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1/18

4·3유적지 토산리 향사 옛터



Philo Kalia
 ·
#4.3피해지역 셋째답사
토산리
주민을 다 처형
미리 엎드린 여인 한분이 살아남아 그날을 증언
해변의 어머니! 라는 추모비와 모자상, 비의 내용을 지금 읽으도 심장이 떨린다.
여성은 달보게하고 반반한 여성 겁탈 후 살해
표선 백사장 해변에서 광란의 죽임의 굿판
한국사는 고려 이후 식민지를 겪고 해방후에도 4.3에서 6.25전쟁 이후까지 가장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한 제주역사의 시점에서 읽어야겠다는 결심이 생겼다.
진정 현람애월민의 역사다.
너무 춥고 강풍때문에 이제 그만.





4·3유적지  토산리 향사 옛터

http://www.jeju43.org/m/bbs/board.php?bo_table=3_2_1_1&wr_id=133


개요


○ 위치 :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중앙로 16번길 1(토산리 537-1번지)



○ 토산리민 대학살사건 때 최초 집결지였다. 토벌대는 1948년 12월 14일 알토산으로 소개 온 웃토산 주민들과 알토산 주민들을 모두 향사에 모이라 했다. 그 중에서 18세 이상 40세 미만의 남자를 결박한 후 끌고가 표선해수욕장에서 집단 총살했다.



○ 토산리민 대학살사건 때 최초 집결지였다. 토벌대는 1948년 12월 14일 알토산으로 소개 온 웃토산 주민들과 알토산 주민들을 모두 공회당에 모이라 했다. 그 중에서 18세 이상 40세 미만의 남자를 불러모아 결박했다. 젊은 여자들도 따로 불려갔다. 이 날 주민들과 함께 향사에 집결했던 김상보씨는 “남자들을 불러낸 후 여자들에게는 모두 달을 쳐다 보라 했다. 그 날은 음력 보름날이어서 달이 밝았다. 군인들은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하는 처녀들을 끄집어냈다.”고 증언했다. 이들은 표선리 군부대에 끌려가 유치장에서 수감되었고, 12월 18일과 19일 이틀에 걸쳐 남자들이 모두 표선 백사장(한모살, 당캐)에서 집단학살당했다. 여자들은 일주일 후 역시 표선백사장에서 총살당했다.




“누님이 향사마당에 집결됐을 때 끌려가서 희생됐다. 오후 3~4시경, 사람들을 향사에 다 모이라고 했다. 향사터가 200평정도 됐는데 다 모여놓고 남자 18세~40세 남자들은 따로 줄을 서라고 했다. 여자들은 달을보라 해서 안 든 사람들, 우리 누님도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지 않으니까 끌려갔다. 3일 후에 몰살됐다. 석방돼서 나온다고 했었는데 토벌대장이 죽으니까 보복으로 다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말이 있었다. 표선지서에 갇혀 있다가 표선백사장 모래밭에서 죽었다. 누님 시신은 아버지가 수습해왔다. 나중에 사혼했다.”(김성헌 증언)

또 이 곳엔 토산리를 에워싸는 성을 만든 뒤부터는 경찰파견소가 들어섰다. 주민들은 파견소를 두르는 성을 겹담으로 쌓아 경비를 섰다. 김씨는 “파견소에는 5~6명의 경찰들이 번갈아 주둔했는데 위미리 출신 강소장은 악독하기로 소문났다.”고 말했다.







※ 출처 : 『개정증보판 제주4·3유적』Ⅱ, 제주4·3연구소, 2020.



현황











어머님!

1918년 4·3사건으로 보리어 도장리 위주 리인은 1844터 일 404 하였다. 다행히 살아남은 우리의 어머님들은 "어어있는 초가지를 일에서 포격이 싸다! 불었는 어린 자식을 중에 중고 시인이 고요히 상동 상사들의 일과 달 을 하디드의 영인들! 및 집단들 알림이 두셨는괴 이십대의 젊은 나이 있기에 아치들을 버리고 다른 대로 가지의 독하게 사실수도 있었으린다 중일에 43-4 : ગયબ 1% 44 2048: કય 들을 키우시서 조선인 태일의 고소득 이들을 만들 이닌 역군들을 만들어 수있습니다.

다만 머리 역탈로 변하시고 허리 굽고 얼굴에 깊 등 둘이 지었어도 지난날을 뒤돌아보시며 산지도 후회하실이 없이 어디 숨은 손으로 손자를 어루만 시시는 자비로우신 이러닝을 될 때 우리 리민들의 가슴을 적시며 드는 이 세상 제일의 어머님 이라 고 사랑스럽게 생각하며 뜻을 모아 이 모사상을 세 웁니다.

2002년 12월 등 김승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