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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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축구선수에 대한 내용은 이태석(축구선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국민훈장 무궁화장 수훈자 이태석 李泰錫 | Lee Tae-seok | |
출생 | |
사망 | |
국적 | |
본관 | |
학력 | 토성중학교 (졸업) 경남고등학교 (졸업) 인제대학교 의과대학 (의학 / 학사) 광주가톨릭대학교 (신학 / 학사) 이탈리아 로마 살레시오대학교 (신학 / 석사) |
병역 | |
가족관계 | |
종교 | |
별명 | 쫄리, 남수단의 성 보스코, 왕눈이 개구리 |
소속 |
1. 개요[편집]
Everything is good.
"요즈음은 '예수님이라면 이곳에 학교를 먼저 지으셨을까, 성당을 먼저 지으셨을까?'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학교를 먼저 지으셨을 것 같다.
사랑을 가르치는 성당과도 같은 거룩한 학교, '내 집'처럼 느껴지게 하는 정이 넘치는 학교, 그런 학교를 말이다."이태석 신부의 저서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2013, 생활성서사)
2. 생애[편집]
인제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 |
살레시오 수도회 입회 | |
광주가톨릭대학교 입학 | |
첫 서원[5] | |
제7회 인제인성대상 수상 | |
제23회 보령의료봉사상 수상 | |
제2회 한미 자랑스런 의사상 수상 | |
12월 제1회 KBS 감동 대상 수상 | |
1962년 10월 17일에 부산에서 출생하였다. 천주교 부산교구 송도본당 출신이다.[6] 여기서 알로이시오 슈워츠(Aloysius Philip Schwartz, 소 알로이시오) 몬시뇰 신부에게서 유아세례를 받았다. 미국인 슈워츠 신부는 이태석 신부의 스승으로, 훗날 이태석 신부가 톤즈에서 봉사한 것처럼, 6.25 전쟁 직후 피폐해진 당시 최빈국 한국에서 몸 바쳐 봉사한 인물이다. 학교법인 소년의집학원(알로이시오전자기계고등학교[7], 알로이시오중학교, 부산알로이시오초등학교 등)을 세워 고아들이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해주는 등의 공로를 세워, 부산에서는 성자로 추앙받는 사람이다.
10남매 중 9번째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홀어머니가 삯바느질을 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열심히 공부하여 특히 수학에서 성적이 우수했고 성당에서 풍금을 독학으로 익히고 직접 작사, 작곡도 하는 등 비범했다고 한다.
특히 초등학교 시절 성당에서 보여준 성 다미안 드 베스테르 신부[8]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를 보고 그와 같은 삶을 살겠다고 결심하였다고 한다. 이후 중학교 3학년 때 작곡 작사한 성가 <묵상>을 통해 자신의 삶을 그려내었다. 이 곡은 1998년 수원가톨릭대학교 갓등중창단 첫 번째 앨범 <내 발을 씻기신 예수>에 소개되었다. 여기서 들을 수 있고 가사는 다음과 같다.
십자가 앞에 꿇어 주께 물었네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이들
총부리 앞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이들을 왜 당신은 보고만 있냐고
눈물을 흘리면서 주께 물었네
세상엔 죄인들과 닫힌 감옥이 있어야만 하고
인간은 고통 속에서 번민해야만 하느냐고
조용한 침묵 속에서 주 말씀하셨지
사랑 사랑 사랑 오직 서로 사랑하라고
난 영원히 기도하리라 세계 평화 위해
난 사랑하리라 내 모든 것 바쳐
경남고등학교를 졸업하고[9] 1981년에 인제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하여, 1987년 의사 면허를 취득한다. 이후 육군 12사단에서 군의관으로 복무하면서 신부가 되고 싶은 꿈을 가졌다고 한다. 전역 후인 1991년, 이탈리아인 성 요한 보스코 신부가 설립한 대표적인 가톨릭 교육 수도회인 살레시오 수도회에 입회하였다.
그리고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다시 신학을 공부하여 2001년 6월 24일 사제서품을 받았다. 한국 천주교 3545호 신부다. 당시 그의 서품식을 집전한 이는 다름 아닌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이었다. 본 문서의 위에 올라온 유튜브 영상의 1분 10초 부분에도 나온다. 오늘날 한국천주교회의 큰 자랑이자 존경을 받는 두 사제의 놀랄 만한 인연이었던 셈.[10]
보통 사람보다는 늦은 시작이었지만 그의 신앙과 덕행은 남달랐다. 사제 서품을 받은 직후 아프리카 케냐로 건너갔다가 얼마 안 되어 더 위험하고 어려운 지역인, 20년 동안 내전이 계속되었던 수단(현 남수단 지역)으로 건너가 의료활동을 시작하였다. 열악한 수단의 환경 속에서도 병원을 손수 만들었고, 나병 혹은 문둥병이라 불리는 한센병 환자들과 결핵 환자들을 보살피며 지속적인 예방접종 사업을 벌였다. 특히 발가락이 뭉그러진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그들의 발에 맞춰서 한 명 한 명 본을 뜨고 특수 제작한 신발을 선물하기도 했다. 또한 일주일에 한 번씩 오지 마을을 돌아다니며 이동 진료를 하면서 8년을 지냈다. 여기에 내전으로 인해 가장 피해를 받을 미래 세대들을 걱정하며, 손수 학교와 기숙사를 짓고 수학을 가르치기에 이른다. 거기다 아이들을 모아 악단을 만들고 지휘자를 맡기까지 했다. 이때 브라스밴드 악기를 연주할 줄 아는 사람이 당연히 없었기에 스스로 교본을 보고 배워서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지휘를 했다고 한다.[11]
마을에서 이태석 신부만 가진 '사치품'이 있기는 했는데 다름아닌 전등과 냉장고였다. 백신을 비롯한 약품을 보관하기 위해 냉장고만큼은 없어서는 안 되었기에 집광판을 사 와 지붕에 직접 설치해서 발전을 하고 냉장고를 돌렸는데, 남는 전기는 해만 지면 암흑이라 꼼짝없이 누워 있어야 하거나 겨우 촛불이나 켜던 아이들의 야간 학습을 위한 조명에 있는 대로 털어 주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마태오 복음서 25장 40절)
위와 같은 성경 구절을 자신의 좌우명으로 여기고 의료활동을 해나가던 2008년 10월, 휴가차 귀국해서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대장암 4기라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다. 말기 암 선고를 받고도 돌아가겠다는 의지가 워낙 강해서 주변 사람들이 뜯어말리느라 고생하였다고 한다. 담당 의사에 따르면, 말기암 선고를 받자마자 "톤즈에서 우물 파다 왔어요. 마저 다 해야 하는데…"라며 실의에 빠졌다는데, 본인이 암 판정을 받아서 그런 게 아니라 앞으로도 봉사활동을 계속하지 못할 것에 대한 걱정으로 보였다고 한다. 판정 직후 인터뷰에도 병명은 숨긴 채로 미소를 띄우며 담담하게 봉사활동 및 지원 호소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모습이 나온다. 그 이후에도 투병 중에 톤즈로 몇 번이고 다시 가려고 했기 때문에 그때마다 주변에서 말렸다고 한다.[12]
투병 중에도 자선 공연도 하고 각 지역의 성당을 직접 찾아가서 봉사활동과 지원을 호소하였지만, 결국 암이 간으로 전이되어 2010년 1월 14일 새벽 5시 35분, "Everything is good."[13]이라는 유언을 남기고 47세를 일기로 선종했다.[14] 임종을 지켜본 수녀에 따르면 사망 몇 시간 전부터 의식이 희미해져서 손 하나도 제대로 못 움직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돈 보스코!"라고 외쳤는데 돈 보스코는 자신이 속해 있는 살레시오 수도회의 창립자이자 수호성인이다.[15] 수녀는 이태석 신부에게 "돈 보스코 성인이 앞에 보이시냐"고 물었고, 이태석 신부는 고개를 약하게 끄덕였다. 그 다음 손을 들어 모여 있던 살레시오 수도회 수도자들에게 강복을 해준 다음, 위의 유언인 "Everything is good"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투병 중의 이태석 신부. 오른쪽은 전재희 당시 보건복지가족부 장관이 서울성모병원에 위문을 왔을 때로, 사망 불과 6일 전의 모습이다. |
왼쪽 사진의 얼굴 부분이 나중에 영정사진이 되었다. |
3. 사후[편집]
시신은 전라남도 담양군 담양 천주교공원묘역 살레시오회 성직자 구역에 매장되었으며, 이후 부산광역시 서구 남부민동에 복원된 생가와 그 옆에는 이태석 신부 기념관이 세워졌다.이태석 신부 기념관공식 블로그
사단법인 부산사람이태석기념사업회가 2011년에, 2012년엔 사단법인 이태석사랑나눔(현 이태석 재단)이 출범해 고인의 뜻을 이어 왕성한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전자는 그의 이름을 딴 '이태석 봉사상'을 시상하고 있으며 2021년 11번째 수상자를 배출했다. 시상식은 고인의 기일을 전후로 한다고 한다.
2010년 4월 11일 방영된 KBS 스페셜 <수단의 슈바이처, 故 이태석 신부>와 이를 재편집해 2010년 9월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울지마 톤즈>로 한국에 이름이 알려졌다. 사실 그전에도 여러 성당을 돌며 모금 활동을 하였기 때문에, 이 영화가 개봉된 후 "그분이 그분이셨구나!"라는 반응을 보인 신자들도 많았다고 한다. 2011년 2월까지도 장기 개봉 중이며 단 몇 개 상영관 개봉 체제에서도 40만이 넘는 관객이 보았다. 자세한 정보는 해당 문서로.
한 가지 씁쓸한 점은, 이태석 신부로 인하여 높아진 수단에 대한 한국의 인지도를 이용해 몇몇 한국인 범죄자들이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들어가 여러가지 사기 사건 등을 저지르고 있어, 이태석 신부의 노력과 한국인에 대한 평판을 땅에 떨어뜨리고 있다는 것이다. 수단에서의 사기 사건은 TV 시사고발 프로그램에서 따로 다뤄지기도 했다.
2011년 행정안전부에서는 정부포상 국민추천제를 시행하였는데, 이 제도를 통한 첫 번째 국민훈장 무궁화장(1등급) 수훈자로 선정되었다. 이후 정부에서는 매년 이 제도를 시행하고 있지만, 최고등급 국민훈장인 무궁화장을 수여 또는 추서받은 사람은 이태석 신부를 포함해서 2명 뿐이다.[16]
2011년 12월 15일 바티칸 교황청 내 비오 10세 홀에서 이태석 신부의 일대기를 그린 <울지마 톤즈>가 공식 상영되었으며, 사망 5년이 지나면 시복 절차가 진행될 것으로 알려졌었다. 다만 사망 5년이 한참 넘은 2023년 현재까지도 시복 청원조차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듯. 이태석 신부가 한국천주교회 소속이 아닌 살레시오 수도회 소속이라 살레시오 수도회가 적극적으로 주도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서 시복 절차가 늦춰지고 있다는 견해가 있다.
<울지마 톤즈>를 연출한 구수환 PD가 2012년에 쓴 책인 <울지마 톤즈-그 후의 선물>을 보면 여전히 열악한 남수단 내부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이 책자를 보면 이태석 신부가 도왔던 현지인들은 하느님을 원망하면서 "우리가 서로 싸우고 죽게 하곤 왜 쫄리[17] 신부님을 데려가느냐"면서 울부짖으며 "그분만큼 우릴 돕던 분이 없어요"라며 눈물을 보였다고 한다.[18] 고인을 잘 알았던 선배 성직자들은 '이룬 것 없고 나이만 먹은 나를 데려가시지 않고, 앞으로도 할 일이 많고 나이도 젊은 이태석 신부를 먼저 데려가셨다'며 슬퍼했다. 이태석 신부가 자비를 털어가며 운영하던 병원은 이태석 신부와 같이 병원 일을 돕던 다른 한국인 신부가 남아서 하고 있는데 "정말 이태석 신부님이 하던 일을 도저히 못 따르겠다"고 할 정도였다.
이태석 신부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고 톤즈를 비롯한 많은 현지 주민들이 이태석 신부를 애도하는 가두행진을 벌였는데, 워낙에 시국이 불안한 곳이라 시위나 행진 같은 집단행동이 엄격히 금지되고 있었음에도 군인이나 민병대원 누구도 훼방하지 않았다. 그들도 이태석 신부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
더불어 이태석 신부를 종교적으로 괜시리 욕하는 이들이 아직도 보이는데, 그는 절대로 그런 찌질이 종교 장사꾼이 아니었다. 생전 가톨릭 신자만이 아닌 무슬림, 토속신앙인, 개신교 신자 가리지 않고 모두 돌보았다. 민병대원도 치료하여 그들이 너무나도 고마워하며 병원 근처에서는 전투를 벌이지도, 무기를 든 채로 얼씬거리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개요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성당을 짓기 전에 병원과 학교부터 세워야 하는 걸 거듭 강조한 성직자이다. 고인의 뜻을 기리는 사단법인 이태석 사랑나눔을 봐도 스님도 있고 종교를 초월하여 충분히 존경할 만한 가치가 넘쳐흐르는 사람이다. 물론 이태석 신부는 엄연히 살레시오 수도회에 소속된 사제이며, '종교가 아니라 사람이 우선이다'라는 식의 생각을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태석 신부는 '사제이지만'이 아니라 '사제였기에', 종교와 인간이 모순을 가지는 상황 자체를 상상할 수 없었고, 그렇기에 자신의 행동을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거스른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따른 것'으로 설명한 것이다.
2013년 9월 22일 한가위 특선으로 KBS-1에서 다큐멘터리 <울지마 톤즈-브라스 밴드 한국에 오다!>(예고편)가 방영되었는데 바로 이태석 신부가 남수단에서 처음으로 만든 밴드가 이 브라스 밴드이다.
2018년 11월 20일 남수단 정부가 이태석 신부에게 대통령 훈장(Medal of the President)을 추서했다. 남수단 정부가 외국인에게 훈장을 수여하는 것은 건국 이래 처음이다.#
2020년 1월 9일 이태석 신부 사망 10주기를 맞아 울지마 톤즈 2 : 슈크란 바바가 개봉했다.
2020년 7월 9일 사는 곳이 다르며 의사, 약사, 공무원, 언론인 등이 된 제자 70명이 현재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한 영화 <부활>이 개봉됐다. <울지마 톤즈>의 후속작이다. #1 #2
2022년 9월, 부산광역시교육청이 선정한 '부산을 빛낸 12명'의 일원으로 포함되었다. 함께 선정된 인물은 장기려 박사, 우장춘 박사, 박차정 의사, 안용복, 송상현 장군, 최동원 선수, 금수현[19][20] 선생 등이다.
사단법인 부산사람이태석기념사업회가 2011년에, 2012년엔 사단법인 이태석사랑나눔(현 이태석 재단)이 출범해 고인의 뜻을 이어 왕성한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전자는 그의 이름을 딴 '이태석 봉사상'을 시상하고 있으며 2021년 11번째 수상자를 배출했다. 시상식은 고인의 기일을 전후로 한다고 한다.
2010년 4월 11일 방영된 KBS 스페셜 <수단의 슈바이처, 故 이태석 신부>와 이를 재편집해 2010년 9월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울지마 톤즈>로 한국에 이름이 알려졌다. 사실 그전에도 여러 성당을 돌며 모금 활동을 하였기 때문에, 이 영화가 개봉된 후 "그분이 그분이셨구나!"라는 반응을 보인 신자들도 많았다고 한다. 2011년 2월까지도 장기 개봉 중이며 단 몇 개 상영관 개봉 체제에서도 40만이 넘는 관객이 보았다. 자세한 정보는 해당 문서로.
한 가지 씁쓸한 점은, 이태석 신부로 인하여 높아진 수단에 대한 한국의 인지도를 이용해 몇몇 한국인 범죄자들이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들어가 여러가지 사기 사건 등을 저지르고 있어, 이태석 신부의 노력과 한국인에 대한 평판을 땅에 떨어뜨리고 있다는 것이다. 수단에서의 사기 사건은 TV 시사고발 프로그램에서 따로 다뤄지기도 했다.
2011년 행정안전부에서는 정부포상 국민추천제를 시행하였는데, 이 제도를 통한 첫 번째 국민훈장 무궁화장(1등급) 수훈자로 선정되었다. 이후 정부에서는 매년 이 제도를 시행하고 있지만, 최고등급 국민훈장인 무궁화장을 수여 또는 추서받은 사람은 이태석 신부를 포함해서 2명 뿐이다.[16]
2011년 12월 15일 바티칸 교황청 내 비오 10세 홀에서 이태석 신부의 일대기를 그린 <울지마 톤즈>가 공식 상영되었으며, 사망 5년이 지나면 시복 절차가 진행될 것으로 알려졌었다. 다만 사망 5년이 한참 넘은 2023년 현재까지도 시복 청원조차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듯. 이태석 신부가 한국천주교회 소속이 아닌 살레시오 수도회 소속이라 살레시오 수도회가 적극적으로 주도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서 시복 절차가 늦춰지고 있다는 견해가 있다.
<울지마 톤즈>를 연출한 구수환 PD가 2012년에 쓴 책인 <울지마 톤즈-그 후의 선물>을 보면 여전히 열악한 남수단 내부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이 책자를 보면 이태석 신부가 도왔던 현지인들은 하느님을 원망하면서 "우리가 서로 싸우고 죽게 하곤 왜 쫄리[17] 신부님을 데려가느냐"면서 울부짖으며 "그분만큼 우릴 돕던 분이 없어요"라며 눈물을 보였다고 한다.[18] 고인을 잘 알았던 선배 성직자들은 '이룬 것 없고 나이만 먹은 나를 데려가시지 않고, 앞으로도 할 일이 많고 나이도 젊은 이태석 신부를 먼저 데려가셨다'며 슬퍼했다. 이태석 신부가 자비를 털어가며 운영하던 병원은 이태석 신부와 같이 병원 일을 돕던 다른 한국인 신부가 남아서 하고 있는데 "정말 이태석 신부님이 하던 일을 도저히 못 따르겠다"고 할 정도였다.
이태석 신부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고 톤즈를 비롯한 많은 현지 주민들이 이태석 신부를 애도하는 가두행진을 벌였는데, 워낙에 시국이 불안한 곳이라 시위나 행진 같은 집단행동이 엄격히 금지되고 있었음에도 군인이나 민병대원 누구도 훼방하지 않았다. 그들도 이태석 신부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
더불어 이태석 신부를 종교적으로 괜시리 욕하는 이들이 아직도 보이는데, 그는 절대로 그런 찌질이 종교 장사꾼이 아니었다. 생전 가톨릭 신자만이 아닌 무슬림, 토속신앙인, 개신교 신자 가리지 않고 모두 돌보았다. 민병대원도 치료하여 그들이 너무나도 고마워하며 병원 근처에서는 전투를 벌이지도, 무기를 든 채로 얼씬거리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개요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성당을 짓기 전에 병원과 학교부터 세워야 하는 걸 거듭 강조한 성직자이다. 고인의 뜻을 기리는 사단법인 이태석 사랑나눔을 봐도 스님도 있고 종교를 초월하여 충분히 존경할 만한 가치가 넘쳐흐르는 사람이다. 물론 이태석 신부는 엄연히 살레시오 수도회에 소속된 사제이며, '종교가 아니라 사람이 우선이다'라는 식의 생각을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태석 신부는 '사제이지만'이 아니라 '사제였기에', 종교와 인간이 모순을 가지는 상황 자체를 상상할 수 없었고, 그렇기에 자신의 행동을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거스른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따른 것'으로 설명한 것이다.
2013년 9월 22일 한가위 특선으로 KBS-1에서 다큐멘터리 <울지마 톤즈-브라스 밴드 한국에 오다!>(예고편)가 방영되었는데 바로 이태석 신부가 남수단에서 처음으로 만든 밴드가 이 브라스 밴드이다.
2018년 11월 20일 남수단 정부가 이태석 신부에게 대통령 훈장(Medal of the President)을 추서했다. 남수단 정부가 외국인에게 훈장을 수여하는 것은 건국 이래 처음이다.#
2020년 1월 9일 이태석 신부 사망 10주기를 맞아 울지마 톤즈 2 : 슈크란 바바가 개봉했다.
2020년 7월 9일 사는 곳이 다르며 의사, 약사, 공무원, 언론인 등이 된 제자 70명이 현재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한 영화 <부활>이 개봉됐다. <울지마 톤즈>의 후속작이다. #1 #2
2022년 9월, 부산광역시교육청이 선정한 '부산을 빛낸 12명'의 일원으로 포함되었다. 함께 선정된 인물은 장기려 박사, 우장춘 박사, 박차정 의사, 안용복, 송상현 장군, 최동원 선수, 금수현[19][20] 선생 등이다.
3.1. 제자들의 근황[편집]
2016년 8월 KBS 뉴스를 통해 처음으로 이태석 신부가 지은 학교의 제자들의 근황이 보도되었는데, 이들은 한국에서 의학과 공학을 배우고 있다. 토마스 타반 아콧과 존 마옌 루벤 두 사람은 2018년 1월 15일 인제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이태석 신부의 후배가 되었다.
2017년 1월 산티노 뎅 씨가 충남대학교 토목공학과를 졸업하였다. 이태석 신부 사망 후 수단어린이장학회의 지원으로 한국에 왔고, 2015년 충남대 토목공학과로 편입해서 졸업하였다. #
2018년 12월 21일 토마스 타반 아콧 씨가 드디어 졸업하고 정식 의사가 되었다. 아프리카 출신자가 한국 의대를 졸업하여서 의사가 된 건 그가 처음이라고 한다.# 2019년 1월 존 마옌 씨도 같은 의대를 졸업하고 정식 의사가 되었다. 의사의 길을 택한 두 사람은 수련의 생활을 끝내는 대로 남수단으로 귀국하여 현지 병원을 개원할 예정이다.
2019년 8월 아순타 아조크 씨가 이화여자대학교 공과대학을 졸업했다.[21] 그녀는 같은 해 11월 이태석 신부의 다른 제자들과 함께 또다시 한국을 찾았으며, 다음해인 2020년 이화여대 공식 블로그에 영화 부활의 개봉을 맞아 진행된 그녀와의 인터뷰가 공개되었다.
2019년 12월 24일 토마스 타반 아콧 씨가 KBS 아침마당에 유명일 사무엘 신부[22]와 동반출연해 이태석 신부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2020년 2월 그의 제자 존 마옌 루벤(1986년생)이 인제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국가시험에 합격했다.
2020년 6월 15일 아투아이 알비노 씨[23]가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24] 이에 재단 측에서는 유족들에게 장례비를 전달했다. 이후 부활 개봉 당시에 에필로그 형식으로 다른 제자들의 근황과 함께 그의 사망 소식을 알렸으며, 자막으로나마 짤막하게 그의 죽음을 추모했다. 이후에는 그의 아내와 아이들을 위한 교육비와 생활비를 재단 측에서 제공하기로 했다.
2021년 6월 16일 토마스 타반 아콧 씨가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으로 또 다시 한국 방송에 출연해 다시 한 번 한국의 시청자들을 만나 이태석 신부의 이야기와 자신의 근황 등을 공개했다. 현재 부산백병원에서 외과 전공의 과정을 밟고 있으며,[25] 결혼 2년 차라고 한다.[26]
2017년 1월 산티노 뎅 씨가 충남대학교 토목공학과를 졸업하였다. 이태석 신부 사망 후 수단어린이장학회의 지원으로 한국에 왔고, 2015년 충남대 토목공학과로 편입해서 졸업하였다. #
2018년 12월 21일 토마스 타반 아콧 씨가 드디어 졸업하고 정식 의사가 되었다. 아프리카 출신자가 한국 의대를 졸업하여서 의사가 된 건 그가 처음이라고 한다.# 2019년 1월 존 마옌 씨도 같은 의대를 졸업하고 정식 의사가 되었다. 의사의 길을 택한 두 사람은 수련의 생활을 끝내는 대로 남수단으로 귀국하여 현지 병원을 개원할 예정이다.
2019년 8월 아순타 아조크 씨가 이화여자대학교 공과대학을 졸업했다.[21] 그녀는 같은 해 11월 이태석 신부의 다른 제자들과 함께 또다시 한국을 찾았으며, 다음해인 2020년 이화여대 공식 블로그에 영화 부활의 개봉을 맞아 진행된 그녀와의 인터뷰가 공개되었다.
2019년 12월 24일 토마스 타반 아콧 씨가 KBS 아침마당에 유명일 사무엘 신부[22]와 동반출연해 이태석 신부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2020년 2월 그의 제자 존 마옌 루벤(1986년생)이 인제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국가시험에 합격했다.
2020년 6월 15일 아투아이 알비노 씨[23]가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24] 이에 재단 측에서는 유족들에게 장례비를 전달했다. 이후 부활 개봉 당시에 에필로그 형식으로 다른 제자들의 근황과 함께 그의 사망 소식을 알렸으며, 자막으로나마 짤막하게 그의 죽음을 추모했다. 이후에는 그의 아내와 아이들을 위한 교육비와 생활비를 재단 측에서 제공하기로 했다.
2021년 6월 16일 토마스 타반 아콧 씨가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으로 또 다시 한국 방송에 출연해 다시 한 번 한국의 시청자들을 만나 이태석 신부의 이야기와 자신의 근황 등을 공개했다. 현재 부산백병원에서 외과 전공의 과정을 밟고 있으며,[25] 결혼 2년 차라고 한다.[26]
4. 저서 및 작품[편집]
- 생활성가 - "묵상" (성 바오로 출판사) 1998년
- 자서전 -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쫄리 신부의 아프리카 이야기)" (생활성서사) 2009년
- 자서전 -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 증보판" (생활성서사) 2010년
- 강론집 - "당신의 이름은 사랑(톤즈의 돈 보스코 이태석 신부 영성의 메시지)" (다른우리) 2011년
- 만화 - "내친구 쫄리 신부님 1" (생활성서사) 2011
- 다큐멘터리 - "울지마 톤즈" 2010년
- 영화 - "울지마 톤즈 2 : 슈크란 바바" 2020년
- 영화 - "부활" 2020년
- 영화 - "이태석" 2022년
[1] 음력 9월 19일.[2] 아버지께서는 이태석 신부가 초등학교 다닐 적 돌아가셨다고 한다.[3] 10남매 중 아홉째라고 한다. 이들 가운데 그의 형 이태영(세례명: 마리요셉)도 성직자로 이태석 신부 사후에 만들어진 이태석사랑나눔재단의 이사장을 맡기도 했다.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소속으로 지난 2019년에 선종했다. 현재는 이태영 신부의 뒤를 이어 울지마 톤즈 시리즈와 영화 부활(2020)로 이태석 신부의 일대기를 여러차례 다룬 바 있는 구수환 감독이 이사장을 맡고 있다.[4] 관련 자료. 통상적으로는 요한 세례자로 알려져 있으나 한국 천주교회 사제 인명록에서는 요한으로 명시하고 있다.[5] 수도자로 살겠다는 약속. 청빈, 정결, 순명의 복음삼덕(福音三德)을 서약한다. 자세한 것은 수도자 문서로.[6] 부산관광고등학교와 송도중학교 인근에 위치. 성당 근처에는 이태석 신부의 생가가 복원되어, 여러 사진과 유물과 영상이 전시되어 있으며 관광객들이 간간이 방문한다.[7] 2018년에 폐교되었다.[8] 성 다미아노 신부라고도 한다. 하와이의 한센병 환자를 위해 사목활동을 하다 결국 한센병에 걸려 1889년 선종했으며, 교황 베네딕토 16세에 의해 2009년 시성되어 한센병 환자의 수호성인이 되었다.[9]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 시행 이후다. 1974년 서울과 부산에 전국 최초로 고등학교 평준화 제도가 적용되었다. 그 이전까지는 부산고등학교와 함께 부산의 일류 명문 고등학교였다.[10]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불과 1년 차이로 선종했다. 2009년 2월에 김수환 추기경이 노환으로, 이듬해인 2010년 1월에는 이태석 신부가 대장암 투병 끝에 숨을 거두었다.[11] 아이들은 브라스밴드에 큰 애착을 갖고 있었는데, 한 아이가 이태석 신부에게 빨리 악기를 능숙하게 연주하고 싶다고 하자, ‘먼저 착한 아이가 되어야 한단다.’ 라고 말한 일화도 있다.[12] 이를 두고 "만약 자신의 몸 상태를 전혀 알지 못하고 계속 톤즈에서 봉사를 했다면 오히려 건강이 악화되는 일이 없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도 간혹 나온다. 아주 적은 사례이긴 하지만, 이런 치명적인 중병을 품고도 감기 한 번 안 걸리고 의외로 오래 사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13]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이다." 혹은 "모든 것이 다 좋다."는 의미로 해석된다.[14] 나중에 남수단을 취재한 <울지마 톤즈: 그 후 이야기>라는 책자에서 말라리아로 다 죽어가는 현지인 환자를 본 한국인 의사가 "이태석 신부님 마지막 모습이 바로 저랬습니다..."이라며 병명은 다르지만 삐쩍 마른 모습으로 마지막을 맞이했다고 회고하는 게 나온다.[15] 사망 직전 곁을 지키고 있던 수도회 수사들에게 '어젯 밤 꿈에서 돈 보스코가 나를 축복했습니다'라는 말을 했다는 일화도 있다. 본인이 소속된 수도회의 설립자에게 인정받은 셈이다.[16] 이태석 신부의 뒤를 이은 2번째이자 가장 최근의 무궁화장 수훈자는 2019년의 이국종 교수다.[17] 이태석 신부의 영어 이름이 요한을 나타내는 존, 즉 존 리였는데, 존 리라는 이름이 쫄리로 불리게 된 것이다.[18] 톤즈 마을 주민들은 눈물을 보이는 걸 수치스럽게 여기는데, 이태석 신부와 관련된 이야기만 나오면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얼마나 톤즈 사람들이 이태석 신부를 따랐는지 알 수 있는 부분.[19] 마에스트로 금난새의 부친이다. 부산 경남 지역에서 음악 교사와 작곡가로 활동하여 부산 지역 학교의 교가들을 작곡하기도 했으며 경남여자고등학교 교감도 지냈다. 여담으로 경남여고 교감 재직 당시 교장은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으로 유명한 시인이자 국어교사였던 청마 유치환 선생이었다.[20] 다만 유치환은 친형 유치진과 더불어 계속해서 친일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21] 이태석 신부 사후에 개봉한 영화 부활(2020)에 그녀의 졸업식 모습이 공개되기도 하였다.[22] 이태석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23] 과거 이태석 신부와 함께 찍은 사진과 함께 그때 당시를 회상하는 그의 목소리가 부활 메인 예고편에 쓰였다.[24] UN에 소속된 저널리스트여서, 그의 사망 소식이 현지 언론을 통해 전해지기도 하였다.[25] 전공의 과정이 끝나는 대로 남수단으로 돌아가 의사로 활동할 계획이라고 한다.[26] 아내의 국적을 밝히지는 않았으나, 사진으로 드러난 것으로 보아 같은 아프리카 사람으로 보이며, 그와 결혼한 뒤에 남수단으로 먼저 돌아갔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같은 남수단 사람으로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