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4/24

무교회신앙 자료실 | [이덕휴목사와의 대화]개성과 달란트를 살리는 신앙, 무교회신앙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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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휴목사와의 대화]개성과 달란트를 살리는 신앙, 무교회신앙|▶[무교회자료]
박상익|조회 685|추천 0|2005.06.14. 23:18http://cafe.daum.net/nonchurch/Tikv/88

[이덕휴 목사와의 대화]개성과 달란트를 살리는 신앙, 무교회신앙[20020611]



이덕휴 목사님과의 대화 내용입니다.




교수님 다시 한 번 더 감사드립니다.



주일 예배 후에(3일전) 아무리 생각하여도 저의 좁은 소견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많은 부분들이 선생님의 홈을 또 두드리게 하였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신앙은 끊임없는 질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이 역사의 매 순간이라고 할때, 우리는 지금 역사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E. H 카는 말하기를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고 간명하게 말하였습니다. 다시 말하여 현재사회와 과거사회와의 끊임없는 대화이자 성찰입니다.

저는 지금 역사를 쓰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 무교회주의라는 말과 현재의 무교회주의라는 말에 대하여 지금 대화를 시도하고 있는 중입니다. 역사는 당시 있었던 사실에 대한 하나의 상황이지만, 지금 이 순간의 역사, 또는 시간(카이로스)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신앙)공동체 또는 회중 그리고 에클레시아로 표현되는 오늘날의 교회라는 말을 예수 그리스도는 성서를 통해서 겨우 두 구절에서 세번(마 16:18, 18:17) 말씀하셨습니다(이후 사도들을 통하여 신약성서에서는 115회 나온다). 성서의 표현이 모두 그렇듯이, " ~을 하면 ~한다", "~을 하라, 그러면 ~한다"라는 권고 내지는 명령어로만 이루어졌지 그 말씀에 대한 구체적 언급, 즉 말씀(교회)에 대한 본질이나 구성, 특성, 그리고 표상 등에 대해서 일러주지는 않습니다.

신약성서에서는 "교회가 무엇이냐?"에 대해서 다양한 용법을 사용하는데 교회의 본질을 가장 극명하게 표현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이 용어는 굳이 교회의 기구나 건물이 아닌 말씀으로 부름 받은 자들의 신앙공동체임은 물론입니다. 특히 에밀 브룬너를 위시한 칼 바르트, 한스 큉 등 당시 자유주의 신학을 표방하는 사람들(이후 칼 바르트는 여기서 탈퇴하였음)은 보편적으로 교회를 신앙공동체로 이해하는 한편, 제도적인 기구나 외형적인 건물로 이해하던 교회관에 대한 신학적인 무지를 제거하려고 노력하였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이해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공간적 위치나 소속적인 위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하여 저는 분명히 이해를 같이 합니다. 100%찬동한다는 말씀입니다.

분명히 교회의 원형은 제도화된 교회의 기구가 아니고 또한 소속단체나 교회건물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몸"이라는 사실을 저도 확신합니다. 그 몸 되신 말씀의 기록이자 성령님의 가시적 표현인 성서, 즉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인 케뤼그마(kerygma)만이 유일하신 교회라는 것이 교회론의 본질이라고 저도 믿는 바입니다.

신학적으로 교회란 무엇이냐를 논의한 것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명제, 즉 보이지 않는 교회(invisible church; 보이지 않는 교회는 도나투스주의자들의 아프리카교회를 칭함)를 정면으로 대항하여 보이는 교회(visibl church)와의 구별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교회는 하나님만이 아신다. 그러나 이 교회는 오직 하나님만이 알고 계신 선택된 성도만을 포함시키는 교회이지만, 선택받지 못한 죄인들까지 포함된 보이는 교회와 섞여 있다"라는 말을 우리는 눈여겨 보아야 할 것입니다. 바로 보이지 않는 교회는 보이지 않는 보편적(catholic)교회 속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종교개혁자들에 와서도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는 계속되어 논의되고 있습니다.
쟝 칼뱅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그것을 받아들여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는 각각 두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교회를 말하는 두 방식이라고 하였고, 이어서 루터는 가시적인 교회를 가촉적이고 확인할 수 있는 교회로 이해하고 불가시적 교회는 붙잡을 수 없는 신비로운 교회로 이해하였습니다. 이어서 불가시적인 교회는 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교회로 보면서 가시적 교회의 타당성을 검증하는 비판적 원리에 사용된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두 가지 방식 모두가 믿음, 소망, 사랑 안에서 한 가지 방식으로 살아가는 공동체일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출애굽 이후 교회는 분명 광야교회를 말하였으며, 다윗은 솔로몬을 통하여 출애굽 이후 480년만에 성전을 건축하였습니다. 이후 유대교에서는 "시나고게"라고 하는 회당(congregation)의 건물(cf. 약 2:2)을 분명하게 가리켰고 , 초대교회 이후 사도들은 예루살렘 모교회(또는 원교회)나 안티옥교회에서 사도회의를 하였으며 그 조직 내에서 각급 교회(고린도 교회, 데살로니카, 에베소를 위시한 각 지교회)등에 서신 등을 보내고 회의의 내용 등을 전달한 사실을 성서를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위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현대에 와서 교회론에 대한 가장 신랄한 비판은 브룬너와 바르트의 경우를 찾을 수 있습니다. 특히, 사회정의론자 에밀 브룬너의 경우에는 개신교에 있어서 교회론은 가장 해결되지 않는 문제라고 비판하면서, 교회를 인격 공동체로 이해하지 않고 제도화된 비인격체로 이해되는 것에 대하여 에클레시아와 1611년 이후 킹 제임스 버젼의 ‘church’(교회)라는 말이 오늘날까지 교회론의 명시적 의미를 불분명하게 한다고 비난하였다. 김교신은 이러한 이유로 성서는 꼭 원어로 보아야 한다고 일갈했겠거니 생각합니다. 저도 이러한 문제가 매번 부딪히기에 성서를 읽을 때 히브리원서와 헬라어원서를 곁에 두고 개역성서 또는 KJV 또는 NIRV를 읽고 있습니다.

역사적 상황으로 말미암아 성서의 번역은 때로는 죽음마저도(1525년에 번역된 최초의 영역본의 역자 틴데일은 이 일로 인하여 사형됨) 불러왔다. 교회의 본질은 오직 주님의 "머리되시고 몸"이라는 사실, 그리고 신앙 공동체가 교회의 원형이라는 의미가 옳다고 일단 상정합니다.

이제 긴 사설을 접겠습니다. 제가 두 번 씩이나 선생님께 귀한 시간을 빼앗은 것을 다시 한 번 더 머리 숙여 사의를 표합니다.
선생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교육철학(혹은 교육관) 내지는 신념을 여쭙고 싶습니다. 교회의 목사는 교회라는 이름의 건물과 제도 내에서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는 또는 구원받을 수 있도록 안내하고 지도하는 선생(예수님 자신도 때로는 선생으로 호칭되었음)이라고 잠정적으로 정의한다면, 학교 교육자(선생님 또는 교수님)는 학교라는 건물과 제도권에서 가르치는 학문의 지도자 내지는 스승이십니다.

학교라는 제도가 학문이라는 유무형의 지식만을 전달하는 기구입니까 ? 아니면 학교라는 제도에서 가르쳐지는 유무형의 집단 활동을 통한 교육제도로서 올바른 시민의식을 가르치고 삶의 현장에서 요구되는 지식만을 가르칩니까? 꼭 학교라는 건물과 제도가 있어야만 지식과 인격 그리고 집단 활동에 필요한 제반 질서의식을 전달할 수 있습니까?

20세기 프랑스 최고의 지성이라고 말하는 미셀 푸코는 그의 "감시와 처벌"(박홍규 역)에서 감옥을 정점으로 하여 감시와 처벌의 기구를 가정, 학교, 군대, 병원 등을 꼽으면서 사실상 근대사회가 감시와 처벌의 사회라고 이해하였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의 학교교육의 본질적 또는 목적적 사실행위는 무엇인가를 묻고 싶습니다. 간단한 예로 사법시험에 합격한 똑같은 법관(검사 또는 변호사 포함)일지라도 독학으로 골방과 사시학원만을 전전하다가 등용된 사람과 정규 법과대학을 거쳐 등용된 사람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아무런 차이가 없다면 학교교육 내지 제도는 이미 실패한 것입니다.

그리고 학교의 제도적 모순은 없는지? 부정부패는 없는지? 모든 시행은 올바른지.. 등등을 제도권 밖에서 즉 광야에서 혁명투사처럼 울부짖어야 합니까? 아니면 제도권 내에서 살신하면서 그 비뚤어진 시행착오를 바로 잡아야 옳습니까? 아니면 학교제도가 푸코의 표현처럼 감시와 처벌의 상징이기에 아예 없애버려야 옳습니까? 아니면 매번 지적되는 학교행정과 제도의 불만족을 해소하기 위하여 학교무용론을 주장하시겠습니까?

쟈크 엘룰 같은 지성이 아무리 기독교사회의 모순을 지적한다고(그의 저서, "뒤틀려진 기독교" , " 하나님이냐 돈이냐?" 대장간 역)해서 기독교 사회 내지는 교회가 올바로 선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날 잘못되고 있는 교회제도 내지는 교회론은 신학자 또는 신앙제도권 내에서 멸사봉공의 자세로 임하여 자기를 완전히 죽였을 때 바로세울 수 있습니다. 그것을 세우시는 공의로운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의하여.

이제 제 소신을 확실히 말씀 올리고 맺겠습니다. 도둑놈을 잡으려면 도둑놈 소굴로 들어가야 합니다.
저도 우리나라(다른 나라의 사정도 비슷하겠지만)의 교회와 교회제도에 대하여 진저리를 냈습니다. 대학원 입학하던 날부터 지금까지 단 하루도 버리지 못한 경멸과 모멸감입니다. 특히 신학교와 재단, 교단, 교회 그리고 교회내의 추잡한 모습들을 보면서 더러워서 나 목사 안한다, 라고 생각한 적도 많이 있습니다. 입만 벌리면 헌금, 건축, 선교헌금, 돈 돈 돈, 돈 노래만 부르는 목회자들을 보면서 나는 오늘도 회사에 출근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천막 짓기로 생업을 하였듯이.

육군대장을 정면에서 맞대항 하려면, 깡통계급장을 달고라도 같은 대장계급장을 달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끝으로 제가 좋아하는 성경구절하나 드립니다.

"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로새서 1장 24절). 이 구절은 제 학위논문 맨 마지막에 올린 글입니다.

그럼 주님의 평화와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덕휴 목사님, 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교회론에 대해서는 결국 각자의 믿음에 맡겨야 할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다만 법률가 또는 육군 대장의 예를 들면서 교회의 필요성을 역설하신 점에 대해서는, 목사님이 선택하신 길을 100% 인정하되, 제가 선택한 길도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음을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먼저,
법과대학 출신만이 법관이 되어야 한다는 데 대해서 저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사법고시 개혁을 촉구하는 법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이공대, 의대 출신 같은, 법학과 전혀 상관없는 전공자들도 법조계에 필요하다고 하더군요.
법의학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특히 요즘처럼 사이버 범죄가 기승을 부리는 새로운 시대 환경에서는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법관이 있어야만 제대로 수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특허 관련 업무도 법과대학 출신은 다룰 수가 없습니다. 공학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어야 하지요.


그리고 제도권 교육을 받은 사람만이 그 분야에서 우수한 능력을 갖출 수 있다는 말씀에 대해서도, 그건 너무 경직된 시각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습니다. 그러고 보니 역대 미국 대통령 중 가장 존경받는 링컨도 독학으로 변호사 자격증을 땄더군요.

군대의 예를 드셨지만,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임진왜란 때 조선의 정규군인 관군이 임금 모시고 백성들을 버린 채 도망다니기 바빴을 때, 정작 환난에 처한 불쌍한 백성들을 돌보고 왜군과 맞서 싸운 것은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들이었습니다.

일전에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봤는데, 히틀러 시대 독일 카톨릭 주교들이 주교 복장을 입은 채 손을 앞으로 내밀며 "하일 히틀러!"하고 구호를 외치더군요. 한편의 코미디 같았습니다.
실례지만 일제 시대 한국 교회의 모습이 바로 그것 아니었습니까?

결국 이 모든 것은 신앙의 다양성 문제로 집약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서양사 전공하는 교수들을 학회 등에서 꽤 많이 알고 지냅니다. (저도 이 바닥 물을 30년 가량 먹었거든요.)


그중에는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도 꽤 있지요.
그런데 그분들 중 자신의 신앙을 전공과 통합시키려고 애쓰는 학자는 별로 본적이 없습니다. 실로 유감천만입니다.


다들 박사학위까지 받은 서양사학자이면서도 그저 일요일 교회 나가 예배보고 봉사하는 것만이 신앙 생활의 전부인줄로 알고 있습니다.
봉사, 봉사 하지만, 인문 계통의 학자에게 있어서, 자신의 전공 학문을 통해 신앙의 진리를 밝히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보다 더 큰 봉사가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이 모두가 한국 교회가 신자들에게 주입한 획일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랜 군사독재 시절을 겪으면서 다들 사고가 획일화 된 탓도 있겠지요.)
신앙이 좀 좋다 싶으면,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모두 신학교 가서 목회하는 것으로 결말을 지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신학 공부를 하고 목사가 되었으니, 그런 분들이 평신도 인문학자들에게 무슨 모범을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
그저 교회 와서 청소하고, 밥해주고,... 몸으로 때우는 봉사하라는 것이 전부 아닌지요?
저는 이런 신앙을 일컬어 "따로 국밥 신앙"이라고 규정짓고, 이에 대해 글도 한편 써서 홈페이지에 올린 바 있습니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 영문학 교수로서 밀턴 연구자이기도 하고 "20세기 복음주의 기독교의 아우구스티누스"라고 평가 받는 C. S. 루이스(Lewis)가 이렇게 말했더군요.

"모든 자를 무한히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을 각기 다르게 사랑하실 생각을 갖지 않으셨다면, 왜 우리를 개별적인 존재로 창조하셨겠습니까?"

우리 모두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개별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달란트의 비유"를 통해 너무 잘 설명해주셨지요.
무교회는 각자의 개별성과 달란트를 최대한 존중합니다.
그것은 제가 신앙의 은사이신 노평구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놓칠 수 없는 소중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 한 가지 점만으로도 무교회의 존립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한 가지 알려드릴 것이 있습니다. 지금 출판을 계획하고 있는 책이 있습니다.
무교회주의자들 중 학계에 있는 분들이 쓴 신앙적 관점에서의 학문 연구 성과를 책으로 엮어 내려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루터, 파스칼, 키에르케고르, 셰익스피어, 로제티, 프랜시스 톰슨, 휘트먼, 칸트, 밀턴, 카프카... 등등, 전공학자들이 각자 신앙적 관점에서 연구한 결과를 모으려는 것입니다.
아마 세 권 정도로 책이 나오게 될 것 같습니다. (저도 밀턴에 관한 글을 올릴 계획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무교회가 무슨 학자들만의 집단인 것처럼 여겨질까 우려되는군요.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김교신 선생의 신앙 동지였던 송두용 선생 같은 분은 일제 때 동경 유학생 출신이면서도 서울 오류동에서 거지, 문둥이 등을 집에서 재우고 먹이고 입히고 하시며 평생 그야말로 "봉사"의 삶을 사셨습니다.
60년대라고 기억합니다만, 그분 생존시 서울역 화장실 청소를 혼자서 도맡아 반년 이상 하신 적도 있습니다.
(신문엔 단 한 줄도 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은 아무도 몰라도 하나님만은 아시겠지요.)

아, 그리고 일본 분이긴 하지만 무교회주의자 중 교회를 만든 분도 있습니다.
구로사키(黑崎幸吉) 선생은 우치무라의 제자로서 교회(건물 있는 가시적 교회)를 설립하셨습니다.
그분이 쓴 <구로사키 신구약 성서 주해서>는 70년대에 우리말로 번역되어 한국 목사님들 대부분이 그분의 이름 정도는 알 것입니다.
물론 그분이 만든 교회는 교파 교회가 아닌, 독립 교회였지요.

말씀을 드리자면 끝이 없습니다.
지구상에는 수십억의 인류가 살고 있고, 역사 속에 살다가 죽어간 모든 인류를 합치면 그 숫자는 수백억이 될 것이라고 봅니다.
그 수백억의 인류 가운에 똑같은 인간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개성을 지닌 존귀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대로, 각자의 개성을 100% 발휘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을 드러내려는 신앙, 그것이 바로 무교회 신앙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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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만이 05.03.30. 13:07
'신앙이 좀 좋다 싶으면,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모두 신학교 가서 목회하는 것으로 결말을 지으려 하고 있'다는 주장에 동의합니다. 신학을 공부할 수는 있겠지만, 만일 그렇다면 목사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전공을 좀더 심화시키기 위해서 신학을 공부해야 할 것입니다. 각자 믿는 대로 살 수 밖에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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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kyoung 05.05.18. 14:27
"성령이 친히 가르치신다 "는 말씀이 각인 되어 있습니다. 내가 "마땅히 생각 할 만큼의 분량" 에 도달하면 반드시 다음 단계로 이끌어 주심을 체험하며 살고 있습니다. "각기 자기를 돌아 보며" 란 말씀 또한 마음에 새기며, 그 분을 범사에 인정하며, 늘 그렇게 삽니다 .좋은 글들 감사 합니다. 박교수님! 건필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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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와 개혁 05.06.15. 19:38
지식적 신앙이 많은 사람들과 복음의 화두가 많은사람들과 차이점은 뭐겠습니까? 한국교회의 문제는 신학교가 잘못 가르침 목사들의 거짓 말씀으로 병들어가고 는데 아무도 이를 개혁하려 하지 않습니다. 제도권에서 신학하기보다 살아가는 현장에서 신학하는것이 생생한 신학이 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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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익 05.06.15. 23:01
그렇죠, 내가 서있는 이 땅이 거룩한 곳이죠. 살아가는 현장에서 위에 계신 분의 뜻을 헤아리는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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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정 08.06.01. 00:59
작은 교회지만 개인의 개별성을 인정하며 서로의 섬김을돕고 서로 세워가는 목회자와 성도들을 만난 저는 복이 참 많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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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익 08.06.01. 19:29
나도 고향이 청주인데...청주 산다고 하니 반가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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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님달님 09.11.08. 01:16
"자신의 전공 학문을 통해 신앙의 진리를 밝히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보다 더 큰 봉사가 어디 있겠는가?" 교수님, 저도 동감합니다. 각자 자기가 전공한 학문을 자기 신앙으로 승화시켜서 좀더 건강한 삶을 개척해 가는 것이 오늘날 예수의 살을 치열하게 사는 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것이 무교회적 신앙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교수님, 늘 건강하시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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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익 09.11.08. 15:46
사업가는 사업가대로, 농부는 농부대로, 정치가는 정치가대로...서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드러내는 신앙이라야만 다양성이 확보될 수 있겠지요. 하지만 한국의 경우, 온갖 부정부패를 일삼는 기업가, 정치인이면서 일요일 하루 교회 가서 헌금 바치고 봉사 하면 그걸로 신앙 끝! 이더군요. 그 대표적 사례를 현 청와대 주인에게서 볼 수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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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선정애o 10.07.06. 15:43
이 글을 세 번째 읽었는데 이전에 두 번 읽었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 드는군요. 두 분 모두 훌륭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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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익 10.07.06. 16:08
동물로 비유를 하자면 무교회는 황야의 이리 같죠. 교회는 주인집에 목줄 매고 있는 개와도 같고...체질상 속박을 싫어하는지라 개줄은 죽어도 못매겠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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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선정애o 10.07.06. 16:51
졸지에 제가.....개꼴 됐네여.....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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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익 10.07.06. 18:13
그래도 이리보단 개팔자가 훨 낫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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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송화 11.07.06. 23:00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신앙 공동체...
그리고 송두용 선생님에 대한 글....그 분의 이야기는
첨 들어봅니다. 우리도 몰라도 주님은 아시겠지요.
그 분이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려 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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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익 11.07.07. 11:27
우주교회가 진짜 교회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