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1/04

天野貞祐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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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野貞祐

あまのていゆう
天野貞祐
AMANO Teiyu.jpg
生誕1884年9月30日
神奈川県津久井郡鳥屋村
死没1980年3月6日(満95歳没)
東京都武蔵野市
死因老衰
墓地雑司ヶ谷霊園
国籍日本の旗 日本
出身校京都帝国大学文学部哲学科
職業哲学者
教育者
著名な実績第67代文部大臣
第14代旧制第一高等学校
初代獨協大学
影響を受けたもの内村鑑三
大村仁太郎
宗教キリスト教
宗派カトリック
配偶者天野タマ
天野藤三
親戚尾崎行雄
受賞大功労十字星章
文化功労者
勲一等旭日大綬章
野球殿堂
従二位
天野 貞祐(あまの ていゆう、1884年9月30日 - 1980年3月6日)は、大正昭和期の日本の哲学者教育者文学博士京都帝国大学名誉教授。第二次世界大戦後は第一高等学校校長・文部大臣第3次吉田内閣)を務めた後に獨逸学協会学校を母体として創立された獨協大学の初代学長を務めた。文化功労者武蔵野市名誉市民[1]

来歴[編集]

神奈川県津久井郡鳥屋村(現在の相模原市)の豪農の出身、父・天野藤三自由民権運動に参加して後に村長・衆議院議員を務めた。ちなみに実兄は尾崎行雄の妹婿にあたる。父は教育熱心な人物であり、天野も将来医師になる事を嘱望されて13歳の時に獨逸学協会学校中学校(旧制中学、獨協学園の前身)に入学した。そこで野球と出会い、野球部の選手として活躍したが足を痛めて退部、更に追い討ちをかけるように母をチフスで失い、4年生の時に退学してしまう。
だが、21歳の時に内村鑑三の『後世への最大遺物』を読んで、自分の人生を見つめなおした天野は獨協の5年生として復学して翌年には首席で卒業した。当時の獨協の校長であった大村仁太郎に憧れて教育者へと志望を転向して第一高等学校に入学、内村から直接教えを受け、また九鬼周造岩下壮一とは親友になった。その後京都帝国大学文科大学・同大学院に進学して桑木厳翼らの下でカント哲学を専攻した。在学中にカントの『プロレゴーメナ』(『哲学序説』)の日本語訳に取り組み、東亜堂後に岩波書店から刊行された。
1913年、『カント学者としてのフィヒテ』を発表、同年には西田幾多郎の推挙で智山派勧学院大学林講師となり、翌年には第七高等学校ドイツ語教師として赴任した。更に西田幾多郎らの推挙を受けて学習院教授、続いて1926年からは桑木厳翼朝永三十郎の推挙によって母校・京都帝国大学助教授を務める。この間1922年から翌年にかけてドイツのハイデルベルク大学に留学して哲学研究に打ち込み、1930年にはイマヌエル・カントの代表作『純粋理性批判』を初めて日本語訳する事に成功した。 1931年 6月京都帝大より文学博士号をえた。論文は「純粋理性批判」ノ形而上学的研究。 1931年、京都帝国大学文学部教授となった天野であったが、1937年に出した『道徳の感覚』が台頭する軍部軍国主義に対する批判が含まれていたことから、軍部や右翼マスコミが天野を糾弾、自主絶版という事で不問に付されたものの、その後も『学生に与ふる書』(1939年)を著すなど、時流に流される世の中に警鐘を発し続けた。
1944年、京都帝国大学を定年退職した天野は甲南高校(現在の甲南大学)校長在任中に終戦を迎えた。翌年天野は母校・第一高等学校校長に就任、その後は安部磯雄の急死にともなって日本学生野球協会会長・日本育英会会長を歴任、1950年には吉田茂に乞われて2年間文部大臣を務めた。ただし、後述のように、当時は再軍備と逆コースを巡って揺れていた時期と重なり、戦前と同様に時流に流されない教育という自身の信念に基づく教育行政を推進しようとした事が、予想もしない政治問題を惹き起こし、結果的には天野にとっては不本意な時期となる。
大臣退任直後、天野は青春時代を過ごした母校・獨逸学協会学校の後身である獨協学園が戦後日本の国家スタイルがドイツ型からアメリカ型に移行するに伴って衰微している事を知ると、母校再建のために校長就任要請を受諾して、自らが信条とする「学問を通じての人間形成」の精神に則った「獨協再建」に尽くす事になる。やがて、遅ればせながら獨協にも大学を創設すべきだと言う声に支えられて1964年に獨協大学を創立して初代学長に就任、続いて国立教育会館の初代館長に就任するのである。
だが、戦後の日本は「オールド・リベラリスト」の天野にとっては意に沿うことばかりではなかった[2]。一高校長時代には大学制度改革に際して「東京帝国大学(東京大学)を一般の大学と同じにしてしまった場合には、東大を頂点とした大学の格付けが生まれて受験競争が発生してしまう」として学部を置かない大学院大学にする事を提案したものの退けられ[3]、文部大臣時代には戦後の人心の荒廃と受験競争の激化を憂慮して1953年に『国民実践要領』を作成[4]して道徳教育の必要性を唱えたところ、日本社会党などの野党日教組から「反動的な修身教育の復活だ」と糾弾された[5]。獨協大学創立にはこうした時流に対する天野の抵抗の意味もあったとされている。だが、やがて学生運動の嵐が獨協大学にも及ぶようになると、学生達から天野の方針を批判する声が高まってきた。これを受けて1969年、天野は学長退任に追い込まれた。
その後も獨協学園の学園長として学校運営に関わる一方で、1973年には教育面で勲一等旭日大綬章を、学生野球の面で野球殿堂(特別表彰)が贈られた。1980年に96歳で死去した時には従二位と銀杯一組が贈られている。
墓は尊敬する大村仁太郎の眠る雑司ヶ谷霊園と故郷の天野家の墓に分骨されて、後に妻のタマ(1990年に102歳で死去)も同じようにして葬られた。

著書[編集]

  • 『カント純粋理性批判 純粋理性批判の形而上学的性格』岩波書店「大思想文庫」 1935、復刊1985
    • 『「純粋理性批判』について』講談社学術文庫 1980
  • 『道理の感覚』岩波書店 1937 のち角川文庫
  • 『学生に与ふる書』岩波新書 1939
  • 『道理への意志』岩波書店 1940 のち角川文庫
  • 『私の人生観』岩波書店 1941
  • 『生きゆく道』細川書店「細川新書」 1948 のち角川文庫
  • 『若き女性のために』要書房 1948 のち現代教養文庫
  • 『如何に生くべきか』雲井書店 1949
  • 『人間の哀しみ』弘文堂アテネ文庫 1949
  • 天野貞祐著作集』全5巻 細川書店 1949-1951
  • 『教育試論』岩波書店 1949
  • 『今日に生きる倫理』要書房「要選書」 1950
  • 『真実を求めて』雲井書店「雲井新書」 1950
  • 『スポーツに学ぶ』細川書店 1951
  • 『学生論』河出書房 1952
  • 『教育論』河出書房 1952
  • 『人生論』河出書房 1952
  • 『日日の生活』中央公論社 1952
  • 『私のスポーツ観』神田順治編 河出市民文庫 1952
  • 『国民実践要領』酣燈社 1953
  • 『随想録』河出書房 1953
  • 『忘れえぬ人々 自伝的回想』河出書房 1953
  • 『わたしの生涯から』青林書院 1953/新版・日本図書センター〈人間の記録〉 2004
  • 『今日に生きる女性の道』要書房「要選書」 1954
  • 『日日の倫理 わたしの人生案内』酣燈社 1954
  • 『人生読本』要書房 1955
  • 『高校生のために』東西文明社 1957
  • 『新時代に思う』東京創元社 1958
  • 『現代知性全集3 天野貞祐集』日本書房 1958
    • 復刻 『日本人の知性11 天野貞祐』学術出版会 2010
  • 『私たちはどう生きるか 4 天野貞祐集』ポプラ社 1958
  • 天野貞祐著作集』全5巻 塙書房 1960
  • 『医家と教養』金原出版 1960
  • 『高校生のために』塙書房 1960
  • 『現代人生論全集 1 天野貞祐集』雪華社 1966
    • 復刻 『私の人生論 1 天野貞祐』日本ブックエース 2010
  • 『カント哲学の精神』学芸書房 1968
  • 天野貞祐全集』全9巻 栗田出版会 1970-1972、復刻版・日本図書センター 1999
  • 『教育五十年』南窓社 1974
  • 『わが人生』自由学園出版局 1980

共編著[編集]

  • 『大学生活』(編)光文社 1949
  • 『君の情熱と僕の真実 心の対話』武者小路実篤共著 日本ソノサービスセンター 1968

翻訳[編集]

  • カント『哲学序説 プロレゴメナ』 桑木厳翼共訳 東亜堂 1914、のち旧岩波文庫「プロレゴーメナ」
  • カント『純粋理性批判』岩波書店 1922-1936 のち旧岩波文庫、講談社学術文庫 全4巻

補注[編集]

  1. ^ 武蔵野市名誉市民
  2. ^ これは、獨協学園に対しても言えることで、戦後の1947年に民主化政策に則して「独立協和」を略したものとする「独協」に校名表記を改めたが、6年後に保守的なOBらの反発で元に戻される事になった。この時、再改称に反対した少数派の中に校長の天野がいた。天野は古い戦前の日本には戻りえないこと、国家との過度のつながりが学校そのものの経営危機を招いた原因であることから、その再出発の証として「独協」の名称に拘っていたのである。そのため、再改称後も天野は「獨協」という字は用いず、終生「独協」と表記した。
  3. ^ しかも、東京大学側は一高の統合を画策し、天野の抵抗にも関わらず、1950年に統合されることとなる。
  4. ^ ただし、実際に作成したのは高坂正顕西谷啓治鈴木成高であり、天野はこれをまとめたに過ぎない。3名はいずれも西田幾多郎の系統をひく京都学派の中心的存在であったが、作成当時は公職追放中であったために極秘に執筆された事情があり、それが公表された場合の反響を考慮して、天野の単独著作の体裁を取ったとされている。
  5. ^ 天野は戦前の国家のみを重んじて個人の尊厳を踏みにじった軍国主義的な愛国心は強く否定したが、同時に戦後の個人のみを重んじて国家を省みない愛国心否定論に対しても強く反発した。天野は国家を自己存在の母胎と自覚して、自己の使命・理想に邁進させるのが愛国心の本来の役目であるとして、その代表的愛国者として内村鑑三・夏目漱石・西田幾多郎・福澤諭吉などを挙げている。なお、1950年には公立学校での日の丸君が代国旗国歌として掲揚及び斉唱を最初に命じた天野通達を出している。

参考文献[編集]

関連項目[編集]

外部リンク[編集]

新渡戸稲造及び内村鑑三の門下生 - Wikipedia

新渡戸稲造及び内村鑑三の門下生 - Wikipedia

新渡戸稲造及び内村鑑三の門下生

新渡戸稲造及び内村鑑三の門下生(にとべいなぞう および うちむらかんぞう の もんかせい)は、新渡戸稲造及び内村鑑三の門下生、及び両名の影響を受けた同時代の著名な人物の一覧を指す。
武田清子は同じ門下生と言いながら、玉と石との混じり具合を観察して「弟子を以って師匠を計れぬ者の集まり」と断じている。(出典:『植村正久―その思想史的考察』教文館 2001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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トーマス・カーライル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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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路愛山内村鑑三新渡戸稲造およびその門下生たち矢内原忠雄畔上賢造等に多大な影響を与えた。例えば内村鑑三は「後世への最大遺物」において、「勇ましい高尚なる生涯」が「後世への最大遺物」になる例として、カーライルがハリエット・テイラー英語版)(友人ジョン・スチュアート・ミルの晩年の内妻)により誤って燃やされてしまった「フランス革命史」の膨大な完成原稿を書き直したエピソードを挙げ、「私はカーライルという人については全体非常に尊敬を表しております」としている。

作家夏目漱石ロンドン留学時に記念館を訪れ、帰国後に紀行文「カーライル博物館」を書いている。初期作品「吾輩は猫である」に、登場人物がカーライルと同じ「胃弱」であることを自慢して友人にからかわれる描写がある。

なおボルヘスが再評価している。訳文は『序文つき序文集』(国書刊行会、2001年)に所収。

[김삼웅의 인물열전] '격동기의 경세가' 손병희 평전 :: [87회] 정보기관 사주, 음해 서적 발간 돼

[김삼웅의 인물열전] '격동기의 경세가' 손병희 평전 :: [87회] 정보기관 사주, 음해 서적 발간 돼



2013/02/20 08:00 김삼웅
함석헌이 전두환 정권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을 때 주변의 한 켠에서는 음습한 음모가 진행되고 있었다. 독재시대 공권력으로 처리하기 어려운 상대에게 사적 폭력을 자행하는 것은 독재자들이 즐기는 수법이었다. ‘사적 폭력’에는 암살, 테러, 비리조작, 스켄들 날조 또는 과장 등이 동원되었다. 

함석헌에게는 아무리 뒤져봐도 엮을 건덕지가 없었다. 그렇다고 돈이나 권력을 탐하지 않아서 재물이나 감투로 유혹할 수도 없고, 재산이 없어서 이를 강탈한 방법도, 잡지 발행 과정을 정보기관이 훤히 꿰고 있어서 세무조사를 해봐야 나올 것이 없었다. 해서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히는 방법 뿐이었다. 함석헌에게는 마침 그런 ‘헛점’이 있었다.

함석헌의 외조카라는 조순명이 1982년 7월 합동 출판사에서 사생활 문제 등을 담은 <거짓 예언자>라는 책을 발간했다. 이 책에는 <운명의 여인>, <나이롱 단식>, <사탄아 물러가라> 등 저주 섞인 항목이 들어 있었다. 그는 1965년부터 함석헌에게 “거짓말쟁이”, “색마”, “후안무치” 등 극렬한 용어로 비난해왔다고 한다. 조순명은 이후 1986년에 이 책의 증보판을 펴냈다. 그리고 1992년 <함석헌과 한국 지성들 上下>를 홍익재라는 출판사에서 간행하였다. 

1986년 증보판을 낼 때에는 초판 때보다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밝히고 책 제목도 <왠말인가 함석헌>으로 바꾸어서 간행했다. 조순명은 “그에게 다시 질문을 던졌건만, 두번째 역시 그는 아무런 응답도 하지 못하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주석 2)고 서문에서 썼다. 

1982년 <거짓 예언자>가 나왔을 때 함석헌의 주위에서는 이를 전두환 정권 정보기관의 소행으로 치부했다. 그리고 이심전심으로 이 책에 대해 외면하였다. 독자들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의 ‘외도’와 관련한 소문은 주변에서 끊임없이 회자되었고, 본인도 공개석상에서 이를 시인하면서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거짓 예언자>들의 내용과는 다른 방향이었다. 김용준 교수의 지적이다.

나는 지난 번에 함 선생님이 “아내 아닌 다른 여인을 범하였다”는 표현을 쓰기는 하였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절대적인 차원에서 하는 소리다. 풍문에 여러 말들이 떠돌았지만 확실치도 않다. 이런 풍문을 여기에 옮겨 놓을 수도 없지만, 다만 씨알농장에서 자진해서 선생님의 취사와 살림살이를 돕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을 나온 오모 여인과의 사건인 것만은 확실하다. 

내가 알기로는 그런 일이 있은 다음 이 여인이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자기의 은사인 김석목 교수에게 고백한 것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주석 3)

함석헌이 1957년 천안에서 씨알농장을 경영할 때 오모 여인과 관계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일로 그는 참회를 거듭했다. 당시 44일 간의 긴 단식 기도에는 이에 대한 반성도 포함되었다. 1960년 9월(30일) 당시 독일에서 공부 중이던 안병무에게 보낸 함석헌의 편지에도 ‘참회’의 내용이 엿보인다.

내가 분명 죄 되는 일을 한 게 있습니다. 벌써 전부터 있던 일이지만 그것이 금년 1월에 와서 가까운 친구들에게 알려져 문제가 되었습니다. 단식도 그래 했고 글과 말을 그만두고 모임을 중지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지금 할 수 없고, 한 마디로만 들어주십시오. 여성문제에서 잘못한 것입니다. 놀라고 슬퍼하실 줄 압니다마는 사실입니다. 친구들 다 소식 끊어졌고 류 선생(유영모-필자)도 매우 섭섭하게 여기시는 중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우선 형이 나를 친구로 계속해 대해주겠느냐 하는 데 있습니다. 나로서는 그럴 염치 없고 형의 넓은 생각에 달렸습니다.(…) 하지만 내 혼이 상처를 입었습니다. 나를 버리지 않거든 또 소식 주십시오. 아아! (주석 4)

함석헌의 이런 ‘외도’를 빌미로 조순명은 줄기차게 ‘외삼촌’을 비방하고 다녔다. 
<거짓 예언자>가 별 효과를 보지 못하면서 <웬말인가 함석헌>에 이어 <함석헌과 한국 지성들>을 두 권으로 묶어 펴냈다. 이를 두고 함석헌과 오랜 교분을 가졌던 김용준은 ‘정보기관의 후원’이라 지적한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할 수 없지만 함 선생님에게는 조카뻘 되는 조순명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정보기관의 후원까지 받아가면서 그는 당시 민주화운동의 선봉에서 주야장천 사자후를 토하고 있는 함석헌을 마치 희대의 색한이나 되는 듯 비난하는 <거짓 예언자>라는 책을 출판하여 화제를 모은 일이 있다. 

이 책을 낸 출판사는 일확천금을 노려 초판을 5만부나 찍었다. 그러나 당시 시민운동으로 불매운동이 벌어져 이 책은 서점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와 같은 사실을 말씀하시면서 불매운동을 일으킨 젊은이들에게 고마움과 흥분을 감추지 못하시던 함 선생님의 모습을 나는 아직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주석 5)

한국현대사에는 독재자가 적대시하는 인물들에 관한 각종 위서(僞書)가 끊이지 않았다.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의 <시역의 고민>, 김대중을 음해한 함윤식의 <동교동 25시>, 최근 김근태를 고문한 이근안의 책, 그리고 <거짓예언자 함석헌>이 대표적이다. 

이와는 별개로 함석헌의 도덕적 일탈행위는 그것이 실수이든 아니든 비판의 대상이다. 도덕성의 상징인 재야 지도자의 위치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일생일대의 오점이고 실수였다. 그는 80회 생신 자리를 비롯 몇 차례 공개석상에서 참회하는 발언을 하였다. 


주석
2> 조순명, <함석헌과 한국지성들 上>, 홍익재, 1997. 
3> 김용준, 앞의 책, 126~127쪽.
4> 앞의 책, 127쪽, 재인용. 
5> 앞의 책, 13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