)
종교란 궁극적으로 구원을 목표로 하는데, 구원이란 온전함(wholeness)을 회복하는 일이다.(114쪽)
노자,장자에서는 이 ‘혼돈’을 모든 것의 시원으로 본다. 통전적, 통일적 실체로서 모든 가능성을 그 속에 머금고 있는 ‘완전한 무엇’이다.
사회의 통념이나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 삶의 깊은 의미를 찾아 이를 추구하는 참삶(how to live)의 문제는 뒷전으로 물러나고, 오로지 사회에서 떠받드는 고루한 윤리체계를 비판 없이 받아들여 겉으로 나타나는 행위만 매끈하게 꾸미려는 처신(how to behave)의 문제가 주관심사가 되어 버린 사회.(181쪽)
구슬처럼 영롱한 소리를 내려 하지 말고 돌처럼 단단한 소리를 내십시오(184쪽)
임금이 자기를 과인寡人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낮추어 부름(186쪽)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진리는 역설”이라고 했다. 진리는 상반되는 듯한 두 명제를 동시에 포괄하기 때문이다.(194쪽)
아힘사 ? 간디를 통해 유명해진 이 말의 본뜻은 ‘아무에게도 해를 주지 않음’이다. 정치적인 용어로는 ‘비폭력’, ‘무저항’이라고 한다.(202쪽)
자기 주장, 자기 줏대만을 고집하는 사람은 섞일 수가 없다. 자기를 진정으로 비운 사람만이 어느 누구와도 진정한 의미의 교류가 가능하게 된다.(204쪽)
신학자 니버의 기도
“하느님, 제가 바꿀 수 없는 것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의연함을 주시옵고,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꿀 수 있는 용기를 주시옵고,
그리고 이 두가지를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208쪽)
기독교 신자 가운데 특히 열성적인 교파 신도를 만나도 자기가 세상의 모든 진리는 독점하고 있는 양 무슨 질문이 나와도 척척 박사처럼 잘도 받아넘긴다. 이런 식으로 미리 다듬어지고 학습된 말재주에 능하다고 정말 달변이라 할 수 있을까?(212쪽)
17세기 유럽에서는 과학적 사고의 중요성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내면 세계를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에 대항하여 내면 세계로 우리의 관심을 집중해야 한다고 하는 사상가가 나오게 되었다. 대표적인 이가 파스칼, 몽테뉴, 존 던, 칸트 같은 사람이다.(221쪽)
중국에서는 도가道家와 도교道敎를 구별한다. 도가에서는 생사에 집착함이 없이 자유스러운 참삶(eternal life)을 주된 가르침으로 삼는 반면, 도교에서는 보약,금단,부적,요술,방중술 등 어떠한 수단을 쓰든지 장생불로(長生不老)하고 될 수만 있으면 신선이 되어 죽지 않는 불멸을 이상으로 가르친다는 점이다. (233쪽)
어느 의미에서 우리의 삶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기간을 소비하면서 죽어 가는 것이다.(234쪽)
도와 덕은 물론 본질적으로 같지만 도가 본체론적인 면을 가리킨다면, 덕은 도에서 나오는 내재적 창조력이나 그 작용을 가리키는 말이라 할 수 있다…. 도가 개인이나 개체 안에서 작용할 때 그 힘을 구체적으로 지칭하여 덕이라 한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237쪽)
남부러울 것 없이 살고 있는데도 뭔가 허전하고 모자란 듯한 느낌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우리가 이렇게 내면적인 세계, 도에 접하기 전에는 영원에의 목마름이 충족될 수 없다. “주님, 우리의 마음은 당신 안에 안주하기 전에는 안정을 찾을 수 없습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242쪽)
덕德-도에 입각하고 도를 터득했을 때 얻어지는 신선하고 활기찬 생명력, 도의 활성화에서 나오는 약동적인 힘을 뜻하는 것.(250쪽)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합니다.(知者不言,言者不知)-도덕경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지고 많이 인용되는 구절 가운데 하나(257쪽)
도데체 도를 따른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며 정확하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 구체적 첫걸음이 바로 근검 절약.(273쪽)
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작은 생선을 조리하는 것과 같습니다. 작은 생선을 구울 때는 우선 칼로 배를 따서 내장을 뺀다든가 뼈를 추린다든가 하지 않고 통으로 굽는다. 젓가락으로 이리저리 들쑤시지 않는다.익을 때까지 가만히 놓아 두고 지켜보고만 있어야 한다….완전히 내팽개쳐 두는 것은 아니다.(275쪽)
고대 사람의 생각으로는 세상에 사람을 못살게 하는 것이 두 가지인데 하나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움직이는 귀신이요, 다른 하나는 보이는 세계를 다스리는 위정자였다.(277쪽)
큰 나라는 강의 하류…….유가에서는 하류를 천히 여기고 상류를 좋아하는 데 반해 도가에서는 하류를 상류보다 좋게 여긴다.(281쪽)
책을 한 권 쓸 때 ‘360쪽짜리 책 한 권’이라 생각하는 대신 ‘하루 한 쪽’ 하는 식으로 생각하면 일이 더 쉬워질 수 있다.(289쪽)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 일만은 이루고 말리라는 강한 집념과 집착 때문에 실패했을 경우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좌절감과 실의에 빠질 수 밖에 없다.(295쪽)
도덕경에서는 루소를 비롯한 자연주의 정치철학자와 마찬가지로 이른바 국민을 교육한다는 것은 결국 국민이 본래 가지고 있던 순박한 본성을 후패케 할 뿐이라고 한다.(299쪽)
불초不肖는 ‘같지 않다’는 뜻인데, 확대된 뜻으로 불초소생이라 할 때와 마찬가지로 부조의 덕망이나 유업에 미치지 못할 정도로 미흡함, 똑똑지 못함, 쓸모없음 등을 가리킨다.(309쪽)
간디에게 많은 영향을 준 톨스토이가 예수님의 가르침 가운데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마태5:30)고 한 것을 가장 중시했다는 사실은 흥미로운 사실이다.(315쪽)
조셉 캠벨에 의하면 위대한 정신적 영웅은 이렇게 일반 사람이 이해하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에 그들에게 돌아가기를 거부하는 refusal to return의 단계를 거치게 된다고 한다.(324쪽)
사실 진리는 단순하고 담백한 것이다.(324쪽)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있으면 손가락에 우리의 전적인 관심을 집중시킬 것이 아니고 그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달을 보아야 한다. 상징 자체에 붙들리는 것이 아니라 상징의 일깨움을 따라 상징이 상징하는 바를 알아본다는 것이다.(324쪽)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것이 가장 훌륭합니다.(知不知上)
알지 못하면서도 안다고 하는 것은 병입니다.(不知知病) (327쪽)
공자님은 “아는 것은 안다고 하고 알지 못하는 것은 알지 못한다고 하라. 그것이 곧 아는 것이다.(논어2:17)라고 했다.(327쪽)
도덕경에서 말하는 용기란… 의연함과 침착함을 유지함으로 상대방을 압도하고 상대방 스스로가 더 이상 함부로 건드릴 수 없다는 것을 알도록 하는 것,…(336쪽)
긴 안목으로 보면 하늘이 그렇게 엉성하게 일을 처리하지 않는다. 그러니 상대방의 잘잘못을 가지고 당장 너무 조급하게 반응하지 말라. 결국은 하늘의 정의가 강처럼 흐르게 될 것이라는 하늘에 대한 신뢰감을 가지고 살라는 것이다.(337쪽) 사필귀정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죽음보다 더 큰 가치, 자기가 믿기에 궁극적으로 의미 있는 일이라고 여겨지는 일을 위해 자기 목숨을 희생할 각오가 되었을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한 경우이다.(339쪽)
도가적 입장에서 보면 살아가는 데 어떤 목표를 정하고 삶을 그 목표를 추구하기 위한 수단으로 희생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못 된다…. 행복은 나비와 같다…..행복은 고양이 꼬리에 달린 방울과도 같다.(345쪽)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가지고 싶어지는 것이 사람의 마음(353쪽)
깊은 원한은 화해하더라도 여한이 남는 법입니다.(358쪽)
기도는 하늘이 남보다 나를 더 잘봐주기를 바라서 드리는 주문이나 편법이 아니다. 어떤 면책권이나 치외 법권적 특권을 얻어 내기 위한 수단도 아니다. 기도는, 넒의 의미의 종교는 내가 하늘의 뜻에 내 뜻을 맞추고 하늘의 길에 내 발걸음을 맞추기 위한 자기 낮춤, 자기 비움의 작업이다.(361쪽)
진리의 말은 아름답지 못하다고 한다.(368쪽)
진리의 말은 변론이 아니라고 한다. 양쪽을 다 같이 포용하는 말이기 때문에 사물을 이것이냐 저것이냐로 분명히 딱 쪼개고 끊는 논리적인 변론일 수가 없다. 변론을 잘 한다는 것은 어떤 사물에 대하여 자기가 가진 제한된 생각이나 고정 관념을 평소 달달 외우고 있던 틀에 맞추어 독단적으로 그리고 일사천리로 주장하는 일이다…. 어느 종교에서 열성파 신자가 자기의 주장을 뒷받침할 성서 구절만을 달달 외워서 타교파 사람을 공박하는 따위와 같은 것이다.한 가지 생각, 곧 자기가 가진 생각만 옳고 다른 생각은 모두 틀렸다고 보는 입장이기 때문에 우선은 무지의 특권인 확신을 가지고 힘차게 말할 수 있다. (369쪽)
사랑이나 진리 같은 정신적인 것은 나누어 주면 줄어드는 산술 법칙이 아니라, 나누어 주면 줄수록 오히려 더 많아지는 역설의 법칙이 적용된다.(370쪽)
공감 Thanksto 찜하기
외유내강 새창으로 보기
모래바다 ㅣ 2011-06-14 ㅣ 공감(3) ㅣ 댓글 (0)
이 글을 쓰기 전 몇 개의 리뷰를 읽어보았다. 대부분은 오강남의 도덕경에 대하여 매우 긍정적인 평가였다. 그러나 더러는 노자의 사상을 왜곡해서 한심하며, 이 책에 높은 점수를 주는 사람들을 싸잡아 비판하는 평가도 있었다. 나는 전자에 속한다. 동양 철학을 전공하는 전문가도 아니고 이 책에서 느낀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칠 생각도 없기 때문에 이 책이 도덕경을 180도 왜곡 했다 한들 나는 그것을 별로 중요한 관점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도덕경을 하나의 자기 계발서라고 생각하고 읽었다.
사상에 관련된 책을 이번에 처음 읽어 보았다. 나는 철학에 철자도 모르는 사람이며, 노자에 대해서도 역시 전혀 알지 못했다. 오강남의 도덕경 81장을 다 읽은 지금 역시 도와 덕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겠다. 분명히 다른 여러 가지 번역본에 비해 오강남의 도덕경은 일반인이 읽기 쉽게 집필 되어 있다고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아직 내가 세상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지 쉽게 마음속으로 다가 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 책이 '어떠한 리뷰' 에서 말하듯이 대통령이나 왕이 아닌 그냥 '평범한 일반인' 에게 전혀 쓸모 없는 것이냐? 그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그 이유를 설명해 보려한다.
나는 공대생이다. 지금 현재 학생이라는 나의 신분에 가장 필요한 덕목은 '노력' 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노력이 마음만 먹는다고 되는 것은 아니었다. 짧은 인생이지만, 지금까지 경험해본 바로는 '노력'은 편안하고 안정된 마음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마음이 안정되지 않고 근심에 쌓여 있으면 어떠한 노력도 하고 싶지 않다. 그러한 의미에서 나는 '도덕경'을 매우 높게 평가 하고 싶다.
나는 성격이 근심이 많고 대인관계를 썩 잘 해내지 못한다. 겉으로 봐서는 사람들과 매우 원만한 관계인 것처럼 보이지만 내 마음속으로는 항상 불안하고 불편하고 욕심이 많다. 그러던 중 등교 길에 '도덕경' 을 읽기 시작했다. 신기 하게도 한 장 한 장 읽어 나가면 마음이 매우 편안해지고, 근심 걱정이 사라졌다.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모든 것을 '내려놓음' '무소유'에서 비롯되는 마음은 결코 아니었다. '도뎍경' 에서도 "아무것도 가지려 하지마라", "완전한 비움"처럼 무소유와 비슷한 말이 있다. 하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그것과는 다른 것 같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일까? 확신할 수는 없지만 왠지 다음과 같은 것을 갖게 되어서 인지 싶다. 바로, 항상 상대적인 평가로 고통 받고 남들보다 우위서지 못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절대적'으로 나 자신을 판단할 수 있게 해주는 잣대를 갖게 된 것이다. 이 것을 어떠한 구절에서도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읽다 보면 나는 언제나 이러한 마음이 든다. 그래서 '외유내강' 이라는 중국인들의 가치관이 도덕경에서 출발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81 개의 전장이 구구절절 마음에 와 닿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도덕경은 왕, 재상을 위해 쓰여진 것 이기 때문에, 보통 사람에게는 전혀 필요 없거나 혹은 안 읽는 것보다 못한 것 같은 그러한 구절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걸러가며 읽으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시대가 바뀐 만큼 적용할 수 있는 문장도 바뀌었으니 그것을 판단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는 내 짧은 견해를 늘어놓았고, 이제 결론을 맺어야 할 것 같다. 분명히 도덕경 이라는 밥상에는 여러 반찬 들이 많이 차려져 있다. 중요한 것은 독자가 얼마나 자신에 게 필요한 영양가 있는 반찬을 골라서 먹느냐 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반찬은 안 먹으면 그만인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이 있다. 도덕경에는 매우 영양가 있고 주옥같은 반찬들이 곳곳에 많이 차려져 있다는 것이다.
'물'과 같이 되라. 물은 누구와도 겨루려 하지 않는다. 그저 낮은 곳으로 흘러갈 뿐이다. 하지만 물은 만물을 존재하게 한다.
총 : 29편
리뷰쓰기
나를 비워 나를 완성시키는 도덕경 새창으로 보기
doorumgil ㅣ 2010-02-06 ㅣ 공감(2) ㅣ 댓글 (0)
도가사상의 원조인 노자의 저술로 알려진 도덕경, 그냥 '무위자연'으로만 배웠던 노자를 알기위해 도덕경을 일독하였다. 많은 도덕경 번역서가 있지만 읽기 쉽게 풀어쓰고 분량도 적당한 현암사판 도덕경을 선택하였다.
도덕경이 시종 강조하는 것은 무위와 비움이다. 없음으로 있음을 만들고, 하지 않음으로써 함을 만드는 역설의 철학이다. 이는 다시말해서 있음과 함의 주류를 비판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혼란했던 춘추전국시대의 문제점을 노자는 부국강병을 달성하기위하여 법률을 제정하고 예법을 강조하는 인위적인 작위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보았다. 애초부터 주류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으로 탄생한 소수자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이것은 노자의 핵심적 역할이자 한계라고 생각한다. 현재의 진보정당이 현실에 대한 비판이나 현실문제에 대한 환기의 역할을 하지만 수권정당으로는 어려워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의 느낌이 든다
5천자 정도의 간결한 격언집으로 이루어져서 그런지 몰라도 해석하기에 따라 의견이 분분해질 수 있다는 생각이다. 가령 36장의 '오므리려면 일단 펴야합니다. 약하게 하려면 일단 강하게 해야 합니다. 폐하게 하려면 일단 흥하게 해야 합니다. 빼앗으려면 일단 줘야합니다.' 라는 부분은 법가에서 정적을 치는데 필요한 정략적 음모로 읽힌다. 이구절은 원래 만사 흥망성쇠나 생주이멸을 뜻하는 것이라 역자는 말하는데 그 본질적인 면보다 세상사람들에게 권모술수의 처세술로 더 많이 알려진 것이다. 도덕경을 우리가 그동안 익숙한 자구해석이나 이분법적 사고로 바라볼때는 인생의 처세술이나 뜬구름 잡는 명상록으로 밖에 볼 수 없는 것 같다. 내용을 자구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하나의 <도>라는 이미지로 크게 받아들여 깨우쳐야 하는데 쉽지않은 일이다.
도덕경이 이야기하는 큰도가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동안 남들과 비교하며 욕심과 소유욕의 굴레에서 스트레스를 받던 나를 돌아보고 무언가 계속 서두르며 눈에 보이는 양적인 쌓임을 성취라 자족하던 조급한 발걸음을 한박자 늦춰야 겠다는 고민을 잠시나마 하게된건 도덕경을 읽은 후 큰 소득이었다.
더불어 비교종교학자인 오강남 교수가 번역하여 그런지 성경구절과 비교하여 풀이한 구절이 여러곳에 나열되어 있는점이 특징이다. 산은 하나인데 어느 방향에서 오르느냐에 따라 내용과 과정이 달라진다는 종교 다원주의에 대해서도 생각할 여지를 만드는 부분이라 하겠다.
공감 Thanksto 찜하기
처음 읽는 도덕경 새창으로 보기
스파피필름 ㅣ 2009-05-30 ㅣ 공감(1) ㅣ 댓글 (0)
도를 도라 하면 더 이상 도가 아니라는 그 유명한 도덕경의 구절을 난생 처음 읽어봤다. 사랑을 사랑이라 말하는 순간 사랑이 아니게 되는 것처럼 이라고 농담을 해본다. 시절이 하 수상하여 마음이 어지럽다. 단순하고 명료한 무언가를 생각하고 집중하고 싶은데 딱히 그럴만한 대상이 없다. 한마디로 마음 둘 곳이 없구나. 하여 잡은 이 책.. 총 81장으로 되어있고 한 장당 서너 페이지로 하루에 한장씩 읽어도 마치 마음이 정화되는 것처럼 차분해진다. 무위, 상선약수와 같이익히 알고 있는 개념도 글을 통해 다시 확인하니 새롭다. 살아가면서 점... 더보기
공감 Thanksto 찜하기
21세기, 노자에게 듣다 새창으로 보기
minerva ㅣ 2009-05-17 ㅣ 공감(1) ㅣ 댓글 (0)
노자에게 듣다, 듣기가 어려운 부분은 살면서 배워 나가기로 하고, 일단 듣는다. 노자는 시적인 은유로 직설적이지 않고 에둘러 가르침을 준다.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영원한 도, 부를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라는 전제하에 아무것도 하지 않음에서 함을 발견하고, 없음의 쓰임에서 있음의 이로움을 역설하며, 하고서도 드러내려 내세우지 않는 깨달은 자의 자세를 말한다.
1장
말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며
부를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이름이 없는 것이 하늘과 땅의 시작이며
이름이 있는 것은 모든 것의 어머니.
항상 욕망이 없다면 그 신비스러움을 볼 수 있으며
항상 욕망이 있다면 그 분명함을 볼 수 있다.
이 둘은 한 근원에서 나왔으나 이름만 다를 뿐,
그 같음을 어둠이라 부른다.
어둠 속의 어둠이어라 모든 신비의 문이여!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名, 天地之始;
有名, 萬物之母.
故 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
此兩者同,
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도덕경 1장은 많은 흥미로움을 주는데, 우선 ‘말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라는 말이 함의하고 있는 뜻은 무엇인가 생각해볼 만한 문제다. 말로 표현되면 이미 도를 떠나서 다른 무엇이 된다는 뜻 같기도 하다. 나는 ‘도’를 도 말고도 다른 것으로 대체해 본다. 내가 이루려는 목표, 사랑 등으로. 문맥이 통하기에 더 생각해 본다. 우리는 쉽게 사랑을 말하고, 쉽게 자신의 꿈을 말한다. 본질적으로 그것은 말로 설명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라는 게 노자의 입장이다.
도를 꿈을 사랑을 한 가지로 보는 나는 그것을 어떻게 일상 생활 속에서 이룰 것인가,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가, 셋이 함께 가야 행복할 텐데, 욕심을 낸다. ‘부를 수 있는 도는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임의로 이름을 지어 부르는 모든 대상들 또한 유한자로서 영원하지 못하다. 개체를 반복해서 이어가더라도 더 이상 그 이름은 아닌 것. 이름지을 수 있는 것은 그것이 한정하는 것으로 영원하지 않다. 영원하기 위해 도를 행하되 그 자체로서 충만하고, 이름을 짓되 그 자체로서 충만하면 될까? 이름을 짓기 시작한 때부터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도 생각할 수 있다.
욕망이 없고있음으로 하여 신비로움과 분명함을 볼 수 있다. 흔히 빛을 경외하며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빛을 빛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둠이다. 그런 논리로 욕망이 없기 때문에 신비로움을 볼 수 있고, 반대로 욕망이 있기 때문에 분명함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둘의 근원은 어둠, 어둠 속의 어둠, 그것은 모든 신비의 문이라 일컫는 것에서 밝은 면과 그것을 그것답게 하는 어둠을 함께 보는 눈을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논리가 인생무상으로 흐르지 않고, 굳건히 자신의 길을 걷는 성인의 모습으로 투영되는 것은 노자의 사상이 그만큼 원대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제로서 오히려 우리들에게 삶의 목표를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러이러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결코 이루어질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루려면 성인의 경지에 도달하는 정도로 해야 한다, 그러니 그런 것을 꿈꾸지 말라, 아니 말하거나 부르기 전에 이런 전제 정도는 알고 출발하라. 다소 어감이 딱딱해졌더라도 이해하시길. 아마도 노자는 좀 더 부드럽고 자상한 면모를 지녔으리라.
오히려 하지 않음으로써 하는 무위자연을 역설하고 있는 노자는 어느 누구보다도 시대를 앞서 산 철학자일 것이다. 전편에 흐르는 마음결로 사상은 철학자, 절대자, 군주, 백성들의 구체적인 삶까지도 들여다보는 혜안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무위자연은 아마도 모든 것을 끝까지 열심히 해낸 자의 역설 같이 느껴진다. 다 하고 나서도 그 다함을 드러내지 않는 태연함, 속속들이 체험하고 나서 느끼는 여유로움은 아니었을까.
공감 Thanksto 찜하기
도덕경 듣기. 새창으로 보기
누구개 ㅣ 2009-01-05 ㅣ 공감(1) ㅣ 댓글 (0)
아담한 사이즈와 읽기 쉬울 것 같은 편집(대중적으로 씌여졌음에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나의 어리석음 때문이다.) 때문에 서점에 가면 늘 현암사의 시리즈들을 훑어 봤던 기억이 난다. 물론 그 중에 읽은 것은 두세권에 불과하지만.
주말에 술먹고 하루 신세를 진 친구 방 한 구석에 그 현암사의 도덕경이 꽂혀 있었다. 빨간 책들 사이에 외롭게 있는 것같아 기왕 진 신세라는 생각에 '안 읽으면' 달라고 했다. 선듯 내주는 친구.
고마운 친구^^.
긴 휴가를 맞아 다시금 읽어 봤다.
대학때, 그리고 사춘기 시절 도가와 관련한 책들을 간혹 읽곤 했었다.(이 책도 서점 한구석에 앉아서 다 읽었었다.) 초탈한 도인들을 사뭇 경외하고 한편으로는 부러워하면서. 다시 읽어 본 도덕경, 정확히는 주석자가 다시 '읽어준' 도덕경은은 예전의 느낌과는 많이 달랐다. 단지 '도를 도라고 하면 도가 아니다'는 '최소한 도는 '도를 도라고 하면 도가 아닌 것'은 일러준다'는 식의 말장난에 가까운 이해를 위한 책읽기는 아니었다.
그것은 첫번째로 주석자가 그 뜻을 우리 삶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풀어낸 것에 크게 빚지고 있다는 생각이다. 말을 위한 말, 논쟁을 위한 논쟁이 아니어야 한다는 도덕경의 가르침을 도덕경의 해설에서 부터 실천하고자 노력한 느낌을 받았다. 물론 그만큼 그 참 뜻을 밝히기 위해 이전의 다양한 해석들을 읽고 읽었을 것이리라. 또 그 문구를 언어적 해석이 아닌 자신의 삶에 대입하여 성찰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한다. (물론 지식과 경험이 일천한 나는 도덕경은 물론 해설까지도 짐작할 뿐이지만 말이다.)
두번째는 10여년이라는 세월이 읽기의 깊이를 다르게 해주었다는 생각이다. 그간 얼마나 지혜로워지고 얼마나 지식이 쌓였겠는가. 하지만 그간 부딧친 사람들, 사건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만난 (알지 못했던) 나 자신들. 그런 경험과 혼란들이 다시 읽는 도덕경을 더 깊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주었다고 믿는다.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하고 아는 자는 말하지 않는다. 언어와 대상과의 인식론적이고 본질적인 간극만을 다루는 것은 아니다는 생각이다. 그것은 대상을 명명하기 위해, (혹은 그렇게 하는 것이 일반적 사고의 관성이거나) 만들어진 이분법적이고 정태적인 언어적 시스템과 그 기반인 인간의 일차원적인 욕망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이고자 함이 아닐까?
옛 선인들의 깊은 통찰과 본질에 대한 탐구는 시대를 초월한다. 아마도 그것은 죽어서 쌓여있는 지식이 아니라 살아 있는 직관으로만 파악할 수 있는 인간 본질/자연 그 자체에 대한 것이기 때문일테다. 오랜만에 다시 읽어본 도덕경. 두고 두고 읽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괜한 흥분에 '장자를 읽다'라는 책까지 사버렸다. ^^.
-------
총 : 29편
리뷰쓰기
도덕경 새창으로 보기
Jeanne ㅣ 2007-06-05 ㅣ 공감(3) ㅣ 댓글 (0)
학교 다닐 때 쓴 것.
(당연히 잘 쓴 글은 못되고) 재밌다.
난 참 재밌는 아이야... ^__^
비교가 맞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잠언이 인생에 대한 각론이라면 전도서는 총론이라고 생각했다. 비슷하게 비교하자면 공자의 논어는 잠언에 해당하고 노자의 도덕경은 전도서에 해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두 사상이 거의 동시대 즉 춘추전국 시대의 어지러운 사회 상황 속에서 각기 다른 방법으로 ‘대책’을 제시한 차원의, 같은 외부적 동기에서 나온 사상이긴 하지만 말이다. 본서를 읽으면서 순수하게 묵상하게 되는 부분도 많았지만 머리가 상당히 복잡해져 무언가를 논하기엔 정리가 힘든 상태였었는데 강의를 들으면서 더욱 복잡해졌다. 또한 본서가 어떤 비범한 명상이나 체험, 인물따위에서 비롯한 산물이 아닌, 유교의 사상이 교조화된 시대에서 그에 대한 반발의 사회적 ‘의도’에서 저술된, 그런 선도적 목적과 개혁의 노력이내재되어 있다는 점이 text를 그 자체로 깊이 묵상하는데 방해가 되었다. 많은 의문점과 결론지어지지 않는 복잡스러운 생각들을 대충 정리해보고 싶다.
우선 ‘도’의 본질과 포스트모더니즘을 어떻게 결부지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처음에는 포스트모더니즘과 도가사상은 언뜻 보면 유사성이 있는 듯 하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도가사상은 올바른 정치와 삶의 자세를 위한 절대불변의 도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절대적 진리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는 포스트모더니즘과는 다른 것이 아닐까. 하지만 또 다르게 보면, ‘불가지론’으로 정의될 수 있는 노자의 도에 관한 기본 생각은 우리가 진정한 진리를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진리는 말로 표현 할 수 없으며 어떤 식으로든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표현 되어질수 가 없다. 그것은 ‘無’이다- 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이것은 포스트모더니즘과 유사점이 있다. 후자가 진리자체를 거부한다는 데에 차이가 있을 뿐 현대인들도 진리가 혹시 존재한다 할지라도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표현 되어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자는 거부의 의사가 담긴 결론이고 도가 사상은 그것을 깨달아 체득할 것을 가르치는 것에 차이가 있다.) 또 다른 면에서 장자가 꿈을 꾸어 나비가 되었는데 자신이 진정 나비가 되었던 것인지 나비가 된 꿈을 꾼 건지 혼동하는 이야기에서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는 포스트모더니즘과 흡사한 사상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는데…내가 차원(dimension)을 적절하게 연결(match)하지 못하는 것 같다.
또 한가지로는 ‘절대신’으로 대표될 수 있는 관념주의 문화의 다른 시대/장소의 사상과 접목시켜볼 때이다. 각 문화에서 도덕과 윤리의 기준에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AD 4세기 무렵을 기점으로 시작된 관념주의 단계의 서구사회에서는 신에 대한 봉사의 형태가 지역의 문화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기독교와 이슬람교를 비롯하여). 여기에서 관념주의란 어떠한 절대적 가치의 실재를 믿는 것을 말한다. 그 가치가 절대적 신에게서 부여되었으며 그러므로 신적권위를 갖는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그 자체로 악한 것’과 ‘그 자체로 선한 것’이 존재한다. 하지만 ‘절대’라는 수식어와 모순적인 ‘다양성’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어 멕시코의 아즈텍 부족은 신에게 정결한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살아있는 사람의 심장을 꺼내어 -지극히 반인륜적인- 바쳤다.[1] 신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가혹한 대가를 치뤄 왔던 것이다. 노자는 서구인들이 믿었던 이 ‘절대적 가치’를 ‘도’라 하지 않을 것임은 당연하다. ‘절대적 가치’라 이름 지어지지만 지역문화에 따라 다양성을 지녔던 그 모순은 그 ‘절대적 가치’가 진정 ‘절대적 가치’가 아님을 스스로 시인하는 것인가? 둘을 접목시켜보자면 노자가 더 우위에 있는 것을 ‘도’라 명명한 것이라고 이해되어지는데 -그는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은 도라 하지 않는다 – 이 논리에 의하면 하나님은 진정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는 절대적 신이 아닌 그러한 존재라고 한 역사적 시기와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에 의해 상정되었던 ‘道보다 하위인’ – 도라고 불릴 수 없는 – 하나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물론 둘을 비교하기에 도가사상은 종교를 포함하는 보다 포괄적인 철학이라 할 수 있고 삶에 관한 지혜를 중심으로 하지 인간의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종교는 아닌 것으로 이해된다. (내가 전혀 비교 불가능한 차원의 양자를 무식하게 연계지은 것인가?)
마지막으로 ‘절대불변의 법칙’과 ‘창조주의 창조질서’와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하여.
그가 말하는 ‘도’는 신이 아닌 만물의 움직임의 근거이다. 말없이 만물을 생성화육하게 하는 저 자연 속에 숨겨진 보이지 않는 힘이다. 그는 그것을 ‘절대불변의 법칙’이라고 일컫는다. 계절의 변칙 없는 주기와 해가 지고 달이 뜨는 우주의 생리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진실로 절대불변의 법칙이라 할 수 있다. 기독교는그것을 하나님의 창조질서로 이해한다. 포스트 모더니즘이 절대적 진리란 것은 없다고 말하지만 인간의 영역을 초월하는 우주의 ‘법칙’, 즉 질서가 존재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지 않은가? 그것은 우리가 근거 없이믿는 미신이 아니라 감각적으로 – 감각시대를 사는 ‘감각’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사람들이 - 증명할 수 있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인지함으로써 인간이 무엇을 추론할 수 있을까. 인간이 자연을 한정된 범주에서나마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 하에 과학이 발전해왔다. 하지만 과학이 자연이 어떻게 존재하고 작용하는지 훌륭히 설명해 내었을지 몰라도 궁극적으로 왜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했다. 또한 아무리 객관적 진리라고 외쳤던 과학 조차도 실험자의 의도와 해석에 좌우된다는 그 실망은 가히 파격적이었을 것이라생각된다. 과학에의 실망은 각자가 인지하는 세계가 각자의 진리라고 말하는 진리관으로 이어진다. 노자가 말하는 ‘영원불변의 법칙’ 그리고 엄연한 실제적 자연의 질서에 대해 이 시대의 사상은 어떤 결론을 내리나. 책을 다 읽진 않았지만 화이트헤드의 <이성의 기능>에서 이해한 바를 언급하자면 그는 그것은 모든 생물학적 현상을 완벽하게 물리적 현상으로 환원할 수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유기체인 생물은 어떠한 목적인(이성이 기능하는 출발점) – ‘산다’, ‘잘산다’, ‘더 잘산다’로 간략화되는 - 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동물의 진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우리의 몸 속에서 발견되는 목적적 인과에서 유추하여 우주에도 그러한 힘이 있다고 결론짓는다. 대충 이러한 논리로 결국에는 창조론을 터무니없다고 여기고 무신론적인 우주관을 제시하는 것 같다.
힌두교에서 말하는 ‘해탈’이 인간의 육체와 실재하는 자아를 완전히 벗어난 형이상학적 초탈을 의미한다면 노자가 말하는 이상적 경지는 고요히 흐르고 낮은 곳에 처하길 즐기는 물과 같이 감정적(인격적)으로 겸손하며 사심 없는 담담한 내적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힌두교가 현상적/경험적 세계의 모든 것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을 연습하는 철학이라면 본서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두는, 애써 바꾸려 작위하지 않는- 그렇게 행동해야 할 근거를 인식할 것을 가르치는 학문이라고 이해했다.
<실은 노자는, 성인은 천지의 무위자연의 법칙을 몸소 인간에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성인이 하는 일은 하늘의 도와 일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7장 解義 중>
비록 역자의 해의이긴 하지만 이 구절에서 나는 노자의 사상이 초기 기독교에게 영향을 미친 스토아학파와유사하다고 생각했다.(좀 단편적인 비교이긴 하지만) 후자역시 인간이 inexorable law에 도달하려 train할 수있고 철학의 목적은 자연의 법을 understand, obey and adjust 하기 위함이며 현명한 사람은 우주의 법(질서)에 mind가 부합하는 사람이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제9장이 제시하는 미덕은 ‘중용’인 것 같다. 조금 부족하게, 겸허하게 빈 공간을 남겨두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이 태도는 어디에 적용해 볼 수 있을까. 물을 조금 부족하게 받아놓고 쓰는 사람은 현명하며 아낄 줄 알고 최선을 추구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누군가가 물이 넘치도록 틀어놓은 채로 사용한다면 그는 헤프고 마음이 섬세하지 않으며 차분한 성품을 지니지 못한 사람으로 비칠 것이다. 밥을 먹을 때에도 조금 부족하게 먹는 것이 육체의 건강에는 물론 정신 건강에도 좋다. 욕망에의 절제 없는 개방, 즉 방종은 인간의 마음을 퇴폐적으로 만든다. 칼을 잘 다루어 보지 않은 사람은 칼을 갈 때 무조건 쓰임의 효율성만을 생각하여 더욱 날카롭게 갈 것이다. 그럴수록 예리하여 잘 자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칼을 많이 다루어본 사람은 적당히 날카롭게 갈 것이다. 부러지거나 꺾어지기 쉬울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한 면만 바라보고 극단으로 치우쳐 행동하는 것은 대부분 좋은 결과를 낳지 못한다. 무엇이든 여러가지 면을 신중히 고려하여 적정 線을 파악하고 이루어가야 함이 마땅하다.
<건전한 정신이란 몸과 마음을 도에 집중하여 기가 흩어지지 않고 유화함을 체득하여 순수하고 꺠끗함에 이른 상태를 말한다. 마음에 더럽혀짐이 없이 도에 집중된다면 심오한 경지에 이를 것이며, 그 맑은 눈으로 자신을 반성하여 흠이 없을 수 있을 것이다. -10장>
‘영아와 같은 상태’라고 표현하였다. 어린아이는 세상을 많이 경험하지 않았고 머리가 자라지 않았으므로 순수하게 세상을 인식한다. 모든 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며 복잡한 술수로 처세할 줄 모른다. 배운 것을 의심하지 않고 거짓이란 것을 알지 못한다. 더러움으로 물들지 않은 그 마음은 흠이 없다.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면 그의 삶은 참으로 순전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될 것이다.
20장은 철학적 가르침과 더불어 탄식과 푸념 섞인 듯한 표현이 감상을 자극한다.
<세상의 여러 사람들은 기뻐 웃으면서 소나 양의 맛있는 고기를 즐기는 듯,…나만은 홀로 휑하게 빈 가슴으로 평안하고 고요하게 있네..나른하고 고달파서 돌아갈 곳 없는 사람과도 같네…>
33장은 그 어느 장보다도 받아들이기 평이하고 귀감이 되는 교훈이다. 앞의 장들이 추상적이고 대의적인 반면 본 장은 비교적 소시민적이고 개인적인 교훈도 준다.
<남을 이기는 사람은 지혜 있는 자이지만, 자신을 아는 사람은 더욱 명철함이 있는 자이다. 남을 이기는 사람은 힘이 있는 자이지만, 자신을 이기는 사람은 더욱 강한 사람이다.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넉넉하고, 근면 역행하는 사람은 뜻이 있는 자이다…>
전혀 새로운 내용은 아니지만 정말 멋진 교훈이라고 생각했다.
남들이 가르치는 이익과 손실에 대하여 나도 또한 가르친다. ‘남들은 강한 것, 있는 것이 이익이라고 가르치지만 나는 약한 것, 없는 것이 유익하다고 가르친다.’ –42장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그칠 줄 알면 위태하지 않다 –44장
날뛰어 움직이면 추운 것을 이기고, 고요히 있으면 뜨거운 것을 이긴다. –45장
고요함을 찬양한 내용이다. 일상에서 발견되는 현상으로 아주 재치있게 비유하였다.
나는 착한 사람을 선으로 대한다. 나는 착하지 않은 사람도 또한 선의로 대한다. 그렇게 하면 모두가 선인이 된다. 나는 믿음성이 있는 자를 믿는다. 그러나 나는 믿음성이 없는 자도 또한 믿는다. 그렇게 하면 모두가 성인이 된다. –49장
모든 사람을 이렇게 대함으로서 그들을 진정 그렇게 변화시키는 사람은 정말 ‘성인’이라 할 수 있는 위대한힘을 지닌 사람이다.
사욕이 생기는 구멍을 막고 사욕이 들어오는 문을 닫으면 몸이 다할 때까지 노고하지 않을 것이지만, 그 구멍을 열어 놓은 채 거기에서 생기는 일들을 잘 처리하려고 하면 몸이 다하도록 구제되지 못할 것이다. –52장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그 구멍을 막고, 그 문을 닫으며, 그 날카로움을 꺾고, 그 분(忿)을 풀며, 그 광채를 부드럽게 하여 티끌과 함께 섞여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을 심원×신비한 동일이라고 한다. –56장
사욕이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문을 닫고 그리하여 날카로운 것을 둔하게 만들어 질박함을 지키고, 분노하는격정을 풀어 누그러지게 하여 다툼의 근원을 없애 버린다. 특히 남의 눈에 드러나 보이는 광명을 흐리게 하여 티끌과 함께 있으면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해의>
언어적 표현 자체가 문학적 감흥을 주는 장이다. 메시지 또한 그렇다. 외우고 싶은 구절이다.
큰 나라가 작은 나라에 겸허하게 저자세를 취하면 작은 나라가 거기에 붙게 되고 –61장
크면 클수록 높으면 높을수록 저자세를 취하라는 가르침.
훌륭한 전사는 무용을 부리지 않고, 싸움을 잘 하는 자는 성내지 않으며, 적에게 가장 잘 승리하는 자는 적과 대전하지 않고, 사람을 잘 쓸 줄 아는 사람은 그 사람 앞에 몸을 낮춘다. 이것을 다투지 않는 덕이라 하고, 이것을 남의 힘을 쓰는 길이라고 한다. –68장
백번 싸워 백 번 이기는 것이 최선이 아니고,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는 것이 가장 잘
싸우는 것이다. –孫子
한 번 생각하고 반응하는 나에게 두 번 생각하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한 발짝 물러서는
여유로움…그 진부한듯한 교훈을 새롭게 깨닫게 해준 것이다.
알면서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 상덕이다. 알지 못하면서 안다고 하는 것은 병이다.–71장
사람이 살았을 떄는 부드럽고 연약하지만 죽으면 곧고 강하다. 초목도 살았을 때에는 부드럽고 연하지만죽으면 말라서 야물다. 그런 까닭에 굳고 강한 것은 죽음의 속성이고, 부드럽고 약한 것은 삶의 속성이다. 그런 까닭에 군사가 교만하여지면 멸망하고, 나무가 강하면 꺾여진다. 강대한 것은 아래에 있고, 유약한 것은 위에 있다. –76장
가장 경탄을 자아내는 장이다. 그 비유의 절묘함과 유약함의 힘.
산다는 것, 그것은 자연스러움 그 자체다. 생명의 태어남이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작위’로 삶을 메우려 한다. 욕심, 쾌락, 야망…을 위해서 노력을 아끼지 않는, 삶의 목적에 대한 진지한 성찰없이 물질과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며 사는, 그리고 자기PR시대로 자신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드러내기를 추구하는 현대인들과 그런 경향을 자연스레 많이 답습하는 나. 그런 나에게 이 어찌보면 진부하면서도 실천하기엔 낯선 그런 교훈들이 ‘도덕경’이라는 권위로 인한 새로운 뉘앙스로 내게 깊이 생각해보고 좀 더 여유로움을 지니게 하는 소중한 가르침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가볍게 생각해본 것을 덧붙이자면 노자가 제시하는 정치는 작은 생선을 삶는 것처럼 백성들을가만히 놔두는 것이다. 법령을 자주 변경하거나 많이 만들어내서 국민의 생활을 지나치게 간섭하고, 제한하고, 명령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이다. <60장> 하지만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저 ‘멍청’하고만 있는 정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어려운 일은 그것이 쉬울 때에 처리하고, 큰일은 그것이 미세할 때에 해결하라. 천하의 어려운 일은 반드시 쉬운데서부터 일어나고, 천하의 큰일은 반드시 미세한 데서부터 시작된다. –63장
대충의 그림은 그려지지만 과연 이 사상은 현대의 정치에 어떤 효용성과 의미를 지니는가. 도무지 적용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토록 범죄가 갈수록 잔인하고 극악해질뿐더러 수단방법도 과학기술의 무궁한 발전에 부응해 고차원적인 시대에, 또한 원조교제 등 윤리체계가 무너지는 시기에 무위 자연의 사상은 괴리감만 줄 뿐이다. 아마도 도덕경의 저자들이 현 세대를 보게 된다면 경악을 금치 못할 것 같다. 백성들이 너무 지혜로와서…
[1] 감각의 문화
-------------
공감 Thanksto 찜하기
쉽게 접근할 수 있어서... 새창으로 보기
평범 속의 비범 ㅣ 2006-05-13 ㅣ 공감(10) ㅣ 댓글 (0)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해주어서 좋군요. 나름의 뜻을 새겨서 보여주는 것도 좋구요. 다만 원문의 포인트가 될 수 있는 것은 약간 어렵더라도 새겨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공감 Thanksto 찜하기
이럴수가 OTL 새창으로 보기
風月樓主 ㅣ 2005-02-24 ㅣ 공감(28) ㅣ 댓글 (1)
이런류의 리뷰를 쓰시는 분들께서 흔히 혼동하시는 것이 있다.
이런 책의 좋은 주옥같은 구절들은 원전에서 있는 것이며, 아무리 좋은 번역이라도 원전을 훼손하거나 자신만의 주관이 너무 들어가는 것은 해석을 도와주기도 하지만 오히려 새로운, 자신만의 깨달음 등을 방해하곤 한다는 것이다. 요컨데, 이런 책에서 중요한 내용은 얼마나 보기 좋은지가 아니라 원본에 충실한지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문열씨의 삼국지에 낮은 평가를 주시는 분들이 많으시다.)
그런 의미에서 알라딘 초이스! 와 현암사라는 이름에 넘어가 판본 확인도 안한 나도 잘못이지만 이 책은 더욱 대단하시다 _-b 오탈자는 애교요, 나름대로의 의역에 다른 판본을 보지 못했다면 이것이 정론인양, 옳은 해석인양 넘어가 볼뻔 했다. 마음을 비우고 도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도덕경을 보면서 자꾸 슬금슬금 화가 치밀어 책을 엎은적은 이번이 처음인거 같다. 장자도 오강남씨의 저서를 비싼 돈주고 사서 봤는데 그녀석까지 제대로 된 판본인지가 의심스러울정도다.
쉽게 들고 다닐수 있는 이동성. 잘된듯해 보이는 번역내용. 이런것이 전부는 아니다. 처음 본 판본이 해석은 철저히 배재된 채로 원문과 번역만을 실은 것이었기 때문에 이런 거부감이 더욱 할런지 모르겠다. 화려하지만 몸에 맞지않는 옷을 입은 듯한 그런느낌. 그런 찝찝함이 책을 끝까지 읽지 못하게 한다. 다른 판본이나 구해서 다시 구매해야겠다.
공감 Thanksto 찜하기
상식의 도덕경 새창으로 보기
노자읽기 ㅣ 2004-10-29 ㅣ 공감(2) ㅣ 댓글 (0)
가장 쉽고, 편하고 무난한 해석본을 보고 싶다면, 단연 오강남의 도덕경이다..책이 작고, 편집도 깔끔하고, 단단한 겉 표지에, 내용도 쉽게 잘 만들어진 책이다..이것이 기독교 종교 철학자의 솜씨라는 점 또한 흥미롭다. 그런데 쉬운 만큼 오역은 게 중 심한 것 같다. 특히 13장의 경우는 매우 독창적(?!)이다.
공감 Thanksto 찜하기
물 흐르듯이 편안하고 자연스러움을 느낀다. 새창으로 보기
md1221 ㅣ 2003-11-23 ㅣ 공감(2) ㅣ 댓글 (0)
중.고등학교 도덕 교과서에서 가볍게(?) 훝고 지나갔던 노자의 사상에 대해서 접할수 있었다.
교과서에서는 무위자연...뭐 이정도 기억이 난다. 사상 자체가 뭐랄까 좀 신비하고 다른 사상과는 독특함이 느껴지는거 같아서 기회가 되면 한번 책을 보고자 했는데 원전과 설명이 곁들여져 있어서 괜찮았던거 같다.
도덕경은 80장이 약간 넘는 분량이고 1장은 대략 1페이지 정도로 구성되어 있다. 몇몇 장은 약간 고루하고 설명을 읽어도 잘 와닿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전반적으로는 내용이 훌륭하다.
원전만 읽으면 무슨 내용인지 잘모르고 수박 겉핡기 식으로 넘어 갈 수도 있지만 다음장에 그장의 설명이 같이 나오니 내가 모르고 넘어간 부분에 대해 많이 알수 있다.(물론 저자의 주관이 약간씩은 들어간듯 하다)
소위 요즘 범람하는 성공, 자기계발 쪽의 도서의 내용과 상반되는 내용이 많아 신선하기도 하고 책을 다 읽고 나면 마음이 착 가라앉으면서 편안함을 느낄수 있을것이다.
소장하고 있다가 속상하거나 스트레스 받을때 읽어도 도움이 될듯 하다.
공감 Thanksto 찜하기
------
총 : 29편
리뷰쓰기
도덕경 새창으로 보기
kje0525 ㅣ 2003-11-08 ㅣ 공감(1) ㅣ 댓글 (0)
역자는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의 비교 종교학 교수로 있는 오강남이다. 그는 서두의 '독자들에게'라는 글에서 '이렇게 신나는 책을 읽어보지 못하고 일생을 마치는 사람은 김치찌개의 맛을 모르고 한평생을 마치는 사람보다 훨씬 더 불쌍한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 책을 다읽고 난 뒤의 내생각도 그와 같다.
'장자'는 '도덕경'과 함께 노장 사상의 성전이랄 수 있겠는데, '도'를 말하지 않으면서도 '도'를 내비취고 있는 책이다. 사실 오강남 풀이의 이책은 장자 전문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학자들에게 장자가 직접 쓴 것으로 알려진 내편 7편과 그외에 외편과 잡편에서 자주 거론되는 몇몇 내용들을 담고 있다.
나는 요즘 '낭만주의는 해방이다'라는 명제를 생각해 내고 그기서 나의 사상적 단초를 마련할려고 하고 있다. 직감을 통해 경험과 논리의 협소함을 초월하고 우주의 총체성에댜한 통찰을 얻는 것은 분별지에 속박당한 주객해체의 억압적 담론을 해방할 수 있는 힘이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된 것이다. 이 힘은 주체 중심의 왜곡된 낭만주의를 넘어 나와 나 이외의 모두를 궁극적으로는 하나로 인식할 수 있는 화엄의 경지를 열 수 있을 것이다.
'장자'에서 특히 2장의 '제물론'은 물(인식의 대상인 객체)를 고르게 한다는 뜻이다. 이 장은 모든 분별지의 극복을 통해 있음의 없음과 없음의 있음이라는 상식적이면서도 충격적인 역설을 보여주고 있다.
획기적인 변혁과 그로써 얻을 수 있는 자유는 '도의 경지'를 일컫는 것이다. '도'는 말도 아니고 개념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그 무엇....? 그렇다. 도는 해방이다. 도를 해방이라고 규정한 것 자체는 내가 도를 구속한 것이 되지만 도는 분명 해방이다. 해방 그것이 도인 것이다.
'장자'는 심오한 책이다. 개념지어질 수 있는 피동형의 책이 아니라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면서도 모든것을 말하는 역설 그 자체의 책이다. 이 역설의 경지는 진리일까? 도일까? 나늠 말하지 못할뿐이다.
공감 Thanksto 찜하기
도덕경.. 새창으로 보기
mem1980 ㅣ 2002-12-08 ㅣ 공감(0) ㅣ 댓글 (0)
얼마전 그것도 2년이나 됫군 도올 김용옥 선생이 티비에 등장해 노자에 대해서 강연을 했엇고 한때 노자 센세이션이라고도 할수있을만한 일들이 벌어졌었다. 그때 노자관련 서적이 인문 베스트에 많이 들어가 있엇다. 그 이후에 다시 도올선생이 나오고 다시 동양 고전에 대해서 말한다. 그러한 노자가 과연 어떠하길래 그렇게 떠들어 대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또 동양 고전에 대해서 무지한 나 자신에 대해서도 좀 궁색한 면이 있엇기에 이책을 구입햇다. 책을 읽는데 무슨 도덕책을 읽는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제목도 비슷하다. 하지만 먼가 안에 깊은 뜻이 담겨져 잇는것 같다. 근데 아직은잘 모르겟다. 더 열심히 읽어봐야겟다. 즉 한번바서 잘 모르겟다 이거다. ^^;
공감 Thanksto 찜하기
노자의 도는 空이 아니다 새창으로 보기
jd5024 ㅣ 2003-04-18 ㅣ 공감(0) ㅣ 댓글 (0)
사람들은 자주 착각을 한다. 노자의 도는 공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채워서 없애는 것을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느낌이 좋다.. 수많은 번역서가 있지만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책의 향기가 조금씩 달라지는 것 같다!! 매번 언제 읽어도 새롭다..1분중 0분께서 이 리뷰를 추천하셨습니다.
공감 Thanksto 찜하기
언어의 한계를 넘어 진리를 이해하는 사유체계로 새창으로 보기
곽지희 ㅣ 2002-08-14 ㅣ 공감(0) ㅣ 댓글 (0)
도덕경은 당시 주류의 사상에 비판적이고 대안적인 흐름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환경오염, 인위적이고 상업적인 자본의 횡포, 빈부의 차 현재의 많은 문제점들의 원인들도 지적해줄 수 있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점들에 대한 환기를 할 뿐이지 현실적으로 전복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도덕경에서 나타나 있듯이 도, 무위는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애쓰지 않지만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다. 나는 도덕경의 사상이 현실적인 대안이라는 점 보다는 새로운 사유체계를 이루어 줄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었다.
도와 덕에 관한 경전은 말중심의 사유체계에서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커뮤니케이션 방식으로 말하고 있다. 도에 대한 정의는 그 서술하는 즉시 한계에 봉착하게 되며, 따라서 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도가 아니라는 진술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를 설명하는 방식에 있어서 로고스 중심주의적 사유체계는 적절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사유체계로 도를 이해하는 것이 좋을까?
도는 오히려 언어 중심의 사유체계를 뛰어넘는 이미지 중심의 사유체계로 커뮤니케이션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이 보인다. 왜냐하면 이미지도 또한 개념적 또는 추상적인 의미 규정과는 달리 대상을 구체적으로 감각적으로 재현해 낸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지를 정의할 때에 우리는 논리적 사유방식, 즉 로고스 중심주의적 사고로 이미지의 하나의 측면만을 말하겠다는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미지는 규정이나 논리에서 벗어나 있다고 여겨지는 것을 붙잡아야 하며, 이미지에 대해 정의 내리는 주체에 따라 그 의미가 다양하게 변하는 어려운 점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이미지를 로고스 중심적인 사유체계로 정의하는 데에 따르는 어려움은 도를 정의할 때 가지는 어려움과 유사한 점이 발견된다.
특히 이미지는 명백하게 현존하는 인식이나 사물의 재현도 아니고 그렇다고 단순히 부재하는 것의 표현도 아니다 . 몽젱은 “이미지는 절대 존재와 아무 관계가 없으며 또한 비존재와도 아무 관련이 없다. 이미지는 현존하지 않는 절대 존재의 독특한 표현 양태이다. 이미지는, 부재와 현존을 맺어준다. 게다가 이미지는 우리에게 이 부재를 현존케 하고, 그 부재의 현존을 하나의 기호관계로 뚜렷하게 해준다.”고 했다.
인간이 현재 세상에서 그 무언가 결핍을 느끼고 그 무언가를 표현하려 한다면 그것은 이미 하나의 이미지인 것이며, 인간은 언제나 결핍을 느끼는 존재하는 의미에서 언제나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노자가 도덕경을 통해서 도와 덕에 대해서 무언가를 전달하려고 했다면, 그것은 단지 언어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도에 대한 이미지의 공유일 것이다. 도에 대해서 다 말할 수는 없지만 그 과정에서 전달될 수 있다는 점. 이것은 이미지 중심의 사유체계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접합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미지는 그것이 관련되는 모든 영역(실은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이지만) 즉 논리, 미학, 윤리, 교육, 정치, 형이상학, 예술, 철학에서 하나의 근본토대를 차지하고 있다 .
이미지와 상상력이 서구의 합리주의내에서 경시 받아오다가 이제서야 인류의 공통분모로 그 위상이 올라가고 있다 . 도의 성격, 즉 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도 있는 말로 표현할 때는 어렵지만 상상력으로는 받아들일 수 있는 그 신비함은 언어 중심주의가 아니라 이미지 중심주의라는 대안적인 새로운 사유체계와 닮은 점이 많으며 이렇게 이미지중심주의로 전환하며 이해할 때, 그 본래적인 진의가 전달될 수 있어 보인다. 또한 그 동안 주류에서 외면되어 왔던 인류의 공통분모인 이미지와 상상력의 의미를 도라는 궁극의 진리로 극대화 시켜주는 것 같다.
공감 Thanksto 찜하기
이제는 노자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때 ^^ 새창으로 보기
shinny2002 ㅣ 2003-08-07 ㅣ 공감(1) ㅣ 댓글 (0)
오강남 교수의 책을 몇 권 읽으며 그의 편견없는 종교, 철학의 식견에 감탄을 하곤 했다. 몇 해 전 도올의 노자와 21세기를 몇회 보면서 좀 의아하기도 하고 이상하단 생각이 들어 노자에 대한 서적을 몇 권 읽었던 적이 있다. 도올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오히려 그를 계기로 노자를 제대로 이해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으니까. 그의 도덕경 해설로 뭇사람들이 노자에 대해 관심을 갖을 수 있었다는 것 만큼은 고마운 일이다.
고등학교 윤리책에서 배운 단 한 줄의 노자 '노자의 무위자연설' 그 때 윤리선생님의 해설을 생각하면 기막힌 한숨뿐이다. 지금 생각해도 말도 안되는 해설을 하셨었는데, 차마 내 모교의 선생님을 욕되게 하고 싶지 않아 생략하겠다. 그만큼 노자에 대한 평가가 왜곡돼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고, 이제라도 노자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에 다행이란 생각이다. 빠르게 소용돌이 치는 사회와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불안한 세상에서 그의 말씀 하나 하나는 등대처럼 절실하고 안타깝다. 지금이야말로 자연으로 돌아가 용서를 구하고 화해를 시도해야할 때가 아닌가.
---
총 : 29편
리뷰쓰기
[도덕경], 외로운 투쟁과 나눔의 미학 새창으로 보기
페르 ㅣ 2002-01-03 ㅣ 공감(1) ㅣ 댓글 (0)
원문을 통한 [도덕경]읽기와 해석은 많은 인내와 한자 실력을 필요로 했다. [도덕경]을 읽는 일은 그만큼 많은 시간이 필요했지만 그 내용과 느낌 점에 있어서는 마음의 양식을 채울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EBS를 통해서 간간이 강좌를 들어보기도 했지만 강사의 견해가 많이 들어가 큰 도움은 되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다. [대학],[중용],[논어]의 잠언들(나는 이 책들을 인생의 잠언 집이라고 명명한다.)
배울 때는 상당히 지루한 경향이 있었지만 (물론 개인적인 욕심과 한문강좌를 수강하면서 시험이라는 필요에 따라서 잠정적인 외우기에 불과했는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도덕경]은 인간의 가치관과 자연관, 사회 그리고 나의 관계를 생각해 보게 하는 고서라고 본다. 특히 [도덕경]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세계를 지향하는 현대인의 자연관(미국과 유럽)에서 새롭게 부각되고 대두되면서 지대한 관심사가 되어 근래에 와서 더욱 빛을 발하고 있는 책이다.
[도덕경]-제1장 道可道, 非常道(도가도 비상도)
-모든 수식어를 불허하는 이 한 문장은 나를 [도덕경]에 빠지게 하는 문구였다.
-(명가명, 비상명)
希言自然(희언자연) 말이 없는 것이 자연이다.(제 23장)
知人者智, 自知者明(지인자지,자지자명)-남을 아는 것은 지혜이지만, 자신을 아는 것은 명철함이다.(제33장)
無執故無失(무집고무실)(제 64장)-집착이 없으니 상실이 없다.
노자가 말하는 자연관과 인간사의 뚜렷한 차이점은 자연은 집착이 없고 말이 없는 것이라고 한다. 자연은 넘치면 덜어낼 줄 알고 사람은 넘치더라도 그 욕심이 끝이 없으니 시사하는 바가 이렇듯 크다.
만물과 더불어 되돌아 갈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대순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
반자도지동-즉 되돌아감이 도의 근원이다. 도는 일체 존재하는 것들의 근원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노자가 말하는 도=자연이라는 성립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도덕경]에서 보여주는 자연관은 이렇듯 순수한 원리를 통해서 아낌없이 주는 것이 자연이라고 본다. 그 동안 우리의 패러다임은 개인보다는 집단을 위주로 형성되어온 가치관이었다면 현대는 개인주의 경향이 새롭게 대두되고 있다.
이단시되어 온 [도덕경]의 가치가 새롭게 재평가되어지고 있음을 눈여겨보아야 할 시점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자칫 각박한 현실 속에 살고 있다고 생각되어지는 사람들에게 조금의 여유라도 주지 않을까?
아무튼[도덕경]은 새로운 가치관의 틀에서 새롭게 대두되고 있다. 세계가 변화하고 세계관이 이동하는 현시점에서 우리의 새로운 지침서로 부각하고 있는 [도덕경]은 나에게 많은 가르침은 준책이다.
세상은 나뿐만 아니라 자연과 더불어 사는 공동체의 공간이다. 이 공동체의 공간에서 인간은 어떻게 행동해야하고 대자연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독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또한,인간 실존에 대한 성찰과 더불어 현시대에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의미 그리고 가치있는 삶의 방법을 모색해 나가기위한 의미 있었던 시간이었다.
공감 Thanksto 찜하기
국내 최고의 도덕경 주해 새창으로 보기
정기립 ㅣ 2001-08-22 ㅣ 공감(1) ㅣ 댓글 (0)
도덕경은 동양 최고의 경전이다. 원전의 본문은 겨우 원고지 25매 분량밖에 안되지만, 한자 한자에 담긴 함축성과 상징성, 그리고 그 의미의 깊이와 넓이 때문에 후대의 주석가들이 쓴 주해서만 해도 종류가 수천가지나 되며 해석방법도 천차만별이라고 한다.
국내에도 많은 종류의 노자 도덕경 주해서가 있었지만, 이 책이 그 중에서 가장 탁월하다고 느낀다. 역자 오강남씨는 최근 '예수는 없다'라는 책으로 큰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분으로, 캐나다에서 종교학을 전공하였고 도덕경 번역을 18년전부터 준비하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책 구석구석에 역자의 세심한 정성이 배어있는 듯하다. 역자는 우리말 번역을 모두 경어체로 썼다. 심원한 우주의 진리를 먼저 터득한 고대 사상가가 그것을 반말로 전달하리라고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것부터가 설득력이 있고, 실제로 번역된 본문을 읽어보면 친근감과 그윽한 감동이 느껴진다.
이 책이 국내에서 나온 도덕경 주해서 중에 최고라는 것은 번역된 본문만 읽어보아도 바로 느낄수 있다. 이전에 나온 번역들처럼 우리말 문장 자체가 의미를 알기 힘들어서 몇번씩 읽어야 하는 경우가 별로 없다. 그냥 술술 읽혀지면서 의미가 통한다. 이 점이 이 책의 최고의 장점이다. 역자는 거기다가 자기나름의 느낌과 이해를 토대로 충분한 분량의 친절한 해설까지 덧붙여 놓았고 그 내용또한 알짜배기이지만, 나는 굳이 그것까지 읽어볼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역자가 18년 전부터 도덕경 풀이를 준비한 노고의 결실이라 하겠다.
누군가가 도덕경을 읽고 싶다고 말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이 책을 추천해 줄 것이다. 이미 선물도 많이 했다. 역자는 캐나다에서 오래 체류하며 공부한 분인 것으로 안다. 아마도 캐나다라는 나라의 환경이 이 책의 열매에 기여하지 않았을까? 중국만큼 광대한 영토를 가졌으면서도 인구가 고작 3000천만에 불과한 나라... 밑에 있는 미국에 비해서 사람들이 그다지 경쟁없이 욕심부리지 않고도 살수 있는 나라, 그야말로 무위의 실천이 가능해보이는 나라. 노자의 사상을 실천하면서 산다는 것이 과연 어느민족 누구에게나 가능할까 하는 의문을 남겨본다.
満蒙開拓団「墓標なき8万人の死」と岸田文雄の資産 イスラエル政府はナチの残党を地の果てまで追いかけた!! 日本以外の国で「岸田文雄首相誕生」は絶対にありえない!!: 中田潤ジャーナル「プロパガンダをぶっとばせ!」
満蒙開拓団「墓標なき8万人の死」と岸田文雄の資産 イスラエル政府はナチの残党を地の果てまで追いかけた!! 日本以外の国で「岸田文雄首相誕生」は絶対にありえない!!: 中田潤ジャーナル「プロパガンダをぶっとばせ!」
2018年4月21日 (土)
満蒙開拓団「墓標なき8万人の死」と岸田文雄の資産 イスラエル政府はナチの残党を地の果てまで追いかけた!! 日本以外の国で「岸田文雄首相誕生」は絶対にありえない!!
岸田文雄は広島1区選出の衆院議員だが、広島生まれではない。
岸田が誕生したのは東京原宿の「隠田マンション」。日本で初めて「マンション」と呼ばれた白亜の豪邸だ。
満蒙開拓団「墓標なき8万人の死」を札束に変えた。それが岸田家の資産形成のからくりだ。
岸田文雄の祖父、岸田正記は、広島市で貸家業を営む家に生まれた。東京帝国大学法学部卒。1928年に衆院議員となっている。
1931年。満州事変。
1933年。岸田正記が「幾久屋百貨店」を設立。
幾久屋百貨店で買い物をしたことがある日本人が今、何人いるだろうか?
幾久屋百貨店は日本には存在しない。傀儡「空洞」国家、満州国とともに消えた。
日本最古の百貨店は三井財閥の三井呉服店だ。1904年。「三井・三越」は連名で顧客に案内状を送った。
<当店販売の商品は今後一層その種類を増加し、およそ衣服装飾に関する品目は一棟御用弁相成り候 設備致し、結局 米国に行はるるデパートメント、ストアの一部を実現致すべく候>
1920年。阪急電鉄が「白木屋(現・阪急百貨店)」を開業。満州事変以前、わが国では、三越、高島屋、大丸、そごうなど「呉服屋系」、阪急、近鉄、名鉄など「電鉄系」が覇を競い合っていた。
「呉服屋系」も「電鉄系」も満州に進出できず、誰も見たことのない「幾久屋百貨店」が大連、奉天に突如、出現した。
なぜなのか?
「満州国は私が描いた作品だ」(安倍晋三の祖父、岸信介)
1928年と1930年。商工省官僚、岸信介は2度にわたってナチス・ドイツを視察し、「計画経済による産業の合理化」を主張した。
「ドイツでは、鉄鋼、自動車など重要産業にたいする国家権力の介入がますます厳しくなっている」
「ドイツの成功のカギは、自由競争を否定したことにある」
「トラスト、カルテルによる企業間の『協働』こそが、ドイツ製品のコスト低減を実現させた」
「わが国もドイツ型の国家統制経済体制を導入すべきだ」
この主張により、岸信介は「革新官僚」と呼ばれるようになった。
岸がドイツを視察した翌年、1931年に満州事変が起き、「革新官僚」に満州国という「まだ何も描かれていないまっさらなキャンバス」が与えられた。
1933年3月。「満州国経済建設要綱」なるものが立案された。その柱は二つ。
「財閥の排除」
「一業一社主義」
満州国の会社は「一業種につき一社のみ」認める、とされたのだ。満州国は「企業独占」の壮大な実験場となった。
時を同じくして、岸田文雄の祖父、国会議員歴5年目を迎えた岸田正記が「幾久屋百貨店」を設立した。
岸と岸田の密談は誰だって想像できるだろう。
岸田「満州の不動産業を俺が独占する。百貨店を作るから流通業も俺に任せてくれ」
岸「いいでしょう」
作詞家、なかにし礼の父親は軍人の勧めで満州に渡り、牡丹江で日本酒を作っていた。苦難の末に作り上げた酒は「関東軍御用達」となり、満州における酒造業独占を目指した。
「一業一社主義」とは何か?
満州の日本酒は、なかにし礼の父親が作る銘柄のみとなる。
満州の大都市には、三越も東急もなく、岸田文雄の祖父、岸田正記が作った「幾久屋百貨店」しかない。
結託すれば、日本酒販売のすべての利益を「たったふたり」で山分けできるのだ。
儲からないわけがない。
なかにし礼の満州時代を描いたテレビドラマ『赤い月』
膨大な札束、金塊とともに満州から逃げ出した岸田文雄の祖父、岸田正記のその後の行動は、安倍晋三の祖父、岸信介よりも悪質だ。
1942年5月20日。日本の歴史上初の「一国一党独裁」政党「翼賛政治会」が結成され、岸田正記は「国防委員長」の椅子に収まっているのだ。
岸田文雄の祖父は、大量虐殺魔のボスだった!!
ナチス・ドイツの経済体制を満州で実現させようとした岸信介(東条英機政権商工大臣)も当然、翼賛政治会の党員だったが、1944年、サイパン陥落を機に東条英機首相と対立。
「これから、日本本土への空襲が開始される。軍需担当の長として責務は果たせない。今すぐ講和すべきだ」(岸信介)
1944年7月18日。東条内閣総辞職で大臣をやめた岸は、「反東条」の政治団体「護国同志会」を結成。この幻の政党には「元社会大衆党議員」も参加している。
しかし、満州で大儲けした岸田正記は、翼賛政治会(→大日本政治会)所属議員のまま敗戦の日を迎えた。
日本本土空襲の死者は、24万人とも100万人ともいわれている。
戦後、イスラエルは、ナチの残党を地の果てまで追い、拘束し、処刑した。
アウシュビッツ強制収容所の所長、アドルフ・アイヒマンがブエノスアイレスで拘束されたのは1960年5月。
1953年4月。岸田正記は衆院選で当選。国会議員に復帰した。
1957年7月。東京のど真ん中にある白亜の豪邸で、岸田文雄は産声を上げた。
岸田文雄
2018/04/20
알라딘: 내 안의 나를 깨우는 장자 잡편 : 기발한 상상력으로 자아를 일깨우다
알라딘: 내 안의 나를 깨우는 장자 잡편 : 기발한 상상력으로 자아를 일깨우다
내 안의 나를 깨우는 장자 잡편 : 기발한 상상력으로 자아를 일깨우다 l 옛글의 향기 3
장자(저자) | 최상용(역자) | 일상과이상 | 2017-02-10
공유
URL
종이책
미리보기
종이책정가 12,500원
전자책정가 7,500원
판매가 6,750원 (10%, 750원 할인, 종이책 정가 대비 46% 할인)
마일리지
330점(5%) + 멤버십(3~1%) + 5만원이상 구매시 2,000점
페이지 수 308쪽 (종이책 기준)
제공 파일 ePub(31.73 MB)
가능 기기
크레마 그랑데, 크레마 사운드, 크레마 카르타, PC, 아이폰, 아이패드, 안드로이드 폰/탭, 크레마 터치, 크레마 샤인
배송료 배송상품이 아닌 다운로드 받는 디지털상품이며, 프린트가 불가합니다.
eBook
장바구니 담기
바로구매
선---------------
옛글의 향기 3권. <장자>는 한자와 동양사상을 많이 알고 있는 독자에게는,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담긴 소설처럼 한 번에 읽힐 정도로 재미있는 책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독자에게는, 본문 중에 실린 옮긴이의 주석과 주요한자의 독음 및 해설들이 원전에 집중해 읽는 데 오히려 걸림돌이 된다.
이에 안타까움을 느낀 이 책의 옮긴이 최상용은 어떻게 하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고민했고, 이 책에서는 주석과 한자의 독음 그리고 해설 등을 생략했다. 한글만 알아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쉬운 우리말로 옮겨 썼고, 해설이 필요한 부분에는 문장 속에 자연스레 설명을 녹아낸 것이다. 더 나아가 딱딱한 문어체를 지양하고 다감한 구어체로 이야기하듯 문장을 전개했다.
또한 소설처럼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본문을 이야기 중심으로 구성하고, 각각 쉬운 우리말로 풀어 쓴 제목을 달았으며, 해당 글이 원전의 어느 편의 몇 단락에 소재한지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했다. 각 편의 말미에 '한자어원풀이'를 수록했다. 학장부단 등 이 책의 각 편에 실린 주요 한자어의 어원풀이를 통해 한자에 담긴 본연의 뜻을 이해할 수 있도록, 글자의 원형이 담긴 갑골문과 금문 그리고 설문해자를 참조 인용하며 상세한 풀이도 했다.
<장자> 잡편은 「경상초(庚桑楚)」, 「서무귀(徐無鬼)」, 「칙양(則陽)」, 「외물(外物)」, 「우언(寓言)」, 「양왕(讓王)」, 「도척(盜跖)」, 「설검(說劍)」, 「어부(漁父)」, 「열어구(列禦寇)」, 「천하(天下)」 등 총 11편으로 구성되었다. 이 책의 잡편은 외편과 마찬가지로 각 편의 첫머리 글자를 취해 편명으로 삼았다. 잡편은 내편에서 드러난 장자의 사상을 부연 전개하고 있다.
들어가는 말
제23편 와루산에 사는 노자의 제자-경상초(庚桑楚)
제24편 은자 중의 은자-서무귀(徐無鬼)
제25편 초나라 왕을 만나고픈 노나라 사람-칙양(則陽)
제26편 우리 밖의 사물-외물(外物)
제27편 다른 사물에 비유한 말-우언(寓言)
제28편 왕위를 물려줌-양왕(讓王)
제29편 도둑의 우두머리-도척(盜跖)
제30편 칼싸움하지 말 것을 설복함-설검(說劍)
제31편 물고기 잡는 노인-어부(漁父)
제32편 도가 사상가 열자-열어구(列禦寇)
제33편 온 세상의 사상가들-천하(天下)
저자 : 장자 (莊子)
저자파일
최고의 작품 투표
신간알리미 신청
최근작 : <장자 : 쉽고 바르게 읽는 고전>,<장자 (내편)>,<장자 (큰글씨책)> … 총 94종 (모두보기)
소개 :
장자는 성은 장(莊), 이름은 주(周), 자(字)는 자휴(子休)이다. 그는 송나라 몽(蒙) 사람으로 전국시대 제자백가 중 도가의 대표적인 사상가이다. 여러 문헌을 종합해 보면, 장자는 전국시대인 B.C.300년경부터 맹자보다 약간 뒤늦게 나타나 활약한 듯하다. 그는 고향인 몽에서 칠원을 관리하는 말단 벼슬아치로 근무하는 한편, 논리학파의 거물인 혜시와 친하게 지낸 박학다식한 학자요 논객이었다. 초나라 위왕이 그를 재상으로 맞아들이려고 했으나, 그는 자유를 속박당하기 싫어 이를 거절하고, 청빈한 생활을 하면서 유유자적한 생애를 보냈다...
역자 : 최상용
저자파일
최고의 작품 투표
신간알리미 신청
최근작 : <한자 실력이 과학 실력이다>,<한자 실력 세트 - 전3권>,<한자 실력이 사회 실력이다> … 총 23종 (모두보기)
소개 :
언론에서 기자로 활동하다가 동양학의 깊이에 매력을 느끼고 원광대학교 동양학대학원에 입학했다. 기공학(氣功學)으로 석사학위를, 기학(氣學)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신비롭게만 여겨왔던 기(氣)를 체득하기 위해 참선, 명상, 도인법 등 다양한 수련을 해왔다. 더 나아가 동양학의 과학적인 접근을 위해 서울대학교 한의물리학교실에서 인체의 경락, 바이오포톤, 생체자기장, 생체에너지 등을 연구하기도 했다.
현재 인문기학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면서 대학 및 대학원, 기업 및 여러 사회단체 등에서 동양학을 강의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시대를 초...
“큰 새는 바람을 거슬러 날고,
살아 있는 물고기는 물살을 거슬러 오른다!”
김구 선생과 노무현 대통령의 좌우명을 낳게 한 장자,
소설처럼 재미있게 읽히는 스토리별 구성과 쉬운 우리말 번역으로 새롭게 태어나다!
난세의 시대, 『장자』와 만나면 난제가 풀린다!
지금 우리 사회는 정치는 물론 경제적으로도 불안하고 혼란스럽기만 하다. 이러한 난세에 춘추전국시대의 혼란기에 살았던 장자와 그의 책 장자(莊子)는 지금의 우리에게 신선한 청량제로 다가온다. 왜냐하면 이 책에는 시대를 초월한 삶의 지혜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세상과 나 자신을 더 나은 쪽으로 바꾸려면 환경, 인습, 욕망 등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말한다.『장자』에는 혼란한 세상을 개혁하는 타개책부터 바람직한 인간관계를 위한 처세법, 내 안에 감춰진 대아(大我)를 일깨우는 방법 등이 담겨 있다.
중국 전국시대를 살았던 장자는 천지만물의 근원을 ‘도(道)’로 보았고, “인위적으로 무언가를 이루려 하지 않고(無爲), 자기에게 주어진 대로 자연스럽게 행해야 한다(自然)”고 주장했다. 그래야 세상은 물론 나 자신을 이롭게 한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장자의 사상은 고금을 막론하고 중국인들의 생활철학이 되었으며, 중국 불교와 문학과 회화 등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더 나아가 동서고금의 많은 이들에게 크나큰 교훈을 주었다. 『장자』 1편 「소요유(逍遙遊)」는 인간의 상상력을 한껏 자극하는 거대한 물고기 곤(鯤)과 상상력을 초월하는 새 붕(鵬)을 등장시켜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자유로운 세계를 소요하듯 살아가는 무위자연(無爲自然)한 삶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러한 내용에 교훈을 얻는 김구 선생은 ‘큰 새는 바람을 거슬러 날고, 살아 있는 물고기는 물살을 거슬러 오른다’는 뜻의 ‘대붕역풍비(大鵬逆風飛) 생어역수영(生魚逆水泳)’를 좌우명으로 삼았고, 노무현 대통령 역시 이 글을 좌우명으로 삼아 마음을 다졌다. 또 마르틴 하이데거와 헤르만 헤세 등 서양의 대가들은 『장자』를 여러 번 읽고, “이 책을 읽은 건 운명적인 해후!”라고 말했다.
노자(老子) 의 『도덕경(道德經)』과 함께 도가사상을 대표하는 이 책은 10만여 자로 되어 있는데, 내편(內編) 7편, 외편(外編) 15편, 잡편(雜編) 11편 등 모두 33편으로 구성되었다. 그중 외편과 잡편은 후학(後學)에 의해 저술된 것으로 추측되고, 내편은 장자 자신이 쓴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편만 중요하다고 볼 수는 없다. 내편도 중요하지만 잡편 역시 장자의 사상발전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는 물론 당시 제자백가의 사상적 특징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책이다. 이처럼 『장자』는 ‘시대를 초월하는 넓고 깊은 지혜를 담은 책’으로 평가받고 있기 때문에 ‘서울대 권장도서 100선’, ‘연세대 필독서 200’, ‘고려대 권장 교양 명저’에 선정되는 등 현대인의 필독서이다.
소설처럼 재미있게 읽히는 스토리별 구성과 쉬운 우리말 번역
10만여 자로 되어 있는 『장자』는 매 문장마다 깊은 의미와 상징을 담고 있기 때문에 철학, 문학, 예술 등 분야를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크나큰 영향을 끼친 고전이다. 하지만 깊은 의미와 상징을 함축한 문장들 때문에 원문만 읽어서는 그 뜻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일반 독자들은 전문가의 주석이 포함된 책을 읽어야 했는데, 오히려 그로 인해 가독성이 떨어지는 불편을 겪어야 했다.
사실 『장자』는 한자와 동양사상을 많이 알고 있는 독자에게는,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담긴 소설처럼 한 번에 읽힐 정도로 재미있는 책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독자에게는, 본문 중에 실린 옮긴이의 주석과 주요한자의 독음 및 해설들이 원전에 집중해 읽는 데 오히려 걸림돌이 된다. 정작 장자의 호쾌한 사상을 일별하기에 어려움도 있었거니와 이것저것 살피며 읽느라 끝내 독파하지 못하고 중도에 내팽개쳐버리는 경우가 많다. 이에 안타까움을 느낀 이 책의 옮긴이 최상용은 어떻게 하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고민했고, 이 책에서는 주석과 한자의 독음 그리고 해설 등을 생략했다. 한글만 알아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쉬운 우리말로 옮겨 썼고, 해설이 필요한 부분에는 문장 속에 자연스레 설명을 녹아낸 것이다. 예를 들면, 좌망(坐忘)과 조철(朝徹) 같은 어려운 한자어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앉은 채 모든 걸 잊어버리는 좌망(坐忘)”이나 “아침 햇살과도 같은 밝은 깨달음인 조철(朝徹)”이라고 풀어 썼다. 더 나아가 딱딱한 문어체를 지양하고 다감한 구어체로 이야기하듯 문장을 전개했다.
또한 이 책을 소설처럼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본문을 이야기 중심으로 구성하고, 각각 쉬운 우리말로 풀어 쓴 제목을 달았으며, 해당 글이 원전의 어느 편의 몇 단락에 소재한지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했다. 예를 들면, ‘매미와 새끼 비둘기가 어찌 대붕의 뜻을 알겠습니까! 제1편 소요유(逍遙遊) 1-2’와 같이 제목을 달았다. 또 기존의 『장자』 책들은 대부분 무겁고 두꺼운 한 권짜리라서 휴대하기가 불편했는데, 내편·외편·잡편 등 세 권으로 나누어 언제 어디서나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도록 했다.
한편, 이 책은 각 편의 말미에 ‘한자어원풀이’를 수록했다. 학장부단(鶴長鳧短) 등 이 책의 각 편에 실린 주요 한자어의 어원풀이를 통해 한자에 담긴 본연의 뜻을 이해할 수 있도록, 글자의 원형이 담긴 갑골문(甲骨文)과 금문(金文) 그리고 설문해자(說文解字)를 참조 인용하며 상세한 풀이도 했다. 따라서 장자를 보다 깊게 이해하고자 하는 독자들에게도 유용한 책이 될 것이다.
제자백가의 사상적 발전을 알 수 있는 잡편(雜篇)
『장자』 잡편은 「경상초(庚桑楚)」, 「서무귀(徐無鬼)」, 「칙양(則陽)」, 「외물(外物)」, 「우언(寓言)」, 「양왕(讓王)」, 「도척(盜跖)」, 「설검(說劍)」, 「어부(漁父)」, 「열어구(列禦寇)」, 「천하(天下)」 등 총 11편으로 구성되었다. 이 책의 잡편은 외편과 마찬가지로 각 편의 첫머리 글자를 취해 편명으로 삼았다. 잡편은 내편에서 드러난 장자의 사상을 부연 전개하고 있다.
제23편 「경상초」의 앞부분에서는 노자의 제자 경상초를 등장시켜 ‘노자의 도’를 논하고, 뒤에서는 ‘양생’과 ‘제물론’과 같은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즉 “양생의 방법이란 자연의 도인 하나를 품고서 자기의 본성을 잃지 않는 것이지” 혹은 “도는 만물에 두루두루 통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사물이라도 나뉨이 있으면 이루어짐도 있고, 이루어짐이 있으면 훼손됨도 있게 됩니다”와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제24편 「서무귀」에서는 인간의 오욕칠정에 대해 다양하게 설명하고 있다. 즉 “지식인은 생각의 변환이 없으면 즐거워하지 않고, 말 잘하는 변사는 말의 조리가 없으면 즐거워하지 않으며, 일을 잘 살피는 사람은 상대방과 논쟁하여 따질 일이 없으면 즐거워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모두가 밖의 사물에 얽매어 있는 자들입니다”라는 내용 등이 실려 있다.
제25편 「칙양」에서는 다양한 관점에서 여러 인물들을 등장시키며 잡다한 주제들을 논의하고 있다. 예를 들면 성인의 특징, 임금으로서의 올바른 도리, 위정자와 백성의 관계, 길흉화복의 문제, 대자연의 변화인 음양의 성쇠에 따른 영향, 인간의 죽음과 삶과 같은 문제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제26편 「외물」에서는 우리 자신 밖의 모든 것을 뜻하는 외물, 그중에서도 재물과 명예를 탐하다 인간관계 및 자신을 망치는 사례들을 언급하고 있다. 즉 “충신이라고 해서 반드시 신임을 받는 건 아닙니다. 오나라 오자서(伍子胥)는 충신이면서도 사형을 당하여 강물에 던져졌고, 주나라의 대부 장홍(萇弘)은 모함을 받아 촉 땅에서 자결했다”는 내용 등이 실려 있다.
제27편 「우언」에서는 『장자』의 서문과도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즉 이 편의 첫 장에서 “내 글에서 우화의 형식을 빌려 한 말(寓言)이 십 분의 구 정도이고, 옛사람들이 중시하는 말이나 일을 빌려 한 말(重言)이 십 분의 칠이며, 무심히 한 말(卮言)은 일상에서 수시로 나오되 자연의 질서와 화합된 것들입니다”라고 언급되어 있다.
제28편 「양왕」에서는 천자의 자리를 물려주려 해도 자기의 일신을 중시하며 물리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즉 “해가 뜨면 들로 나가 일하고, 해가 지면 집으로 들어와 쉽니다. 이렇게 하늘과 땅 사이를 소요하다 보면 마음이 한결 흡족해진답니다. 그런데 내 어찌 천하를 다스리겠습니까? 슬프게도 임금님께선 저를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 것 같군요”와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제29편 「도척」의 서두에서는 공자와 도척을, 뒤에서는 자장과 지화를 등장시켜 유가를 비판하고 있다. 특히 도척의 입을 통해 “공구 네가 한 말은 모두가 쓸모가 없어 내가 버린 것들이다. 그러니 어서 빨리 돌아가고 다시는 그런 말들은 하지도 말거라! 네가 믿고 있는 도란 본성을 잃고 허둥대는 것으로서 교활하게 남을 속이고 거짓으로 일을 꾸미는 데 쓰이는 것이지, 진정성을 보전할 수 있는 게 아니다”라고 말한다.
제30편 「설검」에서는 장자를 등장시켜 칼싸움을 좋아하는 조나라 문왕을 설복하여 그만두게 한다는 내용이 전개되고 있다. 본편의 말미에 “장자가 ‘전하! 이리 편안히 앉으셔서 마음을 좀 안정시키시지요. 검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모두 다 아뢰었습니다.’ 그 뒤로 문왕은 석 달 동안이나 궁 밖을 나가지 않았고, 검객들은 모두 그 자리에서 자결하고 말았습니다”라는 내용이 실려 있다.
제31편 「어부」에서는 도를 체득한 어부를 등장시켜 공자에게 가르침을 준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편에서는 도가적인 것과 유가적인 내용이 뒤섞여 있다. 예를 들면 “천자·제후·대부·서민 등 이 네 가지 계층의 사람들이 스스로 알아서 올바른 길을 가게 하는 것이 다스림의 미학입니다. 이 네 계층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자리를 벗어나게 되면 그보다 큰 사회적 혼란은 없을 겁니다”라는 내용이 실려 있다.
제32편 「열어구」에서는 도가 사상가인 열자를 등장시키며 여러 도가 사상을 열거하고 있다. 특히 후반부에서 “장자가 막 죽음에 이르렀을 때 제자들이 성대하게 장례를 치르려 하자, ‘나는 하늘과 땅을 속관과 겉 관으로 삼고, 해와 달을 한 쌍의 구슬 장식으로 삼으며, 별들로 입에 물리는 구슬로 삼고, 만물을 부장품으로 생각하고 있단다. 이처럼 내 장례 용품은 이미 다 갖추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여기에 무얼 보탠단 말이냐’라는 대목”도 기술되어 있다.
제33편 「천하」에서는 춘추전국시대의 대표적인 사상가들을 소개하며 각 학파 나름의 특징을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 소개된 사람으로는 묵적과 금골리, 송견과 윤문, 팽몽 및 전병과 신도, 관윤과 노자, 장자, 혜시 등이다. 특히 “혜시의 학술은 여러 분야에 걸쳐 있고 그가 지은 책도 다섯 수레나 되었지만, 그가 내세운 도는 잡다한 것들로 뒤섞여 있고 그의 이론 또한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라며 혜시를 평가절하하고 있는 점이 눈길을 끈다.
Subscribe to:
Posts (At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