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大 박사 출신 소운 스님
“돈 버는 데 혈안이 된 종교인 통렬한 반성 필요”
129호 2015년 07월 01일
- 소운 스님은 “불교가 우리 사회에서 종교로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고민이 깊다”고 말했다.
“저한텐 공부가 수행인가 봐요. 난해하고 복잡하다고 여겨지는 불교가 우리 사회에서 종교로서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연구를 하고 싶어요.”
파르라니 깎은 머리와 잿빛 승복. 분명 스님이 맞다. 하지만 그의 수행법은 공부와 연구다. 그는 학승(學僧)으로 세속에서 수십 년을 매달렸다. 그 결실로 일본 도쿄대에서 석사를, 미국 하버드대에서 박사를 땄다. 한국인 스님으로는 하버드대 최초의 박사다.
토요일이었던 지난 6월13일, 서울 종로 인사동의 한 사찰음식점에서 만난 소운(素雲) 스님(54)은 “요즘처럼 물질만능주의가 판치고 정신이 피폐해진 시대에 불교만큼 우리를 한데 묶을 수 있는 종교는 없다”고 설파했다.
오늘날 불교는 명상, 참선, 힐링 등으로 현대인의 생활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특히 불교는 동양 정신문명의 기둥이 되는 대표적인 사상이자 철학이다.
그러나 불교를 종교로 이해하는 것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 낯선 범어(梵語)와 어려운 한자로 된 용어는 물론이고 형이상학적이거나 모호한 개념, 오랜 세월 동안 국가·지역별로 다양하게 변화해 오면서 불교는 종교로선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조계종단은 교선일치(敎禪一致)를 표방하지만 교(敎)를 선(禪)의 한 과정으로만 본다”고 말했다. “토굴과 선방에 앉아 참선하는 것과 함께 불자와 속인들에게 불교를 제대로 알려주는 것도 중요합니다. 조선시대 500년 동안 배척당하면서 산속으로 들어간 불교가 이상하게 변한 게 지금 모습입니다. 불교가 오늘날 종교로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습니다.”
종교가 우리 사회를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래야 잘못된 우리 사회의 의식구조가 바뀌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선 자기만의 영역을 넓히고, 더 큰 절과 더 큰 교회만을 추구하는 종교인들이 먼저 변해야 한다고 그는 목소리를 높였다. “돈 버는 데 혈안이 된 종교인이 많잖아요. 오히려 일반인이 종교인을 걱정하기도 하고요. 종교인들의 통렬한 반성이 필요해요.”
학문에만 정진하다보니 박사까지
그는 산사(山寺)를 지키는 비구니 스님과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걸었다. 그가 출가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의 죽음을 접하면서였다. “새삼 ‘무상(無常)’을 깨달았어요. 그 전에 친구와 함께 태종대 근처의 절에 간 적이 있는데, 법회에서 스님이 하신 말씀이 귀에 쏙쏙 들어왔어요. 그 뒤에도 자주 찾았는데,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출가를 결심했어요.”
그는 편지 한 장 달랑 써놓고 집을 떠났다. 출가하겠다고 하면 가족이 반길 상황이 아니었다. 경남 마산의 조그만 절에서 머리를 깎고, 부산 범어사의 작은 암자로 옮겨 행자 생활을 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수행법이나 불교의 교리에 대해 가르쳐 주지 않았다. 스님들은 자신들이 그랬듯이 스스로 깨닫기를 바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는 다급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허전함과 함께 불교에 대한 궁금증이 커졌다. 대학에서 불교를 제대로 공부하고 싶었다. 검정고시를 거쳐 동국대 선학과에 입학한 것은 23살 때였다. 그래도 배움에 대한 열정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당시 불교학 관련서적은 거의 일본어로 돼 있었다. 차라리 일본에 가서 배워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 6시 도서관에 들어가 밤 12시까지 공부하는 독한 생활이 2년 반 동안 이어졌다. 1989년 대학을 졸업한 뒤 스님은 일본 도쿄대 인도철학과 연구생 과정에 들어갔다. 1년만 공부하려던 일본 유학생활은 계속됐다. 석사과정에 진학했지만 집에 손을 벌려 받아 온 1년치 유학비용이 다 떨어졌다. 아르바이트를 할 수도 없었고, 장학금을 받기 위해 미친 듯이 공부했다.
석사과정 중 미국 UC버클리대에 어학연수를 떠난 것이 그의 운명을 또 바꿨다. “정말 별천지였어요. 온 세상 사람이 다 있었어요. 태평양에서 아시아를 보니까 아시아는 너무 좁았어요. 미국이라는 넓은 곳에서 범어를 통해 불교 원전을 공부하고 싶었어요. 마침 하버드대에 범어·인도어과 박사과정이 있었어요. 무슨 용기였는지 담당교수를 직접 찾아가 ‘여기서 공부하고 싶다’고 했죠. 아마 제가 특이했나 봐요. 오라고 하더군요.”
그는 도쿄대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1994년 미국으로 떠났다. 처음에는 영어가 어려워 먹고 자는 시간 외에는 공부만 했다. 과제를 제대로 제출한 적도 없었다. 제 때 졸업을 못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일상생활은 곧 수행이었다. 그는 기숙사 방에 작은 부처님을 모셔놓고 홀로 예불을 드렸고,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고 지냈다. 음식은 고행이었다. 기숙사에 채식주의자를 위한 메뉴가 있었지만 너무 질려 3개월 동안 된장찌개만 먹은 적도 있었다.
소운 스님은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고 다니니 눈에 안 띌 수 있었겠냐”며 “그래도 나는 땅만 보고 걸었다”고 말했다. 그는 하버드로 떠난 지 8년 만인 지난 2002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해선 서울 성북동 약사암에서 3년 간 수행했다. 20년 가까이 공부한다는 핑계로 수행을 게을리 했기 때문이다. 수행을 하다 우연히 집어든 신문이 그를 학자의 길로 이끌었다. “신문 한 귀퉁이에 동명대학교에 불교문화학과가 생긴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어요. 총장실에 바로 전화를 걸었죠. 이메일 주소를 받아 이력서를 보내면서 ‘혹 교수가 필요하면 나를 뽑아 달라’고 했어요. 두드리니까 열리더군요.” 그는 현재 동명대에서 인간과 철학, 다문화사회의 소통 등 교양과목을 가르치고 있다.
그에게는 이제 학교가 피안(彼岸)이다. 학생들을 재미있게 가르치는 게 여간 곤혹스럽지 않지만 그들에게 인생을 살아가는 자세를 일깨워준다는 점에선 보람도 크다. 최근에 개인적으로 한국 불교에 대한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한국 불교에 대한 연구 자료가 거의 없는 것이 항상 아쉬웠기 때문이다. 그는 요즘 고려시대 불교경전인 현행서방경(現行西方經)을 영어로 번역해 펴낼 준비를 하고 있다.
그는 “일본만 해도 대학과 절에는 교리를 공부하는 1000여명의 스님들이 있다”며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고 말했다. 그는 “중생들에게 부처의 가르침을 전하는 것이 이 시대 스님들의 의무이자 책임”이라며 “한국 불교 발전을 위해 학문적 토대를 굳건히 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소운 스님은 인터뷰 동안 자주 웃었다. 힘들었다면서도 웃었고, 재미있었다면서도 웃었다. 웃음소리는 호탕했다. 그와의 주말 점심식사는 일장춘몽(一場春夢)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그런 시간이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식당을 나와 다시 번잡한 인사동 골목으로 들어섰다. 뒤돌아보니 스님과의 만남이 잠깐 동안의 꿈이었구나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