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04

이토 진사이 - 위키백과, 伊藤 仁斎

이토 진사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토 진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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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진사이/호리카와 문인에 의한 초상

이토 진사이(일본어伊藤 仁斎), 간에이(寛永かんえい) 4년 음력 7월 20일(서기 1627년 8월 30일) ~ 칸에이(寛永かんえい) 2년 음력 3월 12일(서기 1705년 4월 5일)〕은 에도 시대 전기에 활약한 유학자, 사상가로서 교토에서 목재상을 하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일상생활 가운데 있는 윤리와 인간 모습을 탐구해 제시했다.

이름은, 어려서는 유정(維貞), 커서는 유정(維禎)이다. 가명 통칭은, 원길(源吉), 원좌(源佐), 원칠(源七)이다.

옥호(屋号)는 쓰루야 시치에몬(鶴屋 七右衛門つるや しちうえもん)이다. 진사이(仁斎)는 호고 시호는 고카쿠 선생(古學先生こかくせんせい).

  • 옥호: 에도 시대에는 가게 이름이 가게 주인 이름과 같았다. 이것을 '야고(屋号やごう)'라고 한다.

생애[편집]

간에이(寛永かんえい) 4년 7월 20일 (서기 1627년 8월 30일) 교토에서 태어나서 1662년 교토의 호리카와(堀川ほりかわ)에 고기도(古義堂こぎどう)를 연다.

간에이(寛永かんえい) 2년 3월 12일 (서기 1705년 4월 5일) 죽었다.

가정[편집]

40세를 지나고 나서 혼인해 1남 2녀를 두었지만, 52세 때에 첫 번째 아내가 앞서가고 그 수년 후에 두 번째 아내와 재혼하여 4남 1녀를 더 낳았다.

이토 진사이(伊藤 仁斎いとう- じんさい) 나이 68세 때 막내동이로 5남의 란구(蘭嵎らんぐう)가 태어난다.

아들 5인은 모두, 뛰어난 유학자가 되었다.

이 사람들이 바로 이토 도가이〔伊藤 東涯いとう-とうがい[겐조(原蔵げんぞう)]〕, 이토 바이우〔伊藤 梅宇いとう- ばいう[주조(重蔵じゅうぞう)]〕, 이토 가이데이〔伊藤 介亭いとう- かいてい[쇼조(正蔵しょうぞう)]〕, 이토 지쿠리〔伊藤 竹里いとう- ちくり[헤이조(平蔵へい ぞう)]〕, 이토 란그〔伊藤 蘭嵎いとう-ら んぐう[사이조(才蔵さいぞう)]〕로, 세상에서 이토 진사이(伊藤 仁斎いとう- じんさい)의 고조(五蔵ごぞう)로 불린다.

학설과 사상[편집]

주요 저서로서 『논어고의(論語古義)』,『맹자고의(孟子古義)』,『어맹자의(語孟字義)』,『중용발휘(中庸発揮)』,『동자문(童子問)』,『고학선생문집(古學先生文集)』등을 들 수 있지만, 생전에 강의와 저술을 정리하고 퇴고하는 데 전력을 경주했기 때문에 직접 발간한 저작은 없다.

도덕과 존재가 생겨나는 본바탕이 되는 이치나 법칙으로서 이(理)를 공자도 맹자도 일절 언급하지 않았으므로, 그 탐구를 허황되었다고 부정하고 그 탐구를 해결하는 단서를 갖다 주어 이바지하는 예기(禮記)나 예기에서 독립하여 존재하게 된 대학(大學), 중용(中庸) 등을 후대에 불교나 노장사상이 혼합된 완전하지 아니한 텍스트로 치부하여 그 위신과 영향력을 부정하는, 배짱이 두둑하면서도 사소한 부분까지 아주 분명한 방법과 수단을 이용하여 변하지 않는 기준으로서 자신이 세운 준거인, 공자와 맹자의 언행에서 이탈하는 해석을 용인하지 않는, 코기가꾸(古義学こぎ‐がく)을 제창하고 견지하였다.

이토 진사이(伊藤 仁斎いとう- じんさい)는 당시 주동이 되어 이끌었던 주자학의 논리로 경전을 해석하는 방식을 버리고 텍스트를 직접 검토하는 방법으로 학문하였다.

주자학은 학문 체계로서는 과거의 선진 유학보다는 이론이나 이치에 매우 합당한 체계를 갖추고는 있었지만, 그 성립하는 과정에 유입된 불교의 선학(禪學)이나 노장사상(老莊思想)이라고 하는 유교에 관계되지 않은 사상에 영향받았으므로 경서를 약간 편향되게 해석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토 진사이(伊藤 仁斎いとう- じんさい)는 그러한 요소[부분]를 유학의 온전성이 불순한 물건처럼 더럽혀졌다고 간주하여 모든 한계나 표준을 뛰어넘어 있는 대상이나 현상의 범위 전부나 자연 따위가 주관의 작용과는 독립하여 존재한다고 생각되는 정신이나 인식의 목적이 개념이나 언어에 기초하여 된 표상을 향한 감각이나 지각 작용에 의거하여 깨닫게 되는 내용에 근거하지 않고 순수하게 논리에 부합하는 사고만으로 현실이나 사물을 인식하려는 일이나 판단이나 추리 따위의 사유 작용을 거치지 아니하고 대상을 직접 파악하는 인식이나 지식에 토대한 직관을 배격하고 관찰이나 실험으로써 검증 가능한 지식만을 인정하려는 방법을 이용한다.

이런 경향은 동시대 유학 연구에서 공통으로 볼 수 있다.

이토 진사이(伊藤 仁斎いとう- じんさい)는 주자학 사상인 “리(理)”에 반하고 “정(精)”을 바람직하게 평가했다.

만물과 무한한 시간을 포함하는 끝없는 공간의 총체의 근원을 이루는 물질이 아닌 실재나 인식의 목적이 개념이나 언어에 근거하여 된 표상이나 본질의 외면에 나타나는 상의 모든 범위와 의식이나 경험의 대상인 현상 전체가 주관의 작용과는 독립하여 존재한다고 생각되는 냉정한 도리보다는 조금 더 인간답고 혈액이 통하는 인간의 감정[심정]을 굳게 믿고 의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맹자 사상인 사단(四端)의 심(心)이나 성선설(性善説)을 주창하기에 이른다.

이토 진사이(伊藤 仁斎いとう- じんさい)는 공자와 맹자의 사상과 주자학의 괴리를 깨닫고 주자학의 왜곡에서 탈피하여 공자와 맹자 사상의 순수화를 실현시키고자 여생을 모두 바쳤다.

공자와 맹자는 근엄한 얼굴과 정숙한 모습으로 존재와 도덕이 생겨나는 본바탕이 되는 원리, 즉 이(理)를 찾아 이 세상 너머의 신비나 형이상학을 좇는 주자학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알 수 없는 것을 아는 것처럼 꾸미는 불손한 견강부회요, 결국 논의만을 분분하게 하여 실제로 필요한 덕행을 소홀히 하게 하는 위선의 실마리요, 나의 형이상학에 기초한 믿음을 남에게 강요하여 결국 분쟁을 야기하기 쉬운 신앙의 강제이며, 수준 높은 식자 능력을 갖추기 어려운 보통 사람들을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에서 소외시키는 차별의 합리화에 불과하다.

그런데 공자와 맹자의 철학은 사람들이 보통 알거나 알아야 하는 지식이면서도 실제로 행하기에는 말이나 생각처럼 쉽지 않은 사랑의 실천, 그것도 중단하지 말고 실천하라는 가르침이다. 이에 따라 군주에서 문맹인 하층민까지 도덕과 학문, 사회와 정치의 주인이 될 수 있으며 되게 해야 한다.[1]

저작[편집]

  • 『논어고의(論語古義)』(세키 기이치로우편 「일본 명가 사서 주석 전서」논어부일, 동양 도서, 1922년 4월)
    • 최경열 역, 그린비 2016
    • 장원철 역, 소명출판 2013
  • 『맹자고의(孟子古義)』(세키 기이치로우편 「일본 명가 사서 주석 전서」맹자부일, 동양 도서, 1924년 10월)
    • 최경열 역, 그린비 2016
  • 어맹자의
    • 최경열 역, 그린비 2017
  • 『동자문(童子問)』시미즈 시게루 교주 이와나미 문고, 1970년 외 ISBN 978-4-00-330091-6
    • 최경열, 『동자문』- 이토 진사이 선집 1, 그린비, 2013년 1월 2일, ISBN 9788976823984
  • 대학정본 / 중용발휘
    • 최경열 역, 그린비 2017
  • 키무라 에이이치 편집·해설 「이토진사이집 일본의 사상 11」(지쿠마 서점) 1970년
  • 카이즈카 시게키 편집·해설 「이토진사이 일본의 명저 13」중앙공론사 1977년 1983년
  • 요시카와 고지로, 시미즈 시게루 교주 「이토진사이 이토토가이」 <일본 사상 대계 33>이와나미 서점, 1971년
  • 아사야마 요시로, 엄명교주 「이토진사이」<일본한시인선집 4>연문출판, 2000년, ISBN 978-487636-190-8
  • 우에타니 겐 교주 『인재일찰(仁斎日札)』<신일본고전문학대계99>이와나미 서점, 2000년 3월
  • 이토 린후 「이토진사이,부-이토토가이」<총서·일본의 사상가 10>덕성 출판사, 1983년 3월
  • 미야케 마사히코 편집·해설 「고학선생님 시와 글집」<근세 유가 문집 집성 제 1권>리카응사, 1985년

연구서[편집]

  • 이또오 진사이 / 이기동 저
  • 비토우 마사히데 「이토진사이에 있어서의 학문과 실천」, 「사상」 제524호, 1968년 2월
  • 요시카와 고지로 「진사이,소라이,노리나가」,이와나미서점,1975년6월,복간2000년외,ISBN 978-4-00-000959-1
  • 와타나베 히로시 「이토진사이·이토토가이-송학 비판과 「고의학(古義学)」
    • 사가라 도루·마츠모토3지개·원 료원편 「에도의 사상가들」상권, 연구사 출판, 1979년 11월
  • 고야스 노부쿠니 「이토진사이 인륜적 세계의 사상」, 도쿄대학 출판회, 1982년 5월
  • 증보판 「이토진사이의 세계」리카응사, 2004년 ISBN 978-4-8315-1060-0
  • 이시다 가즈요시 「이토진사이」<인물 총서> 요시카와 히로후미관, 1989년 ISBN 978-4-642-05176-7
  • 사가라 도루 「이토진사이」리카응사, 1998년 ISBN 978-48315-0827-0
  • 마루야 코이치 「이토 히토시재의 「정」적 도덕 실천론의 구조」, 「사상」 제820호, 1992년 10월
  • 다니자와 에이이치 「일본인의 논어 「동자문」을 읽는다」 PHP 신서상·아래, 2002년, ISBN 4-569-62224-0·ISBN 978-4-569-62271-2
  • 「일본 유교의 정신 주자학·진사이학·소라이학」시냇물사 1998년 8월

각주[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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伊藤仁斎

出典: フリー百科事典『ウィキペディア(Wikipedia)』
伊藤仁斎、堀川門人による肖像

伊藤 仁斎(いとう じんさい、寛永4年7月20日1627年8月30日) - 宝永2年3月12日1705年4月5日))は、江戸時代の前期に活躍した儒学者思想家京都の生まれ。日常生活のなかからあるべき倫理人間像を探求して提示した。

は、はじめ維貞、のち維禎。仮名 (通称)は、源吉、源佐、源七。屋号は、鶴屋七右衛門。仁斎はであり、号は古学先生。『論語』を「最上至極宇宙第一の書」と尊重した。 初めは朱子学者であったが、後に反朱子学となり、孔子・孟子の原義に立ち返る「古義」を標榜した。

生涯[編集]

  • 寛永4年7月20日(1627年8月30日) 京都で誕生。
  • 1662年 京都の堀川に古義堂(堀川学校)を開く。堀川を隔てた対岸に、山崎闇斎の闇斎塾があった。
  • 宝永2年3月12日(1705年4月5日) 死没。

家庭[編集]

  • 40歳を過ぎてから結婚し1男2女をもうけたが、52歳のときに妻に先立たれ、その数年後に再婚し、更に4男1女をもうけた。末子で五男の蘭嵎(らんぐう)が生まれたのは仁斎68歳の時である。5人の男子は皆、優れた儒学者となった。東涯(原蔵)・梅宇(重蔵)・介亭(正蔵)・竹里(平蔵)・蘭嵎(才蔵)で、世上「伊藤の五蔵」と称された。

学説と思想[編集]

論語』を「最上至極宇宙第一の書」と称した。

古義学(古学)を提唱し、主著に『論語古義』『孟子古義』『語孟字義』『中庸発揮』『童子問』『古学先生文集』などが挙げられるが、生前は講義と著述の整理・推敲に尽力し、著作を公刊することはなかった。

仁斎の学問手法は、当時支配的だった朱子学経典解釈を廃し、直接テクストを検討するというものである。朱子学は学問体系としては非常に整ってはいたが、その成立過程に流入した禅学や老荘思想といった非儒教的な思想のために経書の解釈において偏りがあった。仁斎はそのような要素を儒学にとって不純なものとみなし、いわば実証主義的な方法を用いた。このような傾向は同時代の儒学研究に共通にみられるものである。仁斎は朱子学の「理」の思想に反して、「情」を極的に価値づけした。客観的でよそよそしい理屈よりも人間的で血液の通った心情を信頼している。四端の心や性善説を唱えた。

校注著作[編集]

参考文献[編集]

解説書[編集]

脚注[編集]

  1. ^ 元版は「日本古典文学大系97 近世思想家文集」岩波書店。原文も収録
  2. ^ 「論語古義」の現代語訳(2段組み表記)を収録

関連項目[編集]

外部リンク[編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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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닌사이

출처 : 무료 백과 사전 "Wikipedia (Wikipedia)"
이토 닌사이, 호리카와 문인의 초상

이토 히사이 (이토 진사이, 히로 나가 4년 7월 20일 ( 1627년 8월 30일 ) - 호에이 2년 3월 12일 ( 1705년 4월 5일 ))는 에도 시대 의 전기에 활약한 유학자 · 사상가 . 교토 의 태생. 일상생활 속에서 있어야 할 윤리 와 인간상 을 탐구하고 제시했다.

는, 처음에 유정, 후유 유. 가명(통칭) 은 겐지치, 겐사, 겐지치. 야호 는 쓰루야 시치오에몬. 닌사이는  이며, 사호 는 고학 선생님. '논어'를 '최상지극우주 제일서'라고 존중했다. 처음에는 주자 학자였지만, 후에 반주자학이 되어 공자·맹자의 원의로 돌아오는 '고의'를 표방했다.

평생 편집 ]

  • 히로나가 4년 7월 20일(1627년 8월 30일) 교토에서 탄생.
  • 1662년 교토의 호리카와에 고의당 (호리카와학교)을 연다. 호리카와를 가로지르는 건너편에 야마자키 암사이의 어둠사이 학원이 있었다.
  • 다카나가 2년 3월 12일(1705년 4월 5일) 사망.

가정 편집 ]

  • 40세를 지나고 나서 결혼해 1남 2여자를 벌었지만, 52세 때 아내에 앞서 그 몇 년 후에 재혼하고 4남 1여자를 벌었다. 막내에서 오남의 란구가 태어난 것은 인사 68세 때이다. 5명의 남자는 모두 뛰어난 유학자가 되었다. 동평 (원장)· 우메우 (중장)·개정 (정장)· 다케리 ( 평장)· 란후라 (재장)로, 세상 “이토의 오조”라고 불렸다.

학설과 사상 편집 ]

논어』를 「최상지극우주제일의 서」라고 칭했다.

고의학( 고학 )을 제창하고, 주저하게 『논어 고의』 『孟子古義』 『어 孟字義』 『中庸発휘』『童子問』『古学先生文集』 등을 들 수 있지만, 생전 은 강의 와 저술의 정리· 추억 에 진력해, 저작을 공간하는 것은 없었다.

인사이의 학문 수법은 당시 지배적이었던 주자 학적 경전 해석을 폐지하고 직접 텍스트를 검토한다는 것이다. 주자학은 학문 체계로서는 매우 정돈되어 있었지만, 그 성립 과정에 유입된 선학이나 노장 사상이라고 하는 비유교적인 사상 때문에 경서의 해석  있어서 편향 이 있었다 . 닌사이는 이러한 요소를 유학에 있어서 불순한 것으로 간주하고, 이른바 실증주의 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이러한 경향은 동시대의 유학연구에 공통으로 보이는 것이다. 닌사이는 주자학의 '리'의 사상에 반해 '정'을 극적으로 가치있게 했다. 객관적이고 약한 이굴보다 인간적이고 혈액이 다니는 심정을 신뢰하고 있다. 사단의 마음과 성선설을 주창했다.

주석이 달린 작품 편집 ]

참고 문헌 편집 ]

해설서 편집 ]

각주 편집 ]

  1.  원판은 「일본 고전 문학대계 97 근세 사상가 문집」이와나미 서점. 원문도 수록
  2.  「논어 고의」의 현대 어역(2단조 표기)을 수록

관련 항목 편집 ]

외부 링크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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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ō Jins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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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ō Jinsai drawn by his student

Itō Jinsai (伊藤 仁斎, August 30, 1627, Kyoto, Japan – April 5, 1705, Kyoto), who also went by the pen name Keisai, was a Japanese Confucian philosopher. He is considered to be one of the most influential Confucian scholars of seventeenth century Japan, and the Tokugawa period (1600–1868) generally, his teachings flourishing especially in Kyoto and the Kansai area through the final years of the Tokugawa shogunate.

Jinsai's school, known as the Kogigaku, criticized the teachings of Song dynasty Chinese philosopher Zhu Xi 朱熹 (1130–1200) and instead advocated a philosophical vision based on an understanding of the meanings of key terms in the Analects and the Mencius. His school has been considered part of a larger movement, Kogaku ("ancient learning'), including earlier scholars such as Yamaga Sokō 山鹿素行 (1622–1685), and later thinkers such as Ogyū Sorai 荻生徂徠 (1666–1728). However, Jinsai never mentions Sokō or his ideas, and Jinsai's own statements of philosophical meaning were strongly and systematically criticized by Sorai. Rather than as a thinker aligned with the so-called Kogaku movement, Jinsai's ideas are best understood on their own terms. Jinsai is widely known for his outspoken affirmation of the validity of human emotions, and his articulation of a metaphysics highlighting the pervasiveness and infinite creative potential of a "unitary generative force" (Jpn: ichigenki). Indicative of his renown in the larger world of East Asian philosophy, Jinsai's writings have frequently been compared to those of the Qing dynasty scholar Dai Zhen 戴震 (1724–1777), whose key work, Mengzi ziyi shuzheng (The Meanings of Philosophical Terms in the Mencius) is very similar in theme and method to Jinsai's opus, the Gomō jigi (The Meanings of Philosophical Terms in the Analects and Mencius).

Life[edit]

Jinsai was born the eldest son of a Kyoto merchant, Itō Ryōshitsu. It is not clear exactly what merchant activities the family was engaged in, however. He began studying Chinese from an early age and devoted himself to Zhu Xi's expression of Song dynasty Neo-Confucianism. He continued to study Confucianism throughout his teens, going over old books his uncle had left his father.[1]

By the age of ten, he was studying under his uncle, a noted physician who had once treated the emperor Go-Yōzei. He also likely studied with Matsunaga Sekigo, a Kyoto-based Neo-Confucian scholar who had in turn studied with Fujiwara Seika. Given the distinctively Kyoto lineage of Jinsai's learning, there are good reasons for interpreting it as an expression of the philosophical world of the ancient imperial capital.[2]

Itō suffered from an unidentified illness when he was twenty-eight and left the family business to his younger brother. Afterwards he became a recluse, studying Buddhism and Daoism. During this time he began to have his first doubts over Zhu Xi's philosophy, even changing his pen name which showed his commitment to humaneness (jin).[3]

He later established a private school, the Kogidō, in Kyoto in 1662. Following Jinsai's death in 1705, leadership at the Kogidō was assumed by his son, Tōgai (1670–1736). The Kogidō was located on the east bank of the Horikawa River, directly across from the school of Yamazaki Ansai. During his lifetime, Ansai became a major proponent of Zhu Xi's version of Song Neo-Confucian thought. Jinsai's school, in contrast, offered a sustained critique of Zhu Xi's ideas. Especially in Kyoto, Jinsai's school met with great success, attracting three thousand students from many different classes and professions.[4]

Teachings[edit]

Jinsai formed his own understanding of Confucian philosophy after coming to realize that Zhu Xi's speculative philosophy of was not practical in everyday ethics. Instead, he felt one could learn the way of the sages through an understanding of the meanings of words in the Analects and the Mencius, two of the Four Books that Zhu Xi's philosophy had elevated to nearly canonical status within the broad field of East Asian Confucianism. The other two of the Four Books, The Doctrine of the Mean and the Great Learning, were originally chapters from the Book of Rites (Chinese: Liji), that had been treated as separate volumes, with significant emendations, by Cheng Yi and Zhu Xi. It was largely on the basis of the latter two writings that Zhu Xi in particular had articulated some of his most distinctive Neo-Confucian ideas. In response to Zhu Xi's textual alterations, Jinsai argued, in a very distinctive manner, that "the Great Learning was not a surviving work of the Confucian School", not simply rejecting Zhu Xi's claims on particular points, but in an across the board manner dismissing the text as "not Confucian" in any significant respect. Instead of the Great Learning, Jinsai's approach was to focus on an explanation of the meanings of philosophical terms as discussed in the Analects and the Mencius. Jinsai's approach to Confucian scholarship is today known as kogigaku or "study of ancient meanings". This approach was taken up by later Confucian scholars, particularly Ogyū Sorai.[4]

In significant respects, Jinsai can be seen as advancing the Neo-Confucian project that Zhu Xi, his chief philosophical adversary, had otherwise so effectively and persuasively championed. For example, Jinsai's most comprehensive philosophical text, the Gomō jigi (The Meanings of Philosophical Terms in the Analects and Mencius), was first recorded as Jinsai was giving a series of lectures on Chen Beixi's 陳北溪 (1156–1223) Xingli ziyi 性理字義 (The Meanings of Neo-Confucian Philosophical Terms). Much of the philosophical structure of Jinsai's Gomō jigi as well as its methodology of conceptual clarification and analysis clearly derive from Beixi's work. The two texts even share common elements in their titles, jigi and ziyi 字義 (Jpn: jigi) being written with the same characters, referring to the meanings of words. In both cases, however, the words that were discussed and defined were distinctively philosophical terms such as tendō (the way of heaven), tenmei (the decree of heaven), michi (the way), sei (human nature), kokoro (the mind and heart), kotowari (principle), kishin (ghosts and spirits), and many others.

Jinsai is often described as an apolitical philosopher. However, the Gomō jigi can easily be seen as an inherently political text, one which defines the very philosophical foundations of an ideal political order. In the Analects, 13/3, Confucius, when asked by a disciple what he would do if given political authority, replied that he would "rectify terms" (zheng ming). When his disciple responded with bewilderment, Confucius explained that if words were not used correctly, then in effect there could be little hope for order in a state. For that reason, Confucius added, the prince is always careful in his use of words. Jinsai's project of defining philosophical terms rightly is very much a later day expression of Confucius' view that in order to govern effectively, one must ensure that words are understood and used correctly. If that is not done, then all will be lost.

Jinsai had several fundamental philosophical disagreements with Zhu Xi, the premier interpreter of Confucian thought since the late-Song dynasty. For one, Zhu Xi had claimed that human nature is inherently good. Jinsai disagreed and instead argued it had the potential to become good, but only through daily practice and deeds can this potential be realized. Additionally, he rejected the dualism of rational principal (li) and material force (qi) proposed by Song Confucianism, believing it was material force alone that led to the creation of life and all things.

Furthermore, Zhu Xi connected the way of heaven (tendō) with the human way (jindō) through rational principal. Jinsai on the other hand saw the way (michi) as being embedded in the common and everyday, and not ensconced on some elevated plane as Zhu had suggested. To Jinsai, the central question was how one should conduct oneself in everyday life. Zhu Xi affirmed that all humans are born with an "original human nature" (sei), which is naturally good. Jinsai, however, rejected this.

Rather than the essential goodness of human nature, Jinsai stressed natural human emotions (ninjō), which he found in everyday life. Extending from this came the importance that was placed on poetry which allowed for the expression of human emotions. This, he believed, provided a needed release of emotions and desires. Song Confucianism he felt too much advocated seriousness and a restraint of human nature.[3] His support for literature even led to the Kogidō attracting some students more interested in Chinese poetry than his Confucian teachings.[4]

Although often grouped with the Edo Confucian scholar, Ogyū Sorai, as a proponent of the ancient learning movement, Jinsai's singlemost harsh critic was none other than Sorai. In a letter written to Jinsai, Sorai early on expressed admiration for the Kyoto philosopher and an interest in his philosophy, having read a pirated edition of Jinsai's Gomō jigi published long before Jinsai was ready for it to be released in its final form. Jinsai never responded to Sorai, apparently wounding his pride deeply. Whatever Sorai might have made of Jinsai's silence, it is clear that in Sorai's later writings, in the Bendō and Benmei (1728) in particular, Sorai takes issue with Jinsai on nearly every count, often criticizing him harshly as in effect no different in philosophical doctrine than the thinker he supposedly was criticizing, Zhu Xi.

In the later writings of the Kaitokudō, a merchant academy based in Osaka, Jinsai found a succession of defenders who returned Sorai's critiques with a series of harsh responses to Sorai's own philosophical statements.

Works[edit]

  • Gomō jigi 1705 (The Meaning of Words in the Analects and Mencius).
  • Dōjimon 1705 (Questions From Children).
  • Daigaku teihon 1705 (The Established Text of the Great Learning).
  • Hakushimonjū 1704 (Postscripts to the Collected Works of Bo Juyi).

Notes[edit]

  1. ^ Yamashita, Samuel Hideo. (1983). "The Early Life and Thought of Ito Jinsai", in Harvard Journal of Asiatic Studies. 43:2, pp. 455-457.
  2. ^ Tucker, John Allen. (1998). Itō Jinsai's Gomō jigi and the Philosophical Definition of Early Modern Japan. pp. 29-52
  3. Jump up to:a b De Bary, William et al. (2005). Sources Of Japanese Tradition: Volume 2, 1600 to 2000, pp. 206-207.
  4. Jump up to:a b c Shirane, Haruo. (2006). Early Modern Japanese Literature: An Anthology, 1600-1900. p. 362.

References[edit]

  • Chan, Wing-tsit, translator. Neo-Confucian Terms Explained: The Pei-his tzu-i by Ch'en Ch'un, 1159–1223.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86. ISBN 978-0-231-06384-5
  • De Bary, William Theodore, Arthur E. Tiedemann and Carol Gluck. (2005). Sources of Japanese Tradition: 1600 to 2000.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ISBN 0-231-12984-X
  • Najita, Tetsuo. (1987). Visions of Virtue in Tokugawa Japan: The Kaitokudō Merchant Academy of Osaka.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 Shirane, Haruo. (2006). Early Modern Japanese Literature.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ISBN 0-231-10990-3
  • Spae, Joseph John. (1967). Itō Jinsai: A Philosopher, Educator and Sinologist of the Tokugawa Period. Peiping: Catholic University of Peking, 1948. New York, Paragon Book Reprint Corp., 1967.
  • Tucker, John Allen (1998). Itō Jinsai's Gomō jigi and the Philosophical Definition of Early Modern Japan. Leiden: E. J. Brill, 1998. ISBN 978-90-04-10992-6
  • Tucker, John A. (2006). Ogyū Sorai's Philosophical Masterworks: The Bendō and Benmei.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ISBN 978-0-8248-2951-3
  • Yamashita, Samuel Hideo (1983). "The Early Life and Thought of Itō Jinsai", in Harvard Journal of Asiatic Studies. 43(2): 455–7.

External links[edit]

  • 논어고의 - 하 - 소명출판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동양편 265
  • 이토 진사이 (지은이), 장원철 (옮긴이)
  • 소명출판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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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제 童子問520쪽
    150*220mm
    676g
    ISBN 9788976823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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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정본 / 중용발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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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맹자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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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매가 42,750원

    동자문

    책소개
    <동자문>은 이토 진사이가 쓰고, 그의 사후 1707년에 그의 아들 도가이가 편찬한 ‘유학의 길(道)’에 관한 문답서이다. 이토 진사이는 도쿠가와 막부의 관학으로 위세를 떨치고 있던 주자학을 비판하면서, 주자의 주석을 배제하고 직접 <논어>, <맹자>의 본문을 해독해서 성인의 원뜻을 구하자고 주장한 ‘고의학’(古義學)의 창시자로 이후 일본 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동자문>은 고의학의 종지를 알기 쉽게 전달하는 이토 진사이의 대표 저서이자 일본 유학의 고전으로, <논어>와 <맹자>,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 인(仁), 효(孝), 충(忠), 왕도(王道) 등의 유학 개념, 이학(理學)과 노불(老佛) 비판 등등에 관해 동자(어린아이)가 묻고 스승이 대답하며 그 뜻을 밝혀주고 있다.


    접기



    목차


    간행 서(序)
    동자문 上
    1장. 공자와 맹자의 올바른 가르침
    2장. 공맹 외에 도에 이르는 지름길은 없습니까
    3장. 도에 이르는 길에 대해 더 듣고 싶습니다
    4장. 『논어』는 너무 평이하지 않습니까
    5장. 『논어』에 대한 분명한 깨우침을 내려 주십시오
    6장. 어째서 『논어』가 육경보다 훌륭하다 하십니까
    7장. 『맹자』는 읽지 않아도 됩니까
    8장. 알기 쉽고 행하기 쉬운 것이 지극하다는 가르침
    9장. ‘사람 밖에 도가 없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10장. 후세의 학문은 어째서 『논어』와 배치됩니까
    11장. 성인의 도에는 아주 어려운 게 있지 않습니까
    12장. 『논어』는 왜 본성의 선함을 말하지 않습니까
    13장. 성·도·교의 구분을 상세히 듣고자 합니다
    14장. 성·도·교의 순서가 『중용』에서와 다릅니다
    15장. 도를 말하지만 교가 그 가운데 있다
    16장. 교가 성보다 귀한 것입니까
    17장. 성이 교보다 귀한 것입니까
    18장. 성과 교에는 우열이 없는 것입니까
    19장. 교의 조목을 상세히 알고 싶습니다
    20장. 문을 배우는 것을 그르다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21장. 학문의 위대함에 대해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22장. 학문은 본성의 안과 밖 중 어디에 있습니까
    23장. 외물에 유혹당해도 되겠습니까
    24장.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도는 비근하지 않습니까
    25장. 비근을 소홀히 하지 말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26장. 안회에 따르면 공자의 도는 비근하지 않습니다
    27장. 도에 대한 시비가 생기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28장. 알기 쉽고 행하기 쉬운 것이 옳은 것입니까
    29장. 지금 유학자들은 도에 들어가기 어렵습니까
    30장. 자하가 한 말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31장. 성인의 말의 쉽고 어려움을 어찌 생각하십니까
    32장. 『논어』의 도리에 대해 더 말씀해 주십시오
    33장. 옛사람들의 올바른 처방을 여쭙니다
    34장. 『논어』·『맹자』의 핵심을 듣고자 합니다
    35장. 어째서 충신이 인을 행하는 기초입니까
    36장. 어째서 경보다 충신을 위주로 하는 것입니까
    37장. 경은 쓰지 말아야 합니까
    38장.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폐단이 있습니까
    39장. 인의 뜻은 무엇입니까
    40장. 인을 알기 어려운 까닭은 무엇입니까
    41장. 궁리는 인을 구하는 데 방해가 됩니까
    42장. 공자와 맹자가 말씀하신 인이란 무엇입니까
    43장. 완성된 덕으로서의 인에 대해 여쭙니다
    44장. 인을 학문의 종지로 삼았다는 말씀을 여쭙니다
    45장. 인은 반드시 사랑에서 그치는 것입니까
    46장. 공맹의 인이 사랑과 관계가 있습니까
    47장. 공자는 어째서 관중이 인하다고 하셨습니까
    48장. 자로, 염유, 공서화는 인하지 않습니까
    49장. 관중이 왕도를 돕지 못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50장. 자문과 진문자는 어째서 인하지 않습니까
    51장. 이치에 합당하고 사심이 없으면 인한 것입니까
    52장. 성인의 인과 관중의 인은 같습니까
    53장. 공자의 인에 대해 여쭙겠습니다
    54장. 덕을 완성하지 못해도 인이라 할 수 있습니까
    55장. 한유의 박애가 비판받은 까닭은 무엇입니까
    56장. 인을 성이라 해서 헛되게 만들어 버렸다는 뜻
    57장. 장식이 만든 「수사언인록」은 합당합니까
    58장. 서를 실천하여 인을 구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59장. 증자는 어째서 부자의 도가 충서라 했습니까
    동자문 中
    1장. 책마다의 강령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2장. 어찌 중을 두고도 인의만을 주장하십니까
    3장. 인의가 중보다 소중한 것입니까
    4장. 중용이 공문의 심법이라는 말을 어찌 보십니까
    5장. 성인은 중으로 도통을 전했다고 합니다
    6장. 인의가 공맹의 종지가 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7장. 맹자는 어째서 지를 미워하셨습니까
    8장. 맹자가 왕도를 말씀하신 까닭은 무엇입니까
    9장. 선유의 말은 왕도와 함께 말할 수 없습니까
    10장. 왕도는 욕구를 경계하지 않습니까
    11장. 왕도를 행하는 학문이 우선할 일입니까
    12장. 왕도를 공부에 받아들여 쓰는 게 절실합니까
    13장. 학문이 왕도를 근본으로 하는 뜻은 무엇입니까
    14장. 경세제민의 책들도 왕도를 잘 밝히고 있습니까
    15장. 왕도를 상세하고 분명히 논한 곳은 어딥니까
    16장. 호화·호색에 대한 맹자의 본뜻은 무엇입니까
    17장. 임금에게 정심성의를 말하면 안 됩니까
    18장. 왕의 덕이란 어떤 것입니까
    19장. 후세에는 왕도를 행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20장. 고례회복보다 여민동락이 우선입니까
    21장. 삼대 이후는 모두 타락한 것입니까
    22장. 옛날 왕들도 검약을 숭상했습니까
    23장. 문왕이 영대를 지은 일에 대해 여쭙니다
    24장. 혹독한 세금을 경계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25장. 검약으로 다스린들 사람들이 따르겠습니까
    26장. 당 태종의 예악에 대해 여쭙니다
    27장. 예가 절약과 검소에서 생깁니까
    28장. 왕자와 패자의 구분을 여쭙겠습니다
    29장. 백성을 자식처럼 기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30장. 어떻게 하늘께 영원한 명을 빌 수 있습니까
    31장. 치도의 요점을 여쭙겠습니다
    32장. 상벌을 공과에 합당하게 할 수 있습니까
    33장. 검약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어찌 인색합니까
    34장. 천하에서 어떤 선이 가장 귀합니까
    35장. 맹자가 제선왕에게 행한 예가 오만해 보입니다
    36장. 효에 대해 여쭙겠습니다
    37장. 효에도 크고 작음이 있습니까
    38장. 달효란 무엇을 말합니까
    39장. 충에 대해 여쭙겠습니다
    40장. 충과 효 가운데 무엇이 중합니까
    41장. 사제지간의 도리를 여쭙니다
    42장. 스승을 구하는 방도를 여쭙니다
    43장. 스승의 도리를 여쭙니다
    44장. 붕우의 뜻을 여쭙니다
    45장. 붕우유신의 ‘신’은 무엇을 말합니까
    46장. 선생님께서도 소원이 있으십니까
    47장. 자기 의론과 다르면 교류하지 않습니다
    48장. 세상의 학자들은 서로를 비방하고 있습니다
    49장. 자기 스승의 문하만을 사사롭게 감쌉니다
    50장. 자신을 지키는 법도를 여쭙니다
    51장. 검소함을 지키는 방도를 여쭙니다
    52장. 집안을 다스리는 것에 대해 여쭙니다
    53장. 세상일에 대응하는 방법을 여쭙니다
    54장. 비방이나 칭찬에 마음이 흔들립니다
    55장. 화와 복이 생기는 연유를 여쭙니다
    56장. 학문의 요체를 여쭙니다
    57장. 돌이켜 찾는 것과 충서에 차이가 있습니까
    58장. 유학자의 심법은 무엇입니까
    59장. 하학상달의 뜻을 여쭙니다
    60장. 상달 공부를 여쭙니다
    61장. 상달했을 때는 어떻게 됩니까
    62장. 갑작스런 깨달음은 있습니까
    63장. 소이연의 리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64장. 이학·심학·성학 등의 명칭은 옳은 것입니까
    65장. ‘리’를 가볍게 볼 수는 없습니다
    66장. 리가 전부 다 좋은 것은 아니겠지요
    67장. 리를 학문의 근본으로 삼으면 안됩니까
    68장. 리는 왜 만물의 근본이 될 수 없습니까
    69장. 천지는 하나의 거대한 생물이라는 이치
    70장. ‘통함은 있으나 막힘은 없다’는 무슨 뜻입니까
    71장. 심학이란 명칭은 어떠합니까
    72장. 본연의 덕이란 무엇입니까
    73장. 가르침에 성을 우선으로 해야 합니까
    74장. 천지만물과 일체된다 함은 무슨 뜻입니까
    75장. 장재의 「서명」에 대해 여쭙니다
    76장. 가장 사랑하는 선유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77장. 선유의 어떤 말씀이 가장 지극합니까
    동자문 下
    1장. 맹자의 성선설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2장. 송명 유학자들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3장. 오로지 『논어』·『맹자』만 공부하면 됩니까
    4장. 오경의 이치를 여쭙니다
    5장. 오경 각각의 대의를 여쭙겠습니다
    6장. 『예기』에 대해 여쭙겠습니다
    7장. 혼천의 제도에 대해 여쭙겠습니다
    8장. 도에 부합되는 중은 무엇입니까
    9장. 오경과 『논어』·『맹자』의 차이가 궁금합니다
    10장. 명을 안다는 말에 대해 여쭙겠습니다
    11장. 명을 안다는 말의 깊은 뜻을 듣고 싶습니다
    12장. 공자께서 논란을 꺼리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13장. ‘곧다’는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14장. 굴원에 대해 여쭙겠습니다
    15장. 사물에 얽매이지 않고 세상과 함께 움직인다
    16장. 이단의 말에도 취할 만한 것이 있습니까
    17장. 노장을 좋아하는 것이 해가 됩니까
    18장. 삼대 이후에는 성인이 불교에서 나왔습니까
    19장. 불법은 번창하는데 유학은 그렇지 못합니다
    20장. 고명하고 박학한 선비가 선(禪)을 좋아한 까닭
    21장. 주자와 육상산의 같고 다름을 여쭙겠습니다
    22장. 주자와 육상산에 대한 양명의 견해를 여쭙니다
    23장. 옛사람들은 어디에서 도를 구했습니까
    24장. 방심 찾기와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25장. 활법으로 활물을 다스린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26장. 유와 무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27장. 노씨의 허무와 석씨의 적멸에 차이가 있습니까
    28장. 유가와 불가를 구분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29장. 유가의 도통은 선림의 정통과 같지 않습니다
    30장. 이단의 가르침을 구분할 수 있습니까
    31장. 후세에 인재가 드문 까닭은 무엇입니까
    32장. 박문·박학의 가르침과 다른 듯합니다
    33장. 어째서 박학과 다학이 상반됩니까
    34장. 독서에는 무엇이 긴요합니까
    35장. 천문·지리 등 여러 학문을 이해해야 합니까
    36장. 역사서를 읽을 필요가 있습니까
    37장. 역사서 읽는 법을 여쭙겠습니다
    38장. 훌륭한 역사서란 어떤 것입니까
    39장. 시 짓기를 좋아해도 해가 되지 않겠습니까
    40장. 문장을 짓는 것은 해가 되지 않겠습니까
    41장. 정도를 얻은 시문집에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42장. 어째서 성학에 뜻을 둔 사람이 적습니까
    43장. 천하의 선 가운데 무엇이 으뜸입니까
    44장. 노불의 언어로 풀이된 성인의 글은 어떻습니까
    45장. 선생님을 믿지 않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46장. 선과 노장의 언어를 분별해 주십시오
    47장. 명경지수란 말을 미워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48장. 선생님 학문의 가법에 대해 여쭙겠습니다
    49장. 공자에 대한 맹자의 평가를 어찌 보십니까
    50장. 공자가 요순보다 현명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51장. 공자께서는 어찌 조술하기만 하셨습니까
    52장. 공자는 왜 상고의 성신들을 택하지 않았습니까
    53장. 부처와 노자의 명성도 오랑캐에까지 미칩니다
    간기(刊記)
    원문
    해제 _ 유학의 자기화 혹은 독립으로서의 『동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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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속에서
    P.20~21
    『논어』·『맹자』 두 책에 보이는 공자와 맹자의 올바른 가르침은 단청같이 빛나고, 천하의 이치를 모두 포함하고 있어 모자란 것이 없으며, 온갖 전적典籍을 다 모아 빠뜨린 것이 없지. 여기서 벗어나면 곁길이고 다른 길이야. 네가 내 뜻을 알고자 한다면 『논어』·『맹자』 두 책을 보면 충분할 것이다. 지금 너를 위해 ‘창고를 기울이고 곳간을 뒤집듯이’ 속속들이 자세하게 다 알려 준다 해도 또한 두 책 밖으로 벗어날 수 없을 것이야. 네가 숙독하고 자세히 음미해 터득하는 것이 있다면, 나와는 생사에 차이가 있고 사는 곳이 떨어져 있으며 세대가 다르다 하더라도 서로 한 방에 모여 종일 토론하는 것처럼 마음과 마음이 서로 통하고 부절(符節)이 들어맞듯 저절로 어긋나지 않게 될 것이다. 게을리하지 말고 힘쓰도록 하거라. 네가 두 책을 다만 성인 문하의 평이하고 친근한 책으로만 여기고 깊은 뜻이 담긴 바를 알지 못할까 두려울 뿐이구나._ 「공자와 맹자의 올바른 가르침」


    P.258
    “세상일에 대응하는 방법을 여쭙니다.” 대답하였다. “겸양만 한 것이 없다. 겸양은 실질적인 덕이지. 무릇 윗사람을 범하고 이기기를 좋아하며 남과 쟁투를 벌이는 것은 모두 겸양을 잊는 데서 생기는 게야. 그러므로 겸양 하나가 서면 모든 덕이 모여드니 단지 세상과 어긋나지 않을 뿐만이 아니란다. 일에 응하고 만물에 접하는 데도 가장 긴요한 방도이지. 사람으로서 예양(禮讓)하는 마음이 없으면 다른 미덕이 있더라도 모두 볼만하지가 않아. 그러므로 천하에 겸양보다 좋은 게 없고 겸양을 모르는 것보다 나쁜 게 없는 것이란다.” _ 「세상일에 대응하는 방법을 여쭙니다」


    P.263~264
    “학문의 요체를 여쭙니다.” 대답하였다. “학문의 요체는 오직 자신에게 돌이켜 찾는 데[反求] 있을 뿐이다. 『중용』에, ‘활쏘기는 군자와 비슷한 면이 있다. 활을 쏘아 과녁 정곡에 맞지 않으면 잘못을 자기에게 돌이켜 찾는다’라 하였고, 맹자께서 말씀하시길, ‘어진 사람은 행동이 활쏘기와 같다. 활 쏘는 사람은 자기 몸을 바르게 한 이후에 활을 쏘아, 쏜 화살이 과녁에 맞지 않으면 자기를 이긴 사람을 원망하지 않고 자신에게 돌이켜 구할 뿐이다’라고 하셨으니 평생토록 사용해도 다 쓸 수 없는 것이 있다고 말하는 게 이것이지. 또 말씀하시길, ‘남을 사랑했는데도 친해지지 않으면 자신의 인을 돌이켜 보고, 잘 다스리려는데 잘 다스려지지 않으면 자신의 지혜를 돌이켜 보고, 예로 잘 대해 주는데 답례가 없으면 자신의 공경을 돌이켜 보라. 행동을 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있거든 모두 자신에게 돌이켜 찾으라. 자신이 바르면 온 세상이 인정해 줄 것이다’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학문의 핵심은 오직 자신에게 돌이켜 찾는 데 있을 뿐이라고 한 것이야. 성인이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사람을 탓하지 않는 경지도 여기서 자연스레 도달한 결과지. 실로 학자의 근본 임무이니 위대한 일인 게야.” _ 「학문의 요체를 여쭙니다」


    P.507
    일본은 에도시대를 대표하는 두 사상가로 오규 소라이와 이토 진사이를 거론한다. 실제 이 두 사람이 대표성을 띠게 된 것은 마루야마 마사오와 사카이 나오키라는 두 학자의 연구가 결정적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당대 가장 수준이 높았던 학문 이해로 각각 고전 저작을 창조적으로 읽고 재해석하는 데 성공하였다. 고전의 새로운 읽기, 현대적 재창조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마루야마와 사카이 두 학인에게서 목도할 수 있다. 이토 진사이와 관련해 통찰력 있는 견해를 보여 준 글이 하나 더 있다. 가라타니 고진의 『유머로서의 유물론』에 수록된 「이토 진사이론」이 그것이다. 이토 진사이의 방법론을 깊이 사색하면서 그 의의를 밝힌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여기서 오규 소라이와 이토 진사이가 주목할 만할 인물임을 이미 조선시대에 이덕무와 정약용 등이 명확하게 인지하고 평가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적시해 둔다. _ 「옮긴이 해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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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 신문: 한겨레 신문 2013년 2월 1일자



    저자 소개
    지은이: 이토 진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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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도 시대 전기에 활약한 유학자, 고의학파(古義學派)의 창시자. 초명은 고레사다(維貞)이고 뒤에 고레에다(維禎)로 개명했으며, 보통 겐시치(源七), 겐키치(源吉), 겐스케(源佐) 등으로 불렸다. 진사이는 그의 호이며, 고학선생(古學先生)으로도 불렸다.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 교토에서 재목상(材木商)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당시 가장 유명했던 화가 오가타 고린(尾形光琳)의 사촌 여동생과 결혼했다. 청년 시절 주자학에 몰두하였고 이십대 후반에는 가업을 포기하고 불도(佛道)에 전념했으나, 삼십대에 이르러서는 이를 비판하며 유교 고전의 새로운 읽기를 시도하였다. 1662년 사립 유학 학교인 고의당(古義堂)을 설립하여 후학을 양성하기도 한 그는 『논어고의』(論語古義), 『맹자고의』(孟子古義), 『어맹자의』(語孟字義), 『동자문』(童子問), 『중용발휘』(中庸?揮), 『고학선생문집』(古學先生文集), 『진사이일찰』(仁齊日札), 『동지회필기』(同志會筆記) 등의 저서를 남겼으며, 사후 그의 아들 이토 도가이(伊藤東涯)가 모두 교감해서 출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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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옮긴이: 최경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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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작 : <기록자의 윤리, 역사의 마음을 생각하다> … 총 12종 (모두보기)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에서 한문학을 공부했습니다. 곡부서당(송양정사松陽精舍)에서 서암(瑞巖) 김희진(金熙鎭) 선생님께 한문을 익히며 낯선 세계에 눈을 떴습니다. 선생님과의 만남은 무엇보다 인간의 감화력이 무엇인지 체험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한림원과 민추(현 고전번역원)에서도 고전을 공부했습니다. 서양인이 동양을 공부하는 치밀함에 자극받아 영어에도 주의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에서 방문학자로 연구하기도 했습니다. 18세기 조선 지식인들에 대한 관심을 품고 있으나 그보다 우선 넓게 공부해서 파야겠다는 생각으로 중국고대사상에 집중해, 선진(先秦)시대 저작을 두루 읽고 있습니다. 유학이 정통이나 주류로 자리 잡기 이전, 많은 담론이 쟁명(爭鳴)하는 모습이 장관이라서 공부가 흥미롭습니다.
    『당시 300수』를 공역했고 일본의 유학자 이토 진사이(伊藤仁齊)의 대작인 『논어고의』(論語古義), 『맹자고의』(孟子古義), 『동자문』(童子問) 등을 잇달아 번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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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 제공 책소개

    주자학을 버리고 논어·맹자의 길을 추구한 일본 유학!!
    ―이토 진사이의 ‘고의학’(古義學) 대표서 『동자문』(童子問) 완역!

    조선에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있었다면 일본에는 이토 진사이(伊藤仁齋 1627~1705)가 있었다. 이 둘은 주자학이 강력한 이념으로 작용하던 시대에 이를 비판하거나 창조적으로 혁신하고자 노력한 유학자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일본이 임진왜란 이후 조선에서 성리학을 받아들여 계승했지만 이토 진사이에 이르러 주자학을 버리고 『논어』의 참뜻을 이해하고자 시도했고, 거꾸로 조선의 다산은 이를 통해 유학에 관한 새로운 영감을 얻어냈다는 점에서 근세 유학의 중요한 고리를 형성하고 있다. 이런 이토 진사이의 저서를 국내에 처음으로 완역하여 선을 보인다(이 책 『동자문』 외에 그의 주요 저서인 『논어고의』, 『맹자고의』, 『어맹자의』 등을 ‘이토 진사이 선집’으로 구성해 2015년까지 완역하여 펴낼 예정이다).
    『동자문』(童子問)은 이토 진사이 사후 2년 뒤인 1707년에 그의 아들 도가이가 편찬한 ‘유학의 길(道)’에 관한 문답서이다. 『논어』와 『맹자』,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 인(仁), 효(孝), 충(忠), 왕도(王道) 등의 유학 개념, 이학(理學)과 노불(老佛) 비판 등등에 관해 동자(어린아이)가 묻고 스승이 대답하며 그 뜻을 밝혀주는 책이다. 여기서 문답의 핵심은 『논어』에 대한 올바른 이해이다. 주자학은 도쿠가와 막부에 의해 관학으로 지정될 정도로 위세를 확장하고 있긴 했지만, 이토 진사이가 보기에 주자학은 초월적인 리(理)를 강조하여 인간의 자연스런 관계 형성과 내면의 욕망을 억압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현실과 괴리된 주자학을 통해서가 아니라 공맹의 말을 직접 보고 가르침을 얻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토 진사이는 공자와 『논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저 알기 어렵고 행하기 어려우며 굉장하고 광대해 살펴 헤아릴 수 없는 말들은 모두 없애 버리고, 알기 쉽고 행하기 쉬우며 영원히 바뀌지 않는 진리를 세워 백성들의 삶의 표준으로 삼으신 것이다. 이를 제자들에게 전해 주시고 후세에 알려 주셨지. 그러므로 『논어』 한 권은 실상 가장 지극한, 우주 제일의 책인 것이다.”(『동자문』 상권 5장) 주자의 주석을 배제하고 직접 『논어』, 『맹자』의 본문을 해독해서 성인의 원뜻을 구하자는 진사이의 이런 유학 사상을 ‘고의학’(古義學)이라 부른다. 『동자문』은 고의학의 종지를 알기 쉽게 전달하는 이토 진사이의 대표 저서이자 일본 유학의 고전이다.

    일본 사상사의 변곡점, 이토 진사이


    이토 진사이는 일본 사상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주자학의 세례를 받았으면서도 그것에서 벗어나 유학을 다른 관점에서 사고할 수 있는 기틀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에도 시대 일본은 조선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주자학을 통치의 이념으로 삼았고,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 1561~1619), 야마자키 안사이(山岐闇齎 1619~1682) 등의 걸출한 주자학자를 배출해 내기도 했다. 교토에서 꽤 상층에 속하는 재목상의 아들로 태어난 이토 진사이 역시 11세 때 『대학』을 읽고 감명을 받아 주자학에 뜻을 두었다. 그러나 그는 현실과 거리가 먼 고원한 논의에 의문을 품고 불교와 도가의 학문에도 기웃거리다가 종국에는 유학의 가르침을 찾아 나선다. 즉, 『논어』와 『맹자』의 본문을 자세히 읽고 이곳에 있는 내용만이 성인의 원뜻을 전달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그 뒤 36세 때 교토에 고의당(古義堂)이라는 강습소를 열고 성인의 학문 연구와 유학의 보급에 힘쓰게 된다.
    이토 진사이의 이러한 탈-주자학적인 행보와 사유는 일본 사상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주자학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 일상적인 관계에 성인의 도가 있다는 발상은, 나아가 정치적인 문맥에서 발전되어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여지를 후세에 남겨 준 것이다. 그 결과, 예컨대 오규 소라이(荻生?徠 1666~1728)의 고학(古學)은 정치적 측면(공적 세계)을 중시해 예악형정과 제도문물을 통해 국가를 다스리는 도를 추구했고, 더 나아가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 1730~1801)는 일본 중심의 국학(國學)을 진흥하기에 이른다. 한마디로, 일본 사상사의 측면에서 이토 진사이는 ‘유학의 일본화’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주자학을 넘어선 복고 유학, 고의학

    『동자문』은 송대의 주석을 버리고 『논어』와 『맹자』 원문을 숙독하고 계속 완미하면 스스로 터득하는 바가 있을 것이라고 한 말을 논증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성인의 뜻은 그런 것이 아니었는데, 송대 유학에 이르러 왜곡되었다는 것을 지적해 본래의 가르침이란 이렇다라는 것을 보여 준다. 예컨대, 주자학에서 말하는 리(理)는 근원적이고 초월적인 리로서 기(氣) 혹은 사물 이전에 리가 먼저 있고, 리가 없으면 사물도 없다고 주장하지만, 이토 진사이가 보기에 리는 그저 ‘기 안에 있는 조리’에 불과할 뿐 초월성이나 근원성을 담지하지는 않는다며, 주자학의 형이상학적 성격을 비판한다.
    더구나 이런 리 중심의 세계관이 현실의 문맥으로 확장되었을 때에는 인간의 자연스런 감정과 관계를 억압하고 지나치게 엄숙한 도덕만이 강조되어 일용에 필수적인 도움과는 거리가 멀어진다고 진단한다. 실제로 주자학이 실용적 측면 내지는 윤리적 가치를 결한 것은 아니지만, 그가 보기에 주자학은 ‘리’를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그 폐단이 작지 않다. 이토 진사이는 “모든 일을 오로지 리에 의지해 결단하면 잔인하고 각박한 마음이 많아지고, 관대하고 인후한 마음은 적어지지. 위의 덕(德)이 박절하면 아래에는 반드시 상처를 입어 사람들도 마음으로 복종하지 않는다”(중권 65장)라며 ‘리’에 대한 편협한 강조를 경계한다.
    이에 비해 이 책이 주장하는 바의 근거는 성인, 즉 공자와 맹자의 말씀이다. 공자가 한 말과 그가 주목한 일이 고의학이 추구하는 학문적·윤리적 가치를 결정한다. 예컨대, 한때 주자학에 심취했던 이토 진사이의 호가 교사이(敬齋)였던 데서 알 수 있듯이 주자학에서는 경(敬) 공부를 강조하지만, 『동자문』에서는 이를 비판한다. 마음을 고요하게 만들어서 마음속 깊은 곳에 내재된 본성을 밝게 드러내도록 하는 이런 경 공부는 공자의 관심사와는 멀다는 것이다. 공부에는 여러 가지 방도가 있는데, 마치 의사가 병을 치료하는 여러 방법과도 같다, 그런데 경만을 위주로 삼는 것은 단방에 온갖 병을 다스리려는 것과 같아 사람을 그릇된 길로 인도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동자문』은 공자와 맹자의 올바른 가르침이 어떤 것인지 밝히는 데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동자에게 전해주는 일상적 윤리로서의 유학, 『동자문』

    - 일상일용의 강조
    『동자문』에서 누누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고원한 논의가 아니라 비천한 일상생활에 쓸모가 있는 실질적인 덕성이다. 일례로 인의예지를 강조하는 방식을 보자면, 그것이 당연한 이치이기 때문이 아니라 일상의 관계를 엮어 주는 바람직한 토대이기 때문이다. 도(道)는 고원한 것이 아니다. “도는 대지와 같은 것이다. 천하에 땅보다 낮은 것이 없고, 사람이 밟는 것은 땅 아닌 게 없어 땅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다.”(상권 24장) 이토 진사이에게 도란 부모를 사랑하고 어른을 대우하며 처자 사이의 정이 좋고 뜻이 맞으며 형제간에 화합하는 것에 지나지 않다. 유학의 참된 가르침을 설명하기 위해 굳이 ‘동자’를 등장시킨 것도 성인의 도가 대단히 형이상학적이고 알기 어려운 논의가 아니라 일상에 있는 친근하고 가까운 것이라는 점을 말하기 위해서였던 것이 아닐까 싶다.

    - 사랑으로서의 인(仁)
    현대 유학에서 인(仁)은 ‘인함’, ‘어질다’, ‘사람다움’ 등 다양한 의미로 이해되고 있다. 특이하게도 이토 진사이는 인을 사랑(愛)으로 해석한다. “인은 사랑에서 그친다. 사랑은 실질적인 덕이다. 사랑이 아니라면 그 덕을 볼 수 없다.”(상권 45장) 예컨대, 오륜오상이 사랑이 뒷받침되지 않은 단순한 외적 규범이라면 사람은 위선에 빠지기 쉬우며, 자칫 남3
    에게 잔인하고 각박하며 해할 수도 있다고 한다. 사랑이란 곧 참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오륜오상의 도덕도 사랑에서 나오지 않으면 거짓일 뿐이다. 성인 공자의 문하에서 인을 덕의 으뜸으로 삼은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이토 진사이는 주장한다.
    그에게 인은 인간의 참된 덕성에 다름 아니며, 성인의 도에 다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랑은 박애와도 통한다. 여기에 가지고 있으면서 저기에서 행하지 않는 것은 인이 아니다. 한 사람에게 베풀면서 열 사람에게 미치지 않으면 인이 아니다. 마음은 사랑과 떨어지지 않고 사랑은 마음에서 온전히 하나가 되는 것이 바로 인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큰 덕이 없고 사람을 해치는 것보다 선하지 않은 것이 없다. 사랑이 있어야만 ‘완성된 덕으로서의 인’을 비로소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동자문』에서 말하는 성인의 도는 사랑으로 사람들과 관계 맺고 인의로써 세상과 함께 움직이는 것이다. 이러한 진사이의 사상 내용은 고의학의 보편적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곳에 무가 권력에 대한 긍정이나 국가주의적 색채가 없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 * *
    일본에 유학 전통이라 할 만한 것이 있는가? 라는 물음에 답할 만한 것이 많지는 않으나, 『동자문』을 비롯한 이토 진사이의 저서들은 다른 동아시아인들이 읽어도 많은 가르침을 얻을 수 있는 보편적인 성격을 담고 있다. 조선시대 다산 정약용이 그의 글을 읽고선 일본이 군사력에만 의존해 이웃나라를 약탈하는 미개한 나라인 줄로만 알았는데 유학의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여 예의를 알게 된 개명된 나라로 여겼다 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토 진사이의 『동자문』은 동아시아 지성사·유학사에서 함께 거론되어야 할 중요한 정신 유산이4
    다.

    ====

    madwife 2018-12-05
    메뉴
    ˝핵심을 아는 자는 말이 필시 간결하니 말이 많은 자는 반드시 핵심을 모르는 것이다.˝ 이토 진사이 본인의 기준으로 보면 글이 좀 번다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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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연 2016-03-28
    메뉴
    나도 동자처럼 언제든지 여쭐 수 있는 스승이 있으면 좋겠다. 문답체를 고려한 깔끔한 번역에, 디자인과 제본도 가독성이 잘 살렸다.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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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토 진사이’로 읽는 일본 유학의 진수

    등록 2016-04-14 21:38
    이인우 기자 사진



    논어고의
    맹자고의

    이토 진사이 지음, 최경열 옮김
    그린비·각 권 4만5000원, 4만2000원

    <논어>를 ‘우주 제일의 책(宇宙第一書)’이라고 극찬한 사람은 일본의 실학파라고 할 수 있는 고의학파의 창시자 이토 진사이(伊藤仁齋;1627~1705)이다. 이 일본 대유가 논어와 맹자를 주석한 <논어 고의>와 <맹자 고의>가 한문학자 최경열씨의 번역으로 동시 출간됐다. 일본 실학의 고갱이를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가진다.


    보통 사람들은 주자학만 유학인 줄 알지만, 중국 송대의 주희가 집대성한 주자학은 ‘신유학’으로 한정된다. 선진시대 공자와 맹자의 유학은 주자 이후 유학과 구분하여 ‘원유학’이라 불린다. 이토 진사이의 유학은 바로 주자학을 건너뛰어 원유학, 즉 공자와 맹자가 말한 본래 사상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유학이다. 주석서 이름이 고의(古義)인 것도 주자학의 관념성에 가려진 옛글의 참뜻을 밝혀내겠다는 의지를 담은 셈이다.

    중세 일본을 통일한 도쿠가와 막부는 평화시대를 이끌어갈 체제철학으로 주자학을 설정한다. 조선의 퇴계학이 선풍적인 인기를 모은 까닭도 일부 여기에 있다. 교토의 목재상 집 아들로 태어난 이토 역시 청년 시절 주자학을 배우고 불교에도 심취했으나, 삼십대에 이르러 주자학과 불교 모두를 비판하며 원유학에 기반한 실질 중심의 유학사상 수립으로 나아갔다.

    이토는 유학의 모든 가르침은 <논어>에서 연원한다고 본다. <맹자>는 논어의 가르침(교)에서 도(道)를 이끌어낸 것으로 해석한다. 이렇게 되면 공맹사상은 주자학적 관념론이 아니라 본래의 현실친화적인 가르침으로 읽을 수 있게 된다. “고원한 논의는 무의미하다. 진정한 가르침은 일상 속에서 살아 있고, 사용될 수 있는 실질적인 덕성이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고의학파의 이런 사상은 사무라이계급의 주자학적 세계관에 대응하는 조닌(상공업에 종사하는 중인)계층의 사상으로 환영받았다. 메이지 유신 후 서구 자본주의를 유교와 결합시킨 시부사와 에이치(1840~1931)의 유상(儒商) 철학도 고의학파에 닿아있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일반 독서인들이 조선의 주자학적 전통과 비교해 장단점을 살펴볼 수 있는 입문의 기회이다.

    이인우 <서울&>콘텐츠디렉터 iwlee21@hani.co.kr
  • =====
논어고의 
이토 진사이 (지은이), 최경열 (옮긴이)   그린비   2016-04-10
정가 45,000원

이토 진사이 선집 (총 5권) 더보기신간알리미 신청
어맹자의 - 논어 맹자 개념어 사전
판매가 15,2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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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이토 진사이 선집 2권. 주자학이 횡행하던 시절, 경전 탐구에 있어서 지배적 담론에 포섭되지 않고 끊임없이 그 본의가 무엇인지를 묻고, 자기 나름의 해답을 구해낸 이례적이고도 선구적인 유학자가 있었다. 그는 바로 일본 고의학의 창시자 이토 진사이다.

이토 진사이가 <논어>를 평생에 걸쳐 탐구하며 성인의 뜻을 밝혀낸 저작이다. '고의'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논어>의 옛 의미, 그 당시의 원래 의미를 탐구한다. 한나라에서부터 육조시대에 이르는 고주와 주자를 중심으로 한 송나라 시대의 신주를 섭렵한 끝에 이들과는 다른 <논어> 해석의 길을 연 저작이다. 주자학에 가려진 경전의 의미를 밝히고, 주체적인 해석을 보여주고 있다.접기
목차
『논어고의』 간행 서문
『논어고의』 총론
논어고의 권1
학이(學而)
위정(爲政)
논어고의 권2
팔일(八佾)
이인(里仁)
논어고의 권3
공야장(公冶長)
옹야(雍也)
논어고의 권4
술이(述而)
태백(泰伯)
논어고의 권5
자한(子罕)
향당(鄕黨)
논어고의 권6
선진(先進)
안연(顔淵)
논어고의 권7
자로(子路)
헌문(憲問)
논어고의 권8
위령공(衛靈公)
계씨(季氏)
논어고의 권9
양화(陽貨)
미자(微子)
논어고의 권10
자장(子張)
요왈(堯曰)
논어고의 원문
옮긴이 해제 / 실학으로 다시 읽는 『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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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P.18~19
고원해 다다를 수 없으며 은미하고 까다로워 알 수 없다는 따위의 말은 삼대의 왕의 사적을 고찰해 보면 잘못이 있을 것이며, 온 세상에 기준으로 세워 보면 어그러질 것이며, 인간의 감정과 사물의 원리에 미루어 생각해 보면 모두 부합하지 않을 것이다. 우주라는 시공간에 본래 이런 식의 이치가 없으니 도를 심하게 곡해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높은 곳[高]을 끝까지 올라가면 반드시 낮은 곳?[卑]으로 돌아오며 먼 곳[遠]을 극단까지 나아가면 반드시 가까운 곳[近]으로 돌아온다. 비근卑近으로 돌아오고 난 뒤에야 견해가 비로소 실질[實]을 갖게 된다. 왜냐하면 비근한 곳은 항상 살 수 있지만 고원한 곳은 제대로 머무는 곳이 아닌 줄 알기 때문이다. 이른바 비근은 본래 비근이 아니요 평상?平常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실로 예로부터 지금까지 온 세상이 공통으로 따르던 것이었으며 인간 윤리와 일상생활에서 당연히 있어야 한다고 여기는 바였다. 어찌 여기에 고원한 것이 있겠는가. 비근을 싫어하고 고원을 기뻐하는 자들과 어떻게 천하와 만세에 두루 통용되며 잠시라도 떨어질 수 없는 도를 함께 얘기할 수 있겠는가. 배우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를 알아야 한다. 그런 뒤에 『논어』를 읽을 수 있다.
P.317~318
진사이는 논한다?: 어떤 사람이 물었다. “성인은 상서로운 조짐을 말씀하시지 않았는데 여기서 봉새와 하도를 말씀하신 것은 어째서입니까?” 나는 대답했다. “이 말은 상서로운 조짐을 말한 것이 아니라 봉새와 하도를 빌려 당시 훌륭한 임금이 없는 것을 탄식한 것이다. 성인은 남들과 함께 지내지 다른 기반에 서지 않으며 동시대를 살면서 세상 사람들이 듣기에 놀랄 말을 하지 않는다. 일을 할 때 성공과 실패에 크게 문제되지 않는 것은 모두 옛 방식을 따르며, 분분한 설명으로 사람들이 듣고 보는 것을 감히 어지럽히지 않는다. 봉새와 하도는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길 성왕聖王이 세상을 다스릴 상서로운 징조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공자는 이를 빌려 자신의 탄식에 부쳤을 뿐이다.”
P.848
여기서 논점은 주희가 맞다 틀리다 하는 점이 아니라 진사이가 그의 해석과는 다르게 『논어』를 읽었다는 사실이다. 주희 해석의 시비 문제도 아니고 진사이 해석의 시비문제는 더욱 아니다. 다르게 읽기 그 자체다. 인仁을 실實의 관점에서 읽는다면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독자가 눈길을 주어야 할 곳은 이 질문이다. 진사이의 대답?: 사랑하고 슬퍼하는 마음을 펼치는 것이다. 인은 본래 사랑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맹자는 “친친인민애물”親親仁民愛物이라는 말로 정식화한다.) 내가 가진 사랑과 연민의 마음을 남에게까지 확대하는 것. 내 마음을 실제로 남에게 적용하라는 말이다. 사랑하는 마음을 자신에게 담아 두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남에게 베풀어라. 진사이는 인을 이렇게 읽었고 다시 한번 주희의 형이상학은 평이하고 일상적인 실의 원리로 대치된다. 공부하는 사람이 할 일은 일상에서 실질적이고 평이한 도를 묵묵히 실행하는 것이다. 가까운 곳에서 도를 찾고 마음에 두고 잊지 않으면서 쉬운 일부터 해나가야 한다.(「옮긴이 해제」 중에서)
추천글
한겨레 신문: 한겨레 신문 2016년 4월 14일자
동아일보: 동아일보 2016년 4월 16일자 '책의 향기/150자 서평'
저자 소개
지은이: 이토 진사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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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학교 대학원에서 한문학을 공부했습니다. 곡부서당(송양정사松陽精舍)에서 서암(瑞巖) 김희진(金熙鎭) 선생님께 한문을 익히며 낯선 세계에 눈을 떴습니다. 선생님과의 만남은 무엇보다 인간의 감화력이 무엇인지 체험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한림원과 민추(현 고전번역원)에서도 고전을 공부했습니다. 서양인이 동양을 공부하는 치밀함에 자극받아 영어에도 주의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에서 방문학자로 연구하기도 했습니다. 18세기 조선 지식인들에 대한 관심을 품고 있으나 그보다 우선 넓게 공부해서 파야겠다는 생각으로 중국고대사상에 집중해, 선진(先秦)시대 저작을 두루 읽고 있습니다. 유학이 정통이나 주류로 자리 잡기 이전, 많은 담론이 쟁명(爭鳴)하는 모습이 장관이라서 공부가 흥미롭습니다. 『당시 300수』를 공역했고 일본의 유학자 이토 진사이(伊藤仁齊)의 대작인 『논어고의』(論語古義), 『맹자고의』(孟子古義), 『동자문』(童子問) 등을 잇달아 번역했습니다.
출판사 제공 책소개
주자학이 횡행하던 시절, 경전 탐구에 있어서 지배적 담론에 포섭되지 않고 끊임없이 그 본의가 무엇인지를 묻고, 자기 나름의 해답을 구해낸 이례적이고도 선구적인 유학자가 있었다. 그는 바로 일본 고의학(古義學)의 창시자 이토 진사이(伊藤仁齋, 1627~1705)이다. 그의 핵심 저작, 곧 「논어」와 「맹자」를 평생에 걸쳐 탐구하며 성인(聖人)의 뜻을 밝혀낸 저작 「논어고의」(論語古義)와 「맹자고의」(孟子古義)를 동시에 번역 출간하였다.
‘고의’(古義)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이 두 저작은 「논어」와 「맹자」의 옛 의미, 그 당시의 원래 의미를 탐구한다. 한나라에서부터 육조시대에 이르는 고주(古注)와 주자(주희)를 중심으로 한 송나라 시대의 신주(新注)를 섭렵한 끝에 이들과는 다른 「논어」, 「맹자」 해석의 길을 연 저작이다. 주자학에 가려진 경전의 의미를 밝힌 이 두 저작은 조선 땅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주체적인 해석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고전 연구상에서 짚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이다.

[출판사 서평]

‘논어’와 ‘맹자’의 본의는 무엇인가?
―일본 특유의 사상이 피어나는 지점, 이토 진사이의 ‘고의학’(古義學)

주자학이 횡행하던 시절, 경전 탐구에 있어서 지배적 담론에 포섭되지 않고 끊임없이 그 본의가 무엇인지를 묻고, 자기 나름의 해답을 구해낸 이례적이고도 선구적인 유학자가 있었다. 그는 바로 일본 고의학(古義學)의 창시자 이토 진사이(伊藤仁齋, 1627~1705)이다. 그의 핵심 저작, 곧 「논어」와 「맹자」를 평생에 걸쳐 탐구하며 성인(聖人)의 뜻을 밝혀낸 저작 「논어고의」(論語古義)와 「맹자고의」(孟子古義)를 동시에 번역 출간하였다.
‘고의’(古義)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이 두 저작은 「논어」와 「맹자」의 옛 의미, 그 당시의 원래 의미를 탐구한다. 한나라에서부터 육조시대에 이르는 고주(古注)와 주자(주희)를 중심으로 한 송나라 시대의 신주(新注)를 섭렵한 끝에 이들과는 다른 「논어」, 「맹자」 해석의 길을 연 저작이다. 주자학에 가려진 경전의 의미를 밝힌 이 두 저작은 조선 땅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주체적인 해석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고전 연구상에서 짚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이다.
특히 이 저작들은 일본사상사에서 전환적인 위치를 점유한다. 중국의 강력한 자장에서 벗어나 주체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불행히도 이후 흐름은 국수적인 國學으로 귀결하고 말았지만) 자신들만의 어떤 고유한 특질을 찾아내려는 집요한 연구 성격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본의를 집요하게 추적하고 “진사이는 논한다”라고 자신 있게 소신을 밝히는 학문 태도는 사상사와 무관하게 지금 여기에서도 유효하다. 먼지 쌓인 경전을 털어내고 ‘실학’(實學)으로써 세상에 펼쳐 보이는 그의 공부 방법은 고전 연구 현장에 적용할 가치가 높다.

「논어」와 「맹자」를 함께 읽는다

이토 진사이는 「논어」와 「맹자」의 시대적 거리에도 불구하고, 두 경전을 마치 하나의 텍스트인 양 대하고 있다. 그가 주장하는 ‘고의’, 즉 성인 공자가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의미가 바로 이 두 저작에 집약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토 진사이 선집’으로 구성된 「논어고의」, 「맹자고의」, 「동자문」(童子問), 「어맹자의」(語孟字義, 미출간)는 모두 이 성인의 뜻, 성인의 도가 무엇인지 탐구하는 얼개들이다. 「동자문」이 질문과 대답의 형식으로 성인의 뜻과 그 핵심에 집중하고 있고(주제적이고) 「어맹자의」가 공자와 맹자의 개념을 풀이하고 있다면(개념적이라면), 「논어고의」와 「맹자고의」는 「논어」와 「맹자」를 읽어가며 성인이 말하는 도의 구체적인 내용과 보편적 성격을 밝히고 있다(내용적이다). 한마디로 「논어고의」와 「맹자고의」는 이토 진사이 고의학의 고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진사이에 따르면, 「논어」는 교(敎)를 말하지만 도(道)가 그 안에 있다. 반대로 「맹자」는 도를 말하지만 교가 그 안에 있다. 이를 섞어 읽으면, 「논어」는 공자의 가르침이 주를 이루지만 「맹자」의 거울을 비춰 보면 성인의 도, 즉 인의(仁義)의 의미가 구체화한다는 것이다. 또 「맹자」는 인의를 비롯한 몇몇 추상적인 개념과 문답의 논의가 주를 이루고 있는데, 공자의 가르침을 근거로 그 적실성을 얻음을 알 수 있다. 진사이는 말한다. “공자와 맹자의 도를 공부하는 사람은 「논어」와 「맹자」의 같은 점을 알아야 하고 또 다른 점을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공자와 맹자의 근본 취지가 자연스레 명료해질 것이다.” “「논어」와 「맹자」 두 책의 말이 다른 점이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서로 보완이 되는 관계이다. 이것이 두 책의 핵심이며 학문의 목표다. 만약 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끝내 공자와 맹자의 문하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배우는 이들은 이 점을 깊이 주의해야 한다.”
이렇게 진사이는 「맹자고의」에서는 「논어」를, 「논어고의」에서는 「맹자」를 가져와서 두 경전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논의를 전개한다. 「논어고의」를 완성하고 「맹자고의」를 완성한 게 아니라 두 저술을 하나로 묶어 자신의 학문 양식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곧 주자학의 근거였던 「맹자」를 추상의 그물에서 구출해내고 「논어」의 의소(義疏)로 삼음으로써 고의학만의 독특한 해석 근거로 삼기에 이르렀다. 비로소 성선설을 비롯한 인성론의 굴레를 벗고 민낯에 가까운 모습에 다가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성인의 도는 실질에 힘쓴다”

이토 진사이는 성인 문하의 학문은 “실제에 유용한 실학(實學)”이라고 단언한다. 실학이라는 말을 직접 쓸 정도로 그의 관심은 ‘실’에 집중되어 있고 그것으로써 「논어」와 「맹자」를 관통해 읽는다. 이 속에는 주자학이 불교에 대해 ‘허학’(虛學)이라고 비판했던 것을 그대로 되돌려주는 듯한 비판을 내포하고 있다. 추상적이고 은미한 도를 추구하고, 자기 자신의 수양과 ‘경’(敬)의 태도를 강조한 주자학에 대항해 진사이는 세상 경영과 일상 일용을 강조한다. 자기 수양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백성의 삶을 보살피고 편안히 하는 실질적인 행동이자 군자의 정치임을 강조하며 ‘실’을 경세의 토대라는 관점에서 구체화한다.
공부하는 사람이 할 일은 일상에서 실질적이고 평이한 도를 묵묵히 실행하는 것이다. 가까운 곳에서 도를 찾고 마음에 두고 잊지 않으면서 쉬운 일부터 해나가야 한다. 자신이 솔선한다면 백성들은 서로 일을 권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일은 멈춰지게 된다. 자신이 몸소 부지런히 하면 효과가 빠르게 나타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성과를 이루지 못하게 된다. 나아가 공자에 대해, 백성들을 교화하려 했다고, 아니 더 나아가 이들과 함께하려 했다고 평가한다. 공자의 인(仁)을, 남을 차마 해치지 못하는 마음으로 남을 차마 해치지 못하는 정치를 펼치겠다는 의지로 해석한다.
공자는 늘 실천했다. 말이 아니라 사상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몸을 놀려 움직이며 바삐 돌아다녔다. 괴롭다고 불평하지 않았으며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서운해하지 않았다. 자신의 주장을 일관되게 밀고 나갔으나 유연했고 사람들에게 예를 지켰지만 비굴하지 않았다. 그런 마음이며 태도이기에 덕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방정하지만 사납지 않고 엄정하지만 두려움을 주지 않는. 진사이가 “위대하다”고 한 말은 으레 하는 수사가 아니다. “공자는 세상을 근심하는 마음을 하루도 마음속에서 잊은 적이 없다. 그런 까닭에 그런 마음이 석경을 치면서 자연히 드러났던 것이다. …… 성인은 온 세상을 자기 한 몸처럼 보고, 백성들이 어지러운 세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을 자기 몸에 가려움증과 고통이 심한 것처럼 보았다.” 고전의 권위에 압도되거나 글로만 바라보지 않고 성인의 마음을 읽어내는 이토 진사이의 깊은 안목이 글 곳곳에 반영되어 있다.

이기론과 심성론에서 벗어난 유학

이토 진사이는 단언한다. “도란 완벽하게 바르고 명백해서 알기 쉽고 따르기 쉬우며, 천하와 만세에 두루 통용되며 잠시라도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지키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즐기기 어려운 것이다. 고원해서 도달할 수 없는 것은 도가 아니며 은미하고 까다로워 알 수 없는 것은 도가 아니다.” 때문에 그는 주자학의 여러 해석에 반대한다. 심성론에 기반한 이기론(理氣論)적 해석, 존천리거인욕(存天理去人慾)과 같이 인간의 욕망을 부정하는 논리, 어떤 고정된 실체나 진리를 상정한 듯한 본체론적 해석, 이발(已發)이니 미발(未發)이니 하는 사변적인 논의 등에 강한 거부반응을 보인다. 그것은 공자와 맹자 시대에는 없던 해석 틀로 후세의 유학자들이 덧씌운 것에 불과하다. 심하게 말하면 때로 그것은 불교와 노장의 허무맹랑한 이야기와도 별반 다르지 않은 이야기이다.
가령 주자학자들은 인간의 본성을 해명하면 근본적인 문제가 풀리고 이에 따라 사회와 국가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맹자」를 그 기초에 두었다. 성선설을 중심에 놓고 어떻게 하면 때 묻은 인간을 다시 선하게 만들 수 있는지 연구하였고, 따라서 현실성에 바탕한다기보다는 이론적인 정합성을 강조하였다. 이토 진사이는 주자학의 이런 추상화 작업이 「맹자」의 본모습에서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것으로 파악한다. 그는 성선(性善)의 논의 그 자체보다는 인성의 문제가 어떻게 선정(善政)의 문제로 확충할 수 있는가에 주목한다. 맹자는 “사람에겐 누구나 차마 해치지 못하는 것이 있는데, 이를 실천하는 데까지 도달하는 것이 인(仁)”이라고 하였다. 다른 말로, 사단의 마음을 확충한다면 비록 그것이 미약할지라도 인의예지의 덕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진사이는, 주자학자들은 이와 달리 “오로지 성(性)을 귀하게 여길 줄만 알지 확충 공부가 더 큰 줄은 모른다”며 비판한다.
「맹자」라는 텍스트는 맹자가 동시대의 제자백가들과 논쟁을 벌이며 유학을 통해 정치를 펼치려 노력한 모습을 그리고 있다. 유학의 이념이나 논리의 정합성, 경전으로서의 권위, 그런 것이 아니라왕과 제후들과의 문답, 제자들과의 문답, 맹자의 행적 등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현장 중계 같다. 이때 비로소 「맹자」는 유학 담론으로서가 아니라 이질적인 것들이 공존하는 현실의 언어로서 읽을 수 있다. 이토 진사이가 주자학 관련 주석을 광범위하게 참조했으면서도 결국에는 갈라지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다. 공자와 맹자가 주장한 인의와 도덕을 추상적이고 심오한 무엇으로 해석하기보다는 현실에 들어맞는 합리적 사상으로 풀어간다는 점. 그리고 이 점이야말로 일본 사상사에서도 특이성을 발현되는 지점이자 유학에 있어서 ‘사고의 혁신’을 보여주는 지점이다.
이토 진사이는 묻는다. 유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유학자에게 정치란 무엇인가? 일상에서 만민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을 여는 것에 있음을 그는 「논어고의」와 「맹자고의」를 통해 계속 말하고 있다. 이 두 저작은 형이상학으로 색칠하지 않고, 현세의 삶을 꾸려가는 사람살이의 방법으로 고전을 재창조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접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