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09

'몽골 군벌' 이성계, '친명 사대' 노선 택한 까닭



'몽골 군벌' 이성계, '친명 사대' 노선 택한 까닭



'몽골 군벌' 이성계, '친명 사대' 노선 택한 까닭
[기고] 한국사 왜곡의 주역, 이성계와 정도전
김운회 동양대 교수
2014.03.09 09:31:36

'몽골 군벌' 이성계, '친명 사대' 노선 택한 까닭

한국에서는 한족(漢族)을 제외하고는 모두 오랑캐로 가르친다. 만주족이나 몽골인도 모두 오랑캐인 것은 물론 한국인은 자신도 한족이 불러준 예맥(똥고양이)이라는 애칭(?)의 오랑캐로 기꺼이 받아들인다. 특이한 일이다. 실제로 몽골, 만주, 한국인들은 큰 차이가 없는 민족이다. 만주에서 보면 압록강과 두만강이 만주와 한반도와의 경계가 아니라 백두산을 중심으로 서로는 선양(瀋陽), 북으로는 지린(吉林), 남으로는 평양, 함흥 일대까지가 거의 하나의 풍광으로 시야에 들어온다. 그런데도 한국에서는 만주와 몽골인들을 한국인과는 전혀 다른 종족으로 더럽고 믿을 수 없는 오랑캐로 가르친다. 한족(漢族)은 특히 북방 민족들을 적(狄)이나 호(胡), 흉(匈), 맥(貊), 융(戎), 예(穢) 등의 용어로 지칭하며 비하했는데 그 이면에는 북방인들을 그만큼 무서워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면 한국인들이 왜 이렇게 자존심도 없이 스스로를 비하하면서까지 북방인들을 천시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극단적이고 한족 중심주의적 중화사상인 성리학(性理學)과 깊은 관련이 있다. 성리학이 국가적 이데올로기가 된 것은 조선(朝鮮)이다. 따라서 조선 시대 이후 이 같은 경향은 매우 심각해졌다. 따라서 조선 건국 이데올로기를 기초한 정도전(鄭道傳)은 이 책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물론 그 시대적 상황에서 불가피한 선택일 수도 있지만 명나라가 안착하고 조선도 안정화되었을 때도 중국에서도 사라진 성리학으로 극단적으로 무장해간 것은 ‘역사적 이성’의 상실일 분만 아니라 정신사적으로 비극이다.

이성계도 몽골 군벌


눈을 돌려 북방사 특히 몽골과 만주의 역사가 극심히 왜곡된 이면에는 조선의 건국자 이성계의 책임은 없을까? 한국에서의 북방사 왜곡은 이성계의 출신 문제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윤은숙 교수(강원대)의 저서인 <몽골제국 만주 지배사(소나무, 2010)>에 따르면, “원이 망해가며 이성계 부자가 고려에 귀순하기 직전까지 근 백년간의 그들의 조상과 그들은 몽·원제국 옷치긴 분봉왕 휘하의 엄연한 몽골국인이었다. <조선왕조실록>과 <태조실록 총서>에 따르면, 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李安社)는 삼척에서 동해안을 타고 올라가 동북면 일대를 근거지로 구축했고, 1255년에 옷치긴(Otchigin : 斡赤斤) 왕가를 통해 몽골제국에서 천호장 겸 다루가치 직위를 받았다. 다루가치는 몽골족이 아니고는 좀처럼 잘 주지 않는 고위 군관직이라는 점에 있다. 13∼14세기 동북 만주지역을 장악했던 옷치긴 왕가는 이 방대한 경제 인프라를 기반으로 제왕들 중 최고의 경제·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대칸들은 개경과 심양에 각각 개성 왕씨 부마왕을 분봉왕으로 세워 옷치긴 왕가의 과도한 비대화를 견제하였다.(교수신문 2007.2.5)”고 한다.


분명한 사실은 이성계가 성인이 될 때까지 고려가 아니라 원나라 국민이었다는 것이다. 즉 이성계는 원나라에 속하는 옷치긴 제국의 휘하의 고위직 군관이었다는 것이다.


옷치긴 왕가에 대해서 간단히 알아보면, 옷치긴(Otchigin) 즉 테무게옷치긴(1168∼1246)은 칭기스칸의 막내 동생인데 매우 용맹스러운 사람으로 칭기스칸의 절대적 신임을 받고 현재의 아무르강 일대에서 한반도 북부까지 다스린 제왕이다.


몽골 대평원을 통일한 칭기스칸에게 당시에 가장 큰 적은 공교롭게도 텝텡게르(Teb Tenggeri)라는 샤먼(무당)이었다. 유목민들에게 샤먼은 신(神)과 같은 존재로 칭기스칸의 개혁에 반대했던 사람들이 그를 중심으로 모이곤 했는데[주1] 칭기스칸에게는 ‘목에 가시’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칭기스칸이 그를 제거하기도 어려웠다. 이 일은 맡은 사람이 바로 옷치긴이다. 이 때문에 칭기스칸은 옷치긴에게 제왕들 가운데 가장 큰 지역을 다스리게 했고[옷치긴 울루스(Ulus : 제국)의 성립], 자신이 서방원정(1219∼1225)을 떠날 때에 국정운영을 맡길 정도로 신임이 깊었다. 옷치긴 왕가는 13세기에서 14세기까지 유목과 농경을 모두 할 수 있는 땅을 받음으로써 제왕들 가운데는 가장 큰 경제력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림 ①]



옷치긴 울루스(제국) 윤은숙(2010 : 105)에서 재구성

옷치긴 사후 2대 왕은 타가차르(塔察兒)이다. 타가차르는 쿠빌라이의 최대 정적이었던 아릭부케(阿里孛哥)를 격파하여 쿠빌라이가 황제위에 오르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고[주2], 쿠빌라이칸(원 세조)의 명령에 따라 항상 원정에 나서는 등 원나라 조정에서도 명망이 높은 사람이었다. 멍케칸(헌종)이 1254년 고려 정벌 시에 예구와 타가차르를 파견하기도 했다.


1264년 쿠빌라이가 등극하여 황제위에 오르자 가장 큰공을 세운 사람이 타가차르였다. 그래서 타가차르는 원 세조의 절대적 신임을 받아서 “항상 쿠릴타이(일종의 화백 제도)에 참석하여 중대한 국사(國事)를 논의하였으며 매우 존경을 받았다.(<집사>)”고 한다.[주3] 당시 타가차르는 독자적으로 원나라 조정의 법도를 어겨가면서 자신의 관할권이 있는 지역에 사신도 파견하고 민호도 소집하기도 할 정도로 힘을 가지고 있었다.[주4]


바로 이점에서 옷치긴 제국은 원세조(쿠빌라이칸)에게 가장 강력한 우방인 동시에 가장 두려운 대상이기도 했을 것이다. 윤은숙 교수는 심양왕 제도도 옷치긴 제국의 남하(南下)를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옷치긴 왕가가 원나라 ― 고려 사이에 위치하면서 고려까지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이것을 중간에서 차단하기 위해서 심양왕을 두어서 서로 충돌시켜 옷치긴 제국의 영향력을 통제하려고 했다는 것이다.[주5]


결국 원 세조가 우려했던 일이 터졌다. 1287년 옷치긴 왕가의 4대 제왕인 나얀(乃顔 : 타가차르의 손자)은 원세조의 중앙집권화 정책에 대항하여 동방의 제왕들과 반란을 일으켰다.[주6] 원 세조는 고령(73세)에도 불구하고 직접 정벌에 나서 나얀을 처형하였다.(1287)


나얀이 반란을 일으키자 고려 충렬왕은 원 세조에게 즉각 지원군을 파견하여 동북지역의 안전을 일부 담당하려고 했다. 그런데 나얀의 잔당들이 상대적으로 허약한 고려로 몰려오면서 사태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충렬왕은 다시 원나라에 지원군을 요청하여 1291년에야 반란이 진압되어 고려는 안정을 찾았다.


옷치긴 울루스의 귀족 이성계 가문


옷치긴 울루스(제국)은 이로써 다소 약화되었다가 1316년 요왕(遼王) 톡타(Toqta)가 임명되면서 다시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기 시작했다.[주7] 바로 이 시기에 이성계의 아버지인 이자춘(李子春)이 태어났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가문은 이성계(李成桂, 1335~1408) → 아버지는 이자춘(李子春, 1315~1361 : 환조) → 할아버지는 이춘(李春 : 도조) → 중조부 이행리(李行里 : 익조) → 고조부 이안사(李安社 : 목조) → 이양무(李陽武) 등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문제는 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와 그의 자손들이 주로 살았던 곳은 함경도 또는 현재의 옌지(延吉) 지역으로 이 당시는 고려 땅이 아니라 몽골의 영토였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성계가 몽골인이었음을 당연할 것이다. 이성계의 할아버지인 이춘은 보안테무르, 아버지 이자춘은 울루스부카라는 등의 몽골이름이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원나라가 멸망(1368)하기 전 34년 전에 태어난 이성계에게도 몽골 이름이 있었을 것이다.[주8]


[그림 ➁]




이성계 선조 정착지(좌)와 고려 말의 정치 지도(우) : 교육부검정(2001) 역사부도 ㈜ 금성 재구성


[그림 ➁]에서 보면 이성계의 선조들이 정착했던 지역은 현재의 옌지(延吉)나 두만강의 북부 지역 또는 함경북도 지역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이안사(李安社)는 전주(全州)에서 170호를 거느리고 삼척을 거쳐 두만강 하류를 거슬러 올라가 원의 개원로에 소속된 남경(南京) 즉 현재의 옌지(延吉) 성자산성(城子山城)의 오동(斡東) 지역에 자리를 잡았다.[주9]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1255년 이안사는 몽골제국의 산지(散吉 : Sanji) 대왕(몽골의 장군)의 도움을 받아 원나라로부터 남경 등지를 지배하는 수천호(首千戶)겸 다루가치 직위를 하사받았다.[주10]


당시의 천호장이나 다루가치는 그 지역을 관할하는 몽골 제왕들이 임명권을 가지고 있었고, 임명하고 난 뒤 중앙정부로부터 허락을 받는 형태였으므로 실질적으로는 산지가 이안사를 다루가치로 임명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지역은 옷치긴의 손자인 타가차르 대왕이 관할하고 있던 지역이었다. 산지라는 사람은 타가차르 대왕과 가까운 인물로 추정된다.[주11] 만약에 이안사가 몽골인이 아닌데도 다루가치로 임명되었다면, 타가차르 대왕의 두터움 신임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안사가 고려에서 이주한 사람이고 그 시기가 얼마 되지 않았다면 이안사의 다루가치 임명은 역사적 미스터리다. 고려의 이주민인 이안사가 언제 어떻게 거대한 영역을 다스리는 타가차르 대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을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이 시기 즉 1255년 이후 원나라는 본격적으로 고려 전역에 주둔하기 시작하였고, 그 주둔 범위가 압록강에서부터 익산, 담양, 해양(海陽 : 광주), 나주, 목포 등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였기 때문에 고려로서는 큰 위기 상황이었다. 당시 고려 조정은 원나라와 연줄을 닿기만 해도 그를 이용하여 원나라와의 외교 교섭에 동원하고 있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고려 출신의 이안사가 그 정도의 유력인사였으면 고려 조정에서 그를 모를 리도 없었을 터인데 이안사는 <고려사>에 일체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이안사의 아들인 이행리는 <고려사>에 한번 등장하는데, 일본 정벌을 위해 파견된 홍다구(洪茶丘, 1244~1291)를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즉 홍다구는 1281년 제2차 일본정벌 때 우승(右丞) 실도(實都)와 4만 군사를 이끌고 일본 정벌에 나섰다. 바로 이 부분에서 이행리의 출신에 대한 애매한 서술이 있는데 이는 아마도 <고려사> 편찬 과정에서 일부 조작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즉 <고려사>에 “(1281년) 3월 갑인에 원나라 정동행중서성 우승과 홍다구가 고려로 왔는데, 그때 우리 익조(翼祖) 또한 원나라 황제의 명으로 (이행리가 원나라 관리이므로) 동북면으로부터 고려 국왕을 뵙기 위해 재삼에 이르렀는데, 매우 공손하여 충렬왕이 말하기를 ‘경은 본래 사족(士族)이니 어찌 근본을 잊겠는가? 이제 경의 행동거지를 보니 족히 마음의 소재을 알겠도다’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주12] 충렬왕이 이행리에 대하여 “그대는 원래 선비 가문의 사람이니 어찌 그 근본을 잊겠는가?”라는 기록 하나로만 이성계 가문 전체를 고려인으로 담보해야하는 상황이다.


1290년 이안사의 아들 이행리는 다른 천호장들과의 불화로 옌지 지역의 기반을 상실하고 쌍성총관부의 함주(咸州 : 함흥)로 이주하였고, 1300년 다시 원나라로부터 쌍성 등지의 고려군민들을 다스리는 다루가치로 임명되었다. 또 이 직위는 그대로 이자춘에게 세습되었다. 이것은 이성계 집안 자체가 옷치긴 왕가와 긴밀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고려는 전 통치 기간을 통해서 이 지역을 제대로 다스린 적이 없고 특히 원나라 이후에는 옌지(延吉)에서부터 함주(함흥) 등의 지역에 대한 정치력을 한번도 가진 적이 없었다. 후일에 공민왕이 이 지역을 점령하고 더 나아가 길주까지 진출하여 오늘날 두만강과 압록강을 국경으로 하는 기초가 마련된 것이다. 따라서 이성계의 가문은 설령 그 선조가 전주(全州)에서 출향했다고 하더라도 이미 수세대에 걸쳐 여진화(女眞化) 또는 몽골화된 귀족으로 봐야한다.

이성계의 할아버지인 이춘(李椿)은 원나라로부터 아버지 이행리의 천호(千戶) 관직의 계승과 함께 발안첩목아(勃顔帖木兒)라는 몽골식 이름을 받았으며 이자춘(李子春)을 낳고 의주에서 화주(和州: 함흥 인근)로 옮겼다. 이자춘은 함경도 쌍성 지방에서 세력을 떨치며 원나라의 천호(千戶)로 있다가 1355년(공민왕 4)에 이르러 처음으로 고려 조정에 내알(來謁)하여 소부윤(少府尹)이라는 벼슬을 받았다. 바로 이 시기를 즈음하여 개경에 머무르게 된 것이다. 이 때 이성계의 나이는 이미 20세가 넘었기 때문에 이성계는 사실상 몽골의 귀족으로 봐야한다. 즉 이성계의 가문은 5대째 몽골의 고위 관직을 가진 군벌 세력이었던 것이다.[주13] 그리고 이성계 가문이 다스린 지역은 대부분 여진인(만주족)이었고 이성계 가문의 주축군도 여진인(만주족)들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주14]


1355년경 이자춘(이성계의 아버지)이 고려에 귀부한 시기는 이미 원나라의 국력이 쇠약하여 후일을 기약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1328년 원나라는 이른바 ‘천력(天曆)의 난’[양도내전(兩都內戰)]이 발생하여 카이산파의 엘테무르(연철)와 이순테무르파[태정제(泰定帝)파]인 톡타(요왕) 사이에서 유혈 충돌이 일어나 칭기스칸의 황금씨족(종실)의 내분이 심각하게 일어났다. 이 시기 원나라에서는 전성기를 지나 황위 계승에 따른 치열한 권력투쟁이 일상화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설상가상으로 1342년 이후에는 천지지변이 많아 황하가 대범람하여 하남, 산동 등의 지역이 황폐화되었고 후일 명나라의 건국 세력인 백련교도(주원장)의 반란이 창궐하여 이미 남중국에서 강대한 세력을 형성하였다. 특히 1360년 아르카이 테무르(오고타이의 후손)가 반란을 일으켜 많은 몽골의 제후들이 호응하여 원나라 조정을 어지럽혔고, 강남을 장악한 주원장은 명나라를 건국(1368)하면서 동시에 군대를 몰아, 대도(베이징)에 밀어닥쳤다. 1368년 7월 원나라의 혜종은 상도[上都 : 이전의 카이펑(開平)으로 현재 내몽골 중부의 시린궈러멍(錫林郭勒盟)]로 피신하였다.


이와 같이 이자춘(李子春)이 귀부한 10여년 동안의 기간은 원나라의 내우외환(內憂外患)이 극에 이른 상황이었다. 바로 이 시기에 이자춘은 “보다 안전한” 고려쪽으로 터를 잡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점에 있어서 이성계 가문의 전주(全州) 본관 문제도 다시 제대로 검정해봐야 한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 가문이 확실히 고려 가문이라면 어떻게 천호장과 다루가치를 누대에 걸쳐 세습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성계와 청태조(누르하치 아이씬조러)는 별로 다르지 않다. 청태조의 고향은 백두산으로 정확히는 함경도 종성 또는 중국 옌벤(연변)·룽징(龍井)의 하왕산 지역이라고 한다.[주15] 만약 이성계가 고려 사람이라면 청태조는 조선(朝鮮) 유민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의문 투성이의 이성계 가문 : 이성계 가문은 만주인 또는 몽골인


이성계의 직계 조상으로 알려진 이린(李隣 또는 李璘)은 신라 때 사공(司空)을 지낸 이한(李翰)의 후손이라고 한다.[주16] 이린은 대장군 이용부(李勇夫)의 아들로 고려 제18대 의종(毅宗)때 시중(侍中)을 지낸 문극겸(文克謙)의 사위이다. 이린은 이성계(李成桂)의 6대조이며, 아들은 이양무(李陽茂)이며, 손자가 이안사(李安社)라고 한다. 그런데 이린은 고려 무신정권의 실력자인 이의방(李義方)의 동생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고려사>(卷128, 列傳41, 叛逆2)에 나와 있다. <고려사>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① 이용부의 아들은 이준의(李俊儀), 이의방, 이린 등이고, ② 이린이 이의방의 동생이며 ③ 이린은 명문 출신의 문극겸(文克謙)의 사위라는 것이다.(<高麗史> 文克謙列傳도 동일함)


이성계가 이린의 후손이라는 것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제외하면 다른 정사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도 이린의 이야기는 없고 이안사(李安社)부터 찬양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고려사>에서는 이인(李隣)으로 <선원선계(조선 왕실의 족보)>에는 이린(李璘)으로 되어있어 한자(漢字)가 다르다.


나아가 <고려사>에는 “명종 4년(1174) 12월 계해일(癸亥日)에 이린(李隣)을 집주(執奏)로 임명했다.”고 했지만 <고려사>의 다른 부분에는 “(1174년) 이의방이 우연히 선의문(宣義門) 밖으로 나오자 정균(정중부 아들)이 몰래 승려 종참(宗旵) 등을 부추겨 이의방을 뒤따라 가다가 그를 살해하게 한 후, 이의방의 형제(이준의, 이린) 및 그 일당 등을 체포해 모두 죽였다.(”義方偶出宣義門外, 仲夫子筠, 密誘僧宗旵等, 托有求訴, 隨義方後, 伺隙斬之. 分捕俊儀兄弟及其黨高得元·柳允元等, 皆殺之“<高麗史> 卷128, 列傳41, 叛逆2)”라고 하여 앞의 기록과 맞지 않다.


그리고 <고려사>에는 이린의 아들로 주장되는 이양무(李陽茂, ?~1231년)에 대하여 “고종 8년(1221) 4월에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최선단(崔先旦)이 과거 급제자 이양무(李陽茂) 등 86인을 선발했다.(<高麗史> 志 國子試)”는 기록이 있는데 이해하기가 어렵다. 여기에 나타난 이양무는 실제로 이린이나 조선왕계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으로 보이는데, <태조실록 총서>에는 분명히 이성계의 선조로 서술이 되어있다. 즉 이양무와 이린의 관계에 대한 설명은 <고려사>에는 없고 다만 <태조실록 총서>에만 있다.


왜냐하면 이의방의 죽음으로 전체 혈족들이 몰살되었는데 설령 이양무 혼자 살아 남았다 해도 대역죄인으로 전주에 계속 있으면서 1221년 과거에 급제했다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다. 즉 <고려사>에 따르면, 이의방(李義方)과 이린(李隣)이 죽은 것은 1174년이고 이린의 아들로 주장되고 있는 이양무(李陽茂)가 과거에 급제한 것은 1221년인데, 만약 이린이 죽은 시점에서 이양무가 1살이었다고 해도 47세에 과거에 급제한 것이 된다. 만약 이양무가 10세만 되어도 이양무는 63세에 과거에 급제한 것이 된다. 그러면 이양무는 그의 아들인 이안사와 함께 언제 삼척으로 갔을까?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조선의 <태조실록(太祖實錄)>에는 “(이안사는) 처음에 전주(全州)에 있었는데 그때 나이 20여 세로서, 용맹과 지략이 남보다 뛰어났다. (…) 산성 별감(山城別監)이 객관(客館)에 들어왔을 때 관기(官妓)의 사건으로 인하여 주관(州官)과 틈이 생겼다. 주관(州官)이 안렴사(按廉使)와 함께 의논하여 위에 알리고 군사를 내어 도모하려 하므로, 목조(穆祖)가 이 소식을 듣고 드디어 강릉도(江陵道)의 삼척현(三陟縣)으로 옮겨 가서 거주하니, 백성들이 자원하여 따라서 이사한 사람이 170여 가(家)나 되었다. (…) 때마침 그 산성별감(山城別監)이 새로 안렴사(按廉使)에 임명되어 또 (삼척으로) 오려고 하니, 목조는 화(禍)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배를 타고 동북면(東北面)의 의주(宜州 : 함경도 덕원)에 이르러 살았는데, 백성 170여 호(戶)가 또한 따라갔고 (…) 고려(高麗)에서는 목조를 의주 병마사(宜州兵馬使)로 삼아 원나라 군사를 방어하게 하였다. (…) 원나라 산길 대왕(散吉大王 : [산지])이 와서 쌍성(雙城)에 둔(屯)치고 있으면서 (…) 사람을 두 번이나 보내어 목조에게 원(元)나라에 항복하기를 청하니, 목조는 1천여 호(戶)를 거느리고 항복하였다.”라고 하는 것은 사실이기 어렵다.


즉 무엇보다도 이안사가 삼척으로 이주한 것은 20세 전후라고 하는데, 그가 지방관과 불화가 심하자 지방관이 군대를 동원해야 할 정도로 힘이 센 호족이었다는 것이 문제다. 더구나 이양무는 대역죄인(이린)의 아들인데도 과거에 급제했다거나 그 아들(이안사)은 전주라는 대도시에서 호족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 이안사가 지역을 이주할 때마다 170호씩 이동하는 것도 전혀 상식적이지 않다. 지도자나 씨족장을 따라 움직이는 것은 분명히 농경민들의 행태는 아니다. 이것은 유목민 사회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또한 고려에서 이안사를 의주병마사를 삼았다(<태조실록>)는 내용도 <고려사>에는 없다.


분명한 것은 이린(李隣) ― 이양무(李陽茂) ― 이안사(李安社) 등의 혈연관계가 전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안사 이후의 행적과 후손들의 혈연적 연관성은 고도의 일치성이 있다.


뿐만 아니라, 이안사가 함경도 덕원(의주) 쪽으로 이동하기 전에 “먼저 평양(平壤)의 백성들이 목조의 위세(威勢)와 명망(名望)을 듣고 뒤따라오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산지(散吉 : 몽골 장군)가 크게 기뻐하여 예절을 갖추어 대우함이 매우 후하였고,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즐거이 술을 마시었다. (…) ‘이 뒤로부터 서로 잊지 말도록 합시다.’하더니 (…) 명년 을묘(1255)에 산길이 이 사실을 원(元)나라 황제에게 알리니, 원나라에서 이안사를 오천호소(五千戶所)의 수천호(首千戶)로 삼고, 다루가치(達魯花赤)를 겸하게 하였다.(<태조실록 총서(太祖實錄 總序)>)”는 기록은 전혀 신뢰할 수 없다.


인터넷이 있는 시대도 아닌데, 이안사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평양(平壤)에서 이름도 없는 이안사를 흠모하여 함경도 쪽으로 따라온다거나 옷치긴 왕가의 실세였던 산지(散吉 : 산지) 대왕이 “연회가 끝나려 할 적에 친히 옥배(玉杯)를 목조(이안사)의 품속에 넣어 주면서 말하기를, ‘이 뒤로부터 서로 잊지 말도록 합시다.’라고 맹세하고(<太祖實錄 總序>)” 다루가치로 임명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만약 산지(散吉) 대왕 이 이안사를 다루가치로 임명했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안사는 몽골인이거나 만주족(여진) 가운데 몽골제국에 크게 협조한 사람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 당시의 고려 입장에서는 고려인 가운데 몽골의 다루가치가 될 정도로 중요 인사라면 고려 조정에서도 매우 중요한 인물로 각종 외교 로비에 등장하였을 터인데 일체 나타나지 않는다. 즉 이안사는 <고려사>에 존재하는 인물이 아니다.


따라서 다루가치는 아무나 임명되는 것이 아니며 고려에서 금방 이주해온 이안사를 당시 옷치긴 왕가의 실세였던 “산지 대왕이 원나라 조정에 천거하여 다루가치가 되게 했다.”는 <태조실록 총서>의 기록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만약 이안사가 애초부터 그 지역에 뿌리를 내렸던 여진계의 몽골 귀족이었다면 충분히 수긍이 가겠지만, 근거도 없는 이주민에게 고위벼슬을 하사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성계와 나하추


이성계를 정통 몽골 귀족이라고 의심하는 또 다른 이유는 이자춘과 나하추(納哈出)와의 관계 때문이다. 이들 두 사람은 상당히 친밀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하추는 원나라 초기 공신(功臣)인 무칼리(木華黎)의 후예로, 대대로 요동(遼東)지방의 군사적 책임을 맡았던 집안에서 태어나 원나라 말기에는 심양(瀋陽)을 근거지로 만주지역을 다스렸다. 1362년(공민왕11) 2월 나하추는 쌍성(雙城 : 현재 함남 永興)을 치고자 수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였으나 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使) 이성계에게 참패하고 달아났다. 이 이야기는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제35, 36, 38장)와 <납씨가(納氏歌)>에 잘 나타나 있다.[주17]


고려는 나하추에게 정1품의 벼슬을 내리기도 하였다. 만약 나하추가 고려의 벼슬을 받고 그대로 귀화하면서 나주(羅州) 나(羅)씨의 성을 받았다가 쿠데타를 일으켜 왕조를 건설했다면, 이성계와 같은 결과가 되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나하추는 원나라가 동북으로 쫓겨 갈 당시 성립된 북원(北元 : 기황후의 아들이 초대 황제임)을 도와 요동지역과 중원 회복을 위해 투쟁하다가 주원장의 고립정책으로 결국 명나라에 투항하였다. 이후 만주 지역의 원나라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면서 북원은 멸망의 길을 걸었다.


<조선왕조실록>과 <고려사>에 따르면, “이성계가 (나하추의) 말을 쫓아 추격하니 ‘이보게 이 만호, 두 장수끼리 어찌 이리 핍박하는 것이오?’ (…) 후에 나하추가 사람을 통해 왕에게 말을 바치고 (…) 나하추가 말하기를 ‘이자춘이 지난 날 ’나에게는 제주 있는 아들이 있다더니 과연 거짓말이 아니었네.‘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즉 나하추와 이자춘이 매우 가까운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주18]


이성계와 이자춘이 원나라가 망해가는 걸 보면서 고려에 투항했고, 이성계가 고려 귀족화 되는 길을 걸으면서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려 했다면, 자신의 출신을 더욱 은폐해야 할 것이고 이 과정에서 결국 친명(親明)·반원(反元)으로 선회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원나라는 이미 기울었고 명나라는 중원을 통일한 신흥 제국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몽골 귀족이 아니라 전주 이씨(李氏)로 뿌리를 내리게 되면, 더욱 원나라와는 철저히 절교(絶交)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 고려에는 정치적으로 복잡한 보수 세력과 신진 세력의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었다. 친원 - 친명, 대토지 소유 - 중소지주, 성리학 - 비성리학 등으로 각 분야별로 대치하던 정치세력의 이합집산도 심화되고 있었다. 이 틈새를 뒤집고 들어간 것이 바로 정도전(鄭道傳)이었다.

이성계는 원명 교체기에 자신의 군벌 모태인 원나라로부터 결별하고 독립하면서 재빨리 고려 국내의 친원파(親元派)를 적으로 돌려 제거하기 시작했다. 이성계는 신흥 명나라와 손을 잡아, 고려 내부의 권력투쟁에서 안정적으로 승리를 이끌어 갈 수 있는 대외관계 노선을 선택했다. 1368년 명나라가 건국하자, 바로 그 이듬 해 고려도 신속하게 원나라와의 관계를 정리하였다. 즉 고려는 원나라 연호 사용을 정지하고 원나라를 북원(北元)으로 부르기 시작하였다(1369).[주19] 북원은 북상하는 명나라의 15만 대군을 섬멸한 후(1372), 고려에 대해 합동 군사작전으로 중원(中原)을 회복하자는 요청을 여러 차례 보내왔으나 끝내 고려는 침묵하였다.[주20] 물론 당시 국제정세로 보아, 고려의 선택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1384년 이후에는 명나라가 북원의 사신이 다니는 길을 봉쇄해버렸기 때문에 통교하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원나라 황실은 긴 세월의 은혜를 저버리고 두터웠던 ‘구생(舅甥 : 장인과 사위)의 은혜’를 배반한 고려에 대해서 크게 실망을 하였다.


윤은숙 교수는 “결국 몽ㆍ원 제국이 죽어 넘어진 시신위에서 그것을 자양분으로 삼아 2대 제국이 태어나는데, 하나는 1368년의 주원장의 명나라고 다른 하나는 1392년의 이성계의 조선국이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주21] 따라서 고려계(?) 몽골군벌 가문 출신인 이성계가 개국한 조선조는, 친명사대(親明事大)에 강하게 집착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고 이것은 조선조를 통틀어 나타나게 된다.


조선이라는 명칭도 그래서 정한 것이다. 즉 정도전은 조선의 건국 이념을 정리한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에서 이성계의 “조선은 기자조선의 계승자라는 의미로 국호를 조선으로 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조선의 위정자들은 600년 동안 조선을 기자를 계승한 나라로, 중화의 충실한 외변(外邊)으로 자처했다. <조선경국전>에는 “우리나라는 국호가 일정하지 않았다. … (고구려·백제·신라·고려 등은) 모두 한 지방을 몰래 차지하여 중국의 명령도 없이 스스로 국호를 세우고 서로 침탈만 일삼았으니, 비록 그 국호가 있다 해도 쓸 것이 못 된다. 오직 기자만은 주나라 무왕의 명령을 받아 조선후에 봉해졌다. … (명나라 천자가 ‘조선’이라는 국호를 권고하시니) … 이는 아마도 주나라 무왕이 기자에게 명했던 것을 전하여 권한 것이니, 그 이름이 이미 정당하고 말은 순하다.” 라고 썼다.[주22]


조선은 한민족의 역사를 대변하는 국호가 아니라, 중화(中華)의 신하인 기자를 기리기 위한 국호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친명적(親明的) · 친한족적(親漢族的) · 모화적(慕華的)이었다. 이것이 우리 역사의 왜곡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나라는 없어져도 중국과의 의리를 지켜야한다?


한국에서는 고려와 몽골의 관계에 대해 부정적으로 가르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명나라와 조선의 관계가 더욱 부정적이다. 원나라는 사실상 세계의 지배자였고 고려인들은 원나라의 정치에 직접 개입하거나 영향을 미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명나라와 조선의 관계는 일방적이었고 종속의 정도는 더 심했으며 조선인들이 명나라의 정치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었다.


조선은 중국에서도 사라진 성리학(性理學)을 국학으로 하여 이데올로기(ideology)로 삼았고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의례(儀禮)의 근간으로 하여 통치철학의 기본으로 건국한 나라였다. 명나라 성화(成化) 연간에 편찬된, 주자의 사상을 집대성한 구준(丘濬)의 <문공가례의절(文公家禮儀節)>(전 8권 : 1465)을 적극 수용하여 성리학적 이데올로기를 더욱 강화하였다.[주23]


우리에게는 학문의 스승으로 각인된 이황(李滉), 이이(李珥), 김장생(金長生) 송시열(宋時烈) 등은 비생산적인 <주자가례>를 더욱 발전시켜 <성학십도(聖學十圖)>,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성학집요(聖學輯要)>, <가례집람(家禮輯覽)>,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 등을 저술하여 이를 더욱 공고히 하였다.


조선은 성리학(주자학)을 국가 정교(政敎)의 기본강령으로 채택하여, 주자학에서 말하는 관혼상제(冠婚喪祭)의 사례(四禮)에 관한 예제(禮制)는 누구나 반드시 지켜야하는 국가적 이데올로기였다. 그러나 주자학은 송대(宋代)의 시대의 산물이었고, 송나라 때 이루어진 <주자가례>가 당시 조선의 현실과는 동떨어져 많은 예송논쟁(禮訟論爭)을 야기시켰으며 그것이 결국 조선으로 하여금 세계사의 흐름에 역행하여 사회가 정체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조선은 스스로 중화사상으로 철저히 무장하더니 급기야 “중국(명)은 우리나라에 있어서 곧 부모요, 오랑캐(청)는 우리나라에 있어서 곧 부모의 원수입니다. (…) 차라리 나라가 없어질지언정 (중국과의) 의리는 저버릴 수 없습니다.[윤집 「척화론(斥和論)」]”라고 하기도 하고 “오로지 우리 동방(東方)은 기자(箕子) 이후로 이미 예의의 나라가 되었으나 지난 왕조인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도 오랑캐의 풍속이 다 변화되지는 않았습니다(<肅宗實錄> 7-1-3). (…) 기자(箕子)가 동쪽으로 오시어 홍범(洪範)의 도로써 여덟 조목의 가르침을 베풀었으니 오랑캐[夷]가 바뀌어 중국인[夏]이 되었고 드디어 동쪽의 주(周)나라가 되었습니다(송시열의 말 : <肅宗實錄> 9-2-12).”라고 하는 등 역사적 이성(理性)을 상실해갔다.


즉 조선의 대표적 충신(忠臣)이라는 자가 “중국은 부모(父母)고 우리 나라가 없어져도 중국과의 의리를 지켜야한다.”고 하지를 않나, 한국의 유학의 성인급(聖人級)으로 분류된 동방거유(東方巨儒)라는 자는 “한국은 중국에 의해서 오랑캐의 티를 벗고 새끼 중국이 되었으니 그 은혜가 만대에 이른다.”고 한다. 이것은 이 사람들이 민족의식(民族意識)이나 역사적 이성이 없어 생긴 결과가 아니라 성리학이나 중화사상으로 무장하면 불가피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조선의 성리학(주자학)이 위험한 것은 성리학을 제외한 어떤 사상이나 종교도 이단(異端)과 사교(邪敎)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조선은 사회경제적 발전의 동력을 상실하고 인문과학적 사회에서 안주하는 환경을 만듬으로써 미래의 비전을 상실하였던 것이다. 서유럽은 근대 이성으로 무장하고 부국강병의 길로 가고 있는데 조선은 시대를 역행하여 결국은 식민지의 길을 갔다.


이와 같이 조선은 철저한 사대 모화를 통해 우리 민족의 원류와는 단절을 도모하였고 이것은 다른 의미에서 조선의 국왕이 된 이성계 자신의 정치적 실체를 은폐하려는 정치적 계산에서 비롯된 것이다. 몽골 군벌이었던 이성계가 조선 국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당시 고려인들이 몽골과 고려와의 차이를 크게 느끼지 않았을 수도 있고 몽골군벌이 조선의 왕이 되는데에 대한 저항감이 크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필자의 개인적인 입장으로는 당시 ‘사실상 유일한 독립국’ 고려와 세계의 지배자인 원나라의 친밀한 관계를 생각해 보면, 이성계가 몽골 군벌이었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은 이해가 되지만, 이성계의 무력을 이용하여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던 세력들이 민족의 원류인 북방민들을 지나치게 오랑캐로 천시하는 정치, 사회, 문화적 환경을 만든 것이 문제이다. 이것이 한국 역사 전체를 왜곡하고 오늘날 민족의 정체성의 혼돈을 초래한 원인이다.


- 본문 주석


[주1] 예컨대 칭기스칸의 가족사를 기록한 <몽골비사>에 보면, 아홉 개의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텝텡게르에게 모여들었다고 한다. 유원수譯 <몽골비사> (혜안, 1994) 215쪽.
[주2] 옷치긴 울루스(Ulus : 제국)의 2대 제왕인 타가차르는 새 황제로 쿠빌라이(원 세조)를 선택함으로써 동방의 왕가들이 일제히 쿠빌라이편에 가담한 것이다.
[주3] 라시드 앗딘 <칭기스칸기> (김호동 譯註) (사계절, 2003) 91쪽.
[주4] 그래서 몽골 침공 초기에 고려가 저질의 공물을 바치자 이를 응징하기 위해서 사신 저고여를 통해 엄청난 공물을 징수하기도 했다. 이 사건은 고려의 무신 정권이 대몽항쟁을 강화하는 구실이 되기도 했지만 당시 옷치긴 울루스에서 요구한 공물은 실제로는 몽골 조정과는 무관하게 옷치긴 울루스 자체에서 부과한 것으로 판단된다.
[주5] 윤은숙 <몽골제국 만주 지배사(소나무, 2010)> 20쪽.
[주6] 나얀(乃顔)은 칭기스칸의 막내동생 테무게오치긴의 현손(玄孫)이다. 하이두(海都)가 원 세조(쿠빌라이)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동방의 여러 영주들도 반란에 가담하였는데, 이 당시 나얀이 맹주였다.
[주7] 叢佩遠 <中國東北史>(吉林文史出版社, 1998) 396쪽.
[주8] 주채혁 <순록치기가 본 조선·고구려·몽골(혜안, 2007)> 참고
[주9] 배재홍「조선 태조 이성계의 高祖 穆祖 李安社와 삼척」<朝鮮史硏究> (朝鮮史硏究會, 2003) 9쪽
[주10] “명년 을묘에 산지(散吉 : Sanji)가 이 사실을 원나라에 알리니, 원나라에서 오동 천호소를 세우고 금패를 하사하여 남경(南京) 증의 지역에 5천호 이상을 다스리는 수천호(首千戶)로 삼고 다루가치를 겸하게 하였다.”<朝鮮王朝實錄> 太祖實錄總序
[주11] 윤은숙, 앞의 책, 274∼276쪽.
[주12] 甲寅元遣征東行中書省右丞忻都茶丘來. 時我翼祖亦以朝命自東北面來見王至于再三益恭益虔王曰: “卿本士族豈忘本乎? 今觀卿擧止足知心之所存矣.” <高麗史> 29卷-世家29-忠烈王2-1281.
[주13] 즉 이안사, 이행리, 이춘, 이자춘, 이성계 등은 원나라의 천호(千戶) 겸 다루가치 지위를 세습하여 함주, 등주, 화주의 고려인과 여진인을 지배했기 때문에 몽골 귀족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김구진 「여진과의 관계」<한국사> 22(국사편찬위원회,1995) 331쪽.
[주14] 윤은숙, 앞의 책, 280∼281쪽.
[주15] 박진관 <신간도 견문록> (예문서원, 2007) 292쪽.
[주16] 조선의 <태조실록 총서>에 “이한(李翰)이 이자연(李自延)을 낳았다. 이자연이 이천상(李天祥)을 낳고, 이천상이 광희(光禧)를 낳고, … 대장군(大將軍) 이용부(李勇夫)를 낳고, 이용부가 내시 집주(內侍執奏) 이인(李隣)을 낳고, 이인이 시중(侍中) 문극겸(文克謙)의 딸에게 장가들어 장군(將軍) 이양무(陽茂)를 낳고, 이양무가 상장군(上將軍) 이강제(李康濟)의 딸에게 장가들어 이안사(李安社)를 낳으니, 이 분이 목조(穆祖)이다.”로 되어있다.
[주17] <납씨가(納氏歌)>는 이성계가 고려 공민왕(恭愍王) 11년(1361) 28세 때 동북방병마사가 되어 나하추(納哈出)를 격퇴한 사실을 칭송한 노래.
[주18] <朝鮮王朝實錄>「太祖實錄總序」, <高麗史> 卷133 恭愍王世家 40
[주19] <高麗史> 卷133 恭愍王世家 41 공민왕 18년 8월 丙戌.
[주20] 구체적으로 원나라 혜종(토곤 테무르)과 기황후도 고려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였고(1368), 명나라 대군을 격파했던 아유시리다라칸(기황후 子)의 조정에서도 “옛 주인(故主)의 의리가 중하고 구생(舅甥 : 장인과 사위)의 은혜가 두터운데, 가히 배반할 수 있겠는가? 고려왕은 진실로 생각을 고치어 황제의 명령(上命)에 부응하여 군사를 가다듬고 말을 먹이어 (원나라와) 함께 기각지세(掎角之勢)를 이루어서 우리 국가(원나라)의 중흥(中興)의 사업을 도울 수 있도록 하라.”고 하면서 고려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였다(1376). <東國通鑑> 卷50 高麗紀 辛禑 2年 丙辰年.
[주21] 윤은숙 「조선창업, 과연 한반도의 자생적 산물인가」교수신문(2007.2.5) 및 윤은숙 <몽골제국 만주 지배사> (소나무, 2010)
[주22] <朝鮮經國典>「國號」
[주23] <주자가례>는 <문공가례(文公家禮)>라고도 하는데 후인들이 주자의 이름을 빌어 편찬한 책이라는 설도 있다. 고려 말 주자학과 함께 한반도에 전래되었다. 명(明)나라 성화(成化)연간에 구준(丘濬)이 <주자가례>를 기초로 하여 의절고증(儀節考證) 등을 추가하여 <문공가례의절(文公家禮儀節)> 8권을 만들었다.

19 김형수(녹색당) 그린뉴딜과 탈성장, 한 길인가 분기점인가? Namgok Lee

연구소 칼럼 - [칼럼] 그린뉴딜과 탈성장, 한 길인가 분기점인가?

[칼럼] 그린뉴딜과 탈성장, 한 길인가 분기점인가?
by 녹색전환연구소 posted Sep 26, 2019
김형수(녹색당 서울시당 정책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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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IPCC 1.5도 특별보고서 발표된 후 파리협약에서 합의한 2도가 아닌 1.5도 이내로 지구 평균기온 상승을 제한해야 한다는 경각심이 전 세계로 확대되었다. 전 세계 시민들은 각국 정부에 기후 위기 비상사태를 선언할 것을 요구하며 2050년 탄소 배출을 0으로 만들 즉각적인 감축 계획을 요구하고 있다. 2030년까지 2010년 대비 온실가스 배출을 45% 줄여야만 1.5도 이내로 지구 온도 상승을 제한할 수 있다는 IPCC의 특별 보고서에 따라 인류에게 남은 시간은 10년에 불과하다. 앞으로 10년 우리에게 필요한 정책은 무엇일까?


최근 전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는 정책은 바로 그린뉴딜 정책이다. 미국 정치 변화의 바람을 일으킨 오카시오 코르테즈와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로 나선 버니 샌더스는 앞 다투어 그린뉴딜 정책을 내놓고 있는 상황이다. 그린뉴딜만큼 주목받지 못하고 있지만 탈성장 또한 현재의 위기를 타개할 대안 정책으로 회자되고 있다. 그린뉴딜과 탈성장, 방향은 비슷하지만 차이가 있고, 각 정책을 지지하는 진영들에서는 논쟁이 있다. 그린뉴딜과 탈성장은 인류가 초래한 온 생명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경로에서 서로 같은 길일까 아니면 다른 길일까?


그린뉴딜, 로버트 폴린의 주장

그린뉴딜을 지지하는 대표적인 연구자 로버트 폴린을 통해서 그린 뉴딜의 주장을 살펴보자. 폴린은 실현가능한 지구적 기후 안정화 진전시키기: 탈성장 대 그린뉴딜(2019)에서 기후변화라는 위기를 막고 지구 기후를 안정화하기 위해서는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이고 경제성장을 하는 절대적 탈동조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가 주장하는 그린뉴딜의 기본은 GDP의 1.5 ~2퍼센트를 에너지효율 향상, 재생에너지 확대에 투자해 생활 수준을 높이고 일자리를 창출하자는 프로그램으로 요약된다.


폴린이 말하는 에너지효율 향상 프로그램이란 건물효율 개선, 대중교통 시스템 향상과 함께 에너지효율을 높인 차량 이용, 전력 송배전 손실 감소, 산업기계 효율적 운영 등을 뜻한다. 폴린은 에너지효율 향상은 생활 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같은 서비스라면 더 적은 에너지가 필요하므로 비용을 아낄 수 있기 때문이다.


폴린에 따르면 재생에너지에 투자를 확대하는 것은 일자리 창출도 가능하게 한다. 전환과정에서 발생하는 실업의 충격을 완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재생에너지에 투자하는 것이 필연적으로 노동자에게 적당한 보상을 보장하고, 작업장 조건과 노동조합 대표성을 강화하며, 여성과 소수자들에게 직업 기회를 필연적으로 확대 보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재정투자라는 공적 지출로 직업의 질, 조합의 범위, 소수자들에 대한 직업에 대한 기회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폴린은 에너지효율, 재생에너지 확대에 투자는 산업 정책을 필연적으로 요구된다고 주장한다. 정부가 재정지출을 한다 해도 공공기업, 사적 기업 등이 초기 자본의 흐름을 진전시키고, 프로젝트의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연구개발에 대한 지원, 세제 혜택, 공공 조달 등의 산업 정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어서 그는 탈성장 주장을 평가하는데, 탈성장은 구체적인 실현 가능한 기후 안정화 정책들을 제시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향후 20년 동안의 10% GDP 감소라는 탈성장론의 시나리오에 따르면 2007년 ~2009년 금융위기나 대공항 수준의 경기 침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구성원들에게 미칠 충격이 크고, 해당 시나리오에서는 그린뉴딜 시나리오에서보다 이산화탄소배출 감축량이 적다고 비판한다.


무엇보다 탈성장 시나리오에서조차도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감축시키는 것은 GDP 전체의 축소가 아니라 에너지효율, 재생에너지 부문 투자의 거대한 성장임을 지적한다. 계산상 화석연료 생산과 소비는 급격하게 감소하지만, 에너지효율, 재생에너지 부문 투자는 GDP 성장에 기여하는데, 무엇보다 이 정도의 GDP 감소는 빈민층과 노동자들의 생활 수준 감소와 실업을 결과한다고 비판한다. 탈성장은 전략적 관점에서도 재생에너지 프로젝터를 철저하게 정치적으로 비현실적으로 만드는 효과를 낳게 될 수 있다고 말한다.


탈성장, 버튼과 소머빌의 주장


마크 버튼과 피터 소머빌은 탈성장: 반론 에서 폴린을 겨냥해 직접 비판을 제기한다. 그들은 폴린이 기후변화만 강조하고 있고, 생물 다양성, 깨끗한 공기, 물, 살만한 도시, 사회적 국제적 평등을 기후변화를 완화라는 긴급성에 종속시킨다고 지적한다. 즉 현재 인간의 자원 소모에 의한 생태적 수용 능력의 한계를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폴린은 금융화된 신자유주의, 수익 추구의 극대화를 비판하고 성장은 긍정하고 있는데, 버튼과 소머빌은 금융화된 신자유주의가 자본주의 이윤율 하락에 대한 대처 방안이라는 점에서 성장이 내포하고 있는 근본적 문제가 아닌 그것의 파생된 문제를 악당으로 오인했다고 문제를 제기한다. 또한 선진국의 성장과 탄소배출의 분리 현상인 탈동조화는 탈산업화가 되면서 탄소 배출 산업을 외부화, 국가적으로 외주화한 데서 비롯된 것이고, 물질적 관점에서 자원 소모와 경제성장의 탈동조화는 일어난 적이 없다고 지적한다.


버튼과 소머빌은 역사적으로 재생에너지 확대가 화석연료 감소로 이어진 사례가 없다는 점도 지적한다. 재생에너지가 늘면서 화석연료 사용도 늘었고, 현재와 같은 소비수준으로 재생에너지를 충당하기 위해서 재생에너지 활용이 18배나 증가해야 한다며 폴린을 비판한다. 그리고 폴린의 정의로운 전환 프로젝트는 화석연료 산업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자본주의의 끊임없는 이윤 추구나 자원 개발이나 채굴은 석유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들은 경제와 이윤 추구는 분리되어야 하고, 생태적 수용 한계 내에서 인간의 필요가 충족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경제 축소가 꼭 빈곤층에 고통을 주는 게 아니라 부와 소득의 집중에 강하게 연결된 배출을 축소하는 것임을 강조하며 당장의 미래는 아닐지라도 지구의 생태적 수용 능력 한계 내에서 인간의 필요를 충당해야 하며, 전 지구적 경제의 물질적 규모 감소와 평등한 통제, 배출 감소가 이루어져야 함을 주장한다. 결론적으로 불필요한 산업생산, 에너지 소비, 도로 공항 투기적 고층 건물 등 건설, 화석연료에 의존적인 농업을 줄이고, 재생에너지를 통한 열 생산, 전기차를 통한 교통, 시멘트와 철을 사용하지 않은 건설, 종생태학의 원리를 따르는 농업으로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린뉴딜 비판에 대한 폴린의 반박


버튼과 소머빌에 대한 반론은 아니지만 폴린은 탈성장론자들의 비판에 답하면서 여전히 구체적 정책이 없음을 지적한다. 그는 일본의 예를 들며 일본 경제는 90년대 성장 없는 초 저성장 시대를 지났지만 이산화탄소배출량이 전혀 줄지 않았음을 지적하며 GDP 감소가 탄소배출 저감과 필연적으로 연결되지 않음을 제시한다. 또 인도를 예를 들면서 탈성장론자들은 개발도상국의 탈성장을 이야기하지 않지만, 인도는 경제성장과 함께 탄소배출을 많이 한다는 점을 들며, 인도 같은 나라에도 절대적 탈동조화 그린뉴딜이 필요함을 제시한다.


한 길인가, 분기점인가


폴린이 현재의 총체적 생태적 위기를 이산화탄소 혹은 온실가스 배출 문제로 초점을 맞추는 경향은 분명하다. 기후 위기가 일으킬 총체적인 생태적 파국도 있지만, 인류의 화석연료 사용뿐만 아니라 자원소모 자체가 일으키는 생태적 과부하를 고려했을 때 화석연료나 발전 부문에 초점을 맞춘 저탄소 기획은 일정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그러나 탈성장론은 근대 문명의 성장 지상주의의 근본적 한계를 적확히 지적하고 있지만, 지금 당장의 즉각적인 실천 계획들을 그린뉴딜론 만큼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인류가 마주한 위기에 대응할 시간은 부족한데, 인류가 나가야 할 큰 흐름에 대한 논쟁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상황이다. 저탄소사회라는 방향은 동일하지만, 무엇을 위기로 인식하고, 문제의 근원을 보는 시각에서는 그린뉴딜과 탈성장은 최종 도착지가 다를 수 있다. 그린뉴딜은 기존 성장지상주의적 산업 문명의 체질 개편 내지는 일자리 확충에 국한될 수도 있고(체제 유지의 알리바이), 탈성장론은 실천과 계획 없는 비판에만 머무르거나 현실화되지 못한 담론으로만 머물 수도 있다. 상호 비판과 경쟁을 통한 대안의 정교화가 필요한 상황이다.


양쪽을 모두 긍정하자면,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방향은 탈성장에 둬 지구의 생태적 한계 내에 인류의 필요를 충당하도록 경제를 축소시켜 가야 할 것이다. 다만, 전환 사회로 진입하는 마중물이자 단기적 이행전략으로 그린뉴딜을 택할 수도 있겠다. 이렇게 본다면 그린뉴딜을 보다 더 산업 문명 비판적 시각에서 재구성하는 탈성장의 기획과 개입이 필요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령 폴린의 그린뉴딜에서는 인간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상품의 생산과 소비, 이를 거래하는 시장의 역할이 강조 전제되어 있고 임금노동시스템 유지 또한 전제되어 있다. 성장을 요구하는 시장 시스템이 아니라 생산과 소비의 속도를 줄일 수 있는 자급, 자립의 역할이 강조되는 농업과 농작인 삶이 더 풍부하게 고려될 필요가 있다. 또 임금노동 체제 자체가 변화되는 시점에서 임금노동시스템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본소득론 또한 결합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참고자료
Robert Pollin, Advancing a viable glogal climate stabiliztion profect: Degrowth versus the Green New Deal, 2019 Union for radical political economics, Review of radical political economics 2019 vol 51(2) 311-319

Robert Pollin, Degrowth versus Green New Deal: Response to Julet Schor and Andrew Jorgenson, 2019 Union for radical political economics, Review of radical political economics 2019 vol 51(2) 31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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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k BurtonPeter Somerville, Degrowth: A defence, New Left Review 115, 95-104
 

탈성장론과 그린성장론을 들여다보고 싶다.

기후위기를 비롯한, 인류 존속의 위기에 대한 체감이 이상할 정도로 낮은 원인이나 탈성장이나 그린성장이 뿌리내리기 위한 동력, 문명전환과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변동과의 괸련 등에 대해서.
이 글에 소개된 논의들 속에는 이런 부분들이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 사람들의 삶의 목표, 행복에 대한 심층의 가치관 변화를 어떻게 도모하는냐는 것은 이런 논의가 현실적이고 보편적인 논의로 되는데 결정적인 요소가 아닐까?
지금의 단계에서 추진하려면 노사관계나 실업이나 복지에 대한 전망에 대해 정치 경제적 설득이 가능하고 유력한 정치세력이 이 전망들로 표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우리 정치에서 인류의 급박한 위기에 대응하는 목소리가 거의 안보일 정도로 약한 것이야말로 우리의 아픈 실태다.
만일 위기가 급속하게 닥치고 사람들의 인문적 토대와 정치 경제의 제도와 의식이 문명전환의 방향으로 바뀌지 않는 상황에서는 공멸하거나 그것을 피하기 위한 어떤 형태의 생태 독재가 불가피할 수도 있을텐데 이것은 또 다른 재앙으로 될 것이다.
단지 그린성장이냐 탈성장이냐 같은 기술적ㆍ제도적 접근만으로는 어렵고, 근본적이기 어렵다는 느낌이 든다.

물론 더 알아봐야겠지만.
문명전환의 동력에 대해,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반드시 검토되어야할 그린성장이나 탈성장에 대해.
그리고 4차 혁명과의 연동에 대해 폭넓은 연계 속에서 다방면의 노력들이 집중되어야할 것 같다.
녹색당이 이런 면에서 보다 주도적이고 적극적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하고 응원한다.
새벽에 이 글을 보며, 들었던 느낌이다.
이태영

Think We Can’t Stabilize the Climate While Fostering Growth? Think Again.



Think We Can’t Stabilize the Climate While Fostering Growth? Think Again.
2015



Think We Can’t Stabilize the Climate While Fostering Growth? Think Again.
Long-term investments in clean energy would curb emissions and create millions of jobs around the globe.

By Robert Pollin
OCTOBER 27,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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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 the 21st United Nations Climate Change Conference opens in Paris on November 30, annual global emissions of carbon dioxide (CO2) will be about 32 billion metric tons. This figure is 10 percent higher than the 29 billion tons that were emitted in 2009, when the last major UN climate conference took place in Copenhagen.



This article is adapted from Robert Pollin’s Greening the Global Economy, 
a Boston Review Book published by the MIT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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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re is no escaping the conclusion that we are playing Russian roulette with the environment by allowing CO2 emissions to continue to rise. The 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 provides conservative benchmarks as to what is required to stabilize the average global temperature at its current level of around 60.3 degrees Fahrenheit, which is 3.6 degrees (2 degrees Celsius) above the preindustrial average of 56.7 degrees. According to the IPCC, global CO2 emissions need to fall by about 40 percent below current levels within 20 years, to around 20 billion tons, and 80 percent by 2050, to seven billion tons.

In the run-up to the Paris conference, 156 countries—including the United States, Russia, India, Japan, South Africa, Brazil, and all of Western Europe—have pledged to cut their CO2 emissions. But taken together, these pledges are not nearly enough to bring global emissions down to 20 billion tons by 2035. On top of that, even these inadequate pledges are not likely to be made legally binding in Paris. Political leaders throughout the world, in short, continue to court ecological disaster rather than mount a viable climate-stabilization program.

This situation is shameful under any circumstances, but it is especially so because a simple and viable path to climate stabilization is right before us. The global economy can bring global emissions down to the IPCC target of 20 billion tons within 20 years if most countries—­especially those with either large GDPs or populations—devote between 1.5 and 2 percent per year of GDP to investments in energy efficiency and clean, low-emission renewable-energy sources. The consumption of oil, coal, and natural gas will also need to fall by about 35 percent over this same period—i.e., at an average 2.2 percent rate of decline per year. These investments aimed at dramatically raising energy-efficiency standards and expanding the supply of clean renewable-energy sources—what we can term a global green-growth program—would also generate tens of millions of new jobs in all regions of the world. That’s because building a green economy requires hiring workers at much greater rates than maintaining the world’s currently dominant fossil-fuel-based energy infrastructure. In its essence, this is the entire global green-growth program.

Of course, if it’s all so simple, then why do global emissions keep rising? Raw greed and corrupt politics loom large, of course. But there is more at play, including serious misunderstandings on the left as to what can and should be done.

THREE BARRIERS TO CLIMATE PROGRESS

There is one fundamental reason why most countries throughout the world, at all levels of development, are unwilling to cut their CO2 emissions sufficiently, notwithstanding the ever-mounting ecological threat. It is because the only way countries can achieve serious emissions cuts is to stop burning so much oil, coal, and natural gas to produce energy. Confronting this reality, in turn, creates three problems that are distinct but interrelated, and all are formidable in their own right.

The first is that workers and communities whose liveli­hoods depend on people consuming fossil-fuel energy will face major losses—layoffs, falling incomes, and declining public-sector budgets to support schools, health clinics, and public safety. The second is that profits will fall sharply and permanently for the colossus fossil-fuel companies, such as ExxonMobil, Shell, and the range of energy-based businesses owned by the US mega-billionaires David and Charles Koch. The world’s publicly owned energy companies—including Saudi Ar­amco, Gazprom in Russia, and Petrobras in Brazil, among others—together control about 90 percent of the world’s total oil reserves. These companies will take still larger hits to their revenues. The third problem pushes us beyond the fossil-fuel industry and into broader issues of jobs and prospects for economic growth. According to most analysts, economies will face higher energy costs when they are forced to slash their fossil-fuel supplies. It will therefore become more expensive to operate the full gamut of buildings, machines, and transportation equipment that drives all economies forward.


Many countries have pledged to cut their emissions in the run-up to the Paris conference. These pledges are not enough.

How do we successfully attack these three problems? The challenges are daunting. But there is also very good news here: They are not nearly as daunting as most analysts claim, including those on the left.

For example, in a widely cited Nation article in 2014, “The New Abolitionism,” the progressive journalist Chris Hayes argued that the losses fossil-fuel companies will have to bear to bring global CO2 emissions down sufficiently will be equivalent to those experienced by US slave owners as a result of the Civil War and abolition. As we will see, this is a huge overstatement, both in terms of the amount of money at play as well as the corresponding magnitude of the political struggle before us. Leftists are also increasingly embracing the view that the solution to climate change is to oppose economic growth in general and advance an alternative “de-growth” agenda. Versions of this approach are developed, for example, by the influential political economists Tim Jackson, in his 2009 book Prosperity Without Growth, and Juliet Schor, in her 2010 work Plentitude. Ironically, their views converge with the arguments long advanced on the right that achieving climate stabilization will inevitably lead to fewer job opportunities and the end of economic growth. The main difference between these left and right de-growth perspectives is that the right denounces this prospect while the left embraces it.

In reality, one critical step to creating a successful global climate-­stabilization movement is to recognize that these perspectives are themselves obstacles to progress. Defeating the oil companies will be grueling, but it will not require another civil war. Victories are already mounting. Even more basically, it is not true that there must be large, painful trade-offs between stabilizing the climate on the one hand and supporting jobs and economic growth on the other. Quite the contrary: A global green-growth project is the one climate-stabilization strategy that can realistically succeed and is available to us right now.
CLIMATE STABILIZATION THROUGH GREEN GROWTH

Of course, executing this green-growth plan is easier said than done. To begin with, energy-efficiency investments in all regions of the world will need to span each country’s stock of buildings, transportation systems, and industrial processes. Efficiency levels will need to rise in office towers and homes (among other places), in residential lighting and cooking equipment, and in the performance of automobiles and provision of public transportation. Expanding the supply of clean renewable energy will require major investments in solar, wind, geothermal, and small-scale hydropower, as well as in low-emissions bioenergy sources, such as ethanol from switchgrass, agricultural wastes, and waste grease. By contrast, expanding the supply of high-emissions bioenergy sources, such as corn ethanol and wood, provides no benefit relative to fossil-fuel sources. Dependency on these high-emissions bioenergy renewables needs to be slashed at the same rate as fossil fuels.

There are large differences in the emissions levels generated by burning oil, coal, and natural gas, respectively, with natural gas generating about 40 percent less emissions for a given amount of energy produced than coal and 15 percent less than oil. It is therefore widely argued that natural gas can be a “bridge fuel” to a clean- energy future, through switching from coal to natural gas to produce electricity. Such claims are wrong. At best, an implausibly large 50 percent global fuel switch to natural gas would reduce emissions by only 8 percent. But this doesn’t take account of the leakage of methane gas into the atmosphere that results when natural gas is extracted through fracking. Recent research has found that when more than about 5 percent of the extracted gas leaks into the atmosphere through fracking, the impact eliminates any environmental benefit from burning natural gas relative to coal. One study that focused on fracking projects in Texas and North Dakota found leakage rates in the range of 9 to 10 percent. If leakages continued at such rates, as would be likely if global fracking operations expanded, the overall emissions impact from natural gas would be worse than that from burning coal.

We therefore come back to a climate-stabilization strategy focused on efficiency and clean renewable investments. Increasing these investments by 1.5 percent of global GDP will require the creation of effective industrial policies for countries at all stages of development. This would mean large-scale public investment in clean energy—for example, to raise efficiency standards in government-owned buildings, dramatically expand good public-transportation systems, and substitute clean renewable energy for oil, coal, and natural gas with the government’s own purchases. Providing abundant and affordable financing for private businesses will also be critical. The situation with energy-efficiency investments makes this clear. On average, such investments pay for themselves within three to five years. But they still require financiers to put up the funds to cover up-front investment costs.




Countries that successfully advance policies to invest between 1.5 and 2 percent of GDP in energy efficiency and clean renewables should not face any more difficulties in maintaining healthy economic growth than if they kept burning oil, coal, and natural gas at their current rates. To begin with, energy-efficiency investments make it cheaper to cook meals; heat and cool homes and offices; travel by cars, buses, and trains; and operate industrial machinery.


It is not true that there must be large, painful tradeoffs between climate stabilization and economic growth.

Similarly, the International Renewable Energy Agency (IRENA) reports that, in all regions of the world, average costs of generating energy with most clean renewable sources are now at rough parity with those of fossil fuels. This means that households, businesses, and public enterprises that substitute clean renewables for fossil fuels will not need to pay more to meet their energy needs. This is without even factoring in the environmental costs of burning fossil fuels. Part of the overall green-growth agenda should therefore include either a carbon tax or a hard limit on carbon emissions, so that these environmental costs are incorporated into fossil-fuel prices. Through a carbon tax or cap, fossil-fuel prices would rise above those for most clean renewables, which would then encourage investments in renewables and efficiency still further. Not all clean renewable-energy sources are now at a rough-cost parity with fossil fuels. Solar energy is the most significant case in point. But solar-energy costs are falling sharply as increased investment levels spur innovation, and will fall still faster as global solar production expands.
GREEN GROWTH AND JOBS

These investments in energy efficiency and clean renewables will greatly expand job opportunities for countries at every level of development. Research that I have conducted with co-authors has found this relationship to hold in Brazil, China, Germany, India, Indonesia, South Africa, South Korea, Spain, and the United States.

For the United States, for example, we found that increasing investments by around $200 billion per year to raise energy-efficiency standards and expand clean renewable production—about 1.2 percent of current GDP—would drop US emissions by 40 percent within 20 years, while creating a net increase of 2.7 million jobs. This is after taking full account of the jobs that would be lost as oil, coal, and natural-gas production fell by 40 percent.

For India, we found that, through increasing energy efficiency and clean renewable investments by 1.5 percent of GDP every year, CO2 emissions could be stabilized at their current low level, which is one-tenth that of the United States on a per capita basis. This would occur even with India’s GDP growing at an average of 6 percent per year—a growth rate that produces a near-tripling of average incomes within 20 years. Over the 20-year program, these investments would also create an average of about 10 million more jobs per year than if India continued to rely on its existing fossil-fuel-dominant energy infrastructure. India could also eliminate nuclear energy altogether through this green-growth program.

In the case of Spain, in a study that we produced for the progressive anti-austerity party Podemos, we showed how green growth could be a cornerstone for a broader anti-austerity agenda. For example, we found that, through increasing investments in energy efficiency and clean renewables by 1.5 percent of GDP, Spain could reduce its emissions by more than 60 percent within 20 years, while generating an increase of about 400,000 jobs, compared with maintaining its existing energy infrastructure. This program would also enable Spain to steadily curtail its heavy dependency on imported oil. At present, Spain’s oil-import bill expands rapidly whenever the economy starts growing. This becomes a major barrier to busting out of its ongoing austerity trap.
“SMALL IS BEAUTIFUL”

Throughout the world, the energy sector has long operated under a variety of ownership structures, including public/municipal utilities, various forms of private cooperatives, and private corporations. Public ownership already dominates the global fossil-fuel industry. But this hardly means that Saudi Aramco, Russia’s Gazprom, or Brazil’s Petrobras are prepared to fight climate change. National development projects, lucrative careers, and political power all depend on continuing the exploitation of large fossil-fuel revenues.

Green-growth investments will nevertheless create significant opportunities for alternative ownership forms, including various combinations of smaller-scale public, private, and cooperative ownership. For example, community-­based wind farms have been highly successful for nearly two decades in Germany, Denmark, Sweden, and Britain. A major reason for their success is that they operate with lower profit requirements than big private corporations.


Investments in energy efficiency and clean renewables will greatly expand job opportunities for countries across the globe.

Falling costs for clean renewable energy, solar in particular, are also creating important opportunities for people to install and operate their own small-scale “distributed energy” systems, which rely less and less on electrical grids. In January, the Financial Times reported that “across the US, about 45,300 businesses and 596,000 homes have solar panels.… Over the past four years, the numbers have risen threefold for businesses and fourfold for homes, as the cost of solar power has plunged.” The prospects for distributed energy are still greater in developing countries such as India, where more than 40 percent of rural households do not have access to grid-based electricity. Distributed renewable energy will enable rural communities to leapfrog over grid-based systems entirely, just as mobile-phone technology has enabled them to stop depending on corporate-controlled landline phone companies.
THE PROBLEMS WITH DE-GROWTH

As expressed by Giacomo D’Alisa, Federico Demaria, and Giorgos Kallis in their new book Degrowth: A Vocabulary for a New Era, “The foundational theses of degrowth are that growth is uneconomic and unjust, that it is ecologically unsustainable and that it will never be enough.” These concerns are real, and de-growth proponents are making important contributions by addressing them forcefully. But on the specific issue of climate change, they are far too sweeping in their indictment of economic growth. Consider some very simple arithmetic: We know that annual global CO2 emissions need to fall from the current level of 32 billion tons to 20 billion tons within 20 years. Now assume that global GDP contracts by 10 percent over the next two decades, following a de-growth scenario. That would entail a reduction of global GDP four times larger than what we experienced over the 2007–09 financial crisis and Great Recession. In terms of CO2 emissions, the net effect of this economic contraction, considered on its own, would be to push emissions down by precisely 10 percent—that is, from 32 to 29 billion tons, exactly the global emissions level when the Copenhagen climate summit convened in 2009. So the global economy would still not come close to bringing emissions down to 20 billion tons by 2035.

Clearly, even under a de-growth scenario, the overwhelming factor pushing emissions down will not be a contraction of overall GDP but massive growth in energy efficiency and clean renewable-energy investments (which, for accounting purposes, will contribute toward increasing GDP) along with similarly dramatic cuts in fossil-fuel production and consumption (which will register as reducing GDP). Moreover, any global GDP contraction would result in huge job losses and declines in living standards for working people and the poor. Global unemployment rose by more than 30 million during the Great Recession. I have not seen any de-growth proponent present a convincing argument as to how we could avoid a severe rise in unemployment if GDP were to fall twice as much as it did during 2007–09.

For nearly 40 years now, the gains from economic growth in virtually all countries have persistently favored the rich. Nevertheless, the prospects for reversing inequality in all countries will be far greater when the overall economy is growing than when the rich are fighting everyone else for shares of a shrinking pie. Even thinking in strategic terms alone, attempting to implement a de-growth agenda would have the effect of rendering the global clean-energy project utterly unrealistic politically.
A SUPERFUND FOR FOSSIL-FUEL WORKERS

In order for the global green-growth project to succeed, it must provide adequate transi­tional support for workers and communities whose livelihoods currently depend on the fossil-fuel industry. The late US labor leader and environmental visionary Tony Mazzocchi pioneered thinking on what is now termed a “just transition” model for these workers and communities. Mazzocchi developed the idea of a Superfund for workers who lose their jobs as a result of necessary environmental transitions. The term refers to the US environmental program that was imple­mented in 1980 to clean up sites at which corporations had dumped hazardous wastes from petrochemical, oil, and nuclear- energy production. As Mazzocchi wrote as early as 1993: “Paying people to make the transition from one kind of economy—from one kind of job—to another is not welfare. Those who work with toxic materials on a daily basis…in order to provide the world with the energy and the materials it needs deserve a helping hand to make a new start in life.”


Green growth projects must provide transitional support for workers and communities whose livelihoods depend on fossil fuels.

The critical point is that providing high-quality adjustment assistance to fossil-fuel-industry workers will represent a major contribution toward making a global climate-stabilization project viable. It is a matter of simple justice, but it is also a matter of strategic politics. Without such adjustment-assistance programs operating on a national scale, the workers and communities facing retrenchment will, predictably and understandably, fight to defend their livelihoods. This, in turn, will create unacceptable delays in proceeding with effective climate-stabilization policies.

Well-funded “worker Superfund” policies therefore need to be incorporated into each country’s green-growth program. For the US case, I estimate that a generous Superfund would be in the range of $1 billion per year, which would barely make a dent if annual public and private spending levels totaled around $200 billion. In addition, the impact on workers and communities from retrenchments in the fossil-fuel sectors will not depend only on the support provided through an explicit Superfund budget. The broader set of opportunities available to workers will also be critical. The fact that clean-energy investments will generate a net expansion in employment in all regions of the globe means that there will be new opportunities for displaced fossil-fuel-sector workers within the energy industry. But more than this, the best form of protection for displaced workers is an economy that operates at full employment. In a full-employment economy, the troubles faced by displaced workers—regardless of the reasons for their having become displaced—are greatly diminished simply because they should be able to find other decent jobs without excessive difficulty.
DIVESTMENT AND REINVESTMENT TO DEFEAT BIG OIL

The giant fossil-fuel corporations will obviously take a big hit under green growth. But overstating what is at stake doesn’t help matters. In fact, it is critical to have a clear grasp of the scale of the losses that fossil-fuel companies are likely to face.

A 2013 study published jointly by Carbon Tracker and the Grantham Institute on Climate Change and the Environment at the London School of Economics examined the current holdings of the 200 largest private-sector fossil-fuel companies, as listed in the world’s various stock exchanges. This study estimated that “60–80 percent of coal, oil, and gas reserves of [these] firms are unburnable.” From these figures, we can roughly estimate that these companies are facing around $3 trillion in lost value over the next 20 years, and the certainty of further subsequent declines.

Of course, $3 trillion is real money. The fossil-fuel companies are not about to relinquish it without a brutal fight. At the same time, $3 trillion is equal to only about 1.3 percent of the $225 trillion in total worldwide private financial assets as of 2012. Still more, the $3 trillion in losses that the fossil-fuel corporations would face will not happen in one fell swoop. The declines would be incremental over a 20-year period. On average, this amounts to asset losses of $150 billion per year. By contrast, as a result of the US housing bubble and subsequent financial collapse, US homeowners lost $16 trillion in asset values in 2008 alone—about 100 times the annual losses that fossil-fuel companies would face.


DEMAND A FEDERAL INVESTIGATION OF EXXON'S CLIMATE-CHANGE DECEPTION


TAKE ACTION NOW!

The fact that the decline in fossil-fuel asset values would occur incrementally over decades also means that investors will have ample opportunity to diversify their holdings. Many are already doing so. As one important example, in June 2014 Warren Buffett, the best-known corporate investor and third-richest person in the world, announced that his company, Berkshire Hathaway, was doubling its holdings in solar- and wind-energy companies to $30 billion. This is even while Berkshire continues to own big shares of conventional utility companies.

More significant has been the rapidly growing global fossil-fuel divestment movement, which includes foundations, universities, religious organizations, and municipalities located throughout the United States and Western Europe, as well as in Canada, South Africa, Australia, and New Zealand. These organizations have been pushed by grassroots activists to take principled stands with their investment portfolios, and they have embraced the challenge. The website Fossil Free reports that 456 institutions, whose total asset holdings add up to $2.6 trillion (including all other holdings in addition to previously held fossil-fuel assets), have committed themselves to divestment. Big Oil can buy politicians and scream all it wants, but it can’t stop investors from walking out.

The divestment movement needs to broaden its goals, to become just as actively committed to reinvestment in energy efficiency and clean renewables as it is to dumping fossil-fuel stocks. This is how we can force the global economy onto a workable path toward stabilizing the climate and generating tens of millions of jobs for working people and the poor throughout the world. All participants at the upcoming Paris conference need to hear this message, very loudly and clearly, over and over again, until it sinks in.



Robert PollinRobert Pollin is a Distinguished Professor of Economics and co-director of the Political Economy Research Institute at the University of Massachusetts–Amherst.

Robert Pollin - Wikipedia



Robert Pollin - Wikipedia



Robert Pollin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Robert Pollin

Pollin in 2017
Born
Robert Pollin Kercheck
September 29, 1950 (age 69)

Washington, D.C.
Alma mater University of Wisconsin,
Madison

New School
Political party Democratic


Robert Pollin (born September 29, 1950) is an American economist. He is a professor of economics at the University of Massachusetts Amherst and founding co-director of its Political Economy Research Institute (PERI). He has been described as a leftist economist[1] and is a supporter of egalitarianism.[2]


Contents
1Career
2Personal life
3Books
4References
5External links
Career[edit]

He was the economic spokesperson in Jerry Brown's 1992 campaign for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Pollin moved to the University of Massachusetts Amherst's economic department from University of California - Riverside in 1998. According to Marxist economist Richard D. Wolff, Pollin's department is described as being "left Keynesians, but the Keynesianism is the theoretical frame. Marxism, for sure, is not" while Pollin states that he would be happy to hire Marxists but that economics departments do not produce them any longer.[3]

In 2013, Pollin, with Thomas Herndon and Michael Ash from the University of Massachusetts Amherst, published a paper which found several errors in Carmen Reinhart's and Kenneth Rogoff's widely cited 2010 paper, "Growth in a Time of Debt".[4][5][6]

Pollin and his colleagues defended Nicolas Maduro following the 2013 Venezuelan presidential election stating that audits performed by the Venezuelan government were sufficient and that Maduro won the presidency.[7][8] In June 2015, the leftist Spanish party Podemos partnered with Pollin on a renewable energy plan that they said would create jobs and make Spain more independent with energy.
Personal life[edit]

He is the son of Irene Kercheck and Abe Pollin, the former owner of the NBA's Washington Wizards and Washington Capitals.[3] Pollin was part of the family ownership team that sold the Wizards after his father's death.[9]

Books[edit]
  • Transforming the US Financial System (ed., with Gary Dymski and Gerald Epstein; 1993)
  • The Macroeconomics of Saving, Finance, and Investment (1997)
  • Globalization and Progressive Economic Policy (ed., with Dean Baker and Gerald Epstein; 1998)
  • The Living Wage: Building a Fair Economy (with Stephanie Luce; 1998)
  • Contours of Descent: US Economic Fractures and the Landscape of Global Austerity (2003)
  • Back To Full Employment (2012)
  • Greening the Global Economy (2015)[10

References[edit]

  1. ^ Devine, James G. (June 2005). Review of Social Economy Vol. 63, No. 2. Taylor & Francis. pp. 299–301.
  2. ^ Steelman, Aaron. "Breaking into the Mainstream" (PDF). Federal Reserve Bank of Richmond. Retrieved August 22, 2015.
  3. ^ Jump up to:a b Matthews, Dylan (April 24, 2013). "Inside the offbeat economics department that debunked Reinhart-Rogoff". The Washington Post. Retrieved August 22, 2015.
  4. ^ Herndon, Thomas; Ash, Michael; Pollin, Robert (April 15, 2013). "Does High Public Debt Consistently Stifle Economic Growth? A Critique of Reinhart and Rogoff" (PDF). Political Economy Research Institute, University of Massachusetts Amherst.
  5. ^ Goldstein, Steve (April 16, 2013). "The spreadsheet error in Reinhart and Rogoff's famous paper on debt sustainability". MarketWatch.
  6. ^ Konczal, Mike (April 16, 2013). "Researchers Finally Replicated Reinhart-Rogoff, and There Are Serious Problems". Roosevelt Institute.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April 18, 2013.
  7. ^ "Pollin defendió a Maduro en su polémica victoria". La Gaceta. June 22, 2015. Retrieved August 24, 2015.
  8. ^ Beeton, Dan. "Economists Call on Media to Report "Overwhelming Evidence" Regarding Venezuelan Election Results". CEPR. Retrieved August 24, 2015.
  9. ^ "Leonsis close to purchase of Wizards". ESPN. Associated Press. April 28, 2010. Retrieved October 10, 2015.
  10. ^ Robert Pollin (November 13, 2015). Greening the Global Economy. MIT Press. ISBN 978-0-262-02823-3.

2019/11/30

Amazon.com: Rethinking Japanese Feminisms eBook: Julia C. Bullock, Ayako Kano, James Welker, Elyssa Faison, Sarah Frederick, Barbara Hartley, Kathryn Hemmann, Chris McMorran, Akwi Seo, Hillary Maxson, Setsu Shigematsu, Nancy K. Stalker, J. Keith Vincent, Leslie Winston, Tomomi Yamaguchi: Books








































Rethinking Japanese Feminisms offers a broad overview of the great diversity of feminist thought and practice in Japan from the early twentieth century to the present. Drawing on methodologies and approaches from anthropology, cultural studies, gender and sexuality studies, history, literature, media studies, and sociology, each chapter presents the results of research based on some combination of original archival research, careful textual analysis, ethnographic interviews, and participant observation.

The volume is organized into sections focused on activism and activists, employment and education, literature and the arts, and boundary crossing. Some chapters shed light on ideas and practices that resonate with feminist thought but find expression through the work of writers, artists, activists, and laborers who have not typically been considered feminist; others revisit specific moments in the history of Japanese feminisms in order to complicate or challenge the dominant scholarly and popular understandings of specific activists, practices, and beliefs. The chapters are contextualized by an introduction that offers historical background on feminisms in Japan, and a forward-looking conclusion that considers what it means to rethink Japanese feminism at this historical juncture.

Building on more than four decades of scholarship on feminisms in Japanese and English, as well as decades more on women’s history, Rethinking Japanese Feminisms offers a diverse and multivocal approach to scholarship on Japanese feminisms unmatched by existing publications. Written in language accessible to students and non-experts, it will be at home in the hands of students and scholars, as well as activists and others interested in gender, sexuality, and feminist theory and activism in Japan and in Asia more broadly.



Review
With a special emphasis on the plural 'feminisms,' this interdisciplinary volume features the richness and diversity of feminist approaches deriving from literature, cultural studies, history, anthropology, and sociology., Intersections: Gender and Sexuality in Asia and the Pacific

What makes Rethinking Japanese Feminisms stand out is its sustained attention to feminisms; feminism hovers in the background of many studies of women and gender, but here it is foregrounded. . . . Three key themes from this volume stood out to me: first, a more richly textured understanding of the transwar period, one that emphasizes continuities as well as the complex landscape of the 1920s through the 1950s, an era that looks much messier and more transnational here than we normally appreciate (Bullock, Maxon, Faison, Frederick). The second concerns a much more nuanced understanding of the complicated trajectories of feminist movements―including the centrality of translation to these movements―and of more recent feminist politics and the backlash such politics have incited (Welker, Shigematsu, Seo, Vincent, Yamaguchi). The third area centers on finding women and feminism in unexpected places (Winston, Hartley, Hemmann) and the possibilities for women’s employment and sometimes financial independence in areas scholars seldom look (Stalker, McMorran). . . . Rethinking Japanese Feminisms showcases the diversity of Japanese feminisms across several axes and deserves a wide readership. The bookwill be useful in college and graduate classrooms. I hope that the volume’s complex, nuanced discussion of feminisms in Japan will make its way into more popular understandings., Journal of Japanese Studies

Bold and original, this interdisciplinary volume examines Japanese feminisms in fresh and surprising ways. Rogue writers, innkeepers, and Ikebana practitioners take their place alongside feminist heroes, educators, and activists. An excellent candidate for classroom use, this approachable, well-researched volume will no doubt incite student debate over what constitutes “feminism,” “activism,” and “Japanese feminisms.” An indispensable volume for all scholars of gender studies in Japan and beyond, Rethinking Japanese Feminisms gives us new ways to view the past and contemplate the future. -- Jan Bardsley, author of Women and Democracy in Cold War Japan

This welcome collection offers a refresher course on the canon of feminist history in Japan, melded with new material that tracks developments, debates, and detours. The book is truly interdisciplinary, with contributions from the fields of anthropology, sociology, literature, history, gender studies, and media studies from scholars in the US, Australia, Japan, and Singapore. . . . The volume’s richly expansive domain will provoke questions about how one should define feminist activity and lives. The editors took care to assure that the essays are brief and written in accessible language, making this volume ideal for use in undergraduate courses on Japan, feminisms, and gender studies., Choice

This eclectic volume offers fresh and, in some instances, alternative interpretations, insights, and perspectives on key developments and events in the evolution of feminism in Japan and the impact and accomplishments of noted activists in feminist movements over the past century. Particularly fascinating are the chapters that unveil expressions of feminism in literary and artistic works hitherto given little attention by feminist scholars or even viewed as antithetical to feminism. -- Kumiko Fujimura-Fanselow, editor of Transforming Japan: How Feminism and Diversity Are Making a Difference

About the Author
Julia C. Bullock is associate professor of Japanese literature and culture at Emory University.

Ayako Kano is professor in the Department of East Asian Languages and Civilizations, and core faculty member in Gender, Sexuality, and Women’s Studies at the University of Pennsylvania.

James Welker is associate professor in the Department of Cross-Cultural Studies at Kanagawa University in Yokohama, Japan.

Julia C. Bullock is associate professor of Japanese literature and culture at Emory University.

Sarah Frederick is associate professor at Boston University, where she teaches Japanese literature, film, and popular culture. She is also the translator of Yellow Rose by Yoshiya Nobuko.

라틴아메리카 해방신학의 아버지
[20세기 세계 기독교를 만든 사람들⑧]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 라틴아메리카·라스카사스·해방신학·민중신학

이재근 (newsnjoy@newsnjoy.or.kr)
승인 2018.11.28 13:22


라틴아메리카, 즉 중남미는 소위 기독교 대륙이다. 1492년 콜럼버스의 항해와 도착 이래,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강력하고 신속한 식민화와 가톨릭화를 추진한 결과, 이 지역은 이미 19세기가 시작되는 1800년대에 전 인구의 92.0%가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는 당시 기독교인 비율이 가장 높았던 유럽 대륙의 91.8%를 뛰어넘는 기록으로, 이미 그 시기에 세계 최대의 기독교 인구 대륙이 되었음을 뜻했다. 이 비율은 점차 높아져서,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08년이 되면, 중남미 기독교 인구는 95%가 된다. 같은 해 유럽 기독교인의 비율이 76.7%로 떨어지고, 북미도 인구 대비 기독교인의 비율이 66.4%밖에 되지 않는 상황, 또한 새로운 기독교 대륙으로 최근 각광받는 아프리카도 사하라 이북 무슬림 인구 비율 때문에 대륙 전체의 기독교인 비율이 47.7%에 지나지 않는 현실을 감안하면, 지난 200년 이상 독보적으로 90%가 넘는 기독교인 비율을 유지해 온 대륙은 오직 라틴아메리카뿐이다.1) 즉, 지난 500년간의 가톨릭 확장과 지배, 그리고 지난 100여 년간의 개신교 전파와 확산으로 라틴아메리카는 21세기 세계 기독교를 주도하는 대표적인 기독교 대륙이 되었다.


그러나 단순히 기독교인이 많다는 것과, 그 대륙 안에 사는 기독교인이 믿고 있는 신앙 및 살아가고 있는 현실, 경험, 상황이 기독교적인가 하는 문제는 전혀 별개다. 페루 출신 가톨릭 신학자 구스타보 구티에레스2)(Gustavo Gutiérrez, OP3), 1928~)는 바로 라틴아메리카의 정치 및 사회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경험과 그들의 해방을 위한 투쟁을 기독교 신학과 신앙의 준거점으로 삼는" 새로운 신학 운동을 창시한 인물 중 한 사람이다. 주로 '해방신학'(liberation theology)이라 불리는 이 신학 운동은 대표자와 창시자가 여럿이므로 기원을 단 한 사람에게로 소급할 수 없다. 그러나 구티에레스는 1971년에 이 운동의 교과서로 인식되는 책 <해방신학 Teología de la liberación: Perspectivas>(Lima: CEP, 1971)을 저술한 이래로, 여러 의미로 "해방신학의 아버지"로 불렸다. 따라서 구티에레스의 삶의 궤적을 훑기 위해서는 그의 삶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 라틴아메리카 해방신학의 탄생과 발전, 논란 등을 함께 다루어야만 한다. 그의 삶을 지배한 세 핵심 단어는 △라틴아메리카 △라스카사스 △해방신학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과의 관계에 관심을 갖는 한국인 독자를 염두에 둔다면, 여기에 △민중신학을 하나 더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해방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가톨릭 신학자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사진 출처 노터데임대학교






1. 라틴아메리카




1928년생으로 학자로서 여전히 활동 중인 구스타보 구티에레스는 페루 출신 가톨릭 철학자이자 신학자로, 해방신학의 창립자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구티에레스는 남아메리카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1928년 6월 8일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모는 백인과 원주민 사이에서 태어난 이들의 후손인 메스티소였는데, 원주민 중 케추아 부족 혈통이었다. 구티에레스는 열두 살부터 골수염을 앓아서, 자주 침대에 누워 지내야 했다. 따라서 12살부터 18살까진 휠체어를 사용하는 날이 많았고, 이후에도 한쪽 다리를 저는 장애를 평생 유지했다. 원래 구티에레스는 정신과 의사가 되기 위해 1947년에 페루 산마르코스국립대 의대에 들어갔으나, 학교에서 정치 동아리에 참석하면서 라틴아메리카 정치 현실에 눈을 떴다. 의학보다 철학과 신학에 더 관심이 많았기에, 곧 신학으로 진로를 바꾸어 사제 과정을 공부하기 위해 리마 가톨릭신학교와 칠레 산티아고신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유럽으로 유학을 떠나 벨기에 루뱅가톨릭대학(1951~1955)에서 철학과 심리학을, 이어서 프랑스 리옹대학(1955~1959)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1959년에 사제로 안수받은 후, 1년간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에서 수학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그는 앙리 드 뤼박(Henri de Lubac), 이브 콩가(Yves Congar), 마리-도미니크 세뉘(Marie-Dominique Chenu), 크리스티앙 뒤코크(Christian Ducoq) 등, 당대의 저명하고 개혁 지향적인 가톨릭 학자들에게서 신학을 배웠다. 또한 이들로부터 도미니코회, 그리고 예수회 사상을 배웠고, 에드바르트 스힐러벡스(Edward Schillebeeckx), 카를 라너, 한스 큉, 요한 밥티스트 메츠 같은, 가톨릭 전통 신학의 경계를 넘어서는 사상을 전개한 혁신적 대가들의 작품에 영향을 받았다. 그가 유학하던 시절의 유럽 교회는 당대 세상에 문을 열고 대화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시기였으므로, 이 분위기도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카를 바르트 같은 개신교 신학자나 프랑수아 페로(François Perroux) 같은 사회과학자에게도 영향을 받았다. 특히 콩가, 세뉘, 스힐러벡스 등이 모두 도미니코수도회 소속이었던 데다가, 그의 해방신학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쳐 그가 전기를 쓰기도 한 16세기 선교 수도사 라스카사스(Bartolome de Las Casas, 1484~1566)의 소속 수도회였던 점 덕에, 구티에레스 역시 1998년 도미니코회에 가입했다.

1960년에 귀국한 구티에레스는 리마 교황청 가톨릭대학(Pontifical Catholic University of Peru)에서 신학과 사회과학을 가르치는 동시에, 리마 빈민 구역인 리막(Rimac)에서 사목 활동을 하면서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에 눈을 떴다. 이 시기에 체 게바라나 카미요 토레스 같은 혁명가들과도 교제했다. 이후 그는 현실을 반영한 학문의 틀을 짜기 시작했다. 이 현실, 상황, 경험이 바로 해방신학의 근거와 기초, 추진력이었다. 특히 1974년에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라스카사스연구소(Instituto Bartolomé de las Casas)를 설립했다. 이후 북미와 유럽의 여러 대학에서 방문교수로 활동했다. 현재는 미국 인디애나주 소재 성십자회 대학인 노터데임대학에서 존 오하라 추기경 석좌교수직을 맡고 있다. 1993년에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la Légion d’honneur)을 받는 등, 여러 국가와 기관에서 권위 있는 상을 많이 받았다.4)



2016년 9월 27일 도미니칸대학교에서 열린 심포지엄. 단상에서 발언하는 구티에레스. 사진 출처 플리커




구티에레스가 눈뜬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은 이 대륙의 비극적인 역사에서 비롯되었다. 유럽인 도착 이전 라틴아메리카에는 그들만의 고유한 문화를 가진 여러 다양한 종족들이 살고 있었다. 특히 이 지역에는 정치조직, 종교 문화, 경제활동 등에서 상당한 고유성과 탁월성을 지닌 아즈텍, 잉카, 마야문명 같은 고도로 발전된 국가조직도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대항해시대가 시작된 후 1492년에 콜럼버스가 도착하면서, 이 지역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이라는 유럽 해양 제국에 정복되어 착취·추방·학살당하는 운명으로 전락했다. 정치와 종교 간 구별이 분명치 않은 기독교 세계(Christendom)가 지배하던 시기였기에, 두 제국이 보낸 함선 대부분에는 군인과 선원, 관리, 상인과 함께 가톨릭 선교사들이 타고 있었다. 따라서 군인이 군사적으로 정복한 곳에, 관리의 정치적 통치가 뒤따랐고, 이어서 상인들에 의한 경제적 착취와 함께, 사제들의 '강제' 개종 활동이 뒤따랐다. 그러나 이 모두는 한데 뒤섞여 있었기에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으며, 라틴아메리카 원주민 및 대륙의 생태 자체를 전복하는 총체적 변혁을 가져왔다.

라틴아메리카에 도착한 유럽인의 군대는 숫자는 미미했으나, 발전된 무기, 특히 근대식 대포, 중무장한 기사, 군용견 등을 동원하여 활과 창, 독침, 주술 등을 사용한 원주민을 쉽사리 정복했다. 그러나 원주민의 패배와 멸절에 특히 기여한 것은 생화학 무기였다. 즉, 실제 생화학 무기를 유럽인이 의도적으로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몸에 지니고 온 세균과 바이러스가 오히려 치명적인 무기가 되었다. 이미 유럽에서 홍역을 앓고 나서 면역력을 지닌 유럽인과는 달리, 홍역은 이 병에 한 번도 노출되어 본 적이 없는 원주민의 몰살을 불러왔다. 이외에도 돼지인플루엔자, 천연두, 결핵, 디프테리아, 독감, 페스트 등이 사람과 가축에 엄청난 피해를 끼쳤다. 통계가 저마다 달라 정확히 알기는 어렵지만,5) 유럽인이 라틴아메리카에 도착한 후 채 100년이 되기도 전에, 원주민 전 인구의 약 절반 이상이 질병·전투·학살 등으로 사망했다. 따라서 이 시기 라틴아메리카에서 원주민이 당한 경험은 역사상 최대의 대학살(genocide)이라 칭할 만하다.

또한 금, 은, 설탕, 커피, 면화, 담배에 대한 욕망으로 수많은 광산이 개발되고, 거대 플랜테이션 농장들이 들어서면서, 원주민과 아프리카 흑인의 노예화도 가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부에 부를 쌓는 식민지 귀족 계층이 탄생했다. 19세기에 라틴아메리카 여러 식민지들이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대항하여 독립 투쟁을 전개하면서, 오늘날 지도에 그려진 라틴아메리카의 독립국들이 탄생했다. 그러나 이들 신생 독립국들의 진정한 독립은 예나 지금이나 쉽지 않았다. 유럽에 대한 종속에서 해방된 이들은 20세기 이후 미국의 경제원조를 받으면서, 점차 미국에 종속되기 시작했다.

특히 1950년대 이후 산업화 시대에 미국의 정치적·군사적·경제적 지원에 의존하고, 이전 시대 식민지 귀족층의 후예라 할 만한 부패한 권력층이 국가가 소유한 부를 거의 독점하면서, 실제 민중의 극단적 가난, 양극화, 뇌물과 부패, 결탁 등으로 인한 부패, 군사독재 정부와 종교계, 폭력 조직과의 결탁, 인구의 도시 집중과 슬럼화, 일상적 살인과 폭력 등이 난무하는 세상이 되었다. 구티에레스와 해방신학이 등장하기도 전에 하버드대 역사가 아서 슐레진저(Arthur Schlesinger, 1888~1965)는 "지금 이곳 라틴아메리카 인구수는 미국보다 1/8이 더 많다. 그러나 미국 국민총생산의 1/8 수준에도 못 미치는 생활을 하고 있다. 국민의 5%가 국가 총수입의 1/3을 차지하는 반면, 70%는 극빈 생활을 하고 있다. 이들 배후에 있는 정부들은 이와 같은 체제를 계속 유지하지 위해 정치적·사회적 구조들을 조직화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었다.6) 이것이 20세기 중반 이후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이었다.



2013년 당시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브리태니커백과사전 홈페이지 갈무리






2. 라스카사스




라틴아메리카 비극적 현실의 또 다른 측면은 정치적·경제적 부패와 인종차별, 학살의 역사가 종교, 특히 가톨릭의 전파 및 지배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지리상의 대발견' 이후 두 나라, 특히 스페인의 신대륙 종교 정책은 중세 시대에 확립된 방식을 그대로 따랐다. 스페인 영토 내에서 무슬림 무어인(Moor)7)을 몰아내는 일종의 십자군 운동인 레콩키스타(재정복, Reconquista)를 1492년에 완수한 스페인 가톨릭 신자들은 그들이 스페인에서 사용했던 공격적이고 호전적인 교화 방법을 신대륙 원주민에게도 그대로 적용했다. 스페인 내에서 카나리아제도와 그라나다를 스페인 기독교인이 무슬림에게서 탈환했을 때 교황은 이들이 정복한 지역의 교회를 총괄할 수 있는 권한을 왕실에 하사했다. 이를 국왕의 교회 보호권(patronate real)이라 한다. 그런데 이것이 신대륙에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이로써 왕이 신대륙의 주교와 고위 성직자를 임명하고 재정을 독립적으로 관리하게 되어, 식민지 교회는 스페인 국가(민족)교회가 되었다. 따라서 스페인 국가의 이익과 교회의 이익이 하나로 통합되었고, 이 과정에서 스페인군과 민간인이 자행하는 현지인과 환경에 대한 착취·파괴·말살 등의 악행도 국가의 이익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곤 했다.8)

1492년 이래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시행한 제국주의적이고 식민주의적인 착취형 선교에는 이면도 있었다. 성경에 기반하고, 선교사의 모델인 사도 바울이 구현한 참선교를 실천하기 위해, 피선교지 사람들과 같은 수준으로 가난하고 단순하게 살면서 동일시(identification)의 모범을 이루려 노력한 프란치스코회, 도미니코회, 예수회 수도사들의 헌신도 있었다. 이들 중 많은 이가 원주민의 눈으로 식민지 정책을 판단하면서, 유럽 정착민의 원주민 착취에 대항하여 원주민 권리를 옹호하는 입장에 섰다. 영화 '미션'에 나오는 예수회 신부 가브리엘이 보여 준 것이 바로 이런 이들의 선교 전형이었다.

특히 18세기에 유럽에서 예수회가 스페인과 다른 나라 지도자들에게서, 후에는 결국 교황에게까지 핍박을 받고 한때 해산되는 고초를 당한 여러 이유 중 하나는 이들이 원주민 권리를 격렬할 정도로 옹호했기 때문이었다. 즉, 중남미 가톨릭 선교 패러다임에는 이런 극적인 대칭 구조가 있었다. 상부에는 지배 계층, 교구 주교나 재속 성직자, 스페인 정착민의 이익을 위해 일한 일부 수도자가 있었고, 하부에는 이를 비판하고 스스로 멸시의 대상이 되어 원주민과 함께 길을 걸어간 진실한 선교사가 있었다. 이런 교회의 양면성은 오늘날까지 중남미 가톨릭교회의 특징으로 이어졌다.



영화 '미션'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 원주민들 사이에서 오보에를 부는 가브리엘 신부. 영화 '미션' 스틸컷




스페인령 중남미 선교 역사에서 수많은 인물이 등장하지만 이들 중 특히 언급해야 할 가장 중요한 선교사로, 바르톨로메 데 라스카사스(Bartoleme de las Casas, c.1484~1566)라는 인물이 있었다. 라스카사스는 원래 1501년부터 오늘날의 도미니카공화국에 해당하는 산토도밍고에 정착하여 사목하는 사제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초기에 그는 원주민 착취에 대해 별 의식이나 양심의 가책이 없었다. 그런데 1511년에 도미니코회 수도사 안토니오 데 몬테시노스(Antonio de Montesinos, c.1475~1545)가 산토도밍고에서 행한 설교를 들고 번민하다가 1514년에 일종의 마음의 회심을 경험했다. 몬테시노스는 스페인 정착민들이 그들의 악행 때문에 무어인이나 터키인처럼 구원받을 수 없다고 설교했다. 그러자 그를 지지한 동료 도미니코회 수도사들과 지방 관리 사이에 심각한 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원래 라스카사스는 원주민 보호를 조건으로 왕에게서 위탁받은 토지와 사람 사용권 '엔코미엔다'(encomienda)를 활용하여 반노예나 마찬가지인 원주민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 제도하에서 원주민 보호는 허울 좋은 구호에 지나지 않았다. 이 권리는 원주민 보호가 아니라 원주민을 착취하여 자신의 이익을 노리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라스카사스는 1514년 오순절에 자기 소유의 엔코미엔다를 포기하고 기독교 신앙은 원주민 착취와 공존할 수 없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이후 몬테시노스의 활동에 합류한 그는 스페인으로 수차례 건너가 이 제도의 악행을 고발하고 조치를 탄원했다. 그러나 어렵게 스페인 본국에서 엔코미엔다를 교정하려 시도해도, 식민지 현지 백인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일이 반복되었다. 이후 라스카사스는 중앙아메리카, 멕시코 등지에서 비슷한 원주민 인권 활동을 벌이다 남부 멕시코 치아파스의 주교로 임명된 후에도 개혁 활동을 계속 이어 갔다. 그러나 결국 엔코미엔다를 소유한 정착민들과의 갈등을 이겨 내지 못하고, 스페인으로 돌아가서 남은 39년 생애 동안 글과 연설을 통해 제도 개선을 시도하다가 1566년에 92세로 사망했다. 불행히도 라스카사스의 책은 1552년에 페루에서 금서로 지정되었고, 17세기 중반에는 그가 쓴 여러 책이 종교재판소가 규정한 금서 목록에 포함되는 비극을 겪었다.9)

이미 언급했듯, 구티에레스는 1960년에 귀국한 후 교수와 사목 생활을 병행하면서 1974년에 라스카사스연구소를 설립했다. 이어서 1992년에는 <라스카사스: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서 En busca de los pobres de Jesucristo: El pensamiento de Bartolomé de las Casas>(Lima: CEP, 1992)라는 전기를 출간했다. 구티에레스가 라스카사스를 자신이 지향한 해방신학의 정신을 구현한 모델임을 분명히 한 것이었다.



3. 해방신학




라틴아메리카가 처한 구체적 역사적 현실, 그리고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적 모델로서의 라스카사스와 함께, 해방신학 탄생에 기여한 주요 요소들은 가톨릭교회에서 열린 두 차례 회의였다. 하나는 전 세계 가톨릭 전체를 대변하는 모임으로, 교황 요한 23세의 주도로 1962년부터 1965년까지 열린 제2차 바티칸공의회(Vatican II), 다른 하나는 1968년에 콜롬비아 메데인(Medellin)에서 열린 제2차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CELAM II)였다. 두 회의와 이들이 발행한 문서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고 성경이 말하는 정의와 평화를 이루기 위해 사회구조의 변혁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당위를 부여하여 해방신학의 탄생에 산파 역할을 했다. 전자가 주로 일반론적인 측면에서 교회가 쇄신하고 세상에 적응해야 한다는 선언적 명제를 기술하면서 문을 열었다면, 후자는 더 구체적인 라틴아메리카의 현실과 그 쇄신 방향을 구체적으로 서술했기에 해방신학의 진정한 시원으로 간주된다.10)

광주 가톨릭대 김정용 교수는 CELAM II(간단히 '메데인'이라 쓰기도 한다)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메데인 회의는 라틴아메리카 대륙이 전면적인 해방, 온갖 예속으로부터의 해방, 인격적 성숙, 집단적 통합을 바라는 열망으로 가득 찬 새로운 역사적 시점에 들어 서 있다고 진단하면서(메데인 문헌: 서문 4항) 남미의 상황을 '제도화된 폭력이라고 부를 불의의 상황'(메데인 문헌: 평화, 16항)으로 규정한다. 특히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인 불평등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주님이 주시는 평화의 선물을 거부한다. 그런 곳에서는 주님 자신조차도 거부된다"(메데인 문헌: 평화, 14항)고 천명하였다. 아울러 메데인 회의는 인간을 온갖 노예 상태에서 해방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의 빛 속에서(메데인 문헌: 정의, 3-5항 참조)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과 연대(메데인 문헌: 교회의 가난, 9-11항 참조)를 강조하고 교회의 현실 참여에 새로운 계기를 마련했다."11)

해방신학의 주창자는 여럿이다. 그중 페루의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브라질의 레오나르두 보프, 휴고 아스만, 멕시코의 호세 미란다, 우루과이의 후안 루이스 세군도, 스페인 출신으로 엘살바도르에서 활동한 혼 소브리도 등이 유명하다. 해방신학이 가톨릭 배경에서 출현했기 때문에, 대부분 가톨릭이지만 예외도 있다. 아르헨티나 출신 호세 미구에스 보니노는 개신교 중에서도 감리교 소속이었다. 미국 퍼시픽종교학대학원에서 오래 가르친 로버트 매카피 브라운은 라틴아메리카 배경은 아니지만, 미국에서 이 신학을 가장 든든하게 옹호한 주창자 중 하나였다. 이렇게 주창자들 배경이 다양하기 때문에, 주장하는 내용도 조금씩 다르다.12) 그러나 대체로 공유되는 특징은 다음과 같다.13)



도미니칸대학교에서 강연하고 있는 구티에레스. 사진 출처 플리커




1) 신학은 반드시 상황적이어야 한다. 전통적인 유럽신학은 교회의 학문이자, 교리 체계를 형성하기 위한 학문이자, '위로부터의'(from above) 학문이다. 소위 이런 보편적, 절대주의, 이론신학은 라틴아메리카의 사회적 상황에 부적합하다. 이와는 달리, 상황신학은 언제나 특정하고 구체적인 사회 문화적 환경에 깊이 연관을 맺어야 하고, 거기서 출발해야 하므로, 라틴아메리카에서 시작된 해방신학은 그 대륙의 현실과 경험을 반드시 취급해야만 한다.

2) 라틴아메리카가 처한 구체적인 삶의 정황은 극단적인 빈곤과 양극화다. 다른 모든 대륙에도 빈곤은 있다. 그러나 라틴아메리카의 가난은 북미나 유럽과는 달리, 외적 요인으로 부과된 빈곤이다. 즉, 이 가난은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거주민 대다수의 인간성을 말살하고 희생해 가면서까지 소수에게 권력과 부를 몰아주는 사회구조가 만들어 낸 결과다. 특히 유럽과 북미 국가들과 일부 다국적 기업이 라틴아메리카 각국 정부와 결탁하여 만들어 낸 '종속' 경제가 이런 고통을 극대화한다. 또한 이런 사회구조는 정부와 일부 재벌 기업만의 책임이 아니다.

이 대륙 국가 모두에서 국교이거나 주요 세력인 가톨릭교회는 체제의 질서를 지지해 왔고, 또 앞으로도 계속 그럴 교회이므로, 교회는 사회정치 문제에서 중립적이라는 스스로의 주장과는 달리, 언제나 압제자를 편들었다. 따라서 국제 자본주의와 세계화에 함몰된 정부와 기업과 교회가 이 비참한 현실의 원인제공자이자 결탁자다.

3) 하나님은 가난한 이들을 편애하시며, 우선 선택하신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보편적으로, 예외 없이, 우주적으로, 차별 없이 사랑하신다는 것이 전통적이고 역사적인 기독교 신학의 가르침이었다. 창세 이전에 창조주의 뜻에 따라 상황이나 조건과 관계없이 구원받기로 선택된 이들이 있다는 구원 예정론을 가르치는 전통이 있기는 했으나, 이들도 하나님의 사랑이 편파적이거나 조건적이라고 가르치지는 않았다. 그러나 해방신학은 하나님의 사랑에 조건이 있고, 하나님은 편파적으로 편애하는 분이라고 가르친다.

하나님의 편파적인 사랑은 가난한 자들을 향한다. 그러나 가난한 자들이 도덕이나 행위에서 다른 이들보다 낫다는 것이 조건은 아니다. 구티에레스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가난한 자들이 선취권을 갖는 것이 마땅한 것은 그들이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다른 이들보다 더 낫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에 '나중 된 자가 먼저 된 자'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진술은 우리가 생각하는 좁은 의미의 정의에 대한 이해와 상충한다. 그러므로 바로 이런 선호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길과 다르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14) 1968년의 메데인 회의를 재평가하기 위해 멕시코 푸에블라에서 1979년에 모인 제3차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CELAM III)는 이 명제를 더욱 확고하게 지지했다.


"생명을 살리는 성령의 힘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명백하고 예언자적인, 우선적이고 연대적인 선택을 나타낸 제2차 주교회의의 생각을 다시 수용한다. (중략)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의 포괄적 해방을 직시하면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해야 할 전체 교회의 회개의 필요성을 확증한다. (중략)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을 동반하고 섬기기 위해 그들에게 가까이 갈 때, 우리는 우리처럼 가난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형제가 됨으로써 우리에게 가르친 바를 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봉사는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일에 유일한 요소는 아니지만 우선적 요소이다. (중략) 가난한 사람들과 억압당하는 사람들을 위한 개입과 바닥 공동체의 생성은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 속에 있는 복음화의 잠재력을 발견하도록 도와주었다. 이들은 교회의 회개를 외침으로써 항상 교회를 질문의 대상으로 세우기 때문이다."15)

4) 신학은 프락시스(praxis, 실천)에 대한 성찰에 따르는 이차적 행위다. 다른 말로, 해방신학은 바른 이론, 즉 정통 교리(orthodox)를 추구하지 않고, 바른 실천, 즉 정통 실천(orthopraxis)를 추구한다. 이 정통 실천이 신학의 기준이다. 따라서 가난한 이들의 해방을 위한 바른 실천과 헌신에서 신학이 시작해야 한다. 이는 전통 신학의 순서, 즉 바른 이론에서 바른 실천이 나온다는 고전신학의 방법론을 완전히 뒤집는 코페르니쿠스적 혁명과도 같다.

5) 구원은 곧 해방이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생명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이다. 생명의 하나님은 자신이 사랑하시는 이들에게도 생명을 주시고자 한다. 그런데 사랑하시는 이들이 고난과 압제 중에 있으므로, 결국 사랑이신 생명의 하나님은 해방하시는 하나님이다. 이런 해방신학의 주장이 완전히 독창적인 것은 아니다. 구티에레스가 유럽에서 공부할 때 배운 요한 밥티스트 메츠 등 유럽 정치신학자들의 주장이 해방신학의 방법론에 차용되었다.

또한 해방신학은 기독교적 실천을 보조하는 이론적 토대로 마르크스주의도 주저 없이 차용한다. 특히 라틴아메리카가 처한 특수 현실을 이해하고 이를 해결하는 토대로 마르크스주의 사회 분석을 활용했다. 자본주의에 반대한 이들은 사회주의 자체가 하나님나라는 아닐지라도, 이 체제가 현실 사회에서는 가장 이상적인 경제체제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마르크스주의를 활용하는 것과, 초대교회 당시 교부들이 기독교를 변증하기 위해 플라톤 등의 그리스 철학자를 활용하고, 중세 스콜라주의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를 이용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믿었다.

따라서 구원은 천국을 보장받는 행위가 아니라, 육적이고 사회적인 억압으로부터의 자유, 사회변혁, 이웃을 위한 삶으로의 회심을 포괄하는 총체적 해방이다. 그렇다면 이런 총체적인 해방과 정의를 위한 노력에 폭력도 수단이 될 수 있는가. 구티에레스와 보니노 등 대표 해방신학자들은 폭력을 이상화하지도, 우선 수단으로 제시하지도 않는다. 무장투쟁보다는 비폭력 저항을 더 선호한다. 그러나 최후의 수단으로 폭력이 사용되어야 하는 불가피한 경우가 있다면, 이를 피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특히 해방신학이 탄생하기 전에, 원래 신부이자 콜롬비아국립대 교수였다가 교수직을 포기하고 무산계급을 위한 게릴라 혁명전에 참여하여 영웅이 된 콜롬비아인 카미요 토레스(Camilo Torres Restrepo, 1929~1966)16)가 이런 인식의 선구자였다.



구티에레스가 2013년 페루 리마 교황청 가톨릭대학에서 세계은행그룹 김용 총재와 대화하고 있다. 사진 출처 플리커




구티에레스를 비롯한 해방신학자들의 이런 주장은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해방신학의 주장을 독특한 기여로 인정한 이들도 있었고, 가혹하게 비판한 이들도 있었다. 기여로 인식될 만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17) 첫째, 신자와 그들이 처한 현실의 구체성에 대한 관심이 없는 신학은 불완전하다. 둘째, 가난하고 고통받는 자들에 대한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의 관심을 상기하여, 교회가 이 문제에 다시 천착하게 했다. 셋째, 구원이 영적이거나 교회적인 것만이 아니라, 영육, 지정의를 포괄하는 전인적인 것이며, 교회와 사회를 포괄하는 총체적인 해방임을 깨닫게 해 주었다. 넷째, 신학이 단순히 바른 이론으로만 존재해서는 안 되며, 삶의 구체적이고 어두운 현실을 바꾸는 바른 실천을 동반해야 한다.

그러나 이 신학은 다음과 같은 비판18)도 받았다. 첫째, 우선 가톨릭교회에서 내린 공식 비판이 있었다. 1984년 9월에 바티칸 신앙교리성에서는 '자유의 전갈: 해방신학의 일부 측면에 대한 훈령'19)이라는 제목의 문서에서 "해방신학은 예언서와 복음서에 의존해서 빈자를 옹호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성서 속의 가난한 자와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를 혼동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의 재난이다"라고 비판했다. 이 문서는 당시 교리성 수장이던 보수주의자 요제프 라칭어(Joseph Razinger)가 작성한 것으로, 라칭어는 2005년부터 2013년까지 교황 베네딕토 16세로 재직하게 되는 인물이다. 이듬해에는 브라질 해방신학자 보프에게 1년간 함구령을 내리기도 했다. 구티에레스에 대한 조사도 있었지만, 그에게는 함구령을 내리거나 정죄를 하지는 않았다. 1986년 4월에 나온 두 번째 교시 '자유의 자각: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해방에 관한 훈령'20)에서는 해방신학의 일부 요소에 대해 이전에 했던 비판을 반복하기는 했다, 예컨대, 가난한 사람들이 곧 메시야적 하나님 백성으로 환원되고, 하나님의 구원이 마르크스주의적 계급투쟁을 통한 인간의 자기 구원으로 환원되고, 하나님나라는 계급투쟁의 성공을 이룬 공산사회가 되며, 신앙은 역사에 대한 신실함으로 대체된다. 2년 전 교시보다는 발언 강도가 유화적이고 온건하기는 했지만, 해방신학의 내재주의 성향을 비판한 것은 같았다.21)

둘째, 다른 보수주의 진영, 혹은 개신교의 비판도 신앙교리성의 판단과 맥이 크게 다르지 않다. 즉, 해방신학이 당연시하는 이원론적 이분법 구도가 과연 늘 타당한가 하는 점이다. 라틴아메리카 사람은 모두 빈자와 부자로 선명하게 구별되는가? 라틴아메리카의 빈곤의 원인이 전적으로 북반구 정부와 기업의 착취에서만 온 것인가? 외부인이 모든 죄를 덮어쓰고, 내부자인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경제정책 실패, 라틴아메리카인의 관습과 삶에 대한 태도 등에서 비롯된 것은 없는가?

셋째, 라칭어의 비판과 유사하게, 많은 비판자들은 해방신학이 마르크스주의 담론에 너무 지나치게 의존한다고 판단한다. 마르크스주의의 무신론적 세계관과 인간관이 기독교 세계관의 인간에 대한 인식, 예컨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피조물로서의 인간의 가치 대신에, 물질과 환경으로 결정되는 인간관을 주창한다는 비판이다. 마지막으로, 해방신학이 주장하는 바른 실천, 즉 프락시스의 타당성에 대한 물음이다. 예컨대, 해방신학에 동정적인 영국 선교학자 앤드루 커크 또한 바른 실천(orthopraxis)의 우선성이 타당한지 질문한다. 즉, 바른 실천이라는 용어가 성립하려면, 어떤 실천이 바른지에 대한 이론적 성찰이 전제되어야 할 텐데, 바른 실천 다음에야 바른 이론이 따라 나온다면 바른 실천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 수 있냐는 것이다. 결국 커크는 이론적 근거, 즉 기독교인의 지침으로서의 성경 계시에 대한 확고한 해석학적 지침이 전제되지 않는 바른 실천은 모호하다고 비판한다.22)



4. 민중신학




구티에레스와 그 동료들의 해방신학에 한국교회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역시, 우선 한국천주교의 공식 반응부터 살펴보자. 한국천주교주교회는 1984년 10월에 '해방신학 경계 성명서'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해방신학'이라는 이름에 편승하는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을 경계하여야 한다. 성서와 교의를 순전히 정치적으로 해석하고,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과 마르크스의 무산자들을 혼동하며, 폭력적인 계급투쟁으로써 진정한 개혁을 지체시키는 것은 교회의 정통 신앙에서 일탈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만 정신적인 파멸 위에 새로운 빈곤과 예속을 가져올 뿐이다"라며 해방신학을 비판했다.23) 그런데 이 내용은 사실상 같은 해에 발표된 교황청 교리성 문서와 차이가 거의 없다. 말하자면, 해방신학에 대한 당시 한국천주교 내부 입장은 교황청의 공식 입장에 순명하는 것이었다.24)

따라서 같은 이유로, 보수적인 입장에 서 있던 천주교인은 1970년대 말부터 활동하던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등, 민주화와 인권 투쟁에 앞장 선 사제들을 해방신학에 오염된 이들도 정죄하기도 했다. 그러나 해방신학에 우호적인 라틴아메리카 출신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 시보리(Jorge Mario Bergoglio Sívori) 추기경이 2013년부터 프란치스코 교황으로 즉위하면서, 해방신학에 대한 긍정적인 관심이 되살아났다. 1984년 성명서와 같은 부정적인 평가가 더 이상 한국천주교회의 대세는 아님을 뜻한다.25)



2014년 바티칸에서 프란치스코 교종과 만나 악수하는 구티에레스. 바티칸뉴스 갈무리




개신교에서는 주로 진보를 대변하는 기독교장로회의 민중신학이 해방신학으로부터 일정한 영향을 받았다. 한국만의 독특한 정치문화, 신앙 환경에서 태동한 민중신학이 라틴아메리카 배경에서 탄생한 해방신학과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다. 따라서 민중신학을 한국판 해방신학이라 부르는 것은 타당치 않다. 그럼에도 둘 사이에는 유사점이 많으며, 1960~1970년대 상황화신학의 세계적인 확장 및 유통 과정과 맞닿아 있다.

실제로, 한국 민중신학은 1975년 4월호 <기독교사상>에 서남동이 '민중의 신학에 관하여'를 기고하면서 독립된 신학 담론으로 등장했다. 서남동은 "대국적으로 보아 내 신학의 변화는 서구 신학의 흐름을 따른 셈입니다. (중략) 그러다가 우리 현실의 문제에 눈을 뜨게 되면서 해방신학에 종사하게 되었고, 그 과제를 한국적 상황에서 문제시하여 이제는 '민중신학'에 관여하게 되었습니다"라며, 스스로 해방신학이 한국적 상황을 문제시하는 민중신학의 기원이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는 민중의 개념이 해방신학의 프롤레타리아보다 한층 더 포괄적이라고 주장한다. 즉, 단순히 무산 노동자 계층만이 아니라, 노동자, 농민을 포함한 모든 서민 대중이 민중(ochlos)이라는 것이다.26)

그러나 유럽에서 더 이른 시기부터 등장한 정치신학의 영향하에, 1960~1970년대 라틴아메리카와 한국이라는 특수한 상황, 현실, 경험에서 등장한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은 세계의 신학의 일부로서 상호 공명하는 신학적 대화와 실천적 연대의 파트너였다. 해방신학은 또한 흑인신학, 여성신학, 아시아신학, 생태신학 등 이후에 등장하는 다양한 급진 신학의 모판이자 수원이기도 했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스는 급진적 바른 실천(orthopraxis)을 요청하는 이런 종류의 다양한 전 세계 상황신학을 대변하는 선구적 대표자였다.












1) 마크 A. 놀, 『복음주의와 세계 기독교의 형성』, 박세혁 역, 이재근 해설 (서울: IVP, 2015), 31.
2) 한국에서 대개 '구티에레즈'로 표기하거나 발음하지만, 스페인어에서 z는 영어의 s, 혹은 한글의 ㅅ에 해당하는 발음이므로, 여기서는 '구티에레스'로 쓴다. 국립국어원의 다음 표기 일람표를 보라. http://www.korean.go.kr/front/page/pageView.do?page_id=P000106&mn_id=97.
3) Ordo Praedicatorum 혹은 Order of Preachers(설교자회)의 약자로, 도미니코수도회를 뜻한다. 구티에레스는 1998년에 도미니코회에 입회했다.
4) 김정용,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37> 구스타보 구티에레스(상) '가난한 이들' 의 관점에서 시작된 '해방신학', 문을 열다," 「가톨릭평화신문」 (2014.3.16.). http://www.cpbc.co.kr/CMS/newspaper/view_body.php?cid=500207&path=201403.
5) 추산치는 너무도 다양해서, 아메리카 대륙 전체에 850만에서 1억까지 범위가 상당히 넓다. 그러나 대체로 학자들은 5000만 명에서 1억 명 사이로 잡는다. 주경철, 『대항해시대: 해상 팽창과 근대 세계의 형성』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08), 399. 이 책 전체가 대항해시대 서유럽 제국의 해상 팽창 과정에서 구세계와 신세계가 어떤 상호 영향을 주고받았는지를 다룬다. 특히 환경, 기독교, 문화의 세계화 과정을 다루는 3부(361-539)를 보라.
6) 김균진, 『현대 신학 사상: 20세기 현대 신학자들의 삶과 사상』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4), 613-618.
7) 8세기경 스페인이 속한 이베리아반도를 정복한 무슬림을 부르는 막연한 호칭으로, 원래는 모로코·모리타니아·알제리·튀니지 등의 베르베르인과 여러 원주민 부족을 지칭하는 표현이었다.
8)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라틴아메리카에 식민지 기독교를 건설하는 과정에 대해서는 후스토 L. 곤잘레스, 『중세교회사(개정증보판)』, 엄성옥 역 (서울: 은성, 2012), 285-349를 보라. 쿠바 출신인 곤잘레스는 자신이 속한 세계의 역사를 서양 교회사와 엮어서 상당히 균형 있게 다룬다.
9) 곤잘레스, 『중세교회사(개정증보판)』, 291-294.
10) 스탠리 그렌츠, 로저 올슨, 『20세기 신학』, 신재구 역 (서울: IVP, 1997), 340f.
11) 김정용,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37> 구스타보 구티에레스(상)." http://www.cpbc.co.kr/CMS/newspaper/view_body.php?cid=500207&path=201403.
12) 그렌츠, 올슨, 『20세기 신학』, 344.
13) G. 구티아레즈, 『해방신학(I): 원론편』, 편집부 역 (서울: 한밭출판사, 1984); 그렌츠, 올슨, 346-359; 김균진, 621-641; 김정용,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38>구스타보 구티에레스(중)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인간 해방 위해 투신하도록 초대," 「가톨릭평화신문」 (2014.3.23.). http://www.cpbc.co.kr/CMS/newspaper/view_body.php?cid=501227&path=201403; 김정용, "[21세기를 빛낸 신학자들]<39>구스타보 구티에레스(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은 교회 사명," 「가톨릭평화신문」 (2014.3.30.). http://www.cpbc.co.kr/CMS/newspaper/view_body.php?cid=502292&path=201403.
14) Gustavo Gutiérrez, A Theology of Liberation: History, Politics, and Salvation, 15th anniversary ed., trans. Caridad Inda and John Eagleson (Maryknoll: Orbis, 1988), xxxviii. 그렌츠, 올슨, 352에서 재인용.
15) 1979년 푸에블라 주교회의 문서. 김균진, 622에서 재인용.
16) "예수가 오늘 살아 있다면, 그 역시 게릴라가 되었을 것이다"라는 말로도 유명하다.
17) 김균진, 641-643.
18) 같은 책, 643-655; 그렌츠, 올슨, 359-363.
19) 한국천주교의 공식 번역문은 다음을 보라. http://www.cbck.or.kr/book/book_list6.asp?p_code=&seq=401423&page=20&KPope=&KBunryu=&key=&kword=.
20) 한국천주교의 공식 번역문은 다음을 보라. http://www.cbck.or.kr/book/book_list6.asp?p_code=k5160&seq=401410&page=21&KPope=&KBunryu=&key=Title&kword=.
21) 구티아레즈, 『해방신학(I): 원론편』, 3; 그렌츠, 올슨, 343; 김균진, 643.
22) J. Andrew Kirk, 『해방신학』, 전호진 역 (서울: 엠마오, 1989, 207-217; 그렌츠, 올슨, 361f.
23) "계급투쟁·폭력혁명 거부. 한국천주교주교단, 「해방신학」 비판 경명의 의미," 「중앙일보」 (1984.10.15.). https://news.joins.com/article/1787380.
24) 김정용, "[21세기를 빛낸 신학자들]<39>구스타보 구티에레스(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은 교회 사명," 「가톨릭평화신문」 (2014.3.30.).
25) "알고 믿고, 믿고 알고 – 왜 다시 해방신학인가?" 「격월간 가톨릭 평론」 (2015.7.21.). http://review.wti.or.kr/?p=1131.
26) 서남동, 『민중신학의 탐구』 (서울: 한길사, 1983), 202, 183, 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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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27

‘사회적 합의’라는 말의 폭력 | 창비



‘사회적 합의’라는 말의 폭력 | 창비



‘사회적 합의’라는 말의 폭력백영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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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경

가수 구하라가 세상을 떠났다. 한해 2천명 이상의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죽는 나라, 제대로 애도받지 못한 죽음이 무수히 넘쳐나는 나라에서 이 죽음이 큰일로 느껴지지 않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 것 같다. 세간에서는 가수 겸 배우 설리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우울증을 원인으로 지목하기도 하고, 다른 젊은 여성들에게 전염효과를 미칠까봐 걱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미투운동 이후 페미니즘으로 고양된 청년층 사이에서 이들의 죽음은 작은 사건이 아니라 손댈 수 없이 썩어버린 한국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중대 사안이자 징후이다.



최근 내려진 성폭력 관련 사법조치 가운데 몇가지만 복기해봐도 이들의 죽음은 단순히 개인적 불행 탓이 아니다다. 구하라씨는 본인의 동의 없이 촬영된 동영상으로 협박받았고 무단으로 침입한 전 남자친구에게 폭행당했지만, 법원은 “구씨가 먼저 호감을 표시했고 두 사람이 정기적으로 성관계를 갖던 사이”라는 이유로 가해자 최씨에게 불법촬영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구씨의 죽음 이후 같은 판사가 서울 시내 웨딩홀에서 여성 하객들의 치마 속을 수십차례 촬영한 사진기사에게도 ‘집행유예’를 선고한 전력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성범죄 양형기준을 정비하라는 청와대 청원이 이어지는 중이다. 하지만 작금의 사태를 단순히 양형기준이 미비해서 생긴 일이로 치부하기는 어렵다. 친밀한 관계에서 벌어지는 폭력에 둔감한 사법부의 문제이자, 불법촬영된 성관계 동영상을 대량으로 소비하면서 규제할 생각이 없는 한국사회의 문제로 보는 편이 옳다.



몇가지 예를 더 들어보자. 사법부는 건설업자 윤중천의 별장에서 촬영된 성관계 동영상 속 인물이 김학의 전 법무부차관이 맞는다면서도 성접대에 대해서는 공소시효 만료를 이유로 무죄를 판결했다. 검찰의 고의적인 수사 지연에 따른 일이지만 판결 자체에도 문제는 많았다. YG엔터테인먼트의 양현석 전 대표도 성매매 알선 등에 대해 ‘객관적 증거’가 없다면서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이른바 ‘레깅스 판결’에서는 판사가 기소장에도 쓸 수 없는 불법촬영 사진을 판결문에 첨부해서 논란을 일으켰다. 세계 최대의 아동 성착취동영상 사이트의 운영자를 붙잡았더니 한국인이었는데, 한국법원은 이 사람에게 징역 1년 6개월이라는 솜방망이 처분을 내렸다. 해외 일부 국가에서는 이런 영상을 소지만 해도 일이십년을 감옥에서 살아야 하는 중죄다. 이 모든 일들이 길어야 석달 안에, 대부분 이달 들어 일어났다.



미투 이후 한국사회에도 어느 정도 의미있는 변화가 생겨났다고 믿었던 사람들은 여전히 한국이 가해자들의 세상이라는 것을 확인하며 분노하고 좌절했다. 특권층일수록 여성의 몸을 노골적으로 거래하고 도구로 사용하지만 법은 그들에게 한없이 너그럽고, 그들은 온갖 방식으로 처벌을 피해간다. ‘검찰개혁’이 최우선 과제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공수처만 생기면 대단한 변화가 일어날 것처럼 주장한다. 하지만 검찰이 기껏 기소해도 판사가 무죄를 선고하는 모습 앞에서 그러한 낙관에 동의하기란 어렵다. 안희정 사건의 2심에서는 1심과 달리 성인지감수성에 입각하여 피해자다움을 강요하지 않는 판결이 나왔다고들 하지만, 피해자가 경험하는 사회는 여전히 냉혹하다. 특히 피해자가 연예인이라도 될라치면 몸과 마음에 대한 권리를 모두 돈으로 산 듯이 구는 반응이 쏟아져 나오곤 하니, 폭력적인 성문화에 한국사회 전체가 가담하고 있는 양상이다.



물론 미투운동 이후에 한국사회가 전혀 나아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일반인들의 상식이 많은 부분 변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권과 사법부, 언론, 시장은 변화가 너무나 느리거나 간혹은 퇴행하기 때문에 더 절망스러운 기분이 드는 면도 있다. 도대체 이 사회가 내리는 법적 판단과 권력 행사에 나의 목소리, 피해자의 자리는 있는지 의심이 드는 것이다. 실제로 구하라씨가 사망한 후에 성관계 동영상이 실시간 연관검색어에 올랐고, 폭행피해 당시의 신체를 촬영한 사진들이 언론매체를 통해 다시 퍼졌으며, 이는 여러 사람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시정되지 않았다. 심지어 판결 당시 판사도 피해자를 앞에 앉혀둔 채 성관계 동영상을 보았다는 사실이 알려져 충격을 주기도 했다. 언론은 악성 댓글이 재능있는 한류 스타의 때 이른 죽음을 불러왔다며 댓글 문화를 비판했지만, 개인의 SNS에 올라온 내용을 일일이 기사화해 악성 댓글을 유도한 언론 자신의 책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같은 매체의 다른 지면에서 여전히 비슷한 류의 연예인 사생활 기사를 발행했다. 이미 위헌판결이 난 인터넷 실명제를 다시 도입해서 익명의 댓글을 막아야 한다는 실효 없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미 실명으로도 악성 댓글을 다는 시대가 되었다. 혐오발언과 악성 댓글이 오롯이 익명성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기 어려운 것이다.



지금 인터넷 공간에서는 여성 연예인이 페미니즘 책을 읽었다는 이유로, 혹은 브래지어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마녀사냥을 당한다. 성소수자의 경우에는 성소수자라는 이유 그 자체로도 인간됨을 박탈당하는 수준의 혐오발언이 가해지는 중이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일단 인권을 포괄적으로 보호하고 피해자를 구제할 수 있는 차별금지법의 제정이 절실한데, 이를 주장할라치면 이른바 ‘사회적 합의’의 벽에 부딪히게 된다. 실제로 구하라씨의 ‘리벤지포르노’ 피해는 작년 10월 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하는 혜화역 시위에서 여성차별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으로 의미화되기도 했다. 당시에도 차별금지법 요구는 보수교회에 의해 공격을 받았고, 정부는 법 제정 요구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최근에는 국가인권위원회가 정하는 차별금지 대상에 성적 지향이 들어간 것은 사회적 합의 없이 일어난 일이라며 반드시 삭제해야 한다는 법안까지 발의된 상태이다. 반면, 노골적인 혐오와 비하, 차별 행위를 막고 인권을 보호하는 차별금지법의 제정은 대통령 공약 사항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합의가 부재하다는 이유로 추진되지 않고 있다. 그런 상황이 오래 이어지다보니 이제 심지어는 충분한 사회적 합의가 없으면 어차피 법을 만들어도 실효를 거두지 못할 것이라면서 차별금지법 제정에 반대하기도 한다. 모든 입법이나 규제가 완전한 사회적 합의를 거쳐야만 시행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각의 반대가 있으면 인권마저 보장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실제로는 노골적인 차별이나 다름없다.



지난 19일 국민과의 대화에서 나온 대통령의 ‘사회적 합의’ 발언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말이 사용되는 바로 이러한 현실의 맥락 때문이다. 현재 한국사회에서 사회적 합의라는 용어는 차별과 혐오를 행하는 사람들이 역차별이나 종교적인 신념을 내세울 때 사용될 뿐,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한 정부의 노력은 담겨 있지 않다. 성폭력의 문제에서 종종 시민의 눈높이에도 미치지 못하는 사법판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언론이 혐오의 언어와 선정적인 보도, 심지어 가짜뉴스의 선동으로 차별에 앞장설 때 정부는 과연 어떤 사회적 합의를 기다리고 있는가. 정부의 역할 없이 혐오가 저절로 사라지는 날, 사회적 합의가 형성되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다른 ‘정치’ 문제는 정부가 의지를 가지고 해결해도 성이나 차별 문제는 합의를 기다려야 하는 사항이라고 말하는 것은 ‘선량한 차별’도 아니고 그저 직접적인 차별이다.



백영경 / 제주대 사회학과 교수

2019.11.27.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