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6/24

불교/타 종교 간의 관계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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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타 종교 간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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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편집]

삼명(三明)을 갖춘 바라문으로서 일찍이 한 사람이라도 하느님[1]을 본 자가 있는가?
만일 본 일도 없고 볼 수도 없는 하느님을 믿고 받든다면,
마치 어떤 사람이 한 여인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의 얼굴을 본 일도 없고 이름도 거처도 모른다는 것과 무엇이 다르리요.

- 잡아함 권16 삼명경
비구들이여, 참으로 긴 세월이 지난 그 어느 때, 어느 곳에서 이 세상은 무너지는 때가 있다. 세상에서 대부분의 중생들은 광음천에서 태어나게 된다. 마음으로 이루어진 그들은, 희열(喜,기쁨)을 음식으로 삼고, 스스로 빛나고, 허공을 다니고, 깨끗한 존재로 오랫동안 긴 시간을 머문다."

2.3 "비구들이여, 참으로 긴 세월이 지난 그 어느 때, 어느 곳에서 이 세상은 다시 이루어진다. 이루어 지는 세상에 비어 있는 범천의 하늘 궁전이 나타난다. 그때 어떤 중생이 수명이 다하고 공덕이 다하여 광음천의 무리에서 떨어져서 비어 있는 범천의 하늘 궁전에 태어난다. 그는 거기서 마음으로 이루어지고, 희열을 음식으로 삼고, 스스로 빛나고, 허공을 다니고, 깨끗한 존재로 오랫동안 긴 시간을 머문다."

2.4 "그는 그곳에서 오랜 세월 홀로 살았기 때문에 싫증과 동요가 생긴다. '다른 중생이 여기에 왔으면!'이라고. 그때 중생들도 수명이 다하고 공덕이 다해서 광음천의 무리에서 떨어져 범천의 하늘 궁전에 태어나 그 중생의 동료가 되었다. 그들도 역시 거기서 마음으로 이루어지고, 희열을 음식으로 삼고, 스스로 빛나고, 허공을 다니고, 깨끗한 존재로 오랫동안 긴 시간을 머문다."

2.5 "비구들이여, 그때 첫 번째로 태어난 중생에게 이와같은 생각이 든다.
'나는 범천이요, 대범천이고, 정복자요, 정복되지 않는 자요, 모든 것을 보는 자, 지배자, 권능을 가진 자, 창시자, 창조자, 으뜸이 된 자, 신분을 부부여하는 자, 주인, 과거와 미래의 것들의 아버지다. 나야말로 이 중생들의 창조자이다. 나에 의해 이 중생들은 창조되었다. 무슨 이유 때문인가? 전에 내게 '다른 중생이 여기에 왔으면!'이라고 는 생각이 일어났고, 그러한 내 마음의 바램 때문에 이 중생들이 여기에서 생겨났기 때문이다.'라고.

나중에 그곳에 태어난 중생들에게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범천인 이 존자는 대범천이고, 정복자요, 정복되지 않는 자요, 모든 것을 보는 자, 지배자, 권능을 가진 자, 창시자, 창조자, 으뜸이 된 자, 신분을 부부여하는 자, 주인, 과거와 미래의 것들의 아버지다. 범천인 이 존자에 의해 우리는 창조되었다. 무슨 이유 때문인가? 우리는 이분이 여기에 먼저 계신 것을 보았고, 우리는 나중에 태어났기 때문이다.'라고."

2.6 "비구들이여, 거기서 먼저 태어난 그 중생은 수명이 더 길고, 더 아름답고, 더 큰 위력을 가졌다. 그리고 나중에 태어난 중생들은 수명이 더 짧았고, 더 못 생겼으며, 더 작은 위력을 가졌다.
비구들이여, 그런데 그 중 어떤 중생이 그 무리로부터 죽어서 지금 상태(今生,금생)로 오는 경우가 있다. 지금 상태로 온 자가 집으로부터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다. 집으로부터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 자는 노력의 결과로, 정진의 결과로, 실천의 결과로, 불방일의 결과로, 바른 마음의 기울임의 결과로 마음이 삼매를 닦을 때 전생을 기억하는 마음의 삼매를 얻는다. 하지만 그는 바로 그 전생의 삶은 기억하지만 그 이상은 기억하지 못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범천인 그 존자는 대범천이고, 정복자요, 정복되지 않는 자요, 모든 것을 보는 자, 지배자, 권능을 가진 자, 창시자, 창조자, 으뜸이 된 자, 신분을 부부여하는 자, 주인, 과거와 미래의 것들의 아버지다. 범천인 그 존자에 의해 우리는 창조되었다. 그는 항상하고, 견고하고, 영원하며, 변하지 않는 존재인 그는 영원히 그렇게 계신다. 그러나 범천인 그 존자에 의해 창조된 우리는 무상하고 견고하지 않으며, 수명이 짧고 죽기 마련이며, 지금의 상태로 왔다(이곳에 태어났다.)' 라고

비구들이여, 그것 때문에, 그것과 관련하여 일부 영속 일부 비영속론자인 그 사문·바라문 존자들이 일부는 영원하고 일부는 영원하지 않은 자아와 세상을 선언하는 첫 번째 경우이다."

- 디가니까야 1, 범망경 中
법계(法界)와 그것에 속한 것들이 모두 마음이 지어낸 것들임을 알아야 하리라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 화엄경, 야마천궁 게찬품

불교는 타 종교의 신에게 무척 관대한 편이라고 알려져 있다. 일단 기독교이슬람 같은 절대자를 믿는 유일신교에 비하면, 다른 종교와 공존할 여지가 교리상 더 폭넓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실제 석가모니는 그의 가르침에서 당시 인도 반도의 다양한 종교들과 철학 학파들을 모두 외도라 하며 철학적으로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다. 또한 서구적 관념에서는 절대 신(神) 혹은 인도적 관점에서는 브라흐마 중심의 종교에 대해서도 (위에 나와있는 범망경의 사례와 같이) 그런 종교의 기원이 되는 '존재와 세계가 일부는 영속하고 일부는 영속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문들'의 예를 들어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불교가 타종교의 교리에 대해 관대한 것이라고 보기보다는 불교의 가르침의 핵심이 지혜와 자비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이 자비로 타 종교는 물론 모든 중생들에게 자비로운 것이라고 봐야 한다.

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불교는 이미 처음부터 그리고 발전하는 과정에서도 철학적으로 탄탄한 바탕을 자생적으로 갖추었다. 태생적으로 인도 반도의 여러 사유들과 교류했으며, 대승 불교의 경우 중국 철학과도 교류하며 발전했다.[2][3] 이러한 철학적 이미지 때문에 불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절대자를 믿는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들에 너무나 익숙한 서양인들은 불교를 종교가 아닌 하나의 철학으로 분류하기도 한다.[4]

그런 이유로 현대적인 관점에서 볼 때 다른 종교에 비해서 상당히 유화적인 게 특징이다. 그러나 평신도들이 하는 행태를 보면 이들이 불교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인지 아니면 석가모니 중심의 다신교를 믿고 있는 것은 아닐지 의심되는 면이 없지는 않다. 냉정히 말해 평신도들의 기복적인 신앙 모습은, 불교에 대한 이해가 깊은 불자가 아니면 다신교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이럴 때는 이 부처/보살에게 빌고, 저럴 때는 저 부처/보살에게 빌고. 다만 이를 크게 탓하기도 뭐한 것이, 불교의 기본은 자력으로 스스로를 구제하는 자력 구원이 중심이긴 하지만 초기부터 이미 부처/보살의 가피력으로 구원받는 타력 구원관이 존재했기 때문이다.[5] 또한 부처에게 개인적인 복을 빌다가 불경을 읽고 공부하면서 제대로 된 교리를 알게 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자비를 모토로 삼는 종교라고는 하나, 역사적으로 다른 종교를 배척하는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타 종교에게 무척 관대한 편이라곤 하지만 실은 본지수적. 즉, '부처가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다른 종교의 창시자나 성인으로 환생하거나 나타나는 것'이라고 하여 불교 외의 모든 종교를 불교의 열화상태, 혹은 하위호환으로 보기 때문이다. 지금의 힌두교를 보면 알겠지만 다신교라고 타 종교나 외국 선진 문물에 융화적일 줄 생각하면 경솔하다. 다만 그렇다고 해도 타문화와의 적응은 굉장한 수준. 이런 면은 현대 문명과 실시간으로 치고 박으면서 가장 잘 적응한 모습을 보여준 그리스도교를 능가할 정도. 메이저 종교 중 폭력으로 성장하는 사례가 적은, 몇 되지 않는 경우 중의 하나다.

물론 역사적으로 불교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던 폭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인도 반도의 마우리아 왕조와 쿠샨 왕조 같은 경우엔, 불교를 전파하기 위하여 주변국들은 정벌하고 먼 나라에서는 고승들을 파견해 전도하는 방법을 썼다. 한반도의 경우, 고려 시대 무신정권 시절 교종 계열 종파 승려들이 무신 정권에 대항해 난을 일으키기도 했고, 조선이 건국된 후 일부 고위 승려들이 하급 승려들을 모아서 조선 정부를 타도하고 불교국가의 부흥을 꾀하고자 당취(黨聚)라는 조직을 만들어, 계율을 어겨 타락한 승려를 응징함과 동시에, 주변 절들과 마을에 약탈과 방화, 살인을 벌이기도 했다(여기에서는 땡초를 참고)[6].

일본의 경우, 센코쿠 시대엔 말이 승병이지 무사들이 승려인 척했던 게 태반인 소헤이처럼 전쟁의 도구로 쓰였다. 그리고 도쿠가와 막부 시기에 불교 측에서 "부처극락 야소지옥"을 외치며 일본 내 가톨릭 신자들을 박해한 기록도 있고(...) 한편 동남아 상좌부 불교에서는 극단주의가 만연해지고 있는 실상이다. 참고

동아시아 불교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 번째는 처음 불교가 동아시아 여러 나라들에 도입될 당시 부처님=신이라는 관념하에 도입되었다는 것이다. 토속신앙에서 신과 부처를 혼용/동일시하거나, 삼국유사의 불교 도입 당시 신라 귀족들이나 일본 사서에서 모노노베 씨의 불보살들을 외국의 신으로 부르고, 불교 도입에 찬성한 소가 씨 역시 외국의 신이라는 주장 자체에는 반발하지 않는 모습이 보였다. 심지어는 조선에 서학이 들어왔을 때, 서학을 불교의 한 분파로 여기기도 했다.

다만 이는 동아시아에서 유달리 두드려져서 그렇지, 동남아권 남방 불교나 인도 본토에서도 어느 정도 나타난 현상인 것은 사실이다. 미얀마 같은 경우에도 토속신앙인 낫(정령)이 불교적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인도 본토에서도 인도의 토속신앙의 신들을 부처/보살, 명왕, 신중, 천인 등의 표현을 붙여서 흡수하기도 했다. 지모신 숭배가 모태가 된 지장보살이나 바라문교의 천신이었던 제석천, 태양신 신앙과 관련있으며 특히 밀교에서 중시하는 대일여래 등이 대표적인 경우.

주의할 점이라면 이 항목의 서술만 믿고 불교는 위선적인 불교라던가 종교 화합은 불가능하다라는 생각을 가지는것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는 점.
확실히 타 종교와 모순적인 점이 있거나 이로 인한 갈등이 있다곤 해도 종교의 벽을 허물고 갈등없이 지내는 종교인들은 많이 있다. 당장 법정 스님도 다양한 종교인들과 교류를 가졌으며, 개종을 고려하는 사람에게 어느 종교든 한길로 이어져 있으니 무리해서 개종하려 들지 말라며 타종교를 인정하셨던 분이다.

2. 힌두교[편집]

힌두교하고도 사이가 좋지 않아 힌두 경전을 보면 불교를 비하하는 대목이 상당히 많다. 흔히 사람들에겐 힌두교에서 비슈누의 화신 중 하나가 붓다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는 사실 비슈누가 붓다로 변신해서 악마들을 타락시켜 그들의 힘을 빼앗으려던 것이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다. 저 표현은 불법은 정법(正法)이 아니므로 악마들이 불법을 믿게 되면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서 힘을 잃게 된다는 논리에서 기인한다. 결국 엄청난 불교 모독이자 불교 신자들을 싸그리 악마로 치부해 버리는 광역도발인 셈이다. 로저 젤라즈니의 소설인 신들의 사회에서도 이러한 관계를 차용한 장면이 나온다.

역사적으로 불교는 브라만교가 힌두교로 진화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대승불교의 공세로 브라만교가 대위기를 맞이한 8세기, 인도 최대의 철학자로 일컬어지는 샹카라가 나타나 브라만교에 나가르쥬나의 공 사상을 나름대로 비판적으로 흡수 발전시켜 만든 것이 힌두교 베단타 학파이며 이로 인해 브라만교는 대변혁 힌두교로 전환되었다.[7] 그리고 힌두교는 인도 내에서 최종적으로 불교에 승리하게 되었다.

아무리 현대 힌두교가 불교의 교리에 큰 영향을 받아 둘 사이의 간극이 좁혀졌다고는 하나, 사실 교조 석가세존부터가 이미 사마나[8] 출신이다보니 교리의 내용면에서 여전히 몇가지 중요한 차이점을 보이고있다. 가장 대표적인 논쟁은 '아트만'에 관한 것으로, 즉, '고정불변하여 영속하는 자리가 있는가'의 문제에 관한 것이다. 쉽게 풀어 '나의 실체가 존재하는가' 정도의 논쟁으로 받아들이면 얼추 맞다. 힌두교는 '아트만(Atman)'을 인정하여 '나'의 실체'가 있음을 받아들이는 반면, 불교는 '안아트만(Anatman)' 혹은 '아나타(Anatta)'라고 하여 '나'의 '실체'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 '안아트만(Anatman)'을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 그 유명한 '무아(無我)'라는 용어이다. 이외에도 불교는 카스트를 인정하지 않는 점이라든가, 수행의 목적이나 방법[9][10], 중도사상[11] 등에서 힌두교의 주류와 의견을 달리한다.

인도 헌법의 아버지인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는 불합리한 카스트 제도의 근원이 힌두교에 있다고 보고 50만 명의 불가촉천민들과 합동 개종을 한 적이 있다.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 참고.

사실 여러가지면에서 유대교와 기독교의 관계와 비슷한 면이 많다. 불교는 힌두교(당시의 브라만교)를 원류로 하고 있으나, 그 원류에 반발하여 갈라져 나온 세력이고 기독교 역시 유대교를 원류로 하나 당시 유대교의 주류인 바리사이파에 반발하여 갈라져 나온 세력이다. 현재의 유대교가 예수를 인정하지 않듯이 현재의 힌두교 역시 석가모니를 인정하지 않는다. 위에 말했듯이 석가모니는 잘못된 방법을 가르쳐서 악마들을 몰락시키려는 의도였다고 깐다.

3. 자이나교[편집]

한역된 불교 경전에서는 이들을 육사외도의 일파로 간략하게 설명하는 편이지만, 남방 불교 경전에서는 자이나교 교리 및 신도들을 비판하는 내용이 상당히 많이 등장한다. 남방 불교의 자타카에서는 승리자라는 뜻의 자이나라는 이름 대신에 창시자 이름을 자이나교 교주의 본명인 '니간타 나라뿟다'라는 이름으로 이들을 소개한다.

불경이 중국에서 한역되는 당시에는 중국에 자이나교 신자들이 없는데다가 도교의 영향으로 채식을 강조하면서 자이나교를 비판하는 내용을 굳이 번역할 필요가 없던 반면, 스리랑카 등에서는 한동안 자이나교와 불교가 서로 경쟁하는 관계였기 때문에 이런 차이가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데바닷타 종파의 계율과 자이나교 계율이 상당부분 비슷하다.

4. 도교[편집]


도교와의 관계는 지금이야 별다른 마찰이 없지만 한때 잘 나갔을 때는 역사상으로 엄청나게 치고 받았다.[12] 중국 당나라 시절 도교경교와 함께 타 종교 배척, 숙청전이 꽤 화려했다. 당송 시기의 도교가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어느 정도 불교를 압도하던 시기가 있지만 그 이후엔 이렇다 할 국가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으니 유일하게 비빌 언덕이 민간이라 철저하게 민간신앙으로 파고들어 민간 도교 시대로 접어든다. 지금 와서는 민간 신앙과 도교와 불교가 사이좋게 이리저리 뒤섞여서 구분하기도 힘든 상태다.

노자의 사망이 불분명한 것을 양측에서 이용했는데 이른바 노자화호설이 화두가 되었다. 불교에선 청정법행경이란 위경까지 쓰면서 노자를 가섭존자의 환생이라 주장했고, 도교측에선 불경을 서쪽으로 떠난 노자의 이론이 되돌아온 것이라 주장했다. 그러나 노자화호설이 불교에서 창작한 것이란 설도 있어서 미묘. 참고로 <불교의 중국 정복>(에릭 쥐르허 저)이란 연구서에서는 노자화호설의 문헌 등장이 불교에서 먼저 나왔다는 점을 들어 불교 측의 창작이라는 주장을 지지하고 있다.

아무튼 이 설은 불교가 처음 중국에 전래될 당시[13] 중국인들의 중화사상에 호응해 불교에 대한 반감을 낮추는 데 나름대로 기여했고, 이후 양측에서 계속 잘 써먹다가 결국에는 원나라 당시 도교와 티베트 불교와의 교리논쟁에서 비판받기도 했었다. 지금도 노자화호설은 중국에서는 널리 퍼져있는 이론이다.

한국에서도 역사적으로 도교와 충돌이 있었다.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옛 귀족세력과 연결된 불교를 억제하기 위해 도교를 중국에서 수입하다가, 이것이 상당히 갈등을 일으켜서 고구려 멸망의 원인의 되었다는 설도 있다. 다만 이건 도교와 불교의 충돌이라고 보기에는 상당히 정치적인 사건이다.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쿠데타로 시해한 것은 당시 불교의 왕즉불 사상에 위배되는 행위였기 때문에 수많은 불교도들의 반발이 있어왔다. 그래서 연개소문이 선택한 일종의 사상통제책이 바로 도교의 수입이라는 것. 더욱이 연개소문과 사이가 좋을 리 없는 기존 정치세력들의 종교는 불교와, 불교랑 결합한 상태인 토착신앙이었다. 그런데 도교와의 충돌에 대해서는 고구려 후기부터 고분벽화에서 불교적인 요소가 점차 사라져가는 모습을 보이기에, 이에 대해서는 설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아도 다소 비판적인 주장도 있다.

당나라를 배경으로 한 명나라 때의 서유기에서는 불교와 도교가 중심적 위치를 반반씩 갖고 있다. 당장 손오공의 스승인 수보리 조사가 불교+도교적인 인물로 나온다. 손오공이 요괴에 홀렸던 왕에게 "삼교(유교까지 합쳐서)를 골고루 신봉하여 도사도 공경하고 스님도 존경하며 유능한 인재를 많이 기르시라"고 훈계하는 장면도 2번 정도 나온다. 이는 동북아시아의 전통적인 삼교론에서 나온 것으로, 당시에는 특별히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삼장법사와 함께 서역으로 가는 과정에서 나오는 도인들은 당나라 시기 도교VS불교의 극한 대립을 반영해서인지 도인이 활개치는 나라에서는 승려들은 부려먹히는 신세인데 사실 그렇게 된 게 요괴들이 도인 행세해서인 경우가 많다.

5. 유교[편집]

중국 성리학의 성립이 불교 사상과 중국에서의 선(禪)을 유학적으로 정리하며 탄생한 것이었기 때문에 유교와 불교는 동양문화권에서 함께 발전해 왔다고 볼 수 있다. 위의 도교와의 관계 문단에서도 설명했듯, 그다지 큰 반목없이 공존하기도 한 관계다.

이는 불교나 유교, 게다가 도교까지 모두 절대자인 신(神)을 가운데 두는 종교가 아니었으며 심신의 수양을 통해 자아발전을 이루는 면에서 공통점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서양의 기독교랑 다른 종교가 서로 대립하거나 유대교가 박해받거나 한 걸 보면 확실히 차이가 보인다. 현대의 한학자들은 대개 역사 연구를 통해 불교사와 핵심 사상을 잘 알고 있거나 불교학자들이 유교 및 도교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역사적으로도 추사 김정희가 유교는 물론 불교에 대해 해박했고 말년에 승려가 되었다든지 혹은 구한말의 경허 선사가 말년에 머리를 기르고 서당을 열어 아이들에게 유학을 가르쳤다고 하는 등 사상적 교류는 늘 있어 왔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으로 인해 유교와는 역사적으로 사이가 나쁜 편이었다. 특히 고려 왕조 때 국교 격까지 갔었던 것이 유교가 조선왕조에 들어서 불교를 밀어내고 국교로 지정되면서, 조선왕조 시절 양반들과 호걸 및 관료들이 불교와 승려를 탄압하고 천시하는 등 이래저래 유교 때문에 수모를 겪었다. 게다가 신분제도에 있어서도 승려는 하층민 계통인 천민에 속하기 때문에 조선왕조 시절에는 유림과 양반들로부터 천대와 멸시를 당해왔고 일부 승려들은 노비, 백정, 평민들과 함께 궁궐 복원공사 등에도 동원되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얼마나 숭유억불 사상이 조선을 지배했냐면, 이런 일도 있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청나라에 방문했다가 건륭제로부터 불상을 선물로 받은 기록이 나온다. 박지원은 유학자였기에 청나라 저잣거리에다 그 불상을 비싼 가격에 팔아 불상을 판 돈이라고 자신이 가지지 않고는 짐꾼들에게 술이라도 사먹으라고 줬으나, 짐꾼들마저 불상을 판 돈이라 받기를 거부하여 마부에게 주었는데, 마부조차 받기를 거부했다.

불교 건축이나 미술 계통 문화재 파괴도 대대적으로 시행되었다. 숭유억불 문서에서 이 당시 유교 원리주의자에 의해 소실된 문화재 목록을 볼 수 있다. 경주의 많은 불상의 목을 잘랐다. 에밀레종도 녹일 뻔 했고 팔만대장경도 버릴 뻔 했다가 간신히 살아남았다. 심지어 이성계와 얽힌 절도 불태울 정도였다. 한국에 중국이나 일본처럼 웅장하고 화려한 문화재가 적고 소박함이 키워드가 된 원인 중 하나가 숭유억불인 셈이딛.

다만 그래도 아예 불교를 뿌리 뽑거나 철폐해버리려는 정도는 아니었다. 비록 가문의 망신이라는 소리는 들을지언정 선비가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는 것도 가능은 했으며,[14] 조선 말 까지도 전국의 절들은 계속 건재했다. 태조 이성계는 말년에 불교에 심취했으며, 태종과 세종도 꾸준히 불사를 시도하여 신하들과 마찰은 빚은 기록이 있다.[15] 유학적으로 용서받기 힘든 짓을 저지른 세조는 아예 호불 군주를 자처했다. 문정왕후는 승과까지 실시했는데, 그녀가 나중에 유학자들에게 호되게 비판 받는 요소로도 작용했다. 조선 내내 왕실은 불교에 생각보다 호의적이었으며, 위의 김정희나 경허 선사의 일화도 조선 후기, 그리고 조선 이후의 일이다.

중국 후한 시대에 불교가 들어올 때만 해도 중국인들은 오랑캐의 가르침이라면서 불교 유입에 민감했다. 한대에 융성했던 유교 문화는 현실적, 윤리적인 도덕 철학을 강조했는데 그 때문에 처음 들어올 때만 해도 중국인들은 불교 이론을 허무맹랑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위진남북조시대오호십육국시대를 거치며 중국 대륙이 쑥대밭이 되는 과정에서 불교가 전국적으로 확산된다.

그 이유는 불교의 사상이 민중의 정신적인 귀의처가 되어주었고, 윤회론에 입각한 내세관, 방대한 경전체계, 인도 의술에 능통한 승려들의 의약구제, 위정자들에게 부담이 없는 구세이념[16], 전술 지식을 알려주는 신승들의 전술적 가치, 한족 중심적이었던 유교와는 달리 호(胡)족들에게 친화적이었던 이방 이념들이 당시 중국인들의 필요조건에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항상 무탈한 것만은 아니었고, 잊힐만 하면 국가 차원에서의 불교 탄압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6. 한국 토속신앙[편집]

이미 화엄경에도 주성신(主城神), 주지신(主地神), 주산신(主山神), 주림신(主林神), 주하신(主河神), 주해신(主海神), 주수신(主水神), 주화신(主火神), 주풍신(主風神), 주공신(主空神) 등 자연의 요소들이 가진 특성을 신격화 하고 있으며 이들의 수행계위를 밝히고 있다. 즉 불교는 이미 그 대상이 한국이든 미국이든 자연 및 만물과 분리되지 않은 인간의 삶을 다루고 있기에 이를테면 무속에서 숭앙하는 '관운장' 같은 만들어진 인격신이 아닌 산신 등 토속 신앙의 신들을 중요시 한다. 특히 우리나라 전래의 북두칠성 사상의 주신은 인간의 수명을 주관하는 의미에서 단순한 신급이 아닌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아미타불과 동급의 지위의 칠성불이라 하여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석가모니도 보리수 아래에서 항마촉지인의 자세로 땅을 손으로 가리키며 대지의 여신이 자신의 깨달음을 증명한다고 했다.

한국은 불교 도입에 상당히 적극적이었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토속신앙을 한꺼번에 묶을 필요가 있던 지배층들은 불교 수용에 긍정적이었고, 덕분에 유달리 한국에서는 불교와 토속신앙 간에 융합이 빠르게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토속신앙의 불교화와 불교의 기복적/주술적인 토속신앙의 의례/관념 수용이 빠르게 이루어졌다. 당장 현재 한국과 동남아 불교의 같은 의례를 놓고 비교해도 엄청나게 다르다.

그렇다고 토속신앙이 뵌교와 티베트 불교처럼 완전히 동일화되진 않았다. 불교의 교리나 요소를 일부 차용했을 뿐, 불교에 완전히 동화된 것은 아니다. 물론 승려나 보살로 칭하는 무속인들의 경우에는 상당히 불교색이 강하지만, 무당 문서에서 볼 수 있듯이 지역별/개인별 차이는 크며, 오히려 근래에는 민족종교로서 차별성이 두드러지는 추세다.

사실 현재 한국불교와 토속신앙의 강한 유착관계는 불교가 한국에 들어오면서 토속신앙과 섞인 것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미륵 신앙. 기복적인 토착 천신/용신 숭배사상과 완전히 결합하였다. 이러한 문화가 고착화된 것은 조선시대 숭유억불의 영향이 컸다. 숭유억불 정책 하에서 불교와 토착신앙이 살아남기 위해 융합하면서 남사당패, 점이나 굿을 하는 스님들도 일부 등장하게 된 것.

현재 한국 불교와 무교 양측에서는 예전처럼 꼭 결합해야만 할 일도 없기에 각자 개성을 살리는 쪽이긴 하나, 불교 종파마다 차이가 크다. 일례로 대한불교조계종 같은 경우 순수불교 정신을 내세우며 절에서 하는 천도재, 49재 등도 대폭 간소화한 데 반해, 한국불교태고종 같은 경우 예전부터 내려오던 기존의 의례 대부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 때문에 신도들이 조계종의 단순한 의례에 만족을 못해, 태고종 스님들을 모셔오거나 의례를 배워와서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17]

한국 불교계에서는 이러한 부분을 불교 포교를 위한 방편으로서의 측면만을 부각시키는 경향이 있다. 학계에서는 역사적 사례나 불교하고 아예 접점이 없는 가택신 신앙(특히 조왕신)이나 북두칠성 신앙, 민간신앙에서 불교를 철저하게 무속신의 일부로 보는 점 등을 근거로 인정하지 않거나, "불교의 대중화"와 "불교화된 민속신앙"을 엄연히 구분해야 한다고 본다.[18] 실제로 현재 국내에 조왕신 신앙의 흔적을 사찰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오히려 일반 민가보다 더 쉽게 찾을 수 있는 경우도 있다. 또 북두칠성연명경처럼 기복적인 토속신앙의 영향하에 만들어진 경전도 있다.

다만 토속신앙에 대한 대접엔 한계가 있다. 어디까지나 절의 중심은 붓다/보살이지 토속신이 아니니까. 그래도 관련된 재와 법회도 정기적으로 지내주고, 불교를 잘 믿고 선행을 하면 복을 주고 도와주지만 그렇지 않으면 독자적으로 징벌을 내리는 강력한 호법신으로 인식하고는 있다. 원광대학교 조용헌 교수는 저서 <조용헌의 사찰기행>에서 이러한 인식을 법(부처)은 멀고 주먹(산신)은 가깝다고 한 줄로 요약한 바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토속신은 어디까지나 호법선신으로서 절과 불법을 수호하고 신도나 승려들이 필요할 경우 도와주는 존재라고 여겨질 뿐, 일반적으로는 아미타불, 미륵불, 석가모니부처님/보살같은 존숭의 대상은 아니다.

토속신들이 대우받는 것은 불교가 토속신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당장 삼성각을 따로 짓지 않는 수준의 작은 절이라도 대웅전에 합사할 때 토속신을 신중과 마찬가지로 하단에라도 배치한다. 불교 교리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혹자는 이런 것을 기복신앙적 불자들이나 무속인들이 시주하는 재물 수입이 쏠쏠하니 그만큼 투자를 하는 것뿐이라고 색안경 쓰고 바라 볼 수도 있다. 신중신앙이 지금보다 흔했던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절에서 신중 법회/재는 고려시대만큼은 아니더라도 나름대로의 비중을 차지했다. 근현대 조계종의 불교개혁운동 이전에는 신중단에도 절을 하였으나, 성철 스님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드는 승려가 부처님을 수호하는 신중에게 절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이렇게 되었다.

물론 이런 주장은 이미 구한말~일제강점기부터 불교를 근대화시키자는 승려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논의되던 사안이었으나, 해방 후 성철 스님을 비롯한 개혁주의 성향의 승려들이 결정타를 내리면서 한국 불교의 신중신앙과 토속신 신앙은 동시에 크게 쇠퇴하였다.

토속신들은 원래 불교의 요소였으며 한국인들에게 불교 전래 이전부터 오랫동안 친근한 존재였고, 동시에 불교 전래 이후에도 신앙관에 깊은 영향을 주고 있었기에 개혁주의 성향 승려들이 대부분 입적하면서 다시 한국 불교 내부에서 신앙의 대상이 되었지만, 정작 원래 불교의 일원이던 신중들은 예전만큼 큰 영향력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 봉암사에서 결사를 이끌던 시절 비불요소 철폐를 외치며 토속신 전각은 물론 신장탱조차 없애고 여러 불공을 철폐했던 것으로도 유명한 성철 스님의 생전에는 토속신앙적 기복신앙에 배타적이었던 해인사가 결국 독성각으로 복원한 것도[19], 전술했듯 근본주의 사상이 강한 조계종도 서울 조계사를 제외하면 조계종의 간략화된 불교의례보다 기존의 해오던 재래식 불교의례를 신도들이 원한다고 유지하는 데는 이런 속사정이 있다. 참고로 성철 스님이 결사를 열었던 봉암사는 결사 당시에는 토속신앙 건물을 철거하였으나(참조), 지금은 대웅전을 확장하고 산신각을 복원한 지 오래다. 특정한 기간이 아니면 일반인들에게 개방하지 않는 사찰인데도 말이다.

일부 종파의 경우 독립된 토속신을 모시는 전각을 찾을 수 없다. 대한불교천태종밀교 종단인 대한불교진각종과 여기서 갈라져 나온 총지종은 밀교거나 밀교적 성향이 있음에도 이런 이유로 토속신을 모시는 전각은 물론 밀교에서 중시하는 신중이나 명왕을 위한 전각이 없다. 다만 천태종의 경우 법회/재를 주관하고 신도들을 위해 복을 빌고 기도해주는 부전승이 다른 종파와는 달리 정식으로 교단에 일원으로 소속되어 있고, 의전국이라는 전담부서도 있다.

천룡팔부 같은 원래부터 불교에 있었던 신중의 경우 해방 후 현대 한국불교에서는 대웅전 내 한 구석에 작게 신중전을 차려놓는 선에서 끝나는 게 일반적이고 절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적은 편. 법회가 열려도 보통은 토속신들과 같이 하단을 차지할 뿐이고, 독립적인 법회나 재는 찾기 힘들다. 당장 우리나라 절에서 산신과 산신재 혹은 산신법회가 차지하는 비중을 떠올려 보면 답이 나오는데, 과거 밀교가 나름대로 번창하던 때는 삼국유사에도 나오듯이 제석이나 사천왕 같은 경우 토속신앙의 천신/오방신 신앙과 결부되어[20] 해당 위격만을 모시는 절도 있었지만, 나머지 신중들은 그런 것도 없었다. 재를 지낸다 해도 대부분 예불 때 신중단을 바라보며 반야심경 읽는 정도가 고작. 그마저도 신중단에 반야심경을 읇는 것은 신중을 높이는 의미에서 독경하는 게 아니라, 신중에게 설법을 하는 의미로서 읽는 것이다.[21]

토속신앙의 신들이 대부분 독자적인 전각(칠성각, 삼성각 등)을 세워 따로 모신 것에 비하면 큰 차이점이다. 일본에도 사찰 안에 작은 신사를 세운 사례는 있으나 그 반대의 경우도 있고, 그 빈도도 웬만한 절이면 거의 토속신앙의 신을 모신 제대로 된 전각이 있는 한국에 비하면 드문 경우가 많다.

7. 신토[편집]

일본의 경우 아스카 시대에선 신토는 상당히 긴 시간 동안 전쟁을 해왔다. 실제로 불교가 처음 일본으로 도입될 당시 위에서 나온 대로 귀족 정치전쟁과 맞물려 친불교파인 소가씨와 반불파인 모노노베씨 간에 엄청난 전쟁들이 많이 시작된 데다, 현세구복을 중요시하던 토속신앙인 신토와 보다 고급 철학에다가 수입품이라는 이점까지 지닌 불교 간에 이권 다툼(?)형 전쟁들을 벌일 수밖에 없었는데, 이때 모노노베씨와 신토가 소가씨/불교 세력에 밀려나 버리고 만다. 소가씨는 왕실의 외척으로서 힘을 행사했고, 스이코 덴노와 쇼토쿠 태자 이후 불교는 적극적으로 유입되어 일본에 자리잡게 된다.

다만 소가씨가 도래인을 자청한 가문이고 백제와 가까웠다는 것을 생각할 때, 토착종교를 믿던 토착민과 외래종교를 신봉한 도래인의 알력다툼으로도 볼 수 있다. 실제로 정체성과 종교 문제가 겹치는 경우는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매우 많다. 왜냐하면 민족이 곧 해당 신앙이었던 시절이었기 때문. 실제로 아스카 시대 때 불교에 심취한 왕들은 백제를 비롯한 중국한반도같은 외국과 가까운 자들이 많았으며, 시대가 흐르고 불교가 토착화되면서 그와 별도로 자리잡힌다.

후에 헤이안 시대 진언종과 천태밀교 등 밀교가 본격적으로 수입되자 신토의 신과 불교의 신들을 동일하게 여기며 불보살이 일본의 신의 모습으로 불교전래 이전에 이미 와 있었다는 소위 본지수적설에 입각하여 신토와 불교가 결합하고, 더 나아가 기존 신토의 신들을 모두 불교의 부처님/보살의 화신(아바타)로 격하시키고, 나중에는 아예 전원 신중으로까지 눌러댔다. 심지어 아마테라스의 경우 관음보살의 협시신중인 우보동자라는 작은 신으로 격하되는 시기를 겪을 정도. 이러한 신불습합, 본지수적을 피한 것은 자체적인 신토 철학을 만들고 경제적 기반을 가진 이세신궁 정도이며, 대부분의 신사와 절이 합쳐져 절의 승려들이 대를 이어 신사의 신관이 되는 일이 빈번했다.

이후 신토는 지속적으로 불교의 위세 앞에서 큰 힘을 내지 못했다. 에도 막부 중기에 민간의 아마테라스에게 복을 비는 관습이 등장해 사정이 나아진 적이 있었다. 당시 일본인들의 기복신앙은 대단해서, 아마테라스에게 복을 비는 순례 시 봉건질서를 무시하는 행위를 민중들이 저질러도 막부에서 어지간하면 눈 감고 넘어갈 정도였다. 이런 시절에도 일본 정토진종의 승려들은 민중들의 신사 참배를 제지하는 행위를 하다 문제가 생겼을 정도.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신토가 불교를 누른 것은 에도 시대 말~메이지 유신 초기를 거치면서 일본 철학계에서 자체적으로 불교에 대한 검증과 비판이 일어나고, 그 결과물은 바로 국가신토일본은 메이지 유신 때는 오히려 불교를 억누르고 신토를 분리시키려 하기도 했다지만, 일본이 조선을 침탈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한 정책이 바로 승려에 대한 도성 개방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까지 국가신토는 일본 제국주의와 전체주의를 옹호하는 침략의 도구로서 줄창 이용되어 온 끝에 전쟁 패망 이후 정상적인 신토로 돌아가게 되고, 불교는 불교대로 평범한 관계로 돌아오게 되었다.

8. 창가학회[편집]

1200년대 가마쿠라 막부 시기에 니치렌(日蓮, 1222년~1282년)이 제안한 불교계 신흥 종교이자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로 알려진 그 일본 종교이다. 법화경(法華經)을 중시하며 사찰에서 활동하는 전통적인 불교와 다른 모습을 보인다. 국제창가학회(SGI: Soka Gakkai International)로 활동하다가 1970년대에 한국에 진출했다. 그동안 아베 닛켄(阿部日顕, Abe Nikken, 1922~2019)의 일련정종과 함께하다가 1991년에 결별했다.

9. 기독교[편집]

중국에서는 당나라 때 네스토리우스 계열의 선교사들은 불교의 요소를 적극 차용하는 등 친불교적이었으나, 대항해시대 이후 가톨릭 예수회 선교사인 마테오 리치 신부가 명나라에서 선교할 때, "유교의 기본적인 가르침은 그리스도교와 모순이 없다"고 주장했다. 반면 불교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불교에 대한 이런 비판은 당시 명나라 사대부들에게 점수를 따기 위한 목적 역시도 있었을 것으로 강하게 추정되고 있다.

교리적인 이유들도 있다. 불교와 달리, 그리스도교는 윤회를 믿지 않으며, 단 한 번의 창조-구원-공심판과 종말이라는 직선적인 세계관을 가진다. 단 과거부터 끈질기게 제기되는 주장 중 하나로서, 예수의 근본적인 가르침인 사해동포주의와 사랑 그리고 현실에 대한 직시는 불교의 가르침과 대동소이하다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외 나머지 부분은 사도 바오로의 재해석..이라는 주장.

또한 신(神)관, 구원관이 정반대다. 그리스도교에서 원죄[22] 를 지닌 채 수고와 애씀으로 점철된 삶을 살며 보잘것없는 인간의 구원은, 유일신이며 생명 그 자체이자 창조주인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과 은총, 즉 참 하느님이며 참 사람인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23]십자가상 수난과 죽음, 부활성령의 활동 등에 대한 믿음으로 얻어진다고 가르친다. 인간 개개인의 노력 역시도 중요하지만, 이는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개인의 '응답'일 뿐, 구원의 전제조건은 아니다. 반면 불교는 그러한 의미를 지닌 신(유일신, 창조주)이 있다는 견해를 자아에 대한 집착의 연장선상으로 보아서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종교이며,[24] 생명이라는 고정된 관념(산냐)과 그에 대한 집착을 경계하고, 개인의 수행과 노력으로[25] 자아에 대한 집착을 여의고 해탈을 얻어 번뇌의 고통에서 벗어난다고 가르친다. 물론 불교 역시 파고들면 정토종이나 아미타불 같은 케이스가 있는 만큼, 이렇다 저렇다 한 마디로 요약하기는 어렵다. 다만 전체적으로는 개인의 역량이 상당히 강조된다.[26]

즉, 말하자면 구원의 주체가 교리나 신앙이냐의 차이이다. 불교의 경우 교리에 대한 절대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수행을 쌓음이 요체며 그것이 신앙으로 보일수 있다. 하지만 신앙의 주체는 결국 교리 그 자체이지 부처는 아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무엇보다 신앙이 전제되어야하며 신앙의 주체는 예수 그리스도이며 거기에 대한 세부 교리는 신앙을 실천히기 위한 수단이다.

물론 그리스도교와 불교는 모두 교리상 평화와 사랑과 자비를 중시하는 등의 공통점도 많지만, 앞에서 말한 차이점으로 인해 교리적으로는 호환이 불가하다. 때문에 마테오 리치 신부는 저서 <천주실의>에서도 불교를 매우 비판했다.[27] 그러나 중국에서는 기독교 자체가 흥하지 못했던지라[28] 신자들끼리의 이렇다 할 분쟁은 없었다.

한국의 경우는 초기 조선 천주교나 불교나 세트로 국가로부터 탄압당하던 처지라 동병상련의 심정이 있었는지, 상당히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29] 천주교를 공부하는 수많은 신자들을 받아들여 집회를 하게 하였다. 천주교의 성지들 중 그래서 은근히 절터가 많다. 신자들끼리는 그럭저럭 우호적인 편이었다. 박해로 순교한 천주교 신자들에게 승려가 명복을 빌어주는 사례도 있었다. 물론 교리적으로 볼 때 가톨릭과 불교는 다른 점이 많으나, 신자 개개인 단위에서는 의외로 호의적인 경우가 많다. 일반 신자들 외에도 사제와 승려들이 친밀하게 지내는 것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오늘날에도 불교 승려가 성당에서, 가톨릭 신부가 에서 강연을 하는 사례가 있으며, 크리스마스와 부처님오신날에 서로 축하 메세지도 보내곤 한다.[30] 심지어 가톨릭 신부가 되기 위한 필수 코스인 가톨릭 신학대학의 수업 과정 중에 불교 교리에 대한 과목까지 있을 정도. 즉 가톨릭 신부 정도 되면, 불교 교리에 대한 지식이 어지간한 일반인은 물론이고 불자들 수준이거나 그 이상이다.

단 그렇다고 해서 가톨릭이 불교의 교리까지 믿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톨릭은 타 종교(의 교리, 구원)도 인정한다고 오해하는 듯 한데, 가톨릭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확실하고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교리를 포기한 적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 다만 구원은 인간이 판단하는 문제가 아니라 오직 하느님께서 판단하고 주시는 것이므로 타 교파ㆍ타 종교 신자들에게 함부로 "너 지옥"이라고 판단하고 저주하지 않으며, 비신자들 역시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존엄한 인간이며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들이므로, 사랑과 친절로 존중하며 대하는 것이다. 가톨릭은 자신들을 어디까지나 기독교의 한 분파로 인정한다. 허나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대상은 가톨릭(보편) 교회, 혹은 유일한 형제 교회인 정교회에 속한 사람으로, 개신교인들은 종교 공동체로 일컬어지며 구원의 대상인 보편교회에 속하지 않은 것으로 본다.[31]

다만, 불교의 계율과 교리를 믿지는 않더라도 존중하라는 것이 천주교의 공식적인 가르침이다. 때문에 천주교 신자가 불상을 파괴한다든지 하면 이는 천주교의 교리에 대놓고 반하는 것이 된다.
불교에서는 여러 종파에 따라 이 무상한 세계의 근본적 불완전성을 긍정하고, 신심과 확신으로 완전한 해탈의 경지에 이르거나 아니면 자기 노력이나 위의 도움으로 궁극의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길을 가르친다. 그 밖에 전 세계에서 볼 수 있는 다른 종교들도 교리와 생활 규범과 신성한 예식 등을 제시하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인간 마음의 불안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며 그 길을 가르친다. 가톨릭교회는 이들 종교에서 발견되는 옳고 거룩한 것은 아무것도 배척하지 않는다. 그들의 생활양식과 행동 방식뿐 아니라 그 계율과 교리도 진심으로 존중한다. 그것이 비록 가톨릭교회에서 주장하고 가르치는 것과는 여러 가지로 다르더라도,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진리의 빛을 반영하는 일도 드물지는 않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 비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선언)

개신교와의 관계는 아무래도 확실한건 가톨릭 쪽보다는 껄끄럽다. 다만 개신교 자체는 하나의 종파가 아니라 여러 종파들의 묶음이다 보니, 관계를 요약하기는 어렵다. 일부 극단적 개신교 종파들이 사찰이나 불상에 준테러급의 짓거리를 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다른 나라들의 종교 갈등 사례에 비한다면 대규모 폭력 사태는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반대로 NCCK나 한국기독교장로회향린교회, 빈들교회 등 진보성향의 개신교 교회나 단체에서는 부처님 오신 날에 축하메세지를 발표하거나 법당을 방문하여 종교화합을 위한 다채로운 행사를 함께 하기도 한다.

특별히 서울 장충동 소재의 경동교회(한국기독교장로회)는 오래전부터 불교 정토회와 교류가 있어왔고, 담임목사가 법당을 방문하여 설교하고, 크리스마스 예배 때는 정토회 법우들이 경동교회를 방문하여 함께 성탄예배를 드리고 캐롤을 부르는 모습이 매년 보도되기도 한다.

다만 신자들 간의 감정은 다른 종교와의 관계에 비해서는 아무래도 데면데면한 게 사실이다. 나이 지긋하신 개신교 신자가 "불교 믿으면 지옥 간다!!"고 말하는 경우는 결코 적지 않으며, 더 큰 문제는 그 개신교 신자가 교육한 어린 아이들이 불교를 믿는 친척집에 가서 "지옥 간다"는 소리를 하여 친척들 간 종교분쟁을 일으키기도 한다는 것.

극단적 성향의 개신교 광신도 무리가 사찰 등에 단체 관광을 가서 땅밟기 같은 걸 하는 사례도 있어서, 다른 종교 신자들이나 같은 개신교도들 사이에서도 비판받기도 한다. 땅밟기는 해당 문서 가서 보면 알겠지만, 한국 무속신앙과 개신교가 기묘하게 결합된 형태의 짓거리로, 명확하게 분류하면 이단이 맞긴 하다. 예리코의 전투 운운하지만, 가톨릭이나 정교회는 물론이고 미국 청교도나 영국 성공회 심지어 보통의 정상적인 한국의 개신교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근본 없는 짓거리다. 다만 2000년대만 해도 땅밟기를 하는 부류가 개신교 주류를 차지하고 있어서 불교와의 사이가 극단으로 치든 적이 있다. 땅밟기의 폐단이 개신교 내부에 알려지고 사이비 종파로 확정난 건 2008년 이후의 이야기.

심지어 2021년에는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법회를 하고 있는 조계사 앞에 개신교 광신도들이 몇 시간씩 죽치고 앉아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찬송가를 부르고 불교를 모욕하는 발언을 한 적도 있다.

일본의 경우 에도 막부 초기에 키리시탄 탄압 때 제일 먼저 나선 종교가 불교였고, 상당수의 승려들이 앞장서서 후미에를 실시했다. 그 이유는 오다 노부나가가 원래 무신론자에 반불교 성향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반대하는 불교 세력들이 많아, 이 불교 세력들을 억제하기 위해 가톨릭을 지원한 데에 있다. 그러니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당시의 정권에 반하는 입장인 도쿠가와 막부에선 키리시탄들이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으며[32], 이때 일본 불교는 더더욱 반기독교 성향이었다.

가톨릭 신앙 금지령을 내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모든 백성들이 불교도가 되길 바랄 정도로 독실한 불교도였지만, 당시 기독교 교리 자체가 일본 사회에 맞지 않았던 이유가 크다. 가톨릭 자체가 유일신 신앙이라 불교와 다신교인 신토를 부정할 수밖에 없으며[33], 자살을 죄악시했기 때문에 할복을 금지시켰고, 일부다처제도 부정하기까지 했으니, 가톨릭의 확산은 당시 근세 일본 사회에 있어 위협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카쿠레키리시탄 참조. 거기에 안 그래도 이런 식으로 일본 내부에서 가톨릭의 평판이 영 좋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가톨릭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반란인 시마바라의 난까지 일어나 버리니 일본에서 가톨릭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가고 말았다. 그리고 이렇게 시작된 일본의 기리시탄 탄압은 메이지 유신까지 계속된다.

한편 스리랑카에서는 불교인들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탄압이 일어나고 있다. 내전 당시에는 힌두계 타밀족에 대한 핍박을 주로 했으나, 내전이 끝나니까 그리스도인들도 핍박받게 되었다. 그리스도인들한테 반감이 있는 이유도 과거 유럽 식민주의 팽창 당시 가톨릭이 불교 승려를 처형하거나 핍박하였고, 개신교는 처형은 안 했다만 불교인의 사회적 지위는 매우 낮아 고위직에 오를 수 없었다.

유사한 사례로 불교가 기득권을 틀어쥐고 있는 동국대학교에서는, 거꾸로 불교가 개신교를 차별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동국대 측에서 예민하게 나올 수 밖에 없는 게, 개신교 측에서 동국대에서 깽판을 벌인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라서 싫어한다. 그냥 이유없이 싫어하는 게 아니라, 싫어할 수 밖에 없는 빌미를 제공한 개신교의 문제가 더 크다. 예를 들면 학교 당국의 부정부패와 비민주적 행태를 비판하며 날카롭게 대립각을 세웠던 전직 총학생회장은 크리스천이라는 이유로 학교 당국과 충돌을 빚었으나, 현재는 특정 정치세력과 결탁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2018년 초에는 학교 당국과 대치하며 본관 점거농성을 벌이고 있는 청소노동자들이 일요일에 개신교 인권운동가인 정진우 목사를 초청하여 본관에서 예배를 드렸다는 이유로 불교 언론들이 나서서 "불교 대학에서 예배를 드리는 게 말이나 되냐"며 비난하기도 했다.

10. 이슬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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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라시드 앗 딘 하마다니의 <집사>에 묘사된 석가모니

인도 반도에서 불교가 거의 사그라 든 것은[34] 바로 이슬람교 때문이다. 비단 인도뿐만 아니라 8세기 이후 중앙아시아에서 불교가 사그라 든 것도 이슬람교의 확산과 맞물린 일이다. 즉 8세기 이후 중앙아시아-인도의 이슬람교도 확산은 불교의 축소와 연관되어 있다. 다만 불교가 완전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은 아니라 중앙아시아 발흐사마르칸드부하라 등의 도시의 불교 대학들이 이슬람 건축이나 이슬람 대학 시스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특히 이슬람의 신학 학교들인 마드라사들은 중앙아시아 불교 사원, 특히 아프가니스탄 발흐의 나우바하라 불교 사원의 체계에서 기원한다. 그리고 몽골의 침략 이전 중앙아시아의 마드라사들은 이슬람 교리를 집대성하는 학문적 중추로 기능한다. 그리고 불교 교리는 이슬람 수피즘쉬아파 교리에 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서기 10~11세기 오늘날 우즈베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일대에서 활동하던 천문학자 겸 역사학자 알 비루니는 오늘날의 파키스탄과 북인도를 여행한 후 인도의 철학과 종교, 역사와 언어, 문화 등을 다룬 <키탑 알 힌드>라는 책을 저술하는데 이 책에서 알 비루니는 힌두교 경전이나 철학서 이외에도 불교 관련한 기록도 상세히 남겼다. 물론 무슬림인 알 비루니 입장에서 불교 신도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는 어려웠고 대신 비루니는 석가모니 부처를 칭송하는 기록을 남겼다. 알 비루니는 인도의 석조 수조를 보면서 아직 무슬림들의 기술 수준은 아직 이 정도로 발전하지 못했다는 기록을 남겼다가 비판을 받았을 정도로, 자문화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인도 문명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데 상당한 노력과 성과를 보여준 인물이기도 했다.

한편 몰디브에서는 1153년에 국왕인 이븐 압둘라 술탄이 자발적으로 불교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했고, 이후 일반 민중들에게까지 이슬람이 포교되면서 불교를 밀어내고 이슬람교가 주류종교가 되었다. 이 경우에는 왕권강화[35]와 교역상 이득을 동시에 노린것인데, 당연히 마찰이 없던것은 아니라서 수도권인 말레는 순조로운 개종이 이루어졌지마, 지방에서 아직 불교를 믿던 세력들이 강했는데, 지방세력들에게 이슬람을 포교하는 과정에서 승려를 처형시키는 등 법난이 있던것으로 보이며, 지방세력들도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이슬람화가 되었다.

태국에서는 태국 남부에 이슬람을 믿는 지역에 불교도를 이주시키고 승병이 조직되는 일도 있었다. 현재는 충돌이 많이 약해졌지만, 불교급진파가 늘면서 힌두교 말고도 소수 이슬람이나 기독교에 대해서도 굉장한 거부감을 보이고, 교회나 마스지드를 불교성지에 지었기에 불교도 시위대가 가서 없애버릴 것을 요구하는 사례가 늘어났다. 또한 소수 이슬람과 갈등으로 이 이슬람 급진파 공격을 받자 승려들이 무장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다만 태국 문서나 스리랑카 문서를 참고하면 좀 복잡한 면이 있다. 스리랑카의 경우 싱할라족 불교 근본주의 단체인 부두발라세나의 영향이 크다. 스리랑카 내에 반이슬람 여론을 강력히 이끌어가고 있으며, 종교의 영역뿐만 아니라 수틀리면 정치의 영역으로 진출하겠다는 의지를 강력히 천명하고 있으며, 미얀마의 극단주의 불교세력인 969과도 협력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세한 내용은 이 기사를 참조할 것.

불교가 중앙아시아에서 크게 번성한 적이 있었지만 이슬람기독교조로아스터교와는 상당히 악연으로서 이들의 우상파괴 논리에 의해 수많은 미술품이 파괴되고 박해를 당하기도 하였다. 아프가니스탄 탈레반들이 바미안 석불을 파괴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36] 현재의 중앙아시아의 종교는 이슬람이 대다수이다.

중앙아시아와 인도 불교가 이슬람의 공세로 쇠퇴하던 시기 이후에도 티베트 불교는 직접 이슬람과 대치하던 상황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8세기 당시 신장 지역 서부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에 해당하는 지역은 무슬림들이 정복하여 급속한 이슬람화가 진행되었으나, 토하리스탄의 경우 토번 제국이 무슬림들의 진공을 저지하였고 이로 인해 위구르인들이 완전히 이슬람화하는 시점은 14~15세기로 늦춰졌다.

역사적으로는 인도와 아라비아 반도는 매우 가깝고, 중앙아시아 불자들이 인근 페르시아로 가서 불교를 성공적으로 전파하여 페르시아 만 일대에는 많은 불교 사원 유적들이 남아있다. 그러나 서기 3세기 경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삼는 사산조 페르시아가 불교를 탄압하고 기독교 교세가 늘어난데다 결정적으로 이슬람 세력이 중동을 장악하면서 중동 불교는 씨가 마르게 된다.[37]

여담으로 대한민국에서 1970년대부터 중동-이슬람권 경제 진출이 활발할 때 파견간 노동자들의 경우 불교 '신자'가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불교 신자들을 선발해서 일부러 파견을 갔다는 뜻은 아니고 다른 이유가 있다. 이슬람교에서는 무신론자/무종교를 대단히 부정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노동자들도 형식상으로나마 종교가 있어야 했다. 하지만 한국의 다른 메이저 종교인 기독교(개신교천주교 등)는 이슬람교와의 충돌이 매우 우려되기 때문에 서류상 종교를 대부분 불교로 통일시켰다고 한다.

11. 원불교[편집]

원불교는 불법의 시대화 생활화 대중화를 목표로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에 의해 창시된 종교다. 별도의 원불교 교전을 가지고 있고, 불교와 개별 종단으로 분리되기는 하지만 그 가르침이 불법에 바탕하고 있고 소태산 역시 스스로 석가모니에 연원을 대었으므로[38] 넓은 의미에서는 불교의 범주로 볼 수도 있다. 실제로 원불교 교도에게 원불교가 불교라고 하면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또 불교가 아니라고 하면 그건 또 그것대로 아니라고 한다. 종단으로는 구분되어있지만 근본 가르침을 공유하는 특수한 관계 때문이며, 그냥 천주교와 개신교의 관계 정도로 생각하면 편하다. 원불교는 창시 당시 불법에 바탕을 하면서도, 이 불법을 대중들에게 제대로 전하지 못하는 당시의 불교에 대해 혁신의 필요성을 제기하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남녀 출가자 차별 철폐, 출재가 평등, 생활중심의 수행 등 한국 불교의 다른 종파들과는 많이 다른 모습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글로벌하게 보면 세계 불교도 연맹에 가입되어 있기도 하다. 격식에 치우치지 않고 합리성을 추구하는 성향이 서양인들과 잘 맞아서 외국인 교무를 꾸준히 배출하는 등 해외 포교에서 한국불교 이상의 성과를 내고 있기도 하다.

12. 뵌교[편집]

13. 유대교[편집]

13.1. 유대인 불자(JewBu)[편집]

서양의 불교 신자 중 30% 정도가 유대인이라고 한다. 불교로 아예 개종하는 경우도 있는 한편, 유대교 전통을 유지한 채 불교 수행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이들을 주부(JewBu, Jubu, Jewish Buddhist)라고 일컫는다고 한다. 유독 유대인들이 불교에 흥미를 느끼는 이유에 대해서는, 유대교에 부족한 영적 수행 요소, 불교의 개방성 등이 꼽힌다. http://www.bulkyo21.com/news/articleView.html?idxno=20489 https://www.youtube.com/watch?v=Is2hqkPTXVw
그 외 목록 https://en.wikipedia.org/wiki/Jewish_Buddhist

[1] 범천(梵天). 제석천. 우주 만물을 만들었다는 최고 절대신을 말한다.[2] 유대교 및 그리스도교가 비옥한 초승달지대의 사유들과 교류하며 발전하고, 또한 그리스 철학과 교류한 것과 비교하면 꽤 흥미로운 비교가 될 수 있다. 유대교는 지혜서에서 플라톤의 사추덕(현명, 정의, 절제, 용기)을 서술하는 등 그리스 철학과 상당한 교류를 하였으며, 이러한 사유들은 그리스도교 교회로 이어진다. 대승불교의 경우도 중국의 여러 사상들과 경쟁 및 교류하며 발전했는데, 심지어 노장사상의 계승자는 도교가 아니라 선종이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 그리스도교를 빼놓고 서양철학사의 서술이 불가능하듯, 대승 불교를 빼놓고 동아시아 철학사를 서술하는 것도 불가능한 지경이다. 고등학교 한국사에서 원효, 지눌 등의 사상을 교육하는 것도 이런 이유.[3] 오히려 불교가 중국 사상을 관념론적으로 한 단계 높혀놓았다. 도교는 물론이고 현실지향적이던 유교의 형이상학화(성리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4] 그러나 불교가 철학적인 토대를 탄탄한 배경을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종교성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교 역시 플라톤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받아들여 나름의 논리를 갖추었지만 종교임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당장 신약의 복음서들만 하더라도(특히 요한 복음서) 그리스 철학적 색채가 강한 편이고, 심지어 필리피서에서는 형상(Forma)이라는 상당히 플라톤적인 용어로 예수의 신성을 설명한다. 물론 고대에는 철학과 종교가 명확히 구분되지는 않았기에 철학과 종교 둘 다에 해당할 수는 있지만, 종교라는 특성이 부정되기는 어렵다.[5] 초기경전인 아함경 중 증일아함경에도 염불수행에 대해 나온다.[6] 여기서 당취는 땡추중, 즉 땡중의 어원이 되는 단어다. 일설에 따르면 이 당취는 임진왜란의 승병의 중심이 되었다고 하는데, 임진왜란 발발 당시 조정에서 불교의 대우를 개선하겠다는 조건을 내걸어 거병케 했고, 전쟁이 끝나고 어느 정도 개선이 이루어져 많은 당취들이 양지로 나오게 되었지만, 대부분의 사대부들은 여전히 승려들을 무시했으며 큰 개선은 없었다. 금강산 당취의 잔재세력인 운부(雲浮)는 조정의 태도에 불만을 품고 장길산과 손을 잡아 1696년(숙종 22) 봉기하여 거사를 도모하려 했다. 그러나 일면에서는 국초보다 불교에 대한 실질적 상황이 좋아졌다고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다시 지어진 '법주사 팔상전'을 보면 새롭게 힘을 얻게 된 부농층과 상인계층이 공사에 크게 힘을 실어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실 사대부들 중에서도 남들 앞에서는 불교 엄청 까대면서도 정작 본인 죽고 난 뒤에는 49재를 반드시 올리도록 지시한 사람들이 꽤나 많았다. 일단 왕실부터가 불교 신도들이 많았으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삼국시대 이래로 현대 한국의 기독교, 천주교인들도 49재를 지내는 걸 보면 알 수 있듯 불교의 중요 사상과 문화는 어떤 정치적 상황에 처하더라도 그것과는 상관 없이 민간인의 입장에서는 토착화된 종교로 받아 들여지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7] 샹카라는 나가르쥬나의 사상을 꽤 많이 받아들였는데 그래서 당시에 다른 브라만교 학자들로부터 '가면을 쓴 불교도'라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최종 결론에서 불교의 공 사상이 아닌 범아일여 사상을 주창한다.[8] 석가모니가 활동할 당시 힌두교(당시는 브라만교)에 반발하여 나온 수행집단을 일컫는다. 본래 힌두교(브라만교)에서 진리를 탐구하는 구도행위는 '브라만' 출신이만이 얻을 수 있는 특권이었다. 이에 반발하여 계급에 큰 관계없이 누구나 나와 구도를 할 수 있음을 주창하던 이들이 바로 사마나이다. 물론 사마나 모두가 카스트에 반발했던 것은 아니고, 그 외의 철학적 견해의 다름으로 뛰쳐나온 사마나들도 있었다.[9] 현대의 힌두교는 범아일여를 필두로하여 나와 우주를 일치시키려하는 신비주의적 성향이 강한데에 비해 불교는 예나 지금이나 철저히 '괴로움의 소멸'이 목적이다. 불교에 신비주의적 성향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신비주의적인 것들 조차 괴로움을 없애기 위한 '수단'으로 쓰일 뿐 결코 '목적'이 되는 경우가 없단 소리다.[10] 불교수행법 중 아나빠나사띠(Anapanasati) 같은 수행법은 최초 소개자가 부처 그 자신이며 힌두교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자적인 수행법이다.[11] 나가르주나의 중관학파에서 차용한 용어로써의 '중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 의미에서의 중도, 즉 고행과 안정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중도'를 말하는 것이다. 현재에와서도 이를 중요한 교리로 다루는 것은 불교만의 매우 독특한 색깔이다. 오히려 '중관학파'가 주장하는 의미로써의 '중도'는 현대 힌두교에서 이미 차용한 부분이 너무 많아 실제 둘을 비교해 보면 엇비슷할 때가 많다.[12] 특히 원나라 몽케 칸 시절에는 아주 크게 대판 싸워 도교의 도사들이 절을 빈번히 약탈하자 몽케 칸이 쿠빌라이 칸에게 두 종교의 분쟁을 풀도록 시켰는데, 1258년 쿠빌라이는 승려와 도사들을 불러 입배틀을 시켰다. 도사들이 승려들에게 지자 쿠빌라이는 강제로 237개 도장을 불교 사원으로 바꾸고 도교 경전을 불태웠다.[13] 중국에서 불교는 애당초 이민족 왕조의 귀족계층을 중심으로 전래되고 확산된 귀족적 성격의 외래 종교였다.[14] 대표적으로 율곡 이이가 한때 스님이 된 바 있다.[15] 왕들이 불교 행사를 여는 대부분의 이유는 사랑하는 가족이 죽었을 경우 명복을 빌기 위해서였다. 유교가 현실적인 필요에 의해 탄생한 종교인 만큼, 사후세계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어 소위 ‘남은 사람들’의 아픔을 위무하기엔 제약이 많다.[16] 말그대로 세상을 '구하는' 것이다. 유교에서 말하는 '치세'의 이념과는 다르다. 군주에게 엄격한 도덕을 강조하는 유교에 비해서 위정자들에겐 상대적으로는 널널한 것이었을 듯.[17] 구미래, <한국인의 죽음과 사십구재> 민속원, 2009. 참조[18] 홍윤식, <불교문화와 민속> 동국대학교 출판부, 2001. 참조[19] 원래는 독성, 용왕, 산신을 같이 모신 삼성각이었으나, 삼성각의 토속신 중 그나마 불교 영향이 강한 독성만 다시 모셨다.[20] 사천왕사에 토속신인 오방신을 모셨다고 나오고, 통도사에는 불사에 사용하던 오방신 탱화가 지금도 보관 중이다.[21] 최준식, <조선의 도인들> 소나무, 2012. 참조[22] 가톨릭 한정. 정교회는 인정하지 않는다.[23]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심.[24] 불교 역시도 천룡팔부 등 신 개념이 존재하지만, 그리스도교의 신 개념과는 매우 거리가 있다.[25] 혹은 극단적인 수행과 노력이 아니더라도, 실상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바탕한 세계관의 전환 그 자체로.[26] 여담으로 여신전생 시리즈에서 LAW광신자의 상징인 메시아교는 그리스도교 계열인데, 그와 대치하는 CHAOS인 가이아교는 상당히 불교색이 짙은 경향이 있는 것이 이런 점 때문이다. 이렇다 보니 불교의 가르침이 무신론에 가깝다고 보는 오해가 있을 정도. 참고로 아미타불은 극락 보내 주는 것이지, 성불시켜 주는 것이 아니다. 극락은 성불하기 최적의 조건을 갖춘 수행 장소일 뿐이다.[27] 다만 마테오 리치 신부의 불교 비판은, 오늘날 가톨릭 신자의 관점에서 보면 좀 과한 면도 있다. 이를테면 불상을 보고 못생겼다고 깐다든지(…)[28] 아래에서 설명할 일본도 기독교가 흥하지 못한 국가 중 하나이지만, 센코쿠 시대~에도 막부 초기에는 그래도 꽤 교세가 있었다.[29] 사대부들은 그 둘이 같다고 생각한 듯한데, 채제공은 천주교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에서 천주교를 불교의 별파로 봤다.[30] 참고로 이 두 날이 모두 공휴일인 나라는 한국뿐이다.[31] 이전에는 "예수와 하나님을 믿는다면 개신교를 포함해 누구나 구원을 받으며 심지어 예수를 믿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았다면 연옥을 통해 구원을 받는다"고 적혀 있었는데, 막연하게 가톨릭에 대한 친근한 환상을 가진 개신교인들이 하는 착각 중 하나다. 연옥도 가톨릭에 속해 대죄/중죄를 짓지 않아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대상이 여전히 죄가 많아 사후 보속하는 과정에 대한 개념이며, 예수와 가톨릭을 알고도 예수를 믿지 않거나 가톨릭교회에 다니지 않으면 당연히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유일한 예외 대상은 전혀 하느님이나 가톨릭교회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거나 가톨릭교회에 속할 기회를 아예 갖지 못한 사람이라면 구원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경우 뿐이다.[32] 단,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리스도인들의 횡포 때문에 바테렌 추방령을 내리는 등 가톨릭 신앙에 압박을 가했지만 이것은 치안 유지의 차원이었지, 에도 막부 시절 같은 탄압은 없었다. 이때 일본은 불교 신자들과 가톨릭 신자들의 갈등이 심했고, 심지어 다이묘들 간에도 종교 때문에 감정 상하는 일이 많았다.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앙숙 관계인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도, 가토의 영지에서 탄압받던 가톨릭 신자들을 고니시가 두둔한 일로 서로 날을 세운 적이 있다. 다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경우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키리시탄들이 싹 다 서군에 붙는 바람에 정권 유지의 차원으로 탄압했고 그것도 세키가하라 전투가 끝나고 잠시 중단하다가 가톨릭 교도들이 일으킨 시마바라의 난 때문에 에도막부는 어쩔 수 없이 가톨릭을 탄압하게 된다. 다른 건 다 둘째치더라도 시마바라의 난이 제일 크다.[33] 신토 부정은 천황 부정이고 일본 체제의 붕괴를 의미하기도 하였다.[34] 현재 인도의 불교 신자 수는 기독교 신자보다도 더 적다.[35] 이 시기는 몰디브가 통일된지 얼마 안되었던 시절이었다.[36] 이와는 반대로 동남아의 미얀마 등지에서는 불교도들이 무슬림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혹은 모스크를 불태우거나 하는 일도 있었다.[37] 몽골 제국 시대에 몽골인들이 불교 사원을 다시 몇 개 건설하긴 했지만 중동의 몽골인들이 이슬람으로 금새 개종해버리는 바람에 현지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했다.[38] 소태산은 스님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불법과 별 인연 없이 스스로 깨침을 얻은 케이스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은 직후 여러 종교의 경전을 열람하고 금강경에 감명을 받아 석가모니 부처님을 스스로 연원으로 정하였다

《도마복음》: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잇는 가교(架橋) / 오강남 <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 특집 < 기사본문 - 불교평론

《도마복음》: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잇는 가교(架橋) / 오강남 <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 특집 < 기사본문 - 불교평론


《도마복음》: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잇는 가교(架橋) / 오강남
기자명 오강남
입력 2009.09.22

들어가면서

《불교평론》에서 요청한 원고의 제목은 ‘도마복음 등 외경과 불교와의 관계’라는 것이었다. 이 글에서는 필자가 최근에 펴낸 《도마복음》 풀이 책1)을 중심으로 해서 《도마복음》이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만남에서 어떤 의미가 있고, 또 앞으로 어떤 위치를 차지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다루려고 한다. 도마가 인도로 갔던가, 도마와 인도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가 하는 등의 문제를 가지고 역사적 진위를 밝히는 작업 등은 이 글의 범위 밖의 것으로서 논의에서 제외됨을 처음부터 밝히는 바이다.

심층에서 만나다

세계 여러 종교를 살펴보면 각 전통에는 두 가지 층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를 쉬운 표현으로 하면 표층(表層)과 심층(深層)이라 할 수 있다. 서양 말로는 엑소테릭(exoteric)과 에소테릭(esoteric)이라 하는데, 불교적 용어로 현교적(顯敎的) 차원과 밀교적(密敎的) 차원이라 할 수 있을까.

표층 종교의 가장 두드러진 특색은 경전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고, 종교를 자기중심적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심층 종교의 가장 큰 특징은 경전의 문자적인 뜻 너머에 있는 더 깊은 뜻을 깨쳐 나가려고 노력하고, 무엇보다 종교를 자기중심적인 나를 비우고 내 속에 있는 참 나를 찾는 길로 받드는 것이다. 내 속에 있는 참 나는 결국 절대자이기에, 그 절대자와 내가 하나라는 깨달음에 이르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

불교에도 표층 불교, 심층 불교가 있고, 그리스도교에도 표층 그리스도교, 심층 그리스도교가 있다. 물론 각 종교마다 표층과 심층 중 어느 것이 얼마나 더 두꺼우냐 하는 비율상의 차이점은 있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불교는, 그 명칭이 말해주는 것처럼 기본적으로 성불, 곧 깨달음을 목표로 하는 종교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심층을 강조하는 종교라는 뜻이다. 그러나 불자들 모두가 다 성불을 궁극 관심사로 여기고 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현재 많은 불자들이 기복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고, 이것은 어느 의미에서 이상할 것도 없는 현상이라 보아야 한다. 대부분의 종교인은 표층적인 관심에서 시작하여 심층적인 차원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한편 그리스도교는, 적어도 한국의 경우를 보면, 대부분이 표층적 차원에 머무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는 그리스도교에 깨달음이라는 심층의 차원이 있는지도 모르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다. 그 뿐 아니라 심층을 이야기하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보면 이단이라든가 심지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불교와 그리스도교가 다른 점 한 가지는 불교인들의 경우 자기는 아직 표층에 머물러 있기는 하지만 깨달음 같은 심층을 목표로 삼고 있거나 심층적인 불교를 받들고 있는 사람을 비난하거나 정죄하지 않는 반면, 그리스도인들의 경우 그리스도교의 심층적 차원을 이상으로 여기거나 그런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이들을 배척하고 정죄한다는 사실이다. 정통 그리스도교에서 유영모, 함석헌 선생님을 백안시하거나 배척한 것이 그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일이 한국 그리스도교에 비일비재하다는 사실이 한국 그리스도인들만의 책임이나 잘못은 아니다. 왜 그런가?

《도마복음》의 배경

1세기 그리스도교가 발생하고 2, 3세기에 걸쳐 발전하면서 그리스도교 안에도 몇 갈래의 신앙 형태가 생겨났다. 지금 우리의 분류를 적용하면 초대교회에 크게 표층적인 그리스도교와 심층적인 그리스도교가 병존했다고 할 수 있다. 단순히 믿는 믿음의 단계에 만족하는 표층 그리스도인들이 있었고, 이런 단순한 믿음의 단계를 지나 사물의 실상을 꿰뚫어 보는 깨달음의 단계를 추구하는 심층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 이들 심층 그리스도인들은 ‘물’로 세례를 준 세례 요한의 세례는 오로지 ‘첫 단계’에 불과하므로 이에 만족하지 말아야 한다고 보았다. 그들은 세례 요한 스스로도 자기 뒤에 오실 예수님이 “성령과 불로”(마3:11, 눅3:16) 세례를 주리라고 예언했는데, 바로 이런 세례를 받아 영적으로 눈을 떠야 한다고 생각했다.

심층적 그리스도인들의 주장에 의하면, 물로 세례를 받았을 때는 하느님을 창조주나 심판자로 믿고 우리 스스로를 ‘하느님의 종’으로 여기고 살았지만, 성령과 불로 세례를 받아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되면 이제 하느님을 모든 존재의 근원으로 보게 되고 자기들을 ‘하느님의 자녀’요 ‘상속자’로 확신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제 질투하고 진노하는 그런 하느님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로 충만한 새로운 하느님, 우주의 질서로서의 하느님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성령과 불로 받는 제2의 세례를 아폴루트로시스(apolutrosis)라 불렀는데, 이는 노예가 노예 신분에서 풀려나는 것과 같은 ‘놓임’이나 ‘해방’, ‘해탈’을 뜻하는 말이었다.

특히 주목할 것은 표층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고 그대로 믿는 ‘믿음’을 강조한 데 반하여 심층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말씀 속에 감추어진 ‘비밀’을 깨달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비밀을 깨달아 아는 것을 그들은 ‘그노시스(gn굅sis)’라 불렀다. 한문으로 이를 보통 ‘영지(靈知)’라고 번역하고, 영어로는 ‘knowledge’라 옮기는데, 우리말로 ‘깨침’ 혹은 ‘깨달음’이라 하는 것이 원의에 가깝다. 그노시스는 불교의 ‘반야(般若, praj괴켥)’ 곧 혜(慧), 명(明), 지혜(智慧), 현대어로 통찰, 꿰뚫어 봄, 직관 등에 해당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물론 심층 그리스도인들은 상대적으로 소수에 속했다. 초대교회 지도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교회 내에 있는 이런 소수의 심층 그리스도인들이 눈의 가시처럼 여겨졌다. 이런 소수의 과격한 주장이 절대다수를 이루고 있는 표층 신도들과의 차별화를 불러오기 때문에 교회 내에 불필요한 분열을 조장한다고 보았다. 특히 이들 심층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의 깨달음을 강조했기 때문에 교회 내의 계급제도라든가 조직에 크게 의존하지 않는 성향을 보이므로 교회의 권위와 일치를 저해하는 세력으로 여겨졌다. 이런 몇 가지 이유로 초대 그리스도교에서는 불행하게도 심층 그리스도교가 억압받고 박해받는 소수의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4세기 이런 심층 그리스도교는 지하로 내려가거나 쇠퇴하고 만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젊은 추기경 아타나시우스(Athanasius)의 등장 때문이었다. 4세기 초 로마 제국을 통일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제국을 통치할 하나의 종교적 이데올로기로서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에게 그리스도교를 ‘하나의 하느님, 하나의 종교, 하나의 신조, 하나의 성서’로 통일할 것을 요청했다. 그에 따라 325년 니케아 공의회가 열렸다. 여기에서 예수를 하느님과 ‘동질’이라 주장하던 아타나시우스가 예수의 인성을 주장하던 아리우스(Arius)파를 물리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아타나시우스는 당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다양한 신앙 형태에 따라 서로 다른 생각들을 드러내고 있던 그리스도교 문서들을 일괄 정리할 필요를 느꼈다. 그는 그때까지만 해도 쪽복음처럼 개별적으로 떠돌아다니던 그리스도교 문헌들 중 27권을 선별하여 그리스도교 경전으로 정경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것이 지금 그리스도교에서 신약(新約)이라 부르는 그리스도교 경전이다. 그는 한 걸음 나아가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여 367년 자기의 신학적 판단 기준에 따라 ‘이단적’이라고 여겨지는 책들을 모두 파기 처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심층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던 깨달음 중심의 문서들은 물론 이런 파기 처분의 대상 1호였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이집트에 있던 그리스도교 최초의 수도원 파코미우스(Pachomius)의 수도승들이 그 수도원 도서관에서 이런 문헌들을 몰래 빼내 항아리에 넣어 밀봉한 다음 나중에 찾기 쉽도록 산기슭 큰 바위 밑에 있는 땅속에 숨겨놓았다.

이렇게 숨겨진 문서가 1,600년이 지난 1945년 12월 이집트 카이로에서 남쪽으로 500Km 떨어진 나그함마디(Nag Hammadi)라는 곳에서 발견되었다. 열세 뭉치로 묶여 있는 이 파피루스 서류 뭉치들 속에는 모두 52종의 문서가 들어 있었는데, 여기에는 지금 그리스도교에서 가지고 있는 정경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여러 가지 이름의 복음서들, 예를 들어 《도마복음》 《빌립복음》 《진리복음》 《이집트인복음》 《요한의 비밀서》 등이 있었다.

이런 문서 중 가장 크게 주목 받은 것이 《도마복음》이었다. 초기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도마가 예수님의 쌍둥이 형제로 알려져 있었던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도마복음》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던 그리스도교에 대한 이해를 혁명적으로 바꾸어주었기 때문이다. 22세에 옥스퍼드대학교 교수가 되고, 그 후 신비주의에 관해 방대한 저술을 낸 앤드루 하비(Andrew Harvey) 같은 이는 1945년에 발견된 이 《도마복음》이 같은 해 8월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에 버금가는 폭발력을 가진 문헌이라고까지 하면서 《도마복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도마복음》을 읽을 경우 그리스도교에는 표층적인 신앙 형태가 주종을 이루고 있고, 심층적인 차원이 거의 없는 것이 아닌가 하던 종래까지의 일반적 오해를 불식(拂拭)시키기에 충분하다는 뜻이다. 《도마복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깨침’을 강조하고 있고, 거기 나오는 예수는 스스로 깨친 이로서 제자들에게 ‘깨침’을 가르치는 분으로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도마복음》의 특징

나그함마디에서 발견된 《도마복음》은 사본의 필체로 보아 대략 기원후 350년경에 필사된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그러나 《도마복음》 자체는 여러 가지 정황을 참작해볼 때 기원후 약 100년경에 지금의 형태로 완성되었을 것으로 본다. 그렇지만 그 내용의 상당 부분은 50년에서 6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들이라 여겨지는데, 그렇게 본다면 《도마복음》은 성경에 나오는 다른 복음서들에 비해 적어도 10년 내지 20년 정도 더 오래된 전승을 포함한 복음서라는 이야기가 된다.

《도마복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그것이 114절의 간단간단한 예수님의 말씀만 적어 놓은 ‘어록’이라는 점이다. 이 말씀들 중 약 50% 정도가 성경에 나오는 공관복음서들의 말씀과 평행을 이룬다. 그러나 《도마복음》이 공관복음과 다른 가장 중요한 특징은 공관복음에서 많이 언급되고 있는 예수님의 기적, 예언의 성취, 재림, 종말, 부활, 최후 심판, 대속 등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고, 그 대신,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내 속에 빛으로 계시는 하느님을 아는 것, 이것을 깨닫는 ‘깨달음(gn굅sis)’을 통해 내가 새사람이 되고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강조한다는 점이다.

특히 《요한복음》과 비교하면 그 특징이 더욱 두드러진다. 《요한복음》에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요3:16)고 하거나, 예수님을 “나의 주요, 하나님”(요20:28)으로 믿는 등 ‘믿음(pistis)’을 강조하고 있는 데 반해 《도마복음》에는 ‘믿음’이라는 낱말이 딱 한 번, 그것도 제자의 입을 통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도마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가르침은 깨침을 궁극 목적으로 하는 불교나 기타 세계 신비주의 종교 전통과 궤를 같이한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도마복음》과 불교는 다 같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필자는 그동안 논문이나 책을 통해 불교와 그리스도교가 서로 격의 없는 대화를 통해 서로 배울 것은 배우고 가르칠 것은 가르쳐 주는 협력관계를 이루어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불교와 그리스도교가 대화를 한다면 무엇보다 함께 머리를 맞대고 어떻게 하면 더욱 많은 사람들이 표층 종교에서 심층 종교로 들어갈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가지고 의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뜻을 이곳저곳에서 발표한 적이 있다.2)

이제 여기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도마복음》 중에서 불교의 기본 가르침과 맥를 같이하는 것 몇 구절을 인용하여 불교와 연관해서 살펴보면서, 이런 작업을 통해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대화가 어떻게 더욱 활기 있게 진행될 수 있을까를 모색해보는 계기가 이루어질 수 있었으면 하고 기원해본다.

《도마복음》 제22절: 예수께서 젖을 먹고 있는 아이들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젖 먹는 아이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이들과 같습니다.” 제자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아이들처럼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둘을 하나로 하고, 안을 바깥처럼, 바깥을 안처럼 하고, 높은 것을 낮은 것처럼 하고, 암수를 하나로 하여 수컷은 수컷 같지 않고, 암컷은 암컷 같지 않게 하고, 새로운 눈을 가지고, 새로운 손을 가지고, 새로운 발을 가지고, 새로운 모양을 가지게 되면, 그러면 여러분은 그 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도마복음》의 핵심과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는 구절 중의 하나라 할 수 있다. 《도마복음》 제4절에서 늙은이라도 갓난아기에게서 배워야 한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그 젖먹이 갓난아기에게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를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성경 복음서에도 같은 말이 있는데, 거기는 어린아이가 갓난아기라는 말이 없다. 또 천국에 들어가는 요건으로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마18:4) 것이라는 말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도마복음》에서는 자기를 낮춤이 그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나 천국에서 큰 자로 인정받는 것과 직접 관계가 있다는 말이 없다. 그와는 달리 《도마복음》은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요건으로서 ‘젖먹이 갓난아기같이 됨’이라고 하고, 단도직입적으로 그 이유를 밝히며, 이 젖먹이 갓난아기들이야말로 ‘둘을 하나로’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둘을 하나로 만든다는 생각은 제4, 22절에 나왔고, 23, 48, 106절에도 계속 나온다. 무슨 뜻인가?

첫째, 물리적으로 갓난아기는 남성의 아버지와 여성의 어머니 ‘둘이 하나가’ 되어 생긴 결과다. 그 아이도 나중에는 대부분 남성이나 여성이 되겠지만, 아직 할례를 받기 전의 갓난아기는 남녀로 분화되지 않은 하나의 상태, 합일의 상태라 할 수 있다. 반대같이 보이는 것을 한 몸에 합치고 있는 종합이다.

둘째, 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인식론적으로 아이는 아직 나와 대상을 분간하는 이분법적 의식이 없는 상태다. 즉, 주객(主客)이 분화되지 않았다. 이런 의식 상태에서는 ‘내외(內外), 상하(上下), 고저(高低), 자웅(雌雄)’ 등 일견 반대되고 대립되는 것 같은 것을 반대나 대립으로 보지 않고 조화와 상보의 관계로 볼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갓난아기의 특성으로서, 이런 특성을 가져야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다.

태극기 가운데 붉은색(양)과 파란색(음)으로 된 태극의 음양(陰陽)에서 음과 양의 관계를 말할 때, 음이냐 양이냐 하는 양자택일(兩者擇一)이나 이항대립(二項對立)식 ‘냐냐주의(either/or)’의 시각으로는 실재의 진면목을 볼 수 없고, 음이기도 하고 양이기도 하며 동시에 음도 아니고 양도 아니라는 ‘도도주의(both/and, neither/nor)’적 태도를 가질 때 사물의 전체를 본다고 한다. 음과 양을 독립된 두 개의 개별적 실체로 보지 않고 한 가지 사물의 양면으로 파악한다는 뜻이다. 이것을 요즘 말로 고치면 ‘초이분법적 의식(trans-dualistic consciousness)’을 갖는다는 것이고, 좀 더 고전적인 말로 하면 중세 신비주의 사상가 니콜라우스 쿠자누스(Nicolaus Cusanus, 1401~1464)가 말하는 ‘양극의 조화(coincidentia oppositorum)’를 발견하는 것이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분별의 세계를 초월하여 불이(不二)의 경지에 이르라는 것이다.

사실 세계의 여러 종교에서 ‘양극의 조화’처럼 중요한 개념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음양의 조화를 말하는 태극 표시는 말할 것도 없고, 위로 향한 삼각형과 아래로 향한 삼각형을 포개놓은 유대교의 ‘다윗의 별’이라든가, 수직선과 수평선을 교차시킨 그리스도교의 십자가나, 두 원을 아래위로 반반씩 겹쳐놓고 그중 겹쳐진 부분을 잘라 만든 초기 그리스도교의 물고기 상징, 불교 사찰에서 보는 만(卍) 자 등이 모두 이런 양극의 조화를 이상으로 삼고 있다는 역사적 증거들이다.

제23절: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여러분을 택하려는데, 천 명 중에서 한 명, 만 명 중에서 두 명입니다. 그들이 모두 홀로 설 것입니다.”

여기서는 깨달음에 이르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천 명 중 한 명”, 심지어 “만 명 중 두 명” 꼴이라니 그야말로 가물에 콩 나기보다 더 어려운 셈이 아닌가.

힌두교에서는 구원에 이르는 길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눈다. 즉, 깨달음의 길(j괴켥na marga), 신애(信愛)의 길(bhakti marga), 행함의 길(karma marga)이다. 깨달음의 길이란 우주의 실재를 꿰뚫어 보는 통찰과 직관과 예지를 통해 해방과 자유에 이른다는 것이고, 신애의 길은 어느 특정한 신이나 신의 현현을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해 믿고 사랑하고 받드는 일을 통해 구원에 이른다는 것이고, 행함의 길이란 도덕규범이나 규율을 잘 지키거나 남을 위해 희생적인 선행을 많이 하여 구원에 이른다는 것이다.

세 가지 구원의 길 모두 자기중심적 자아를 극복함으로써 새사람이 되게 한다는 점에서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때로는 실행하기에 상대적으로 어려운 길과 쉬운 길로 나누기도 한다. 깨달음의 길은 가장 가파르고 어려운 길이라 상근기(上根器)에 속하는 소수에게만 가능하다고 본다. 일반 사람들이 가장 많이 따르는 길은 신에게 전적으로 헌신하는 신애의 길이다.

불교에서도 이와 비슷한 생각이 있다. 참선을 통해 깨달음을 얻음으로써 성불하겠다는 선불교의 길을 보통 ‘난행도(難行道)’라고 하고, 아미타불의 원력을 믿고 “나무아미타불” 하며 그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서방정토에 왕생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정토종의 길을 ‘이행도(易行道)’라고 한다. 물론 참선하겠다는 사람보다 염불하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더 많았다.

그리스도교 초기에도 《도마복음》에서 말하는 것처럼 내 속에 있는 하느님의 나라를 ‘스스로’ 깨달아 알라는 깨달음의 길은 그만큼 어려운 것으로 알려졌던 모양이다. 결국 《도마복음》식 기별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보다, 예수를 믿고 은혜의 선물로 주는 영생을 얻으라고 강조하는 《요한복음》의 길을 채택한 사람들이 숫자적으로 더 많았다.

그러기에《요한복음》은 정경으로 채택되어 그리스도교의 정통 가르침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반면 《도마복음》은 사라지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어떻게 보면 《도마복음》에서 말하는 식의 그리스도교 전통은 신앙의 심층 차원을 알아볼 기회가 없던 일반인들에게는 현실적으로 인기 품목이 되기 어려웠던 것이 당연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문맹률이 97퍼센트 이상이던 고대 사회와 달리 이제 많은 사람들이 최고의 교육을 받았고, 인터넷 등 대중 매체의 발달로 정보화 시대가 되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나 필자도 한 세대 전에 태어났으면 그리스도교에 깨달음을 강조하는 전통이 있었다는 것을 모르고 지냈을지 모른다. 그야말로 이제는 들을 귀, 알겠다는 마음만 있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히브리어 성경 《요엘》서에 보면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욜2:28)이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그 후’가 오늘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지적·영적 환경 속에서는 깨달음을 얻는 사람들이 ‘가물에 콩 나듯’이가 아니라 가마솥에 ‘콩 튀듯’이 등장하리라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20세기 가톨릭 최고의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도 21세기 그리스도교는 “신비주의적으로 변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신비주의적’이라는 말은 물론 깨달음을 강조하는 심층적 종교의 태도를 의미한다. 독일의 신학자로서 미국 유니언 신학교에서 오래 가르친 도로테 죌레(Dorthee Soelle)도 근래에 펴낸 그의 책 《The Silent Cry》에서 신비주의 체험이 역사적으로 특수한 몇몇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무엇이 아니라 이제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서 있을 수 있는 일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이른바 ‘신비주의의 민주화(democratization of mysticism)’를 주장했다. 지금 유럽이나 미국에서 참선이나 명상이 많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크게 주목받고 있는 현상이 이런 흐름을 직접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제28절: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내가 설 곳을 세상으로 정하고, 육신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났습니다. 나는 그들이 취해 있음을 보았지만, 그 누구도 목말라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내 영혼은 이런 사람의 아들들로 인해 아파합니다. 이는 이들이 마음의 눈이 멀어 스스로 빈손으로 세상에 왔다가 빈손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이 취해 있지만, 술에서 깨면 그들은 그들의 의식을 바꿀 것입니다.”

여기서는 예수님은 자기가 이 세상에 육신의 몸으로 온 목적을 천명한다. 그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세상 죄를 지고 가려는 것이 아니다. 술 취한 상태, 잠자는 상태에 있는 인간들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다. 인간 실존의 한계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우리 눈에 보이는 현상세계만을 실재인 줄로 알고 있는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인간들에게 현상계 너머에 있는, 혹은 그 바탕이 되는 실재(實在), 진여(眞如), 여실(如實), 자신의 참모습을 보도록 깨우쳐주기 위해 오셨다는 것이다.

“마음의 눈이 멀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 그야말로 예수님이 가르쳐주는 지혜와 깨달음이 바로 우리 앞에 있는데, 그것을 잡지 못하고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하는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완전한 절망만은 아니다. 지금은 우리가 취해 있지만 우리의 취한 상태, 잠자는 상태를 깨우기 위해 일부러 육신을 쓰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 술 취한 상태, 잠자는 상태에서 깨어나면, 그리하여 심안(心眼)의 개안(開眼)이 있기만 하면, 완전한 ‘의식의 변화’를 맛보게 된다고 했다.

마지막 구절은 종교사적으로 너무나도 중요한 발언이다. 여기에서 “술에서 깨면 그들은 그들의 의식을 바꿀 것”이라고 할 때 ‘의식을 바꿀 것이다’라고 번역한 이 말의 원문은 콥트어 판에서도 그리스말을 그대로 사용하여 ‘메타노이아(metanoia)’로 되어 있다. 이것은 예수님 가르침의 핵심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공관복음에서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쳤을 때 그 ‘회개’에 해당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메타노이아’는 어원적으로 ‘의식(noia)의 변화(meta)’를 의미한다.

단순히 옛 잘못을 뉘우치고 새로운 삶을 살기로 작정한다는 식의 회개라는 뜻 그 이상이다. 우리의 이분법적 의식을 변화시켜 초이분법적(trans-dualistic) 의식을 갖게 된다고 하는 뜻이다. 말하자면 성경 복음서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는 예수님의 ‘천국 복음’이란 결국 ‘우리의 이분법적 의식을 변화시키고, 그로 인해 하느님의 주권이 내 가까이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라 풀이해도 무리가 없다. ‘의식의 변화’ 혹은 변혁을 체험하는 것이야말로 예수님이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갖게 되기를 바라던 최대의 소원이었던 셈이다.

이것은 사실 우리 주위에 있는 불교나 유교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불교에서 ‘붓다’ ‘부처’ ‘불(佛)’이란 ‘깨침을 얻은 이(the Awakened, the Enlightened)’라는 뜻이고, ‘불교’라는 말 자체가 ‘깨침을 위한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성불하라.”는 말은 “깨침을 얻으라.”는 뜻이다. 유교에서도 신유학은 자기들의 가르침을 ‘성학(聖學)’이라고 했는데, ‘성인들의 가르침’이라는 뜻보다는 ‘성인이 되기 위한 가르침(Learning for Sagehood)’이라는 뜻이 더 강하고, 성인이란 한문의 ‘성

제77절: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모든 것 위에 있는 빛입니다. 내가 모든 것입니다. 모든 것이 나로부터 나왔고 모든 것이 나에게로 돌아옵니다. 통나무를 쪼개십시오. 거기에 내가 있습니다. 돌을 드십시오. 거기서 나를 볼 것입니다.”

여기서 세 가지 정도를 검토할 수 있다. 우선 생각해볼 것은 “나는 빛”이라고 했을 때 여기서 말하는 ‘나’가 무엇일까 하는 문제이다. 《도마복음》 전체의 맥락에서 볼 때 여기서 말하는 ‘나’는 한 개인으로서의 역사적 예수님 한 분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이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요8:58) 있었던 그 ‘우주적 나(Cosmic I)’, 곧 모든 사람들 속에 내재한 신성, 하느님, 참나를 가리키는 것이다.

천도교 2대 교주 최시형이 제사를 지낼 때 그것이 곧 자기 자신을 향한 제사임을 강조한 향아설위(向我設位)의 개념도 이와 궤를 같이한다. ‘시천주(侍天主)’와 ‘인내천(人乃天)’―한울님을 모신 내가 곧 한울님이니, 제사를 지내도 그것이 곧 자신에 대한 제사라는 뜻이다.

불교에서도 부처님이 어머니 옆구리에서 태어나자마자 큰 소리로 “하늘 위와 아래에 나밖에 존귀한 것이 없다(天上天下唯我獨尊).”라고 했다고 한다. 이때의 ‘나[我]’도 한 개인으로서의 아기 부처님을 의미하는 것이라기보다 우리 모두의 속에 있는 ‘초개인적 자아(transpersonal self)’, ‘참된 자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불교에서는 우리 모두에게 내재한 이런 초아적 요소를 ‘불성(佛性)’이라 부른다. 이것이 천상천하에서 가장 존귀하기에 다른 모든 것은 부차적 의미를 가질 뿐이라는 뜻이다.

두 번째로 살펴볼 것은 ‘빛’이라는 것이 상징하는 종교적 의미이다. 종교사를 통해 볼 때 많은 종교 전통들은 우리 속에 있는 ‘내면의 빛’을 강조한다. 우리 속에 있는 신적 요소, 신성, 참나, 참생명은 바로 ‘빛’이라고 한다. 우리의 일상적이고 인습적인 의식에서 벗어나 변화되고 고양된 순수 의식을 가지게 되면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그 ‘빛’을 체험할 수 있다고 한다.

힌두교 경전 《우파니샤드》에 보면 우리 속에 있는 브라만[梵] 혹은 참나[我]를 두고, “그대 홀로―그대만이 영원하고 찬연한 빛이시나이다.”라고 하였다. 불교인들이 염불을 통해 체현하려고 염원하는 ‘아미타’불도 ‘무한한 빛’, ‘무량광(無量光)’의 부처님이다. 유대교 신비주의 카발라 전통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13세기 문헌 《조하르(Zohar)》도 문자적으로 빛을 의미하고, 그 문헌에서 언급되는 절대자 아인소프(En-Sof)도 분화 이전의 무극(無極) 상태이면서 동시에 ‘무한한 빛’이라 했다.

그리스도교 동방정교 전통에서도 ‘신의 영광’이란 빛이신 신의 특성을 이야기한다고 보고, 이런 빛을 보는 사람이 신과 합일의 경지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퀘이커 교도들도 침묵의 예배를 통해 ‘내적 빛’을 체험하려고 한다. 이처럼 많은 신비주의 전통에서 ‘빛’은 때 묻지 않은 순수 의식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우리의 내면 세계의 찬연함을 말해주는 가장 보편적인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로 주목할 것은 이 절이 말하고 있는 ‘범재신론적 신관’이다. 본문에 ‘나’ 혹은 ‘신성(神性)’이 ‘통나무’에서도, ‘돌’에서도, 그 어디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고 했다. 도가 문헌 《장자》에 보면 누가 장자에게 “이른바 도(道)라고 하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장자가 “없는 데가 없다.”라고 하자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달라고 한다. 결국 땅강아지나 개미에도, 기장이나 피에도, 기와나 벽돌에도, 심지어 대변이나 소변에도 있다고 하며 이른바 도의 ‘주편함(周遍咸)’적 특성, 도의 편재성(遍在性)을 강조한다. 불교적으로 말하면 이사무애나 사사무애의 경지다.

나가면서

지금껏 《도마복음》 중 단지 몇 절을 뽑아 나름대로 살펴보았다. 필자는 앞에서 말한 《도마복음》 풀이 《또 다른 예수》라는 책 서문에서 “이 책이 한국에서 그리스도교인들과 불교인들을 이어주는 가교(架橋)의 역할을 할 수 있었으면” 한다는 염원을 밝힌 바 있다. 여기서도 같은 염원을 가지고 이 글을 썼다.

이 짧은 글에서 독자들이 《도마복음》이나 불교의 깊은 가르침이 다 같이 우리에게 ‘심층’ 차원의 종교를 지향하도록 우리를 일깨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므로 불교와 그리스도교가 그렇게 멀리 있는 것이 아닌 ‘이웃 종교’임을 새삼 확인하게 되었으면 한다. 그리하여 불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손을 잡고 더욱 많은 사람들이 표층 종교에서 심층 종교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데 협력하는 관계가 더욱 긴밀해지고, 이로 인해 세상이 그만큼 더 밝아지고 아름다워질 수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바이다. ■




오강남 / 캐나다 리자이나대학교(University of Regina) 비교종교학 교수.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캐나다 맥매스터(McMaster) 대학교 종교학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저서로는 《길벗들의 대화》 《도덕경》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 《장자》 《예수는 없다》 《예수가 외면한 그 한 가지 질문》 《세계종교 둘러보기》 《또 다른 예수》, 번역서로는 《종교 다원주의와 세계 종교》 《살아 계신 붓다, 살아 계신 그리스도》 《귀향》 《예언자》 등이 있다.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