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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원효와 켄 윌버를 이야기하는가?| 자유게시판
이남곡|조회 835|추천 1|2012.10.15.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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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효남 교수의 저서 <상보적 통합>에서 발췌
1. 21세기 디지털 정보화 시대, 즉 디지털 융합의 통합 미디어⁄인터넷 시대가 도래했지만, 종교•정치•경제•문화•사회 등 각 분야의 이념과 사상은 여전히 지역 대 지역, 국가 대 국가, 민족 대 민족, 계층 대 계층 간에 분열되어 있어 그 대립 갈등이 심화되어가고 있고, 이런 문제해결을 선도해 나가야할 철학, 심리학, 정치학, 사회학, 종교, 예술 분야도 과학기술의 지배하에 전근대•근대•탈근대 사조가 혼재한 가운데 극단적 포스트모던 사조가 모든 것을 ‘해체’하면서 ‘평원화flatland'되어 깊이가 없는 사상과 이념들이 백가쟁명하고 있다.
또한 그러다보니 다양한 색깔들을 접어 단색으로 만드는 것 같은 오용되고 왜곡되기 쉬운 통합담론이 나오고 있는 것도 오늘의 현실이다.
이런 현실에서 볼 때, 오늘 날 그리고 앞으로 올 ‘새 시대new age’ 즉 ‘통합시대integral age'를 위하여 7세기와 현대의 대사상가인 원효와 켄윌버의 시대를 초월한 만남, 즉 그 상보적 통합이 요청된다.
2. 원효의 화쟁적 언어관; “이치(理)는 말을 끊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말을 끊는 것이 아닌 것도 아니다. 이런 까닭에 이치는 또한 말을 끊는 것이기도 하고 끊지 아니하는 것이기도 하다.”고 하여 이언(離言;말을 떠남)⁄의언(依言;말에 의존함)을 말한다.
언어가 참뜻을 드러낼 수는 없지만, 또한 말을 떠나서는 어떤 이치도 존재할 수 없고 말로 표현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대승의 체는 … 현묘하고 현묘하나 어찌 만상의 밖에 있으랴. 고요하고 또 고요하나 오히려 백가의 언설 안에 있다”고 하여 백가의 제반 학설들이 비록 부분적이나마 나름대로의 가치와 의미를 다 갖고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장님이 부분적인 코끼리를 말할 수 밖에 없는 한계가 있지만, 장님이 코끼리를 말하는 것도 그런대로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켄 윌버의 ‘모든 진리 주장은 비록 부분적이지만 옳다’는 관점과 맥락이 같은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화쟁은 언어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태도로 어떤 표현 방식으로 말해야 의견이 같거나 다른 사람들을 리(理)를 잃지도 않고 정(情)을 잃지도 않으며 화해시킬 수 있는가?’일 것이다.
이에 대해 원효는 ‘동의하지도 않고 이의를 제기하지도 않으며 말한다(非同非異而說)’는 자세와 방식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
3. 원효의 화쟁논리; 원효의 화쟁을 하는 논리는 ‘극단(極端)을 떠남’과 ‘긍정과 부정의 자재(自在)’의 두가지 논법으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 극단을 떠난다는 것은 단순히 극단적인 말이나 표현을 떠나는 것이 아니다. 원효가 보기에 모든 다툼은 사람들이 집착에 빠져 있어 단정을 하고 자기 주장만을 하기 때문에 집착을 없애는 것이 화쟁의 근본해결방법이라는 것이다.
우선 일차적으로 언어의 한계를 이해시켜 어떤 말이나 개념들이 다 상대적으로 성립함을 지적해서 한 쪽에 대한 집착을 버리게 하면서 또 다른 극단도 버리도록 하고 있다.
예컨대 유(有)•무(無)의 쟁론에 대해 ‘유무의 관계는 유가 아니면 무인 관계가 아닌, 유가 없으면 무도 없는 상호의존적이고 상대적인 관계’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중도(中道)도 유무와 상대적으로 성립하는 것이므로 그것도 불변의 실재로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즉 ‘이변비중(離邊非中)’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논리는 양 쪽을 다 긍정하는 단초를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이중부정(二重否定)⁄이중긍정(二重肯定)이라는 ‘긍정과 부정의 자재’의 논리 구조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둘째로 원효는 모든 이쟁(異諍)의 화쟁에서 긍정과 부정이 자재해야함을 보여 주고 있다.
언어적 차원에서 보면 언어로 표현되는 모든 차별상은 상대적으로 성립함으로 긍정과 부정이 자재로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부정을 하는 이유가 집착을 버리게 하기 위해서이지만 아니라는 것에 대한 집착도 또 다른 집착이기 때문에, 즉 극단을 떠나라고만 강조한다면 그것도 또 다른 극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비연비불연(非然非不然;그렇지 아니하고 그렇지 않은 것도 아님)이라는 것도 아니라고 하면 아니라고 하는 것에 또 집착을 하므로 그것을 부수기 위해 아닌 것도 아니라는 표현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긍정과 부정의 자재의 논법이야말로 대긍정의 태도를 이끌어내는 방법이 아닐까!
4. 화쟁방법; 원효의 화쟁방법은 ‘동의도 않고 동의하지 않지도 않으며 말함(非同非異而說)’과 ‘경전 내용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만일 여러 가지 다른 견해가 엇갈려 쟁론하고 있는 때에 유견(有見)에 의해 설한다면 공견(空見)과 다를 것이요, 또 만일 공집(空執)에 동의하여 설한다면 유집(有執)과 다른 것이다...이런 까닭에 동의도 하지 않고 이의도 제기하지 않으면서 설한다. 동의하지 않는다함은 말 그대로 모두 용납되지 않기 때문이고, 동의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고 함은 그 뜻을 살펴서 들이면 허용되지 않는바가 없기 때문이다. 동의하지 않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情)에 어긋나지 않고,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리(理)에 어긋나지 않는다.”
이렇게 함으로서 리(理)와 정(情)에 어긋나지 않게 되고 그래서 화쟁의 논리가 설득력이 있으면 진정한 화해가 가능하기 때문에 화쟁의 방법으로서 화쟁하는 사람의 언어적 표현의 태도가 중요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동의하고 동의하지 않음의 둘 모두를 떠나서 자유로운 입장에서 화쟁을 해야 화쟁하는 사람이 집착 없는 상태가 된다는 것이고 이것이 화쟁의 전제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렇게나 동의하지도 동의하지 않지도 않는게 아니라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가(一心之源) 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두 번 째로 원효는 ‘경전 내용에 대한 폭 넓은 이해’를 화쟁의 방법으로 강조하고 있다.
쟁론을 일삼는 사람들 중에는 자신이 아는 일부 (경전) 내용에 대한 낮은 소견을 갖고 그것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진리에 대한 낮고 부분적인 소견에서 벗어나 보다 넓고 깊은 전체적인 이해를 하도록 고쳐주고 인도하는 것이 화쟁의 방법이다.
(사실 이 점이 어렵다고 생각한다. 화쟁하는 사람이 가져야할 태도와 배치될 가능성이 클 수 있기 때문이다.)
<중략>;원효와 켄 윌버의 동일성과 상이성 그리고 상보성에 대하여
5. 화쟁적 통합철학의 전망
앞으로 모든 분야에서 화쟁적 통합철학을 열린 의식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하게 되면, 그래서 ‘지도와 영토’<윌버>를 혼동하지 않고, ‘달’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원효>을 혼동하지 않게 되고 궁극의 진리와 관계되는 모든 언어적 표현들을 일심(一心)의 근원으로 돌아가서, 일미(一味)의 법해(法海)로 돌아가서 보게 된다면, 또한 인지(人知)에서 나온 모든 ‘상대적 진리’들을 언어적 집착에서 벗어나 비전논리적으로 보게 된다면, 자연히 서로 저만 옳다고 다툴 필요가 없어지게 되면서 21세기에 신인류는 진정한 화해와 통합의 새 시대를 열어가게 될 것이다. 따라서 과학과 인지가 더욱 발달하고 인류의 평균의식이 제 2층 ‘밈'의식인 비전논리수준으로 더 진화되고 제3층 '밈’의 자아초월선단의식 수준의 신인류가 더 많이 출현하게 되면 앞으로 모든 분야에서 보다 온전한 ‘통합지도’가 나오게 되고 그럴수록 ‘지도’의 내용은 보다 더 다양한 스펙트럼의 색깔과 목소리를 내면서도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면서 상생적으로 공존하게 되는 진정한 화회적 통합의 시대가 도래하게 될 것이다.
실로 이 길만이 21세기에 평원화된 과학기술문명의 초고도화로 인하여 영성을 상실한 사이보그로 진화하여 결국 디스토피아적 멸망을 초래하지 않고, 깊이를 회복한 신영성의 시대로 진화하여 유토피아적 고도의 과학 기술문명을 누리는 의식이 진화된 인류로 진화하게 할 것이다.
댓글 4 추천하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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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곡 12.10.15. 13:47
초록색으로 쓴 것은 제 생각인데, 화쟁하는 사람이 어떤 견해에도 집착함이 없는 가운데, '무엇이 옳은 견해인가?'를 단정에서 벗어나 당사자들이 스스로 찾아가도록 하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모든 이해관계나 견해가 다른 사람들로부터의 신뢰가 어떻게 이루어질까 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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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곡 12.10.15. 17:02
리(理)와 정(情)을 함께 생각하는 것이 화쟁의 묘라고 생각된다. 이중부정, 이중긍정, 비연비불연 등이 제삼자적 입장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치열한 진리추구와 결합할 때 생명력을 갖는 것이다. 이 경우에도 정(情)을 잃지 않아야 화쟁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원효는 누누히 지적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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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봉 12.10.17. 23:02
100번은 읽고나서 다시 돌아온 외팔이처럼 질문을 삼가 드리...어안이 벙벙,놀람,흥분 입이 꽉 막혀 벙어리-묵언 2년 수행을 할까? 말을 하다보면 시행착오를 거듭 거듭 할 수록 달인의 경지의 문턱...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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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봉 12.11.01. 00:18
소통과 연대/암환자들을 치료하는 묘방으로 ....스크랩해갑니다.사내 대장부 하늘이 무 너져도 청산이 靑靑(Ever-Gree...n) 박영석(히말라야 14좌 등반 성공후 그곳에 묻힘 즐겁게 갔으리라 민습니다 영원한 미이라 아니 無無.武舞務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