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10
일본군/조선인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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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조선인
최근 수정 시각: 2019-11-17 21:5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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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조선인
일본군
旧日本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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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당시에 일본군에서 복무했던 한반도 출신자를 가리키는 표현. 그 특성상 대다수, 특히 장교는 거의 전원이 육군이고 해군은 드물다.
1. 개요2. 조선지원병3. 학도 특별지원병 제도4. 조선군인/조선인 일본병5. 알려진 사람들
5.1. 조선군인5.2. 일본 육군5.3. 일본 해군6. 매체에서의 조선인 일본군
6.1. 문학작품6.2. 드라마6.3. 영화6.4. 논픽션
1. 개요[편집]
일본은 19세기 말부터 일본 육해군을 조선에 진주시켰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겪으면서 그들은 조선을 지배하겠단 야욕을 드러냈고 1905년에 을사조약으로 외교권 박탈, 1907년엔 대한제국 군대해산을 일으켰다. 그 후 1910년에 강제 병합을 했다. 총독부 산하의 행정기관에도 조선인을 배치하였으나, 일본군에 조선인이 입대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당시 조선인이 일본군에 있는 경우는 대한제국 군대해산 당시에 일본에게 협조적이었던 친일파 군인들이 일본 육군으로 들어온 경우나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장교로 임관하는 경우 밖에 없었다. 사실상 당시 일본 육사에 들어갈 수 있는 조선인은 조선 왕족 출신이거나[1] 친일파들뿐이었다. 그나마 해군은 장교는커녕 말단 수병조차 조선인을 받지 않고 있었다.[2] 1930년대 이후론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 군관학교에 들어가 만주군이나 관동군으로 복무하는 경우도 있긴 했다. 당시 일본군은 일본 본토 출신들이거나 조선이나 대만에서 자란 일본인이었다.
강제병합 이후 치안을 유지한단 핑계로 경찰 조직 대신에 헌병을 조선 전역에 배치했다. 이때 조선총독부는 헌병보조원으로 일부의 조선인을 뽑았다. 대부분의 제국주의 국가가 그랬지만 식민지의 사람들은 아주 하급직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로선 조선인이 할 수 있던 몇 안 되는 공직이었기에 상당히 엘리트들이었다. 1919년에 일어난 3.1운동으로 이후 조선총독부는 헌병을 일본제국 경찰로 대신하고 조선인들을 보다 많이 채용한다.
그러다가 1930년대에 들어서 중국과 일본이 전쟁을 벌이고 미국과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지자 일본군은 병력을 수급하기 위해 조선인을 일본군에 끌고 가거나 군속(군무원)으로 데려갔다. 이들은 내선일체를 외치며 조선인과 일본인과 대만인이 같은 민족이라고 주장했지만[3] 실제로는 군 복무에서 철저히 분리하여 관리했으며 조선인들은 전장에서도 심각한 차별대우를 받았다.[4] 그리고 일본은 독립운동가나 사회주의자들의 친족도 징병에서 제외하였다. 전후에 전범으로 유죄를 받은 조선인은 129명이었고 이들 중 14명은 사형되었다. 도쿄 재판에 오른 A급 전범은 당연하지만 없다. 차별 등으로 조선인이 고위직에 올라가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한국계 일본인인 외교관 도고 시게노리가 있긴 한데 이 사람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 건너간 사람이 아니라 임진왜란 때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끌려온 조선인 도공의 후예이다. 일본군 고위급에 오른 조선인의 대다수는 대한제국군에서 편입한 친일파나 왕공족이었다. 홍사익만이 예외적인데 일본군에서 내선일체를 위해 조선 이름을 유지하는 그를 진급시킨 것으로 보인다. 일종의 전시용 어퍼머티브 액션(affirmative action). 이와는 별개로 한국인으로 일본에 귀화한 한국계 일본인 중에 자위대 직원이 있을 것이다. 2011년 일본 방위성 정보 본부에서 북한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조선계 일본인 정보원이 한국에서 사찰하다가 추방된 적이 있다. 프랑스 기사
육군병의 경우 94,978명이 징집되어 5,870명이 전사하고 89,108명이 귀환했다 (생존률 93.8%). 중국에 배치된 조선인 육군병 15,941명 중 15,287명이 살아 돌아왔다. 그러나 이는 지역별로 천차만별이어서, 사망률이 높았던 필리핀 전역에 배치된 육군병은 3,107명 중 951명만이 귀환할 수 있었다 (생존률 30.6%). 뉴기니 등도 마찬가지였다 (2,877명 중 1,014명 귀환, 생존률 35.2%).[5]
2. 조선지원병[편집]
3. 학도 특별지원병 제도[편집]
4. 조선군인/조선인 일본병[편집]
약간 표현에서 기술적인 차이가 있는데 조선군인은 대한제국군에서 일본군으로 편입한 친일파나 1938년 지원병을 받기 전에 일본 정부의 특례로 일본군에 입대한 사람을 말한다. 아래는 1910년 9월 1일에 일본군으로 편입한 대한제국군 인원이다. 전원이 육군 장교이다. 총원이 25명이다.
중장(부장)
2
소장(참장)
2
대령(정령)
1
중령(부령/2등군의장[6])
4
소령(참령)
4
대위(정위)
8
중위(부위)
1
소위(참위/삼등사[7])
3
이들 외의 조선군인으로는 특례로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 홍사익이나 영친왕 등이 있다. 1883년부터 1945년까지 조선인 가운데 일본육사에 입학한 인원은 141명이었다. 이중 메이지와 다이쇼 시기의 인원은 85명이며 이중 상당수는 육군무관학교가 폐쇄할 때 편입한 33명이다. 대한민국 육군 참모총장 가운데 일본육사 출신은 만주국육군군관학교에서 편입한 자를 포함해 다섯이다. 조선인으로 일본해군병학교에 들어간 사람은 없고 일본 내지인 호적으로 들어가 입학한 경우는 일부 있다고 하나 정확한 출처는 없는 상태다. 대한민국 해군 참모총장 및 고급 장교 가운데 일본 해군 출신은 없으며, 초대 해병대사령관 신현준 등 소수의 만주군 인맥이 있으나 대부분 해병대로 보내졌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부족한 조종사 충원을 위해 해군 예과 연습생(단기에 해군 조종사를 양성하기 위한 과정, 약칭 예과련.) 일부를 조선인에게도 개방했으나, 종전까지 임관한 사람은 없다. 예과련 출신 중 중앙정보부장이 되는 김재규가 유명한데, 그 역시 후보생으로만 있다 광복으로 임관 못하고 귀국했다. 일본육군항공사관학교에는 일부 입학자가 존재하는데 대한민국 공군 참모총장 중에도 두 명이 있다.
보기에 따라서는 일본군 헌병대에서 군속 신분으로 일하던 헌병보조원도 군인으로 보기도 하는데 이들은 일등병과 이등병 사이의 대우를 받았다. 1910년 당시에 헌병경찰의 숫자는 2,019명이었는데 이중 조선인 헌병보조원은 1,012명이었다. 헌병을 합친 전체 경찰의 숫자는 7,712명이며 이중 조선인의 숫자는 4,440명이었다. 1919년엔 헌병 대신 조선총독부경찰이 업무를 맡았다. 헌병보조원들은 일본제국 경찰의 순사가 되었다.
조선인 일본병은 1938년부터 시작된 지원병, 1943년 시작된 학병, 1944년 시작된 징병제에 의해 일본군에 들어간 자를 말한다. 육군의 경우 1938년부터 특별지원병 제도를 시작했고 해군은 1943년부터 육전대(해병대)와 지상근무자를 중심으로 조선인을 받았다. 고졸 이상으로서 간부를 임용하는 제도의 경우 학도 특별지원병 제도를 확인할 것. 병사의 경우 보통학교 4년 졸 이상이면 일본어, 산수 시험을 봐서 합격했다.
조선인을 징병할 때[8] 일본 육군에서는 주로 보병 (약 2/3)으로 데려갔다. 그 외에는 치중병, 비행병, 공병, 고사포병, 산포병, 야포병으로 각각 1~5%씩 데려갔지만, 전차병, 야전중포병, 철도병, 통신병, 선박병, 항기병, 병기병으로 복무한 인원은 소수에 불과했다. 일본 해군 역시 주로 수병과 공작병 (각각 1/3)으로 데려갔다. 나머지는 정비병, 기관병, 목공병, 위생병, 주계병으로 복무했다.
5. 알려진 사람들[편집]
5.1. 조선군인[편집]
홍사익: 한국인 평민출신으로 유일하게 일본군 장군(중장)까지 오른 인물. 중일전쟁 시기 중국팔로군과 조선의용군과 교전(태항산 전투) 당시 일본군을 지휘했으며, 태평양전쟁 시기에는 필리핀전선에서 연합군포로 수용소장 지냈다. 종전후 필리핀에서 전범으로 처형당했다.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군대가 해산되자 일본의 육사로 유학갔다. 당시에는 대한제국의 명의로 유학을 간 것이었다. 한일합방 이후 같이 유학을 간 친구들은 독립운동 등에 투신하였으나 그는 그대로 남아 일본 육사를 졸업한 뒤 일본군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 그는 자신을 영국군에서 복무하는 아일랜드인 정도로 생각했다고 한다. 친구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할 것을 제안했지만 시기상조라며 거절했으며 탈영한 조선인 일본군을 숨겨주는 등 묘한 행동을 많이 했다. 일본군 장군에 있었다는점과 중일전쟁시기 조선 독립군을 상대로 교전 지휘했다는점, 그리고 2차대전 전범이었다는 점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된다. 최종계급 일본군 육군 중장.
조동윤: 1871-1923. 조선군과 대한제국군을 거쳐 일본군 중장에 이르렀다. 다만 이는 실적 등으로 진급한 것이 아니라 원래 대한제국군의 고위 장교였고 친일 행적 등으로 받은 계급이다.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남작 직위를 받기도 했다.
이병무: 1864-1926. 조동윤과 마찬가지로 대한제국군을 거쳐 일본군에 편입됐다. 정미칠적, 대한제국 군대해산을 주도했으며, 이후 의병 토벌에 진압에 앞장서기까지 했음. 경술국치 후 귀족작위 받아 떵떵거렸다. 친일파로 최종 계급은 일본군 중장.
조성근: 1876-1938. 조동윤, 이병무와 마찬가지로 대한제국군을 거쳐 일본군에 들어간 친일파. 최종 계급 일본군 중장.
어담: 1881-1943. 위의 조성근과 마찬가지로 대한제국군을 거쳐 일본군 중장을 지낸 친일파. 조선총독부 중추원에서 일본 참의원을 지냈으며 지원병 제도가 생기자 조선인들이 일본군에 입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은: 1897-1970. 영친왕. 왕공족으로 일본 육사를 졸업했다. 이방자 여사와 결혼했다. 1936년 2.26 사건 당시에 연대장으로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도쿄에 주둔하기도 했다. 최종계급은 일본군 중장. 다만 자발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잘 분류되지는 않는다.[9][10]
이희두: 1869-1925. 대한제국군에서 일본군으로 넘어간 친일파. 최종계급 일본군 소장. 러일전쟁 때 일본군이 서울에 주둔할 수 있게 도왔다.
김응선: 1881-1932. 청일전쟁 당시의 일본군 우츠노미야 타로에게 발탁되어 일본 육사로 유학했다. 그후 일본군으로 러일전쟁에 참전했다가 대한제국군으로 다시 파견되어 열심히 친일질 했다. 최종계급 일본군 소장.
왕유식: 1870-1930. 이름과 달리 존나 무식했던 모양이다 위와 마찬가지로 친일파가 된 대한제국군의 군인. 원래는 대한제국군 대위로 박영효가 임명한 친일파 장교를 견제하려고 고종이 일본으로 유학보냈는데 친일파가 되어 돌아왔다.
5.2. 일본 육군[편집]
나가타 겐지로(永田絃次郎): 본명은 김영길로 평양 출신으로 일본 도야마 대학교를 나온 뒤에 일본군 병(군악부)으로 입대했다. 음악가로 테너로 활동했다. 일본군을 독려하는 음반 등을 발표했다. 전후에 갑산파성향을 띄다 재일교포 북송에 참여해 북한으로 갔다.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빨갱이로, 친일 종북 월북 그랜드슬램 그거 심영(...) 그러나 북한 공연에서 오 솔레미오를 불렀다는 이유로 자본주의자로 몰려 가택연금 등을 당하다가 풀려난 뒤에 북한에서 음악을 가르쳤다고 한다. 아내는 일본인인데 자녀들은 북한에서 음악을 가르친다고. 이 자가 부른 노래는 한 곡이 나무위키에도 항목이 만들어져 있는데 일본 군가 정복하자 런던이다.
김달삼 : 학병 출신으로 소위 임관. 복무 중 종전을 맞고 귀국하였다. 일본군 복무 경험은 이후 4.3사건에서 김달삼의 유격대 지휘통솔력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김석원 : 일본 육군 대좌 출신으로 중일전쟁 전선에서 상당한 활약을 했다. 신생 한국 육군에도 장성으로 임관해 한국전쟁 때도 일본군도를 패용하고 지휘했다.
김수환 : 사관후보생으로 강제로 징집되어 장교로 교육을 받다가 탈락하고 병으로 끌려가 강제로 태평양 전선에서 싸웠다.
장준하 : 자원입대하여[11] 중국에 제65사단 7991부대에 배속되었다가 1944년 7월 탈영한다. 탈영 직후 국민당 유격대에 의탁했으나 그 유격대는 일본군도 아니고 중국 공산당 게릴라의 공격으로 와해되고, 어찌어찌 빠져나와 김준엽과 다른 조선인 탈영병들과 함께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도착하여 한국 광복군에 편입되었다. 임시정부가 미국 OSS와 합작 기획한 국내 진공 작전 요원으로 김준엽, 노능서 등과 함께 편입되지만, 8월 15일 광복으로 수행하지 못하고 일반인 자격으로 쓸쓸히 귀국하였다. 이 여정을 함께 했던 광복군 장병 분들이 90대의 춘추로 몇 분 살아계셔서 KBS 역사스페셜에서 증언을 하였다.
김준엽 : 장준하와 마찬가지로 학도병에 반강제적으로 입대하여 중국에 있던 일본군 자대에 배치되었으나 곧 탈출하여 한국 광복군 기지로 향한다. 마찬가지로 중국군에게 투항해 중국군 기지에서 장준하를 만났다. 광복 후 귀국까지의 행적은 장준하와 거의 동일하다.
탁경현 : 조선인 카미카제 대원. 역사스페셜에서 관련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도 했다. 그를 조명한 영화가 일본에 나오자 그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의 주선으로 그의 고향에 추모비가 세워지자 분노한 주민들이 일본을 위해 죽은 것이 뭐가 자랑이냐고 추모비 건립을 반대하여 끝내 식이 치뤄지지 못했다.#
이응준
이종찬
이형근
채병덕
5.3. 일본 해군[편집]
김기택: 전 영남대학교 총장. 입대 시점은 확실하지 않으나 입대 전에 만주흥업은행 본점에서 근무했고 한국전쟁 때 육군종합학교를 거쳐 경리장교로 입대했던 것을 보면 일본 해군에서도 주계과(경리, 보급, 행정을 맡는 병과) 장교였던 것으로 보인다. 종전시 대위였다.
김재규: 일본 해군 예과 연습생 출신으로, 해군 항공소위 임관을 준비하다 광복을 맞아 임관 못 하고 돌아왔다. 대한민국에선 육군 장교가 되었다.
이외에 기관과 등 지원병과 중심으로 출신자가 있다. 심지어 일본 해군 항공대 출신 전투기 조종사도 있었다. 또한 당시 상선학교(도쿄상선, 고베상선학교 등) 출신의 해기사는 의무적으로 해군 예비역 소위로 편입되었으므로 이곳 출신 조선인들 중 군함에 탄 이들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현대 한국 사회에서 일본군경력을 드러내는 건 사회적인 매장을 자초하는 일이나 다름없으므로 생존자나 후손들도 대개 공개하지 않는다.
6. 매체에서의 조선인 일본군[편집]
시기가 시기이니만큼 한국에서는 일제강점기나 친일반민족행위자를 다룬 작품에서, 일본에서는 태평양전쟁을 다룬 작품에서 많이 나온다.
6.1. 문학작품[편집]
《태백산맥》(조정래, 한국) - 김범우, 심재모
6.2. 드라마[편집]
여명의 눈동자(MBC, 1991, 한국) - 장하림, 최대치
제 3공화국(MBC, 1993, 한국) - 청년기의 박정희 전 대통령
6.3. 영화[편집]
일제 어용영화 지원병(志願兵)(1941, 조선)
일제 어용영화 병정님(兵隊さん)(1944, 조선) - 조선군 보도부의 지원으로 제작된 개소리 모음집선전 영화.
잊혀진 황군(忘れられた皇軍)(1963, 일본) - 일제 침략전쟁에 일본군 소속으로 참전했다가 부상을 입은 조선인 병사들의 삶과 이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배상을 요구하는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로 니혼 TV를 통해 방송된 25분짜리 영화이다. 극중 일본 정부는 조선인 부상자 문제에 대해서 조선은 1945년 이후 외국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조선인으로 징병된 이들 역시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보상대상에서 제외했고, 한국 정부는 이들이 일본군에 부역하는 상황에서 입은 부상이기 때문에 한국과의 연관성과 한국정부의 지원 의무가 없으며 일본 정부에 청구할 것을 못박았다.[12] 감독은 감각의 제국으로 유명한 오시마 나기사이다.
전장의 크리스마스(일: 戦場のメリークリスマス 영:Merry Christmas, Mr. Lawrence)(1983, 일본•영국) - 조선인 병사를 연합군 포로를 성폭행하고 처벌받을 처지에 놓이자 자살하는 부정적인 모습으로 묘사해 국내에서 개봉되지 못했다.
나는 당신을 위해 죽으러 갑니다(俺は、君のためにこそ死ににいく)(2007, 일본) - 조선인 가미카제 부대원 탁경현을 모티프로 한 캐릭터가 나온다.
마이웨이(2011, 한국) - 주인공이 노몬한 사건에 참전한 조선인이라는 설정으로 우여곡절 끝에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독일군으로 참전하게 된다. 한국사의 미스터리 중 하나인 노르망디의 한국인에서 영화의 모티프를 따왔다.
손님(2015, 한국) - 촌장[13]
6.4. 논픽션[편집]
《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김효순, 한국) - 관동군에 징병되어 만주 작전에 참전했고 소련군에 의해 굴라그에서 혹사당했던 조선인 병사들의 애환과 배상 문제를 다룬 책.
궁금한 이야기 Y / 17세 소년은 왜 자살특공대가 되었나(2014.02.28 방송, 한국) - 조선인 가미카제 부대원 박동훈의 이야기를 다뤘다.
그것이 알고싶다 328회 / 야스쿠니의 神이 된 소년 특공대원(2005.02.26 방송, 한국) - 만주국의 수도였던 장춘의 방송국에서 발견된 박동훈의 유언이 담긴 레코드와 그가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통해 일본의 우경화와 보통국가화 문제를 지적했다.
그것이 알고싶다 1137회 / 화태(樺太)에서 온 편지 - 국가는 왜 날 버렸나?(2018.09.15 방송, 한국)
[1] 당시에 일본은 왕공족으로 이들을 분류하였다. 황족보단 낮고 화족보단 높게. 간단히 줄여 이왕(李王)가라고 불렀다.[2]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을 감안하면 일본 해군은 일본 육군에서 제한적으로나마 조선인들의 입대를 허용하는 것에 대한 반감이 매우 컸을 것이다.[3] 윤치호 등 친일파는 정말로 이것을 믿고 '드디어 내지인과 조선인이 평등하게 하나가 되는구나!'하고 기뻐하기도(...)믿으면 곤란하다[4] 단, 일단 입대하고 나면 계급 우선주의에 입각했기에 조선인이라도 하급자 일본인은 그들을 함부로 못 대했다. 괜히 조선인들이 오장 달 때까지만 참자며 버틴 게 아니며, 실제로 오장으로 진급하여 동네로 오면 자신을 괴롭히던 주재소장(오늘날의 파출소장 내지는 지구대장) 싸대기부터 때리고 봤다고 하는 게 아니다. 홍사익 중장의 경우에도 일본인 부하들이 홍 중장이 조선인이라고 무시하는 경우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구름위의 존재 같은 중장이 일본인도 아니고 대한제국 황족도 아닌 평민 출신이라는 점에서 더 외경심을 느꼈다 한다.[5] 일본군의 병력동원 규모와 추이[6] 군의관 별도의 계급으로 중령에 상당한다. 3등군의장은 소령.[7] 소위에 상당하는 계급으로 보이는데 아는 위키러의 추가바람.[8] 관련 문헌은 정안기 (pdf 논문 본문) 및 엑셀 보충 자료를 참조할 것.[9] 왕, 공족은 대한제국 황실을 예우하기 위해 일본 정부가 고안한 일본황족과 일본화족, 조선귀족 사이의 특수한 지위로 '협력에 대한 대가'였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친왕 이은 경우, 태어나자마자 아주 어린시절부터 일본에 볼모로 끌려간 경우였고...[10] 1950년 전후로 한국내 입지를 공고히 하고자 한 이승만대통령의 입김으로 그는 정상적 입국절차를 받지 못해 결국 해방 후에도 한동안 일본에 지냈다. 하지만 그는 육군 장교자격으로 2.26사건의 진압부대의 일원이었을 뿐, 단 한차례도 제대로 된 교전, 특히 독립군전선 혹은 중국전선을 밟은 적 조차 없다. 또한 그는 자신의 국적을 계속 잊지 않고 1910 경술국치이후 1945 8.15 광복까지의 35년간 한국어를 잊지 않아 1945년 이후 주변의 한국인들과는 유창한 한국어로 소통했다고 한다. 참고로, 1945년 전까지 그의 주변에는 한국인이 없어 한국어를 사용할 기회가 없었다. 35년간 일본의 일본인들 사이에서 한편으로는 계속 한국어를 되뇌었다는 것이다.[11] 고향친구 최기일은 말리는거 뿌리치고 자원 입대했다고 말했고 본인 자서전 돌배게에서도 부모님이 걱정 되었다고 이유를 들면서도 자원했음은 분명히 하고 있다. 여기에 뒷배경이 있었는데, 그의 미망인 김희숙 여사가 정신대로 징발될 수 있었기 때문에 학업을 중단하고 자원입대하게 된 것이다. <출처 : 장준하, 묻지못한 진실, 돌베개, 고상만 저. p38>[12] 단 영화의 촬영시기는 한일국교정상화가 실시되기 전이었고 대일청구권등 보상논의 역시 이루어지기 이전이었으며 당시의 한국 경제 역시 산업화와 새마을 운동이 실시되기 이전의 참담한 수준이었고 당시의 한국 정부는 한국전쟁당시 부상당한 참전 용사들의 복지 문제도 손을 놓고 있던 실정이었다. 한일기본조약체결 이전 한국인들의 반일감정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13] 영화 속에서 촌장은 나환자촌의 환자들을 배신해 학살하고 유일한 생존자인 무당마저도 동굴에 가두고 산 채로 태워죽이는 등 온갖 패악을 저지으면서 본인이 부리는 패악을 "살려고 지은 죄는 용서받는다."라는 말로 합리화한다. 주인공 부자와의 약속을 배신한 것도, 한센병 환자들과 무당을 죽여버리고 마을을 차지한 것도, 일본군에 입대한 것도 본인이 살기 위해 한 행동이기 때문에 거리낄 것이 없다는 것.
학도병 - 나무위키
학도병 - 나무위키
학도병
최근 수정 시각: 2019-10-23 22:00:30
분류
군인
學徒兵
1. 개요2. 한국의 학도병3. 일본의 학도병4. 다른 나라의 사례
UN 아동권리협약 제38조 ① 당사국은 아동과 관련이 있는 무력분쟁에 있어서, 당사국에 적용 가능한 국제인도법의 규칙을 존중하고 동 존중을 보장할 의무를 진다.
② 당사국은 15세에 달하지 아니한 자가 적대행위에 직접 참여하지 아니할 것을 보장하기 위하여 실행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하여야 한다.
③ 당사국은 15세에 달하지 아니한 자의 징병을 삼가야 한다. 15세에 달하였으나 18세에 달하지 아니한 자 중에서 징병하는 경우, 당사국은 최연장자에게 우선순위를 두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④ 무력분쟁에 있어서 민간인 보호를 위한 국제인도법상의 의무에 따라서, 당사국은 무력분쟁의 영향을 받는 아동의 보호 및 배려를 확보하기 위하여 실행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하여야 한다.
국제형사재판소 관할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제10조 (사람에 대한 전쟁범죄) (중략) ③ 국제적 무력충돌 또는 국제적이 아닌 무력충돌과 관련하여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행위를 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5. 15세 미만인 자를 군대 또는 무장집단에 징집 또는 모병의 방법으로 참여하도록 하거나 적대행위에 참여하도록 하는 행위
⑥ 제2항·제3항 또는 제5항의 죄를 범하여 사람을 사망에 이르게 한 사람은 사형, 무기 또는 7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⑦ 제1항부터 제5항까지에 규정된 죄의 미수범은 처벌한다.
1. 개요[편집]
의미 자체로는 국가의 학생들을 징집한 병력을 의미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학생은 대부분 고등학생 이하의 10대 어린 소년들이기 때문에 징집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윤리적으로 크나큰 죄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국제법 상의 문제도 있어 설령 전쟁에서 이긴 국가라 하더라도 미성년자를 강제로 징집한 후폭풍을 감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미성년자를 징집하는 것에 대해 반발하는 자국민의 저항과 종전 후 국제사회에 국가 지도층을 전범으로 고발하는 학도병 피해자들 등. 인권이라는 개념이 문명화된 사회라면 강력하게 작용하는 현대 사회에서 학도병은 국가 입장에서 또한 그다지 현명한 선택이 아니다.
당장 현재 전세계에서 가장 치열하게 전쟁 중인 시리아에서조차 소년병들은 무장단체들에게서만 볼 수 있을 뿐 정부군이 미성년자들을 강제로 징집하지 않는다. 이는 소년병과도 연결되는 점이다.
학도병을 징집하지 않는 추가적인 이유가 있는데, 과거 한국과 일본에서는 고등교육을 받은 학생의 수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상실할 경우 손해가 큰 고급 인적자원인 대학생에게도 병역면제 혜택을 준 시기가 있었다. 이는 서구권도 비슷해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석박사급 인력들이 단순 징발로 말단 병사나 수병이 되어 참호에서 갈려나간 뒤 이 후유증이 컸던 관계로,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이공계 고급인력이나 숙련공 등에게 많은 대체복무의 길을 열었다.
이와 같이 나이나 학력 때문에 징병 대상이 되지 않았던 학생들이 국가가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지원에 의해 군대에 참여한 것을 학도병이라고 한다.
특히 한국전쟁 당시 소년병으로 군대에 지원한 한국 청소년들을 가리켜 학도의용군이라고도 하며, 일본이 편성한 학도병은 더 줄여서 학병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국사 서적에서 학병은 일본군 참여자[1], 학도병은 한국군 참여자로 구분하면 쉽다.
또한 한국과 일본의 학도병,학병은 공통적으로 대국민 총력전을 독려하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 "이렇게 어린 애들도 총잡고 나라 위해서 싸우는데 부끄럽지 않냐. 전 국민이 힘을 합쳐 싸우자!" 라는 식으로 국민들을 선동하기 위한 프로파간다 소재로 사용된 것이다. 당연히 여기서 좀 더 발전하면 패전 직전의 일본과 독일처럼 여자와 노인도 병사로 끌어들인다.
2. 한국의 학도병[편집]
한국전쟁 당시 북한의 남침으로 대한민국이 붕괴 위기에 처하자 수많은 학도병들이 징집 혹은 자원입대해서 북한군과 싸웠다. 서류상 자원입대자들도 많았으나 문제는 학교에서 나오라고 해서 나갔다가 그대로 학도병이 된 사례들도 자원으로 집계되어 사실상 개중에서도 강제가 더 많을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강제로 입대당한 경우도 생각보다 꽤 많았는데, 이 경우도 자원입대라고 여겨졌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초반에 주인공 형제가 군대에 강제로 끌려가는 모습을 보면 된다. 당시 관점으로써도 어린 학생을 전선에 투입한다는 게 비극으로 비춰줬지만 병력도 무기도 부족했는데 기습까지 당해서 병력을 갈아넣어서라도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해야 했던 당시 상황을 감안해야 한다. 그렇다고 미성년자를 징집했다는 뼈아픈 비난과 공격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또한 별도의 소년병들도 존재했는데 미성년자들이 징집됐다는 점에서 별 차이가 없지만 학도병은 군번을 부여받지 못했고, 소년병은 정식으로 군번을 부여받았다.[2]* 이들은 현충원 등지에서 추모비도 볼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국방부의 흑역사이기 때문이다.
바다 건너 재일교포 청소년들이 재일학도의용군을 편성하여 참전하는 경우도 있었다. 대부분의 학도병들은 대한민국 육군에 배치됐다. 소년병은 아니지만 20대 대학생들도 학도병으로 전쟁에 나가기도 했는데, 이 중에선 한국 전쟁 때 학도병으로 참전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있다.
다만 당시 대한민국 입장에서 소중한 자원인 대학생을 전쟁터로 내보내는 건 아주 최악의 행위이기에[3] 대부분 다른 보직을 맡았다. 실제로도 당시에는 대학생 이상의 학력은 병역 대상이 아니었고 대학생 이상이 군복무를 하면 대부분 갑종장교였다. 김영삼 역시 서울대학교 학생이었기에 육군 정훈병으로 배치되었다.
당시 전황이 상당히 심각한 수준이였기 때문에 저렇게 배치되기만 해도 상당한 행운이었다. 일례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출신이자 고려대학교 구로병원 초대 원장이었던 외과의사 민병철도 부산의 전시연합대학을 다니면서 간신히 졸업했는데, 그의 회고록에 따르면 "여전히 거리에서는 육군의 신병 징집이 있었고 신분에 관계없이 일단 잡혀가면 얼마간의 기초 훈련만 받은 채 곧바로 전선에 투입되곤 했다. 나도 여러 번 아슬아슬한 적이 있었는데, 한번은 잡혀서 타고 가던 트럭에서 뛰어내려 도망친 적도 있었다"라고 한다. 다행히 본인은 졸업 후 대한민국 해군 군의관에 지원해서 중위로 진해 해군병원에 배치받았다고 한다.
전쟁 초기에는 정부가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해 이와 같은 무질서한 자원입대를 방관할 수밖에 없었다. 저렇게 어린 애들도 나라 지킨다고 스스로 총 잡고 싸우는데 니들은 뭐하냐는 식의 프로파간다에 이용해 먹기도 딱 좋기 때문이다.[4] 심지어 이런 학도병들을 희생양으로 써먹은 작전까지 존재한다. 자세한 것은 항목을 참조하면 되지만, 당시 이 작전을 구성, 운영한 것은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이후 어느 정도 정국이 안정되면서 51년 3월 복교령을 내려 학도병으로 입대한 학생들에게 학교로 돌아가도록 지시했는데, 학도병들이 제대하지 않고 군에 계속 남은 사례는 크게 2가지로 나뉘었다. 하나는 학생 본인의 의지로 정식 군인이 되어 계속 군대에 남은 사례이고, 하나는 병력 손실을 꺼린 일선 부대장들이 고의적으로 학생들에게 복교령 발표 사실을 알리지 않아 그대로 군복무를 계속한 사례이다.
군대에 남은 학도병들은 나이보다 일찍 군대에 들어가서 실전을 겪고 술과 담배, 여자를 배웠기 때문에 학생으로서의 사회 복귀에 어려움을 겪은 경우가 많다. 50년대 중학교, 고등학교 졸업사진들을 보면 학생이라고 보기에 많이 삭은 아저씨들이 많은데, 한국전쟁 때 징집되었다가 제대 후 다시 재학한 학생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전후 빈곤한 가정 형편 때문에 취업하다 재학한 경우도 있기 때문에 20대 후반의 중고생들도 꽤 많았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학도병에 참가한 청소년들의 애국심은 가상하지만, 그렇다고 상술됐듯이 학도병이라고 모두가 다 자신의 의지로 입대한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학생들이 전쟁에 나간다는 사실 자체가 국가 전체로 보면 전혀 좋은 현상이 아니다. 소년병 항목에서 알 수 있듯이 미성년자들을 함부로 군대에 보내는 것은 군사적으로도 비효율적이고, 국가의 미래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현재는 병역법으로 금지하지는 않지만, 선진국들을 중심으로 그런 행위들이 심각한 인권 침해로 인식되고 한국도 UN 아동권리협약에 비준함으로써 꽤 어려운 일이 되었다.
이러한 과거 때문에 21세기가 된 지금 또한 일부 현역 군인 간부나 예비역이 중고등학교에 안보교육 목적의 특강을 갔을 때 학도병의 희생을 들먹이면서 "여러분도 전쟁나면 총 잡고 싸우게 된다"고 히죽대기도 한다. 별 뜻이 있는 것은 아니고 그저 애들 놀리는 게 재밌어서 하는 이야기인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귀담아 들을 필요는 없다.
소년병 징집은 국제형사범죄법으로 금지되므로 UN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극한 상황이 아니고서야 일단 대한민국에서 만 18세미만의 청소년의 참전은 있을 수 없다. 어디 이름도 처음 듣는 전시 상황인 후진국에서도 쉽게 일어나지 않는 일인데 현재의 대한민국에서 학도병이 생길 가능성은 제로다. 단, 대학생은 성인이기 때문에 소년병의 기준에서 예외이며 매우 극한 상황이라면 고등학생, 중학생까지 징집 가능성이 있다고 봐야 한다. 한국은 학도병의 선례와 미화시킨 이미지가 있어서 필요하면 이런 짓을 하는데 거부감이 없다.[5][6]
3. 일본의 학도병[편집]
학병 항목과 학도 특별지원병 제도 항목, 히메유리 학도대 항목을 참고할 것.
4. 다른 나라의 사례[편집]
독일 :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은 패망으로 몰리자 11, 12세의 히틀러 유겐트 소년들을 연합군과의 전투에 투입했다. 1944년에는 아예 1927년생 히틀러 유겐트 단원들을 무장친위대 이병으로 군적에 올리고 부사관과 장교들을 타 부대에서 차출해 편성한 SS 제12기갑사단 히틀러 유겐트라는 부대도 있다.
[1] 사실 이 경우는 지원을 빙자한 강제 징집에 가깝다.[2] 보통은 이등병으로 갓 입대할 정도의 나이에 일등중사 계급으로 전역을 한 사람도 있을 정도.[3] 당시에는 대학생이 드물었다. 현대의 박사학위자나 그 이상의 취급을 받았다고도 한다.[4] 애들을 전선에 투입하는 게 자랑인가 싶지만 선동용으로는 쓸만 했다고 한다.[5] 사실 대한민국이 고등학생, 중학생까지 징집해야 할 정도로 막장인 상태라면 어린 나이에 징집당해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개죽음을 당하는 게 아닌 도망쳐서 목숨이라도 부지하는 게 더 현명한 선택이겠지만 말이다. 겁쟁이라고 비난받고 나라를 버렸다는 소리를 들어도 내 목숨이 제일 중요한 법이다.[6] 대한민국이 미성년자들을 징집할 상황이면 이미 일선의 현역 장병들은 궤멸되고 동원예비군에 보충역까지 죄다 갈려 나간 후, 민방위와 그것조차 끝나가는, 혹은 아예 그것조차 끝난 중장년층이 전선으로 끌려가는 2차대전 말기 독일의 상황과 동일할 것이다. 국민돌격대 문서에도 언급되지만 이런 상황에서 국민들을 살리기 위해 한시라도 빨리 항복하는 게 아니라 총만 들 수 있는 사람이면 죄다 긁어모아 전선으로 내보내는 것은 "나라가 망하는 거 저승길 동무로 다같이 죽자." 라는 의미, 혹은 국민을 총알받이로 세워두고 높은 사람들은 벙커에서 망명루트 짜고 있거나 정말 그런 전략으로 승산이 바뀔거라 망상하는 것이다. 애국심이 얼마나 투철하든 그런 상황에서 정부는 국민들을 사람으로 볼 생각이 없다는 것을 명심하자.
THE CRAZINESS FOR EXTRA-SENSORY PERCEPTION: QIGONG FEVER AND THE SCIENCE-PS...: EBSCOh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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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RAZINESS FOR EXTRA-SENSORY PERCEPTION: QIGONG FEVER AND THE SCIENCE-PSEUDOSCIENCE DEBATE IN CHINA.Authors:Li, Jianhui ljh@bnu.edu.cn
Fu, Zheng shenzhou6635@mail.bnu.edu.cnSource:Zygon: Journal of Religion & Science. Jun2015, Vol. 50 Issue 2, p534-547. 14p.Document Type:ArticleSubject Terms:*QI gong
*PSEUDOSCIENCE
*EXTRASENSORY perception
*PARAPSYCHOLOGYGeographic Terms:CHINAAuthor-Supplied Keywords:China
extraordinary power or extrasensory perception (ESP)
Qigong Fever
science‐pseudoscience debate
science-pseudoscience debate
Abstract:From 1979 to 1999, a heated dispute over the science or pseudoscience of extraordinary power or extrasensory perception (ESP) took place in China. During these two decades, many so-called 'grandmasters' of ESP and Qigong emerged, and millions of people across the country studied with them; this was known as 'Qigong Fever' or 'ESP Fever.' The supporters of ESP argued that ESP existed, people could cultivate ESP through specific Qigong training, and ESP was a science; whereas the opponents of ESP denied all of these. Both sides of the dispute had many supporters. With the onset of Qigong Fever in China, some Qigong and ESP masters developed their Qigong organizations into Chinese-style religions. Qigong Fever ended when the religions were banned by the Chinese government. The rise of Qigong Fever demonstrated that basic questions about the boundaries between science and pseudoscience were not easy to answer. Different theoretical and practical consequences resulted from different answers to these questions. [ABSTRACT FROM AUTHOR] Copyright of Zygon: Journal of Religion & Science is the property of Wiley-Blackwell and its content may not be copied or emailed to multiple sites or posted to a listserv without the copyright holder's express written permission. However, users may print, download, or email articles for individual use. This abstract may be abridged. No warranty is given about the accuracy of the copy. Users should refer to the original published version of the material for the full abstract. (Copyright applies to all Abstracts.)
ISSN:0591-2385DOI:10.1111/zygo.12178Accession Number:102578946Publisher Logo:
THE CRAZINESS FOR EXTRA-SENSORY PERCEPTION: QIGONG FEVER AND THE SCIENCE-PSEUDOSCIENCE DEBATE IN CHINA.
Contents
THE CRAZINESS FOR EXTRA-SENSORY PERCEPTION: QIGONG FEVER AND THE SCIENCE-PSEUDOSCIENCE DEBATE IN CHINA.
Contents
The Ripple Effect of “Reading with Ears”
Qian Xuesen: Human ESP Will Lead to a New Scientific Revolution
Yu Guangyuan: ESP is Antiscience
From ESP to Qigong Fever
Increasing Voices of Opposition
From Qigong Fever to New Arising Religion
The End of Qigong Fever
Conclusion
References
Full 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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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1979 to 1999, a heated dispute over the science or pseudoscience of extraordinary power or extrasensory perception (ESP) took place in China. During these two decades, many so‐called “grandmasters” of ESP and Qigong emerged, and millions of people across the country studied with them; this was known as “Qigong Fever” or “ESP Fever.” The supporters of ESP argued that ESP existed, people could cultivate ESP through specific Qigong training, and ESP was a science; whereas the opponents of ESP denied all of these. Both sides of the dispute had many supporters. With the onset of Qigong Fever in China, some Qigong and ESP masters developed their Qigong organizations into Chinese‐style religions. Qigong Fever ended when the religions were banned by the Chinese government. The rise of Qigong Fever demonstrated that basic questions about the boundaries between science and pseudoscience were not easy to answer. Different theoretical and practical consequences resulted from different answers to these questions.
China; extraordinary power or extrasensory perception (ESP); Qigong Fever; science‐pseudoscience debate
From 1979 to 1999, China witnessed a heated debate on “extrasensory perception” (ESP) or “extraordinary power” (Palmer [ 10] ), which describes a range of supernatural human abilities, including telepathy, fluoroscopy, clairvoyance, telesthesia, precognition, telekinesis, idiodynamics, out‐of‐body experience, special physiques (e.g., body‐elicited combustion and body‐elicited electricity), and others. During those two decades, enormously popular so‐called “grandmasters” of ESP and Qigong, such as Zhang Baosheng, Zhang Xiangyu, Yan Xin, Zhang Hongbao, Zhang Xiaoping, and Li Hongzhi (the family name is first in Chinese names) emerged. Qigong are English words for two Chinese characters: qì (气) and gōng (功). Qi is often translated as life force or life energy. Gong is often translated as work or cultivation. The two words are combined to refer to a broad range of Chinese self‐cultivation exercises for cultivating and balancing life energy, especially for health. Millions of people across the country went to study with these masters. This social phenomenon was named “Qigong Fever” or “ESP Fever.” The fever did not cease until the most well‐known ESP grandmaster, Li Hongzhi, was brought down.
With the development of Qigong Fever in China, there arose a frenzied debate about whether ESP is science or pseudoscience. The supporters of ESP held that ESP existed, ESP could be cultivated through specific Qigong practices, and that ESP was science. Scholars at Tsinghua University even wrote that they had conducted an experiment that revealed a molecular structure in the laboratory of Tsinghua University changed when Yan Xin, in a display of his extraordinary power in Guangzhou, demonstrated telekinetic powers. However, the opponents of ESP held that ESP did not exist in this world, that the practice of Qigong could never produce ESP (though Qigong practicing could surely improve human body functioning), that ESP performances were nothing but magic shows, and that ESP was a pseudoscience.
Both sides in this dispute had many supporters, including renowned scientists and philosophers as their advocates. Well‐known scientist Qian Xuesen, who was considered the father of China's rocket and atomic bomb program, was among the supporters. He swore by the spirit of the Chinese Communist Party that ESP was science. In contrast, economist and philosopher Yu Guangyuan and scientist He Zuoxiu (a member of the Chinese Academy of Sciences) were among the opponents. They believed that ESP was nothing more than magic show and pseudoscience. Though two sides held opposite attitudes toward ESP, they both raised the question about standards of science and had their own answers, which were used to defend their own opinions. Their debate continued until the occurrence of a Falun Qigong event in 1999, and subsequently Qigong Fever began to cool down. However, currently, a decade or so after the Falun Gong event, some evidence shows that Qigong Fever may have a revival.
The Qigong and ESP Fever debate demonstrated that basic questions about the definition of science, the characteristics of science, and the boundaries between science and pseudoscience were not easy to answer. Different answers to these questions result in different theoretical and practical consequences. This article reviews the two decades of Qigong Fever and the accompanying dispute over science and pseudoscience, and offers possible reasons that these new religions focusing on body cultivation came to thrive in China at that time.
The Ripple Effect of “Reading with Ears”
On March 11, 1979, shortly after China's Reform and opening to the outside world, a news report in Sichuan Daily, which described “a child named Tang Yu in Dazu County who can ‘read with his ears’” (ears have function of eyes), grabbed worldwide attention. Ear reading was regarded as violating common sense and scientific concepts and soon attracted great interest from the chief leaders in the community, county, district, and province where the child, Tang Yu, resided. The story was reprinted by many other newspapers and caused a chain reaction across the country. Eventually, this event caught the attention of international media, including Voice of America, Associated Press, Agence France Presse, Reuters, and others. Their correspondents in Beijing consulted relevant Chinese institutions, hoping to discover the details of ear reading.
To people's disappointment, ten days after the original report, a Chinese investigation team declared that “reading with ears” was nothing but a magic trick (Yu [ 13] , 1). As a common trick, it could be expected to vanish from the public attention when the fakery was disclosed, just as other similar performances had. However, more examples of ESP were unexpectedly made public by the media, resulting in a vigorous ESP movement. Only a month after the original report of “reading with ears,” several large media outlets, such as Beijing Science and Technology News, Hebei Science and Technology News, Anhui Science and Technology News, and Mysteries to Be Explored, had reports of children who could read with their ears.
More and more people were reporting that ESP was in some of their body parts; these body parts went beyond the ears and included hands, hips, and soles of the feet (Yu [ 13] , 4). The owners of such ESP were usually juveniles and their performances were not proficient. Usually, their ESP tended to disappear for no apparent reason. The ESP claimed by Tang Yu and Jiang Yan was soon disproven (Yu [ 13] , 1). In face of this, the People's Daily, one of the most influential newspapers of the Chinese Communist Party, began to reveal its attitude toward this ESP movement. On May 5, 1979, the People's Daily published Zu Jia's article “From ‘reading with nose’ to ‘reading with ears’,” in which Zu Jia stated supporters of ESP “lacked the intention of seeking truth from facts, instead their purpose was to play to the gallery” (Zu [ 19] ). A month later, on July 2, the People's Daily reported in detail the test of Tang Yu's ESP abilities. The negative attitude from the Party paper temporarily stopped the public reporting of ESP phenomena.
In spite of the People's Daily negative attitude toward the ESP movement, critiques of the movement, in general, were not a large or angry group at that time. Yu Guangyuan, the distinguished philosopher and economist, then vice director of the State Science and Technology Commission and vice president of the Chinese Academy of Social Sciences, had said, “I used to believe that the ESP movement in China would finally fade into history” (Yu [ 13] , 1–2). However, in fact the movement did not perish; in contrast, it prospered under the support of some prominent scientists and government officials.
Qian Xuesen: Human ESP Will Lead to a New Scientific Revolution
On June 18, 1979, the Hongkong newspaper Ming Pao published Li Xuelian's article “Reading with ears, not necessarily insane,” in which Li Xuelian held that “some leaders of Committee of the Communist Party of China might have been acting arbitrarily before learning enough about the subject of ESP” (Li [ 6] ). The article played a vital role in reminding the supporters of ESP that the only direction for the development of ESP was as a science. The relevant studies from other countries should be used to break old thinking patterns, which characterized ESP as a trick. As a result, getting access to the ESP studies in foreign countries became a research project of great interest. At that time, the Chinese government had just initiated a policy of reform and opening to the outside world, and thus learning from the culture and technology of other countries was encouraged. Coincidentally, it was rumored then that both the Soviet Union and the United States had been researching ESP for military applications. For example, one book said that the U.S. Navy had performed mind reading in its submarine the “Nautilus” in 1959 and the Soviet Union had experimented on thought communication from Moscow to Leningrad (Ostrander and Schroeder [ 9] ). It seemed that studies on ESP had emerged as an advanced area of modern science and had military applications; therefore, China should catch up. Thus, at that time, following nearly every report of advanced ESP phenomena from foreign countries, China soon announced the same discovery or an even more astonishing discovery. Consequently, the discovery of ESP transited from accidents to universal screening and induction.
At the same time, the Chinese Journal of Nature, based in Shanghai, demonstrated a great interest in ESP by publishing a large number of observational reports and academic papers, which were said to confirm the existence of ESP. In one article, researchers even described that among the 40 random children (approximately 10 years of age) they recruited, up to 63% had top perceptual abilities (He et al. [ 4] , 9). In June, 1980, the famous scientist Qian Xuesen, then the honorary president of the China Association for Science and Technology (CAST), visited the Journal of Nature and said that reading with ears “is objective and cannot be denied.” He also encouraged ESP researchers to “be brave and persistent” in the face of doubts and denials (see Editor's Report [ 1] , 587). Qian Xuesen's fame and influence in China's community of science and technology guaranteed that his words would provide support for ESP proponents; he not only asserted that we should do ESP research but also shed light on how to do ESP research. Unsurprisingly, from 1979 to 1982, the Chinese Journal of Nature published 53 articles on ESP; these articles were all from China's top universities and research institutions. China's fever for ESP had reached a climax.
On May 11, 1981, China's “Second Symposium on Human Body ESP” was held in Chongqing city, Sichuan Province, with support from both the Chinese government and China's community of science. Representing the Chinese government, Yang Chao, then the secretary of the Committee of the Communist Party of Sichuan province, and Nie Chunrong, then the secretary of the China Association for Science and Technology, delivered reports during the opening of the symposium. Representing China's community of science, Qian Xuesen submitted an article named “On Launching Basic Research on Human Body Science.” One year later, Qian again expressed his confidence in ESP research in a meeting on “human body science.” He said, “I believe what truly appeals us to explore along this winding and hard road is that it may lead to a new scientific revolution in the twenty‐first century, perhaps even greater than the early twentieth century scientific revolution led by quantum mechanics and relativity theory” (Qian [ 11] , 211). From then on, “human ESP (or human body science) is the dawn of a new scientific revolution” became ESP supporters’ slogan. The soaring patriotism and lofty scientific feeling attracted a growing number of people to the study of ESP.
Yu Guangyuan: ESP is Antiscience
In the furor of ESP research, however, Yu Guangyuan, then the vice president of the Chinese Academy of Social Sciences and the vice director of the State Science and Technology Commission, stated, “I just could not bear this ESP Fever anymore” (Yu [ 13] , 1). In July 1981, he delivered a speech at the Workshop for the University Teachers of Philosophy in the Renmin University of China titled “Philosophical Comments on Propaganda of ‘Reading with Ears’ in Recent Two Years,” in which he harshly criticized the ESP represented by “reading with ears” and noted “we should stop any ESP‐related antiscience propaganda” (Yu [ 13] , 27). Specifically, his critiques included:
All existing ESPs were nothing more than “tricks,” and these could never be accepted as science.
That “seeing is believing” could be deceiving. We should not evaluate ESP in the empirical fashion. Instead, we should base our evaluation on whether the demonstrations of ESP were scientifically reasonable.
ESP is the extension of spiritualism, and spiritualism was against the basic ideas of Friedrich Von Engels’ dialectics of nature.
Yu later published several public speeches and articles, publicly criticizing ESP from philosophical angles. For example, in his article “To Accept Spiritualism or to Accept Dialectics of Nature? (Yu [ 13] ), Yu explained his stance toward ESP thoroughly. In this article, Yu got ideas from Engels's article “Natural Science and Spiritual World” in the Dialectics of Nature. In Engels’ article, several famed scientists were criticized for believing in spiritualism in nineteenth century (Engels [ 2] ). Yu said, “I believe today we still must hold the ideas adopted by Engels in his article … till today, what Engels had criticized is still propagated as before. Thus all of his criticisms are still valid today” (Yu [ 13] , 68). Yu believed that from spiritualism to ESP, there were “no substantial changes.” As a result, Engels’ critiques of spiritualism could be directly applied to today's ESP.
Considering Yu's significant academic and political influence, it was not surprising his attitude was soon echoed by many in the academic community, including renowned scientists Zhou Peiyuan, Mao Xinsheng, and Pan Shu. Their critiques, together with Yu's, were soon reprinted by the People's Daily. In the face of the disagreements, on June 15, 1982, the Propaganda Department of the Central Committee of the Communist Party of China released an official announcement, which dictated that “human ESP should no longer be introduced or propagandized by media from now on. No one shall criticize or debate over ESP. … No one shall carry out any human ESP experiment. No one shall put on ESP performances for the purpose of publicizing.” This is the so‐called “three‐not policy” on ESP. After the announcement, debate over ESP accordingly, but temporarily, vanished from newspapers.
The subsequent facts show that the announcement suppressed the criticisms of ESP, but did not have much impact on its supporters. For example, early in 1983, the Institute of Aerospace Medicine (the 507 Institute) was made China's ESP research base and launched long‐term ESP research initiatives. From 1983 to 1987, Qian Xuesen had delivered more than 100 speeches in the institute regarding the importance of ESP research. His speeches were organized as a book Talks on Human Body Science and Modern Science. In 1988, another book of Qian's, On Human Body Science, was published. Because of Qian's high social position in science and politics in China, his theory became the guideline for research on ESP. The plans for the establishment of special ESP research institutions were soon implemented. In March 1983, the Chinese Journal of Nature and the Preparatory Committee for the Society of China Human Body Science together issued an internal quarterly journal titled Human ESP Studies. Three years later, on May 26, 1986, the Society of China Human Body Science was officially established, which finally legalized ESP research in China. With public approval and a legalized academic society, it was expected that ESP research would develop in the same fashion as any other field of scientific research. However, the Qigong grandmasters arrived and diverted ESP on to a completely different track.
From ESP to Qigong Fever
In 1986, Yan Xin, a Qigong master, attracted enormous public attention. Before Yan Xin, Qigong had been a mysterious way of body cultivation, the guidelines of which were far from clear. Thus, though many Chinese knew Qigong, few could practice it. Yan created a new method of dissemination, “power‐displaying reports (PDR)” or “force‐displaying reports,” to maximize the popularity of Qigong. PDR allowed everyone easy access to Qigong and its practice through gatherings to learn Qigong, cure illnesses, and spread the practice of Qigong. By doing this, Yan brought the mysterious Qigong much closer to the general public. Even earlier than Yan, a more senior Qigong master named Zhang Baosheng was transferred to the 507 Institute to join the military research in June 1983. For the general public, this was undoubtedly regarded as an affirmation by the government of the importance of a Qigong grandmaster.
Public belief was strengthened when, on December 25, 1985, the Society of China Qigong Science was established. “Together with its numerous local branches and the Society of China Human Body Science, the Society of China Qigong Science has led China's social movement and academic research in relation to both human body science and Qigong. With their efforts, the number of ESP and Qigong followers then shot up to thousands, and public belief in ESP could been seen everywhere in social life” (Tu [ 12] , 17). On July 15, 1987, China's State Education Committee Commission issued Document No. 128 of the year 1987, which asked important educational institutions to initiate ESP and Qigong research programs, open human body science courses, and train teaching professionals for these courses. The spread of Qigong Fever at that time seemed irrepressible.
Qigong became the primary proponent of ESP for two reasons. First, folklore held that Qigong contained all known ESP phenomena, including super‐sensory experiences, such as reading with the ears, thought transmission, and mind‐triggered object movement. What is more, it was said that Qigong could give rise to new ESP phenomena that were even more unbelievable. Second, compared with ESP, Qigong was more attractive to the public, most of whom were not born with ESP. Specifically, Qigong found its charm in that: ( 1) ESP is just occasional and not all people have it, while Qigong is common to all people and was deeply rooted both historically and culturally; ( 2) Qigong has more efficacy than ESP, for example, Qigong is an efficient way to keep fit and healthy; ( 3) ESP studies could not clearly explain ESP induction; the practice of Qigong, however, would result in ESP, according to some reports; and ( 4) ESP organizations were unstable, while Qigong boasted a large base. ESP had been occasionally of interest in its own right in the past, but it was now connected to Qigong.
The legitimization of ESP was a complete breakaway from the cold indifferent attitude held by people toward mysterious phenomena. People even came to treat the existence of super‐sensory capacities asserted by Qigong masters as common sense. In this atmosphere, the more incredible a Qigong master's assertion, the more credible it appeared to people and the more popular it became. The expectations were always increasing. Consequently, the new Qigong masters had to display even more incredible powers to attract interest. From this point on, the era of Qigong grandmasters arose, in which numerous Qigong grandmasters competed for the spotlight. For example, Zhang Hongbao created Zhong Gong (China Health Maintenance and Intelligence Boosting Qigong), Zhang Xiaoping claimed to be the successor of “Unification of All Methods of Qigong,” Zhang Xiangyu established “Nature Centered Qigong,” Tian Ruisheng founded “Fragrance Qigong,” and Li Hongzhi developed “Falun Gong” (The Wheel of Dharma Qigong). All of these masters claimed that the practice of Qigong would lead to ESP. The huge impact generated by these so‐called ESP grandmasters was due not only to the power‐displaying reports, but also to the publicity of various Qigong books that exaggerated its efficacy. For example, in May 1987 Shanghai Cultural Press published a set titled Five‐Dime Series, among which was a popular piece of literature called Chinese Supermen, one of the early books introducing a grandmaster of ESP, written by Zhu Runlong and Zhu Qiaqia (see Zhu and Zhu [ 17] ). More than three hundred thousand copies of this book were sold and the demand was still high. Later, more of the same type of books became available, including God‐man Zhang Baosheng and Chinese Supermen's ESP, authored by writers and journalists. These books and other related materials, including news reports, biographies, and novels, described ESP phenomena and events primarily recounted by ESP practitioners, without verification. Ambiguity was present even in the reports from researchers and professional journalists. Boosted by such books and reports, various types of grandmasters constantly emerged. For instance, Zhang Xiangyu, Yan Xin, Zhang Baosheng, Zhang Hongbao, Zhang Xiaoping, Tian Ruisheng, and others were touted as grandmasters with infinite power, even as godlike men.
The public became completely obsessed with these Qigong masters and their Qigong arts. A growing number of reports stated that “Qigong could induce ESP and cure diseases which are untreatable in both Western medicine and traditional Chinese medicine” (Zong and He [ 18] , 26). Qigong became a social power that could no longer be ignored. For example, it was estimated that “till the end of 1989, China had got sixty million Gongfu and Qigong practitioners (some said the number was actually one hundred million)” (Mi [ 7] , 51). In addition, “Qigong and ESP at that time had at least one thousand traditions or schools, among which Beijing alone owned more than 300. Additionally, more than ten thousand Qigong research groups and Qigong art groups were active at that time in China” (Tu [ 12] , 17).
Chinese cultural and academic communities were responsible for Qigong Fever for at least two reasons. ( 1) Qigong had been overestimated by the academic community. For example, Qian Xuesen said in 1981, “Human ESP, presenting itself either as acquired traits induced by a senior Qigong master or as inherent traits possessed by those special teenagers, is no longer something of mystery. Instead, we could study ESP phenomena and the existing system of scientific knowledge is enough for us to study them. We do not even need to create any new theory or formula” (Qian [ 11] , 24). ( 2) Qigong had been overhyped by the media. Under encouragement like Qian's, Qigong newspapers became the main media publishing ESP papers and newsletters. “In martial Qigong Fever, many domestic media, for various reasons, did not stick to the news principles, lauding the so‐called ‘grandmasters,’ ‘supermen,’ and ‘magical power’ to the skies” (Zhang [ 16] , 5).
As a result, almost the entire Chinese society was obsessed with Qigong. Opponents had no way to voice their opinion. As Yu Guangyuan said, “Within a long time in the middle of 1980s, … pseudoscience prevailed so extensively that opponents’ articles had got no chance to be published, either rejected or totally ignored” (Yu [ 14] ). It was not until January 9, 1989, that Hongkong's Ta Kung Pao finally published Yu's speech titled “I strongly object to the promotion of antiscience ESP” (Yu [ 15] ). Shortly after that, Nie Chunrong, then the secretary of the Secretariat of China Association for Science and Technology, replied with an article titled “I strongly support scientific research on human ESP” (Nie, [ 8] ). Obviously, attitudes toward ESP and Qigong diverged significantly at the top echelons of the Chinese academic community.
Increasing Voices of Opposition
ESP supporters had employed two main arguments to prove that ESP was a science: ( 1) ESP phenomena were verified empirical facts. Many reports claimed that their ESP phenomena had gone through rigorous scientific verification. ( 2) The fact that we could not yet find scientific explanation for ESP suggested that ESP might not be a subject for current science, but the subject of a new science not yet understood. To deny ESP, thus, was to be scientifically “out of fashion.”
These two arguments later became the target of opponents’ critiques. In October 1990, a symposium titled “Promote Science and Suppress Superstition” was held in Beijing by the China Research Institute for Science Popularization in which Guo Zhengyi and other opponents of ESP criticized a variety of ESP phenomena and called them pseudoscience. Subsequently, opponents began to criticize ESP under the name of “opposing pseudoscience.” Accordingly, the debate between ESP supporters and opponents developed into a debate between science and pseudoscience. Opponents believed that if they succeeded in proving ESP to be pseudoscience, they would prove that Qigong's claims were exaggerated. Then, Qigong would lose its charm for the public and would soon fade away. To achieve this, opponents opened fire on supporters’ two arguments mentioned above and tried to demonstrate that ( 1) most ESP phenomena had not gone through standard scientific verification and ( 2) there was no “new” science because ESP was not science at all.
The debate mainly focused on the supporters’ first argument, that is, that ESP exists. No matter what certain ESP followers thought, opponents believed that their beliefs were false and demanded repeated trials in public under strict conditions.
On December 5, 1994, the Chinese Central Commission of the Chinese Communist Party and the State Council issued a document, “Several Suggestions on Promoting the Popularization of Science and Technology,” which stated “it is quite shocking some superstitious and benighted activities became increasingly rampant, and those of antiscience, pseudoscience frequently occurred” in recent years. This was the first time the Central Committee of the Communist Party of China urged the suppression of “antiscience and pseudoscience.” At that time, opponents’ voices began to be heard in the media. For example, supporters had once asserted that in 1982 “superman” Zhang Baosheng had gone through an ESP test where the success rate of his repeatedly performing ESP was as high as 95.5%. However, He Zuoxiu, an academician of the Chinese Academy of Sciences, made an opposite announcement that in May 1988, during Zhang's one public performance, Zhang failed to perform ESP due to losing the ability to use ESP or being unable to cheat (He [ 5] ). Thus, He asserted that Zhang did not pass the public trial as supporters had claimed. Numerous domestic and international newspapers soon reprinted He's announcement, which initiated in China a movement to uncover the false nature of the ESP phenomena. On June 30, 1998, the People's Daily reported that, according to the U.S. National Research Council's special report, ESP had yet to be verified by science. Until then, both the scientific and political authorities had declared at the time that argument ( 1) was a pseudoposition, which deprived ESP of its rational basis.
From Qigong Fever to New Arising Religion
The legitimization and development of the ESP movement was based on two principles: ( 1) the scientization of ESP, which provided the basis for the acceptance of all types of activities associated with Qigong and ESP, and ( 2) the systematization of Human Body Science research, offering the basis for vigorous expansion of Qigong organizations. During the gigantic Qigong movement, some schools of Qigong attracted more followers than others. “For example, ‘Chinese Health Maintenance and Intelligence Boosting Qigong’ was then one typical Qigong organization in China. Officially, it announced the number of its followers to be over 30 million. Though apparently exaggerated, the real number was estimated to be as much as ten million” (Tu [ 12] , 18). The Qigong grandmasters were entrusted with superior positions. To attract more people, many Qigong schools ceased to use scientific terms and instead resorted to traditional mysticism. This trend was represented by certain Qigong vocabulary, such as “Kylin Culture” and “Falun Qigong.” Kylin is a holy and dignified creature in traditional Chinese mystery, and Falun is a wheel‐shaped Buddhist instrument representing the endless power of the Buddhist doctrines.
With the stabilization of the trust and worship for the Qigong grandmasters by the public, it became very hard for the Qigong organizations to reject the temptation to gain benefits through the people's worship. Some Qigong organizations had motives in touting the efficacy brought about by Qigong and to privilege and idolize their Qigong masters. They also tried to avoid government control and develop their organizations into religions. For example, Zhang Hongbao developed grandmaster worship to such an extreme that he required his followers to hang his “true grandmaster portrait” in their homes and worship him in religious rituals. This type of worship was also present in the Falun Gong. From that point forward, people no longer cared whether ESP was science or not because Qigong grandmasters began to propagandize ESP in a transcendent fashion which was not related to scientific or empirical evidence. Occasionally, when asked about whether Qigong or ESP was science or not, Qigong grandmasters would say that modern science was not real science and their Qigong was a science higher than modern science. Obviously, the meaning of their science was not the same as the meaning of modern science.
The End of Qigong Fever
The divorce of Qigong from science, together with the attempt of certain Qigong organizations to become independent from the government, led to a response by the government. In 1994, China's Ministry of Civil Affairs ordered the disbanding of the International Union of Qigong Science. The union's two newspapers, International Qigong Newspaper and Qigong and Sports, which were among the main Qigong promotion media, were also banned by the China National Press and Publishing Bureau in 1997 and 1998, respectively. Previous ESP grandmasters, such as Yan Xin, Zhang Baosheng, and Zhang Hongbao, had to give up their godlike positions and various superstitious activities were suppressed to a degree.
However, Qigong Fever did not recede easily. Actually, after 1995, with the shift of the media focus, anti‐ESP articles in the media were on the decrease, while articles and books on Qigong and ESP were on the increase. Because many older well‐known grandmasters had lost their godlike positions, there was a dearth of grandmasters after 1995. This created a perfect historical opportunity for Li Hongzhi, the founder of Falun Gong, to emerge as one of the most influential Qigong grandmasters and he filled the vacuum quickly. After the rise of Falun Gong, books on Falun Gong were published in the tens of thousands, while the voices of opponents became harder to hear or read. As a rising religious force, Falun Gong suppressed opposing opinions with its ever‐increasing strength. For example, in May 1998, a Beijing TV station reported the academician He Zuoxiu's critique of Falun Qigong, which irritated Falun Qigong followers. They surrounded the TV station and the station finally dismissed a journalist to calm the fervent Falun Gong followers. On April 11, 1999, Tianjin Education College's journal Science Review for Juveniles, which had a very small circulation, published He Zuoxiu's article “It Is Not Advisable for Teenagers to Practice Qigong.” This article again irritated Falun Gong practitioners, who responded by surrounding the offices and conducting demonstrations. From April 19 to April 25, 1999, thousands of Falun Gong followers surrounded and attacked the editorial office of Science Review for Juveniles. The police was finally called in to assist. Moreover, on April 25, 1999, tens of thousands of Falun Gong followers from all over the country surrounded Zhongnanhai (the office of the central government of China) and presented petitions to the central government, which surprised the world and shocked the Chinese leadership.
On July 22, 1999, the Ministry of Civil Affairs and the Ministry of Public Security released the decision banning Falun Gong. The presence of Qigong in academic research institutes had finally come to an end. The “research groups of human body science” of the 507 Institute were dismissed.
Reflecting on the passing Qigong Fever, Gong Yuzhi, a famous Chinese philosopher concluded: “Prevailing superstition, pseudoscience, antiscience, and mysticism would erode and endanger our guiding theoretical basis in thinking. Once our thinking gets infected with superstition and mysticism, it in return promotes the flourishing of Huidao School [superstitious sects and secret societies], evil cults, and gangdom, which sets a great political threat to our society” (Gong [ 3] , 10).
Conclusion
China's ESP movement began in the 1970s with an ordinary social report, which gradually developed into a huge ESP fever infecting all social communities that was finally vanquished by government command. This movement lasted for more than 20 years and involved a wide range of the population, from ordinary citizens to scientists and government officials, issued thousands of publications, consumed huge amounts of funds along with other social resources, and finally burned to ashes. At the climax of this movement, the Chinese government even established public research institutions of “human body science” for the study and promotion of ESP, which were rarely seen in other countries. Notably, the movement occurred within a social background of ideological emancipation, leaving later generations a large thinking space. The Qigong and ESP Fever showed that basic questions, such as the definition of science, characteristics of science, and the boundaries between science and pseudoscience, are not easy to answer. Moreover, different answers to these questions result in different theoretical and practical consequences. In hindsight, it is noted that the ESP movement was grounded in a densely mystical culture and led to the establishment of several Chinese‐style religions. ESP forms the background, carrier, and cultural roots of Falun Gong and other Chinese religions. Eventually, with the banning of several Qigong organizations, the past reports of frequently discovered ESP vanished completely. However, in recent years, there are some occasional signs of an ESP revival. For example, two new grandmasters, named Li Yi and Wang Lin, emerged, their actions were widely reported, and they were the recipients of worship from government officers, entrepreneurs, and movie stars. They went down from their altars for worship within a cloud of doubt. In the cultural environment of China, after some years, various grandmasters will probably emerge again. Therefore, the corresponding science–pseudoscience debate is very likely to continue in China in the future.
References
1 Editor's Report. 1980. “ Comrade Qian Xuesen Visited the Journal's Editorial Office.” Journal of Nature 8 : 587.
2 Engels, Frederick. 1968. Dialectics of Nature. New York : International Publishers.
3 Gong, Yuzhi. 1995. “ Chinese Communist Party's Tradition of Promoting Science and Opposing Superstition.” Journal of Chinese Communist Party History 5 : 5 – 12.
4 He, Muyan, et al. 1980. “ Reconsider the Universal Problems of ESP of Human Body.” Journal of Nature 9 :683, 674.
5 He, Zuoxiu. 1995. “ A Belated Report: Memoir of ‘Super‐man’ Zhang Baosheng's Miscues.” Beijing Youth Daily, 26 May.
6 Li, Xuelian. 1979. “ Reading with Ears, Not Necessarily Insane.” Ming Pao, Hongkong. 18 June.
7 Mi, Aini. 2009. “ 1987: How Qigong Masters Were Born.” Outlook, Oriental Weekly, 51 :40–41.
8 Nie, Chunrong. 1991. “ I Strongly Support Scientific Research on Human ESP.” China Human Body Science, 4 :147–50.
9 Ostrander, S., and L. Schroeder. 1970. Psychic Discoveries behind the Iron Curtain. Englewood Cliffs, NJ : Prentice‐Hall.
10 Palmer, David A. 2007. Qigong Fever: Body, Science, and Utopia in China. New York : Columbia University Press.
11 Qian, Xuesen. 1988. On Human Body Science. Beijing : People's Military Medical Press.
12 Tu, Jianhua. 2009. “ Twenty Years of Extrasensory Perception and Its Features.” Journal of Hunan City University 4 : 14 – 19.
13 Yu, Guangyuan. 1986. Comments on the So‐called Human ESP. Shanghai : Knowledge Press.
14 Yu, Guangyuan. 1989a. “ My ‘Grudges’ with Pseudo‐science.” Southern Weekly, 6 August.
15 Yu, Guangyuan. 1989b. “ I Strongly Object to the Promotion of Anti‐science ESP.” Ta Kung Pao, 9 January.
16 Zhang, Zhuo. 2011. The Media's Role in the ‘Martial Arts and Qigong Fever’ of 1979–1999 in China (PhD thesis). Beijing Sport University, Beijing, China.
17 Zhu, Runlong, and Qiaqia Zhu. 1987. Chinese Supermen. Shanghai : Shanghai Cultural Press.
18 Zong, Yi, and Yanping He. 1989. “ From Mystery to Science: Study of the Trend of Chinese Qigong Fever.” Outlook 14 : 25 – 27.
19 Zu, Jia. 1979. “ From ‘Reading with Nose’ to ‘Reading with Ears’.” People's Daily, 5 M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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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anhui Li and Zheng Fu
Jianhui Li is Professor of Philosophy in the School of Philosophy, Beijing Normal University, 19 Xinjiekouwai Street, Beijing 100875, China; e‐mail:.
Zheng Fu is Assistant Professor in the School of Philosophy, Beijing Normal University, 19 Xinjiekouwai Street, Beijing 100875, China; e‐mail:.
Copyright of Zygon: Journal of Religion & Science is the property of Wiley-Blackwell and its content may not be copied or emailed to multiple sites or posted to a listserv without the copyright holder's express written permission. However, users may print, download, or email articles for individual 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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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anhui Li and Zheng Fu
Jianhui Li is Professor of Philosophy in the School of Philosophy, Beijing Normal University, 19 Xinjiekouwai Street, Beijing 100875, China; e‐ma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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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학도병 4천여명 강제동원 실태 드러나…정부보고서 첫 발간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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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학도병 4천여명 강제동원 실태 드러나…정부보고서 첫 발간
송고시간 | 2018-01-22
'쇼생크' 뺨치는 탈출 사례도…김준엽 선생, "배아프다" 행군 빠지고 교관 따돌려
1944년 1월 학도병 입영을 다룬 조선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행정안전부 제공=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이태수 기자 = 1940년대 일본이 '학도지원병'이라는 명목으로 우리나라의 학생과 청년 4천385명을 태평양전쟁에 강제 동원한 구체적인 사실이 정부 보고서를 통해 공개됐다.
행정안전부는 태평양전쟁에 동원된 조선인 청년의 피해 실태 조사 내용을 담아 정부에서는 처음으로 진상보고서를 발간했다고 22일 밝혔다.
이번 보고서는 행안부 과거사업무지원단과 고려대가 지난해 10∼12월 함께 진행한 진상조사 결과를 담은 것이다. 학도병 제도 시행 배경, 동원 규모, 부대배치 실태, 생존자 회고록, 일본군 부대 명부 등 학도병 동원 피해 실태를 두루 다뤘다.
행안부는 "지금까지 학도병으로 동원된 조선인은 4천385명으로 추정됐을 뿐 구체적인 자료가 없었다"며 "이번 보고서는 피해 실태를 종합적으로 구명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학도병은 전문학교 이상 졸업자를 대상으로 한 군인 동원제도로, 1943년 말 기만적인 지원과 전형 절차를 거쳐 동원됐다.
보고서는 학병 동원 대상자로 지목된 총 6천203명 가운데 70%에 해당하는 4천385명이 군인으로 차출됐다며, 이는 실질적인 강제동원이라고 지적했다. 학도병을 거부한 청년들은 군수공장 등지에 보내졌다.
학도병에서 탈출한 고(故) 김준엽 선생을 찾고자 일본군이 작성한 수색도면[행정안전부 제공=연합뉴스]
동원된 학도병은 1944년 1월 20일 일본군 부대에 입영 후 훈련을 받고 각지에 배치됐다. 절반가량은 일본, 30%가량은 중국 전선, 나머지는 한반도 내에 잔류한 것으로 확인됐다.
조사진은 당시 '육군특별지원병임시채용규칙'을 비롯해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학도병 출신자 모임 '1·20 동지회'의 회고록, 한국 광복군·독립유공자 명부, 조선인강제연행진상조사단 명부, 일본군 부대 명부 등을 폭넓게 들여다봤다.
그 결과 학도병 가운데 일본군을 탈출해 광복군에 참가한 이가 43명,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은 사람이 71명으로 확인됐다.
행안부는 "이번에 발굴된 자료 중에는 전선 배치 이후 탈출해 광복군 등 소속으로 독립운동을 펼친 이들의 기록도 상당수 포함됐다"며 "앞으로 독립유공자 포상의 근거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1944년 1월 학도병 입영을 다룬 조선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행정안전부 제공=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이태수 기자 = 1940년대 일본이 '학도지원병'이라는 명목으로 우리나라의 학생과 청년 4천385명을 태평양전쟁에 강제 동원한 구체적인 사실이 정부 보고서를 통해 공개됐다.
행정안전부는 태평양전쟁에 동원된 조선인 청년의 피해 실태 조사 내용을 담아 정부에서는 처음으로 진상보고서를 발간했다고 22일 밝혔다.
이번 보고서는 행안부 과거사업무지원단과 고려대가 지난해 10∼12월 함께 진행한 진상조사 결과를 담은 것이다. 학도병 제도 시행 배경, 동원 규모, 부대배치 실태, 생존자 회고록, 일본군 부대 명부 등 학도병 동원 피해 실태를 두루 다뤘다.
행안부는 "지금까지 학도병으로 동원된 조선인은 4천385명으로 추정됐을 뿐 구체적인 자료가 없었다"며 "이번 보고서는 피해 실태를 종합적으로 구명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학도병은 전문학교 이상 졸업자를 대상으로 한 군인 동원제도로, 1943년 말 기만적인 지원과 전형 절차를 거쳐 동원됐다.
보고서는 학병 동원 대상자로 지목된 총 6천203명 가운데 70%에 해당하는 4천385명이 군인으로 차출됐다며, 이는 실질적인 강제동원이라고 지적했다. 학도병을 거부한 청년들은 군수공장 등지에 보내졌다.
학도병에서 탈출한 고(故) 김준엽 선생을 찾고자 일본군이 작성한 수색도면[행정안전부 제공=연합뉴스]
동원된 학도병은 1944년 1월 20일 일본군 부대에 입영 후 훈련을 받고 각지에 배치됐다. 절반가량은 일본, 30%가량은 중국 전선, 나머지는 한반도 내에 잔류한 것으로 확인됐다.
조사진은 당시 '육군특별지원병임시채용규칙'을 비롯해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학도병 출신자 모임 '1·20 동지회'의 회고록, 한국 광복군·독립유공자 명부, 조선인강제연행진상조사단 명부, 일본군 부대 명부 등을 폭넓게 들여다봤다.
그 결과 학도병 가운데 일본군을 탈출해 광복군에 참가한 이가 43명,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은 사람이 71명으로 확인됐다.
행안부는 "이번에 발굴된 자료 중에는 전선 배치 이후 탈출해 광복군 등 소속으로 독립운동을 펼친 이들의 기록도 상당수 포함됐다"며 "앞으로 독립유공자 포상의 근거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학도병을 다룬 조선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행정안전부 제공=연합뉴스]
조사진이 찾은 일본군 명부에는 목숨을 걸고 일본군을 탈출한 학도병의 사례도 자세하게 담겨 있다.
평양 출신 고(故) 김준엽 선생(전 고려대 총장)은 1944년 1월 20일 입영해 중국 안동과 상해관을 거쳐 보병으로 서주에 배치됐다.
그는 초년병 교육을 받던 그해 3월 행군 전날 복통을 호소해 교관으로부터 내무반에 머무를 것을 명령받았다. 그런데 같은 날 "복통에도 행군에 참가하겠다"고 밝히고서는 그날 밤 부대를 빠져나왔다.
다음 날 아침 점호에서 김 선생이 보이지 않자 일본군 경비대장은 대대적인 수색에 나섰다. 인근 경비대도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 나서는 한편, 밀정까지 중국에 보내 김 선생의 뒤를 캐고 나섰다.
하지만 일본군은 결국 그를 찾지 못했고, 서류상으로는 '생사불명'으로 남았으나 김 선생은 한국 광복군에 합류했다.
평안북도 삭주가 본적인 고 장준하 선생도 1944년 7월 중국 서주에서 탈출해 자유의 몸이 된 것으로 기록됐다. 그 역시 광복군으로 활동하다 해방을 맞았다.
행안부는 "꽃다운 청년을 전장에 내몰아 희생시킨 일본이 우리나라에 끼친 강제동원 피해를 사실대로 정확히 밝혀내야 한다"며 "앞으로 진실규명에 적극 나서겠다"고 전했다.
보고서는 국가기록원 홈페이지(www.archives.go.kr)에서 누구나 볼 수 있다.
The Earth in God's Economy: Creation, Salvation and Consummation in Ecological Perspective (Studies in Religion and the Environment / Studien zur Religion und Umwelt): Ernst M. Conradie: 9783643906250: Amazon.com: 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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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logical destruction is taking place on such a scale that it prompts the need to make sense of the world in which we live and of this moment in history. This study explores the ecological significance of seeing the world as the whole household of the triune God and, more specifically, in terms of God's acts of house-holding (economy), including creation, salvation, and eschatological consummation. (Series: Studies in Religion and the Environment / Studien zur Religion und Umwelt - Vol. 10) [Subject: Religious Studies, Environmental Studies, Ecology]
Ecological destruction is taking place on such a scale that it prompts the need to make sense of the world in which we live and of this moment in history. This study explores the ecological significance of seeing the world as the whole household of the triune God and, more specifically, in terms of God's acts of house-holding (economy), including creation, salvation, and eschatological consummation. (Series: Studies in Religion and the Environment / Studien zur Religion und Umwelt - Vol. 10) [Subject: Religious Studies, Environmental Studies, Ecology]
2019/12/09
TESSA MORRIS-SUZUKI. Our Leaders Fiddle While Australia Burns | John Menadue – Pearls and Irritations
TESSA MORRIS-SUZUKI. Our Leaders Fiddle While Australia Burns | John Menadue – Pearls and Irritations
TESSA MORRIS-SUZUKI. Our Leaders Fiddle While Australia Burns
Posted on 9 December 2019
As homes and communities go up in flames, Australian politics descends into new depths of silly-season absurdity. Enough is enough. It is time for Australia’s leaders to face up to the nation’s greatest security threat.
Kafka would have loved it.
Much of Australia faces its worst bushfire threat in living memory. Thousands of people have been forced from their homes, and hundreds have lost their homes altogether. Schools and major highways have had to close, and cities are shrouded in health-damaging smog. And our leaders respond with impassioned debate about… What? Whether Naomi Wolf wanted to remove a Christmas tree from an Oxford student common room twenty-eight years ago.
Is the Australian electorate supposed to laugh or weep?
Whether or not they blatantly deny the facts of climate change, our leaders are in denial. They are refusing to face up to what is happening, shrugging their collective shoulders and allowing the whole burden of their policy failures to fall on the shoulders of ordinary Australian citizens, local communities and volunteer groups like the heroic and desperately overstretched Rural Fire Service.
When challenged by some persistent interviewer, the best our Prime Minister can do is to mutter that changing Australia’s climate policy would not stop this year’s bushfires. Name me one person who ever suggested that it would. But the fact is that, in the struggle to find a global response to a global problem, Australia under the coalition has been one of the foot-draggers and would-be free-loaders, trying its best to do as little as it can get away with. It has therefore made a sterling contribution to the global failures whose consequences we are now reaping.
But that is only one side of the story. The other is that we are now living the reality of climate change. Having reluctantly and half-heartedly given up on climate change denial, Morrison and co. have now shifted to the new tack of telling us than no one particular fire or drought can be definitively blamed on climate change. Of course not. We get that. It is just that, overall, climate change makes them more severe, more frequent, more long lasting. What was the once-in-a-lifetime exception is now the new normal.
And what are you going to do about it?
Why is our government not bringing together the best minds in the country to talk about responses? How can we provide better national support to volunteer fire services whose tasks are getting more overwhelming by the day? How can we plan our suburbs and country towns to make them at least a little less vulnerable to fire, water shortages and rising sea levels? How can we improve infrastructure so that fewer places have only one escape route in time of crisis? What are we going to do about the grim future reality of skyrocketing insurance costs, which will leave many people unable to afford home insurance? None of our major parties has serious answers to these questions.
These are not easy or comfortable topics to discuss. Much easier to engage in silly-season name calling about political correctness and woke greenies. But these are the real existential threats to our security. These are the human security threats faced today by hundreds of thousands of Australians who will never find their lives and happiness threatened by the presence of a medivac-ed refugee or the wife of a former ISIS fighter.
Our Prime Minister’s beloved Quiet Australians (and don’t we love them as long as they keep quiet?) can only watch on gob-smacked bemusement as their homes, communities and environments go up in smoke while their leaders close their eyes to Australia’s greatest security threat.
Après nous la deluge… and the bushfires, and the droughts, and the cyclones, and the rising sea levels…
Tessa Morris-Suzuki is Emeritus Professor in the College of Asia and the Pacific, Australian National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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