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7/17

종교대화, 이찬수, 그리스도교와 불교를 비교하며 알 수 있는 것들 230717

 

그리스도교와 불교를 비교하며 알 수 있는 것들:

그리스도의 몸보신불의 구조적 유사성을 중심으로

 

 

이찬수

 

 

1. 들어가는 말

 

종교 간 대화/비교의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종교의 외적 표현들을 중심으로 하는 현상학적 비교, 사회 정의를 위한 실천 지향적 대화, (), (), () 처럼 종교들의 근원적 원리와 세계의 차이점이나 공통점을 찾기 위한 철학적 대화 혹은 논리적 비교 등 다양하다. 어떤 방법이든 이들 행위가 외견상 뚜렷한 차별성 속에서 느껴지던, 아직은 모호한 상통성 내지는 유사성이 대립과 갈등으로 아파하고 있는 우리의 삶에 조화와 일치라는 유용한 의미를 가져올 수 있다[1]면 바람직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그리스도인과 불자가 예수와 붓다를 이해하고 신앙해온 과정을 비교하며 이들의 종교적 의미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가령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되게 해주는 근거가 그리스도라면, 불자를 불자되게 해주는 근거는 ()이다. 이때 그리스도인에게 지니는 그리스도의 의미와 불자(특히 대승불교도들)에게 지니는 의 의미는 과연 얼마나 다르고 혹은 얼마나 상통할 것인가. 이와 관련해 초월적 존재인 그리스도와 아미타불 같은 보신불에게서 구체적 을 상상하는 경우를 중심으로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그리스도의 몸보신불(報身佛) 개념이 탄생되고 전개되어 가는 과정을 비교해보면서 그리스도인에게 그리스도와 불자에게 붓다는 서로 비슷한 깊이를 지니고서 비슷한 역할을 해오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보고자 한다. 역사적 예수가 초월적인 그리스도 차원으로 확대되고, 붓다의 영역이 고타마에 제한되지 않고 보신불이라는 초형상적인 세계로 전개되어 나가는 과정을 비교하면서 이 종교들의 대중적 전개 양상의 유사성을 밝히고, 더 나아가 이를 통해 인간 종교 심성의 구조적 유사성을 드러내 볼 것이다.

 

2. 하느님-예수, -붓다

 

그리스도교는 예수로 인해 생겨났다. 물론 역사적 예수는 철저하게 신을 믿고 의지하며 그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자였다. 그는 스스로를 신의 차원까지 높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 사후 제자들은 예수 선포의 확실성을 위해 예수 자신까지 선포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로, 그것도 외아들로 불리게 되었다: 일찍이 아무도 하느님을 보지 못했다. 아버지의 품안에 계시는 외아들 하느님이신 그분이 알려주셨다.(요한 1,18) 이 말의 기본적인 의미인즉, 한 집안의 아들을 보면 그 아버지가 연상되듯이, 보이는 예수가 보이지 않는 신을 쏙 빼 닮았다는 뜻이다. 제자들이 스승 예수를 통해 하느님을 새롭고도 결정적으로 보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그러는 가운데 나의 아버지께서는 내게 모든 것을 넘겨주셨다(마태 11,27) 내지는 나를 본 사람은 이미 아버지를 보았다(요한 14,9)는 전승도 생겨났다.

이와 비슷하게 고타마 싯달타는 깊은 수행과 명상 속에서 인생의 원리,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깨달았고, 그것을 가르치고 실천하며 살았다. 그는 법이 나의 스승(장아함 1 『大本經』)이라 말했고, 그가 최후로 남긴 유언도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으라(自燈明 法燈明)는 것이었다. 내가 열반하더라도 법신은 영원히 멸하지 않는다면서, 자신이 설한 율()과 법()을 그의 사후(死後)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고 가르쳤다.(『대반열반경』) 그는 제자들에게 깨달은 이, 붓다로 불리게 되었다. 물론 붓다 자신은 스스로를 신격화하거나 숭배의 대상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가 가르친 법이 그의 인격을 통해 드러났다고 믿었다. 예수 선포의 확실성을 위해 예수 자신까지 높이기 시작했던 그리스도교 전통에서처럼, 이것은 고타마 붓다에 대한 존중과 숭배로 이어졌다. 법이란 무시이래 주어져 있고 돌아가고 있는 보편적인 진리이지만, 제자들은 그 진리를 붓다가 보여준 진리, 붓다 안에서 드러난 진리로 알아들었다. 그리스도교의 경우와 비슷하게, 이것은 남전(南傳) 니카야에서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보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보는 것이다라는 표현으로 드러나고 있다.

 

3. 예수-그리스도, 색신-법신

 

예수와 고타마 붓다는 분명히 역사 내적 존재이다. 그런데 제자들에게 예수와 고타마 붓다는 모두 그들이 전하고 실천한 하느님의 말씀 혹은 법을 구체적으로 드러내주는 존재로 받아들여졌다. 역사적 예수 및 고타마 붓다가 하느님 말씀의 구체화 및 영원한 법의 구체화로 고양된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거처하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요한 1,14); 법은 세존을 근본으로 하고 세존에 의해 이끌리며 세존에게 의존한다.(남전 『니카야』, 북전 『아함경』) 보편적이고 영원한 하느님의 말씀, 법을 역사적 존재인 예수, 붓다에게서 보는 것이다. 육신(사륵스)이 된 말씀, 붓다에게서 결정적으로 드러난 법의 도식으로 이들을 설명하면서, 점차 예수와 붓다를 각각 예수와 붓다되게 해준 그 선행적 원리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예수의 말씀과 붓다의 깨달음에서 세상을 다시 보게 된 제자들 중 일부는 이들 사후 각각 예수야말로 본래 영원한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신 분이셨는데 낮고 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다가 다시 본래 위치만큼 들어 높여지셨다(필립 2,6-11)는 예수 선재(先在) 신앙을 발생시켰고, 고타마 싯달타가 붓다가 된 것은 금생에 6년 동안 고행해서 얻은 결과였다기보다는 수많은 생애를 거듭하면서 끝없이 수행하고 선행을 쌓은 결과라는 신앙을 낳았다. 그 결과 붓다의 전생 이야기(자타카)도 만들어지게 되었다. 둘 다 존재의 기원을 현재 이전의 자리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 역사적인 예수는 선재하는 하느님 말씀의 육화이듯, 고타마 붓다는 세상 돌아가는 근원적이며 선행적인 이치를 결정적으로 드러내준 구체적 존재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역사적 예수는 본래 하느님의 모습을 한, 하느님과 같은 분이셨는데,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나셨으며, 고타마 붓다는 이미 수도 없이 되풀이된 전생 속에서 무시이래 돌아가고 있는 세상의 이치를 비로소 진작에 깨닫도록 되어 있었던 분이라는 견해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경험적인 차원에서는 예수/붓다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법을 알아들었지만, 논리적으로는 하느님의 말씀/법이 예수/붓다를 예수/붓다되게 해준 근거가 된다는 식으로 풀어나간 셈이다.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교에서 영원한 하느님의 말씀과 그 육화 도식으로 하느님과 예수를 이해하기 시작했다면, 불교에서는 영원한 진리로서의 법신(法身, dharmakāya)과 그 구체화로서의 색신(色身, rūpakāya) 도식[二身說]으로 법과 붓다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4. 붓다의 몸

 

물론 그리스도교에서든 불교에서든 이러한 구분 혹은 몸 개념은 명확하게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불교에서는 더욱 그렇게 보인다. 불교적 몸(kāya)은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첫째가 물리적 혹은 생물학적인 몸이라면, 둘째는 본질 혹은 주요 부분[]이라는 의미에서의 몸이다. 그런데 중생은 흔히 오온(五蘊)의 집합에 지나지 않는 생물학적인 몸에 매인다. 그 몸을 불변하는 실체처럼 여기고 그 욕구에 집착한다. 이것을 신견(身見)이라 한다. 물론 신견은 극복과 타파의 대상이다. 이 몸뚱이가 오온의 집합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몸에 대한 집착이 제거될 때 진여를 보게 되는데, 그 진여를 제대로 본 근원적인 주체가 바로 법신인 것이다. 앞의 표현대로 하면, 세존에 의해 이끌린 법, 즉 붓다에게 결정적으로 드러난 법이 바로 법신인 것이다.

법 자체는 구체적 상상의 범위를 넘어서지만, 역사적 존재인 붓다에 의해 알려진 법에는 상상 가능한 어떤 형식이 있다. 법 자체에 이라는 구체적인 표현을 더한 이유도 어찌되었든 역사적 붓다에 의해 상상 가능한 어떤 것이 말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발생한 법신은 구체적 존재인 고타마 붓다의 깨달음과 그 깨달음에 근거한 구체적 가르침들[]을 가능하게 해주는 근본 요소들의 집합과 같다.[2]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려면, 깨달음 자체가 완벽한 것이어야 하고, 완벽한 깨달음이란 진여에 대한 깨달음이자 동시에 진여에 의한 깨달음을 말한다. 이런 식으로 법을 법되게 해주는 근본 요소들이 고타마 붓다에게서 드러났다고 보았다. 바꾸어 말하면 고타마 붓다는 법을 법되게 해준 근본 요소들을 드러낸 존재이다. 법신을 구체적으로 드러낸 색신인 것이다. 색신과 법신을 총칭하여 불신(佛身)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러한 색신과 법신 도식은 초기부터 확립되어 있던 교리가 아니다. 이신설(二身說)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지만, 원시 불교 단계에서의 이신설과 대승불교 초기경전에서의 이신설의 개념은 서로 다르다. 원시불교에서 이따금씩 등장하는 법신이라는 용어는 어디까지나 역사적인 존재로서의 붓다에 대한 찬탄의 표현일 때가 많았다. 붓다가 가르쳐주고 보여준 법이 바로 그 붓다 안에서 다 드러났으니, 그 분이야말로 순수한 근본 요소들의 총체와 같다는 의미가 원시불교에서의 법신이라는 용어 속에 들어있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어디까지나 구체적 존재인 고타마 붓다의 모습에 대한 기억과 연상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이었다. 그러나 붓다 사후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모습에 대한 기억도 희미해졌다. 그러자 붓다의 육체적 흔적, 즉 유골(śarīra)과 같은 구체적 사물을 숭배하는 탑돌이 신앙인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법신 자체보다는 법신을 알려준 고타마 붓다를 그 법신의 구체화[化身, nirmanakāya]로 알고 숭배하는 것이다. 탑돌이 신앙인들은 붓다의 생물학적인 몸에서 그 몸을 몸 되게 해주는 근원적이고 이상적인, 즉 완전한 요소들을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붓다의 유골을 숭배했다. 그렇지만 붓다의 형상을 만들지는 않았었다. 붓다가 성취한 열반은 구체적인 형상을 초월한 곳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사라져 버린 자에게는 더 이상 형태가 없다[3]고 하듯이, 붓다의 형상을 만들기보다는 다만 탑돌이 행위를 통해 붓다의 몸의 흔적을 기억하면서 그의 깨달음의 능력 속으로 들어가고자 했을 뿐이다.

그러다가 초기 대승경전인 『반야경』에서는 역사적 존재인 석가모니 숭배나 그 유골을 숭배하는 탑돌이 신앙인들에 대한 비판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반야경』에서는 역사적 존재가 아닌, 반야바라밀이 참된 부처의 몸[佛身]이라고 주장한다. 역사적 존재로서의 고타마 붓다보다는, 경험적으로는 붓다에게서 비롯되었지만, 이론상으로는 그 붓다를 붓다되게 해준, 이미 선재하는 진리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붓다 그 본래 모습은 역사적 존재 혹은 그 생물학적인 몸이 아니라, 붓다의 지혜(반야)라는 것이다.[4] 『유마경』에서도 이렇게 말한다: 벗이여, 여래의 []신이란 법신인 것이며, ()에서 생긴다···” 이렇게 초기 대승경전에서는 붓다의 지혜라는 의미에서 법신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팔천송반야경』에는 색신과 법신을 구분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여래는 그의 색신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다. 법신은 여래로서, 법의 참 본성은 오지도 가지도 않는다.[5] 이런 표현을 통해 육신을 지녔던 석존에 매이지 말고 그의 지혜, 그가 실현한 무아의 진리를 따라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다. 『화엄경』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붓다의 아들들이여! 여래는 하나의 특별한 법이 아니고 특수한 형태의 움직임도 아니다. 법신은 특수한 장소에 머물지 않으며 그 구제 활동도 특정한 사람들에게 제한되지 않는다. 도리어 법신은 그 자체로 무한한 법, 끝없는 움직임, 무수한 몸 속에 존재하며 일체 중생의 구제를 위해 두루 일한다.[6] 역사적 존재로서의 고타마 붓다에 대한 강조로부터 역사적 구체성을 초월한 보편적 진리로서의 법신에 대한 강조로 무게 중심이 옮겨가고 있는 것이다. 불신()身의 보편성에 대한 강조인 것이다. 물론 몸 숭배에 대한 이러한 비판적 언설들이 등장한다는 것은 당시 이미 붓다의 유골과 같은 육체적 흔적에 집착하는 불탑 신앙자들이 상당히 많았다는 사실에 대한 반증이다.[7]

 

5. 그리스도의 몸

 

이러한 불신론의 전개는 성서가 예수의 부활과 관련하여 초기에는 예수의 육체적 부활을 강조하다가 점차 초형상적 그리스도로 전이했던 것과 유사하다. 원시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한편에서 예수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 또는 교회와 함께 하는 예수를 느끼면서 그것을 예수에 대한 신적 선재성 개념으로 발전시켰고, 다른 한편에서는 예수를 보지 못한 제자단에게 예수의 확실성을 전하는 방법의 일환으로 예수가 육체적으로 부활했다는 신앙을 발생시키기도 했다. 가령 서기 70년경 기록된 『루가복음』에서는 예수를 보지 못한 후대 교회 구성원들이 예수의 육체성에 집착하던 것을 반영하여 예수가 육체적으로 부활했다고 전한다: 왜 당황하며 어찌하여 여러분의 마음 속에 의심을 품습니까? 내 손과 발을 보시오. 바로 나입니다. 나를 만지고 살펴보시오.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보다시피 나에게는 있습니다.(루가 24,39) 부활한 예수가 자신을 유령이라고 생각하는 제자들을 향해 던졌다는 이런 식의 표현은 실상 예수의 몸에 매이던 초기 신자들의 입장을 반영한다.

그러나 육체는 어디까지나 제한적 존재이다. 이러한 반성 속에서 예수의 육체적 제한성보다는 영적인 보편성이 점점 더 부각되기에 이른다. 가령 서기 100년경 기록된 『요한복음』에서는 진정한 부활은 육체적 차원을 넘어선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가령 예수가 부활했다는 소문을 들은 제자 토마가 예수의 몸을 만져보기 전에는 믿지 못하겠다고 하자 그 뒤 홀연히 나타난 예수가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나를 보고서야 믿었습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이들이 복됩니다.(요한 20,29). 예수가 육체적으로 부활했다고 믿는 교회 구성원들의 분위기를 반영하여 예수가 자신의 몸을 드러내 보여준 것처럼 묘사되어 있지만, 정말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 육체성/구체성을 넘어서는 곳에서 진리의 모습이 보인다는 사실이다.[8] 진리는 역사적 구체성 안에 갇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대중은 예수의 육체성에 집착했다면, 경전 기록자와 같은 엘리트층은 육체적 제한성을 넘어서는 곳에서 진리의 모습을 보고자 했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예수의 부활과 관련하여 전개되어간 성서의 역사도 전체적으로는 예수의 몸에 대한 집착을 벗어나는 쪽으로 전개된다.[9] 

 

 

6. 영적인 몸

 

중요한 것은 나중에 상상되고 신봉되는 예수의 몸은 역사적 예수의 몸과는 다른 차원에 있다는 것이다. 한 예로 역사적 예수 사후(死後)에 그분의 몸을 더 이상 보지 못하게 된 제자단/교회에서는 역사적 예수를 본래 하느님의 모습을 하고 계셨다는 이상적인 분, 즉 초월적 그리스도 차원에서 생각하게 되었다. 초월적 그리스도는 예수에 대한 모습이되, 죽은 예수가 제자단에게 계속 힘을 불어넣고 있으며, 그를 따르던 사람들과 여전히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려는 의도로 재해석된, 예수의 초형상화이다. 이것은 부활의 관념과 연결된다.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에 의하면, 예수의 부활에 대한 표현들은 예수가 그 추종자들 중에 계속 현존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회화적 기술(wordpicture)이다.[10] 이미 죽었으나 추종자들에게 여전히 현존하는 예수, 그가 부활의 그리스도인 것이다.

물론 이 초월적 그리스도도 예수의 형상이라는 점에서 그에게도 이 있다. 그렇지만, 바울로에 따르면, 그것은 몸이되 영적인 몸(소마 프뉴마티콘, 1고린 15,44)이다. 땅에 묻혀서 썩어 없어질 몸과 달리, 언젠가 다시 일어날 몸이다(1고린 15). 그 몸은 신에 의해 들여 높여질 현재 몸의 영적인 차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영적인 몸은 생물학적인 몸과 전적으로 분리되는 것은 아니다. 그 몸을 지니고 산 결과이기도 하다. 생물학적인 몸은 썩어 없어질 것이지만, 바울로에 따르면, 그 썩을 것이 뿌려져서 영적인 몸으로 재탄생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재탄생의 근거는 하느님이다. 하느님이 썩을 것을 썩지 않을 것으로 변화시켜주신다는 것이다. 바울로는 예수가 이미 그런 영적인 몸을 입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런 점에서 부활의 첫 열매 - 유일한 열매가 아니라 - 로 믿었다. 사람들도 예수처럼 영적인 몸을 입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흙으로 빚어진 그분의 형상을 지녔듯이, 장차는 천상에 속한 그분의 형상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1고린 15,49) 천상에 속한 그분의 형상, 즉 그리스도의 형상이 말하자면 영적인 몸이다. 이렇게 초기 교회는 여전히 예수에 의해 능력을 부여받고 있는 자신들의 경험을 영적이고 초월적 그리스도로서 표현했다.

 

7. 보신불

 

마찬가지로 역사적 붓다 사후 그가 가르친 법 자체가 인격화한다. 그러면서 고타마 붓다가 영원한 법의 구현자이시듯, 그렇게 초월적 형상을 지닌 붓다가 여럿 있었음은 물론 지금도 서방의 깨끗한 땅에 그러한 초형상적 붓다(아미타불, 약사불, 아촉불)가 계시다는 사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 붓다는 중생이 원하는 바에 따라 각기 다른 장소에서 다른 모습으로 스스로를 나투는 분이다. 십력(十力), 사무외(四無畏),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 등과 같은 불과(佛果)의 공덕의 초형상적 구체화이다. 이것 역시 고타마 붓다로 인한 영향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주는 방식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렇게 드러나는 붓다가 인간 신앙의 대상이고 귀의의 대상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불제자들은 이 초형상적 붓다에 귀의한다. 그 초형상적 붓다가 바로 보신(報身, sabhogakāya)으로서의 붓다인 것이다.

보신불이란 사전적인 의미에서 보살이 서원하고 수행한 결과 얻은 초자연적인 몸, ()으로 인해 받은() 불신(佛身)이다. 그런데 그렇게 받은 몸이 정말 불신이려면, 논리적으로 보건대 그것은 로부터 와야 한다. 앞에서의 표현을 빌면, 법신 자체가 자신을 비우고 상대화하여 그 서원과 수행 속으로 들어오지 않고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법신의 하향적 자기 비움과 보살의 상향적 서원과 수행이 만나는 영역이 보신불의 세계이다. 그러기에, 역사적 전개의 양상을 따르자면, 보신불은 다양한 중생의 구원적 요청에 부응하여 생겨난 붓다의 다양화이지만, 논리적으로는 절대적 법신이 스스로를 부정하여 상대적 법신의 세계로 드러낸 결과이다. 그러면서도 이것은 고타마 붓다로 인해 알려지고 가능해진 초월적 붓다의 세계라는 점에서 보신불 신앙은 석가모니불과 그 불을 신앙하는 중생과의 연결성을 설명하는 가운데 발생한 것이다. 열반에 든 석가모니불을 대신해 지금 여기서 자신들에게 직접 은혜를 베풀 붓다로서 요청된 존재인 것이다.

보신불은 역사적 석가모니불에 의해 알려졌으나 그 역사적 제한성을 초월한다. 역사 안에서 역사 너머의 진리가 개시되는 것이다. 역사적 존재인 석가모니를 통해 역사 이전적 석가보살 이야기가(자타카)가 발생되었듯이, 보신불 사상은 중생 구제를 위한 서원을 하고 그를 실현하기 위해 수행하는 보살 사상의 필연적인 결과인 것이다.

보신불은 보살 신앙에서 성립된 대승불교도들의 귀의와 믿음의 대상이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날 불자들이 석가모니 부처님께 귀의(나무석가모니불)한다고 말하지만, 그때 귀의처인 석가모니불은 사실상 보신불과 같은 역할을 한다. 법신불을 알려준 이라는 신앙적 확신 속에서 재조명된 석가모니불, 바꾸어 말하면 보신불의 차원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지만, 그때의 예수는 사실상 초월적 그리스도나 다름없다. 이미 영적인 몸으로 변화되어 있고 들어 높여져 있는 그리스도이기에 그를 통해 하느님께 나아간다고 믿는 믿음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역사적 예수가 처녀 마리아의 몸에서 잉태되었다고 믿는다지만, 사실상 그렇게 태어날 수 있는 존재는 이미 신앙의 대상이 되어버린 초월적 그리스도이고, 고타마 싯달타가 마야 부인의 옆구리에서 고통 없이 태어난 뒤 바로 걸으며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 외쳤다지만, 사실상 그런 신비로운 탄생이 가능한 근거는 이미 신처럼 들어 높여진 보신불의 차원에서 재조명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예수나 붓다나 모두 괴로운 육체 덩어리를 지니고 살았지만, 그리스도나 보신불의 몸은 그러한 근원적 괴로움의 초월자 차원에서 재조명된 몸이라는 점에서 둘 다 마찬가지의 구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나자렛 예수라는 역사적 개체와 고타마 싯달타라고 하는 역사적 개체가 말 그대로 개체에 머물지 않고 그 개체를 개체되게 해준 원천적 실재와 직접 연결되며, 그러한 신앙적 확신 속에서 다시 보인 초역사적 개체들이 그리스도이고 보신불이다.

 

8. 아미타불, 지장보살, 예수

 

대표적인 보신불이 아미타불이다. 아미타불은, 석가보니불의 설법에 따르면, 법장보살이 원을 세우고 수행하여 도달한 붓다이다. 아미타무한한 수명(無量壽, Amitayus) 혹은 무한한 빛(無量光, Amitabha)이라는 뜻으로서, ()의 공덕, 법력, 기쁨의 형상이며, 중생을 구원하는 자비의 몸의 상징이다. 한 마디로 법신의 초형상적 구체화이다.[11] 중생이 구원을 얻기 위해 할 일은 그저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고 외우는[南無阿彌陀佛!] 것으로 족하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이는 누구나 정토에 태어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자비의 서원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보신불의 신앙 구조는 예수야말로 하느님의 외아들이기에 그 아들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나 아들이 다 해준다(요한 14,13-14)고 하는, 하느님의 외아들 혹은 그리스도로서의 예수에 대한 신앙적 구조와 상통한다.[12]

아울러 지옥으로 간 예수지장보살 신앙도 마찬가지의 신앙적 구조를 반영해준다. 가령 가톨릭이나 개신교를 막론하고 지난 천오백 년 동안 전 세계 많은 교회에서 여전히 바쳐지고 있는 대표적인 신앙고백문인 사도신경에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저승(Hell)에 가셨다는 구절이 있다.[13] 예수가 십자가에 죽은 뒤 땅에 묻혔고 저승, 즉 지옥으로 갔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는 갇혀있는 영혼들에게도 가셔서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습니다(1베드 3,19)라고 하는 한 전승이 잘 설명해준다. 여기서 갇혀있는 영혼들이란 노아가 방주를 만들었을 때 하느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셨지만 끝내 순종하지 않던 자들(1베드 3,20), 이른바 구원의 기회를 놓쳐버렸다고 간주되는 이들이다. 대홍수 때 노아의 식구들만 구원받았고, 다른 이들은 저주받아 영원히 죽어버렸다는 일반 상식과는 달리, 예수는 그들을 영원한 죄인으로 두려 하지 않았고, 그들을 지옥에 남겨두고자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진 것이다.(1베드 4,6a)

이러한 예수의 모습은 지옥을 포함하여 육도 중생을 다 구원하기 전까지는 정각(正覺)을 이루지 않겠다고 서원한 지장보살(地藏菩薩)의 모습과 닮아있다. 지옥에 떨어져 고통을 당하는 중생이 단 하나라도 남아있는데 어찌 홀로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겠는가 하는 반성 속에서 스스로 지옥에 남아있기를 자청한 보살이 지장보살이다. 그의 서원은 중생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니, 그 고통을 해결하기 전에는 절대로 열반하지 않겠다는 다짐의 표현이었다. 중생이 아프니 내가 아프다는 유마거사의 자타불이적 마음 자세와 같은 맥락이다. 지장보살은 일체 중생의 구원 이전까지 스스로 붓다가 되기를 유보했기에 여전히 보살로 불리지만, 그러한 보살 정신은 이미 중생의 구원 요청에 부응하여 생겨난 보신불 신앙과 기본 구조에서는 다르지 않다. 모두 역사적 존재에 의해 알려진 초월적 세계가 중생 구원의 요구에 따라 다양하게 전개된 초형상적 구원자들의 모습인 것이다.

 

9. 신앙적 깊이의 상통성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와 보신불이라는, 양쪽 신앙 구조의 핵심에 놓여있는 것들은 그것을 신앙하는 이들에게 비슷한 깊이를 지닌다. 그리스도인에게 그리스도의 의미와 불자들에게 아미타불, 지장보살 등 다양한 구원자들이 지니는 의미는 깊이의 차원에서 대립되기는커녕 상통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 = 아미타불이라거나 그리스도 = 지장보살이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나무아미타불을 염하는 불자들의 신앙과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그리스도인의 신앙, 구원의 가능성을 지옥에까지 열어둔 지옥 정복자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육도를 헤매는 중생이 하나라도 남아있는 한 결단코 성불하지 않겠다고 서원한 지장보살에 대한 불자들의 신앙은 인간 구원 열망의 다양한 표현 형식으로 읽혀질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응당 이러한 구원의 표현 형식은 모순과 우열 차원에서 밝혀질 수 있을 성질의 것이 아니다. 저마다의 신앙 체험의 근거가 되는 각 전통의 깊이, 혹은 그 전통 안에서 발생한 신앙 체험의 깊이에는 서로 물리칠 수 없을 유사성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불교에 관심을 기울이는 신학자 존 캅(John B. Cobb, Jr.)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불교 신자가 아미타에서 배운 것을 연구함으로써 그리스도에 관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고, 불교 신자들도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그리스도로부터 배운 것을 연구함으로써 아미타에 관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14]고 한 말은 당연하며 타당하다. 또 김경재가 산의 등정로는 다르지만 호연지기는 비슷하다라는 말을 통해 “‘구원에 대한 이론과 개념 설명이 설혹 종교마다 다양할지라도 구원받은 사람의 삶의 태도에는 상통하는 점이 있다는 사실을 체계적으로 설명한 바 있는데,[15] 그러한 주장 역시 저마다 궁극적 진리라고 하는 것을 인생의 목표 내지는 근거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체험은 세계관과 그 표현 방식상의 차별성에도 불구하고 서로 물리칠 수 없을 비슷한 깊이를 지닌다는 이 글의 핵심과 상통하는 것으로 보인다.

 

10. 보편성의 추구와 언어적 과장

 

그리스도교에서나 불교에서나 중생의 몸 자체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한, 유한한 것이다. 굳이 사고(四苦)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원치 않는데도 병들어 괴로워하다가 결국 쇄락하고 마는 것이 인간의 몸뚱이다. 사성제 중 첫 번째인 인생의 괴로움에 관한 진리(苦諦) 역시 병들고 늙어가는, 몸의 욕구가 충족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불만족을 포함하는 말이다.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요소인 오온(五蘊) 가운데 첫째인 색온(色蘊) 역시 신체의 물리적인 측면과 연결되어 있다. 몸이 인간 괴로움의 가장 근원적인 부분임을 말해준다. 이것은 역으로 그 몸의 욕구가 충족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괴로움의 극복이 불교적 깨달음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붓다나 예수 같은 이들이 바로 그러한 괴로움을 극복했다고 믿어지면서, 불만족스럽고 제한적인 몸의 차원을 넘어선 존재 차원에서 재조명되었고, 중생의 구체적인 구원 욕구에 부응하는 초월적 존재로 바뀌어 것이다. 예수와 붓다로부터 비롯된 두 종교 모두 구체적인 몸을 초월적인 몸으로 전개시켜온 역사를 가진다.

이러한 역사에는 서로 공통되는 이유와 논리가 뒷받침되어 있다.

첫째는, 전술했듯이, 이것은 중생이 예수예수의 말, 붓다붓다의 법을 일치시키는 데서 비롯되는 일이다. 예수가 말한 하느님의 세계와 붓다가 전한 깨달음의 법이 정말로 하느님이고 법이려면 그렇게 발설한 예수와 붓다가 하느님 및 법과 동일해야 한다. 그 동일시를 위해 구체적 역사를 절대적 세계로까지 초월시켜 구체적 역사의 모든 것을 포용하는 방식이 가장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외적 확장을 통한 보편에의 추구인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내적 본질을 깊이 천착하며 거기서 보편적 원리를 발견해가는 방식도 있다. 전자가 대체로 중생의 길에 가깝고, 후자는 대체로 철학 혹은 신학자의 길에 가깝다.

그런데 이 둘은 외견상 역방향인 듯해도 보편에의 추구라는 점에서는 사실상 만난다. 이 글의 주제와 관련지으면, 몸이 없어야 할 초월적 존재에 몸을 붙이는 행위는 역사와 초월, 부분과 전체를 연결시키고 역사 내 제한적 존재를 초월적 보편자와 동일시함으로써 현실의 대립적 모순을 극복하려는 종교적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는 언어의 문제이다. 모든 언어에는 경계가 있다. 어떤 언어든 그 개념적 제한성 때문에 그 언어를 사용하는 순간 다른 언어와 세계를 가린다. 실선적 경계가 있는 언어를 사용할 때 그 너머의 세계나 특별한 경험을 전달하는 데는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보편적 세계, 특별한 경험을 적극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일종의 과장법을 쓰게 된다. 일상적 경험은 일상적 언어로 어느 정도 전달되지만, 비일상적 경험 내지 일상 너머나 그 근원에까지 연결되는 세계에 대해 말할 때 어느 정도 과장하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이때 발화자가 말하려는 내용을 긍정적으로 전달하려면 일정 부분 과대평가를 하게 되고, 부정적으로 전달하려면 과소평가를 하게 된다. 과대든 과소든 모두 지나침, 과도함, 과장이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과장하는 이유는 발화자의 의도를 전달하기 위해서이다.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과 전달하는 방식에는 발화자의 의도가 들어있다. 청취자도 그 과장법을 수용하면서 발화자의 의도를 이해하게 된다. 본 의도는 그 과장된 표현보다는 작은 세계라는 사실을 인식한다. 하지만 청취자가 다시 발화자가 되면 마찬가지로 과장된 언어를 사용하곤 한다.

이러한 적어도 종교적인 영역에서 과장법은 단순 오류가 아니다. 경험과 의도를 전달하는 방법의 하나이다. 이러한 과장적 전달이 계속되고 중첩되면서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개념과 관점이 형성된다. 그 개념과 관점이 기존의 대상을 재형성 혹은 재구성한다. 그러면서 그 대상은 과장되기 이전의 존재와 불연속적 연속 혹은 연속적 불연속의 관계에 놓이게 된다. 언어학자 소쉬르는 언어 과정을 이렇게 정의한 바 있다.

 

누군가 불어 단어 nu를 발음하면, 피상적인 관찰자는 거기서 하나의 구체적인 언어 대상만을 볼 것이다. 그러나 좀 더 주의 깊게 검토하면, 그 고찰하는 방식에 따라 완전히 다른 서너 가지의 현상을 잇달아 발견하게 될 것이다. , 음으로서, 개념의 표현으로서, 라틴어 nūdum의 해당어로서 등등. 대상이 관점을 선행하기는커녕, 관점이 대상을 만들어내는 것 같은 인상이다. 더구나 문제의 현상을 고찰하는 이 여러 가지 방식 중, 어느 것이 나머지에 비해 선행하거나 우월하다고 예견할 수 있는 근거는 전혀 없다.[16]

 

예수의 선포와 붓다의 깨달음이 대중 안에서 살아나가는 방식에는 언어의 특징과 구조가 한 몫 한다. 예수를 신처럼 받듦으로써 예수의 가르침을 지속해나가고, 석가모니 붓다의 몸에서 정신적인/영적인 몸과 신통력의 몸으로 옮겨감으로써 법을 지속해나간 것은 굳이 해석학의 기본원리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러운 일이고, 오해가 커진 것이라기보다는 중요성이 변화한 것이다.[17] 특히 신의 개념과 영역이 자연스럽게 전승되고 통용되는 곳, 신인동형론(anthropomorphism) 사유가 문화화되어 있는 곳, 현실 너머(초월)에 대한 상상이 익숙한 곳에서의 과장법은 자연스럽고 더 효과적이다. 그리스도교와 불교가 자라났던 그리스, 로마, 인도처럼 다신교적 세계관이 자연스러운 곳일수록 예수가 신적 그리스도로, 고타마 붓다가 초월적 보신불로 전개되어가는 것은 대중의 익숙한 화법이다. 초월의 개념이 다소 약한 중국을 거치며 확립된 선불교 전통에서는 인격적 신앙관을 거부하는 경향이 있지만, 인도를 배경으로 형성된 불교가 기존의 언어를 계속 초월시켜 온 것은 자연스럽다. 그것이 중생의 종교적 심성의 근간이다.

역사 내적 예수와 붓다를 역사 초월적 그리스도와 보신불로 승화시켜온 종교적 심성은 서로 모순이 아니다. 전술했듯이, 경험적으로는 예수/붓다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법을 알아들었지만, 경험의 확실성을 보증하기 위해 하느님의 말씀/법이 예수/붓다를 예수/붓다되게 해주었다는 논리로 뒷받침하는 방식이다. 예수를 바로 그 예수로 만들고, 붓다를 바로 그 붓다로 만든 근원에 대해 후학들이 신(), 일자(一者), (), 절대무(絶對無) 등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며 역사와 보편을 연결시키는 작업을 해오기도 했다. 예수와 붓다의 육체는 사라졌지만, 육체를 가지고 여전히 고통받는 중생의 삶이 유의미하려면, 그 고통을 이미 극복하고 초월의 세계와 합일한 사례가 있어야 한다. 나아가 제한적 육체가 보편적 세계로 전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애당초 있어야 한다. 이 스승들은 그리스도인과 불자에게 그 가능성을 구현한 드문 사례들이다. 그렇게 다양한 방식으로 영향을 끼치고 진리의 세계로 인도한다는 신념이 부분과 전체를 연결키시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역사 내적 구체성과 역사 초월적 보편성이 서로 만난다. 역사 안에 역사 너머의 세계를 담는 행위, 가령 지옥에 있는 중생들까지 구원한다고 여겨지는 이들의 행위에는 궁극적으로 천국과 지옥, 선과 악이라는 이원론이 사라지는 곳에서야 진리가 완성된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예수가 하느님이 되고, 붓다가 법(진리) 자체가 되어야 결국 모든 것과 모든 곳이 하느님 나라, 불국토가 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적 존재의 몸을 그리스도법신불로까지 끝없이 초월시켜 왔지만, 그 초월성의 정점에서 만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 초월적 세계를 상상하도록 한 역사적 세계의 본질이다.

·, 천국·지옥이라는 이원론을 넘어서는 곳과 일체중생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곳은 동일하다. 그런 식으로 불교와 그리스도교는 모든 이원적 사유를 포섭하는 근원적 세계에 대해 말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1디모 2,4)는 성서와 일체중생실유불성(열반경)이라는 불경은 대극합일적이다. 궁극적으로 외부와 내부, 초월과 내재는 서로 만난다. 두 종교 전통의 역사는 인간 종교 심성의 구조적 유사성과 함께 무엇보다 신앙적 깊이의 상통성을 잘 보여주는 구체적 사례들인 것이다.



[1] 이찬수, 『불교와 그리스도교, 깊이에서 만나다: 교토학파와 그리스도교』(다산글방, 2003), 159.

[2] 법신 개념을 구체화했던 세친의 『섭대승론석』에는 몸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데, 첫째가 태어나면서 얻어진 생물학적인 몸이라면, 둘째는 공능(功能), 즉 어떤 작용의 능력으로 얻어진 것이다. 풀어 말해 두 번째 의미의 몸은 무명에 의해 마음의 움직임이 일어나고 그 움직임, 즉 업에 따라 받은 과보라는 의미이다: 미혹(無明)에 의거하여 선업과 악업과 부동업을 일으키고 업으로 말미암아 일곱 가지 인식의 결과를 얻으며 인식의 결과에 의거하여 다시 미혹을 생하는 것을 사람의 공능으로 얻어지는 것이라고 한다.(大正藏 31, 254쪽 下) 그러니까 공능으로 얻어진 몸이란 업을 받아 다른 작용을 일으키도록 전해주는 주체인 셈이다. 그런데 법신은 무명에 의한 업의 연결고리를 끊은 인식주체이다. 이와 관련하여 『섭대승론석』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번뇌를 끊는 도를 일으켜 닦을 때 인식주체의 허구적이고 비실제적인 부분을 떠나 인식주체의 본질적이고 실제적인 부분과 더불어 상응하기 때문에 전의(轉依)라고 이름한다. 이 전의로 말미암아 금강도 뒤에 법신을 증득하는 것이다.(앞의 글, 같은 쪽) 여기서 전의는 유가행파의 핵심 개념이다. 허망한 연기(緣起)의 세계가 진실한 성기(性起)의 세계로 전환하는 것이다. 유가행파에 따르면, 중생은 세상 만사가 다른 것에 의존하여 일어난다(依他起性)는 사실을 모른 채 망상에 사로잡혀 있지만(遍計所執性), 만일 그러한 타자의존적 사물의 실상(依他起性)을을 제대로 깨닫게 되면 사물의 원만 구족한 모습(圓成實性)이 드러나게 된다. 한 마디로 의타기성에서 원성실성으로의 전환이 바로 전의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해서 그러한 전의가 일어날 수 있는가? 여기에는 일체 사물이 여래, 즉 법신을 본질로 하고 있다는 불교적 형이상학이 전제된다. 본래 그러한 존재이므로 비로소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대승기신론』의 표현에 따라 정리하면, 본각(本覺)을 비로소 시각(始覺)하는 것이 전의이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중생이 바로 여래의 성품을 모시고 있는 여래장이기 때문이다.

[3] 『숫타니파타』 제5품 제7; 『숫타니파타』, 석지현 옮김(서울: 민족사, 2001), p.274.

[4] 武內紹晃, 「佛陀觀の變遷」, 『大乘佛敎とは何か』(『講座·大乘佛敎』卷1)(東京: 春秋社, 昭和56),  162참조.

[5] The Perfection of Wisdom In Eight Thousand Lines & Its Verse Summary, tr. by Edward Conze, Bolinas: Four Seasons Foundation, 1973, p.291.

[6] D. T. Suzuki, Outlines of Mahayana Buddhism, New York: Schocken Books, 1963, p.224에서 인용.

[7] 『대반열반경』에 따르면, 고타마 붓다 화장 후 남은 206개의 유골은 고타마 족속과 관계가 깊은 다른 여덟 부족들에게 배분되었고, 이들 부족에서는 이것으로 무덤을 만들어 붓다를 숭배했다. 후에 아쇼카 왕은 이 유골 숭배를 통해 불심을 더욱 확장하기 위해 붓다의 무덤을 다시 열어 유골을 가루고 만들어 팔만사천개의 스투파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 숫자가 정확한지는 알 길이 없으나 모두 고타마 붓다의 몸과 관련된 물건들을 통해 고타마의 가르침을 확인하고자 하는 몸 숭배 신앙의 일환이다.

[8] 존 도미닉 크로산, 『역사적 예수』, 김준우 옮김(서울: 한국기독교연구소, 2000), pp.640-41 참조.

[9] 물론 이것은 경전상에 나타난 종교적 엘리트들의 접근방식일 뿐이다. 실제로 불교와 그리스도교는 대중화의 길을 걸으면서 사실상 다양한 불상, 성상들을 만들어내고 예수와 붓다의 구체적 모습에 집착하는 역사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불교의 경우는 불탑(佛塔, 스투파) 신앙에서 불상(佛像) 신앙으로, 그리스도교도 마찬가지로 성상파괴적 자세에서 성상옹호적 자세로 바뀌어갔다. 특히 불교는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던 쿠샤나 왕조를 거치면서 서기 1세기 말경부터 동전 같은 곳에 붓다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그리기 시작했고, 서기 120-130년경에는 구체적인 불상이 제작되기에 이르렀다.(高田修, 『불상의 탄생』, 이숙희 옮김, 서울: 예경, 1994, pp.202-204; p.112쪽 참조) 이론적으로는 붓다의 몸에 대한 집착을 비판하고 보편적 진리를 향하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역사적이고 구체적 존재에 대한 숭배로 이어졌다는 뜻이다. 가령 서기 200년경 기록된 『금강경』에서는 “‘수보리야 네 뜻이 어떠하뇨? 몸의 형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없겠느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몸의 형상으로는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무릇 있는 바의 형상이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약 모든 형상이 형상이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이런 기록 자체가 사실은 대중의 신앙에서는 몸의 형상, 즉 불상에 대해 집착하고 있음을 반증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대승불교로 이어졌다. 이에 비해 유대교 문화와는 대조적으로, 애당초부터 신을 인간적 형상에 따라 묘사하는 데 익숙한 그리스 문화에 노출되어 있었던 초기 교회 구성원들은 예수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리는 데 익숙했다. 다만 그리스의 아폴로 신과 같은 모습에서 로마 제국의 종교가 된 이후부터는 로마 황제를 닮은 예수의 상이 제작되는 등 시대를 반영하고 있다. 예수의 구체적인 모습에 대한 상상은 대중의 신앙 속에서 더 지속되어온 것이다.

[10] 크로산, 앞의 책, pp.201-202.

[11] 아미타불도 『법화경』에서 말하는 아미타불과 『화엄경』에서 말하는 아미타불은 뉘앙스가 다르다. 법화경의 아미타불은 석가모니 열반 후 석가모니불을 대신해줄 만한 초역사적인 붓다이다. 이미 머나먼 옛날부터 성불해있는 붓다, 아미타유스(無量壽)이다. 시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존재하면서 언제든 어디서든 중생을 교화하고 있는, 초월적 형상의 붓다인 것이다. 그러나 화엄경에 등장하는 아미타불에게는 구체적인 형상의 개념이 약하다.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은 시방에 편만한, 보편적이고 무한한  붓다이다. 그래서 화엄경의 아미타불은 아미타바(無量光)이다. 법화경의 아미타불이 역사적인 붓다 중심적이라면, 화엄경의 아미타불은 법 중심적이다.(武內紹晃, 앞의 글, 163-164頁 참조)

[12] 아미타불과 예수에 대한 구체적인 비교는 이찬수, 『불교와 그리스도교, 깊이에서 만나다: 교토학파와 그리스도교』, 236-263쪽 참조.

[13] 한국 개신교에서는 이 가운데 예수가 저승/지옥에 가셨다(descended into Hell)는 구절을 누구인가 언제인가 슬쩍 빼버렸다. 하지만 천주교회에서는 여전히 그러한 구절을 담아 신앙고백을 한다.

[14] B. , 『과정신학과 불교』, 김상일 옮김(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8), p.177.

[15] 김경재, 『이름없는 하느님』(서울: 심인, 2002), p.235.

[16] 페르디낭 드 소쉬르, 『일반언어학 강의』,최승언 옮김, 민음사, 2021, p.13.

[17] 폴 윌리암스, 『서양학자가 본 대승불교』, 조환기 옮김, 시공사, 2000, p.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