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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03

천주교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 :: [20101115] 김조년 교수의 함석현의 평화주의와 우리의 평화운동 (정세미)

천주교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 :: [20101115] 김조년 교수의 함석현의 평화주의와 우리의 평화운동 (정세미)



[20101115] 김조년 교수의 함석현의 평화주의와 우리의 평화운동 (정세미)정세미 강연 2016. 12. 20. 22:09


2010년 11월 15일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위한 미사(정세미) 강연

대전 관저동 성당



함석헌의 평화주의와 우리의 평화운동

김조년 한남대 교수

(민들레의료생협 이사장, 표주박통신 발행인)









함석헌의 평화사상의 맥락




이것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일단 그의 생애가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를 살피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함석헌에게서 평화는 가능하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를 뛰어넘는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왜 살아야 하냐 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을 하는 것과 같다. 어느 누구도 살 가치가 있다거나, 살아야 할 어떤 당위성이 있어서 사는 것이 아니다. 그냥 낳았으니까 사는 것이요, 살려 주시는 것이니까 사는 것이지, 어떤 자유의지의 선택에 따라서 우리가 사는 것은 아닌 것과 같다. 물론 살지 않고 죽음을 택할 수는 있는 것이지만, 그 순간 삶과는 일단 떨어진다. 살아 있는 한은 살아야 할까 말아야 할까를 생각할 것 없이 그냥 살아가는 것이다. 거기에 어떤 다른 질문이 없다. 이것처럼 평화롭게 사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삶이 아니면 죽음이듯이, 평화가 아니면 반평화나 불화가 있을 뿐이다. 즉 평화롭게 살아야 하냐 아니냐의 문제는 평화가 필요한 것이냐, 가능하냐,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느냐를 뛰어 넘는 문제로 설정한다. 여기에는 어떤 논리를 따지는 말의 전개가 필요가 없다. 평화하지 않으면 죽음이다 하는 것에 걸리는 문제기 때문이다.




함석헌에게서 이러한 문제는 태어나면서부터 일생을 따라다닌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가 태어난 1901년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한 가운데 있는 시점으로 언제나 전쟁의 기운이 사회에 가득할 때였다. 특히 그가 태어난 평안북도 용천지방은 중국과 한반도를 연결하는 지점, 압록강 하류 서해안에 있는 작은 섬이었다. 그래서 지리상으로 볼 때 중국과 한반도 사이의 갈등과 긴장과 화해의 분위기를 아주 민감하게 느끼던 곳이다. 더욱이나 조선은 말기현상으로 중앙정부의 권위가 사라지고 지역민 스스로 자신들의 안녕을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때와 곳에서 자랐다. 전쟁의 분위기는 어린아이들의 놀이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패를 나누어 놀이를 할 때에도 ‘나는 아라사다, 나는 일본이다’라고 하면서 전쟁놀이를 하는 것이 어린아이들의 일상이었다.




6ㆍ25 때 우리가 전쟁놀이 하면서 자랐고, 지금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과 미군이 싸우는 전쟁놀이를 하고 자라는 아이들이 있는 것처럼, 언제나 전쟁 상황에서는 아이들이 놀이를 통하여 전쟁을 재생산하고 체화하는 비극을 반복한다. 그러다가 국권을 잃은 때부터 점점 더 사회불안은 심화되었다. 이러한 때 사회분위기는 언제나 나라를 잃고 자기를 상실한 비애감에 휩싸였다. 함석헌의 집안 분위기와 그가 살던 지역의 분위기는 중앙정부와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상관은 없었지만, 민족과 나라를 잃은 것에 대한 비감함은 매우 대단하였다. 그러한 것이 그에게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가 일찍이 어린 나이에 접촉한 기독교교육의 효과는 매우 결정적으로 컸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 동등하다는 것을 그는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인다. 그가 자랐던 곳에서는 반상의 구별이 별로 없던, 평민들이 주로 살았던 곳이기에 계급갈등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안에서의 남녀차별이나 장자우선 관습은 남아 있었지만, 그것은 어머니의 가르침에 의하여 아주 뼈저린 경험으로 깨지고 깨우쳐진다. 거기에서 그에게는 민주주의 사상의 기초를 배운다. 남녀가 평등하다는 것, 상하가 평등하다는 것을 어머니의 단순한 이야기로 깨달아 그의 일생을 이끌어 나간다.




그 뒤 그는 사립 기독교학교를 다닐 때와 공립학교를 다닐 때의 분위기를 다 경험한다. 사립학교에서는 매우 활발한 자유정신과 독립정신을 경험하였지만, 공립학교에서는 식민지배자의 앞잡이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그러나 다른 선택의 가능성이 없었다. 그러던 중 3ㆍ1만세운동이 일어난다. 이 때 그는 평양의 만세운동을 앞장에서 아주 시원하게 전개한다. 그 결과로 학교를 나오게 되고, 다시는 관립학교에 가지 않고, 그의 말대로 하느님의 발길에 채여 오산학교에 간다. 이 때부터 그는 관과는 대립하는 관계를 설정한다. 그것은 바로 그에게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 거대한 사건이 된다. 그곳에서 민족주의를 알게 되고, 독립 기독교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동양고전과 서양철학의 접목이 어떠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며, 동시에 자기 자신이 독자적으로 깊이 생각하고 파고들어가는 훈련을 하게 된다. 여기에서 그는 매우 귀한 사람들을 책으로 접촉하게 된다. 가장 귀한 인물이 이승훈과 유영모다.




일본에 건너가 공부하게 되면서 기독교를 새로 이해하고, 기독교와 애국이라는 관계를 새롭게 정리한다. 특히 예레미야를 공부하면서 망국노의 비애가 무엇인지? 무엇을 통하여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는 데 힘을 보탤 수 있는 것인지를 깨닫고 생각하게 된다. 이 때 그가 만난 우찌무라 간조는 일생의 좋은 스승으로 남는다. 그에게 배운 것은 독립정신으로 모든 것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뒤 귀국하여 모교 오산학교에서 10년간 교사로 생활한다.




특히 예레미야를 공부하면서 망국노의 비애가 무엇인지?

무엇을 통하여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는 데

힘을 보탤 수 있는 것인지를 깨닫고 생각하게 된다.




이 때 그의 동료 김교신과 함께 무교회성서집회를 열고, 《성서조선》을 창간하여 함께 꾸려나간다. 이 때 그는 오산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데, 역사 교사가 된 것을 무척 후회한다. 아무 것도 학생들에게 영광스럽던 조상들의 역사를 가르칠 건덕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계속되는 외세의 침략과 패배와 굴종과 식민통치의 쓰라린 경험의 역사만을 반복할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 데는 ‘자기를 잃어버린’ 결과라는 것이다. 자기를 잃어버린 뒤에는 어떠한 물질의 영광이나 힘의 강력함도 소용이 없다. 등뼈가 부러진 것이요, 중축이 부러진 것이 되고 만다. 그러한 근본이 못된 다음에는 어떤 처방도 임시처방일 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러한 것들을 보면서 그는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쓴다.




여기에서 그는 한국역사를 고난의 역사로 규정하고, 고난의 의미를 예수의 고난과 한국민족의 고난을 대비하여 본다. 예수의 고난에서 인류구원의 비전을 보듯이 한국역사의 고난의 행진 속에서 세계구원의 비전을 본다. 한국역사는 단순히 한민족의 한 역사로 끝나지는 않는다. 그 한 예가 6ㆍ25전쟁이다.




그것은 세계의 모든 잘못 된 것이 함께 몰려든 전쟁이다. 이데올로기와 물질과 과학과 민족들과 헤게모니 쟁탈전이 한반도에서 집중하여 나타난 것이었다. 그것은 세계화의 어두운 면과 긍정의 면을 동시에 경험한 거대한 사건이었다. 이것의 의미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1) 우선 무력과 전쟁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 2) 국지적인 문제라 하더라도 그 지역의 독자적 힘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국제관계 안에서 해결된다는 것, 3) 적과 아, 원수와 형제의 개념이 아니라 하나의 인류, 하나의 인간이라는 철학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 4) 그러나 민족의 문제는 외세종속체계에서가 아니라 자기 힘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이 앞서야 한다는 것, 5) 고난의 연속으로 경험한 민족의 최대비극을 통하여 세계구원의 원대한 비전을 찾아보라는 것, 6) 적대관계나 상생관계나 어느 한 편이 이기고 다른 편은 지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살아가는 길을 찾으라는 것. 사실 이러한 것을 염두에 두고 우리는 현재의 남북문제도 처리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비로소 예수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과 모든 인류가 궁극적으로 구원되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음미하여 볼 때라고 본다. 이 부분은 뒤에서 다시 논의하게 될 것이다.

그이의 평화사상: 민족과 민족의 화합, 사람과 하느님의 합일, 사람과 자연의 평화, 순간(지금)과 영원의 통합, 땅과 하늘의 합일, 개인과 전체의 합일을 상정한다.




그는 “씨알은 평화요 평화는 씨알에 있다”는 명제에 따라서 이와 같은 사상을 전개한다. “우리는 모두 세 세계에 살고 있다. 극대(極大)의 나라, 극소(極小)의 나라, 중간 나라. 물질계를 보는 데 눈ㆍ망원경ㆍ현미경의 세 눈이 있듯이, 정신계에도 세 눈이 있어야 한다. 영원ㆍ무한을 내다보는 눈, 마음이 갈피를 찾는 눈, 그리고 사회와 역사를 두루 살피는 눈. 이 여섯 세계를 공통으로 다스리고 있는 원리가 평화다. 화는 곧 조화ㆍ고름인데, 고르게 되지 않고는 세계가 서갈 수 없다. 안ㆍ밖ㆍ생ㆍ무생을 말할 것 없이 복잡한 힘의 얽힘이다. 그 얽혀 작용하는 것이 어느 고른 상태에 이르지 않고는 하나의 세계가 있을 수 없다. 코스모스라는 말은 그래서 있다. 하나의 질서 잡히고 법칙 있는 세계가 된 다음에야 우리가 능히 생각하고 알고 교섭할 수 있다. 그렇게 되기 전에는 설혹 상상한대도 혼돈ㆍ어지러움ㆍ허무ㆍ두루뭉수리밖에 없다. 우리가 있을 때, 알 때, 나일 때는 벌써 거기 세계 곧 질서ㆍ코스모스ㆍ대조화ㆍ평화가 있었다. ‘화(和)는 천하지달도(天下之達道)다.’(중용) 그러므로 화는 알파와 오메가다.




영원ㆍ무한을 내다보는 눈, 마음이 갈피를 찾는 눈,

그리고 사회와 역사를 두루 살피는 눈.

이 여섯 세계를 공통으로 다스리고 있는 원리가 평화다.




다른 말로 하면 평화는 구경의 원리인 동시에 또 내재의 원리다. 칸트가 위와 안을 보고 다 같이 놀라고 찬미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중간의 세계도 알고 보면 놀랍다. 공자가 교육의 대강을 말하는데, 명명덕 친(신)민 지어지선(明明德 親(新)民 止於至善)이라고 했다. 그것을 실현하는 과정을 말할 때 첫머리에 평천하(平天下)를 내걸었다. 명명덕 어천하(明明德 於天下)라 했다. 예수가 날 때 하늘에서 찬송이 들려서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기쁨’이라 했다. 노자의 무위(無爲), 석가의 니르바나도 요컨대 평(平)의 자리다.




예와 이제를 말할 것 없이, 종교 정치를 가를 것 없이, 사람인 다음에는 다 평화를 내세웠다. 전쟁을 직업으로 하여 불쌍한 씨알의 피로 제 살을 찌우고 기름을 짜며 사람 죽임을 재미있는 장난으로까지 하는 소위 영웅이란 것들도 입으로는 평화를 위해 하노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주 내놓고 전쟁을 예찬하는 놈은 미쳤거나 그렇지 않으면 악마의 종자라고 할밖에 없다. 씨알은 말하자면 내재의 평화, 극소세계의 평화다. 본질적인 평화다. 씨알의 바탈이 평화요, 평화의 열매가 씨알이다. 그러므로 씨알의 목적은 평화의 세계 이외에 있을 수 없다. 극소는 극대에 통한다.” 함석헌: ‘세계평화의 길’, 함석헌 저작집 12, 『평화운동을 일으키자』, 한길사 2009, 44-46




결국 그에게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것, 그것들이 교섭하여 사는 방법은 화라는 것이다. 그것이 그가 내세우는 평화사상의 알파요 오메가다. 그런데 이것들이 깨지는 데는 몇 가지 사회제도와 그것에 힘을 업은 인간의 집단 심리와 집단행동에서 연유한다. 소유제와 국가지상주의와 계급제가 그것이다. 이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것은 국가지상주의다. 국가주의는 결국엔 국가지상주의, 민족 지상주의로 변하여 나와 다른 민족이나 나와 다른 가문, 또는 내나라 다른 나라, 나와 다른 종교에 대한 전쟁을 때때로 신성한 것으로 만들었다. 대개 정의로운 전쟁이나 거룩한 전쟁이란 것은 바로 여기에서 연유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뒷받침하는 철학은 차별에 있다. 나와 너는 다르다는 것, 다른 너는 나의 소유물이나 밥이나 도구가 되어도 좋다는 기본철학을 깔고 있다. 여기에 모든 중심은 ‘나’에 있다. ‘우리’나 ‘서로’가 아니라, ‘나’를 중심에 놓는다. 이 때 나는 언제나 강력하여야 했다. 여기에 복무한 것이 이른바 우승열패, 약육강식 따위의 사회진화론적 차원의 관계철학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힘의 논리를 앞세운 것으로 화쟁의 원칙이 없다. 그러나 상당히 강한 다른 이론, 즉 생물진화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것들은 꼭 강자만이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약한 자들이 연합하여 살아남았다는 이론이 매우 강하다. 이것은 러시아의 학자 크로포트킨이 쓴 『상호부조론』에서 주장하는 화쟁과 상생의 논리다. 만물은 서로 돕는다는 것이다. 어떤 것은 상생관계로 돕고, 어떤 것은 상극관계로 돕는다. 그것들은 서로 함께 존재해야 살아나가는 것이지, 어느 것이 사라지면 다른 것 역시 사라진다. 적대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 역시 공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주의 원리다. 원칙이 그러하지만, 그것을 실현하는 것은 현실에서 어떻게 사는가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




2. 함석헌의 평화운동과 실천


함석헌의 평화사상이 언제부터 싹트게 되었을까? 가장 가까운 직접 영향은 2차 대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때 그는 전선에 투입되지는 않았지만, 무모한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았다. 특히 식민지배체제 아래 살고 있는 조선 청년들이 강제로 전쟁터에 끌려가는 것을 보면서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가를 본다. 그리고 가장 큰 것, 특히 전쟁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가장 큰 이유로 과학기술의 발달과 성숙한 인간이성을 든다. 전쟁무기를 생산하고 운용할 수 있는 과학기술은 세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을 완전히 말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을 증명하였다. 핵무기의 개발은 전혀 무력전쟁의 무의미함을 말해준다. 핵무기의 발명과 개발은 그것을 무기로 사용하여 무력으로 상대방을 제압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할 경우 모두가 멸망하게 될 것이기에 평화롭게 살라는 명령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 무렵 H. G. 웰즈의 『세계문화사대계』를 읽고 그의 세계국가주의와 평화사상을 받아들인다. 세계는 점점 더 하나의 국가로 되어가며, 한 형제로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으며, 싸워야 할 아무런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톨스토이나 간디의 삶은 그에게 비폭력적 평화의 삶이 어떠한 효과를 가져오는가를 깨우쳐준다. 더욱이나 인간이성의 성숙으로, 인간은 함께 사는 존재라는 것을 확인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과 그가 꾸리는 사회는 독립이지만, 종속이 나닌 함께 어울려 산다는 것을 생활로 경험한다. 급격하게 문제들이 개별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으로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지점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더욱이나 6ㆍ25를 경험하면서 더 이상 무력을 통한 전쟁으로는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한다. 그런데도 가장 안타까운 것 중 하나는, 누구보다, 어느 나라와 민족보다 더 평화를 사랑하여야 하는 한반도에서 ‘평화’란 말의 정치-사회적 범죄성을 뼈아프게 여긴다. 평화운동이 어디에서보다도 더 먼저 일어나야 할 한반도에서 평화란 말이 위험한 말이 되는 것을 경험하면서 당대의 가장 큰 화두는 평화임을 실감한다. 그 당시 평화는 새 길을 여는 명령이면서 시대를 때리고 깨우는 목탁이었다.




그래서 일차로 주장한 것이 한반도의 중립국가론이다. 이것은 그 당시 이데올로기 대립과 갈등이 심화된 상황에서 매우 위험한 발상이었다. 어느 한 이데올로기에 속하는 것을 극복하는, 초월하자는 주장이었다. 그것은 동시에 한반도의 남북 양쪽을 통제하고 있는 외세로부터 자유를 선언하고 독립하자는 주장이 된다. 즉 남의 힘을 빌리지 말고, 우리의 힘으로 나라를 통일하고 이끌어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스위스처럼 약한 나라는 중립의 입장이라야 자신을 잃지 않고 종속체계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분리하고 지배하려는 외세의 입장에서 볼 때와, 그러한 외세의 힘을 빌어 정치를 하려는 세력의 입장으로 볼 때는 매우 불순한 주장이었다. 이러한 원칙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방법이 나와야 한다. 그것은 철학과 도구와 삶을 통합하는 것이라야 한다. 다음 같은 것들이 그 중 몇 가지다.




평화사상은 그의 폭력에 의한 피해와 그것에 맞서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일제 때 감옥에 두 번 씩 투옥되었고, 해방된 조국에서 소련군에 의하여 투옥되었고, 남쪽으로 내려와서 글을 쓴 것 때문에 투옥되었다. 그 뒤 감금, 투옥, 재판, 가택연금, 금구령에 버금가는 강연방해, 글 삭제와 게재방해 등을 받았다. 정부의 집권권력의 폭력성을 고스란히 몸으로 체험하였다. 그러는 과정에서 몇 가지 그의 평화사상과 운동에 영향을 준 것이 있었다. 동양에서는 제도와 권력을 철저히 부정하는 노장사상, 힌두교의 바가받기타를 몸으로 실천한 간디, 전쟁에 대한 애매한 태도를 취하는 것에 맹렬한 비판을 가하면서도 기독교의 예수와 이사야의 사상, 퀘이커의 평화사상과 평화운동, 그리고 우리 민족의 본래 가지고 있는 평화사랑의 사상을 기본으로 한다.




앞에서도 말하였듯이 평화는 그에게는 신조다. 어떤 논리나 실험으로 증명하여서가 아니다. 인간의 본능이 평화라고 보고 싶은 것이다. 평화가 생명의 본연의 길이기에 그것에 저촉되는 것에 대한 저항은 아주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평화는 공존이다. 공존하지 못하면 공멸할 뿐이다. 이렇게 평화로운 삶을 가장 극명하게 저해하는 것이 국가주의다. 나라를 뜻하는 한자의 국(國)자에서, 국가는 이미 근본에서부터 무력을 핵심으로 한다. 사람(口)과 땅(一)을 무력인 칼(戈)로 지켜 낼 큰 테두리(口)가 곧 국가다. 그에게 국가는 폭력의 핵심이다. 아직 사람이 크게 깨닫지 못하였을 때는 국가가 사람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였지만, 지금은 그것의 보호를 필요로 하는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점점 더 국가는 견고한 성으로 자리를 굳힌다. 그러므로 가장 근본 되는 평화주의 운동은 국가주의에 대한 저항으로 시작된다. 그 한 예를 그는 주민등록증을 만들지 않았다. 성숙한 개인-이성의 진행은 국가 없이 살 수 있는 때가 되었다는 것이 그의 확신이다. 전쟁은 언제나 국가를 앞세운 전쟁업자들의 흥정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쟁만큼 가장 사치스럽고 낭비스럽고 파괴스런 것이 없다는 결론이다.




그런데 그것에 저항하는 방법은 어디까지나 비폭력저항이다. 그것의 실예를 간디의 비폭력저항운동에서 보며, 그보다 먼저 살았던 소로우에서 모범을 찾는다. 이 두 사람에게 비폭력은 방법이나 수단이 아니라 삶이었다. 그것을 통하여 일을 성취시키고 이룬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삶이기 때문에 살아갈 뿐이라는 것이다. 간디에게는 폭력을 통하여 인도의 독립을 얻기 보다는, 비폭력으로 영국의 식민지 안에서 사는 것이 더 낫다고 할 만큼 비폭력을 철저한 삶의 하나로 본 사람이다. 바로 그 길을 함석헌은 따르기를 바랬고, 실천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비폭력운동과 삶은 철저한 자기훈련과 자기교육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개개인들이나 집단문화가 성숙되어야 하며, 삶을 수련하듯이 살아가야 할 의무가 있다. 그것은 폭력을 미워하고, 국가권력을 비판하는 것이지만, 그것을 잠시 동안 수행하고 담당하는 사람들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들 사람을 우리와 꼭같은 인격을 가진 존재, 하느님, 부처, 그리스도, 인을 가진 존재로 인정하고 그들까지도 불쌍히 보고, 구원하는 깊은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엄밀히 따지면 그들은 역사의 심판을 위하여 대신 짐을 져주는 불쌍한 사람들이다. 함석헌이 가장 힘들어 했던 부분의 하나는 바로 이 점이었다. 내 속에 공격의 대상인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을 미워하는 맘이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랬다. 내가 맘으로 그를 미워하는 것은 이미 그를 죽이는 폭력에 사로잡힌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비판이나 대항하는 행동은 나와 그를 동시에 구원하는 기도요 구도자의 행위가 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을 위하여 해체되어야 할 것들이 많았다. 그 중 하나가 계급이요, 소유제도였다. 계급은 평등에 저해되는 것이며, 지나친 소유제의 신성시는 함께 사는 것을 방해하는 근본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계급해체의 방법으로는 역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길 밖에 다른 것은 없었다. 그것은 인간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인권을 최대한으로 보장하는 사회제도에서 온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도 제재하지 않는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일이다. 민주주의의 실현은 그에게는 인간의 권위를 최대한으로 보장하고,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평등한 사회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것을 거저 되지 않는다. 값비싼 댓가를 치루어야 한다. 전대로 남이 그것을 대신하거나 집어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 우리 자신이 이루어야 할 일이다. 그러기 위하여는 가장 중요한 것이 언론의 자유였다. 그래서 그는 일제 때는 김교신이 주간이었던 《성서조선》을 통하여, 해방된 뒤에는 《영단》아니, 《말씀》을 통하여 영적 진리의 말씀을 펼치다가, 1950년대 중반부터 장준하가 발행하는 《사상계》와 1970년에 그 자신이 발행한 잡지 《씨알의 소리》를 통하여 끊임없이 발언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바로 씨알의 자기교육 도구였다. 무지하거나 무식하여서는 결코 자기를 해방할 수는 없다. 온갖 것으로 씨알을 무식하게 만들고 무지하게 만들려는 제도로부터 벗어나려면 스스로 깨닫는 길밖에는 없다. 그러려면 교육기관이 필요한데, 이제 제도 교육기관이나 언론기관은 모두 다 기본 틀을 유지하고 지키고 더욱 견고히 하는데 봉사할 뿐이다. 여기에는 기본 종교기관들도 마찬가지다.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바른 언론을 통한 씨알들의 자기교육을 통한 깨달음, 곧 해방뿐이었다.




그 해방운동은 결국 평화운동과 통한다. 왜냐하면 온갖 기본 제도들은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하는 데 방해되는 것을 주장하고 이끌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로부터 벗어나는 인간해방운동은 평화운동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는데, 사탄은 우리는 서로 싸우는 적대자로 갈라놓고 지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평화운동을 제창하는 것은 결국 통합운동이다. 사람과 사람을 갈라놓고, 민족과 민족을 갈라놓으며, 나라와 나라를 분리하고,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를 따로 서게 하며, 사람과 하느님을 분리시키고, 자연과 인간을 적대관계로 설정하는 온갖 분열의 철학과 종교와 정치와 문화에 대한 저항운동이다. 그 저항은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그것은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함석헌은 끊임없이 ‘생각하는 백성’과 ‘행동하는 씨알’을 말하였다. 이들이 모여서 모든 것을 아우르는 함께 살기 운동을 벌여야 한다는 것이 그의 평화운동의 요체였다.




3. 우리의 평화운동




그렇다면 우리의 평화운동은 어떠하여야 하는 것일까?

기독교인으로서: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온 것은 구교와 신교를 막론하고 스스로 우리 사람들에 의하여 된 일이다. 여기에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유교가 한국에 들어온 때도 분명한 기록은 없으나 그 때 사정으로 미루어보면 지배자 층을 통하여 들어왔고, 불교도 일부 민간에 들어왔던 것이 있는지 모르나 적어도 공공연히 크게 들어온 것은 정치 세력을 타고 왔다. 그러므로 그 두 종교는 처음부터 사회의 상층으로부터 시작되었고, 후에 민간에 널리 퍼진 때에는 그것은 늘 지배자의 종교, 국교였다. 그런데 이 기독교만은 그와 반대로 지배자가 아니고 불우한 지위에 있는 자를 통하여 왔다. 유교나 불교와 같이 나라 사이의 외교의 한 부분으로 온 것이 아니고 민간의 요구로 오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 후의 발달에서도 나라의 지배 세력과 늘 사우는 자리에 있었다. 그러므로 도덕면에서 크게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 한길사(젊은이들을 위한 새편집) 2010, 363




그래서 우리에게는 처음부터 큰 의미를 가지고 오게 되었다. “우리에게는 처음부터 온전히 세상을 건지고 인생을 건지는 진리로, 연구하는 것으로 시작이 되었으며, 마침내 이편에서 머리를 숙여 세례를 구하게 되었다는 것은 비단 교회사에서뿐 아니라 일반 역사를 이해하는 데도 잊어서는 안 될 일이다.” 위의 책, 364




이 때 우리 사회는 매우 절박하게 새로운 기운이 필요하였다. “한 시대가 새로워지려면 결국 기적이 일어나야만 한다. 기적을 행하는 것은 외물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하는 정신만이다. 그러므로 결국 종교 문제다. 유럽의 신생운동이 종교혁신에 이르러 가지고야 참 신생이 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데 이 때의 종교는 어떠하였느냐 하면 불교에서도 유교에서도 새로운 것을 기대할 수 없었다. 이제 깬다는 것은 씨알이 깨는 것이므로 요구되는 것은 씨알의 종교다. 그런데 유교도 불교도 다 씨알의 종교는 될 수 없었다. 그것은 완전히 씨을 떠나 특권층의 것이 되어버렸고, 그 특권층과 함께 썩었으므로 도저히 씨알의 가슴을 흔들 힘이 없었다. 씨알이 구하는 것은 곧 새 양심이다. 두 종교가 다 특권층에 붙음으로써 씨알의 양심을 마비시켜버렸다. 그러므로 그 때의 형식으로 굳어진 유교 교리나 고루한 선비의 유교 사상을 가지고는 아무리 뒤집고 고쳐보아도 씨알을 흔드는 새것은 나올 수 없었다.” 위의 책, 357




물론 그 당시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하던 불교나 유교 역시 그것들이 들어올 때는 언제나 새 기운으로 들어왔다. 단군조선이 세워질 때 하나님을 숭배하는 종교로 됐고, 기자조선이 될 때 유교로 했으며, 삼국이 세워질 때는 불교가 큰 할 일을 하였다. 이것들이 다 썩은 뒤에는 새로운 것이 와야 하는 조건들이 형성된 때였다. 이 때 기독교는 왔다. 모두가 다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찾게 하려는 것이란다. 거기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아시아인이나 아프리카인이 따로 있지 않고, 종이나 주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늙은이나 젊은이가 따로 있지 않고, 지배자나 피지배자가 따로 있지 않다. 모두가 그 앞에서는 평등하며 오로지 하나가 되어 그를 찾음이 인생의 최종 목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을 가진 종교가 이 땅에 들어온 것은 몇 가지 이루어야 할 사명이 있었다. 1) 계급주의를 깨뜨리는 일이요, 2) 사대사상을 쓸어버리는 일이요, 3) 숙명론의 미신을 씻어버리는 일이었다. 위의 책, 369




이것을 이루기 위하여는 천지에 오직 섬길 이는 영이신 하나님 하나밖에 없다는 것, 모든 인류는 다 형제라는 것, 삶의 기본 원리는 사랑이라는 것, 그리고 진리에 대한 절대순종의 믿음을 주장하는 엄격한 도덕적 종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이 사명을 띄고 이 땅에 왔다는 것이다. 기독교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는 다 인생을 건지자는 것이지, 압박하고 짜먹는데 협력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모든 종교들이 그렇게 됐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그 자체 내에 계급주의, 사대주의, 미신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사회혁명을 이루지 못하는 종교가 되고 말았다. 순교자를 그렇게 많이 내면서도 사회혁명을 하지 못한 것은 바로 이 땅에 온 기독교가 깔끔하고 깨끗하게 들어오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위의 책, 370

그것은 서양에서 실패한, 썩은 제도를 그대로 가지고 왔을 뿐, 그리스도의 복음을 살리지 못한 데서 연유한다. 미신이 흥행한 것은 그 당시 사회가 흉흉하여 살고자 하는 발버둥이었다. 그것을 받아 새로 들어온 기독교는 과학적 탐구를 통한 개혁운동을 주도할 민중교육을 실시하였어야 한다. 그런데 그러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때, 구교보다 100여년 늦게 들어온 개신교의 활동에 많은 기대를 걸었다. 자유와 평등과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의 흐름을 타고 들어온 개신교의 활동은 초기의 가톨릭처럼 매우 희망스런 출발을 하였다. 독립사상, 새교육의 흐름과 과학정신이 가득한 것은 새로운 기운을 넣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개신교가 했어야 할 근본혁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그것을 이끌고 나갈 사회적 중산층이 없었기 때문이다. 워낙 강력한 착취 때문에 피폐한 민중 뿐 중산계급이 형성될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일제 때 그 역할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으나 기독교의 생생한 정신이 제대로 펴졌다면, 다른 시들어가는 종교들의 정신도 다시 살아나도록 됐어야 한다. 한 종교의 살아남은 다른 종교가 동시에 새롭게 살아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 정신으로 나갈 때 사회는 평화가 오며 혁명은 가능하여 진다. 특히 우리 사회는 다원종교사회다. 역사를 관통하여 볼 때나 사회를 횡으로 볼 때 다양한 종교들이 고루 분포해 있다. 여기에서 원수는 없다는 것을 선언해야 한다. 한 종교의 건전한 발전은 다른 종교의 건전한 발전을 이끌어 온다. 반대로 한 종교의 타락은 다른 종교의 타락을 함께 불러 올 수도 있다. 모든 것은 그물처럼 얽혀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의 평화생활의 요체는 이러한 것이리라. 신약성경 로마인에게 보낸 편지 12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중심으로부터 사랑하십시오. 사랑하는 척 하지 마십시오. 악은 필사적으로 피하십시오. 선은 필사적으로 붙드십시오. 깊이 사랑하는 좋은 친구들이 되십시오. 기꺼이 서로를 위한 조연이 되어 주십시오.(9-10) 지쳐 나가떨어지지 않도록 하십시오. 늘 힘과 열정이 가득한 사람이 되십시오. 언제든 기쁘게 주님을 섬길 준비를 갖춘 종이 되십시오. 힘든 시기에도 주저앉지 마십시오. 그럴수록 더욱 열심히 기도하십시오. 도움이 필요한 그리스도인들을 도우십시오. 정성껏 환대하십시오.(11-13) 원수에게도 축복해 주십시오. 결코 악담을 퍼붓거나 하지 마십시오. 친구들이 행복해 할 때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그들이 슬퍼할 때 함께 울어 주십시오. 서로 잘 지내십시오. 혼자 잘난 척 하지 마십시오. 별 볼 일 없는 이들과도 친구가 되십시오. 대단한 사람인 양 굴지 마십시오.(14-16) 되받아치려고 하지 마십시오. 대신 누구에게서나 아름다운 점을 찾으십시오. 할 수 있다면 모든 사람과 더불어 사이좋게 지내십시오. 받은 대로 갚아 주겠다고 고집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여러분이 할 일이 아닙니다. ‘내가 상관할 것이다.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다’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17-19) 우리의 성경은 원수가 굶주리고 있는 것을 보면 가서 점심을 사 주고 그가 목말라하면 음료수를 대접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런 관대함을 베풀면 원수는 소스라치게 놀랄 것입니다. 악이 여러분을 이기도록 놔두지 마십시오. 오히려 선을 행함으로써 악을 이겨 내십시오.(20-21)” 신약성경, 로마서 12장(유진 페터슨: 메시지, 신약), 복 있는 사람 2010




얼마나 놀라운 소리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의 말씀,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을 실천하는 실행방법이다. 진리를 위하여 죽은, 초기의 순교자들은 모두가 다 타협을 몰랐고, 방편을 쓰지 않았으며, 소박하였고, 목숨을 내걸었고, 직접적이요, 저돌적이었다. 그것이 우리 크리스천의 전범이다. 그런데 지나치게 지금은 국가주의, 자본주의, 정치주의와 타협하여 산다.




일반 시민으로서; 허(虛) 정(靜) 유(柔) 겸(謙)의 수련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하여 일단 ‘나’를 정립해야 한다. 나는 공(公)과 연결되고, 하나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공은 국가, 민족, 종교, 단체, 가문 따위를 뛰어 넘는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한 때 우리 인류 역사에서 공은 바로 위에 든 것들이라고 여기게 되었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공으로 가는 길목에서 잠간 돌보아 주는 역할을 하였던 것들이다. 지금은 그것을 지나야 하는 때가 되었다. 여기에서 바로 허상을 넘는, 진리와 합일되는 상태에 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를 나 되게 하는 데 방해 되는 모든 것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나’는 어떤 사람이든 그 속에 그리스도, 하느님, 부처, 인(仁)의 씨를 가지고 있다. 그것을 우리는 내면의 빛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이것은 적절한 상황만 되면 언제나 움이 트고 잎이 나고 줄기가 생기고 가지를 뻗치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그것은 언제나 무서운 고난 속에서 피어난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모든 좋고 나쁜 환경을 겪어 가면서 때를 기다려서 솟아난다. 그것은 결코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씨는 많고 무성해서가 아니라, 한 알이라도 제대로 여물고 썩으면 된다. ‘나는 한 알의 씨다’ 라는 생각을 가지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그것을 선언하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우리의 희망이요 위로다. 나는 한 알의 씨알이다. 즉 하느님, 그리스도, 부처, 인, 내면의 빛을 가지고 있는 영근 씨알이라는 것을 확고하게 믿는 것이다.




‘나’는 어떤 사람이든 그 속에 그리스도,
하느님, 부처, 인(仁)의 씨를 가지고 있다.
그것을 우리는 내면의 빛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함석헌과 김교신 등이 일제 강점기의 갖은 압제에서 온갖 박해를 겪으면서 만들어 낸 《성서조선》이란 잡지는 독자가 많을 때 200명 정도를 넘지 못하였으며, 그들이 매년 연말과 연시에 가졌던 수련집회에는 20명 이내가 참석하였다. 그런데 그들에게 뿌려진 씨와 그들이 뿌린 씨는 매우 고귀하고 강력하였다. 한 사람에게 뿌려진 씨는 모든 사람에게 함께 뿌려지는 보편적 씨요, 한 곳에 피어나는 씨는 전체를 뒤덮는 상징이다. 관저동에 개나리가 피면 다른 강산에도 핀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요, 목포에서 움트는 싹이라면 여기에서도 조건이 맞으면 틔어난다는 것을 예시하는 것이다.




다시 반복하여 말하는 것이지만, 동양에서 인(仁)으로 표시하는 씨, 기독교에서 이미지 또는 형상으로 표시하는 하느님의 상은 모든 사람에게 있다. 아니, 내 속에 있다. 이 씨는 알이다. 로 함석헌은 표시하는데, 그것은 바로 전체와 개체, 극대와 극소, 영원과 순간, 하늘과 인간을 통합하는 개념이다. 그것은 각각 독립된 개체이면서 전체를 아우르는 것이다. 이것이 평화의 근원이다. 아름다움의 근원이다. 이 씨를 우리가 가지고 있다는 믿음이 있는 한 우리는 평화할 수밖에 없다.




생명평화운동에서 전개하고 있는 ‘우리가 평화를 원한다면 내가 먼저 평화가 되자’라는 것은 좀 더 적극성을 띈 것으로 진전되어야 한다. 나는 이미 평화의 씨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것을 누리는 것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평화는 원하고 원하지 않고 할 선택사항이 아니라, 명령으로 받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평화 한다고 선언하는 것만이 남아 있다. 다른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하느냐에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내가 평화하면 된다. 이미 나는 평화에 들어섰다고 선언하고 믿는 것이 중요하다. 독립은 선언하므로 시작이 되고, 자유와 평화 역시 선언하므로 되는 것이다. ‘네 병이 고쳐졌느니라’ 선언할 때 이미 병은 사라지는 것이다.

정의롭고 아름다운 세상은 바로 평화로운 세상이다. 단일한, 획일화한 세상이 아니라, 백화가 만발하듯이 서로 다른 독특한 것들이 건전하게 조화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음악이 될 때는 각각 자기 소리를 내되 다른 것에 맞출 때 이루어진다. 불협화음도 아름다운 음악이 되는 것은 바로 전체 음악에 따르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그가 만들고 인정한 모든 것 속에 그의 속성이 함께 들어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믿고 따른다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따르고 그렇지 않은 것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만큼 통이 클 필요가 있단 말이다.




나와 전체; 그렇다면 어떻게 하자는 것일까? 우리는 몇 가지를 일상생활에서 실현하여 볼 필요가 있다. 평화는 거저 오는 것이 아니라, 만들고 찾아야 하는 것이다. 누가 할까? 내가 평화롭게 살아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 우선 ‘천하에 남이란 없다’는 묵자의 말을 깊이 새길 필요가 있다. 그래서 폭력과 평화에 대한 공부와 생각을 하되, 혼자서도 하여야 하는 것이지만, 몇 명 씩 짝을 지어 끊임없이 해보는 것이다. 수도원이나 수녀원 같은 함께 살아가는 것을 실험할 필요도 있다. 간디는 그것을 아쉬람에서 실험하여 보았고, 함석헌 역시 실패하긴 하였으나 몇 번 시도하여 보았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적대적이라고 하는 것을 서로 방문하여 보는 것도 좋겠다. 우선 가톨릭과 개신교가 서로 짝을 지어 방문하여 보고, 기독교가 연합하여 불교나 원불교나 이슬람을 방문하고, 함께 예배, 미사, 예불을 드려보는 것이 좋겠다. 다른 종교를 적대시하고 자기들 것만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느님의 창조질서에 대한 배반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평화의 노래를 자주 부르고, 평화의 기도를 부르며, 한 두 가지의 평화운동이나 평화로운 삶에 구체적으로 우리 자신을 던져보는 것이 좋겠다. 이제는 좌우익의 갈등이나, 진보나 보수의 대립이 아니라, 그러한 것들을 아우르거나 뛰어넘는 하나로 살아가는 실제 생활을 실험하여 볼 때다. 사실 우리 속에는 모든 것을 통합하는 진리를 가지고 있다. 다만 제도와 틀이 그것을 가리고 방해할 뿐이다. 성숙된 인간이라면 바로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해방운동을 벌일 때 우리 사회에 평화로운 기운은 싹이 트고 만발할 것이라고 믿는다. 사실 오늘 가톨릭에 대하여 전혀 모르는, 퀘이커를 따르는 저를 이곳에 초청하여 이야기를 서로 나누고자 하는 것 자체가 벌써 통합의 평화운동으로 가는 한 발걸음이라고 생각한다. 남이야 어떠하든 나는 평화 한다는 것, 사회야 어떠하든 나는 평화 한다는 것을 선언하고 나갈 때 이미 평화의 세계는 뿌려지고 싹이 나고 줄기가 자라고 나무가 되며 가지가 돋고, 잎이 피고 꽃이 피며 열매를 맺어 다시 땅에 떨어져 그 평화의 행진을 계속하여 진행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 맘과 발걸음 자체가 이미 복일 것이다. 세상은 언젠가는 평화의 세계가 되고야 말 것이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요 예수가 이 땅에 온 뜻일 것임을 믿는다. 그러나 지금 평화롭다는 안일한 생각에 위기의식이 없을 때 이미 평화세계는 깨져버리는 것이 될 것이다.

(2010. 11. 15. 관저동성당에서)



[20101115. 사진] 김조년 교수의 함석헌의 평화주의의 우리의 평화운동


출처: https://www.djpeace.or.kr/177 [천주교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

2021/04/02

16] 【지구평화학】종교평화론을 통한 지구평화의 모색 원영상*

 16] 【지구평화학】종교평화론을 통한 지구평화의 모색 원영상*

37)

요약문   코로나19, 환경 재난, 대규모의 전쟁 등으로 인해 지구는 여명이 얼마 남지 않는 상태가 되었

다. 모든 것은 인간에 의해 일어난 것이다. 특히 전쟁은 인간 자신을 파멸시키기도 하지만, 과학, 자본, 이념 등이 총동원되어 자기 파괴로 가는 이해할 수 없는 행위이다. 지구가 멸망한다면 아마도 세계대전이 원인이 될 것이다. 따라서 현재 가장 시급한 것은 인간 간의 증오에 의한 전쟁을 막는 일이다. 물론 환경재난 등 시시각각으로 밀려오는 지구 붕괴의 위기에 대해서는 재론의 여지가 없이 지구적 컨센서스가 필요하다. 그 럼에도 지구평화학이 시급한 것은 자기 파괴를 스스럼 없이 자행하는 몰인격적 무분별 행위가 지속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실존적 인간의 행복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일이 무시간적으로 발생한다. 지구평화학은 모든 위기를 막는 지구적 차원의 지혜를 발산하는 하나의 시금석이 될 것이다. 지구평화학은 현대문명에 필 수적이다. 그리고 그것의 구조는 종교평화학이다. 즉, 폭력이 극대화되는 세계의 아노미 상태를 자기반성을 거친 종교평화학으로 새롭게 길을 놓아야 한다. 코로나19의 고통의 세계화에 대한 긴급한 진단과 처방을 위 해 도덕과 윤리를 소환하는 시점에서 동시에 또한 지구평화학이 요청된다. 이를 위한 종교평화학 구축을 통 해 세계의 분쟁만이 아니라 이성과 이성의 과잉으로 초래된 이 문명에 대해 새로운 처방을 내놓아야 한다. 물론 그 방법은 기존의 인문학적 종교연구, 사회과학적 평화연구를 융합하는 것이다. 서울대를 중심으로 평 화인문학을 개진하고 있기도 하다. 이는 결국 종교의 ‘오래된 새길’에서 모색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자 아와 우주가 합일되는 영성을 창구로 하여, 사회와 지구, 나아가 우주로 향하는 열린 인식을 종교 그 자체 의 본질을 기반으로 현실 사회에 대응 가능한 종교평화학을 전개할 필요가 있다. 지구평화학, 평화인문학의 기반 구축에는 종교평화학이 가장 핵심적 토대가 될 것이다.

차 례

Ⅰ. 머리말

Ⅱ. 지구위기와 종교의 복귀

Ⅲ. 종교평화론에 대한 담론

Ⅳ. 지구평화를 향한 종교평화론

Ⅴ. 맺음말

 

*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 교수

Ⅰ. 머리말

지구의 미래는 있는가? 지구 온난화, 코로나19 팬데믹, 끊임없는 전쟁 등 지구는 질서보다도 무 질서가 증가되어 온 것이 현실이다. 욕망에 의해 뒷받침된 자본주의의 세계화는 지구의 한계를 더 욱 명확히 하고 있다. 인간은 스스로 자정 능력을 잃어가고 있다. 인간 개개인이 결정하고, 실천해 서 해결할 수 있는 단계는 지났다. 세계는 공동의 의지로 이 난국을 해결해 나가지 않는 한 결코 누가 구원해 줄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특히 현실적 삶을 불안으로 몰아넣는 폭력과 전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며, 핵무기와 같은 대량살

상 무기의 발달로 인해 한 순간에 지구를 파멸로 몰아넣을 수 있는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익과 감정에 위배되면 상대를 절멸시키고야 말겠다는 야만적 본능은 인간만이 발현되며, 전쟁은 그 과 정이다. 전쟁만큼 인간을 불안으로 몰아넣는 일은 없을 것이다. 21세기는 과학과 자본에 힘입어 본 격적인 대량살상이 이루어졌다. 

1, 2차 세계대전은 물론, 중국 내전, 6·25전쟁, 남북베트남 전쟁, 이란과 이라크의 전쟁, 미국과 이라크 전쟁 등 이 외에 수없는 국지전은 손으로 헤아리기도 어렵다. 전문가들은 1~2억명이 20세 기 전쟁에서 죽었다고 한다. 강인철은 1999년도의 세계 분쟁 45건이 무력충돌 가운데 24건이 종교 분쟁으로 53.3%에 이른다고 한다. ) 이 외에도 언론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종교분쟁이 아닌 전쟁에 도 종교적 이데올로기가 깊이 관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쟁과 종교는 유사 이래 서로 불가분 의 관계로 그 동맹을 강화하고 있다. 

스웨덴의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는 <2018 세계 군비 지출 동향 보고서>를 통해 전 세계 국가의 군비 지출액이 1조 8220억 달러(2,122조)에 달한다고 발표했다. 전세계 1인당 군사비 지출은 평균 239달러에 해당한다. ) 이는 더욱 늘고 있다. 첨단무기는 갈수록 살상성능이 강화된다. 국가와 자본은 결탁하여 전쟁마저도 외주화 하는 일이 일어난다. ) 이처럼 약육강식이 횡행하는 지구는 과 연 희망이 있는 것일까. 이를 비판하고, 이에 저항해야할 논리를 제공해야할 학문마저도 자본의 의 지에 눌려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종교에게는 희망을 걸 수 있을까. 필자를 비롯한 종교인, 학자들은 2015년부터 ‘종교폭력-평화-국가’의 관계를 중심 테마로 하여 토론하는 레페스(REligion and PEace Studies, 종교평 화연구)포럼을 개최해왔다. 그 목표는 ‘종교평화론 구축’이다. 그 토론의 성과를 묶어 종교 안 에서 종교를 넘어: 불교와 그리스도인의 대화(2017), 지속적 폭력과 간헐적 평화(2020)를 출판하 고 종교평화론 담론(가제)을 금년 4월에 출판할 예정이다. 세 번째 공저는 한일 간에 종교인, 학 자들이 양국을 오가며 토론한 내용이다. 금년에는 ‘아시아 종교평화학회(Asian Association For Rel igion and Peace)’를 출범시킬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무기한 연기되었다. 본 연구도 이 선상에 놓여 있다. 지구적 평화의 희망을 결국 다시 종교로부터 찾고자 하는 열망인 것이다. 

Ⅱ. 지구위기와 종교의 복귀

후기마르크스주의적 문학비평가인 테리 이글턴은 신의 죽음, 그리고 문화에서 계몽주의 이래 

신의 죽음을 기획했던 이성은 실패했다고 한다. 그는 신의 임시 대리역할을 했던 모든 지적 현상 이 담당했던 사회적 역할은 종교가 짊어졌던 이념적 역할을 감당하지 못했다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이에 대해 종교는 세속화의 길을 통해 살아남았다고 한다. 이제 모든 것이 상대화되고, 무의 미해진 포스트모던사회에서 ‘전능한 신’의 역할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없다 ) 하여, 자아의 증 폭과 폭주로 무질서해진 현대에 다시금 종교를 소환시키고 있다. 그는 현실과 동떨어진 환상으로 서의 종교는 여지없이 비판하지만, 종교가 연마해온 실천적 삶, 존재의 혁명을 추종하는 종교의 

‘실천적’가치를 재조명하면서 현대문화에 대한 해독제를 종교에서 발견하고 있다. )  이에 “종교적 믿음이 사회 질서의 실존을 위한 일련의 근거를 제공하는 부담에서 자유로워진다

면, 종교적 믿음은 정치의 비판자로서 진정한 목적을 자유롭게 발견하게 될 것이다”6)라고 보며 종교를 현실로 이끌어 내고 있다. 인간의 주체성에 담긴 오만은 신의 다른 이름이었던 것이다. 예 들 들어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해 점령했을 때, 미국은 자신들의 동맹들과 함께 1991년 1월 이 라크를 공격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는 전 세계를 향해 전쟁을 선포하는 TV연설에서 “신의 이름으로 전쟁을 개시한다”고 했다. 신은 이 전쟁에 개입하라고 명령을 내리지 않았음에 도 그는 신의 대리자임을 내세워 전쟁에 개입했던 것이다. 

이후 2001년 9·11테러 이후,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라크 침공 등 주권을 가진 국가에 무력으로 침입하여 수많은 백성을 살상으로 몰아넣었다. 물론 쿠웨이트를 침공한 이라크나 테러를 일삼은 이슬람 원리주의 무장단체 알카에다에 일차적 문제가 있다. 그러나 전체적 상황을 분석해보면, 이 러한 국가 간 분쟁이나 테러리스트를 키운 세력은 미국이기도 하다. 현실의 한 면만을 가지고, 힘 센 나라가 상대방을 악으로 규정하며, 전쟁을 전쟁으로 막으려고 하는 악순환을 세계는 눈뜨고 바 라보아야만 한다. 전쟁은 무의미하다. 역사 이래 전쟁을 일으킨 자들은 권력을 가진 자들이다. 실 제 희생자들은 전쟁터의 힘없는 군인들, 노약자, 여성, 어린이들이다. 그들은 그들의 생명과 삶의 터전을 이유도 모른채 화염 속에 던져야 했다. 

여기에 새삼스럽게 통계를 제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군대는 인간을 죽이 기 위한 조직이다. 어떤 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그 국가와 전통에 속해 교육을 받고, 적을 인정 하고 유사시 전쟁터에 나간다. 과연 개인의 의지는 있는 것인가. 국가와 자본은 전쟁을 수행하는 양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념과 무기를 제공하는 한, 군대는 존속한다. 지구의 현실적 위기는 갈등 과 분열, 폭력과 전쟁이다. 

종교는 여전히 삶의 유용한 요소다. 정진홍은 종교란 “존재론적 차원에 이르는 모든 물음을 수 용하고, 그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해답을 수렴하면서, 바로 그 존재론적 차원으로부터 표상화 되는 물음과 해답의 상징체계이다” )라고 한다. 과거처럼 종교의 사회적 지배나 역할이 줄어든 현 재에도 종교는 다양한 형태로 삶에 침투해 있다. 정진홍이 말하는 존재론에 대한 물음에 답을 얻 고자 사람들은 다양한 형태의 개인적 종교를 갖는다. 테리 이글턴 또한 “종교는 지금까지 인류가 이루어낸 가장 강력하고 끈질기며 보편적인 상징형식이다.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와 개별적 일 상을 그렇게 직접적으로 연결시켜주었던 상징형식이 어디 있었단 말인가” )라고 하며 종교의 복원 을 주장한다. 종교는 상징을 상징으로 해석하지 않고 사실로 해석하기 때문에 수많은 전쟁과 갈등 이 초래되었다 )고 한다.  과거에 집착된 종교를 역사로 보지 않고, 내적 초월의 세계와 일상의 삶 을 잇는 가교로 보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종교는 인간의 삶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따라서 위기의 시대에 종교가 다

시 복원된다고 하는 것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이미 종교적 차원에서 인간의 한계상황에 대한 물음을 종교는 지속적으로 해왔다. 문제는 이러한 한계상황이 개인적 차원만이 아니라 집단적 차 원, 지구적 차원으로까지 확대되었다는 점이다. 종교는 이 세상의 의미를 추구하는 것만이 아니라 세계의 질서를 구축하는 데에도 기여해 왔다. 윤리나 도덕의 원천이 되었던 것이다. 인류가 현재 요구하는 것은 이러한 질서의 원천을 종교로부터 다시 얻고자 하는 것이다. 나아가 세계를 통합하 고, 새로운 가치를 주조해냄으로써 불투명한 인류의 미래에 희망을 부여하자는 것이다. 종교가 소 환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Ⅲ. 종교평화론에 대한 담론

세계의 많은 지성들은 종교와 평화의 관계에 대한 언설을 내놓고 있다. 특히 평화학의 창시자 

요한 갈퉁은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에서 전쟁과 같은 폭력을 직접적 폭력, 전쟁이 없는 상태 의 간접적 폭력을 구조적 폭력이라고 본다. 전자가 없는 상태가 소극적 평화, 후자가 없는 상태가 적극적 평화이다. 그리고 이 폭력들의 이면에는 문화적 폭력이 존재한다. 이는 “모든 상징적인 것 으로 종교와 사상, 언어와 예술, 과학과 법, 대중 매체와 교육의 내부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한 다. ) 그 중에서도 종교는 문화적 폭력의 제1순위에 놓여 있다. 

요한 갈퉁은 종교는 초월적 목표에 초점을 두는 강한 측면과 대중의 기본적 욕구 충족과 같은 현세의 문제에 초점을 두는 부드러운 측면이 존재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 두 측면이 각각 문화적 폭력과 문화적 평화에 중요한 부분을 구성한다고 말한다. 종교의 강한 측면, 즉 형이상학적 세계나 이를 담보로 한 권력적 측면이 역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어 왔던 것이다. 그럼에도 갈퉁 은 종교의 생명 중시의 가치는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그는 간디 사상 속의 생명의 통합(unity-of-life)과 수단과 목적의 통합(unity-of-means-and-ends)

의 원칙들을 존중한다. 그리고 이 원칙들은 모든 생명의 신성함을 존중하라는 것과 수단과 목적을 소중히 하는 것은 스스로를 소중히 하는 것이 될 것이라는 교훈을 수용하라는 것이라고 한다. ) 갈퉁은 서양의 종교들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지만, 이처럼 동양 종교들의 가르침 속에서 여러 가지 교훈을 찾아낸다. 이병욱은 문화적 폭력에 대한 처방으로써 불교의 공(空)사상은 모든 이데올로기 의 그물에서 벗어나는 기능을 하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불교에서는 불교에 대한 집착마저 벗어 날 때 진리의 눈을 얻게 된다고 한다. 이러한 입장에서 어떠한 이데올로기에도 집착하지 않는 유 연함과 개방성이 열리는 것이다”  )고 한다. 수행의 관점에서 평화와 관련한 동양종교의 본질을 꿰뚫는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울리히 벡의 언설 또한 이 점에서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 그는 “종교란 수백 년 동안 거대한 초국적 장벽 쌓기 또는 허물기를 전문적으로 수행한 건설재벌이다”라고 하며, “종교는 서로에 대항하거나 서로 힘을 합쳐 종족, 민족, 아니 대륙을 넘어 장벽을 헐거나 세운다” )라고 비판한 다. 종교적 보편주의들 간의 충돌은 폭력을 양산한다. 이에 민족, 종교, 폭력의 상관성이 19세를 관 통하는 특징이었고, 20세기에는 세계대전을 통해 그 정점에 도달했다. 따라서 현재의 글로벌 위험 사회에서는 “평화가 진리를 얼마나 대신할 수 있는가에 따라 인류의 존속이 결정된다”며, “종 교는 세계정치에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고 주장한다. 

극한사회에 이른 인류는 신자유주의의 통로를 종교의 보편적 가치로 재포장해야 한다. 폭력이 

극대화되는 세계의 아노미 상태의 타개를 위해 약자나 소수자 문제 등에 종교적-세속적 경계를 넘 어선 협동을 통한 일상적 실용주의적 측면에서 그 유용성을 찾는다. ) 종교가 지닌 내적 연대, 나 아가 열린 종교의 외적 연대로까지 확장되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제도 종교의 문제는 자기중심적 선교, 포교로 인해 갈등을 일으킨다. 밖으로도 배타적 분열을 일 으키는 한편, 안으로도 분리되어 진보와 보수, 전통과 혁신 등의 파벌로 나뉜다. 당연히 폭력이 배 태될 수밖에 없다. 밖으로는 정의의 전쟁론인 성전(聖戰)을 일으키며, 안으로는 권력을 향한 교단주 의가 횡행한다. 여전히 강한 뿌리가 남아 있긴 하지만, 종교의 권력화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실질적 으로 해체되어 가고 있다. 대표적인 것인 해방신학과 참여불교다.

해방신학은 남미에서 1960년대 말부터 정치적 억압과 경제 수탈에 대항해 신학이 사회에 참여하

여 고통을 극복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개진되었다. 60년대 전반에 개최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높이고 사회구조를 인간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결정, 위르겐 몰트만 등 신학자 들이 나치 독일과 유대인 대학살을 경험하고 나온 기독교 복음의 사회적 책임 주장, 마르크스주의 적인 경제사상 등이 배경이 되었다. 해방신학에는 구조적이고 제도적인 정치, 경제적인 폭력에 대 항하는 평화의 논리로써 대화, 비폭력, 중재 등의 평화적 수단이 들어 있다. ) 여전히 전쟁이라는 거대한 폭력에 앞에 해방신학은 더욱 요구된다. 

참여불교 ) 또한 20세기에 일어난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불교계를 말한다. 불법승 삼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사회에 개입한다. 스리랑카 내전에서 불교계의 중재 와 화해의 역할, 일본 내 현대적 재가불교 단체들의 세계평화운동, 원불교와 정토회를 비롯한 한국 현대불교의 평화운동은 등은 매우 적극적이다. 오늘날 해방신학과 참여불교는 종교의 무정부적 차 원의 지평을 기반으로 지구적 차원의 신자유주의 하에서 전개되는 자본의 폭력적 상황과 그 하부 구조에서 일어나는 폭력과 갈등의 사회구조를 뛰어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Ⅳ. 지구평화를 향한 종교평화론

지구평화를 위한 종교평화론의 역할은 무엇인가. 어떤 측면에서 종교는 지구적 차원의 갈등구조

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일까. 종교가 가진 다양한 가치는 지구를 실제로 통합시키는 데에 기여할 수 있을까. 종교를 개인적 차원에서 사회적 차원으로, 종교적 가치를 사회적 가치로 전환하는 데에 성 공할 수 있을까.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레페스포럼은 이처럼 거시적 문제 해결을 위한 첫 걸음이다. 이러한 담

론이 가능한 것은 한국사회가 다종교 사회이기 때문이다. 독점적 종교가 없이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인류 미래에 희망을 선사한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노마드(nomad) 사회에서 지구 내에 영향력을 가진 종교들과 한반도 자생 종교들이 때로는 연합하여 사회문제 해결을 시도 하고 있다는 자체가 고무적이다. 최근 환경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는 한국의 종교환경연대 가 대표적이다. 그 외에도 한반도가 고통 받는 곳에서는 종교의 일상적인 연대가 일어난다. 그렇다 면 타국에서는 볼 수 없는 이러한 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어떠한 측면인가? 종교의 심층적 차 원의 세계로부터 개인을 둘러싼 사회적 차원, 나아가 세계적 차원으로까지 종교평화론은 확장 가 능할까?

필자는 무엇보다도 종교가 가진 최초의 속성, 예를 들어 세계의 근원과 소통하는 통찰적 예지로

써 인류가 형제·자매라고 하는 하나의 가족, 또는 모든 존재는 연기(緣起)적으로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는 가르침은 그 어떤 혁명보다도 근원적이며 보편적이다고 판단한다. 현재 평화는 이러 한 종교적 세계관이 실질적으로 투영되고 확장되어 가는 과정이다. 이는 종교가 지구적 차원에서 근본적 평화를 끊임없이 모색하고 있다는 증거에 다름이 아니다. 종교가 가진 인간적 연대는 그렇 다면 지구적 평화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개될 수 있을까. 다음의 네 가지 측면에서 보고자 한다. 첫째, 정의의 전쟁론에 대한 대응을 위한 종교평화론이다. 

종교에서의 정당한 전쟁론은 동서 양 세계에서 진행되었다. 불교는 정법으로 다스리는 전륜성왕 은 불가피할 경우 전쟁에 참여할 수 있다. ) 그것은 불의와 악에 대항하는 상황에 해당한다. 그러 나 근본적으로 석존이 직접 부여한 불살생계에 의해 살상이 동반되는 전쟁은 허용되지 않는다. 석 존 또한 전쟁을 막기 위해 중재에 나서기도 했다. 가톨릭에서는 중세에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불가피한 정당한 전쟁론이 주장되었다. 이러한 논리 또한 ‘나를 박해하는 자를 사랑하라’는 예 수의 언설에 비추어 본다면 모순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성전론이 가장 횡행하는 지역은 이슬람권이다. 지하드는 신앙의 원리를 위한 투쟁이었지

만, 이슬람 원리주의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러나 지하드 또한 이슬람 신자가 정당방위에 해당하는 경우에 전쟁을 치르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사회에서는 성전 혹은 정당한 전쟁론은 점차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역사를 통해 전쟁은 보복을 위한 악순환이 되고 있으며, 실제 큰 피해자는 전쟁 당 사자보다도 대부분 약자들이다. 역사적으로 정당한 전쟁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고 본다. 이는 종 교 근본주의의 문제이기도 하다. 종교적 신념에 무비판적이고 맹목적인 집착, 종교교단주의의 내적 구조화, 경전의 몰역사적이고 폐쇄적인 해석 등등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종교평화론의 역 할이 있을 것이다.   둘째, 적극적 평화구현을 위한 감폭력의 종교평화론이다.

이는 종교평화론자 이찬수의 문제 제기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평화와 평화들에서 요한 갈퉁 의 ‘적극적 평화’는 이상적 질서의 기독교적 표현인 ‘하느님 나라’, 유학에서 말하는 ‘대동 (大同)’, 한국 신종교들에서 공통적으로 제시하는 개벽(開闢) 사상의 구조와도 비슷하다고 한다. ) 하느님 나라나 개벽은 적극적 평화에 대한 종교적인 표현 혹은 번역들이라고 본다. 개벽의 구체적 내용을 적극적 평화라고 해도 된다는 뜻이다. 그는 종교 연구는 평화 연구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으며, 평화학에서의 평화는 종교적 이상과 상통한다고 한다. 

이찬수는 평화는 평화적 수단에 의해 이루어지며, 과정으로서의 평화 역시 평화라는 목적에서 

온다는 평화학의 기본 구상은 종교적 혹은 신학적 구조와 상응한다고 본다. 또한 종교적 혹은 신 학적 언어를 세속화 시대에 어울리도록 변형시키면 평화학이 된다는 사실을 논리적으로 규명하고 있다. 평화학은 ‘세속화한 시대의 신학’, 혹은 종교적 세계관의 ‘세속적 변용’이라는 사실을 밝힘고자 하는 것이다. ‘평화는 종교의 본질이고 이상’이라는 근원적 사실을 주장한다. ) 그는 평화학과 종교적 이상 모두에 공통적으로 담겨있는 평화 개념을 중심으로 평화학과 종교가 결국은 평화를 지향하고 구현하려 한다는 점에서 비슷한 구조를 하고 있다고 한다. 결국 ‘평화는 폭력 줄이기, 즉 감폭력(減暴力)의 과정’이라는 지론을 통해 종교평화학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셋째, 보편윤리 제정에 종교평화론의 역할이다.

세계종교자평화회의(WCRP)는 1970년 함께 사는 세계를 위해 행동해야할 내용을 7개 항으로 정 리했다. 공동의 인간성, 공동의 안전, 상호의존성, 공동의 미래, 공동의 삶, 포괄적 교육, 희망과 헌 신이다. 이 내용은 세계보편윤리를 확립하는 기초라고 할 수 있다. 1990년대부터 유네스코 철학· 윤리국에서는 보편윤리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1997년 파리에서 ‘보편윤리를 위한 개념적, 철 학적 기초’를, 1999년 한국에서 ‘보편윤리와 아시아 가치’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을 가졌다. 이러 한 논의는 지구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시급한 과제이다. 또한 지구 전체의 헌법 제정을 위한 토대를 구축하는 일이다. 

이 보편윤리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고, 포용하며, 존중하는 가운데 모두에 게 통용될 수 있는 보편성을 확립해야 된다. 특히 다양한 문화, 국가, 민족, 종교들의 특수한 가치 를 넘어서 이들 가치가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이 보편윤 리는 전체의 공동 이익과 함께 개인의 이익에도 부합하는 경우에 그 당위성이 성립한다. 이를 위 해서는 모두가 공감하면서도 모든 문제를 포용하는 초월적인 가치에 서 있는 종교성에 기반 할 필 요가 있다. 따라서 종교적 가치에 기반한 지구 차원의 평화를 위한 논의가 요구된다. 

넷째, 평화인문학, 녹색평화학과 종교평화론과의 관계 정립이다.

최근 서울대학교 평화인문학단에서는 평화인문학을 주제로 다양한 연구 성과를 도출했다. 지금

까지 사회학의 영역이었던 평화학을 인문학의 영역으로까지 깊숙이 끌어들인 것이다. 홍정호 또한 「한반도 평화인문학의 기초 과제로서의 종교평화학 형성 방안 연구」 )에서 기독교의 신학(선교)적 차원에서 한반도를 필드로 종교평화학을 시도하고 있다. 평화인문학에서는 지구의 실질적 평화구 축을 위해서는 “지금보다 훨씬 심층적이고 근원적이며 다차원적인 대응과 치유, 평화형성을 지향 하는 실천성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정책적 차원과 구별되는 삶의 종합적 차원을 고려해야 한

다.” )고 한다. 사실 이러한 차원은 이미 일상의 종교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구조, 제도 이 전에 삶에 깊이 침윤된 종교를 근간으로 평화학을 구축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나아가 종교평화론의 구체적인 모습인 녹색평화론적 관점이다. 녹색평화는 환경과 평화, 생태적

인 것과 평화의 관계를 설정하고, 탐구해 가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 지역과 지역, 환경과 사회의 공존과 화해를 지향하는 것이 동원된다. 이렇게 될 때, 평화론의 실질적인 개방인 동시에 지구 내 모든 존재의 공존이 가능하게 된다. 녹색평화는 생태적 질서에 기초한다. 모든 종교가 지향하는 ‘관계성’의 영역이 바로 녹색평화의 지향점이자 목표이다. 타자를 어떻게 환대할 것인가, 타자가 곧 나임을 확인하는 작업이 녹색평화론의 궁극인 종교평화론의 세계인 셈이다. 종교의 이상이 곧 전 지구적 차원의 모든 존재의 이상이자 현실이 되는 것이다.  

Ⅴ. 맺음말

지금까지 시도되었지만, 현실화되지 않았던 종교평화론은 지구가 한계상황에 이른 지금에야 비 로소 조명받기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종교 자체의 집단적 속성이나 현실적 상황으로 인해 경원시되고, 논의의 무용함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진지하게 생각해보면, 종교 스스로도 진화하여 자신의 문제에 대한 비판과 반성을 통해 지구적 차원의 평화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오고 있 다. 이 점을 박충구는 기독교윤리사 시리즈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해방신학이나 퀘이커의 평화주의 등을 통해 그들이 고난 속에 걸어온 평화노선을 보여주고 있

다.23) 이슬람의 영성주의, 불교의 수행담론 등은 이에 못지않은 일상의 평화를 지향하며, 사회와 지구적 차원의 평화 구축을 위한 이론과 에너지를 제공하고 있다. 탈종교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이를 미처 평가하지 않았을 뿐이다.

종교평화론은 지구의 마지막 남은 평화론이 될 것이다. 양육강식을 강요하는 인간의 무지와 무

명의 한계를 근본으로부터 파헤치고, 현실적으로 인간과 인간의 유대를 통한 연대가 가능하다면 종교평화론은 유용한 도구가 될 것이다. 이를 위해서 선결되어야 하는 것은 자신의 교의를 넘어서 종교다원주의가 확립되어야 한다. 이는 종래 논의되었던 것처럼 종교 자신의 입장에서 개진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고난, 사회적 모순에 대한 대응 차원에서 다원주의가 하나의 기능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를‘종교신다원주의’라고 명명하고자 한다. 

두 번째는 국제정치에 있어 종교의 역할 비중을 높여가야 한다는 점이다. 현재 미얀마 군대의 

쿠데타로 비폭력 저항에 가담한 민중들이 죽어가고 있음에도 UN은 제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강 대국 중심의 논리는 지구의 평화는 물론 한 국가의 군대에 의한 민중살상을 막지 못하는 한계에 직면해 있다. 자국의 이익을 위한 선택적 개입에만 신경 쓰고 있다. 종교 개개의 힘은 약하지만, 인권이나 생명의 가치를 지키기 위한 연대는 언제든 가능하다. 실질적인 정치의 힘을 종교적 연대 를 통해 발휘할 필요가 있다. 이를 필자는‘생명평화 종교연대’라고 명명하고자 한다. 지구의 한 계를 돌파하고자 하는 움직임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종교권도 예외는 아니다. 종교연합(UR, U nited Religions) )창설도 하나의 좋은 방안이다. 특히 종교는 이미 국경을 초월하여 활동하는 실질 적인 평화적 조직이자 집단이다. 인류가 이를 어떻게 적절히 활용하느냐에 따라 미래는 결정될 것 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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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욱, 「불교의 평화관의 재구성: 요한 갈퉁의 평화개념을 중심으로」, 대동철학51호, 대동철학 회, 2010. 이찬수, 평화와 평화들, 서울: 모시는 사람들,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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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호, 「한반도 평화인문학의 기초 과제로서의 종교평화학 형성 방안 연구」, 선교신학59호, 한 국선교신학회,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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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PRI Military Expenditure Database>,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https://www.sipri.org) 


2021/03/26

퀘이커 300년 (1-19) | 바보새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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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퀘이커 퀘이커 300년- 10. 퀘이커 사상과 현대 바보새 01-07 351 0
17 퀘이커 퀘이커 300년- 9. 퀘이커 역사와 종교형식(2) 바보새 01-07 463 0
16 퀘이커 퀘이커 300년- 9. 퀘이커 역사와 종교형식(1) 바보새 01-07 446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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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퀘이커 퀘이커 300년- 7. 모임공동체(2) 바보새 01-07 365 0
12 퀘이커 퀘이커 300년- 7. 모임공동체(1) 바보새 01-07 411 0
11 퀘이커 퀘이커 300년- 6. 결의에 이르기까지 바보새 01-07 323 0
10 퀘이커 퀘이커 300년- 5. 감화 바보새 01-07 332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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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퀘이커 퀘이커 300년- 3. 사상으로서의 속의 빛(2) 바보새 01-07 314 0
6 퀘이커 퀘이커 300년- 3. 사상으로서의 속의 빛(1) 바보새 01-07 360 0
5 퀘이커 퀘이커 300년- 2. 속의 빛의 체험 바보새 01-07 31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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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이커 300년 | 함석헌 Ch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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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Dec 2005 — 감화'로 불리는 이런 메시지를 한 사람이 두 번 할 수 없고, 남의 말에 꼬투리를 잡거나 논쟁을 하지 않는 것만을 원칙으로 한다. 교회·목사·설교 없이 ...

2021/01/30

퀘이커리즘에서 배운다(1) /기독교사상2011년6월

퀘이커리즘에서 배운다(1) /기독교사상2011년6월


<기독교사상> 2011년 06월호

http://www.clsk.org/gisang/gisang_view.asp?tab=sasang_theologry&flag=01&board_idx=665&page=5&block=0&theologry_sec=&set_year=2013&set_month=01&view_year=2011&view_month=06


퀘이커리즘에서 배운다(1)

퀘이커리즘으로의 초대

- 정지석-


퀘이커가 아닌 사람이 퀘이커리즘에 빠지다

나는 퀘이커 교도가 아니다. 감리교 신앙으로 세례 받고, 장로교 신학을 공부한 목사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교회에서 목회하기보다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크리스챤 아카데미 사회교육원 같은 에큐메니칼 연합기관에서 주로 일했기에 나 자신 종교적 정체성을 말하자면 ‘에큐메니칼’이라고 말하고 싶다. 종파와 교파의 구분에 관계없이 하나님을 믿고, 교회와 세계가 하나의 큰 포괄적인 하나님의 집에 속하듯이, 나도 하나님의 큰 집에 소속해 있다고 믿는 기독교인이다. 이런 에큐메니칼 기독교인의 관점에서 나는 퀘이커리즘을 소개하고자 한다.


10여 년 전 나는 퀘이커리즘이라는 소종파를 공부할 기회를 가졌다. 감리교와 장로교 신앙, 그리고 에큐메니칼 정신의 세례를 받은 나에게 퀘이커리즘은 매우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퀘이커’(Quaker) 또는 ‘친우’(Friend)라고 부르는 이들의 신앙 추구의 모습, 교회와 공동체에 대한 이해, 역사와 세계에 대한 태도 등에서 기존 교회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게 되면서도, 나는 그것이 이질적인 거부감으로 느껴지기 보다는 뭔가 우리가 오랫동안 잃어버려 온 기독교 신앙의 원형과 본질을 상기시켜 준다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이것은 오래된 진리를 만나는 각성과 같은 경험이었고, 마음 깊이 숨겨진 빛을 발견하는 기쁨 같은 것이었다. 확신하건데, 오늘 절망적 위기에 빠진 한국교회 안에서 새로운 영성을 찾는 이들에게 퀘이커리즘은 영적으로나 실천적 삶의 면에서 의미 있는 방향과 대안을 제시해 줄 것이다.


퀘이커리즘의 세계는 비록 소종파지만 역사적 전통이 깊고 상당히 다양한 면모를 갖고 있다. 그래서 나는 몇 차례에 걸쳐 퀘이커리즘을 소개할 때, 오늘의 한국교회에 도움이 될 만한 것들에 초점을 맞춘다. 현대 퀘이커리즘의 주요한 면모로서 침묵의 영성, 예언자적 영성, 그리고 평화의 영성이 차례로 소개될 것이다. 퀘이커리즘은 신학의 종교라기보다는 영적 체험의 종교이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를 나는 앞으로 퀘이커리즘을 소개하면서 상세히 설명할 것이다. 경험의 종교를 소개함에 있어서 나는 신학적 토론보다는 내가 경험한 것을 이야기 식으로 풀어가는 방식을 사용할 것이다.


최근 나는 10년 만에 미국 펜들힐(Pendle Hill)에 다시 와 있다. 펜들힐은 미국 퀘이커들이 퀘이커리즘을 경험하고 공부하는 ‘공동체형 성인교육 기관’이다. 공동체형 성인교육기관이란 말이 우리에게는 잘 이해되지 않는 개념이지만, 도식적으로 설명하자면 수도원과 학교와 휴양소를 하나로 모아놓은 것이라 할 것이다. 나는 펜들힐 같은 공동체형 성인 교육기관이 우리 사회와 교회에도 꼭 필요하다고 믿는다. 그래서 이번에 이곳 펜들힐에 다시 와서 자세히 살펴보고 있는 중이다. 미국에 펜들힐이 있다면 퀘이커 운동의 발상지인 영국에는 우드부룩(Woodbrook)이 있다. 한국 퀘이커였던 함석헌은 이 두 곳을 모두 가 본 후에, 퀘이커리즘을 경험하려면 펜들힐에 가고 공부하고자 한다면 우드부룩에 가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나도 10년 전 이 두 곳에 머물면서 퀘이커리즘을 공부하고 경험했다. 영국 버밍험에 있는 우드부룩은 퀘이커 대학원으로서 아카데미즘을 강조한다면 미국 펜들힐은 퀘이커리즘과 공동체의 경험을 강조한다. 나는 한국에 펜들힐 같은 공동체 형 교육기관에 우드부룩의 아카데미즘을 도입하는 것도 좋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구체적인 추진을 모색 중이다. 펜들힐의 비전은 20세기 초반 퀘이커들이 내외적인 위기감을 느끼면서 설립한 것인데,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 갱신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좋은 모델이 될 것이라 생각되기에 퀘이커리즘을 소개하는 지면을 빌려 상세하게 소개할 것이다.

‘퀘이커’란 낯선 이름의 종교인
퀘이커리즘에 대한 나의 첫 기억은 좋지 않은 것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다니던 교회 전도사는 군대를 반대하는 이상한 종교들이 있으니 그 꼬임에 빠지면 안된다고 설교했는데 퀘이커라는 이름이 그 중에 들어 있었다. 군대에 가지 않으면 누가 나라를 지킨단 말인가. 참으로 허무맹랑한 교리를 전파하는 그런 종교는 이단 종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그 기독교 종파들은 그런 허무맹랑한 주장을 하는 것인가? 누구도 그런 질문도 대답도 하지 않았다. 교회 목사님과 전도사님은 단지 그런 종교에 대해서는 알려고도 하지 말고 가까이 가려고도 하지 말라는 엄한 금지령만을 내릴 뿐이었다.


나는 마을 입구에 있던 감리교회에 다니면서 기독교에 입문했다. 나에게는 감리교가 제일 좋은 기독교이고 옆 마을에 있던 장로교회조차 이상한 신앙을 가르치는 교회로 보였다. 가톨릭교회는 천주교로서 기독교와는 다른 종교라고 알던 시절이었다. 조금 더 자라나서 알게 된 성공회, 구세군, 침례교, 순복음 교회들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내가 다니는 교회만이 진짜 교회라고 믿고, 다른 교파 교회에 대해서는 부지불식간에 경계심과 경쟁심을 품고 지내던 때였다. 이런 터무니없는 자기 종교 우월감에 빠진 청소년기에 애국심은 또 얼마나 열렬하고 무조건적인가. 이런 민감한 사춘기 시절에 이름도 이상하고 낯선 ‘퀘이커’라는 종교가 기독교 신앙의 이름으로 군대를 비판하고 부정하는 주장을 하고 돌아다닌다고 하니 좋지 않은 인상은 마음 깊이 심어졌다. 최근 종교적 병역거부 문제로 많이 알려진 여호와의 증인을 퀘이커와 같은 것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이런 이유에서 일 것이다. 그러나 둘은 종교적 배경에서나 전통에서 많이 다른 종파이다.

종교적 동아리 의식과 사회정의 운동
종교적 배타심을 품고 사회 정의 운동을 할 수 있는 것인가. 이 점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를 해보자. 고등학생 시절 받은 신앙 교육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대학에 가서도 교회는 감리교뿐인 줄 알고 지냈다. 친구를 만나도 감리교회 신자라고 하면 다른 교파 교회나 종교를 가진 친구보다는 무언가 더 친근한 신앙적 동질감을 느꼈다. 장로교 신자라면 왠지 다른 종교 신자처럼 느껴졌다. 단지 같은 교파 교회에 속해 있다는 것 이외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데 더 친근함을 느끼는 이런 감정적 유대감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종교적 신앙은 동종 집단을 결속시키는 반면 이종 집단에 대해서는 배타적인 태도를 형성한다. 배타적인 동아리 의식을 결속하는 묘한 마법 같은 힘이 있다. 이것은 예수 신앙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비본질적인 것이지만 현실적으로는 강력한 힘이다. 나 역시 그런 배타적 신앙문화 흐름에 편승하고 있었다. 대학시절 나는 민주화와 인권 운동에 가담했다. 이것은 사회의식에 따른 것이었지만 보다 궁극적 동기는 신앙적인 것이었다. 사회 불의와 인권 탄압에 저항하는 것은 이웃 사랑의 예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고 사회 참여 운동에 가담했다. 종교적 배타심을 갖고 있으면서 사회 정의와 평등 운동에 참여한다는 것이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지내던 때였다. 이 점은 지금 생각해도 참 신기하다. 마음속으로는 다른 종파 교회와 경쟁적인 라이벌 의식을 가지면서, 사회 평등과 정의를 외칠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묘한 심리상태일 것임이 틀림없다. 아마도 한국교회 에큐메니칼 운동 수준이 이런 정도에 있지 않나 싶다. 뭔가 정리되지 않고 일관성이 없이 시세(時勢)에 따라 춤을 추던 시절이었다.


함석헌을 알게 된 것도 이 시절이었다. 함석헌의 책을 읽고 강연을 들으면서 나의 신앙과 생각의 껍질들이 한 꺼풀씩 벗겨져 나갔다. 우물 안 개구리가 우물 밖으로 빠져나오는 경험이었다. 우물 밖에 나와 본 하늘이 너무 넓고 광막하여 다시 우물 안으로 들어가 나만의 하늘을 갖고 싶은 심적 갈등과 유혹도 많았던 때였다. 그때 나는 감리교회도 한 우물이란 것을 깨달았다. 절대적인 것으로 삼아 온 것이 상대적인 것임을 알게 되었을 때의 상실감은 참 쓰라린 것이었다. 그러나 보상도 있었다. 그동안 바라보지 않았던, 그러려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다른 것들을 바라보려는 마음의 여유가 생긴 것이다. 그리고 교파의식, 교단의식이라는 마음속의 담이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는 단순히 의식의 변화로 그치지 않았다. 감리교 신자로서 감리교회만이 진짜 교회인줄 알았던 내가 장로교 신학교에 입학했다. 소문으로 듣기에 굉장히 자유로운 신앙과 진보적(liberal) 신학을 한다는 한신 신학대학원의 분위기는 엄숙하고 무거운 느낌이었다. 신학 풍토 역시 정통신학이 주를 이뤘다. 해방신학과 민중신학 같은 비정통 신학을 다양하게 접할 수 있는 곳이었지만 퀘이커리즘 같은 소종파 신앙 전통에 대해서는 들을 기회가 없었다.

퀘이커리즘과의 만남
내가 퀘이커리즘을 다시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시간이 꽤 흐른 뒤였다.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장학생으로 아일랜드 에큐메니칼 평화 대학원에서 공부하게 되었을 때 나는 평화교회전통(Peace Church Tradition)을 이어오는 기독교 종파 가운데 퀘이커리즘이 있다는 것을 들었다.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퀘이커리즘을 다시 듣게 된 순간이었다. 그리고 고등학생 시절 가졌던 질문이었던 왜 그 사람들은 군대를 거부하는지, 그것이 기독교 신앙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지에 대한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당시 나는 어렴풋하게나마 예수를 잘 믿고 따른다면 폭력을 쓰지 말아야 하고, 예수의 정신은 군대 정신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나라를 스스로 지키기 위해서는 강한 군대가 있어야 하고, 국민의 일원으로서 나라를 지키는 군 복무는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군대에는 군목과 교회도 있고, 군대와 기독교 신앙은 깊이 생각할 것 없이 서로 잘 협력하여 나라를 잘 지키는 일에 봉사하면 되는 것이다. 국가의 명령을 위반하는 종교는 뭔가 잘못된 종교이다. 불교도 호국불교를 높이 평가하지 않는가. 그런데 평화교회는 이런 생각과는 다른 신앙을 말하고 있다. 나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진보적 열린 신학을 추구한다는 한신 신대원에서도 듣지 못하던 이야기였다. 국가와 정부가 잘못하면 교회가 예언자적 비판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알고 있었지만, 폭력, 군대, 전쟁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양심과 일치 될 수 없다고 믿고 또 그 믿음을 실천해 왔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은 것이다.


일찍이 대학시절 나는 함석헌이 퀘이커 교도라는 소문은 들어 알고 있었으나 퀘이커리즘에 대한 관심은 없었다. 함석헌도 대중 앞에서 퀘이커리즘을 설파하거나 병역 거부를 선동한 적은 없다. 1997년 늦은 가을날 저녁, 평화교회 강의를 듣고 돌아 온 아일랜드 더블린의 학교 기숙사에 앉아 나는 퀘이커리즘과 함석헌, 그리고 고등학교 시절의 퀘이커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퀘이커리즘과의 만남을 계시처럼 받아들였다.

역사적 평화교회, 퀘이커
나는 예수와 군대 사이에는 일치할 수 없는 본질적 차이가 있음을 느끼면서도 깊이 파고들지 못했다. 신앙만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이 세상에는 많이 있음을 아는 현실주의자였기 때문에 나라를 지키는 데는 군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었다. 예수의 십자가 희생을 본받아 나라를 위해 희생하는 군인의 삶으로 대치되었다. 군대는 예수 신앙과 맞서는 것이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했다. 남북한이 싸우고 있는 상황에서, 외세의 침입과 지배를 당한 아픈 역사를 갖고 있는 우리 민족에게 군사력을 강하게 하는 길이 올바른 신앙이요 기독교인의 태도이지 이에 반하는 그 어떤 주장은 비록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라 할지라도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그만큼 현실적인 주장이 우리 신앙생활에 강하게 작용한다.


그러나 이런 현실주의적 사고가 매우 그럴듯한 감화력을 가지지만 실제로는 모순이고 비극적인 악순환의 틀에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가진 미국이 최고로 안전한 나라여야 하는데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못하다. 전 세계 국가의 군사비 예산을 다 합친 것보다 미국의 군사비 예산이 많은데도 미국은 국가 안보와 시민 안전을 위해 군사비 예산을 계속 증액시키고 있다. 현실주의자들이 만드는 현실은 끝없는 비극과 공포와 불안의 연속이다. 기독교인은 다만 덜한 악(less evil)에 기여할 수 있을 뿐이라고 겸손한 신앙에 머물러 있기에는 이 세상의 전쟁과 폭력은 위태하고 심각한 지경에 있다.


이런 생각을 하니 나는 더욱 평화교회에 끌렸다. 기독교 역사에서 평화교회로 이름 붙여 말할 수 있는 교회 가운데 특별히 퀘이커, 메노나이트와 브레드린 교회들을 가리켜 사람들은 역사적 평화교회라고 부른다. 이들에게 그런 이름을 붙여준 집단은 20세기 초부터 활발하게 일어났던 서구의 현대 에큐메니칼 기독교 그룹이다. 나는 이들 세 기독교 종파들 가운데 퀘이커에 마음을 두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한국의 평화 사상가인 함석헌이 퀘이커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퀘이커가 다른 두 집단들에 비해 현실 역사 참여를 활발히 하는 신앙 전통을 가졌다는 것이다. 나중에 이들의 평화신앙과 실천론을 좀 더 상세히 소개하는 시간에 말하겠지만, 메노나이트 교회는 재세례파 신앙에 기반한 교회로서 일반 교회와 같이 교회 제도와 체제를 갖추고 신학도 견고하지만 전통적으로 현실 참여가 약하다. 그에 비해 퀘이커리즘은 교회 체제와 형식도 없고, 신학보다는 개인의 영적 경험의 증언을 존중하기 때문에 신학적 연구 대상으로 삼기에 난감한 면이 있으나 현실참여 활동이 활발하다. 최근 퀘이커 연구자들은 퀘이커 신학(Quaker Theology)이란 말도 사용하지만, 그들은 신학자(theologian)란 말보다는 역사가(historian)란 말을 선호한다.

펜들힐과 함석헌
퀘이커 평화 신학을 연구하기로 결정한 후 나는 퀘이커 운동의 발생지인 영국에서 퀘이커리즘을 읽는 시간을 갖고, 20세기 퀘이커 평화운동이 보다 실천적으로 활발하게 일어났던 미국에 건너갔다. 이것은 영국 지도교수의 제안에 의해서였다. 영국에서는 우드부룩 퀘이커 대학원(1999년, 2002~2003년)에서 있었고, 미국에서는 펜들힐(1999~2000년)에서 머물렀다. 두 곳은 퀘이커리즘을 공부하고 경험하기에 더없이 적합한 곳이다. 함석헌 선생이 처음 퀘이커리즘을 경험하고 공부한 곳이 펜들힐(1962년 가을학기)이고 우드부룩(1963년 겨울학기)이다. 함석헌이 이 두 곳에서 머문 지 40년 가까이 지난 후에 나도 퀘이커리즘을 이곳에서 공부하게 된 셈이다. 함석헌은 미국 펜들힐을 특히 좋아했다. 펜들힐에서 만난 미국 퀘이커들도 함석헌의 종교성을 높이 존경했다. 함석헌 이후로 한국의 젊은이들이 드문드문 펜들힐에 찾아오기 시작하여, 내가 머물었던 2000년에는 5명의 한국인이 머물렀다. 한국 초대 여성 총리였던 한명숙도 이 기간에 가족과 함께 펜들힐에 머물렀다. 펜들힐은 퀘이커만 머무르는 곳은 아니다. 어느 종파이든, 심지어는 종교를 갖지 않은 비종교인에게도 열려있는 곳이다. 이번에 10년 만에 다시 찾아 온 펜들힐에서 들으니 2000년 이래로 제법 많은 한국인 구도자들이 펜들힐을 찾아와 머물렀다고 한다. 아는 이들의 이름도 있고 모르는 이들의 이름도 있다. 소리 없이 새로운 영성을 찾아 돌아다니는 이들이 우리 사회에도 알게 모르게 많이 존재함을 느낀다.


함석헌과 퀘이커리즘 사이의 얽힌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자. 함석헌이 펜들힐에 온 때는 그의 나이 62세였다. 할아버지가 다 되어서 온 것이다. 일단 펜들힐에 오게 되면 학생 신분이 된다. 함석헌도 학생 신분이었다. 그가 이렇게 늦게라도 이곳에 오게 된 배경이 흥미롭다. 함석헌은 무교회 신앙을 신봉하다가 그의 나이 40대를 거치면서 동양 사상과 종교를 읽으면서 보편적 기독교 신앙으로 나아갔고, 동시에 역사적 예수에 대한 관심을 가지면서 무교회주의 신앙을 넘어선다. 그리고 한국 전쟁 이후 장준하가 시작한 <사상계>에 사회비판과 종교비판, 특히 날카로운 기독교 비판의 글을 쓰면서 한국 사회에 널리 알려지는데, 5·16 군사 쿠데타를 통렬하게 비판하는 글은 그 후 그의 삶을 반 군사독재 투쟁의 선봉에 서게 한다. 그 당시 젊은 언론인이었던 송건호는 총칼의 무력시위를 호되게 꾸짖는 함석헌의 글을 읽고 정의의 예언자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또 이 글을 읽고 미 국무성은 함석헌을 미국으로 초대했다. 그들은 함석헌으로부터 한국의 정황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함석헌은 이 초청에 응했는데, 그 본심은 미국의 퀘이커를 자세히 알아보고자 함이었다. 함석헌은 세계 전쟁 중에 퀘이커들의 신앙 양심에 따른 평화운동 이야기를 들으면서 퀘이커리즘에 큰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직접 퀘이커를 만난 것은 한국전쟁 후에 한국에 들어와 평화 구호활동을 하고 있던 영국과 미국의 퀘이커들을 만난 것이 처음이다. 미국에 와서 여행하는 동안 그는 주로 퀘이커들을 만났고, 펜들힐에서 한 학기동안 퀘이커리즘을 공부했다. 그 후 함석헌은 전 세계 퀘이커들과 가깝게 교제했고, 서울 퀘이커 모임을 이끌었다. 20세기 후반기를 산 우리나라 지식인들 가운데 함석헌을 아는 사람은 한번쯤 퀘이커란 이름을 듣게 된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영국과 미국의 퀘이커들은 2차 세계전쟁 이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이들은 함석헌을 두 차례에 걸쳐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했다. 영미권에서 퀘이커는 평화의 대명사, 정직한 기독교인의 모범으로 통한다. 우리나라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아직도 퀘이커리즘을 이단 비슷한 기독교 종파로 생각하는 이들도 있지만, 영미권에서는 영적이면서도 지성적인 기독교인들로 인식된다. 10년 전 펜들힐에 머물면서 나는 함석헌과 퀘이커리즘간의 관계성과 20세기 미국 퀘이커들의 평화운동을 연구했다. 이것은 나의 박사 논문 주제였다.

“펜들힐을 불 살라라”
지금 펜들힐에서 ‘펜들힐 80년 역사’를 쓰고 있는 퀘이커 신학자 더글라스 귄(Douglas Gwyn)은 1960년대 펜들힐의 역사적 사건들과 인물들을 소개하면서 함석헌과 펜들힐에 얽힌 일화를 이야기 했다. 펜들힐에서 한 학기를 마치고 떠나는 환송의 자리에서 함석헌은 펜들힐 원장에게 상자 하나를 선물했다고 한다. 원장은 상자를 풀었다. 겉 상자를 풀면 속 상자가 나오고 그것을 열면 다른 상자가 계속 나오는 도깨비 상자 선물이었는데, 마지막 속에서 나온 것이 작은 성냥 상자였다. 함석헌은 거기에 메시지를 남겼다. “펜들힐을 불 살라라.” 영적인 불로 펜들힐을 태우라는 것이 펜들힐에 남긴 함석헌의 메시지였다. 함석헌의 ‘펜들힐 영적 방화 사건’을 기억하고 소개하면서 더글라스 귄은 상당히 고무된 표정이었다. 그는 초기 퀘이커리즘을 연구하는 학자인데, 함석헌의 이런 ‘영적 선동’에서 초기 퀘이커들의 부활을 느꼈던 것 같다. 펜들힐의 설립 초기 정신은 초기 퀘이커들의 불타는 영성을 회복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그 불길은 점차 사그라 들었던 것임에 틀림없다. 함석헌은 그것을 감지했을 것이고, 다시 펜들힐이 불타오르기를 희망했던 것이리라. 함석헌의 영적 방화사건 이야기는 펜들힐 역사에 의미 있는 에피소드로 기록될 것이다. 그런데 어찌 성냥을 그을 곳이 펜들힐 뿐이랴. 나 자신과 한국교회, 그리고 우리 사회 안에도 성냥을 그을 곳이 많지 않은가



정지석 l 목사는 영국 우드부록(Woodbrooke) 대학원에서 ‘퀘이커리즘과 함석헌의 평화 사상 비교 연구’로 박사(Ph. D.)학위를 받았다. KNCC, 크리스챤 아카데미 사회교육원, UNESCO-APEIU 국제이해교육원에서 평화교육가로 일했으며 성공회 대학과 한신대 신학대학원에서 평화윤리와 교육을 강의하였다. 한국 YMCA 생명평화센터 소장이며 현재 미국 펜들힐에서 연수중이다.
#퀘이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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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영혼과 용기 < 김조년의 맑고 낮은 목소리 < 칼럼 < 오피니언 < 기사본문 - 금강일보

아름다운 영혼과 용기 < 김조년의 맑고 낮은 목소리 < 칼럼 < 오피니언 < 기사본문 - 금강일보


<김조년의 맑고 낮은 목소리> 아름다운 영혼과 용기

기자명 김조년
입력 2012.10.22 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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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조년
한남대 명예교수

가끔 우리가 살아가면서 짜증스러운 소식과 소리를 들을 때도 있지만, 또 그보다 더 산뜻하고 아름다운 소리를 들을 때도 있다. 아마도 아름답고 용기 있는 영혼들이 있어서 우리가 이만큼 품위가 있고 진전된 삶을 살아가는 것인지 모른다. 오늘날처럼 차차 국경이라는 것이 흐려지거나 없어지고, 경제와 재정, 국방과 정치와 문화와 종교, 그리고 의사소통과 생각과 학문의 교류가 한 국가단위나 종파단위 또는 민족과 이데올로기를 넘어서 자유스럽게 오고가는 때도 그렇게 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상당히 빠른 속도로 더 진전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이제까지 당연하다고 하였던 가치들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아주 급속하게 거대한 강물처럼 흐를 것이란 말이다. 물론 그 반대의 흐름도 있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것들이 종국에는 어느 곳으로 흘러갈 것인가?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거대한 흐름으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강압된 분위기 속에서 깊은 속으로부터 ‘아니’라고 부르짖는 내면의 소리를 듣고 삶으로 표출한 사람들이 있었다. 아마도 역사는 그런 사람들의 작은, 그러나 용기 있는 몸짓 하나로 제대로 된 길로 접어들고 껑충 뛰어오르는지 모른다. 1955년 12월 1일 미국 앨러배마주의 몽고메리에 사는 흑인 여인이 봉재공장에서 일을 마치고 피곤한 몸으로 버스를 탔을 때다. 빈자리에 앉았으나 다음 승강장에서 백인이 올라왔다. 그가 앉을 자리가 없었다. 흑백의 구별이 명확하던 때, 그녀는 당연히 그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여야 했다. 그러나 그녀는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라는 기사의 말을 ‘나는 내가 앉은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습니다’란 말로 거부하였다. 그녀는 경찰에 의하여 체포되었고, 구치소에 갇혔다가 나왔다. 바로 이 작은 사건은 380여일이 넘는 긴 기간 버스타기거부 운동으로 번졌고, 워싱턴까지 몇 년을 걸친 대행진이 이루어졌으며, 흑백을 구별하던 차별정책들이 속히 사라지게 하는 시작이 되었다. 오늘의 미국 대통령 오바마는 그래서 나오지 않았을까? 아름다운 영혼의 용기 있는 몸짓이 역사를 어떻게 짓는가를 말해준다.

2001년 9월 11일 아침에 미국 뉴욕시에 있는, 미국의 경제 권력을 상징하는 세계무역센터를 적이라고 여긴 세력의 두 대의 비행기가 공격하여 어마어마한 충격을 주었다. 미국 전 지역에 갑자기 옛 시대에나 있을 법한 국가주의와 애국주의가 거대한 파도처럼 춤을 추었다. 집집마다, 승용차와 거리를 달리는 모든 차들도 성조기를 달았다. 학교에서나 교회에서나 직장 어디에서나 알카에다가 존재하는 아프가니스탄을 바숴버려야 한다는 흐름이 거대하게 일고 흘렀다. 대통령은 그들을 향한 전쟁을 불사하겠다고 선포하고, 국민들은 들끓는 여론으로 지지하였다. 그 때 굉장히 빠른 속도로 미국의 퀘이커(Quaker)교도들과 노엄 촘스키(Noam Chomsky) 교수는 아프가니스탄을 향한 공격전쟁을 일으키지 말라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것은 반국가적인 듯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세계의 양심들은 그 성명을 크게 지지하고 받아들이면서 새롭게 일어나는 국가주의의 반이성적 흐름을 걱정하였다.


최근 일본의 우익정치가들의 수없이 많은 발언으로 독도를 사이에 둔 한·일 간의 긴장이 높아지고 센카쿠열도(尖閣列島) 또는 댜오위다오(釣魚島)를 중심에 둔 일본과 두 중국 사이의 긴장이 매우 날카롭게 대립한다. 한국의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하고, 그 문제되는 열도 주변에서 군사작전 비슷한 무력시위를 양 중국은 벌이기도 하였다. 일본은 그 섬을 사서 자기 영토로 등록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이 때 일본의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가 아사히신문에 긴 글을 썼고,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와 1270여 명의 지성인들이 성명을 발표하였다. 논쟁이 되는 그 지역들은 한국과 중국이 약할 때 일본의 침략의 산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영토논쟁을 일으키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일본은 자신들이 잘못했던 과거로부터 해방되는 참신함이 있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대하여 중국의 작가 옌렌커(閻連科)가 응답하는 글을 썼다. 국제적인 지성인들의 모임이나 연대운동으로 정치가들이 바람을 일으키려는 국가주의의 흐름을 평화의 흐름으로 바꾸는데 함께 힘쓰자는 발언이었다. 이 두 발언들은 각각 자기 나라에서 소수에 속하거나 별로 듣는 사람이 많지 않은 작고 맑은 소리인지 모른다. 그러나 바닥 깊은 곳에서 나오는 참의 소리일지 모른다.

최근 우리나라 동부전선에서 북한을 탈출한 병사가 휴전선 양쪽으로 쳐진 철책선을 넘어 아무런 제재 없이 초소의 문을 두드려 귀순한 일이 보도되었다. 남과 북의 양측에서 철책선을 아주 철저하게 감시하고 지키지만 그것이 의미가 없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사건이었다. 그것의 의미가 무엇일까? 이것과 동시에 우리 정치권에서는 NLL에 대한 논쟁이 뜨겁다. 그 선들은 언제부터 있었으며, 누가 만들었으며, 언제까지 지속될까? 그것이 없었던 때와 사라진 뒤의 그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는 현재의 상황에서 살아가는 제한적 존재이기에 그것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동시에 미래와 꿈을 먹고 사는 존재들이다. 미래의 밝은 세계를 염두에 둘 때 현재의 복잡한 문제들이 풀릴 실마리가 생긴다. 남북의 경계들은 통일 된 뒤에는 하나의 아프고 슬픈 추억과 기억으로 남을 것들이다. 그것이 우리의 삶 전체를 지배한다는 것은 또한 비극이요 슬픔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건들을 미래의 자리에서 그 경계의 무의미성을 상징하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 표를 의식하지 않고 근본문제를 바라보는 지점에 설 때 우리의 논쟁은 훨씬 더 창조적이고, 평화적이며, 밝은 미래를 바라보는 차원의 것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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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에겐 전쟁이 남긴 트라우마가 있다" - 오마이뉴스

"한국인에겐 전쟁이 남긴 트라우마가 있다" - 오마이뉴스

 단체 사진을 찍고 있는 대담 참석자들. 사진 왼쪽에서부터 웬 티진 소장, 조셉 거슨 박사, 최문순 강원도지사, 이정옥 대구가톨릭대 교수.
▲  단체 사진을 찍고 있는 대담 참석자들. 사진 왼쪽에서부터 웬 티진 소장, 조셉 거슨 박사, 최문순 강원도지사, 이정옥 대구가톨릭대 교수.
ⓒ 박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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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에 정전이 된 이후, 지금 우리 강원도는 분단 상태에 놓여 있는 한반도 안에서도 유일한 분단도로 남아 있다. 남강원도의 인구는 155만, 북강원도의 인구는 168만이다. 그렇게 둘로 나뉘어 있는 가운데, DMZ의 2/3를 공유한 채 중무장한 군대가 양쪽에서 서로 대치하고 있다. 그래서 군사적 규제를 강하게 받고 있다. 그 바람에 경제적 발전도 가장 뒤처졌다. 한마디로 살기 어려운 지역으로 남아 있다. 올해로 정전 60주년이다. 강원도가 이제는 평화와 번영의 지역으로 바뀌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 최문순 강원도지사

지난 6일 강원도 춘천에서 '강원DMZ국제평화생명포럼 2013'이 개최됐다. 이 포럼은 "한국전쟁 정전 60주년을 맞아, 분단국가 안에서도 유일하게 남·북으로 나누어져 있는 지역인 강원도에서 평화 비전을 구상하자"는 취지로 진행됐다. 이 포럼에서는 국내외에서 평화 운동을 이끄는 여러 활동가와 전문가들이 모여 활발한 토론을 벌였다.

이 포럼이 열리는 동안에 '강원DMZ국제평화생명포럼 2013 조직위원회'와 <오마이뉴스>는 최문순 강원도지사와 미국에서 정치와 국제안보학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는 조셉 거슨 박사, 그리고 중국에서 인민대학교 지속가능발전 선도연구소 소장으로 있는 웬 티진 소장 등이 참석해 함께 대담을 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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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셉 거슨 박사는 AFSC(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 퀘이커 교도 평화운동 조직) 대표로, '2010 핵확산금지조약(NPT) 국제설계위원회' 등을 공동 설립하고, '중국 파견 미국평화활동대사'로 활동한 바 있다. 웬 티진 소장은 중국 국무부 자문위원회와 환경보호 정부자문위원회 자문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대담 주제는 주로 한반도의 긴장 상태가 분단도인 강원도에 미치는 영향과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서 강원도가 해야 할 역할 등에 집중됐다. 대담은 6일 저녁 춘천 라데나 리조트 안에 있는 한 카페에서, (사)한국NGO학회 회장인 이정옥 대구가톨릭대 교수의 사회로 진행됐다. 다음은 이날 대담 자리에서 오고간 대화 전문이다.

남북 관계 경색으로 일상적인 고통에 시달리는 한국인들

 이정옥 교수.
▲  이정옥 교수.
ⓒ 박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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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옥(대구가톨릭대 교수) : "한반도는 올해 한국전쟁 정전 60주년을 맞았다. 정전이 된 상태로, 완전한 평화 상태는 아니다. 먼저, 이런 비정상적인 정전 상태가 60년 동안 계속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지, 그리고 이 같은 정전 상태가 한반도에 사는 일반인들의 삶에는 어떤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는지 말씀을 나눠보고 싶다."

웬 티진(중국 인민대학교 지속가능발전 선도연구소 소장) : "나는 수많은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연구를 진행했다. 많은 분쟁 지역을 돌아봤다. 그중에서 스페인의 바스크 지역이라든지, 북아일랜드의 벨파스트 지역, 북인도 지역, 멕시코 국경 등 이런 지역들에서는 게릴라 운동이 진행되고 있다. 또한, 페루도 마찬가지로 분쟁 지역에 속해 있다. 태국 남부도 국경 분쟁에 휩싸여 있다.

그런 연구를 진행한 것은 그 지역에서 그런 분쟁이 일어나는 이유를 알아보는 게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도 이런 폭력적인 사태들이 일어날 수 있다. 만약에 지역에서 그런 사태들이 일어나면, 그것은 그 지역 정부에 엄청난 도전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지역적인 분쟁이 일어나게 되면,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지역에 국한시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우리가 주의 깊게 들여다봐야 할 것이 있다. 특정 지역에서 분쟁이 일어나는 데는 국제적인 배경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사실을 지역 주민들에게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조셉 거슨(퀘이커 교도 평화운동 조직 대표) : "내가 다녀온 분쟁 지역들은 주로 중동에 있는 국가들이다. 레바논이나 팔레스타인, 북아일랜드를 꼽을 수 있다. 이런 곳에서 발생한 분쟁들은 웬 티진 교수가 지적했듯이 국제적인 측면도 있지만, 내전과 같은 측면도 있다. 물론, 분쟁이 일어나는 배경에는 다양한 상황이 존재한다.

내가 한국을 돌아본 바에 따르면, 한국에는 여전히 이산가족이 많이 남아 있다. 이산가족은 심리적이며 정신적인 상처가 여전한 것으로 알고 있다. 부분적으로는 정전 상태이고 부분적으로 전쟁 상태인, 이런 비정상적인 상태로 인해서 불안감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특히 이곳 강원도 같은 곳은 지역상 남·북이 대치하는 최전선에 있기 때문에 위기가 닥칠 때마다 그 위기가 강원도 주민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다. 그로 인해 강원도 주민들에게 트라우마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분단 상태에 있는 한반도에 살고 있는 까닭에 많은 남자들이 군 복무를 하고 있다. 심지어 전쟁 직후, 그러니까 전쟁이 끝났는데도 불구하고 의무징병제에 따라 군대 생활을 해야만 했다. 이것은 사회가 군사화한 결과로 봐야 한다. 정전 이후 군사화 된 사회가 도래하면서, 오늘날 이렇게 최문순 도지사처럼 민주적으로 선출된 도지사를 맞이하는 데도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오늘 포럼에서 여러 차례 말한 바 있지만, 강원도는 북한과 맞닿아 있는 최접경 지역이기 때문에 당연히 경제적인 면에서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클린턴 행정부 말기에 북한과 미국 사이에서 굉장히 중대한 합의가 이루어진 적이 있다. 그러나 그 직후에 부시 행정부가 들어선 뒤에는 북한과 미국 간에 이뤄진 합의가 더 이상 진전을 보지 못하고, 좌초되고 말았다. 부시 행정부는 그 이후 또 한국의 햇볕정책에도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북한을 악의 축으로 지목했다. 이런 조치를 취함으로써, 북한과 미국이 국가와 국간 간의 관계가 아니라, 마치 불법적인 집단과 국가 간의 관계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이런 식의 조치들이 결국 한국민들에게 트라우마를 남겼다. 미국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도 평화를 통해 이런 문제들이 발생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최문순(강원도지사) : "두 분 말씀이 굉장히 정확한 부분이 있다. 트라우마가 있는 것이 맞다. 그것 때문에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많은 제약을 겪고 있는 지역이 바로 강원도다. 생활상 일상적인 불편이 뒤따른다. 여러분이 지금 앉아 있는 이 자리도 바로 38선이 지나가는 곳이다. 우리는 지금 한국전쟁 당시에 치열한 살육전이 벌어졌던 현장에 앉아 있다. 한반도에서 일어난 분쟁은 레바논이나 스페인하고는 좀 다르다. 민족이나 문화, 종교 이런 데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념이라는 우리들의 삶과는 큰 관계가 없는 비본질적이고 시대착오적인 문제에 뿌리를 두고 있다.

1953년에 정전이 된 이후, 지금 우리 강원도는 분단 상태에 놓여 있는 한반도 안에서도 유일한 분단도로 남아 있다. 남강원도의 인구는 155만, 북강원도의 인구는 168만이다. 그렇게 둘로 나뉘어 있는 가운데, DMZ의 2/3를 공유한 채 중무장한 군대가 양쪽에서 서로 대치하고 있다. 그래서 군사적 규제를 강하게 받고 있다. 그 바람에 경제적 발전도 가장 뒤처졌다. 한마디로 살기 어려운 지역으로 남아 있다. 올해로 정전 60주년이다. 강원도가 이제는 평화와 번영의 지역으로 바뀌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남북 간 민간 교류, 중앙정부가 권한을 독점해서는 안 된다

이정옥 : "강원도는 그동안 도 자체적으로 북한과 꾸준히 교류와 협력을 진행해 왔다. 그런데 남북 관계가 경색되면서 최근 5년여 기간 동안에는 남북강원도 양쪽 지역 간의 관계도 거의 단절되다시피 했다. 우리는 이때 교류와 협력을 계속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강원도가 남북 간 교류 협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웬 티진 소장.
▲  웬 티진 소장.
ⓒ 박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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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 티진 : "내가 오늘 포럼에서 제안한 것이 있다. 요즘 지구온난화나 환경 보전 같은 것이 대중의 이목을 끌고 있는 주제다. 거기에 초점을 맞춰서, 생태 회랑(Eco corridor)을 건설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한국에서 시작해 북한을 거쳐서 중국까지 가는 긴 회랑을 건축하는 과정에서 사회적인 관계도 맺게 되고, 커뮤니케이션도 실현 가능하게 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정치적으로 '옳다, 그르다'를 말할 수 없다. 어떤 사람에게 당신은 정치적으로 잘못됐다고 말하면, 그 말을 듣고 설득을 당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나? 그냥 싸우자는 얘기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이슈와 관련해서는 생태적인 문제로 접근하는 게 올바르다고 생각한다. 실제 중국에 있어서도 남부 중국과 북부 중국을 연결하는 생태 회랑을 구축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이를 통해서 두 지역 간에 커뮤니케이션이 더욱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 사례를 볼 수 있다.

우리는 한반도에서 시작한 생태 회랑이 대륙으로 뻗어나가면서 국제적으로 많은 국가들을 연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뿐만 아니라, 북한, 러시아까지 해당이 될 수 있다. 이런 생태 회랑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투자뿐만 아니라 새로운 기술도 필요하고, 새로운 사회적 자본도 필요하다. 이렇게 함으로써 사회적인 운동이 일어나게 되고, 이런 사회적인 운동이 결국엔 정부의 목표를 충족할 수 있게 된다. 실질적으로 중국에서 사회단체가 조직됐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런 사회단체가 조직이 되면, 국제적으로 한국과 북한, 중국, 러시아가 서로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국제적인 워크숍도 가질 수 있다. 그러면 그런 워크숍을 통해 국제적인 회랑으로 거듭날 수도 있다."

조셉 거슨 : "지금 여기서 논의가 되고 있는 것들이 강원도 차원에서 혹은 시민단체 차원에서 남과 북이 협력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 그리고 그런 식으로 해서 경제, 사회, 환경을 개발하는 문제를 가지고 대화를 진행해 보자는 얘기가 오고가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들을 어디서 어떻게 이뤄낼 수 있느냐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런 문제들은 국가 안보와 연관이 있다. 국가 안보라는 문제 때문에 강원도에서도 많은 곤란과 어려움을 겪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의 이해관계를 어떻게 풀 것인가 하는 문제도 간과할 수 없다.

그래서 제안을 드리자면, 중국에 가서 중국 정부의 지원을 받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유럽이나 다른 중립국 등 제3국에 있는 NGO의 협력을 받아 진행하는 방법도 있을 수 있다. 어쨌든지 간에 결정은 전적으로 한국 사람들에게 달려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한 가지 답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러 가지 답이 여러 단계에서 또 여러 차원에서 있을 수 있다. 이것은 한국의 정치 상황과 문화적이고 전통적인 정서를 고려해서 한국에서 선택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최문순 : "두 분이 굉장히 핵심적인 문제를 지적한 것 같다. 지금은 남북 관계와 관련한 모든 권한을 중앙정부가 독점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권한을 중앙정부가 독점하지 말고 시민사회, 그리고 지방 정부와 나눠 가질 것을 요구하고 있다. 국가안보와 직접 관련이 없는 문제, 아까 웬 티진 교수가 말한 생태 회랑을 건설하는 문제라든지 또 인도적인 차원의 민간 교류 같은 것은 민간단체나 지방 정부에서 결정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 우리의 요구다.

강원도 같은 경우 예전에는, 말라리아에 감염된 모기가 남쪽으로 넘어오기 전에 북한에서 방재하는 사업을 했었다. 그리고 또 소나무 병충해가 남쪽으로 넘어오기 전에 북한에서 방재하는 사업도 진행했는데, 지금은 그 사업들이 모두 중단됐다. 이런 비정치적이고, 또 방재사업 같이 우리가 필요로 해서 하는 사업들은 이제 서로 자유롭게 진행할 수 있게 해줬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아직 그런 단계에 가 있지 않다."

정전 이후 고립된 강원도, 국가 발전 전략에서 누락됐다

이정옥 : "강원도는 지정학적인 위치에 의해서 예로부터 대륙으로 가는 교통망의 경유지 역할을 해온 지역이다. 옛날에 한반도에서 대륙으로 가는 철도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중단됐다. 강원도는 이 철로들을 다시 연결해 대륙으로 뻗어나가는 걸 고민 중이다. 그렇게 했을 때 그것이 이 지역의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궁금하다. 그리고 강원도가 대륙으로 뻗어나가는 데 방해가 되는 요인이 생긴다면, 그 문제들은 또 어떻게 해결하는 것이 좋겠는가?"

웬 티진 : "서울에서 DMZ를 방문했을 때, 그곳에서 인상 깊게 봤던 부분이 실제 기차 선로가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그 선로가 지금도 남아 있기는 하지만 기차는 다니지 않는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는 거기가 바로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치 시베리아가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교량 역할을 하듯이, 강원도도 그런 교량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주의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중국에서는 한국에 식품을 주로 수출한다. 그것 외 중국 내륙과 별다른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진행되고 있다. 중국은 내륙에서 생산한 잉여 생산물을 그냥 한국에 수출할 뿐이다. 그 과정에서 지금 중국 내륙의 전통 문화가 다 파괴되고 있다. 내륙 사회에서는 솔직히 얻는 게 아무것도 없다. 이 부분은 더 자세히 말하고 싶지 않다. 나는 다만 지금 세계가 변하고 있다는 걸 말하고 싶다. 산업화라는 것은 어떻게 되면, '과잉생산'이란 말로 정의될 수 있다. 그에 반해 새로운 문명은 '생태 문명'으로 거듭나고 있는 중이다. 이 새로운 문명에서는 지역의 자연과 문화적 다양성, 사회적 다양성 등이 다 새로운 자원이 될 수 있다. 개발이 고도화된 나라에서는 이런 새로운 자원들이 파괴되기 일쑤이지만, 생태 문명이 싹트고 있는 곳에서는 그렇지 않다. 지역에서는 그 지역의 자원들이 모두 새로운 가치를 갖게 된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생태 회랑이 가지고 있는 성격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지역을 기반으로 해서 이런 회랑들이 많이 생겨나야 한다. 회랑을 건설하는 데서 이뤄진 발전들은 모두 그 지역의 자산으로 남을 것이다. 회랑은 그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짧지 않다. 길게 이어지는 것이라서 시베리아까지 연결될 수도 있다. 이렇게 회랑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산업사회에서는 발견하지 못했던 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강원도는 그동안 산업화에 낙후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문명으로 전환하는 데 좋은 자원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 자원을 잘 활용하면, 지역끼리 얼마든지 회랑을 연결할 수 있다. 나는 강원도가 새로운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본다."

조셉 거슨 : "스웨덴의 한 교수가 유라시아를 잇는 대륙 횡단 철도에 대해 발표한 것을 본 적이 있다. 그걸 보고 새로운 상상력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는 미국과 중국 간의 무역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상태다. 따라서 한반도가 양 대국 사이에서 어떻게 상생 전략을 모색할 것인가 하는 것은 상당히 도전적인 과제가 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중국과 EU를 연결하는 새로운 벨트가 현실적으로 얼마나 가능할지는 조금 회의적이다."

 최문순 강원도지사.
▲  최문순 강원도지사.
ⓒ 박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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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문순 :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반도국가다. 남북으로 분담이 됨으로써 고립된 섬과도 같은 해양국가가 됐다. 그 결과 우리 강원도 같은 경우에는 아주 폐쇄된 지역이 되고 말았다. 국가 발전 전략도 주로 해양으로 나가야 되니까 저 남쪽에 치우쳐 있었다. 수출 목적으로 남쪽에 항만을 개발했다. 그쪽으로 발전이 치우쳤다. 그러면서 강원도는 국가 발전 전략에서 누락이 됐다. 그래서 우리 강원도는 어떻게든 남북 간의 관계를 개선하고, 러시아와 중국으로 진출하는 통로를 확보함으로써 대륙 국가로 가야 하는 입장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TSR(시베리아횡단철도), TCR(중국횡단철도), TMR(몽골횡단철도)을 계속 주장하고 추진하고 있다. 그 철도들을 통해 화물과 관광객들을 가장 안전하고 싸게, 중국과 러시아를 거쳐 유럽까지 이동시킬 수 있다. 그 통로를 확보하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다. 지금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는 철도가 연결돼 있다. 그 길이가 8088km다. 거기에 북한만 연결하게 되면, 강원도에서 모스크바까지 8500km 가량의 철도가 연결될 수 있다. 이것은 중국, 러시아, 몽골 등 인근 국가에 모두 이익이 된다. 우리는 또 이것으로 새로운 세계 질서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본다. 그 중간 지점에 북한이 있다. 이 문제의 핵심 역시 평화가 과제다. 평화가 지역을 발전시키고, 세계 질서를 바꾸는 데 가장 중요한 핵심 과제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평화 체제가 구축되면, 기존의 문제들은 모두 사라진다

이정옥 : "미국에는 한국이 육로를 통해서 중국과 러시아와 연결이 되는 것에 약간 저항하는 세력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한국을 비롯해 중국, 러시아 등 3개국이 서로 유대관계를 맺는 것이 정당하다는 걸 알리고 싶다. 조셉 거슨 박사께서는 미국을 어떻게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조셉 거슨 : "여러 차원에서 가능하다. 한 가지 방법으로는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과 같은 다양한 다자간 대화가 있을 수 있다. 이렇게 다양한 토론을 하게 되면, 미국에서도 이런 관계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혜택도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웬 티진 : "미국에 한국인들이 많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미국 문화도 경험하고 한국 문화도 경험했던 그런 사람들이 미국 사회와 한국 사회가 서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강원도 출신의 재미교포들을 조직해서 그들로 하여금 미국 정부에 여론을 전달하게 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그렇게 해서 미국에게 주어지는 이익을 아주 분명하게 설명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정옥 : "중국 정부에는 한국이 도 차원에서 이런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을 얼마나 적극적으로 후원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그리고 이런 일과 관련해, 중국 정부뿐만 아니라 중국 내 시민사회단체와도 협력을 구하는 게 얼마나 가능한지 알고 싶다."

웬 티진 : "중국의 후원을 얻는 것은 매우 쉽다. 나는 전략적 싱크탱크의 회원으로 중국 정부에 정책 컨설턴트를 하고 있다. 리포트를 작성해 제출하기도 하는데 그 리포트는 정치가들에게도 전달된다. 일정 정도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정책 분야 연구에서 20년을 일했다. 공식적으로 이런 논의를 끌어올 수 있는 영향력은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 '회랑'에 대해서 미국이나 일본이 별로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 어떻게 보면, 강원도로서는 호재다. 일본은 오래 전부터 시베리아의 천연 자원에 굉장히 많은 관심이 갖고 접근했다. 하지만 러시아에 적대적인 세력이 많아, 지금은 약간 후퇴한 상황이다.

그런 면에서 강원도가 지금 상당히 좋은 기회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 짚고 넘어가자면, 앞서 최 지사께서 횡단철도 이름에 몽골이나 중국 등 특정 국가 이름을 넣었는데, 그렇게 하면 또 미국이 반대할 수 있다. 국가 이름 대신에 시베리아처럼 특정 지역의 이름을 붙이면 저항이 덜하다. TCR(중국횡단철도)처럼 그림을 너무 크게 그리지 않는 게 좋겠다. 내가 '회랑'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이정옥 :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지금 군사적인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이렇게 고조되는 긴장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그리고 이런 긴장을 해소하는 데는 어떤 방법이 좋은지 묻고 싶다. 그리고 또 항구적인 평화를 달성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이 강원도민들에게 가져다줄 수 있는 혜택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눠봤으면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강원도민들에게 평화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는 미국이 진정한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거듭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묻고 싶다. 미국은 그동안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역할을 맡아 왔다. 하지만 최근에 보여준 모습은 상당히 실망스러운 것이다."

 조셉 거슨 박사.
▲  조셉 거슨 박사.
ⓒ 박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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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셉 거슨 : "지금 미국에서는 사회가 위기에 빠져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부패한 정치 시스템이 존재한다. 얼마 전에 대법원이 선거에 무한대로 돈을 쓰도록 허용함으로써 미국 민주주의에 아주 심각한 타격을 주는 결정을 내렸다. 학자들은 그것을 민주주의 게리맨더링이라고 부른다. 한마디로 미국은 민주주의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미국은 굉장히 다양한 지역이 한 국가를 이루고 있다. 지역은 그 지역마다 또 다양한 정치적 가치와 문화를 가지고 있다. 미국 역사상 최초로 흑인이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그로 인해 억만장자와 인종주의자들이 서로 협력하는 관계를 가질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다. 우리는 이런 부분에 대해 저항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국에는 무조건 '노'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앞서 인종주의자라고 지칭했던 사람들이다. 이번에 좌우가 협력해서 시리아 폭격을 방지하려고 했던 것은 이례적인 사례다. 지금 극우주의자들이 영향력을 발휘해서 연방정부가 폐쇄되는 사태까지 이르게 됐다. 다음 선거에서는 아마도 이런 극우주의자들의 존재가 가진 힘이 미약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미국은 점점 더 민주주의 모델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은 쇠퇴하는 제국이다. 그리고 군사적인 긴장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자면, 지금 제일 긴장된 곳이 센카쿠 열도와 남중국해를 둘러싼 긴장이다. 그쪽에 긴장이 강화되는 바람에 상대적으로 한반도의 긴장이 조금 완화되는 추세다. 거기에다가 지금 북한과 한국, 그리고 북한과 미국이 물밑 접촉을 시도하고 있다. 그것이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시키는 측면이 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정치가들에게 계속 대화를 하라고 압력을 넣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항구적인 평화를 구축하는 데서 강원도민들이 어떤 혜택을 입게 되느냐 하는 문제는 그 전에 강원도민들이 정전 상태로 인해서 어떤 피해를 입고 있는지를 아는 데서 해답이 나올 수 있을 것 같다. 만약에 현재의 정전 협정이 항구적인 평화 체제로 바뀐다면, 정정 협정으로 인해 받고 있던 피해들이 모두 끝난다고 볼 수 있다. 경제는 계속 발전될 것이고, 이산가족은 아무런 제약 없이 상봉할 수 있게 되고, 군사력은 더 이상 증강할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웬 티진 : "위기에는 주기가 있다. 앞으로는 중국이 위기를 맞이할 차례다. 중국이 위기를 맞으면 미국은 중국을 억누르기가 좀 더 쉬울 것이다. 하지만 그런 위기가 아니더라도 미국은 중국을 무너뜨릴 힘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예를 들어, 미국은 남중국해에서 필리핀 해군을 움직여 중국을 자극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중국의 일반 국민들은 왜 중국이 필리핀한테도 꼼짝 못하냐라는 식의 민족주의적인 요구를 하게 된다. 하지만 중국 지도부는 그 배경에 미국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쉽게 움직이지 못한다. 그렇게 되면 결국 중국 국민은 중국 지도부를 불신하게 된다. 미국은 중국 정부를 곤경에 빠뜨릴 수 있는 수단을 여러 가지로 가지고 있다.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중국 하나 정도는 얼마든지 무너뜨릴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안하는 이유가 중국을 무너뜨리고 난 뒤의 결과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중국을 부상하는 제국이라고 하지만, 사실 중국은 부상할 생각도 없다. 미국이 부상하게 놔두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중국은 국제 문제에서 극히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만약에 중국한테 기회가 생긴다면 미중간의 군사적 긴장에 의해서가 아니라, 미국이 스스로 내부에서 큰 실수를 저지르는 경우가 될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는 국가 간에 승자와 패자를 논하는 것이 무의미하다. 그래서 나는 계속 지역 주도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제 국가 간의 경쟁도 의미가 없다. 지역 주도성이 강조돼야 한다. 국가 간의 관계가 너무 복합적인 위기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에, 이제는 지역 주민이 자기 생존권을 스스로 방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누가 대신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최문순 : "남북 간의 갈등도 그렇고, 동북아시아의 갈등도 매우 복합적이다. 3중 4중의 갈등이 진행되고 있다. 우리는 강대국들이 직접 전쟁을 하게 될 가능성은 무척 적다고 본다. 다만 그것이 남북 대리전이 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우리에게는 역사적으로 늘 그래 왔던 경험이 있다. 동북아시아에서 군사적인 긴장이 고조되면 그만큼 국지전, 대리전이 한반도에서 일어날 가능성도 높아진다. 그렇기 때문에, 이럴 때 남북 관계에서 평화가 더 중요해지는 게 아닌가 한다.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역시 평화가 근본이라는 생각이다. 다시 한 번, 멀리서 찾아와 긴 시간 함께 포럼에 참석해주신 분들께 감사 인사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