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03

알라딘: [전자책] 안 되겠다, 내 마음 좀 들여다봐야겠다

알라딘: [전자책] 안 되겠다, 내 마음 좀 들여다봐야겠다


안 되겠다, 내 마음 좀 들여다봐야겠다
용수 (지은이)나무를심는사람들2016-12-15
































10.0 100자평(2)리뷰(4)

종이책 페이지수 232쪽

책소개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했는데 왜 우리는 여전히 행복하지 않은가? 아홉 살 때 미국으로 건너가 티베트 불교로 출가한 독특한 이력을 가진 용수 스님은 
우리가 나쁜 사람이라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행복하게 하는 법을 몰라서 고통을 받는다고 이야기한다. 
마음을 본다는 것은, 마음의 습관을 보는 것, 마음의 본성을 보는 것을 뜻한다. 
마음이 가진 특성과 습관을 잘 모르기 때문에 고통을 받는 것이라면, 그것을 바로 알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우선 마음이 잘하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첫째, 좋은 것은 당기고 싫은 것은 밀어내는 것, 
둘째, 작은 일은 크게 키우고 없는 문제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런데 마음이 시키는 대로 좋은 것은 끌어당기고 싫은 것은 밀어냈는데 왜 우리는 여전히 행복하지 않은가 하는 의문이 든다. 
저자는 밀어낼수록 더 세지는 마음습관의 원리를 이해하라고 말한다. 
마음이 가지는 속성을 이해하고, 계속적으로 고통을 만들어 내는 마음-생각-감정의 악순환을 멈출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들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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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머리말

1부 더 다치기 전에 마음 들여다보기

1. 화를 내거나 꾹 참는 마음습관
화가 주인 된 삶
화를 바라보기, 렛고
화를 분명히 보고 있는데 왜 사라지지 않지?
부정적인 감정이라는 꼬리표
부정적 감정을 대치하는 자애심

2. 자기를 비하하는 마음습관
자기 비하는 겸손과 달라
먹는 걸로 결핍감을 채우는 사람들
완벽함에 집착하는 사람들
게으름과 모욕감이 자기 비하를 만든다
자기 비하를 긍정적으로 바꾸는 세 가지 질문
내면의 지혜를 믿으세요
스스로에게 하는 자비 명상

3. 남 탓하고 상대를 바꾸려는 마음습관
다 너 때문이야!
신경 꺼!
상대를 바꾸는 세 가지 방법
아내 혹은 남편을 바꾸려는 마음
부모 탓하는 마음
자녀를 바꾸려는 마음

4. 나만 아끼는 마음습관
아집, 나에 대한 집착
내 마음을 살피고 다스린다는 것
선하고 순수한 마음이 행복해지는 길
나만 아끼는 사람은 늘 외롭다
이기적인 마음 다스리기
2% 친절 수행
티베트 스승들께 배운 행복해지는 수행법

5. 삶의 고통을 부인하는 마음습관
고통 삼매에 빠지다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고통을 받아들여야 한다
고통의 본질
진짜 행복, 가짜 행복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트라이 마인드, 다시 시도하기

6.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마음습관
죽을 줄 모르는 사람들
왜 죽음에 대한 준비가 필요한가
티베트 불교에서 보는 죽음에 대한 아홉 가지 생각
죽음의 과정
죽음 명상

2부 명상을 권하다

1. 왜 명상을 해야 할까요?
명상이 주는 혜택
렛고 하면 마음습관이 바뀐다
무엇을 알아차리나
자유로운 알아차림, 명상하지 않는 명상
정지, 불방일
먼저 스스로에게 친절하세요
장애가 생겼을 때

2. 나에게 맞는 명상을 찾는다
소리 명상
먹기 명상
몸 명상
형상 명상
선택 없는 명상
생각 명상
RAIN 명상
마음 TV 명상

부록 티베트 전통 수행, 로종
접기


책속에서



슬픈 상황에서는 슬픈 감정이 있어야 합니다. 슬픈 상황인데 즐겁고 기쁜 감정이 든다면 그것이야말로 문제가 있는 것이지요.
-<화를 내거나 꾹 참는 마음습관>

시작할 때부터 실패할 거라는 마음을 바탕에 깔고 있기 때문에 자주 실패합니다. 실패를 하게 되면 ‘역시 나는 할 줄 아는 게 없어’ 하면서 스스로를 비하하는 악순환을 되풀이합니다. … 세상 누구보다 우리는 우리의 사랑을 받을 만한 존재입니다.
-<자기를 비하하는 마음습관>

사랑은 ‘어떻게 하면 당신을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집착은 ‘당신은 왜 나를 행복하게 하지 못할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남 탓하고 상대를 바꾸려는 마음습관>

흔히 누군가를 지나치게 좋아해서 그를 쫓아다니는 사람을 스토커라고 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자신에 대한 지나친 스토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자신다울’ 자유를 주세요.
-<나만 아끼는 마음습관>

왜 우리가 행복하지 못할까요? 행복을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행복을 찾고 있는 마음을 내려놓으면 행복이 있습니다. 내려놓는 연습을 계속하다 보면 행복감을 점점 더 많이 느끼게 됩니다. 이 행복감은 조건 없는 평화, 우리 그 자체입니다. 더 이상 찾지 마세요. 행복을 찾는 마음을 내려놓으세요.
-<삶의 고통을 부인하는 마음습관>

제가 종을 울립니다. 종소리에 집중할 필요는 없고 단지 종소리를 듣기만 하면 됩니다. 몸에 힘을 빼고 걱정을 소리 안에 다 내려놓으세요. 특별히 할 게 없습니다. 집중할 것도 없고 그저 마음 편안하게 쉬면 됩니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소리에 쉬었던 이것이 바로 명상입니다.
-<왜 명상을 해야 할까요?>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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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용수 (지은이)


아홉 살 때 미국으로 건너가 유타주립대학에서 신문방송학을 공부했다. 2001년 우연히 달라이라마의 강의를 들은 것이 그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2002년 달라이라마의 제자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인도로 가는 길에 네팔 카트만두에서 그가 가장 아끼는 책들을 번역한 티베트 역경원의 창시자인 뻬마 왕겔 린포체를 만나 출가했다. 그 뒤 남프랑스 티베트불교 선방에서 4년간 무문관 수행을 했고, 한국에 들어와 화계사, 무상사 등에서 수행하며 유나방송에서 명상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다.
티베트 닝마파 한국지부인 세첸코리아를 설립하여 지구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알려진 욘게이 밍규르 린포체, 프랑스 과학자이자 수행자인 마티유 리카르 스님, 사카파 법왕 사카 티진 큰스님을 초청해 법회를 열어 티베트불교를 한국에 알리는 일을 하고 있다.
스스로를 인간 되는 중, 착해지는 중, 스님 되는 중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중이 된 것을 너무나 감사하게 여긴다. 더불어 티베트불교 명상은 친절하고 자연스럽고 효율적인 수행법이라고 말한다.
티베트불교를 알리기 위해 꾸준하게 책을 내고 있는 그는 《안 되겠다, 내 마음 좀 들여다봐야겠다》에서는 감정과 생각이 어떻게 습관이 됐는지 이야기했다면 《용수 스님의 곰》, 《용수 스님의 코끼리》는 10년 넘게 매일 아침 SNS에 올렸던 티베트불교 명상에 관한 내용 중 많은 이들한테 사랑받은 글을 골라 책으로 묶었다. 접기


최근작 : <용수 스님의 코끼리>,<용수 스님의 곰>,<안 되겠다, 내 마음 좀 들여다봐야겠다> … 총 4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했는데 왜 우리는 여전히 행복하지 않은가? 티베트 수행자 용수 스님이 쓴 《안 되겠다, 내 마음 좀 들여다봐야겠다》는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떠오르는 감정과 생각이 어떻게 마음습관이 되었는지, 우리의 고통은 어디서 비롯되는지, 굳어져 버린 습관을 바꾸어 행복하게 사는 방법은 없는지 저자 자신이 티베트 불교 스승들로부터 배운 가르침, 자신의 수행 체험과 명상 지도 경험을 통해 얻은 것들을 조목조목 친절하게 알려 준다.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했는데 왜 우리는 여전히 행복하지 않은가?
더 다치기 전에 내 마음을 들여다보라

아홉 살 때 미국으로 건너가 티베트 불교로 출가한 독특한 이력을 가진 용수 스님은 우리가 나쁜 사람이라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행복하게 하는 법을 몰라서 고통을 받는다고 이야기한다. 마음을 본다는 것은, 마음의 습관을 보는 것, 마음의 본성을 보는 것을 뜻한다. 마음이 가진 특성과 습관을 잘 모르기 때문에 고통을 받는 것이라면, 그것을 바로 알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불교를 만나기 전 저자는 ‘나는 이래야 된다’, ‘삶이 이래야 된다’고 하는 그림을 그렸다. 이 그림에 맞게 자신과 자신의 삶을 조절하려고 했다. 그러나 불교를 만나 프랑스에서 4년간 무문관 수행을 하면서 달라졌다. 자신이 불교 수행이 주는 혜택을 가장 많이 본 사람이라고 말하는 저자는 이 책에서 나오는 방법으로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어떤 경험도 거부하지 않고 친절하게 깨어 있을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우선 마음이 잘하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첫째, 좋은 것은 당기고 싫은 것은 밀어내는 것, 둘째, 작은 일은 크게 키우고 없는 문제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런데 마음이 시키는 대로 좋은 것은 끌어당기고 싫은 것은 밀어냈는데 왜 우리는 여전히 행복하지 않은가 하는 의문이 든다. 마음은 원래부터 이렇게 작동하도록 만들어진 것일까? 혹시 마음의 이런 작동 때문에 우리가 불행한 것은 아닐까?
저자는 밀어낼수록 더 세지는 마음습관의 원리를 이해하라고 말한다. 좋다고 생각해서 끌어당겼더니 오히려 행복해지기는커녕 불만족만 커진다. 화, 욕심, 어리석음, 불평불만, 게으름 등을 싫다고 생각해서 밀어냈더니 다음 번에는 더 강해져서 찾아오는 것이다. 행복을 위해 끌어당기고 밀쳐내는 마음이 어떻게 습관화되고 강화되는지를 보여 줌으로써 좋다 싫다 하는 마음습관이 실체가 없는 무상한 것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이 책에서 저자는 마음이 가지는 속성을 이해하고, 계속적으로 고통을 만들어 내는 마음-생각-감정의 악순환을 멈출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들을 제시한다.

내 삶은 왜 이렇게 힘들까?
여섯 가지 마음습관으로 들여다보는 내 인생처방전

그렇다면 우리를 고통으로 몰아넣는 여섯 가지 마음습관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첫째, 화를 내거나 꾹 참는다.
둘째, 자기 자신을 비하한다.
셋째, 남 탓하고 상대를 바꾸려고 한다.
넷째, 나만 아낀다.
다섯째, 삶의 고통을 부인한다.
여섯째,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먼저, 화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대한 지적이다. 사소한 일에서부터 공분을 일으키는 일까지 세상에는 우리의 화를 돋우는 일이 많다. 그런데 화가 날 때 보통 사람들은 화를 내거나 화를 참는 방식으로 대한다. 이는 화가 주인이 되고 자신은 그 화의 노예가 되어 휘둘리거나 반대로 적으로 여기고 저항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 두 가지 방식으로 화를 대해 왔기 때문에 화내는 습관이 커진다고 본다. 이때 저자가 스승에게 배운 방식은 화를 그저 바라보는 것이다. 순간적으로 일어났다가 다시 사라지는 화를 바라보는 것은 화가 우리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화를 다스리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다. 이것이 바로 티베트 명상으로 일컬어지는 내려놓음 즉 렛고(Let go) 명상이다.
그런데 화를 분명히 보고 있는데 사라지지 않는 경험을 한다. 화가 일어날 때 그저 바라본다고 해도 화가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남아서 힘들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명상을 오래 배운 사람도 화가 나는 순간에 명상을 삶에 적용하기가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분노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 화가 없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기대하는 마음이 있기에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또 다른 이유로는 “화를 바라보는 힘보다 화를 내는 것이 아주 강한 습관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날마다 생각과 감정을 바라보는 연습을 하더라도 오랫동안 화를 냈던 습관보다는 약하다. 그래서 더 배워야 하고 더 연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화를 완전히 사라지게 할 수는 없지만 화를 알아차리는 힘을 기를수록 화 때문에 일어나는 감정의 영향을 덜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저자는 분노의 대치법으로 상대도 나와 똑같이 실수를 하고, 좋지 않은 행동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라고 말한다. 미운 사람에게 떡 하나를 더 주는 마음이 바로 분노의 대치법인 셈이다. 이는 싫어하는 사람의 행복을 바라는 것이다. 왜 분노를 자애심으로 대치해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분노가 모든 삶을 망치기 때문이다. 분노를 드러내는 것도 억지로 참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고통이 되기 때문이다.
저자가 두 번째로 강조하는 마음습관으로는 자기 자신을 비하하는 것이다. 우리는 타인에 대해 친절하라고 배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자기 자신에게는 가혹하리만치 엄격한 잣대를 대는 사람이 있다. 조그만 잘못도 용서하지 못하고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다. 긍정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은 긍정적으로 보지 못하고 부정적으로 본다. 열 가지 중에서 잘하는 것이 아홉 가지인데도 못하는 한 가지만을 집중적으로 생각하는 강한 습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마음이 들 때 저자는 스스로에게 세 가지 질문을 던져 보라고 한다.
첫째, 과연 이것이 사실인가?
둘째,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이럴 것인가?
셋째, 나는 어떤 좋은 점이 있는가?
이렇게 질문을 던지다 보면 자기를 비하하는 마음습관을 바로 볼 수 있는 지혜가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이다. 부정적인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망상을 만들게 되고 그 망상의 사슬에 감겨 평생을 허비할 수도 있다. 이런 상태를 저자는 고통 삼매라고 표현한다. 마치 삼매경에 빠진 것처럼 자신이 만든 고통에 깊이 빠져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처럼 자신을 괴롭히는 생각에 중독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저자는 이 책에서 우리가 가진 여섯 가지 마음습관이 왜 생겨나는지 어떻게 하면 습관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지를 차근차근 설명해 간다.

일상에서 쉽게 실천할 수 있는 다양한 명상법 소개

티베트 수행의 가장 큰 장점은 어렵지 않고 일상생활에서 충분히 따라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저자는 기본에 충실하면서도 실생활 밀착적인 내용으로 다양한 명상법을 설명한다. 이 책의 2부에서는 명상을 왜 해야 하는지, 명상이 주는 혜택과 가부좌를 하고 앉아서 하는 명상만이 아니라 소리 명상, 먹기 명상, 몸 명상, 형상 명상, 생각 명상 등 마음습관을 바꿀 수 있는 쉽고 다양한 명상법을 소개한다. 부록으로 티베트 전통 수행인 로종 명상의 핵심을 담은 마음훈련 8구절을 소개하면서 암송을 통해 자비심과 공성을 익힐 수 있는 방법도 소개한다. 접기

평점
분포

10.0



아주 쉽고 재미있게 알아차림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 알아차림을 통해 냐면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여러 다양한 방법들을 제시합니다.
이글을 읽고 나서 내 안의 고통을 치유하고 벗어나는 방법을 알게 되었고 마음의 평화에 조금더 가까워지게 되었습니다
mvm50 2016-12-31 공감 (0) 댓글 (0)


리뷰쓰기


명상 길잡이
극히 불교적인 책이지만 그속의 내용은 인간적으로 삶의 지혜가 있는것 같음, 특히 명상에 대해 어려움을 같고 있는 사람에겐 좋은 길잡이가 되는 책으로 보임.
chan6855 2017-01-16 공감(1) 댓글(0)


마음아, 이제 좀 쉬어도 되겠다

굳건한 듯 보이는 생각, 개념, 감정의 세계에서 모든 것을 가만히 바라보며 마음을 쉬는 자리로 물러나는 방법을 너무도 쉽고 친절하게 알려주는 책이다. 명상을 전혀 접해보지 않은 지인들에게 선물할 만한 책을 처음으로 만난 것 같아 반갑기만 하다.

책 내용도 쉽게 읽히지만 몇 페이지마다 재미있고 감각적인 일러스트가 들어 있어서 읽는다는 부담감에서도 마음을 쉴 수 있게 해 주려는 스님의 따듯한 마음이 느껴진다.

쉴 새 없이 돌아가는 마음에 사로잡혀 있다가 잠시 멈추고 쉬는 것은 항상 매고 다녀야 하는 줄 알았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을 통해 그 홀가분함과 자유로움, 평화로움과 만족감을 누구나 쉽고 자연스럽게 언제 어디서나 느낄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한다.

여름눈 2016-11-20 공감(1) 댓글(0)


마음이 불편할때

마음이 불편하거나 마음이 궁금하거나마음이 답답하거나내 마음은 왜이럴까?나만 이럴까? 남들도 이럴까?의문점이 생길때 읽으면 속이 시원해 지는책
스마일 2016-12-06 공감(1) 댓글(0)

(1) Ludrup Yongsoo | Fac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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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ienZ Academy" Ep. 2: "Paik Heungmi: Love Has no Frontiers"

[표지로 읽는 과학]'새 머리'라고 무시 마라 포유류 못지 않다 : 동아사이언스

[표지로 읽는 과학]'새 머리'라고 무시 마라 포유류 못지 않다 : 동아사이언

새 머리'라고 무시 마라 포유류 못지 않다
2020.09.27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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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 제공

이번주 사이언스 표지에는 동아시아와 서유럽 일대에 널리 분포하는 까마귀인 송장까마귀가 등장했다. 표제는 ‘조류의 지각능력’이다. 그 동안 ‘새 머리’라는 표현으로 무시하던 조류에게 고차원적인 뇌 기능으로 분류되던 ‘지각능력’이 존재하며 지각을 가능케 하는 포유류의 뇌 구조인 대뇌피질에 상응하는 독특한 신경조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힌 두 편의 논문이 이번주 사이언스 커버스토리를 장식했다.



마틴 스타초 독일 보훔대 교수팀은 새의 뇌 신경망을 추적한 결과, 새의 뇌 외피에 포유류 피질에서 발견되는 것과 비슷한 신경망이 존재하며 이 신경망 덕분에 새가 뛰어난 인지 기능을 발휘할 수 있게 됐다고 국제학술지 ‘사이언스’ 25일자에 발표했다.



인류는 한동안 고차원적인 지각능력 또는 인식능력이 인간에게만 존재하는 독특한 능력이라고 믿었다. 또 이런 능력이 인류 특유의 복잡하게 발달한 대뇌 피질 덕분에 나타났다고 믿었다. 하지만 유인원과 일부 영장류에게서도 비슷한 능력이 발견된 데 이어, 아예 대뇌피질이 없고 뇌가 작은 까치와 까미귀, 일부 명금류 등 조류에게서도 비슷한 능력이 발견되면서 '반드시 대뇌피질을 가져야 지각능력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라는 주장이 힘을 받게 됐다. 하지만 조류의 뇌 어느 부분이 이런 고차원적인 지각을 담당하는지는 그 동안 밝혀지지 않았다.


연구팀은 3차원 편광영상 기술을 이용해 비둘기와 올빼미 뇌 외피를 관찰했다. 그 결과 조류 외피의 신경망 구조와 회로는 종과 상관없이 비슷하고, 이 가운데 일부 뇌신경망이 포유류의 대뇌 피질 속에서 발견되는 신경망과 특성이 매우 비슷하다는 사실을 밝혔다.


포유류의 뇌는 ‘신피질’이라고 불리는 6층의 복잡한 피질을 구성하고 있다. 여기에는 뇌 표면을 기준으로 수직으로 연결된 신경망(아래 그림 왼쪽 파란선)과 수평으로 연결된 신경망(아래 그림 왼쪽 흰선)이 존재해 서로 수직으로 만나는 구조가 존재한다. 특히 수평으로 존재하는 신경망은 여러 다른 감각 영역과 운동 영역을 연결해 통합하는 기능을 한다.



새의 뇌는 이런 신피질이 없고 훨씬 단순한 구조를 갖고 있는데, 시각과 촉각 등 감각을 담당하는 일부 영역에서 포유류의 신피질과 매우 비슷한 뇌 표면과 수직인 신경망(아래 그림 오른쪽 파란선)과 수평인 신경망(아래 그림 오른쪽 흰선)이 존재하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이번에 밝혀졌다. 포유류와 뇌 구조는 다르지만, 감각을 처리하는 영역의 신경망은 매우 비슷한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연구팀은 이 신경망이 뛰어난 새의 지각 능력의 원천이라고 주장했다.



왼쪽은 쥐의 뇌, 오른쪽은 비둘기의 뇌 구조다. 포유류의 뇌는 ‘신피질’이라고 불리는 6층의 복잡한 피질을 구성하고 있다. 여기에는 뇌 표면을 기준으로 수직으로 연결된 신경망(아래 그림 왼쪽 파란선)과 수평으로 연결된 신경망(아래 그림 왼쪽 흰선)이 존재해 서로 수직으로 만나는 구조가 존재한다. 새의 뇌는 이런 신피질이 없고 훨씬 단순한 구조를 갖고 있다. 시각과 촉각 등 감각을 담당하는 일부 영역에서 포유류의 신피질과 매우 비슷한 뇌 표면과 수직인 신경망(아래 그림 오른쪽 파란선)과 수평인 신경망(아래 그림 오른쪽 흰선)이 존재한다. 사이언스 논문 캡쳐

같은 날, 안드레아스 니더 독일 튀빙겐대 교수팀 역시 송장까마귀에게 시각 자극을 가한 뒤, 새의 뇌 가장 바깥 영역에서 이 자극이 무엇인지를 인식하는 신경세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해 사이언스에 발표했다.


니더 교수팀은 훈련받은 송장까마귀 두 마리에게 시각 자극을 가한 뒤 뇌를 관찰했다. 그 결과 신경세포가 시각 자극에 대해 물리적 자극의 강도를 감지한 뒤, 다시 이를 바탕으로 시각 정보를 인식하는 두 단계의 신경 활동을 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특히 뇌의 가장 바깥 영역에 신경세포 밀도가 높은 부분이 존재하며 이 부분이 시각 정보를 인식하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새는 두뇌가 작은 대신 신경세포 밀도를 높여 포유류 못지 않은 인식 능력을 발휘한다는 사실도 밝혔다.


니더 교수는 “지각 또는 인식 능력이 조류 및 파충류와 포유류의 공통조상이 살던 3억2000만 년 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을 가능성과, 포유류와 조류에게 각각 따로 진화(수렴진화)했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연구 결과”라고 말했다.


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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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bert Ciesl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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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bert Cieslik SJ (* 2. Juli 1914 in Weißwasser, Österreichisch Schlesien; † 22. September 1988 in Tokio[1]) war ein deutscher, in Japan wirkender römisch-katholischer Ordensgeistlicher (Jesuit) und Hochschullehrer. Er war ein Überlebender des Atombombenabwurfs auf Hiroshima.


Inhaltsverzeichnis
1Leben
2Werke
3Weblinks
4Einzelnachweise
Leben[Bearbeiten | Quelltext bearbeiten]

Hubert Cieslik, dessen Vater im Ersten Weltkrieg fiel, erhielt einen Platz im seit 1924 von Jesuiten geleiteten Franz-Ludwig-Konvikt in Breslau und besuchte das nahegelegene Matthias-Gymnasium. Ab 1926 war er Mitglied im Bund Neudeutschland. Exerzitien, die der Missionsprokurator Pater Bruno Bitter SJ 1929 abhielt, weckten in ihm das Interesse an der Japan-Mission, und er beschloss, in den Jesuitenorden einzutreten.

Am 22. April 1933 wurde er in das Noviziat in Mittelsteine (seit 1945 Ścinawka Średnia) aufgenommen. Schon 1934 wurde er nach Tokio entsandt, wo er sein zweites Noviziatsjahr an der Sophia-Universität verbrachte. Er blieb an der Universität, um Japanische Sprache und Philosophie zu studieren. Dabei prägte ihn besonders Pater Johannes Laures (1891–1959).[2] Dessen Forschungsschwerpunkt war der Aufbau einer Bibliothek und Bibliographie zur frühen christlichen Überlieferung in Japan (Kirishitan bunko).[3] Ciesliks erste wissenschaftliche Publikation in Japan war die Übersetzung zweier Quellenschriften des 17. Jahrhunderts. Die Erforschung der Entwicklung und des Schicksals des frühen Christentums in Japan wurde sein Forschungsschwerpunkt.

Noviziat in Nagatsuka bei Hiroshima

Seit 1938 lebte er in Hiroshima. Er assistierte dem Ordensoberen der Mission, Pater Hugo Lassalle, in der Pfarrei und unterrichtete Latein und Griechisch im Noviziat, das in Nagatsuka etwas außerhalb der Stadt lag. Nach Abschluss seiner theologischen Studien wurde er am 31. Oktober 1943, gemeinsam mit Hubert Schiffer, von Bischof Johannes Roß SJ in Tokio zum Priester geweiht. Wegen der zunehmenden verheerenden Luftangriffe auf Tokio zog fast die gesamte Jesuitenkommunität in Tokio in das als sicher geltende Hiroshima bzw. in das Noviziat Nagatsuka.

Cieslik begann eine Seelsorgetätigkeit in der Pfarrei im Stadtteil Noborichô. Am 6. August 1945 befand er sich mit dem Ordensoberen Lasalle und zwei weiteren Patres, Wilhelm Kleinsorge (1907–1977) und Hubert Schiffer (1915–1982), im Pfarrhaus neben der katholischen Pfarrkirche Maria Himmelfahrt, an deren Stelle sich heute die Weltfriedenskirche (Hiroshima) erhebt. Damit waren sie acht Blocks, etwa 1,2 km vom Bodennullpunkt entfernt. Dadurch, dass Cieslik sich beim Lichtblitz der Explosion in einen Gang des Hauses warf, blieb er äußerlich unverletzt, als die Druckwelle das Haus traf. Das Pfarrhaus, das von dem deutschen Jesuiten-Bruder und Architekten Ignaz Gropper (1889–1968) erst 1936/37 besonders stabil und erdbebensicher gebaut worden war, hielt der Druckwelle weitgehend stand, wurde aber beim folgenden Feuersturm vernichtet. Zusammen mit Pater Kleinsorge konnte Cieslik die verwundeten Patres Schiffer und Lasalle in den Asano-Park (eigentlich Shukkei-Garten[4]) in Sicherheit bringen. Am Abend wurden sie dort von einem Bergungstrupp der Jesuiten, die am Stadtrand im Noviziatshaus überlebt hatten, darunter Helmut Erlinghagen, Klaus Luhmer und Johannes Siemes, gefunden und nach Nagatsuka gebracht, wo die Verletzten von Pedro Arrupe medizinisch erstversorgt wurden. Anfang September wurde er, inzwischen unter den Nachwirkungen der Strahlung leidend, zur ärztlichen Behandlung nach Tokio gebracht. Als einer von insgesamt 16 Jesuiten, die sich beim Abwurf der Bombe im Raum Hiroshima aufhielten,[5] überlebte Cieslik die Explosion um 43 Jahre.

Ab Dezember 1945 war er wieder in Hiroshima und machte hier sein Tertiat in den Baracken, die auf dem Gelände der zerstörten Missionsresidenz errichtet werden konnten. 1950 zog er wieder nach Tokio. An der Sophia-Universität wurde er Rektor des Miki-Hauses, eines Wohnheims für Jesuiten in der Philosophie-Phase ihres Studiums. Zugleich wurde er Beauftragter für das Gebetsapostolat in Japan. 1968 scveröffentlichte er seine Erinnerungen an den Atombombenabwurf in japanischer Sprache als Hakai no hi (Tag der Zerstörung).[6]

Von 1966 bis 1972 war er Ordensoberer der St.-Ignatius-Residenz der an der Sophia-Universität lehrenden Jesuiten und des Provinzials der japanischen Ordensprovinz. Seit dem Tod von Pater Laures leitete er die Gesellschaft zur Erforschung der christlichen Kultur in Japan (Kirishitan Bunka Kenkyukai) und war Herausgeber ihres Jahrbuchs. Er veröffentlichte zahlreiche Aufsätze in Monumenta Nipponica. Ab 1969 lehrte er an der Herz-Jesu-Universität für Frauen (聖心女子大学, Seishin Joshi Daigaku) im Tokioter Stadtteil Shibuya.
Werke[Bearbeiten | Quelltext bearbeiten]
Kirishito-ki und Sayo-yoroku Japan: Dokumente zur Missionsgeschichte des 17. Jahrhunderts. Ins Deutsche übertragen von Gustav Voss und Hubert Cieslik. Mit einem Vorwort von Naojiro Murakami, Tokyo: Sophia University – Leipzig: Harrassowitz 1940 (Monumenta Nipponica Monographs)
Publikationen über das Christentum in Japan: Veröffentlichungen in europäischen Sprachen. Hrsg. von Margret Dietrich und Arcadio Schwade, Frankfurt am Main; Berlin; Bern; Bruxelles; New York; Oxford; Wien: Lang 2004 ISBN 978-3-631-38886-0
Gotō Juan: ein Beitrag zur Missions-Geschichte Nord-Japans. Schöneck/Beckenried (Schweiz) 1954 (Schriftenreihe der Neuen Zeitschrift für Missionswissenschaft 12)
„Das Blut der Märtyrer ist Samen der Christen“. Bergisch Gladbach: Heider 1988
(posthum) Margret Dietrich und Arcadio Schwade (Hrsg.): Publikationen über das Christentum in Japan: Veröffentlichungen in europäischen Sprachen. Frankfurt am Main; Berlin; Bern; Bruxelles; New York; Oxford; Wien: Lang 2004 ISBN 978-3-631-38886-0
Weblinks[Bearbeiten | Quelltext bearbeiten]
Totenzettel mit Porträt, Provinzialarchiv der Zentraleuropäischen Jesuiten-Provinz, München
Einzelnachweise[Bearbeiten | Quelltext bearbeiten]
Biographische Daten und Lebensstationen nach Arcadio Schwade: Hubert Ciesliks Biographie (1914–1998), in: Hubert Cieslik: Publikationen über das Christentum in Japan: Veröffentlichungen in europäischen Sprachen. Hrsg. von Margret Dietrich und Arcadio Schwade, Frankfurt am Main; Berlin; Bern; Bruxelles; New York; Oxford; Wien: Lang 2004 ISBN 978-3-631-38886-0, S. 15–19
Siehe Ciesliks Nachruf auf Laures: In Memoriam: Fr. Johannes Laures, S. J. (1891–1959). In: Monumenta Nipponica 15 (1959), S. 209–224 (JSTOR)
Kirishitan Bunko Library, abgerufen am 29. August 2020
Helmut Erlinghagen: Hiroshima und wir – Augenzeugenberichte und Perspektiven. (1982)
Researcher confirms that 16 Jesuits experienced Hiroshima A-bombing and told world of tragedy, Hiroshima Peace Media Center vom 12. November 2019, abgerufen am 29. August 2020
Hiroshima Peace Media Center, abgerufen am 14. September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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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bert Cieslik SJ (born July 2, 1914 in Weißwasser , Austrian Silesia , † September 22, 1988 in Tokyo [1] ) was a German, in Japan acting Roman Catholic religious chaplain (Jesuit) and university professor. He was a survivor of the atomic bombing on Hiroshima .


Table of Contents
1Life
2Works
3Weblinks
4Individual evidence
Life [ edit | Edit source ]

Hubert Cieslik, whose father died in the First World War, received a place in the Franz-Ludwig- Konvikt in Breslau , which had been run by Jesuits since 1924, and attended the nearby Matthias Gymnasium . From 1926 he was a member of the Bund New Germany . Exercises held by the mission procurator Father Bruno Bitter SJ in 1929 aroused his interest in the Japan Mission and he decided to join the Jesuit order.

On April 22, 1933 he was accepted into the novitiate in Mittelsteine (since 1945 Ścinawka Średnia ). In 1934 he was sent to Tokyo, where he spent his second novitiate year at Sophia University . He stayed at the university to study Japanese language and philosophy. He was particularly influenced by Father Johannes Laures (1891–1959). [2] Its research focus was to build a library and Bibliography of early Christian tradition in Japan ( Kirishitan bunko ). [3]Cieslik's first scientific publication in Japan was the translation of two source writings from the 17th century. Research into the development and fate of early Christianity in Japan became his research focus.

Noviziat in Nagatsuka bei Hiroshima

From 1938 he lived in Hiroshima . He assisted the religious superior of the mission, Father Hugo Lassalle , in the parish and taught Latin and Greek in the novitiate, which lay just outside the town in Nagatsuka. After completing his theological studies, he was ordained a priest on October 31, 1943, together with Hubert Schiffer , by Bishop Johannes Roß SJ in Tokyo . Because of the increasing and devastating air raids on Tokyo , almost the entire Jesuit community in Tokyo moved to Hiroshima, which is considered safe, or to the novitiate Nagatsuka.

Cieslik began pastoral work in the parish in the Noborichô district. On August 6, 1945, he was with the superior Lasalle and two other fathers, Wilhelm Kleinsorge (1907–1977) and Hubert Schiffer (1915–1982), in the parsonage next to the Catholic parish church Maria Himmelfahrt , which is now the World Peace Church ( Hiroshima) rises. That took them eight blocks, about 1.2 km from ground zeroaway. Because Cieslik threw himself into a corridor in the house when the flash of light flashed, he was externally unharmed when the pressure wave hit the house. The rectory, which was built by the German Jesuit brother and architect Ignaz Gropper (1889–1968) in a particularly stable and earthquake-proof manner only in 1936/37, withstood the shock wave to a large extent, but was destroyed in the subsequent firestorm . Together with Father Kleinsorge, Cieslik was able to bring the wounded Fathers Schiffer and Lasalle to safety in Asano Park (actually Shukkei Garden [4] ). In the evening they were there by a rescue team of the Jesuits who had survived in the novitiate house on the outskirts, including Helmut Erlinghagen and Klaus Luhmerand Johannes Siemes , found and brought to Nagatsuka, where the injured were given initial medical care by Pedro Arrupe . At the beginning of September he was brought to Tokyo for medical treatment, meanwhile suffering from the after-effects of the radiation. As one of a total of 16 Jesuits who were in the Hiroshima area when the bomb was dropped, [5] Cieslik survived the explosion by 43 years.

Ab Dezember 1945 war er wieder in Hiroshima und machte hier sein Tertiat in den Baracken, die auf dem Gelände der zerstörten Missionsresidenz errichtet werden konnten. 1950 zog er wieder nach Tokio. An der Sophia-Universität wurde er Rektor des Miki-Hauses, eines Wohnheims für Jesuiten in der Philosophie-Phase ihres Studiums. Zugleich wurde er Beauftragter für das Gebetsapostolat in Japan. 1968 scveröffentlichte er seine Erinnerungen an den Atombombenabwurf in japanischer Sprache als Hakai no hi (Tag der Zerstörung).[6]

Von 1966 bis 1972 war er Ordensoberer der St.-Ignatius-Residenz der an der Sophia-Universität lehrenden Jesuiten und des Provinzials der japanischen Ordensprovinz. Seit dem Tod von Pater Laures leitete er die Gesellschaft zur Erforschung der christlichen Kultur in Japan (Kirishitan Bunka Kenkyukai) und war Herausgeber ihres Jahrbuchs. Er veröffentlichte zahlreiche Aufsätze in Monumenta Nipponica. Ab 1969 lehrte er an der Herz-Jesu-Universität für Frauen (聖心女子大学, Seishin Joshi Daigaku) im Tokioter Stadtteil Shibuya.
Werke[Bearbeiten | Quelltext bearbeiten]
Kirishito-ki und Sayo-yoroku Japan: Dokumente zur Missionsgeschichte des 17. Jahrhunderts. Ins Deutsche übertragen von Gustav Voss und Hubert Cieslik. Mit einem Vorwort von Naojiro Murakami, Tokyo: Sophia University – Leipzig: Harrassowitz 1940 (Monumenta Nipponica Monographs)
Publikationen über das Christentum in Japan: Veröffentlichungen in europäischen Sprachen. Hrsg. von Margret Dietrich und Arcadio Schwade, Frankfurt am Main; Berlin; Bern; Bruxelles; New York; Oxford; Wien: Lang 2004 ISBN 978-3-631-38886-0
Gotō Juan: ein Beitrag zur Missions-Geschichte Nord-Japans. Schöneck/Beckenried (Schweiz) 1954 (Schriftenreihe der Neuen Zeitschrift für Missionswissenschaft 12)
„Das Blut der Märtyrer ist Samen der Christen“. Bergisch Gladbach: Heider 1988
(posthum) Margret Dietrich und Arcadio Schwade (Hrsg.): Publikationen über das Christentum in Japan: Veröffentlichungen in europäischen Sprachen. Frankfurt am Main; Berlin; Bern; Bruxelles; New York; Oxford; Wien: Lang 2004 ISBN 978-3-631-38886-0
Weblinks[Bearbeiten | Quelltext bearbeiten]
Totenzettel mit Porträt, Provinzialarchiv der Zentraleuropäischen Jesuiten-Provinz, München
Einzelnachweise[Bearbeiten | Quelltext bearbeiten]
Biographische Daten und Lebensstationen nach Arcadio Schwade: Hubert Ciesliks Biographie (1914–1998), in: Hubert Cieslik: Publikationen über das Christentum in Japan: Veröffentlichungen in europäischen Sprachen. Hrsg. von Margret Dietrich und Arcadio Schwade, Frankfurt am Main; Berlin; Bern; Bruxelles; New York; Oxford; Wien: Lang 2004 ISBN 978-3-631-38886-0, S. 15–19
Siehe Ciesliks Nachruf auf Laures: In Memoriam: Fr. Johannes Laures, S. J. (1891–1959). In: Monumenta Nipponica 15 (1959), S. 209–224 (JSTOR)
Kirishitan Bunko Library, abgerufen am 29. August 2020
Helmut Erlinghagen: Hiroshima und wir – Augenzeugenberichte und Perspektiven. (1982)
Researcher confirms that 16 Jesuits experienced Hiroshima A-bombing and told world of tragedy, Hiroshima Peace Media Center vom 12. November 2019, abgerufen am 29. August 2020
Hiroshima Peace Media Center, abgerufen am 14. September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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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bert Ciesl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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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버트 Cieslik의 SJ (출생 년 7 월 2, 1914바이스 바서 , 오스트리아 실레 지아 , † 년 9 월 (22), 1988 년도쿄 [1] )에서, 독일이었다 일본의 로마 가톨릭 종교 목사 (예수회)와 대학 교수 행동. 그는 히로시마 원자 폭탄 의 생존자였다 .


목차
1생명
2공장
삼웹 링크
4개별 증거
생활 [ 편집 | 소스 수정 ]

제 1 차 세계 대전에서 아버지가 사망 한 Hubert Cieslik 은 1924 년부터 예수회가 운영해온 Breslau 의 Franz-Ludwig- Konvikt 에서 자리를 받았고 인근 Matthias Gymnasium에 참석했습니다 . 1926 년부터 그는 Bund New Germany 의 회원이었습니다 . 1929 년에 선교부 검찰관 브루노 비터 SJ 신부가 수행 한 훈련일본 선교부 에 대한 그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그는 예수회에 합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1933 년 4 월 22 일에 그는 미텔 슈타인수련회 에 받아 들여졌습니다 (1945 Ścinawka Średnia 이후 ). 일찍이 1934 년에 그는 도쿄로 보내져 소피아 대학 에서 두 번째 11 년을 보냈습니다 . 그는 대학에서 일본어 와 철학 을 공부했습니다 . 그는 특히 Johannes Laures 신부 (1891 ~ 1959)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 [2] 연구의 초점은 일본 초기 기독교 전통 의 도서관과 서지 ( Kirishitan bunko )를 만드는 것이었다 . [삼]일본에서 Cieslik의 첫 번째 과학 출판물은 17 세기의 두 원저를 번역 한 것입니다. 일본 초기 기독교의 발전과 운명에 대한 연구가 그의 연구 초점이되었습니다.

Noviziat in Nagatsuka bei Hiroshima

1938 년부터 그는 히로시마에 살았다 . 그는 본당에서 선교부 의 종교적 우상Hugo Lassalle 신부를 도왔고 Nagatsuka의 마을 바로 외곽에있는 수녀원에서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가르쳤습니다. 신학 공부를 마친 후, 그는 1943 년 10 월 31 일 에 도쿄의 Johannes Roß SJ 주교로부터 Hubert Schiffer 와 함께 사제성임 되었습니다 . 도쿄 에 대한 증가하고 파괴적인 공습으로 인해 도쿄 의 거의 모든 예수회 공동체 는 안전한 것으로 간주되는 히로시마 또는 수련자 나가 츠 카로 이사했습니다.

Cieslik은 Noborichô 지역의 본당에서 목회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945 년 8 월 6 일, 그는 Lasalle과 두 명의 다른 아버지 인 Wilhelm Kleinsorge (1907–1977)와 Hubert Schiffer (1915–1982)와 함께 가톨릭 교구 교회 Maria Himmelfahrt 옆에있는 목사관에있었습니다. 현재는 세계 평화 교회입니다. 히로시마) 상승. 그라운드 제로 에서 약 1.2km 떨어진 8 블록떨어져. Cieslik은 빛의 섬광이 번쩍 일 때 집안의 복도에 몸을 던 졌기 때문에 압력 파가 집을 강타했을 때 외부 적으로 무사했습니다. 독일 예수회 형제이자 건축가 인 Ignaz Gropper (1889–1968)가 1936/37 년에만 특히 안정적이고 지진에 견디는 방식으로 지은이 사제는 충격파를 상당히 견뎌냈지만 이후의 화재 폭풍 으로 파괴되었습니다 . Kleinsorge 신부와 함께 Cieslik은 부상당한 신부 Schiffer와 Lasalle 을 아사노 공원의 안전한 곳 으로 데려 올 수있었습니다 (실제로 Shukkei Garden [4] ). 저녁에 그들은 Helmut ErlinghagenKlaus Luhmer를 포함하여 외곽의 수련 된 집에서 살아남은 예수회 구조대에 의해 거기에 있었습니다그리고 Johannes Siemes 가 발견되어 Nagatsuka로 옮겨졌고 Pedro Arrupe는 부상당한 첫 번째 의료 서비스를 제공했습니다. 9 월 초, 그는 방사선의 후유증으로 고통받는 동안 치료를 위해 도쿄로 이송되었습니다. 폭탄이 떨어졌다 때 히로시마 지역에 있던 16 개 예수회의 총의 하나로서, [5] Cieslik 43 년까지 폭발을 살아 남았다.

1945 년 12 월부터 그는 히로시마로 돌아와 이곳 에서 파괴 된 선교부 거주지에 지을 수있는 막사에 입주했습니다. 1950 년에 그는 도쿄로 돌아 왔습니다. Sophia University에서 그는 철학 단계에서 예수회 기숙사 인 Miki House의 총장이되었습니다. 동시에 그는 일본 기도 사도직 위원으로 임명되었습니다 . 1968 년 원폭에 대한 기억을 일본어로 하카 이노히 ( 파괴의 날) 로 출판했다 . [6]

1966 년부터 1972 년까지 그는 소피아 대학과 일본 종교 지방 의 지방 에서 가르치는 예수회 성 이그나티우스 거주지의 우월했습니다 . Laures 신부의 사망 이후, 그는 일본 기독교 문화 연구 협회 ( Kirishitan Bunka Kenkyukai )를 이끌 었으며 연감의 편집자입니다. 그는 Monumenta Nipponica에 수많은 기사를 게재했습니다 . 1969 년부터 도쿄 시부야 지구에있는 성심 여대 (聖 心 女子 大学, Seishin Joshi Daigaku)에서 가르쳤다 .
작품 [ 편집 | 소스 수정 ]
Kirishito-ki와 Sayo-yoroku Japan : 17 세기 선교사에 관한 문서. Gustav Voss와 Hubert Cieslik이 독일어로 번역했습니다. 서문 : Naojiro Murakami, Tokyo : Sophia University-Leipzig : Harrassowitz 1940 ( Monumenta Nipponica Monographs)
일본의 기독교 출판물 : 유럽 언어 출판물. 편집 : Margret Dietrich 및 Arcadio Schwade,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베를린; 베른; Bruxelles; 뉴욕; 옥스퍼드; 비엔나 : Lang 2004 ISBN 978-3-631-38886-0
Gotō Juan : 일본 북부의 선교사에 대한 공헌. Schöneck / Beckenried (스위스) 1954 (Missionswissenschaft 12에 대한 Neue Zeitschrift 간행물 시리즈)
"순교자의 피는 기독교인의 씨앗". Bergisch Gladbach : 하이더 1988
(사후) Margret Dietrich 및 Arcadio Schwade (eds.) : 일본 기독교 출판물 : 유럽 언어 출판물. 프랑크푸르트 암마 인; 베를린; 베른; Bruxelles; 뉴욕; 옥스퍼드; 비엔나 : Lang 2004 ISBN 978-3-631-38886-0
웹 링크 [ 편집 | 소스 수정 ]
초상화가있는 데스 노트 , 뮌헨 중앙 유럽 예수회 지방 기록 보관소
개별 증거 [ 편집 | 소스 수정 ]
^ Arcadio Schwade : Hubert Ciesliks Biographie (1914–1998) 에 따른 전기 데이터 및 생명 스테이션 , in : Hubert Cieslik : 일본 기독교에 관한 간행물 : 유럽 언어 간행물. 편집 : Margret Dietrich 및 Arcadio Schwade,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베를린; 베른; Bruxelles; 뉴욕; 옥스퍼드; 비엔나 : Lang 2004 ISBN 978-3-631-38886-0 , pp. 15-19
Siehe Ciesliks Nachruf auf Laures : In Memoriam : Fr. Johannes Laures, SJ (1891–1959). 에서 : Monumenta Nipponica 15 (1959), pp. 209–224 ( JSTOR )
Kirishitan Bunko Library , 2020 년 8 월 29 일 액세스
Helmut Erlinghagen : 히로시마와 우리-목격자 보고서와 관점. (1982)
연구원은 16 명의 예수회가 히로시마 원폭을 경험하고 비극의 세계를 전했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 히로시마 평화 미디어 센터 vom 2019 년 11 월 12 일, abgerufen am 29. 2020 년 8 월
Hiroshima Peace Media Center , 2020 년 9 월 14 일 액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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ヒューバートCieslikの SJ(生まれ年7月2、 1914Weißwasserオーストリアシレジア;†年9月22、 1988年の東京[1] )であったドイツ、日本、ローマカトリックの宗教牧師(イエズス会)と大学教授が働きます。彼は広島へ原爆の生存者でした。


目次
1生活
2作品
3Webリンク
4個々の証拠
人生[編集| ソースを編集]

父が第一次世界大戦で亡くなったHubertCieslikは、1924年からJesuitsによって運営されていたBreslauのFranz-Ludwig- Konviktに居を構え、近くのMatthiasGymnasiumに出席しました。1926年から彼はBundNewGermanyのメンバーでした。1929年にミッションの検察官であるブルーノビターSJ神父が行った演習は、日本ミッションへの関心を呼び起こし、彼はイエズス会の命令に加わることを決心しました。

1933年4月22日、彼はミッテルシュタインの修練院に受け入れられました(1945年以降、ŚcinawkaŚrednia)。早くも1934年に彼は東京に送られ、そこでソフィア大学で2年目の修練期を過ごしました。彼は日本語と哲学を勉強するために大学に滞在しました。彼は特にヨハネス・ローレス神父(1891–1959)の影響を受けました。[2]その研究の焦点は、日本における初期のキリスト教の伝統の図書館と書誌を構築することでした(桐石丹文子)。[3]Cieslikの日本での最初の科学出版物は、17世紀の2つのソースライティングの翻訳でした。日本における初期キリスト教の発展と運命に関する研究が彼の研究の焦点となった。

Noviziat in Nagatsuka bei Hiroshima

1938年から広島に住んでいた。彼は教区で使節団の宗教上司であるヒューゴ・ラサール神父を助け、長塚の町のすぐ外にある修練院でラテン語とギリシャ語を教えました。神学研究を終えた後、1943年10月31日、東京のヨハネス・ロスSJ司教から、ヒューバート・シファーとともに司祭任命されました東京での空襲の増加と壊滅的な被害により、東京のイエズス会コミュニティのほぼ全員が、安全と考えられている広島、または初心者の長塚に移りました。

CieslikはNoborichô地区の教区で牧歌的な仕事を始めました。1945年8月6日、彼は上司のラサールと他の2人の父親、ウィルヘルムクラインソージ1907〜 1977年)とヒューバートシファー1915〜 1982年)と一緒に、現在は世界平和教会となっているカトリック教区教会マリアヒメルファートの隣の牧師館にいました。広島)が上がる。それは彼らに8ブロックを要しました、グラウンドゼロから約1.2 km離れて。Cieslikは、閃光が点滅したときに家の廊下に身を投げたので、圧力波が家に当たったとき、彼は外面的に無傷でした。ドイツのイエズス会の兄弟で建築家のイグナズ・グロッパー(1889–1968)によって1936/37年にのみ特に安定した耐震性のある方法で建設されたこのレクトリーは、衝撃波に大いに耐えましたが、その後の火災で破壊されました。Cieslikは、Kleinsorge神父と協力して、負傷したSchiffer神父とLasalle神父を浅野公園(実際にはShukkei Garden [4])で安全な場所に連れて行くことができました。夕方、彼らは、ヘルムート・アーリンハーゲンクラウス・ルーマーを含む、郊外の修練院で生き残ったイエズス会の救助隊によってそこにいました。そしてヨハネスSiemes、発見され、長塚、にしたペドロ・アルペを与えた負傷した最初の医療を。9月上旬、放射線の後遺症に悩まされながら、治療のために東京に連れて行かれた。爆弾が投下されたときに広島地域にいた16人のイエズス会の1人として[5]、 Cieslikは43年まで爆発を生き延びました。

1945年12月から彼は広島に戻り、破壊されたミッションレジデンスの敷地に建てられる兵舎で3度目の学位を取得しました。1950年に彼は東京に戻った。ソフィア大学で、彼は彼らの研究の哲学段階でイエズス会の寮であるミキハウスの学長になりました。同時に、彼は日本の祈り使徒職の代表として任命されました。1968年に彼は、日本に原爆の彼の思い出を発表していないハイ破戒(破壊の日)。[6]

1966年から1972年まで、彼はソフィア大学と日本の州教えているイエズス会の聖イグナチオの住居よりも優れていました。ローレス神父の死後、日本キリスト教文化学会(桐石丹文化研究会)を率い、年鑑の編集者を務める。彼はMonumentaNipponicaに多数の記事を発表しました。1969年から東京の渋谷地区にある聖心女子大学(聖心女子大学、聖心女子大学)で教鞭を執った。
作品[編集| ソースを編集]
キリシトキとサヨヨロクジャパン:17世紀のミッション史に関する資料 GustavVossとHubertCieslikによってドイツ語に翻訳されました。村上直次郎による序文、東京:ソフィア大学-ライプツィヒ:ハラソウィッツ1940(モニュメンタニッポニカモノグラフ)
日本のキリスト教に関する出版物:ヨーロッパ言語の出版物。マーグレット・ディートリッヒとアルカディオ・シュヴァーデが編集、フランクフルト・アム・メイン。ベルリン; ベルン; Bruxelles; ニューヨーク; オックスフォード; ウィーン:Lang 2004 ISBN 978-3-631-38886-0
GotōJuan:北日本のミッションの歴史への貢献。Schöneck/ Beckenried(Switzerland)1954(NeueZeitschriftfürMissionswissenschaft12の一連の出版物)
「殉教者の血はクリスチャンの種です」。ベルギッシュグラッドバッハ:ハイダー1988
(死後)マーグレット・ディートリッヒとアルカディオ・シュヴァーデ(編):日本のキリスト教に関する出版物:ヨーロッパ言語の出版物。フランクフルトアムメイン; ベルリン; ベルン; Bruxelles; ニューヨーク; オックスフォード; ウィーン:Lang 2004 ISBN 978-3-631-38886-0
Webリンク[編集| ソースを編集]
肖像画付きの死のメモ、中央ヨーロッパのイエズス会州の州のアーカイブ、ミュンヘン
個々の証拠[編集| ソースを編集]
アルカディオ・シュヴァーデによる伝記データとライフステーション:Hubert Ciesliks Biographie(1914–1998)、in:Hubert Cieslik:日本のキリスト教に関する出版物:ヨーロッパ言語の出版物。マーグレット・ディートリッヒとアルカディオ・シュヴァーデが編集、フランクフルト・アム・メイン。ベルリン; ベルン; Bruxelles; ニューヨーク; オックスフォード; ウィーン:Lang 2004 ISBN 978-3-631-38886-0pp.15-19
SieheCiesliks Nachruf auf Laures:In Memoriam:Fr。Johannes Laures、SJ(1891–1959)。In:モニュメンニッポニカ15(1959)、pp。209–224(JSTOR
桐島文庫図書館、2020年8月29日アクセス
HelmutErlinghagen:広島と私たち-目撃者の報告と展望。(1982)
研究者は、16人のイエズス会が広島の原爆を経験し、悲劇の世界を語ったことを確認しました。広島平和メディアセンターは2019年11月12日、アブゲルフェンは2020年8月29日です。
広島平和メディアセンター、2020年9月14日アクセス

Noble Strategy - [6] Right Speech

 6] Right Speech

As my teacher once said, “If you can’t control your mouth, there’s no way you can hope to control your mind.’ This is why right speech is so important in day-to-day practice.

Right speech, explained in negative terms, means avoiding four types of harmful speech:

  • lies (words spoken with the intent of misrepresenting the truth); 
  • divisive speech (spoken with the intent of creating rifts between people); 
  • harsh speech (spoken with the intent of hurting another person’s feelings); and 
  • idle chatter (spoken with no purposeful intent at all).

Notice the focus on intent: This is where the practice of right speech intersects with the training of the mind

Before you speak, you focus on why you want to speak. This helps get you in touch with all the machinations taking place in the committee of voices running your mind. If you see any unskillful motives lurking behind the committee’s decisions, you veto them. As a result, you become more aware of yourself, more honest with yourself, more firm with yourself. You also save yourself from saying things that you’ll later regret. In this way you strengthen qualities of mind that will be helpful in meditation, at the same time avoiding any potentially painful memories that would get in the way of being attentive to the present moment when the time comes to meditate.

In positive terms, right speech means speaking in ways that are trustworthy, harmonious, comforting, and worth taking to heart. When you make a practice of these positive forms of right speech, your words become a gift to others. In response, other people will start listening more to what you say, and will be more likely to respond in kind. This gives you a sense of the power of your actions: the way you act in the present moment does shape the world of your experience. You don’t need to be a victim of past events.  

For many of us, the most difficult part of practicing right speech lies in how we express our sense of humor. Especially here in America, we’re used to getting laughs with exaggeration, sarcasm, group stereotypes, and pure silliness—all classic examples of wrong speech. If people get used to these sorts of careless humor, they stop listening carefully to what we say. In this way, we cheapen our own discourse. Actually, there’s enough irony in the state of the world that we don’t need to exaggerate or be sarcastic. The greatest humorists are the ones who simply make us look directly at the way things are.

Expressing our humor in ways that are truthful, useful, and wise may require thought and effort, but when we master this sort of wit we find that the effort is well spent. We’ve sharpened our own minds and have improved our verbal environment. In this way, even our jokes become part of our practice: an opportunity to develop positive qualities of mind and to offer something of intelligent value to the people around us.

So pay close attention to what you say—and to why you say it. When you do, you’ll discover that an open mouth doesn’t have to be a mistake.


Yoo Jung Gil 같은상황이라도 어떤 마음으로 사건을 접하는가에 따라

 Yoo Jung Gil · 

가슴이 뭉클해지는 글이라 퍼왔습니다

Dong Yeon Won 

음악감독이 작업이 잘 안풀려 후배작곡가랑 한강시민공원에 갔다. 주차를 한후 커피두잔을 뽑고 무상무념으로 한강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뒤에서 웬차량이 쿵하고 추돌을 했다.

음악감독과 후배는 뒷목(?)을 잡고 차에서 내렸다.

그런데 뒷차 운전자는 묵묵부답 차에서 꼼짝도 안한다. 

음악감독은 차에서 내리라고 소리를 쳤지만 뒷차는 미동도 안한다.

차량엔 성에가 잔뜩 끼어 제대로 보이지도 않고 창문을 두드려도 뒷차는 어떤 반응도 안보인다.

음악감독:아 나 정말 왜 안내려요,,,빨리 내려요,,,

후배작곡가:이거 완전히 돌겠구만 무슨 음란마귀짓(?)을 하고 있길래 차량을 박고서도 내리지를 않네,,,나 이거 두달은 입원해야돼,,,,

음악감독:(창문을 두드리며) 술마신거 다 아니까,,빨리 내려요,,,내가 경찰 다 불렀으니까,,빨리 내려서 처리하라구요,,,,

그때 창문이 서서히 내려왔다.

차안에는 뇌성마비 부부두분이 정신이 나간체 눈물범벅이 되서 

음악감독을 응시했다,,,

남편: (더듬거리시며)죄송해요,,제가 이번에 중고로 차량을 구입했는데 장애인차량으로 개조해서 운전이 너무 서툴러서 사고를 냈어요,,

근데 너무 무서워서 ,,,가슴이 떨려서 ..손발이 오그라들어서 빨리 문을 못열었어요,,,죄송해요,,,,(부인도 눈물범벅인체 연신 죄송하다고 하였다)

그순간 음악감독과 후배작곡가는 완전히 얼어붙었다.

음악감독 :아닙니다. 아이고 많이 놀라셨죠,,,괜찮습니다,,다 괜찮고 아무일 없습니다,,,이거 범퍼,,,원래 찌그러지라고 있는겁니다...아니 이거 전에 사고나서 찌그러진겁니다,,,

음악감독(후배작곡가를 바라보며): 너 안아프지,,,나 하나도 안아프다,,,우리 안아퍼,,,그지,,,우리 안아퍼,,,

후배작곡가:형 나 너무 쌩쌩해,,,,하나도 안아퍼,,,,

아저씨 아주머니 그냥가세요,,,,조심해서 운전하시고 뒷차가 막 빵빵거려도 그냥 천천히 가세요,,,그냥 막 무조건 천천히 가세요

장애인부부는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하시며 가셨다,,,,

미담을 이야기할려는게 아니다,,,그냥 세상은 아직 살만한건 같아서 전하는 말이다.

Comments

Yoo Jung Gil

저는 이 사건을 통해 단순한 미담을 소개하고 싶은 것이아니라. 같은상황이라도 어떤 마음으로 사건을 접하는가에 따라 상황와 관계가 달라지는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이익과 손해, 피해에 집착>하면 당연히 분노하고 피해여부에 따라 돈으로 계상하는 차가운 관계가 되지만

<자비와 연민>의 마음으로 사건을 접하는 순간 세계와 사람이 모두 따뜻한 관계가 된다는것을 깨닫게 되는 사례이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시비와 귀찮음>에 예민해지면 모든사안이 화나고 짜증나는 일의연속이지만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마음으로 대하면 

사랑와 자비, 연민의 마음으로 세상은 좋은 사람들의 행동이라는 시각으로 보이게 된다는 것이지요.

어떤 마음을 내느냐에 따라 세상은 달라진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