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mgok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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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정읍 논어 산책에서는 제8 태백(泰伯) 편을 다룬다.
이 편에는 민주국가에 사는 현대인들이 거부감을 가지기에 충분한 구절들이 들어 있다.
이런 구절을 읽음에 있어서는 ‘그것 봐라, 공자야말로 봉건전제주의를 옹호한 고루한 사상가가 아닌가?’라거나 공자를 억지로 변호하려는 옹색한 논리를 펴기보다는 그 시대적 사회적 한계 속에서 공자가 이런 말을 하게 된 그 뜻을 현대 속에서 살펴볼 일이다.
이런 구절을 함께 산책할 정도가 되면 현대 민주주의의 맹점을 파악하여 올바른 정치 및 사회운동을 펴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될 것이라고 본다.
첫 번째 거론하고 싶은 문장이다.
ㅇ 공자 말하기를 “백성을 따라오게 할 수는 있어도 알게 할 수는 없다.”(8-9)
子曰 民可使由之 不可使知之
우민화(愚民化)하여 봉건 전제정치에 따르게 하는 사상이 아닌가 하는 비판을 받을 만한 문장이다.
일단 공자의 시대나 사회를 선반에 올려 놓고 생각해보자.
요즘 현대민주주의국가에서 나타나는 비이성적 때로는 반이성적 ‘팬덤’현상과 ‘낡은 이념이나 정서에 바탕을 두고 혐오와 분노의 편가름 현상’은 어떤가?
에릭 올린 라이트의 ‘리얼 유토피아’에서 말하는 다음 문장도 참조할만 하다.
“현재의 문맥에서 우리는 세 가지 중요한 권력 형태를 구분할 수 있다. 경제적 자원에 대한 통제력에 기초한 ‘경제권력’, 규칙제정에 대한 통제력과 영토에 대한 규칙집행능력에 기초한 ‘국가권력’,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자발적 집합행위를 위해 사람들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에 기초한 ‘사회권력’이 그것이다.
슬로건을 사용해서 말한다면, 사람들에게 일을 하게 만드는 세 가지 방식이 있다. 당신은 그들을 ‘매수’할 수 있다. 당신은 그들을 ‘강제’할 수 있다‘ 당신은 그들을 ’납득‘ 시킬 수 있다. 이것은 각각 경제권력의 행사, 국가권력의 행사, 사회권력의 행사에 상응한다. 그리고 앞으로 보겠지만, 이들은 자본주의, 국가주의, 사회주의의 구분과 밀접히 연결되고 있다“
결국 현대에 있어서도 미래 정치는 강제나 매수가 아닌 ‘납득’에 있는 것이다.
강제나 매수보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납득’하게 하는 것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 아닌가?
다만 공자가 ‘可使由之 不可使知之’로 표현한 것은 지나쳤다고 생각한다.
‘可不可(가불가)’로 표현하기보다 ‘빈이무원난(貧而無怨難) 부이무교이(富而無驕易)’에서 사용한 ‘난이(難易)’ 정도로 말하는 것이 좋았을 것 같다.
실제로 공자는 자로 편 마지막 장에서 ‘가르치지 않은 백성으로 전쟁을 벌이는 것은 백성을 버리는 것이라고 말한다(以不敎民戰 是謂棄之)’고 말하고 있다.
두 번째 거론하고 싶은 문장이다.
ㅇ 공자 말하기를, “그 자리에 있지 않으면 그 정사를 논하지 않는다” (8-14)
子曰 不在其位 不謀其政
언론의 자유나 비판 반대를 봉쇄하는 말로 들리기 쉽고, 실제로 과거 역사에서 이 말이 부정적 역할을 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이 말을 현대민주주의에서 검토한다면, 이제 시민(인민, 국민)이 통치의 객체에서 정치의 주체로 실질적 힘을 갖추기 위한 조건을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권리와 책임의 공존’이 아닐까 한다.
주인이 가져야할 덕목이다.
그래서 이 말을 현대에 하고 싶으면 ‘비판이나 반대를 하려면 먼저 자신이 책임 있는 태도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정도가 아닐까?
며칠 전 벗과의 통화 내용이다.
“저는 요즘 ’저항에서 권력으로‘ 라는 말을 합니다”
나는 이 ‘권력’이라는 말이 오해의 소지가 있지만 이제 시민이 통치의 객체에서 진정한 주체로 되어야 한다는 말과 통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지금의 권력 정치와는 '다른' 권력은 어떻게 창출되는가?
이런 점들을 고찰하는 논어 산책이 되면 좋을 것 같다.
3 comments
이무열
첫 번째에서 미래 정치는 납득 보다는 공감, 감응, 공명 이런 말이 선생님 뜻에 더 적절하지 않을까 합니다. ^^
Reply1 d
김재형
논어는 약간의 다시 쓰기 필요합니다.
고전 대부분이 조금 고쳐쓰기하면 감각적인 글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