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4/27

알라딘: 착한 인류 - 도덕은 진화의 산물인가



알라딘: 착한 인류 - 도덕은 진화의 산물인가




[eBook] 착한 인류 - 도덕은 진화의 산물인가
프란스 드 발 (지은이),오준호 (옮긴이)미지북스2014-07-10 원제 : The Bonobo and the Athe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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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공 파일 : ePub(40.47 MB)
TTS 여부 : 지원

종이책 페이지수 388쪽,

책소개
세계적 영장류 학자의 눈으로 밝힌 인간 도덕성의 생물학적 기원. 인간의 도덕성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은 인간의 본성이 본래 선하지 않으며, 자연은 약육강식의 야만적인 투쟁의 장이라고 믿어왔다. 거기서 도덕은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우리의 본성을 억누르는 인위적인 문명의 고안물이었다. 종교인들은 도덕을 신에게서 온 명령이라고 보았고, 철학자들은 탁월한 이성의 규칙에서 도출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두 주장은 상반되는 듯 보이지만 도덕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왔다는 점에서 같다.

네덜란드 출신의 세계적 영장류학자 프란스 드 발은 여기에 과감하게 도전장을 내었다. 도덕은 종교나 문명이 출현하기 훨씬 전부터 인류의 오랜 진화 과정 속에 확립되었다는 것이다. 도덕은 신의 명령이나 이성의 초월적 원리가 아니라, 인간과 동물이 함께 공유하는 감정에 뿌리박고 있으며, 아래에서부터 위로 올라왔다.


목차


1장 세속적인 쾌락
2장 왜 착한 행동을 하는가
3장 진화의 나무와 보노보
4장 신은 죽었는가 아니면 혼수상태인가?
5장 선한 원숭이 우화
6장 십계명은 너무 많다
7장 신의 간극
8장 도덕성은 아래에서 위로 왔다
후주
참고문헌
옮긴이의 말
찾아보기



책속에서



P. 26 여키스는 두 유인원 중 하나가 그가 아는 어떤 유인원보다 훨씬 섬세하고 공감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그리고 더 똑똑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여키스는 그 침팬지를 ‘천재 유인원’이라고 불렀고, 자신의 책 『너무나 인간적인Almost Human』에서 상당 부분을 이 침팬지에게 할애했다. 그는 자신이 살아 있는 보노보를 최초로 서구 사회에 소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접기
P. 35 우리는 합리주의적 반성 과정을 거쳐 차근차근 도덕성을 발전시킨 게 아니다. 도덕성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배경으로부터 강력한 압력을 받은 결과 형성된 것이다.
P. 52 침팬지들은 표범이 덤비는 상황에서도 서로를 구한다. 다람쥐는 소리로 다른 다람쥐들에게 위험을 경고한다. 코끼리는 쓰러진 동료를 일으켜 세우려고 애쓴다. 동물들은 왜 다른 동물을 돕는 행동을 할까? 이것은 자연의 법칙에 모순되는 게 아닌가?




저자 및 역자소개
프란스 드 발 (Frans de Waal)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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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영장류학자이자 대중 저술가로 폭넓은 명성을 얻고 있는 프란스 드 발은 1948년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네덜란드 위트레흐트대학교에서 동물 행동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영장류학계의 최고권위자 중 한 명이며, 2007년에는 <타임>이 선정한 “오늘날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이름을 올렸고, 2011년에는 <디스커버>의 “47인의 과학계의 위대한 지성”으로 선정되었다.
현재 미국 애틀랜타 에모리대학교 심리학과 C.H.캔들러 석좌교수이며, 미국에서 가장 유구한 역사와 큰 규모를 자랑하는 여키스 국립영장... 더보기


최근작 : <침팬지 폴리틱스>,<공감의 시대>,<동물의 생각에 관한 생각> … 총 60종 (모두보기)

오준호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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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국어국문과를 졸업했고 경상대 정치경제대학원에서 공부했다. 논픽션 작가로 활동하며 르포르타주와 인문 교양서를 넘나들며 다양한 책을 쓰고 독자를 만나고 있다. 권문석과 짧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었고 세상을 바꾸려는 꿈을 그와 같이 품었다. 문석이 실현하려고 노력한 기본소득에 대한 책 『기본소득이 세상을 바꾼다』를 썼다. 그밖에 『세월호를 기록하다』, 『노동자의 변호사들』, 『소크라테스처럼 읽어라』, 『반란의 세계사』 등을 썼다.


최근작 : <‘알바생’ 아니고 ‘알바노동자’입니다>,<기본소득이 세상을 바꾼다>,<2017 한국의 논점> … 총 27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신이 없는 세상을 말하기 전에
우리는 도덕적인 인간의 가능성을 확인해야 한다.

세계적 영장류 학자의 눈으로 밝힌 인간 도덕성의 생물학적 기원!
종교와 문명이 출현하기 전에 우리는 이미 도덕적인 존재로 출발했다

인간의 도덕성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은 인간의 본성이 본래 선하지 않으며, 자연은 약육강식의 야만적인 투쟁의 장이라고 믿어왔다. 거기서 도덕은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우리의 본성을 억누르는 인위적인 문명의 고안물이었다. 종교인들은 도덕을 신에게서 온 명령이라고 보았고, 철학자들은 탁월한 이성의 규칙에서 도출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두 주장은 상반되는 듯 보이지만 도덕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왔다는 점에서 같다. 네덜란드 출신의 세계적 영장류학자 프란스 드 발은 여기에 과감하게 도전장을 내었다. 도덕은 종교나 문명이 출현하기 훨씬 전부터 인류의 오랜 진화 과정 속에 확립되었다는 것이다. 도덕은 신의 명령이나 이성의 초월적 원리가 아니라, 인간과 동물이 함께 공유하는 감정에 뿌리박고 있으며, 아래에서부터 위로 올라왔다. 저자는 오랜 세월 영장류를 연구하면서 그들의 사회적 행동들을 근거로 밝혀낸 인간 도덕성의 생물학적 기원을 그의 새로운 저작 『착한 인류』에 오롯이 담아냈다.

동물들의 도덕성

동물들에게도 도덕성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놀라운 일일까? 그동안 도덕은 다른 동물과 명징하게 구별되는 인간만의 고유한 특징으로 알려져 왔다. 유전자에서부터 종의 차원에 이르기까지 생명체는 기본적으로 ‘이기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네덜란드 출신의 세계적인 영장류학자 프란스 드 발은 동물들도 남을 돕고, 공감 능력을 갖고 있으며, 공정함과 정의의 감각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동물들은 보상이 없어도 선행을 베푼다. 유인원들은 자기 몫의 일부를 잃을 수 있는데도 자발적으로 문을 열어 동료가 먹이에 접근하게 해준다. 관절염이 심한 늙은 암컷 침팬지를 무리의 다른 암컷들이 도와준다. 몸이 불편한 동료가 이동할 때 도와주고, 물을 떠다준다. 우울해 하는 동료를 안아주고 입 맞추고 위로한다. 포유류는 타자의 감정에 민감하고 그들의 필요에 반응한다.
동물들이 보상 없이 남을 도운 사례는 너무나 많다. 암컷 침팬지가 멀리서 비명을 지르며 물에 빠지는 소리를 듣자 평소 안면도 없던 수컷 침팬지가 두 개의 전기철망을 넘어가 물에 빠진 암컷을 구한 사례도 있다. 아프리카 아이보리코스트에서는 적어도 열 마리의 야생 침팬지 수컷이 어미 잃은 새끼를 입양하여 30년 이상을 데리고 살았다. 짧은꼬리원숭이 무리가 선천적으로 신체가 불편한 원숭이를 돌봐 주었고, 그 원숭이가 오래도록 살아 다섯 마리의 새끼를 낳아 기른 경우도 있다. 시카고대학교 연구의 실험에서는 쥐가 초콜릿 칩보다 갇힌 동료를 먼저 구출하였다. 침팬지들은 표범이 덤비는 상황에서도 서로를 구한다. 범고래가 귀신고래의 새끼를 공격하자 혹등고래가 나타나 귀신고래의 어미를 도와준 일도 있다. 다람쥐는 소리로 다른 다람쥐들에게 위험을 경고한다. 코끼리는 쓰러진 동료를 일으켜 세우려고 애쓴다. 동물들은 왜 다른 동물을 돕는 행동을 할까? 이것은 자연의 법칙에 모순되는 것이 아닌가?

인간의 사악한 본성과 ‘위’로부터 부과된 도덕

다윈이 진화론을 제시한 후 오랫동안 자연은 약육강식의 야만적인 투쟁이 벌어지는 검투장과 같은 곳으로 묘사되었다. 동물은 자기 생존을 위해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존재이며, 인간도 다를 바 없는 것으로 생각했다. 도덕성이란 우리의 이기적인 본성을 겨우 가려놓은 얇은 판뚜껑에 불과하다는 이른바 ‘판뚜겅 이론’(veneer theory)이 지난 30년간 인간에 대한 지배적인 견해로 자리잡았다. 오늘날에도 종교인들은 신이 없다면 인간은 도덕적으로 살 수 없는 존재라고 주장한다. 철학자들 역시 초월적인 이성의 원리에서 나온 도덕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인간 행위에 부과된다는 점에서 동일한 관점을 공유한다.
신이 없다면 우리는 도덕적으로 살 수 없을까? 우리 조상들은 종교가 없던 시절에는 사회 규범도 없이 살았던 걸까? 우리에게 타인을 배려하는 본성이 아예 없다면 그렇게 행동하라고 설득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드 발은 인간의 도덕성이 신이나 도덕 원리 같은 저 높은 곳에서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존재 자체에 닻을 내리고 있다고 말한다. 생긴 지 겨우 2천 년 정도 된 현대 종교가 나타나기도 훨씬 전에, 도덕성은 인류의 진화 과정에서 이미 출현했다. 우리는 합리주의적 반성 과정을 거쳐 차근차근 도덕성을 발전시킨 게 아니다. 도덕성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배경으로부터 강력한 압력을 받은 결과로 형성된 것이다.
도덕성의 뿌리는 이성이 아니라 감정에 있다. 포유류들의 공감 능력과 타자를 배려하는 능력에서 우리는 도덕의 기원을 발견할 수 있다. 대부분의 영장류 사회에서 공동체 내의 협약을 유지하기 위해 애쓴다는 사실을 관찰할 수 있다. 자연은 피투성이 싸움판이 아니며, 도덕성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인간적인 혁신이 아니다. 이제 도덕성은 우리의 존재 깊숙한 곳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주장이 대세가 되었고, ‘인간 본성은 원래 악하다’는 판뚜껑 이론은 심장마비가 걸린 것처럼 죽어 증발해버렸다.

도덕은 진화의 산물이다

언제나 자연은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들과 쾌락을 연관 짓는다. 인간은 먹어야 하기에 음식 냄새를 맡으면 침을 흘리고 식사를 즐거운 행위로 느낀다. 인간은 재생산을 해야 하기 때문에 섹스는 집착인 동시에 쾌락이 된다. 새끼를 기를 수 있도록 자연은 어미와 자식 사이에 무엇보다 강력한 애착을 주었다. 마찬가지로 남을 돕는 일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고 우리의 본성에 어긋나지 않는다. 먼 친척이거나 혈연이 아닐 경우에는 도움의 정도가 줄어들지만 희생의 본질은 똑같다. 이미 2세기에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에서 “남을 돕는 일처럼 본성에 일치하는 행동은 그 자체가 보상이다”라고 자신의 통찰을 기록했다.
원숭이와 유인원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권력을 추구하고 섹스를 즐기고, 안전과 애정을 원하며, 영토를 점령하고 신뢰와 협동을 소중히 여긴다. 우리에게 컴퓨터와 비행기가 있긴 하지만 우리의 정신구조에는 사회적 영장류의 정신구조가 남아있다. 침팬지 암컷들은 수컷이 싸움을 끝내면 서로 등을 돌린 수컷들을 끌어당겨 손에서 무기를 빼앗고 화해시킨다. 죽어가는 늙은 침팬지를 위해 젊은 암컷이 대팻밥으로 푹신한 쿠션을 만들어주고 몸을 뉘어주기도 한다. 유인원들도 타자의 관점에 설줄 안다. 문제를 겪고 있는 동료의 입장에서 상황을 볼 줄 안다. 유리에 부딪혀 기절한 새를 보노보가 구해주기도 하고, 침팬지가 야생의 삶에 미숙한 인간을 잡아당겨 독사를 피하게 한다.
남의 처지를 이해하고 공감하고 돕는 이러한 능력이 인간뿐만 아니라 유인원과 다른 포유동물에게도 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이러한 사실은 감정이 도덕의 발생적 근원이며 기초적 자원임을 알려준다. 독일의 심리학자 클라우스 셰레는 “감정은 특정한 시기에 유기체에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고려하여 투입과 산출을 제어하는 지능적인 인터페이스”라고 정의한 바 있다.

도덕은 아래에서부터 위로 왔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도덕은 무리 생활을 하는 영장류의 진화적 압력에서 나왔다. 그것은 공감 능력, 공정성에 대한 감각뿐만 아니라 개인보다 집단을 앞세우고 협력 사회를 추구하는 능력을 우리의 내면에 갖추어 온 과정이었다. 규율 잡힌 사회에는 대개 위계질서가 있기 마련이다. 누가 먼저 먹이를 먹고 누가 먼저 짝짓기를 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그 위계질서는 궁극적으로 폭력에 기반한다. 사회적 위계질서는 거대한 금지 시스템이다. 그리고 이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인간 도덕성을 진화시킨 배경이다. 인간의 도덕 역시 일종의 금지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긴 세월 동안 영장류, 유인원, 그리고 우리 인간은 충동을 통제하는 능력을 내면화해왔다. 우리와 가장 가까운 유인원 사회에서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원칙 같은 호의와 냉대의 사회적 경제를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그런 대차대조표를 만들어 기대와 의무를 발전시키고, 누군가 신뢰를 깨면 부정적으로 반응한다.
도덕성은 아래에서부터 위로 출현했다. 도덕법칙은 하늘에서부터 또는 탁월한 이성적 원칙으로부터 부여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스스로를 조직하는 방식에서 비롯되었다. 그리하여 도덕은 고대부터 몸에 뿌리 깊게 밴 가치들로부터 솟아났다. 그것의 근본에는 집단생활에서의 생존이라는 가치가 있다. 어딘가에 속하고, 함께 생활하고,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욕구는 우리가 의지하는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것을 촉구한다. 다른 사회적 영장류도 이 가치를 우리와 공유하며, 우리처럼 감정과 행동 사이에 여과장치를 갖고 있다. 그 덕분에 그들은 상호 동의할 수 있는 신사협정에 도달한다. 공정함과 정의의 감각은 오래된 능력으로 보아야 한다. 그것은 자원을 두고 경쟁하는 가운데 공동체의 화합을 유지해야 할 필요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라는 존재의 도덕성 가능성에 대해 보다 낙관적인 전망을 가지고 출발할 수 있다.

종교의 자리는 어디인가?

오늘날 우리는 사회에서 종교가 어디쯤 있어야 하는가를 놓고 논쟁한다. 최근 리처드 도킨스나 크리스토퍼 히친스와 같은 전투적인 무신론자들은 종교야말로 악의 근원이며 거짓과 미몽이라고 외친다. 그들은 인간이 과학적 지식을 확장하면서 수천 년 동안 부당하게 권력과 권위를 누려왔던 종교를 점점 사회 밖으로 밀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무신론자들은 말 그대로 종교와 싸운다. 우리는 과연 신이 없는 세상을 그려낼 수 있는가? 그 세상은 좋은 세상인가?
종교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드 발은 장구한 진화 과정에서 도덕의 발생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한편으로 종교를 인간 사회의 지평 속으로 집어넣어 그 역할이 정당하게 평가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도덕은 종교보다 훨씬 일찍 출현했지만, 종교는 인간의 선한 본성을 제도적으로 지원하면서 그것을 강화해주었다. 종교는 도덕의 기원이 아니지만, 나중에 들어온 후원자인 것이다. 우리는 거꾸로 종교의 기원에 대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선사 시대에는 종교가 필요하지 않았다. 영장류 무리처럼 작은 집단에서 서로가 서로를 잘 아는 상황에서는 당연히 규칙을 잘 따르고 남들과 원만하게 지내야 한다. 인격에 대한 평판을 관리해야 한다. 하지만 큰 사회를 이루자 얼굴 대 얼굴 메커니즘이 허물어지고 더 큰 집단을 관리하게 위해 신에 대한 요구가 나온 것이다. 캐나다 심리학자 에이라 노렌자얀이 말하듯 “인간을 도덕성으로 인도한 존재는 신이 아니다. 신은 우리가 스스로 옳다고 느끼는 길을 갈 때 우리를 돕도록 그 자리에 놓인 것이다.”
드 발은 과학자로서 무신론자로서 종교의 역할을 줄이자는 생각에 찬성한다. 그러나 그는 신무신론자들의 공격적인 행태에 대해, 종교에서 가치를 찾는 수많은 사람들을 모욕해서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한다. 우리가 종교를 천천히 부드럽게 없앨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더라도 종교의 유산에 대해 어느 정도까지는 감사해야 하고, 그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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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선한 본성을 찾아 진화의 세계로 나아가보는 책
다른 틀린 그리고 앞선 혹은 뒤떨어진의 경계를 허물고 보면
그들과 나와 경계가 너무나 희미해서 놀라게 된다
인간적 관점을 살짝 내려놓고
간소한 그러나 지극히 인간적이라고 느껴지는 도덕의 힘을 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가을물 2015-06-15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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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 발의 기존 책들과 조금 겹치는 부분들이 있고 지금 논란이 있는 부분들도 좀 있어서 아주 좋게 평가하긴 그렇네요. 드 발의 모든 생각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드 발의 전체적인 그림에는 저도 크게 동감합니다. 근데 대체 한국판 제목은 왜 무신론을 빼야만 했나요? 특별한 이유라도?
구루구루 2019-02-09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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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보고 뭉클... 세상은 더 좋아질 거라는 희망을 품게 된다. 인간이 그런 존재라는 확신 때문에.
회색궤도 2014-12-16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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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도 우리처럼 :: 착한 인류











그 아이의 이름은 현주였다. 현주에게선 늘 이상한 냄새가 났다. 지하실에서 백 년 정도 썩은 미미인형의 머리칼에서 풍길 법한 냄새였다. 실제로 현주네 집은 볕이 잘 들지 않았다. 정신지체를 가진 현주 어머니는 청결 의식이 부족했다. 그 집에 놀러 가면 자주 발바닥이 간질거렸다. 눈에 안 띄는 뭔가 밟히고 깨졌다. 내 친구들과 나는 그런 현주네 집이 편했다. 마룻바닥을 다다다 뛰어다니고 종잇조각을 찢어 날리면서 집안을 마구 어지럽혀도 혼내는 사람이 없어 좋았다. 우리들 세상이었다. 현주는 우리가 하자는 대로 무엇이든 했다. 우리보다 두 살 어린 그 아이를 앉혀 놓고 냄새 나는 머리칼을 빗겨주었다. 연분홍색 크레파스로 볼연지도 찍어주었다. 거울 속에서 현주가 배시시 웃으면 그렇게 바보 같을 수 없었다. 우리는 두꺼운 이불로 그 바보 같은 얼굴을 덮어버렸다. 그러면 현주는 느릿느릿 이불을 걷어내고는 또 바보 같이 웃었다. 그 모양을 보면 이상하게 분하고 약이 올랐다. 화도 안 내고 울지도 않는 현주는 진짜 인형 같았다. 우리의 장난은 점점 심해졌다. 어느 여름 날이었다. 교회에서 놀던 우리는 예배실 구석에서 벽장을 발견했다. 구겨진 방석과 작은 알전구들, 뒤얽힌 전선 같은 것들이 어둠 속에 처박혀 있었다. 벽장 안에 들어간 우리는 문을 닫고 귀신 놀이를 했다. 완전한 어둠과 정적이 우리를 삼켰다. 한참을 그 안에서 놀다 시시해진 우리는 바깥으로 나왔다. 현주도 우리를 따라 나오려고 했다. 그때 우리 중 누군가 재빨리 문을 닫아버렸다. 쿵쿵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벽장 미닫이문을 꽉 붙들었다. 쿵. 쿵. 쿵쿵쿵. 그 다음에 비명 섞인 울음이 들렸다. 닫힌 문 뒤에서 현주 인형이 울고 있었다. 우리는 사악하게 웃었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가 우리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예수 같은 건 무섭지 않았다. 나는 신을 믿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위에서 나는 ​참회하기 시작했다. 어둠 저편에서 현주가 계속 울고 있었다. 나는 부끄러워서,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워져서, 달리기 시작했다. 내 뒤를 따라붙는 시커먼 그림자를 떨궈내려는 듯이 막 달렸다. 골목을 내달리면서 나는 알았다. 나 자신으로부터 달아날 수는 없다는 것을. 예수보다도 무서운 것이 나 자신이었다. 내 안에서, 또 다른 눈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 인간이 언제나 타인에게 공감하고, 절대로 물건을 훔치지 않고, 등 뒤에서 배신하지도 않고, 남의 부인을 탐하지도 않는다면 세상에 걱정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인간이란 존재는 그렇지 않고, 그래서 도덕규칙이 필요하다. 한편 우리는 타인을 존중하고 돌보라고 명하는 수백만 개의 규칙을 만들 수 있지만, 우리에게 그런 성향 자체가 없다면 그런 규칙들은 무용지물이 될 것이다. (본문 중에서)

​ 영장류학자 프란스 드 발'은 이 책에서 도덕성에 관한 흥미로운 주장을 펼치고 있다. 도덕성 (또는 옳고 그름에 대한 감각)은 종교나 이성, 문명에 앞서 우리 안에 내재한 생물학적 본성이라는 것이다. 영장류들을 대상으로 한 수많은 연구 자료들이 이를 입증한다. ​그는 이 책에서 오랜 세월 함께 했던 영장류 친구들을 소개한다. 관절염에 걸린 동료를 도와 나무를 오르는 침팬지들, 자기보다 낮은 가치의 보상을 받은 동료 침팬지를 보고 자신의 먹이를 거부하는 침팬지, 강제 섹스를 거부하는 암컷을 도와 수컷을 내쫓는 보노보 암컷들. 실수로 인간을 물고 죄책감에 사로잡힌 침팬지... 그들도 우리처럼 남들과 어울려 살아가고, 사회적 규칙을 준수하고, 동료들과 공감하고,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고, 불공평한 제안을 거부했다.

​ ​나는 침팬지 사회가 예외 없이 '이에는 이, 눈에는 눈tit for tat' 원칙을 고수하는 모습에 놀라곤 한다. 이 유인원들은 먹이에서 섹스까지, 털 고르기에서 싸움 지원까지 호의와 냉대의 사회적 경제를 만든다. 그들은 대차대조표를 만들어 기대와 의무를 발전시키는 듯하다. 따라서 신뢰를 깨면 부정적으로 반응한다. (본문 중에서)

​ 책에 의하면 도덕성은 하찮은 동기로부터 기원했다. 포도를 받은 침팬지는 오이를 받은 동료 침팬지를 보고 왜 같이 파업을 선언하는가. 달아오른 수컷 보노보는 매력적인 암컷 보노보를 왜 우두머리 수컷에게 양보하는가. ​프란스 드 발은 다양한 사례를 통해 이들이 일정한 사회적 법칙을 준수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법칙을 깨뜨린 침팬지(또는 보노보)는 무리로부터 처벌 받는다. 영장류의 도덕 법칙을 이끄는 궁극적인 동력은 "무리에 통합되려는 욕망"이었다. 고립되거나 배제되면 생존 가능성이 급격하게 감소하기 때문이다. 인간도 다른 영장류처럼 사회적 연대에 가치를 두는 무리동물이다. ​진화하면서 우리는 "관계의 가치", "협력의 이점", "신뢰와 정직의 필요성" 따위를 본성적으로 알게 되었다. 프란스 드 발은 이 '자연화된 윤리학'을 주장하면서 인간의 도덕성이 외부의 고상한 원칙(신성한 존재나 이성적 법칙)에서 나왔다는 생각은 창조론의 신화에 불과하다고 역설한다.

우리는 '양극성 유인원bipolar apes'이다. 기분이 좋을 때면 보노보처럼 친절하고, 기분을 잡치면 침팬지처럼 지배하려 들고 폭력적이 된다. (본문 중에서)

​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착하다는 것이 책의 주장이다. 그런데 이 도덕성은 "불멸의 인간 본성"이라기보다는 스스로 조직하는 방식에 달렸다는 것이다. ​종교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프란스 드 발'은 "신의 비존재에 집착하는" "전투적인 무신론"자들을 비난한다. 종교가 도덕성의 원천은 아니지만, 도덕성 단련에는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

​도덕법칙은 하늘에서부터 또는 탁월한 이성적 원칙으로부터 부여된 것이 아니다. 고대부터 몸에 뿌리 깊게 밴 가치들로부터 솟아났다. 그것의 근본에는 집단생활에서의 생존이라는 가치가 있다. 어딘가에 속하고, 함께 생활하고,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우리의 욕구가 우리가 의지하는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것을 촉구한다. (본문 중에서)

​ 한 편의 잘 만들어진 교양 다큐를 보고 난 기분이다. 잠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책의 시작부터 등장하는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그림 《세속적 쾌락의 정원 The Garden of Earthly delight》과 도덕성에 관한 흥미로운 이론들, 종교와 과학의 역할에 대한 순수한 고찰까지 이 한 권의 책에 잘 녹아있다. 아. 영장류 친구들의 사진도 실려 있다. 내 시선은 오래 그들에게 머물렀다. 그들의 커다란 눈이 나를 쳐다보았다. 모두 다 알고 있다는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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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의허 2014-08-09 공감(6) 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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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한 도덕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인간은 선과 악의 양면을 갖고 있다.보편적인 선은 공공선이라고 하여 성장과정,사회적 학습과 경험에 의해 체득되어 간다.선은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로서 자신의 욕망과 탐욕을 억제하고 타자와 사회에 누를 끼치지 않겠다는 내면의 정신작용일 것이며,반대로 악은 해서는 안될 일로서 타자와 사회에 악영향을 끼치는 행위일 것이다.인류가 시작되면서 문자가 발명되고 문명이 발전되어 오면서 인간은 놀라울 만한 삶의 질을 높혀 왔다.이러한 급속한 문명의 발전은 개인을 비롯하여 사회,국가에 이르기까지 지식과 힘은 커졌지만 도덕적 가치관은 퇴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려스럽기만 하다.



인간의 도덕적 기원 및 가치관을 종교의 가르침에서 찾고 그것에서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무신론자 및 신을 경원시하는 부류에게는 도덕과 종교의 가르침을 동일시하지는 않는다.나 역시도 각 종교의 가르침과 신성시되는 신의 존재 및 위대함은 마음으로 믿게 된다.다만 종교가 정치적 세력화하고 물질적 숭배에 앞장서다 보니 본래 종교의 가르침을 애써 외면하고 비난하기까지 하고 있다.또한 종교간 이념과 갈등이 심화되는 경우에는 고질적인 종교분쟁을 넘어 테러와 학살이 자행되기도 한다.그래서 인간이 인간으로서 마땅히 갖추어야 할 도덕적 가치는 비단 종교의 가르침에 기인된다고는 보지 않는다.



고대시대,중세봉건시대 그리고 근대산업화와 도시개발화가 이루어지고,경직된 이데올로기가 누그러들면서 현대사회는 흑백논리보다는 경제이익과 개인의 창달에 더욱 주력하고 있다.한국인은 오랜 세월 유교문화에 익숙해져 있기에 남녀간,노소간의 언행과 예절 등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이 특색이다.포스트모더니즘과 남녀평등의식이 강하게 작용하다 보니 다소 희색된 것은 사실이다.586세대인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우리 세대가 조상을 섬기고 제사를 지내는 마지막 세대가 아닐까 라는 것을.우리 세대가 피안의 세계로 넘어가게 되면 후세들의 도덕적 가치는 무엇으로 계측할 수가 있을까.신자본주의 세대에 태어난 현재 청년층들은 과연 미래의 삶과 도덕적 가치관을 어디에 두고 살아갈 것인지 미래사회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다.



인간은 과연 착할까,아니면 환경과 학습,시대의 흐름에 편승하여 사익과 영달에만 몰입하다 보니 인간관계가 매끄럽지 못하고 경쟁의 논리에 치중하다 보니 삶이 각박해지면서 정작 인간만이 갖고 있는 인간에 대한 예의를 소홀히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이러한 현상을 두고 과연 도덕적 인간이다 아니다 를 논할 수는 없다고 본다.개인은 국가의 개체 내지 분자로서 사회질서,사회시스템에 맞춰 삶의 목표를 정하여 사회질서와 사회시스템에 종속되어 갈 수 밖에 없는 존재이기에 개인과 개인간의 도덕적 문제보다는 개인의 욕망과 가치관은 속으로 묻어두고 타자을 위하고 집단과 사회를 위하도록 강요당하는 비의도적 이타심을 발휘해야 하는 착한 채 하는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라고 생각을 아니할 수가 없다.



프란스 드 발저자는 <착한 인류>에 대한 문제를 유인원(類人猿)인 침팬지와 보노보를 관찰,연구하면서 이 글을 시작하고 있다.침팬지는 수컷이 강하고 보노보는 암컷이 우세하다.인간과 견주어 보면 침팬지는 남성우월의식과 지배의식이 강한 반면,보노보는 평화와 평등,배려의식이 강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침팬지와 보노보가 동료 및 새끼들에게 위협에 닥쳤을 때 본능과 유전자에 흐르는 보호본능에 의해 어느 정도 감싸는 모습이 포착되고,자웅이 성행위를 하는 경우 그들만의 괴성을 지르는 모습에서 말은 못하지만 인간의 행위와 비슷한 점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무리 속에서 동료와 함께 있을 때 먹이감을 옆의 동료에게는 많이 주고,자신에게는 맛이 있는 것을 적게 주었을 때 질보다는 양의 차이를 알아차리고 먹지 않는다는 점에서 '참 영리한 동물이다,보노보도 감정이 있구나'라는 것을 느끼게 한다.그런데 유인원 보노보보다 인간은 더욱 이기적이면서 이타적인 존재로서 애정과 도움,(그룹과 조직 속에서)소속감과 동질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껍데기와 알맹이는 질적으로 차이가 난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게 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도덕적 가치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저자는 인간은 태어나면서 가정의 환경과 진화론적인 생물학적 차원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종교는 인간의 나약함과 거듭남을 강조하고 설득하기 위해 예정설,원조.원초적 타락을 되풀이하면서 거론하고 교인들에게 주입하고 있다.성경 문구는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읽다 보면 가슴에 와닿고 명심해야 할 말씀들이 참으로 많다.그렇지만 오늘날 각 종교의 행태를 보면 돈과 물질의 유혹에 집착하고 정치화,경제세력화하려는 사탄적인 교단들이 많음에 한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개인적으로 생각컨대 인간이 상실한 도덕성을 회복하려면 공맹사상을 들먹거리는 것보다는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과 공동체적인 삶으로 복귀해야 한다는 것이다.즉 한국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고 착취하는 물질적인 삶을 경제민주화,사회통합,복지문제로 실질적 전환을 해 나가는 동시에 인성교육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유년 시절부터 강조해 나가는 국가 개조작업이 절실하다는 생각이다.도덕이 인간의 그릇된 본성을 덮어 씌운 미봉책으로 보여진다.근본적으로 도덕적인 삶을 살아가려면 집에서는 부모,학교에서는 교사,사회 및 국가는 리더자가 본보기를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 착한 인류로 거듭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어렵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일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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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 2014-08-10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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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성, 과연 인간만의 것일까?




우리의 혼란은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더 많은 지식만이 필요할 뿐이라는 환상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42쪽)

과학은 인간 중심적 경향을 보인다는 말에 크게 공감한다. 저자가 보여주는 진화의 나무만 보더라도 인간이 얼마나 자기편향적인가를 알 수 있다. 오직 인간만이 무슨 대단한 존재인양 그려져 있는 그림보다 DNA에 기초한 나무에 침팬지, 보노보, 고릴라와 같은 유인원과 같이 한 가지에 매달려 있는 인간의 모습이 훨씬 더 인간적으로 보이는 건 왜일까? 유인원과 인간을 같은 가지에 매달아 놓은 진화의 그림에서 보이듯 그들을 여러방면에서 연구해본다면 인간의 기본적인 본성을 찾아낼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도덕성을 이야기하면서 그 흐름을 이끌어가는 존재가 바로 유인원, 보노보인 까딹이다. 보노보는 침팬지보다 인간과 가깝다고 여겨지는 유인원이라고 한다. 인간에게 필요한 윤리나 도덕을 말하고자 하면서 굳이 유인원의 행태를 보여주고자 했던 이유를 찾아내는 건 쉽지 않았다. 가뜩이나 재미없는 주제인데다 장황하게 느껴지는 문구들로 인해 지루한 감도 없지 않았다.



도덕법칙은 하늘에서부터 또는 탁월한 이성적 원칙으로부터 부여된 것이 아니다. 고대부터 몸에 뿌리 깊게 밴 가치들로부터 솟아났다. 그것의 근본에는 집단생활에서의 생존이라는 가치가 있다. (-329쪽)

도덕성은 두 개의 H와 관련된 규칙 체계다. '타인을 돕는 것Helping' 과 적어도 동료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 not Hurting' 이다. 이 체계는 타인의 행복과 집단을 개인보다 앞세우라고 요구한다. 물론 개인의 이익이 부정되지는 않지만 협력 사회를 만들기 위해 개인의 이익 추구를 억제한다. ( -232쪽)

도덕성이 무엇일까? 문득 궁금해졌다. 그래서 찾아보았더니 뭐가 그렇게 어려운지... 하여간 인간의 틀로 정의되어지는 것들은 참 복잡하다. 칸트가 이러니 저러니...그래놓고는 인간이기때문에 이런 정도는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해야 한다는 듯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학문적인 의미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양심' 이라는 말로 정의되는 것이 도덕성이다. 한마디로 말해 제 마음에 꺼리낌이 없어야 하고 사회규범에 어긋나지 않는 자율적인 마음상태인 것이다. 그런데 인간에게 왜 이런 도덕성이 필요한 것일까? 인간은 언제부터 그렇게 도덕성을 갖추며 살았던 것일까? 그렇다면 오직 인간만이 도덕성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뭐 이런 궁금증을 풀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안타깝게도 인간만이 그런 도덕성을 가졌을 거라는 편협된 생각은 버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현생인류에 와서 새롭게 생긴것도 아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집단을 이루는 사회적인 개체속에 자연스럽게 생겨나기 시작했다는 것을 유인원을 통해 밝혀내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그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생존을 위해서 그렇게 해야만 했다는 것은 유인원이든 인간이든 별다를 게 없어 보이니.



"신이 없다면 인간은 신을 만들어야 했을 것이다" - 볼테르

종교가 나타나기 전의 인간의 삶도 반드시 '약육강식'은 아니었다.(-144쪽)

사회적 위계질서는 거대한 금지 시스템이다. 사회적 위계질서는 의심의 여지없이 인간의 도덕성을 진화시킨 배경이다. 인간의 도덕 역시 일종의 금지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충동을 조절하는 것이 관건이다. (- 224쪽)

처음 책장을 넘기기 시작하면서부터 종교문제가 계속 따라 붙었다. 종교와 과학의 대립에 대해 말하고 싶어하는 것인지, 아니면 종교를 통해 우리에게 도덕성이 생겨났다는 말인지 영 껄끄러웠다. 그러면서 옮긴이의 말에서 보았던 이 책의 원제에 대한 말이 생각났다. 'The Bonobo And The Atheist(보노보와 무신론자)'... 결국 우리가 갖고 있는 도덕성이라는 것은 종교와는 무관하다는 것이었는데 인류가 진화하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사회적 본성에서 비롯되었다는 말에 크게 공감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종교를 무시하는 건 아니다. 현재까지는 종교의 공백을 대체할 그 무엇도 찾아내지 못했다는 말이 섬뜩(?)하기는 하지만. 이야기의 흐름을 이끌어가고 있는 존재가 유인원인 까닭인지 책을 보는 내내 얼마전에 보았던 영화의 장면들이 책속의 내용과 겹쳐졌다. 영화속에서 보여졌던 유인원의 모습이 단지 영화속의 모습만은 아니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인간처럼 아픈 동료를 보살펴주고, 싸운 뒤에는 화해를 요청하며, 혼자만 이익을 독차지하려드는 것을 응징하며 그들만의 위계질서를 잡아가는 모습, 어린 새끼를 향한 사랑, 같은 동족을 향한 따스한 동질감... 영장류에서부터 진화한 인간과 다를 바 없던 그들만의 속성이라니! 좀 따분하긴 했지만 읽고 난 뒤의 공감대는 컸다. 다시 또 생각하게 된다. 만들어진 모든 것으로부터 놓여나 자연스러움에 동화되어지는 그날은 언제 올까...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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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비 2014-07-27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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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인류 : 도덕은 진화의 산물인가




'나는 생물학자를 이보다 감동시키는 그림을 알지 못한다.'(326쪽)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영장류학자로 일컬어지는 프란스 드 발. 그는 이 책의 첫머리에서 자신이 네덜란드의 남부 도시 덴 보스 출신이라는 것, 그리고 16세기의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스가 이 도시의 이름을 따 자신의 이름을 지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노천시장에 서 있는 보스의 동상을 보며 성장했던 드 발은, 보스의 대표적인 작품인 경이로운 제단화 <세속적 쾌락의 정원>으로 생물학, 윤리학을 종횡무진 연결하며 이야기를 이어간다. 다행히 집을 파헤쳐(?) 보니 보스의 <세속적 쾌락의 정원>의 전체 도판이 들어있는 큰 책이 있었다. 프란스 드 발처럼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 제56전시실의 이 그림 앞에 멈추어 있는 즐거운 상상을 하며 책장을 넘겨갔다(드 발은 이곳으로 들어갈 때 성소(聖所)로 걸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생물학자의 이같은 풍부한 감수성이라니!).



보통 이 그림을 해석할 때는 인간과 기괴한 생물들이 함께 행복을 누리는 중앙 그림을 '지상낙원의 정원, 에덴동산'으로 보고, 오른쪽 그림인 무시무시한 지옥에서 신의 계율을 어긴 인간과 생물들이 끔찍한 벌을 받는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데, 드 발은 영장류학자다운 독창적인 눈으로 이 그림을 본다. 중앙 그림은 우리의 자연 상태에 대한 묘사이며, 거기에는 종교적 혹은 도덕적 해석이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또 왼쪽 그림에서는, 천국이 한 번에 창조된 것이 아니라 어떤 과정을 거쳐 조금씩 복잡해졌을 거라고 암시되어 있었다는 것을 발견해낸다. 나는 이 대목을 보며 감동을 받았다. 네덜란드의 덴 보스에서 다른 시대에 태어난 두 사람. 보스는 진흙 웅덩이에서 기이한 온갖 생물들이 나오는 그림을 그렸고, 500년이 지난 후 프란스 드 발은 이 장면에서 인간 역시 하찮은 기원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상기한다.



'하찮은' 기원. 인간의 손은 어류의 앞지느러미에서 유래했고 폐는 부레에서 진화했다. 신체 뿐 아니라 마음과 행동의 영역도 마찬가지라고 드 발은 역설한다. 종교는 인간의 도덕성이 특별한 기원에서 유래했다는 믿음을 주입해왔지만, 이 세계적인 영장류학자는 풍부한 사례들을 제시하며 우리의 이타적인 충동들이 영장류의 오랜 계통 속에서 진화된 결과일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도덕성은 '위에서 아래로' 주어진 것이 아닌 '아래에서 위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드 발은 인간이 도덕적인 행위를 하기 위해서 종교가 필요하다는 명제에 회의적이다. '사회에서 서로 믿고 살려면 꼭 필요한 자기 조절 능력이 이미 우리에게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없을까?'(16쪽)라는 그의 문제의식에 공감을 느낀다. 분명 인간은 2,000년 남짓 된 현대적 종교가 발생하기 이전부터 자신들의 공동체가 잘 기능하는지 걱정해 왔을 거라는 이야기에도 세차게 끄덕끄덕. 거기에 드 발은 유머러스하게도, 생물학자들은 그 정도의 시간에는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고 덧붙인다. 이처럼 통 큰 생물학의 세계.^^;



종교의 역할을 줄이고, 전능하신 신보다 인간의 잠재력에 강조점을 찍어야 한다고 말하는 드 발이지만, 그는 무신론자들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을 보여준다. 읽다가 도킨스 아저씨의 입장이 되어서 다소 억울(?)한 기분이 들어 흥분하기도 했다. 종교를 가진 사람들의 입장을 헤아려 주느라 같은 진화론자를 너무 깎아내리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고.-_-;;

뭐 이런 억울함은 잠시 접어두고, 도덕적인 사회의 핵심 요소들을 반드시 종교에서 가져올 필요가 없긴 하지만(그 핵심 요소들이 바로 우리로부터 나오는 것이므로) '신처럼 해석이 열려 있는 무언가의 존재 여부를 놓고 흥분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340쪽)는 그의 입장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책 마지막에서 그는 보노보의 입을 빌려 무신론자들에게 멀리 바라볼 것을 촉구한다.



인간의 이타적인 충동과 공감 능력이 영장류의 오랜 계통 속에서 진화한 결과물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풍부한 증거들은 매혹적이다. 인간의 도덕성이 외부의 고상한 원칙에서 기원한 것이 아니라 동물의 행동을 관찰할 때 인지할 수 있는 '변변치 않은 동기'로부터 기원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인간이 진화하면서 스스로 도덕성을 갖추어왔다는 것을 무색케하는 비극적인 일들이 흘러넘치는 세상이지만, 그래서 때때로 정말 우리에게 그런 내재된 도덕성이 있는지에 대해 회의하고 절망하고 싶지만, '진화된 본성이 우리를 여기까지 오도록 이끌어준 손이었다'(345쪽)는 사실은 희망이 될 것이다. 오히려 비극적인 세상일수록 더더욱 간절히 붙잡고 놓치 말아야 할 그런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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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토잼 2014-08-22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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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니까 그럴 수 있다.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 있을까. 때때로 우리는 이 말을 전혀 다른 2가지 상황에서 내뱉는다. 하나는 인간이 타인에게 무척이나 폭력적이고 잔혹한 행동을 할 때, 다른 하나는 인간이 타인에게 친절하다 못해 자신의 손해를 감수할 때다. 그리고 곧, 그 2가지 상황에 대해 이해를 시도하게 되는데, 그 양상이 다르게 나타난다. 전자에 대해서는 ‘인간’에게서 끌어낸 이해를, 후자에 대해서는 ‘인간이 아닌 것’에서 끌어낸 이해를 시도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은 물질적 존재이고, 또 동물에 가까운 존재라는 의미로서 폭력성... + 더보기
블랙레인 2014-07-29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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