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2/03

알라딘: 한국 기독교 형성사 옥성득 2020

알라딘: 한국 기독교 형성사


한국 기독교 형성사 
옥성득 (지은이)새물결플러스2020-02-27

768쪽

책소개
본서는 방대한 사진, 그림, 지도, 도표 등 희귀 자료를 곁들여가며 한국에 기독교(개신교)가 전파되던 당시 첫 세대 한국 기독교가 어떤 과정을 거쳐 골격을 형성했는지를 심도 있게 탐구한다. 한국 초기 기독교의 역사와 이를 통한 교훈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필독서다.

머리말

감사의 글

약어표

이미지(사진, 그림, 지도, 표, 도표) 목록

 

서론 : 경쟁하는 담론들

1. 개신교와 한국 종교들의 만남에 관한 탈식민주의 담론

    미국 선교사에 대한 진보와 보수 신학의 판에 박힌 평가

    브라운 패러다임의 문제

2. 초기 선교사들의 한국 종교 이해

    초기의 인상 무종교

    천주교와의 차별화

    수정한 반응 다중 종교성

 

제1장 : 하나님 - 용어 문제와 신조어 하ᄂᆞ님의 채택

1. 중국의 용어 문제

    로마 가톨릭 上帝天主와 전례 논쟁

    개신교 에 대한 上帝의 우위성

2. 한국의 용어 문제

    로마 가톨릭의 텬쥬(天主)

    존 로스의 하느님(하나님채택

    이수정의 신(사용

    언더우드의 다양한 실험과 송순용의 상뎨 지지

    텬쥬와 하ᄂᆞ님의 경쟁

3. 유일신 하ᄂᆞ님의 창출 : 선교사와 한국인의 합작

    한글 기독교 주간 신문의 원시 유일신론 논증

    독립신문의 하ᄂᆞ님 지지

    게일과 주시경 하ᄂᆞ님을 -크신-로 만들다

    헐버트의 삼위일체론적 단군신화 해석

    한국사 서술과 항일 운동에 나타난 한국인 기독교인의 단군 이해

    언더우드의 하ᄂᆞ님 수용

    성신과 성령

    성취론과 하나님, 1910-1924

결론 : 신조어 하ᄂᆞ님의 창출

 

제2장 : 구세주 - 정감록 예언과 십자가 파자 풀이

1. 경합하는 천년왕국적 미래상들

    북미의 복음주의적 천년왕국론

    정감록의 말세 예언

2. 로마 가톨릭의 십자고상

    18세기 조선 부연사들이 북경 천주당에서 본 십자가

    19세기 전반 북경 러시아 공관에서 본 십자고상

    辟邪紀實』 유포와 영아소동

3. 개신교의 붉은 십자기와 암호 해독

    천로역정과 십자가의 새 이미지

    정감록 예언의 기독교적 풀이, 1895-1905

    성 게오르기우스 십자가에서 예수기로

    국권 회복을 위한 십자기

4. 적십자의 일본 제국주의 이미지, 1904-1910

    일본의 적십자사병원과 간호부

    십자가에서 처형된 한국인 의병

결론 : 종교적 메시아와 정치적 메시아

 

제3장 : 성령 - 무교의 신령과 기독교 축귀

1. 귀신 숭배에 대한 선교사의 우상 파괴적 태도

    수용한 전통 귀신 숭배 금지

    거행한 의식 주물 불태우기와 당집 파괴

    이론 적용 귀신을 이긴 세균론

2. 한국 샤머니즘에 관한 개신교 선교사의 연구

    조지 하버 존스

    엘리 바 랜디스

    제임스 게일

    호머 B. 헐버트

    호레이스 G. 언더우드

3. 귀신들림과 기독교 축귀 의식

    산동에서 존 네비어스와 귀신들림

    한국에서 기독교 축귀 의식

    축귀하는 전도부인

    귀신들림에 대한 전근대적 관점 수용

결론 : 실천적 은사지속론과 샤머니즘의 공생

 

제4장 : 조상 - 유교 제사와 기독교 추도회

1. 한국 유교의 제사

2. 한문 소책자의 제사 금지 변증론

    매드허스트의 淸明掃墓之論(1826)

    네비어스의 祀先辨謬(1859)

3. 중국 개신교의 선교대회와 제사 금지 정책

    1877년 상하이 선교대회와 제사 문제

    1890년 상하이 선교대회

    1907년 백주년 선교대회

4. 내한 선교사들의 제사 금지 정책

    제사 금지 이론과 이유

    제사 금지 정책

    1904년 선교 20주년 대회와 신중론

5. 한국교회 반응과 한국인의 효도 신학

    제사 폐지와 박해 안내

    원시 유교 천제론과 기독교-유교 공존론

    제사 폐지 변증론과 조상 구원의 문제

6. 기독교 상례와 토착적인 추도회의 발전

    상례의 발전

    사회 추도식과 기독교식 단체 추도회

    가정 추도회의 발전

결론 : 효도신학과 추도회의 창출

 

제5장 : 예배당 - 근대성과 토착성의 조화

1. 수용 : 세 가지 통로에 따른 다양한 양식의 수용과 정착

    미국 고딕 복고 양식과 로마네스크 복고 양식

    만주 중서(中西절충형과 ㄱ자형

    산둥 예배당의 자급 원칙

2. 성장 : 예배 공간의 양적, 지리적 확산 과정과 특징

    양적 확산 전쟁과 부흥운동의 영향

    지리적 확산 서북 지역의 우세

3. 발전 : 대표적인 예배당들의 건축 과정과 특성

    황해도 장연군 소래교회

    평양 장대현교회

    전주 서문밖교회

    서울 정동제일교회

    원산감리교회, 1903

4. 외형 특징

    규모 자급형

    위치 풍수묘지성황당과의 갈등

    양식 한양 절충식으로 전통과 근대를 통합함

    형태 : ‘자형, ‘자형, ‘자형의 공존

    십자기 교권과 교폐의 갈등

    주련

5. 내부 특징

    휘장과 병풍 남녀 좌석의 분리

    양반석과 백정석 신분 분리가 교회 분리로

결론 : 개신교 근대성과 토착성의 병존

 

제6장 : 서적 - 한문 문서와 한글 번역

1. 동아시아의 기독교 인쇄 문화와 선교사들의 그물망 관계

2. 초기 한국 기독교인 지식인층

    지적인 중산층

    양반층의 개종

    한성감옥 도서관의 한문 기독교 서적과 양반층의 집단 개종

3. 한국에서 사용된 한문 성경

    대표자 역본과 한글 성경

    국한문 병용본과 국한문 혼용체본

4. 한국에서 사용된 한문 소책자

    번역 없이 보급된 한문 전도문서와 서적

    한글로 번역된 한문 전도문서

    한문 전도 책자의 메시지

5. 찬송가 : 번역의 토착화

    중국 찬송의 번역

    한국 찬송가 불교 용어의 사용

결론 : 우상 파괴론과 성취론의 공존

 

제7장 : 부흥 - 평양과 선도와 새벽기도

1. 19세기말 민간 종교와 선도

2. 청일전쟁과 평양 선도인들의 개종

    평양의 첫 기독교인들

    선도인들의 개종

3. 길선주의 개종 : 도교의 사적 구원에서 기독교의 공적 구원으로

    개종 동기

    개종 과정

4. 길선주의 새벽기도 : 개인 기도에서 공동체 기도로

    개인 아침 묵상신경

    장로교회 사경회에서 새벽기도회 시작

    감리교회 부흥운동과 새벽기도회

    길선주의 새벽기도회

5. 길선주의 평양 부흥회 : 부흥의 주역이 선교사에서 한국인 목회자로

    길선주의 부흥 설교와 영성

    모국어 설교와 한국인 지도자들의 부상

    통감부의 계몽과 선교사들의 계몽

6. 길선주의 서울 부흥회 : 교회의 무게 중심이 서울에서 평양으로

결론 : 대부흥의 해석사

 

결론 : 한국적 기독교의 토착화

1. 태평양 횡단 확산 : 북미 복음주의의 전파

2. 황해 횡단 확산 : 중국 개신교의 수용

3. 한국 종교와 혼종 : 한국 개신교 형성

 

참고문헌

색인

 


목차


머리말
감사의 글
약어표
이미지(사진, 그림, 지도 표, 도표) 목록
서론: 경쟁하는 담론들
제1장 하나님 용어 문제와 신조어 하??님의 채택
제2장 구세주 정감록 예언과 십자가 파자 풀이
제3장 성령 무교의 신령과 기독교 축귀
제4장 조상 유교 제사와 기독교 추도회
제5장 예배당 근대성과 토착성의 조화
제6장 서적 한문 문서와 한글 번역
제7장 부흥 평양의 선도와 새벽기도
결론 한국적 기독교의 토착화
참고문헌
색인


책속에서



세 개의 결정적인 발견으로 북미 선교사들은 한국 종교와 성에 대한 이해를 수정하게 되었다. 선교 사업의 첫 10년(1884-93년) 동안 그들은 한국인의 다층적 종교 정체성(multiple religious identity)을 발견했다. 이 다원성을 이해하기 위해 그들은 한국 종교를 더 깊이 연구했다. 두 번째 10년(1894-1903년) 동안 그들은 한국인 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단군신화에서 한국의 원시 유일신 신앙의 흔적을 발견하고 그 하??님을 기독교와 기독교 항일민족주의의 하나님으로 채택했다. 일부 선교사들은 한국 샤머니즘을 심도 있게 연구했다. 세 번째 10년(1904-13년) 동안 내한 선교사들은 부흥운동을 통해 한국인의 심오한 잠재력을 깨달았다. 선교사들은 한국인이 서양인과 다르고, 한국인은 더 높은 영적·윤리적 삶을 영위할 수 없으며, 한국인은 독립 국가와 민주주의 사회를 운영할 수 없다는 기본적인 가정을 버렸다. 1904-07년에 한국 정치 지도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이 출현하자, 그들은 문화 제국주의에 기초한 입국 당시의 전제와 가정이 잘못되었고 왜곡되었음을 깨닫고 수정된 담론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_서론 접기

하나님에 대한 공인된 이름인 하??님은 단군신화의 삼위일체적 성격의 신화적 근거와 원시 유일신론의 역사적 근거에 입각하여 채택되었다. 한국어 용어 하??님은 중국어 용어 上帝와 일본어 용어かみ와 비교하여 볼 때 순수한 유일신 삼위일체론과 양립할 수 있는 견고한 신학적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삼위일체 교리는 한국교회가 삼일 신관을 가진 타종교와 대화할 수 있는 잠재력을 제공했다.

한편 용어 하??님은 그 형성 과정에서 일부 부정적인 함의들을 극복하지 못했다. 하??님은 서북의 지역주의, 유교의 이성주의와 가부장주의, 무교의 혼합주의 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서북 기독교인들은 1900년대 와 1930년대 두 차례에 걸친 한 철자법 개정 때 서북 방언을 유지하기 위해 아래 아(ㆍ)를 없애는 간소화에 반대했는데, 자연히 하??님을 하나님이나 하느님으로 표기하는 안에 저항했다. 서북 기독교인이 다수를 차지하는 상황에서 채택된 하??님은 신학적 성찰보다 여론과 다수결을 따라간 면이 있었다. 초자연적 원리와 자연적 과정 사이의 상응이라는 유교의 형이상학적 개념은 기독교의 하나님과 예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내재적이고 개인적인 이해를 방해했다. 하??님이 가진 가부장적인 인상은 부분적으로는 긴 수염을 가진 단군 할아버지의 이미지나 산신 초상에서 왔고, 부분적으로는 상제의 유교적 이해에서 왔다. 무교적 혼합주의는 기독교 신자들과 여성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들에게 하??님은 물질적 번영이나 육체적 건강을 위한 묘약을 주는 도깨비 방망이에 불과했다. 하??님 용어의 역사에서 드러난 대중의 신학적 보수주의, 혼합주의, 가부장주의는 한국 개신교가 여전히 직면하고 있는 신학적 과제들이다.

_1장 접기

신유교가 왕조 이념으로서의 헤게모니를 상실하자, 한국에서는 네가지 종교적 메시아 사상?동학의 후천 개벽설, 개신교의 전천년왕국설, 개신교의 후천년왕국설, 일본의 신도 제국주의의 문명론?이 서로 경쟁 했다.165 수직적으로, 두 종교의 천년왕국 종말론인 미국의 세대주의와 한국의 민간 메시아 사상이 1894-1905년 전쟁기에 교회 마당에 세워진 붉은 십자기(예수기)에서 만나 통합되었다. 수평적으로는 두 개의 정치문화 이상인 기독교 후천년왕국설과 계몽 운동이 1890년대-1900년대 근대 국가 건설을 위해 통합되면서 개혁 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적, 국가적 이상은 1905년부터 동아시아를 문명화하고 식민지화하려는 일본 제국의 동아시아주의(pan-Asianism)에 의해서 왜곡되었다. 다양한 메시아주의적 민족주의 파벌 간의 경쟁에서 정감록과 십자가의 형상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 땅에서 천국을 상상하고 건설하도록 하는 핵심적인 촉매제가 되었다. 접기

신학적인 측면에서, 능력 대결 과정에서 일부 한국인들은 그리스도를 영매이면서 동시에 신령인 강력한 무당으로 인식했고, 선교사와 전도부인은 그리스도의 대리인이라고 이해했다. 서구 기독교의 합리주의와 한국 샤머니즘의 신령 사상 간의 상호작용은 두 세계관이 종교적으로 서로 접목되는 결과를 낳았다. 20세기로 접어드는 시점에 개신교 선교회는 영혼을 위한 복음 선교와 육체를 위한 의료 선교를 통합했다. 비록 육체의 구원이 영혼 구원의 한 수단으로 인식되기는 했지만, 영혼 구원의 우선성은 육체의 구원을 포함했다. 선교회가 세운 병원과 진료소에서 의사와 간호사는 ‘위대한 의사’인 예수의 대리인으로서 신체의 치유를 통한 전인적인 구원을 위해서 노력했다. 한센병 환자 사역은 기독교가 인간을 전인적으로 접근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육체는 과학으로, 영혼은 종교로”라는 근대 서구의 이원론 체계는 이들에게 양자택일의 난제가 아니었다. 귀신들림을 믿음으로 치유한 사례들은 의료 선교사와 복음 선교사 모두에게 이런 세속적 이분법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해주었다.

_3장 접기

상례는 전통 의례에 기독교 의례가 접목되면서 정리(??)에 따른 통상의례들은 수용했으나 비기독교적 요소는 배제했다. 상례 장소는 예배당을 추가하여 가정 입관식, 교회 출관식(장례식), 묘지 하관식 순서로 거행했다. 유교식 혹은 전통적인 상복, 상여, 상여 행렬 등은 그대로 허용했으나, 기독교를 상징하는 십자가 문양이 상여, 상복, 행렬 곳곳에 추가되었다. 행렬 중의 곡과 상여가는 찬송가로 대체했다. 묘지는 선산 매장을 인정했고 교회 묘지는 별도로 만들지 않았으나 음택 풍수는 금했다. 한식 청명 절기에 묘지 관리 차원의 성묘는 인정했으나 술과 음식을 바치고 절하는 것은 금지했다.

추도회도 조상들의 매년 기일을 인정했고, 신주 대신 정을 모시게 했으며, 유교 제사와 접한 관계에 있던 족보를 유지하게 했다.145 1주기 인 소상과 2주기인 대상때는 특별히 교인들을 가정에 초대하여 추도회를 드렸다. 가정 추도회에는 제사가 드려지던 시간과 장소, 일부 형식은 그대로 둔 채 교인들도 초청하여 찬송, 기도, 성경 읽기 등의 간단한 예배를 드리고 음식을 나누며 돌아가신 분을 추억하는 형식이 추가되었다. 또한 조상 기념의 방법으로서 사모하는 마음으로 유지 받들기와 자선사업 기부를 강조했다. 이는 조상에 대한 의존을 그리스도 안에서 조상과의 영적 교제로 변형시키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일부 교인들은 여전히 추도회 때 믿지 않고 죽은 조상과 부모를 위한 기도를 계속했다.

_4장  접기
이러한 한양 절충형 예배당 외형에 전통 종교와 타협한 내부 구조는 대한제국이 의욕적으로 근대화를 추구하고 가시적 성과를 거두었음에도 여전히 의식과 의례 측면 등에서 보수성을 극복하지 못한 점과 비교되는 한국 개신교의 근대성과 토착화의 균형 잡힌 성과다. 1903-07년에 전개된 개신교의 대부흥운동은 예배 공간에서 깃대를 없애고 휘장 철거를 논의하고 양반석을 폐지하는 등 동도·구본에서 부정적인 요소를 정화하는 과정이었다. 1910년 전후에 서울의 새문안교회와 승동교회가 로마네스크 복고 양식으로 건축되고 안동교회 등에서 휘장을 철거함으로써 서울에서는 장로회까지 구본신참을 너머 기독교 문명화 방향으로 전환해 나갔다. 그러나 평양을 비롯한 지방 교회들은 개량 한옥 양식을 고수하고 문화적·신학적으로 보수화의 길을 갔다. 진보적이고 서구화된 서울 대 보수적이고 토착화된 (서북) 지방이라는 개신교의 이중 구조는 1910년대에 심화되었고, 일제 총독부가 문명화 의제에 우위를 점하면서 새 국면을 맞이했다.

_5장  접기
19세기 개신교의 메시지는 동아시아 문화와 종교에 대해 우상파괴와 토착화라는 이중적인 태도를 취했다. 전자는 조상의 정령과 우상의 ‘미신적인’ 숭배 그리고 아편, 전족, 일부다처제 등 악습을 공격했다. 후자의 진보적인 태도는 기독교와 전통 종교 사이에 있는 유사한 접촉점을 강조하고, 전통 종교를 ‘복음의 준비’로 받아들다. 적응과 토착화라는 방법론을 채택한 결과 한문 개신교 소책자는 한국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었다. 역사적으로 이와 유사한 사례는 한 세기 전, 유교에 적응한 마테오 리치의 한문 천주교 문서를 한국 유학자가 받아들일 때 발생했다. 천주교의 경우에는 박해와 핍박으로 꽃피지 못했으나, 개신교는 시행착오를 줄이면서 상대적으로 많은 종교의 자유 속에서 급성장하면서 토착화의 열매를 거둘 수 있었다. 중국 기독교의 신학과 문서가 서구 미 기독교와 한국 종교 문화 사이에 가교 역할을 했다.

_6장  접기
평양의 도교적 기독교 영성이 한국(장로) 교회의 주류를 형성했고 그 중심에 도교(선도)에서 개종한 길선주의 적 지도력(설교와 기도)이 있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평양의 선도 수행자들에게 일어난 미미한 영적 지각 변동은 한국 전역에 파문을 일으키며 번져가서 한국교회의 복음주의 영성을 형성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 종교 의 전체 지형을 변화시키는 엄청난 파급 효과를 일으켰다. 일군의 도교인들─송인서, 김종섭, 길선주, 김성택, 옥경숙, 정익로, 이재풍, 김찬성 등─은 청일전쟁 전후에 개종하고, 평양 장로교회의 첫 지도자들이 되었으며, 1907년까지 대부분 장로나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이들에게 일어난 작은 지각 변동은 이후 북한 개신교의 급성장과 부흥운동, 나아가 한국교회의 성장과 부흥에 영향을 미쳤다. 길선주의 개종은 복음주의가 강조하는 중생 체험이 뚜렷한 전형적인 사례다. 그러나 1895년 청일전쟁 후 그의 개종 체험은 부흥운동 당시 한국인들의 기독교에로의 개종이 과거 신앙과의 완전한 단절이 아니라, 무교-선교-불교-유교로 발전되어온 한국인의 종교성이 근대 종교인 개신교를 수용함으로써 보다 완전한 종교로 성취되는 연속성을 유지하는 진화 과정을 보여주는 사례다. 동시에 그의 개종 동기였던 도교적 개인 구원관을 극복하는 대안으로서의 기독교의 사회 구원관은, 당시 북미 개신교의 근대 복음주의가 가졌던 기독교 문명론이 민족적 위기 속에서 근대 자주 국가 형성을 모색하던 한국 사회에 접목된 사례를 예시했다.

_7장  접기
1910년까지의 통사인 백낙준의 저서와 달리, 이 책은 개신교와 한국 종교 간의 초기 만남의 역사를 살펴보았다. 이는 지난 90년간 한국 사회와 교회가 여전히 민족의 정치적 과제들과 씨름하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그
주제를 깊이 논의하기에는 여력이 부족했으나, 이제 한 세기 후 타종교와 타문화와 타언어가 이웃이 된 현실에서 문화와 종교에 대한 건전한 기독교적 담론이 필요하고, 그 자료가 우리 땅에서 산출된 경험과 성찰이면 더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초기 한국 기독교사를 문화 제국주의나 종교 민족주
의를 넘어 문화 교류의 관점과 자기 신학화의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균형잡힌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 전자는 세계 기독교와의 대화이며 후자는 한국적 기독교의 창출로서, 이 두 측면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창조적으로 변형되고 발전되어야 한다. 미국 종교사의 관점에서 보면, 초기 한국 기독교는 주류 미국 개신교(복음주의)의 확장과 미국 자본주의와 미국 중산층 문화가 이식된 한 형태일지도 모른다.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관 점에서 보면, 그것은 20세기 초반 서구 제국주의와 그 도덕적 등가물인 서구 기독교 선교의 협력 사례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세계 기독교와 한국 종교의 통합된 관점으로 본다면, 그것은 독특한 한국 기독교의 형성 과정이었다. 한국 종교와 개신교의 상호 합류 과정에서 후자는 토착화의 방향으로 이동하여 전통성을 보유한 반면, 전자는 개신교의 자극을 받아 근대화 의 방향으로 이동하면서 근대성을 확보하려고 했다. 한국 개신교 1세대의 기독교 토착화 노력에 대한 유산의 발굴은 현 한국교회가 역사적 연속성과 정체성을 견지하면서 다양한 사회적, 종교적 문제에 활발히 참여할 수 있는 역사적 틀을 제공한다. 기독교의 정체성과 보편성의 원칙(수직적 초월)과 이민화와 문화화의 원칙(수평적 적응)의 창조적 조합을 통해 한국 기독교는 정체성과 적실성을 유지하면서 미완의 과제인 한국적 기독교를 형성해 나갈 수 있다.  접기

북미 선교사들이 한국 종교에 대해 초기에 보여준 인상적인 반응과 이후 수정된 반응이라는 변화 과정을 연구하면 그들이 온건한 복음주의적 선교신학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 모찌모찌

추천글

이 획기적인 연구는 한국 기독교의 발전을 다룬 책 중에서 가장 좋은 책이다. 옥 교수는 개신교 선교사와 한국 종교 간의 초기 만남을 추적하고, 세계 기독교 연구를 새롭고 더 깊은 방향으로 인도한다. 이 책은 필독서다.
- Dana L. Robert

이 놀라운 책을 통해 옥 교수는 내한 선교사에 대한 전형적인 이해를 초월하고, 개신교가 한국의 전통 종교와 어떻게 의미 있게 만났는지를 깊이 있게 탐구한다. 나는 이 책을 한국 기독교사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뿐만 아니라 한국적 성, 전통 종교, 종교 간의 대화에 관심을 가진 학자와 학생들에게 강력히 추천한다.
- 노영찬 (미국 조지 메이슨 대학교 종교학 교수)

이 책은 지난 한 세대 동안 등장한 한국 개신교에 관한 연구 중에서 가장 포괄적이고 중요한 기여다. 옥 교수는 1세대 한국 기독교인에 대한 기존의 학문적인 담론에 도전하고, 초기 한국 개신 교인들이 문화적 만남의 과정에서 직면하는 신학과 종교적 실천의 복잡한 논쟁점들에 대한 해결책을 스스로 발견하기 위해서 어떻게 노력했는지를 보여준다. 이 책은 앞으로 오랫동안 한국 교회사에서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 James H. Grayson (쉐필드 대학교 명예교수)

한국 기독교사에 대한 통찰력 있는 이 탁월한 연구서는 한국 근대사, 다문화 간 상호작용, 세계 기독교 연구에 관심을 가진 자에게 필독서다.
- Joseph Tse-Hei Lee (뉴욕페이스 대학교 교수)

“개신교와 한국 종교 문화 간의 초기 만남에 대한 역사는 문화 제국주의를 넘어 문화 교류의 관점에서 쓰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옥 교수는 그런 작업의 모델을 한국 사례에서 제시하지만, 이는 지난 150년간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기독교가 획기적으로 성장한 것에 대한 역사적 관점만 이 아니라 지난 2000년간 교회사를 보는 관점에 대한 모델이기도 하다. 곧 우리가 아주 다른 상황에서 반복해서 발견하는 “수직적 초월인 기독교의 보편성 원리와 수평적 적응인 문화화 원리의 창조적 조화”가 그것이다.
- John Wilson (Books & Culture 편집장)




저자 및 역자소개
옥성득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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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UCLA) 아시아언어문화학과 임동순·임미자 한국기독교학 석좌교수. 서울대학교 영문학과와 국사학과를 졸업한 후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과 대학원에서 신학 수업을 이어 나갔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 신학교(신학석사)와 보스턴 대학교 신학대학원(신학박사)에서 기독교 역사를 공부했다. 현재는 UCLA에서 한국 근대사와 한국 종교사를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는 『대한성서공회사』(전 3권), 『첫 사건으로 본 초대 한국교회사』, 『다시 쓰는 초대 한국교회사』, 『한국 기독교 형성사』(제37회 한국기독교출판문화상 대상) 등이 있고, 편역서로는 『언더우드 자료집』(전 5권), 『대한성서공회사 자료집』(전 3권), 『목판화로 대조한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의 생애』, 『마포삼열 자료집』(전 4권)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신데카메론>,<쇠퇴하는 한국교회와 한 역사가의 일기>,<조선예수교장로회 50주년 역사 화보> … 총 17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전통적으로 한국 초기 기독교사에 대한 연구는 서구 선교사들이 주도한 선교의 역사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본서는 책 제목이 말하듯이 영미 선교사들이 주체가 되어 한국을 대상으로 삼고 선교한 선교의 역사가 아닌, 한국인과 선교사들이 협력하여 만든 ‘한국’ 기독교의 역사에 대한 서술이다. 나아가 교회의 발달을 기술하는 교회사를 넘어 한국 종교사와 세계 기독교사의 일부인 한국 ‘기독교’ 역사의 서술을 지향한다. 또한 본서는 근대가 가진 식민성, 다층성, 혼종성을 탐구하지만, 동시에 창출된 한국 기독교의 기독교적 보편성과 한국적 독특성에 관심을 기울인다.
본서는 저자가 35년 동안 심도 있게 연구한 초기 한국 기독교사 연구의 결정판으로, 1910년까지 한국 개신교를 형성한 영국, 미국, 중국, 한국의 다양한 요소가 상호작용하면서 형성된 지형을 제시한다. 그가 시추해 들어가는 한국 기독교의 지층에는 태평양을 건너 전파된 영미 기독교, 황해와 만주를 통해 전래된 중국 기독교, 그리고 한국의 여러 종교들과 유기적으로 만나 형성된 한국적 기독교가 여러 층으로 쌓여 있으며, 이들을 융합시키는 촉매제가 된 혁명과 전쟁과 역병과 기근 등 시대 상황이 그 광맥을 관통하고 있다. 이 책은 개신교와 한국 종교가 만났을 때 발생한 갈등점과 접촉점을 확인하면서, 선교사와 한국 기독교인들이 만든 종교 담론과 토착화된 ‘한국 기독교’라는 오래되고 신선한 심층 지하수를 퍼 올린다.
본서는 2013년 캘빈 대학교 네이걸세계기독교연구소의 세계기독교연구시리즈 제1권으로 출판된 영문 학술서 The Making of Korean Christianity(베일러대학교출판부, 2013, 411쪽)를 저자가 직접 번역하면서, 지난 6년간 추가 연구를 통해 대폭 수정?보완한 개정판(768쪽)이다. 미국 기독교 서평지 Books and Culture의 편집장은 본서를 최우수작인 ‘올해의 책’으로 뽑았고, 선교학 잡지 International Bulletin of Mission Research는 “2013년의 탁월한 선교학 저서 15권”의 한 권으로 선정했다. 탈서구 세계 기독교 시대에 맞는 한국 기독교사에 대한 요구를 충족시키는 연구였기 때문이다.
그동안 초기 한국 기독교의 성장, 부흥, 민족주의 운동과 달리, 현재 한국 개신교에 요구되는 타종교에 대한 유연한 태도와 담론은 별로 연구되지 않았다. 반면 한국 기독교의 저층에 살아 있는 유산을 발굴한 본서는 1세대 북미 선교사들과 한국 기독교인들이 전통 종교를 파괴한 십자군이요 문화 제국주의자였다는 고정 관념에 도전한다. 본서는 영미 기독교와 중국 기독교와 한국 종교의 삼중 통합의 조합 양상을 추적한다. 주요 주장은 다음과 같다. 첫째, 초기 내한 북미 선교사들은 엄격한 청교도형 보수주의자나 전투적 근본주의자가 아니라 온건한 복음주의자들로서, 한국 종교를 파괴하고 기독교로 대체하려던 태도를 점차 버리고 그 안에 있는 선한 요소를 수용하고 이를 기독교로 완성해 나가는 성취론적 태도를 취했다. 즉 개신교를 한국인의 영적 열망과 예언적 갈망을 성취하는 종교로 제시했다. 둘째, 초기 한국 개신교는 중국 기독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는데, 이 한중 기독교 사이의 언어-신학적 연속성은 일본의 다신론적 식민주의에 대항하는 유일신론적 민족주의 형성에 기여했다. 초기 한국 개신교의 신학의 주류(主流)는 영미의 온건한 복음주의였으며, 진보적인 중국 개신교가 저류(低流)로 흐르면서, 1910년 이후 등장한 신류(新流)인 자유주의 일본 신학과 대결했다. 셋째, 북미 복음주의와 중국 개신교는 한국 종교에 있는 접촉점을 수용하고 삼중적 융합을 이루면서, 국가 이데올로기의 지위를 상실한 유교의 대안 신종교로 자립했다.
기독교는 한 문화권에서 다른 문화권으로 번역되는 번역성과 함께 특정 종교와 문화를 변화시키는 변혁성을 지니면서 동시에 그 문화권에 뿌리를 내리는 토착성을 가진다. 한국적 독특성과 세계적 보편성이 만나고,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창조적이 된다. 이를 성경적 이미지로 비유하자면 다음과 같다. 1) 한 겨리의 소: 밭을 일구는 한 겨리의 소처럼 기독교는 전통 종교와 함께 멍에(마태 11:29)를 메는 동반자가 되어 한국인의 영성을 쟁기질했다. 2) 접목: 한국 종교의 대목(臺木 stock)에 기독교라는 접수(?穗 scion)가 접목(로마 11:17)되어 뿌리의 진액인 유일신론으로 살아나면서 개량 신품종인 한국 기독교가 만들어졌다. 선교사들과 한국인들은 뉴욕, 시카고, 내쉬빌, 토론토에서 자란 과목을 화분에 담아서 기선에 싣고 태평양을 건너 한국 땅에 이식하거나, 뉴잉글랜드에서 수확한 복음의 씨를 서울 거리에 마구 뿌리지도 않았다. 그들은 중국 한문 문화권에서 잘 적응된 앵글로색슨-중국 기독교의 나무에서 좋은 접수를 갖고 와서 한국 종교라는 대목에 접목했고, 그 결과 한국 기독교라는 좋은 나무가 성장했다. 3) 봄날의 아름다운 나무: 유교와 기독교의 상호의존적 표리관계는 밝은 봄날의 아름다운 나무와 같다. 햇빛이 있어야 나무가 무성해지지만, 나무가 있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전통 종교에 있는 메마른 가지는 전지를 해서 제거해야 하지만, 유교라는 나무가 있어야 봄의 광채가 반영되듯이, 유교와 기독교는 상호의존적 관계에 있다. 4) 목걸이: 한국 개신교는 한국 종교에 흩어져 있는 보석들을 모아서 하??님이라는 유일신 황금 줄로 일이관지하여 아름다운 목걸이(창 41:42, 단 5:29, 아 4:9)를 만들어 한국인의 목에 걸어 주었다. 5) 물동이를 버린 사마리아 여인: 남편 다섯이 있던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요한복음 4장)처럼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한국인에게는 참 종교가 없었으나 기독교를 통해 메시아인 예수를 만나면서 마르지 않는 샘물을 마시게 되었다. 6) 마른 뼈들이 살아나 군대가 됨: 에스겔이 환상에서 본 계곡의 마른 뼈들처럼 생기를 잃었던 한국인의 종교성과 영적 갈망이 기독교의 거룩한 예언의 바람이 불자 살과 근육이 붙고 살아나 종말 공동체인 큰 군대(겔 37:10)가 되었다.
본서는 서론과 7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론은 경쟁하는 종교 담론과 선교사들의 한국 종교 이해를 다룬다. 1부에 해당하는 1-3장은 신학(삼위일체)의 한국화 과정, 곧 신론(하나님 용어 형성을 통해 본 한국적 하나님론), 메시아론(종말론), 성령론(귀신론)을 토론한다. 4장은 1부와 2부를 이어주는 조상론(제사론)이다. 2부에 해당하는 5-7장은 교회론으로 예배당(공간론), 성서와 서적(번역론), 부흥 운동(의례론)을 분석한다. 토론하는 종교는 유교, 불교, 도교(선도), 동학(천도교), 민간 종교로서의 정감록 신앙과 풍수신앙 등이다. 서술 방법은 1) 1960년 이후 기존 해석에 대한 비판, 2) 그런 담론을 만든 여러 자료의 정리, 3) 저자의 논지를 입증하기 위해 논쟁과 토론 과정에서 생성된 1차 자료 정리, 4) 결론적으로 포용적 성취론적 해결 과정을 드러냄으로써 한국 기독교의 자기 신학화(self-theologizing)의 사례와 잠재성을 강조했다. 책에는 사진 87장, 그림 17장, 지도 5장, 표 9개, 도표 3개 등 총 121개의 이미지가 포함되어 가독성과 이해력을 높인다. 표지 그림처럼 삶이나 신앙은 순례다. 한국 기독교의 순례와 그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기독교(개신교)가 한국 종교와 사회와 동행하면서 자기 정체성을 잃지 않고 서로를 풍성하게 만들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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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초기 한국 기독교 제대로 알아가기

성경해석과 설교에서의 가장 기본적인 뼈대는 이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본문이 기록된 당시의 정황(context) 가운데 본문(text)은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있으며, 그 메시지를 현재의 정황(context)에서 우리는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가?

본문이 기록된 당대의 정황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고대 근동과 이스라엘의 역사와 문화, 정치, 문학 등을 연구한다. 우리 삶의 터전을 이해하고 현재의 정황에서 우리 삶에 적실하게 본문의 메시지를 적용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삶의 맥락을 분석한다.

현재 삶의 정황을 분석할 때에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자신이 속한 나라의 초기 기독교 역사일 것이다. 그 역사를 이해해야 이스라엘의 종교에서 그 나라의 종교로 어떠한 토착화의 과정을 거쳤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진공상태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며, 현재에도 우리의 의식과 세계관 한가운데 여전히 우리나라 고유의 정신과 정서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초기 기독교 역사를 이해함에 있어 아주 귀한 책이 출간되었다. 새물결플러스에서 나온 『한국 기독교 형성사』는 부제에서 드러나듯 1876년부터 1910년까지 한국의 종교와 개신교의 만남 가운데 어떠한 다양한 사건들이 발생했는지를 말해준다.

머리말에서 저자가 밝히듯 이 책의 1장에서 3장은 삼위일체의 한국적 이해를 다룬다. 1장은 하나님이라는 용어가 어떻게 정착해갔는지, 2장은 한국인이 이해한 십자가의 이미지를 통해 발전해 나간 메시아상과 천년왕국상을 조사한다. 3장은 한국 개신교에서 샤머니즘과의 관계를 분석하고 그것의 갈등과 협상을 토론한다.

4장에서 7장은 더욱 세부적인 사건들을 다룬다. 4장은 제사 문제, 5장은 한국 교회의 예배당의 특징과 발전 과정, 6장은 한문 문서와 한글 번역, 7장은 평양의 부흥 사건을 해석한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미국과 중국, 그리고 한국의 종교와 문화 가운데에서 발생한 독특한 한국 기독교의 발생과 형성 과정을 서술한다.

이 책의 특징은 역사적 사건들의 객관적 서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다채로운 정황과 입체적인 해석을 곁들이고 있다는 데 있다. 즉 한 사건의 원인과 그 과정, 그에 따른 영향력 등을 상세하게 기술하며, 그 사건을 신학적이고 교회론적이며 정치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또 다른 특징은 풍부한 원자료들을 배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존에 접하지 못했던 초기 한국 기독교의 풍부한 자료들을 직접 대할 수 있다. 이는 독자들이 함께 공동 해석 작업에 동참하여 당대의 분위기와 맥락 등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초기 한국 기독교에 대한 오해와 무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 책은 특히 초기 한국 기독교의 형성 과정에서 선교사들의 세계관과 신학의 형성과 변화의 과정을 알 수 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그릇된 정보들로 인해 그동안 잘못 이해하고 있었거나 대충 알았던 사실들에 대해 정확하게 교정할 수 있다.

우리는 풍성한 자료와 상세한 설명, 다양한 해석 등을 통해 초기 한국 기독교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더불어 이야기 곳곳에서 느껴지는 감동은 덤이다. 이 책을 통해 저자가 얼마나 큰 수고와 노력을 했는지를 알 수 있고, 앞으로 많은 목회자와 신학생, 성도들이 그 배려 가운데 큰 도움을 받을 것 같다.

한국에는 종교가 없다"는 말은 한국인에게 종교라는 인식이나 개념 자체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오래된 종교들이 쇠퇴해서 사람들을 사로잡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선교사들의 눈에는 종교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는 뜻이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이 점을 의도적으로 강조했는데 이는 한국은 무종교 상황이므로 기독교 선교가 정당하다는 주장을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 P60

이 논쟁은 한문 용어 대 한글 용어의 대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서울의 교회연합 정신을 가진 보다 포용적인 집단과 평양에 중심을 둔 개신교의 정체성을 강조하려는 ‘극단적 개신교‘ 집단 간의 갈등이었다 - P136



스코트 부인은 한국 개신교의 놀라운 성장의 원인을 한국인의 내면에 자리 잡은 유일신론으로 보았다. 한국인이 그런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갖고 있다면 결코 일본의 물질주의나 다신교인 신도(神道)에 만족할 수 없었다. 한국인은 한국인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한국의 역사와 언어와 영성에 밀착되기를 원했다. 기독교의 하나님 신앙은 일본의 군국주의와 물질주의에 맞선 한국의 민족주의와 영성주의에 연결되었다 - P177



1903-08년 부흥운동이 개신교회를 휩쓸 때, 교회의 십자가와 십자기는 다양한 의미- 구속의 장소, 난민의 피난처,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요새, 선교사의 치외법권으로 보호 받는 정치적인 힘, 메시아 도래를 예견한 전통 예언의 성취, 서구 과학과 기술, 한국의 민족주의-를 지녔으며, 이들은 상호 보완적으로 공존했다 - P274



서양 의학이 콜레라균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은 한국인 회심자들의 마음에 안정을 주었는데, 이는 더 이상 신령에게 벌을 받거나 질병 앞에 무기력하다고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신령에 대한 두려움은 사탄 마귀에 대한 두려움으로 대체되었고, 세균은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이길 수 있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 P295



북미 선교사는 한국인과 한국 사회에 영향을 미쳤지만 동시에 한국의 종교문화적 환경, 특히 샤머니즘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선교사들이 일종의 세계관적 회심을 경험했다고 하겠다. 귀신들림 현상에 관한 선교사들의 증언은 종교 개념과 사고방식 사이의 상호작용을 집약적으로 보여주었다 - P334



유교의 제사가 족벌•계급•성을 차별하는 기제로 작동했다면, 기독교의 예배는 한 하나님 앞에서 평등함을 드러내는 계급 철폐의 상징이었다. - P382



한국교회는 유교의 오륜과 수신의 법도를 기독교 윤리로 수용하고 실천했다. 교회 지도자들은 죽은 조상의 영혼 대신 살아 있는 부모에게 효도할 것을 강조했다. 죽은 조상에게 드리는 죽은 제사 대신 살아 계신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을 ‘산 제사‘로 불렀다. 한국교회는 부모 생전에 효도할 것을 강조함으로써 유교도들의 박해와 반대를 다소 경감시키고 한국인의 도덕성에 호소할 수 있었다. 그들은 제사를 십계명의 제1, 제2계명 측면에서만 검토한 것이 아니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5계명의 측면에서 바라보았다. 그것은 성경에 근거한 효도의 의무였다 - P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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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찌모찌 2020-04-18 공감(17) 댓글(0)





조선산 기독교의 형성

1.

한국의 무교회주의자이자 조선을 성서 위에 세우겠다며 <성서조선>지를 창간하였던 김교신은 '조선산 기독교'라는 말을 남겼다. 이는 해외의 선교사들로부터 이식된 개신교가 아니라 조선인의 주체성이 담보되며 "김치와 된장 냄새가 나는" 기독교이다(그럼 루터의 신학에서는 독일산 맥주의 냄새가 나나?). 요는 서구의 종교인 개신교를 조선의 문화와 풍토 등에 맞춰 주체적으로 수용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1960년대에 더 강화되어 초기 개신교 선교를 "사상적 식민지적 예속"이라 부르며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표출하거나 해방신학, 바르트의 신정통주의에 영향을 받아 윤성범이나 민중신학의 안병무 등으로 이어진다. 최근에도, 이만열과 덴버신학대의 정성욱도 김교신의 "조선산 기독교"가 연상되는 주장을 한다(자세한 내용은 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III권 참조). 한국 고유의 토착 신학과 토착 기독교를 주장한다는 것은, 뒤집어 생각해보면, 아직까지 한국의 개신교는 서구에서 들여온 외래 종교이며 더 나아가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이식된 종교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여담으로, '이식된 기독교 담론'이 과거에 한국의 민주주의는 해방 이후 미군정에 의해 이식되었다는 과거의 인식과도 묘하게 닮았다는 인상을 받는다). 서남동/안병무 등의 민중신학과 80년대 이후 고조된 반미주의는 '한국 고유의 기독교의 결여'를 더욱 강화하였고 초기 선교사들을 "보수적(49p)", "근본주의적(49p)", "배타주의적(46p)", "오리엔탈리즘적(51p)"이라고 규정하는 데에 일조했다.

2.

그러나 옥성득은 이만열, 민경배, 이덕주, 류대영, 박용규 등 기존의 한국 기독교사 연구가들이 초기 선교사들을 근본주의자, 보수주의자로 규정하며 초기 한국 기독교를 '선교사들의 의해 이식된 미국 기독교'로 보는 담론을 비판한다. 옥성득의 <한국 기독교 형성사>는 "미국-중국 기독교와 한국 종교 문화 속에 있던 친화적인 요소들 사이의 융합을 통한 토착적 한국 개신교의 창출사"에 관심을 두고, "성취론으로 기독교 토착화의 길을 연 온건 복음주의자"와 "1세대 한국 기독교인의 다층적인 신학과 신앙"의 역동적이며 창조적인 역사를 밝히고 이를 입체적으로 증명하려 노력한다. 특히 그 과정에서 그가 염두에 둔 것은 "미중한의 삼중 요소의 통합"으로, 조선 선교 이전에 쌓인 중국 선교 경험이 어떻게 조선 선교에 영향을 주었는지 보여준다.

3.

그에 따르면, 분명 초기 선교사들에게 오리엔탈리즘적 요소가 발견된다. 알렌은 선교 초창기 보고서에서 "한국인들에게는 종교가 없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기록하였고, 아펜젤러는 "유교를 종교가 아닌 윤리학 체계로 분류"하며 "불교 승려는 문명의 영역 바깥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았다. 한국은 무종교의 나라(이는 기존 종교가 사회적으로 거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라는 "성급하고 피상적인 평가가 초기 선교사들의 활동 방향을 결정했다. 초기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무종교, 혹은 그릇된 종교들의 땅에 진정한 종교를 심는 사람들이라는 정체성을 확립했다." 그러나 한국에서 생활하는 기간과 한국에 대한 학문적 지식이 늘어나고, 한국인 성도들이 늘면서 선교사들의 평가도 바뀌기 시작했다. "그들은 한국인의 다층적 종교 정체성을 발견했다." Korean Repository의 창간, 동학농민운동, 하나님 용어 논쟁,한국인 지도자들의 성취론적 한국 종교 이해, 미국 ASV 역, 대부흥운동 등 일련의 6가지 사건들을 경험하며 선교사들은 초기에 가졌던 편견들 수정하고 한국인의 종교 전통과 기독교 신학을 조화시키기 시작했다. 이처럼 선교사들의 수정된 시각과 관점을 바탕으로 이 책의 각 장의 내용이 전개된다. 1장은 히브리어로 엘로힘, 헬라어로 데우스가 "하나님"(원래는 '나'는 아래아를 쓰지만, 불가피하게 하나님으로)으로 번역된 과정을 설명한다. 2장은 정감록 예언을 활용하여 한국인에게 십자가의 이미지를 이해시키고 메시아 신앙으로 발전시킨 과정을, 3장은 초기 선교사들이 조선 무당의 축귀 등 샤머니즘을 어떻게 대했는지를 다룬다. 1~3장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어떻게 한국적으로 받아들여졌는지를 다룬다. 4~7장은 유교의 제사, 서양과 조선 상황이 예배당 건축 발전에 미친 영향, 성취론적 입장의 한문 전도 소책자와 양반 지식인의 회심, 길선주 등 도교적 신앙을 가졌던 인물들이 새벽기도와 부흥회와 가지는 상관관계를 분석한다.

4.

그중에서도 가장 흥미를 끌었던 주제는 유교 제사문제였다. 중국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 선교사들도 초기에는 제사 문제에 대해 엄격한 자세를 취했다. 그 이유는 1) 죽은 영혼에 대한 제사는 우상숭배라는 점, 2) 근대 문명 개화 시세에 맞지 않다는 점, 3) 천주교 연옥교리 및 미사와의 유사성, 4) 유교 제사가 조선의 후진성의 원흉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두번째와 네번째 이유는 다분히 선교사들의 오리엔탈리즘적 편견을 지적할 수 있는 부분이고, 특히 4번째 이유는 일제의 정체성론과도 유사하다. 이는 "제사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제사 금지 정책이 시행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1890년대, 진보적 선교사들은 성취론의 관점으로 이러한 제사-우상숭배론을 비판하였고, 종국에는 "조상 숭배에는 적절한 공경의 뜻만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예배의 뜻도 있으므로, 제사 대신 중국인의 관점의 근접하는 추도회로 드리되 제사의 장점을" 살리는 쪽으로 선교 방향이 잡혔다. 이와 거의 동시기에 일부 한국 선교사도 제사 금지 신중론의 태도를 보이며,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지도를 받은 한국교인들이 제사 의례의 기독교화를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조선인의 다층적 종교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시왕이 죽은이의 혼(魂)의 운명을 결정하며 자손의 제사와 무관하다고 믿는 한국인들의 제사는 우상숭배와 거리가 있고 정성들인 제사와 하나님의 복을 연결지어 제사가 선교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한편으로, 한국교회는 제사 금지 정책을 수용하면서도 이와는 다른 논리를 펼쳤다. 즉, "기독교가 유교의 약점을 보완"한다며, 한문소책자에 근거하여 "이 큰 道는 한 나라에 한정되지 않고 동서고금에 통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더 나아가 조선 유교의 天도 "전통적 하나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인격신 요소"가 유지되고 있다며 결과적으로 "만물의 근본인 하나님 예배의 회복은 유교의 완성"이라고까지 주장하기에 이른다. 노병선의 기독론적 조건부 보편 구원론, 길선주의 포괄주의는 위와 같은 성취론적 유교-제사 이해의 대표적 주장들이다. 결국, 선교사들은 제사가 지니는 긍정적 가치를 "기독교적으로 영구화시킬" 방안을 궁리했고, 그 결과로 '세례받은 제사'가 탄생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십계명과 유교의 효 사상을 접목하여 효도 신학이 적극 소개되었고, "인류의 천부인 성부 하나님은 평등한 믿음 공동체, 효자의 모범이신 성자 예수님은 속죄와 화해의 사랑 공동체, 효도의 영인 성령은 거룩한 제의 공동체와 성례 공동체"라는 삼위일체적 차원에서 이해되었다. 효도신학의 배경에서, 오늘날의 기독교식 상례와 거의 유사한 절차의 상례와, 간단한 예배와 교제와 함께 조상에게 묵도하는 기독교적 추도회가 마련되었다.

5.

헬무트 리처드 니버는 기독교와 세속문화와의 관계를 논하면서 가장 이상적인 관계는 죄로 물든 세상의 잘못된 문화를 복음에 맞추어 그리스도교적으로 변혁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한국의 제사 사례는 세상변혁적 신앙의 한 예시라고 생각한다. 선교사들은 초기에는 편견 가득한 눈으로 제사를 정죄하고 금지하여 제사와 대립하였다. 그러나 중국 선교회의 경험과 한국의 현실과 한국인의 영성을 이해하면서 그들은 입장을 온건하게 바꾸었다. 그 덕분에 제사는 효도신학이라는 이름으로 기독교의 세례를 받았고, "제사의 문화적, 윤리적 전통은 유지하되 우상숭배 요소는 배제하고 대신 기독교적 요소로 대체"된 한국교회만의 기독교적 제사(추도회)가 등장할 수 있었다. 특히 한국에 맞게 제사의 대안을 고민한 목회적 모습에서는 배타주의나 문화적 제국주의의 면모 보다는 일면 포용적 면모가 돋보인다. 또한, 그 과정에서 길선주 등 한국 개신교회 초기 성도들도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은 여러가지를 시사한다. 이와 같은 저자의 논리는 1~7장까지 일관적이다. 기존의 연구자들이 인식하는 것과 같은 '문화배타주의적/근본주의적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이식되고 한국인은 배제된 한국 기독교'는 없다. 오히려 앞에서 본 제사의 사례, 뿐만 아니라 "하나님 용어"의 사용, 새벽기도회, 정감록 예언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한국인에게 이해시킨 사례처럼 초기 한국 기독교가 만들어져 가던 역사는 선교사들이 조선의 다층적 종교 위에서 개신교를 결합시킨 혼합주의의 역사였다. 선교사들은 일방적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전도하지 않았으며, 한국인도 수동적으로 이를 받아들이지만은 않았다. 김교신이 그토록 이야기했던 "조선산 기독교"는 이미 한국교회의 형성기부터 내재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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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우 2020-07-05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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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성득, 『한국 기독교 형성사』를 읽고(류대영)
2020년 3월 18일

좋은나무
https://cemk.org/16233/

『한국 기독교 형성사』는 대중을 위한 책이 아닌 학술서다. 따라서 기독교, 한국 개신교 역사, 해당 시기의 한국사 등에 대한 기본 지식이 없는 사람이 읽기에는 좀 버거울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한국 개신교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이 책을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책을 통해 독자들은 북미 선교사들이 가지고 온 개신교가 한국의 정치, 문화, 언어, 종교와 어떻게 만나고 어떻게 상호 반응했는지 돋보기로 보듯 명확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본문 중)

류대영(한동대 교수, 역사학)

 

옥성득, 『한국 기독교 형성사』

새물결플러스 | 2020. 2. 27. | 768쪽 | 42,000원

그동안 많은 서평을 쓰고 논찬을 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그런 일들이 사실은 자기 자랑의 또 다른 방식임을 알 수 있다. 물론 논문과 책을 내는 일도 다르지 않다. 서평을 쓰거나 논찬을 하고 나면, 늘 후회가 되고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이 그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하여, 얼마 전 나는 다른 사람의 글이나 책 평가하는 일을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이번에 기윤실로부터 옥성득 교수의 새 책 서평을 부탁받고 고사하다가 결국 글을 쓰게 된 것은 약간의 의무감 때문이다. 옛 친구가 좋은 책을 내었으니 소개하여 많은 사람이 읽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 글은 일종의 추천사이니 좀 더 비평적인 평가는 다른 전문가들의 의견을 참고하기 바란다.

옥성득 교수는 한국 개신교 초기 역사에 관한 최고 권위자 가운데 한 명이다. 그가 영문과 학부생 시절부터 이만열 선생님 문하에 들어가 선교사 자료를 읽기 시작했으니, 벌써 35년 넘게 한국 개신교 역사를 공부하고 있는 셈이다. 원효로 자취방에서 해석은커녕 무슨 글자인지 알기도 어려운 헨리 아펜젤러의 손 편지 복사본을 해득하느라 끙끙대던 그의 모습이 생생하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그는 초기 미국(북미) 선교사 및 영미 성서공회 관련 일차자료를 가장 많이 읽고 정리한 학자가 되어, 그 분야에서는 비견할 수 없는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 한국 개신교 역사 연구의 중심지는 한국이다. 그것은 한국문학과 한국역사 공부의 중심지가 한국인 것과 다르지 않다. 그만큼 한국에 연구자가 많고 자료가 풍부하기 때문이다. 물론 해외에도 한국의 역사, 문학, 종교를 공부하는 몇몇 훌륭한 연구자들이 있지만, 학문이 개인이 아니라 집단에 의해 발전하는 것임을 생각할 때, 그들의 기여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옥성득 교수는 매우 예외적인 학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해외에 있으면서도 국내 연구에 전혀 뒤지지 않음은 물론이고 오히려 많은 선도적인 연구를 해왔다. 무엇이든, 그가 쓴 글과 책은 믿고 읽어도 된다.

『한국 기독교 형성사』는 옥성득 교수의 35년 연구 역량을 집결한 매우 탁월한 연구서다. 그동안 옥 교수의 공부는 크게 세 가지 분야로 진행되었다. 첫째, 호러스 언더우드나 사무엘 모펫, 그리고 영미 성서공회 등에 관한 일차자료 편집·번역서; 둘째, 평양대부흥이나 초기 한국 개신교 역사에 관한 통사류 혹은 대중적 서적; 그리고 셋째, 한국이나 해외에 발표한 여러 학술 논문들이 그것이다. 이번에 출간한 『한국 기독교 형성사』는 박사학위 논문(2002)을 보완하여 출간한 영문 단행본(2013)의 한국어판이다. 굳이 말하자면 이 책은 세 번째 부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지만, 사실은 세 분야의 연구 역량이 집결되었다고 할 수 있다. 책의 기본 틀은 박사학위 논문에서 완성되었지만, 그 이후 수정 및 보완하여 완성된 것이다. 약 18년 전에 쓴 박사학위 논문에 기초한 책이라 너무 오래전의 연구 결과가 아닌가 싶을 수도 있지만, 그만큼 공을 많이 들였다는 뜻이기도 하다. 미국에서 학술서 한 권을 주요 출판사를 통해 내는 일, 특히 박사학위 논문을 수정하여 단행본으로 내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아는 사람이라면, 박사학위 논문과 원본 영문 책 사이의 10년 간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이다.


ⓒ새물결플러스.

 

이 책은 『한국 기독교 형성사』라는 제목이 붙어서 통시적(通時的; diachronic) 역사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공시적(共時的; synchronic) 성격을 가진 역사 연구다. 물론 각 장은 통시적 접근을 하지만, 7개의 장들은 각각 독립적 주제를 다루며, 서로 통시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이 책은 숲이 아니라 여러 나무들을 자세히 보여줌으로써 숲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도와준다. 책의 주된 관심은 일본 강점 이전의 초기 한국 개신교 역사에서 선교사들이 전한 개신교와 당시 한국의 종교전통이 어떻게 만났는지 살펴보는 데 있다. 구체적으로 책은 다음과 같은 주제들을 다룬다. ‘하나님’이 어떻게 개신교의 신(神) 명칭으로 자리 잡게 되었는가(제1장). 정감록 해석과 십자가 사용이 개신교 수용에 어떻게 기여했는가(제2장). 샤머니즘과 축귀(逐鬼) 의식을 선교사 및 개신교인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가(제3장). 유교적 조상제사가 어떻게 여겨졌고 기독교적 추도예식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제4장). 초기 예배당들은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떤 특징이 있는가(제5장). 한문 및 한글 기독교 문서(전도서, 성경, 찬송)는 어떤 특징이 있는가(제6장). 그리고 길선주의 도교적 배경은 대부흥 과정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어떤 역할을 했는가(제7장). 이런 주제들을 다루기 위해 저자는 많은 일차자료(영문, 한글, 한문)를 섭렵했는데, 그 분량과 범위의 방대함이 놀랍다. 거기에 더하여 다양한 해외의 이론 및 국내외 연구 결과를 참고했다. 자료, 특히 일차자료의 충실한 검토야말로 역사 연구의 완성도를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임을 생각할 때 이 책은 역사 연구의 좋은 모범을 보여 준다 하겠다.

『한국 기독교 형성사』는 대중을 위한 책이 아닌 학술서다. 따라서 기독교, 한국 개신교 역사, 해당 시기의 한국사 등에 대한 기본 지식이 없는 사람이 읽기에는 좀 버거울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한국 개신교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이 책을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책을 통해 독자들은 북미 선교사들이 가지고 온 개신교가 한국의 정치, 문화, 언어, 종교와 어떻게 만나고 어떻게 상호 반응했는지 돋보기로 보듯 명확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풍문으로, 교회 모임에서, 혹은 인터넷에서 접할 수 있는 정보로 알 수 있는 것과 엄밀한 학문탐구를 통해 알 수 있는 것 사이의 거리는 아득히 멀다. 한국 개신교 역사를 오랫동안 공부한 나는 이 책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았다. 책이 다루는 주제들에 관해 문외한이 아니었던 나조차도, 막상 책을 읽으며 그동안 몰랐던 것이 많았음을 새삼 알게 되었다. 아마 대부분의 일반 독자들은 이 책을 읽으며 이루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새로운 역사적 사실을 접하게 될 것이다. 공부의 시작은 자신의 무지를 깨닫는 데 있다. “오늘의 것 가운데 과거에 씨앗이 뿌려지지 않은 것은 없다.” 역사학의 오랜 금언(金言) 가운데 하나다. 과거를 알면 오늘을 이해할 수 있으며, 미래를 짐작할 수 있다.

한국 개신교는 이제 지도자들의 자기반성과 자기개혁을 통해 새로운 모색을 도모하기에는 너무 깊은 수렁에 빠져 있다. 평신도들의 대대적인 자각과 깨어있는 행동만이 희망이다. 자각은 정체성의 인식에서 오며, 올바른 정체성은 자신의 역사적 좌표(座標)를 정확히 깨닫는 데로부터 시작한다. 역사적 정체성을 알기 위해서라면, 좋은 역사책 읽는 것보다 더 좋은 길은 없다. 『한국 기독교 형성사』는 한국 개신교의 오늘이 걱정되고 내일이 궁금한 모든 사람이 읽어야 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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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 형성사’ 2020 최고의 기독 신간 선정
 손동준 기자 승인 2021.01.07

한국기독교출판협회, 제37회 한국기독교출판문화상 수상작 발표
기독 양서 발굴 및 독서문화 증진 위해 해마다 우수도서들 선정

UCLA에서 한국기독교학을 가르치는 옥성득 교수의 ‘한국 기독교 형성사’(새물결플러스)가 지난 한 해 발행된 기독 신간 가운데 최고의 책으로 꼽혔다.

한국기독교출판협회(회장:황성연, 이하 기출협)가 제정하여 올해로 37년째를 맞은 ‘한국기독교출판문화상’ 수상작이 최근 발표됐다. 기출협은 기독 양성의 발굴 및 독서문화 증진을 위해 ‘한국기독교출판문화상’을 제정하고, 매해 회원사들의 신간들 중 접수를 받아 5개 분야(국내, 국외 구분)에서 심사하여 우수도서들을 선정하고 있다. 

올해 대상은 옥성득 교수가 쓴 ‘한국 기독교 형성사’가 선정됐다. 지난해 2월 출간된 이 책은 방대한 사진, 그림, 지도, 도표 등 희귀 자료를 곁들여가며 한국에 기독교가 전파되던 당시 첫 세대 한국 기독교가 어떤 과정을 거쳐 골격을 형성했는지를 심도 있게 탐구한다. 한국 초기 기독교의 역사와 이를 통한 교훈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필독서’로 통하고 있다. 

저자인 옥성득 교수는 서울대학교에서 영문학과 국사학을 전공했으며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와 보스턴신학교에서 기독교 역사를 공부했다. 현재 UCLA 인문대 아시아언어문화학과의 한국기독교학 석좌교수로 재직하면서 한국 근대사와 한국 종교사를 가르치고 있다. 한국 기독교 역사를 동아시아 역사와 세계 기독교 역사와의 관계 속에서 살피는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저서로는 ‘한반도 대부흥’, ‘대한성서공회사’, ‘다시 쓰는 초대 한국교회사’ 등이 있다.

한국기독교출판문화상은 전체 대상(국내작에 한함) 및 각 분야별 최우수 1종을 선정하고, 1차 심사를 통과한 도서 전체를 분야별 우수도서(10종 이내)로 선정한다. 대상(大賞)의 경우 국내서로 제한하여 선정하나, 당해 연도에 수상작이 없을 수도 있다. 

기출협은 지난해 9~11월 1차 심사를 진행했으며, 2차 심사를 통해 수상작을 선정했다. 올해는 총 12명의 심사위원이 1차 심사를 맡았고, 협회 출판분과위원회(위원장:조경혜)에서 2차 심사를 맡아 대상 1종, 최우수상 10종(분야별 1종), 우수상 18종(분야별 2종) 등 총 29종을 선정했다. 

1차 심사의 경우 출품된 작품들을 분야별로 심사위원이 기획, 편집, 제작, 디자인 등의 요소로 점수를 매겨 총 50~100점으로 평가하고, 심사평을 작성했다. 2차 심사의 경우 1차 심사에서 심사위원들의 합산 점수로 최고점을 받은 후보작을 3배수로 압축해, 1차 심시위원들의 심사평과 점수, 2차 심사위원들의 평가를 더해 최종 선정했다. 

1차 심사위원은 △어린이 분야:강정훈, 김은덕, 임희옥, 현은자 △청소년/신앙일반 분야:계재광, 노지훈, 배태훈, 송광택 △신학/목회자료 분야:고용수, 도한호, 박창영, 황민효 등이며, 2차 심사위원은 기출협 회장단 및 출판분과위원회가 맡았다. 

분야별 최우수상에는 △어린이 국내:마음콩콩 성경동화 세트(함성비엔에스) △어린이 국외:하나님과 만나는 100일 과학 큐티2(루이 기글리오) △청소년 국내:109편의 스토리를 따라 세계 교회사 걷기(임경근) △청소년 국외:하나님의 속도(테리 루퍼) △신앙일반 국내:신학 레시피(이동영) △신앙일반 국외:다시 춤추기 시작할 때까지(윌터 브루그만) △목회자료 국내:깜놀 히브리어(이요엘) △목회자료 국외:전도서 주석(크레이그G.바솔로뮤) △신학 국내:성령의 복음(박용규) △신학 국외:1559년 라틴어 최종판 직역 기독교 강요세트(존 칼빈) 등이 선정됐다. 

한편 37회 한국기독교출판문화상 시상식은 오는 2월 25일로 예정된 정기총회에서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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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MINAR LIST


옥성득 교수
CH742   한국기독교 역사의 주요 이슈들    패서디나
Major Issues of the History of Korean Christianity
날짜  2017년 8월 14 - 18일  Mon-Fri
학점  4/8       비고  Con 3

CH742:  한국기독교역사의 주요이슈들 
8/14-18 | Ray Anderson | 4/8학점 con3 | 옥성득 교수



강의개요:

 

이 과목은 한국개신교의 역사를 역사적신학적선교학적사회적 이슈에 중점을 두어 고찰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학습목표:

 

이 과목을 통해 학생들은

(1 )한국교회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인물 및 쟁점들에 대해서 이해하게 되고,

(2) 한국교회의 현재적인 이슈들에 대해서 비평적인 견해를 가지게 하고,

(3) 한국교회의 개혁에 관한 논문을 쓸 능력을 가지게 됩니다.


과목구성:

 

      일주일간 집중강의로 진행되는 이 수업은 강의와 토의와 연구보고서로 이루어 집니다.

 

 필독도서:

 

  (4 & 8 units) 1,450 pages

 

Oak, Sung-Deuk. A New History of Early Korean Protestantism다시 쓰는 초대 한국교회사새물결플러스, 2016. (557 pp.) ISBN 9791186409756, 25,000

       Research Society of the Korean Church History. 

History of Korean Christianity한국기독교의 역사  I. 기독교문사, 2011, chapter 2-6. (290 pp.) ISBN 9788946615052, 15,000

       ----------------. History of Korean Christianity II 한국기독교의 역사  II. 2011. (340 pp.) ISBN 9788946615069, 15,000

       ----------------. History of Korean Christianity III 한국기독교의 역사 III. 2009. (263 pp.) ISBN 9788985628648, 15,000

 


  (8units only) 1,640 pages

Oak, Sung-Deuk.  First Events of Early Korean Protestantism  첫 사건으로 본 초대 한국교회사.

짓다, 2016. (406 pp.) ISBN 9791195611829, 18,000

      Chang, Kyu-sik. A Study on Christian Nationalism during Japanese Colonialism일제하 한국기독교 민족주의 연구혜안, 2001, 102-390. (289  pp.) ISBN 9788984941335, 24,000

      Kim, Seung-Tae.  Colonial Power and Religions식민 권력과 종교. IKCH, 2012. (327 pp.) ISBN 9788985628723, 22,000

      Kang, In-Chul.  The Korean Christian Churches, Nation, and Civic Society한국 기독교회와 국가

시민사회, 1845-1960. IKCH, 1996. (313 pp.) ISBN 9788985628433, 12,000

      Kang, Sung-Ho. A Dark History of Korean Christianity한국기독교 흑역사짓다, 2015. (305 pp.) ISBN 9791195611812, 15,000

 

 

추천도서:

 

Oak, Sung-Deuk. The Making of Korean Christianity. Waco, TX: Baylor University Press, 2013. ISBN 9781602585768, 68,930

Ryu, Daeyoung. Early American Missionaries in Korea초기 미국 선교사 연구, IKCH, 2001. ISBN 9788985628334, 16,000

-------------. Modern Korea and American Missionaries개화기 조선과 미국 선교사, IKCH, 2004. ISBN 9788985628525, 22,000

-------------. Modern Korean history and Christianity한국 근현대사와 기독교푸른역사, 2009. ISBN 9788991510616,20,000

 

 


과제물:

 

1. 8학점 등록학생은 필독도서에서 3,090페이지 이상을 읽고 책마다 장단점과 느낀점을 중심으로 2페이지의 독서보고서를 작성한다. (4학점은 1,450페이지 이상) (20%) 이 과제물은 학습목표 (1)(2)를 만족시킨다. [70/160 hours]

 


 2. 다음의 4시대마다 중요한 주제를

 선택하여 4개의 Reflective essay papers 를 작성하여 제출한다. (페이퍼1개당, 4학점 700-900 단어, 8학점 1,400-1,800단어) (40%)
a. 1876-1910 ;  b. 1910-1945;  c. 1945-1990;  d. 1990-now.   이과제물은 학습목표(1)(2)(3)을 만족시칸다 [30/60 hours]


 

3. 세미나를 통해

 배운 것에 근거하여 논문 (4학점은 2,500-3,000단어, 8학점은 5,000-6,000단어)을 작성한다. (40%) 이 과제물은 학습목표 (1)(2)(3)을 만족시킨다 [20/50 hou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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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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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기독교][책] <한국 기독교 형성사 > 옥성득 (2020)
- 42,000원, 7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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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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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초기 한국 기독교의 성장, 부흥, 민족주의 운동과 달리, 현재 한국 개신교에 요구되는 타종교에 대한 유연한 태도와 담론은 별로 연구되지 않았다. 반면 한국 기독교의 저층에 살아 있는 유산을 발굴한 본서는 1세대 북미 선교사들과 한국 기독교인들이 전통 종교를 파괴한 십자군이요 문화 제국주의자였다는 고정 관념에 도전한다. 본서는 영미 기독교와 중국 기독교와 한국 종교의 삼중 통합의 조합 양상을 추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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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주장은 다음과 같다. 
첫째, 초기 내한 북미 선교사들은 엄격한 청교도형 보수주의자나 전투적 근본주의자가 아니라 온건한 복음주의자들로서, 한국 종교를 파괴하고 기독교로 대체하려던 태도를 점차 버리고 그 안에 있는 선한 요소를 수용하고 이를 기독교로 완성해 나가는 성취론적 태도를 취했다. 즉 개신교를 한국인의 영적 열망과 예언적 갈망을 성취하는 종교로 제시했다. 
둘째, 초기 한국 개신교는 중국 기독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는데, 이 한중 기독교 사이의 언어-신학적 연속성은 일본의 다신론적 식민주의에 대항하는 유일신론적 민족주의 형성에 기여했다. 초기 한국 개신교의 신학의 주류(主流)는 영미의 온건한 복음주의였으며, 진보적인 중국 개신교가 저류(低流)로 흐르면서, 1910년 이후 등장한 신류(新流)인 자유주의 일본 신학과 대결했다. 
셋째, 북미 복음주의와 중국 개신교는 한국 종교에 있는 접촉점을 수용하고 삼중적 융합을 이루면서, 국가 이데올로기의 지위를 상실한 유교의 대안 신종교로 자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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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한 문화권에서 다른 문화권으로 번역되는 번역성과 함께 특정 종교와 문화를 변화시키는 변혁성을 지니면서 동시에 그 문화권에 뿌리를 내리는 토착성을 가진다. 한국적 독특성과 세계적 보편성이 만나고,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창조적이 된다. 이를 성경적 이미지로 비유하자면 다음과 같다. 
1) 한 겨리의 소: 밭을 일구는 한 겨리의 소처럼 기독교는 전통 종교와 함께 멍에(마태 11:29)를 메는 동반자가 되어 한국인의 영성을 쟁기질했다. 
2) 접목: 한국 종교의 대목(臺木 stock)에 기독교라는 접수(?穗 scion)가 접목(로마 11:17)되어 뿌리의 진액인 유일신론으로 살아나면서 개량 신품종인 한국 기독교가 만들어졌다. 선교사들과 한국인들은 뉴욕, 시카고, 내쉬빌, 토론토에서 자란 과목을 화분에 담아서 기선에 싣고 태평양을 건너 한국 땅에 이식하거나, 뉴잉글랜드에서 수확한 복음의 씨를 서울 거리에 마구 뿌리지도 않았다. 그들은 중국 한문 문화권에서 잘 적응된 앵글로색슨-중국 기독교의 나무에서 좋은 접수를 갖고 와서 한국 종교라는 대목에 접목했고, 그 결과 한국 기독교라는 좋은 나무가 성장했다. 
3) 봄날의 아름다운 나무: 유교와 기독교의 상호의존적 표리관계는 밝은 봄날의 아름다운 나무와 같다. 햇빛이 있어야 나무가 무성해지지만, 나무가 있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전통 종교에 있는 메마른 가지는 전지를 해서 제거해야 하지만, 유교라는 나무가 있어야 봄의 광채가 반영되듯이, 유교와 기독교는 상호의존적 관계에 있다. 
4) 목걸이: 한국 개신교는 한국 종교에 흩어져 있는 보석들을 모아서 하??님이라는 유일신 황금 줄로 일이관지하여 아름다운 목걸이(창 41:42, 단 5:29, 아 4:9)를 만들어 한국인의 목에 걸어 주었다. 
5) 물동이를 버린 사마리아 여인: 남편 다섯이 있던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요한복음 4장)처럼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한국인에게는 참 종교가 없었으나 기독교를 통해 메시아인 예수를 만나면서 마르지 않는 샘물을 마시게 되었다. 6) 마른 뼈들이 살아나 군대가 됨: 에스겔이 환상에서 본 계곡의 마른 뼈들처럼 생기를 잃었던 한국인의 종교성과 영적 갈망이 기독교의 거룩한 예언의 바람이 불자 살과 근육이 붙고 살아나 종말 공동체인 큰 군대(겔 37:10)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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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서는 서론과 7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론은 경쟁하는 종교 담론과 선교사들의 한국 종교 이해를 다룬다. 
1부에 해당하는 1-3장은 신학(삼위일체)의 한국화 과정, 곧 신론(하나님 용어 형성을 통해 본 한국적 하나님론), 메시아론(종말론), 성령론(귀신론)을 토론한다. 4장은 1부와 2부를 이어주는 조상론(제사론)이다. 
2부에 해당하는 5-7장은 교회론으로 예배당(공간론), 성서와 서적(번역론), 부흥 운동(의례론)을 분석한다. 토론하는 종교는 유교, 불교, 도교(선도), 동학(천도교), 민간 종교로서의 정감록 신앙과 풍수신앙 등이다. 서술 방법은 1) 1960년 이후 기존 해석에 대한 비판, 2) 그런 담론을 만든 여러 자료의 정리, 3) 저자의 논지를 입증하기 위해 논쟁과 토론 과정에서 생성된 1차 자료 정리, 4) 결론적으로 포용적 성취론적 해결 과정을 드러냄으로써 한국 기독교의 자기 신학화(self-theologizing)의 사례와 잠재성을 강조했다. 
책에는 사진 87장, 그림 17장, 지도 5장, 표 9개, 도표 3개 등 총 121개의 이미지가 포함되어 가독성과 이해력을 높인다. 표지 그림처럼 삶이나 신앙은 순례다. 한국 기독교의 순례와 그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기독교(개신교)가 한국 종교와 사회와 동행하면서 자기 정체성을 잃지 않고 서로를 풍성하게 만들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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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g Deuk O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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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이런 독자가 있다. 
아니 이런 독자는 찾기 어렵다. <한국 기독교 형성사: 한국 종교와 개신교의 만남>. 사실 내가 한 챕터를 쓰기 위해 들인 시간은 수십 년이요, 한글-->영어-->한글로 돌아오는 과정을 겪으면서 수 많은 수정을 거듭했으니, 읽는 독자도 한 챕터를 읽는 데 3일은 들여야 할 것이다.
이번 학기에 학교에서 처음으로 학부생들, 주로 외국인이고 한국기독교사를 모르는 학생들에게 한 달 동안 이 책을 가르쳤다. 그러니 신학생들은  기 죽지 말고 읽어 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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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성
4 cSNovem1bgcerna 62810d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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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라는 용어.(1)
<한국 기독교 형성사>(옥성득,새물결플러스)의 부제는 '한국 종교와 개신교의 만남'이다. 우리가 책을 읽을 때 항상 부제를 유심히 살펴보고 서론을 읽은 후 결론을 먼저 읽고 본문을 읽는 순서를 활용하면 중요한 점들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 보통은 책을 읽을 때 순서대로 꼼꼼히 읽어나가면서 숙제를 마치듯 읽곤 하는데 꼭 그럴 필요는 없다.
사실 이 책 <한국 기독교 형성사>는 장별 주제 하나만 해도 엄청난 논점들이 내재되어 있다. 이 책을 한 번에 다 읽고 통합적인 독후감을 쓰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본래 저자 옥성득 교수께서 보유하신 지식이라는 것은 한 개의 장마다 길게는 몇 년을 연구해야 얻어낼 수 있는 정말 막대한 자료들이 간추려진 상태로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을 한 장씩 천천히 읽으면서 관련자료, 각주 등을 살펴보는 데에 시간을 많이 들였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 책은 한 장을 제대로 살피고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참고자료의 분량 자체에 그만 넋을 잃고 만다. 이 점에 있어서는 저자 옥성득 교수께 조금은 불만이다. 한 장씩 한 권의 책으로 나와야 할 것이 왜 한 권에 이렇게 요약되어 나왔나 싶어서다.
이 책은 저자도 밝혔듯이 조직신학의 일부분과 유사하게 구성되어 있다. 신론, 기독론, 성령론의 순서를 따르고 후반부에서는 실천신학적 측면이 강하다. 약 40페이지에 달하는 서론 안에 중요한 내용들이 거의 요약되어 있어 이 부분에 언급된 기초적인 개념들을 바탕으로 메모해가며 읽지 않으면 일반인들은 도중에 상당한 혼란을 느낄 수도 있다.
선교 역사나 한국 교회 성장론에 대한 공부가 되어 있는 사람이 읽는다면 속도는 꽤 빠를 수 있다. 도중에 그동안 잘못 전달되어왔던 선교역사에 대한 사실관계 확인만 해도 충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짐작에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또한 읽었다고 해도 한두 번만 읽어서는 도저히 전체 맥락을 기억해내기도 어려울 만큼 상당한 팩트들이 나열되어 있으므로 한 부분씩 나누어 논제로 삼고 신학대학교에서 연구과제로 삼으면 알맞은 분량의 책이다.
그러니 이 책을 읽었노라며 통째로 독후감을 쓰는 분들은 둘 중 하나다. 제대로 읽지 않고 느낌만 적었거나 제대로 읽어낼 만큼 극소인원의 지식 상류층들일 것이다. 나는 당연히 촌놈의 무지한 자로 이 책에 한번 도전하려고 읽기 시작했는데 서론만 읽어내고 확인하는 과정에서만 몇 달이 걸렸다. 이제 겨우 신론에 해당하는 하나님 용어 파트를 읽어냈을 뿐이다. 그리고 잊기 전에 무언가 내용을 남겨 함께 공유함이 좋겠다 싶어 이렇게 글로 남긴다.
내 서론이 긴 이유는 이 책의 서론이 긴 이유만큼이나 내용 자체가 풍성하고 배울 내용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런 점은 양해를 구한다.
하나님 용어에 관해 가장 먼저 개념을 잡아야 할 점은 이 용어가 본래 각 대륙 또는 나라에 전해지면서 공통적으로 사용할 만한 대표적인 용어가 없었고 선교사들은 공히 선교지의 상황마다 알맞은 토착화 과정을 거치며 '하나님' 용어를 실정에 맞게 불러 사용했다는 사실이다. 그 과정에서 현지의 종교적, 사회적 정서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고 용어의 토착화를 바탕으로 선교지마다의 독특한 신앙관이 발생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또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 책의 부제에서 드러나듯 개신교라는 유래종교와 한국의 토착 종교가 만나서 만들어지는 용어의 문제가 이 장의 중요한 이슈라는 점이다. 왜 이런 선제적 개념정의가 중요할까? 두 개의 서로 다른 종교가 만나 용어를 어떻게 정의하느냐가 곧 선교지라는 현지의 기독교 영성을 형성하는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의 노력은 현지에서 자신들이 믿는 신의 이름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집중되었다.
이 과정은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내는 방법 하나와 전통적 용어에 대한 새 의미 부여라는 방법을 통해 전개되었다. 한국의 방법은 이 두가지를 통합한 독특한 경우라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한 단계 더 들어가서, 그럼 과연 선교사들이 믿는 '유일신' 개념이 한국 종교에 존재했었느냐 하는 의문인데 여기서는 '단군'을 그에 해당하는 존재로 본다. 
이 책이 수많은 논제들을 함유한 책이라고 앞서 미리 말한 이유가 있다. 저자 옥성득 교수는 이 지점에서 종교진화론 또는 퇴화론에 대한 긴 각주를 달았다. 종교진화론이란, 고대 애니미즘이 다신교와 일신교를 거쳐 유일신교로 진화했다고 보는 입장이다. 반대로 종교퇴화론은 계시에 의한 유일신교가 종교적으로 퇴화하면서 다신론, 마술, 미신 등으로 변형되었다고 보는 시각이다. 1890년대 선교사들의 신학 일반이 이 개념을 지지했다.
그러나 고대 메소포타미아나 중국 등의 유물에서 발견되는 다신교적 흔적들이 발견되면서 이 이론은 지지받지 못하고 있다. 그와 관련하여 우리 단군신화는 일종의 유일신교적 고대 종교였다.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단군은 유일신적인 숭배 대상이었는데 어떻게 한반도에 이런 종교가 유래하고 정착되었는지 연구할 수 있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아니나다를까, 각주에는 자료부족으로 더 깊은 논의가 불가능하다는 주석이 달려 있었다.

가장 최근의 참고자료가 2005년에 나온 H. Barrett의 "Chinese Religion in English Guide:The History of an Illusion"에 나오는 자료 한 개였다. 
<계속>

Sung Deuk O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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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영성
하나님이라는 용어(종합본)

*본 글은 <한국 기독교 형성사>(옥성득,새물결플러스) 중 하나님 용어에 관한 챕터의 내용을 요약하며 개인적인 의견을 붙인 글이다. 모두 6회에 걸쳐 페이스북에 게시한 글인데 읽기에 불편한 점이 있어 하나로 엮었다. 필요한 경우 공유하거나 재게시해도 좋으나 재게시의 경우 출처를 반드시 밝혀주기 바란다. 오류 및 수정의 책임을 글쓴이에게 돌리기 위함이다.


<한국 기독교 형성사>(옥성득,새물결플러스)의 부제는 '한국 종교와 개신교의 만남'이다. 책을 읽을 때에는 항상 부제를 먼저 유심히 살펴보고 서론을 읽은 후 결론을 읽고 그 후에 본문을 읽는 순서를 활용하면 중요한 점들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 보통은 책을 읽을 때 순서대로 꼼꼼히 읽어나가면서 숙제를 마치듯 읽곤 하는데 꼭 그럴 필요는 없다.

사실 이 책 <한국 기독교 형성사>는 장별 주제 하나만 해도 엄청난 논점들이 내재되어 있다. 이 책을 한 번에 다 읽고 통합적인 독후감을 쓰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본래 저자 옥성득 교수께서 보유하신 지식이라는 것은 한 개의 장마다 길게는 몇 년을 연구해야 얻어낼 수 있는 정말 막대한 자료들인데 이 지식들이 짧게 간추려진 상태로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을 한 장씩 천천히 읽으면서 관련자료, 각주 등을 살펴보는 데에 시간을 많이 들였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 책은 한 챕터를 제대로 살피고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참고자료의 분량 자체가 어마어마하기에 읽는 이로 하여금 그만 넋을 잃게 만든다. 이 점에 있어서는 저자 옥성득 교수께 조금은 불만이다. 한 장씩 한 권의 책으로 나와야 할 것이 왜 이 한 권에 이렇게 요약되어 나왔나 싶어서다.

이 책은 저자도 밝혔듯이 조직신학의 일반적인 구성과 유사하게 꾸려져 있다. 전반부에서는 신론, 기독론, 성령론의 순서를 따르고 후반부에서는 실천신학적 측면이 강하다. 약 40페이지에 달하는 서론 안에 중요한 내용들이 거의 요약되어 있어 이 부분에 언급된 기초적인 개념들을 바탕으로 메모해가며 읽지 않으면 일반인들은 도중에 상당한 혼란을 느낄 수도 있다.
선교 역사나 한국 교회 성장론에 대한 공부가 되어 있는 사람이 읽는다면 속도는 꽤 빠를 수 있다. 도중에 그동안 잘 못 전달되어왔던 선교역사에 대한 사실관계 확인만 해도 충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짐작에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또한 읽었다고 해도 한두 번만 읽어서는 도저히 전체 맥락을 기억해내기도 어려울 만큼 상당한 팩트들이 나열되어 있으므로 한 부분씩 나누어 논제로 삼고 신학대학교나 소규모 한국사 연구 동아리 등에서 연구과제로 삼으면 알맞은 분량의 책이다.

짐작하기에 이 책을 읽었노라며 통째로 독후감을 쓰는 분들은 둘 중 하나다. 제대로 읽지 않고 느낌만 적었거나 제대로 읽어낼 만큼 극소 인원의 지식 상류층들일 것이다. 나는 학사출신의 지식 무지렁이지만 이 책에 한번 도전하려고 읽기 시작했는데 서론만 읽어내고 확인하는 과정에서만 몇 달이 걸렸다. 이제 겨우 신론에 해당하는 하나님 용어 파트를 이렇게 읽어냈을 뿐이다. 그리고 잊기 전에 무언가 내용을 남겨 함께 공유함이 좋겠다 싶어 이렇게 글로 남긴다.
내 서론이 긴 이유는 이 책의 서론이 긴 이유만큼이나 내용 자체가 풍성하고 배울 내용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런 점은 양해를 구한다. 신학생이나 목회자가 읽으면 크게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일반인이 읽으면 복잡할 수 있으니 시간을 두고 챕터별로 읽으면 될 것 같다. 한국교회사에 대해 이 정도 수준으로 정돈된 책이 따로 있을까 싶다. 그럼 내가 읽은 <하나님 용어>에 관한 부분 요약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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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용어에 관해 가장 먼저 개념을 잡아야 할 점은 이 용어가 본래 각 대륙 또는 나라들에 전해지면서 공통적으로 사용할 만한 대표적인 용어가 없었고 선교사들은 대부분 선교지의 상황마다 알맞은 토착화 과정을 거치며 '하나님' 용어를 실정에 맞게 불러 사용했다는 사실이다. 그 과정에서 현지의 종교적, 사회적 정서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고 용어의 토착화를 바탕으로 선교지마다의 독특한 신앙관이 발생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또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 책의 부제에서 드러나듯 개신교라는 유래종교와 한국의 토착 종교가 만나서 만들어지는 용어의 문제가 이 장의 중요한 이슈라는 점이다. 왜 이런 선제적 개념정의가 중요할까? 그 이유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종교가 만나 용어를 어떻게 정의하느냐가 곧 선교지라는 현지의 기독교 영성을 형성하는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의 노력은 현지에서 자신들이 믿는 신의 이름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집중되었다.
이 과정은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내는 방법' 하나와 '전통적 용어에 대한 새 의미 부여'라는 방법을 통해 전개되었다. 한국의 방법은 이 두가지를 통합한 독특한 경우라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한 단계 더 들어가서, 그럼 과연 선교사들이 믿는 '유일신' 개념이 한국 종교에 존재했었느냐 하는 의문인데 여기서는 '단군'을 그에 해당하는 존재로 본다. 
이 책이 수많은 논제들을 함유한 책이라고 앞서 미리 말한 이유가 있다. 저자 옥성득 교수는 이 지점에서 종교진화론 또는 퇴화론에 대한 긴 각주를 달았다. 종교진화론이란, 고대 애니미즘이 다신교와 일신교를 거쳐 유일신교로 진화했다고 보는 입장이다. 반대로 종교퇴화론은 계시에 의한 유일신교가 종교적으로 퇴화하면서 다신론, 마술, 미신 등으로 변형되었다고 보는 시각이다. 1890년대 선교사들의 신학 일반이 이 개념을 지지했다.
그러나 고대 메소포타미아나 중국 등의 유물에서 발견되는 다신교적 흔적들이 발견되면서 이 이론은 지지받지 못하고 있다. 그와 관련하여 우리 '단군신화'는 일종의 유일신교적 고대 종교였다.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단군은 유일신적인 숭배 대상이었는데 어떻게 한반도에 이런 종교가 유래하고 정착되었는지 연구할 수 있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아니나다를까, 각주에는 자료부족으로 더 깊은 논의가 불가능하다는 주석이 달려 있었다. 가장 최근의 참고자료가 2005년에 나온 H. Barrett의 "Chinese Religion in English Guide:The History of an Illusion"에 나오는 자료 한 개였다.


중국은 하나님이라는 용어를 어떻게 이해하고 사용했을까? 우리는 중국의 기독교 역사에 별 관심이 없는 편이나 저자는 중국의 기독교 역사를 강조하고 있다. 그 이유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기독교 전통이 한자 등 문화적 유대를 통해 매우 긴밀한 영향력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나라에 온 선교사들이 용어문제로 논쟁하는 과정에서 중국의 '하나님 용어'를 1905년까지 연구하고 사용했다는 점도 중요하다.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는 유교를 자연철학으로 이해하고 상제(上帝)와 천(天)을 사용하면서 동시에 인격적인 신인 主를 사용하는데 불교나 도교의 교리적인 측면을 수용하는 것은 거부했다. 한자 主를 一과 大의 조합으로 여김으로써 유일신 개념을 담았던 것이다. 토착화된 기독교로써 유교와 기독교를 종합했다. 여기서 저자 옥성득 교수는 '혼합'이 아니라 '종합'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좀 다르게 표현하자면 화학적 반응이 아닌 물리적 반응인 셈이다.
만일 이 과정을 '혼합'이라는 단어로 사용했다면 논란이 생겼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정확히 마테오 리치가 거부했던 중국 유교의 자연철학적 측면을 배제하고 열린 체계로써 아퀴나스 신학과 유교를 종합한 것은 토착화 과정에서 늘 문제가 될 수 있는 타종교, 타문화와의 혼합주의적 성격을 극복하는 방법론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 같다.
이어서 마테오 리치가 명 왕조의 문화 혼합주의적 체계에 흡수된 것이 아니라 "적응했다"는 표현 역시 중요한 표현이라고 보여진다. 혼합 종교로써 중국 기독교를 따로 창시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것은 내가 책을 읽으면서 파악한 것이므로 학문적 근거가 따로 있지는 않다. 하지만 17세기 청대에 와서 도미니크회와 프란체스코회가 취한 유교에 대한 태도와는 상반되기에 그런 이해가 생긴 것이다.
탁발승단의 도미니크회와 프란체스코회는 유학과 정면으로 대결했다. 제사를 종교행위로 보았고 유학과 신학을 선명하게 대비시켰다. 예수회의 적응 방법론을 유교와의 '혼합'으로 보았던 것이다. 당연히 강희제는 이런 태도를 가진 가톨릭의 태도에 반감을 가졌고 옹정제에 이르러서는 예수회마저도 추방되었다. 이후 18세기 오리엔탈리즘의 발현으로 황제와 가톨릭의 천주 대결구도는 심화되었으며 마테오 리치의 '보유론'은 폐지된다. 
개신교의 입장은 어땠을까? 개신교 선교사들은 가톨릭 선교사들과는 다른 행보였다. 성육신적 용어사용을 채택했다. 토착화된 용어를 사용하려는 이유는 가톨릭의 전철을 밟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개신교 선교사들이 사용했던 하나님 용어는 4개의 카테고리로 나뉜다. 신, 제(帝), 천, 주 등이었다.  사실 나는 이 각주를 읽으면서 한 가지 사실에 눈길이 갔다. 당시 상해에는 Mission Press라는 기관이 있었던 것 같다. 선교 출판국 정도일 텐데 상해에 이런 기관을 두고 선교사들의 중국 진출 교두보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다.
상해의 기독교 역사나 전통의 기록들을 확인해 보는 것도 필요하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최근 중국 상하이 기독교인은 가톨릭이 10만명 정도 되고 개신교인은 4만명 정도라고 한다. 지난 2016년에는 매년 50만 명씩 신자가 늘지만 목회자는 태부족이라는 기사가 나올 정도였는데 최근 경향은 찾아보지 않았다. 당시 상하이 인구는 2400만 명 정도였다. 일반적으로 상하이는 기독교의 주요 성지로 알려져 있지만 우리나라에 상하이 기독교에 대한 자료나 논문이 얼마나 알려져 있나 모르겠다.
책도 상하이에 관한 것들은 채 번역이 되지 않은 채 중국어로 된 것들만 검색이 되고 있다. 위 네 카테고리의 하나님 용어 관련 각주도 상해 출판국에서 발행된 1848년, 1928년의 자료에서 참조한 것으로 되어 있다. 약 20개 정도의 하나님 용어 중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것은 신, 상제, 천이었다. 결국 이런 다양한 사용은 개신교 선교사들을 분리시켰다. 일명 상제파와 신파, 천주파 등이었다.
이 중에서 메드허스트에 관한 각주가 또한 눈길을 끌었다. 메드허스트는 상제를 신의 본체이며 신은 상제의 영적 기능이라고 논증했다는 것이다. 내가 이십 년만 젊었어도 논문을 찾아 어떤 논증이었나 살펴보고 싶었지만 지금은 사업을 하는 촌놈이다 보니 그럴 여유도 없고 정력도 없다. 왜 나에게는 이런 때늦은 후회가 찾아온단 말인가!
상제 개념이 히브리어의 야웨와 어떻게 동등하게 이해될 수 있었는지 사실 대단히 중요한 문제다. 중국에서 상제란 황제의 개념이 있고 황제를 신처럼 숭상하던 문화 안에서 신 위의 신 개념을 어떻게 중국인들에게 이해시킬 수 있었으며, 그것을 용인했던 중국 제국 시대의 당위는 무엇인가를 확인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상제파라 일컬어지는 이들 선교사 그룹은 고대 중국인이 단일신자들이었으며 유일신적인 상제를 섬겼다고 여겼다.
미국계 신(神)파는 중국의 신개념에 대응하는 것으로 신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이유는 분명했다. 이들은 중국에는 유일신 개념이 없었고 다신교적 종교로 상제는 만신전의 최고신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에 중국에 유일신으로써 '신'을 보급하려고 한 것이다.
신파의 대표적인 인물은 윌리엄 분이라는 성공회 주교였다. 우주의 시작을 비인격적인(오늘날 기계적인) 진화과정으로 이해했던 신유학파 주희의 개념을 수용했던 그는 '상제'와 같은 특정한 하나님 이름보다는 보다 상위의 개념, 즉 우주의 대표자인 신이라는 이름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조선에 선교사로 온 언더우드에게로 이어져 하나님이라는 용어를 거부하는 데까지 이어진다.
상제파와 신파의 용어 경쟁에서 신파는 패배하고 만다. 제임스 레그라는 걸출한 빅토리아 시대 선교사는 상제를 옹호했다. 이 용어가 유일신적 요소를 가진 관계적 용어라고 주장했는데 사실 그는 초기에 신(神) 용어를 사용했지만 후에 중국 고전을 연구하면서 상제로 바꾼 것이었다. 윌리엄 분의 주희 주석의 입장과 맥을 같이 한다.
특이한 점은 레그의 경우 중국인의 유일신 개념의 근거를 신적 계시에서 찾았다는 점이다. 이런 측면은 유일신 개념이 다신교로 변화한 퇴화 개념을 받아들였는데 앞서 마테오 리치의 견해와 일맥상통한다. 그는 예수회의 천주(天主) 개념을 거부했는데 이유는 그 개념이 혼합주의적으로 다신숭배에 해당한다고 해석했기 때문이었다.
제임스 레그가 언급되어야 하는 이유는 한국 기독교가 그의 상제 개념을 수용했다는 점에 있다. 그는 유교 고전에 나오는 상제가 유일신이며 공자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이고 유교는 기독교의 몽학선생이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이 바로 한국에 온 선교사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특히 언더우드는 레그의 견해를 광범위하게 이용했고 상제론에서 나온 하나님이라는 용어의 원시 유일신성을 변증했다.
크게는 영국 선교사들은 상제를, 미국 선교사들은 신(神)을 지지했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온 미국 선교사들이 한문 성경에서 상제 용어를 사용한 이유는 당시 성서를 출판하는 사업에서 영국성서공회와 협력했기 때문이다. 이들 사이에서 성공회는 천주를 지지했다. 이들 세 용어, 즉 신, 상제, 천주는 1890년대와 1900년대에도 동시에 사용되었으며 중국인들은 역시 토착 신명을 좋아했다.
중국에서는 성령과 관련해 용어 문제가 생겨났다. 신을 사용하던 그룹은 신-신이 되어 '신의 영'이나 '성령'으로 변형했고 상제를 사용하던 그룹은 성신으로 표현했다. 한국으로 넘어와서는 한국 선교사들에 의해 하나님-성신으로 변형되었기 때문에 갈등은 없었다. 다만 우리나라에서 개역본 사용에 있어 1895년부터 1936년까지 성신만 사용했다. 영국성서공회의 한문본 역본이 기초가 되어서다. 1938년 개역본은 일본어 역본의 영향을 받아 신-성령을 참고해 성령으로 번역했다.
한국 선교 초기 개신교는 두 개의 용어가 대립했다. 하나는 하느님이었고 다른 하나는 천주(텬쥬)였다. 하느님은 고유 신명이고 텬쥬는 한문 용어였다. 1903년까지는 두 용어가 혼합되어 사용되었는데 이후 하느님이라는 신조어로 통일되었다. 저자 옥성득 교수는 이 부분에서 20년이라는 빠른 번역사에 한국인들이 신조어인 하느님으로 통일하는 '신학적 창의성'을 강조한다.
한국에 들어온 가톨릭은 초기에는 제사를 허용했다. 마테오 리치와 예수회 신부들의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 천주교회가 생긴 1784년 이후 1791년부터는 제사를 금지했다. 1836년부터 조선에 살기 시작한 프랑스 선교사들은 한국인들이 부르던 민간신앙 속의 하늘(ciel)을 미신숭배 용어로 이해했고 배척했다. 이런 전통이 이어지면서 19세기 조선 천주교는 텬쥬만을 사용했다.
1860년에 나타난 동학. 교주인 최제우는 유불선 삼교에 천주교를 혼합한 새 종교에 천주(天主)를 사용했는데 당시 조선의 조정이 이를 천주교와 같은 것으로 여겨 박해했다. 이런 까닭에 최시형은 용담유사에 '텬쥬' 대신에 한글 번역어 '한울님'을 사용했다. 
이 부분에 짧게 천도교가 언급되고 있는데 3대 교주인 손병희 대에서부터 동학이 천도교로 개칭되면서 교리적 변화를 겪는다. 즉, 인내천 교리 안에 내재된 내면적 초월성, 휴머니즘이 강조되면서 초월적인 天의 개념이 약화된 것이다. 최제우부터 손병희에 이르는 동학의 변화를 탐구하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고 이어 각주에 언급된 이돈화에 대한 연구도 도움이 된다. 천도교의 쇄퇴에 어떤 교리적 측면이 있는지를 확인해볼 수 있어서다. 
천도교가 일제에 부역한 것은 표면적인 이유랄 수 있고 실제로는 교리적 측면에서 내재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하나의 사회운동 철학의 개념으로 전이한 것이 종교로써의 기능에 제한을 주었고 결국 몰락의 길로 간 게 아니냐는 생각이다. 신이 인류의 세상에 인카네이션을 했을 때 그 신적 속성을 지나치게 인격화하면 하늘의 권위를 상실하게 된다.
예수가 끊임없이 자신을 하늘과 연결짓고 하나님의 아들임을 강조한 이유는 바로 그런 차원이 있기 때문이다. 신약의 여러 기자들이 한결같이 강조하는 것은 그의 신인성이다. 세상을 변화시킬 힘은 철학적 개념으로써의 종교가 아니다. 늘 신적 권위야말로 절대적 윤리성을 담보하고 철두철미한 당위를 제공하기 때문에 천도교, 아니 초기의 동학이 만일 그런 측면을 유지했더라면 지금쯤 우리나라에만 존속된 독특한 성격의 기독교가 남아있게 되었을 것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중국에서부터 지난한 논쟁 속에서 태어난 텬쥬라는 단어 하나가 지닌 거대한 힘을 감지할 수 있게 된다. 동학은 '텬쥬'를 버리고 '한울님'을 만들어냈다. 유불선과 천주교의 혼합이었던 동학의 본래 성격은 텬쥬에서 나온 것이라고 봐야 한다. 최제우 자신이 상제의 강림을 경험했던 게 핵심 정체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텬쥬'가 '한울님'으로 변하면서 정체성은 흐려지기 시작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용어 문제가 얼마나 중대한 것인지 알 수 있다. 선교사들이 천주냐, 신이냐, 상제냐를 놓고 치열하게 논쟁하며 고민했던 이유는 중국이라는 나라에 유일신 개념이 존재했느냐 아니냐의 문제와 뗄 수 없는 관계성을 지닌 채 황제 시대부터 개화시대를 거치면서 중국인의 신개념이 변해가는 데 따른 적응의 차원에서 하나님 용어가 대단히 중대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용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용어이면서 동시에 기독교의 핵심인 유일신 개념을 인지할 수 있어야 하는 용어의 발견은 그래서 선교사들에게 너무나도 중요한 문제였다. 그에 비추어 동학의 퇴보는 그 '용어 설정의 변화'에 있다고 보인다. 한울님을 우리 전통 민간 신앙 속의 하늘님과 연결할 수 있었을까? 아니면 전혀 다른 존재였을까? 이 문제에서 적절한 해답을 찾아내지 못한 것이 천도교의 약점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존 로스(1842-1915). 스코틀랜드연합장로교회 소속의 이 위대한 선교사에 대한 연구는 필수인 것 같다. 저자 옥성득 교수는 다른 포스팅이나 블로그에서도 자주 이 선교사에 관한 포스팅을 했다. 그만큼 중요한 인물인데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그는 1910년 은퇴할 때까지 중국과 한국을 대상으로 사역한 인물로 1877년부터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기 시작해 1882년에 5년에 걸친 노력 끝에 첫 한글 복음서인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출판했다. 이어 5년 뒤인 1887년에는 한글 신약전서인 <예수셩교젼셔>를 출간했다.
이때 로스는 하나님(하느님)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기존의 하느(아래아)님을 하나님으로 철자를 바꾸었다. 아래 아 자를 단순화하려는 노력이자 중국에서 벌어졌던 하나님 용어에 대한 지루한 논쟁에 종지부를 찍겠다는 의도였다는 각주의 설명이 있는데 대한성서공회사(옥성득 외)를 참조하고 있다. 집에 책이 있는데도 아직 제대로 읽어보지 못한 <대한성서공회사>를 한번 살펴봐야겠다 싶은 대목이다.
로스 선교사를 통해 백홍준, 김청송, 서상륜 등의 첫 교인들이 태어났고 선교사들의 조사로 활약했으며 북한교회의 씨앗이 되었다. 로스가 처음으로 하느님 용어를 사용한 것은 1878년이었다. 그에게 하느님은 천상의 통치자요 상제와 동등어였다. 전능자, 무소부재, 불가시성의 속성을 가진 존재로 하느님을 이해했던 것이다.
또한 로스는 당시 조선 조정이 천주교를 사교로 여겨 배척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조선 천주교에서 사용하던 텬쥬 용어 대신 하느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게 개신교와 천주교의 차별성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로스의 <예수셩교문답>은 한글 복음서인 <예수셩교젼셔>에 앞서 출판된, '하느님' 용어를 처음 채택한, 스코틀랜드장로교회의 한글판 교리문답지였다.
흥미로운 것은 1882년에 출판된 로스본 누가복음과 요한복음 한글판은 띄어쓰기가 다르다. 누가복음에서는 하느님, 쥬, 예수 다음을 띄어 쓰는 대두법을 사용했다. 예를 들면, "두사람이하느님의 ^ 압페서"와 같은 식이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이도가처음에 ^ 하느님과함께"와 같은 식이다. 읽어나가는 데에는 누가복음 식보다는 요한복음 식이 좀 더 편하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각주에 따로 자세한 언급은 없다.
로스는 제임스 레그나 윌리엄슨의 영향을 받아 유교를 기독교의 몽학선생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레그에 대한 존경심이 컸고 레그가 이해한 중국 원시종교에 대한 개념을 로스도 받았던 것으로 저자는 설명한다. 로스는 예수회의 이해와 맞물려 있었는데 이는 예수회가 바티칸과 독립적으로 활동한 것으로 간주해 일종의 개신교적 선교사들이라고 여겼던 때문이고 반대로 프란체스코회 선교사들에 대해서는 프랑스 군대와 관계가 있다고 여겨 그들을 비판했다.
사실 로스의 하느님 용어 채택에는 그에게 영향을 끼친 레그의 철학적 연구방법론과는 달리 한국과 중국에서의 신 용어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연구가 배경이 되어 있다. 그 연구의 결과로 한국인들에게 '유일신론적 영성'이 있음을 인정하면서 하느님 용어를 사용한 것이다.
또한 레그는 유교의 상제에 집중했으나 로스는 만주 도교의 상제와 한반도의 하느님에도 관심을 두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옥황상제가 바로 도교에서 말하는 '상제'다. 로스는 도교와의 대화를 통해 이 상제가 기독교의 유일신 하나님과 통할 수 있는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처럼 유교의 상제론, 도교의 상제론, 조선의 하느님 등에서 공통점을 발견하고 그것을 '수용'함으로써 로스 자신만의 독특한 '성취론적 동아시아 신론'을 발전시킨 것이다.
로스는 한국에서 고관들이 가뭄 때 하늘을 보며 기우제를 드리면서 부르는 하느(아래아)님의 존재를 보았고 조선이 그 하느님을 상제로 번역하는 것도 알았다. 말하자면 중국에서 온 상제, 신, 천과 같은 용어 논쟁이 가져오는 불필요한 다툼을 조선에서는 깔끔하게 하느님으로 해결하고 있었던 것을 발견한 것이다. 로스로써는 큰 수고를 덜어내게 된 셈이다.
로스는 1883년부터는 '하느님'을 '하나님'으로 사용했다. 표기법 변경에 따른 것이었고 의미상의 변화는 없었다. 특히 다신교적 민간신앙 속에서도 한국인들이 하나님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유일신론적 신용어로 하나님을 채택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보았고 중국 상제파 선교사들이 이해했던 것처럼 상제나 하나님이나 여러 다신의 주신이 아니라는 것, 즉 전혀 다른 차원의 유일신이라는 데에 의미를 두었던 것이다.
마침 이 부분에 이르러 각주에서 저자는 이런 로스의 하나님 용어 채택은 상제와 신을 뚜렷하게 구분하는 데까지 이르렀고 상제는 하나님, 신은 귀신으로 분리하게 되었으며 영어에서는 God와 gods로 하나님과 귀신을 구분하는 데 반해 한문 성경에서는 상제만 사용하고 일본어 성경도 신(神)만을 사용하지만 로스 역본의 영향으로 한글 성경에서는 명확하게 '하나님'과 '신'이라는 단어로 명백하게 구분해내고 있다고 설명한다.
왜 우리는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되었는지 분명하게 알게 해주는 중요한 대목이다. 만일 당시 선교사들이 중국의 용어를 그대로 가져와 사용하게 했다면 지금 우리말 성경에는 상제로 사용될 수도 있었고 신이나 천으로도 사용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로스는 조선땅을 밟기가 쉽지 않았던 때에도 중국을 오가는 조선인들을 만났고 지역을 방문해가며 한국인이 사용할 한국어로 된 성경을 번역하는 데에 최선을 다했다. 그의 이런 노력의 배경에 대해 옥성득 교수의 평가는, 그가 진보적인 복음주의 선교 신학을 가졌고 동아시아 종교에 대한 관용적 태도를 지녔기 때문이라고 평가한다. 바로 그런 태도가 한국인에게 있었던 하느님 신앙이 유일신론적 신앙임을 간파하는 능력이었다는 것이다.
우리도 잘 아는 선교단체가 있다. 위클리프다. 세계 여러 지역에 나가 번역선교를 하는 단체로 그 나라의 말과 글을 익혀 그들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사역이다. 그 사역을 하는 선교사들을 보면 아주 오랜 세월을 그 지역에서 살며 그들과 함께 문화와 지식과 정서를 공유하면서 번역사역을 한다. 선교사들이 왜 한 나라에 가서 자기 뼈를 묻을 생각으로 사역하겠다고 맹세하고 나가는지가 분명해지는 대목이다. 이제 우리가 거의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던 '하나님'이라는 단어 하나가 한 선교사의 엄청난 희생과 노력에 의해 만들어졌고 또 만들 당시에 그 선교사가 어떤 생각과 믿음을 가지고 만들었는가를 묵상해 보면 이 단어가 품은 깊은 영성에 좀 더 다가갈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님은 우리 민족이 오래 전부터 하늘을 우러러 절대자이며 유일한 지배자를 섬길 때 사용하던 말이었다. 그들은 그 신의 존재를 당시에는 다르게 여겼고 다르게 이해하였겠지만 야웨 신앙을 가진 선교사 한 사람이 이 땅에 찾아와 그 절대자가 온 우주를 창조하고 지배하며 복을 주며 통치하는 오직 유일한 한 분 야웨였다는 것을 알려줌으로써 진정한 하나님이라는 말뜻을 지닌 단어가 되었다. 우리 민족에게는 유일한 한 분 하나님을 섬기는 능력이 있었다. 그것을 발견하고 이해할 수 있게 해 준 이 땅의 모든 선교사들에게 감사하는 밤이다.
조선의 마케도니아인 이수정. 그는 하나님 용어에 어떤 관련이 있을까? 우선 이수정은 일본에서 첫 한국인 개신교 신자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고 일본주재 미국 성서공회의 지원으로 신약 복음서를 번역했다는 데에서 큰 의미가 있다. 지금도 도쿄에 있는 시바교회가 이수정이 세례를 받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이수정이 세례를 받은 곳은 로케츠쵸 교회이나 지금은 시바 교회.)
이수정의 세례와 관련해 일본 기독교 잡지인 칠일잡보는 로케츠쵸교회(露月町)의 야스가와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았다고 나와있으나 본 책에서 옥성득 교수는 미국측 선교사들의 선교보고서인 'Foreign Missionary Vol.XLIII 1884-1885'의 자료를 토대로(옥성득 교수님의 개인자료와 다르게 공식적으로 나타난 자료를 말함.) 야스가와 목사도 함께 있었지만 보조역할을 했고 실제로는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사 조지 녹스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은 것으로 적고 있다. 그 이유로 이수정이 야스가와 목사보다 나이가 많았던 점을 꼽는다. 
일본 쪽 기록에서 신사유람단이 일본에 갔을 때 이수정을 '수령'으로 이해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당시에는 최고 연장자(약 40세)였던 까닭에 일본에서 그렇게 봤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참고하면 나이가 중요한 역할을 하던 당시에 어린 사람에게서 세례를 받았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데에 동의가 된다. 이 세례는 한국인이 일본에서 받은 최초의 세례였다. 여기서 히로시마에서 목회하는 내 친구 목사는 일본에서 최초로 한국인이 일본노회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은 사례라는 점이 자랑스럽다.
그런데, 이수정과 민비에 관련된 역사가 상반된 게 있어서 어떤 것이 진실인지 알 수 없다. 본 책에서 옥성득 교수는 각주에 이수정이 임오군란 때 민비를 지게에 싣고 탈출해 충주까지 갔다는 역사를 채용한다. 그러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는 임오군란 때 민비를 탈출시킨 것은 여흥부대부인 민씨와 무예별감 홍재희였다고 설명한다. 
한국근현대사사전에서는 민비 탈출과 관련해 지게가 아니라 궁녀의 옷으로 변장하여 탈출했다고 한다. 홍재희에 대한 기록으로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에서도 동일하게 기록하고 있다. 과연 민비를 탈출시킨 장본인은 이수정인가, 홍재희인가? 그것에 대한 여러 설들이 있어 좀 복잡하다. 그리고 여러 온라인 페이지들에서 이수정에 대한 기록들이 나오는데 지명과 세례받은 교회, 안종수와의 관계 등에 약간씩 차이가 있다.
어쨌든, 이 책에서는 이수정이 민비를 탈출시키는 데에 공을 세웠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그의 친구이자 개화파였던 안종수가 속했던 신사유람단을 비수행원으로 따라가 일본에 갔던 것은 사실이고 거기서 농학박사였던 츠다센을 만나 기독교를 소개받은 것으로 역사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여기서 개화파였던 이수정은 기독교인이 되면서 동시에 조선의 개화는 선교사들이 들어와야 한다는 생각이 커졌고 미국 교회에 선교사 파송을 호소한 '마게도니아인의 편지'를 쓰게 된다.
이수정은 미국성서공회 루미스 총무의 지원으로 <신약마가젼복음셔헌해>를 1885년 2월에 출간한다. 이 때 하나님 용어는 '신'(神)을 사용했다. 미국성서공회가 당시에 중국과 일본에서 동일하게 신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은 중국의 상제보다 일본 토착신명인 신(かみ)을 선호했다. 
루미스 목사는 이수정에게 조선 선교를 논의했고 이수정은 일본인 신자가 조선에 들어와 선교하는 것을 강력히 반대했다. 반감이 크다는 것이었고 그 대신에서 미국인 선교사를 조선에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루미스 목사는 이수정에게 조선선교의 전략 중 하나로 성서번역을 요청했고 마가복음부터 번역해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정확한 기록은 아니지만 당시 만주의 존 로스 목사가 번역한 신약성서를 이수정에게 보여주자 이수정은 크게 실망했다고 한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에 대해 몇 가지 설이 있는데 존 로스 목사의 번역은 평안도 사투리였고 자신은 한양 양반 출신이라 실망했다는 설과 조선 최초로 한글성경을 번역하려고 했는데 이미 나온 게 있어 실망하였을 것이라는 등의 설이다. 어쨌든 존 로스는 누가복음부터 번역한 데 반하여 이수정은 마가복음부터 번역했고 서울 표준어로 했다.
이 책에서 이수정의 최후에 대한 기록으로 1884년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에 망명한 김옥균과 불화하여 김옥균이 보낸 자객에 의해 중상을 입고 이듬해인 1885년 귀국했으나 사망했다고 적고 있다. 다른 자료에 따르면 김옥균과 이수정의 만남은 1883년 9월20일 루미스 총무 보고서한에 나와 있는데 종교를 주제로 나눈 대화에서 이수정과 야스가와 목사에게 보여주었던 김옥균의 태도는 처음에는 매우 강경하고 무례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김옥균은 조선 근대화를 위한 노력으로 일본에서 차관 300만엔을 받아오려고 했는데 이때 역할을 해준 이가 후쿠자와 유키치로 불교신자였다. 김옥균도 불교에 심취해 있던 인물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후에 김옥균은 야스가와 목사와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는 게 동일자 위의 루미스 보고서한의 내용이다. 이듬해인 1884년 1월 29일 자 루미스 총무 보고서에는 김옥균이 기독교를 완전한 진리로 받아들인다는 고백을 했다는 내용이 있고 미국을 방문하고 서울에 미래 사업의 기초로 기독교 병원을 개설하려고 한다는 내용도 있다.
실제로 1884년 7월에 맥클레이 목사가 조선에 파견되어 의료와 교육 사업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이수정이 미국에 마케도니아인의 편지를 써서 보낸 것은 1883년 12월 13일이었다. 이 편지가 미국 언론에 공개되면서 감명을 받은 언더우드가 조선 선교를 지원하게 되었다. 아펜젤러와 함께 일본에 온 언더우드는 두 달 간 이수정에게 한국어를 배웠고 이수정역 마가복음을 가지고 1885년 4월에 인천에 도착한다.(위 내용 중 일부는 신명호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의 <한국사대전환기 영웅들>월간중앙 2020.8월호 기사를 참고함.)
여기서 김옥균과 이수정의 관계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왜 김옥균은 이수정을 암살하려고 했을까? 이수정이 김옥균이 보낸 자객에 의해 암살시도를 당했던 게 1884년과 1885년 어간인데 그 사이 김옥균의 행보는 회심과 믿음의 행보가 아니던가? 알 수 없는 게 역사이자 인간의 마음이다. 역사는 도도한 물결 속에 수많은 갈등을 품고 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처음에는 하나(아래 아)님이라는 용어를 반대했다. 이 용어를 채택한 것은 1904년 신약전서 임시본과 1906년 첫 공인본 한글성경이었던 신약젼셔였다. 언더우드는 앞서 일본에서 이수정에게 받아왔던 <신약마가젼복음셔언해>를 1885년부터 수정하기 시작했다. 수정하기 시작한 이유는 이수정역 첫머리에 하나님을 '신'으로 적었고 이를 조선에서는 귀신으로 이해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수정역의 '신'은 '샹뎨'로 변경되어 맨 첫머리 문장은 이렇게 바뀌었다. "샹뎨의아달예수스크리스도스복음이니그처음이라" 언더우드가 '신' 대신에 '샹뎨'를 사용한 것은 번역 조사 송순용의 영향이다. 언더우드는 한불자전 편찬에 참여했던 그에게 '국문 수용법'이라는 책을 받아 한국어를 배웠고 언더우드와 가까워진 관계로 송순용은 천주교에서 출교된다.
당시 하나님 용어와 관련해 여러 이름들이 사용되고 있었는데 1894년에 한국 선교사들의 하나님 용어는 세 개의 진영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독일계 북감리회 출신의 올링거 목사는 '샹뎨'를 지지했고 성공회는 텬쥬를 사용했으며 게일, 마테프, 베어드 등은 하나님을 사용했다. 언더우드는 '하나님'이라는 단어 자체가 한국인들에게 샤머니즘의 최고신의 이름으로 불린다는 이유로 내내 거부했다. 혼합주의적이며 비성경적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 한국 선교사들과 기독교인들에게 원시 유일신교적 신학을 발전시키도록 도운 것은 충국의 상제파 선교사들의 소책자들이었다.
여기서 좀 복잡한 상황이 되었을 때 언더우드는 용어실험에 들어갔다. 삼요록에서는 여호와, 참신, 샹뎨를 사용했고 복음대지에서는 여호와와 참신을 사용했다. 하나님과 텬쥬 각 판본을 발간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용어의 실험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하나님 진영의 용어가 채택되었다. 
선교사들과 한국인들이 사용했던 하나님은 우상숭배에 반대하는 배타적 유일신론이었다. 1895년에 나온 마페트와 최명오의 전도책자 <구셰론>에 나오는 하나님에 대한 설명이다.
"하나님을 홀로 하나이시고 둘이 업스시니 하늘도 아니요 옥황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요 귀신도 아니요 이에 스스로 있어 시종이 없고 영원히 변혁하지 아니하시는 천지 만물에 큰 주시라."(고어를 현대어로 바꿈)
아펜젤러의 묘츅문답에서도 이 하나님 용어가 불교의 보살, 도교의 옥황, 유교의 하늘, 무교의 귀신과는 다른 유일신이라고 강조했다. 이때 아펜젤러는 천주교의 성인 숭배를 우상숭배 목록에 추가했다. 이렇게 하나님 용어가 굳어지면서 천주교와 개신교의 구분이 명확해졌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영국성서공회는 중국의 영국성서공회 총무들의 불만을 받아들여 1903년까지 하나님 판본과 텬쥬 판본을 동시에 출판하기로 결정했지만 당시 성공회 교인이 1% 미만이었던 조선은 99%가 개신교인인 상황에서 하나님 사용으로 굳어졌다.
여기서 중요한 점 하나를 저자는 지적한다. 서울의 언더우드, 기퍼드, 스크랜턴, 트로로프는 텬쥬를 사용했고 평양의 마테프, 원산의 게일, 서울의 아펜젤러와 밀러는 하나님을 사용했다. 그런데 이 논쟁이 한문이냐 한글이냐의 문제라기 보다는 서울의 교회연합 정신에 무게를 둔 선교사 집단과 평양의 중심을 둔 개신교 정체성 강화에 무게를 둔 선교사 집산의 갈등이었다는 것이다.
신학적으로는 이 하나님 용어가 유일신 용어인지 다신교의 최고신 용어인지가 논쟁의 주제였다. 중국에서는 '신'파 선교사들이 상제를 중국의 제우스로 이해했듯이 언더우드와 기퍼드는 하나님을 혼합주의적인 한국 종교의 최고신으로 이해했다. 한국 선교사들이 거의 대부분 하나님 용어를 사용할 때도 언더우드는 끝까지 텬쥬를 고집했다.
이후 언더우드는 1904년 경 하나(아래 아)님의 기원이 한국인의 유일신 신앙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텬쥬 대신에 하나님을 수용했다.(본 책 137) 언더우드가 끝까지 텬쥬를 고수하다 하나님 용어를 수용한 데에는 그동안 한국 안에서 일어났던 여러 연구들의 종합적인 결론 때문이었다. 독립신문과 여러 애국가들에 나타난 하나님 용어가 한국의 원시 유일신관의 존재라는 의견, 게일과 주시경의 하나님 어원 연구, 헐버트의 단군 삼위일체론 등에서 한국인의 유일신관적 용어가 하나님이라는 개념들이 있었고 언더우드 역시도 한국의 고대 신화를 연구하면서 동일한 유일신관을 이해한 것으로 이 책은 설명하고 있다.
다행히도 저자 옥성득 교수는 한국의 원시 유일신론 논증에 관해 138-178에 이르는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여 한글 기독교 언론들에 나타난 하나님 용어의 유일신관적 경향, 게일과 주시경의연구, 헐버트의 단군신화 해석, 그리고 언더우드의 하나님 용어 수용 과정 등을  기술하고 있다. 이 자료들만 검토해도 상당한 학문적 주제와 논문 요소들이 나올 것 같다. 
이 요약본 글을 읽어본 사람들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에서 사용되던 하나님 용어와 우리나라나 일본에서 사용되던 하나님 용어가 서로 어떻게 다르고 어떤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는지, 그리고 선교사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극동에 전파하면서 이 용어와 관련하여 어떤 고민을 했는지, 왜 그런 고민이 필요했고 중요성은 무엇인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않으면, 기독교는 본래 유대교에서 출발한 것이고 여러 대륙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오기까지 상당한 시간과 문화를 거쳤고 사회와 정치적 장벽들을 건너 유래된 것임에도 그 정체성인 유일신관을 손실하지 않았다는 데에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지를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냥 보통명사가 되어 아무렇지 않게 사용되어온 하나님이라는 용어. 그 역사의 이면에는 수많은 갈등과 번민과 연구가 있었다. 선교사들은 이 땅에 들어오면서 과연 무엇을 가지고 들어왔고 무엇을 전달해 주었을까? 만일 우리 조상들이 사용하던 용어 안에 유일신관적 요소가 없었다면 하나님 용어는 지금과 다르게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우리나라 고대 사회에서는 어떻게 유일신관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 다신교적 경향은 유일신관 하에 펼쳐진 다양한 필요에 의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다신교적 신앙이 점차 진화해 유일신관으로 변해간 것일까? 아니, 어쩌면 다신교의 최고신과 유일신과의 차이를 고대인들도 어떤 식으로든 이해할 수 있었단 말인가? 중국의 신과 한반도의 신은 어떻게 다른가? 서로 아무 관련이 없는 걸까? 우리 한반도에서 살던 고조선 시대 조상들이 지녔던 단군신앙은 정체가 무엇인가?
수도 없이 꼬리를 물고 등장하는 궁금증들을 유발시키는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사실 이 파트 하나만 가지고도 몇 년을 깊이 있게 연구할 수 있는 것들이다. 종교학적 연구도 가능하고 신학 및 문화인류학적 연구도 필요하다. 나는 이 요약본을 작성하면서 하나님 용어 문제에 대한 옥성득 교수의 결론 부분은 적지 않는다. 이 부분은 이 책을 구입해서 읽는 독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혜택이어야 한다. 185페이지에 있는 하나님 용어 규정에 있어서의 부정적 함의들에 대한 저자의 평가는 매우 합당하다고 판단한다. 
그 한 페이지의 소결론이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하나님 용어의 발전사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평가라고 볼 때, 이 한계성을 극복하는 것도 현대 기독교의 중요한 과제라 할 수 있다. 단순히 하나님 용어가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가만 살펴볼 게 아니라 그 용어 발전사에 잠재된 한계까지 점검하면서 미래지향적인 대안을 요청하는 저자의 진심어린 충고가 실은 이 파트가 가진 가장 큰 의미라 할 수 있다.
여기까지 한 파트를 정리하면서 머릿속은 복잡하기 이를 데 없다. 너무 단순화되고 형식화된 하나님이라는 용어 하나를 놓고 수많은 번민을 했던 조선의 선교사들이 존경스럽다. 그리고 초대 신앙인들이 어떤 역할을 감당했고 어떤 고민에 동참했는지도 절실하게 배우게 되면서 우리 신앙의 뿌리에 좀 더 근접한 것 같아 한편으로는 뿌듯하다. 주문을 외우듯, 비명을 지르듯, 만세삼창을 하듯 습관적으로 외치는 '하나님'이라는 용어는 우리가 쉽게 말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니다. 만일 이 역사를 깊이 있게 알고 이해하면서 그 이름을 부른다면, 왜 유대인 서기관들이 그 단어 하나를 기록하면서 철저히 붓을 갈고 몸을 씻었는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 나의 아버지, 나의 주님. 그 이름에 영광을. 그 거룩하고 온전하신 이름을 높여드립니다. 우리 조상들과, 그들을 찾아와 어루만지고 축복하며 눈물로 복음을 전했던 위대한 선교사들의 희생이 아버지의 이름을 높이는 산제사였음을 깨달았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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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내지는 수정 사항.
저자 옥성득 교수께서 첨언하신 내용에 따르면 이수정이 녹스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은 이유는 조선 양반으로서의 자존심 때문이었다고 하며,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이수정과 두 달 동안 함께 시간을 보낸 것이 아니며, 김옥균은 개종하지 않았고 김옥균(급진)과 이수정(중도)의 갈등은 두 사람의 노선 차이에 따른 것이라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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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02

[프런티어] Wu Chongqing: "공백"을 넘어서: 내부 개발의 관점에서 본 현급 도시-농촌 이동성

[프런티어] Wu Chongqing: "공백"을 넘어서: 내부 개발의 관점에서 본 현급 도시-농촌 이동성



[프런티어] Wu Chongqing: "공백"을 넘어서: 내부 개발의 관점에서 본 현급 도시-농촌 이동성
농촌 건설 연구 2022-01-08 18:00




기사 출처: "난징 농업 대학 저널(사회 과학 판)" 6호, 2021



저자: Wu Chongqing, 쑨원대학교 철학과 교수, 맑스주의 철학과 중국 현대화 연구소, 화남 농촌 연구 센터.



요 약: 현재 현 지역에서 도시와 농촌 간의 흐름은 점점 더 뚜렷해지고 있지만 대부분 점대점의 흐름이다. 이에 의해 형성된 도농불평등 관계도의 버전은 현급 농촌 활성화의 진정한 그림이 아니다. 내부 발전의 관점에서 현급 도농 이동성은 현급 자원을 기반으로 하며 다양한 생산 요소가 전 지역에 흐르고 통합되어 1차, 2차, 3차 산업의 통합 발전을 실현합니다. 현급 농촌 지역의 활성화. 산동성 허쩌시 동명현과 운성현의 10년 거주 인구 증가 이면에는 현의 1차, 2차, 3차 산업의 통합 및 발전과 초기 사회적 효과의 징후를 볼 수 있습니다.진화의 수렴. 내부 발전의 발전의 관점에서 Fei Xiaotong의 "대가족 모델", "1 년 모델" 및 "남강소 모델"에 대한 관심은 현급 농촌 활성화와 같은 맥락입니다. 전략. 중공"이 원동력입니다.


중심 단어: 빈 공간, 군 지역, 도농 이동성, 내부 개발, 농촌 활성화

1990년대 이래로 "농업, 농촌 및 농민"의 연구자들은 농촌의 "할로우아웃" 현상에 주목했고, 오늘날 "할로우아웃"이라는 용어는 대중화되어 거의 대명사가 되었다. 현대 중국 농촌 사회. 21세기 초, 나는 고향인 복건성의 남동쪽 해안에 있는 Sun Village를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청년과 중년들이 고향과 마을을 떠나 공장에서 일하게 된다면 이주노동자의 수출지인 농촌은 필연적으로 '공허화'될 것이다. 그러나 '같은 마을 공동체'라는 경제 현상이 만연한 지역에서는 여전히 농촌 사회가 활발하고 경제 활동과 사회 연결, 문화 활동이 서로를 보완해 '공동화'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한 그림을 만들어낸 경로와 논리를 탐구하는 것이 2012년 여름 "경계 밖: 중국 농촌 지역 "공동"의 역운동"을 쓰게 된 동기였습니다. 당시 나는 '공백의 역운동'이 북쪽의 절강성 원저우, 중부 푸젠성 푸티엔, 광동의 차오산과 남쪽의 레이저우 반도에 이르는 지역이다. 이것은 시골의 특수한 형태에 불과한 특별한 현상이다. [1]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동국동포'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2] 그래서, 항상 "공백"으로 간주되어 온 더 넓은 시골에서 새로운 변화의 조짐이 있습니까?




1. 군내 도농 이동 현상이 주목받고 있다.




중국 사회학자들 사이에서 Fei Xiaotong은 이미 1948년에 도농 이동에서 도농 연결의 측면을 주목했습니다. 그는 "시골에서 도시로 이주하는 것은 흔한 현상이었다. . . . 여기에서 내 눈길을 끈 것은 마을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마을에 뿌리를두고 완전히 흡수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도시로 가서 시골과 단절된 사람이 되십시오.” [3] 최근 몇 년 동안 “3농촌” 연구자들이 군 내 도농 이동 현상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주노동자의 장거리 이동이 정상화되는 반면, 현내 단거리 이동도 크게 증가했다. 학자들은 다양한 설명과 설명을 제공했습니다.




Lu Huilin과 Su Houfa[4]는 "뿌리화된 도시화"를 제안했습니다. 후난성 류양시를 예로 들면서 그들은 지역의 전통 불꽃놀이 산업이 응집과 분산이 결합되어 농촌 주민들이 향내에서 평화롭고 만족스럽게 살고 일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도농간 교육자원의 불균등한 분포와 지역산업의 분포로 인해 많은 농촌 부모들은 자녀들이 더 나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도시에 집을 사러 가야만 한다. 저자는 이를 "풀뿌리의 도시화" 또는 "카운티의 도시화"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도시화는 서구의 뿌리내린 도시화와 달리 뿌리를 내리는 도시화이다. 그들은 "중국 사회는 도시화가 뿌리를 내리기 위한 기본 조건, 즉 중국 사회의 보편적인 제도적, 문화적 특성(강한 지역성과 고향, 집단 체계와 그 유산)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지역 산업을 발전시키고 교육 자원의 균형을 유지함으로써 우리는 서구의 뿌리 뽑힌 도시화 모델을 피하고 뿌리 깊은 도시화를 현실로 만들 수 있습니다.”




"농민들이 도시로 이주하는 것은 여전히 ​​현재의 추세이지만, 그들이 도시에 들어서면 시골에서 소외된다는 전통적인 사회과학의 전제와 달리, 도시에 들어오는 농민들은 여전히 ​​시골에 묶여 있다." [5] Bai Meifei[6]는 '우주로 퍼진 가족'과 '세대간 가족'의 개념을 도시와 농촌 사이의 전통적인 공간 변형과 다른 개념으로 제시했습니다. 가족은 현과 시골에 동시에 퍼져 있습니다. 시간 단위. 이들의 경제협력 행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택 구입에 투자하는 것이고, 그 다음으로 (노인) 손자 돌보기, (아이들의 계절성 포함) 농사일을 돌보는 것이다. 통신(인터넷, 사물인터넷)과 교통시설의 발달은 가족과 공동체의 시간적 현실을 압축하고, 동시성과 중첩성을 높였으며, 기반시설의 변화는 도시와 농촌 주민들의 생활환경에 심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Dong Leiming[7] 등은 먼저 "자율적 도시화"에 주목한 다음 "주변 수륙 양용 도시화"를 제안했습니다. "근처의 고용 기회가 충분한 도시화 지역에서 공간 확장성을 갖춘 새로운 유형의 도시 및 농촌 가족 형태가 등장했으며 농촌 사회는 점차 '해체'되어 안정적이고 완만하게 진화하는 중국 특성의 독립적인 도시화 유형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Leiming 최근에 일부 농부들은 도시와 농촌 지역을 자주 이동하여 도시에서 주택을 구입하고 다음 세대를 양육하고 있으며, 농촌 지역은 점점 더 도시에 연결된 "뒤뜰"이 되었으며 완전한 형태를 형성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음에 주목합니다. 마을 사회. "수륙 양용 도시화"마을을 전략적으로 배치하는 방법과보다 효과적인 사회 거버넌스를 달성하는 방법은 향후 학계에서 신중하게 연구해야 할 문제입니다. [8] 농민들이 인근 도시에 거주하고 군 내 도시와 농촌을 자주 이동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직접적인 원동력은 도시에 진입하는 자녀 또는 손자의 요구에서 비롯됩니다. 질 높은 교육을 받습니다. Ye Jingzhong의 연구에 따르면 정책 설계 및 도농 노동 이동 배치와 함께 교육은 가족 구성원의 시간과 공간을 합리적으로 조정하고 할당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농촌의 초·중등 학교 배치 조정은 농촌 도시화의 불가피한 결과가 아니라 경제성장을 핵심으로 하는 발전주의를 추구하는 전략적 배치인 도시화를 촉진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다. [9] 일부 카운티와 도시에서는 대다수의 중학교가 카운티 소재지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농부들은 자녀가 더 나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도시에 가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He Xuefeng[10]은 현 경제, 특히 현의 산업화가 발전하기 어려운 경우 현 경제, 특히 현 경제는 생산적이기보다는 소비적이며 현이 부족해야 한다고 예리하게 지적했습니다. 고용 기회. 농민들이 집을 사러 군마을에 들어왔다고 해도 군마을은 농민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는 “농민 가족이 교육을 위해 군진에 집을 사서 군면에서 살아야 한다면, 농민 가족은 시골에 남겨진 부모를 도시로 데려와 도시에 살 수 없을 것입니다. "남은 농업에 대한 지원을 제공하는 노인 부모가 훨씬 더 필요할 것입니다. 농민이 시골 마을에서 주택을 구입한다고 해서 농민 가정에 대한 농업의 중요성이 줄어들지는 않지만 많은 경우에 농민 가정에 대한 농업과 농촌 지역의 중요성이 높아집니다." "중국 농민들이 도시에 들어오는 과정은 상당히 복잡하고 일회성 과정이 아닙니다. 대신 시골에서 도시로 집을 옮기지만 끊임없이 도시와 도시를 오가며 테스트합니다. 시골."




위의 학자들은 군 내 도시와 농촌의 흐름에 대해 서로 다른 평가를 내렸지만, 이러한 흐름이 순조롭고 지속 가능하게 보이려면 군 차원의 산업을 발전시키고 현 차원의 교육을 보급해야 한다고 모두 보았다. 균형 잡힌 방식으로 자원.




2. 이주 노동자가 고용을 위해 카운티로 돌아갑니다.







2021년 5월 11일, 제7차 전국 인구 조사("Seven Census")의 결과가 발표되었습니다. "Seven Census" 데이터에서 우리는 전국의 일부 지역에 있는 일부 지역 및 카운티의 주민 인구가 2010년의 6번째 전국 인구 조사("제6차 인구 조사")와 비교하여 다양한 정도로 증가했음을 발견했습니다. 전국의 주요 중소도시를 관할하는 지구에서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됨에 따라 거주 인구가 증가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국가 상황으로 볼 때, 2010년부터 2020년까지 가구와 분리된 인구는 88.52% 증가했으며, 2020년 전국 유동인구는 3억 7,582만 명으로 2010년에 비해 1억 5,439만 명 증가했습니다. 농촌에서 도시로 이동하는 인구 2억 4,900만 명으로 전체 유동인구의 66.26%를 차지하며 2010년에 비해 3.06% 증가했습니다. 국가의 인구 흐름은 여전히 ​​농촌 이주에 의해 지배되고 인구 흐름의 속도와 규모는 10 년 전보다 훨씬 높은 상황에서 인구 유출 속도와 영구 인구 감소는 전국 2,000 개 이상의 현에서 국가가 가장 분명해야 합니다. 현 제도가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최소한 산업화 및 도시화 정도가 낮고 비농업 고용 기회가 적으며 대부분이 농업 현 및 이주 노동자 수출 지역에 속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Seven Census"의 데이터에 따르면 대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대부분의 카운티에서 지난 10년 동안 거주 인구가 크게 감소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산둥성 허저시의 둥밍현과 운청현, 펑산현(구) 등 대도시와 중소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몇몇 현에서는 거주 인구가 감소하지 않고 증가했다. 단링현, 메이산시, 쓰촨성현, 리신현, 맹성현, 보저우시, 안후이성, 린취안현, 푸양시, 안후이성 등




우리는 군에 거주하는 인구가 기본적으로 지역 등록 인구이며 외국인 인구의 비율이 일반적으로 매우 낮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몇몇 현의 주민 인구가 감소하지 않고 지난 10년 동안 증가했다면, 이는 현의 출생률은 정상 수준을 유지하면서 원래 유출된 인구가 더 명확하게 돌아오고 있음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산동성 허쩌시 윈청현 거주 인구는 2010년 1,040,700명에서 2020년 1,120,900명으로 증가하여 순증가 80,200명, 7.71% 증가했습니다. 2010년 71.11명 1만명이 2020년 761,000명으로 순증가 49,900명으로 7.02% 증가했다. 그렇다면 이주노동자들은 왜 귀국하는가? 리플 로우 후 무엇을해야합니까?




'일곱 인구조사' 자료에서도 "시내 가구분리 인구는 도시인구의 12.97%로 도시 인구 8명 중 1명꼴이다. 가구분리 인구가 증가했다. 76,986,324명으로 192.66% 증가했으며, '5차 인구조사'와 '6차 인구조사' 사이의 성장률보다 훨씬 높은 성장률을 보였다." “시가지의 급격한 인구분리의 증가는 중요한 사회적 현상이 되었으며, 이는 메가시티나 메가시티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도시화의 발전 과정과 중소 도시.”[11] 시 지역의 사람과 가구의 분리가 심각하고 크며, 이는 카운티 내 도농 이동의 증가와 이주 노동자의 귀국 상황과 관련이 있을 수 있습니다. 군.




이주노동자 귀국에 관한 우리의 이전 연구들은 대부분 고향으로 돌아가 사업을 시작하는 이주노동자에 대한 이해에 초점을 맞추었다. 사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업가는 대부분 해외에서 성공적으로 사업을 시작한 성공한 사람들이고, 이주노동자 중에는 드물다. 소수의 복귀 기업가가 카운티 거주 인구 증가의 주요 공헌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일부 현의 ​​10년 거주 인구 증가를 더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2021년 7월에 산둥성 허저시 동명현과 운청현을 방문하여 연구를 수행했습니다.




1990년대에 허쩌시 지방 정부는 일반적으로 남부 장쑤에서 일하기 위해 노동 서비스 수출을 조직했습니다. 2015년부터 허저시 인적자원사회보장부는 현, 구, 향 정부와 협력하여 38개의 시급 귀가 기업 서비스 스테이션과 213개의 현급 귀가 기업가를 설립했습니다.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 선전 등 주요 도시에 주유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전국의 성(省) 수도와 선진국을 아우르는 귀국 서비스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사업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허쩌시 인적자원사회보장국의 통계에 따르면 2021년 2월 현재 총 301,000명이 기업가 정신과 취업을 위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우리가 동명현과 운성현에서 배운 것은 귀국자 중에 창업을 하기 위해 귀국한 사람이 적고 대다수가 취업을 위해 귀국한 사람이며 고향으로의 취업은 고향 사업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최근 몇 년 동안 허저시는 "판자촌에서 중점 도시를 개조"하는 정책을 통해 관할 현에서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를 수행했습니다. 건설 부동산은 특히 Dongming 현에서 모든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Dongming 현도 해변 지역에 황하 주거 이전 프로젝트가 있기 때문에). 해외취업으로 기술을 습득한 이주노동자들이 속속 귀국하여 사업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고향에 돌아와 일을 하고 있으며 주로 건설, 실내장식, 수도 및 전기설비, 도시급식, 카운티의 다른 서비스 산업뿐만 아니라 농업 서비스 회사에서 농업 기계의 전문 농업 노동자를 운영하기 위해 고용하고, 주요 농업 기업에서 고용하는 계절 비정규직. 이들 중 대부분은 40~50대이다.




이주노동자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군에서 일하게 되며, 그들의 고용기회, 고용일수, 고용수입은 일반적으로 이주노동자들을 수입한 곳보다 적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을 되돌리는 또 다른 요인은 무엇일까요?




3. 카운티 내 비농업 고용과 가정 기반 농업 고용의 결합




중국 소농의 생활 방식은 일반적으로 "농업과 ​​공업 보충"입니다. 전통적인 방식은 "농업에 노동을 보조"하는 것입니다. 농업은 가족의 주요 수입원이며 수공예품은 여유 시간에 수입을 보충합니다. 개혁개방 이후 점차 '농업보상'으로 발전하여 2가지 상황으로 나눌 수 있다. 노년층은 집에서 농사를 지어 수입을 보충하고, 다른 한 명은 여유농사를 하며 외출을 하고, 가계의 주요 수입원은 아르바이트이며, 농사일이 바쁠 때는 집에 가서 씨를 수확한다(노인은 없다. 집에서) 소득을 보충하기 위해. 이것은 모두 Huang Zongzhi[12]가 제도화한 "반 노동 반 농업"에 속합니다. 즉, 농업 인구는 일반적으로 너무 적은 토지로 인해 "과소 고용" 또는 "숨겨진 실업" 상태에 있어 많은 농부들이 의존해야 합니다. 저소득 동시에 농업 및 저소득 임시 근로자는 일부 가족 구성원이 일하러 나가는 "단시간 노동 및 부분 농업"방식을 기반으로 생활합니다. Huang Zongzhi et al.[13]은 농업 자체의 경제적 잠재력을 강조했는데, 그의 연구에 따르면 오늘날 중국의 농업은 세 가지 역사적 변화가 합류하여 주어진 기회에 직면해 있고 그 결과 1인당 노동력이 증가할 것이라는 점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10~25년 안에 농업 노동력 잉여와 저소득이라는 오랜 문제가 완전히 개선되어 농업 자체가 농민에게 완전한 고용 기회와 적당히 풍요로운 생활 수준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Huang Zongzhi 등이 예측한 밝은 전망은 실현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현재 일부 긍정적인 변화, 즉 "농업으로 일을 보조하는" 소농의 생계 방식은 변하지 않았지만 즉, "일을 위해 집을 떠나는 근로자"가 변경되지 않았습니다. 반일 및 반농업 모델이 본국에서 일하는 비농업 고용과 재택 농업 고용의 결합으로 변경되었습니다. .




산둥성 허저시 동명현과 운청현은 서로 인접해 있으며, 둘 다 대농업 현으로 3년 연속 20억 캐티 이상의 곡물 생산량을 자랑하는 "슈퍼 곡물 생산 현"입니다. 농부들은 여전히 ​​농업에 대한 전통적인 느낌을 유지합니다. 현지인에 따르면 농민들은 토지를 소중히 여기는 개념을 가지고 있으며 "토지에 곡물을 보유하고 기술에 곡물을 저장한다"는 데 동의하고 토지 양도의 위험이 높다고 생각하고 토지를 양도 할 의사가 없습니다. . 저장 및 판매, 먼저 저장한 다음 판매할 수 있는 농부를 위한 "곡물 은행"이 있지만(먹을 수 없는 경우) 일부 일반 사람들은 여전히 ​​집에서 곡물을 저장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집에서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음 .




또한 농민의 토지 처분, 자가 경작 및 토지 양도 외에 토지 신탁도 포함됩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식품 가격의 큰 변동으로 인해 농민과 농업 사업체는 토지 신탁에 더 많은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Dongming 현과 Yuncheng 현 농업 및 농촌 국의 연구 심포지엄에서 Dongming 현 토지의 약 50 %가 자작하고 토지의 25 %가 양도되고 토지의 25 %가 위탁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약 20 운성현 토지의 %는 자가 경작, 50%는 토지 순환, 30%는 토지 신탁입니다. 자경이라고 해서 농업이 가계의 유일한 수입원이 된 것은 아니며, 자경을 선택한다고 해서 여유를 이용하여 근처에서 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1년 내내 출근하는 가족은 토지이전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고, 직장에 복귀한 가족은 토지신탁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소위 토지 신탁은 실제로 농업 생산의 아웃소싱입니다. 현재 지역 농민들에게 제공되는 토지 신탁 서비스는 주로 현 공급 및 판매 협동 조합이 설립한 농업 서비스 센터와 전국 최대의 농업 생산 서비스 조직으로 알려진 Jinfeng 면입니다. Jinfeng 코뮌은 "현대 농업 서비스 계획 맞춤화 센터"로 자리 잡고 있으며 관리인에게 (무당) "200 파운드 추가 및 200 위안 추가"를 약속합니다. Yuncheng County Suiguantun은 농업 서비스 센터를 담당하고 주변 3개의 진과 진에 방사합니다.전문 협동 조합, 가족 농장, 대규모 곡물 농부 및 기타 새로운 농업 사업체 및 소규모 농부를 위해 밀 및 옥수수 기반 농업, 재배 및 관리를 개발합니다. "메뉴식" 토지 신탁 서비스, 수확, 판매, 통일된 농산물 공급, 통일된 농업 표준, 통일된 판매 및 가공, 통일된 심기 및 수확, 통일된 예방 및 통제, 통일된 곡물의 운영 방식을 구현합니다. 건조 및 판매. 호스팅은 세미호스팅과 풀호스팅으로 나뉩니다. 밀 생산을 예로 들면 쟁기질, 파종, 물주기, 비료, 살충제 및 살충제 살포, 수확, 건조 및 창고 보관 등 총 7개의 생산 링크가 있으며 3개의 생산 링크가 아웃소싱되는 한 신탁 관리로 간주됩니다. 물론 자가경작과 토지신탁의 구분이 그렇게 명확하지 않다. 예를 들어 자가경작을 하더라도 특정 계절에 특정 생산 링크를 아웃소싱하는 것을 배제하지 않고 옥수수를 재배할 때 관리하는 동일한 토지와 밀을 재배할 때 자가 재배가 있습니다. 농업 서비스 센터에 대한 통합 판매. 요컨대 농민들은 실제 상황에 따라 토지이용 방식을 매우 유연하게 조정할 수 있다.




사실 엄밀한 의미에서 온전한 호스팅은 없고, 호스팅을 하더라도 여전히 자기수양의 연결고리가 있다. 물주는 과정을 아웃소싱할 수 없기 때문에 농업회사가 물 주는 과정의 수탁자를 받아들이기를 꺼려하는 것이 아니라 농부들이 관수는 획일화될 수 없고 스스로에게 의존해야 하는 관심과 양심의 작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 땅에 물을 주는 것은 밀 생산에서 가장 중요한 연결 고리이며 밀 이삭과 곡식 충전 기간 동안 땅에 물을 충분히 주지 않으면 수확량 감소로 직접 이어질 것입니다. 동명현을 흐르는 황하(黃河)는 예전에 "유하(流江)"였으므로 황하를 홍수 관개용수로 돌리기에 매우 편리했습니다. Xiaolangdi 발전소가 완공되면 상류에서 물을 방출하여 하류의 토사 강바닥을 씻을 수 있습니다.강바닥은 일반적으로 3 ~ 4m 낮아지고 더 이상 황하에서 물을 우회 할 수 없습니다. 관개. Dongming 현 농업 및 농촌 사무국의 Yang 국장은 "과거에는 초당 2,000입방미터 이상의 유량이 해변을 범람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초당 5,000입방미터의 유량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울 우물은 고급 농지 건설에 부속되어 있으며 하나의 우물은 50무의 토지를 관리할 수 있고 토지는 유료 카드로 관개할 수 있습니다. 토지의 물주기가 자유홍수에서 유료관수로 바뀌었기 때문에 농업서비스업체에 외주를 맡게 되면 벼랑 끝으로 물이 충분히 관개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 농민들이 스스로 관개를 하게 된다. 예외.




위에서 언급한 객관적인 상황의 존재는 귀국 이주 노동자가 카운티 내 비농업 고용과 국내 농업 생산의 일부를 결합한 생계 모델을 채택한다고 결정합니다. 이 생계 방식에서 농부들은 도시와 농촌을 오가는 것이 아니라 집이 중심이고 카운티 내에서 일한다고 말하는 것이 좋습니다.




국가통계국이 발표한 '이주노동자 모니터링 조사 보고서'(2010-2020)에 따르면 이주노동자의 월평균 임금은 2010년 1690위안에서 2019년 3962위안으로 10년 새 3배 이상 올랐다. 연령. 지난 10년 동안 대규모 농업 경영인의 소득 증가율은 도시 이주 노동자의 소득 증가율보다 더뎠다. 농촌에서 가족노동을 주체로 하는 농업경영인의 소득 기대치가 도시이주노동자의 임금소득을 기준으로 한다면, 농촌과 농업을 떠나는 농업경영인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인가? , 이주 노동자의 대열에 합류? Dongming 현과 Yuncheng 현의 상황으로 볼 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현으로 돌아와 일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나라가 통일된 도시와 농촌 노동 시장을 형성했지만 그 안에 흐르는 노동력이 균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그들이 내리는 합리적인 선택 중 일부는 현금 수입에 초점을 맞추고 다른 일부는 접근 가능한 노동에 초점을 맞출 수 있습니다. 범위 내에서 언제든지 가족 구성원.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은 집에서 대규모 농업에 종사하지 않고 농업을 다양한 정도로 위탁하고 카운티 내에서 2 차 및 3 차 산업에 종사합니다.




4. 현의 1차, 2차, 3차 산업을 통합 발전시키는 방법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9기 5중전회에서 "2035년 국가경제사회발전 및 장기목표를 위한 14차 5개년 계획 수립에 관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제안"을 검토, 승인했다. 중국 공산당 활성화에 관한 섹션은 특히 "현 경제를 발전시키고 농촌 지역의 1차, 2차 및 3차 산업의 통합 발전을 촉진하고 농촌 경제 형식을 풍부하게 하고 농민이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공간을 확장할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소득." 현의 1차, 2차, 3차 산업의 통합 발전을 촉진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예를 들어 Yuncheng County를 논의할 수 있습니다.




운성현은 산동성 성급 현대농업공업원구 시범현으로 국가급 1개, 성급 8개를 포함하여 총 203개의 주요 농업기업이 있으며 6개의 성급 유명 농산물 브랜드를 보유하고 있다. 및 1개의 잘 알려진 상표. 우리는 1차, 2차, 3차 산업의 통합 발전을 통해 두 개의 주요 농업 기업인 Lvhe Agricultural Comprehensive Development Co., Ltd.와 Huabao Food Co., Ltd.를 조사했습니다. 그 발전 과정은 다음과 같은 공통점을 반영합니다. 1차 산업에서 시작하여 자금을 축적하고 투자를 확대하여 대규모 생산을 형성하고, 1차 농산물의 가격 변동 영향에 저항하기 위해 2차 산업은 기반으로 개발됩니다. 1차 산업, 2차 산업 투자 3차 산업의 발전은 상대적으로 덜 시급하고 자신의 능력에 따라 할 수 있습니다.자금이 충분하면 3차 산업을 투자하여 산업 체인을 확장할 수 있습니다.




Lvhe 농업종합개발(주)는 2014년에 설립되었습니다. 토지 이전을 통해 양묘장, 양돈장, 식용 버섯 농장을 설립하고 채소 온실 재배를 조직했습니다. 회사에서도 농민의 토지수탁을 받아 협동조합을 설립하고 사장이 지역의 전문농업인을 모집하여 영농을 하고 있다. 회사는 생산규모 확대에 따라 냉장창고 건설에 투자하고 있으며, 1차 농산물의 시장가격이 낮아지면 냉장보관을 위한 농산물 보관을 주선할 예정이다. 그 후 회사는 카운티의 초, 중등 학교를 중심으로 중앙 부엌 및 콜드 체인 유통 사업을 개발했습니다.주로 회사에서 재배한 농산물을 사용하여 패스트 푸드 도시락으로 가공했습니다. 쌀 총 10위안. 중앙 부엌의 노동자들은 오전 7시부터 오전 10시 30분까지(집에서 그들을 돌보기 위해) 일하고, 하루 생산 능력은 100,000상자의 도시락에 달할 수 있습니다. 근무 시간 동안 1인당 100개의 간식을 만들 수 있습니다. 신선도와 보온성을 확보하기 위해 음식배달차량이 중앙부엌에서 초중고교까지 이동하는 시간을 2시간 이내로 통제하고 있으며, 기본적으로 이러한 주행반경은 군 전체를 커버할 수 있다. 이제 회사는 "노인과 젊은이를 돌본다"는 목표로 Lvhe 요양원을 건설하기 시작했습니다. Zhang Qingtao 이사회 의장 겸 회사 당위원회 서기는 "요양원 건립의 목적은 Lvhe의 브랜드를 확장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지역 사회의 긍정적인 평가를 이끌어냅니다. 회사의 1차 산업에서 확장된 회사의 2차 및 3차 산업 콘텐츠는 카운티 내 사회(시장)의 실제 요구를 기반으로 하며 카운티에 뿌리내리는 중요한 비즈니스 철학이 되었습니다. 농업을 지역 비즈니스 콘텐츠로 삼는 기업은 이와 관련하여 일정한 공통점이 있어야 합니다.




Huabao Foods Co., Ltd.는 또한 Yuncheng County의 성급 농업 선도 기업으로 돼지 농장으로 시작하여 자금을 축적한 후 도축 공장을 건설했습니다. 나중에 돼지고기 시장 가격의 큰 변동으로 인해 회사는 냉장고를 건설하기 위해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야 했습니다. 돼지 고기 가격이 너무 낮아 사육 돼지가 돈을 잃을 경우 돼지 고기는 가격 저점을 피하기 위해 도축 후 일시적으로 저장되고 냉동됩니다. 냉동육은 신선육에 비해 가격이 현저히 저렴하기 때문에 신선육은 일반적으로 보관이 쉽지 않다. 이 회사는 또한 최대 유통 반경이 200km를 넘지 않는 자체 콜드체인 물류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반경이 너무 크고 배달 시간이 너무 길면 돼지 고기의 신선도를 보장 할 수 없습니다. 소비자들은 냉동 돼지고기를 좋아하지 않고 유통 반경의 제약으로 인해 반경 200km 이내의 일일 시장 수요에 의해 도축량이 제한되고 도축 산업에서 단일 공장의 생산량은 일반적으로 크지 않습니다 . 그러나 시장의 돼지고기 소비량에는 계절적 차이가 있습니다.여름에는 소비량이 적고 겨울에는 많습니다.도축 공장의 일일 생산량이 제한된 성수기에는 시장 수요를 어떻게 충족시킬 수 있습니까? 이것은 냉동고의 보관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여름 Huabao 도축 공장 일일 생산량의 85%는 신선한 육류 공급이고 15%는 냉동실에 저장됩니다. 냉동고를 건설하면 먼저 양돈 산업의 시장 위험을 피할 수 있고 두 번째로 돼지고기 시장 수요의 계절적 차이를 조정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현재 직영점을 오픈해 도축장의 역량을 활용해 다양한 돼지고기 심층 가공, 판매 방식 확대, 육류 유통기한 연장, 직영점 판매 등을 시도하고 있다. 회사 사장은 “1차 산업에서 시작해 2차 산업에서 돈을 벌고 3차 산업에서 만나다(즉, 각 기업의 상황에 따라)”라고 생생하게 요약했다.




현의 1차, 2차, 3차 산업의 통합 발전은 자체 모델과 논리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보존을 위해 필요한 유통 반경 내 시장 수요, 카운티 개발에 따라, 신선 보관 창고 또는 냉동고를 설치합니다. 1차 산업에서 2차 산업으로의 발전이 가장 어렵고도 중요합니다. 이러한 전환이 실현되지 않으면 1차 산업의 운영은 시장 위험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며 개발 과정에서 극복할 수 없는 병목 현상이 발생할 것입니다. 전환이 완료되면 3차 산업의 발전 속도와 규모를 선제적으로 침착하게 결정할 수 있습니다. 현의 1차, 2차, 3차 산업의 통합 발전의 주요 특징은 소규모 시작, 소규모 진입 및 소규모 지역화 개발입니다. 그래야만 지역의 1차, 2차, 3차 산업의 통합 발전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대규모 개발을 위해 큰 자본을 도입하고 대규모 과대 광고를 하는 대중적인 비즈니스 모델과 다르며, 그 결과는 대내외, 대재앙과 하강이 될 수 있습니다.




현 지역의 1차, 2차, 3차 산업의 통합 발전은 고유한 모델과 논리가 있지만 그 출현에는 특정 단계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특정 조건이 필요합니다. 즉, 현의 1차, 2차, 3차 산업의 통합 발전은 전적으로 지방 자치단체나 기업이 자체적으로 기획한 결과가 아니라 어느 정도 지역 사회경제적 발전의 산물이다. 일련의 요인이 수렴된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이른바 특정 조건과 특정 발달 단계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아마도 다음과 같은 진술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역의 주요 농업 기업의 자본이 2차 산업을 시작할 만큼 충분히 축적되었을 때, 현의 시골을 비우는 추세는 기본적으로 역전되었고 거주 인구는 증가했습니다. 떨어지는 대신, 현의 교통 상황이 크게 개선되었습니다. 현급 이주 노동자 및 재택 농업의 생계 모델의 실현과 일치합니다. 및 육종업, 현급 농산물 및 부자재 시장 수요의 꾸준한 성장과 지역 농업 선도 기업의 신선한 농산물이 현급 시장을 커버한다. 이것이 현의 1차, 2차, 3차 산업의 통합 발전을 위한 조건이라기 보다는 1차, 2차, 3차 산업의 통합 발전의 성과 또는 결과라고 보는 것이 더 낫습니다. 카운티. 사실 이러한 요소들은 서로를 보완하며 '중공'의 악순환을 끊고 '공허'를 초월하는 힘을 구성한다. 물론 무시할 수 없는 또 다른 중요한 사실이 있는데, 이 모든 일이 읍이나 군이 아니라 인구 100만 이상의 대농군과 대군 내에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작은 인구.




5. 속모발달과 적절한 부위별 범위




Sophia University Tsuruumi Kazuo [14]는 "내부 모발 발달 이론"을 옹호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녀는 발달 과정에서 발달 과정이 "지역"을 기반으로 해야 함을 강조하면서 발달 과정에서 전통적인 내부 모발 발달의 중요한 역할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지역 자원과 전통을 기반으로 하지만 지역의 크기가 너무 커서는 안 됩니다. “'소규모'가 중요한 이유는 이런 조건에서만 주민들이 스스로 어떻게 생활하고 발전할지 결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내부 개발도 외부 요소를 도입해야 하며, 현대화 패턴이 보완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서로. Tsurumi Kazuko[15]는 또한 긴 기사 "내부 헤어스타일 개발의 원형 - Fei Xiaotong과 Yanagida Guonan의 비교"를 썼고 Fei Xiaotong은 Tsurumi Kazuko의 자신의 생각 해석에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이로부터 Fei Xiaotong과 Tsuruumi Kazuko의 공통 이론은 "내부 모발 발달 이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Fei Xiaotong은 또한 작은 마을의 발전에 대한 자신의 견해가 "아마도 일본의 Kazuko Tsurumi의 '내부 모발 발달 이론'과 유사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Fei Xiaotong은 Kazuko Tsurumi를 초청하여 1982년과 1984년 사이에 공동 검사를 실시하도록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강소성의 농촌 개발. 그들은 강소성 소진의 급속한 인구 증가에 주목하여 소진과 면, 여단 기업의 발전 경로를 이해하는 데 중점을 두었고 내부 발전의 관점에서 연구했습니다.




Fei Xiaotong은 1980년대에 남부 Jiangsu 모델을 시찰했을 때 그것이 또한 전통적인 모델에서 태어났다고 믿었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전통적인 모델이 있습니다. 하나는 전통적인 대가족 모델입니다. 즉, 대가족 모델인 '1세 2공' 모델과 남강소 모델, 이 세 가지 모델은 같은 맥락에 있다. "남강소성 모델에서 공동체 소유는 어떤 의미에서는 가족 소유의 발전이기도 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공동체와 생산팀은 일반적으로 사회주의 시대에 새로운 것으로 간주되며, 이러한 방식으로 식별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왜 코뮌 제도가 중국 농민들에게 그렇게 쉽게 받아들여지고 20년 넘게 운영되고 있는 것일까요? 고민해볼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수술을 하면서 전통 대가족의 그림자를 봤습니다. '하나의 대 두 대중'은 대가족의 지도 이념이 아니거나 심지어는 가족까지 확장되는 것 아닌가요? 가족 또는 씨족의 기본 조직 원칙?이 관점에서 볼 때 공동 및 여단 기업의 발생, 관리 방법, 모집 및 배포 원칙은 전통적인 대가족 모델의 모든 곳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16] Fei Xiaotong. [17] 또한 "남부 장쑤성의 향 산업 모델은 도시 기술 및 장비의 지원과 같은 외부 조건과 결합된 농업 집단의 축적에 의존하는 공동 집단 경제의 기반 위에 나타났습니다. Tsurumi Kazuko가 내부 모발의 발달에 대해 말할 때 그녀는 단지 "사회 전체가 내부 모발 발달의 단위로 간주되지 않고 지역의 제한을 통해 간주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지 않습니다. 제한 구역의 크기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1980년대에 쓰루미 가즈코와 페이샤오통이 함께 장쑤 남부의 공동 기업을 내부 개발의 관점에서 시찰했을 때, 그들은 분명히 향(코뮌)을 "내부 개발"의 영역으로 간주했습니다.




Fei Xiaotong은 1980년대 인민 코뮌 시대의 "1세 및 2 공적" 모델과 사회적 기업의 유사성을 구체적으로 언급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내부 개발의.. 이 추론은 Fei Xiaotong이 신중국 건국을 앞두고 떠나기로 선택한 것에 대한 Kazuko Tsurumi의 설명에서도 확증될 수 있습니다. Fei Xiaotong은 대만이나 영국, 미국을 선택할 수 있었지만 칭화대학교에 남아 1949년 10월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했습니다. Tsuruumi Kazuko[18]는 다음과 같이 인용했습니다. "1948년 12월 아직 베이징에 있던 Redfields는 당시 Fei Xiaotong의 기분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항상 낙관적이고 용감했던 Fei Xiaotong은 공산주의자... Fei Xiaotong은 중국의 공업 및 농업 발전에 대한 자신의 견해가 기본적으로 새 정권에 대한 자신의 이익과 같다고 느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중국을 위해 계속해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고 아마도 중국을 위해 뭔가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Tsurumi Kazuko 의미: Fei Xiaotong은 산업 및 농업 발전에 대한 중국 공산당의 생각을 이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신중국 건국 이후 중국 공산당은 청사진을 그릴 것이며, 비효동은 신중국의 공업과 농업의 발전 경로가 내부 발전의 발전 경로, 즉 노동자 동맹의 발전 경로와 유사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믿고 있다. 농민, 공업과 농업의 조화로운 발전, 산업화는 지역적이며, 농촌과 농업을 훼손하지 않고 서유럽과는 다른 산업화의 길을 걷게 된다.




인민 꼬뮨의 실천적 탐구를 내부 발전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고 그것을 중국 사회의 전통적 발전의 한 단계로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인민 코뮨이 사실상 소규모의 시도임을 알 수 있다. 규모 지역 범위 내에서 산업과 농업의 조화로운 발전을 달성합니다. 1958년 8월 우리 나라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이 통과한 "농촌 인민공동체 설립에 관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결의"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시간이 지나면 우리 나라 시골에는 많은 공산주의 코뮌이 있을 것이고 각 코뮌에는 고유한 농업, 공업, 대학, 중학교, 초등학교, 병원, 과학 연구 기관, 상점 및 서비스 산업, 운송 사업이 있을 것입니다. 1961년에 공포된 "농촌 인민 코뮌의 사업에 관한 규정"의 제12조는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 코뮌 관리 위원회는 필요와 가능성에 따라 사회적 기업을 단계적으로 조직할 수 있습니다. 코뮨과 여단이 공동으로 투자하거나 여러 코뮌이 공동으로 투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앙 정부는 분명히 인민 코뮌이 코뮌이 운영하는 기업을 조직해야 하는지 여부에 대한 정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반복. 예를 들어, 1962년에 공포된 "인민 꼬시 60조"의 제13조의 규정은 기본적으로 1년 전에 공포된 "농촌 인민 꼬시의 사업에 관한 규정" 제12조의 규정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위원회는 일반적으로 향후 몇 년 동안 기업을 설립하지 않는다.이미 설립된 기업은 정상적인 생산 조건에 부합하지 않고 대중에게 인기가 없으면 모두 폐쇄해야 한다.유지해야 하는 기업은 개별 기업의 경영은 수공예 협동조합으로 이관되어 생산팀에 위임되거나 개별 수공예 및 가족 부업으로 변경될 수 있습니다. 현 인민위원회의 위원은 계속해서 코뮌이 운영하거나 생산팀에 위임할 수 있다." 코뮌이 운영하는 기업은 농업 생산과 농민의 생활에 직접 봉사해야 하며 농업 생산을 방해하거나 코뮌 구성원의 부담을 증가시키지 않아야 한다. 1975년 10월 11일까지 "인민일보"는 "위대한 밝고 찬란한 희망 - Gongxian County Huiguo Town Commune의 조사, 허난성”은 촌과 팀 기업을 잘 운영하기 위해 열성적이다”라고 논평에서 지적했다. 또한 세 가지 주요 차이점을 좁히기 위해. , 노동자와 농민의 동맹을 강화하고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공고히 하는 것 또한 지극히 광범위한 의미를 갖는다. "




실제로 Gongxian County의 사회적 기업의 발전은 중단되지 않았지만 개혁 개방 전후에 걸쳐 진행되었습니다. 물론 공현현의 사회적기업은 개혁개방 이후 더욱 발전하였다. 1992년 나는 향군(사회적기업)을 시찰하기 위해 공현(지금은 공이시로 개칭)에 갔다. 2020년에 Gongyi시는 중국 100대 공업 현(도시) 중 하나로 선정되었으며 이는 또한 지역 산업화의 강력한 활력을 나타냅니다. 페이샤오통이 고민하는 대가족모델, '1세2공' 모델, 남강소모델(향촌기업)은 전통적으로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러나 개발 과정에서 연속적으로 뒤따랐습니다.대신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1980년대의 향읍과 촌락기업을 새로운 현상으로 묘사하는 것은 분명히 적절하지 않다.




코뮌과 향을 내부 개발 및 지역 산업화의 지역 범위로 간주하면 특정 개발 조건이 개선되면 이 지역 범위가 확장됩니까? 그리고 확장해야 합니까? 이것은 츠루미 가즈코와 페이샤오통이 당시 논의하지 않은 문제였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인민 코뮌의 규모에 대한 마오쩌둥의 생각을 살펴보고자 할 수 있습니다.




벌집형 가스렌지를 생산하는 동시인민코뮌 금속공장 노동자들(1961)




1955년 마오쩌둥(毛澤東)은 그의 저서 "중국 농촌 지역 사회주의의 고양"에서 "현재의 소규모 1차 코뮌은 여전히 ​​노동력과 다양한 생산 수단의 완전한 사용에 대한 제약이다. , 우리는 이것을 돌파할 수 있다"고 말했다. 걸쇠를 걸고 전체 생산력과 생산을 크게 발전시키십시오. 그때에는 다양한 사업을 발전시키고 도시와 농촌을 섬기는 많은 대규모 사업을 발전시키는 것이 더욱 필요합니다.”[19] 협동조합 소규모 협동조합은 규모가 작고, 크고 선진 협동조합은 규모가 크기 때문에 노사분업이 더 큰 규모로 이루어질 수 있다. 인구가 많고 생산 수단의 규모가 크며 지리적 공간이 클수록 노동 분업이 더 필요하고 노동 분업이 상세할수록 더 많은 일자리가 제공되고 더 많은 일자리가 제공됩니다. 생산 수단의 사용, 그리고 더 높은 효율성. . 마오쩌둥(毛澤東)은 "일부 지역에서는 협력 후 일시적인 노동력 과잉이 있는데, 이는 생산 규모가 확대되지 않고 다각화된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재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규모가 크면 운영할 부서가 많아지고, 노동의 범위가 자연의 폭과 깊이로 확장되고, 작업이 섬세하게 이루어지며 노동력이 부족함을 느낄 것이다.이 상황은 단지 농업기계화 이후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미래에는 사람들이 상상하지 못한 다양한 사업들이 몇배, 열배, 몇십배의 높은 수확량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공업, 교통, 교류의 발전은 전임자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과학, 문화, 교육, 보건 등의 사업도 마찬가지이다."[20] 마오쩌둥(毛澤東)은 그는 "큰 사회"의 "큰" 우월성 때문에 반사회주의에 오래 머물 수 없다고 믿었다. 마오쩌둥(毛澤東)은 "인민 코뮌이 좋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큰"과 "공공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더 넓은 공간에서 생산 규모를 확장하고 조직을 심화할 수 있는 "큰"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농민(시장화보다는). ) 분업과 협력을 기반으로 다양한 작업을 개발할 수 있으며 많은 농촌 노동력을 흡수할 수 있습니다. "공공" 때문에 농업, 공업, 상업, 운송, 과학, 문화, 교육, 보건은 광활한 농촌 지역에서 실시되고 고도의 조정, 깊은 통합 및 범위 내에서 합리적인 배치로 발전되었습니다. '대', '공공'이 아니면 공업, 농업, 상업, 학문, 군인을 통합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주도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과격한 인민의 코뮌 운동이 틀렸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했다.




인민 코뮌의 공간적 범위(향)를 현 지역으로 확장하면 인민 코뮨이 토지를 기반으로 다양한 작전을 수행하고 노농과 농민의 간극을 좁히려는 발상을 알 수 있다. 오늘날의 군을 단위로 하는 도시와 농촌 사이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며, 농촌 활성화 전략은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운송 조건이 크게 개선되어 생산 요소의 흐름이 가속화되고 인력과 물류의 거리 비용이 크게 감소했습니다 (즉, Mao Zedong이 말한 것처럼 산업, 운송 및 교류의 발전, 1차, 2차, 3차 산업의 통합 발전에 필요한 단위 공간은 인민 코뮌(소위 "큰 산업")의 향 범위에서 확장되어야 하고 확장될 수 있습니다. 더 큰 카운티 범위.




2021년 중앙문서 제1호는 현의 배치에 기초하여 현 지역에 현대적인 농촌 공업 시스템을 건설하고 농촌의 1차, 2차, 3차 산업의 통합 발전을 위한 시범 단지를 건설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현(구) 단위로 건설하고 산업체인의 주체는 현에 남아 있어야 한다.농민은 산업의 부가가치를 더 많이 공유하고 현을 통합 발전의 중요한 진입점으로 삼는다. 도시와 농촌 지역의. 우리는 그러한 개발 목표가 내부 모발의 개발을 통해서만 달성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외부의 대규모 자본과 대규모 프로젝트가 군에 개발을 위해 도입되면 지역 농민은 노동력을 파는 일반 노동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대형 외국 기업은 경영상의 문제가 걱정되어 현지 노동자 채용조차 꺼림). 산업의 부가 가치를 공유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 현은 생산 기지 또는 원자재 공급 장소가 될 수 밖에 없으며 프로젝트 산업 체인의 본체는 현에 머무를 수 없습니다. 내부발전의 발전에 힘써야만 로농의 비교적 호의적인 관계와 도농관계를 확립할 수 있고 농촌의 '공백' 정도를 낮출 수 있다. Fei Xiaotong은 대가족 모델, "1 년 및 2 공"모델 및 남부 강소 모델 (향 및 마을 기업)의 유사한 정맥 - 내부 개발의 발전에 주목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이것은 오늘날의 현 수준의 농촌 활성화 전략으로 확장될 수 있습니다.




6. 결론




군내 도시와 농촌의 흐름에 대한 기존의 연구는 대부분 가족 전략 선택의 관점에서 수행되거나 가족 교육의 필요성 또는 가족 결혼의 필요성으로 인해 카운티 타운에서 주택을 임대하거나 구입할 여력이 없습니다. 열린 가족". 이와 같은 군내의 도시와 농촌의 흐름은 점대점의 흐름(고향과 군청 소재지)이다.군 소재지는 교육소비나 주택소비를 위한 장소일 뿐이다. 도시와 농촌의 불평등 관계 농촌 활성화 그림 두루마리.




지난 10년간 산둥성 허쩌시 동명현과 운성현 주민 인구의 증가는 현의 1차, 2차, 3차 산업의 통합 발전과 초기 긍정적인 사회적 효과의 징후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상황의 출현은 오랜 기간에 걸쳐 다양한 요인에 의해 발생하며, 발전과정의 진화와 수렴은 지방자치단체의 일시적인 기획이나 기업의 결단력의 산물이 아니다. 그것을 귀속시키고 싶다면 군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자원의 내부 개발에 귀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현 지역의 1차, 2차, 3차 산업의 고도로 통합된 발전을 진정으로 달성할 수 있는 것은 다양한 지역 자원의 뿌리를 통합하는 지속 가능한 내부 개발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발전 패턴에서 현내 도농의 흐름은 현진과 농촌 고향 사이의 일대일 흐름일 뿐만 아니라 현 전체 생산요소의 흐름과 통합이다. 농촌활성화의 시작점인 '공허화'를 넘어설 것으로 기대되는 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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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무처. 중국 농촌에서 사회주의의 고조: 2권 [M]. 베이징: 인민출판사, 1956.

[20]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무처. 중국 농촌에서 사회주의의 고조: 2권 [M]. 베이징: 인민출판사, 1956.










추가 읽기[프런티어] Wu Chongqing: "경계 밖": 중국 농촌 지역의 "공백"의 반전 운동
[음성] Wu Chongqing, Zhang Huipeng: 소농과 농촌 활성화: 현대 농업 산업 부문 시스템에서 소농의 구조적 딜레마와 탈출구
【서문】Wen Tiejun: 중국의 도농 통합 경로
"고향으로 돌아가기" | Pan Jiaen: "Reverse"에서 "고향으로 돌아가기"

2022/02/01

Waiting Expectantly on Zoom - Friends Journal


Waiting Expectantly on Zoom - Friends Journal

April 1, 2021

By Kathy Neustadt


Photo by One


Let’s face it: there is something inherently strange (even for Quakers) about sitting with your eyes closed in front of an open laptop computer, its screen filled with images of people you’ve mostly never met. They come in and out of focus when you open your eyes just enough to make sure that they are still there. All of us on this Zoom call are muted so there is no shared ambient noise. This results in an unnatural, slightly disconcerting environment of non-sound. Even the “we”-ness of this online gathering is unstable, since any given sneaked peek may reveal a new participant, who has likely changed the pattern of rectangles on the screen. To top it off, the people participating are all “here”—virtually—because we’re hoping that a spiritually satisfying (but highly intangible) experience will result.

So the question is, does it?

And the answer—oddly, surprisingly, even miraculously—is that it does. Or at least that it has, steadily, for a small group of Quakers that has been Zooming since last March, logging hundreds of days of daily worship. Whether this experience is applicable to others or replicable, I can’t say, but I believe it’s a story worth telling, remembering, and filing away for the future.

It all began in mid-March, just days after the World Health Organization declared COVID-19 a pandemic, when the Ministry and Counsel Committee of Allen’s Neck Meeting in southeastern Massachusetts made plans for its first Sunday service on Zoom. Peter Crysdale made an impromptu offer to host half-hour Zoom worship sessions for the other six days of the week. Peter served as the minister of Allen’s Neck from 2002 to 2011 and has had several other less-defined roles over the ensuing years (he now refers to himself as “Minister Among Ministers Emeritus”). Quickly reaching out to local Friends at Westport, Sandwich, and Falmouth Meetings, he also contacted individuals further afield who might be interested (myself among them, happily), including members of the writing group he’s run for years. Peter later recounted:


I was struggling with my role within the meeting, and this came as an opportunity to do something I loved. At the beginning of the pandemic, I remembered attending daily worship at Pendle Hill [study center in Wallingford, Pennsylvania] during the ten years I was there and how after several of those years that half-hour meeting in the Barn had gradually grown into a profound realization of what silent worship was, and that it was essential to my life. So I wanted to offer that, though I didn’t really think it would take, or that it would last.

Peter added:


I also came to this experience with a slight disdain for Zoom. I didn’t think the technology could work as a meetinghouse. But I immediately felt a connection with the people who showed up and had no ambivalence about silence. It’s lovely to jump in the deep end with people, where you have no idea what’s going to happen, and we soon found that the worship we entered into was real and really quite deep. The with-each-otherness that’s developed has surprised us all.

This sense of surprise is echoed regularly in the messages from daily meetings. As one person observed recently:


This rhythm, this expectation that I will have this time with you all—and with God—this idea of practice and going deeper is just amazing. The connection that I feel with you over Zoom, how does it happen? I only see a little of you and your homes, but we have created such deep intimacy.

Even an attender who regularly joins the group by phone, which would seem to lessen the connection, has shared her sense that “something magical is happening here in this medium that I didn’t think possible. It’s become one of the firmer practices in my life during a time when everything else is pretty upside down.”

Others appreciate their experience of worship for its sense of continuity. As an original member of the group reminded us, “The history of Quaker worship began with regular ‘family worship’ at home, so I consider what we’re doing to be historically based. And that fills me up—we’re doing what we used to do.” To which another Friend added, “This sitting in daily worship is something I have long wanted. It was hoped for, yet I had not the wherewithal, alone, to mold my time. But together—the six or eight or twelve of us—we have become the heart of my daily practice.”

“We don’t do introductions, and we don’t do announcements,” Peter explains. “That might sound strange, but I think it gives people a sense of singleness of purpose. It reminds me of the old advertisement for Tetley: ‘The tea that dares to be known by good taste alone.’ In other words, it’s all about the silent time.” In direct confirmation, a long-term attender noted, “This has been a very safe environment for me, maybe especially because it doesn’t involve any business; it’s been pure worship.”

Photo by Rymden

For the first eight months Peter emailed a Zoom invitation for the 8:30-to-9:00 a.m. session to a couple dozen people every Monday through Saturday. The participants were, and remain, heavily weighted toward retirement age and largely from New England. But it’s the exceptions to these characteristics—the people considered to be most “from away”—that give our community stone soup some of its liveliest seasoning. For example, we are lit up any time the young family from Harlem in New York City is able to join us (usually during breakfast), when both mom and toddler are likely to share. And the “weighty” couple from the United Kingdom, originally connected through Peter’s writing group, always broaden and deepen our perspective.

As it turns out, our animals are the garnish. The cats on the windowsills and furniture or on laps where we can’t see but still feel them: the orange tabby tail that twitches and curls in front of the camera from question mark to exclamation and back again. One small dog hops with aplomb on and off a settled lap, while my three cows—too large for an indoor presence—are nonetheless included in our shared creaturehood. Without question, we smile more because of them.

And where, it’s fair to ask, does smiling lead to but the warming of our hearts? We feel it daily despite not having met. For all of our Yankee-ness, declarations of affection flow freely among us. On one particularly trying day (was it a heavy downpour or just the growing seasonal darkness?), a simple message spoke the minds of many: “I love you all. I needed to be here. You are my rock.”

“This rhythm, this expectation that I will have this time with you all—and with God—this idea of practice and going deeper is just amazing. The connection that I feel with you over Zoom, how does it happen? I only see a little of you and your homes, but we have created such deep intimacy.”

Around such experiences—and such expressions—concentric circles continue to form. Inner tenderness deepens the relationships we have with others in our lives, and with ourselves. As a parent explained shortly before the holidays, “I had been approaching my children with anxiety because they were so far away, but now I’m deepening my relationship with them because I’m coming to them more softly, with more of my heart open. That’s a clear benefit of faith.”

Late in the fall, after friends of Friends began expressing interest in joining the group, Peter presented the idea of adding a second worship session. After some discussion, we agreed to an experimental additional half-hour for the month of December, to run from 7:50 to 8:20 a.m., with a ten-minute break before the next meeting. It was an arrangement that delighted Peter from the beginning since, as he loves to announce, it makes us “the only Quaker meeting that has a halftime.” He has recently taken to adding, “And sometimes, when our meeting is deep in worship, we also go into overtime.”

Interestingly enough, the additional daily meeting did not result in the flood of new members that some had feared. Instead, the people already attending began to do their own experiments with the new schedule: some migrated to the earlier time slot; some stayed with the later one; and many continued to move back and forth as it suited. A few stalwarts—even some who had previously announced that an hour of silence was “way too long”—now sit through both sessions, sometimes including the extra ten minutes in between. With solid group approval, the two sessions are still going strong.

Over the course of the year, a core group of people tend to show up most days and a nearly equal number of individuals show up irregularly—when they can or as they’re “called.” They are never made to feel they are lesser members; I tend to think their comings and goings help keep things interesting and dynamic. It is also not unusual for people to leave early or show up late without any kind of censure. The message that we are all welcome and that there’s always a place for us at the table—which can sometimes be mere assertion—feels embodied here. It feels physically and psychically true.

Photo by Andrea Piacquadio on Pexels

The community that results from all this seems to have greater capacity for fluidity and permeability, qualities that make for healthy organisms. “Gathering in worship with folks some mornings, and knowing they are there even when I’m not Zooming in, has pulled me into Spirit much more than I imagined it could,” explained an occasional participant. “I love that I can arrive and immediately enter in.” Another reported that she’s even “had the experience that I could feel the prayers of folks far distant.” She also has noticed herself giving active encouragement to those who bring messages—a role she’s currently exploring—which she deeply appreciates.

Gratitude, in fact, is our most frequent theme, and “I am so grateful for this community” or “The gratitude that I feel in worship sets my tone for the day” are common expressions that are heard often. One Friend enumerated the blessings in her personal journey:


The development of the Quaker morning worship has held me spiritually through this extraordinarily challenging time in a way that nothing else could. I grew in ways that I had never yet experienced. I grew together, if that makes any sense. I grew—it was a journey all to myself—but I grew in the community, love, support, and neutral spirituality of the Zoom worship . . . which came right on time. In God’s time, as they say. I am so grateful.

For Peter, a focus on silent worship itself is part of his figurative and literal ministry. Allen’s Neck Meeting, under his guidance, has been moving over the past 10 or 15 years from a programmed group with a worship script to an unprogrammed format without a script. As a result, he notes, “We have very few ‘seasoned’ Friends in our meeting. It’s difficult to learn an experience-based faith from a syllabus, so this learning how to be Quaker is a high priority for me.”

As if in response to Peter’s concern, one of the newer members of Allen’s Neck recently examined some insights he’s been receiving from the daily Zoom worships:


As I am someone who likes to be in control, this surrendering and giving up and learning to listen better has not been easy. In fact, it continues to be a real challenge. But after having participated in this practice since last spring, I feel that I am on the cusp of grasping the idea of “entering the stream,” and I look forward to being able to partake and accept more fully as we continue on.

We are, all of us, working hard. A regular attender explained how a commitment to daily worship has helped strengthen her faith:


I joined the daily Zoom worship group at a time when I noticed I was responding to the COVID situation by getting irritable. I also realized that COVID, police violence, and climate change were demonstrating to me that I had really, all along, been putting my faith in human strength and cleverness rather than in God. So a daily worship was attractive as a way of growing a stronger faith in God and settling into a daily practice that would also help me deal with short-tempered people. It has done that. Messages from the Spirit and from Friends during worship are helping me understand how to live in faith, one little nudge after another.

Worship, prayer, faith: they are all being addressed. “I am thinking today about the experience of expectant waiting,” someone shares near the end of the half hour, “which took many years for me to understand. For a long time, it was a place where I just waited for a message, but at some point in my faith practice, I came to see that sweet longing of expectant waiting as something in itself.” The speaker begins to smile (and—wait—is her rectangle starting to glow, just ever so slightly?): “It was like a warm bath for my whole spirit, and I really enjoy when I can get there—I love being there.”

Day after day, we seek clarity. This comment from a Friend who thinks deeply and speaks only infrequently illustrates our group’s evolution over time:


I look at us and see two ideas: The first is the idea of worshiping daily as obedience—something we commit to—which has an effect on us; for me, it’s like it has created a well-lit path to the center. Obviously, I stray off it at times, but it’s a blessing. The second is that this group has come together, and we have opened ourselves up to each other. We have become a meeting: we are a meeting; this is what we are.

The community that results from all this seems to have greater capacity for fluidity and permeability, qualities that make for healthy organisms.

Nudged, bathed, surrendered, we continue our practice, one gathering at a time. These days, however, with vaccinations a reality for a growing number of people and a new president duly inaugurated, a better future is coming into focus. How these changes will affect us and reshape the experience we’ve been having is not something we have begun to consider. Even Peter, the “mad scientist” who created us, seems satisfied that we are proof that “a small group of attenders can be drawn slowly into the sense-experience of what Friends worship is” without looking beyond.

There will be more to our story going forward, but instead of attempting to guess what comes next, I’m trying to lean into the wisdom of “it will be known.” What is true for now is that some constellation of a “we” will continue to show up each day to sit in front of our silent screens—our Quaker quilt—no longer strangers but still techno-gathering and still expectantly awaiting our small spiritual mirac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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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thy Neustadt




Kathy Neustadt has a doctorate in folklore and specializes in New England culture. She attends Allen’s Neck Meeting in South Dartmouth, Mass., and has written about it in Clambake: A History and Celebration of an American Tradition. She lives in New Hampshire with her husband and a host of barnyard friends. Contact: kdn@comcast.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