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한인 디아스포라 선교와 ‘벤데’ 행상
2010-06-25
브라질 하면 ‘축구’를 연상하게 만든다. 세계적인 선수들이 있고, 월드컵과 같은 축구 무대에서 실력을 뽐내는 나라이다. 최근 월드컵에서 북한의 월드컵 팀과 브라질 국가 대표 팀이 격돌하였고, 북한은 아쉬운 2:1의 패배를 하기도 하였다. 남미의 브라질은 스패인과 포르투칼의 식민지 지배와 함께 만들어진 나라이다. 따라서 원주민들은 오히려 보호받지 못하고 죽음과 박해로 정글 속으로 숨어들어가서 삶을 연명하여야 하였다. 이러한 나라를 대상으로 한인 디아스포라의 삶의 지경을 넓혔고, 진리의 선교적 사명을 그 땅도 예외는 아니었다. 따라서 오늘 필자는 브라질 선교 가운데 나타난 ‘벤데’ 행상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벤데’라는 말은 브라질에서 보따리 행상을 말한다. 한인 디아스포라들이 브라질에서 ‘벤데’라 부르는 행상을 시작한 것은 1963년 2월 12일 17세대 103명이 산투스 항구에 도착한 이후였다. 브라질의 이민도 하와이와 마찬가지로 농업이민으로 시작한다. 비록 농업이민으로 브라질 땅에 왔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농사를 지을 줄 모를 뿐만이 아니라 농지가 너무 척박한 환경이라서 새로운 일을 만들어 낸 것이 행상이다.
악착같은 한인디아스포라들은 몇 마디 상업적인 언어를 익혔다. 즉 ‘봉피야’(좋은 아침입니다). ‘왔다리제’ (좋은 오후입니다) ‘쓰나야’ (보기만 하세요) 등이었다. 초창기 행상은 온종일 가가호호를 방문하면서 물건을 사주기를 간구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허탕을 치기 일 수였다. 비록 어려움이 있었지만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은 역시 생존의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일주일, 이주일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장사가 되기 시작하였다. 그만큼 ‘벤데’를 통한 희망도 부풀게 되었다.
지금은 상파올로 한인들이 경영하는 양대 의류 도매업 지역이 있다. 즉 봉 레티로(Bon Retiro)와 오리엔트(Oriente) 이다. 이들 지역에서 한인 가게는 무려 3,000여개나 된다. 이와 같은 숫자는 의류 도매업의 90%에 해당한다. 한인들이 의류 업으로 이곳 지역을 장악하기 전까지만 해도 유대인들의 독무대 였다 고 한다.
브라질의 한인 디아스포라들이 정착하기까지에는 목회자의 기도와 지도가 있었다. ‘벤데’업의 초년생들을 위해서 상업교육을 담당했던 분들도 대부분 목사님의 사모였다. 결국 기독교의 청교도 정신이 키톨릭 속에서 살아남는 비결을 전수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들 브라질 디아스포라들은 상업뿐만이 아니라 신앙에서도 청교도 들이었다. 남미의 대부분이 카톨릭 이지만 개의치 않고 믿음생활을 철저히 하였다. 이민자들을 위해서 헌신했던 교회가 서울 농장교회라고 한다. 초창기 농장에 입주한 사람들은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교회당 건축을 위해서 노력하였다. 심지어 어린이들도 참여하여 훌륭한 성전을 건축하였다.
브라질의 상파올로에는 현재 50여개의 한인교회가 자리 잡고 있다. 이들 중에 대표적인 교회는 새소망교회라고 한다. 오리엔트에 위치한 이 교회는 총 대지 70,000여 평에 1,000여석의 대예배실, 도서실 장서가 4,000권, 기도굴이 39개, 학생관 좌석 200개를 갖춘 메머드한 교회로 성장했다.
브라질의 한인 디아스포라들은 초창기 무수한 적들과 싸웠다. 오지의 뜨거운 태양, 잘못 물리면 목숨을 잃게 되는 발과 ‘비셔’, 방울뱀과 같은 자연환경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했다. 이제는 성장하는 경제력과 함께 주류사회로 편입되면서 초창기의 눈물도 씻겨 지고 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이민 초창기부터 기도로 도와주고 힘썼던 교역자들의 공을 폄하할 수 없다. 남미의 브라질 속에서 결코 중단할 수 없는 디아스포라 선교를 보게 된다.
복음은 생명력이 있어서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하는 힘이 있다. 브라질 땅이라고 예외일 수 는 없다. 사도 바울은 소아시아 지역을 떠돌아다니면서 강도의 위험과 산과 강의 위험을 수없이 많이 겪었다고 고백하였다. 한인 디아스포라 선교사역도 예외일 수는 없다. 질긴 생명력이 한국의 선교를 이어갈 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