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0/05

[1930년대, 우리 시대의 뿌리를 찾아서]출판 제국의 프로파간다, ‘쿨재팬’으로 진화 - 주간경향



[1930년대, 우리 시대의 뿌리를 찾아서]출판 제국의 프로파간다, ‘쿨재팬’으로 진화 - 주간경향



[1930년대, 우리 시대의 뿌리를 찾아서]출판 제국의 프로파간다, ‘쿨재팬’으로 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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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를 전면에 내세운 아베의 '쿨재팬(Cool Japan)'은 경제적 효용과 대외적인 프로파간다 효용을 동시에 호힉득할 수 있었던 전략이었다. 리우올림픽에서 마리오가 된 아베는 바로 그 쿨재팬을 실천해 보인 것이다.

2016년 리우올림픽 폐막식에 아베 신조 총리가 마리오로 등장해 화제가 된 일이 있다. 미디어는 일제히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고 표현했고, 도쿄신문 등 소수의 미디어만이 아베 총리를 히틀러에 빗대거나 예산 낭비라며 비판했다. 한국의 많은 미디어도 “유쾌하고 창의적인 퍼포먼스”라며 도쿄올림픽 홍보의 성공을 평창과 비교하며 부러워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를 비롯하여 현재 대중들로부터 광폭적 지지를 받고 있는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 등 인기 정치인의 공통점은 대중의 기분에 적극 부응하는 극장 정치를 한다는 점이다.




도쿄니치니치신문(東京日日新聞) 1924년 12월 5일자에 실린 ‘킹’의 창간호 광고. ‘킹’은 발행 직전 거의 모든 일간지에 전면광고를 게재하고 한 부에 ‘50전’이라는 저가를 책정하는 등 파격적이고 공격적인 마케팅을 벌였다. / 필자제공. 일본근대문학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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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프로파간다

프로파간다(Propaganda·대중 선전)는 즐거워야 한다. 과거 일본 군부는 강압적이고 지루한 프로파간다에 대해서 회의적이었다. 중일전쟁 초기 육군성 정보부장 시미즈 모리아키라(淸水盛明)는 사상전 강습회에서 “선전을 강요하면 안 된다. 즐기면서 자신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감흥하고 스며들도록 계발·교화해야 한다”고 했다. 이는 침략전쟁에 대한 대중의 자발적이고 지속적인 협력을 원했기 때문이다. 시미즈는 일본의 인기 대중문화를 총동원하는 사상전을 구상했다.

일본제국의 ‘사상전’은 엄격한 사상 검열과 대중오락 매체를 매개로 한 ‘즐거운’ 선전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전승 보도가 이어지던 중일전쟁 초기, 많은 대중의 자발적 전쟁 협력은 문화 콘텐츠를 절묘하게 이용한 즐거운 프로파간다가 성취한 지점이었다. 최근 1930년대 파시즘 연구에서 일본제국의 일상을 밝고 모던한 분위기를 통해 재평가하는 담론이 등장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군수경기 호황과 ‘전시 잡지 붐’ ‘출판 버블’이 공존하는 분위기, 그리고 출판자본의 형성과 안정은 단순한 ‘언론 탄압사관’의 수정을 불가피하게 한 것이다.




킹 창간호. / 필자제공. 일본근대문학관 소장.근대 일본제국이 남긴 뛰어난 프로파간다는 권력의 일방적 강요에 의하지 않았다. 오히려 민중의 취향 파악에 전력을 기울인 문화사업 주체가 정부나 군의 눈치(자기검열)를 살피면서 영리 목적으로 만든 것들이다. 소중한 여가시간을 정치선전으로 도배된 부담스러운 매체와 보내고 싶은 대중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프로파간다 최고 기술자는 고단샤(講談社) 창업자 노마 기요하루(野間淸治·1878~1938)였다. 1930년대는 잡지의 시대였고 노마야말로 자타가 인정하는 잡지왕이었다. 노마가 <킹>(KING)을 창간한 1925년 전후에는 25세 이상 남성에게 선거권을 부여하는 보통선거법이 제정되었고 다수당이 내각을 형성하는 정당내각이 관행화되었다. 1240만명의 유권자가 탄생했다. 이들의 정치행동이 다수당과 정권의 향방을 정하는 사회가 출현한 것이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잡지 <킹>이 ‘특권계급 예술’의 ‘전 민중으로의 해방’을 목표 삼아 대규모 광고전략을 취하기 시작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100만 독자=대중 포섭 작전

노마는 잡지 <킹> 창간호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서 식민지를 포함한 전국 200개 이상의 신문에 연일 전면광고를 실었다. 창간호에 들인 광고비용만 38만 엔. 창간호 75만부는 전설이 되었고, 1920년대 말에는 150만명이 넘는 독자를 획득했다. <킹>의 성공은 출판시장의 광고경쟁에 불을 지폈다. 특히 1920년대 중후반을 뜨겁게 달군 엔본(각 권 1엔, 매달 한 권씩 발행되는 전집) 선전은 치열했고, 300종 이상의 각종 전집이 범람할 정도로 출판시장의 규모는 급속히 확장되었다. 이러한 <킹>과 엔본 붐을 통해 독서의 대중화가 이루어지고, 출판물의 대량생산·대량소비를 통해 출판자본주의가 확립된다. 고단샤 사장 노마는 1932년에 도쿄 거주 고액납세자 1위가 된다. 출판사 사장이 1위를 했던 시대. 현재의 출판 불황을 생각하면, 물론 당시와 지금을 같은 선상에 놓을 수 없지만, 그러나 시점을 바꿔서 1930년대 여론 형성에 큰 힘을 발휘한 잡지·출판 등이 전쟁 수행 권력과 자본의 지배욕을 자극한 측면은 새삼 돌아볼 필요가 있다.

특히 1930년대는 제국의 출판자본이 식민지 시장을 강하게 의식하고 독자 포섭에 열을 올렸던 시기다. 식민지 조선의 독자도 기대 이상으로 반응했다. 각종 인기 잡지뿐 아니라 출판 당일 도쿄에서 판매 금지가 되었던 <전기>와 같은 좌익 매체도 상당히 빠른 속도로 현해탄을 건넜다. 매체마다 조선인 독자들이 보낸 엽서가 다수 소개되었다. 조선 대중이 제국 중앙의 출판자본과 직접 대화를 함으로써 출판 영업지도에 경성(京城)이 굵게 각인되었던 시대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 내지와 식민지 조선의 상이한 검열구조나 억압적 통치구조를 통해 식민지가 더 힘든 상황에 있었다는 지점만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당시 문화매체가 만들어낸 구조적 특성을 살펴야 하는 것이다.

당시 동아일보는 <킹>이 ‘무지대중에게 널리 뿌리 박고 있는 잡지’(1934년 2월 9일)라고 소개했다. ‘잡지 보국(報國)’을 이념으로 내걸었지만 대중들의 구매의욕을 자극하는 잡지의 구성은 전혀 지루하거나 따분하지 않았던 것이다. 예컨대 <킹>의 지면에는 강담·만담·만화 등 대중오락물, 입신 출세를 위한 처신술, 미용체조, 화장법 등이 뒤죽박죽 섞여 있었다. 문체는 아주 쉬웠고 한자에는 전부 독음이 달려 있어서 누구나 읽을 수 있었다. 때문에 식민지 조선의 독자들도 열광했었다. 이는 조선인 독자 엽서에도 잘 드러나 있다. 전남 영암의 한 독자는 “킹이 너무나 재미있어서 때때로 철야”(킹·1937년 3월호)를 했다. 또한 한 평양 철근노동자는 12세에 고아가 되어 학업을 중단했지만 킹이 너무 좋아서 반복해서 읽었고 덕분에 일본어를 습득했다면서 킹을 “나의 은사”(1939년 3월호)라고 칭송했다.

<킹>의 ‘100만 독자=대중’은 출판자본의 욕망을 자극했다. 1920년 말 최전성기를 맞이했던 사회주의 출판도 예외는 아니었다. 치안유지법이 본격적인 사상 탄압의 도구가 된 것은 1928∼29년 사이다. 흥미로운 것은 탄압의 강도가 높아진 이 시기에 ‘사회주의’ 출판물이 자본 제조기 역할을 했고, 발매 금지가 판매량 증가에 공헌을 했다는 점이다. 일본 공산당계 잡지 <전기>는 1년의 절반을 발매 금지당한 덕에 인기 잡지로 급부상했다. 그들의 목표는 <킹>의 독자층인 노동자 탈환이었다. <전기>는 1927년 테제 이후 천황제 타도를 외치던 ‘불경 전기파(NAPF)’의 잡지였다. 하지만 그들의 투쟁은 출판자본 <킹>이 만들어놓은 출판자본주의 시스템 외부의 사상운동이 아니었다. 그들도 역시 출판자본주의 시스템에 내부화되어 있었고, 다른 출판자본과 더불어 <킹>의 선전방식을 답습했다. 목적은 서로 다르지만 <킹> 독자의 탈환을 꿈꾸는 자본운동의 축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2016년 리우 올림픽 폐막식 영상에서 애니매이션·게임 캐릭터 '마리오'로 깜짝 등장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왼쪽)와 같은 해 일본의 인기 동영상 사이트 니코니코동과 애니메이트가 주최한 할로윈 코스프레 페스티벌에서 데츠가 오사무의 만화 '리본의 기사' 주인공 모습으로 등장한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 우익 정치인이면서 대중의 인기에 부합하는 파격적 모습을 보이는 공통점이 있다. / 라이브도어 뉴스
역사수정주의와 대중의 변심

사회주의 상품의 인기는 길지 않았다. 대중들이 싫증을 냈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량 전향사태와 동시에 일어난 현상이기에 사상 탄압 때문에 독자가 떠난 것으로 오해될 수도 있다. 물론 운동의 중심에 있던 이들에게는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그러나 100만 독자 경쟁이 독자의 욕망 투영 경쟁을 낳았고, 숫자로 환산되는 ‘독자=대중’ 덩어리의 크기가 신문지면 구성을 바꾸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이때 바로 만주사변을 매개로 조선과 만주 관련 기사에 관심이 급증하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장혁주, 최승희는 최고의 ‘조선’ 상품으로 부각되었다. 사상탄압은 분명 사회주의 서적 발매를 억제하는 동인이었다. 하지만 ‘사회주의’ 독자들이 ‘민족’ 상품의 독자로 탈바꿈하고 중일전쟁 개전에 열광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1933년 일본 공산당 최고 간부였던 사노 마나부, 나베야마 사다치카의 전향을 계기로 대량 전향 시대가 열린다. 이들의 ‘전향 성명’에는 대중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자책이 담겨 있었다. 감옥에 수감된 사회주의자에게 지배권력이 허락한 유일한 잡지가 <킹>이었다. 특히 비전향 장기수들은 10여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자신들이 결코 손에 넣지 못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은 <킹>을 읽는 ‘벌’을 받아야 했다.


1937년, 잡지왕 노마 기요하루는 출판계를 대표해서 내각정보부 참여(參與·조언자)가 된다. 중일전쟁 프로파간다에 직접 관여를 한다. 매일신문, 아사히신문, 요미우리신문 등 1930년대 1일 발행부수 100만을 넘었던, 대중과 친화력이 높은 미디어 대표들이 모두 동원되었다. 총력전 당시 일본의 정보국은 단순한 입막음과 정보 은폐가 효과적이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들은 적극적 선전과 계몽, 대외 이미지 개선과 국민 여론 조작을 위한 프로파간다 개발에 열을 올렸다. 하지만 일본제국의 비참한 말로는 즐거운 프로파간다 개발에 열정을 쏟았던 1930년대의 기억을 희미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오늘날까지도 흔쾌히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국민’ 만들기 기획은 대중의 변심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계속된다.

대중문화를 전면에 내세운 아베의 ‘쿨재팬(Cool Japan)’은 경제적 효용과 대외적인 프로파간다 효용을 동시에 획득할 수 있었던 전략이었다. 리우올림픽에서 마리오가 된 아베는 바로 그 쿨재팬을 실천해 보인 것이다. 이때 문화적 콘텐츠와 역사 문제는 별개일까? 쿨재팬 수행 주체의 대중문화 정책은 젊은층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이 일본 내부의 배외주의적 차별을 용인하는 주체라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야스쿠니에 집착하는 아베, 9월 1일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위령제 추도문을 거절한 고이케 도쿄도지사. 역사의 희생자를 민족 ‘차별’ 없이 모두 같은 ‘희생자’로 위령해야 한다는 이들의 주장은 ‘재일 특권’을 주장하는 재특회의 주장과 맞닿아 있다. 고이케가 관동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수 ‘6000명’이라는 숫자를 문제 삼아 9월 1일 행사에 추도문을 보내지 않았듯이, 쿨재팬 수행권력은 ‘역사수정주의’라는 단어를 선점해 역사전쟁을 벌인다. 지금 아베의 지지율은 하강국면이다. 그리고 그를 잇는 고이케의 높은 지지율이 힘을 갖기 시작했다. 아마 당분간 대중문화 옹호자를 자처하면서 역사 문제에 기죽지 않는 극장 정치 달인들의 21세기형 프로파간다와의 전쟁은 더욱 치열해질 것 같다.

<고영란 니혼대학 국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