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0/05

[1930년대, 우리 시대의 뿌리를 찾아서]우리는 언제까지 1930년대를 살아야 할까? - 주간경향



[1930년대, 우리 시대의 뿌리를 찾아서]우리는 언제까지 1930년대를 살아야 할까? - 주간경향



[1930년대, 우리 시대의 뿌리를 찾아서]우리는 언제까지 1930년대를 살아야 할까?




인쇄
|
목록
|
복사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밴드


한국에서도 정권교체는 이루어냈지만 총체적 위기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그 위기에 대한 대처법 역시 1930년대에 만들어진 아이디어를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거대한 전환>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는 칼 폴라니의 책이 1944년에 처음 영국에서 선보였을 때, 그 제목은 <우리 시대의 기원>이었다. 1930년대 말에 구상되기 시작한 이 책에서 그가 ‘우리 시대’, 즉 ‘시장사회’로 특징지어지는 시대의 기원을 탐구하고자 한 까닭은 바로 그 ‘우리 시대’의 종말을 목도하고 있다는 의식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 시대의 종말은 또 다른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기도 했다. 폴라니가 그려낸 시대와 다른, 다름 아닌 지금 현재의 ‘우리 시대’의 시작 말이다.

번영의 시대 저물고 세계 대공황 도래





전지현롱패딩 프리미아 CLICK


물론 그때가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었다는 것은 지금의 위치에서나 할 수 있는 것이지, 당대 사람들에게 30년대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미래가 보이지 않는 시기였다. 폴라니가 감지한 한 시대의 종말이란 1929년에 발생한 세계 대공황으로 인해 ‘보이지 않는 손’으로 표현되던 ‘자기조정적 시장’이라는 신화가 깨져나가는 과정이었다. ‘황금의 20년대’라고 불리는 번영의 시대가 대공황이라는 갑작스러운 파국으로 막을 내리면서, 사람들은 당연히 올 거라 믿었던 ‘내일’이 안 올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고 말았다. 내일에 대한 희망으로 오늘의 고통을 견디던 이들에게는 특히 더 치명적인 것이었다. 1937년에 미국의 사진가 마거릿 버크화이트가 찍은 사진(실제로는 홍수 이재민들의 모습을 담은 것이긴 하지만)이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처럼 약속된 미래와 현재 사이의 간극은 너무나 분명했다. 앞만 보고 달리면 되는 시대는 끝났고, 길 잃은 대중의 방황이 시작되었다. 이제 이들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지가 통치의 핵심 과제가 된다. ‘위기관리 시대’의 시작이다.




1937년 2월 미국 켄터키주에서 홍수피해를 입은 아프리카계 이재민들이 식량배급을 받기 위해 줄을 서 있다. 그들의 머리 위 입간판에 그려진 부유한 일가족의 풍경과 대조적이다. 1930년대 말 자본주의 세계의 장밋빛 전망과 현실의 괴리를 보여주는 사진으로 주간지 「라이프(life)」의 표지로 채택됐다./마가렛 버크화이트(Margaret Bourke-White), ‘Kentucky Flood’(켄터키 홍수)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가 초래한 이러한 상황은 사회주의자들에게는 더 없이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30년대에 사회주의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 당시 소련에서 제1차 5개년계획이 순조롭게 성과를 올리고 있어서 대안으로서 사회주의에 대한 기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았는데도, 각국의 공산당은 그 기회를 활용하는 데 실패했다. 각국의 공산주의운동을 지도하던 코민테른의 당시 노선은 위기적인 상황 속에서 구체적인 대안을 만들기 위한 모색을 한다기보다는 단지 계급투쟁을 격화시키면서 그 주도권을 잡으려는 것이었으며, 자기들의 노선만이 옳다는 식의 그들의 행태는 운동의 확대를 저해했다. 더욱이 30년대 내내 전해지던 정적 숙청에 관한 소식들은 소련을 우리가 가야 할 미래로 보기 어렵게 만들었다. 자본주의에 대한 절망에 더한 사회주의에 대한 실망 속에서 사람들은 더욱 혼란스럽기만 했다. 하지만 사회주의자들의 실패와 무관하게 시장에서 밀려난 이들은 정치화되어갔다. 분노에 찬 그들의 존재는 지금 여기에 있는 위기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었다.

자본주의 부흥 꾀한 미국의 뉴딜정책

그런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대처법 중 하나로 등장한 것이 복지국가로 구체화되는 수정자본주의 노선이다. 대공황 이전부터 이미 ‘자유방임의 종언’을 선언했던 영국의 경제학자 케인스는 시장을 국가의 재정정책으로 보완할 수 있다고 보았는데, 그 핵심에 있는 것은 ‘유효수요’의 창출, 즉 소비자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실업자를 비롯해 시장에서, 즉 자본의 축적 사이클에서 이탈해 정치화된 이들을 다시 경제적 주체인 소비자로 만듦으로써 시장으로 복귀하게 하려는 것이 그의 노선이었다. 케인스의 노선은 전후 영국에서 노동당이 집권하면서 본격적으로 실현된다. 그의 영향을 받으면서 복지국가의 설계도를 그린 소위 ‘베버리지 보고서’의 필자 윌리엄 베버리지가 사회보장제도의 필요성을 주장하게 된 까닭이 가난은 증오를 낳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처럼, 가난을 통해 생겨날 수 있는 어떤 적대적 주체의 형성을 미리 방지하려는 것이 그 노선의 핵심이었다. 복지국가에 대해서는 지금도 많은 논의들이 있지만, 그것이 거대한 관료기구를 낳게 되는 이유가 일탈적 주체 형성을 막기 위한 관리의 필요성 때문이라는 점은 기억해둬야 할 것이다.

영국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자본주의 체제의 부흥을 꾀한 것이 미국의 뉴딜정책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존경하는 인물로 거론한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1933년에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바로 추진한 것이 뉴딜정책이었는데, 산업이나 농업에 국가가 개입해 시장의 조정자 역할을 맡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영국과 비슷하지만 결정적인 차이도 있다. 뉴딜정책에는 테네시계곡개발공사(TVA)로 구현된, 후진 지역에 대한 대규모 종합개발계획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지역 개발에 의한 자본주의 (재)활성화 기획은 성공적이었으며, 이는 일국 차원을 넘어 세계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미국 냉전 전략의 한 축인 ‘근대화’의 이름으로 진행된 후진국 개발의 모델이 된 것이다. 한국에서도 1960년대에 국토개발이 진행될 때 많이 참조된 것이 TVA였으며, 그 뒤로 진행된 개발로 인해 한국의 지역사회도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지역 개발은 확실히 한국 자본주의를 성장시켰지만, 그 대가 또한 만만치 않았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개발을 통한 자본주의의 외연 확대는 그 모순을 뒤로 미룰 뿐, 결코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불안한 마음으로 깨달아가고 있다.

그렇게 대중적으로 불안감이 커져가는 가운데 성장하는 것이 파시즘이다. 2008년 금융위기를 정점으로 세계적인 장기불황이 지속되는 가운데 미국에서는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고 유럽에서도 노골적으로 인종주의를 내세우는 세력이 득세하고 있다. 파시즘은 사람들의 불안감을 혐오선동을 통해 조직하는 데 성공했다. 불안해하는 이들에게 우리의 삶을 위협하는 게 누구인지, 누가 적인지 가르쳐준 것이다. 독일에서 반유대주의를 핵심으로 하는 나치즘이 성공하는 데 원래 유럽 사회에 만연하던 반유대주의가 그 토양을 제공한 것은 틀림없지만, 그 반유대주의 가운데서도 ‘유대인=고리대’라는 이미지가 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에는 유의할 필요가 있다. 나치즘은 당시 독일 사람들을 괴롭히던 국제적인 금융자본에 대한 적개심을 이 이미지를 통해 유대인에 대한 증오로 전환시킨 것이다. 트럼프를 지지한 것이 가난한 백인 노동자들이었던 것처럼, 거기에는 굴절된 계급의식이 존재한다. 나치당의 정식 명칭이 국민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이었던 것처럼, 그들은 사회주의를 내건 노동자의 당임을 자처했다. 다만 사회주의 앞에는 국민을 붙이고 노동자 앞에는 독일을 붙임으로써 그 계급의식은 내셔널리즘 속으로 통합되어 있었는데, 그 통합을 가능케 한 것이 ‘유대인’과 같은 ‘외부의 적’이었다.




1938년 독일 뉘른베르크주의 나치 집회에서 주민들이 열광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전쟁과 대공황에 피폐해진 독일 주민들은 대안으로 나치를 택했다./베를린 안네프랑크센터 소장
경제영역에 개입한 정치권력

영국이나 미국의 경우 대중이 정치적 주체로 등장하는 것을 막기 위해 국가가 개입해 그들이 다시 경제적 주체로 돌아갈 수 있게 만들려고 했지만, 파시즘의 전략은 오히려 그들을 정치적 주체로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는 것이었다. 1940년에 독일에서 촬영된 사진이 보여주는 것처럼, 파시즘은 여성이나 어린이들에게도 정치적 주체가 될 기회를 제공했다. 실제로는 동원에 불과했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밝은 표정은 그 경험이 얼마나 기쁜 것이었는지 말해준다. 사실 우리는 최근에도 이와 비슷한 표정을 본 적이 있다. 작년 연말부터 광장에 등장한 태극기의 물결 속에서 가끔씩 볼 수 있었던 표정이다. 물론 그 자리는 ‘빨갱이는 죽여도 좋다’는 극단적인 혐오선동이 난무하는 살벌한 공간이었지만, 개별적으로 참여한 노인들은 때로는 즐거워 보이기도 했다. 파시즘이 여전히 미력을 지닌다면 바로 이런 점 때문일 것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노인 자살률을 자랑하는 사회에서 소외되어 힘겨운 삶을 이어가던 이들에게, 젊은 시절처럼 ‘대의’를 위한 헌신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이었겠는가. 우리는 파시즘 하면 흔히 독재·학살 등을 떠올리지만, 그것이 다양한 사람들이 정치적 주체가 될 수 있는 ‘참여’의 공간을 열어놓았기 때문에 성공했다는 점 역시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30년대에 세계적으로 등장한 여러 위기관리 기법들은 대체로 경제영역에 정치권력이 개입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손’을 대신할 수 있는 ‘보이는 손’을 만드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경제계획의 수립이나 정치적 선동을 해낼 수 있는 지식인들의 위상은 높아졌다. 미국에서 시행된 뉴딜 정책이 지식인들이 정부 사업에 대거 참여하게 되는 첫 계기가 된 것처럼 지식영역이 국가영역으로 편입되기 시작한 시기가 이때였으며, 그것은 ‘전향’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런데 그러한 정치권력의 강화를 반기지 않는 지식인들도 존재했다. 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맹위를 떨치게 되는 이념을 형성하게 되는 이들이다. 파시즘이든 복지국가든 국가가 경제영역을 통제하려는 모든 시도는 결국 자유를 파괴하고 만다는 신념을 가진 여러 나라 지식인들이 처음으로 한 자리에 모여 논의를 한 것은 1939년의 일이었다. 이들이 만들어낸 이념이 복지국가 체제를 실제로 전복하는 데에는 몇십 년의 세월이 필요했지만, 그러한 사상 자체는 이미 30년대에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지금 세계적으로나 국내적으로나 30년대를 방불케 하는 파국의 징후들은 널려 있다. 한국에서도 정권교체는 이루어냈지만 총체적 위기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그 위기에 대한 대처법 역시 30년대에 만들어진 아이디어를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언제까지 ‘30년대’를 살아야 하는 것일까? 이 ‘우리 시대’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기 위해, 다음 회부터는 식민지 조선을 주된 무대로 우리가 겪은 30년대가 어떤 시대였으며 그것이 현재 우리 사회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 살펴볼 것이다. 역사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역사 속으로 뛰어들어가보자.

<후지이 다케시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원문보기: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705292026001&code=115#csidx6c081667218db398b30eed53223af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