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 (1527년)
이탁오 李卓吾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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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이지(李贄) |
출생 | 1527년 11월 19일 복건성 천주부 진강현 |
사망 | 1602년 5월 7일 |
성별 | 남성 |
국적 | 중국 |
직업 | 양명좌파 사상가, 유학자 |
종교 | 이슬람교 |

이탁오(李卓吾: 1527년 11월 19일[음력 10월 26일]~1602년 5월 7일[음력 3월 16일])는 중국 명나라의 양명좌파 사상가이다. “잘나신 나”라는 뜻의 “탁오”는 자이고, 휘는 이지(李贄)다. 호는 온릉(溫陵)이었다.[1] 초명은 임재지(林載贄)였으나 이후에 종가의 성(姓)을 따라 이지로 개명했다. 복건성(福建省) 천주부(泉州府) 진강현(晋江縣)(오늘날 푸젠성 취안저우) 출신이다. 유학자이면서 이슬람교도였으며, 당대 성리학자들로부터 기행을 한다고 비난을 받았다.
생애
[편집]이탁오의 관직 생활은 하남성·북경·남경의 하급 관리 및 남경형부원외랑(南京刑部員外郞)을 거쳐, 51세 때 운남성 요안부(姚安府)의 지부(知府)가 되었다가 쉰네 살 때 그만둔 것이 전부이다.
<자찬(自贊>에서 이탁오는 자신의 성질은 편협하고, 성급하며, 얼굴 표정은 거만하고, 마음은 미치광이라고 스스로 평했다. 사람들과 교제 범위는 아주 좁고, 만나면 매우 친밀해지지만, 상대를 미워하면 그와 절교하고 나아가 평생 그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실제로는 따뜻한 옷, 풍성한 음식을 바라지만 절개를 지키기 위해 굶어 죽은 백이와 숙제를 담고자 한다는 등, 이상과 실상, 말과 행동, 즉 입과 뱃속이 몹시 다르다고 했다. 이러한 자기 평가를 말 그대로 받아들여선 안 된다. 여기엔 반어적 분위기가 넘쳐난다. <고결설>에서 그는 고결함을 좋아하기에 오만하고 성급하며 마음이 좁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는 권세나 부 등 외적인 것에는 일절 신경 쓰지 않고, 어떤 사람이 가지고 있는 내적인 것(착하고 좋은 점)만을 바라보려 애썼다.[1]
이탁오의 성격은 지극히 독선적인 데다가 외곬수였다. 그는 사람들과 시비를 즐겼으며, 매사에 도전적이고 전투적으로 대했다. 게다가 기행을 좋아하고, 반유교적이고 파괴적 언사를 자주 써서 당대 사회에서 큰 주목을 끌었다. 결국, 그는 당대 명나라 사상계에서 이단으로 몰리게 되었다. 1602년(만력 30년) 부패한 관료층의 탄압을 받아 '도를 혼란케 하고 세상을 미혹하게 했다'라는 죄목을 받아 사상범으로 체포되었고, 옥중에서 목을 베어 자결했다. 향년 76세였다.[1]
이탁오는 양명학의 창시자인 왕양명(王陽明)과 왕기(王畿)를 도를 얻은 진인(眞人)의 불사자(不死者)라면서 존숭했다. 그의 사상에서 〈동심설(童心說)〉, 역사 비판에서 선악과 현부(賢否)의 상대화 등은 양명학의 발전이면서 동시에 불교나 노장 사상의 영향도 받았다.
사상
[편집]동심설(童心說)
[편집]이탁오 사상의 핵심에 놓여 있는 학설이다. 《분서》 제3권에 실린 글에서 유래한다. 이 글에서 이탁오는 먼저 동심(童心)을 진심(眞心, 참다운 마음)이라고 말한다. 이때의 동심은 "거짓이 전혀 없고 순진무구한 최초 일념(一念)의 본심"을 뜻한다. 이 마음을 잃으면 참다운 인간(眞人)이 아니게 된다. 어떻게 해서 그 마음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일까?[1]
사람은 동심을 갖고 태어난다. 하지만 자라면서 귀와 눈을 통해 외부로부터 듣고 보는 것 여러 가지가 들어가 세상에 대한 지혜도 발달한다. 그 때문에 동심이 방해를 받고 거짓 행동(假事)이나 거짓말(假言)을 일삼게 되고, 결국 동심을 상실한다. 참다운 인간의 마음을 상실하고, 가짜 인간(假人)이 되는 것이다.[1]
이러한 논리를 바탕으로 이탁오는 천하에서 최고로 치는 문장은 당시(唐詩, 당나라 시), 원곡(元曲, 원나라 연극), 명나라 소설 《수호전》 등과 같이 동심에서 출발한 작품들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비해 육경(六經)이나 《논어》, 《맹자》 같은 경서들에는 동심이 담겨 있지 않다. 육경, 《논어》, 《맹자》는 공부 못 하는 제자들이 스승의 설명을 조금씩 알아들은 걸 모아 놓은 책이거나 권위에 약한 사관들이 함부로 성인을 추어올리면서 쓴 책이기 때문이다. 이런 책들은 성인의 마음을 직접 전한 것이 아니고, 도학자들이 핑계나 변명 거리로 삼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1]
이탁오가 말하는 동심은 욕망도 포함하여, 살아 있는 인간의 적나라한 마음에 가깝다. 그 반대편에 있는 거짓 마음은 동심을 압착하여 그것을 어떤 주형에 넣으려는 기성 질서나 도덕관, 권위를 뜻한다. 구체적으로는 옛 경전의 권위를 구실 삼아 강요되는 기성 도덕의 가르침이다. 이탁오는 이를 도리의 견문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견문이 사람 내부에 주입되면 진실한 마음인 적나라한 동심은 사라진다. 그 탓에 사람은 가짜 인간이 되고, 거짓 행동을 일삼으며,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게 된다. 한마디로, 이탁오가 거짓으로 부정하는 건은 사회의 기성관념, 현재의 거짓 사회관계다. 구체적으로는 당대 유행했던 주자학적 도통 관념, 또는 그 관념에 사로잡혀 자신의, 인간의 진실한 희망이나 욕구를 망각하는 일이다.[1]
이탁오에 따르면, 사람은 거짓을 끊고 순수하게 참다운 최초의 일념인 본심, 즉 하지 않으려 해도 어찌할 수 없는, 적나라한 동심에 바탕을 두고 진실에 충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이 참다운 삶이고, 그러한 삶에 의해 구축된 진실을 따라 바람직한 사회관계나 이념을 실현해 나가야 한다. 이러한 참다움은 기존 사회 통념에 대해서는 파괴적이다. 반면 바람직한 미래의 사회상에 대해서는 창조적으로 작용한다.[1]
저서
[편집]《분서》(焚書)
[편집]이탁오의 저작으로 전6권이며 《속분서》(續焚書) 5권이 부가됐다. 이 저서는 이탁오가 관직을 그만두고, 호북성 황안현(黃安縣)에 살던 경정향(耿定向)의 집에서 거하다가 사상적 대립으로 절교한 후 마성현(麻城縣) 용호(龍湖)의 지선원(芝仙院)에 거주하던 시절(59세 이후) 십여 년 동안 써 놓은 서간, 수필, 시 등을 모은 문집이다. 이 저서에서 대표적 논문은 제3권에 수록된 〈동심설(童心說)〉이다. 어린아이의 마음을 잃어버리는 것은 보고 들은 지식이 밖으로부터 들어와 안의 주인이 되고, 도리가 들어와 안의 주인이 되기 때문이라면서, 특히 도리를 부정적으로 간주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음란을 가르치는 《서상기》, 도둑을 가르치는 《수호전》 등과 같은 속문학(俗文學)이 고금의 지극한 문장[至文]이고, 6경(六經)·《논어》·《맹자》는 도학자들의 핑계로 삼는 책으로 위선자를 만드는 원천이다. 이 외에 《분서》에는 “사람이 각각 생지(生知)를 소유하고, 모든 사람이 다 부처가 된다”는 것을 설명하고 (권1 答周西嚴), “의복을 입고 밥을 먹는 것. 이것이 인륜의 물리(物理)이다”(권2 答鄧石陽) 등 독자적이면서 자유로운 견해가 많이 제시되어 있다.
《장서》(藏書)
[편집]이탁오의 대표적 저작으로 전68권이다. 《속장서》(續藏書) 27권이 부가되어 있다. 《분서》가 그의 문집으로 잡다한 것을 수집한 책이라면, 이 책은 전국 시대에서 원대(元代)까지를 기록한 기전체(紀傳體) 역사서다. 이 책은 이탁오가 지선원에 체류하던 십수 년 동안 저술한 것이다. 서두의 〈장서 세기열전 총목전론〉(藏書世紀列傳總目前論)에서 시비와 선악에는 정체(定體)가 없고, 전부 상대적, 병존적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장자의 사상과 많이 비슷하다. 〈세기총론〉(世紀總論), 〈덕업유신론〉(德業儒臣論), 〈후론〉(後論) 등 이 책의 전반적 논조는 무위(無爲), 무사(無私)에 대한 반론, 공리의 주장, 전통적 가치관 및 규범 의식에 대한 반발, 송유도통론(宋儒道通論)의 부정 등 종래 사서(史書)인 《사기》, 《자치통감》, 《통감강목》(通鑑綱目)의 춘추필법을 무시하고, 자유분방하고 독창적인 견해와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전기 자료
[편집]- 원중도, 《가설재집》 권17, 이온릉전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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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 Zhi (philosopher)

Li Zhi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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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ditional Chinese | 李贄 | ||
Simplified Chinese | 李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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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 Zaizhi | |||
Chinese | 林載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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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ngfu (courtesy name) | |||
Chinese | 宏甫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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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huowu (art name) | |||
Chinese | 卓吾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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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 Zhi (1527–1602), often known by his pseudonym Zhuowu (which means, “I who am smart”), was a Chinese philosopher, historian and writer of the late Ming dynasty. A critic of the Neo-Confucianist views espoused by Zhu Xi, which was then the orthodoxy of the Ming government, he was persecuted and committed suicide in prison.
Biography
[edit]He was born in Jinjiang, Fujian province (in modern Quanzhou). His ancestor by seven generations was Lin Nu, the son of Li Lü, a maritime merchant. Lin Nu visited Hormuz in Persia in 1376, converted to Islam upon marriage to a Semu girl ("娶色目女") (who was most likely either Persian or Arab), and brought her back to Quanzhou.[1][2] This was recorded in the Lin and Li genealogy《林李宗譜》. However, the new faith did not take root in his lineage and the family stopped practising Islam during the time of his grandfather. His father made a living by teaching, and Li Zhi was therefore educated from an early age.
In 1551, he passed the village examinations, and five years later was appointed as a lecturer in Gongcheng (in modern Huixian, Henan Province). In 1560 he was then promoted to the Guozijian in Nanjing as a professor, but went into filial mourning, returning to his native Quanzhou. During this time he participated in the defence of the coastal city against Wokou raids. After returning from mourning in 1563, he was assigned to the Guozijian in Beijing.
In 1566, he served in the Ministry of Rites in Beijing, where he became learned in Yangmingism as well as Buddhist thought. He was then assigned as a prefect of Yao'an County in Yunnan in 1577, but left his post three years later. After this, he took up a teaching post in Hubei on the invitation of Geng Dingli, but was attacked as a heretic by Dingli's brother, the scholar and official Geng Dingxiang, and eventually moved to Macheng. In 1588, he took the tonsure and became a Buddhist monk, but did not follow the ascetic lifestyle of other monks. Two years later, his work A Book to Hide was printed.
He travelled during the 1590s, visiting Jining and Nanjing, where he met with Matteo Ricci and discussed the differences between Buddhist and Catholic thought. Returning to Macheng in 1600, he was again forced to leave after attacks from the local magistrate for his philosophical views.

In 1602, after being accused of deceiving society with heretical ideas by Zhang Wenda and other officials of the Censorate, he was arrested and imprisoned, where he committed suicide.[3] Having heard that he was to be exiled to his native Fujian, he cut his throat with a shaving knife which he seized from a servant. After his death, he was buried in Tongzhou, where his grave still remains.
Philosophy
[edit]Li Zhi's philosophy was based upon Neo-Confucianism, though he was a staunch critic of the then-orthodox Cheng-Zhu School, and indeed identified himself as a heretic. He can be seen as having been influenced by Wang Yangming (1472–1529), as well as the Taizhou School. He denied that women were inferior to men in native intelligence, and argued that many women in Chinese history, such as Wu Zetian, had actually been superior to men. However, he did not believe women should be emancipated and commended widows who chose suicide over remarriage.[4]
The Childlike Heart-Mind (tóng xīn; 童心)
Li Zhi wrote a considerable amount on the “childlike heart-mind” (tóng xīn; 童心). Although someone of a childlike heart-mind was once considered to be someone “naive, immature, and inexperienced in the ways of the world” – and thus “bound to come to a bad end” – Li uses the term in a different sense, as evidenced by his reference to the 13th-century play The Western Chamber (Xixiang ji).[5] In this play, a scholar and a maiden develop a somewhat “forbidden” relationship, have a clandestine and passionate love affair, push through “traditional barriers” to their love, and finally marry. In the original telling (from the Tang Period, 7th-10th century CE), these same lovers have a short-lived, passionate romance which takes a sharp downward turn when the scholar decides to leave the maiden, leaving them both with no choice but to marry other people, although not out of “true love”.[5] In referencing this, Li argues for the ideals of the lovers in the Western Chamber, the “spontaneity, genuineness, abundance in feeling, and passionate desire”.[5] These are all aspects of Li's childlike heart-mind.
Li's works on the childlike heart-mind are thought to be “innovative” yet “muddled and inconsistent”.[5] Some regard his seemingly incompatible ideas on the heart-mind as a relativist ethical structure “where anything goes."[5][6] Pauline Lee, however, rejects this interpretation, arguing instead that Li's work is useful in allowing us to understand the cultural milieu in which he lived, and that his “philosophical vision” bears great “intrinsic value and power”.[5]
This concept of the childlike heart-mind is not unlike concepts of Li's contemporaries on similar subjects. In fact, Li may have even considered his contemporaries’ terms, namely the “original heart-mind” (ben xin), the “genuine heart-mind” (zhen xin), “pure knowing” (liang zhi), and “the infant heart-mind” (chizi zhi xin).[5]
The term “ben xin” comes from a passage in the Mengzi that says that if a person acts in accordance with their “appetitive parts,” even if it is to save their own life and even if the decision is difficult for them, then they have “lost contact” with their original heart-mind, something which Mengzi believed is a person's “greatest moral resource."[5] Li Zhi makes a conscious decision not to use this term, preferring instead to use tong xin. This may be due in part to the fact that, while Mengzi believed that the heart-mind was something to be cultivated and nurtured, Li saw the heart-mind as something to be “preserved,” since, in his view, it is innately perfect from birth. Mengzi also thought that there was a specific “path of moral self-cultivation” and that those who had followed this path correctly would all have the same ethical attitudes, whereas Li held that there were many different ways that one could cultivate the heart-mind, particularly through the reading of certain texts or engagement in certain practices.[5]
“Zhen xin” is found in the Buddhist text the Platform Sutra, in which it is said to be analogous to the “deep concentration of oneness,” something to practice while also maintaining a lack of attachment to things.[5] However, the heart-mind, in this view, runs the risk of becoming enmeshed with the Dao if ever it lingers in anything, if it becomes too attached. Ultimately, the heart-mind in this conception is considered to be functioning properly if it is doing things with natural ease, rather than struggling against the natural way of things (or Dao). Self-cultivation plays a role in this idea of the heart-mind, as well, through deep concentration.
“Liang zhi” comes from Wang Yangming's idea of the heart-mind as something that is known through a discovery-based self-cultivation method and as being “directly manifested in a faculty of ‘pure knowing’” (a term which Mengzi used but which Wang means differently).[5] Wang regarded pure knowing as something innately perfect, just like Li's heart-mind, but which was “clouded over” at birth, akin to the sun being obstructed by clouds.[5] This “clouding” could be caused by one's qi if it had somehow become corrupted or soiled, so the aim was to have clear qi by exercising one's pure knowing, something which could be accomplished only through the will.
“Chizi zhi xin” is a term used by Luo Rufang meaning “infant heart mind”.[5] This idea held the “free expression of one's natural desires” in high regard. Luo believed that a person's feelings “are [their] human nature,” and so the feelings should not be “repressed” in any way.[5] Spontaneous expression (expression without thinking about it) is also a part of the human nature, and as long as “artificial obstructions” (such as “false teachings or excessive meditation”) do not interfere, the feelings can thrive.[5]
To Li, losing the genuine mind could result in losing the genuine self, and anyone who failed to be genuine would never recover their genuine heart-mind.[5] The childlike heart-mind is lost when anything from the outside – be those “aural and visual impressions” (even of the “Principles of the Way”), “knowledge and perceptions,” or the favor of a good reputation while masking a bad one – interferes with it.[5] Li also believed that if a person's childlike heart-mind was “obstructed,” then whatever that person said would not come from the childlike heart-mind, and so would lack “foundation” and would not be truthful. This is because, “when childlike heart-mind is obstructed, the Principles of the Way that come from outside the self become one's heart-mind."[5] This is a problem because, in this case, everything a person encounters and does with their physical senses is of the Principles of the Way, and so is not arising spontaneously from the childlike heart-mind. Words inspired by the Principles of the Way might sound nice or flow well, Li thought, but they wouldn't have anything to do with the person themselves. Their words would be “phony” and so the person themselves will be “phony,” and so too for everyone else until the whole world became like this, eventually leaving people unable to determine between “good” and “bad."[5]
Li felt that the childlike heart-mind's “genuine feelings and desires,” as well as the expression of these, could “connect one to an abundant and powerful source” which is too great for “phony” individuals to comprehend.[5] Because of this, such individuals would turn away from opportunities to deepen their spiritual "vision," and face instead a life of comfort and “blindness."[5]
Li notes that early sages had so securely preserved their heart-minds that, when they read and studied the moral teachings of the Principles of the Way, they were able to protect their heart-minds.[5] However, Li was concerned that many students would allow these same teachings to interfere with their heart-minds. This seems contradictory, given that it was the sages themselves who wrote the books of these teachings that, when read and studied, would cause the students to lose their childlike heart-mind. However, Li's justification for this reasoning is that the sages’ teachings were specific to each student, not necessarily to be used universally. He likened the teachings to medicine, not only in that each one is tailored specifically to the “patient's” needs, but also in that what helps one person might worsen the condition of another.[5] For Li, writings such as the Analects and the Six Classics were not to be understood as the “ultimate standard for thousands of generations,” because, he proposed, these texts would not then be direct products of the childlike heart-mind.[5]
Although Li does say that the childlike heart-mind cannot return once it is lost, the aforementioned metaphor of “healing” might suggest that anyone is capable of recovering their childlike heart-mind, though perhaps not in its original condition.[5] This is partially because our phoniness is our own doing and our own decision, and therefore is not entirely out of our control.[5] The metaphor also reminds people that this particular kind of “health,” the recovery of the heart-mind, is relative. Each individual person has certain things that they need to do in order to remain healthy, and these practices are different from person to person.
Ethics
[edit]Li did not believe in rule-based ethics, but in using one's innate and sensitive “faculty of knowing” (or the “child-like heart-mind”) to read and evaluate each situation as it came and to determine from this which action to take.[7] This does not mean that Li regarded all judgments as being entirely subjective. Consistent with his view that one should follow their heart-mind, their most genuine and spontaneous nature, he was highly critical of any actions that were taken or works which were written that did not come from this nature.
While Li advocates for spontaneity and “immediate” action “without prior reflection or thought,” this does not mean that he favors completely reckless behavior. For Li, such spontaneity was possible and favorable only because the subject had (ideally) worked to preserve their childlike heart-mind.[7] Without an intact heart-mind, such spontaneous action could be mis- or uninformed.
Opinions on Fiction Writing
[edit]Many of Li Zhi's contemporaries regarded fiction with disdain; true to form, however, Li disagreed and held it in high esteem. He argued that the “most exquisite literature in the world” comes from the childlike heart-mind because, if something is written from this heart-mind, then nothing is obstructed and no one is “forcing” the “structure” or “style” of their writing.[5] Therefore, if someone composes a written work of fiction that originates from their childlike heart-mind, then this work is indeed “exquisite.” He took issue with the more popular idea that “good” prose is that which is written in a “classical” style (such as from the “pre-Qin period”).[5] He claimed that all of the “exquisite” literature from past periods could not be seen through the lenses of their own preceding periods, and that they were notable because they were, indeed, originals. To Li, what defined the quality of certain literature was not the time in which it was written, but rather the faculty within its author from which it arose.
In fact, in general Li vehemently discouraged people from regarding “ideas of antiquity” as solid, “unchanging” truth without first critically examining them, as he believed truth to be “context-dependent” and, therefore, was subject to change with one's environmental variables.[7] He did not believe that people should adhere to “universal truths,” since, in his particularist view, there likely were none.[7]
The "Good Death"
[edit]Li Zhi once wrote to his friend Kong Ruogu regarding his own death, saying, “Under no circumstances should you leave my bones for others to take care of."[5] This is a reference to a passage of Kongzi's on what constitutes a “good death." According to Kongzi, such a death is “genuine in feeling” (therefore not “deceptive”), occurs with friends and loved ones around, and is “supported by relations and rituals constructed by culture,” not alone and away from people and social customs.[5] The Xunzi also discusses what constitutes the “good death,” describing it as an event which is both “genuine in feeling” and “social in nature."[5] Though Li does not employ the importance of ritual, “formality,” “social relations,” and “reverence” as part of his own ideas on the “good death,” he does incorporate some Confucian aspects of it, namely the qualities of genuineness and “sincere generosity." This comes as no surprise given that Li believed that a necessary quality of a good life is the “[attendance] to our genuine desires”.[5] However, Li acknowledged the roles of culture and social relationships in people's daily lives, and so also believed that this single quality was not enough to secure a good life. In fact, during his periods of mourning, he followed the traditional customs, and appears to have meant it genuinely. For instance, when he returned home to bury both his grandfather and second eldest son, he expressed to Kong Ruogu his guilt over having delayed the burial of his great-grandparents by fifty years.[5] Although this was due to insufficient funds rather than carelessness, Li insists that this is a “crime” for which “nothing can atone,” as it goes against "custom".[5]
Among Confucians, disfigurement in death was considered to be unacceptable and something to be avoided. In fact, among Confucian families it was considered a filial duty to keep the body from disfigurement.[5] However, Li writes as if unfazed by the idea, saying that, should he die “on the road” (already an unfavorable death by Confucian standards), he should like for his body to be cremated or thrown into a river.[5]
Having been arrested in Tongzhou for behaving as a heretic and a traitor (such as by bathing with prostitutes and inviting high-class women to attend his various philosophical discussions), Li ultimately decided to die as he awaited his trial.[5] Still in prison, he slit his throat with a razor borrowed from a prison guard, though did not die until two days later. Whether this act was one of desperation or of courage has long been disputed, but Li's friend Yuan Zhongdao notes that, either way, Li's qi (“life energy”) must have been considerably robust in order to sustain him for those two days.[5]
Toward the end of his life, Li claimed that his having taken the tonsure did not make him feel that he was living in a way that was “superior” compared to others, as this way of life was, in his words “the only way."[5] His reasons for having done this had nothing to do with its supposed “desirability” or with practicing the Dao, but with his aversion to being controlled. Believing that people are controlled their whole lives – and even after death (such as in burial) – Li chose to break free of this restraint by adopting the tonsure rather than returning home.[5] He writes of this in his essay “Testimony,” assuring the reader that this decision was the “genuine intention” of his “original heart,” or his childlike heart-mind.[5]
Gender Equality
[edit]Confucian feminism focused mainly on self-cultivation as a means of approaching patriarchal issues, primarily through “reading classical texts, writing poetry, engaging in discourse and debate,” and “meditation”.[7] Li Zhi felt that, because women are inherently just as capable as men are of achieving “intellectual and spiritual development,” men and women should both have “opportunities” for self-cultivation available to them.[7]
Pauline Lee describes Li as a “particularist” in that he believes that anyone can “work to achieve” “moral knowledge,” but also that all moral judgments are relative to their “specific conditions and time."[7] However, she notes that this does not mean that Li is content to leave women's problems of inequality as they are, as he argues against standard Confucian practices such as the “cloistering of women” in the home, or customs that denounced the remarrying of widows, or the overall subservience of women.[7]
Chinese Confucian cosmology, describing not just the order of the universe but also the order of relationships between people (the latter mirroring and even influencing the former, and vice versa), was one particular area of Confucianism which Li attacked. This cosmology involved the “elements” yin and yang which are often associated with other opposing energies, including masculine and feminine.[7] Lee argued that yin-yang relationships, at least by the third century, were “hierarchical,” with yin as yang’s secondary subordinate.[7] While Li maintains the traditional Confucian idea of the cosmos as emanating from one original source, he sees this creation as “cooperative,” with yin and yang working together to produce the universe rather than one force being the initiator for the secondary force to follow. He also held the Confucian idea of the family and society as reflections of the cosmos (and vice versa), but again his view was more binary than monistic, believing there to be no hierarchy in creation and, therefore, no hierarchy in male-female or husband-wife relationships.[7] Li also challenges the hierarchical notion of the five essential Confucian relationships (father-son, ruler-subject, husband-wife, old-young, and friend-friend), all of which, aside from friendship, were based on power imbalance.[7] He does this by arguing in his letter “Discussion on Husband and Wife” that societal order is dependent upon the husband-wife relationship as its “ultimate source,” and so this particular relationship should be seen as one between friends who have willingly decided to work together.[7]
Not surprisingly, Li had a more egalitarian view of gender relationships than did traditional Confucian thinkers, regarding such relationships as “complementary."[7] He saw men and women as intellectual and spiritual equals, with equal capabilities for self-cultivation in these areas. It is worth it to note that Li did not discuss gender equality in the area of moral development, though this may be due to the fact that, for much of Chinese history, women appeared to have superior moral capacities by nature.[7]
Although the popular belief at the time was that women could not understand the Way due to their supposedly inherent “shortsightedness,” Li Zhi disagreed. To Li, someone who is shortsighted is concerned only with what happens within their lifetime, such as the events of their offspring and what happens to their physical body.[8] A farsighted person, however, considers what is beyond that, “transcending” not only the body but also the “superficial appearances of life and death” while also turning their attention away from mindless chatter and prejudices and toward the teachings of the sages, which encouraged a more unbiased perspective.[8]
Li argued that, although men and women are different, their vision is not; that is, there is no vision that is either “male” or “female,” as “vision" in the way that Li meant it, is not gendered.[8] This means that shortsightedness is not inherently female, nor is farsightedness inherently male. Li illustrates this point by describing a hypothetical situation in which there is someone with “a woman's body and a man's vision,” someone who is both female and not only values engaging in conversation of the “transcendent,” but also understands that attachment to the ever-changing things of the material world is not worthwhile.[8] He makes reference to notable “farsighted” women of the past, such as Yi Jiang (King Wu's ninth minister) and Wen Mu (also known as Tai Si, King Wen's consort and a “sage” whose “virtuous behavior” set such a high standard that it “rectified” the customs of the southern regions).[8]
Li Zhi asserts that it is only a shortsighted man who would anger at the idea of women being farsighted, and that a truly farsighted man would neither engage with nor desire the approval of shortsighted men (for, if he did, it would only make him one such shortsighted, “small-minded” man himself).[8]
Literary works
[edit]Li was a notable author of the xiaopin, a form of short essay.[9] His philosophical works included A Book to Burn and A Book to Keep (Hidden).
A Book to Burn and A Book to Keep (Hidden)
[edit]A Book to Burn is composed of Li's responses to questions from friends (“soul friends,” he calls them) in which he offers criticism of what he considers to be mistakes of the contemporary scholars of the day.[8] Li wanted to print this book because of the possibility that it would make its way to those who might be interested in his ideas. Though he feared being killed by dissenters for what he'd written, he was nevertheless optimistic that someone might read his work and understand what he meant.[8]
Li also writes of the relationship between married couples in this text, describing “loving-kindness” as being particularly “profound."[8] He discusses how the intimacy that is cultivated within such a relationship extends beyond sex and even friendship by virtue of both parties having struggled and “sacrificed” together.[8] He waxes poetic about his late wife, praising her “feminine” virtues, which, in Confucianism, referred to “womanly virtue, womanly speech, womanly appearance, and womanly work."[8]
A Book to Keep (Hidden) gives accounts of thousands of years of good and bad deeds from antiquity to the current age.[8] By Li's own advice, it cannot be read by those who possess “eyes of flesh” (a Buddhist term indicating the “most mundane form of vision” characteristic of someone unenlightened).[8]
References
[edit]- ^ Association for Asian studies (Ann Arbor;Michigan) (1976). A-L, Volumes 1-2. Columbia University Press. p. 817. ISBN 978-0-231-03801-0. Retrieved 2010-06-29.
- ^ Chen, Da-Sheng. "CHINESE-IRANIAN RELATIONS vii. Persian Settlements in Southeastern China during the T'ang, Sung, and Yuan Dynasties". Encyclopedia Iranica. Retrieved 2010-06-28.
- ^ Beck, Sanderson. "Ming Empire 1368-1644". Retrieved 16 September 2016.
- ^ Ray Huang (1981). 1587, A Year of No Significance: The Ming Dynasty in Decline. Yale University Press. p. 208. ISBN 978-0-300-02884-3, ISBN 978-0-300-02884-3.
- ^ ab c d e f g h i j k l m n o p q r s t u v w x y z aa ab ac ad ae af ag ah ai aj ak al am an ao Lee, Pauline C. (2012). Li Zhi, Confucianism and the Virtue of Desire. Albany: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ISBN 978-1-4384-3927-3.
- ^ Peterson, Willard; Twitchett, Denis C.; Mote, Frederick W. (1998), "Confucian learning in late Ming thought",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Cambridge University Press, pp. 708–788, doi:10.1017/chol9780521243339.013, ISBN 9781139054768
- ^ ab c d e f g h i j k l m n o Lee, Pauline C. Li Zhi (1527–1602): A Confucian Feminist of Late-Ming China. 2002. Stanford University, PhD Dissertation.
- ^ ab c d e f g h i j k l m Rivi Handler-Spitz, Pauline C. Lee, Haun Saussy. A Book to Burn & a Book to Keep (Hidden): Selected Writings of Li Zhi. 2016.
- ^ Mair 2001. "Introduction: The Origins and Impact of Literati Culture", paragraph 22.
Bibliography and further reading
[edit]- Qingliang Chen. Li Zhi (1527–1602) and his Literary Thought. 1999. University of Massachusetts, Amherst, Master's Thesis.
- L. Carrington Goodrich and Chanying Fang, eds., Dictionary of Ming Biography 1368-1644, 2 vols.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76), II: 807-818
- Phillip Grimberg, Dem Feuer geweiht: Das Lishi Fenshu des Li Zhi (1527–1602). Uebersetzung, Analyse, Kommentar. Marburg: 2014, 442pp.
- Rivi Handler-Spitz, Pauline C. Lee, Haun Saussy, eds. A Book to Burn and A Book to Keep (Hidden): Selected Writings of Li Zhi.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6. ISBN 978-0-231-16612-6
- Ray Huang, 1587: A Year of No Significance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81), pp. 189–221.
- Pauline C. Lee Li Zhi (1527–1602): A Confucian Feminist of Late-Ming China. 2002. Stanford University, PhD Dissertation.
- Pauline C. Lee Li Zhi, Confucianism, and the Virtue of Desire Albany NY: SUNY, 2012.
- Mair, Victor H. (ed.) (2001). The Columbia History of Chinese Literature.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ISBN 0-231-10984-9. (Amazon Kindle edition.)
- Marie Laure de Shazer, Le Club des Confucéens et Lizhi, le Mal Aimé en Chine (French Edition) ISBN 979-8738163135
- Jean François Billeter, Li Zhi, philosophe maudit, Geneva, Droz, (1979), (in French) ISBN 2600040862
李卓吾
李卓吾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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プロフィール | |
出生: | 嘉靖6年10月26日 |
死去: | 万暦30年3月16日 |
出身地: | 泉州府晋江県 |
職業: | 陽明学者 |
出生地: | 泉州府晋江県 |
各種表記 | |
繁体字: | 李卓吾 |
簡体字: | 李卓吾 |
拼音: | lǐ zhuówú |
和名表記: | り たくご |
各種表記(本名) | |
繁体字: | 李贄,林載贄 |
簡体字: | 李贽,林载贽 |
拼音: | lǐ zhì,lín zǎizhì |
和名表記: | り し,りん さいし |
英語名: | Li Zhi |
李 卓吾(り たくご、嘉靖6年10月26日(1527年11月19日) - 万暦30年3月16日(1602年5月7日))は、中国明代の思想家・評論家。陽明学左派(泰州学派)に属する。泉州府晋江県の出身。
もとの名は林載贄(りん さいし)。のちに姓を李と改める。1566年に即位した隆慶帝朱載坖の諱を避けて「載」字を除き、李贄(り し)と名乗った。号は卓吾(一説に字とも言われる)・宏甫・篤吾・龍湖叟。別号は温陵居士。
また母を早くに亡くし、父の影響を大きく受けたと言われる李卓吾は、父(白斎公)を偲ぶと言う意味で、晩年「思斎」と号した[1]。
生涯
[編集]嘉靖6年(1527年)、泉州府晋江県に生まれた。当時、明世宗嘉靖帝の治世は「北虜南倭」に悩まされる時代であった。若年を泉州で過ごした卓吾は母を早くに亡くし、父に読書詩文を教わった。26歳の時に郷試に合格したが進士とはならず地方官を歴任した。40代は北京・南京で官界生活を送り、54歳で官を退いた。その後麻城県龍湖にある芝仏院に落ち着き、そこで読書と著述に励んだ。官職から退いた後は、友人の経済的な援助を支えに生活していたという[2]。李卓吾の代表作のほとんどはこの芝仏院時期のものであり、本人の著作や同時代の友人などの記述など多くの記録が残されているが、その中でも50歳以前の卓吾の状況を伝える文は極端に少ない[3]。
その思想は陽明学左派(泰州学派)に属するが、それは官僚として各地に赴任した折、焦竑や耿定向・耿定理兄弟と親交を結び陽明学へと傾倒していったためである。その後王畿・羅汝芳といった王陽明の弟子に出会うことで、さらに李卓吾は思索を深めていった。現在の中国の歴史学者の研究では、ムスリムではないかと言われている。
なお万暦27年(1599年)、南京に赴任していた折りにイエズス会のマテオ・リッチと邂逅している。以後何度か会い、相互理解を深めたようである。李卓吾はリッチの人柄や能力、その著作『交友論』に高い評価を下している。またリッチの方でも李卓吾がキリスト教に一定の理解を示したことや文学にも科学にも精通していると書き残している。
李卓吾は儒教・仏教・道教の三教の融合を唱えていたため、外国思想であるキリスト教に理解を示したのは当然とも言えるが、相対主義者でもあった卓吾は、絶対権威の一神教であるキリスト教を完全に認めたわけではない、とも考えられている[4]。
官職引退後に刊行した詩文集『焚書(ふんしょ)』(1589年)には耿定向との往復書簡が納められ朱子学及びそれを信奉する道学者への厳しい批判が込められていた。そのため、周囲から危険思想と断定され、様々な圧力をかけられた。『焚書』を公刊した後からは、地方の郷紳や学者から迫害を受け、龍湖に住んでいた70歳の年(1596年)には巡道(地方の司法長官)史氏が「李卓吾はまだいるのか、この人物は大いに空気を汚している。もし立ち退かないなら法に照して処置しよう」(『続焚書』巻一、答来書)と郷紳たちに言ったという[5]。
李卓吾への批判はその思想だけでなく生活習慣(僧形となったこと、剃髪、極度の潔癖症であったこと、女性にも学問を講義したこと)にまで及び、彼を悩ますことになる。62歳の時に落髪出家(剃髪)を行ったとされる。李卓吾自身は、儒書をまとめた『初潭集』を編集するなど儒者の精神を捨てたわけではなかったが、世間で剃髪は”世俗との訣別、儒者の放棄”と受け取られる行為[6]として、役人などからも大きく批判され、迫害や逮捕につながるものとなった。また李卓吾への批判はその思想の特異性のみならず、彼の性格に拠るところも大きい。自ら狷介・偏狭と述べ憚らず、世と相容れないこと甚だしかった。
また73歳で南京で出版した歴史人物評論集『蔵書』も逮捕投獄の原因の一つともなった。結局、迫害を逃れたさきの北京近郊で逮捕された。そして獄中で自殺。享年76。
死後も弾圧は止まず、著作やその出版の版木は既刊、未刊問わず全て焼却、遺棄され、王朝が清に移り変わっても禁書目録にその著作は載せられることになる。また陽明学右派の書といえる『明儒学案』(明代の学者を羅列して、その学問の系統を明らかにした書[7])にもその名は記されていない。
思想
[編集]李卓吾思想の真髄は童心説にある。「童」が童子、赤ん坊と言う意味であり、人間が生まれたままの自然状態である。「童心」とは偽りのない純真無垢な心、真心を言う。これは陽明学の「良知」を発展させた先に李卓吾が到達したものである。李卓吾によれば、誰もが持つこの「童心」は人間が成長して社会生活を営み、文明化されるにつれて、道理や見聞、知識を得るなど外からもたらされるものによって曇らされ、失われるという[8]。
この思想が危険視されるのは、当時正統イデオロギーとなっていた朱子学における聖人に至る道を否定している点にある。朱子学では心を性と情に分かち性こそ理とする「性即理」をテーゼとするが、性を発露するために読書などによって研鑽を積まねばならないとする。しかるに李卓吾はそのように多くの書物を読んで道理や見聞を得ると言う研鑽そのものが「童心」を失わせるとして排し、否定的に捉えるのである。そして「童心」を失った者が成す文や行動がいかに巧みであろうと仮(にせ)であって、真なるものでは無いとする。
李卓吾が仮(にせ)、端的に言えば偽善者と非難する具体的な対象は士大夫たちである。彼が生きた明代は『金瓶梅』が書かれたり、著名な詩人がひいきの妓女のくつをお猪口にして持ち歩いたりする行動に見られるように文化爛熟あるいは退廃の時代といえるのであるが、その支配イデオロギーは儒教の中でも特にリゴリズム(厳格主義)の傾向が強い朱子学であった。すなわち士大夫は口を開けば「仁義」といった立派なことをいうが、実際の行動はそれに伴っていないことがままあったのである。こうしたダブルスタンダードに対し李卓吾は激しく反発し、士大夫やその価値観を激しく痛罵したのである。
士大夫的価値観への嫌悪・反発が明確に吐露されている例として、それまで儒者によって貶められてきた歴史上の人物や文学の顕彰が挙げられる。たとえば秦の始皇帝や馮道といったそれまで高く評価されてこなかった人々を再評価し、また『西廂記』・『西遊記』・『水滸伝』を『史記』や『離騒』とならぶ古今の至文と評価している。それらをはじめ、十数種類にのぼる批評の文章入りの本を書き、通俗文学の地位を大いに高めた。公安派の文学には李卓吾の思想的な影響が顕著である。
李卓吾の代表作『蔵書』は紀伝体の歴史書だが、その真骨頂は人物の分類や各列伝に付される評論にあり、歴史書の体裁をとった思想書と見るべきである。『蔵書』にて、李卓吾は孔子の是非の判断も現在の基準とはならず、各人は自己の是非の基準を持つべきだとしている。李卓吾は戯曲や小説にも「童心」の発露を認めて、詩文と俗文学の価値を同等のものとした。こうした李卓吾の価値判断は、彼が外的な規範よりも、自らの内なる真心、すなわち「童心」を重視し、且つ是非に定論無しとしたことにより可能となったのである。
後世への影響
[編集]李卓吾の童心説は激しい批判を浴びたが、命脈が絶えたわけではない。文学において受け継がれていった。すなわち明末に袁宏道ら公安派の唱えた性霊説はこの童心説を受けたものである。これは人間の自然な心の発露を文学によって表現しようとする考えで、その後は清の袁枚に引き継がれた。後継者としては水滸伝の補作者馮夢竜がいるが、馮夢竜は李卓吾と異なり明王朝の価値観に挑戦せず、俗文学を通じて穏やかに思想を説いていると増井経夫は述べている。
真っ向から士大夫的価値観に挑戦した李卓吾の姿勢を継ぐものは明・清を通じて現れなかった。しかし現在の我々がすでに知っているように、儒教は中国が近代化する過程において支配イデオロギーの座から滑り落ち、五四運動においては「人を喰う」教えとして批判にさらされた。ここにいたって、儒教批判の先駆者として李卓吾は漸く顕彰されるのである。中華人民共和国が政権を獲得した後も、儒教が批判にさらされる中で李卓吾は善人として持て囃された。現在、顧炎武・黄宗羲・王夫之と並んで明末清初を代表する思想家の一人として数えられている。
日本との関係
[編集]現代日本ではほとんど知られていない李卓吾だが、江戸の中頃から幕末にかけて日本でも多くの思想家に読まれていた。
野山獄中に於いて李卓吾の『焚書』を読んで非常に感激したという吉田松陰は李卓吾に深い思い入れを持っていた[9]。吉田松陰は獄死する一年ほど前から李卓吾に関心を寄せ、彼が中国の史書から言葉を抜き出したというノートには李卓吾に関係するもの(『焚書』や『続蔵書』など)が多く残され、その印象を入江杉蔵や品川弥二郎をはじめとする多くの門下生へと書き送ったという[10]。『焚書』の抄録については、これを形見として残し実読を勧める旨記された書簡[11]とともに高杉晋作に届けるよう久坂玄瑞に命じたことが知られている[9][12]。
吉田松陰は、李卓吾の時代や思想とは異質性はあったものの、その思想の中から自らを投影しその文章などを自己表現の一つとした[13]。
明治に入って李卓吾を顕彰したのは三宅雪嶺著『王陽明』(1894年)に寄せた陸羯南の跋文「王陽明の後に題す」であり、また内藤湖南は遺著『支那史学史』(1949年)に「李贄の史論」の章を立て「古今未曾有の過激思想」と評したが、それ以前に早く「李氏蔵書」(「読書記三則」の一、初出1902年。『目睹書譚』所収)で「但だ此は激薬の若し、以て常食とはすべからず」としながら一読を奨めていた。これらが清末中国人留学生の眼に触れて李卓吾再発見の一つの機縁をなした可能性が、島田虔次によって示唆されている。
「神の道」を提唱した本居宣長も、李卓吾の提唱した「童心」と似た思想を展開している。本居宣長は「道」の根本的な意味が「真心」にあり、それは童心と同じように成長する過程で得る知識や学習などにより失ってしまうと言う。この真心も童心も、共に過ごし「生まれつき」「自然な状態」を強調している。本居宣長の「内なる自然」として人間の私欲を容認していると言う点は李卓吾の思想に通じる所がある[14]。
著書
[編集]- 『焚書』
- 『続焚書』
- 『蔵書』
- 『続蔵書』
- 『李氏文集』
- 『卓吾大徳』
- 『古道録』
- 『孫子参同十三篇』
- 『浄土訣』
- 『坡公年譜』
なお明代の『西遊記』のバリエーションのひとつに『李卓吾先生批評西遊記』があるが、これは権威づけのため李卓吾の名を勝手に使用したものである。
脚注
[編集]- ^ 劉岸偉『明末の文人李卓吾 中国にとって思想とは何か』(初)中央公論社、1994年8月、25頁。ISBN 4-12-101200-3。
- ^ 劉岸偉『明末の文人李卓吾 中国にとって思想とは何か』(初)中央公論社、1994年8月、27頁。ISBN 4-12-101200-3。
- ^ 劉岸偉『明末の文人李卓吾 中国にとって思想とは何か』(初)中央公論社、1994年8月、24頁。ISBN 4-12-101200-3。
- ^ 劉岸偉『明末の文人李卓吾 中国にとって思想とは何か』(初)中央公論社、1994年8月、36頁。ISBN 4-12-101200-3。
- ^ 劉岸偉『明末の文人李卓吾 中国にとって思想とは何か』(初)中央公論社、1994年8月、30-31頁。ISBN 4-12-101200-3。
- ^ 劉岸偉『明末の文人李卓吾 中国にとって思想とは何か』(初)中央公論社、1994年8月、111頁。ISBN 4-12-101200-3。
- ^ ブリタニカ国際大百科事典
- ^ 劉岸偉『明末の文人李卓吾 中国にとって思想とは何か』(初)中央公論社、1994年8月、133頁。ISBN 4-12-101200-3。
- ^ a b 亀田一邦『幕末防長儒医の研究』知泉書館、2006年6月、87頁。ISBN 9784901654807。
- ^ 溝口雄三『李卓吾 正道を歩む異端』集英社〈中国の人と思想〉、1985年2月、16頁。ISBN 4081850100。
- ^ 「僕頃李氏焚書ヲ抄録仕候。卓吾ハ蠢物ニテ僕景仰欽慕不大方。僕若遂ニ不能見老兄ニハ、右ノ抄録ヲ残置候間、御一見可被下候」(『高杉晋作資料』第二巻、安政六年四月頃,吉田松陰より晋作宛書簡(No. 38)、51頁)
- ^ 亀田一邦「松下村塾の近代」140-141頁。
- ^ 劉岸偉『明末の文人李卓吾 中国にとって思想とは何か』(初)中央公論社、1994年8月、188-192頁。ISBN 4-12-101200-3。
- ^ 劉岸偉『明末の文人李卓吾 中国にとって思想とは何か』(初)中央公論社、1994年8月、179-180頁。ISBN 4-12-101200-3。
参考文献
[編集]- 島田虔次 『朱子学と陽明学』 岩波新書 青版、1967年。ISBN 4004120284
- 『中国思想史の研究』 京都大学学術出版会、2005年
- 「私の内藤湖南」、『中国の伝統思想』 みすず書房、2001年
- 溝口雄三 『中国前近代思想の屈折と展開』 東京大学出版会、1980年。ISBN 4130100459
- 溝口雄三『李卓吾 正道を歩む異端』集英社〈中国の人と思想〉、1985年2月。ISBN 4081850100。
- 劉岸偉 『明末の文人李卓吾:中国にとって思想とは何か』 中公新書、1994年
- 黄仁宇 『万暦十五年 1587:「文明」の悲劇』 稲畑耕一郎ほか訳、東方書店、1989年。ISBN 4497892727
- 増井経夫訳 『焚書:明代異端の書』 平凡社、1969年
- 藤野岩友編『中国文学小事典』高文堂出版社
- 亀田一邦『幕末防長儒医の研究』知泉書館、2006年6月。ISBN 9784901654807。
- 亀田一邦「松下村塾の近代」、江藤茂博・町泉寿郎[編]『講座 近代日本と漢学 第2巻 漢学と漢学塾』戎光祥出版、2020年1月。ISBN 9784864033428
이탁고
이탁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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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 | |
출생: | 가야 6년 10월 26일 |
사망: | 만력 30년 3월 16일 |
출신지: | 천 주부 |
직업: | 양명학자 |
출생지: | 천 주부 |
각종 표기 | |
번체 : | 이탁고 |
간체 : | 이탁고 |
늑대 소리 : | lǐ zhuówú |
화명 표기: | 리 타쿠고 |
각종 표기(본명) | |
번체 : | 李贄, 林載贄 |
간체 : | 李贽, 林贽贽 |
늑대 소리 : | lǐ zhì,lín zǎizhì |
화명 표기: | Rishi, Rin Saishi |
영어 이름 : | Li Zhi |
李卓吾(리타쿠고, 가야 6년 10월 26일 ( 1527년 11월 19일 ) - 만력 30년 3월 16일 ( 1602 년 5월 7일 ) ) 은 중국 명대 의 사상가 · 평론가 .
원래의 이름은林載贄( 린 사이시 ) . 해)라고 자칭했다.호는 탁고 (일설에 글자라고도 말해진다)·히로시·아쓰고·용호사.
또 어머니를 빨리 죽고 아버지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하는 이탁고는 아버지(백사이공)를 원한다는 의미에서 만년 '사재' 라고 호했다 [ 1 ] .
평생
[ 편집 ]가야 6년(1527년), 센 슈후 신강현 에서 태어 났다 . 40대는 베이징·난징에서 관계생활을 보내, 54세로 관 을 물러 났다 . 2 ] 이탁고의 대표작의 대부분은 이 잔디불원 시기 의 것이며, 본인의 저작이나 동시대의 친구등의 기술 등 많은 기록이 남아 있지만, 그 중에서도 50세 이전의 탁고의 상황을 전하는 글은 극단적으로 적다 [ 3 ] .
그 사상은 양명학 좌파 ( 태주학파 )에 속하지만, 그것은 관료로서 각지에 부임한 때, 초반 이나耿定向·耿定理형제와 친교를 맺어 양명학으로 경도해 갔기 때문이다. 그 후 왕기 ·라 여호와 같은 왕양명 의 제자를 만나면서 이탁고는 사색을 깊게 했다. 현재 중국의 역사학자의 연구에서는 무슬림이 아닌가 하고 있다.
또한 만력 27년 ( 1599년 ), 난징 에 부임하고 있던 접기에 예수회 의 마테오 리치 와 邂逅하고 있다. , 그 저작 『교우론 』 에 높은 평가를 내리고 있다. 또 리치의 쪽에서도 이탁고가 기독교 에 일정한 이해를 나타냈다고 문학에도 과학에도 정통하고 있다고 쓰고 있다.
이탁고는 유교·불교· 도교 의 삼교 의 융합을 주창하고 있었기 때문에 외국사상인 기독교에 이해를 나타낸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만 상대 주의자 이기도 한 탁고 는 절대 권위의 일신교인 기독교를 완전히 인정한 것은 아니다 .
관직 은퇴 후에 간행한 시문집 『焚書』 (1589년)에는 耿定向과의 왕복 서간이 납부되어 주자학 및 그것을 신봉하는 도학자에 대한 엄격한 비판이 담겨 있었다. 케, 용호에 살고 있던 70세의 해(1596년)에는 순도(지방의 사법 장관)사씨가 “이탁고는 아직 있을지, 이 인물은 크게 공기를 더럽혀 있다 . 5 ] .
이탁고에 대한 비판은 그 사상뿐만 아니라 생활습관(승형이 된 것, 면도, 극도의 결벽증 이었던 것, 여성에게도 학문을 강의한 것)까지까지 그리고 그를 괴롭히게 된다. (면발)을 했다고 한다. 이탁고 자신은 유서를 정리한 '초담집'을 편집하는 등 유자의 정신을 버린 것은 아니었지만, 세상에서 면발은 “세속과의 별별, 유자의 포기”라고 받는 행위 [ 6 ] 로서, 장교들로부터도 크게 비판받아 박해나 체포로 이어지는 것이 되었다.
또 73세에 난징에서 출판한 역사인물평론집 ' 장서'도 체포투옥의 원인 중 하나가 됐다.
사후에도 탄압은 멈추지 않고, 저작이나 그 출판의 판목은 기간, 미간 불문하고 모두 소각, 유기되어 왕조가 청나라 로 옮겨져 도 금서 목록 에 그 저작은 실릴 수 있게 된다. )에도 그 이름은 적혀 있지 않다.
사상
[ 편집 ]이탁고 사상의 진수는 동심설에 있다. 「동」이 동자, 아기라고 하는 의미이며, 인간이 태어난 채의 자연 상태이다. 「동심」이란 거짓이 없는 순진무구한 마음, 진심을 말한다. 이는 양명학의 '좋은 지'를 발전시킨 앞에 이탁고가 도달한 것이다. 이탁고에 의하면, 누구나가 가지는 이 「동심」은 인간이 성장해 사회생활을 영위해, 문명화됨에 따라, 도리나 견문, 지식을 얻는 등 밖으로부터 가져오는 것에 의해 흐려져 잃어버린다고 한다 [ 8 ] .
이 사상이 위험시되는 것은 당시 정통 이데올로기가 된 주자학에서 성인에 이르는 길을 부정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 그러나 이탁고는 그렇게 많은 책을 읽고 도리나 견문을 얻는다고 하는 연루 그 자체가 「동심」을 잃게 한다고 배제하고, 부정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이탁고가 임시 로 단적으로 말하면 위선자 와 비난하는 구체적인 대상은 사대부 들이다 . 버섯 의 녀석 의 쓰레기를 어지럽히고 가지고 다니거나하는 행동에서 볼 수 있듯이 문화 숙성 혹은 퇴폐의 시대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지배 이데올로기는 유교의 그 중에서도 특히 리고리즘의 경향이 강한 주자학이었다.
사대부적 가치관에 대한 혐오· 반발 들 수 있다 .廂記」・『西遊記』・『水滸伝』을 『사기 』나 『이소 』라고 하는 고지의 지문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탁고의 대표작 '장서'는 기전체 의 역사서이지만, 그 진골정은 인물의 분류나 각 열전에 붙는 평론에 있어, 역사서의 체재를 취한 사상서로 봐야 한다. '장서'에서 이탁고는 공자 의 시비의 판단도 현재의 기준이 아니며 각 사람은 자기의 시비의 기준을 가져야 한다고 한다. 이탁고는 희곡이나 소설에도 '동심'의 발로를 인정하고 시문과 속문학의 가치를 동등한 것으로 했다. 이런 이탁고의 가치 판단은 그가 외적인 규범보다 자신의 내면의 진심, 즉 '동심'을 중시하고 꼭 정론 없이 한 것으로 가능해진 것이다.
후세에 미치는 영향
[ 편집 ]이탁 고의 동심설은 격렬한 비판을 받았지만, 명맥이 끊어진 것은 아니다 . 표현하고자 하는 생각으로, 그 후는 청의 고장 으로 이어졌다 . 후계자로서는 미즈키덴의 보작자 료 몽룡이 있지만, 료몽룡은 이탁고와 달리 명왕조의 가치관에 도전하지 않고, 속문학을 통해서 온화하게 사상을 설고 있다고 마스이 케이오는 말하고 있다.
정면에서 사대부적 가치관에 도전한 이탁고의 자세를 이어받은 것은 명명청을 통해 나타나지 않았다 . 여기에 있어도 유교 비판의 선구자로서 이탁고는 점차 현창되는 것이다. 되는 가운데 이탁고는 선인 으로서 갖고 사로 잡혔다 .
일본과의 관계
[ 편집 ]현대 일본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탁고이지만, 에도 중반부터 막부 말기에 걸쳐 일본에서도 많은 사상가에게 읽혀졌다.
야산 옥중에 이탁고의 『焚書』을 읽고 매우 감격했다는 요시다 마츠네 는 이탁고에게 깊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 [ 9 ] 요시다 마츠네는 옥사하기 1년 정도 전부터 이탁고에 관심을 가져, 그가 중국의 사서에서 말을 꺼냈다는 노트에는 이탁고에 관계하는 것(『焚書』이나『속장서』 등)이 많이 남겨져, 그 인상을 이리스 기 쿠라 와 시나가와 야지 로 『焚書』의 초록에 대해서는, 이것을 형견으로 남겨 실독을 추천하는 취지된 서간 [ 11 ] 과 함께 타카 스기 신사쿠에게 전달하도록 쿠사카 겐즈 에게 명령한 것이 알려져 있다 [ 9 ] [ 12 ] .
요시다 마츠네는 이탁고의 시대나 사상과는 이질성은 있었지만, 그 사상 속에서 스스로를 투영해 그 문장 등을 자기 표현의 하나로 했다 [ 13 ] .
메이지에 들어가 이탁고를 현창한 것은 미야케 유키네 의 '왕양명'(1894년)에 전해진 육후남의跋文「왕양명의 뒤에 제목」이며, 또 나이토 후난은 유저 『시나 사학사』(1949년)에 ‘이제의 사론’ 장을 세우고 ‘고금 미만 유의 과격 사상’이라고 평가했지만, 그 이전에 빨리 ‘이씨 창고 책」(「독서기 삼칙」의 1, 초출 1902년. 『눈병서담』 소수)에서 『단다 이츠는 격약의 젊고, 그래서 상식과는 전혀 없다』라고 하면서 독독을 장려하고 있었다 .
‘신의 길’을 제창한 혼이 선장도 이탁고의 제창한 ‘동심’과 비슷한 사상을 전개하고 있다. 잃어버린다고 한다. 이 진심도 동심도 함께 보내고 '태어난다' '자연스러운 상태'를 강조 하고 있다. 14 ] .
저서
[ 편집 ]- 『焚書』
- 『속焚書』
- 『장서』
- 『속장서』
- 『이씨 문집』
- 『탁고대덕』
- 『고도록』
- 『손자참동 13편』
- 『정토 訣』
- 「파공년보」
덧붙여 명대의 『니시유키』의 바리에이션의 하나에 『이탁고 선생 비평 니시유키』가 있는데, 이것은 권위를 위해 이탁고의 이름을 마음대로 사용한 것이다.
각주
[ 편집 ]- ^ 류 기시 위 「명말의 문인 이탁고 중국 에 있어서 사상이란 무엇인가」(첫) 중앙공론사, 1994년 8월, 25페이지 .
- ^ 류 기시 위 「명말의 문인 이탁고 중국 에게 있어서 사상이란 무엇인가」(첫) 중앙공론사, 1994년 8월, 27페이지 .
- ^ 류 기시 위 「명말의 문인 이탁고 중국 에 있어서 사상이란 무엇인가」(첫) 중앙공론사, 1994년 8월, 24페이지 .
- ^ 류 기시 위 「명말의 문인 이탁고 중국 에 있어서 사상이란 무엇인가」(첫) 중앙공론사, 1994년 8월, 36쪽 .
- ^ 류 기시 위 「명말의 문인 이탁고 중국 에 있어서 사상이란 무엇인가」(첫) 중앙공론사, 1994년 8월, 30-31페이지 .
- ^ 류기시 위 「명말의 문인 이탁고 중국 에 있어서 사상이란 무엇인가」(첫) 중앙공론사, 1994년 8월, 111쪽 .
- ↑ 브리타니카 국제 대백과사전
- ^ 류기시 위 「명말의 문인 이탁고 중국 에 있어서 사상이란 무엇인가」(첫) 중앙공론사, 1994년 8월, 133쪽 .
- ^ a b 가메다 잇쿠니 『마쿠스 에 방장 유의의 연구』 치센 서관, 2006년 6월, 87 쪽 .
- ↑ 미조구치 유조 「이탁고 정도를 걷는 이단」슈에이샤 <중국의 사람과 사상>, 1985년 2월, 16페이지 .
- ^ 「저쯤 이씨 焚書ヲ抄録 마무리. 탁고 하호물 니테 종경앙 기모 불대방. 38), 51페이지)
- ↑ 카메다 카즈타니 「마츠시타무라 학원의 근대」140-141쪽.
- ^ 류 기시 위 「명말의 문인 이탁고 중국 에 있어서 사상이란 무엇인가」(첫) 중앙공론사, 1994년 8월, 188-192쪽 .
- ^ 류 기시 위 「명말의 문인 이탁고 중국 에 있어서 사상이란 무엇인가」(첫) 중앙공론사, 1994년 8월, 179-180쪽 .
참고문헌
[ 편집 ]- 시마다 츠지 『주자학과 양명학』 이와 나미 신서 청판 , 1967년.
- 「중국 사상사의 연구」 교토 대학 학술 출판회, 2005년
- 「나의 나이토 코난」, 「중국의 전통 사상」 미스즈 서방, 2001년
- 미조구치 유조 「 중국 전 근대 사상의 굴절과 전개」 도쿄 대학 출판회, 1980년.
- 리우 기시 위 「명말의 문인 이탁고:중국에 있어서 사상이란 무엇인가」중공신서 , 1994년
- 황인우 『만력 15년 1587:「문명」의 비극』 이나바타 코이치로 외역, 동방서점, 1989년 .
- 마스이 케이 부역 『焚書:明代異端書』平凡社, 1969년
- 후지노 이와토모 편 「중국 문학 소사전」고분도 출판사
- 카메 다 이치 쿠니 「에도 막부 말기 방장 유의의 연구」 치센 서관, 2006 년 6 월.
- 가메다 이치 쿠니 「마츠시타 무라 학원의 근대」, 에토 시게 히로 · 마치 이즈미 슈로 [편] 「강좌 근대 일본과 한학 제 2 권 한학과 한학 학원」 戎光祥 출판, 2020 년 1 월.
관련 항목
[ 편집 ]이지 [ 편집 ]
리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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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명나라 운남성 요안주 태수 | |
토종의 | 푸젠성 행정위원 취안저우주 진장현 |
민족성 | 논란의 여지가 있는 [ a ] |
원래 이름 | 린 자이지 |
글꼴 크기 | 그의 자호는 홍부(洪夫)이고, 호는 주오우(周夫)이며, 온령거사(溫陵居士)라고도 불렸다. |
태어나다 | 가정 6년 10월 26일 (1527년 11월 19일), 복건성 천주( 泉州) 주 |
죽음 | 1602년 3월 16일 (1602년 5월 7일) × 베이징 |
무덤 | 이주오우의 무덤 |
기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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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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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李
전기
[ 편집하다 ]가정 6년 ( 1527년 ), 이위는 복건성 천주 에서 태어났 으며 해상 무역을 하는 가문 출신이었다. 그의 친가의 원래 성은 린(林) 이었으나 , 후에 리(李) 로 바뀌었다 . 그의 조상인 린주는 취안저우 [ 7 ] 에 거주하는 부유한 상인이었으며 , 지역과 페르시아만 사이를 항해하고 무역을 했으며 셀주크 여성 과 결혼했습니다 . 그의 증조부 까지 그의 아버지 쪽 조상들은 중국인과 외국인, 무슬림 등과 계속 교류했습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보다 몇 세대 전에는 해상 무역에 종사하거나 번역가로 일했습니다. 이치가 태어났을 때, 그의 아버지 쪽 가문은 이미 쇠퇴해 있었습니다. [ 8 ] 또한 그의 사상과 저술에서 이슬람의 영향이 명백히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그는 실천적인 무슬림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 9 ]
이위는 어린 시절부터 전통적인 유교 교육을 받았습니다. [ 10 ]
가정 31년( 1552년 )에 판사 로 임용되었으나 ,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진시(金始) 시험을 준비하지 못하고 , 과거의 관례에 따라 관직에 오르기를 청했다. 그 후 그는 수년간 낮은 직위와 낮은 급여를 받는 공무원으로 일했습니다. [ 11 ]
가정(嘉靖) 38년( 1559년 )에 부친의 죽음으로 대신 직을 그만두었다 . [ 10 ] 애도 기간이 끝난 후 그는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베이징 으로 갔고 제국 대학의 강사 로 자리를 제안받기까지 1년 이상 기다렸습니다 . 이 기간 동안 그는 생계를 위해 사립학교 교사로 일했습니다. [ 11 ]
그는 아들 넷과 딸 셋을 두었지만, 가장 큰 딸만 자랐습니다. [ 10 ]
가정제 42년( 1563년 )에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자, 상관과 친구들이 당시의 풍습에 따라 선물을 주었습니다 . 선물 금액이 상당히 많았기 때문에 그는 절반으로 허난성의 땅을 사서 가족을 부양하는 데 필요한 수입을 얻었고, 나머지 절반으로 고향으로 돌아가 할아버지와 다른 조상들을 장례 지내는 데 사용했습니다. 그는 재정적으로 넉넉하지 않아 혼자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그가 나중에 아내와 재회했을 때, 그는 돌아오는 동안 극심한 가뭄으로 인한 기근 으로 두 딸이 영양실조로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 [ 12 ] [ 10 ]
그 후, 이추이는 허난성 공청 의 관립 학교 에서 3년간 교사 로 근무했고 , 베이징과 난징 의 황실학원에서 각각 몇 개월씩 강사로 근무했으며, 예부 에서 5년간 관리를 맡았고, 난징 사법부에서 약 5년간 부서기로 일했습니다. 만력 5년 ( 1577년 ) 에 운남성 요안주 태수 로 부임 했다 . [ 10 ] 요안주 태수가 되기 전에는 봉급이 매우 적어 가족을 부양할 수조차 없었다. [ 10 ] 그는 북경 예부(禮部) 서기로 재직할 때 왕양명(王陽明) 과 왕계(王啓) 의 저서를 자주 읽고 , 왕계에게 직접 자문하였는데, 이는 그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 10 ]
만력 8년( 1580년 ) 요 안주 태수로 임기를 마치고 은퇴를 결심했다 . [ 13 ] 그 후 그는 가족을 데리고 황안(黃安) , 갱정상 (耿定祥) , 갱정리(耿定里) 형제 와 함께 호광(湖廣)에서 살았습니다 . [ 10 ] 그는 耿定祥과 큰 불화와 갈등을 겪은 후 마청 [ 10 ] 의 사찰인 지불원 으로 이사하여 주사경 , 주 사구 등의 도움을 받기 로 결심 했다. [ 14 ] 그 후 그의 아내는 혼자 고향인 취안저우로 돌아갔고 만력 15년( 1587 )에 사망했습니다. 그의 아내는 죽기 전에 그가 집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여러 번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씨족의 일을 피하기 위해 돌아가지 않겠다고 고집했습니다 . [ 10 ] 이위는 아내의 죽음에 깊은 슬픔을 느꼈습니다 . [ 10 ] 마청에서는 또한 매국진과 긴밀한 교제를 맺고 그로부터 깊은 지원을 받았다. [ 11 ]
그는 지불사를 운영하면서 오랫동안 마음이 통하는 친구들의 기부에 의지해 물질적 부족을 겪지 않았습니다. [ 10 ] [ 15 ] 그는 지방 관리들의 초청으로 의식에 참석하거나 사무 처리를 돕게 되어 불필요한 문제가 생기는 것을 피하기 위해 승려 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기로 결심했습니다 . [ 10 ] 그러나 그는 어떠한 출가수계도 받지 아니하였고 , 불경을 독경하고 기도하는 등의 행위에도 참여하지 아니하였다. 그는 세균공포증이 있는 사람일 수도 있다 . 그의 옷은 항상 깨끗하며 그는 종종 청소 활동에 참여합니다. [ 16 ] [ 11 ] 반면 그는 여행을 할 때는 언제나 가마를 타고 다녔고, 눈을 쓰지 않기 위해 직접 책을 읽기보다는 조수들에게 읽어달라고 부탁하는 등 상류 지식인들과 비슷한 생활 방식을 고수했다. [ 10 ] [ 17 ]
그가 죽기 전 10년여 동안 그는 주로 자신의 작품을 쓰고 출판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지포원에는 책을 인쇄하는 데 사용하는 목판을 보관하는 특별한 장소가 있었습니다. [ 10 ] 이 기간 동안 그의 저서의 주제는 유교 고전에 대한 해석, 역사적 자료에 대한 관찰, 문학 비평, 윤리 및 철학적 사상에 대한 논의를 포함하여 매우 광범위했습니다. 그는 소설에 대한 연구를 수행할 때 이야기 속 등장인물의 도덕성 과 행동에 초점을 맞추고 마치 그들이 실제 사람인 것처럼 논평합니다. [ 11 ]
그는 말년에 류동싱 [ 16 ] 과 깊은 교류를 하였고 마경룬이 그를 위해 특별히 지은 저택 에서 살았다 . [ 15 ] 그는 또한 전통적인 유교 학자-관리의 가치와 의례 질서에 공개적으로 도전하는 견해를 점점 더 공개적으로 표현하여 공격과 비판을 받았습니다. [ 10 ] 만력 29년( 1601 ) 초봄에 지불원이 방화로 소실되었다. [ 18 ] 마경룬은 그에게 생활비를 지원해 주었다 . [ 16 ] [ 15 ] 그 당시 그는 하북성 통저우에 살았다는 설도 있다. 마침내, 황실의 검열관인 장문달이 만력제 에게 과장된 묘사를 하며 , 이위가 기존의 윤리 질서를 훼손하고 사회적 사상과 행동에 심각한 혼란을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고 경고했습니다. [ 19 ] 만력제는 이에 이위(李魏)를 “감히 이단을 선동하고 천하를 미혹하며 백성을 속였다”는 죄목으로 고발하고, 금의 위(金義位)에 의해 이위가 체포되어 그의 저작물이 파괴되도록 결정했다. [ 11 ] 심문 후, 읍 검사는 그에게 중형을 선고하지 말고 대신 고향으로 돌려보내 평생 지방 관리들의 감시를 받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다. [ 16 ] [ 11 ]
만력 30년( 1602년 )에 머리를 깎으러 간 시종이 자리를 비운 사이, 이치가 감옥에 갇혀 면도칼로 자살했다고 전해진다 . 그는 얼마 후 죽었습니다. [ 16 ] [ 11 ] 마경룬은 그의 사후에 그의 장례식을 준비했습니다. [ 16 ] [ 11 ]
리루이는 또한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를 직접 만나 종교 사상 등의 주제를 논의했습니다. [ 20 ]
가족
[ 편집하다 ]1984년 개정된 남안현지에서는 역사 문헌과 유물을 검토한 후 그의 본가가 복건성 취안 저우시 난안시 육성가 용교 연지항이라고 기록하여 , 그를 남안 용교 이씨 가문의 8대조로 규정했다 . [ 7 ] [ 21 ] [ 22 ]
무덤
[ 편집하다 ]생각
[ 편집하다 ]이지는 양명학 의 한 분파인 태주 학의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 그는 낙여방의 제자 였으며 왕양명 과 낙여방의 이론을 극단까지 밀어붙였으며 [ 23 ] , "미친 선"의 가장 열렬한 옹호자였다 [ 24 ] . 황종희는 “이탁오(李座烏)는 야생선(派進禪)을 주장하였고, 학자들은 그를 따랐다.”고 말했다. [ 25 ] 그는 공개적으로 자신을 "이단자"라고 불렀고, 우주가 물질 속의 음과 양, 두 에너지의 변화로 이루어졌으며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로서가 아니라 둘로 생겨났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의복을 입고 음식을 먹는 것이 인간 윤리의 근본 원칙”이라고 주장하고, 공리주의를 중시하고, “사물을 진실한 감정에 따라 판단하고, 낡은 것을 개혁하고 새로운 것을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관학파와 지식인 계층이 유교의 정주론 만을 권위로 여기던 상황에 대응하여, 그는 정주론을 위선적인 도가라고 비난하고, "공자 의 시비를 옳고 그름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 육경 ", " 논어 ", "맹자"가 단지 그의 제자들이 임의로 기록한 것일 뿐이며 "모든 시대를 위한 궁극적인 이론"이 아니라고 믿었습니다 . 주국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날 학자들의 도덕이 난무하는 것은 사실 이것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서를 전혀 읽지 않고 이씨 가문의 '서적'과 '서화'를 진귀한 보물로 여깁니다. 이는 사람들의 마음을 타락시키고 도덕을 훼손합니다. 이는 천하의 재앙이며 그 끝은 알 수 없습니다." [ 26 ] 그의 시와 수필의 대부분은 칠선 과 칠선 의 퇴보적인 사상을 비판한 것이다 . 그는 창조물은 반드시 자신의 의견을 표현해야 하며, "절대적 순수함"의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아이의 순수함을 저해할 만큼 너무 많이 읽고 도덕성을 이해하는 것"에 반대했습니다. 그는 문학에서 소설과 오페라의 지위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으며, ' 서방 '과 ' 수호전 '이 "역사상 최고의 문학"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 수호지 ', ' 서방연의 ' 등 많은 작품에 대해 논평을 했습니다 . 공안종의 원삼형제 는 그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생애 후반에 역사에 큰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는 역대 왕조의 공식 역사 를 바탕으로 "수장서(受藏書)"를 편찬하였고 , 명나라의 자료를 광범위하게 수집하여 "계장서(戒藏書)"를 저술하였는데, 이는 전통 사학에 획기적인 진전을 이루었습니다.
이루이는 사람들의 실제 행동과 유교 윤리의 이상적 규범 사이의 간극에 주목하여 당시 사회의 주류와는 다른 견해를 제시했습니다. 예를 들어, "사생활은 인간의 마음입니다. 사람들은 마음을 드러내기 전에 사생활을 보장받아야 합니다. 사생활이 없으면 마음도 없습니다." [ 27 ] 그는 사대부 계층의 언행불일치(실제 행동과 유교적 이상규범의 극심한 불일치)라는 공통적 현상을 논하고 비판하는 데 주력했으며, 일반 대중의 언행일치성을 칭찬했다(그러나 그는 지식인 이외의 사람들과는 거의 교류하지 않았고, 단지 이념적 논의의 사례로만 활용했다) [ 11 ] . 그는 도가 학자들을 "저속한 학자", "저속한 학자", "부패한 학자"라고 부르며, 그들이 "겉으로는 도가인 척하지만 속으로는 부와 명예를 추구한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들이 비판하는 대상에는 자신의 생각, 말, 행동이 포함됩니다 . [ 11 ] 그는 관리들의 범죄행위를 '무기 없는 도적'과 '사람을 잡아먹는 호랑이'로 여겼다.
이추이는 공자 의 사상을 기준으로 삼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여러 차례 밝혔는데, 이로 인해 많은 학자-관리 계층으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았다. [ 11 ] [ 28 ]
'아이와 같은 순수함'은 리웨이의 사상적 담론에서 중요한 개념이다. [ 4 ] 이취는 유교 등 중국 전통 윤리 개념에 대해 심도 있는 논의를 하였고, 평등주의 에 가까운 견해를 보였다 . 그는 양성평등을 지지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예를 들어, 그는 무측천 , 이강 , 태사 등의 업적을 칭찬하고 여성의 타고난 지능은 남성보다 열등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 29 ] ),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되는 것을 반대했고 [ 30 ] 남녀 의 자유로운 결혼을 주창했으며 , 탁문군 과 홍복의 배우자 선택 능력을 칭찬했지만, 전통적인 " 여성의 미덕 " 을 따르는 특정 행동 도 칭찬했습니다. [ 11 ]
이치는 후광 지역의 학생들 에게 리치 의 『우의론』을 추천했고 [ 31 ] 리치의 개인적 자질이 그가 만나본 대부분의 중국 지식인 들 보다 뛰어나다고 칭찬했습니다 . [ 32 ]
책
[ 편집하다 ]- "리의 서적 모음" 68권. 명나라 만력 27년(1599년) 난징에서 조각됨.
- "리의 계속된 책 모음" 27권으로 구성됨. 명나라 만력 37년(1609년)에 새겨진 조각품입니다.
- "역사적 논평의 필수 요소" 36권. 명나라 만력 41년(1613년) 하의각에 새겨짐.
- 6권으로 구성된 "리의 서적 소각" 명나라 만력 18년(1590년)에 마청에서 조각되었다.
- 5권으로 구성된 "리의 서적 소각의 연속" 명나라 만력 46년(1618년) 신안 해상 홍유채가 조각한 작품입니다.
- 《주탄 컬렉션》 권12, 권30. 명나라 때 조각됨.
- "주오노자삼교묘기"(또는 "선언장"으로도 알려짐), 4권. 명나라 만력 40년(1612년) 만릉의 유순이 조각한 작품입니다.
- 《이줘우의 유서》는 총 12권 23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명나라 때 지수재가 새긴 책(『도고록』 2권, 『심경요강』 1권, 『관음문』 1권, 『노자해석』 1권, 『장자해석』 2권, 『공자삼통』 3권, 『묵자안현』 2권, 『인과기록』 3권, 『정토비밀』 1권, 『안연로취』 4권, 『삼종』 1권, 『영청답변』 1권)
- 18권으로 구성된 '이씨전집'. 명나라 때 조각됨.
- "이인"은 2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명나라 때 조각됨.
- 6권으로 구성된 '육서(六書)'. 명나라 만력 45년(1617년)에 가석(賈施)이 새긴 책으로, 『역대수집서(易代數集書)』 1권, 『명나라수집서(明王國参集書)』 1권, 『소서답(燒書答)』 1권, 『소서잡담(燒書雜談)』 1권, 『서적집(書傳)』 1권, 『이야기집(話集)』 1권이 포함되어 있다.
- 8권으로 구성된 '양명 선생의 도가에 대한 기록'입니다. 명나라 만력 37년(1609년)에 무림 계급당이 새긴 작품입니다.
- 9권으로 구성된 '왕 선생의 용희문집'입니다. 명나라 만력 27년(1599년)에 새겨진 작품입니다.
- "베개 위의 열 권의 책" 6권. 명나라 인쇄본(『정계록(整界錄)』, 『순장록(荀莊錄)』, 『선의선(先儀禪)』, 『괴사(奇史)』, 『박사(薄士)』, 『구경(口敬)』, 『양생(養生)』, 『논리(論理)』, 『천년가문비밀(千年家門秘密)』 등)
- 충의수호론 비판 100권 100장. 명융우탕(明榮宇堂)과 해자산(解盛)에서 출판함(명나라 때 양정검(楊定廉)이 새긴 "전수호전비평(全水湖傳悲试)" 121권도 있음).
- 명나라 때 조각한 "서방본에 대한 주석" 2권, "홍복전설에 대한 비판" 2권, "은둔처전설에 대한 비판" 2권, "비단세공설에 대한 비판" 2권.
- "세 명의 특별한 인물 선정" 24권. 명나라 때 우운협이 판화한 책(방정학집 11권, 전기 1권, 우가지안 회고록 4권, 문집 1권, 시집 1권, 문집 1권, 자서전 1권, 전기 1권 포함).
- 《성안집》 20권, 《석삭심어보》 20권, 《사서주석》, 《폭선집》 16권, 《의구정인》 2권, 《이씨이야기》 8권, 《구왕편》 7권, 《이문령집》 20권, 《선담》 1권, 《용호담》 1권, 《문선》 4권, 《좌덕의 계략》 3권, 《이씨인과록》 3권, 《업사례》 2권, 명나라 때 조각됨.
책 태우기
[ 편집하다 ]"책 태우기"(세상이 용납하지 않고 언젠가는 불태워버릴 것이라는 의미)는 이지의 가장 유명하고 논란이 많은 책이다. 그것은 그의 반정주 사상, 즉 주자학, 정치 , 철학 , 사회 사상과 고결한 인품이 응축되어 나타난 것입니다. 최근 비평가들은 이 책을 "중국에 영향을 미친 100권의 책" 중 하나로 칭찬했습니다.
만력 46년(1618년), 그의 제자 왕번 로가 이지 의 유고를 모아 《서책계(書策界)》 5권을 편찬했다. “도서 모음”, “서문 모음”, “역사 독서 모음”, “잡문 모음”, “시 모음”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지불원 공자상에 새겨진 글'이 가장 인기가 많다.
영향
[ 편집하다 ]명나라 말기의 문인들 가운데 이위는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동정심론"을 제창하여 성실함을 강조하고 사람들이 직관에 따라 내면의 진실한 자아를 표현하도록 장려했는데, 이는 명나라 후기 미술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극작가 당현조와 서예가이자 화가인 동기창은 둘 다 이루이와 교류하였고 그의 이론에 감탄했습니다. 당현조는 '비범한 인물'의 작품은 자연스럽게 돋보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는 이치의 '동심론'과 유사합니다. [ 33 ]
일본
[ 편집하다 ]요시다 쇼인은 이수이의 작품인 '책 태우기', '책 수집의 계속' 등에 큰 관심을 갖고 공감하였으며, 학생들에게도 강력히 추천하여 읽게 하였다. [ 34 ] [ 35 ] [ 36 ]
중국학자 나이토 코난은 이조의 사상을 논하면서, 그것이 "이전이나 이후에 본 적이 없는 극단적인 사상"이라고 평했다. [ 37 ]
논평
[ 편집하다 ]칭찬
[ 편집하다 ]- 이팅지의 "이탁오 제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의 마음과 정신은 팔팔하고, 당신의 지혜와 통찰은 세월을 관통합니다. 당신은 광활한 우주에 홀로 계시고, 어떤 먼지에도 물들지 않으시고, 어떤 것에도 방해받지 않으시며, 청정하고 욕망에서 벗어나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당신이 가진 것입니다. 제 고향에는 당신 같은 학자나 관리가 없고, 심지어 전국에조차 당신 같은 사람은 드뭅니다."
- 치방현의 "이좌우묘 참배": "내 인생의 절반은 세상과 벗하며, 내 운명은 쉬안저우에 있다. 복건과 초는 얻기 어렵고, 불교와 유교는 머물지 않는다. 세상은 기쁨과 노여움을 함께 나누며, 대도는 인자함과 증오를 허락한다. 나는 또한 마음을 터놓을 친구를 찾고 있으며, 지금도 그를 찾고 있다."
- 왕본기(王本奇)의『서집(書集)』 서문: “스승께서는 평생 읽지 않은 책이 없고, 표현하지 않은 생각이 없으셨습니다. 마치 배고픔과 갈증이 배부를 때까지 멈추지 않는 것처럼 모든 것을 읽으셨고, 마치 숨이 막혀 토해낼 때까지 멈추지 않는 것처럼 모든 것을 토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한 마디의 말이 세상의 시비를 영원히 좌우할 수 있고, 한 번의 기침과 침 뱉음이 세상의 이치를 영원히 좌우할 수 있습니다. 웃음, 분노, 꾸지람만으로는 모든 것이 글이 될 수 없습니다. 그의 말씀은 진솔하고 깊으며, 그의 글은 천지를 뒤흔들어 놓기에, 귀머거리가 듣고, 눈먼 자가 똑똑히 보고, 꿈꾸는 자가 깨어나고, 깨어 있는 자가 깨어나고, 병든 자가 일어나고, 죽은 자가 살아나고, 불안한 고요함이 사라지고, 시끄러운 결절이 사라지고, 차가운 장이 따뜻해지고, 염증이 생긴 마음이 치유됩니다.” 멋지다. 울타리에 갇힌 사람들은 스스로 빠져나오고, 완고하고 굽히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겸손해지고 감동을 받는다."
- 위안종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 "형들과 상팡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말을 내려놓고 소파에 앉아 잠시 쉬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책상 위에 웡의 글이 눈에 띄었습니다. 읽고 너무 기뻤습니다. 교약후에게 보낸 편지 와 사해팔물도 읽었습니다. 눈은 피곤하지만 마음은 쉬고 싶지 않았습니다. 오늘 손무자의 수기를 읽었습니다. 저는 하룻밤 사이에 부자가 된 거지입니다." 남의 글을 읽으면 마음이 아프지만, 옹 선생의 글을 읽으면 마음이 행복해집니다. 몇 마디만 해도 기운이 납니다. 전생에 익숙해져서 그런 걸까요? 운중에서 온 사신들이 계속 옵니다. 다행히 최근에 당신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저는 백씨 노처녀라 읽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혀가 길고 손이 깨끗한 노인이 어떻게 이 영암경(靈巖經)에 주석을 달 수 있겠습니까? "나중에 웬링 주석이 출판될 것이고, 이전의 웬링 주석은 팔 곳이 없을까봐 걱정입니다." [ 38 ]
- 위안훙도는 말했다 : " 탁 무는 그의 책 『독서의 즐거움』에서 이렇게 썼다: "신께서 나에게 용기를 주셨다. 옛사람들이 덕이 있다고 칭찬한 사람들은 모두 가짜이고, 현학적이고, 무능하고, 쓸모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멸시하고, 버리고, 침 뱉고, 저주한 사람들은 모두 나라와 가족과 생명을 맡길 수 있는 사람들이다. 나는 그의 말을 잠시 읽었을 때 너무 과장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책의 이 부분을 읽고 나서 탁무의 글이 역사상 가장 심오한 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나라의 수많은 작품 중에서 오직 탁무의 작품만이 백성들을 기쁘게 하고, 미궁( 진지루 )의 작품은 세상에 큰 이로움이 된다. 그것들은 참으로 선하고 위대한 사건이라고 불릴 수 있다." [ 16 ]
- 풍원중이 이탁오 선생의 묘를 애도하며 지은 시입니다. "그는 스스로 혼돈을 깨고 고금의 시류를 바꾸었다. 그는 용기와 지혜로 가득 차 있었으며, 사후 그의 이름은 더욱 유명해졌다."
- 허자창 : “ 주천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좌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 그는 모든 좋은 말을 싹 없애고, 『수호전 』을 쓰는 사람은 지옥에 갈리는 벌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 그는 오랫동안 그 책을 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원망하고 냉소적으로 대할 때, 그는 이 책을 좋아하여 평론하고 문장을 지적했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본래의 가르침을 거스르고 자신의 계략을 드러낼 수 있습니까? 그래서 나중에 이상한 재앙이 온 것입니까? 이좌오에게는 제자가 있어서 그것을 오중에게 가져왔습니다. 오의 학자 원무야, 풍우룡 등은 이좌오의 학문을 매우 좋아하여 보물 처럼 여겼습니다 . 그들은 그것을 보고 사랑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여러 번 교정하고 삭제하고 수정하여 제게 보여준 『잡록』과 『유물』에 첨부했습니다. 글씨와 조각은 정교하고 비번은 조가 아닙니다. 제가 책을 펼쳤을 때, 맑고 상쾌합니다. 바로 이거예요." [ 39 ]
- 우위(吳玉)의 『이탁오전(李卓烏傳)』에 따르면, "장문대(张文達)와 왕아량(王雅良)은 단번에 탁오의 책을 불태우고, 하루 만에 탁오를 모함했다… 탁오의 책은 인기가 많아 백성들이 좋아하지 않았고, 백성들도 달가워하지 않았다. 조정에서 불태웠지만, 학자와 관리들이 보복하여 일본 에 유포되었다 ."
- 송숙은 이지를 자신의 소울메이트로 여겼다. 1899년에 그는 "송은의 <은밀한 방서>를 읽으며"라는 제목의 네 편의 연시를 지었는데, 세 번째 연시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씨 가문은 작은 가문이라 아무도 전하지 않았다. 황량한 세상에 남겨진 원고에 대해 누가 묻겠는가? 누가 그것을 감상할 수 있겠는가? 이제부터 나는 영원히 살 것이다."
경멸적인
[ 편집하다 ]- 장문달 : “전성기에는 관리로 재직했고 , 노년에 머리를 깎았습니다 . 최근에는 『수서(受書)』, 『소서(燒書)』, 『탁무대덕(左武大德)』 등의 책을 새겼는데, 이 책들은 전국에 유포되어 사람들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그는 여불위(呂不威) 와 이연(李淵)을 지혜롭다고, 이사 (死使) 를 재주가 뛰어나다고 , 풍도(風道)를 관리로, 탁문군(左文君)을 배우자를 잘 고른다고, 진시황(秦始皇) 을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로, 공자(孔子) 의 시비는 믿을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는 미치고 변덕스러워 마땅히 파멸되어야 합니다. 더욱 증오스러운 것은 그가 마청(麻城) 에 살면서 파렴치한 행실을 보인다 는 것입니다. 그는 파렴치한 사람들과 함께 승원(僧院)을 방문하고, 기생을 데리고 낮에는 목욕을 하고, 선비들의 아내와 딸들을 승원으로 유혹하여 설법합니다.” 법. 어떤 사람들은 이불과 베개를 가지고 다니며 자기도 합니다. 상황이 정말 어처구니없습니다. 그는 또한 " 관음 문제"라는 책을 썼는데, 그 책에서 소위 관음은 모두 학자들의 아내와 딸입니다. 젊은이들은 그의 오만함을 좋아한다. 그들은 거칠고 방종하며, 다른 사람들을 선동하여 사람들의 재산을 빼앗고 아내를 강간하게 합니다. 그들은 동물과 다르지 않으며, 그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과거에는 일부 학자와 공무원 들도 진언을 외우고 승려를 예배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묵주를 계율로 삼고, 피난처의 상징으로 방에 멋진 이미지를 걸어 놓습니다. 그들은 공자 의 가족 규칙을 따르는 법을 모르고 , 선과 승려 에 집착합니다 . 최근에 이취가 수도( 베이징 ) 에서 40마일 떨어진 통저우 로 이사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 만약 그가 수도에 들어가 적의 유혹을 받는다면, 그것은 마성의 연속이 될 것입니다. 예부에서 통주 지방 관리들에게 편지를 보내 이수이를 고향으로 돌려보내 처벌을 받게 하라고 명령 하길 바랍니다 . 또한 각 도와 각 성 정부 에 편지를 보내 조의가 출판한 모든 책과 조의 집에서 인쇄되지 않은 책을 모두 찾아내어 불태워 버리도록 하라. 그래야 후대에 재앙이 닥쳐오지 않을 것이다. 다행히도 세상은 좋은 곳에 있습니다! " [ 19 ]
- 만력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 " 이추는 감히 이단을 선동하고 세상을 미혹하며 백성을 기만했습니다. 그는 공장 경비원 과 오성(五城)에 의해 체포되어 처벌받아야 합니다. 그의 모든 책은 인쇄되었든 아니든 지방 관원에 의해 수색되고 불태워져야 합니다. 어떤 책도 남겨서는 안 됩니다. 그를 비호하고 비밀리에 보관하는 추종자가 있다면 관련 부서와 기타 관련 관리들은 그들을 고발하여 처벌해야 합니다." [ 19 ]
- 구셴청 : " 리줘우는 남들은 틀리고 남들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며, 성공과 실패로만 옳고 그름을 판단합니다. 학자들은 이제 망가졌고, 지붕을 올려다보며 속으로 한숨만 쉬는 것뿐입니다! 도대체 뭐 하는 겁니까!" [ 40 ]
- 주국진 : " 탁무의 이름은 탁우입니다 . 저는 한때 피저우의 배에서 그를 만났습니다 . 그는 총명하고 용감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만의 장점이 있습니다. 그의 책을 읽을 때, 그가 엉뚱한 주장을 할 때마다 "저는 신랑에게 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아, 그는 신랑인데, 어떻게 법을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 법은 너무나 심오합니다. 성인은 원래 "옳다"라는 단어를 언급했지만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저는 그것에 대해 한마디도 할 수 없습니다. 저는 마음으로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인이 감히 말하거나 참아 말한 것이 아닙니다. 현대 학자들이 난무하는 것은 사실 이것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서 의 원본 경전을 읽지 않고 , 사람들은 이의 "장서(裝書)"와 "소서(燒書)"를 집어 들고 그것을 진귀한 보물로 여깁니다 . 이것은 사람들의 마음을 타락시키고 도덕을 해칩니다. 이것은 재앙입니다. 세상은 어디로 향할지, 그리고 그 끝이 어디일지 알 수 없습니다. 리의 책은 아이디어가 있는 사람들에게 매우 영감을 주고 열린 마음을 줍니다. 아이디어가 없는 사람들은 분명 무모한 악당이 될 것입니다. 탁무가 말했다: "동남해만 있고 서북해는 없습니다. 해가 지면 어디로 가서 동쪽으로 나오는지 궁금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곤륜산 에 숨겨져 있다고 합니다 . 그러나 해가 하늘 한가운데에 있다면 아래에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위아래가 없이 사방을 도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게다가 위에서 아래로 보면 사방이 가운데에 있습니다. 사방만 있다면 어떻게 위를 뚫고 멀리 내려갈 수 있겠습니까?" 이치가 매우 명확하니 더 이상 말하지 마십시오. 탁무는 왕릉 , 온교 , 조보를 모두 어머니를 죽인 도적으로 꼽았습니다. 사절을 만나 칼에 쓰러졌을 때 어떻게 령이 그런 짓을 할 수 있었겠는가? 교는 동쪽으로 장강을 건너 사신이 도착하면 곧바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바오의 어머니도 도적들 가운데 있었으므로, 그는 항복하여 어머니를 구할 수도 있었지만, 도적들을 물리쳐야 했고, 그렇게 되면 나라의 법에 따라 어머니와 아들은 모두 죽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충성심과 효도를 모두 잃었을 것이고, 후회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옛날 옛적에, 고대인들은 어쩔 수 없이 그럴 수밖에 없었고, 거의 비통해했지만, 비평가들은 여전히 요구했기에, 호광 이나 풍도 보다는 좀 더 관대했어야 했습니다 . [ 41 ]
- 『사문총서총람총람』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 제갈량이 쓴 모든 책은 거칠고, 사악하고, 터무니없으며, 성인도 무법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 책은 공자를 부정하고 그 자체를 칭찬하고 비판하며,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선악을 뒤집는, 특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입니다 . 이 책은 파기될 수 있지만, 그의 이름은 더럽혀질 가치가 없습니다 . 제갈량은 거창한 말로 세상을 속였고, 동시에 교홍과 같은 사람들은 그를 성인으로 여겼습니다. 오늘날에도 시골의 가난한 학자들은 그의 허황된 명성에 충격을 받고 여전히 그를 존경하고 믿습니다. 우리가 이를 무시한다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독창적인 업적을 과시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두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의 범죄를 폭로하기 위해 그의 목록을 특별히 보존했습니다." [ 42 ] [ 28 ] "…수이는 성인도 아니고 법도 없었기에 감히 다른 의견을 피력하였으니, 소문을 퍼뜨려 체포되어 처벌을 받았지만 두려워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러나 교홍 등이 그를 높이 칭찬하여 널리 칭송하니, 이에 마을 서당의 무식한 학자들이 모두 그를 존경하고 믿었다. 그는 오늘날까지 사람들의 마음과 풍속에 해를 끼쳤다. 그러므로 그를 처형하고 그의 책을 파기할 수는 있겠지만, 그의 직함은 마땅히 보존하여 그가 정통 교리 의 죄인 이며 백성을 미혹한 이단자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이는 무식한 사람들이 그의 허위 명성에 놀라 그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이것이 또한 그의 약점을 드러내는 의미이다." [ 43 ] “저는 기록된 ‘구정역경’을 수집했습니다. 이것은 부부, 부자, 형제, 군주와 신하, 벗의 다섯 가지 범주로 나뉜 이야기 모음입니다. 각 범주에는 자체 하위 제목이 있으며 모두 고대인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하고 주석을 추가합니다. ‘초탄’이라는 이름은 롱탄이 승려였을 때 편찬되었다는 의미이므로 그 이름이 붙었습니다. 전반적으로 유교와 불교의 합일을 주장합니다. 터무니없고 우스꽝스럽기 때문에 단어의 의미를 대충 이해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것이 터무니없다는 것을 알지만 이 책은 명나라 말에 유행했는데, 이는 당시 사람들의 마음과 풍속이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보여줍니다.” [ 44 ]
- 왕부지 : 청원은 후에 스스로를 '계완(戒完)'이라 칭했는데, 이는 의봉의 '태극완춘(太極萬春)' 사상에서 영감을 받은 것입니다. 이는 그가 이단에 빠진 자들과는 달리 청렴결백한 사람임을 보여줍니다. 의봉의 '태극완'에는 수치심, 겸손, 그리고 시비(時非)가 모두 담겨 있습니다. 미옹( 방이지 )은 조화를 아는 것의 조화를 조화의 조화로 여긴 듯합니다. 따라서 그는 장자의 두 구절을 깊이 차용 하여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그는 곰발바닥과 물고기를 모두 가질 수 있지만, 둘 다 가질 수 없다면 둘 다 잃게 된다고 믿었습니다. 특히 그는 하신인(何心陰) 과 이홍복(李洪福) 을 처형해야 할 인물로 직접 고발했는데, 이는 명백한 사건입니다. 그는 중요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자신의 몸으로 철과 기름을 시험해 보고 욕망을 탐닉했습니다. 무지하고 경솔한 사람들이 그의 본보기를 따랐습니다. 그의 책은 지금도 유포되고 있습니다. 오늘 당장 그를 없애야 하지 않을까요?" [ 45 ]
- 고염무 : “…옛날부터 이수만큼 무모하고 대담하게 성인 에게 반기를 든 악인은 없었습니다 . 그러나 엄격한 황제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그의 책은 여전히 백성들 사이에 유포되고 있습니다. 천계 5년 9월 , 사천성 검시관 왕 황제에게 다음과 같이 회고했습니다. “이수(李受)의 책은 기이하고 황당합니다. 검사소에 그것들을 불태우고 시장에 팔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그 책들은 아직도 유통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학자와 관리들이 그의 책을 좋아했고 자주 수집했습니다. 그 책들은 오늘날까지 소실되지 않았습니다. [ 46 ]
다른 견해
[ 편집하다 ]- 위안 중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 "겉은 뜨거우면서도 속은 차갑고, 뼈가 각져 있었습니다. 그는 매우 공격적이었고 남을 비난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는 자신과 의견이 맞지 않는 사람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의지가 강했고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했습니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 16 ] “그는 태수가 되어 법도를 간소하게 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스렸다. 사찰 에 가서 정사를 볼 때는 황제와 함께 법당에 앉거나 명승을 그 사이에 앉혔다. 경전과 문서 사이에 불일치가 있으면 황제와 함께 비밀을 논의했다. 모두가 이에 놀랐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봉급 외에는 다른 재물이 없었다. 얼마 후 옥과 옥에 싫증이 나서 계족산 에 가서 용전(龍典)을 읽고는 떠나지 않았다. 검관 유미(劉尾)는 그의 청렴함에 감명을 받아 사직 하고 귀향하도록 청원서를 썼다. [ 16 ] “그는 몸이 마르고 음악과 성에 무관심했습니다. 그는 또한 순결했고 여자를 미워했습니다 . 그래서 그는 자식은 없었지만 첩이나 하녀는 두지 않았습니다 .” [ 16 ] “그녀는 뼈를 드러내기 위해 피부를 벗겼는데, 이는 이치의 방식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녀가 밖에 나가서 토론할 때는 오직 칼과 칼만을 사용했습니다. 그녀는 젖을 나르는 사자와 같았고, 향기를 퍼뜨리는 코끼리와 같았으며, 그녀는 고독하고 교만하여 그녀에게 응답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 16 ] "그녀는 바닥 청소를 좋아했고, 여러 사람이 빗자루를 묶어도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옷깃과 치마를 빨아서 매우 깨끗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녀는 얼굴과 몸을 닦았는데, 마치 물을 씻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녀는 저속한 손님을 싫어했고 그들을 만나기를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즉시 그녀는 그들의 냄새가 싫어서 멀리 앉으라고 했습니다." [ 16 ] "그의 재치 있고 유머러스한 글은 거침없이 쓰여졌습니다. 웃음을 자아내고 뼈를 에는 듯한 감동을 선사했습니다. 그는 읽은 모든 책을 좋은 판본 으로 베껴 썼습니다 . 그는 동서양의 비밀 언어인 이소(李消) , 마(史)와 반(半) 의 시 , 도(道)( 원명 ), 사(陵雲), 유(劉), 두(扶)의 시, 그리고 송나라와 원나라의 유명 인사들의 기이 한 이야기 와 노래들을 읽었습니다. 그는 붉은 붓으로 한 글자 한 글자 교정했습니다. 그의 글은 명료하고 독특하며, 그는 종종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립니다. 그의 글은 이상하거나 낯설지 않고, 그의 마음속 독특한 견해를 표현합니다. 그의 글은 찬란하고 눈부셔서 자세히 들여다볼 수 없습니다. 그는 많은 시를 쓰지 않았지만, 그 안에는 신의 경지가 가득합니다. 그는 또한 글쓰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는 매번 먹물을 갈고 종이를 펴면서 옷을 벗고 큰 소리를 지르면 토끼는 뛰어오르고 오리는 떨어진다. 그의 걸작들도 매우 사랑스럽고 가늘고 튼튼하며 종이 위에는 철제 손목과 뼈가 그려져 있다.” [ 16 ] “공작이 기분이 좋아지자 그의 행동은 더욱 기괴해졌다. 그는 이단자들을 비판 하고 그들을 멸시하는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 16 ] "그는 경공과 토론했는데, 그의 노트는 매 글자가 수만 자에 달하여 도교 의 숨은 뜻 과 비바람, 강의 물결을 드러냈습니다. 그의 저서를 읽은 사람들은 그의 지식에 감탄했고, 그의 재능에 감탄했으며, 그의 글은 두려워했습니다." [ 16 ] "개공은 책을 읽지 않을 때 특히 역사를 읽는 것을 좋아했으며 , 고대의 놀라운 작품에 대한 통찰력이 뛰어났습니다." [ 16 ] "옛날에 누군가가 위대한 신사 로 불릴 때마다 그는 때때로 그들의 단점을 공격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악당 이라고 불렸을 때 그는 때때로 자신의 강점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 16 ] "그들의 의도는 주로 빈말을 버리고 실제 적용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피상적인 것을 버리고 정신을 드러내다. 표면적인 추론을 버리고 인간 본성을 이해해야 합니다.” [ 16 ] “ 진실을 바로잡고 왜곡하는 데에는 약간의 실수가 있지만 편견도 있습니다. 그러나 조롱과 반박을 무시하고 주의 깊게 읽어 보면, 그 반박의 본질이 세상과 사람들의 마음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이 정통 교리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 이는 성인을 파괴하고 교리를 배반하기에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 16 ] "공의 책은 쌓임을 없애고 침체를 몰아내는 책이라고 하는 것이 옳습니다. 세상에서 없어서는 안 될, 복사할 수 없는 희귀한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너무 일찍 출간되어 독자들의 마음이 바뀌지 않았고,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공이 불행을 겪은 이유는 책 때문이 아니었다." [ 16 ] "대두공에 대해서는 예측하기 어려운 점이 몇 가지 있다. 그는 관직에 오르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고, 오직 나라를 위해 봉사하는 방책만을 이야기했으며, 세상 일은 명예만 생각하는 하찮은 학자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정직하고 독선적이며 얼음처럼 차가운 사람이었지만, 거만하고 비열하고 옹졸한 사람을 몹시 싫어했으며, 그런 사람은 반드시 자손에게 해를 끼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본래 모든 소리와 광경을 멀리하였고, 탐욕을 더러운 것과 같은 것으로 여겼으나, 세상의 광경을 사랑하였고, 꽃과 달과 아이들의 처지를 크게 감상하였는데, 마치 그것들을 자신의 외로움을 표현하는 데 사용하였던 듯하였다. 그는 본래 괴짜이며 많은 것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는 사람들과 사물들과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강점과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존경하는 경향이 있으며, 자신을 그들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합니다. 본래 그는 세상을 잊고 죽은 사람이었으나, 옛날 충신과 의인, 기사와 검객들이 남긴 유품과 생사여탈의 우정을 읽고는 눈물이 나서 일어서서 흐느끼며 참을 수 없었다. 만약 누군가의 뼈가 금속이나 돌처럼 단단하고, 그의 정신이 구름처럼 얇다면, 그는 말을 하면 말을 하게 되고, 그의 뜻은 가는 곳마다 표현될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물리치고 왕이 되었습니다. 공문거는 위무를 어린아이처럼 대했고, 지수예는 종혜를 노예처럼 여겼다 . 새의 둥지는 뒤집어져도 지저귐소리는 변하지 않는다. 매의 날개는 뚫을 수 있지만, 그 용의 본성은 길들일 수 없습니다. 이는 인삼을 태우고 창포를 베어내고, 노자처럼 칼을 갈아서 얻은 결과이다. 아아! 그의 재능은 너무 높았고, 그의 정신은 너무 고귀해서 세속적인 세상에 묻혀 있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투옥되었고 버드나무 아래 서서 자신을 손등 이라고 부른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 정말 안타까운 일이에요! 조심하는 게 좋아요! ” [ 16 ] “사람이 배울 수 없는 데에는 다섯 가지 이유가 있고, 배우고 싶어하지 않는 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당신은 학자이자 공무원이며, 순수하고 정직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당신들을 따르고 평범한 사람들처럼 행동하기 때문에 배울 수가 없습니다. 너는 어린 소녀 의 방 에 들어가지 말고 , 창녀의 침대에 올라가지 마라. 하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정욕에 빠져 있습니다.하지만 그들은 아직 특혜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배울 수가 없습니다. 당신은 진실을 깊이 이해하고 그 위대함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우리 국민은 글자에만 집착해 그 심오한 의미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배울 수 없는 세 가지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노년까지 오직 글을 읽는 법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우리 세대는 세상사에 깊이 빠져서 책을 읽지 않았고, 어떤 식으로도 배우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정직하고, 활력이 넘치고, 올곧으며,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소심하고 약해서 남에게 절하며 이 다섯 가지를 배우지 못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강하고 거만하며 복수하고 싶은 마음과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어한다면, 그가 글을 쓸 때 아무도 그에게서 배우고 싶어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공직에서 물러나 은퇴했으니, 유명한 산으로 가서 숨어 지내야 합니다. 그 대신 당신은 명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인간 세계를 떠돌아다닙니다. 당신은 학생이 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속이는 데는 서두르지만, 신중함을 게을리 하는 사람, 바른 행실을 닦지 않는 사람, 쾌락에 탐닉하고 쾌락에 탐닉하는 사람, 무딘 칼로 어지럽히는 사람은 배우려 하지 않는 세 번째 사람입니다. 무언가를 배울 수 없는 사람은 평생 그것을 배울 수 없습니다. 그리고 배우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배우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아하더라도 배우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마술사가 말한 바에 따르면, 그는 머리를 깎았 지만 여전히 자신의 미덕을 홍보하기 위해 왕관을 쓰고 있었습니다 . 그는 80세가 되어서도 여전히 자신의 욕망을 잊지 않았습니다. 이게 사실인가요? 소위 두꺼비의 배설물은 입에서 나옵니다. [ 16 ]
- 션잔 : " 은거 후 출가하여 초나라 황저우(黃州) 용담산(龍潭山)에 살았습니다. 그는 수천 명의 유교 신도와 불교 신도를 끌어들였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해탈과 직진의 원리에 기반을 두었고 , 고상한 이상과 영웅적 정신을 지닌 많은 젊은이들이 그를 존경했습니다. 후세 사람들은 그를 미친 듯이 추종하여 유교를 파괴 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불교 교리를 버렸습니다." [ 47 ]
- 신철(沈鐵)의 이 좌오(李座烏) 전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재지가 다시 백문(白門, 남경)으로 갔고, 교홍(趙洪)은 한림(漢林)으로 집에 남아 옛 벗을 찾았는데, 남경의 학자들은 더욱 그에게 매료되었다. 그가 단상에서 설법하자 온 나라가 감동했다. 북동주(北同州) 의 마경룬(馬景倫)이 관료 로 유배 되자 재지를 집으로 초대하여 향을 피우고 제자처럼 행하니, 연(燕)과 기(奇) 사람들이 그를 보고 절을 하였다."
- 리아오 : "...도운유가 나에게 중심 두루마리를 써 주었는데, 그 안에 내가 '세상에 맞서 감히 순수함을 보여라'고 했습니다... '순수함을 보여 준다'는 것은 어린아이인 척하거나 유치하다는 뜻이 아니라, 참된 지식과 성실에 기반한 솔직한 표현입니다. 이 표현은 과장되었을 수 있지만 거짓이나 위선이 아닙니다... 저는 이것을 좋아해서 동방삭 , 이루이 , 진성 산 , 왕중 , 디오게네스 , 볼테르 , 스위프트, 버나드 쇼 , 조지 패튼 장군 과 같은 인물들을 선호합니다. 패튼, 저는 그들의 날카로움과 그것을 보여주려는 열정을 좋아합니다. ... 황사성에 기사를 썼고 ...그들은 저에게 4,000위안을 주었습니다. 저는 즉시 ...황사성을 찾아서 말했습니다. "농담이군요. 제가 받는 돈은 4,000위안 뿐이에요. 3만 위안을 가져와." …실제로 3만 위안을 줬는데, 제가 린정지 에에게 선거 자금 으로 줬어요 . 이렇게 "세상에 맞서 결백을 보여줬던" 거죠. 내 태도는 충분하지 않았고 약간 "저속"했습니다…” [ 48 ]
- 황런위 : " 리치 의 비관주의는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그가 살았던 시대에도 속합니다. 전통적인 정치가 굳건해졌고, 종교 개혁 이나 르네상스 와 같은 새로운 활력은 그런 환경에서는 자랄 수 없습니다. 사회적 환경은 개인의 지적 자유를 매우 제한 하며 , 사람들의 성실함 과 정직함은 관목 으로만 자랄 뿐 , 정글 로 자라날 수는 없습니다 ." [ 11 ]
- 리카르도 리카르도의 중국에 대한 기록 : "이 두 유명인( 교홍 과 이위 )은 모두 리카르도 신부를 매우 존경했는데 , 특히 유교 배교자 리카르도 신부 가 외국 사제를 방문했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얼마 전 학자들이 모여 기독교의 길에 대해 논의했을 때, 그는 토론 내내 침묵을 지킨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기독교의 길이 유일하게 참된 삶의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리카르도 신부에게 두 편의 짧은 시가 적힌 종이 부채를 주었습니다..." [ 49 ]
- 황종희 : "... 탁무는 평생 사람을 꾸짖는 것을 좋아했고, 그의 학문적 학식은 기이했기에 그를 꾸짖는 것은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 50 ]
현대
[ 편집하다 ]이지의 글은 명나라 이래로 여러 차례 금지되었으며, 그의 작품을 불법 복제하거나 심지어 위조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의 제자 왕번치는 “탁무 선생이 죽은 후, 그의 책은 더욱 유명해졌고 그의 이름도 더욱 중요해졌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시중에 나와 있는 모든 희곡과 에로티시즘 주석판은 모두 탁무 선생이라고 불립니다.”라고 말했습니다.
1974년 린뱌오 비판, 공자 비판 운동 당시 중국 공산당 관계자들은 리루이가 공자 를 비롯한 여러 유교 인물과 사상을 맹렬히 비판하는 데 전념했으며, 진시황 과 법가를 칭찬하는 한편 사대부 를 맹렬히 비판했다고 밝혔습니다 . 따라서 리루이를 "법가를 존중하고 유교를 반대하는 진보적인" 사상가로 칭송했습니다. [ 51 ]
전기 및 행위
[ 편집하다 ]- 주오우의 이론(책 태우기)
- 자화자찬(책 태우기)
- 삶에 대한 감정 (책 태우기)
- 위안 중도: 리 웬링의 전기(커쉐자이의 최근 수필집에서 발췌)
- Wang Keshou: Zhuowu Laozi (Jifu Tongzhi)의 묘비
- Shen Fu : Li Zhuowu (Minshu)의 전기
- He Qiaoyuan: Li Zhi (Minshu)의 전기
- Qian Qianyi : Zhuo Wu Li Zhi (다대 시집)
- Tan Qian : Li Zhi ( Guoqie ) 의 전기
- Zha Jizuo : Li Zhi, Yuan Huang (죄의 기록)
- 푸지린: 이지의 전기(명수: 이교도의 전기)
- 왕홍서(Wang Hongxu): 이지(명나라 역사 초안)
- 팽지칭: 이좌오우 전기(평신도 전기)
- 마청현 연대기: 이지의 전기
- "취안저우주 기록": 이지의 전기
- "Fujian Tongzhi": Li Zhi의 전기
- 운남 일반사: 이지(Li Zhi) 전기
- 오우(吳牛) : 명나라 이좌오(李座牛)의 전기
- 홍자오 : 탄위안 컬렉션
- Wang Benqi: 스승 Zhuo Wu의 메시지
- 션 더푸 : 완리 야와이 비안
- 주궈진(Zhu Guozhen) : "용추앙의 단편"
- 션잔: 최근 이벤트
- 셰 자오저: 오행
- 류동과 우이정: 황도 풍경에 대한 간략한 설명
- 황종희 : 명나라 유교의 역사
- 구옌우 : " 일지루 "
- 밍 시루
- 이좌오기(鈴木土尾) ( 스즈키 토라오 지음)
- 린과 리의 가계도
또한 참조
[ 편집하다 ]노트
[ 편집하다 ]- ^ 초창기에는 중국 학계에서 리지의 민족 정체성에 대한 분쟁이 전혀 없었습니다. 중화민국 이래로 후이족의 정체성이 형성되었습니다. 중국 학자들, 특히 후이족 학자들은 6대째 임 누가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셀주크족 여성과 결혼했다는 사실을 근거로이지를 후이족 으로 분류합니다 . 연구자 Zhao Qing은 “조상의 중대가 이슬람을 믿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문서적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Lin Ni가 무슬림이었다는 이유만으로 Li Zhi도 무슬림이었다고 가정하는 것은 분명히 비합리적이다”라고 믿고 있습니다 [ 1 ] : 4, 9, 12 .
- ^ "Zhi"는와 광둥어 에서는 "zhi"로 발음됩니다 .
- ^ 만력 11년(1583년), 이치의 사촌 임치재는 이광기가 편찬한 『무자공계보』를 근거로 “원나라 말기에 군수 물자가 많이 들어 곡식과 은이 부족하여 한 사람이 어떻게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 게다가 어린 고아들이 어머니의 집에서 지내는 경우가 많아 이름을 바꾸고 어머니의 성을 임씨로 바꿨다”고 주장했다. 이추이의 큰할아버지 이광기는 《이씨 족보》에서 천주 이씨 가문의 1대에서 18대까지를 기록했습니다. 18대 이형(지핑)은 바타이의 임씨 부인과 결혼했습니다. 이형의 넷째 아들 준화(尊和, 본명은 무채)가 왕위를 천주(泉州)에 물려주었는데, 그는 이씨 가문의 19대손인 얀루(延魯)였으며, 자는 준화였다. 그는 취안저우 린리 씨족의 첫 번째 조상이었습니다. 린루는 지(智, Jingwen)를 낳았는데, 지(智)는 천주(泉州)의 두 큰 지파인 린(林)과 리(李)를 나누는 시작이 되었다. 《청원림리종보》에 따르면, 이씨 가문의 조상인 린루는 자주 해외 여러 나라로 항해를 다녔다고 한다. 린루의 장남 린루는 취안저우의 부유한 사업가였습니다. 홍무 17년, 임로가 호르무즈(이란, 포트아바스)로 항해했다. 서로 다른 신념으로 인해 그의 사업에 큰 불편이 생겼습니다. 게다가 그는 30세가 넘었기 때문에 현지 관습에 적응하고 이슬람을 믿어야 했으며, 현지 무슬림 여성(푸)과 결혼해야 했습니다. 린주는 아내와 함께 중국으로 돌아온 후, 신앙이 달라져 생활 습관에 큰 변화가 생겼는데, 이는 유교와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가족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그의 어머니는 불교 신자였습니다). 그의 동생 린단은 "형의 이상한 습관을 바꿀 수 없어서 은퇴하여 도시의 남쪽으로 살았습니다." 그의 동생은 "린과 리 파벌을 분열시키기 시작했고, 균열도 여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아들 이광치를 데리고 남의(난안)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무자이공의 족보에 따르면, "…구는 다섯 아들을 낳았는데, 첫째는 신(Xin), 둘째는 헌보(Xianbao), 셋째는 신성(Xinsheng), 넷째는 위성(Yusheng), 다섯째는 복성(Fusheng)이었다. …단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첫째는 신위(Xinyu), 둘째는 천위(Tianyu)였다. 신위는 후사가 없었기에 천위는 영락 20년(1422) 남안현 삼사도(Sanshi Do)에 입적하였고, 성은 이(Li)이고 이름은 광계(Guangqi)로 고쳤다…" 이신성(林玉의 셋째 아들로, 자는 운성(Yuncheng)이며, 이신의 3대조)은 사촌 이광계(Lin Tianyu)와 함께 남안현 영교(Rongqiao) 삼사도로 이주하였다. 린루는 세 명의 아내와 결혼했습니다. 가계도가 소실되면서 린루 아들들의 어머니들의 생활상은 알 수 없게 되었다.
- ^ 이지의 본래 성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이(李)였어야 했으나, 학교에서는 "임재지(林在智)"로 등록했다. 리 씨족의 그들의 분파는 린 씨족에서 유래했기 때문에, "한 씨족, 두 성씨"이기 때문에, 그들은 때때로 자신들을 린이라고 불렀고, 린과 리 사이를 번갈아 불렀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의 조상은 원나라 이후에 복건성으로 이주했습니다. '재지(財治)'에서 '지(治)'로 바뀐 것은 명나라 목종 황제 주재귀의 금기를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지의 가족 배경에 관한 새로운 연구"를 참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