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6/17

希修 윤회, 우주, 12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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希修

< 윤회, 우주, 12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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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N28 (사진#704)에서 부처님이 "Whoever sees dependent co-arising sees the Dhamma; whoever sees the Dhamma sees dependent co-arising."이라고 하셨을 정도로 12연기는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다. SN12:20 (사진#705)에서 부처님은, 사람들이 이해하든 못 하든 무관하게 존재하는 자연법칙인 인과=12연기를 당신이 깨달아 설명해 줄 뿐이라고도 하셨다. 12연기가 이렇게 중요한 이유는, 12연기는 한 찰나와 그 다음 찰나 사이의 ‘의식’ (매순간 끊임없이 계속 변해 가는)의 윤회를 설명할 뿐 아니라 한 생과 그 다음 생 사이의 윤회 사이에서도 동일하게 작용하는 법칙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개개 존재들의 생멸뿐 아니라 우주의 생멸까지도 관통하여 일관되게 설명하는 법칙이기 때문이다. (인과가 '자연법칙'이라 해도 그걸 표현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렇기에 부처님의 인식/표현 방식 혹은 가르침을 Right 'View'라고 부르는 것. 다른 인식/표현 방식도 있을 수는 있겠지만, 부처님의 방식이 해탈을 위한 최선의 방식이라고 신뢰하는 것이 불교신자들의 입장이며, 윤회의 원인인 욕망의 강을 건너면 뗏목에 해당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조차 내려놓아야 하지만 팔정도를 개발하는 동안에는 뗏목 (부처님의 가르침과 수행의 노력)을 꼭 붙잡고 있어야 한다. '내려놓는다'는 것은 ‘나’의 이익/정체성과 관련시켜 생각하지 않는다는 의미일 뿐 해탈한 아라한이라고 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벗어나 산다는 얘기도 결코 아님에 주의해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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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647, 648, 649, 696, 697, 698, 699의 내용은 "Phenomena are preceded by the mind, ruled by the mind, made of the mind." (Dhp 1~2)의 좀더 구체적인 설명이다 (참고: https://www.facebook.com/groups/102608566443956/posts/4335614399809997). 즉, 한 개인의 생명/삶도 그 자신의 의식이 만든 것이고 각자가 경험하는 세상/우주도 각자의 의식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내용인데, 상카라 (saṅkhāra = fabrication)를 의미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여기에 세 가지 흥미로운 점이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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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도 각자가 경험하는 삶도 각자의 의식이 만들었다는 위 얘기와 “세상이라는 건 6감각기관 (5감 + 이성)과 그 대상들”이라는 부처님의 정의 (SN 35:82)에 근거해 어떤 분들은 "그러므로 모든 건 내 의식 안에서만 존재하는 환상일 뿐"이라고 해석한다. 하지만 부처님이 '실재'와 '환상'을 구분하시는 장면을 초기경전에서 본 적이 없다. 만에 하나 우리의 삶이 장자의 호접지몽 같은 꿈에 불과하다 한들, '이 삶은 그저 꿈일 뿐'이라는 생각이 우리의 고통을 해결해 주지는 못 한다. 이 삶이 환상이라 하더라도 이것이 수고스럽고 괴롭다면 깨어나야 하는 것이고, 그 깨어남의 방법을 부처님은 가르치실 뿐. 그러므로 본인의 자식이 납치와 살해를 당해도 '어차피 환상이잖아!'라며 안 괴로워할 자신이 있는 분이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이들로서는 이 삶이 꿈이니 환상이니 논하는 일 자체에 사실상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잠으로 인한 꿈은 5시간 후든 15시간 후든 언젠가 저절로 깨어나지만, 삶이라는 ‘꿈’은 수억 번을 윤회해도 저절로 깨어나지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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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해탈한 이가 감각적 욕망을 버려도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은 그대로 남는다고 AN 6:63은 말한다. ("The beauties remain as they are in the world, while, in this regard, the enlightened subdue their desire.") 또 AN 9:38은 neither perception nor non-perception의 경지에 이른 수행자는 우주의 끝에 머문다고 표현한다. ("... the dimension of neither perception nor non-perception ... This is called a monk who, coming to the end of the cosmos, remains at the end of the cosmos.") 즉, A라는 사람이 해탈할 경우 그에게는 ‘우주/세상 = 6감각과 그 대상들’이 무의미해진다는 얘기일 뿐 세상이 물리적으로 사라진다는 얘기는 아니라고 보인다. 흔히 실재-환상, 또는 실체-작용에 대한 논의들을 많이 하지만, 매사를 12연기로 파악한다면 불필요한 사변이 아닌가 싶다. ‘Empty’니 ‘no substance’니 ‘무상’이니 ‘무아’니 하는 것들은 전부 ‘윤회계 내의 그 무엇도 의지할 만하지 않다’는 의미의 ‘가치 판단 (value judgment)’이라고 이해하면 된다고 타니사로 스님도 말씀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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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이 물질세계와 상호작용한다는 얘기는 기공에서 경험하는 현상들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그리고 다른 종교들에서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아브라하믹 종교들에서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했고, 베단타 전통의 우파니샤드에서는 의식 (Consciousness. 대문자 C를 씀) 자체가 우주이고 神=브라만이라고 말한다. 그 브라만이 개개의 존재로서 표현된 것이 아트만인데, 그러므로 아트만은 브라만의 일부이기도 하고 전체이기도 하며, 각각의 존재 안에서 동면하고 있는 아트만을 깨우는 것이 바로 베단타의 수행인 것. (그들이 자신들의 궁극적 목적을 대문자 S를 써서 'Self realization'이라 부르는 이유도, 김 아무개 혹은 이 아무개라는 이승에서의 정체성이 아닌 아트만으로서의 그야말로 '참 나'를 깨닫는 것이 그들의 수행이기 때문.) 그리고 여러 종교들을 섞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베단타의 영향을 가장 강력하게 받은 소위 뉴에이지 영성이 "우리 각자는 모두 神. 그러므로 우리가 원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물리적으로 manifest될 수 있다"라는 내용의 끌어당김의 법칙 (Law of Attraction)을 주장하는 것도 이런 배경을 갖는다고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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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바로 위에서 언급한 지점에서 우파니샤드와 부처님의 가르침은 서로 정확히 반대 방향을 지향한다. 우파니샤드 철학을 이어받은 전통들에서는 잠자고 있는 나의 아트만='참 나'를 깨우기 위해 명상을 할 때에도 'I am', 'I am'하며 되뇌이는 방법을 사용하고, 또 김 아무개로서의 내가 하는 행동을 관조하는 '내면의 참 나'를 늘 붙들고서 그 감각을 잃지 말라고 말한다. (바로 이 ‘진짜 나’ 개념이, 후기 대승불교가 우파니샤드의 브라만-아트만 사상을 계승한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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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초기불교에선 윤회를 벗어나는 해탈이 궁극의 목적이고 윤회의 대표적 원인이 바로 '나 집착'에서 기인하는 욕망들이기에, 그러므로 '나'라는 렌즈를 사용해서 매사를 바라보지 말고 오직 4성제와 12연기의 관점에서만 매사를 바라보라고 말하며, 이것이 바로 無我라고 일컬어지는 Anattā (無我보다 非我가 훨씬! 나은 번역) 교리다. 다시 말해, 글자 그대로 '나라는 게 본래 없다'는 의미가 아니고 ('I have a self'도 'I have no self'도 잘못된 견해 6가지에 들어간다고 부처님은 MN 2에서 명시하셨음), '나'라는 존재를 중심으로 사고하는 한 존재의 굴레인 윤회를 벗어날 수가 없다는 얘기다. ("Wherever one’s selfhood turns up, there that action will ripen. Where that action ripens, there one will experience its fruit, either in this very life that has arisen or further along in the sequence." -- AN 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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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우파니샤드는 Consciousness로서의 '참 나'에 집착함으로써 끊임없이 윤회를 만들어 내지만, 초기불교는 '나'라는 관점에서 생각하는 상카라를 끊음으로써 윤회를 파괴한다. 초기불교의 시각에서 해석하자면 아트만이나 참 나 식의 모든 수행은 윤회와 우주를 영속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뿐인 것. (이 점 하나만 봐도, “모든 종교적 수행은 결국 하나의 최종 목적지에서 만난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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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위대한 철학이 그렇듯 부처님의 가르침 역시 유기체와도 같다. 그런데 부처님이 "Whoever sees dependent co-arising sees the Dhamma; whoever sees the Dhamma sees dependent co-arising."라고 하셨을 정도면, 각각의 부분적 교리/모듈들은 전부 12연기를 중심으로 하여 12연기와 맞물려 돌아가야 한다. 마치, 맥락에 따라 '생태', '동태', '북어' 등의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해도 결국은 전부 '명태'인 것처럼, 얼음도 수증기도 모양만 다를 뿐 여전히 물인 것처럼, 無我니 空이니 中道니 하는 것들도 12연기를 이해시키기 위한 다양한 노력/표현방법에 불과한 것 (사진 #706, 707, 708, 740, 741, 742). 12연기의 첫 요소가 ignorance이니 그 해결도 당연히 knowledge일 수밖에 없으며 (흔히 '깨달음'이라 불리는 것은 그러므로 무슨 신비적 초월적 추상적 득도가 아니라 4성제와 12연기에 대한 Right Knowledge일 뿐), '오직 모를 뿐' 식의 불가지론이나 회의주의로는 해탈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 DN 1, DN 15, SN 22:81의 일관된 메세지이기도 하다 (사진#760, 761, 7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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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들 출처 =>
 "The Wings to Awakening"
https://www.facebook.com/media/set/...

'타니사로 스님의 12연기 설명'
https://www.facebook.com/keepsurfinglife/posts/1429810934057652

'번역의 문제 3. Saṅkhāra (상카라)'
https://www.facebook.com/keepsurfinglife/posts/1633543037017773

'부처님이 사성제와 팔정도를 가르치신 배경 간단 요약'
https://www.facebook.com/keepsurfinglife/posts/1587004275004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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