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7/17

Kang-nam Oh - 내 종교만 진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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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종교만 진리인가?


요즘 책 정리, 서류 정리, 통신문 정리 등을 하고 있는데, 옛날에 써서 학회에서 발표했거나 잡지에 실렸던 영어 논문이 여럿 발견되었습니다. 그 중 일반인들이 관심이 있어할 것 몇 가지를 한국어로 요약해서 페북에 올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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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부처님 오시는 날 조계사 앞에서 소란을 피운 일부 개신교인들을 보면서 오늘은 1983년 캐나다 종교학회에 제출했던 <Some Analogical Models for Religious Pluralism>(종교 다원주의를 위한 몇 가지 유비적 모델)이라는 논문의 요지를 올리고자 합니다.  

사실 요즘은 종교 다원주의라는 말이 곡해되기 쉬워 별로 쓰지 않고, 상호성(mutuality), 수납성(acceptance)이라는 말을 씁니다만, 편리를 위해 다원주의, 다원성이라는 말을 그대로 쓰겠습니다. 곡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I. 서론

 오늘날의 문화적 특성 중 하나는 종교 다원주의라 할 수 있다.  이제 종교 개혁 시대에 통용된 “cujus regio, ejus religio”(누구가 지배하느냐에 따라 그의 종교가 결정된다)고 하는 것이 통용되지 않는다.(종교 개혁 시대에는 영주가 가톨릭이면 거기 사는 모든 사람이 가톨릭 교인이고, 영주가 개신교면 거기 사는 모든 사람들이 개신교인이 되는 것을 두고 한 말)  우리 주위에는 여러 종류의 신앙을 가진 여러 종류의 사람들로 가득하다.
이와 같은 다종교 현상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않는 사람들의 반응은 일반적으로 배타주의로 표출되기 일수다.  캐나다 학자로서 하버드 대학교 세계종교연구소 소장을 지낸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 교수는 이런 배타적 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대부분의 종교 제도는 외부인들에게는 어리석거나 심지어 괴상하게 여겨지지 않는다면 적어도 기이하게 여겨지기 마련이다....그러나 이제 이런 무지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1979)
          이제 많은 사상가들이나 종교학자들은 이런 배타적 태도, 혹은 존 힉이 말하듯 우주가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믿었던 천동설의 “프톨레마이오스 식 시각(Ptolemaic perspective)”처럼 모든 종교가 내 종교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식의 믿음은 오늘처럼 다문화적이고 다종교적인 세상에서는 바람직하지도 않고 지탱할 수도 없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예를 들어 영국의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는 
         “오늘날 살아있는 사람 중에 어느 한 종교가 다른 모든 종교보다 더 위대하다고 확언할 수 있을 정도로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There is no one alive today who knows enough to say with confidence whether one religion is greater than all others.)고 했다.  “내 종교가 유일한 진리 종교라고 믿는 배타적 마음은 죄된 마음 상태로 그 죄란 바로 교만의 죄다.”고 했다.(1957)
          자기 종교가 진리의 전매권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것은 아직까지 실질적으로(de facto) 널리 퍼져 있지만, 그것은 법적으로(de jure) 무지하고, 나이브하고, 미숙하고, 자기 중심적이고, 오만하고 심지어 위험하기까지 한 것이다.  올더스 헉슬리는 “다른 모든 형태의 제국주의와 마찬가지로 신학적 제국주의도 영구적 세계 평화에 위협이 된다.”(Like any other forms of imperialism, theological imperialism is a menace to permanent world peace.)고 했다.(1944)
          현세의 다원주의적 성격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이런 상황에서 요구되는 새로운 시각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메르치아 엘리아데가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밝히고 있다.
          “실로 우리는 이미 전지구적(planetary) 문화에 접근하고 있고, 머지않아 아무리 국지주의적인(provincial) 역사가나 철학자나 신학자라 하더라도 다른 대륙 출신의 동료들이나 다른 종교 신도들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문제를 생각하고 자신의 신념을 형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1966) 
          필자는 이 페이퍼에서 종교적 다원주의를 위해 학습효과를 위한 방편(heuristic device)의 일환으로 몇 가지 유비적 모델을 제시하고 검토해 보고자 한다.  이 모델들은 각기 다른 종교들이 가지고 있는 상반된 진리주장(truth-claims)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서로 병립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려는 목적에서 제시해 보려는 것이다.  이중 몇 가지는 고전적 내지 일반적인 것이고 몇 가지지는 요즘 것이나 필자 자신의 것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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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종교만 진리냐?(2)

지난 번 다종교 현상을 이해하기 위한 비유들을 열거하기 전에 서론적으로 다종교 현상 이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종교학자들이나 역사학자들의 이론을 소개했습니다.  지금부터 종교간의 이해와 협력을 촉진시킬 수 있는 비유들을 하나하나 검토해볼 계획입니다. 
처음부터 밝히는 것은 이런 비유들이 모든 종교적 배타주의의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는 무결의 열쇠들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런 비유들은 지구를 중심으로 해와 달 등이 돌아간다는 천동설처럼 내 종교를 중심으로 다른 종교들이 돌아간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태양을 중심으로 행성이 돌아간다는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의 시각(Copernican perspective), 모든 종교는 진리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일깨우는데 도움이 되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제시해 보는 것이다.  모든 비유는 사실과 모든 점에서 완벽하게 들어맞는 것이 아니다.  이를 좀 어려운 말로 하면 tertium comparationis, 비유에는 커버되지 않는 사각 지대가 있다는 뜻이다.  다음에 열거하는 비유들을 살피면서 이를 염두에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II. 유비적 모델들  
1.  길(Paths)
종교다원주의에 가장 많이 쓰이는 비유 모델은 “길”이라는 비유다.  모든 주요 종교들은 모두 산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각이한 길들이라는 것이다.  비록 출발점과 과정을 다르지만 모두 산꼭대기에서 만나는 것이니 길이 다르다고 서로 다투지 말라는 뜻이다.
이 비유는 주로 힌두교 사상가들이 많이 사용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힌두교 성자 라마크리슈나(Ramakrishna, 1834-1886)를 들 수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은 각이한 신도들이나 시대나 국가에 알맞게 여러 가지 종교를 마련해 주었다.  모든 교설들은 오로지 각기 다른 여러 가지 길일 뿐이다.  어느 한 가지 길 자체는 결코 신일 수 없다. 실로 누구든 어느 한 길을 마음을 다한 헌신으로 따르면 그는 신에 이를 수 있다. 아이싱을 입힌 케이크를 위에서 먹든 옆에서 먹든 다 같이 단맛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다투지 말라.  그대가 그대 자신의 믿음과 의견에 확고하게 서있듯 다른 사람들도 역시 그들의 믿음과 의견에 서있을 수 있는 자유를 허하라.”
 이 말을 인용한 종교학계의 거장 휴스턴 스미스는 “종교들이 신학이나 의전이나 교회조직 같은 산기슭에 머물러 있는 한 그들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종교들이 신도들을 산꼭대기를 향해 인도하는 역할을 하는 한 그들은 모두 수납가능한 것이다.  종교들 간의 다름은 비통해 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다양한 인류의 종교적 모험에 공헌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산을 오르는 것인데, 다른 사람들을 자기들의 길로 데려오려고 산 아래만 빙글빙글 돌아다니고 있는 사람들은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아니다.”
이 비유는 많이 인용되기는 하지만 완벽하지는 않다.  우선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종교가 산꼭대기를 향하고 있다고 전제하는 것은 무리라는 것이다.  어떤 종교는 산꼭대기에 올라가는 것을 자기들의 종교적 목표로 삼고 있을 수 있지만, 어떤 종교는 오히려 강가나 바다가, 혹은 넓은 들을 달리거나 숲 속을 거닐며 즐기는 것이 자기들의 종교적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라 여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비유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으로 그 유명한 토마스 머튼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종교의 다른 방식을 존경하라는 근본 취지는 이해할 수 있다.  

2. 색깔(Colors)

내 종교만 진리라는 생각을 벗어나게 도와줄 수 있는 두 번째 비유로 여러 다른 종교들은 다른 색깔들이라는 비유가 있다.  다른 색깔들은 "무색의 빛이라는 분화되지 않은 빛의 근원(one undiferentiated source of uncolored light)"에서 나온 각각 다른 색깔이라는 뜻이다.  이것 역시 힌두 전통에서 이야기되는 것이지만 근래에 와서 스위스 출신 사상가 프리조프 슈온(Frithjof Schuon, 1907-1998)에 의해 더욱 정교하게 다듬어졌다.  슈온은 궁극실재로서의 분화되지 않은 무색의 빛이 문화적, 역사적, 사회적인 프리즘을 통과하면서 여러 가지 색깔로 분화되어 나왔는데, 이것이 바로 개별 종교라고 하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각각 다른 종교지만 각각의 색깔들은 “모든 형식, 모든 상징, 모든 종교, 모든 교설” 등의 바탕이 되는 무색의 ‘신비스러운 근원(numinous source)’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는 역할을 하는 한 모두 인류에게 공헌하는 것이라 본다.
 슈온은 종교들을 현교적 종교(顯敎, exoteric religion)와 밀교적 종교(密敎, esoteric religion)로 구분한다.  종교들은 현교적 차원에서는 빨강, 초록, 노랑 등 모두 다 다른데, 이런 다름을 억지로 하나로 만들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했다.  반면  밀교적 차원에서는 여러 종교들이 다양한 색깔들처럼 무색의 빛의 근원으로 인도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고 본다.  그런 일치를 그는 “초월적 일치(transcendent unity)”라고 했다.
종교들이 각각 다른 길이라는 비유와 각각 다른 색깔이라고 하는 비유는 이른바 종교적 평행주의(parallelism)의 입장이라 볼 수 있다.  각 종교는 제 갈길을 가거나 제 나름대로의 색깔을 띄고 있으니,  남의 종교에 간여하지도 말고 개종시키려 하지도 말라는 것이다.  오로지 더  좋은 그리스도인, 더 좋은 불교인, 더 좋은 힌두교인이 되라고 하는 셈이다.
이 두 가지 비유는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한 가지 중요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이 비유들은 여러 가지 종교 전통들 간의 상호 영향이나 배움 같은 것의 가능성을 부정한다는 점이다.  “모든 길은 그 자체로 충분하다.  이런 길들 중 하나에 들어섰으면 그 길을 따라 갈 것이지 그 길에서 나와 다른 곳을 둘러보는 것은 시간과 정력의 낭비일 뿐이다.”하는 식이다.
신학자 폴 틸리히도 “각자의 종교의 깊이로 꿰뚫고 들어감”을 강조하고 종교 간의 개종을 반대했다는 점에서 평행론자에 가깝지만, 그를 순수한 평행론자라 할 수는 없다.  그는 “not conversion, but dialogue”이라고 하여 개종은 반대했지만 대화를 중요시했기 때문이다. (1964, 95)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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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종교만 진리를 독점하고 있는가? (4)

4. 지도(Maps)

내 종교만 유일한 진리라고 주장하는 독선에서 벗어나 종교 간의 대화와 협력의 방향으로 나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비유 네 번째로 들고 싶은 것은 “지도”다.  여러 가지 종교는 여러 가지 문화적 사회적 맥락에서 만들어진 다양한 지도들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 비유에 의하면 여러 가지 지도가 거리의 단위라든가 지정학적 구별을 위한 국가들의 색깔이라든가 학교나 교회, 사찰, 온천 등을 표시를 하는 지도 제작법의 차이로 인해 다 다르지만 그것들이 사람들에게 목적지로 가는데 도움을 주는 한 모두 수납 가능하다는 뜻이다.
물론 지도를 제작하는 사람들은 지형지물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엉터리 지도 제작자가 만든 지도는 사람들을 엉뚱한 곳으로 잘못 인도할 수 있다.  따라서 지도 제작자가 올바른 지도를 만들었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증명될 필요가 있다.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그들이 의도한 목적지로 인도하는데 어느 정도 성공했고 지금도 성공하고 있는 지도인데도, 그것이 우리가 우리 식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하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조건 배척하는 것은 곤란하다.  오히려 각각의 지도를 가지고 서로 대화하고 연구해서 각자의 지도에서 빠진 것,  있을 수 있는 잘못을 수정, 보완하고, 보다 정확하고 일목요연하게 이해하기 쉬운 지도를 만드는데 함께 힘쓰는 것이 더 중요하다.

5. 손가락(Fingers)

종교 다원주의를 위한 “손가락” 비유는 선불교(禪佛敎)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  선불교에서는 종교에서 가르치는 교설이나 상징이나 의식(儀式)이나 형식 등 모든 것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標月指)”이라 한다.  손가락은 우리의 시선을 달로 향하게 하여 우리가 달을 보는 기쁨을 누리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다.  손가락 자체가 우리의 시선을 독점해서 우리가 손가락만 보고 달을 보지 못하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산통이다. 달을 본다는 목적에서 떠나 손가락의 길이나  굵기나 색깔이나 거기 난 털의 숫자 같은 것에 대해 얼마나 많이, 그리고 얼마나 정확히 알고 있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처럼 종교도 우리가 궁극 의미를 체험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가장 중요한 기능이다.  이런 최종의 목적을 떠난 교리 논쟁이나 진리 주장은 의미가 없다.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다고 보기도 한다.  예를 들어 부처님이나 조사(祖師)들이라도 우리의 주목과 헌신을 모두 앗아가 우리가 달을 보도록 하는데 걸림돌이 된다면 그런 부처, 그런 조사는 구도의 길에서 만나면 죽여버리라고 한다.  이른바 “살불살조(殺佛殺祖)”라는 것이다. 
선불교에서 물론 달을 본다고 하는 것은 깨침의 경험, 궁극실재에 대한 직관과 통찰을 갖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이런 경지에 이르게 되면 손가락 가지고 논쟁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물론 아직 달을 보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손가락이 달을 보도록 올바른 방향으로 가리키는가, 혹은 연못이나 호수에 비친 달을 가리키고 있는가 서로 대화하고 서로 배워야 할 것이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중국 고전 장자(莊子)에도 나온다.  이른바 “득어망전(得魚忘筌)”이다.  물고기를 잡았으면 물고기 잡는 틀은 잊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처럼 득의망언(得意忘言), 곧 본뜻을 알아차렸으면 말은 잊어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의 궁극 목표가 정해지고 거기에 합의하였으면 각자 그 목표를 향한 수단은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고, 쓸데없는 논쟁으로 누가 더 잘났다고 떠들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궁극 진리는 말 너머에 있는 것이다.  도덕경(道德經)에 나오는 가르침처럼,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知者不言 言者不知)”(56장)
며칠 전에 “낮에 나온 반달”을 보았다.  진짜 달을 볼 수 있었으면....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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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 종교를 어떻게 볼 것인가?(5)

6. 약(Medicines)

종교 간이 대화와 협력을 증진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비유 그 여섯 번째는 종교를 “약”으로 보는 것이다. 종교를 약으로 비유하는 것은 종교사에서 오랜 전통이다. 영어로 구원이라는 말이 “salvation”인데, 이 말은 어원적으로 완전하게 됨, 건강하게 됨(becoming whole or healthy)이다. 여러 가지 종교들은 여러 가지 영적 증상에 대한 각기 다른 약처방(prescriptions)이라 보는 것이다.
이 비유는 불교에서 강조하고 있다. 부처님을 용한 의원이라 보는 것이다. 부처님은 모든 병에 한 가지 약만 처방하는 ‘돌팔이 의사(quack)’가 아니라 아픈 사람람들에 대한 정확한 진단의 결과를 토대로 약을 처방하는 의원이라는 것이다. 이른바 “웅변이야”이다. 용수(龍樹)에 의하면 “부처님은 상황이 요구하는 데 따라서 아트만(self, substance)을 긍정하기도 하고 부정하기도 했고, 긍정과 부정을 동시에 하기도 하고, 둘을 다를 부정하기도 했다.”(Murti, 247)
이 비유는 왜 이렇게 많은 종교가 있는가, 심지어 한 종교 안에서도 다른 가르침들이 있는가 하는 것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저명한 종교학자 휴스턴 스미스 교수에 의하면 “종교가 모든 사람들의 필요에 부응해야 하기 때문에 비록 같은 전통 안에서도 거의 무한한 다양성으로 퍼져 나가는 것 이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다.”(H. Smith, 1958, 3)
이 비유를 적용하면 종교 전통들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은 우주와 우리들의 삶에 대해 깔끔하고 논리적으로 일관성 있는 사상체계를 세우는데 관심이 있은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구체적인 영적 질병들을 고치는 데 적합한 여러 가지 약을 처방하는데 관심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세상에 여러 가지 병이 있는 한 여러 가지 처방이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어느 한 처방전만이 절대적으로 옳고 나머지는 모두 틀렸다고 하는 생각은 있을 수 없다.

7. 음식(Foods)/식당(Restaurants)
각각 다른 종교들은 각각 다른 음식을 제공하는 식당에 비유될 수 있다. 라틴어 속담에 “De gustabus non est disputandum”이란 것이 있다. 입맛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어느 한 식당이 모든 음식에 대해 혼자 전매특허를 받았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그 식당에서 전문으로 하는 음식과 손님들의 입맛이 잘 맞아야 하는데, 손님의 입맛은 대체적으로 비슷하기는 하지만 다 같을 수는 없다. 한 식당이 모든 손님의 입맛을 만족시킬 수 없다.
좀 더 좁혀서 같은 식당이라 하더라도 손님들의 입맛이 각각 다르므로 어느 한 가지 음식이 맛있는 음식이다, 제일 좋은 음식이다 단정적으로 말하면 곤란하다. Gina Cerminara 라는 분은 이런 비유를 소개한다.
큰 뷔페 식당이 있다고 하자. 50가지나 60가지 각각의 음식이 진열되어 있다. 손님들이 줄을 서서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을 골라 접시에 담았다. 각각 다른 이유로 다른 음식을 골랐다. 손님들의 접시에 담긴 음식을 보면 똑 같은 경우는 드믈다. 그런데 그 누구도 “나만 옳은 음식을 골랐다. 당신은 가서 내가 골라 담은 것과 같은 것으로 골라 담으라.”고 소리치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날 종교 상황을 보면 많은 사람이 자기가 선택한 종교만 유일하게 옳은 종교요 남의 종교는 그릇되다고 주장하는 실정이다.
이 비유는 종교적 배타주의가 비합리적일 뿐 아니라 남에게 성가신 일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자격 있는 요리사가 준비한 음식이 맛도 좋고 영양학적으로도 적절하다면 각자 자기의 성향과 필요에 따라 선택하면 되는 것이지 어느 한 가지를 남에게 강요하면 곤란하다. 물론 분명히 영업적 이익만 생각하고 건강을 해치는 음식을 파는 식당이라는 것이 판명된 경우라면 그런 식당의 음식은 피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스스로도 음식에 대한 기본 지식을 갖출 필요가 있다.
8. 언어(Languages)
서로 다른 종교들은 서로 다른 언어들과 같다고 보는 견해다. 이 세상에 절대적으로 올바르고 참된 언어는 없다. 모든 언어들은 특정 사람들이 저들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할 능력이 있다. 모두가 다른 언어들보다 모국어를 더 친숙하게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사용하는 언어는 유일하게 올바르고 진실된 언어이고 다른 모든 언어는 올바르지 못하다고 주장하는 배타주의적 입장을 취할 수는 없다. 심지어 외국어를 배워 사용할 수도 있다. 무슨 언어를 사용하든지 그 언어가 표현하려 하는 깊은 뜻을 알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독일의 거장 괴테가 “하나의 언어만 아는 사람은 아무 언어도 모른다”고 했는데, 종교학의 창시자 맥스 뮐러는 “하나의 종교만 아는 사람은 아무 종교도 모른다”고 했다. 내 모국어, 내 종교를 귀하게 여기지만 내 언어, 내 종교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외국어, 이웃 종교를 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웃 종교를 배척할 것이 아니라 이웃 종교와의 대화가 절실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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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어머니
종교를 어머니에 비유할 수 있다. (아이를 앵버리 시키는 특별한 어머니도 있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내 어머니가 나에게는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어머니다. 그렇다고 모두가 다 내 어머니를 어머니로 모셔라 할 수도 없고, 또 다른 모든 어머니는 무조건적으로 글렀다고 할 수도 없다. 내 종교가 나에게는 최고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모두 내 종교로 들어오라고 할 수도 없고 이웃 종교는 무조건 안 된다는 주장도 불가능하다.

나가면서
진리냐 아니냐를 판가름하는 잣대가 내 것이면 진리, 네 것이면 무조건 엉터리라 하던 종래까지의 관행은 이제 지각 있는 사람들에게 배척당하고 있다. 내 것, 네 것 구분하는 대신 인류의 보편적 행복과 안녕에 기여하는가 하는 것 등으로 판단해야 할 것이다. 모든 종교는 특별히 사악한 종교가 아닌 이상 모두 현재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함께 일하는 동역자들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학교 종교학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