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o Jung G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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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바로 나입니다. - 생명에 대한 각성과 생태적 영성
유정길 (불교환경연대 녹색불교연구소소장)
영국 축구팀인 토트넘 소속 손흥민선수가 번리전에서 많은 상대선수들의 테클속에도 70m를 단독으로 달려 결국 원더골을 넣는 장면은 한국국민 뿐아니라 그를 좋아하는 세계 사람들이 열광했을 것이며 그 순간 손흥민에 감정이입을 하여 ‘손흥민을 나’라고 생각했던 순간일 것이다. 모든 스포츠 경기는 어느 한쪽에 ‘나’를 투사하여 ‘그편, 그가 곧 나’라고 생각하여 온 힘을 다해 응원한다. TV를 볼때도 주인공에 빙의하여 ‘그가 곧 나’라고 생각한다. 주인공을 괴롭히는 사람을 보면 욕하고 미워하며, 그래서 결국 주인공이 역경을 헤치고 해피엔딩이 되면 보는 나도 행복해 한다.
부모님들은 사랑으로 아들과 딸을 키우며 ‘그들을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아프면 자신도 아프고, 그들이 잘되면 자신도 덩달아 행복해 한다. 이뿐아니다. ‘동물의 왕국’등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면 사자에게 잡혀먹는 사슴이 처참한 모습, 맹수에 잡혀 잔인하게 죽어가는 작은 생명들을 보면서 마치 자신인양 그 장면을 보면서 진저리를 친다. 모두 ‘저것이 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일종의 빙의(憑依)되었다고 할까?
사람이나 동물등, 어떤 존재에 나를 투사하겨 그들이 되는 경험, 그래서 그 고통과 느낌에 동참하고 체험하는 감각. 타인이 고통과 아픔에 함께하는 감수성이다. 이런 감수성이 유달리 예민하고 많은 사람들, 그래서 더 많은 생명들의 느낌, 아픔, 기쁨에 인입되어 함께할 수 있는 섬세하고 감각이 있는 사람을 우리는 자비심과 사랑의 마음이 많은 사람이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사랑과 자비는 상대에게 들어가 그가 곧 내가 되는 감수성이다. 그렇게 내가 확장되는 것이다.
(피부속에 갖혀있는 나, 우주적 자아)
나무를 흙에서 뽑아 버리면 나무는 곧 죽는다. 나무와 흙이 연결되어 있어 그 연결이 끊어져 죽게 된다. 물고기를 물밖에 꺼내면 물고기는 곧 죽는다. 물과 연결이 끊어진 물고기는 죽는다. 사람을 공기와 차단시키면 곧 죽는다. 모든 생명은 이렇게 연결되어야 살 수 있다. 연결이 끊어지면 곧 죽음인 것이다.
좀 깊이 들어가보자. 내가 홀로 존재할수 있을까? 당연히 없다. 그러나 우리는 ‘피부로 덮힌 나만을 나’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실제 나는 타인(당신)과 연결되어 있다. 그들과 연결이 끊어지면 죽는다. 그들이 만들어주는 물건들이 없으면 내가 살수 없다. ‘당신은 곧 확장된 나’인 것이다. 그런데 더 깊이 생각해보니 나무가 없으면, 바위가 없으면 풀과 벌레, 새들과 구름과 연결이 끊어지면 내가 살아갈수 없다. 그렇다면 나무와 바위와 풀과 벌레, 구름 등 모두 ‘확장된 나’라고 할수 있지 않을까? 이들 모두 연결되어 관계맺으면서 서로가 서로 의존하며 서로를 살려나가는 존재인 것이다. 이들 모두 ‘나’이다.
연결된 관계를 깨닫고 난 뒤에 새롭게 열리는 세계는, 나만 잘되면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대가 잘되는 것, 자연과 비인간 생명들이 풍요로워지는 것이 인간이 풍요로워 지는 것이다. 그래서 나를 위한 이기적 노력이 아니라, 상대와 자연이 잘되도록, 행복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곧 내가 잘되고 행복하게 되는 일이다. 이제껏 사랑와 자비의 대상 폭을 자신과 가족정도까지로 생각하지만 이제는 애정을 투사하는 가족(친족)을 많은 이웃과 생명, 자연에게 확대하는 일, 이것이 생태적 각성이자 영성이다.
- 나와 나의 이익만 생각하는 것을 ‘개별적 자아’라고 한다면,
- 당신이 나라고 생각하는 확장된 자아를 ‘관계적 자아’라고 할수 있다.
- 또 자연과 비인간생명으로 까지 확장된 나라고 생각하는 것을 ‘생태적 자아’라고 할수 있으므로
- 상대를 위해, 뭇 자연과 생명의 행복을 위해 내가 노력하고 돕는 것을 ‘보살적 자아’라고 할수 있다.
(불평등을 통해 평등이 완성된다.)
우리는 그동안 ‘아마존의 밀림이 파괴되든 말든 나와 무슨 상관이야’라고 말하곤 했다. 가난한 사람들이 고통을 받건 말건 ‘나와 관계없다’고 외면하기도 했다. 상관(相關)없다는 말은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뜻이다. 근대사회는 고립된 개체를 근본단위로 생각해 왔다. 그래서 각각의 개인들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중요한 가치로 생각해왔다. 독립적일수록 성공적 삶이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실은 인간은 관계적 존재이다. 의존적인 존재이다. 홀로 우뚝선 독립적 존재가 되기 위해 경쟁과 대립을 일상화하고 수많은 인간을 밟고 위로 올라가는 과정에서 상대방은 경쟁의 대상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대립과 경쟁 투쟁과 대립을 기반으로한 사회를 만들어왔고 결국 생물멸종과 기후위기를 초래했다. 이러한 어리석음이 <인간의 성공이 사실은 인간의 실패가 된>것이다. 조금더 나아가보자.
근대사회는 이들 개인들 간의 평등이 중요하다. 모두 1/N의 동등한 권리와 책임이 강조되어온 사회이다. 그러나 관계적 존재로서 생태적 관점에서는 좀 다르다. ‘평등’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그 ‘평등’을 넘어서야 진정한 평등이 완성된다고 생각한다. 평등을 궁극으로 생각하며 50:50에 집착하는 수많은 미묘한 현실적 불평등은 끊임없는 분쟁과 갈등의 원인이 된다, 그러나 생태적 관점에서 보면 상대가 20이나 30밖에 못하더라도 나는 그를 위해 70와 80을 하며 돌보며 돕고 배려하는 것이다. 나아가 내가 70, 80을 했다는 계산조차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상대도 마찬가지 현상이 발생된다. 서로 더 잘해주려고 노력하는 관계, 더 해주지 못해 미안한 관계, 그제서야 평등, 평화가 완성된다. <돌봄적 불평등>이라고 할까? 그래서 평등이 아니라 공경이고, 그래서 동학이나 불교에서 <모심>이라는 말을 그토록 강조하는 이유이다. <평등>을 포월하여 <모심>으로 가는 것이다.
(생태적 깨달음과 생태적 영성 : 덕분에 사는 감사의 각성)
영성(靈性, spirituality)이란 말은 ‘장로, 전도, 천주, 예배, 천당“이라는 말처럼 본래 불교용어였지만 기독교(개신교, 천주교)에서 주로 사용하는 용어가 되었다.
불교는 대체로 ’불성(佛性), 자성(自性), 여래장(如來藏)‘이라는 뜻이었고
그 뜻이 더 분명하기 때문에 영성이라는 용어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국어사전에 영성은 ‘사람의 신령한 품성이나 성질’이라고 설명되어있다.
아마도 ‘초월적(신적) 존재에 대한 의식’,‘초월적 사고’, ‘초월적인 가치 또는 보이는 현상, 그 너머의 궁극적 가치를 추구하며 신령한 품성과 경지를 체험하는 것’이란 의미로 생각된다.
불교는 신적 존재나 초월적 존재를 크게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궁극적 깨달음을 추구하는 경지와 그런 마음의 선정과 지혜를 닦는 것” 정도로 정리하고자 한다.
그래서 생태적 깨달음을 생태적 영성이라고 한다면,
- 관계맺고 연결되어 있는 관계, 상대의 행복이 나의 행복, 자연과 생명의 풍요가 곧 인간 자신의 풍요라는 생각하는 것이며,
- 모든 천지자연과 우주적 존재임을 느끼는 것이다.
- 나아가 인간이나 동물, 식물만이 생명이 아니다. 생명은 구분된 개체로 바라보면 안된다.
- 서로 관계 맺은 거대한 시스템 전제가 생명이기 때문이다.
기후환경문제는 이산화탄소를 줄여 온난화 위기를 극복하자는 것이 궁극이 아니다.
자연과 세계, 인간사회에 대한 가르고 나누던 전도된 미망(迷妄)을 깨우쳐
서로 dusruff된 사회적 개벽적 질서로의 전적 사회를 만들라는 메시지이다.
그러면 이러한 생태적 영성을 고양시키는 방법은 무엇일까
“감사”이다.
당신 ‘덕분에’, 천지자연 ‘덕분에’, 수많은 생명과 천지자연 ‘덕분에’ 살아가는 것을
확연히 깨닫고 감사하면서
그 감수성을 고도화시키고, 그 은혜를 갚는 보은의 삶으로 사는 일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