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왜 ‘수령제 국가체제’를 선택했고, 계속 유지하려 하나? - 통일뉴스
북한은 왜 ‘수령제 국가체제’를 선택했고, 계속 유지하려 하나?<연재> 김광수의 ‘제대로 된 북한사회에 대한 이해’(5)
김광수 | no-ultari@hanmail.net
승인 2018.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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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수 / 정치학 박사(북한정치 전공) · 『수령국가』 저자 · 21기 통일부 통일교육위원
본인은 지속적으로 ‘제2의 북한바로알기운동’을 주장하고 있다. 이 전제 하에 본인은 ‘제대로 된 북한사회에 대한 이해: 수령국가체제’라는 큰 주제를 갖고 왜곡된 북한이해를 바로잡고자 (이슈가 있을 때마다) <통일뉴스>에 정기 기고 글을 게재하고자 한다.
김광수 / 정치학 박사(북한정치 전공) · 『수령국가』 저자 · 21기 통일부 통일교육위원
본인은 지속적으로 ‘제2의 북한바로알기운동’을 주장하고 있다. 이 전제 하에 본인은 ‘제대로 된 북한사회에 대한 이해: 수령국가체제’라는 큰 주제를 갖고 왜곡된 북한이해를 바로잡고자 (이슈가 있을 때마다) <통일뉴스>에 정기 기고 글을 게재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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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4.27 판문점선언과 6.12 싱가폴 북미선언 이행과정에서 있을 수도 있는 이러저러한 우여곡절을 정론으로 대응하고자 하는 의미도 담아내고자 한다. 또한 이미 사문화되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 생명력과 위력을 가지고 있는 분단적폐의 제도적 주범 국가보안법을 철폐하는데도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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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4.27 판문점선언과 6.12 싱가폴 북미선언 이행과정에서 있을 수도 있는 이러저러한 우여곡절을 정론으로 대응하고자 하는 의미도 담아내고자 한다. 또한 이미 사문화되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 생명력과 위력을 가지고 있는 분단적폐의 제도적 주범 국가보안법을 철폐하는데도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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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이번 연제의 큰 타이틀은 ‘북한의 수령체제에 대한 이해와 오해(들)’이다.
(1)제1편은 ‘백두혈통에 대한 이해와 오해’이고,
(2)제2편은 ‘북한은 왜 수령제 국가체제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나?’이고,
(3)제3편은 ‘북한의 수령제 사회에 대한 옳은 이해: 수령과 우상화를 중심으로’이고,
(4)제4편은 ‘수령제사회주의도 사회주의이다’로 끝맺는다.
독자들의 많은 관심과 필독을 권한다. / 필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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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의 크기, 인구, 경제력, 군사력 등 모든 부분에서 미국과는 상대도 되지 않고, 특히 1990년대 이후 사회주의 진영이 붕괴된 이후부터는 고립무원의 상태가 된 그런 북한이었지만, 북한은 그 모든 상황을 이겨내었다. 뿐만 아니라 핵보유와 함께, ICBM을 갖게 되어 미국, 중국, 러시아와 같은 반열의 전략국가가 되었다.
그 근원에는 누가 뭐래도 주체사상으로 무장된 수령중심의 일심 단결된 국가체제가 있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니 그 어찌 북한의 ‘수령제 국가체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런 북한이해를 돕기 위해 우선 두 가지 편의적 개념을 도입하고자 한다.
그 첫째는 ‘수령제 국가체제’를 소련식에다 북한식을 결합한 체제라고 규정하고자 한다.
그 둘째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프롤레타리아독재라는 사회주의 체제의 특징을 수용하되, 동시에 그러한 당-국가 시스템 위에 수령을 추대한 북한식 정치체제 방식으로 규정하고자 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래 놓고-위 두 가지 개념을 전제해 놓고 북한은 왜 많고 많은 사회주의 국가체제들 중에서도 하필이면 ‘수령제 국가체제’를 선택했을까 하는 문제를 다음과 같은 시기구분을 통해 그 체제-‘수령제 국가체제’ 선택의 필요불가분성과 정당성을 이해해보고자 한다.
① 제일 먼저는 해방이전 항일무장투쟁의 경험과 교훈이 어떻게 해방이후 사회주의 국가체제를 선택함에 있어 그 영향을 미쳤는지를 고찰해보는 방식이다. ② 두 번째로는 1960년대 현실 사회주의권 내에서 발생했던 권력교체기의 경험을 고찰해내어 여기서 북한이 어떤 교훈을 찾아내었는지 살펴보는 방식이다. ③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1980년대 말~1990년대 초에 발생되어졌던 소련과 동구권 사회주의체제의 몰락과정에서 북한은 또 어떤 총화방식으로 자신들의 체제유지 방어논리를 확립해내었는지 읽어내는 방식이다.
① 그 첫째에 해당되는 해방이전 항일무장투쟁의 경험부분이다.
딱 유일한 하나의 총화를 내온다. 최고사령관을 (유일)중심으로 하는 무조건적인 일심단결의 원칙수립이 그것이다. 이를 위해 2가지 기준이 마련된다.
그 첫째는 (일심)단결해야 될 인물이 확정되고 나면 나이와 학력, 남성과 여성을 따지지도 묻지도 않고, 무조건 그 인물(지도자)을 중심으로 단결해야 한다는 기준이 성립된 것이 그것이다. 이를 위해 혁명적 동지애와 의리라는 관계 맺기가 그 기본원리로 확립되고, 김혁·차광수 등이 실천적으로 그 모범을 선보였다. 김일성보다도 나이도 많았고, 항일운동의 선배이기도 하였고, 거기다가 차광수는 학력도 당시 최고의 엘리트라 할 수 있는 일본 유학파 출신이었으니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김일성은 중퇴, 지금도 북한에서 가장 사랑받는 혁명구호 중의 하나가 <1980년대의 김혁, 차광수가 되자!>이다.)
그 둘째는 초기 공산주의 운동(민족주의자들의 독립운동도 경향적으로는 비슷한 모습을 띄지만, 논외로 한다.)의 경험과 교훈에서 찾아낸 것이 종파와 분파를 절대 허용할 수 없다 이다. 이른바 3인 1파, 3파 1당으로 대변되는 그 당시의 운동방식이 공산주의운동 후기로 넘어오면서는 본래의 목적인 항일독립운동에는 치중하지 않고 자파, 혹은 자당의 헤게모니 장악에만 몰두하게 되는 등 항일독립운동에 심각한 피해를 주었다는 인식 때문이다.
그 인식의 구체성은 다음과 같다.
초기 공산주의 운동은 1925년 4월 17일 조선공산당이 창당되어 1926년 순종 사망을 계기로 일어난 6·10만세투쟁 등에서 그 일정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문제는 1928년 12월 조선공산당이 해산되기까지 내내 3인 1파, 3파 1당으로 대변되는 서울파, 화요파, 북풍파, 상해파 등의 종파·분파주의의 발호는 조선혁명이라는 대의를 위해 투쟁하기보다는 자파의 이익과 헤게모니 장악에만 몰두한 패악이 더 컸다고 북한은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 한 예로 신간회 해산의 결정적 요인이 이 종파·분파주의의 해악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초기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북한(김일성)의 결론이 그 첫째, 사대주의와 교조주의 등의 사상적 해악을 철저히 극복할 것. 둘째, 종파·분파주의의 사상적 독소를 철저히 청산할 것. 셋째, 항일무장투쟁세력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조선민중의 혁명적 역량에 철저히 뿌리를 내리는 것이었다.[그리고 그 교훈은 군(혹은, 당)과 인민의 관계가 ‘물고기는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다’는 비유로 정당화되어졌다.)
이는 당시 김일성과 그 동료(항일빨치산 세력)들이 지도자를 중심으로 단결하지 못하는 조직은 결국 분열되고, 지향했던 목표 달성도 이뤄내지 못하는 조직으로 전락된다는 것을 가슴 깊이 각인했었음을 증명한다.
또한 그들은 그러한 총화로부터 조직 내 종파와 분파를 절대 허용할 수 없다는 원칙을 세울 수밖에 없었고, 이는 지금의 조선노동당이 그 정통을 이어가게 되는 원칙이 되었다. 오직 수령중심의 일치단결만이 가능한 조선노동당으로 말이다.(1960년대 ‘갑산파 숙청사건’이 왜 일어났는지 그 명명백백한 답변이 된다.)
②두 번째에 해당되는 사회주의권 내에서 발생했던 권력교체기의 경험부분이다.
사실, 북한은 자기들보다 먼저 세대교체가 이뤄진 사회주의권 내의 권력투쟁을 보면서 지속적이고 항구적인 당 중심의 국가체제가 운영되기 위해서는 당의 중심인 지도자(총서기, 총비서 등)를 중심으로 단결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심각한 교훈을 접수하게 된다.
역사적 경험도 위 총화가 옳았음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당시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일어난 최고지도자 혹은 혁명 1세대의 몰락과정을 지켜볼 때도 그렇고, 특히 소련과 중국의 경우 그 최고 권력에 대한 도전의 과정을 보면 혁명 1세대가 반스탈린주의의 물결 속에 침몰되고, 임표의 사례와 같이 권력 장악의 과정에서 최고지도자에 대한 도전이 심심찮게 일어나거나 그 권위가 훼손되어 혁명전통이 부정되는 것은 다반사였다.
바로 이러한 전 과정을 지켜본 북한은 사회주의 체제가 올곧게 지켜지고 지속성으로 항해하기 위해서는 혁명 1세대가 구축해놓은 혁명전통에 대한 철저한 고수와 계승, 수정주의의 집중적인 표현인 수령 혹은 최고지도자에 대한 도전이나 권위를 방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문제임을 그 어느 국가보다도 통절히 성찰해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문제의식은 고스란히 조선로동당의 반수정주의 투쟁 경험(평양: 사회과학출판사, 1995)이라는 책에 소상히 담겨지게 되는데, 내용인즉 마르크스 이후의 엥겔스와 엥겔스 사후의 베른슈타인, 카우츠키의 사례에 대한 비교, 레닌 사후 스탈린과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의 경험이 너무나도 분명하게 자기수령에 대한 변함없는 충실성과, 이의 궁극적인 목적이 수령과 당과 대중의 일심단결의 체제를 형성하는 데 있음으로 결론짓는다.
또한 그 핵심 연결고리에 지도와 대중의 올바른 결합에 착목하였고, 그것도 단순히 지도자와 대중의 친밀감이나 현지지도를 통한 지도자의 대중성이 강화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본질은 반드시 수령-당-대중의 통일체를 형성하는 것에 있는 것으로 말이다. 그 실현방도도 혈연적 연계에 의한 강화, 관료주의와의 투쟁, 전 인민의 조직화 등이 제시되고, 사회주의적 지도방법의 원리도 청산리 정신으로 대표되는 위와 아래의 결합이 강조되는 방식이었다.
③ 그 마지막에 해당되는 사회주의권 몰락에 따른 총화방식이다.
소련식 사회주의체제가 몰락할 때 북은 건재했다. 이를 두고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상상하던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여서 모두들 놀라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북한이 어떤 국가이기에 그 레짐 체인지(regime change) 쓰나미마저도 피해가게 했을까? 하고 말이다.
그 궁금증에 대한 답은 이렇다.
우선은 북한이 소련과 같은 사회주의권이었지만, 소련의 위성국가였던 동구권과는 달리 ‘자주’를 앞세운 국가였다는 사실이 그 첫째 반증이다.
그 둘째는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권 몰락으로부터 얻는 교훈을 너무나도 철저하게 반면교사(反面敎師)하였다는 것이다.
1992년 1월 3일 김정일의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책임일꾼들과 한 담화, 「사회주의건설의 역사적 교훈과 우리 당의 총노선」이라는 논문을 보면 이는 명약관화해진다. 소련 및 동구 사회주의권의 좌절 원인이 “사회주의의 본질을 역사의 주체인 인민대중의 중심으로 이해하지 못한 점”,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와의 질적 차이를 보지 못하고 사회주의 근본원칙을 일관성 있게 견지하지 못한데” 있고, “관료주의가 자라나 사람들의 창발성을 억제하고 당과 국가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게 되어 인민대중의 통일단결을 파괴하는 엄중한 결과를 가져왔다”고 피력하고 있는데서 그 증거를 찾을 수 있다.
동시에 북한은 이러한-소련 연방의 해체 및 동구 사회주의국가들의 탈사회주의화 흐름에 대해 “일시적 현상”이며 사회주의와 다원주의는 양립할 수 없다는 주장을 펼친다. 이는 인민들에게는 주체사상에 기초하여 수령과 당에게 모든 운명을 의탁한 채 ‘우리식대로 살아가자’라는 주장을 가능케 하는 논리로 발전하게 되고, 또한 김정일(북한)은 김일성의 사망 직후인 1994년 12월에는 「사회주의는 과학이다」를 발표하여 과학으로서의 사회주의에 대한 승리의 신념을 표시하고, 과학으로서 북한의 사회주의가 지난 시기 사회주의(=마르크스-레닌주의에 기초한 사회주의)에 비해 우월하기 때문에 김일성이 개척하고 이끌어 온 ‘주체의 사회주의 위업’을 대를 이어 계승·완성할 것을 주장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김현환은 자신의 저서, <주체사상과 나와의 대화>(서울: 출판사불명, 1999)에서 이렇게 설명해내고 있다.
“북한의 이러한 인식이 동구권과 구소련 붕괴의 경험은 영도의 계승문제를 올바르게 해결하지 못하여 사회주의 위업이 곡절을 겪었으며 특히, 사회주의의 배신자들이 지도층에 등장하여 수정주의 정책을 강행하여 마침내 사회주의를 붕괴시켰고 이 중심에 흐루쇼프, 고르바초프가 있다.” (88~89쪽)
해석하자면 첫째, 북한은 수령에 대한 이해를 철저히 했다는 것인데, 이는 뇌수가 없는 사람의 생명체가 존재할 수 없듯이 수령 없는 국가는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이 북한의 결론이었던 것이다.
둘째, 정치사상적 자극 없이 물질적 자극만으로 이뤄진 경제성장의 위험성을 캐치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북한은 철저하게 정치사상적 자극을 우선시 하면서도 물질적 자극을 결합시키는 그런 경제성장 원칙과 사업 작풍을 견지해 갔다. 6.28 방침과 5.30조처 등도 다 이 총화위에서 성립된 개건조치인 것이다.
셋째, 인민과 당과의 관계가 비적대적 모순이어야 하나, 멸망한 소련과 동구권에게는 적대적 모순으로 전환돼 당과 인민사이에 그 괴리가 존재한다는 결론이었다. 그러니 북한은 수령과 당, 인민의 관계를 더 혈연적으로 강화하는 방향으로 사회주의 국가체제를 만들어가 갈 수밖에 없었고, 북한은 거기다가 한발 더 나아가 군대도 당과 수령의 군대로 재규정하여 수령-당-인민-군대의 일체성을 내오게끔 된다.
이에 대해서는 백학순 박사도 자신의 저서, 북한 권력의 역사: 사상·정체성·구조(서울: 한울, 2010) 672~676쪽에 당과 인민의 관계가 사회주의 국가의 특성상 비적대적 모순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밝혀놓고, 경우야 어떻든 실제적으로 발생한 당과 인민의 괴리에 대해 이를 대처하는 방법이 국가별로 상이했음을 논증하였는데, 예를 들면 소련의 고르바초프는 당시 소련이 처한 총체적인 문제의 근원을 소련공산당 자체에 돌렸고, 중국은 그 탓을 중국공산당 자체가 아닌 지도자 개개인의 잘못으로 돌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소련은 정치권력의 주체와 그 주체가 행사하는 권력의 정당성을 훼손함으로써 정치적 불안정을 초래한 반면, 중국은 그 정치권력의 주체를 온전하게 보존하여 정치적 안정성을 유지하면서 악화된 환경에 적극적으로 대처해 나갔다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그럼 북한의 경우는? 중국보다 더 철저하게 ‘당의 영도’를 강조하면서 당시 자국의 어려움을 ‘사상’과 ‘당’의 힘으로 극복하려고 노력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즉 북한은 소련과 동구권의 몰락을 통해 인민과 당의 괴뢰는 곧 국가체제의 존폐 문제로 심각하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런 만큼 북한은 그러한 상황이 오지 않기 위해 더욱더 ‘수령-당-대중-(군대)’의 통일체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이론적 정립과 함께 실천성, 제도화의 과정을 밟을 수밖에 없었다는 진단으로 그 결론을 맺는 방식이었다.
특히 군과 관련해서는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총화 해내었다. 소련 몰락 당시 마지막 국방장관이었던 야조프(Dmitri Yazov) 원수가 “소련군대가 사회주의를 지키지 못하고 자본주의 체제에 찬성한 가장 주된 요인이 군 수뇌부가 외적(外敵)으로부터 조국을 수호하도록 군대를 육성하는 데는 관심이 있었지만, 공산당 보위나 사회주의 수호 교양이 관심밖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견해를 밝혔는데, 이 견해를 단초로 하여 북한이 군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에 대한 심각한 고민이 시작되었고, 결과는 이른바 ‘군대가 곧 당’이라는 일체구호였다. 군대의 창건, 목적, 사명, 그리고 정치적 성격 등 그 모든 것에 있어서 당과 군대는 하나로 일치해한다는 논리에로의 집중 그것이었다.
그러다보니 노동계급에 있어 당은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실현하려는 목적 하에 군대를 창설하며 군대는 당의 영도를 받들게 된다는 논리와 함께, 당이 자기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군대를 틀어쥐어야 하며, 군대는 당의 영도를 받아야 자기의 혁명적 성격을 고수하고 자기의 역할을 잘 해 나갈 수 있다는 논리를 성립시켰다.
그리고 이 논리는 사회주의 국가체제만이 구현할 수 있다는 인식도 드러내었다. 김철우, <김정일장군의 선군정치>(평양: 평양출판사, 2000) 49쪽 서술부분을 보면 이는 금방 알 수 있다.
“정권과 민중이 적대관계에 있는 자본주의사회에서는 군대이자 당이고 국가이며 인민이라는 정치구도가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성립될 수 없다.”
또 북한은 그 연장선상에서 군(軍)을 아예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시킨다. 다름 아닌, 혁명의 주력군으로 하는 이념적 재구성까지 성립시키는 이론화과정을 거치게 된다는 말이다.
근거는 이러했다. 소련 사회주의체제 몰락 그 원인들이야 무수히 많겠지만, 그 중 하나가 북한으로 하여금 군을 중시하지 않아 군대가 체제수호에 실패했다는 인식을 갖게끔 하였고, 이는 필연적으로 군대를 ‘국방의 수단’으로만 여겼지 ‘사회주의 정치의 주체’로 보지 못했다는 총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게 하였다. 그래서 얻어낸 그 결론에 북한은 시대환경의 변화에 따라 노동자의 처지와 역할도 크게 달라졌듯이 군대도 ‘새로운’ 시대적 상황변화를 반영하여 혁명의 주력군으로까지 내세운다는 원칙을 성립시켰던 것이다.
이렇듯 북한은 위에서 열거된 세 가지 경험, 즉 1930년대와 1960년대, 그리고 1980년대 말~1990년대 초 경험이 북한으로 하여금 북한식 사회주의체제가 어떤 국가체제를 형성해야 되는지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하였고, 그 고민의 결과 유일해법으로 여타의 사회주의 국가들과는 달리, 수령을 그 정점으로 하는 일심단결 된 사회주의체제가 정답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북한은 자신들의 수정헌법 서문에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와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 동지의 사상과 영도를 구현한 주체의 사회주의 조국이다”라고 명시하기에 이르게 될 뿐만 아니라, 동시에 2016년 5월 7일 조선노동당 7차대회에서 김정은이 발표한 「사업총화문」에서 북한이 지향하는 사회주의체제는 그 어떤 풍파가 몰아치더라도 ‘수령제 국가체제’에서 한 발짝도 이탈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천명될 수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 문장에 “모두다 김일성-김정일주의의 혁명적 기치를 높이 들고 당중앙위원회의 두리에 단결하고 단결하고 또 단결하여 당의 강화발전과 사회주의위업의 완성을 위하여, 조국의 자주적통일과 세계자주화위업의 실현을 위하여 힘차게 앞으로 나아갑시다.”
이 문장에서 우리는 북한의 최종적인 사회주의체제 목표가 김일성-김정일주의에 있으며, 이의 다른 표현이 수령중심의 사회주의체제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지향한다는 것을 분명 알 수 있는 것이다.
또 이 문장에서 우리는 김정일에 이어 29세의 김정은도 권력승계를 왜 무난히 받을 수밖에 없고, 수령으로 받아들이는 데 아무런 (당과 인민적) 저항과 동요 없이 안착할 수 있는지를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이는 체제선택의 문제를 옳고 그름이 아닌, 또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닌, 또 자유주의체제냐 사회주의체제냐가 아닌 한 국가가 자신의 국가체제를 선택함에 있어 자신들이 구축해온 그 역사성과 공고화 과정을 통해 선택할 수 있는 그런 권리문제로 인식한다면, 북한은 그러한 역사과정과 총화를 통해 자신들이 선택할 체제로 ‘수령제 사회주의체제’로 선택했다는 사실이다. 우린 그것을 더 중요하게 바라봐야 한다. 우리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선택했듯이 말이다.)
김광수 약력
저서로는 『수령국가』(2015)외에도 『사상강국: 북한의 선군사상』(2012), 『세습은 없다: 주체의 후계자론과의 대화』(2008)가 있다.
강의경력으로는 인제대 통일학부 겸임교수와 부산가톨릭대 교양학부 외래교수를 역임했다.
주요활동으로는 전 한총련(2기) 정책위원장/전 부산연합 정책국장/전 부산시민연대 운영위원장/전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사무처장·상임이사/전 민주공원 관장/전 하얄리아부대 되찾기 범시민운동본부 공동운영위원장/전 해외동포 민족문화·교육네트워크 운영위원/전 부산겨레하나 운영위원/전 6.15부산본부 정책위원장·공동집행위원장·공동대표/전 국가인권위원회 ‘북한인권포럼’위원/현 대한불교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 부산지역본부 운영위원(재가)/현 사)청춘멘토 이사/현 평화통일센터 ‘하나’ 이사/현 6·15부산본부 자문위원/현 통일부 통일교육위원 외 다수가 있다.
국토의 크기, 인구, 경제력, 군사력 등 모든 부분에서 미국과는 상대도 되지 않고, 특히 1990년대 이후 사회주의 진영이 붕괴된 이후부터는 고립무원의 상태가 된 그런 북한이었지만, 북한은 그 모든 상황을 이겨내었다. 뿐만 아니라 핵보유와 함께, ICBM을 갖게 되어 미국, 중국, 러시아와 같은 반열의 전략국가가 되었다.
그 근원에는 누가 뭐래도 주체사상으로 무장된 수령중심의 일심 단결된 국가체제가 있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니 그 어찌 북한의 ‘수령제 국가체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런 북한이해를 돕기 위해 우선 두 가지 편의적 개념을 도입하고자 한다.
그 첫째는 ‘수령제 국가체제’를 소련식에다 북한식을 결합한 체제라고 규정하고자 한다.
그 둘째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프롤레타리아독재라는 사회주의 체제의 특징을 수용하되, 동시에 그러한 당-국가 시스템 위에 수령을 추대한 북한식 정치체제 방식으로 규정하고자 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래 놓고-위 두 가지 개념을 전제해 놓고 북한은 왜 많고 많은 사회주의 국가체제들 중에서도 하필이면 ‘수령제 국가체제’를 선택했을까 하는 문제를 다음과 같은 시기구분을 통해 그 체제-‘수령제 국가체제’ 선택의 필요불가분성과 정당성을 이해해보고자 한다.
① 제일 먼저는 해방이전 항일무장투쟁의 경험과 교훈이 어떻게 해방이후 사회주의 국가체제를 선택함에 있어 그 영향을 미쳤는지를 고찰해보는 방식이다. ② 두 번째로는 1960년대 현실 사회주의권 내에서 발생했던 권력교체기의 경험을 고찰해내어 여기서 북한이 어떤 교훈을 찾아내었는지 살펴보는 방식이다. ③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1980년대 말~1990년대 초에 발생되어졌던 소련과 동구권 사회주의체제의 몰락과정에서 북한은 또 어떤 총화방식으로 자신들의 체제유지 방어논리를 확립해내었는지 읽어내는 방식이다.
① 그 첫째에 해당되는 해방이전 항일무장투쟁의 경험부분이다.
딱 유일한 하나의 총화를 내온다. 최고사령관을 (유일)중심으로 하는 무조건적인 일심단결의 원칙수립이 그것이다. 이를 위해 2가지 기준이 마련된다.
그 첫째는 (일심)단결해야 될 인물이 확정되고 나면 나이와 학력, 남성과 여성을 따지지도 묻지도 않고, 무조건 그 인물(지도자)을 중심으로 단결해야 한다는 기준이 성립된 것이 그것이다. 이를 위해 혁명적 동지애와 의리라는 관계 맺기가 그 기본원리로 확립되고, 김혁·차광수 등이 실천적으로 그 모범을 선보였다. 김일성보다도 나이도 많았고, 항일운동의 선배이기도 하였고, 거기다가 차광수는 학력도 당시 최고의 엘리트라 할 수 있는 일본 유학파 출신이었으니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김일성은 중퇴, 지금도 북한에서 가장 사랑받는 혁명구호 중의 하나가 <1980년대의 김혁, 차광수가 되자!>이다.)
그 둘째는 초기 공산주의 운동(민족주의자들의 독립운동도 경향적으로는 비슷한 모습을 띄지만, 논외로 한다.)의 경험과 교훈에서 찾아낸 것이 종파와 분파를 절대 허용할 수 없다 이다. 이른바 3인 1파, 3파 1당으로 대변되는 그 당시의 운동방식이 공산주의운동 후기로 넘어오면서는 본래의 목적인 항일독립운동에는 치중하지 않고 자파, 혹은 자당의 헤게모니 장악에만 몰두하게 되는 등 항일독립운동에 심각한 피해를 주었다는 인식 때문이다.
그 인식의 구체성은 다음과 같다.
초기 공산주의 운동은 1925년 4월 17일 조선공산당이 창당되어 1926년 순종 사망을 계기로 일어난 6·10만세투쟁 등에서 그 일정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문제는 1928년 12월 조선공산당이 해산되기까지 내내 3인 1파, 3파 1당으로 대변되는 서울파, 화요파, 북풍파, 상해파 등의 종파·분파주의의 발호는 조선혁명이라는 대의를 위해 투쟁하기보다는 자파의 이익과 헤게모니 장악에만 몰두한 패악이 더 컸다고 북한은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 한 예로 신간회 해산의 결정적 요인이 이 종파·분파주의의 해악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초기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북한(김일성)의 결론이 그 첫째, 사대주의와 교조주의 등의 사상적 해악을 철저히 극복할 것. 둘째, 종파·분파주의의 사상적 독소를 철저히 청산할 것. 셋째, 항일무장투쟁세력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조선민중의 혁명적 역량에 철저히 뿌리를 내리는 것이었다.[그리고 그 교훈은 군(혹은, 당)과 인민의 관계가 ‘물고기는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다’는 비유로 정당화되어졌다.)
이는 당시 김일성과 그 동료(항일빨치산 세력)들이 지도자를 중심으로 단결하지 못하는 조직은 결국 분열되고, 지향했던 목표 달성도 이뤄내지 못하는 조직으로 전락된다는 것을 가슴 깊이 각인했었음을 증명한다.
또한 그들은 그러한 총화로부터 조직 내 종파와 분파를 절대 허용할 수 없다는 원칙을 세울 수밖에 없었고, 이는 지금의 조선노동당이 그 정통을 이어가게 되는 원칙이 되었다. 오직 수령중심의 일치단결만이 가능한 조선노동당으로 말이다.(1960년대 ‘갑산파 숙청사건’이 왜 일어났는지 그 명명백백한 답변이 된다.)
②두 번째에 해당되는 사회주의권 내에서 발생했던 권력교체기의 경험부분이다.
사실, 북한은 자기들보다 먼저 세대교체가 이뤄진 사회주의권 내의 권력투쟁을 보면서 지속적이고 항구적인 당 중심의 국가체제가 운영되기 위해서는 당의 중심인 지도자(총서기, 총비서 등)를 중심으로 단결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심각한 교훈을 접수하게 된다.
역사적 경험도 위 총화가 옳았음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당시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일어난 최고지도자 혹은 혁명 1세대의 몰락과정을 지켜볼 때도 그렇고, 특히 소련과 중국의 경우 그 최고 권력에 대한 도전의 과정을 보면 혁명 1세대가 반스탈린주의의 물결 속에 침몰되고, 임표의 사례와 같이 권력 장악의 과정에서 최고지도자에 대한 도전이 심심찮게 일어나거나 그 권위가 훼손되어 혁명전통이 부정되는 것은 다반사였다.
바로 이러한 전 과정을 지켜본 북한은 사회주의 체제가 올곧게 지켜지고 지속성으로 항해하기 위해서는 혁명 1세대가 구축해놓은 혁명전통에 대한 철저한 고수와 계승, 수정주의의 집중적인 표현인 수령 혹은 최고지도자에 대한 도전이나 권위를 방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문제임을 그 어느 국가보다도 통절히 성찰해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문제의식은 고스란히 조선로동당의 반수정주의 투쟁 경험(평양: 사회과학출판사, 1995)이라는 책에 소상히 담겨지게 되는데, 내용인즉 마르크스 이후의 엥겔스와 엥겔스 사후의 베른슈타인, 카우츠키의 사례에 대한 비교, 레닌 사후 스탈린과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의 경험이 너무나도 분명하게 자기수령에 대한 변함없는 충실성과, 이의 궁극적인 목적이 수령과 당과 대중의 일심단결의 체제를 형성하는 데 있음으로 결론짓는다.
또한 그 핵심 연결고리에 지도와 대중의 올바른 결합에 착목하였고, 그것도 단순히 지도자와 대중의 친밀감이나 현지지도를 통한 지도자의 대중성이 강화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본질은 반드시 수령-당-대중의 통일체를 형성하는 것에 있는 것으로 말이다. 그 실현방도도 혈연적 연계에 의한 강화, 관료주의와의 투쟁, 전 인민의 조직화 등이 제시되고, 사회주의적 지도방법의 원리도 청산리 정신으로 대표되는 위와 아래의 결합이 강조되는 방식이었다.
③ 그 마지막에 해당되는 사회주의권 몰락에 따른 총화방식이다.
소련식 사회주의체제가 몰락할 때 북은 건재했다. 이를 두고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상상하던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여서 모두들 놀라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북한이 어떤 국가이기에 그 레짐 체인지(regime change) 쓰나미마저도 피해가게 했을까? 하고 말이다.
그 궁금증에 대한 답은 이렇다.
우선은 북한이 소련과 같은 사회주의권이었지만, 소련의 위성국가였던 동구권과는 달리 ‘자주’를 앞세운 국가였다는 사실이 그 첫째 반증이다.
그 둘째는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권 몰락으로부터 얻는 교훈을 너무나도 철저하게 반면교사(反面敎師)하였다는 것이다.
1992년 1월 3일 김정일의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책임일꾼들과 한 담화, 「사회주의건설의 역사적 교훈과 우리 당의 총노선」이라는 논문을 보면 이는 명약관화해진다. 소련 및 동구 사회주의권의 좌절 원인이 “사회주의의 본질을 역사의 주체인 인민대중의 중심으로 이해하지 못한 점”,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와의 질적 차이를 보지 못하고 사회주의 근본원칙을 일관성 있게 견지하지 못한데” 있고, “관료주의가 자라나 사람들의 창발성을 억제하고 당과 국가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게 되어 인민대중의 통일단결을 파괴하는 엄중한 결과를 가져왔다”고 피력하고 있는데서 그 증거를 찾을 수 있다.
동시에 북한은 이러한-소련 연방의 해체 및 동구 사회주의국가들의 탈사회주의화 흐름에 대해 “일시적 현상”이며 사회주의와 다원주의는 양립할 수 없다는 주장을 펼친다. 이는 인민들에게는 주체사상에 기초하여 수령과 당에게 모든 운명을 의탁한 채 ‘우리식대로 살아가자’라는 주장을 가능케 하는 논리로 발전하게 되고, 또한 김정일(북한)은 김일성의 사망 직후인 1994년 12월에는 「사회주의는 과학이다」를 발표하여 과학으로서의 사회주의에 대한 승리의 신념을 표시하고, 과학으로서 북한의 사회주의가 지난 시기 사회주의(=마르크스-레닌주의에 기초한 사회주의)에 비해 우월하기 때문에 김일성이 개척하고 이끌어 온 ‘주체의 사회주의 위업’을 대를 이어 계승·완성할 것을 주장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김현환은 자신의 저서, <주체사상과 나와의 대화>(서울: 출판사불명, 1999)에서 이렇게 설명해내고 있다.
“북한의 이러한 인식이 동구권과 구소련 붕괴의 경험은 영도의 계승문제를 올바르게 해결하지 못하여 사회주의 위업이 곡절을 겪었으며 특히, 사회주의의 배신자들이 지도층에 등장하여 수정주의 정책을 강행하여 마침내 사회주의를 붕괴시켰고 이 중심에 흐루쇼프, 고르바초프가 있다.” (88~89쪽)
해석하자면 첫째, 북한은 수령에 대한 이해를 철저히 했다는 것인데, 이는 뇌수가 없는 사람의 생명체가 존재할 수 없듯이 수령 없는 국가는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이 북한의 결론이었던 것이다.
둘째, 정치사상적 자극 없이 물질적 자극만으로 이뤄진 경제성장의 위험성을 캐치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북한은 철저하게 정치사상적 자극을 우선시 하면서도 물질적 자극을 결합시키는 그런 경제성장 원칙과 사업 작풍을 견지해 갔다. 6.28 방침과 5.30조처 등도 다 이 총화위에서 성립된 개건조치인 것이다.
셋째, 인민과 당과의 관계가 비적대적 모순이어야 하나, 멸망한 소련과 동구권에게는 적대적 모순으로 전환돼 당과 인민사이에 그 괴리가 존재한다는 결론이었다. 그러니 북한은 수령과 당, 인민의 관계를 더 혈연적으로 강화하는 방향으로 사회주의 국가체제를 만들어가 갈 수밖에 없었고, 북한은 거기다가 한발 더 나아가 군대도 당과 수령의 군대로 재규정하여 수령-당-인민-군대의 일체성을 내오게끔 된다.
이에 대해서는 백학순 박사도 자신의 저서, 북한 권력의 역사: 사상·정체성·구조(서울: 한울, 2010) 672~676쪽에 당과 인민의 관계가 사회주의 국가의 특성상 비적대적 모순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밝혀놓고, 경우야 어떻든 실제적으로 발생한 당과 인민의 괴리에 대해 이를 대처하는 방법이 국가별로 상이했음을 논증하였는데, 예를 들면 소련의 고르바초프는 당시 소련이 처한 총체적인 문제의 근원을 소련공산당 자체에 돌렸고, 중국은 그 탓을 중국공산당 자체가 아닌 지도자 개개인의 잘못으로 돌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소련은 정치권력의 주체와 그 주체가 행사하는 권력의 정당성을 훼손함으로써 정치적 불안정을 초래한 반면, 중국은 그 정치권력의 주체를 온전하게 보존하여 정치적 안정성을 유지하면서 악화된 환경에 적극적으로 대처해 나갔다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그럼 북한의 경우는? 중국보다 더 철저하게 ‘당의 영도’를 강조하면서 당시 자국의 어려움을 ‘사상’과 ‘당’의 힘으로 극복하려고 노력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즉 북한은 소련과 동구권의 몰락을 통해 인민과 당의 괴뢰는 곧 국가체제의 존폐 문제로 심각하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런 만큼 북한은 그러한 상황이 오지 않기 위해 더욱더 ‘수령-당-대중-(군대)’의 통일체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이론적 정립과 함께 실천성, 제도화의 과정을 밟을 수밖에 없었다는 진단으로 그 결론을 맺는 방식이었다.
특히 군과 관련해서는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총화 해내었다. 소련 몰락 당시 마지막 국방장관이었던 야조프(Dmitri Yazov) 원수가 “소련군대가 사회주의를 지키지 못하고 자본주의 체제에 찬성한 가장 주된 요인이 군 수뇌부가 외적(外敵)으로부터 조국을 수호하도록 군대를 육성하는 데는 관심이 있었지만, 공산당 보위나 사회주의 수호 교양이 관심밖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견해를 밝혔는데, 이 견해를 단초로 하여 북한이 군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에 대한 심각한 고민이 시작되었고, 결과는 이른바 ‘군대가 곧 당’이라는 일체구호였다. 군대의 창건, 목적, 사명, 그리고 정치적 성격 등 그 모든 것에 있어서 당과 군대는 하나로 일치해한다는 논리에로의 집중 그것이었다.
그러다보니 노동계급에 있어 당은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실현하려는 목적 하에 군대를 창설하며 군대는 당의 영도를 받들게 된다는 논리와 함께, 당이 자기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군대를 틀어쥐어야 하며, 군대는 당의 영도를 받아야 자기의 혁명적 성격을 고수하고 자기의 역할을 잘 해 나갈 수 있다는 논리를 성립시켰다.
그리고 이 논리는 사회주의 국가체제만이 구현할 수 있다는 인식도 드러내었다. 김철우, <김정일장군의 선군정치>(평양: 평양출판사, 2000) 49쪽 서술부분을 보면 이는 금방 알 수 있다.
“정권과 민중이 적대관계에 있는 자본주의사회에서는 군대이자 당이고 국가이며 인민이라는 정치구도가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성립될 수 없다.”
또 북한은 그 연장선상에서 군(軍)을 아예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시킨다. 다름 아닌, 혁명의 주력군으로 하는 이념적 재구성까지 성립시키는 이론화과정을 거치게 된다는 말이다.
근거는 이러했다. 소련 사회주의체제 몰락 그 원인들이야 무수히 많겠지만, 그 중 하나가 북한으로 하여금 군을 중시하지 않아 군대가 체제수호에 실패했다는 인식을 갖게끔 하였고, 이는 필연적으로 군대를 ‘국방의 수단’으로만 여겼지 ‘사회주의 정치의 주체’로 보지 못했다는 총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게 하였다. 그래서 얻어낸 그 결론에 북한은 시대환경의 변화에 따라 노동자의 처지와 역할도 크게 달라졌듯이 군대도 ‘새로운’ 시대적 상황변화를 반영하여 혁명의 주력군으로까지 내세운다는 원칙을 성립시켰던 것이다.
이렇듯 북한은 위에서 열거된 세 가지 경험, 즉 1930년대와 1960년대, 그리고 1980년대 말~1990년대 초 경험이 북한으로 하여금 북한식 사회주의체제가 어떤 국가체제를 형성해야 되는지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하였고, 그 고민의 결과 유일해법으로 여타의 사회주의 국가들과는 달리, 수령을 그 정점으로 하는 일심단결 된 사회주의체제가 정답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북한은 자신들의 수정헌법 서문에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와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 동지의 사상과 영도를 구현한 주체의 사회주의 조국이다”라고 명시하기에 이르게 될 뿐만 아니라, 동시에 2016년 5월 7일 조선노동당 7차대회에서 김정은이 발표한 「사업총화문」에서 북한이 지향하는 사회주의체제는 그 어떤 풍파가 몰아치더라도 ‘수령제 국가체제’에서 한 발짝도 이탈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천명될 수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 문장에 “모두다 김일성-김정일주의의 혁명적 기치를 높이 들고 당중앙위원회의 두리에 단결하고 단결하고 또 단결하여 당의 강화발전과 사회주의위업의 완성을 위하여, 조국의 자주적통일과 세계자주화위업의 실현을 위하여 힘차게 앞으로 나아갑시다.”
이 문장에서 우리는 북한의 최종적인 사회주의체제 목표가 김일성-김정일주의에 있으며, 이의 다른 표현이 수령중심의 사회주의체제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지향한다는 것을 분명 알 수 있는 것이다.
또 이 문장에서 우리는 김정일에 이어 29세의 김정은도 권력승계를 왜 무난히 받을 수밖에 없고, 수령으로 받아들이는 데 아무런 (당과 인민적) 저항과 동요 없이 안착할 수 있는지를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이는 체제선택의 문제를 옳고 그름이 아닌, 또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닌, 또 자유주의체제냐 사회주의체제냐가 아닌 한 국가가 자신의 국가체제를 선택함에 있어 자신들이 구축해온 그 역사성과 공고화 과정을 통해 선택할 수 있는 그런 권리문제로 인식한다면, 북한은 그러한 역사과정과 총화를 통해 자신들이 선택할 체제로 ‘수령제 사회주의체제’로 선택했다는 사실이다. 우린 그것을 더 중요하게 바라봐야 한다. 우리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선택했듯이 말이다.)
김광수 약력
저서로는 『수령국가』(2015)외에도 『사상강국: 북한의 선군사상』(2012), 『세습은 없다: 주체의 후계자론과의 대화』(2008)가 있다.
강의경력으로는 인제대 통일학부 겸임교수와 부산가톨릭대 교양학부 외래교수를 역임했다.
주요활동으로는 전 한총련(2기) 정책위원장/전 부산연합 정책국장/전 부산시민연대 운영위원장/전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사무처장·상임이사/전 민주공원 관장/전 하얄리아부대 되찾기 범시민운동본부 공동운영위원장/전 해외동포 민족문화·교육네트워크 운영위원/전 부산겨레하나 운영위원/전 6.15부산본부 정책위원장·공동집행위원장·공동대표/전 국가인권위원회 ‘북한인권포럼’위원/현 대한불교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 부산지역본부 운영위원(재가)/현 사)청춘멘토 이사/현 평화통일센터 ‘하나’ 이사/현 6·15부산본부 자문위원/현 통일부 통일교육위원 외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