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0/05

[1930년대, 우리 시대의 뿌리를 찾아서]글로벌 위기, 퇴행과 실험의 개발주의 - 주간경향



[1930년대, 우리 시대의 뿌리를 찾아서]글로벌 위기, 퇴행과 실험의 개발주의 - 주간경향



[1930년대, 우리 시대의 뿌리를 찾아서]글로벌 위기, 퇴행과 실험의 개발주의




인쇄
|
목록
|
복사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밴드


1930년대는 개발주의라는 독특한 정치 프로그램이 탄생한 시대이다. 수정자본주의와 파시즘은 물론이고 사회주의에서도 개발은 강력한 사회관리 체제의 수립을 정당화하는 기제였다.

1930대는 글로벌 위기의 시대였다. 주요 국가들은 경제불황을 극복하기 위해 금본위제라는 이미 수명이 다한 국제금융시스템의 재건을 고집했다. 이 퇴행적 선택은 당시 경제학적 상상력의 한계였다. 그럼에도 1930년대에는 수정자본주의, 파시즘, 사회주의라는 3개의 체제 실험을 시도하여 ‘거대한 전환’을 모색했지만, 2010년대의 우리는 신자유주의의 실패 속에서 복지국가의 재건을 외치거나, 파시즘의 재래를 두려워하거나, 사회주의의 패배를 복기하거나 하고 있다. 후대 사람들에게는 지금 우리야말로 금본위제 복귀를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을까?




일본과 만주국의 연합을 선전하는 포스터이다. 일본군과 만주국군이 힘을 합쳐 중국군을 만주에서 몰아내고 대만주국을 건설하자는 내용이다. / 기시 도시히코 <만주국의 비쥬얼미디어>

대공황과 만주사변, 1930년대의 동아시아
1930년대 일본은 세계대공황과 만주사변이라는 두 사건으로 들썩였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 무렵 활기에 넘치던 일본의 경기는 전쟁특수가 사라지면서 시들해졌고 여기에 1923년 수도 도쿄 일대를 강타한 간토대지진으로 일본 경제는 침체에 빠져들었다. 불황이 엄습해 오자 기업들은 살아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1927년 발생한 ‘금융공황’은 일본의 취약한 경제구조, 후진적 산업능력, 미비한 금융제도에 정경유착·관치금융 등의 경제·문화적 요인이 결합하여 터진 사건이었다. 은행이 부실하다는 소식이 확산되면서 예금 대량인출사태, 즉 ‘뱅크런’이 발생하여 그 여파는 걷잡을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일본 정부는 심각한 경제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1차 세계대전 때 탈퇴했던 금본위제로 복귀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국제금융시스템인 금본위제는 문명국의 기준 요건이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경제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으로 여겨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부 경제평론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는 1930년 1월 1일을 금본위제 복귀일로 결정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세계대공황 발발 직후라는 최악의 타이밍에 결행한 셈이 돼버렸다. 공황으로 화폐의 실질가치가 하락하자 환투기꾼들에게는 매우 싼 값에 일본 금을 매수하여 차익을 노릴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해외로부터 금태환(金兌換·해당국 화폐의 소유자가 해당국의 중앙은행에 요구하면 화폐를 금으로 제공) 요구가 쇄도하여 금이 급속히 유출되는 데 당황한 일본 정부는 복귀한 지 2년 만인 1931년 12월 결국 금태환 정지를 선언하여 금본위제에서 다시 이탈해 버렸다. 당시 가장 중요한 경제정책이라 할 수 있는 금본위제 복귀 문제가 이렇게 어처구니없게 실패해 버리자 일본 국민들의 불안과 일본 경제의 혼란은 더욱 가중됐다.

일본의 착시를 부른 만주의 규모
세계대공황으로 보호주의가 확산되면서 일본 경제의 한 축을 이루던 미국 수출이 막혔다. 그래서 일본은 중국과의 교역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중국 대륙의 권력을 양분하고 있던 국민정부의 장개석과 동북군벌의 장학량은 1928년 12월의 ‘역치(易幟)’ 후, 중국 대중-민족주의의 요구를 수용하여 제국주의 열강이 보유한 중국 내 이권의 회수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었다. 일본은 만주지역에서 남만주철도회사를 중심으로 철도·광업·철강업에 대한 배타적인 권리를 보유하고 있었고, 또 산둥지역에서는 일본의 대자본이 투자한 섬유기업들(在華紡)이 막대한 이윤을 올리고 있었다. 장개석과 장학량은 만주와 산둥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였는데, 특히 만주는 이른바 일본제국의 ‘이익선’으로 설정돼 있었기 때문에 중국의 이권 회수 시도는 일본의 위기의식을 크게 자극했다. 1931년 9월 18일 관동군이 중국군을 공격해 발발한 ‘만주사변’은 일본제국의 당면한 위기에 대한 군사적 해결책으로 시도된 것이었다.

만주사변은 만주파 군장교들의 독단적 행동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일본 정계는 만주야말로 위기 탈출의 열쇠라는 군부의 주장에 암묵적으로 동조하고 있었다. 관동군은 만주를 대(對)소련 방어를 위한 군사적 완충지대이자 일본의 군사력을 뒷받침하는 군수공업지대로 설정했다. 극심한 불황에 빠져 있던 일본 경제에 있어 만주국의 군수공업화는 새로운 투자처와 소비시장의 창출이라는 면에서 환영받을 일이었다. 대공황 이후 서구 열강들이 블록화하고 있던 상황에서 만주라는 이 신영토의 광대한 크기는 일본도 경제블록을 구축할 수 있을 만큼 규모를 갖추게 됐다는 환상을 창출해 주었다. 일본 경제는 재벌에의 경제력 집중, 생산기술의 후진성, 농공 간의 격차, 금융의 낙후성 등 극복하기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었지만, 만주의 편입은 일본 경제권의 작은 사이즈가 원인이었다는 편리한 해결책을 제시함으로써 구조적 심각성을 규모의 문제로 간단히 치환시키는 작용을 하였다.




1927년 금융공황 당시 일본의 뱅크런 광경이다. 은행이 위험하다는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은행 셔터가 닫혀 버리기 전에 자신의 예금을 인출하려 들었다. / 스즈키상점전시관 소장

1930년대 내내 일본은 일본-만주 블록경제의 구축에 모든 역량을 집중시켰다. 국제사회는 만주사변의 불법성과 만주국의 위법성을 강력히 문제 삼았지만, 일본은 1933년 국제연맹을 탈퇴하는 강수를 두면서까지 ‘일만블록’을 사수하는 데 골몰하였다. 일만블록의 핵심 과제는 바로 ‘개발’로 표현되었다. 개발은 만주의 잠재력을 현실적 경제력으로 전환시키는 작업이었다. 그런데 일본제국의 모든 자원과 관심이 일만블록에 집중되면서 조선, 대만, 가라후토(사할린), 남양군도(미크로네시아) 등 기존 식민지들의 위상이 감퇴하게 되었다. 이 중에서 일만블록 개발 프로젝트에 가장 예민하게 반응한 것은 만주와 바로 붙어 있던 조선이었다. 원래 일본제국의 국경선은 조선의 압록강·두만강이었는데, 만주국 건국으로 국방의 최전선이 북만주의 흑룡강·아무르강까지 올라갔다. 군사요충지로서의 식민지 조선의 중요성이 대폭 하락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1930년대 초 식민지 조선은 극심한 경제적·사회적 위기를 겪고 있었다. 조선인들의 불안감은 1931년 경성과 평양의 화교 학살사건으로 표출되었다. 이는 정치적 약자에 대한 식민지인들의 분풀이였다. 불온한 공기는 사방을 떠다녔고 공산주의 운동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조선총독부는 공공근로사업·직업알선 등의 뉴딜식 사회정책을 실시하기도 했지만 재정 부족으로 인해 극히 제한적인 수준에 그쳤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조선의 농촌에는 홍수와 한해가 번갈아 이어졌다. 농촌진흥운동과 만주 농업이민정책이 농촌 위기의 대책으로 요란하게 제시됐으나 현실성 없는 탁상공론에 불과하였다. 위기 해결에 부심하던 조선총독부는 만주 개발에 대한 조선의 참여를 강력히 희망했지만 일본 본국과 만주 관동군의 반응은 냉담하였다.

제국을 들썩이게 한 블록개발 사업에서 소외된 기존 식민지들은 식민통치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자체적인 개발정책을 모색했다. 조선총독부는 일만블록에 조선을 억지로 끼워넣은 ‘일선만블록’ 구상을 내세워 조선 북부지역 개발을 시도하였고, 대만총독부는 ‘열대산업조사회’를 설치하여 대만 동부지역 개발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남태평양의 남양청과 사할린의 가라후토청에서도 독자적인 개발정책을 입안하여 제국 블록경제에서 소외지역이 되지 않도록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각 식민지의 힘만으로는 개발 구상을 실천으로 옮기기 어려웠다. 개발계획은 그저 회의에서 논의되고 계획서로 작성되었을 뿐이었다. 블록경제의 구축에서 식민지 개발은 필수사업이었지만, 일본제국에 있어 개발의 라인은 일본-만주 축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만주국 건국 직후 조선을 휘감았던 ‘만주열기’가 금세 식어버린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위기극복의 정치 프로그램, 개발주의
이러한 상황은 1936년 2·26 쿠데타를 계기로 일본이 군국주의의 길로 들어서면서 극적으로 전환되었다. 일본 군부는 ‘제국의 국방’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제국 전역을 군사화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각 식민지의 개발 구상은 군부의 지원 하에 비로소 실현가능한 정책으로 바뀌었다. 특히 함경도 청진을 중심으로 한 조선 북부지역은 일본 본토와 북만주를 잇는 교통의 요지이자 소련과의 국경이 인접한 국방의 최요충지로 인정되어 군수공업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대만과 남양군도 개발계획도 일본 해군이 이른바 ‘남진(南進)’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급진전되기 시작하였다. 식민지 중에서 가장 일찍 자체 개발계획을 입안했던 가라후토청도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일본 육군이 사할린 광산 개발을 긴급히 요구하자 오래 묵혀 뒀던 계획서를 다시 꺼내들었다.


식민통치는 군사주의 산업 개발을 통해 위기를 가까스로 면할 수 있었다. 군수산업에 대한 대규모 정부 투자 덕택에 주요 경제지표에는 온통 파란불이 들어왔다. 활황으로 노동력 수요가 급증하면서 조선의 실업문제는 급속히 해소되었다. 조선 북부 공업지대는 도로 건설과 공장 신축을 위해 중국으로부터 쿨리를 수입해야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 초호황은 참혹한 전쟁을 조건이자 결말로 하고 있었다.

1930년대는 개발주의라는 독특한 정치 프로그램이 탄생한 시대이다. 수정자본주의와 파시즘은 물론이고 사회주의에서도 개발은 강력한 사회관리 체제의 수립을 정당화하는 기제였다. 전후 미국의 글로벌 뉴딜에서도 개발은 자본주의 세계 경제의 안정과 확대를 지탱하는 표상이었다. 2000년대 신자유주의의 압력 속에서 한국인들이 부여잡은 것도 개발에 대한 환상과 기억이었다. 뉴딜식 국토개발을 공언한 이명박 정권을 선택하였고, 그 다음에는 아예 개발독재의 상징인 박정희의 유산을 다시 호출하였다. 신자유주의와 개발주의를 결합시키고자 했던 한국인들의 이 기묘한 실험은 이제 어떻게 될까.

<조정우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연구교수>



원문보기: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706261837571&code=115#csidx9f22c40f6d0dcaab222478496944a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