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4/11

한국민주당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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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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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주당
韓國民主黨
이념자유보수주의
경제적 자유주의
반공주의
정치적 스펙트럼우익
당원약 90만 명(1947년)
역사
창당1945년 9월 16일(설립)
1949년 2월(해체)
선행조직조선민족당한국국민당
후계정당민주국민당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 Korea Democratic Party, 영문약칭 KDP)은 미군정기와 대한민국의 보수주의적, 부르주아적 자유주의 정치 정당의 하나이다. 대한민국의 민주당계 정당의 전신이기도 하다. 1945년 9월 16일에 조선민족당한국국민당 등이 합당하여 조직된 정당이었다. 송진우김성수장덕수조병옥윤보선 등이 참여하였다. 초대 당수는 송진우였으나 1945년12월 30일에 암살되고 다음 당수 장덕수 역시 1947년 12월 2일에 암살당했다.
한국민주당에 참가한 정당으로는 8월 28일 김병로백관수 등이 발기한 조선민족당9월 2일 백남훈장덕수윤보선 등이 조직한 한국국민당 등이었다. 이들은 9월 4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 윤보선의 자택인 안동장에서 합당에 합의하였고, 9월 8일 윤보선의 집인 안동장에서 정식 창당하였다. 1945년 12월의 신탁통치 때는 신탁통치에 반대하였으나 1946년 2월 이후 미소공동위원회에는 참석, 참여하여 반대한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1948년 1월에 이승만의 단정 수립론과 김구김규식의 남북협상론이 나뉠 때는 이승만의 단정 수립론을 지지, 선거가 가능한 지역 만이라도 국회의원을 선출하고 정부 수립을 준비할 것을 주장했다. 1948년 7월 22일 초대 내각 구성 때 김도연 등 일부 인사만이 반영되어 이승만 정권에 비판적이었다가 결국 야당화되었다. 1949년 2월 대한국민당의 일부와 합당하여 민국당으로 개편되었다.

개요[편집]

민주당의 기원은 한국민주당에서 시작된다. 한민당은 1945년 9월 16일에 결성되어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도 존속하다가 1949년 2월 10일 발전적으로 해체, 민주국민당으로 개편되었고, 민국당은 그 이후부터 원내 야당으로 활동하다가 역시 발전적으로 해체, 1955년 9월 28일 민주당으로 개편되었다.[1]

광복 직후[편집]

광복 직후 보수적인 인사들과 지주, 미국과 유럽 유학생 출신들은 각자 정당을 조직했다. 1945년8월 18일 원세훈이순탁조병옥 등은 서울에서 고려민주당을 창당했는데 해방 직후 한국에서 조직된 초기 정당 중의 하나이다. 그 뒤 8월 28일 김병로백관수 등은 서울에서 고려민주당과 조선민족당을 조직했고, 9월 2일 백남훈장덕수윤보선장택상허정 등이 한국국민당을 조직했다.
이들은 하나의 단결된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고 보고 8월말부터 협상에 들어갔으며 9월 4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 윤보선의 자택인 안동장에서 통합에 합의한다.
1945년 9월 4일 우익진영의 대표자 82명은 서울 종로국민학교에 모여 한국민주당(한민당) 창당 준비위원회 발기총회를 개최했다. 처음에는 송진우김성수 등의 명망가를 영입하려 하였으나 송진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우익 여당이 있을텐데 별도의 당을 창당할 필요가 없다고 거절했지만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라는 권고에 못이겨 한민당 창당 준비위원회에 참여하였다.

창당 배경[편집]

초대 수석총무 송진우
한민당 창당 준비위원회는 1945년 9월 8일 성명을 내고 "국제적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에 정권을 참칭하는 일체의 단체 및 그 행동을 단호히 배격한다"고 선언했다. 9월 7일에는 김성수송진우서상일 등 동아일보사 계열의 인사들은 국민대회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환영을 계획하였다. 또한 같은 9월 7일 이인조병옥 등이 결성한 중경 임시정부 및 연합군 환영준비위원회를 조직했다. 이들은 곧 9월 8일 국민대회준비위원회로 통합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영 준비를 계획하는 한편 한민당의 측면지원조직으로 활동하였다.
9월 8일 한민당은 창당 발기인 명의로 '조선인민공화국의 타도' 성명서를 동아일보와 중앙방송국 등에 발표했는데, 그것은 '기미(己未) 이래의 조선 독립운동의 결정체이며 국제적으로 승인된 재외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반대, 부인하는 도배(徒輩)가 있다면 이는 3천만 민중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창당 이전부터 조선공산당과의 투쟁에 있어서 선봉적 역할을 한 세력의 모임이었던 한민당은 이후로도 한국독립당독립촉성회와 연대하여 조선공산당남조선로동당 등 좌파에 대한 투쟁을 지향하였다.
1945년 9월 9일 미 24군단이 한반도 입성하여 군정을 선포하였고, 10일 한민당계열 인사인 오긍선이 미군 장교를 접선, 송진우의 한민당을 소개해주었다. 그리고 다음날 9월 11일 군정사령관과 미정보참모부(G-2)는 한민당을 대표한 조병옥윤보선윤치영 등을 만나 한반도 상황을 듣게되는데, 이들 한민당 세력들은 '건준을 비롯한 인공은 "일본과 협력한 한인집단"에 의해 조직되었으며, 여운형은 "한인들에게 잘 알려진 부일협력 정치인"이다.'라고 주장하였다.[2]
창당 멤버의 한사람인 조병옥에 의하면 한민당의 주 목적은 건준 타도라고 하였다. 한국민주당은 건국준비위원회를 타도하는 활동과 그 다음 소위 조선인민공화국과 인민위원회, 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 등의 좌익 집단을 성토, 타도하는 데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 당시 인민위원회의 조직은 지방 방방곡곡으로 뻗쳐 있었고, 조선민주청년동맹이라는 것도 결성되어 있었다.[3] 이들의 조직을 타도하는 것이 한민당의 첫 당면과제였다는 것이다.

창당 조직과 당 행동강령[편집]

한국민주당은 1945년 9월 8일 윤보선의 집인 안동장에서 정식 창당하였다. 이들 한민당에 입당한 구성원들은 미국, 일본 등 해외 유학파와 그밖에 4분의 2가량이 지주, 타협적 민족주의 세력들이 핵심[4] 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친일파를 직접 대표자로 선출하지는 않았지만 지주와 함께 친일파 세력을 상당수 포섭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민중들로부터 지지기반이 매우 약했다.[5] 1945년 9월 16일, 이미 미군정에 큰 영향력을 행사해 온 한민당이 천도교 강당에서 1600여명의 발기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창당대회를 열었다. 한민당은 창당 선언을 통해 충칭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정식 정부'로 맞이할 것을 다짐하면서 당시 민중들로부터 지지를 많이받았던 건준을 맹렬히 비난, 공격하였다.[6] 창당 선언문은 다음과 같다.
(중략)
일본 제국주의 철쇄는 끊어졌다. 혈한의 투쟁! 참으로 36년, 세계사의 대전환과 함께 우리는 드디어 광복의 대업을 완성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반만 년의 빛나던 역사를 도로 밝혀 완벽무결한 자주독립의 국가로서 구원의 발전을 약속하게 되었다. 3천만 가슴에 뒤끓어 용솟음치는 오늘의 기쁨이여! 이 기쁨은 곧 혁명동지들에게 바치는 감사로 옮겨지고 더욱이 포한종천하신 순국제현에게 생각이 사무치매 도리어 몰래몰래 슬플 쁜이다. 참으로 이 크나큰 광복의 공훈은 해내.해외의 들입고 감추인 무수한 혁명동지들의 혈한의 결정이 아니고 무엇이랴.

우리는 머지않아 해외의 개선동지들을 맞이하려 한다. 더욱이 인방중경에서 고전역투하던 대한임시정부를 중심으로 결집한 혁명동지들을 생각건대 그들은 두 번 거듭나는 세계의 대풍운을 타서 안으로 국내의 혁명을 고동하며 밖으로 민족의 생맥을 국제간에 현양하면서 나중엔 군국주의 박멸의 일익으로 당당한 명분 아래 맹방 중,미,소,영 등 연합군에 끼어 빛나는 무훈까지 세웠다. 오늘의 기꺼운 광복 성취가 이 어찌 우연한 바이랴.

우리는 맹서한다. 중경의 대한임시정부는 광복 벽두의 우리 정부로서 맞이하려 한다. 그리고 또 우리는 약속한다. 군국주의의루(전쟁보루)를폭멸하고 세계평화를 확립시키는 세기적 건설기를 당하여 자주독립을 회복한 우리는 맹방 제국에 최고의 사의를 표하는 한편 국제평화의 대헌장을 끝까지 준수 확충하려 한다.

나아가 우리 민족이 장래할 세계의 신문화 건설에 뚜렷한 공헌이 있기를 꾀할진대 무엇보다도 완벽결한 자주독립국가로서 힘차게 발전해야 될 것이다. 이는 오직 전제와 구속 없는 민족주의 제도 앞에 개로개학으로써 국민의 생활과 교양을 향상시키며 특히 근로대중의 복리를 증진시켜 호말의 차별도 중압도 없기를 기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전국민의 자반석 위에 두고 세계 신문화 건설에 매진하려 한다.


동지여, 모이라! 한국민주당의 깃발 아래로.

강령
  • 조선민족의 자주독립국가 완성을 기함
  • 민주주의의 정체 수립을 기함
  • 근로대중의 복리증진을 기함
  • 민족문화를 앙양하여 세계문화에 공헌함
  • 국제헌장을 준수하여 세계평화의 확립을 기함


정책
  • 국민 기본생활의 확보
  • 호혜평등의 외교정책 수립
  • 언론,출판,집회,결사 및 신앙의 자유
  • 교육 및 보건의 기회균등
  • 중공주의의 경제정책 수립
  • 주요 산업의 국영 또는 통제관리
  • 토지제도의 합리적 재편성
  • 국방군의 창설
(하략)
경제 강령을 만들 당시 허정은 무상몰수를 하든 유상매수를 하든 농민에게 토지를 분배할 것을 주장했다. 허정은 공산당과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인 국유화는 곧 농민들을 소작농화 하는 것이라며 반대하였다. 따라서 한민당은 농지에 대해 일부 무상몰수를 포함한 유상매수와 유상매매 또는 분배를 당 강령으로 채택하였다.
이어 한민당은 임정 간부와 항일 독립운동가들을 영수로 추대하였다. 이승만서재필김구이시영문창범권동진오세창 등이 그들이다. 그러나, 이들 5인은 아직 해외에 있었고 국내에 있던 권동진과 오세창은 영수직을 수락하지 않았다. 한편 조병옥은 '김규식 박사도 당의 영수로 추대할 것'을 여러 번 건의하였으나 다른 한민당 당원들에 의해 번번히 묵살당했다. 조병옥은 '나는 그(김규식)에게 누구보다도 많은 기대를 가졌다[7] 며 많이 아쉬워하였다.
1945년 9월 16일 한민당은 정강과 정책을 발표하였다. 정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중공주의 경제정책 수립', '주요 산업의 국영 또는 통제 관리', '토지제도의 합리적 재편성' 등 경제조항은 사회주의 요소를 강하게 담고 있다.

당원 수[편집]

창당 19일 후인 1945년 9월 27일 미군정청 내무부에 신고된 한국민주당의 당원수는 전국적으로 5만 명이었다. 이후 서울의 당 본부와 경기도지구당을 조직하고 1945년 12월 5일 부산시지구당, 경상남도지구당을 결성한 뒤로는 지방 지구당 조직을 확대, 확장시켰으며, 지역의 유지, 해외 유학파, 지주, 타협적 민족주의자, 온건 민족주의자, 친일파 등이 참여하였다.
1946년말 당시 한국민주당은 남한 전역에 54개의 지구당을 조직하였고, 당원수도 1946년 12월기준 23만여 명이었다. 1947년 12월말 미군정청 내무부에 신고된 한민당의 당원수는 86만 6천여 명이었다.

역대 정당 당원[편집]

집단지도체제[편집]

한민당은 집단지도체제를 구축하였다. 형식적으로 수석총무와 정치부장을 선출하였지만 수석총무나 정치부장은 형식적인 대표였고, 외교분야는 당 외교부장, 경제분야는 당 경제부장, 산업분야는 당 산업부장, 농림분야는 농림부장이 주관하는 등의 형식이었다. 또한 각 부처의 총무와 부총무, 부원이 있었고 정치부원이 외교부원을 겸하기도 하고, 각 부장이 타 부의 부원이나 부총무, 또는 각 시도지구당 위원장을 겸하기도 하였다.
허정은 한민당은 총무 중심의 일종의 집단 지도체제였다고 증언하였다.[8] 조병옥은 '한민당은 집단지도체제인 8총무제를 채택하고 수석총무에는 송진우를 피선하고 총무에는 김병로이인 등과 나도 그 8총무의 한 사람으로 활동하였다[3]'고 하였다. 이어 각 도의 시도지구당 위원장을 선출하였다.
한민당 발기위원이자 창당 멤버이기도 한 허정은 당수가 모든 것을 좌지우지 하지 않았던 것만 놓고 보더라도 한민당은 민주적인 정당이라고 봤다. 허정에 의하면 한민당은 한국 최초의 민주적 정당이었다. 민주주의의 구현을 당이 노선으로 삼았을 뿐 아니라, 정당 운영도 민주적이었다 고 하였다. [9] 다수의 의견과 함께 소수의 의견도 존중되면서 그 의견이 민주적 방식을 통해 조정되고 합의에 도달함으로써 당원 자치의 당내 민주주의가 확립되어, 1인 중심의 독선적 당 운영은 있을 수가 없었다.[9] 또한 허정은 한민당이 각 부서의 자치권, 각 시도지구당의 자치권을 인정한 것과 어설픈 민족주의와 애국심에 의존하지 않았던 것 역시 한민당이 갖고 있었던 민주적인 시스템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정치 활동[편집]

출범 초기[편집]

한민당은 1945년 9월 21일 중앙부서를 확정하였는데, 당수제 또는 최고위원제를 채택하지 않고 총무제를 채택했다. 1도(道) 1총무의 원칙에 따라 함경도의 원세훈, 전북의 백관수, 경북의 서상일, 경기의 김도연, 경남의 허정, 충남의 조병옥, 황해의 백남훈, 평안도의 김동원 등 8명의 총무를 뽑았다. 송진우는 수석 총무, 김병로는 중앙감찰위원장, 이인은 당무부장, 장덕수는 외무부장, 김약수는 조직부장을 맡았다.
1945년 10월 20일 송진우의 주도로 환국지사영접위원회(일명 환국지사후원회)라는 외곽단체를 조직하여 해외에서 귀국하는 독립지사들, 사실상 임정 요인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1945년 10월 23일 개최된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개최 대회에 대표를 참석시켜 이승만의 의견에 동조하였다.(독립촉성중앙협의회 참조)

신탁통치 반대 사태와 미소공위[편집]

탁치 찬반론 당내 갈등[편집]

1945년 12월 31일자 동아일보. 송진우 암살을 보도
신탁통치 반대운동 집회.
1945년 12월 27일에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된 신탁통치계획에 한민당은 당차원에서 반대했다. 그러나 초대 수석총무였던 송진우는 신탁통치의 불가피성을 인정하고 일단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였다. 한민당은 당수인 송진우의 의견과 갈등하였다.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한반도에 대한 남북한 분할 신탁통치가 결정되었다.
12월 29일 저녁 송진우가 경교장을 찾아와 김구와 만났다. 송진우의 전기작가는 그가 김구로 하여금 신탁통치 문제에 관하여 미군정과 정면대결을 피하게 하려고 시도했다고 말하였다.[10][11] 브루스커밍스에 의하면 김구는 경교장을 방문한 송진우가 반탁운동에 가담하도록 설득시키는 데 실패한 것이 분명하며 송진우가 여진히 미국치하의 후견기간을 주장하고 있다는 확신을 받은 것 같다고 보았다.[10][11] 송진우는 5개년간 신탁통치를 받아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한다.
한국민주당 일각에서는 신탁통치를 놓고 탁치에 반대하는 시각과 신탁통치 불가피론을 역설하는 입장이 나타났는데, 전자의 대표는 김성수였고, 후자는 송진우였다. 우선 송진우는 임시정부가 미군정에 도전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라고 충고했다. 이는 12월 29일 저녁 12시부터 열린 경교장의 회의에서도 표현되었다.
12월말 그는 한 미국계인사와의 인터뷰에서 주한 미군이 주둔해야 함을 역설하기도 한다.
우리들은 미군이 적어도 2년 동안은 머물러 있기를 원한다. 만일 미군이 지금 떠나게 되면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잡게 될 염려가 있다. 왜 그러냐 하면 그들은 우리들보다 조직이 더 잘 되어 있기 때문이다.[12]
미군정에 도전할 경우 우익 진영에게 정권을 넘기지 않고 제3의 세력에게 정권을 넘길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탁치의 불가피성을 역설했지만 송진우는 자신을 적극적인 탁치론자나 신탁통치에 지지하는 것으로 몰고 가는 여론을 불쾌히 여겼다.

송진우 암살 사건[편집]

송진우와 임시정부 측의 면담은 12월 30일 새벽4시에 끝났으며 두 시간 후 송진우는 자택에서 청년단의 저격을 받고 암살당했다. 1945년 12월 30일 새벽 6시 15분에 자택에서 한현우(韓賢宇) 등의 저격을 받고 암살당했다.[13][14] 범인은 한현우유근배 등 6명이었고 이들이 쏜 탄환 13발 중 6발이 명중했다. 이들의 총은 준 사람은 전백으로 '영화(永和)기업사'라는 해운회사를 차려 사장을 지냈던 사람이다.[15] 전백은 배후는 자신이라고 주장했다.
송진우를 암살한 암살범중의 한 사람인 한현우는 후에 송진우가 미국의 후견을 지지한 것이 자신의 저격 동기였다고 말했다.[16] 한현우는 진술하기를 배후는 없었으며 김구와 이승만이 자신들을 의거를 단행한 의사로 칭찬해 주었다고 주장했다.[17][18][19]
다른 증거는 한현우를 김구와 연결시켰고, 브루스 커밍스는 한현우의 배후를 김구라고 보았다.[16] 미군정청 하지 사령장관은 송진우 암살의 배후로 김구를 지목하고 1946년 1월 1일 김구를 소환하여 경고를 주었다.[20] 송진우 암살 이후 한민당은 탁치 문제에서는 반탁을 주장하였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 봉대론을 취소하고 김구한국독립당과 갈등하게 된다. 송진우의 암살 후 한민당은 혼란에 빠졌지만 곧 원세훈과 백관수를 임시 당수로 선정하였다가 장덕수를 두 번째 당수로 선출한다.
한편 김구는 김성수의 암살을 기도[21] 하려다가 실패하였으며 이것이 미 군정의 첩보에 입수되기도 했다. 이는 김구나 임시정부에 대한 한민당의 감정을 더욱 악화시켰다.

좌우합작위원회[편집]

한민당은 미군정 주도로 진행되는 좌우합작위원회를 반대하지는 않았으나 방관하였다. 이때 한국민주당 측에서도 좌우합작위원회에 대표자를 파견했는데 원세훈이순탁서상일 등을 좌우합작위원회의 한민당 대표로 파견하였다.

미소공위 사태[편집]

장덕수는 한민당의 정치부장으로 당의 이념을 정립하는 데 공이 컸다.[22] 장덕수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신탁통치를 추진시킨다고 이를 반대하는 이승만이나 김구와는 달리 미소공위에 참석하여 한국인의 견해를 당당히 표명하기 위해서는 미소공동위원회와 협의해야 하다고 주장했다.[22] 한국의 독립에 미국소련 등의 강대국의 입김이 배제될 수는 없으며, 이들 강대국을 실력으로 밀어내기는 역부족이라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그러나 장덕수의 설득은 실패했고, 그는 이 일로 김구와 격렬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암살된 제2대 당수 장덕수
1947년 5월부터 장덕수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참가 여부를 놓고 김구와 갈등관계에 있었다. 장덕수는 1947년 12월 2일 자신의 서울 제기동 자택을 방문한 배희범박광옥 등의 총격을 받고 병원으로 입송되었으나 과다출혈로 사망하였다. 이때 붙잡힌 배희범, 박광옥 등과 그들의 배후로 지목된 김석황은 모두 한국독립당 소속이었고, 김석황은 한독당 중앙위원이자 국민회의 동원부장, 임시정부 등에도 관여하였다. 우파정당 통합에서 한민당(한국민주당)은 빠졌는데 우익정당 통합의 일환으로 한국독립당과 한국민주당의 통합 시도에 김성수는 찬성하였으나 장덕수는 반대하였다.[23] 장덕수는 통합하는 것은 당을 통째로 임시정부에 갖다 바치는 일이라며 반대하였다.[23][24]
1946년부터 한민당은 미소공위에 참여하여 반대한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1947년 10월 18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면서 장덕수는 '미소공동위원회에 대해 더는 기대할 것이 없다'고 판단하고 단정 수립 지지로 선회했다. 이어 그는 국제연합(UN)에 호소해 총선거를 실시해야 한다고 판단, 1947년 9월 김성수와 함께 미국 특사 웨드마이어를 찾아 남한 단독정부 수립의 불가피함을 주장하였다.
1947년 11월 김구는 이승만의 노선에 협조하는 대신 김구의 국민의회 중심으로 우익이 단결하는 데 이승만의 동의를 얻어내었다. 그러나 장덕수의 암살로 김구와 이승만·한민당의 단결은 무산되고 말았다.[25]

단정참여 후 야당화[편집]

1946년 6월 3일에 이승만이 정읍발언하였는데, 여기서 처음 언급한 이승만의 '단독정부론'에 대해 한민당은 신속한 지지 의사를 밝혔다. 한민당은 "일부에서는 무슨 역적질이나 한 것 같이 선전하니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며 이승만을 옹호하고 나섰다.
1947년 2월 5일, 미군정의 민정장관으로 중도파 인사 안재홍이 임명되고, 각 부처의 장 및 도지사를 한국인으로 바꾸고 미국인을 고문으로 임명했다. 미군정 기구에 중도파가 파고들어오는 것을 경계한 한민당은 민정장관 안재홍을 맹렬하게 공격하였다. 한민당의 공격은 너무 거셌으며, '1개월을 넘지 않는 동안 저 자를 쫓아내고야 말겠다'고 공언하기까지 했다. 또한 각종 연설과 삐라 등으로 터무니없는 억지식 논리로 안재홍을 몰아붙여서 비방하였다. 심지어 미군정내에 한민당계 고위 관리들은 5월 하순 민정장관 안재홍이 내린 인사 발령까지 거부하였다.[26]
3대 당수 인촌 김성수
1947년 6월 19일 미소공위 문제를 놓고 논란이 있자, '참여하되, 반대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미소공위 협의에 참가할 것을 주장하면서 6월 19일 74개 정당 사회단체로 구성된 '임시정부수립대책협의회'를 구성했다.[27]
한민당은 이승만의 '단독정부론'에 찬성하고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참가하였지만, 1948년 7월 이승만은 정부 조각 후 한민당계열 인사에 재무장관직 1석만을 부여하였다. 이에 한민당은 이승만에 반발하였고, 한민당은 이후 야당의 길을 걷게 된다. 한민당에는 이승만의 최측근인 윤치영허정이기붕 등이 있었다. 이들은 이승만과의 개인적인 인연으로 1948년 8월, 한민당이 이승만을 반대하는 즉시 한민당을 탈당하였다. 특히 미국식 민주주의 보다는 강력한 지도자를 원했던 윤치영은 이승만과의 개인적 인연 외에도 자신의 신념 때문에 한민당을 탈당하게 된다.
윤치영은 한민당을 탈당하면서 당리당략이나 일삼는 정상배, 정치 모리배, 양아치들이라고 극언을 퍼부었고, 이는 한민당 계열이 윤치영을 두고두고 미워하는 원인이 된다. 훗날 1963년 12월과 1966년 윤치영은 총리 내정자로 지명되었지만 한민당 출신 국회의원과 지식인들의 맹렬한 반대로 총리지명 자체가 철회되고 만다. 또한 한민당 계열 인사들은 윤치영이 박정희를 단군 이래의 최고의 지도자라 예찬한 것을 두고도 윤치영은 단군 이래의 최대의 간신이라고 응수한다. 한민당 출신들은 윤치영이 한민당에 극언을 퍼붓고 탈당한 점과 이승만의 절대 지지, 그의 일민주의 노선 지지, 나중에는 박정희를 적극 지지한 것, 3선 개헌과 유신을 적극 지지한 것을 두고 극도로 미워하게 된다.

민주국민당과 통합[편집]

단정수립론에 적극 지지하던 한민당은 UN 소총회의 결의 결과 발표와 미군정법령 제175호 및 국회의원 선거법에 따라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참여했다. 그러나 한민당은 제헌국회의원 선거에서 90명의 입후보자 중 29명의 당선으로 총유효투표의 13%의 의석을 차지하였다.
1948년 5월 30일 제헌국회 개원 이후 한민당은 국무총리 지명과 조각과정에서 당수인 김성수를 총리로 생각하였지만 이승만은 이를 외면하였고, 윤치영 등 10여 명의 의원이 탈당함으로써 원내세력도 위축되었다. 이후 이승만 정권의 초대 총리 인사에서 번번히 반대를 하기도 했다.
1949년 1월 26일 대한국민회대동청년단과 통합하여 민주국민당을 창당함으로써 흡수해체되었다. 민주국민당은 민주당의 모태가 되었다.

정책 비전[편집]

자본의 국영, 국유화[편집]

한민당은 경제관에 대하여 산업자본의 국유화, 국영화를 제시했다. 그러나 지주들이 주를 이룬 만큼 영구 국영화는 아니고 어느정도 민족 자본이 형성된 뒤에 민영화를 서서히 추진하는 것이었다. 한민당은 당 강령 6조에 '중요 산업의 국영 또는 통제 관리'라는 항목이 있었다.
허정에 의하면 하민당이 중요 산업의 국영 또는 통제 관리를 정책으로 내세운 것은 한민다이 사회주의 경제를 지향하기 위해서는 결코 아니었다. [28] 고 해명했다. 허정에 의하면 자유민주주의의 구현이 한민당의 지상과제인 만큼 경제정책도 기회 균등이 보장되는 자유경쟁 체제를 원칙으로 삼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남겨놓고 간 많은 산업시설을 인수할 만한 민족자본이 형성되지 못한 때에 자유경쟁의 원칙만을 고집하면 경제적 혼란이 오고, 이에 따라 기업 윤리가 혼미에 빠지고 급조 재벌이 횡행하여 민생이 위협받을 것이므로, 건전한 민족자본과 기업윤리가 형성될 때까지 국영 또는 통제 관리를 잠정적으로 실시하려고 한 것이다.[28]
토지 문제에서는 경자유전(耕者有田)을 원칙으로 삼고 있었다. 당시 공산당과 그 계열은 경자유전을 말하면서도 토지의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주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은 토지의 국유화를 w전제로 해서 가능한 만큼, 토지의 소유권이 농민에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었다.[28]
농민은 단지 경작권만을 얻을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농민은 남의 땅 경작이 아니라 자신이 소유하는 땅을 원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 땅에 자기가 씨앗을 뿌리고 거둬들이는 기쁨을 희구했으며, 남의 땅에 씨앗을 뿌리고 거둬들이는 슬픔을 바라지는 않았다. 따라서 지주가 개인으로부터 국가로 바뀌는 차이밖에 없는 무상몰수, 무상분배는 경자유전의 원칙과는 거리가 멀었다.[29] 허정과 한민당은 공산당이 말하는 무상몰수 무상분배는 완전한 국유화 국영화는 농민을 소작농으로만드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한민당은 유상 매수 또는 유상 분배를 주장했다. 저렴한 대가 내지는 국가에 토지세를 상환해서 갚아나가는 것이었다. 허정에 의하면 '한민당은 모든 농민에게 자기 땅에 씨앗을 뿌리는 기쁨을 주기 위해 농민이 땅을 사서 사유화하는 유상분배의 원칙을 세웠다.'는 것이다.[29] 가난한 농민을 위해 국가가 지주로부터 토지를 사들여 농민에게 분배하고, 농민은 땅값을 국가에 장기 분할로 갚아나가고, 지주는 토지를 매각한 자금으로 산업 자본가로 전환하는 토지의 합리적 재편성을 의도했던 것이다.[29]

미군정 협력 문제[편집]

미군 주둔 후 한민당은 미군정에 협력하느냐 여부를 놓고 고민하였다 한다. 한민당은 창당 초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정부로 추대하기로 결의하였고, 임정 요인들을 잠재적 영수로 추대했다. 조병옥에 의하면 미군정에 협력하느냐를 놓고 한민당에서는 처음에 쉽게 의견일치를 보지 못하고 딜레마에 빠졌다고 한다.
카이로와 포츠담 선언에서 의하여 한국은 곧 독립 정부를 수립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던 한국민주당은 하나의 딜레마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우리 한국민주당이 미군정에 협력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반대하느냐 하는 딜레마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한데 당시의 국제정세에 비추어 보아 한국은 군정 단계의 훈정기(訓政期)를 거치지 않고서는 치안유지를 할 수가 없고, 또 한반도의 적화를 면치 못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려 한국민주당 수뇌부에서는 와신상담의 격으로 군정에 협력하기로 결정을 하였던 것[3] 이라는 것이다. 이후 한민당은 미군정의 사실상의 여당의 기능을 하였다.

논란과 의혹[편집]

공산당 습격설[편집]

한민당이 창당될 때 조선공산당원 일부가 창당대회장을 습격하여 엉망으로 만들었다는 소문이 한때 유포되었다. 그러나 한민당 창당 발기인의 한사람인 허정은 이를 두고 소문이라고 해명하였다.
허정에 의하면 '한민당 창당과 관련하여 덧붙여서 말해두어야 할 것은 창당대회 때 공산당의 습격을 받았다는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에 대해서이다. 내 기억으로는 공산당의 습격은 전혀 없었던 것 같다.'고 하였다.[30] 그 이유로 허정은 '그 때만 해도 해방 직후여서 좌우의 대결은 물리적인 힘의 대결로 번지지는 않았을 때이다. 다만 이념상의 문제, 정책상의 문제로 대결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실력 행사까지 벌이게 된 것은 시일이 좀더 지난 다음이었다[30]'고 하였다.
허정은 한민당 창당대회 때 박헌영이 내빈으로 참석하여 창당을 축하한다는 축사를 한 것을 증언하였다. 한국민주당 창당대회 때만 하더라도 박헌영이 참석하여 내빈 축사를 했다. 우두머리는 축사를 하고 졸개는 습격을 하는 일은 없었다[30] 는 것이다.

지역정당 논란[편집]

한민당은 창당 초기부터 전라도 당, 호남 갑부의 정당이라고 비난받아 왔다.
이를 두고 창당 멤버인 허정은 한민당을 가리켜 전라도 당, 호남 갑부의 정당이니 친일파의 소굴이니 하고 비난하는 것은 공산당의 악의의 찬 비난에 지나지 않았다[29] 고 해명하였다. 한민당의 주요 인사는 전북 고창(또는 부안) 출신의 김성수, 김병로, 금산의 임영신, 유진산, 전남 담양 출신 송진우, 백관수, 백남훈, 전남 영암 출신의 김준연, 전북 고창 출신의 이철승 외에도 황해남도 해주 출신의 장덕수, 경북 영천 출신의 이활, 충청남도 출신의 윤보선, 윤치영, 충남 천안 출신의 조병옥, 서울 출신의 원세훈, 이기붕, 김도연, 대구 출신 서상일, 경북 출신 장택상, 이인, 부산 출신의 허정, 김약수 등이 있었다.
조병옥은 고하 송진우나 인촌 김성수는 정당을 조직하는 데 있어서나 또는 당 사업을 하는 데 있어서도 지방적인 차별을 두지 않고 인재 본위 실력 본위로 사람을 등용하였으며 특히 정당 및 사회단체 조직에 있어서는 그런 점에 d가장 유의하고 세심한 검토로서 전력을 다하여 주력하였던 것이다 [31] 라며 지역 정당이 아니라고 반박하였다. 한편 허정은 한민당이 전라도 당, 호남 갑부 정당이라는 비난은 공산당이 지어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친일파 정당 논란[편집]

한민당은 창당 초기부터 친일파들을 일부 받아들인 것을 두고 논란거리가 되었다. 창당멤버의 한 사람인 허정은 일부 친일파의 수용을 인정하였지만 나름대로 엄선 기준이 있었다 한다. 그에 의하면 '일제 하에서 고급 관리를 지냈거나 친일파로 지목받던 사람들이 몇 사람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극악한 친일파나 민족반역자는 아니었다.[32] 고 주장했다.
허정은 또 정당 당원들의 총 수가 많다는 것이 정당의 우수성의 증명은 아닌 것 쯤은 알고 있었다.[32] 며 당시 우리로서는 아무리 문호 개방을 원칙으로 하기는 했더라도 무원칙, 무분별하게 입당시켰던 것은 아니다. 단지 좀더 문을 넓게 열어 민족 진영의 대집결체가 되자는 뜻에서 인선의 원칙을 크게 완화시켰을 뿐이다.[33]
한편 한민당에 몸담았다가 탈당한 윤치영은 한민당이 친일파 정당이라고 비난하였다. 윤치영의 이같은 비난은 한민당이 친일파 정당이라는 것에 대한 하나의 설득력을 얻는 원인이 되었다. 한민당은 미국, 영국식 민주주의 체제를 한국 사회에 도입, 확산시키는 것을 당의 중점 사업의 하나로 선정했다. 당 강령으로 넣지는 않았지만 한국 사회에 미국, 영국식 민주주의를 소개, 확산, 정착시킨다는 것을 공공연한 당원들의 목적으로 설정, 인식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이승만, 김구, 박헌영, 이광수, 이범석, 안호상, 박정희 등의 인사들은 이를 노골적으로 불쾌히 여겼다.

기타[편집]

한편 2004년 조선일보의 기자 이한우는 당시 친일파 논쟁이 격화되자, 한나라당을 친일파로 공격하는 일부 좌파 진영의 주장에 대해 "진보진영에서는 늘상 이승만대통령이 친일파를 감싸안았다고 비판합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이승만이 감싸안았다는 친일파의 실체가 묘연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분명했습니다. 한민당이었죠. 이승만이 건국과정에서 한민당과 함께 했고 건국이후에는 한민당을 내팽겨친 것은 알고계시겠죠. 그 한민당이 민주당됐고 박정희때 신민당됐다고 거기서 쪼개져 김영삼김대중이 나왔다는거 아시죠.[34]"라면서 역으로 반박을 가하기도 했다.
한편 작가 장정일은 2004년 민주노동당의 "50년 만의 결실"이라는 주장을 풍자하기도 했다. 그에 의하면 '44년 만의 진보정당의 국회 등원을 '50년 만의 결실'이라고 부정확하게 반올림하는 것 만큼이나 진보정당 자체에 대해 무지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무지는 4.15 총선을 전후하여 새천년민주당의 운명을 놓고 '50년 전통의 야당'이라는 가당치도 않은 수사가 분분했던 것과 동전의 양면[35]'이라는 것이다.
장정일은 또, 2004년 4.15 총선을 전후하여 새천년민주당의 쇠멸하는 진로를 놓고 '50년 역사의 전통 야당'을 지켜 달라고 읍소하는 민주당 지지자들이 꽤 있다. 하지만 새천년 민주당의 50년 전통 운운은 민주노동당의 50년 만의 진보정당 의회 진출이라는 환희에 찬 구호와 달리 사기성이 짙은 것이다.[34]'라고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새천년민주당의 기원을 1990년 1월 22일에 행해진 김영삼의 3당합당에서부터 찾지 않고 한민당, 민국당, 신한당으로 이어지는 계보에서 찾고자 한다면 안티조선 논객을 자청했던 조선일보 기자 이한우 등의 비아냥에 직면할 수 밖에 없다[34]'고 지적한다.

역대 총선 결과[편집]

실시년도선거지역구비례대표정원
당선자 수당선비율당선자 수득표율당선자 수당선비율
1948년1대23/200
11.5%
23/200
11.5%

함께 읽기[편집]

각주[편집]

  1. 이동 한배호, 《한국현대정치론》 (오름, 2000) 337페이지
  2. 이동 G-2 Periodic 1945. 9. 12 보고서
  3. ↑ 이동:   조병옥, 《나의 회고록》 (도서출판 해동, 1986) 142페이지
  4. 이동 김약수나 유진희등 사회민주주의 성향의 일부 진보적 정치인사들이 한민당에 입당했는데, 이들은 주로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노선에 반발하여 한민당에 입당한 경우다. 이들은 한민당의 정치노선에 반발하여 이듬해 1946년 탈당하고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하거나 김규식계열 정치노선과 같이하게 된다. 한민당 핵심인사들은 송진우,김성수,윤치영,조병옥,장덕수,유억겸등이었다.
  5. 이동 1945년 10월, 우파 단체이자 잡지사인 <선구>회라는 단체에서 해방정국 주요정치인들 여론조사를 실시한적이 있었는데, 1위가 여운형, 2위가 이승만, 3위가 김구, 4위가 박헌영, 5위가 이관술 순이었다. 한민당계열 인사들은 단 한명도 뽑히지 않았었다.
  6. 이동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1권 80~83쪽
  7. 이동 조병옥, 《나의 회고록》 (도서출판 해동, 1986) 48페이지
  8. 이동 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 105페이지
  9. ↑ 이동:  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 110페이지
  10. ↑ 이동:  일월총서 71 한국전쟁의 기원(브루스 커밍스, 김자동옮김, 최옥자펴냄, 일월서각) 2001년판 286
  11. ↑ 이동:  고하 송진우 선생전 69, 대한민국사 I 713~714
  12. 이동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해방후 민족국가 건설운동과 통일전선》 (역사비평사, 1991) 310쪽
  13. 이동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 사상사, 2004) 152페이지
  14. 이동 브루스커밍스《한국전쟁의 기원》(강준만, 인물과 사상사, 2004) 287~288페이지
  15. 이동 법조 50년 야사 - 해방공간의 요인암살사건
  16. ↑ 이동:  일월총서 71 한국전쟁의 기원(브루스 커밍스, 김자동옮김, 최옥자펴냄, 일월서각) 2001년판 287
  17. 이동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 사상사, 2004) 152~153페이지
  18. 이동 브루스커밍스《한국전쟁의 기원》(강준만, 인물과 사상사, 2004) 287페이지
  19. 이동 김학준 《고하 송진우 평전:민족민주주의 언론인․정치가의 생애》(김학준, 동아일보사, 1990) 357페이지
  20. 이동 백범어록(김구, 도진순 엮고 보탬, 돌베게, 2007.11)의 67페이지
  21. 이동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해방후 민족국가 건설운동과 통일전선》 (역사비평사, 1991) 535
  22. ↑ 이동:  나영균, 일제시대 우리 가족은 (황소자리, 2004) 224페이지
  23. ↑ 이동: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66쪽.
  24. 이동 박태균, 《현대사를 베고 쓰러진 거인들: 해방정국과 4인의 요인 암살, 배경과 진상》(지성사, 1994) 123~124쪽.
  25. 이동 서중석, 《한국현대사》(웅진지식하우스, 2006) 57쪽
  26. 이동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43~44쪽
  27. 이동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31~32쪽.
  28. ↑ 이동:   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 108페이지
  29. ↑ 이동:    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 109페이지
  30. ↑ 이동:   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 107페이지
  31. 이동 조병옥, 《나의 회고록》 (도서출판 해동, 1986) 181페이지
  32. ↑ 이동:  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 102페이지
  33. 이동 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 103페이지
  34. ↑ 이동:   인물과사상사, 《인물과 사상 2004년 6월호》 (인물과 사상사, 2004) 83페이지
  35. 이동 인물과사상사, 《인물과 사상 2004년 6월호》 (인물과 사상사, 2004) 74페이지

참고 자료[편집]

  • 한국민주당 선전부, 《한국민주당소사》 (한국민주당, 1948)
  • 박태균, 《한국전쟁》 (책과함께, 2005년) 55, 56쪽.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 편 1, 2》(인물과사상사, 2006)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 편 2》(인물과사상사, 2006)
  • 이영훈, 《파벌로 보는 한국야당사》 (도서출판 에디터, 2000)
  • 이기택, 《한국야당사》 (백산서당, 1987)
  • 심지연, 《한국민주당연구 1》(도서출판 풀빛, 1982)
  • 역사문제연구소, 《한국정치의 지배이데올로기와 대항이데올로기》 (역사비평사, 1994)
  • 한배호, 《한국현대정치론》 (오름, 2000)

외부 링크[편집]

Martin Luther King's critique of capitalism is more relevant than ever

Martin Luther King's critique of capitalism is more relevant than ever
David Ragland
April 4, 2018

As we remember Dr. Martin Luther King Jr.’s life and assassination, 50 years ago today, there is much to reflect upon considering the current events, ranging from increased militarism from this administration to gun violence that includes police violence, mass shootings and the protests that have responded and pushed for deep freedom and liberation.

Since the Ferguson uprising, the question of who is violent — and who has the right to wield it — has been on the lips of many officials and police, who often tell protesters they should be more like those from the civil rights era. Yet, as we remember King’s murder, too often we tone down the radical, progressive, and at times depressed man at the heart of a movement that transformed the nation, making him into to a passive angelic figure. The memory of his life, like our own memories — unless meticulously recorded — are fragmentary.

We sacrifice him all over again by turning him over to the conservative, religious and ideological interests invested in watering down his magnificent life. King offered a moral challenge and call to transform American values that instrumentalize humans, and most often black, brown and non-white lives.

King’s dynamic complexity was rooted in his understanding of peace as a condition that necessarily includes justice. In his “Letter from a Birmingham Jail,” which was addressed to the faith leaders who could not understand his forceful approach, King wrote that peace was not just the “the absence of tension” but also “the presence of justice.” The inauthentic claims of concerns with the methods of the emerging black freedom movement are reflected among the detractors of most social movements, Ferguson and Parkland included.

Most of those in power who critique the methods of change agents often do so because change is not in their economic interests. King’s message challenged the moral heart of the American system by highlighting the three-pronged evils of of racism, militarism and materialism. These are interconnected evils that he saw as constituting the very nature of this society’s ills.

It was not enough to name the United States government as “the greatest purveyor of violence in the world today,” but to challenge this country in the urgent task of social transformation that might see our society shift from its rampant materialism to a community focused on human dignity. Such a morality is as the center of an instrumental view of people as things to be used.

In his 1958 essay “Pilgrimage to Nonviolence,” King wrote about the “danger of the profit motive as the sole basis of an economic system” and said, “capitalism is always in danger of inspiring men to be more concerned about making a living than making a life. We are prone to judge success by the index of our salaries or the size of our automobiles, rather than by the quality of our service and relationship to humanity.”

In a speech to staff in 1966, King explained: “There must be a better distribution of wealth.” We get a sense of the threat he posed when we stop to realize that just two years prior to his assassination he dared to say that “America must move toward a democratic socialism.”

Scarcity underlies how Western economic systems interconnect with war and racism. What if abundance was the guiding principle of our values and policy? Since the people in communities like the one I grew up in on the northside of St. Louis — a few miles away from Ferguson — are exploited through crack-era policing and housing policies that reinforce racist worldviews, we are often viewed from a deficit perspective. This perspective understands the world as a place to be policed and fixed as opposed to one filled with people who can deal with their own conflicts if supported with resources they actually need.

King recognized that the United States’ violent approach was not limited to the wars it wages, but the violence of the colonial mentality of occupation and racism in communities of color, which includes economic injustice. We see this in the Center for Investigative Journalism’s recent report on mortgages denied to blacks and Latinos, which examined over 31 million mortgage records in 61 metro areas. It points out how banks under Obama, and now Trump, used the Fair Housing Act to drive gentrification. What should have been a federally-mandated program to help black people buy homes is now being used by most banks — including Chase, Santander and Wells Fargo — to provide loans to whites who in many cases have worse credit and very little cash to put down.

A different report by ProPublica — entitled the “Color of Debt” — describes the likelihood of bill collectors to go after black people as opposed to similarly situated whites and the focus of law enforcement on black communities, instead of white communities that have more drug traffic and crime.

With the public currently deeply engaged in addressing mass school shootings, we have to remember how the response to Columbine was the implementation of “zero tolerance” policies, which disproportionately impacted urban schools that black and Latino students were likely to attend, even though these demographics were far less likely to experience that kind of violence. Instead, those policies contribute to the “school-to-prison pipeline,” which has resulted in a higher proportion of black students being suspended and expelled, increasing those students’ chances of incarceration. Black students often face harsher discipline than their white counterparts. Much of that has to do with teacher bias toward black and Latino students.

Studies that demonstrate how little progress African Americans have made — in terms of home ownership, employment and the increase of black incarceration — do little to change the mind of many. Rather than attributing this lack of progress to racial discrimination, a disturbing percentage of white people believe blacks are less intelligent and more criminal, sadly reinforcing a sense of moral superiority that justifies awarding mortgages and employment opportunities to less qualified whites. This should make white people question the very notion of fairness and the sense that they worked hard to get where they are and what they have.

Derrick Bell, Harvard Law professor and founder of critical race theory, critiqued the civil rights movement on the grounds of interest convergence, which suggests that legislation of that era only passed because it aligned with the interests of white elite liberals who were still unwilling to change the economic order.

But the narrow view of King misses how he connected the dots between the triplets of evil, with racist ideologies allowing the lynchings of black folk while encouraging their military service for a society using similar bias to justify murder in the Global South through war or economic policy. King expanded on his evolving perspective clearly in his final book, “Where Do We Go from Here: Chaos or Community?”

“The Constitution assured the right to vote, but there is no such assurance of the right to adequate housing, or the right to an adequate income,” he wrote. “And yet in a nation which has a gross national product of $750 billion a year, it is morally right to insist that every person have a decent house, an adequate education and enough money to provide basic necessities for one’s family.”

Part of what we fought against in Ferguson was the violence of poverty, its intersection with militarism, and the plain fact that economically-challenged folks make easier targets for the police. I remember standing outside of the courts in New York City waiting on protesters to come out and having a conversation with a clerk who said that it is in the interest of police to arrest protesters and impoverished blacks and Latinos because, “from my perspective, this keeps us in business.”

When the underlying economic model is one of scarcity, there is an expectation of unemployment and poverty, which reinforces the political use of people as instruments to maintain power. The assumption of scarcity makes it easier for us to be indifferent to poverty and violence against economically-challenged people. We are beyond past due for the revolution of values that King called for, so that we cherish “people, not things.”

What if we had a model of abundance?

This movement for black lives and liberation seeks to transform the very nature of how we deal with each other and the way we see each other. We have a choice in how we see the world around us. Can we envision a society that doesn’t profit from the human misery of war and violence, or economic and environmental degradation? Can we envision a new way of relating and (re)structuring society and the way it works?

Instead of spurring economic growth by building prisons, we should build more schools and educate those who commit crimes, because most crime is economic, not racial or moral. We must be creative and grow economically without profiting or allowing human misery and causing oppression of the human family in the Global South. Even our social movements must call people in to decolonize their lives to reduce the suffering of others. A philosophy of abundance — which is how King understood nonviolence — is not only about not using violence, but also about the possibility for creative ways to transform ourselves and our society.



This story was made possible by our members. Become one today.

Dr. David Ragland is co-director of The Truth Telling Project of Ferguson, a national council member of the Fellowship of Reconciliation, and visiting professor at Pacifica Graduate Institu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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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자아 아닌 진짜 자기 찾기


홍성남 2018. 04. 10
조회수 282 추천수 0



사람들은 모두 자기의 인생을 살아갑니다
 때론 행복해하고 때로는 불행하다고 하면서

 그런데 정작 자기의 인생을 자기가 아닌 다른사람이 만들어준 것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부모가 바라는 인생 혹은 부모가 강요한 인생 부모의 뜻을 따라 사는 인생
  마치 허수아비처럼 부모의 칭찬에 목을 매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심리치료에서는 거짓자아의 인생이라고 합니다

 MAY SARTON 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 이제 내가 되었네 여러해 여러곳을 돌아다니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네
  나는 이리저리 흔들리고 녹아없어져 다른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네”

  어떤 영성가는 이런말을 하기도 햇습니다

 “ 사람이 본연의 자기모습으로 돌아가는데 얼마나 오랜시간이 걸리는가?
  그 과정에서 자기것이 아닌 남의 얼굴을 가면처럼쓰는일이 또 얼마나 많은가
  내면 깊은곳의 정체성을 발견하기 까지 우리의 에고는 얼마나 많이 녹아내리며 흔들림을 겪어야 하는가?

 사람은 누구나 천부의 재능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났다
 그래놓고는 인생의 절반을 그 재능을 내버리거나 다른사람들이 말에 미혹되어 잊어버리고 산다
 혹시라도 눈을 뜨고 깨달아 잃어버린것을 갖게 되면
 나머지 인생은 원래 갖고있던 선물을 되찾기 위해 애쓴다 ”

 참으로 어려운것이 인생입니다
 돈을 많이 벌고 사회적지위를 얻고 성공한 인생을 만들은것 같은데도
 마음이 허전한것은 그 삶이 자기삶이 아니라
 다른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삶일때 그런것이지요

 그래서 인생의 은총중에 가장 큰것은
 내 인생길을 알려주는내가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멘토라고 합니다

 좋은 멘토를 만나기 위해 기도하고 기다리시길 바랍니다
 저의 작은 이 상담카페가 길을 잃고 헤메는 외로운 영혼들에게
 작은 등대가 되기를 희망하면서 글을 올립니다

 저역시 길을 잃고 어두움속을 헤매다가 멘토를 만나
 비로서 나이 사십중반부터 나를 찾는 작업을 하였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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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남가톨릭영성심리상담소장. 저 높이 계신, 두렵고 경외스런 하느님을 우리 곁으로 끌어내린 사제다. 하느님에게 화내도 괜찮다면서 속풀이를 권장한다. <풀어야 산다>, <화나면 화내고 힘들 땐 쉬어>, <챙기고 사세요> 등이 속풀이 처방전을 발간했다.이메일 : doban87@catholi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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