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6/02

환경학과 평화학 | 토다 키요시 | 알라딘 2003

환경학과 평화학 | 토다 키요시 | 알라딘
환경학과 평화학
토다 키요시 (지은이),김원식 (옮긴이)녹색평론사2003-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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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폭력과 평화'라는 관점에서 체계적으로 살펴본 책이다. 폭력은 본능이 아니라 문화이며, 노력에 의해서 줄어나갈 수 있는 부분이라고 보고 21세기를 '평화와 환경의 세기'로 만들 방안을 고민한다.

서장에서는, 폭력과 평화의 관점에서 민주주의를 재평가한다. 1장은 폭력과 평화의 개념, 그리고 직접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의 관계를 정리한다. 2장은 국가와 직접적 폭력에 대해서 검토하고, '정당한 살인'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3장은 국가와 기업의 구조적 폭력을 사례를 통해 살펴본다. 4장은 전문가 지배나 젠더의 문제를 포함해서, 구조적 폭력에 관한 제문제를 검토한다. 5장은 인간사회의 폭력과 평화를 '진화된 이웃사람들'과 대비하고, 평화의 문화로 나아가는 이행의 조건을 탐색하고 있다.


목차


머리말

서장: 평화와 민주주의의 심화

제1장 폭력과 평화
1절 직접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
2절 폭력의 주체와 대상

제2장 직접적 폭력과 국가
1절 테러와 전쟁
2절 '정당한 살인'으로서의 전쟁과 사형
3절 직접적 폭력과 국가·비국가집단

제3장 구조적 폭력과 기업·국가
1절 군수산업 - 종래의 죽음의 상인
2절 담배산업 - 새로운 죽음의 상인
3절 다국적기업과 구조적 폭력
4절 구조적 폭력과 국가·국제기구

제4장 구조적 폭력과 관련된 제반문제
1절 원죄다발구조
2절 구조적 폭력으로서의 남북격차
3절 젠더와 생명과학기술
4절 핵(원자력)의 군사이용과 민사(民事)이용의 뒤엉킴
5절 생명공학의 문제점

제5장 평화문화를 향해서
1절 폭력의 비교영장류학과 사회과학
2절 개발주의와 서브시스턴스(subsistence)
3절 평화학과 환경학

부록|평화를 생각하는 데 필요한 독서 안내
부록|촘스키 서평
자료|부시정권의 행보
자료|유사3법안에 항의하는 피폭지, 나가사키의 대학인 101명의 성명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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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토다 키요시 (戸田 清 )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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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오사카에서 태어나 오사카 시립대학 농학부 수의학과를 졸업했다. 일본소비자연맹 사무국에서 일했으며 쓰루문과대학, 쥰심여자대학, 쓰타주쿠대학 등에서 비상근 강사를 역임했다. 1997년 10월부터 나가사키대학 환경과학부 조교수로 근무하고 있으며 환경사회학, 과학사, 평화학 분야를 전공하고 있다.

현재 나가사키 평화연구소 연구원, 나가사키의 자연과 문화를 지키는 모임의 회원, 나가사키 에스페란토 모임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환경정의를 위하여>, 공저로 <인구위기의 미래>, <강좌 환경사회학 제1권>, <동물의 권리>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환경학과 평화학>,<환경정의를 위하여> … 총 12종 (모두보기)

김원식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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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충북 괴산에서 태어났고 국대안 반대 투쟁을 겪으며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중퇴했다. 한국 환경운동의 여명기에 공해추방운동연합에 참여했으며 지금은 반핵반전운동에 몰두하고 있다. 한국어로 옮겨 소개한 책으로는 환경사상의 내용과 역사를 153항목의 키워드로 살펴본 《환경사상 키워드》를 비롯해 《환경학과 평화학》《환경정의를 위하여》《위험한 이야기》《지구를 파괴하는 범죄자들》《시민 과학자로 살다》《지금 자연을 어떻게 볼 것인가》 들이 있다.


환경 문제를 국제적, 구조적 문제로 보고 해법을 찾아나가려는 책

환경 문제를 국제적, 구조적 문제로 보고 해법을 찾아나가려는 책 토다 키요시 교수의 날카로운 지성이 돋보이는 책입니다.
2008-10-21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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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생종이로 만들어진 책

토다 키요시의 <환경 정의를 위하여>에 이어 두번째 구입입니다. 특히 이 책은 재생종이로 만들어졌고 날개가 없으며 가볍습니다. 내용은 구조적 평화를 지향하며 권위주의적인 체제와 국가에 저항하는 평화 지향적 사상이 담겨 있어요.
유리바다 2008-10-27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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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과 평화, 즐거운 불편

토다 키요시 지음, 김원식 옮김, <환경학과 평화학>, 녹색평론사, 2003.





전국역사교사모임에서 내는 <역사교육> 편집진의 집요한 요구에 못이겨, 얼마 전 나는 나를 대상으로 한 인터뷰에 응했다. 근데 그걸 보고 전남의 김남철 선생님이 우리 모임 게시판에 글을 올렸다. 근데 나는 그 글을 읽으면서 좀 황당했다. 김선생님은 내 인터뷰를 보고 갑자기 먹먹해졌다는 것이다. 내공이 어떻고, 또 무슨 꼴통 등의 표현이 있었는데, 암튼 많이 놀랐다는 것 같다.

나는 오히려 김남철 선생님을 볼 때마다 항상 놀라고, 부럽고, 존경스러워 하는데. 그가 나를 보며 충격이었다니 나는 그게 좀 납득이 안 된다. 아마 나의 사고가 아나키스트의 철학을 담고 있다는 것에서 조금 쇼크였던 모양이다.

요사이 부쩍 더 아나키즘을 생각한다. 도대체 국가란 놈이 무엇인가. 이 생각을 하면 그렇다. 맑스가 예리하게 지적했듯이 국가는 유산자들의 위원회일 뿐이다. 그들이 어떻게 하면 적절하게 사회의 부와 권력을 자기들끼리 나누어 먹는가 하는 것을 의논하는 위원회일 뿐이다. 국민의 동의는 매스컴을 통해 만들어진 조작된 여론과 강제 자발적 동의를 기초로 한 헤게모니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러니 그건 진정한 여론도 국민의 의사도 아니다. 다만 기득권 층의 이익을 추수하는 것일 뿐이다.

논의되고 있는 한미자유무역협정도, 군사기지 건설도, 국민을 위한 게 아니다. 국가 안에서 기득권을 가진 자들을 위한 것일 뿐이다. 나머진 들러리다. 그러니 국가에 무얼 기대하겠는가. 그러니 아나키즘의 정당함은 뚜렷해진다.

'평화', 요즘엔 이 단어가 '사랑'이라는 말처럼 유행가 가사 이상으로 흔해져 버렸다. 진정 무엇이 평화인지도 모르는 채 사용한다. 그리고 오히려 그 평화를 아주 상업적으로 이용해먹는 놈들도 많다. 솔직히 제주도가 평화의 섬이라고 하는데, 그 내용은 전혀 없다. 장식일 뿐이다. 그래서였나, 나는 한동안 이 좋은 단어를 의도적으로 멀리하기도 했다. 천박해 보여서였다. 그러나 이제 좀 진지하게 다가가고 싶다. 그래서 이 책을 골랐다. 책 제목 그 자체가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좋은 책이다.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든다. 우선 '평화'라는 말 자체에 대해서 개념적으로라도 정리할 수 있었다.
종래 평화의 대립 개념을 전쟁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1968년 인도의 스가타 다스굽타가 <비평화와 악개발>이라는 논문에서 전쟁이 없는 것만 가지고서는 평화라고 할 수 없으며 기아, 빈곤, 질병, 영양실조, 더러움을 특징으로 하는 고난과 궁핍을 비평화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뒤 노르웨이의 요한 갈퉁이 1969년에 <폭력, 평화, 평화 연구>라는 논문에서 폭력과 평화를 재정의했다고 한다. "폭력이란 폭력이 눈앞에 있다는 것으로 인해 인간존재가 어떤 영향을 받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신체적, 정신적 실현이 잠재적 실현 이하에 있는 것과 같은 때이다."라고 했다 한다. 다시 말해 "건강, 생명, 행복, 미, 지성 등에서 자기 실현이 방해받는다는 것이다. 인간의 신체적, 정신적 자기 실현을 방해하고 있는 요인 중에서 피할 수 있는 것이 폭력이"라는 것이다.

갈퉁에 의하면 폭력은 '직접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으로 나뉜다. 직접적 폭력이야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며, 구조적 폭력은 사회 제도, 관습, 경제적 상태나 법률, 개발 등에 의해 천천히 나타나는 폭력을 말한다. 이건 전쟁이 아닌 상태에서 저질러진다. 환경오염에 의해서, 식량 제재에 의해서 등이다.
그리고 그는 '전쟁 부재로서의 평화'를 '소극적 평화'라고 했고, 그에 반해서 '행복이나 복지나 번영이 보장된다는 의미에서의 평화'를 '적극적 평화'라고 했다. 다시 말해 적극적 평화는 '사회정의의 실현이자 인권의 옹호와 확대이며 고난과 궁핍에서의 해방이다."

그래서 이젠 '전쟁과 평화'가 아니라 '폭력과 평화'라는 표현이 설득력을 얻는 것 같다. 사실 아프리카 어는 국가에서 어린이들이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것, 이것 역시 분명한 폭력이다. 세계 인구의 20%가 세계자원의 80%를 소비하는 것, 역시 분명한 폭력이다. 물론 그 소비자들에게는 가해 의사를 발견할 수 없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들의 소비는 누군가에게 가해의 행위가 되고 만다. 그게 바로 구조적 폭력이면 적극적 평화의 결여이다.

이렇게 평화에 대한 개념 정의를 얻은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다. 물론 중요한 건 실천이다. 그래서인가 이 책의 저자 토다 키요시나 번역자이신 김원식 선생님은 그 구체적 실천을 말한다. 특히 번역자이신 김원식 선생은 1923년 생이다. 그 연세에 여전히 평화, 환경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계신다. 살아있는 스승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말하는 평화실현은 어떤 방법을 통해서 가능한 것인가. '민주주의와 군대는 모순된다'라는 말에 답이 있다. 이 말은 오다 마코토의 말이다. 어쨌든 이들은 철저히 군대를 부정한다. 군대 그 자체가 폭력의 가능성일 뿐만 아니라 폭력 그 자체라는 것이다

노골적으로 말해 "미국 군대의 개입은 대기업의 이권 확보를 위해서 감행되었다." 이것은 앞서 국가가 가진자들의 위원회라고 했던 데에서 미리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의 이권을 지키기 위한 폭력일 뿐이다. 문제는 그것이 베버가 말한 것처럼 국가만이 그 폭력의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문제다. 국가는 기득권자들의 이익을 위해 세계 최대의 살인행위를 과감히 저질렀던 것이다.

사람들이 테러는 비난하지만 전쟁은 비난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대전은 대부분 테러이다. 1차 대전에선 군인 사망자가 90%였다지만 베트남전만해도 민간인 사망자가 95%였다. 전략적 폭격 때문이다. 군인만 골라서 공격하는 게 아니라 도시 자체를 파괴해버린다. 그러면 민간인의 피해가 극심해진다. 이건 테러다. 전쟁이 아니다. 때문에 국가는 합법적 테러 기구를 보유한 권력인 것이다. 물론 저자는 군대 말고 또 사형제와 담배 판배를 국가에 의해 저질러지는 테러로 규정하고 있다.

최근 미군이 개입하는 대부분의 전쟁은 미국 산업체의 이익을 위해서 만들어졌다. 미국 역시 이를 부정하지 않는다. 저자 서문에 있는 표현대로라면 "지구사회의 불평등을 유지하기 위해서 강력한 군대가 필요하다"라는 것이다. 모두가 미국만큼의 소비를 유지할 순 없다. 그러려면 지구가 대 여섯 개가 더 필요할 것이다. 그럼 미국은 자기들만이라도 그런 소비를 유지하고 싶어한다. 그로 인해 발생하는 불만을 억압하기 위해 군대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말이 좋아 국토 방위이지, 사실은 기득권자들의 자기 이권 유지가 군대 설치의 목적일 뿐이다. 우리 남한 군대는? 뻔하다. 언제 한 번 독자적인 목소리를 낸 적이 없다. 철저히 미군에 종속적이다. 아니, 광주 때처럼 자신들의 기득권을 확보하기 위해 자국민을 살해하는 경우가 있다. 역시 본질은 하나다. 군대는 국민의 군대가 아니라 권력자의 군대일 뿐이다.

군대가 없는 국가. 꿈이 아니다. 코스타리카는 1871년에 사형제를 폐지했고, 1949년에 군대를 폐지했다. 19세기에 사형제 폐지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서구 선진국 중엔 미국과 일본만이 사형제를 유지하고 있다. 변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21세기엔 전세계적 차원에서 군대 폐지도 꿈꿔볼 만 하다. 군대가 없는 사회.

간디가 "지구는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에는 충분한 크기이지만, 탐욕을 채우기에는 지나치게 작다" 라고 했던 말을 다시금 떠올린다. "단순하고 윤택한 삶", "즐거운 불편"은 이 책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허위의 풍요로움을 버린다면 못이룰 것도 아니다. 그럴 때 군대없는 지구도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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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2008-11-07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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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에 대한 반대



여담으로 시작하자면, 일본 사람들은 뭔가를 종합해서 정리하는데 참 탁월하다는 생각이 든다. 판타지 라이브러리라는 시리즈가 있다. 온갖 동서고금의 판타지물들에 대해 항목별로 정리한 책들인데 이 시리즈를 보면 항상 감탄을 하게 된다. 이런 거, 일본 사람들이 참 잘하는 거 같다.

[판타지 라이브러리]와 이 책은 주제상 거리가 멀지만, 이 책 역시 '폭력'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매우 종합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면에서 흡사하다. 책은 직접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이라는, 폭력에 대한 다소는 모호한 구분으로부터 시작한다. 즉각 알아차릴 수 있듯이 직접적 폭력은 주체와 대상, 행동의 의도와 결과가 명확한 폭력이고 구조적 폭력은 그렇지 않은 것을 가리킨다. 환경 파괴, 대기업이나 강대국의 행위에 의한 피해 등을 폭력의 개념 내로 포괄하기 위한 범주화로 보인다. 개인 대 개인의 폭력이나 개인의 폭력성 문제는 책에서 다루는 범위 밖이다.

테러, 전쟁, 사형. 국가와 같은 공적 조직이 수행하는 대표적인 직접적 폭력이다. 테러는 나쁜 것, 전쟁은 불가피한 것, 사형은 (악질범죄자에게) 당연한 것이라는 도식이 굳어져 있는 우리에게 이 세 가지를 한 데 묶는 건 괘씸해 보이기도 한다. 사실 (근대) 국가가 UN을 제외한 다른 공적 조직과 대별되는 가장 큰 요인이 바로 합법적 폭력(전쟁 수행력, 사형 및 구금 등 경찰력)을 독점한다는 것 아닌가. 하지만 저자는 국가의 폭력이 과연 정당한가에 의문을 제기한다. 전쟁 중 사망 비전투원의 비율이 2차 대전 후 증가하면서, 급기야 현대전에서는 80-90%의 사망자가 민간인이다. 그렇게 되는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전략 폭격이다.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몇 만피트 위에서 폭격하는 행위는 이제 일종의 게임 같이 되어버린다. 그렇다면 전략폭격을 중심에 두는 현대전이 테러와 뭐가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사형에 대해서는, 요사이 여러 글을 읽다보니 사형 폐지로 가야한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 역시 사형 폐지론자이다. 가장 중요한 원죄 형사 가능성 (오심으로 인해 사형당하는 경우)에 대해 저자는 미국과 일본의 원죄 형사 통계를 들이댄다. 정말 할 말이 없어진다. 2003년 일리노이주에서 13명의 사형수가 무혐의라는 것이 밝혀져 한꺼번에 석방된 케이스는 매우 유명하다. 플로리다 주에서는 5명의 사형이 집행될 때마다 2명의 다른 사형수가 무죄방면된다고 한다. 정말 끔찍한 통계가 아닐 수 없다. 일본도 원죄 형사가 많기는 매한가지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왜 다르겠는가.

좀 간추려서 써야겠다.

책을 읽으면서, 군수산업, 담배산업, 남북 격차, 글로벌 대기업의 지배 문제, 핵 (전쟁용이든 민사용이든), 생명공학기술의 이용, 출산기술 등의 문제를 '폭력'이라는 관점에서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 환경학과 평화학이 무슨 관계일까? 처음 책을 집어들었을 때 좀 생뚱맞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둘다 잘 살아보자는 거고, 막연하게는 큰 관련이 있을 거 같다는 느낌도 들었지만. 키워드는 '폭력'이다. 평화의 반대는 전쟁이 아니라 폭력이다. 환경 문제는 '지구에 대한 폭력' '자연에 대한 폭력'으로 압축된다. 우리의 환경학과 평화학은 공존, 자연과의 평화로운 공존, 타인과의 평화로운 공존을 지향해야 한다. 이 때의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와 같은 소극적인 개념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구조적, 간접적 폭력까지 없애는 적극적인 평화여야 한다.

한때 환경운동이라든가 평화운동은 Main stream에서 떨어져 나온, 소위 '부문'운동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하지만 직접적, 구조적 폭력에 대한 적극적인 반대라는 관점은, 우리시대의 진보적인 이슈들을 아우를 수 있는 좋은 이정표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가지 덧붙이자면. 현대의 폭력이 자본주의의 폭력인가 남성중심 사회의 폭력인가. 여성이 남성 대신 사회를 움직인다면 세상은 다를까.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눠봤지만, 결론지어지지 않은 문제이다. (하긴 나만 결론을 못냈을까) 저자가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언급한 다른 영장류들의 사례는, 내 개인적인 여성편애에 근거를 더해주었다. 일단 다른 영장류든 인간이든 여성이 주도하거나 남녀평등의 수준이 높은 집단은 4대 원초적 폭력(전쟁, 살인, 새끼죽이기, 강간)이 없이 평화롭고 평등하다. 하하 -_-v. 이 문제에 대해서는 좀더 생각해 볼 것이 많다.

마지막으로, 책을 읽고 나서 생긴 추가 독서목록이다.

- 민족국가와 폭력, 앤서니 기든스
- The Anatomy of Human Destructiveness, 에리히 프롬
- 악마같은 남성, 랭햄 & 피터슨

쏘녀 2004-12-14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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環境学と平和学
戸田 清
2003

by 戸田 清 (Author)
3.2 3.2 out of 5 stars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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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1 pages

環境学と平和学は21世紀の人類にとってきわめて重要な実践的学問である。直接的暴力と構造的暴力の密接な連関を分析し、サブシステンス(人間社会の長期的な再生産)を重視する平和パラダイムの要件を探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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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c101
2 out of 5 stars論拠を示して欲しい
Reviewed in Japan on December 24, 2013
Format: Paperba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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主張は良いとして、著者がなぜそう思うのか、そう言えるのか裏付けなり、理由付けがすっ飛ばされているところが多すぎて、途中で読むのを止めてしまいました。独断的というか、賛同できるものもできなくなってしまうのです。

例えば、序章。「安保理常任理事会、米国政府、主要な多国籍企業などが事実上のグローバルな権力構造を形成しており、多くの民衆がその意思決定から疎外されている。世界社会の構造は民主的とは言えない」(以上!)といった調子。問題は、その一文で終わっていて、後にも先にもこの文を補強する議論がなされてはいないことです。少し補ってくれれば主張の内容自体は首肯できるものかもしれないのに、読者置いてけぼりのような印象でした。うまい導入という風でもない。

また、たくさんの文献から引いていることをオーバーにアピール(失礼!)されておられるけれど、いかにも中途半端で、「〇〇が〜〜と言っていることは重要だ」で終わり。なぜその引用が重要なのか、同書の議論の中にどのような位置づけがなされているのか、明確に示されておらず、説得的とは到底思えませんで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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篤郎
5 out of 5 stars平和学への新たな視点
Reviewed in Japan on June 21, 2006
Format: Paperback
 環境問題の研究は、今非常に盛んで、しかも、社会科学からのアプローチは非常に重要になっているだけでなく、学際的分野であるため、自然科学と社会科学の融合が起きています。

 本書では、環境問題の暴力の観点から分析し、平和学に新たな視点を提示しています。もはや平和学は、戦争がない状態、そして、社会的不平等がない状態だけを目指すのではなく、環境保全に対しても目を向け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を指摘するものといえましょう。

 そのためには、現在の軍需産業、そして多国籍企業による環境破壊をとりあげ、その背景にある構造的暴力を指摘する内容となっています。

 そして、環境破壊の悲惨な状況が人類の長い歴史の中で生まれ、さらに、今急速に人類的危機となっていることを理解するうえで重要な一冊であると思います。

 本書を読むことで、人類が世界規模で作り上げてきた「世界システム」を政治、経済、社会や文化にいたるまで、様々なシステムの変換を真剣に考える必要性を感じることになるでしょう。
환경 문제 연구는 지금 매우 활발하고 사회 과학의 접근은 매우 중요 할뿐만 아니라 학제 간 분야이기 때문에 자연 과학과 사회 과학의 융합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본서에서는, 환경문제의 폭력의 관점으로부터 분석해, 평화학에 새로운 시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평화학은 전쟁이 없는 상태, 그리고 사회적 불평등이 없는 상태만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보전에 대해서도 눈을 돌려야 한다는 것을 지적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현재의 군수산업, 그리고 다국적기업에 의한 환경파괴를 취해 그 배경에 있는 구조적 폭력을 지적하는 내용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환경파괴의 비참한 상황이 인류의 오랜 역사 속에서 태어나고, 게다가 지금 급속히 인류적 위기가 되고 있음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한 권이라고 생각합니다.

본서를 읽는 것으로, 인류가 세계 규모로 만들어 온 「세계 시스템」을 정치, 경제, 사회나 문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스템의 변환을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성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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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이구 시게루(宇井純) 등이 참여하고 녹색평론 편집부가 편역한 <환경학과 평화학>에 대한 요약과 평론이다. 요청한 지침에 따라 1,000 단어(글자 수 기준 약 2,500~3,000자 안팎의 분량) 규모로 서술한다. 본문은 독자를 향하지 않는 요약과 평론이므로 <해라> 체를 사용하여 작성하였다.

<환경학과 평화학> 요약

1. 환경 파괴와 구조적 폭력의 교차점

이 책은 현대 문명이 직면한 환경 위기와 평화의 부재가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 동일한 뿌리에서 자라난 쌍생아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저자 우이구 시게루는 평화학의 대부 요한 갈퉁의 <구조적 폭력> 개념을 환경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입한다. 평화학에서 말하는 폭력이란 단순히 물리적 군사 행동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인간의 잠재력 실현을 가로막는 사회적·구조적 불평등 전체를 포괄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환경 파괴는 강자가 약자에게, 자본이 노동자에게, 그리고 선진국이 개발도상국에게 가하는 가장 악질적인 구조적 폭력의 형태로 규정된다. 자본주의적 대량 생산과 소비 체제는 필연적으로 자연을 약탈하고 오염 물질을 배출하는데, 이 고통은 생산의 이익을 누리는 상류층이 아닌, 사회적 안전망에서 배제된 하층민과 후세대에 집중된다. 책은 환경 문제를 단순한 과학 기술의 미비나 관리의 실패가 아니라, 심각한 인권 침해이자 평화 파괴 행위로 재정의한다.

2. 가해자 중심 논리와 '공해 원론'의 실천학

우이구 시게루는 도쿄대 공학부에서 조수로 일하며 미나마타병 등 일본의 치명적인 공해 현장을 직접 조사하고 목격했던 실천적 학자이다. 그는 주류 학계와 관료 조직이 어떻게 오염 기업의 이익을 대변하고 가해자 중심의 논리를 만들어내는지 신랄하게 폭로한다. 국가와 자본은 환경 오염의 인과관계를 증명하는 과학적 기준을 지나치게 엄격하게 설정함으로써, 피해자들이 보상을 받거나 정화 조치를 요구하는 길을 원천 차단한다.

이에 대응하여 책이 제시하는 핵심 대안은 <공해 원론>의 시각, 즉 철저하게 피해자의 고통에서 출발하는 환경학이다. 과학 기술은 권력의 시녀가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도구여야 하며, 환경학은 책상 위의 수치 계산이 아니라 오염된 대지와 아파하는 인간의 현장에서 실천되어야 한다. 우이구 시게루의 사상은 기술 관료주의(Technocracy)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며, 지식인의 도덕적 책무를 묻는 준엄한 선언이다.

3. 군사주의와 생태계 파괴, 그리고 대안적 녹색 평화

녹색평론 편집부는 우이구 시게루의 논의를 확장하여 군사주의(Militarism)가 어떻게 지구 생태계를 파괴하는지 평화학적 관점에서 통합적으로 조망한다. 전쟁은 인간을 살상할 뿐만 아니라, 환경을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초토화하는 최대의 환경 파괴 행위이다. 핵무기 개발과 군비 경쟁에 투입되는 막대한 자원과 에너지는 그 자체로 지구 온난화와 생태계 교란을 가속화하는 주범이다.

결과적으로 이 책은 참된 평화란 전쟁이 없는 상태(소극적 평화)를 넘어, 생태적 착취와 사회적 불평등이 해소된 상태(적극적 평화)여야 함을 설파한다. 녹색 담론과 평화 담론의 결합은 현대 산업 문명의 발전 패러다임 자체를 전환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귀결된다. 인간과 자연이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를 청산하고 연기적 공존을 이룰 때에만 인류의 지속 가능한 미래가 가능하다는 것이 이 책의 일관된 메시지이다.

<환경학과 평화학> 평론

1. 학제적 장벽을 허문 '생명 중심적' 통합 모델의 선구

이 책의 가장 독보적인 학술적 성과는 환경학과 평화학이라는 전혀 다른 두 학문 분과를 <생명>이라는 가치를 중심축으로 삼아 유기적으로 통합했다는 점에 있다. 기존의 환경학이 오염 물질의 수치를 측정하고 기술적 해결책을 모색하는 자연과학적·공학적 영역에 머물렀다면, 평화학은 국가 간의 갈등이나 사회 구조적 불평등을 다루는 사회과학의 영역에 치중되어 있었다.

<환경학과 평화학>은 이러한 이분법적 장벽이 현대 문명의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환경 파괴의 이면에는 자본의 탐욕과 권력의 불평등이라는 구조적 폭력이 도사리고 있으며, 반대로 군사적 갈등의 이면에는 자원 확보를 위한 생태적 약탈이 존재한다. 두 학문의 결합은 단순한 학제적 융합을 넘어, 현대 사회의 다층적 위기를 진단하고 처방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 담론, 즉 <생태 평화학>의 이론적 초석을 놓았다는 점에서 선구적 가치를 지닌다.

2. 기술 관료주의의 위선 고발과 현장 중심의 에피스테메

우이구 시게루의 비판은 학문의 중립성이라는 환상 뒤에 숨은 과학 기술계의 위선을 정면으로 타격한다. 과학이 객관성이라는 미명 하에 권력과 자본의 환경 파괴를 정당화하는 논리를 제공해 왔다는 그의 지적은 오늘날 기후 위기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탄소 배출권 거래제나 공학적 기후 수정 기술처럼, 문제를 일으킨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환경 위기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현대의 탄소 자본주의에 대한 강력한 경고이기 때문이다.

그가 주창한 <공해 원론>은 지식 생산의 주체를 전문가에서 피해자와 시민으로 이동시키는 전복적 성격을 갖는다. 고통받는 현장의 목소리야말로 환경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정확한 데이터이며, 이들의 아픔에 공감하는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정서야말로 학문의 진정한 동력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지식의 민주화와 시민 과학(Citizen Science)의 중요성을 반세기 앞서 역설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3. '녹색평론'적 사유의 깊이와 문명 전환의 필연성

이 책을 편역한 <녹색평론> 편집부의 혜안 역시 평론의 맥락에서 짚고 넘어가야 한다. 우이구 시게루의 사상을 한국적 현실, 즉 압축 성장의 그늘 속에서 환경권과 생존권을 위협받아온 한국 사회의 맥락으로 매끄럽게 번역해 냈다. 단순한 서구식 환경주의(Environmentalism)가 자연 보존에 치중하는 반면, 이 책이 지향하는 생태주의(Ecologism)는 인간의 삶의 양식과 사회 구조의 전면적인 개혁을 요구한다.

이는 성장을 멈추고 자발적 소박함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명평화운동의 실천적 강령과 정확히 맞물린다. 개발주의와 군사주의가 결탁하여 국토를 파괴하고 공동체를 해체하는 현실에 맞서기 위해서는, 생태적 각성과 평화적 연대가 동시적으로 가동되어야 함을 이 책은 논리적이면서도 서정적인 언어로 설득한다.

4. 결론: 기후 불평등 시대에 다시 읽는 고전의 무게

<환경학과 평화학>은 출간된 지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유지하고 있는 고전이다. 오늘날 전 지구가 겪고 있는 기후 위기는 선진국과 부유층이 저지른 대가성이 폭력을 개발도상국의 빈민과 취약 계층이 온몸으로 받아내는 <기후 불평등>의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우이구 시게루와 녹색평론이 경고했던 환경적 구조 폭력의 극단적 발현이다.

인간이 자연을 착취하는 논리와 인간이 인간을 억압하는 군사주의적 논리는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따라서 환경을 살리는 길은 곧 평화를 이루는 길이며, 그 역도 참이다. 이 책은 우리에게 단순한 환경 보호론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체제의 모순에 도전하는 생명 평화의 주체가 될 것인가라는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자본과 기술이 구원해 줄 것이라는 낙관론을 거부하고, 생명 존중과 평화의 연대라는 근본적인 길을 제시하는 이 책의 울림은 여전히 깊고 푸르다.

추천해 드린 서적 중 하나인 <환경학과 평화학>에 대한 상세한 요약과 평론을 작성해 드렸습니다. 혹시 요한 갈퉁의 구조적 폭력 개념이 환경에 적용되는 구체적 사례나, 우이구 시게루의 공해 원론 사상에 대해 더 깊이 알고 싶으신 부분이 있다면 언제든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

<환경학과 평화학> (우이구 시게루, 녹색평론 편집부 편역)은 일본의 환경학자이자 평화운동가인 우이구 시게루가 환경문제와 전쟁문제를 하나의 구조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책이다. 환경파괴와 군사주의를 별개의 문제로 보지 않고, 현대 문명의 근본 원리 자체를 비판한다는 점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요약

1. 환경문제와 평화문제는 같은 뿌리를 가진다

우이구 시게루의 기본 명제는 단순하다.

<환경파괴와 전쟁은 동일한 문명 구조의 두 얼굴이다>

일반적으로 환경운동은 오염·기후·생태계를 다루고, 평화운동은 군비·전쟁·핵무기를 다룬다.

그러나 저자는 둘을 분리하는 순간 문제의 핵심을 놓친다고 본다.

그가 보기에 현대 산업문명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다.

  • 무한 성장 추구
  • 자연의 대상화
  • 기술만능주의
  • 국가 간 경쟁
  • 군사력 중심 질서

이 구조 속에서 환경파괴도 발생하고 전쟁도 발생한다.

따라서 전쟁을 반대하면서 성장주의를 유지할 수 없고, 환경을 보호하면서 군사주의를 묵인할 수도 없다고 말한다.


2. 근대 문명 비판

저자는 근대 산업문명의 발전 과정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근대는 생산력을 크게 증가시켰다.

그러나 동시에

  • 식민주의
  • 자원 수탈
  • 대량생산
  • 대량소비
  • 대량폐기

를 낳았다.

특히 자연을 단순한 자원으로 보는 시각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산은 광산이 되고,

강은 수력발전소가 되고,

숲은 목재 생산지가 된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자연과의 관계를 상실한다.

저자는 이를 단순한 환경문제가 아니라 가치관의 위기라고 본다.


3. 군사주의와 환경파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 중 하나는 군사주의 분석이다.

전쟁은 단순히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다.

전쟁은 거대한 환경파괴 과정이다.

예를 들면

  • 베트남전의 고엽제
  • 핵실험
  • 핵무기 생산
  • 군수산업

등은 엄청난 생태계 파괴를 낳는다.

특히 군사기술은 평시에도 환경을 오염시킨다.

군수산업은 막대한 자원을 소비하고,

군대는 세계 최대 규모의 화석연료 소비 집단 중 하나다.

저자는 평화 없는 환경보호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4. 핵문명 비판

우이구 시게루는 일본 반핵운동의 대표적 지식인이었다.

따라서 핵문제에 많은 분량을 할애한다.

그는 핵발전과 핵무기를 동일한 기술체계의 산물로 본다.

둘 다

  • 고도의 중앙집중성
  • 전문관료 통제
  • 위험의 은폐
  • 민주적 통제의 어려움

을 공유한다.

일본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경험을 가지고도 원자력 발전 확대 정책을 추진한 것은 근본적 모순이라고 비판한다.


5. 지역 공동체의 중요성

저자는 거대한 국가와 시장이 아니라 지역사회에 주목한다.

지속가능한 사회는

  • 지역 자립
  • 주민 참여
  • 생태적 생활양식

위에서 가능하다고 본다.

그는 중앙정부와 대기업이 주도하는 개발 모델보다,

지역 주민이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높게 평가한다.

이 점은 녹색사상과 공동체주의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6. 시민운동의 역할

저자는 전문가나 정치인보다 시민의 역할을 강조한다.

환경오염과 군사주의는 모두 권력 집중의 결과다.

따라서

  • 시민 감시
  • 주민 참여
  • 풀뿌리 민주주의

가 중요하다.

환경운동과 평화운동은 서로 협력해야 하며, 하나의 사회변혁 운동으로 발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평론

1. 오늘날 더욱 중요해진 문제의식

이 책은 출간된 지 시간이 지났지만 오히려 현재 더 중요해졌다.

기후위기 시대에 우리는 점점 더 분명히 보고 있다.

  • 기후위기
  • 자원 경쟁
  • 지정학 갈등
  • 군비 경쟁

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 우크라이나 전쟁
  • 중동 전쟁
  • 희토류 경쟁
  • 에너지 안보 문제

는 환경과 평화를 분리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우이구의 통찰은 상당 부분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2. 녹색평론 독자들에게 익숙한 문제의식

한국 독자에게는 김종철의 녹색평론 계열 사상과 매우 가까운 느낌을 준다.

공통적으로

  • 성장주의 비판
  • 생태주의
  • 지역 자립
  • 공동체 회복

을 강조한다.

세진님께서 관심을 가져오신 대안경제, 생태마을, 공동체 운동과도 연결되는 부분이다.

특히 세진님이 살고 계신 로키엘 파크의 생태 공동체 실험은 이 책이 말하는 "작은 규모의 지속가능한 공동체"와 상당히 닮아 있다.


3. 한계

그러나 몇 가지 한계도 있다.

첫째,

국가 간 현실 정치의 문제를 다소 낙관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전쟁이 단지 성장주의의 산물만은 아니다.

민족주의,

종교,

안보 딜레마,

권력 경쟁도 중요한 요인이다.

둘째,

지역 공동체에 대한 이상화가 있다.

공동체가 항상 민주적이고 평화로운 것은 아니다.

배타성과 보수성이 나타날 수도 있다.

셋째,

현대 과학기술에 대한 비판이 지나치게 포괄적일 때가 있다.

기술은 파괴의 수단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환경 복원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


4. 세진님의 관심사와의 연결

이 책은 세진님이 오랫동안 관심을 가져오신 세 가지 주제와 직접 연결된다.

① <평화와 화해>

한반도 평화, 동아시아 화해 문제는 군사주의 구조를 넘어서는 문제와 연결된다.

② <대안경제>

성장주의와 소비주의를 넘어서는 경제 모델에 대한 탐구와 연결된다.

③ <생태 공동체>

아쿠아포닉스, 도시농사, 로키엘 파크 공동체 생활과 연결된다.

우이구는 단순히 자연을 보호하자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평화로운 사회가 곧 생태적인 사회이며, 생태적인 사회가 곧 평화로운 사회다>

라고 주장한다.

종합 평가

<환경학과 평화학>은 환경문제와 전쟁문제를 하나의 문명 비판 틀 안에서 통합적으로 이해하려는 고전적 녹색사상의 대표작이다.

오늘날 기후위기와 지정학적 갈등이 동시에 심화되는 시대에 이 책의 핵심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하다.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환경을 파괴하는 문명은 결국 인간도 파괴하며, 평화 없는 생태주의도 지속될 수 없다>고 말하는 책이다.

===

2026/05/30

길과 꽃 - 도법 스님 1966~, 끝나지 않는 생명의 순례 | 김왕근 | 알라딘 2017

길과 꽃 | 김왕근 | 알라딘
길과 꽃 - 도법 스님 1966~, 끝나지 않는 생명의 순례
김왕근 (지은이)불광출판사2017





































미리보기




책소개
우리시대를 대표하는 생명평화 사상가이자 활동가인 도법 스님. 열일곱 출가 이후, 간디와의 만남, 화엄경 탐독, 종단개혁, 인드라망생명공동체 창립, 생명평화 탁발순례, ‘붓다로 살자’ 운동, 평화의 꽃길, 기쁨의 세월호까지, 지난 50여 년 동안 스님은 이 땅에 무엇을 싹 틔우려고 한 것일까?

3년 동안의 질문과 답변, 그리고 함께한 공부와 일들. 이 축적 속에서 저자가 본 도법 스님은, 『화엄경』이라는 무변(無邊)한 세계에서 찾은 길 위에 ‘생명평화’라는 꽃을 피우고자 늘 깨어 있었다. 이 책은 이상을 꿈꾸는 현실주의자, 도법 스님의 삶 마디마디에 망울져 있는 뜻을 추적하며, 신념을 꽃피우며 살아간다는 것을 성찰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목차


감사 말
프롤로그

1부 길 찾기
1. 출생, 출가 그리고 화두(話頭)
2. 성철, 지월: 도법과 스승들
3. 간디와 화엄경: 책에서 길을 찾다

2부 혁명
4. 혁명을 향한 성찰: 화엄학림과 선우도량
5. 종단개혁, 종단사태, 백인 대중공사: 종단 내 민주주의를 이끌다

3부 진리
6. 인드라망생명공동체
7. 생명평화결사운동과 탁발순례
8. 생명평화무늬: 불교 세계관의 시각화
9. “붓다로 살자”: 불교 실천론의 요약

4부 실천
10. 21세기 아쇼카선언: 종교 간 벽 허물기
11. 민중총궐기와 ‘평화의 꽃길’: 불교와 민주주의가 만나다
12. 기쁨의 세월호: ‘깨달음의 사회화’를 위한 분투

5부 공부
13. 붓다의 공부방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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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김왕근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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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알림 신청

신문기자, 논술강사, 토론코치 등의 직업을 거쳤다. 언어로 소통하는 일을 평생 했기 때문에 스스로 ‘소통전문가’를 자처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주변 인물들과 갈등을 겪었고 “왜 소통 전문가인 내가 소통을 못하는가?”라는 의문을 갖게 됐다. 2013년 여름, 도법 스님과 인연을 맺은 후 불교 주변을 어슬렁거리면서 마음을 다스리는 능력이 향상되는 경험을 했다. 소통 중에는 논리의 소통 이외에 정서의 소통이 중요함을 깨달았고, 이를 위해 불교가 이 사회에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모든 사람이 붓다의 마음으로 소통하는 사회’가 그의 꿈이다.
접기

최근작 : <길과 꽃>


출판사 소개

출판사 제공 책소개
이상을 꿈꾸는 현실주의자, 도법 스님의 삶과 뜻

“생명은 자기 몸의 아픈 곳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불교도 세상의 아픈 곳을 보듬어야 한다.” - 도법

우리시대를 대표하는 생명평화 사상가이자 활동가인 도법 스님. 열일곱 출가 이후, 간디와의 만남, 화엄경 탐독, 종단개혁, 인드라망생명공동체 창립, 생명평화 탁발순례, ‘붓다로 살자’ 운동, 평화의 꽃길, 기쁨의 세월호까지, 지난 50여 년 동안 스님은 이 땅에 무엇을 싹 틔우려고 한 것일까?
3년 동안의 질문과 답변, 그리고 함께한 공부와 일들. 이 축적 속에서 저자가 본 도법 스님은, 『화엄경』이라는 무변(無邊)한 세계에서 찾은 길 위에 ‘생명평화’라는 꽃을 피우고자 늘 깨어 있었다. 이 책은 이상을 꿈꾸는 현실주의자, 도법 스님의 삶 마디마디에 망울져 있는 뜻을 추적하며, 신념을 꽃피우며 살아간다는 것을 성찰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길을 나서다
만으로 열일곱이던 1966년, 도법은 김제 금산사로 출가한다. 2년 뒤인 1968년,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은 도법, 출가자는 세속과 인연을 끊어야 한다는 가르침에 따라 평소처럼 생활하던 그를 한 사미승이 불러냈다. “어머니가 위독하시다는데, 니가 아무리 중이지만 어머니 아들이다.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느냐.”
이 말에 ‘어머니’가 아닌 ‘삶과 죽음’ 문제가 가슴에 사무친 도법은 죽음을 경험해보자는 데까지 생각이 미친다. 한밤중 다리 위에 선 그는, 장마로 물이 불어난 하천을 바라보다 퍼뜩 정신을 차린다. “아, 여기서 뛰어내려서 죽으면 삶이 끝나니까, 죽음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죽고 마는 것이구나.”
도법은 삶과 죽음의 문제를 풀고 싶었다. 금산사에 가만있어서는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도법은 은사스님께 말씀드리고 합천 해인사로 길을 나선다.


간디와 화엄경
당시 해인사는 한국 불교의 수도였다. 성철 스님(1912~1993)이 구축한 엄격한 수행 가풍 아래로 도(道)를 찾는 수많은 승려들이 운집했다. 도법 역시 문제 해결의 기대를 품고 해인사로 향했다. 하지만 성철 스님 가르침으론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이후 도법은 김천 수도암, 순천 송광사를 거쳐 다시 해인사를 돌며, 참선해서 도인 되겠다고 몸부림쳤다.
그렇게 보낸 10여 년의 끝인 1970년대 후반, 도법은 간디 자서전을 만난다. 인간에 대한 무한한 자비의 마음으로 불살생을 실천했으며 비폭력 불복종으로 인도 독립운동을 주도했고, 영국 제국주의에 저항하면서도 영국을 미워하지 않은 간디. 그는 힌두교도였지만, 도법에게는 “석가모니 붓다의 정신에 가장 충실한 사람”으로 보였다. 이를 계기로 도법은 붓다의 삶과 불교경전을 ‘사회적’ 시각에서 재해석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도법은 『화엄경』도 만났다. 『화엄경』을 통해, 모든 존재가 서로 평등하게 연결되어 조화롭게 존재하고 있으며 ‘생활이 곧 도(道)’임을 깨달았다. “세계를 포용하는 크나큰 인간의 가슴, 생명을 향한 깊고 깊은 애정의 관심, 이웃-생명-세계를 가꾸기 위한 뜨거운 정열의 헌신이 우리들 인간 자신에게 갖추어져 있음을 생각할 때 환희가 솟구침을 느낀다. 인생이란, 삶이란 정말 이래야 된다고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사회 속에서, 생활 속에서 불교를 실천하겠다고 마음먹은 도법은 1990년, 도반들과 함께 불교의 풍토를 바꾸고자 ‘착한 벗들의 수행 공동체’인 ‘선우도량(善友道場)’ 결사운동을 시작한다. “오늘 우리가 직면한 불교의 현실은 올바른 수행의 부재로부터 그 원인을 찾는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위로하고, 기뻐하고, 나누는 실천행으로 새로운 승풍(僧風)을 바로 세워야 한다.”
불교 개혁에 나선 도법은 이후 94년 종단개혁, 98년 종단사태에서 ‘개혁의 아이콘’이 된다.


생명평화의 길을 걷다
도법의 이러한 성찰은 1998년 문을 연 ‘실상사 불교귀농학교’, 1999년 창립된 ‘인드라망생명공동체’라는 모습으로 기어코 현실화된다. 이 둘을 통해 도법은 우리 사회가 “세계, 산천, 초목, 부처님, 보살, 중생, 이것과 저것, 시간과 공간, 유정과 무정 등 모두가 함께 어울려 출렁이는 생명의 큰 바다”가 되길 바라는 큰 꿈을 이루고자 했다.
드디어 2004년, 도법은 ‘생명평화 탁발순례’를 시작한다. 그해 3월 1일부터 2008년 12월 12일까지 장장 1,747일 동안 3만 리를 걷고 8만 명을 만난 이 순례를 통해, 상호의존의 세계관과 동체대비(同體大悲, 너와 내가 한 몸임을 자각하여 내는 큰 자비심)의 실천론을 축으로 하는 도법의 생명평화 사상은 완성된다.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때로는 누룽지를 끓여 먹고, 출발지에 집합해서 생명평화백배서원 절명상 하고, 걷고, 점심 먹고, 그날 종점에서 절명상 하고, 저녁 먹고 대화하는” 일상을 반복하며 성찰하고 확인한 생명의 구체적 양상이 사상에 생명력을 부여한 것이다.
이전부터도 그래왔지만, 이후 도법의 모든 행보는 ‘너와 나를 함께 살리는’ 생명평화의 길 위에서 이뤄진다.


정의(正義)를 새롭게 정의(定義)하다
2001년, 도법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부처님은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부처님은 바른 것을 드러내기 위해 어떤 것과도 타협하지 않은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노해야 할 대상에 화내지 않고 증오해야 할 대상을 미워하지 않고 파사현정(破邪顯正, 삿된 것을 깨뜨리고 바른 것을 드러냄)의 길을 가신 분이 부처님입니다.”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세상을 등졌을 때는 다음과 같은 글을 쓴다.
“만일 당신과 나라는 인간 존재가 좌익, 우익, 친북, 친미 따위보다 더 근본적인 가치이고 더 귀중한 존재임을 가슴에 고이 간직하고 있었어도 극단적인 좌우대립 동족상잔 남북분단의 비극이 벌어졌겠습니까? 그래도 오늘의 비극과 고통이 일어나겠습니까?”

언뜻 반대로 읽히는 이 두 발언은, 사실 근본 뜻에서 차이가 없다. 도법에게 정의(正義)란 “한 몸인 너와 내가 함께 사는 생명의 길”이므로, 그는 ‘선(善)’뿐만 아니라 ‘악(惡)’과도 ‘잘’ 공존하는 길을 모색한다. 도법은 악을 뿌리 뽑아 없애는 게 가능한 일도 아니라고 본다. 선악은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붙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악을 증오하지 않고, 악과 마주쳐 상처받지도 말고, 악에게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찾자며 머리를 맞대는 것이 된다. 이런 행보를 밟기에 도법은 수많은 비판에 직면해 있다.


출가 후 50여 년, 도법 스님 중간점검
도법은 누구보다 많은 존경과 많은 비판을 동시에 받는 인물이다. “생명평화를 위한 순례자” 도법은 존경을 받지만, “성격 급한 스님들이 적지 않은 불교계에서 대표적인 대화론자”인 도법은 비판을 받는다.
종교평화선언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다른 종교(기독교)에 무릎을 꿇는다고 비판을 받았고, 조계사에 들어온 한상균 민주노총위원장을 경찰에 내주었다고 비판을 받았으며, 세월호의 슬픔을 세월호의 기쁨으로 전환하자고 제안해 또 비판을 받았다. 그가 무슨 문제이든 대화로 풀고자 노력하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약자의 편을 드는 대신 강자의 입장을 두둔하는 모양새를 보이기 때문에, 능력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기 때문에 도법은 비판을 받는다. 어디까지가 정당한 비판일까? 비판을 하며 그와 거리를 두고 외면하는 대신, 비판을 하되 그와 함께하며 우리사회를 더 낫게 만들 수는 없을까?
이 책은 문제적 인간, 도법의 입장에서 그의 50여 년 승려의 삶을 돌아본다. 베트남 출신 승려이자 평화운동가인 틱낫한은 말한다. “누군가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의 피부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참된 이해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이해하려는 대상이 되는 것이다.” 진정 도법은 어디를 향해 가고 있을까? 이 책이 그를 이해하고 (그를 긍정하든 부정하든) 그와 함께할 수 있는 길을 가늠할 수 있게 해주는 한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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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길과 꽃

자주 못 가지만 미사에 참여하는 것을 좋아한다. 미사를 드릴 때면 ‘예수라는 한 사내‘와 그의 삶을 생각한다. 그가 행한 기적이나 부활의 이야기보다 내게는, 처형당하기 전날 사람들을 모아놓고 벌인 만찬이나, 십자가에 매달린 채 하늘을 향해 왜 나를 버리셨느냐고 울부짖었다는 ‘인간‘ 예수의 이야기가 어쩐지 더 가슴에 와닿았다. 그의 삶과 죽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을 어머니 마리아의 마음도.

예수는 인간이 이렇게 살 수도 있구나 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었고, 사람들은 그걸 잊지 않기 위해 책으로 기록하고, 정기적으로 모여 그가 한 이야기를 되새기고, 그가 했던 만찬을 재현하기로 했다. 내가 알기로는 이것이 성경이고 미사다. 미사에서 신부님이 포도주 잔을 높이 들고 ˝너희는 모두 이를 마셔라. 이는...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라는 구절을 읊을 때마다, 세상을 위해 자신의 몸을 내어놓을 각오를 한 사내의 힘든 결심, 그 선한 마음을 떠올린다. 이렇게 산 사람도 있는데 나는 어떻게 살고 있나 생각한다. 이게 나에게 미사다. 비슷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 입을 모아 같은 이야기를 읊고, 기억하고, 노래할 때 느껴지는 따뜻한 일체감은 내가 미사를 좋아하는 또하나의 이유다.

기독교와 불교는 다르다면 완전히 다른 종교지만 내게는 비슷하다. 한 인간이 그의 삶을 온통 바쳐 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달았고,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깨달은 것을 이야기했고, 직접 삶을 통해 보여주었다.

작년 봄부터 참가하고 있는 불한당(불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모임)에서 도법스님께 들은 불교의 핵심은, 우리 안에 이미 붓다의 마음이 갖추어져 있고, 우리는 그것을 깨닫고 그대로 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가르침은 이렇게 쉽고, 명확하고, 현실적인데, 삶은 여전히 어렵다.

나와 너무 다른 사람들에 대한 피곤과 분노, 내 바램과는 달리 곁에 머물지 않고 떠나는 것들에 대한 슬픔, 미래에 대한 온갖 걱정과 불안, 그리고 삶이, 이 모든 노력이 무슨 의미가 있긴 한가 하는 자괴감과 허망함 같은 것들이 삶을 짓누른다. 오죽하면 붓다도 깨달음을 얻은 후 ˝내가 아무리 진리를 설해도 이기심에 가득 찬 중생들이 그 진리를 알아들을 수 있을까, 이는 스스로를 지치게 하는 일일 뿐이지 않을까.˝라며 망설였을까(이 대목을 읽으며 반가워서 울 뻔했다. ˝나 이 심정 알아!˝하고).

얼마전 불한당의 김왕근님이 쓰신 도법스님 평전 ‘길과 꽃‘을 읽었다. 에필로그에 이런 말이 나온다.
‘석가모니를 신의 자리에서 인간의 자리로 끌어내리는 것이 불교를 살리는 길이다. 석가모니가 인간이어야 우리가 그를 본받을 수 있다. 석가모니를 인간으로 알고, 또한 우리 자신이 바로 ‘붓다‘임을 알고 살자는 것이 ˝붓다로 살자˝ 운동이다.‘

‘(절대자로서의) 신이 있는가, 나는 그의 존재를 믿는가‘라는 의문은 보류해두었다. 절대자라면 당연히 강인하고 옳게 살았겠지. 근데 나는 그냥 약한 인간일 뿐이지 않나. 지금 내게 간절히 필요한 것은 내 소원을 들어주고 기적을 일으켜줄 신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자신의 온 삶으로 보여주는,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고 생각하게 하는, 그래서 쉽지 않은 이 삶을 한걸음 한걸음 걸어가게 해줄 나와 같은 ‘인간‘이다.

어려운 것은 깨달음이 아니라 깨달음 후의 삶이다. 우리 인간의 마음은 너무 연약하고 잘 잊어버리니까. 기도를 하고 미사를 드리고 수행을 하는 것은 절대자에게 소원을 빌기 위해서도, 어떤 형이상학적인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도 아니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잊지 않기 위해서다. ‘모든 것이 불타고 있는‘ 일상이라는 전쟁터에서 ‘자신의 감각이나 탐욕, 분노에 붙들리지 않고 부처의 마음을 내고 살아가는 훈련‘을 하는 것이다. 도시락을 싸듯 그렇게 준비한 ‘마음‘을 가지고 또 하루하루 일상이라는 전쟁터로 나간다.

도법스님은 평생 이것을 해온 분이다. 도법스님이 쓰신 책이나 도법스님의 강연, 말씀을 옮겨적은 책들을 몇권쯤 읽었지만 정작 도법스님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관한 책은 처음이다. 열여섯에 출가해 간디와 화엄경을 만난 이야기, 안으로는 종단개혁과 대중공사, 밖으로는 실상사 불교귀농학교와 인드라망생명공동체, 최근의 한상균 위원장 관련 사태와 ‘평화의 꽃길‘까지, 도법스님은 시대의 가장 뜨거운 전쟁터 한가운데 있었다. 한 인간으로서의 도법스님의 고민, 노력, 깨달음을 보며 ‘인간이 이렇게 살 수도 있구나‘라고 또 생각했다.
나도 이렇게 살고 싶다고.

덕분에 삶은 더 복잡해졌다(;ㅅ;). 이전에는 의견이 다른 사람을 굳이 설득하려 하지 않았고, 나와 맞지 않는다 싶으면 무슨 일이든, 무슨 관계든 미련없이 발을 뺐다. 그런데 이제는 한번 더 마음을 내고, 한번 더 얘기해보자 생각한다. 어디까지가 최선이고 어디서 그만둬야하는지를 아직은 잘 모르겠어서 힘이 든다. 신기한 것은 사람들과 부대끼는 와중에 이전처럼 내가 자괴감을 느끼거나 피폐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의견이 다른 사람과 부딪힐 때 ˝위협적으로 들리는 험악한 말도 잘 들어보면 ˝내 삶을 도와달라˝는 간절한 요청일 때가 많다˝는 이 책의 한 구절을 되새긴다. 그 사람의 말과 더불어 그 사람을, 그 사람의 처지와 마음을 들여다본다. 거기에 나와 다르지 않은 마음을 가진 한 사람이 있다. 우리는 서로의 슬픔, 절망, 혹은 탐욕이나 거짓을 바라보고, 그것을 바라보는 상대방을 바라본다. 우리는 얘기를 할 수도 있고, 더 나은 해결책을 낼 수도 있다. 애써 준비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도법스님은 ˝찻잔으로 물을 떠내면 호수는 찻잔 한 잔만큼 달라지고, 절을 하기 전이나 절을 한 다음이나 비슷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절한 만큼 달라진다˝고 말했다. 여기에 적어도 상대방을 더 깊이 들여다보는 달라진 내가 있고, 내가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상대방이 아는 만큼 상대방은 달라질 수 있다.

생각해보면 쉽지 않은 삶을 한걸음 한걸음 걸어가게 하는 게 어디 예수나 석가모니, 도법스님 뿐일까. 내가 지켜보는, 나를 지켜봐주는 모든 인간이 나를 이끌어가는 ‘붓다‘이다.
그렇게 서로를 지켜봐주는 것이 사실은 우리 삶의 의미가 아닐까.

발췌 보기 : http://noyuna.tistory.com/2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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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na 2017-05-22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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