創価学会
八葉蓮華 | |
名の由来 | 価値創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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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身 | 創価教育学会 |
設立 | 1930年(昭和5年)11月18日 |
設立者 | 牧口常三郎(初代会長) 戸田城聖(初代理事長) |
種類 | 宗教法人 |
法人番号 | 4011105000632 |
目的 | 日蓮大聖人の仏法の本義に基づき、弘教および儀式行事を行ない、会員の信心の深化、確立をはかることにより、各人が人間革命を成就するとともに、日蓮大聖人の仏法を世界に広宣流布し、もってそれを基調とする世界平和の実現および人類文化の向上に貢献すること[SG 1] |
本部 | 日本 〒160-8583 東京都新宿区信濃町32-4 広宣流布大誓堂 北緯35度40分52.85秒 東経139度43分14.47秒座標: 北緯35度40分52.85秒 東経139度43分14.47秒 |
貢献地域 | 日本 |
会員数 | 827万世帯(公称) |
公用語 | 日本語 |
会長 | 名誉会長:池田大作 会長:原田稔 理事長・宗教法人創価学会代表役員:長谷川重夫 |
関連組織 | #関連する企業、団体を参照 |
ウェブサイト | 創価学会公式サイト (日本語) |
創価学会(そうかがっかい、英語: Soka Gakkai)は、日本の宗教団体(宗教法人)。日蓮大聖人の仏法を信仰する法華経系の在家仏教団体[1] 。
1930年(昭和5年)11月18日、創価教育学会として創立。国内に公称827万世帯の会員(信者)を擁する。創価学会では、信者を「学会員」と称する。
「創価」とは、「生命の尊厳に基づく人類の幸福と世界平和の実現を中心とした価値の創造」を意味する[SG 2]。
『聖教新聞』(日刊紙)、『創価新報』(月刊紙)、『大白蓮華』(月刊誌)などの機関紙誌を発行[SG 3]。
1964年(昭和39年)に結党された日本初の宗教政党である公明党の支持母体である[1]。
概要[編集]
1930年(昭和5年)、尋常小学校の校長であった牧口常三郎と、戸田城聖ら当時の教育者などが集い、日蓮の仏法精神に基づく教育者の育成と、雑誌の発行を目的とする「創価教育学会」(初代会長:牧口常三郎、理事長:戸田城聖)を創立した。同年11月18日、『創価教育学体系』第1巻が発刊される。
1937年(昭和12年)に、創価教育学会は日蓮正宗の法華講(信徒組織)の1つとして位置付けられた[2]。この組織が創価学会の前身となる。
第二次世界大戦中の1943年(昭和18年)6月に牧口、戸田を含む幹部が治安維持法違反並びに伊勢神宮に対する不敬罪で特別高等警察に逮捕され、牧口は1944年(昭和19年)11月18日に獄死。1945年(昭和20年)7月3日、出獄した戸田は、組織名を「創価学会」に改称し組織を再建、1952年(昭和27年)、宗教法人の認証を得る。
1951年(昭和26年)5月3日に第2代会長に就任した戸田城聖の下で、75万世帯を目標にした「折伏大行進」という名の大規模な布教活動が行われ、日本国内での創価学会の勢力は急拡大した。しかし、強引な勧誘手法は批判を呼び、社会問題にまで発展した[3][4]。1958年(昭和33年)4月2日に戸田第2代会長が死去した後、1960年(昭和35年)5月3日に池田大作が第3代会長に就任した(現・名誉会長)。その後、次第に日蓮正宗宗門と軋轢が生じ、1991年(平成3年)11月、「教義の逸脱」などを理由に破門される(後述)。
教義的には日蓮を末法時代の本仏と定め、法華経の肝心・南無妙法蓮華経の御本尊を認定して掲げ、「南無妙法蓮華経」の唱題を実践し、「法華経」思想の布教を宣言(広宣流布)し、平和な世界の実現を目標とするとしている[5]。
1962年(昭和37年)には「公明政治連盟」を創設し、2年後の1964年(昭和39年)には日本の政党の要件を満たしている唯一の宗教政党として「公明党」を結成し、日本の政治にも関わっている[6]。
창가학회
여덟잎 연꽃 | |
이름의 유래 | 가치 창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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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자 | 창가교육학회 |
설정 | 1930년 ( 쇼와 5년) 11월 18일 |
설립자 | 마키구치 토모사부로 (초대 회장) 도다 성성 (초대 이사장) |
종류 | 종교법인 |
법인 번호 | 4011105000632 |
목적 | 니치렌 대성 인의 불법의 본의에 근거하여 홍교 및 의식 행사를 실시, 회원의 신심의 심화, 확립을 도모함으로써 각 사람이 인간 혁명을 성취함과 동시에 니치렌 대성인의 불법을 세계 에 광선 유포 이를 바탕으로 세계평화의 실현과 인류문화의 향상에 기여하는 것 [SG 1] |
본부 | 일본 〒 160-8583 도쿄도 신주쿠구 시나노 쵸 32-4 히로시 선포 천대서당 북위 35도 40분 52.85초 동경 139도 43분 14.47초 좌표 : 북위 35도 40분 52.85초 동경 139도 43분 14.47초 |
공헌 지역 | 일본 |
회원수 | 827만 가구(공칭) |
공용어 | 일본어 |
회장 | 명예회장:이케다 다이사쿠 회장:하라다 료 이사장・종교법인 창가학회 대표 임원:하세가와 시게오 |
관련 조직 | # 관련 기업, 단체 참조 |
웹사이트 | 창가학회 공식 사이트 (일본어) |
창가학회 (그렇게 실망, 영어 : Soka Gakkai )는 일본의 종교단체 ( 종교법인 ). 니치렌 대성인 의 불법을 신앙 하는 법화경 계 의 재가불교 단체 [1] .
1930년 ( 쇼와 5년) 11월 18일 , 창가 교육 학회 로서 창립. 국내에 공칭 827만 가구의 회원( 신자 )을 옹호한다. 창가학회에서는 신자를 「학회원」이라고 칭한다.
"창가"는 "생명의 존엄에 기초한 인류의 행복과 세계 평화의 실현을 중심으로 한 가치의 창조"를 의미한다 [ SG 2] .
『성교신문』(일간지), 『창가신보』(월간지), 『대백련화』(월간지) 등의 기관지지 를 발행 [SG 3] .
1964년 (쇼와 39년)에 결당된 일본 최초의 종교 정당인 공명당의 지지 모체이다 [1] .
개요 [ 편집 ]
1930년 (쇼와 5년), 심상초등학교 의 교장 이었던 마키구치 토모 사부로 와 도다성 성등 당시의 교육자 등이 모여 니치렌 의 불법 정신에 기초한 교육자의 육성과 잡지의 발행을 목적 으로 한다 ' 창가교육학회 '(초대회장 : 마키구치 죠사부로, 이사장 : 도다성성)를 창립했다. 같은 해 11월 18일 , '창가 교육학 체계' 제1권이 발간된다.
1937년 (쇼와 12년)에, 창가 교육 학회는 니치렌 마사무네 의 법화강 (신도 조직)의 하나로서 자리매김되었다 [2] . 이 조직이 창가학회의 전신이 된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3년 (쇼와 18년) 6월에 마키구치, 도다를 포함한 간부가 치안 유지법 위반 및 이세진구에 대한 불경죄로 특별 고등 경찰 에 체포 되어 목 구는 1944 년 ( 쇼와 19년) ) 11월 18일 에 옥사. 1945년 (쇼와 20년) 7월 3일 , 출옥한 도다는, 조직명을 「창가학회」로 개칭해 조직을 재건, 1952년(쇼와 27년), 종교법인의 인증 을 얻는다 .
1951년 (쇼와 26년) 5월 3일 에 제2대 회장에 취임한 도다성 성 아래, 75만 세대를 목표로 한 「절복대 행진 」 이라는 이름의 대규모 포교 활동이 행해져, 일본 국내에서의 창가학회의 세력은 급증했다. 그러나 강한 권유 수법은 비판을 불러 사회 문제 로까지 발전했다 [3] [4] . 1958년 (쇼와 33년) 4월 2일에 도다 제2대 회장이 사망한 후, 1960년(쇼와 35년) 5월 3일에 이케다 다이사쿠가 제3대 회장에 취임했다(현 · 명예 회장 ) . 그 후, 점차 니치렌 마사무네 무네몬과 갈등이 생겨, 1991년 (헤세이 3년) 11월, 「교리의 일탈」등을 이유로 파문 된다( 후술 ).
교리적으로는 니치렌 을 말법 시대의 본불 이라고 정해, 법화경의 핵심·남무묘법련화경의 어본존을 인정해 내어, 「남무묘법련 화경 」 의 창제 를 실천해 , 「법화경」사상의 포교를 선언( 광선류포 )하고 평화 로운 세계 의 실현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한다 [5] .
1962년 (쇼와 37년)에는 「공명 정치 연맹」을 창설해, 2년 후인 1964년(쇼와 39년)에는 일본의 정당의 요건을 충족하고 있는 유일한 종교 정당 으로서 「 공 명당」을 결성 그리고 일본의 정치 에도 관여하고 있다 [6] .
교세 [ 편집 ]
일본에 있어서의 창가학회 공칭의 회원가구수는 약 827만 세대, 일본국외에서는 280만명, 교학부원수가 260만명으로 되어 있다[7 ] .
추정 회원수는 자료에 따라 차이가 있다.
- 약 250만명(1980년・무라카미 시게요시 ) [8]
- 약 500만 명 (1988년・누마타 케냐 ) [9]
- 약 1,200만명(1995년· 요나모토 와히로 ) [10]
- 약 542만명(1995년·문화청 통계로부터 추정)
- 약 576만명(2000년·문화청 통계로부터 추정) [다른 1]
- 약 2,000만명(2006년· 시마다 유토 ) [11]
- 약 250만 가구(2007년·시마다 유미) [12]
- 약 280만명(2017년, 시마다 유토미가 오사카 상업대학 조사에서 추정) [13]
- 약 380만명, 일본 국민의 약 3%(2019년· 시마엔진 ) [14] [15] [16] .
일본 국외로의 포교 활동 [ 편집 ]
1960년 (쇼와 35년), 창가학회로서 일본국외 최초가 되는 「미국 총지부」가 결성되었다. '미국창가학회 <SGI=USA>의 55년'에서는 당시에는 그 구성원의 대부분이 미군 병사와 결혼하여 미국으로 이주한 일본계 미국인 여성의 '전쟁 신부 ' 였다고 지적 되고 있다 [17] . 1960년대 이후 일본으로부터 의 이민 ( 일계인 )이 중심이 되어 각국의 지부가 결성되어 간다. 1975년 (쇼와 50년) 1월 26일 에 미국 괌섬 에 51개국 대표가 모여 창가학회 인터내셔널 (SGI)이 결성되었다.
1975년(쇼와 50년)의 SGI 설립시에는 일본 국외 전체로 회원수는 150만명이었지만, 2021년 11월 현재는 종교의 포교 활동이 엄격히 규제되고 있는 사회주의 국 의 중국 , 북 조선 과 중동 국가의 이슬람교권을 제외한 일본을 포함한 세계 192개국·지역에 퍼져 일본외 전체에서 약 280만명의 SGI 멤버(유럽: 16.2만명, 중근동 · 아프리카 : 5.1 만명 , 아시아 · 오세아니아 : 191만명, 북아메리카 : 35.2만명, 라틴 아메리카 : 32.5만명)을 보유하고 있다 [SG 4] [SG 5] .
교리 관련 [ 편집 ]
교리·목적 [ 편집 ]
- 니치렌 대성인을 말법의 어본불이라고 부르고, 근본의 법인 남무묘법 렌화경을 구현된 3대 비법을 믿고, 어본존에 자행화 외에 걸치는 주제를 외치고, 어서 근본 에 , 각인 이 인간혁명을 성취하고 니치렌 대성인의 유명인 세계 광선류포를 실현하는 것을 대원으로 한다. (창가학회 회헌 제2조 [18] ·회칙 제2조보다 [19] )자세한 것은 「광선류 천#창가학회」를 참조
- 초대 회장 마키구치 토모 사부로 선생님, 제2대 회장 토다성 세이 선생님, 제3대 회장 이케다 다이사쿠 선생님의 「삼대 회장」은, 광선류포 실현에의 사신 홍법의 체현자이며, 이 회의 광선류포의 영원 의 스승이다. 「삼대 회장」의 경칭은, 「선생님」이라고 한다. (창가학회 회헌 제3조 2항 [18] ·회칙 제3조 2항보다 [19] )
- 니치렌 대성인의 불법의 본의에 따라 홍교 및 의식 행사를 실시하고 회원의 신심의 심화, 확립을 도모함으로써 각 사람이 인간 혁명을 성취함과 동시에 니치렌 대성인의 불법을 세계에 광선유포 이를 바탕으로 세계평화의 실현과 인류문화의 향상에 공헌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창가학회 회헌 제4조 [18] ·회칙 제4조보다 [19] )
성전 [ 편집 ]
법화경 을 최고의 경전으로 한 천대지치 의 5 시 8교설과 니치렌이 설한 수량 문저하종 불법·삼대비법을 기초로 하고 있다.
- " 연꽃 많이 "(제2의 편의상품, 열여섯번째 여래수명상품)
- 『신편일련 대성인어서 전집 창가학회판』(성교신문사, 1952년 - 2021년) - ※2021년의 「신판」 발간에 따라 폐간.
- 『닛렌 대성인 어서 전집 신판 창가학회판』(성교 신문사, 2021년)
근행·창제 [ 편집 ]
아침 저녁, 오모토존 으로 향해, 호카케이 의 「방편품 제2」와 「여래 수량품 제16」을 독경하는 일 [20] 을 「근행」이라고 한다.
「남무묘법 연화경 ( 난 미호 시금치 교우)」(※「나무미 시금류 교회」는 아니다)라는 제목을 주장하는 행위. '근행' 이후 수시로 '제목'을 주창한다. 이것을 ' 창제 '라고 한다.
시간이 걸리지 않는 경우 등에는 「근행」을 실시하지 않고, 「제목」만이라도 좋다고 한다 [21] . 「남무묘법 연꽃경」이란 「법화경에 귀의한다」의 뜻이며, 「제목」은 경전의 표제를 주창하는 것에 유래 한다 .
혼존·본불 [ 편집 ]
- 신앙의 대상인 본존 은 일련이 드러난 법화경의 핵심인 ' 남무묘법련 화경'의 문자 만다라이다.
- 니치렌 마사무네 로부터의 파문에 수반해 종문보다 미가타 기모토손의 밑받침이 정지되었기 때문에, 1993년(헤세이 5년) 이후는 니치렌 마사무네 제26세 법주·일관이 1720 년 ( 우호 5 년 ) 에 서사한 혼존(淨圓寺蔵)을 복사 인쇄하여 「고가타키 어혼존」으로 수여하고 있다 [SG 6] .
- 여러 사정으로 집에 불단을 안치할 수 없는 경우에는 '부적 미모토존'이라 불리는 소형 미모토존을 수여한다. 일관서사의 본존을 복사 인쇄한 것이다.
- 「본문 계단의 오오모토존」에 대해서는 2002년 (헤세이 14년)의 회칙 개정에 의해 표기가 변경되었다. 게다가 2014년 (헤세이 26년)의 회칙 개정에 의해, 「홍안 2년( 1279년 )의 본문 계단의 오오모토존은 수지의 대상으로는 하지 않는다」라고 성교 신문 상에서 공식 발표되었다. 덧붙여 「홍안 2년의 본문 계단의 오오모토존」은 니치렌 마사무네 총본산 오이시지에 안치되고 있지만, 최근 , 이 혼존 은 니치렌이 직접 조립한 것이 아니라, 니치렌이 히로야스 3년(1280년) 에 닛코의 제자 히젠에게 수여한 본존을 모사한 것이라는 설이 나와 있다[ 22] . 니치렌 마사무네는 역대법주에 의한 서사본존은 ‘계단의 오오모토존’을 서사한 것으로 주장하고 있지만 오오오본존이 후세에 건립된 경우에는 그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 23] .
- 「비법 지불」에 대해서는, 창가 학회는 신입회 희망자에 대해서,
- 입회 희망자 자신이, 과거의 신앙 대상의 처분·반납을 실시하는 것.
- 본인이 승낙해도, 타인이 돕거나 맡기고 가지고 돌아가지 않는 것.
- 법법 지불은 입회하는 회원 자신이 스스로 스스로 실시한다.
- 동거 가족이나 소유 관계자의 사전 양해를 얻는 것.
- 를 지도로서 철저히 하고 있다 [SG 7] .자세한 내용은 " 신자 # 창가 학회 "를 참조하십시오.「절복대행진#역사」도 참조
활동 [ 편집 ]
연간 주요 행사 [ 편집 ]
2023년 ( 영화 5년) 시점의 연간 주요 행사는 다음과 같다 [SG 8] .
- 1월 1일, 2일 신년 근행회
- 성인의 날 “ 성인 의 날 ” 기념 근행회
- 2월 16일 “니치렌 대성인 성신의 날” 기념 근행회
- 3월 춘계 그 해안근행법요
- 4월 2일 제2대 회장·도다성 성추선근행회
- 4월 28일 “타치무네의 날” 기념 근행회
- 5월 3일 “창가 학회의 날” 기념 근행회
- 5월 19일 “창가 학회 죠스미 오모토존 기념일” 기념 근행회
- 7월 15일 제정령추선근행법요(8월 15일에 열리는 지역도 있다)
- 8월 15일 세계평화기념전몰자추선근행법요
- 9월 12일 「용의 입의 법난의 날」의 의의를 그린 근행회
- 경로의 날「 경로 의 날」의 기념 근행회
- 9월 추계 그 해안근행법요
- 10월 13일 「니치렌 대성인 입멸의 날」의 의의를 그린 근행회
- 11월 15일 “ 시치고산 ”의 기념 근행회
- 11월 18일 창가 학회 창립 기념일 기념·초대 회장·마키구치 조조로 추선 근행회
신행학 실천 [ 편집 ]
창가학회 공식 사이트에 의하면, 창가학회가 신봉하는 니치렌 대성인의 불법에서는, 기본의 수행으로서 「신」 「행」 「학」(신, 굿, 가쿠)의 3개가 설설되어 있다.
- 「신」- 호화 경의 핵심· 남무묘법 연꽃경의 미모토존을 믿는 마음. 신수라고도 하며, 부처의 가르침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을 가리킨다. 「신」이야말로, 불도 수행의 출발점이며, 귀착점이 된다.
- '행'- 불도 수행의 실천으로 '자행(じょう)'과 '화타(けた)'의 두 가지 면이 있다고 한다. 구체적으로는, 자행이란 근행 (호화경의 독경·창제)이며, 화타란 절복·홍교 즉 포교 활동을 말한다.
조직의 지역 활동 [ 편집 ]
좌담회 는, 「삼대의 회장이 가장 소중히 해 온 전통 행사이며 활동이다」라고 되어 있다[ SG 9] . 테라다 키로는, 1950년대 ~ 1960년대 (쇼와 30년대~쇼와 40년대)의 고도 경제 성장기 , 농촌에서 도시로 많은 노동자가 이주해, 생활과 장래에의 불안을 안은 사람들이, 좌담 모임에 참가하는 가운데 고민을 나눠 ‘커뮤니티’를 구축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학회가 이 좌담회 등의 활동을 통해 회원을 교육하고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 인재를 배출하는 '총체혁명'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고 한다[26 ] . 또 오충방에 의하면, 좌담회는 반이나 지구의 단위로 행해져, 1968년 시점에서, 좌담회의 거점은 일본에 20만개소 이상 있었다고 한다[27 ] .
미국 모어 하우스 대학 의 로렌스 카터 교수는 창가 학회 · SGI의 특징으로 "좌담회"를 들고 있으며, 그러한 모임이 사원이나 교회가 아니라 회원가에서 개최되고 있는 것은 " SGI 가 재가운동인 것이 관련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또한, 사원 등의 장소에서 행하면, 성직자의 권위에 특별한 힘이 머무르는 한편, 서민의 자택에서 모이면, 「자연과 모두가 평상복으로 올 수 있는 대중적, 민주적인 장소에 되기 때문에, 그 점이 "SGI의 기저부에 내장된 평등주의의 표현"이라고 하고 있다 [28] .
「성교 신문」의 구독자의 개척 [ 편집 ]
재무 (헌금) [ 편집 ]
창가학회에서는 연 1회, 히로부 부원을 희망한 회원에게만, 사실상의 헌금의 신청 용지가 회원택에 전해진다. 1970년대 중반 이전에는 재무부원이라 불리며 현재는 히로부부원. 이전에는 연간 3,000엔 정도였지만, 현재는 1구 1만엔으로 되어 있다. 생활보호 수급자 등은 대상이 되지 않았다 [29] [30] .
교학연루 [ 편집 ]
창가학회가 편성하고 성교신문사 가 출판하고 있는 『신편 니치렌 대성인 어전 전집 』 (2021년까지 간행. 현재는 신판으로 전환), 『닛렌 대성인 어서 전집 신판 』(2021년 발간) 기초로, 회원은 교학의 연루를 실시한다. 그 학습자료·텍스트로서 월간기관지 ' 대백련화 '가 이용되며, 회원에게는 '교학시험'의 수험이 장려되고 있다.
니치렌의 평생, 어서, 교학의 기초 학습을 목적으로 한 시험으로서, 「교학부 임용 시험(불법 입문)」이 존재한다. 수험자격은 중학생 이상으로 되어 있고, 회우(비회원)도 대상이 되고 있다. 이 시험에 합격하면, 3급・2급・1급의 교학시험을 수험하는 것이 장려되고 있다.
사회학자인 타마노 카즈시는 창가학회의 「행복하게 하는 시스템」의 하나로서 「교학의 습득」을 들고 있다 [31] .
장례 [ 편집 ]
창가학회에서의 장례 는 일반 불교식 장례와 달리 재가신자인 지역의 의전장을 중심으로 하는 '친장장'의 형태로 집행되고 있는 경우가 많다 .
원칙적으로, 친구 장에의 참렬에서는 향전은 필요 없다고 여겨지고 있지만, 참렬자가 향전을 지참하는 것, 유족이 참렬자가 지참한 향전을 받는 것은 각위의 자유이다. 또 「독경료」「계명료」등이 필요한 타종파와 달리 친구장의 중심자의 의전장은 사례를 일절 받지 않는 것으로 정해져 있다[SG 10 ] .
종교학자 야마오리 테츠오는 "일본의 옛 불교집단이 단순한 장례식 불교가 되고 있다"고 비판되고 있는 가운데, 창가학회의 친구장의 대처는 "재가불교로서 정당한 모습" 이다 이다 [32] .
친구 장의 요금 [ 편집 ]
친구 장을 취급하고 있는 장례식 사나 거주하고 있는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존재한다. 일례로서 도쿄도 의 경우, 친구 장의 기본요금은 대체로 35만엔 정도에서 50만엔 정도이다 [다른 2] [다른 3] . 친구 장을 취급하는 장례식사에 따라서는, 일식으로 기본 요금에 포함되어 있는 케이스와 옵션 요금으로서 별도 요금이 되는 경우가 있다.
자세한 내용은 장례식회사의 확인이 필요하다.
포교 활동 [ 편집 ]
무종교 혹은 창가학회 이외의 종교 를 신앙하는 자에게 창가학회에 개종· 입신 하게 하는 것을 「절복」(샤부부, 샤쿠후쿠)이라고 한다.
1951년 (쇼와 26년)에 도다 회장이 「청년훈」을 발표해, 청년부를 중심으로 「절복대행진」이라고 불리는 대대적인 포교가 행해졌 다 . 포교활동은 회원을 증가시켜 세력이 확대되게 된 반면 그 강인한 수법부터 사회문제 까지 발전했다.
현재의 창가학회에서는, 「불법의 인간주의에 근거해, 자타공의 행복을 목표로, 자신의 신앙 체험이나 불법의 철리를 친구나 지인에게 말해 나가는 것」을 「절복·홍교」라고 정의해 있습니다.
또, 「신앙자로서의 자신의 행동, 생활 방식을 통해, 지역이나 직장에서 우정과 신뢰를 깊게 해, 창가 학회의 이념이나 활동에의 이해를 넓혀 가는 것」도 「절복·홍교」에 해당한다고 여겨지고 있다 [33] .
입회·탈퇴의 수속 [ 편집 ]
사회 공헌 활동 [ 편집 ]
지역 공헌 활동 [ 편집 ]
창가학회에서는 개별 회원 및 단체 레벨 모두에서 이웃과 지역 공헌을 추천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지역 축제와 같은 행사에 협력이 있다 [SG 11] . 창가학회 총본부 및 성교신문사 본사가 있는 신주쿠구 시나노쵸에서는, 동내회의 봉오도리 대회나 방재 이벤트에 회장을 제공하는 등 하고 있다.
또 음악대가 지역 행사에 있어서 연주를 하는 경우도 있다. 지역 공헌의 체험 담집이 과거에 발간되고 있다 [34] .
[THE STRAIT TIMES]에 따르면 싱가포르 창가학회는 오랫동안 싱가포르의 국가행사 '진게이(장예) 퍼레이드'에 참가·출연하고 있다 [35] . 2022년 2월 퍼레이드는 통산 38회째의 참가가 되었다. 이 퍼레이드는 싱가포르에서 새해를 축하하는 가장 중요한 행사 중 하나로 알려져있다 [36] . 싱가포르 창가학회는 이러한 국가행사 출연 외에 의료시설에 대한 물자지원과 장애인 지원 등 다양한 자원봉사활동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 37 ] .
이탈리아 창가학회는 1980년대 부터 환경문제 해결과 핵무기 폐절을 목표로 하는 전시활동( 반핵운동 ), 교육·문화운동을 통해 지역과 사회의 번영과 평화를 위해 노력해 왔다고 한다. 2015년 6월에는 이탈리아 공화국 헌법 제8조에 근거한 특별 합의에 의해 이탈리아 정부에 승인되어 이탈리아의 공식 종교라고 하는 「인테이사」의 승인을 받았다. 이에 따라 학교와 교육기관을 설립할 권리 등이 보장되었다 [38] [39] .
재해시의 구원·부흥 활동 [ 편집 ]
대규모 자연재해 발생 시에는 지역 회관에서 회원·비회원을 불문하고 피해자를 받아들여 구호활동에 종사하고 있다.
종교 전문지의 중외일보는 “ 한신·아와지 대지진에서는 창가 학회의 신속한 구호 활동에 대해 효고현 등 으로부터 감사장이 주어지고, 프랑스 · 호주 · 홍콩 · 싱가포르 등 해외 신문 에서도 활동이 보도된다 "를 보도했다 [40] . 동일본 대지진 시에는 42개의 회관에서 약 5천명을 일시 피난소 로 받아들인 것 외에 의연금을 거출했다 [41] . 대피소는 대개 현지 회원 조직의 책임자와 다른 지역에서 파견된 전종 직원을 중심으로 운영되어 의사와 간호사가 건강 상담 을 실시 했다 . 발재 다음날에는 야마가타현 · 니가타현 등으로부터 지원 물자가 도착하고 있다 [다른 4] . 일부 회관은 행정 의 지정 피난소가 되고 있다 [다른 5] . 또, 창가학회에 의한 도호쿠 재해지에의 구호 활동은, 미국의 CNN 의 블로그에도 다루어졌다[42] . 그리고 동일본 대지진 으로부터의 부흥 에 있어서는, 「마음의 복광(부흥) 프로젝트」를 전개. 그 가운데 음악대(창가 글로리아 취주악단, 시나노 합창단, 창가 르네상스 뱅가드 등)는 「희망의 인연」콘서트를 개최해, 가설 주택의 집회장 등에서 합창이나 취주악, 마칭 등 의 연주회 를 개최 하고 있다 [43] . 덧붙여 나중에 「희망의 인연」콘서트는 구마모토 지진 [44] 이나 서일본 호우 등의 재해지에서도 개최되게 되었다 [45] .
2015년(2015년) 3월에 미야기현 센다이시 에서 개막 된 유엔 방재 세계 회의 와 , 2016년(2016년) 5월에 터키 이스탄불에서 개최 된 세계 인도 서밋( en )에서는, 일련 의 부흥 지원 활동을 보고하고 있다 [다른 6] [다른 7] .
종교학자 테라다 키로는 동일본 대지진 에서 후쿠시마현 하마도리의 창가학회가 어떤 지원을 제공해 왔는지를 검증했다. “창가학회의 지원활동의 가장 큰 특질은 경제적·물질적인 지원 이상으로 피해자에게 적극적으로 사는 의미를 계속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또 “부조리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고난·곤란을 시련으로 되돌아보고, “인생에 승리한다”는 것을 고무하는 커뮤니티로서 창가학회는 기능하고 있다 . '라고 했다 [46] .
난민 지원 활동 [ 편집 ]
외국에서의 대규모 재해나 분쟁의 발생시 각국 대사관이나 유엔난민고등변무관사무소 (UNHCR)에 기부를 하고 있다. 또 창가학회 평화위원회 주최로 난민영화상영회나 강연회 등의 계발활동도 정기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유엔 UNHCR 협회 특별 고문 타키자와 사부로는 이러한 장기적인 창가 학회의 지원에 대해 “창가 학회 회원의 세계 평화에 걸리는 열의와 유엔에 대한 관심과 지원 의욕의 높이가 인상적이었다” 고 한다 . [47]
국제연합 NGO(비정부기구)로서의 활동 [ 편집 ]
창가학회는 국제연합홍보국 등록 NGO( 비정부조직 )이다 [다른 8] . SGI(창가학회 인터내셔널)는 1983년(쇼와 58년)에 국제 연합경제사회이사회 와 의 자문자격을 가진 NGO로 등록되었다 .
1992년(헤세이 4년)에는 창가학회 청년부는 국제 연합 지원 활동의 일환으로 국제 연합 캄보디아 잠정통치기구 (UNTAC)에 협력해 캄보디아 라디오 지원 캠페인 '보이스 에이드'를 전개했다. 내전 후 첫 총선을 다음 봄에 앞두고 있던 캄보디아에서는 식자율이 낮고 모국어를 읽고 쓸 수 없는 국민이 많기 때문에 “정견방송을 듣기 위해 중고 라디오를 주었으면 한다 ” 는 아카시 강 UNTAC 사무총장 특별대표(당시 전 유엔 사무차장)의 호소에 응하는 형태가 되었다 [48] . 창가학회는 전국에서 모은 약 28만대의 중고 라디오를 기증했다 [49] . 선물된 라디오가 투표율의 향상으로 이어져 총선거의 투표율은 약 90%에 달했다 [50] . 이 대처에 대해, 아카시는 「캄보디아의 민주주의의 달성에, 크게 기여했다」[51], 「유엔의 역사 속에서도 특필해야 할 것」[52] 라고 말하고 있다.
SGI 뉴욕 유엔연락소는 2009년(2009년) 유엔의 ' 군축 · 평화 · 안전보장 NGO위원회'에서 의장을 맡았다. SGI 제네바 유엔연락소는 특히 인권교육 의 테마로 활동을 전개. 2005년(헤세이 17년)부터 스타트한 유엔 의 '인권교육을 위한 세계프로그램'은 코스타리카 정부와 SGI가 핵심이 되어 실현되고 있다 . [다른 8 ]
핵무기 폐절을 목표로 하는 대처는, 도다 제2대 회장의 원수폭 금지 선언 이래, 창가 학회에 있어서의 평화 운동의 주축으로 되어 있다. 지금까지, 히로시마현 이나 나가사키 현에서의 의식 조사나, 피폭자 나 전문가의 강연회 등이 정기적으로 행해지고 있다.
핵무기 폐절 국제 캠페인 (ICAN)의 국제 운영 위원으로 NGO 피스 보트 공동 대표인 가와사키 테츠는 SGI가 ICAN에 있어서 창설시부터의 「중심적인 파트너」이며, 「핵무기 폐절을 향해 큰 공헌을 하고 있다 "라고 말했다. [53]
SGI는 기독교 , 이슬람교 , 불교 등 189개의 단체로 이루어진 ‘핵무기를 우려하는 신앙자의 커뮤니티’에 참가하고 있으며, 핵무기 폐절에 관한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있다[54 ] . 2022년 6월 핵무기 금지조약 ·제1회 체약국회의나 2022년 8월 NPT 재검토회의에도 SGI 대표단이 참석하여 관련 행사를 개최.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55] [56] .
창가학회 청년부는 반세기 전부터 제2차 세계대전 체험자들에게 청취조사를 실시하고 증언집 등을 정기적으로 출판하고 있다. 오키나와 국제대학 의 이시하라 마사야 명예 교수는 이런 대처에 대해 "오로지 ' 전쟁 의 비참함'을 추구하면서 꾸준히 ' 평화운동 '을 전개하고 있다"고 한다. [57]
특히 피폭지인 히로시마·나가사키 에서는 '피폭체험을 듣는 모임'을 개최하고, '학생평화의식조사'도 정기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히로시마 평화 기념 자료관 타키가와 타쿠오 관장은 “확실히 핵무기가 없는 세계 실현을 위한 큰 추진력”이라고 말했다. [58]
도서 증정 운동 [ 편집 ]
창가학회의 도서증정운동은 땅이나 낙도를 비롯한 교육 환경이 풍부하지 않은 지역이나 지진 이나 태풍 등 자연재해 피해를 입은 지역 어린이들에게 서적 을 증정하는 것이다. 1974년 (쇼와 49년)에 스타트했다. 2011년 (헤세이 23년) 발생의 동일본 대지진 이후는 특히, 재해지의 학교 에의 기증이 중점적으로 행해지고 있다 [59] [그 외 11] .
호화경의 원전 자료 보전·연구 활동 [ 편집 ]
법화경 원전연구에 기여하는 '호화경사본 시리즈'의 출판활동을 공익재단법인 동양철학연구소 와 협력해 추진하고 있다. 각국에 보존되어 온 귀중한 호화경사본을 선명한 컬러 사진으로 촬영한 '사진판'과 사본의 '독서'를 로마자화한 '로마자판'을 공간하여 세계 연구자들에게 널리 제공 하고 『법화경』을 중심으로 한 초기 대승불교 의 연구에 공헌하기 위한 것 [다른 12] . 2016년(헤세이 28년) 시점에서 16점이 간행되어, 「인도 국립 공문서관 소장 길깃 법화 경사본:사진 판」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 동양 고문서 연구소 소장범 문법화 경사본:사진판」등이 포함된다 [다른 13] .
교육 관련 활동 [ 편집 ]
창가학회 교육본부( 교육 관계의 직업에 종사하는 창가학회원)에서는 1984년부터 교육기술의 향상을 목적으로 각각의 교육현장에서의 도전을 기록하는 「교육실천기록운동」을 실시. 또, 그 공유의 장소로서 「인간 교육 실천 보고 대회」가 개최되고 있다.
전시 활동 [ 편집 ]
창가학회에서는 제단체와 연계하여 전시회가 정기적으로 개최되고 있다. "희망과 행동의 씨앗 - SDGs ( 지속 가능한 개발 목표 )의 실현을 위해"전 [ 60] , "핵무기없는 세계에 연대 - 용기와 희망의 선택"전 [ 61] , "나와 우주 전 ―기적의 지구에 사는―」[62] , 「용기의 증언―홀로코스트전 안네 프랭크와 스기하라 치바의 선택」[63] 등을 들 수 있다. 일본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 각지에서 개최되는 경우도 있다. 2022년에는, 친밀한 음식을 테마로 생명의 연결을 생각하는 「밥과 생명의 스토리전」을 기획·작성했다[64 ] . 3월에 돗토리에서 개최되어 국내를 순회하고 있다 [65] .
SDGs를 위한 활동 [ 편집 ]
창가학회 및 SGI는 SDGs( 지속가능한 개발목표 )의 보급과 목표 달성을 위해 노력도 하고 SDGs 시민사회 네트워크의 참가단체로 등록되어 있다[66 ] .
예를 들면, 전시 활동에 있어서는, 2021년의 COP26( 제26회 기후 변동 틀 조약 체약국 회의 )에 맞추어, 회의의 개최지인 영국・글래스고 시내에서, 환경 전시 「희망과 행동의 씨앗」전( 지구 헌장 인터내셔널과 공동)을 개최했다 [67] . 2023년 6월에는 브라질 아마존 창가 연구소는 지구 헌장 인터내셔널과 제휴 협정을 맺고 있다. [68] 또한 ITTO (국제 열대 목재 기관)와 협력하여 아프리카 토고의 숲 재생에도 종사하고있다 [69] . 또, 창가학회 평화위원회에서는 「SDGs 온라인 시네마 시리즈」라고 제목을 붙인 연속 영화 상영회를 개최하고 있다 [70] . 참가자의 의식 계발과 함께 지속 가능한 사회를 목표로 액션을 일으킬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상영회 이외에 관련 단체의 대표나 학식자와의 토크 세션이 행해지는 경우도 있다. 지금까지 ' 다문화공생 ' ' AI ' ' 난민 ' ' 핵무기 '를 주제로 한 영화를 다루고 있다.
최고 간부 [ 편집 ]
주요 임원 [ 편집 ]
(2023년 1월 1일 시점)
- 명예회장: 이케다 다이사쿠 ( 창가학회 인터내셔널(SGI) 회장 겸임)
- 회장:하라다 稔(SGI 회장 대행겸임)
- 이사장(종교법인 대표 임원): 하세가와 시게오
- 주임 부회장: 이케다 히로마사 (SGI 부회장 겸임), 이시시마 켄지, 오오바 호효(SGI 이사장 겸임), 가나자와 토시오, 타니가와 카키(장년 부장·창가 학원 이사장 겸임) [SG 12], 하기 모토 나오키 ( 총 도쿄 장· 성교 신문사 대표 이사 겸임), 하라다 코지 , 야마모토 타케시(총무 회의장 겸임)
- 역대 회장, 주임 부회장, 부회장, 이사장, 부이사장 직장에 여성이 취임한 적은 없지만 최고지도회의 의원으로 취임한 카시와하라 야스의 예가 있다 .
각 부부장 [ 편집 ]
(2023년 1월 1일 기준) [SG 12]
- 장년부장: 타니가와 카키 (주임 부회장·창가학원 이사장 겸임) [SG 12] [SG 13]
- 여성부(구·부인부)장:나가이시 타카미코
- 이케다 화양 협회 회장: 린 레이코
- 청년부장 : 서방광웅
- 남성장관 : 료시마 히데아키
명예 회장과 역대 회장 [ 편집 ]
역대 회장 중에서도, 초대· 마키구치 토모 사부로, 제2대· 도다 성성, 제3대· 이케다 다이사쿠 의 이른바 “ 삼대 회장 ”은, “광선류포 실현에의 사신 홍법의 체현자이며, 이 회의 영원의 지도자이다”라고 2002년 (헤세이 14년)의 회칙 개정(동년 4월 6일 , 토야마 아츠코 문부 과학 대신이 인증 [비1] ) 때에 정해졌다. 다만, 개인 숭배 처럼 삼대 회장 개인을 본불인 일련과 동등 또는 그 이상으로 숭배하는 것은 인정되지 않는다.
이케다는, 도다성 성의 23회 기사에 해당하는 1980년 4월 2 일자 성교 신문의 지상에서, 쇼와 52년(1977년)의 일련의 지도 중에는 「확실히 창가 학회 중심주의적인 독선성」 하지만 광선류포 때문이라고는 해도 '종문에 대해 주객 전도의 풍조를 낳았다' 등과 반성을 보였다. 게다가 회의 등으로 평소보다 자신을 "범부"라고 말했듯이 조직의 지도자인 역대 회장과 본불은 별개이므로 신격화해서는 안되며, 이케다 개인에 대한 절대시 거기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SG 14] .
또, 회장의 임기는 창립 이래 종신제로 하는 관례였지만, 이케다의 회장 사임에 맞추어 제정된 창가 학회 회칙으로 “1기 5년에 재임을 방해하지 않고, 회장이 임기 도중에 사임, 또는 사망으로 부족한 경우 후임자는 전임자의 잔존임기를 인계하지 않는다”고 규정되었다.
덧붙여 회장 임기는 2015년 (2015년)의 회칙 개정으로 「1기 4년」으로 변경되었다.
역대 회장·명예 회장의 일람 [ 편집 ]
아니요. | 감독 | 취임일 | 퇴임일 | 비고 | |
---|---|---|---|---|---|
명예회장(1979년-) | |||||
1 | 이케다 다이사쿠 (1928년 – ) | 1979년 4월 24일 | (현직) | 회장 사임에 따라 승격. | |
회장(1930년-) | |||||
1 | 마키구치 츠네사부로 (1871~1944) | 1930년 11월 18일 | 1944년 11월 18일 | 창립시의 단체명칭은 「창가교육학회」. 재임중에 사망. | |
- | 공석 | 1944년 11월 18일 | 1951년 5월 3일 | 1946년 3월 에 도다성성에 의해 현재의 「창가학회」로 개칭. | |
2 | 도다성 성 (1900년 – 1958년) | 1951년 5월 3일 | 1958년 4월 2일 | 재임중에 사망. | |
- | 공석 | 1958년 4월 2일 | 1960년 5월 3일 | 이사장의 고이즈미 타카시가 회장 직무 를 대행 | |
삼 | 이케다 다이사쿠 (1928년 – ) | 1960년 5월 3일 | 1979년 4월 24일 | 재임 중에 사임, 명예회장으로 승격. | |
4 | 호조 히로시 (1923~1981) | 1979년 4월 24일 | 1981년 7월 18일 | 이케다 회장의 사임에 따라 승격. 재임 중 사망 | |
5 | 아키타니 에이노스케 (1930년 – ) | 1981년 7월 18일 | 2006년 11월 9일 | 호조 회장의 사망에 따라 승격. 임기 도중에 사임. | |
6 | 하라다 료 (1941년 – ) | 2006년 11월 9일 | (현직) | 아키타니 회장의 사임에 따라 승격. |
역대 회장 중에서 명예 회장이 되고 있는 것은 이케다뿐이며, 임기는 정해져 있지 않다.
조직 [ 편집 ]
조직 체제 [ 편집 ]
창가학회에서는 연령과 거주지, 직업분야 등에서 회원관리를 하고 있다.
각 가구마다 작성된 「회원 카드」에 의해 회원이나 가족의 이동 등을 파악한다.
연령별 조직(2023년 1월 1일 현재) [ 편집 ]
두오바오후이 ()- 65세 이상의 남녀가 소속. 도쿄에서는 ‘보수회’, 간사이에서는 ‘금보회’라고 불린다.인생학과의 전성기 ()- 기본은 40세 이상의 남성이 소속. 왕성회 라는 자원봉사로 회관 경비를 하는 인재그룹이 있다.남자부 ()- 미래부·학생부 이외의 18세 이상에서 40세 미만의 남성이 소속. 인재육성그룹으로서 창가반 , 김성회 , 아성회 , 문화반, 위성그룹, 설영그룹, 철인회(간사이만), 영광회, 창상회, 음악대 등이 있다.여성부 ()- 미래부·학생부 이외의 18세 이상의 여성이 소속. 2021년 5월 3일부로 부인부의 명칭을 변경하고, 같은 해 11월 18일의 창립기념일에 맞추어 여자부와 통합했다 [주 1] [SG 15 ] . 인재그룹으로 향성회, 백련그룹 , 자작나무회, 자작나무그룹(간호사 그룹) 등이 있다.학생부 ()- 남자 대학(원)생・전문학교생으로 구성. 인재그룹 '21세기 신이치회'도 이 중 하나.여학생부 ()- 여자대학(원)생·단대생·전문학생으로 구성. 다만 학생 결혼한 경우는 여성부원이 된다(여자고등부도 마찬가지).미래부 ()- 고등학생 이하를 대상으로 한 조직. 소년소녀부(초등학생), 중등부(남자·여자), 고등부(남자·여자)가 있다.
지역별 [ 편집 ]
위에서 중앙(학회본부)-방면-(소)총현-(분)현-권(지역에 따라서는 없음)-본부-지부-지구-블록이 된다.
「방면」은 이하의 14로 구분되고 있지만, 일반적인 지방의 구분 과 일부 다르다. 이 중, 도쿄, 제2총 도쿄, 관동, 도카이도는 동회에 있어서의 「수도권」이라고 한다(법률상의 수도권에 시즈오카현이 더 해진다 ) .
- 홋카이도
- 도호쿠 ( 아오모리 현 · 이와테현 · 아키타 현 · 야마가타현 · 미야기현 · 후쿠시마현 )
- 도쿄 ( 도쿄도 23구 , 시마쇼베 )
- 제2총 도쿄(도쿄도 다마 지역 · 야마나시 현 )
- 관동 ( 지바현 · 사이타마현 · 이바라키현 · 도치기현 · 군마현 )
- 도카이도 ( 가나가와 현 · 시즈오카현 )
- 신에쓰(니가타 현・나가노현)
- 중부 ( 아이치현・기후현・미에현 )
- 호쿠리쿠 ( 도야마 현 · 이시카와현 )
- 간사이 ( 후쿠이현 · 시가현 · 교토부 · 오사카부 · 효고현 · 나라현 · 와카야마현 )
- 중국 ( 히로시마현 · 오카야마현 · 야마구치현 · 시마네현 · 돗토리현 )
- 시코쿠 ( 가가와현 · 고치현 · 에히메현 · 도쿠시마현 )
- 규슈 ( 후쿠오카 현 · 사가현 · 나가사키현 ·오이타현 · 구마모토현 · 미야자키 현 · 가고시마현 )
- 오키나와 ( 오키나와현 )
분야별 조직 [ 편집 ]
예술부, 문예부, 닥터부, 자작나무 그룹, 교육부·학교 교육부, 유아·가정 교육부, 사회 교육·교육 상담부, 국제 본부 통역·번역부, 국제 자원봉사부, 국제 교류부, 재일 외국 인부 , 사회본부, 사회부 전문부, 지역 본부, 농어광부, 승리섬부·계관회·화관회·성진회·행복성부(구·단지부) 등.
소유하는 시설 [ 편집 ]
보유한 부동산 자산 [ 편집 ]
창가학회 시설은 전국에 약 1,200개소 존재한다. 종교학자 시마다 유토 는 "본부가 있는 신주쿠 구 시나노쵸 의 시설의 부동산 합계는 지가 약 479억2412만9천엔"이라고 시산하고 있다 [71] .
창가학회 총본부 [ 편집 ]
- 광선류포 대서당
- 창가문화센터
- 본부별관
- 본부 제2 별관
- 창가세계여성회관
- 도다 기념 국제 회관
- 창가 이케다 화양 회관(구·창가 여자 회관) [주 2]
- 시나노 평화 회관
- 세계청년회관
- 시나노 문화 회관
- 창가학회 종합안내센터
- 창가학회 세계성교회관( 성교신문사 본사점) [SG 18] [SG 19] [SG 20] [SG 21]
- 창가보광회관 [SG 22]
일본 방면 중심 회관 [ 편집 ]
- 홋카이도 홋카이도 문화 회관( 홋카이도 삿포로시 아쓰베쓰구 )
- 도호쿠 도호쿠 문화 회관( 미야기현 센다이 시 미야기노구 )
- 관동 사이타마 문화 회관( 사이타마 현 사이타마 시 사쿠라구 )
- 도카이도 가나가와 문화 회관(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나카구 )
- 중부 중부 이케다 기념 회관( 아이치현 나고야시 니시구 )
- 신에쓰 니가타 이케다 문화 회관( 니가타 현 니가타시 )
- 호쿠리쿠 이시카와 문화 회관(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 )
- 간사이 간사이 이케다 기념 회관( 오사카부 오사카시 텐노지구 )
- 중국 히로시마 이케다 평화 기념 회관( 히로시마현 히로시마시 히가시구 )
- 시코쿠 시코쿠 이케다 문화 회관( 가가와현 다카마쓰시 )
- 규슈 규슈 이케다 강당( 후쿠오카 현 후쿠오카시 히가시구 )
- 오키나와 오키나와 국제 평화 회관( 오키나와 현 나하시 ) [SG 23]
관련 기업, 단체 [ 편집 ]
기업 [ 편집 ]
- 차오프레스
- 제3문명사회
- 시나노 기획
- 거룩한 종교 통신사
- 공명신문
- 봉서원(서점)
- 東西哲学書院 (서점, 먹을 음, 장난감 판매)
- 히가시히로 ( 광고 대리점 )
- 사쿠라 서비스 ( DM , 포장 )
- 일본 도서 수송(수송)
- 니트 보험( 보험 대리점 )
- 후지 하쿠렌샤( 장례식 ) https://byakurensya.jp/
- 시나노 건물 종합 관리(시설 관리)
- 햇빛 경비 보장 ( 경비 )
- 창조사회(건축설계)
단체 [ 편집 ]
- 종교
- 창가학회 인터내셔널 (SGI)
- 정당
- 교육기관 : 유치원 에서 대학원 까지 일관 교육 시스템이 있습니다. 또 일본 국외에도 관련 교육기관이 있다.
- 연예, 예술
- 연구기관
- 동양 철학 연구소 : 동양 사상, 불교의 학문적 연구를 실시한다.
연혁 [ 편집 ]
전사 [ 편집 ]
1930년대 [ 편집 ]
- 1930년 (쇼와 5년)
- 11월 18일 - 목구의 '창가 교육학 체계' 제1권이 발행된다. 도다는 「도다 성외」를 자칭한다. 창가학회에서는 이날을 창립기념일로 하고 있다. 또 「창가교육학지원회」도 결성되었다 [72] .
- 1937년 (쇼와 12년)
- 1939년 (쇼와 14년)
- 12월 - '창가교육학회' 제1회 총회.
1940년대 [ 편집 ]
- 1940년 (쇼와 15년)
- 1941년 (쇼와 16년)
- 7월 - 기관지 '가치창조' 창간
- 11월 - 창가교육학회 제3회 총회.
- 1942년 (쇼와 17년)
- 1943년 (쇼와 18년)
- 1944년 (쇼와 19년)
- 11월 18일 - 마키구치가 도쿄 구치소 내 에서 사망.
1950년대 [ 편집 ]
- 1951년 (쇼와 26년)
- 1952년 (쇼와 27년)
- 1953년 (쇼와 28년)
- 1954년 (쇼와 29년)
- 3월 - 참모실 설치
- 10월 - 오이시지에 청년부 1만명이 등산해 출진식 [6] .
- 11월 - 문화부 설립
- 12월 - 협상 외부 설치. 부장에게는 이케다가 임명.
- 1955년 (쇼와 30년)
- 1956년 (쇼와 31년)
- 1월 - 도다가 무네몬 64세 법주 미즈타니 히가시 의 은퇴 표명을 숭배해 “선대 마키구치 선생 당시부터 학회는 궁자의 일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는 대정신으로 통과해 왔고, 앞으로도 이 정신으로 일관되다. 이를 깨는 자는 비록 대간부라고 해도 즉각적으로 제명한다 ” 고 담화를 발표 [SG32] . 같은 날의 직철에서는 "(창가학회는 니치렌 마사무네) 법주를 종조대성인으로 삼고 말하는 누군가 법주님이라도 일관 불변, 이 신자의 대정신."이라고 평가했다[SG 33 ] .「일승 # 약력」도 참조
- 7월 - 제4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에 6명의 후보자를 옹립. 오사카 지부장의 시라키 요시이치로 등 3명이 당선.
- 12월 - 법무성 형사국은 “그 신조에 근거한 행동에 폭력적인 동향이 현저하다” “다수의 청년 행동대를 군대의 조직 구분에 준해 편성해, 이 절복의 실천에 맞추고 있다”라고 창가 학회를 신흥 우익 단체로 인정했다 [78] (나중에 인정 해제)
- 1월 - 도다가 무네몬 64세 법주 미즈타니 히가시 의 은퇴 표명을 숭배해 “선대 마키구치 선생 당시부터 학회는 궁자의 일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는 대정신으로 통과해 왔고, 앞으로도 이 정신으로 일관되다. 이를 깨는 자는 비록 대간부라고 해도 즉각적으로 제명한다 ” 고 담화를 발표 [SG32] . 같은 날의 직철에서는 "(창가학회는 니치렌 마사무네) 법주를 종조대성인으로 삼고 말하는 누군가 법주님이라도 일관 불변, 이 신자의 대정신."이라고 평가했다[SG 33 ] .
- 1957년 (쇼와 32년)
- 4월 - 참의원 오사카부 선거구 의 보결선거 에서 일부 회원이 선거 위반을 일으킨다. 회원의 공술로부터 고이즈미 이사장, 이케다 섭외장들과 함께 47명이 체포된다. 재판으로 실행범이 된 말단 회원들이 유죄 판결을 받는 가운데, 수모자로 된 이케다·고이즈미는 무죄 판결을 받는다.자세한 내용은 " 오사카 사건 (창가 학회) "을 참조하십시오.
- 6월 30일 - 학생부 결성 [79] .
- 9월 - 요코하마시·미쓰자와 그라운드에서 도다가 “ 원수폭 금지 선언 ”을 발표.
- 12월 - 본부 간부회에서 75만 가구의 절복 달성을 발표. 또, 도다 회장은 결석했지만, 「영원의 삼지침」을 발표 [SG 34] [주 6] .
- 4월 - 참의원 오사카부 선거구 의 보결선거 에서 일부 회원이 선거 위반을 일으킨다. 회원의 공술로부터 고이즈미 이사장, 이케다 섭외장들과 함께 47명이 체포된다. 재판으로 실행범이 된 말단 회원들이 유죄 판결을 받는 가운데, 수모자로 된 이케다·고이즈미는 무죄 판결을 받는다.
- 1958년 (쇼와 33년)
- 3월 - 니치렌 마사무네의 총본산 오이시지의 대강당 이 완성. 학회에서는 '대강당 낙경기념 총등산'이라고 불렀다. 총 20만여명의 회원이 참가.자세한 내용은 「도다 성성 #대강당 준공과 갑작스런 죽음」을 참조
- 3월 16일 - 「광선류포의 모의시험」이 오이시지 대강당에서 행해져 청년부원 6,000명이 참가, 도다가 광선류포의 일체의 후사를 청년부 전체에 투입했다[SG 35 ] ." 대강당 (오이시지) # 개요 "참조
- 4월 - 1일에 도다가 컨디션을 무너뜨려 스루가 다이 일본 대학 병원 에 긴급 입원 [SG 36] . 이틀에 사망 [SG 37] .
- 5월 - 도다의 49일 법요를 계기로 열린 임시 간부회에서 토다의 7회기까지 후계자가 되는 신회장을 세우지 않기로 결정, 도다 기, 호소이 히타치 만남 아래, 이케다, 이시다, 이즈미, 카시와와라 등이 서약서에 서명 [SG 38] .
- 6월 30일 - 본부 간부회에서 「총무」포스트의 신설이 발표되어 이케다가 취임.
- 3월 - 니치렌 마사무네의 총본산 오이시지의 대강당 이 완성. 학회에서는 '대강당 낙경기념 총등산'이라고 불렀다. 총 20만여명의 회원이 참가.
- 1959년 (쇼와 34년)
- 6월 - 이케다가 청년부 참모 실장을 사임하고 총무직에 전념.
1960년대 [ 편집 ]
- 1960년 (쇼와 35년)
- 5월 3일 - 도다의 몰후 2년(삼회기)을 거쳐 이케다 다이사쿠가 창가학회 제3대 회장으로 취임. 이사장에게 하라시마가 취임.
- 7월 - 창가학회 해외본부를 설치 [SG 39] .
- 1961년 (쇼와 36년)
- 1962년 (쇼와 37년)
- 1963년 (쇼와 38년)
- 10월 - ' 민주음악협회 ' 설립.
- 1964년 (쇼와 39년)
- 1965년 (쇼와 40년)
- 7월 - '성교신문'이 일간화.
- 10월 9일~12일 - 정본당 건립을 위해 4일간의 공양이 이루어져 355억엔이 모인다.자세한 내용은 쇼혼도(오이시지)#개요를 참조
- 1968년 (쇼와 43년)
- 연간 행사로서 본부 총회(5월), 남자부 총회(11월), 여자부 총회(11월), 학생부 총회(7월), 여름 강습회(8월) 등이 개최[82 ]
- 4월 1일 - ' 창가학원 ' 설립.자세한 것은 「학교법인 창가학원」을 참조
- 7월 - 참의원 선거에서 부정투표를 했다고 해서 학회원 34명이 검거된다 [83] .자세한 내용은 「신주쿠 교체 옥 사건」을 참조
- 1969년 (쇼와 44년)
- 12월 2일 - 언론 출판 방해 사건 이 표면화.
1970년대 [ 편집 ]
- 1970년 (쇼와 45년)
- 1월 - 총무회의 결정으로 부회장직을 설치. 아키타니 에이노스케 , 호조 히로시 , 모리타 이치야 의 3명이 취임 [84] . 동시에 공명당 중앙집행위원장 , 서기장이 학회 직무를 떠나는 것도 결정.
- 5월 3일 - 이케다가 「언론 출판 방해 사건」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 창가학회와 공명당을 조직적으로 분리하는 등 조직 개혁을 표명하고 당일 실행.자세한 내용은 「언론 출판 방해 사건 # 이케다 회장의 공식 사과」및 「공명당 # 창가 학회와의 관계, 정교 분리 문제」를 참조
- 일본 공산당 위원장 미야모토 현지의 자택의 전화 에 도청기 를 건다.자세한 내용은 「미야모토 현지 집 도청 사건」을 참조
- 1971년 (쇼와 46년)
- 4월 2일 - ' 창가대학 ' 개학(학부·학과의 연혁은 창가대학 참조).
- 1972년 (쇼와 47년)
- 5월 5일 - 이케다, 아놀드 J. 토인비 와 첫 대담을 실시 [85] .
- 10월 - 본당이 완공됩니다.
- 1973년 (쇼와 48년)
- 1974년 (쇼와 49년)
- 10월 - 묘신강(현재의 후지오이시지 현정회 ) 남자부 약 70명이 창가학회 본부(창가문화회관)를 습격하고, 창가학회의 회관 경비를 하고 있던 아성회 멤버와 난투 소란을 일으킨다 .자세한 내용은 " 이즈미 각 # 창가 학회 본부 습격 사건 "을 참조
- 12월 - 일본공산당 과의 사이에서 향후 10년간의 '상호불간섭', '공존'을 겪은 '창공협정'을 체결[86 ] .자세한 것은 「일본 공산당과 창가 학회와의 합의에 관한 협정」을 참조
- 10월 - 묘신강(현재의 후지오이시지 현정회 ) 남자부 약 70명이 창가학회 본부(창가문화회관)를 습격하고, 창가학회의 회관 경비를 하고 있던 아성회 멤버와 난투 소란을 일으킨다 .
- 1975년 (쇼와 50년)
- 1월 - 괌섬 에서 창가학회의 해외 조직인 ' 창가학회 인터내셔널 '(SGI)이 설립된다. 이케다가 회장으로 취임.
- 1976년 (쇼와 51년)
- 1977년 (쇼와 52년)
- 1월 - 이케다가 제9회 교학부 대회에 있어서 「불교사관을 말한다」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출가도 재가도 동격」이라고 발언. 반학회 파승자로부터의 비판이 강해진다자세한 것은 「#쇼와 52년 노선」을 참조
- 5월 - 민사당 중앙집행위원장 카스 가 이치 유키 로부터 공명당 중앙집행위원장 타케이리 요시카츠 앞으로 국회에서 이케다의 호화전용시설 등에 대해 조사하고, 질문하는 취지를 알리는 편지가 도착한다 [77] .
- 7월 - 이케다가 오이시지에의 참배를 일시적으로 금지된다 [87] .
- 1월 - 이케다가 제9회 교학부 대회에 있어서 「불교사관을 말한다」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출가도 재가도 동격」이라고 발언. 반학회 파승자로부터의 비판이 강해진다
- 1978년 (쇼와 53년)
- 1979년 (쇼와 54년)
- 4월 24일 - 이케다가 회장직을 사임하고 명예 회장으로 취임. 이사장이었던 호조가 제4대 회장으로 취임. 이사장에게는 모리타가 맡았다. 창가학회 회칙의 제정에 의해 회장의 임기를 종신에서 5년으로 변경.# 명예회장과 역대회장 참조
- 4월 26일 - 이케다가 호카강 총강두를 사임. 다른 법화강과 마찬가지로 니치렌 마사무네의 감독을 받을 것을 약속한다. 일들은 이케다를 호화강 명예총강두에 맡긴다.
- 5월 3일 - 일들이 창가학회 제40회 본부 총회에서 문제의 수렴을 선언. 여기에 제1차 종창 문제가 종결된다.「일달 #일달과 창가 학회의 갈등」도 참조
- 7월 22일 - 히다시 카오리(사망) (77세).
- 8월 6일 - 아베 히가시 가 종문 제 67세 법주에 등장하고, 보좌의 의식, 그리고 미나미의 의를 실시한다 [SG 42] .
- 4월 24일 - 이케다가 회장직을 사임하고 명예 회장으로 취임. 이사장이었던 호조가 제4대 회장으로 취임. 이사장에게는 모리타가 맡았다. 창가학회 회칙의 제정에 의해 회장의 임기를 종신에서 5년으로 변경.
1980년대 [ 편집 ]
- 1980년 (쇼와 55년)
- 7월 4일 - 반학회 급진파의 승려, 당시는 학회에 융화적이 된 일현을 비판하고 독립, 정신회를 결성 .
- 10월 - 시즈오카현 후지노미야시 에 「후지벚꽃 자연묘지 공원」이 완성 [86] .
- 1981년 (쇼와 56년)
- 7월 18일 - 호조가 사망. 부회장이었던 아키타니가 제5대 회장으로 취임. 이후 2006년(헤세이 18년)에 사임할 때까지 아키타니는 6선을 완수한다.
- 1983년 (쇼와 58년)
- 1984년 (쇼와 59년)
- 1월 - 이케다가 「호화강총강두」에 재임 [88] .
- 1985년 (쇼와 60년)
- 4월 2일 - ' 창가여자단기대학 ' 개학.자세한 것은 「창가 여자 단기 대학」을 참조
- 4월 2일 - ' 창가여자단기대학 ' 개학.
- 1989년 (쇼와 64년/ 헤세이 원년)
- 7월 16일 - 요코하마시 아사히구의 산업 폐기물 처분장에 현금 약 1억 7000만엔이 들어간 금고가 버려져 있었지만, 이것이 창가 학회 간부에 의한 것으로 판명. 비판을 받는다 [89] .
1990년대 [ 편집 ]
- 1990년 (헤세이 2년)
- 7월 16일 - 일현일 로렌 마사무네 상층부가 창가 학회 파문을 향한 「C작전(창가 학회 분리 작전)」을 계획 [주 7 ]
- 11월 16일 - 본부 간부회에서 이케다가 니치렌 마사무네 무네몬 및 히가시를 비판하는 발언을 실시한다 [88] . 학회 측은 「명예회장(이케다)은 (후술의) 「문의」문서에 있는 것 같은 발언을 전혀 하고 있지 않다」라고 반론[주8 ] .
- 12월 16일 - 니치렌 마사무네 무네몬이 전월의 이케다의 발언 내용에 대해 「제35회 본부 간부회에 있어서의 이케다 명예 회장의 스피치에 대한 질문」이라고 하는 문서로 질문[88 ] . 「질문」문서의 내용은, 이케다가 스님을 비판한, 4개 격언을 부정해, 친국 을 호의적으로 평가한, 외도 (불교 이외)의 노래인 「환희의 노래」를 평가한, 등으로서 비판 할 내용. 학회측은 반론 [90] [SG 46] .
- 12월 27일 - C작전 발동. 니치렌 마사무네 무네몬은 호카강 총강두에 임기제를 도입, 이에 따라 1990년(헤세이 2년) 말의 임기 종료와 함께 이케다는 호화강총 강두의 자격을 자동적으로 잃어, 제2차 종문 문제가 발발한다.자세한 내용은 「히가시 (닛렌 마사무네) # 창가 학회 파문」을 참조
- 1991년 (헤세이 3년)
- 1992년 (헤세이 4년)
- 7월 - 전국의 지구 간부 중에서 「친구장」등의 관혼장제를 거두는 도사를 임명 [94] .
- 8월 - 이케다가 니치렌 마사무네로부터 신도 제명 처분으로 된다.제명 #종문의 제명 도 참조
- 11월 - 청년부 기관지 '창가신보' 가 날조한 연석사진을 게재해 일현을 비판, 니치렌 마사무네와의 소송으로 발전. 지재 판결에서는 학회 측이 사진 날조를 실시한 것을 인정하고, 학회 측이 패소, 원고가 요구한 배상 청구도 인정되었다[95 ] . 그 후 학회가 항소한 고재에서 명예훼손은 인정했지만 손해배상은 인정되지 않았다. 닛렌 마사무네 측은 손해배상을 요구 상고하더라도 기각됐다.
- 1993년 (헤세이 5년)
- 8월 6일 - 이케다, '신·인간혁명' 집필에 착수 [96] .
- 9월 7일 - 도치 기현 오야마시·소 고지 소장의 료보 5년( 1720년 )의 일관 서사의 만다라 오모토존을 미가타키 오모토존으로서 일본 전국 및 세계 의 회원에게 수여하는 것을 총무 회·참의회·교학부 최고회의·현장회의 및 책임 임원회의 결의로 결정해, 같은 날 개최의 제70회 본부 간부회에서 「오모토 존 수여에 관한 제정」을 발표[SG 47 ] .
- 10월 12일 - 일관서사의 만다라 오모토존의 수여를 개시 [SG 6] .
- 10월 - 도쿄도 하치오지시 에 도쿄 마키구치 기념 회관이 개관.
- 11월 - 제1차 이케다 다이사쿠 사린 습격 미수 사건 . 앵무새 진리교 가 사린 에 의한 이케다의 암살을 계획. 도쿄도 하치오지시의 도쿄 마키구치 기념 회관 주변에서 사린을 분무.
- 12월 18일 - 제2차 이케다 다이사쿠 사린 습격 미수 사건 . 앵무새 진리교가 도쿄도 하치오지시의 도쿄 마키구치 기념회관 주변에서 사린을 분무해, 아성 회원 몇 명이 피해를 받고, 실행범의 신실 지광이 스스로가 뿌린 사린에 의해 중체. 이 후 시나노쵸의 본부, 전국 각지의 회관, 창가대학, 창가학원 등 학회 관련 시설에서의 경비 가 엄중해진다.
- 1995년 (헤세이 7년)
- 9월 - 도쿄도· 히가시무라야마시 의회 의원 아사키 아키요의 죽음과 관련해 시의가 자살 전에 창가 학회를 비판하고 있었기 때문에, 창가 학회가 모살했다는 데마가 퍼진다.자세한 것은 「아사키 아키요시 의전 낙사 사건」을 참조
- 9월 - 도쿄도· 히가시무라야마시 의회 의원 아사키 아키요의 죽음과 관련해 시의가 자살 전에 창가 학회를 비판하고 있었기 때문에, 창가 학회가 모살했다는 데마가 퍼진다.
- 1996년 (헤세이 8년)
- 1997년 (헤세이 9년)
2000년대 [ 편집 ]
- 2002년 (2002년)
- 3월 - 창가학회 회칙을 개정. 초대목구, 제2대 도다, 제3대 이케다의 「삼대 회장」을, 「영원의 지도자」로 하는 규정을 넣는다[비2 ] .
- 2003년 (2003년)
- 2004년 (2004년)
- 9월 10일 - 근행 양식을 개정.
- 2006년 (2006년)
- 11월 9일 - 아키타니가 회장을 사임하고 최고지도 회의 의장으로 취임. 신회장에게는 부이사장의 하라다 미노루 가 취임. 같은 달, 하라다의 회장 취임 피로를 겸한, 신시대 제1회 본부 간부회 개최. 본부 간부회의 횟수가 리셋되어 '학회 신시대'의 개시가 선언된다.
- 2007년 (2007년)
- 9월 22일 - 「히로부 제2막」 제1회 청년부 간부회. 이후 각 부 간부회 회의 횟수가 모두 리셋된다.
- 2008년 (2008년)
2010년대 [ 편집 ]
- 2010년 (2010년)
- 2011년 (2011년)
- 11월 4일 - 회장 선출 위원회가 개최되어 임기 만료가 된 하라다 회장이 재임되었다(2기째) [SG 51] .
- 2012년 (2012년)
- 12월 19일 - 창가문화센터 개관 [SG 52] .
- 2013년 (2013년)
- 11월 5일 - 창가학회 총본부 회관(가칭)의 대예배실에서 명예회장 이케다를 도사로 낙경입불식이 열렸다. 8일에 행해진 낙성 기념 근행회의 석상, 총본부 회관은 광선류포의 대원을 맹세하는 전당이라고 해서 「광선류포 대서당(고선형 후다이세이도)」라고 명명한다고 발표, 시나노 초 에 소재하는 학회 관련 시설 전체의 호칭이 「창가학회 총본부 (그렇게 실망스럽다)」가 된다 [SG 53] .
- 2014년 (2014년)
- 11월 7일 - 총무회에서 창가학회 회칙 제2조·교의조항의 개정을 결의. 「일제부제총여」나 「일제부제광선류포」 등, 니치렌 마사무네 유래의 용어를 일소해, 「인간혁명」이나 「세계광선류포」등, 창가학회색의 강한 표현으로 변경 . 홍안 2년의 미모토존을 접수의 대상으로 하지 않는 것을 표명하고, 교의조항에 있어서의 「오모토존」의 위치 지정도 변경. 「미모토존」은 「창가학회가 접수의 대상으로 인정한 미모토존」으로 했다 [SG 54] . 이날 개최의 전국 총현장 회의에서 교의조항의 개정을 발표 [SG 55] .
- 2015년 (2015년)
- 11월 16일 - 근행요전 기념내용의 일부 개정이 발표되어 명칭을 '창가학회 근행요전'으로 다시 삼아 다음 2016년(헤세이 28년)에 발매한다고 발표된다 [ SG 56] .
- 11월 17일 - 총무회에서 회칙 개정을 결의. 회장 임기를 5년에서 4년(재임은 방해하지 않음)으로 변경했다. 또 회장선출위원회가 개최되어 회칙개정에 의해 임기만료가 된 하라다 회장이 재임되었다(3기째). 간부 인사에서는 회칙 개정에 의해 신설된 주임 부회장 약간 이름의 임명, 마사키 마사아키 이사장의 퇴임과 부 이사장의 하세가와 시게오가 이사장으로 승격하는 인사를 발표 했다 [ SG 57 ] .
- 2016년 (2016년)
- 11월 4일 - 온라인 동영상 공유 사이트 ' YouTube '에서 ' SOKAnet 채널 창가학회 공식 '을 개설하여 동영상 게재를 시작.
- 11월 7일 - 창가 학회 회칙의 일부 개정을 결의. 제2대 회장· 도다성 성의 지도를 인용해, 전문에 「창가 학회 불」의 문언을 추가. 「삼대 회장」의 조문(회칙 제3조)에, 「『삼대 회장』의 경칭은, 「선생님」이라고 한다.」라고 하는 문언을 추가[SG 58 ] .
- 2017년 (2017년)
- 7월 18일 - 온라인 동영상 공유 사이트 ' YouTube '에서 기관지 ' 성교신문 '의 공식 채널 ' seikyoshimbun '을 개설해 동영상 게재를 개시.
- 9월 1일 - 총무회 및 SGI 상임이사회·SGI 이사회에서 '창가학회회 헌' 제정을 결의. 회칙의 상위에 위치하고 최고법규로 규정된다 [97] .
- 11월 10일 - 창가학회 회헌 서명식이 행해지고 [SG 59] , 회헌 제정에 맞게 개정된 회칙과 함께 11월 18일(창립기념일)에 시행되었다 [SG 60] .
- 2018년 (2018년)
- 2019년 (헤이세이 31년/ 레이와 원년)
2020년대 [ 편집 ]
- 2020년 (레이와 2년차)
- 1월 11일 - 세계 히로부 신시대 제45회 본부 간부회에서 어서 전집의 신판을 2021년(2021년) 11월 18 일에 발간할 계획을 발표 [SG 65] .
- 4월 3일 - 총본부 구성시설로서 건설된 「창가보광회관」의 준공 인도식을 실시 [SG 66] .
- 8월 26일 - 세계 히로부 신시대 제46회 본부 간부회를 광선류포 대서당에서 개최 [SG 67] .
- 9월 15일 - 총본부 구성시설로 건설된 '창가보광회관'이 오픈 [SG 22] [SG 68] [SG 69] .
- 9월 27일 - 같은 해 10월 2일 '세계 평화의 날'에서 60주년을 맞이하는 것을 기념한 '세계 청년부 총회'가 총본부의 창가문화센터를 주회장에 온라인 형식으로 개최되며 [ SG 70 ] , 명예 회장·SGI 회장인 이케다 다이사쿠로부터의 메시지를 발표했다(장남의 이케다 히로마사 주임 부회장이 대독하는 형식) [SG 71] [SG 72] [ SG 73 ] .
- 11월 1일 - 세계히로부 신시대 제47회 본부 간부회를 광선류포 대서당에서 개최[ SG 74] , 2021년 연간 테마를 '희망·승리의 해'로 설정한 취지를 발표했다.
- 2021년 (레이와 3년)
- 1월 7일 - 본부 간부회의 횟수를 리셋한 제1회 본부 간부회를 광선류포 대맹당에서 개최 [SG 75] .
- 1월 31일 - 회수를 리셋한 제1회 청년부 간부회를 도쿄 도다 기념 강당(도쿄도 도시마구 스가모)을 주회장에 온라인 형식·무관객으로 개최되어[SG 76 ] , 명예 회장 · SGI 회장 이케다 다이사쿠의 메시지를 발표했다 (장남 이케다 히로마사 주임 부회장이 대독하는 형식) [SG 77] .
- 3월 22일 - 후지타 관광 에서 2월에 매각된 타이코엔 의 소유권 이전이 완료 [98] [99] .
- 4월 18일 - 제3회 본부 간부회를 도쿄 도다 기념 강당(도쿄·스가모)에서 개최해, 부인부·여자부를 통합한 “여성부” 발족[주 1] [주 9 ] 의 발표 , 신판 어서 전집의 개요 설명 [SG 81] [SG 82] , 학회 창립 100주년 기념 사업인 「간사이 이케다 기념 대강당」의 건설 계획을 발표했다 [SG 15] .
- 4월 21일 - 성교신문지상에서 '간사이 이케다 기념대강당'의 건설계획을 공표 [SG 83] .
- 5월 3일 - 부인부의 명칭을 「여성부」로 변경하는 개정회칙을 시행 [SG 84] [SG 85] [주 1] .
- 11월 17일 - 제80회 총무회에서 여자부를 여성부에 통합하는 회칙개정과 '창가학회회 헌장' 제정 [ 주10] 을 승인 [SG 86] [SG 87] .
- 11월 18일 - 개정회칙과 '창가학회회 헌장'을 시행. 『일련대성인어서 전집 신판』을 발간 [SG 88] .
- 2022년 (레이와 4년)
- 1월 27일 - 중앙사회협의회에서 제26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비례 구 에서 공명당을 지지하기로 결정. 동시에 1994년에 결정한 각종 선거에 있어서의 지원의 기본 원칙에 대해 「인물 본위」인 것을 재확인했다 [SG 89] [100] .
니치렌 교단과의 관계 [ 편집 ]
니치렌 마사무네와의 관계 [ 편집 ]
니치렌 마사무네 산하의 시대 [ 편집 ]
한때 창가학회는 니치렌 마사무네 의 재가의 신도단체였지만, 도다가 포교의 편리와 종문인 니치렌 마사무네를 외호하기 위해, 종문에 종교법 인격의 취득의 허가를 소원했다. 그래서 니치렌 마사무네는 “신규로 입회한 회원은 신도로서 스에데라에 소속시키는 것”, “(니치렌 마사무네) 교리를 지키는 것”, “불·법·승의 삼보를 지키는 것”을 조건으로 승낙 했다 [ 77] .
쇼와 52년 노선 [ 편집 ]
1977년 (쇼와 52년) 1월의 제9회 교학부 대회에 있어서, 이케다는 사원의 의의에 대해, 수행자가 모여, 불법을 연마해, 포교로 향하기 위한 도장·거점으로 자리매김해, 그 본의로부터 "창가학회의 본부·회관, 또 연수소도 또한 "근대에 있어서의 사원"이라고 해야 한다"고 말했다 [101] .
이에 대해 종문=니치렌 마사무네측은 “이케다의 주장은 교리로부터의 일탈이다”라고 비판하고, 비판을 받아 창가학회는 사죄했다[102 ] . 게다가 야마자키 마사토 모가 독자적으로 소몬 젊은 승려를 선동해 비판 활동을 실시하게 했다. 야마자키는 창가학회에 대한 공갈죄에 의해 징역 3년의 실형 판결을 받고 있다 [103] .
일본 기독교단 소속 의 기독교인 으로서 창가학회의 입장을 지지하는 전 외교관 · 작가 의 사토 유에 따르면, 창가학회와 니치렌 마사무네의 대립의 “배경에는 스님이 “위”, 일반 신도는 “아래 '라고 하는 종문의 종교관과 그러한 히에랄키를 인정하지 않는 민중종교인 창가학회의 기본적 가치관의 대립이 있었다.'라고 한다[104 ] .
학회 간부가 니치렌 마사무네 총본산 오이시 지에 등산을 하는 일로 일단은 들어갔지만, 그 후에도 니치렌 마사무네(宗門) 승려와 단도에 의한 비판은 계속되었다.
정신회와의 대립, 히가시와의 동맹 관계 [ 편집 ]
1979년 (쇼와 54년) 7월 22일 에 관장 호소이 일들이 천화(사망). 일들은 생전,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다. 67세 법주로 아베 히가시가 등좌하면 학회를 포함한 니치렌 마사무네내는 혼란에 빠진다.
학회에 비판적인 스님이 ‘정신회’를 결성 , 야마자키 마사토모도 학회를 탈퇴하고 정신회에 참가했다. 이에 대해 히가시는 학회에 우호적으로 접했고, 학회도 날들로부터 히나타에 혈맥상승이 이루어졌다고 지도, 이케다도 종문을 옹호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 결과 종무원은 정신회 승려의 대량처분을 밟아 마침내 비판파 승려의 대부분이 니치렌 마사무네로부터 추방되었다.
후술하는 종문과의 대립 후에는, 이케다나 학회는 닛코가 받은 것은 어디까지나 내증(내정)이며, 정식인 의식은 행해지고 있지 않고, 후계 지명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해석을 변경해 있습니다.
니치렌 마사무네와의 대립·결별 [ 편집 ]
정신회 문제에서는 공투한 일현과의 관계는 악화로 향한다. 1990년 ( 헤세이 2년) 7월 17일, 니치렌 마사무네와 의 연락 회의의 석상, 학회 측이 종문이나 법주를 비판해 자리를 잡는다 [105] [주11] . 같은 해 11월 16일, 제35회 본부 간부회에 있어서의 이케다의 스피치에 대해, 니치렌 마사무네측은 법주나 스님을 경시하는 것으로서 학회에 설명을 요구하는 “제35회 본부 간부회에 있어서의 이케다 명예 회장 연설에 관하여 질문' 문서를 보낸다 [105] .
「질문」문장의 내용은, 이케다가 승려를 비판하고 4개 격언을 부정하고, 친국 을 호의적으로 평가한 외도 (불교 이외)의 노래인 「환희의 노래」를 평가한, 등으로서 비판한다 내용으로 [90] , 이에 대해 학회 측은 '질문'문서에 대한 '방문' 문서를 송부하고 니치렌 마사무네 측이 자신들을 비방·중상하고 있다고 응답을 거부했다[105] [ SG 46 ] [주 12] .
이에 따라 니치렌 마사무네 는 규약을 개정하고, 1984년 1월에 재임되고 있던 이케다의 호카강 총강두의 직책을 풀기로 했다[105 ] . 1991년, 창가학회는 『성교신문』 종이 등에서 니치렌 마사무네에 반론을 한다 [105] . 같은 해 11월 니치렌 마사무네 는 '창가학회'와 ' 창가학회 인터내셔널 '(SGI)을 파문했다 [105] [주13] .
한편, 타하라 소이치로는, 이 대립의 배경으로서, 니치렌 마사무네의 법주인 히가시가 선조의 무덤을 타종의 선사에 건립하고 있던 것이 판명되거나, 이성이나 돈에 관련된 승려의 추문 가 전해지거나 하는 등, 많은 학회원이 종문에 대해 불만을 가지게 된 것은 아닐까, 라고 언급하고 있다. [106]
창가학회와 니치렌 마사무네의 결별에 대해 사토 유우는 세계광선류포의 관점에서 창가학회가 더 이상 “종문의 쐐기 아래에 놓여지는 것은 비현실적”[107]으로 세인트 우르 슬라 학원 ( 카톨릭계 미션 스쿨 ) 카지타 가이치 이사장은 니치렌 마사무네에 의한 파문의 내실은 “권위적이고 형편화된 종문에 의해 그때까지 흩어져 온 학회원의 영혼이 드디어 해방되었다”고 한다 . [108]
시애틀 사건 [ 편집 ]
1992년(헤세이 4년) 6월, ' 창가 신보 '·'성교 신문'에 “일현이 1963년(쇼와 38년)에 법무로 미국 워싱턴 주 · 시애틀 에 출장했을 때, 현지의 매춘부 와 요금 트러블을 일으켜 경찰에 통보되어 신품을 구속됐다", "현지 거주 학회원, 히로에 크로우가 보석 절차를 했다"며 일현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기사가 게재됐다. 닛렌 마사무네 측은 그러한 사실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부정하고 [주 14] 일미 양국에서 소송이 이루어졌다. 또 이 보도는 창가학회나 히가시와 적대하는 정신회·현정회의 기관지에서도 보도되었다.
위조 사진 사건 [ 편집 ]
파문 후인 1992년 (헤세이 4년) 11월, 학회는 기관지 「창가 신보」에, 히가시가 게이샤와 놀리는 사진을 게재. 니치렌 마사무네와의 소송으로 발전했다. 지재의 판결에서는 학회 측이 편집 과정에서 사진을 트리밍 컷 등한 것을 위조로 인정하고 배상 청구를 명했다. [109] 그러나 학회 측이 항소한 고재에서는 학회 측에 의한 사진 위조를 다시 인정했지만 원고에 히가시의 이름이 없는 것을 이유로 원고가 요구한 손해배상은 인정되지 않았다. [110] 일련정종측은 상고하더라도 대법원에서 기각됐다.
커피컵 재판 [ 편집 ]
1992년(헤세이 4년), 가나가와 현 가와사키시 나카 하라구 에 있는 니치렌 마사무네 지케이지에 아들의 유골을 맡고 있던 창가학 회원 부부가, 동반한 몇명의 학회 간부와 함께 아들의 유골을 받아 방문 때, 본당에서 남편이 유골을 받아 퇴출. 그러나 5분 후에 다시 본당을 방문해 유골이 골당 이 아닌 커피컵 에 들어갔다고 주장했다. 그 후의 재판에서는, 수많은 증언으로부터 창가학 회원은 패소해 주장은 물러났다.
니치렌 마사무네 주직 교통 사고사 [ 편집 ]
1994년(헤세이 6년) 7월, 홋카이도 내에서 니치렌 마사무네 주직이 운전하는 자동차와 학회원이 운전하는 자동차가 정면 충돌하는 교통사고가 일어나, 주직이 사망, 학회원이 중상을 입었다 . 현장 검증으로 주직의 전면 과실로 인정되었지만, 주간 신조 등 일부 주간지가 교통 사고는 창가 학회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하는 내용을 게재. 나중에 사고 당사자인 학회원이 주간신조를 제소, 대법원은 주간신조의 패소를 전했다.
이케다 대작에 대한 광언 소송 [ 편집 ]
1996년(헤세이 8년), 스스로의 금전 차관이 원인으로 홋카이도 창가 학회의 간부를 해임된 여성이, 이케다 다이사쿠를 상대로 취해 일으킨 소송. 그 후, 법원은 여성측의 주장이 깨닫게 신용할 수 없다고 한 뒤, 「소권의 남용」으로서 호소를 각하했다[다른 14 ] . 같은 해 3월 이케다 다이사쿠에 강간 당한 고발수기를 '주간신시오'에 게재해 여성과 그 남편이 이케다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를 호소했다. 법원은 여성과 그 남편이 창가 학회에 "공갈 마마이의 전화"를 걸었을 때의 테이프에 주목하고, 판결문에서 "유무를 말할 수없는 강경한 것이며, 그 개성, 인품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하기에 충분할 만한 것일 뿐, 확실히 공갈이 부정하다고 평가받아도 부득이하다”고 단절했다. 판결에서는 "무엇 때문에 거기까지 하는지에 대해서는, 건전한 사회 상식으로부터 하면 약간의 의문이 남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원고들의 개성, 인품에 유래하는 곳이 크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 "소권의 남용에 의한 각하"로서 호소 그 자체가 물러났다 [111] . 법원이 '소권의 남용'이라는 명확한 용어를 사용하여 호소를 부적합한 예는 당시까지 1000만 건 가까운 소송 중 10건이 넘는 것으로, 비율로 '100만 건에 1건 라는 극히 드문 판결이 되었다 [112] . 호소를 일으킨 여성은 “소송은 부부와 변호사만으로 결정했다”고 말했지만, 작가의 야마모토 에이이치는, 수기 발표·기자 회견·민사 소송의 흐름은, 부부와 “주간 신조” 기자·몬와키호 (현· 몬다 타카마사 ), 「창가 학회에 의한 피해자의 모임」의 간부인 니치렌 마사무네 묘관 강원과의 협의로 세워진 시나리오에 근거한 것이 었다고 말하고 있다[113] . 『주간신쵸』지상에서 야마다 나오키 는 “대략 5년에 걸친 재판은 무려 실질심리에 들어가지 않은 채 종결”이라고 소송을 되돌아보고[114], “재판을 계속 방청했다” 는 을 골정 생도「여성의 호소는 시효라고 하고, 여성의 남편의 손해 부분에 대해서도 실질적인 사실 심리에 들어가지 않고 호소를 물리쳤다」라고 기술하고 있다[115]가, 일련의 사건에 대해서 당시 의 신시오 샤 ·사토 타카노 부 사장은 작가· 미야모토 테루 를 통해 “그 어리석은 부부의 호소를, 결과적으로 캠페인적으로 보도를 계속해, 떼어도 당시의 종문의 반학회 세력의 뒷받침이 되어 버린 것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진실인지 모르는 단계에서 그와 같은 광고를 여러 번 친 것은 너무 지나쳤다고 생각한다. 를 기사로 해도 좋은 것인지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었다"고 말했다 [111] .
정본당 해체 [ 편집 ]
파문으로부터 7년 후인 1998년(헤세이 10년), 한때 창가학회가 기진한 오이시지 마사모토도가 해체 된다. 니치렌 마사무네와 창가학회의 분열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이케다 대작본 불논쟁 [ 편집 ]
역대 회장 중에서도, 초대·목구, 제2대·도다, 제3대·이케다의 “삼대 회장”은, “광선류포 실현에의 사신 홍법의 체현자이며, 이 회의 영원의 지도자로 있다”라고 2002년(헤세이 14년)의 회칙 변경시에 정해졌다 [비2] . 게다가 2016년(2016년) 11월 7일에 시행된 개정회칙의 제1장 제3조 2항으로서, 「『삼대 회장』의 경칭은, 「선생님」이라고 한다.」라고 가필 명기되어 [ SG 90] . 다만, 삼대 회장 개인을 본불인 니치렌과 동등 또는 그 이상으로 숭배하는 것은 인정되지 않는다. 이케다는 과거에 성교신문지에서 “나 등을 절대시해서는 안 된다”고 명언하고 있다 [SG 91] . 한편 닛렌 마사무네 측은 ‘이케다 본불론’으로 비판하고 있다.
후지 오이시지 현정회와의 관계 [ 편집 ]
창가학회와 현정회의 전신인 묘신강은 모두 니치렌 마사무네 내의 일법화강이라는 입장이었지만, 1970년대에 학회가 주도한 오이시지 마사모토당의 건립을 둘러싸고, 마사모토당 이 니치렌 의 유언(어유명)에 있는 '본문의 계단 '에 해당하는지 아닌지의 해석으로 대립한 것을 시작으로 관계가 악화되었다.
묘신강은 「비국립」의 계단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보다는 「국가권력립」 내지 「황실립」이어야 한다[비3]로 하는 해석을 현정회로 개명한 현재도 무너지지 않았다 반면 학회와 당시 종문관장 호소이 일들은 “전후 민주주의 체제의 근간인 주권 재민 하에서는 니치렌이 가리키는 나라 의 개념 은 권력이 아니라 민중이다” [ SG 92] [116] 해석하에 정본당 낙경을 가지고 어유명은 달성되었다고 선언한다.
그 후 날들의 중개로 양 단체가 협의해 「정본당은 유명의 계단에는 해당되지 않는다」라고 하는 학회 이사장·이즈미카쿠(당시)의 담화를 성교 신문에 게재하는 것으로 일단 화해 . 이 담화는 낙경법 요직전인 1972년(쇼와 47년) 10월 3일자 지면에 게재되어 법요에는 묘신강 관계자도 참석했다. 그러나 화해한 뒤에도 묘신강은 국가권력 이나 황실 에 의한 '협의의' 국립계단 건립이라는 사상을 포기하지 않고 학회 중앙본부에 대한 시위 등 실력행사를 밟는다. 이것을 받아 일들은 1974년(쇼와 49년) 8월 12일자로 묘신강을 강중 해산 처분에 붙였다.
니치렌종과의 관계 [ 편집 ]
창가학회를 포함한 니치렌 마사무네계 교단에서는 니치렌종을 ‘신연파’라고 부르며 거리를 두고 있다.
오타루 문답 [ 편집 ]
1955년 (쇼와 30년), 니치렌 마사무네 묘 조지 소속의 창가 학회 오타루반의 회원과 니치렌 무네 묘류지사이에서 논쟁이 일어났다. 니치렌 마사무네와 창가학회와 니치렌종은 간부를 파견해 오타루시 공회당에서 공개 법론 에 임했다 [6] . 법론에서는 니치렌종 측이 연설할 때마다 격렬한 염소가 날아다니 거칠게 되었다 [117] .
다른 종교와의 관계 [ 편집 ]
도다성성이 존명이었던 1950년대부터 니치렌 마사무네 이외의 모든 타종교·타종파를 일체 인정하지 않고 「사종・사교」로서 비판해 왔다 [ 118 ] . 그 공격의 모순은 절복대행진기에는立正佼成会이나 천리교 등 닛렌・호카계 혹은 신도계의 신종교 단체, 정본당 건립 이후는 묘신강(현・후지오이시지 현정회)이나 정신 회 등 닛렌 마사무네 계신 종교 단체, 그리고 파문 후에는 닛렌 마사무네 종문으로 향했다. 타치마사 료세이회 등이 신 일본 종교 단체 연합회 나 일본 종교 연맹 등을 통해 타교파와의 교류를 취하고 있는 것과 달리, 2017년(헤세이 29년) 현재에도 학회 본체·공명당 모두 일본 국내의 다른 신종교 교단과는 협조하기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119] .
한편, 니치렌 마사무네로부터의 간섭에 의해 진척에 지장이 있던 기독교 나 이슬람교 등 불교 이외의 기존 세계 종교와의 대화는, 동종으로부터의 파문과 전후해 서서히 연화. 그 경향이 현저해진 것은 「SGI 헌장」이 제정된 1995년 (1995년) 11월 23일 이후로, 헌장의 7번째 항목으로서 「불법의 관용의 정신을 근본으로, 다른 종교를 존중하고 인류의 기본적 문제에 대해 대화하고 그 해결을 위해 협력해 나간다.”라고 기술되어 방침전환을 정식으로 표명했다. 현재 창가학회 인터내셔널 은 (일본 포함) 세계 192개국과 지역에 조직을 갖고 있으며 특정 종교 이외가 엄격히 제한되어 있는 이슬람권, 사회주의국 등 일부 지역을 제외 하고 전세계 에 활동 의 폭을 넓히기까지 이르고 있다.
게다가 SGI는 세계 종교 의회의 정기적인 참가 단체이며, 유럽 과학 예술 아카데미와 일련의 종교 간 심포지엄을 여는 등 다양한 종교 사람들 사이의 이해를 형성하는 것을 목표 로 종교간 대화와 대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120] .
전전·전중의 국가, 신도와의 관계 [ 편집 ]
시마다 유토에 의하면 초대 회장인 마키구치 토모사부로는 황태 신궁 의 신찰인 신궁 대마를 숭배하는 것을 거부하고 소각시켰지만, 국가 신도 의 전부 를 부정하고 있던 것은 아니다고 한다 [121] . 제5회 총회에서의 전원 좌담회에서 마키구치는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 의의를 설해, 야스쿠니 신사에의 참배는 이익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감사의 마음을 나타내는 것임을 강조했다[121 ] . 게다가 마키구치는 아마테루 오가미와 요요의 천황 에 대해 "감사하고 봉사한다"고 쇼와 천황을 현 인신 으로 인정 하고 "고다 국민은 국법에 따라 천황에 귀일봉하는 것이 순충하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121 ] .
또한 현대비즈니스 (Web판 주간현대 )에 의하면, 당초 창가학회의 전신인 전전의 창가교육학회는 치안당국과 좌익운동 단속에서 협력적인 관계에 있었다[122 ] . 창가교육학회는 " 적화 청년의 완전전향은 어떻게 할 수 있을까"라는 단단한 팜플렛을 발행하고, 치안당국과의 밀월만을 회원획득을 위한 선전재료로 하고 있었다[122 ] . 목구 등은 경시청 특고과나 그 전 조임인 내무성 경보국, 사상 검사 등 치안 당국과 긴밀하게 연락을 하고 있었다 [122] . 그러나 일본 공산당을 괴멸시킨 후 치안당국이 다음 단속 대상으로 한 것은 종교단체였다 [122] . 일전에, 창가교육학회는 특별고등경찰 의 탄압을 받게 되었다 [122] . 다만, 그것은 창가교육학회가 반전·평화를 호소했기 때문이 아니다 [122] . 신궁 대마를 숭배하는 것을 거부하고 소각시키는 등 했기 때문이다 [122] .
당시 대부분의 종교단체가 그랬듯이 니치렌 마사무네도 전쟁 에는 협력적인 입장이었다 [123] . 그것은 니치렌 마사무네의 재가 신도단체인 창가교육학회도 마찬가지였다 [123] . 예를 들면, 창가교육학회의 기관지 「가치창조」의 제6호에는, 니치렌 마사무네 종무원이 1942년 1월 21일자로 내놓은 포고를 전재하고 있었다[123 ] . 그 포고의 내용은 니치렌 마사무네가 2월 8일 오후 오이시지에서 전국에서 스님과 단신도를 모아 '대동아 전쟁 전승기원대법요'를 개최하고 니치렌 마사무네에게 있어서 신앙의 근본 인 ' 계단 의 오오모토존(大御本尊)의 개개문에 이어 ‘전쟁 완수 선서식’을 한다는 것이었다 [123] . 게다가 1941년 10월의 「가치 창조」 제3호에서는 당시 일본의 동맹국의 지도자로 「현대의 전륜 성왕」이라고 하고 있던 나치·독일의 아돌프 · 히틀러 총통 의 저서 “ 우리 투쟁』에 대해 소개했다 [124] [123] .
1942년이 되면 제2차 세계대전 에서 일본군 이 남방에서 서전의 승리를 거듭했기 때문인지 창가교육학회의 간부들로부터 용감한 발언이 잇따르게 된다[123 ] . 『가치창조』의 후계지로서 내놓은 소책자 「대선생활실증록」(국립국회도서관 에 복각판이 소장되어 있다)에 의하면, 총회 개회에 있어서 간부의 한사람이 「폐하의 능위하에, 하지만 육해군 장병이 서전 이래, 용서하는 전과를 꼽고 있는 것은, 고등의 충성보다 감격에 참을 수 없는 몫이다… 한때만, 아니오, 단지 이기는 한 손 있을 뿐이다”라고 인사 [123] . 폐회에서는 다른 간부가 “지금, 황국 일본이나 북은 알류샨 군도 방면보다 훨씬 태평양의 한가운데를 관철, 남쪽은 솔로몬 군도 부근에까지, 그리고 한층 더 남양 제도를 거쳐, 서쪽 은 인도양 에서 버마 지나 대륙에, 장마타 창문만주 에 이르는 광대한 전역에 걸쳐서, 용서하는 전과를 들고, 진정으로 성전의 목적을 완수하지 않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제일선에 서는 사람도, 총후에 있는 사람 도 , 지금은 두려워하지만 전장 정신에 의해 일환이 되어, 오로지 목적 달성에 매진하고 있는 것은, 이미 여러분 숙지되는 곳이다”라고 마무리했다[123 ] . 또한 총회는 항상 황궁을 향한 숭배로 시작되어, 회의 끝에는 군가 가 노래되었다 [123] .
한편 창가학회는 “학회가 군부정부에 모인다면 목구치 회장도 토다 회장도 체포되는 일 등 전혀 없었다”는 견해를 취하고 있다[SG 93] [주 15 ] . 그 견해에 의하면, 1943년 6월, 마키구치는 토다와 함께 니치렌 마사무네 소모토야마·오이시지에 소환되어, 당국에 의한 탄압을 우려한 종문측으로부터 「신찰을 받도록(듯이)」라고 권유받는 것도 , 닛코 의 남겼다 유계에 있는 “때의 관수위와 참새도 불법에 다르고 자신을 지키면 유키를 이용할 수 없는 일” [SG 95]의 정신을 관통하고, “승복하기 어렵 습니다 . , 절대 받지 않습니다”라고 말하고 거부했다 [SG 96] . 그로부터 1개월 후, 신찰의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행위가 불경죄와 치안 유지법 위반 에 해당하는 것으로, 마키구치나 도다, 다른 간부들 21명은 체포·투옥되었다 [SG 97] . 간부들은 퇴전해 갔지만, 마키구치 토다의 2명만이 끝까지 신앙을 관통했다. 마키구치는 1944년 11월 18일 , 현재의 창가학회 창립 기념일에 해당하는 이 날에 도쿄 구치소 에서 「순교 (=옥사)」하고, 1명 살아남은 도다는 종전(일본의 항복)의 약 1개월 이전 1945년 7월 3일 에도요타마 감옥 에서 출옥하고 탄압 에 의해 괴멸 상태였던 학회의 재건에 도전한 [SG 101] 이라는 것이다.
정치와의 관계 [ 편집 ]
정치학자 야쿠시지 카츠유키에 따르면 1954년 창가학회는 정치부문으로 문화부를 설립하고 1955년 4월 통일지방선거에 54명의 후보자를 옹립했다. 이듬해 1956년에 열린 참의원 선거에는 6명의 후보자를 세웠다. 그 후 1961년 '공명정치연맹'이 성립되었고 1964년 '공명당'이 결당되었다. 1999년 1월 이후 공명당은 자민당과 연립을 맺어 2009년부터 2012년 민주당 정권 시대를 제외하고 정권 여당으로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125]
종교사회학자인 나카노 히로시 에 따르면, 창가학회의 정치참여 동기는 중소기업 노동자 를 중심으로 하는 민중 의 대변, 정치 의 감시, 신교의 자유 확보의 3점에 집약된다고 한다 [126] ] . 회장 아키타니 의 일본 외국 특파원 협회 에서의 1995년(헤세이 7년)의 회견에서도 이 3점이 강조되었다 [127] .
창가학회 인터내셔널의 Rie Tsumura에 의하면, 창가학회의 정치에의 관여는 제2차 세계대전시에 탄압된 경험을 바탕으로 한 「 주로 방어적」("largely defensive")인 것이다 [128 ] .
정치학자인 나카 호쿠 히로아키 는 “ 공 명당 은 종교단체의 창가학회를 지지 모체로 하여 1964 년 에 결성 됐다 . 반면 공명당은 고도 경제성장 에 따라 도시부로 유입된 비교적 가난한 사람들을 조직화했다. '라고 했다 [129]
종교사회학자의 츠카다 호타카 에 의하면, 제2대 회장 토다 성성은 「 국립 계단」의 건립을 호소해, 「왕법 과 불법 이 명합해야 한다」(「왕불 명합」)로서 정교 일치 적인 이념을 논했다 [130] . 나카노 히로시에 의하면, 도다가 전개한 왕불 명합론·국립 계단론은 정교 분리 원칙에 위배된다는 의심을 받기 쉬웠지만, 도다에 니치렌 마사무네 국교화를 목표로 의도 는 없었다고 [ 131 ] [132] . 국립 계단의 건립은 창가 학회의 정치 진출에 있어서의 종교적 목적이며, 세속적인 목적은 어디까지나 「사회의 번영과 개인의 행복」을 일치시키는 것에 있었다고 나카노는 지적했다[131 ] . 나카노에 의하면, 「국립 계단」건립은 도다 시대 초기의 창가 학회의 정치 참가의 목표의 하나였지만, 초기 단계에서는 그것은 포기되었다[126 ] . 시마다 유타카는 , 창가 학회의 정치에의 관심에 대해 토다가 1956년(쇼와 31년)에 기록한 가운데의 「본문의 계단」에의 언급, 이케다의 1959년(쇼와 34년)의 「국립 계단 의 건립과 학회원의 전도」라고 하는 강연에 있어서의 「정치상에, 본종의 정의를 이용한다」라고 하는 발언에 주목해[133], 이러한 표현은 「실질적으로는 니치렌 마사무네의 국교화를 의미」[134] [135]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논했다.
도다 아래, 창가학회는 1956년(쇼와 31년)의 제4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의 시라키 요시이치로· 호조 나베 팔 옹립 등을 통해 정치에 진출했다 [130] . 제3대 회장 이케다 대작의 시대에 「국립 계단」이라는 말은 「본문의 계단」 「민중의 계단」 등으로 바꿔 붙여[136], 「불법 민주주의」 「세계 민족주의」 등 보편성 이 있다 용어가 눈에 띄게 되어 [136] , 「국립계단」은 1964년(쇼와 39년)의 공명당 결당 선언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136] . 창가학회 비판의 방해나 정교분리를 둘러싼 언론 출판문제를 받아 1970년(쇼와 45년)에 창가학회는 '국립계단론' 포기·'정교분리'를 선언하고[137][138] [ 26 ] , 공명당 강령에서 '왕불 명합' 등의 종교 용어를 삭제하고 공명당의 종교색을 엷게 했다 [137] [81] [26] .
창가학회·공명당은 공명당 결성 후 1960년대 야스쿠니신사 국가호지법안 반대· 일미안보조약 개정 반대 등 혁신정당 의 입장에 있었다 [138] . 나카노 츠키에 의하면, 이것이 이유로 창가 학회는 보수 진영으로부터 위험시되었다 [138] . 시마다 유토는 창가 학회는 「하층 계급을 조직화」[139] 하는 점에서 좌익 진영과 경쟁하고 있었다고 지적하고 [140] [139] , 창가 학회가 정치 진출을 시작한 시점에서 창가 학회는 좌익 진영 에 비판되는 것은 있었지만 보수진영에 비판되지는 않았다고 주장한다 [139] . 초기 창가학회는 대도시로 유입된 하층민을 중심으로 하고 있으며 [141] , 학회원의 압도적 다수가 사회계층 의 하층에서 중간층 아래에 위치하는 것은 2010년(헤세이 22년)에 이르기까지 변함이 없다 [141] .
테라다 키로에 따르면 “창가 학회의 중앙-지방 조직(중앙 본부·방면 본부·도도부현 본부-종합 본부·권 존·본부·지부·지구·블록)은 선거 구분에 대응하는 형태로 편성되어 "선거는 회원 간의 결합을 강화하고, 조직을 계약하고, 회원을 절삭하고, 달성감·충실감을 주고, 창가학회에의 귀속의식을 높이는 중요한 모멘트"라고 한다[ 26 ] . 시마다 유토쿠는 창가학회에서는 선거활동이 일종의 이벤트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선거활동을 함께 한 것으로 친밀해지고 결혼에 이르는 창가학회원의 커플도 적지 않다고 한다[142 ] .
정교 분리 문제 [ 편집 ]
종교단체 의 정치 활동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금지하는 것은 헌법 에 정해진 표현의 자유 나 결사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며, 종교 를 이유로 한 차별이 된다. 따라서 헌법 20조에 반하지 아니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143] [144] [145] .
1970년(쇼와 45년) 4월 24일, 민사당 중앙집행위원 장 카스 이치유키 가 “종교단체가 의회 정치기구를 이용해 정권을 획득하는 것은 헌법의 정교분리 원칙에 반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질질 질문 주의서를 보내. 정부는 “종교단체가 추천이나 지지를 한 자가 공직에 취임하고 국정을 담당해도 그 종교단체와 국정을 담당하게 된 자와는 법적으로는 별개의 존재이며, ( 헌법 20조가 금지하고 있다) 종교단체가 정치상의 권력을 행사하는 데에는 맞지 않는다”는 답변서를 내놓았다.
정부 의 견해는
- "종교단체가 정치적 활동을 하는 것 까지 배제한다는 취지 가 아니다."
- “종교단체와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는 정당에 속하는 공직의 후보자가 그 종교단체의 추천, 지지를 받아 공직에 취임하고 국정을 담당하기에 이르는 경우에도 그 종교단체와 국정을 담당하는 자와는 법률 적 으로 는 별개 의 존재입니다. ( 중략) 종교 단체 가 정치상의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고는 되지 않는다. 147]
- "종교단체 또는 종교단체가 사실상 지배 하는 단체가 정치적 활동을 하는 것을 배제하는 취지 가 아니다. "
- "종교단체 또는 종교단체가 사실상 지배 하는 단체가 정치적 활동을 하는 것을 배제하고 있는 취지라고 는 생각하지 않는다. "
- “헌법이 정하는 정교분리의 원칙은 신교의 자유의 보장을 실질적으로 하기 위해 국가 및 그 기관이 국권행사의 장면에서 종교에 개입하거나 관여하는 것을 배제하는 취지입니다. 종교법인의 정치적 활동을 배제하는 취지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소 타로 ·전 총리, 중의원 의원 [150]
되어 있다. 그 밖에 일부 의원 [ 누구? ] 에 의해 ' 정교일치 '라는 비판은 자주 이루어지고 있다 [다른 15] .
또 내각 관방 참여의 이이지마 이사오는 2014년(2014년) 6월, “공명당과 창가 학회의 관계는 정교 일치와 시끄러워 왔지만, 내각법 제국의 발언이 쌓여 정교 분리라는 것이 되어 "라고 정부 견해를 설명한 뒤 가정의 이야기로 "법제국의 발언, 답변이 단번에 바뀌면 '정교 일치'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다."고 발언했다[151][ 152 ] . 그러나 직후 정부·여당은 이이지마의 발언을 부정. 자민당의 석파 모간 사장 은 “ 내각 을 대표한 형태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정교 분리 에 대한 정부 견해를 유지할 것인지 묻고 “전혀 그대로다”고 응답하고 있다 [152] . 종교사회학자의 궁산達也는 저서 속에서 창가학회를 예로 들면서 “일본에서는 정교분리의 원칙이 있지만 종교교단의 정치에의 관여를 금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종교 교단이 현세에서의 행복을 바라는 한, 정치에의 관여는 불가결해져, 특정의 정치가를 응원하거나, 종교 정당을 결성해 적극적으로 정계에 진출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라고 말한다 [153] .
일본 공산당과의 관계 [ 편집 ]
일본 공산당과 창가학회는 지지층이나 지원대상이 겹치는 등으로부터 1950년대 이후 선거활동에서 서로를 비난하는 등 대립관계에 있었다[154 ] . 1969년 (쇼와 44년) 12월 2일에는 일본 공산당 기관지의 '신분 적기'가 후지와라 히로타리의 '창가 학회를 베는'의 출판을 창가 학회·공명당이 방해했다고 보도 언론 출판 방해 사건 이 표면화 했다. '창가학회를 베는'은 같은 해 11월 10일 발간됐다. 약 1개월 후인 12월 27일에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오야케 소이치는 “선거전에 있어서의 비밀 무기의 효과를 노렸다고 생각되어도 어쩔 수 없는 시점에서 간행되고 있다. 한 문제이다” [155] 라고 지적. 또 사토 유우는 "공산당은 '창가학회를 베는'을 선동의 도구로 최대한 활용"[ 156] 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1970년(쇼와 45년)에는 일본 공산당 위원장 미야모토 현지의 자택 의 전화 회선을 창가 학회의 학생부 간부 수명이 도청해, 체포자도 나왔다.
그 후 1974년(쇼와 49년) 12월, 저쪽 10년간의 「상호 불간섭」과 「공존」을 노래하는 「창공 협정」을 양자로 체결했다[86]가, 자공 연립 정권의 탄생 후에 는 대립 이 재연해, 신분 적기가 「공명당과 창가 학회 『정교 일체』에서 『악정 전범』의 역할」이라고 제목을 붙인 기사로, 창가 학회 정상이 선거전으로 진두 지휘를 거두고 성교 신문에 회원을 고무하는 기사 가 게재 된다고 비판하거나 [비 4] , 입신 강요 문제를 다루는 [비 5] 등을 하고 있다.
자유민주당과의 관계 [ 편집 ]
자민당 이란 자민당 결당 이후 2대회 나가토다 성성과 자민당에서 총재를 맡은 기시신스케가 우호관계에 있어, 기시의 딸 사위 아베 신타로가 기시의 명대로서 오이시지의 대강당의 완성식전 에 열석 해 축사 말했다. 또 창가학회가 일으킨 언론출판방해사건 에서는 공명당 중앙집행위원장·타케이리 요시카츠가 자민당 간사장·다나카 각영에게 사태의 수습을 의뢰, 그 후 자민당 다나카파 다케시타파와 공명당 창가학회는 친밀, 친교 를 깊게 테이키 타나카의 애제자 오자와 이치로가 1993년에 자민당을 이당하면 공명당 간부의 이치카와 유이치가 오자와에 접촉, 뒤에 「원・원・라이스」라고 비유된 연계를 보여 공명당이 비자민당 정권 의 호소카와 연립 정권 에 참가, 창가학회도 전면적으로 협력했다. 이 움직임을 본 자민당 은, 1993년(헤세이 5년)에 동당 소속의 유지 의원이 헌법 20조를 생각하는 회를 결성(회장은 카메이 시즈카 ), “공명당과 창가 학회의 정교 분리 문제를 추궁한다 '를 기두에 창가학회·공명당·호소카와 연립정권 에 공세를 걸었다.
1994년(헤세이 6년) 5월에는 공명당 및 창가학회에 비판적인 종교단체나 유식자로 이루어진 4월회의 결성에 동당 소속의 고노 요헤이가 참가 [주 17 ] , 자민당 은 오랜 숙적 으로 이어진 사회당 과 손을 잡고 정권을 탈취하자 같은 해 10월 동당의 가와사키 지로가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니치렌 마사무네 주직 교통 사고 사건 을 거론했다 [157] .
1995년 ( 헤이세이 7년) 11월의 중의원 종교 법인에 관한 특별 위원회에서는 동당 소속의 중의원 의원 구마시로 아키히코가 창가 학회에 대해 조엔 이라는 당당한 힘 을 갖고 계시는 것 같은데요 …
1996년(헤이세이 8년)에는 당의 운동 방침에 “지금, 우리 나라의 정치에 있어서 가장 우울해야 할 것은, 종교 단체·창가 학회가 신진당이라고 하는 정당의 가죽을 쓰고 국민을 속이고, 정치의 권력을 잡으려고 "획책하고 있는 것"이라는 슬로건이 존재했는데 이는 전년에 열린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신진당에 패배한 것에서 오는 중의원 선거에서 승리해 정권 유지를 목적으로 한 것이다. 같은 해 주간지에 게재된 「이케다 다이사쿠 강간 사건」의 내용을 당의 기관지 「자유 신보」 에 인용, 나이토 쿠니오 ,俵孝太郎가 「시리즈 신진당=창가 학회 워칭」이라고 제목을 붙이고 「이케다 다이사쿠와 김의 문제'나 '이케다 대작 강간문제'를 여러 차례 게재한 한편, 중의원 선거에서 승리해 정권유지를 목적을 달성한 뒤 자유민주당 다케시타파를 중심으로 공명당과의 연립을 모색하는 움직임도 나왔다. 1998년(헤세이 10년) 4월, 자민당 총재 에서 총리 의 하시모토 류타로 가(창가 학회의 항의에 응해) 「자유 신보」의 「이케다 대작 강간 문제」에 대해서 사실이 아니었다고 사죄했다. 자유신보는 현재 폐간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은 자민당에 의한 반창가 학회 캠페인 으로서 대대적으로 행해졌다.
권고 [ 편집 ]
원수폭 금지 선언 [ 편집 ]
1957년(쇼와 32년) 9월 8일, 제2대회 나가토다 성성이 창가 학회 제4회 동일본 청년부 체육 대회 “젊은이의 제전”에서 핵무기의 사용 금지를 호소하는 선언, 이른바 “원수폭 금지 선언” 했다.
도다는 이 선언을 유훈으로 회원들에게 맡기고 이후 창가학회가 실시하고 있는 전쟁체험자의 증언을 모아 출판하는 '반전출판'과 반핵·평화운동 활동의 연원이 되었다고 한다 . [기타 16] .
일중국교정상화 [ 편집 ]
1968년(쇼와 43년) 9월 8일, 이케다 다이사쿠는 도쿄·양국의 닛대강당에서 행해진 학생부 간부회의 석상, 「일중 국교 정상화 제언」을 발표했다 [159] .
창가학회의 출판기관 제3분명사는 낮이 국교정상화에 빠질 수 있었던 것은 일본에서는 통산대신과 초대경제기획청장관 등을 역임한 타카노타치노스케, 후생, 농림, 문부 의 각 장관을 역임한 마츠무라 켄조 , 총리를 맡은 다나카 각영 과 오히라 마사요시 , 창가 학회 회장(현명예 회장)의 이케다 다이사쿠, 중국 측에서는 최고 지도자(중국 공산당 주석)의 모택동, 일본 유학 경험 을 가진 총리의 주은래 , 와세다대학에서 배운 정치가의 승승지, 주니치 우호 협회 회장을 맡은 손평화 등, 일중 쌍방 의 정치가나 각계 지도자들, 그리고 다양한 민간인이나 여러 단체의 인내 강한 노력 이 있었기 때문에 다름없다고 정리하고 있다 [160] .
'SGI의 날' 기념 권고 [ 편집 ]
1975년 1월 26일에 SGI(창가 학회 인터내셔널)가 창설된 것에 기인하여 창가 학회가 정한, 매년 1월 26일의 「SGI(창가 학회 인터내셔널)의 날」에 전해, 이케다 가 SGI 회장의 명의로 발표해 온 평화제언이 1983년 이후 매년 성교신문 상에서 발표되고 있으며, 2022년의 제언으로 40회째가 되고 있다 [161] . 2022년 제언에서는 2023년 일본에서 개최되는 주요 7개국 정상회의 ( G7 정상회의)에 맞춰 ‘핵무기 역할 저감에 관한 정상급회의’를 히로시마에서 개최하도록 제안했다. 또한 신형 코로나 바이러스 의 감염 확대를 받아 감염증 대책을 둘러싼 국제 협력을 강화하는 국제 규칙의 조기 제정을 호소했다 [162] .
덧붙여 2023년은 SGI의 일 기념 제언은 발표되지 않고, 후술의 긴급 제언 2개가 이것을 대신해 발표되었다.
우크라이나 위기와 핵 문제에 대한 긴급 제안 [ 편집 ]
2023년 1월 11일, 이케다는 러시아에 의한 우크라이나 침공의 조기 종결을 위한 긴급 제언을 발표하고, 유엔의 중개에 의해 주요국의 외상 회합을 조속히 개최해, 정전 합의를 도모하도록 호소했다. 또한 핵무기로 공격받지 않는 한 자국은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는 '핵무기의 선제불사용'에 대해 핵보유국에 서약을 요구했다[163 ] .
G7 히로시마 정상회담을 위한 권고 [ 편집 ]
2023년 4월 27일, 이케다는 5월에 개최 예정인 G7 히로시마 정상회의를 향한 제언을 발표하고, 핵무기의 사용이나 위협은 허락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힘차게 발신하도록 요구했다. 또, 우크라이나 침공의 조기 종결을 목표로, 중요한 인프라나 민간 시설에의 공격의 즉각 정지를 실현한 데다, 전투의 전면 정지를 향한 교섭을, 의사나 교육자 등 시민의 대표가 옵저버 참가하는 형태 에서 할 것을 제안했다. 동 제언은 NHK에서도 보도되었다 [164] .
매스 미디어와의 관계 [ 편집 ]
기관지인 성교신문 등은 '무관의 친구'로 불리는 회원의 유지 [주18]에 의한 전국적인 택배망이 정비되어 있어 일반지와 마찬가지로 일간으로 전국에 배달되고 있다 . 성교신문사 는 자전의 인쇄소를 가지지 않고, 전국지의 계열의 인쇄회사나 복수의 지방지에 성교 신문의 인쇄를 위탁하고 있다.
지방 종이로서는 인쇄소의 윤전기를 놀아 두는 시간을 줄일 수 있게, 인쇄 대금을 확보할 수 있는 귀중한 수입원으로서, 성교 신문사(=학회)로서는 자사에서 전국에 고속 윤전 인쇄기의 설비를 유지하지 않고 전국 쓰즈우라에게 일간으로 신문을 전달할 수 있다는 바람에 양자의 이해가 일치하고 있다. 또, 전국지에서도 매일 신문사 나 요미우리 신문사 는 성교 신문의 인쇄를 산하의 인쇄 회사로 수탁하고 있어 [165] , 요미우리 신문사는 2020년 (2020년) 5월 1일 부터 이바라키 현 에서 성교신문 등의 배달 업무를 수탁하기까지 되었다 [166] . 성교신문사(=학회) 측에는 「무관의 친구」의 인력 부족이나 학회원의 고령화가, 요미우리 신문사에는 부수 감소에 멈춤이 걸리지 않는 가운데, 전국에 정비한 판매점의 존속이라는 과제가 배경에 있다고 한다. 또, 매일 신문에서는 이케다의 기고를 게재하거나, 계열의 출판사로부터는 이케다의 저작이 출판되고 있다. 이것에 대해, 주간지 「데일리 신조」에서는, 「어느 전국지 기자」의 발언으로서, 「지금 매일에 있어서 학회는, 조잡하게 취급할 수 없는 대립 고객이며, 학회에 관한 비판적인 기사등 쓸 수 있을 것도 " "550 만부라는 대형 고객에게 요미우리가 송곳니를 벗기는 것은 불가능하게 동일하다"고 적고있다 [166] .
창가학회에는 성교신문사 (「그래프 SGI」)를 시작해, 조수출판사 (「조수」, 「pumpkin」)・제3문명사 (「제3문명」, 「등대」) 등의 계열 출판사가 있다.
또, 전국·지방을 불문하고 라디오국 에의 프로그램 제공은 복수 있다(하기 참조). 텔레비전국 에서는 지방국이나 독립국을 중심으로 이케다 원작의 애니메이션 이나 홍보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는 것 외에, 재경 키국 등에서 성교 신문의 CM이 방송되고 있다 . 단, J-WAVE , 간사이TV , TV구마모토 와 같이 공명당의 CM 및 정견방송과 당학회 계열의 학교교육기관 ( 창가대학 , 창가학원 )의 CM을 제외하고 창가학회 관련 조직( 성교신문 포함) )의 CM의 출고(방송)의 일체를 받아들이지 않는 방송 사업자도 있다 [167] .
스폰서 제공 프로그램 [ 편집 ]
- 알고 싶다! SDGs( BS후지 )
- 내일에 에일 ~ 말에 태워 ~ ( TBS 라디오 )
- 코코로의 온각 ~ music for you ~ ( 문화 방송 )
- 스포츠 전설 ( 일본 방송 및 NRN 네트워크)
- HOKKAIDO SDGs STATION ( HBC 라디오 , " 구찌 의 Good Friday!
- 세계의 동경 ~ 홋카이도 브랜드 ~ ( AIR-G ' )
- 휴먼토크~그날 그때( 아르·에프·라디오 일본 )
- 도쿠가와 가문의 안전 드라이브 일기 ( CBC 라디오 )
- 하트 풀 메세지
- 안심 코코로 765 · 안심 코코로 SATURDAY · 안심 코코로 SUNDAY ( FM COCOLO )
- 교통 정보( 에후엠 야마구치 )… 단, 반 쿨마다 스폰서 있음과 스폰서 없음을 반복하고 있다
- 휴먼 스트리트( 에프엠 후쿠오카 · 에프엠 나가사키 ·에 후엠 오이타 )
- WITH~손을 잇는 지지 아오우~( RNC 라디오 )
과거에 스폰서로 제공했던 프로그램 [ 편집 ]
- 당신에게 모닝콜 (TBS 라디오)
- 뮤직선물~음악·지구호 (문화방송)
- 세계 명곡 대전집 ( ABC 라디오 )
- 고키겐 선데이 음악 ( MBS 라디오 )
- 호카이도 보물섬 (AIR-G')
- 호카이도 건강과 (HBC 라디오)
- 호카이도 백년 이야기 ( STV 라디오 )
- RADIO BREAKERS [주 19] ( 에후엠 오사카 )
창가학회가 일으킨 사회문제 [ 편집 ]
언론 출판 방해 사건 [ 편집 ]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에 걸쳐, 창가학회와 공명당이 회장의 이케다 다이사쿠나 스스로에 비판적인 서적의 출판, 유통을 저지하기 위해, 학회원이나 공명당 당원이 저자·유통업자·취차점·서점에, 협박이나 압력을 가해 출판을 방해하거나, 출판 전의 원고에 스스로의 주장을 짜넣을 것을 요구한 문제.
공명당이 결성되어 중의원에서 의석을 획득하기 시작하자 창가학회 비판의 서적이 발표되는 것이 늘었다[ 168] . 1969년(쇼와 44년)의 후지와라 히로타치 의 「창가 학회를 베는」을 비롯한 다양한 비판본에 대해 창가 학회로부터 압력이 가해지고 있는 것이 밝혀지고, 이케다는 1970년(쇼와 45년 ) 5월에 일련의 방해행위에 대해 사과했다 [168] . 이 건은 일본 공산당 의 불파 철삼도 1970년 국회에서의 질문으로 다루었다 [169] .
『창가학회를 베는』의 출판에 대해서는, 평론가의 오야케 장이치는 「『창가학회를 베는』라는 표현을 이용하고 있는 것은, 분명히 처음부터 창가학회에의 도전」「안부의 발행일이 쇼와 44년 11월 11일은 중의원 총선거까지 앞으로 1개월과 18일 선거전에 있어서의 비밀무기의 효과를 노렸다고 생각되어도 어쩔 수 없는 시점에서 간행되고 있다. 이것은 중대한 문제이다” [155] 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행위가 일본 헌법 에 보장된 언론의 자유와 출판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으로 국회에서 다뤄졌지만, 당초 공명당은 NHK의 공개토론에서 “이들은 모두 거짓말, 데타라메 "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국회에 초청된 출판사나 취차점 등의 증언에 의해, 창가 학회·공명당이 사건에 관여하고 있는 것이 밝혀지면 매스 미디어로부터 격렬한 사회적 비판에 노출됨과 동시에, 창가 학회·공명당의 밀접한 관계나 당시 공명당이 창가학회 내부국으로 존재하고 국회나 지방의원을 맡은 인간이 다시 학회 간부로 조직으로 돌아가는 등 공명당이 조직으로서 독립하지 않았던 것이 정교분리의 관점 에서 문제시되었다.
1970년(쇼와 45년), 이케다 다이사쿠가 “언론 방해의 의도는 없었다”면서도, 방해 행위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죄, 공명당을 창가 학회로부터 분리해 조직으로서 완전하게 독립시키는 등, 창가 학회·공명당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공약했다. 그러나 후년, 이케다의 저서 「신·인간혁명」에서는 「중원 선발 전에, 후지사와 타츠조(후지와라 히로타치의 가명)의 책과 함께, 학회의 비판책이 잇달아 나온 것이다.암흑의 폭풍이 불어, 신이치(이케다의 가명)를 쓰러뜨리는 공격의 독살이 쏟아졌다.”라고 게재[ SG 102] . '주간신조'와 불파 테츠조는 세월이 지났던 것을 곱하여 역사를 개찬하는 것으로 비판했다 [170] [비6] .
선거에서 부정 투표, 부정 행위, 문제 행동 [ 편집 ]
- 1957년(쇼와 32년) 4월에 참의원 오사카 지방구의 보결 선거가 시행되었을 때, 창가학 회원이 오사카 아이린 지구 에 사는 일 고용 노동자들에게 후보자명의 이름이 들어간 담배나 현금을 건네 그러자 창가학 회원들 47명이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체포됐다. 재판 에서는 고이즈미 타카시 , 이케다 다이사쿠는 무죄, 45명에게 유죄 판결이 내려졌고, 유죄가 된 회원 45명은 도다 회장의 이름으로 회원 제명 처분을 받았다.
- 1968년(쇼와 43년)에 행해진 제8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 에서 부정 행위( 투표소 입장권 의 도둑질, 바꾸는 구슬 투표 등)를 실시해, 창가학 회원 34명이 검거 되었다.
- 1969년(쇼와 44년)에는 투표 접수 시간 종료 후에 투표소를 방문한 학회원의 대응을 둘러싸고 폭도로 화한 학회원이 투표소를 습격, 투표소 내에 있던 선거입합인 수명에 폭행을 더해 체포 사람을 냈다. 이 습격사건은 공산당 선출 국회의원이 공직선거법 개정에 관한 특별위원회의 장에서 밝혀 자치성에 대처를 요구하고 있다 .
학회원이 일으킨 범죄, 문제 행동 [ 편집 ]
학회원이 일으킨 범죄나 사회문제로 법원이 창가학회의 조직적 관여 인정한 사안으로 오사카 사건 [171] 과 같은 선거 위반, 커피컵 재판 [172] 미야모토 현지택 도청 사건 [173] 이라는 반목하는 단체에 의 비방중상행동, 수첩강탈사건 [174] [175] 처럼 학회와 추모를 알게 된 전 학회 간부에 대한 불법행위를 들 수 있다. 한때 범죄를 일으켜 체포된 학회 간부를 제명하지 않았고, 그 간부가 몇 년 후 다시 형사 사건을 일으켜 학회 간부로 체포된 적도 있고 조직으로서 학회의 체질이 비판된 경우도 존재했다[176 ] .
섹트문제, 외국에서의 소동 [ 편집 ]
프랑스 [ 편집 ]
1995년 12월에 프랑스 의 하원( 프랑스 국민의회 )에서 채택된 보고서에는, 「섹트 (컬트)의 행동의 특징」을 판정하는 지침이 실려 있다 [177] [178] . 이 보고서는 보고서자의 이름을 따서 "규야르 보고서"라고 불린다 [177] [178] . “①정신의 불안정화 ②법외적인 금전적 요구 ③ 살기 익숙한 생활환경에서의 단절 ④육체적 보전의 손상 ⑤아이의 둘러싸기 ⑥반사회적인 언설 ⑦공질서의 교란 ⑧재판사태의 많음 ⑨ 종래의 경제회로로부터의 일탈⑩공권력에의 침투의 시도」를 「섹트 구성 요건의 10항목」으로서 열거하고, 이 중 1항목에서도 해당하는 것이 있으면 그 단체를 프랑스 정부는 섹트로 간주하고 있다 [179] . 리스트업된 것은 창가학회를 포함한 전부 174종교, 종교단체였다.
- 컬트와 금전에 관한 프랑스 의회 보고, 30수 단체에 주의를 집중시켜 조사했다.
WEB 제3문명 에 의하면, 2011년 9월, 프랑스 의 신문 「르 몬드」의 월간지 「Le Monde DES RELIGIONS」에 「창가 학회, 자기의 내면의 부다」라고 제목을 붙이는 르포르타주가 게재되어 창가 학회 의 역사와 활동이 자세하게 보도되었다. 여기에서는 창가학회가 니치렌 마사무네와 절연한 이유에 대해 “창가학회의 플러그마티즘 및 그 재가에 의한 현대 세계를 중심으로 파악하는 방향성은 니치렌 마사무네의 성직자 집단에 의한 교조주의적 종교관과는 더 이상 불가능 해진다 . 그러니까.”라고 해설했다. 또, 1983년 에 프랑스 국회 에 제출된 「알란 비비안 보고서」를 들고, 창가 학회를 섹트 취급하고 있던 배경에 대해서도 해설해, 수장 직속 기관인 섹트 일탈 행위 감시 단속 관계 부처 위원장 조르주 · 후넥에 의한 “지난 5년 이상에 걸쳐 SGI 프랑스에 관해서, 우리는 섹트 일탈 행위의 통보를 일절 받지 않았다. 운동체(SGI 프랑스)는 예배, 문화, 상업 활동을 구별해, 프랑스 에 있어서는 전혀 문제 를 제기하지 않는다.”라는 코멘트를 소개하고 있다 [SG 103] . 또한 2020년 섹트적 일탈행위 관계성청 경계대책본부(MIVILUDES)에 창가학회에 대해 10건의 통보가 있었다.[180]
벨기에 [ 편집 ]
벨기에 에서는, 창가학회(SGI)가 복수의 미성년자를 권유한 것이 발각되어 사회 문제가 되는, 1997년, 벨기에 연방 의회 조사 위원회는 미성년자 보호를 위해 창가 학회(SGI)를 섹트 적 활동을 하는 단체에 리스트업하여 미성년자에게 권유, 입회를 금지했다 [181] .
독일 [ 편집 ]
1980년대부터 90년대에 걸쳐, 일본에 유학하고 있던 복수의 독일인이 창가 학회의 총회에서 이케다 다이사쿠 가 오른손(실제는 오른쪽의 주먹)을 높게 붙여, 거기에 호응해 참가자들이 일제히 오른손을 내딛은 광경을 목격한 것에서 "창가학회는 나치식 경례를 하는 위험한 단체" [182] 등과 같은 잘못된 풍조가 독일 국내에 전해진다. 그 후 1996년, 창가학회 인터내셔널(SGI) 등을 신종교와 정신세계그룹의 일단체로서 리스트업했다 [183] .
영국 [ 편집 ]
영국 의 경제지 “ 이코노미스트 ” 1999년 7월 3일호에서 “창가 학회는(닛렌 마사무네[오이시지]가 창가 학회와의 연결을 끊고 이케다씨를 파문한 것에 의해서) 주요 목적을 잃은 현재, 전세계에서 하는 좋은 일의 성과를 강조하게 되었다.또한 창가 학회는 부유해져 이후 초기의 목표를 잃은 그 외 많은 조직과 같이, 비판자를 협박, 주류 언론을 위협 해 하고 침묵시킨다는 용서함으로 그 이해를 지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탈리아 [ 편집 ]
2015년 6월 27일, 이탈리아 공화국 정부와 이탈리아 SGI(이탈리아 창가 학회 불교 협회) 사이에 인테이사(종교 협약)가 조인되어 조인식이 피렌체의 이탈리아 문화 회관에서 엄숙하게 집행 되었다 . 그러나, 식전에 이케다 대작이 참석하지 않고 대리인을 세운 것으로부터 이탈리아의 대중지 「Corriere della Sera」는 「Nessuna cerimonia di vincitori(수상자 없는 시상식)」, 「Governo ha dato lui la medaglia di "fantasmi(유령에게 훈장을 주었다)" 등의 비판 기사를 게재했다.
한국 [ 편집 ]
한국 SGI와 관련된 비판이 아래와 같이 있다.
- 1997년(헤세이 9년)에 행해진 한국 대통령 선거 에서 후보자의 김대중이 일본에서 비밀리에 공명당 간부와 면회해, 일본의 공명당의 영향하에 있는 한국 SGI로부터 지지 를 얻을 수 있도록 의뢰해 공명당 간부 후지이 토미오가 승낙했다고 한다. [184]
- 한국 SGI가 평화를 주제로 한 집회에서 다케시마 의 영유권 주장과 역사 교과서 문제 , 일본의 군국주의 비판이 배경이었던 것을 주간신조가 ' 반일집회'라고 보도한다 [185] .
- 2002년(헤세이 14년) 8월 15일, 한국·SGI가 이케다 대작의 지시로 한국의 정치가에 총액 20억원의 배금을 뿌린 부정 의혹이, SGI의 내부 고발이라고 하는 형태로 한국 의 유력 전국지인 ' 중앙 일보 ', ' 동아 일보 ', ' 조선 일보'의 3지에 게재되어 일본에서는 주간실화가 '한국 3대지에서 폭로 이케다 다이사쿠 SGI 회장이 한국의 정치인에게 장미를 둔 20억원 뒷금 의혹」으로서 게재된 것 [186] .
창가학회에 관한 의혹 [ 편집 ]
P 기부 [ 편집 ]
“창가학회에는 P헌금 이라고 불리는 헌금이 존재하고 있다”는 의혹. P헌금의 P란 「프레지던트(영:President)」의 약자로 공명당의 지지 모체, 창가학회의 이케다 다이사쿠 명예회장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 공명당 출신의 국회의원 후쿠모토 준이치 가 2007년(헤세이 19년) 6월, 외국인 기자 클럽에서 외국인 기자를 앞두고, 「공명당의 의원은 선거로 당선했을 때 중의원 의원은 300만엔 , 참의원 의원 는 600만엔의 헌금을 하도록 요구되고 있다”고 기자 회견했다. 후쿠모토의 기자회견 내용을 민주당 이시이이치가 2007년(헤세이 19년) 10월 16일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P헌금'을 추궁했다 [다른 19] .
"미워하면서"로 표시된 의혹 [ 편집 ]
고토 조 전조장 의 고토 타다마사 의 저서 「미워하면서」에서는, 전 공명당 최고 고문의 후지이 토미오가 고토(전 조장)의 아래를 방문해 , 「반학회 운동을 하고 있는 카메이씨 등 네 명의 이름을 꼼꼼히 '이 사람들은 위해가 되지 않는다'는 뜻을 말했다”고 한다. 저서에 등장하는 편집자는 그 교환을 "수취하자 고토조장에게 네 명에게의 습격을 의뢰했다는 의미에 쏠린다"고 표현했다[187 ] . 또, 공동 통신사 기자의 우오스미 아키라는 「월간·현대」중에서, 후지이가 고토에게, 창가 학회에 대해 비판적인 카메이 시즈카(전·중의원 의원)를 침묵시켜 주었으면 한다고 의뢰하는 장면 이 녹화된 비디오 테이프가 있다는 것을 적는다 [188] . 리스트에 이름이 있던 카메이는 경찰 관계자, 변호사 등과 창가학회 대책회의를 하게 된다. 고토는 저서에서 “이케다 다이사쿠가 뒤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하면, 야마자키나 후지이를 파이프 역으로 우리 야쿠자를 흩어져 이용해, 일이 끝나면 모르겠다. 그래서 우리가 조금이라도의 말 오우몬이라면 이번에는 경찰 권력을 사용하여 붕괴에 걸린다. 그리고 그것이 언론에 들키게 되면 뺨을 먹는다 .
오봉회라는 조직 [ 편집 ]
' 오봉회 (大鳳会)'라는 조직의 존재에 대해 아래에서 다루었다.
- 주간문춘이『황태자비 마사코 가 외무성 의 창가학회 심파 ‘대봉회’와 저녁을 했다’는 기사를 게재한 것 [190] .
- "창가학회가 외무성 간부에게 '외유 특별대우' 요청서를 보냈다"는 문제 [191]
- “외무성이 이케다 다이사쿠의 해외 방문에 특별한 편의를 도모하고 있다”고 하는 내용이 국회에서 심의된 것 [다른 20 ] .
재무 사적 유용 의혹 [ 편집 ]
다음과 같은 예가 있습니다.
- 1977년(쇼와 52년)에 민사당 의 카스가 이치유키가 국회에서 이케다 전용의 호화 시설 등에 대해 조사했는데, 회원의 재무가 사적 유용되고 있었다고 하는 의혹을 가져, 당시의 공명당 위원장 위원장 타케이리 요시카츠 에게 질문하는 취지의 편지를 보냈다 [192] . 카스가는 1970년(쇼와 45년) 12월의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이케다의 증인 환문을 요구했지만, 자민당, 공명당의 반대로 증인 환문은 배웅되었다. 또 카스가는 창가학회가 일으킨 언론 출판 방해 사건 에서도 국회에서 이케다 다이사쿠의 증인 환문을 요구했다.
- 1989년,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의 쓰레기 처리 시설에 폐기된 금고로부터 1억엔의 현금이 발견되었다. 당초 창가학회는 이 문제를 제3자의 관점에서 비판했지만, [193] 며칠 후 창가학회 총무의 나카니시 치오가 소유자라고 자칭하고, "(금고의 돈은) 20년 이상 전에, 자신 가 학회 내에서 부정하게 축재한 것으로, 그 존재를 잊고 있는 동안에 잘못 버려졌다” 등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모두 쇼토쿠 태자 상이 인쇄된 구 지폐(C호권)에서 절반은 아주 새로운 상태이며, 「1000만엔」이라고 인쇄된 봉봉으로 묶인 것이나, 한 번도 시중에 나돌고 있다 없는 신찰도 있었다. 게다가 나카니시가 집을 담보로 빚을 지고 있었기 때문에 모순점을 언론으로부터 추궁받았다. 당시의 학회 내부는 나카니시에 동정적이었고 대다수의 간부가 “이 사건은 나카니시가 이케다와 학회를 위해 진흙을 썼다.”라는 견해를 하고 있었다[194 ] .
창가 학회에 대한 시위 [ 편집 ]
이바라키 신문에 의한 「향전 도둑」보도 [ 편집 ]
이바라키 신문 은 창가 학회 신자 집에서 취재를 바탕으로 1962 년 (쇼와 37 년) 4 월 1 일호에서 "창가 학회는 신도의 집에 장례식이 있으면 친척, 지기에서 모이는 향전 은 모두 창가 학회 지부가 꺼내기로 되어 있다”고 보도했다. 창가학회 측은 기사 내용은 사실 무근과 이바라키신문사에 항의했다. 그 후, 확증을 취할 수 없다고 판단한 동사는 4월 17일, 이바라키 신문에 정정 기사를 게재했다.
월간펜에 게재된 명예훼손 [ 편집 ]
잡지 「월간 펜」이 게재한 「사중 오중의 대죄범하는 창가 학회」나 「극악의 대죄 범하는 창가 학회의 실상」이라고 하는 기사가 명예 훼손에 해당한다고 해서, 편집장의 쿠마베 오쿠라가 고소되어 쿠마베 가 유죄가 되었다.
아사기 아키라시 의전 낙사 [ 편집 ]
1995년(헤이세이 7년) 9월, 도쿄도 · 히가시무라야마 시 의회 의원 아사키 아키요 가 맨션 으로부터 전락사해, 후에 경찰이 자살이라고 단정. 아사키가 창가학회와 공명당의 비판활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타살설과 학회의 음모설이 부상했다. 『주간현대』・『주간신조』・『히가시무라야마 시민신문』의 기사에 대해, 창가학회는 명예훼손으로 제소해, 3개 모두 학회측이 승소했다.
영화 감독 이타미 13의 전락사 [ 편집 ]
1997년(헤세이 9년)에 자살( 전락사 )한 이탄 13 의 죽음이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라고 한 설(창가 학회가 관여했다고 단정하는 내용)이 2채널에 게재 되었다 . 창가학회는 2채널 운영자를 상대하고 소송을 일으켰다. 도쿄지방법원 은 2009년(헤세이 21년) 2월 증거 도 없는데 단정적인 내용을 계속 게재했다며 피고에게 손해배상금 80만엔의 지불을 명하는 판결을 전했다. .
주간문춘에 의한 “이케다 다이사쿠 중병설” 보도 [ 편집 ]
『주간문춘』이 2011년(2011년) 10월 27일호(176페이지부터 179페이지)에서 이케다 대작의 간호사로부터의 정보를 바탕으로 『충격 특종 이케다 대작 ‘창가 학회’ 명예 회장 담당 하고 있던 전 간호사가 말하는 「엄계 병실」진짜 병상」과 이케다 다이사쿠 명예 회장의 중병설을 게재했다. 주간문춘의 기사를 받아 창가학회는 주간문춘이나 발행원의 문예춘추사에 “해당하는 간호사는 존재하지 않고, 증언은 사실 무근이다”라고 항의. 주간문춘은 2개월 후인 12월 29일호에서 당시의 편집장이 “소지는 재취재를 실시했습니다만, 증언자가 간호사라고 확증을 얻기에 이르지 않았습니다. 의 기술을 취소하고 폐를 끼친 관계자에게 사과드립니다.」라고 사과했다.
월드 비즈니스 위성에 의한 보도 [ 편집 ]
2018년 2월 27일자의 성교 신문 의 보도 기사에 의하면, 테레비 도쿄 계열 에서 방송되고 있는 「월드 비즈니스 위성」이 2017년(2017년) 11월 24일의 방송으로 창가 학회에 대한 특집을 교차했지만, 테레비 도쿄 측의 불편 함으로 창가 학회에의 취재 의뢰 등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취재가 행해진 뒤, 학회로부터 제명된 인물들[주 20]의 주장이나 언동을 일방적으로 거론해 , 시청 사람에게 학회에 대한 편견을 심는 것이 되고 있는 것 등을 문제시한 창가 학회가 항의. 테레비 도쿄는 2018년(2018년) 2월 22일까지 보도 내용의 오류를 인정하고 사과했다 [SG 104] [SG 105] .
창가학회에 대한 긍정적 평가 [ 편집 ]
일본 국내 [ 편집 ]
사토 유 [ 편집 ]
기독교도 ( 일본기독교단 )의 전 외교관 에서 작가 사토 유우 는 “이케다씨의 평화 에 대한 생각은 진짜다. 더불어 이케다씨는 창가학회의 이념을 구현한 존재다.” 3대 회장이 투옥된 창가 학회의 국가 에 대한 거리감 그래서 창가학회의 평화주의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했다. 또한 “SGI라는 국제조직에 따라 내셔널리즘 과 배외주의를 초극하고 있는 창가학회가 이런 국면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고 말했다[195 ] .
제2차 종창전쟁에 대해서는 '환희의 노래' 사건에 관하여 창가학회 측의 입장을 옹호하고, '여기서 종문이 문제로 한 것은 기독교다. 베토벤의 '환희의 노래'를 부르는 것 종교는 사교 예찬이 될 것이라고 생각 했다 . 유럽 문화는 기독교와 깊고 유기적으로 연결 되어 있다 . 소련 과 동독 에서도 ' 환희 의 노래 '가 무신론 이 부정 하는 신을 예찬하는 이유로 금지하지는 않았다. 하고 있는 것이 노출되었다” [196] 라고 적고 있다. 게다가 “각국의 문화에서 종문 이외의 종교적 요소를 제거하자는 발상은 그림에 그린 것 같은 배외주의다” “어느 문화와 근본적으로 연관된 종교를 완전히 부정한다면 종교간 대화 는 성립되지 않는다. 종문의 완고한 자세가 창가학회의 세계 종교화의 심각한 장애가 되어 있는 것이 더 이상 명백해졌다”[197]라고 말하고 있다 .
2014년 7월 집단적 자위권 행사 용인의 여당 협의에 대해 “공명당이 브레이크 역으로 여당에 없으면 헌법에 제약되지 않는 집단적 자위권의 행사를 용인하는 것이 각의 결정됐다고 생각한다.” [198] “각의 결정에 찬성했기 때문에 공명당은 '평화당의 간판에 상처를 입었다', '평화주의의 간판을 내렸다' 등으로 비판되었다. 연립정권을 이탈하고 깨끗한 평화론 공명당이 그 선택을 하고 있었다면, 나는 공명당의 평화주의가 진짜가 아니라고 비판했다고 생각한다.평화의 당의 간판에 상처가 붙어 하지만 현실 에 전쟁을 저지하고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적어도 현시점에서는 공명당은 그 기능을 하고 있다 .
「『국립 계단의 문제』라고 해도, 현재, 창가 학회는 종문(日蓮正宗)과 蔣別하고 있기 때문에, 종문의 교리인 『국립 계단의 문제』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즉, 공명당과 창가학회에는 니치렌 마사무네를 국교화할 목적이 있다는 비판자들의 논리의 전제가 무너지고 있다.”고 한다 .
타하라 소이치로 [ 편집 ]
타하라 소이치로 (저널리스트)는 “중복되는 시련에 직면해, 창가 학회는 확실히 쇠퇴할 것이라고 하는 여론의 추측을 훌륭하게 배신하고, 그때마다, 핀치를 기회로 바꾼다는 놀라운 에너지로 역경을 극복 확실히, 창가 학회의 힘은 우리에게는 상상 도 미치지 않을 정도로 견고한 것 같다 . 이케다 다이사쿠의 인물상에 대해서, 「아마 가까운 기분이 들지 않는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고 하는 이쪽의 예상은 훌륭하게 빗나가, 위대한 곳을 일절 느끼게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게다가,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매우 훌륭합니다. 이것은 놀랐습니다. "라고 말했다. 또, “내가 이케다에 느낀 것은, 자신을 잘 보여주려는 하심이 전혀 없고, 성실하고 상대를 걱정할 수 있는, 세세한 신경의 소유자라고 하는 것이다.” “희로애락 또한 있어, 매우 인간 냄새도 갖고 있다.”라고 했다 [201] .
창가학회는 “창립 당초부터 종래의 니치렌 마사무네의 틀을 넘은 독자적인 재가신도단체” [202] 였다고 말하고 있다. 또 제2차 종창전쟁에 대해서는, “제9을 노래하는 것의 어디가 문제인가. 눈에 띄지 않는다. 나로부터 해도, 종문 측이 어디에 격렬한 분노를 느끼고 있는지, 전혀 모른다”[ 203] 라고 하고 있다.
(종문과의 결별 이후) 창가학회의 활동 영역이 넓어진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학회원에게 이야기를 듣자 종문과 결별한 이후 지역을 위한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한다. 예를 들면, 지역의 축제에서 신가마도 담당하고, 마을회 임원이나 학교의 PTA 임원도 맡는다. 게다가 교통안전 주간 행사에도 참여하는 등 온갖 지역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언론·출판 문제 후 이케다가 목표로 한 지역과의 융화가 여기에 와서 드디어 뿌리 내렸다는 것일 것이다” [204]라고 말하고 있다 .
학회의 초창기에서 배타적인 태도가 보여진 것에 대해, “신앙을 퍼뜨리기 위해 타종교를 부정하는, 이것은 초창기의 신종교에 있어서 부득이한 것이다. 아마 어느 종교 단체도 비슷한 활동 하고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205] . 타하라는 또, 학회가 니치렌 마사무네(종문)와 결별하고 나서는, 지역 활동이 활발해진 점을 지적한다. "예를 들면, 지역 축제에서 신가마도 담당하고, 마을회 임원이나 학교의 PTA 임원도 맡는다. 또한, 교통 안전 주간의 행사에도 참가하는 등, 온갖 지역 활동에 참가하고 있다" "종문과 헤어진 것 "세계 광포, 지역과의 융합 등 새로운 포교의 형태를 발견했다"고 말했다 [206] .
기타 [ 편집 ]
- 쓰루미 슌스케 (철학자, 평론가, 정치운동가) - 창가학회의 포교활동이 일본 종교의 정화 에 도움이 되고 있다고 “이 의미에서 창가학회는 일본에 진정한 종교심을 만들기 위해 그 앞 흔들림 으로 일하는 침례 요한일지도 모른다 . ”라고 소감을 말하고 있다 .
- 타마노 카즈시 (사회학자) - “창가학회는 '행복하게 하는 시스템'이라고도 부르는 조직 원리를 만들어 회원들이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자신의 생활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도왔다고 할 수 있다. [208 ] .
- 모리 히데토 (평론가) - 창가 학회에 대해 "중세 이래 일본인이 상실하고 있던 신앙 주체가 현출했다"고 위치하고 있으며, "창가 학회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회복이라는 과제에 한정 첨부 어쨌든 응할 수 있었던 것의 의미 쪽이 훨씬 거대하다.”라고 평론했다 [209] .
- 나카에 카츠미 (역사 작가) - 많은 창가학 회원들에게 취재를 통해 '창가학회의 10년 문서'를 저술했다. 그 가운데 “생명 존엄의 불교 철학이 부동이며, 그것을 사회에 살려 가는 운동이 계속되는 한, 역시 창가 학회에 대한 기대는 크다고 말해야 한다”고 책을 맺고 있다 [210] .
- 사키 아키오 (종교 학자)와 코구치 위이치(도쿄대학 명예 교수) 어쩔 수 없는 원천인 것이 회원들 사이에 널리 이해되고 있다. 평가하고 있다 [211] .
일본 이외 [ 편집 ]
- 브라이언 R 윌슨 (국제 종교 사회 학회 초대 회장), 카를르 드 벨라레(벨기에 루벤 대학 명예 교수) 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에서의 고참 원리가 동료 의식과 연결되어 있고, 그 결합에는 신비한 요소가 있다 .
- 다니엘 A 메트로( 메리 볼드윈 대학 교수) - 창가학회의 평화운동을 분석하고 “창가학회가 펼치고 있는 민중 차원의 평화운동은 물론 종교적인 사명감에 근거한 것에 틀림없다. 그러나, 반드시, 모든 인류가 창가 학회에 입회하지 않아도 불법을 기조로 한 “평화의 메시지”를 계속 보내는 것에 의해, 한사람 한사람에 “정신의 변화”를 일으켜 가는 것은 가능하고 또한, “평화의 메시지”를 전세계 사람들이 공유하는 것은 창가학회의 사명을 완수하는 것에도 통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하고 있다[213 ] . 또 “창가학회는 일본의 근대사에 있어서의 독특한 현상이다. 불법이념을 기반으로 그만큼 광범위한 사회적 운동을 성공적으로 전개한 종교단체는 예전에 없었다”고도 말했다. 있다 [214] .
- 필립 E. 하몬드 (미국의 종교 사회학자), 데이비드 마하체크(종교 사회학자) - 창가학회를 사회학적으로 연구. 학회의 역사와 철학에 대한 고찰을 저서에 기록해, “창가 학회의 활동의 원동력은, 니치렌 불교가 갖추어져 있는 금욕적인 특질이거나, 혹은 종교적 신념에 비추어 사회 상황을 변화시키려고 강한 생각이다.”라고 평가했다 [215] . 또 그는 "1991년(헤세이 3년)에 행해진 니치렌 마사무네로부터의 분리가 프로테스탄트의 종교 개혁 에 비유되어 온 것은 당을 얻은 것이다"라고 평하고 있다. 그리고 "이번 일련의 움직임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창가학회가 탑파 - 죽은 사람 대신 공양되는 추도를 위한 명판 - 을 자신들 의 돈벌이 를 위해 팔아 주는 강욕 적인 스님 들을 비난한 것과 개신교 종교 개혁자들이 구속상을 판매 하는 성직자들 에게 이의를 제기한 것이 매우 유사하다는 점이다.”라고 말했다 [216] .
중립적인 입장 [ 편집 ]
시마다 유미 [ 편집 ]
종교 학자인 시마다 히로토미 는 “창가학 회원이 ‘히로부 즉 지역 공헌’으로서 단지 자치 회장이나 학교 PTA, 상점가 임원 등에 적극적으로 취임하고, 그 조직을 ‘절복의 발판’으로 하려고 한다. 있다고 말한다 [217] . 일반인은 일 등에 쫓기고 그 임원에게는 취하고 싶지 않지만[217], 창가학회는 그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지역에서 주도권을 잡으려고 한다 "라고 분석하고있다 [217] . 시마다에 의하면, 1950년대 ~ 1960년대 (쇼와 30년대부터 40년대)의 고도 경제 성장기 에는, 일을 요구해 고향을 떠나 도시를 목표로 다수의 청년들이, 대기업 중심의 총평등에 헹구기도 하지 않고, 미조직 노동자·중소 영세업자로서 고립 무원의 생활을 보낼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조직화되어, 「민족」이라고도 형용할 수 있는 진한 인간 관계가 완성되어 갔다 . 이 조직화가 획기적이고 거기에 창가학회의 사회적인 의의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218] .
한편, “한때는 다른 종교나 종파 를 일체 인정하지 않는 자세를 가지고 있어 [118] , 창가학 회원의 자제는, 수학 여행 등으로 신사 불각을 방문했을 경우에는, 신사 의 도리 이나 사원 의 산문 재빠르지 않겠다", 재무 한 달 정도 전에는 결기대회가 열려, "100만엔 내면 아들이 좋은 기업에 취직할 수 있었다." "보험을 해약하고 학회를 위해 바치면 행복 이 같은 발언이 잇따라 다른 회원들에게 압력을 가한다 [219] 라고 지적 [220] . 또 창가학회에는 다액의 기진을 한 인간들이 적지 않고, 시마다의 지인에게도, 창가학회에 수천만엔을 기진한 예가 있다고 했다[221 ] .
' 불법 지불'이라며 이전에 신앙했을 때 불단과 신선을 소각시킨 사례 가 있었던 것 [6] , 모어 하우스 대학 킹 국제 채플의 주최에 의해 세계 각지에서 "간디 킹 이케다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것에 대해 “세계적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 간디 , 킹 목사 에 대해 이케다 에게 두 사람에게 필적할 만한 공적이 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은 적지 않을 것이다”라고 비판했다 [222] .
공명당 에 대해서는 “ 공 명당은 자민당과 연립여당을 짜고 나서 정책면에서 반드시 독자성을 내세울 수 없고, 결국 자민당의 정책을 추인하고 있는 만큼 끝나는 일이 적고 , 특히 안보 정책으로 공명당이 당시로 하는 평화주의 의 관철이 방해되고 있기 때문에 창가학회 내부에서 공명당에 대한 비판이 잠재화되고 있다”고 한다[223 ] .
“자민당 내에도 창가학회=공명당의 발언력이 강해지는 것을 경계하는 인간은 있기 때문에 자민당 내부에서 창가학회=공명당에 대한 비판이 높아지면 창가학회=공명당으로서는 민주당과 연립을 맺을 가능성 가 나온다 [224] .그렇게 되면 창가학회=공명당은 동물과 새 둘 다에 들어가려고 결국은 어느 쪽에서도 미움받고, 어두운 동굴에 쫓겨난 이솝 이야기의 박쥐가 될 위험이 있다 ” 고도 말하고 있다 [224] .
기타 [ 편집 ]
- 니시야마 시게루 (종교사회학자·동양대학 명예교수) 반대로라도 '모법' 엄계의 자세를 취한 '전통돌파'(절복이라는 브레이크 스루)의 힘에 있다고 한다. 두 번째 '공'은 '본문 계단'의 건립을 전후 일본 사회 속에서 구체적으로 운동화한 것으로 한다. 한편, '죄'는 '공'의 뒷부분에 부딪혀 첫 번째 '죄'로서 타종교에 대한 욕설이나 폭력적인 신선철거 등 심각한 인권문제를 일으킨 것, 둘째 의 「죄」로서, 회칙 개정 등의 전진시에 과거를 총괄하지 않고, 과거와 현재의 교단의 자어 차이에 일향으로 무성착이며, 신뢰할 수 없는 점을 들고 있다[225 ] .
- 시마토진 (종교학자·도쿄대학 명예교수) - 창가학회의 특징으로 '현세중심주의'를 꼽으며, '세계적으로 봐도 서민이 그 실현에 참여할 수 있는 현세에서의 행복을 초점으로 했다 불교로서 창가학회는 눈에 띄는 예”라고 하고 있다. [226] 한편, 그 배타주의적이고 자기완결적인 교리체계로 인해 강력한 집단적 통합이 실현되고 있으며, 지도자의 지시하에 일원적인 의사의 일치가 전제로 되어 자유 질문이나 토론이 봉쇄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또, 상위자의 권위에 대한 순종이 종교적 지도의 범위를 넘어서고, 통제된 집단 생활의 틀이 일상생활의 구석구석의 영역에까지 미치고 있기 때문에, 개인의 자유에 맡겨지는 영역 가 축소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고 있다. 특히 이케다 명예회장 숭배에는 그러한 경향이 강하고, 이러한 개인의 자립의 억제가 「사제 후지」 「이체 동심」등의 강조에 의해 정당화되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227 ] .
신종교를 '격리형', '개인참가형', '중간형'의 3가지로 유형화하고 있으며, 창가학회를 '중간형 속에 포함시켜 지장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고 있다. [228] . - 미야다이 신지 (사회 학자) - 웹 매거진 인터뷰에서 " 동일본 대지진 ( 도호쿠 지방 태평양 앞바다 지진 )의 재해 지역에서 개인적으로 서로 지지하는 인간 관계와 연결을 가진 사람과 가지지 않는 사람의 격차를 보여주고 라고 말한 다음에, 「창가 학회의 피난소는 물건도 윤택이고, 배급 물자도 공평하게, 순당하게 쉐어할 수 있는 구조가 있다 . 교회 등의 커뮤니티와 같고, 예를 들면 구미 등은 허리케인 이나 해일 로 재해해도 행정이나 지자체는 움직이지 않는다.구원 물자의 분배(배급)를 하는 것은, 교회입니다.」라고 발언. 교회적인 커뮤니티가 하는 역할을 언급하고 그 예로서 창가학회를 들었다 [229] . 한편 공명당·창가학회를 '도시종교적 매치펌프'라고 부르며 신자유주의와 빈곤을 증폭시켜 소외되는 사람들을 늘리고 신자를 늘리고 있다고 비판 하고 있다 [230] .
- 하치만 카즈로 (평론가, 역사작가)-「만약 창가학회가 과도한 부담을 강하게 하는 종교라면, 수백만 가구의 신자를 획득하는 것도 유지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중략) 여기에서는 상품 판매에 비추어 논의하고 싶다. 높은 것이야말로 일본 제일의 종교단체인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231] .
창가학회에 대한 비판 [ 편집 ]
이반자에 의한 비판 [ 편집 ]
창가학회는 전 부회장 후쿠시마 겐지로 , 전 공명당 서기 나가노 아야야 , 전 공명당 위원장 타케이리 요시카츠, 전 공명당 도의회 의원 단장 용 연광 , 원도 의회 공명당 간사장 후지와라 행정 , 전 공명당 의원 오하시 토시오 , 동 이시다 차남 , 전교학부 나가 하라시마 히로시 , 전 고문 변호사 야마자키 마사토모 등의 간부 클래스의 이반자나, 나가이 히데카즈 , 스기타 카오루 등의 유명인의 이반자를 내고 있다. 이반자는 니치렌 마사무네 로 옮기거나 언론을 통해 창가 비판·폭로를 하는 경우가 많다.
- 야노 아야야 - 「학회원 2세, 3세는 어릴 적부터, 가정에서 이케다 다이사쿠가 현저한 그림책이나 애니메이션을 보여주고, 어떻게 이케다와 창가 학회의 교리가 훌륭한가를 프린트된다.게다가, 일관 교육 시스템에 의해, 근금 들어가는 창가학회원으로서 엘리트 교육된다.일관교육시스템이라는 양성장치가 있으면 창가학회는 차례차례 새로운 학회원과 「이케다 명예회장」을 믿고 의심하지 않는 간부를 양성할 수 있다. "라고 지적했다 [232] . 이 밖에 현재의 학회의 간부는 이러한 ‘이케다 칠드런’들에 의해 굳어지고 공명당 의원 에게도 창가학원 · 창가대학 출신자가 있다. 이러한 교육에 의해, 학회는 견고한 조직이 되어, 이케다의 독재 체제도 확립되었다고 한다 [232] . 또 “100만엔 재무는 도다 제2대 회장의 표현을 빌리면 학회가 결코 손을 염색해서는 안 되는 “사종교”에의 한 걸음을 내디딴 순간이었다”고 한다[232 ] .
- 스기타 카오루 - 자서 『스기타』에서 창가학회를 비판, 주로 이케다 다이사쿠와 남성 창가학회 간부의 타락함을 비판, 또 스기타 자신이 창가학회 관계자로부터 받은 성희롱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
정치단체에 의한 비판 [ 편집 ]
정계진출을 시작한 시기에 창가학회는 니치렌 종계 타교단, 정토진 종계 교단 외에 혁신 진영으로부터의 비판을 받는 것이 늘었다 [139] . 시마다 유토에 의하면, 1957년(쇼와 32년)의 홋카이도 에서의 창가 학회 청년 부대와 일본 탄광 노동 조합과의 싸움을 하나의 계기로서 [139] , 또 1960년대의 공명당 결성에 따라 [140 ] , 혁신 진영으로부터의 비판이 간행되게 되었다 [140] . 시마다는 이러한 교단·진영은 「민중을 타겟으로 한다」[140] , 「하층계급을 조직화」[139] 하는 점에서 창가학회와 경쟁하고 있었다고 지적하고 [140] [139] , 한쪽의 보수 진영은 이 단계에서는 창가학회 비판을 전개하지 않았다고 한다 [139] . 1990년대 공명당도 합류한 신진당이 참의원 선거에서 의석이 증가하자 신진당의 대두에 위기감을 품은 자민당은 반창가 학회 캠페인을 전개했던 시기가 있었다 .
타 단체에 의한 비판 [ 편집 ]
- NAACP (전미 흑인 지위 향상 협회)는 창가 학회가 주최하는 「간디·킹·이케다 평화 건설의 유산전」에 대해, 「간디나 킹은 큰 공적을 꼽은 것을 전 세계의 사람 이 알고 있지만 , 이케다는 도대체 무엇을 했는가」라고 비판, 주최한다면 「간디 킹 블루스(스프링스틴)전」이라고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33] [234] . 그 모순은 창가 학회뿐만 아니라 모어 하우스 대학 의 로렌스 에드워드 카터까지 향했다 [233] .
- 앵무새 진리 교조 마하라 아키 아키라 는 일요일 매일 부터 시작된 앵무새 배싱은 성교 신문을 인쇄하고 있는 매일 신문사 그룹과 창가 학회가 결탁해 가고 있는 이케다 다이사쿠는 일본을 침략 하는 프리메이슨 의 손끝에서 있어 「불법」을 구부리고 있는 연의 일족 등과 비판 [235] [236] . 이케다 다이사쿠 사린 습격 미수 사건을 비롯해 화학무기 와 생물무기를 이용한 학회에 대한 테러 공격을 실시했다 .
- 행복의 과학 총재 오카와 타카시 는 자발적이고 "현대 사회에서 두 가지 악"으로, 하나는 악덕 언론, 또 다른 악은 "사교 · 창가 학회"라고 비판했다 [237 ] .
유명인에 의한 비판 [ 편집 ]
- 나이토 쿠니오 - 「정계에 진출해, 국가 권력 과 연결되는, 또 연결하려고 하는 권력 지향, 권력 의존의 종교 단체는 사교 속의 사교라고 하는 것이다. 앵무새보다, 훨씬 시말이 나쁜 난문 이다」[238] .
- 아사미 정웅 (전 도호쿠 학원대학 교수) - “멤버가 결과적으로 하나의 정당 밖에 선택하지 않거나, 그 종교 단체의 지시에 의한 것 이외는 다른 정당에 투표하지도 않는다-창가 학회의 지시로 신자가 자민당 에 투표하는 경우처럼 - 만약 그러한 종교가 있다면 그 종교는 반드시 정교분리의 원칙을 깨고 있는 것이며, 또 부끄러운 일이지만, 매우 미성숙하고 전근대적인 종교이다 ” [ 239 ]
- 이시하라 신타로 (전 도쿄도 지사) - 이케다 명예 회장을 「나쁜 천재, 거대한 속물」이라고 비판 [240] .
- 俵孝太郎- 창가학회와 대항하고 있던 조직 4월회의 대표 간사. 2005년 9월 1일의 「일간 겐다이」에서도 창가 학회를 비판.
- 도쿠가와 요시히로 (전 쇼 와 천황 사무라이 종장 ) 라고 어떠한 것인가」라는 생각을 나타냈다. 일설에서는 「선대의 사무라이 종장 이리에 상정이나 , 『 2대 계속해서 평민으로부터의 입내는 조심해야 한다(상황후: 쇼다 미치코 , 황후 : 오와다 마사코 )」라고 발언해, 구 황족 · 구화족 이 찬동한 것 받은 발언”이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쇼와 천황 은 1988년(쇼와 63년) 4월 6일에 「신중하게 너무 좋아하는 사람이 없어지거나, 학생에게 시간을 보내도 좋지 않다.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잘 부탁한다」 「나는 본인끼리가 좋다면 그것으로 좋다”, 동 5월 26일에 “고궁(이 시점에서는 덕인 친왕 ) , 그 후에 는 ? [241] .
- 테리 이토 , 사고신 - 공동 저서 '웃음 창가 학회'에서 창가 학회를 비판.
- 오츠키 요시히코 - 블로그 「오츠키 요시히코의 페이지」에서 이케다 다이사쿠・창가학회・공명당을 정교분리의 원칙 의 관점에서 비판.
- 맛있는 히사이치 - 자서 '대문제'로 창가학회를 비판.
- 플로란스 라크로바 - 파리의 국립 연구원 박사. 수십 년에 걸쳐 창가 학회를 취재·연구를 거듭해, 「창가 학회, 금기의 해부」라고 하는 프랑스 국가 박사 논문을 발표.
- 츠츠이 야스타카 - 『SF 매거진』 1965년 8월 증간호에서 발표한 단편 소설 『타락 지옥 불법(중공 문고 『도카이 도 전쟁』 수록)』에서 창가 학회·공명당을 연상시키는 종교 단체·정당이 '정교 일치 체제 '에서 지배하는 공포의 일본 사회를 그렸다 [주 21] . 또, 아사히 신문 에서 연재하고 있던 장편 「아침의 가스 펄 ( 아사히 신문사 후 신시오 분고)」에서는, 신자다운 인물로부터 츠츠이 야스타카에 대한 개인 공격의 투서가 있었기 때문에, 츠츠이 야스타카는 작중에서 실명을 들고 비판하고 있다 [주 22] . 게다가 『현대어 뒤사전( 문예춘추 문고)』에서는 『창가학회. 이렇게? 실망'이라고 야유하는 기술을 볼 수 있다.
- 단훈 - 자서 '반인간혁명'으로 창가학회를 비판.
- 니라자와 타다오 ( 일본 공산당 전 적기 편집 국장) - 기존 언론이 창가 학회 비판을 금기시하고 있다고 적기로 창가 학회 비판을 전개.
- 고토 타다마사 (모토 야마구치 조계 고토조조장) - 자서 『미워하면서』에서 창가학회와 고토조(야마구치조)와의 관계를 기재.
- 蛭子能収- 공명당 지지자로부터 식사 중에 강한 사인을 요구받아 공명당에 대한 지원도 부탁받은 것에 입복. "공명당의 신자는 왜 그렇게 열심한지 신기하지만 상대의 기분을 생각하지 않는 내가 남은 사람만의 모임이겠지-라고 생각한다"고 비판[243 ] .
- H·N·맥팔랜드(미국의 종교학자) - 1963년부터 64년에 걸쳐 일본에 체재해 일본의 퍼펙트 리버티 교단(PL교단), 생장의 집 등의 신종교에 대해 조사해, “ 신들 의 러쉬 「아워」라는 책에 정리했다 [244] . 그 책 속에서 유일하게 창가학회 조사 때만은 불쾌한 생각을 했다며 “창가학회의 많은 신자들의 두터움이나 무작법에 의해 여러 번 여러 번 기분을 해치게 된다”고 적고 있다[ 244 ] .
- 나빈 패트너 야크 (인도 지방 정당 비주 자나타 다르 당수 , 나중에 인도 오리사 주 총리), "간디 킹 이케다 전"에 대해, 창가 학회는 간디만으로는 인도 독립을 할 수 없었거나 인도 역사 인식을 배워야 한다고 비판 [245] .
- 이노구치 쿠니코 - 2000년(헤세이 12년)에 창가 학회의 「종교적 단결심」("religious solidarity")을 핵으로 한 "거대한 정치적 힘"("enormous political power")을 경계하는 사람도 있다 라고 말했다 [128] .
- 이시이이치 - 2007년 10월 16일 제168회 국회 참의원 예산 위원회 에서 공명당 과 창가학회의 관계에 대해 질문했다 [246]
- 후지쿠라 요시로 (약간 일간 컬트 신문을 주재하는 종교 저널리스트) - 창가 학회에 대해서, 현재에서도 끈질긴 '절복'이나, 비판자나 조직내의 조반자에 대한 상궤를 벗어난 공격이 항상 행해지고 있다고 하고 있다 . 또 「안보법제」등을 둘러싼 조반자측에 대해서도, 「공명당은 원래 평화의 당」 「이케다 다이사쿠 선생님은 평화주의자」등의 주장은, 비판자에의 공격이나 언론 방해, 끈질긴 절복 등의 사회 문제가 오히려 이케다의 회장 재임기간 중에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이케다를 미화하는 '옛날의 창가학회' 정당화는 역사의 왜곡이라고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오히려 이들 사회적인 비판을 받은 문제를 이케다 신앙에 근거해 정당화해 온 것이 컬트적 측면을 정당화하는 '과거의 창가학회'라고 한다[247 ] . 1960~70년대의 언론 출판 방해 사건, 70년의 공산당·미야모토 현지택 도청 사건, 강인한 절복(권유)이나 선거에 있어서의 부정 문제 등, 이케다씨 지도하의 창가 학회가 비판되거나 이케다씨 자신의 관여 하지만 의심받은 문제가 다수 있어, 그래서 창가학회는 이케다 다이사쿠와 함께, 지금까지 천하의 미움받은 사람이었던 것이 아닐까, 하고 있다[248 ] .
- 미조구치 아츠시 (논픽션 작가, 저널리스트) - 창가학회는 종교법인임을 철저히 활용하고 악용하고 있다고 비판. 70년의 출판 방해 사건에 의해, 저작자나 출판사에 협갈을 더해, 학 금기를 만들어 왔다고 한다. 또, 선거에 있어서는, 80년대까지 바꾸어 볼 투표를 일로 했다고 했다고 한다. 창가 학회가 출판 방해와 전화 도청, 갈등 투표, 재판 공작 등을 과거에 실시하고 있어 사회 부정의 덩어리인 것은 상식이다. 회원에게 '내어, 내놓고 내놓으라'고 절규할 정도의 격렬함으로 생활보호 가구에서도 수입을 끌어당기는 것이 학회류라고 한다[249 ] .
창가학회는 '이케다교'라는 비판 [ 편집 ]
나이토 쿠니오나 나나 사토 카즈카 등의 저서에서 볼 수 있듯이, 창가학회는 실질적으로 ‘이케다교’가 아닌가 하는 비판이 있었다 [비 7] [비 8 ] . 이러한 비판을 수반하는 호칭을 둘러싸고는 각 방면에서 다음과 같은 것이 알려져 있다.
- 일본 공산당 의 기관지 「신분 적기」는, 「이케다 다이사쿠본 불론」의 존재 및 초대·목구, 제2대·도다, 제3대·이케다를 “삼대 회장” “창가 학회 영원의 지도자”라고 하기로 결정한 회칙의 존재 등을 접하고 니치렌 마사무네와의 관계를 거절한 ‘이케다교’ 설립의 선언이라고 비판하고 있다[비9 ] . 그 후 2016년(2016년) 11월 7일에 시행된 개정 회칙의 제1장 총칙 제3조 2항에 「「3대 회장」의 경칭은, 「선생님」으로 한다. '라고 가필 명기된다 [SG 90] .
- 니치렌 마사무네 종무원 교학부에 의한 출판물에서는, 니치렌 마사무네가 이케다 대작을 파문에 이른 1991년경에는, 경본이나 과거장, 수주를 창가 학회 독자적인 것으로 변화시키는 움직임 이 보인 것을「 이케다교 독립 노선을 드러냈다”는 견해를 나타내고 있다 .
- 전 공명당 위원장의 야노 아야야는 저서에서 '이케다교'로의 변용이 일어나고 있다 [ 250 ] . [251 ] .
- 기독교 도 ( 일본 기독교단 )에서 전 외교관 작가 사토 유우 는 마츠오카 미키오 와의 공동 저서에서의 대담에서 굳이 이케다교 등이라고 비판하는 세력이 있는 것을 서로 인정한 다음 그러한 세력이 주시 하고 있는 교리 속에서의 이케다의 자리매김에 어려운 과제가 있다고 한 마츠오카의 생각에 응해, 그 배경에 비판하는 측으로부터 개인 숭배라고 보여지고 있는 것이 있지만, 「신경쓰지 않고 , 당당히 이케다 회장(원문 엄마)의 중요성을 내세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의견하고 있다 [SG 106] .
각주 [ 편집 ]
주석 [ 편집 ]
- ↑ a b c 2021년 5월 3일자로 부인부의 명칭을 「여성부」로 변경하고, 11월 18일의 창립기념일에 통합을 완료한다.
- ↑ 완성은 2009년. 2021년에 여자부가 여성부(구·부인부)와 통합했을 때 그때까지의 「창가 여자 회관」으로부터 개칭되었다[SG 16] [SG 17 ] .
- ↑ 당시는 1개월에 3회의 「순간」부터 스타트했다.
- ↑ 3개조란,
- 절복한 사람은 신도로서 각 사원에 속하는 것
- 당산의 교리를 지키는 것
- 삼보 (불·법·승)를 지키는 것
- ↑ 당시 사용하고 있던 니시칸다의 본부 빌딩이 좁아졌기 때문에, 시나노쵸 25번지에 있던 425평의 부지를 구입해, 일단은 본부 건설 용지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도다가 소모토야마 오층탑의 수복을 우선할 의향을 나타내었기 때문에 시나노쵸 25번지의 용지를 매각했다 [SG 31] .
- ↑ 당시에는
- 일가화악의 신심
- 각 사람이 행복을 잡는 신념
- 어려움을 극복하는 신념
- 일가화악의 신심
- 행복을 잡는 신념
- 어려움을 극복하는 신념
- 건강 장수의 신심
- 절대 승리의 신념
- ^ 학회 측의 주장 [SG 43] . 니치렌 마사무네를 이탈한 스님으로 구성된 청년 스님 개혁 동맹은 닛렌 마사무네 상층부가 C작전의 계획을 하고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SG 44] [SG 45 ] .
- ↑ 학회측의 주장 [SG 46] . 학회 측은 “명예 회장은 “묻고” 문서에 있는 듯한 발언을 전혀 하지 않았다”며 본부 간부회에서 이케다가 니치렌 마사무네 종문이나 히가시를 비판한 사실은 없다고 반론. 나중에 송부된 「질문」문서에서 인용된 이케다 발언의 테이프의 반역을 의도적으로 개악하거나 근거가 없는 전문에 의한 비방 중상의 종류가 포함되어 있다고 지적한 바, 종문 측이 사과와 철회를 강요당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 ↑ 「여성부」발족과 이에 따른 회칙 개정(5월 3일 시행)은 본부 간부회에서의 발표에 앞서 화상회의 방식으로 개최된 제79회 총무회(4월 17일 개최)·참 의회 (4 월 17 일 개최) · 중앙 회의 (4 월 18 일 개최)에서 승인되었다 [SG 78] [SG 79] [SG 80] .
- ↑ 1995년 제정의 「SGI 헌장」을 전면 개정한 것.
- ^ 창가학회의 견해에 의하면, 연락회의에서 학회측은, 줄기 숙정을 요청했다고 하고 있다 [SG 45] .
- ^ 창가학회의 견해에 따르면, 학회측은 대화에 의한 문제 해결을 도모했다고 한다 [SG 45] .
- ^ 창가학회의 견해에 의하면, 이 파문 사건은 나중에, 히가시의 측근·가와베 자치의 메모(강변 메모)의 기술이나 종문 해외부 주임·후쿠다 코이도가 작성한 작전 계획서의 기술 등 부터, 「창가 학회 분리 작전(C작전)」의 이름 아래에, 「니치렌 마사무네가 일방적으로 창가 학회를 잘라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는 것이 발각했다고 한다[SG 44] [SG 45 ] .
- ^ 나중에 히가시는 숙박처의 호텔에서 외출한 것은 인정했지만, 매춘부와의 요금 트러블 등에 대해서는 부정하고 있다[SG 44 ] .
- ^ 종문측은 도다가 작성했다고 하는 「통패」문서를 꺼내, 「학회도 전쟁에 가담해, 신찰을 용인하고 있었다」라고 하는 반론을 실시했지만, 학회측은 이 「통견」문서를 「괴문서」라고 본 후, 「필적이 도다의 것과는 달리, 쓰여진 연대도 불명.또, 마키구치의 심문 조서나 도다의 조사 조사 기록에도 등장하지 않는 완전히의 위조 문서」이다 "통계"문서의 존재 자체를 부인했다 [SG 94] .
- ^ 창가학회 공식 홈페이지 「SOKAnet」이나 소설 「인간혁명」에서는, 도다는 체포 당초, 스가모의 도쿄 구치소에 수감되어[ SG 98] , 출옥 직전이 되어 토요타마 감옥에 이송되었다고 한다 [SG 99] [SG 100] .
- ↑ 자민당 이외에 무라야마 토미시 ( 사회당 )· 무무라 정의 ( 신당 사키가케 ) 등도 참가하고 있다.
- ↑ 「무관의 친구」에의 참가는 임의. 판매점으로부터 위탁을 받고 성교신문 등의 배달을 하고, 배달 실적에 따른 수수료가 판매점에서 지급된다.
- ^ 월요일 - 목요일 22시대는 ' SCHOOL OF LOCK! '( TOKYO FM 을 키스테이션에 JFN 계) 내에서 방송하고 있었다.
- ^ 「아시가루회」라고 불리는, 창가학회 본부의 전직원 3인조나 원일 연합정종 스님 등, 창가학회에 비판적인 인물
- ^ 덧붙여 발표 후 작품을 창가학회에서 맹렬하게 비판받았기 때문에, 츠츠이는 단편 '말세법 화경(신쵸 문고 '웃지 말아라' 수록)'에서 응수 했다 .
- ^ 츠츠이 야스타카는 ' 소문의 진상 ' 연재 '웃음 개연의 전망'에서 이 연재를 고지했을 때 '레벨이 낮은 의견에 대해서는 등장 인물이 반격한다'고 명언하고 있다[242 ] .
출처 [ 편집 ]
- ^ a b 와타나베 카즈코 「올 컬러로 알기 쉽다! 세계의 종교: 신앙의 역사와 지금을 알 수 있다! 』 서동사, 2015년 7월 10 일
- ↑ 츠카다 호타카 2015 , pp. 114–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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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점째는 「이케다 다이사쿠가 가지는 매력과 그와 학회원과의 강한 인연」이다.
- “이케다를 학회원 한사람 한사람이 경애하고,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다. 을 강하게 연결하고 있다. 그것은 일본을 넘어 세계에도 퍼지고 있다”고 하고 있다.
- 두 번째는 "좌담회 등 한사람 한사람의 학회원이 존중되는 활동 시스템"이다.
- "창가학회에는 '한사람을 소중히 한다'는 말이 있다고 듣는다. 이런 한사람 한사람을 존중하는 좌담회라는 운동을 창가학회는 전세계에서 꾸준히 전개하고 있다"고 말했다.
- 세 번째는 '숙명 전환'이라는 불법의 교리이다.
- “학회원은 모두 숙명전환을 목표로 날마다 근행을 계속하고 있다. 아무도 없다. 학회원은 그 고뇌의 원인을 자신의 '숙명'에 있다고 받아들여 자신의 내면을 변혁함으로써 고뇌를 해결할 수 있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출처 : 타하라 소이치로 『창가학회』 매일 신문 출판, 2018년, pp.354-356)
- 1점째는 「이케다 다이사쿠가 가지는 매력과 그와 학회원과의 강한 인연」이다.
- ^ 종교학자인 시마다 히토미 는 창가학회가 이러한 대세력이 된 요인에 대해 두 가지 점을 지적하고 있다.
- 첫 번째는 ' 영 에 대한 믿음의 유무'이다.
- 두 번째는 " 장례 "이다.
- “창가 학회는 교세를 늘리고 있었을 무렵에는 출가한 스님 집단인 니치렌 마사무네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어, 창가 학회의 회원이 되는 것은 동시에 닛렌 마사무네의 신도가 되었기 때문에 장례식 도 니치렌 정종의 형태로 행해지고 있었다.그러나, 다른 신종교는 회원이나 그 가족이 사망했을 경우의 장례라는 의식이 있는 곳은 거의 없고, 친가의 불교 종파의 형식으로 장례가 행해졌기 때문에, 그 때, 입회한 신종교의 신앙을 탈퇴하고 친가에서 신앙하고 있던 기성의 종교로 되돌아가는 계기가 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시마다 유미 동상, 6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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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토 유, 마츠오카 미키오 (2015-11-28). 창가 학회를 말한다 . 제3분명사 . p. 53. ISBN 9784476033526 2021년 9월 17일 열람
비판측 자료 [ 편집 ]
- ↑ 『신분 적기』 2002년 3월 30일자
- ^ a b “이케다씨 는 “영원의 지도자” 창가 학회가 “회칙”을 개정” . 심부 적기 .
- ↑ “제2장 3, “국주립 계단”의 망설임”
- ↑ “공명당과 창가학회 “정교일체”에서 “악정전범”의 역할”. 신분적기. ( 2007 년6월4일) 2016년1월31일 열람.
- ^ '신부적기' 창가학회 들어가지 않는다면 승급차별 조례에서 성교신문 읽기 40명 갑자기 해고 내장사
- ^ “ 창가학회·이케다 다이사쿠씨에게 묻는 31년 전의 “맹성”은 세상을 멍하니 허언이었는가”불파 철삼(『신부적기』 2001년 7월 22 일자 )
- ^ “ 창가 학회 이케다 다이사쿠의 아쿠나키 야망 : 이제, “이케다교”로 변질한 진흙 늪 조직의 유쿠에” . CiNii 도서. 2021년 9월 17일 열람.
- ↑ “ 이케다 대작·환상의 야망 : 소설 '인간혁명' 비판 ”. CiNii 도서. 2021년 9월 17일 열람.
- ↑ “창가 학회의 “ 이케다교” 설립 선언/ 회칙 과 종교 법인 규칙 을 변경” .심부 적기 .
- ^ “ -신흥 종교 ‘창가 학회’- ‘회칙’ 개변의 기만을 규명한다 ” (PDF). 니치렌 마사무네 종무원 교학부. p. 14. 2021년 10월 2일 열람.
기타 1차 자료 [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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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학회 친구 장례 플랜/유한회사 11번·메모리즈/진노시의 장례식사 ”. 2013년 11월 1일 열람.
- ↑ “ 친구장 - 대진장제 세레모니 ”. 2013년 11월 1일에 확인함.
- ↑ 공익재단법인 국제종교연구소
- ↑ 구마모토현 우토시
- ↑ 유엔 방재 세계 회의 - 센다이시
- ↑ 세계인도 정상회담의 사이드 이벤트 목록
- ↑ a b c 국제연합홍보센터
- ↑ UNODA 공식 사이트
- ↑ UNHR 공식 사이트
- ↑ 후쿠시마현 나미에쵸립 나미에 중학교 공식 HP
- ↑ 동양철학연구소 “사본의 목적”
- ↑ 창가학회 “호화경사본 시리즈” 일람
- ↑ 헤세이 12년(네) 제3364호 손해배상 청구 항소 사건 도쿄 고재 판결(2001년 1월 31일)
- ↑ 제168회 국회 참의원 예산 위원회 제2호』참의원 , 2007년(2007년) 10월 16일( 의사록 )
- ↑ 핵무기없는 세계에 대한 도전 | 창가 학회 공식 사이트
- ↑ 프랑스어 보고 1995년 ( 영어 번역 ), 프랑스 국민 의회 , 의회 위원회 보고
- ↑ 프랑스 국민의회 (1999년 6월 10일). “ Les sectes et l'argent ” (프랑스어). 프랑스 공화국. 2009년 4월 20일에 확인함. “enquête sur la situation financière, patrimoniale et fiscale des sectes, ainsi que sur leurs activités économiques et leurs relations avec les milieux économiques et financiers[(일본어) 컬트의 재무, 재산, 수익 등 금융관계에 관한 공청]”
- ↑ 제168회 국회 참의원 예산위원회 제2호 참의원, 2007년 10월 16일 회의록, 2012년 11월 7일 열람
- ↑ 참의원 종교법인 등에 관한 특별 위원회 - 3호 2005년 11월 27일
- ↑ 도쿄 지방 법원 판결 <2009년 2월 5일
- ↑ 헤세이 7년형(와) 894호 헤세이 14년 7월 29일 도쿄 지방 법원
참고 문헌 [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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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혁명 (전12권)( 이케다 다이사쿠 저, 성교신문사 )
- 신·인간 혁명 (전 30권)(이케다 다이사쿠 저, 성교 신문사)
- 밖에서 본 창가학회(무라오 행 일저 제3분명사 , 2003년)
- 憚りながら ( 고토 타다마사 , 보물섬 , 2010)
- 아사히 신문 아에라 편집부 「창가 학회 해부」아사히 신문사 <아사히 문고>, 2000년 1월 1일. ISBN 4-02-261286-X .
- 나카노 히로시「전후 일본의 종교와 정치」하라 서방, 2004년 2월 25일. ISBN 4562090103 。
- 츠카다 호타카「제4장 창가학회=공명당」 「종교와 정치의 전쟁점 보수 합동과 정교 일치의 종교 사회학」 하나덴샤, 2015년 3월 25 일 . ISBN 978-4763407313 .
- 시마다 유巳『창가학회』신시오샤 , 2004년 6월 20일. ISBN 4-10-610072-X .
- 오충방 『일본의 조류 창가학회 발전의 행보』 1968년 1월 31일.
- 스다 하루오 『닛코몬류와 창가학회』 도영사, 2018년 9월 5일. ISBN 978-4-86265-687-2
- 타하라 소이치로『창가학회』매일 신문 출판 , 2018년 9월 14일. ISBN 978-4620324074 .
- 창가 학회 장례식 친구 장
관련 항목 [ 편집 ]
외부 링크 [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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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룩한 종교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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