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 인터뷰1] 유동식 교수, “신학의 동기는 초월의 의지”
[기획 대담] 문화신학자 유동식 교수- 1부
입력 Feb 19, 2015
[편집자 주] 문화신학자 유동식 교수의 자택은 숲속에 고즈넉하게 자리잡은 듯 나무들 사이로 비치는 햇볕이 따사로운 정원을 끼고 있었다. 목줄 달린 강아지 한 마리가 오랜 지인인 듯 기자를 반갑게 맞이했지만, 그 정원에서는 정원을 가득 메웠을 목향의 기억과 30년간 드나들던 인적의 기억도 약간의 낯설음을 실은 반가운 얼굴을 하고 문가에 서있었다. 나무와 토양의 향취, 그리고 사람살이의 흔적은 그 정원뿐만 아니라 집의 건물에도 스며있어서 실제로 그곳에서 살았음, 그리고 그곳에서 살고 있음의 의미를 넌지시 알려주었다. 유 교수의 토착화 신학은 이처럼 이곳에 우리가 살고 있음을 토대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토착화 신학은 하나님의 위상을 지역적으로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주적인 실체로 이해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유 교수로부터 그의 신학적 토대와 가능성에 대해 들어보기로 했다. 설 연휴를 맞이해 기획된 이 대담을 총 3부에 걸쳐 싣는다.
▲2월 초 한국 신학계의 대표적 문화신학자 유동식 교수를 그의 자택에서 만났다. 설 연휴를 맞이해 기획된 이 대담에서 본지는 토착화신학의 1세대라 불리는 그의 신학과 삶의 궤적을 조명하며 한국 신학의 어제와 오늘을 평가하고, 미래를 전망해 봤다. ⓒ사진=지유석 기자
이인기 국장(문): 황해도 남천에서 출생하셨는데, 험난한 한국사의 격량을 겪으셨을 것으로 보입니다. 요즘 항간에는 <국제시장>이라는 영화가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혹시 이 영화를 보셨는지요?
유동식 교수(유): 말은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누가 데려가지 않으면 외출하기가 힘이 듭니다. 밤에 외출하거나 시내에 나갈 때는 교인들이 나를 데리러 와요. 최근에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는 봤는데 <국제시장>은 못 봤습니다. 하지만, 내가 살아온 과거이니까 그 영화의 내용은 알고 있지요.
문: 혹시 625동란 중에 피난을 오셨나요?
유: 아니요. 황해도에서 국민학교 때 춘천으로 이사를 왔지요. 그 대신 일본에서 신학교를 다니다가 학병에 끌려갔고 학병으로 2년간 복무하다가 해방을 맞았습니다.
구마모도에서 학병으로 있었어요. 약 20여명이 끌려갔는데 반은 중국으로 보내고 반은 남양으로 보내게 되었거든요. 그때 중국으로 갈 사람들은 갔는데, 남양으로 갈 사람들은 폭격 때문에 출발을 못하고 기다리다가 결국 못 갔습니다. 불행 중 다행이었지요.
문: 이렇게 역사적 체험과 관련하여 질문을 시작하는 이유는 토착화 신학의 기저에 역사적 체험의 특이성이 전제되어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신학적 사고가 역사와 현실과 신앙의 조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까?
유: 그렇지요. 역사를 이야기하니까 말하는데 나의 인생에 있어서 두드러진 역사적 경험은 내가 체험한 구원과, 그리고 외적으로 815해방, 625동란 두 번다 죽을 고비에서 하나님의 섭리로 구원을 받았던 일입니다. 모두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구원을 체험한 경우에 해당해요.
구원을 역사적 경험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역사의 현장 속에서 내가 겪은 초월적 체험이 나의 신학을 구성하는 씨앗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신비주의적인 입장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고난으로부터의 초월, 혹은 승화가 내 신학의 동기였다는 말입니다.
문: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개인적인 체험을 들려주실 수 있으신지요?
▲신앙 생활을 함에 있어서 개인의 독특한 경험은 실로 중요하다. 유동식 교수 역시 자신의 개인적 체험을 높이 사며,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일방적 은총으로 말미암은 구원"에 대해 말했다. ⓒ사진=지유석 기자
유: 조금 전에 말한 대로 나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일방적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초월적인 체험이 나의 인생 이력에서 현실의 고난을 이겨내는 원리를 부지불식간에 나에게 알려주었지요. 우리 세대는 민족적 열등의식에 많이 시달렸거든요? 그 열등의식이 현실이었고 그러한 열등의식 때문에 초월의 의지를 다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어릴 때 나는 사람들이 모두 다 크리스천인줄 알았어요. 나는 3대째 기독교인입니다. 어릴 때 조부모님과 살았는데 조부모님들은 예배보고 기도하는 것이 생활이었지요. 조그만 시골에서 하는 일이라는 것이 늘 반복되니까 그것이 생활인 줄 안 겁니다. 동네 아이들이 교회에 안 가는 것이 이상해 보였어요. 신앙생활 자체가 나의 성장환경이었기 때문에 특별한 사건을 겪고서 신앙을 가진 것이 아니어서 나는 유아세례 받고 난 뒤 공식적인 절차로서 신앙고백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문: 온 가족이 신앙생활을 이어왔던 상황이라면 딱히 핍박을 경험한 것은 아닐 텐데, 식민지인으로서의 열등의식이 신학을 공부하도록 영향을 끼쳤다는 말씀이신지요?
유: 우리 세대는 민족적인 열등의식에 많이 시달렸어요. 나는 일제시대에 학창생활을 하면서 1937년까지는 조선어를 한 시간 배웠는데, 그 이후에는 그 시간을 없애고 교련을 시키더니 창씨개명을 시키고 우리말을 못하게 하더군요. 거기서 오는 반발심도 있었지만 민족적인 열등의식이 더 컸습니다. 집에서는 장손이라서 떠받들려 살았는데 밖에 나오니까 그 민족적 열등의식은 나의 전 존재를 압박했어요. 그 당시에 이런 열등의식을 어떻게 극복할까가 나의 화두였습니다.
당시는 취직을 잘하려면 과학을 전공해야 했는데 연희전문에 가서 과학 공부를 했었지요. 그러다가 적성이 안 맞아서 고민하던 중에 열등의식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초월적인 대상을 찾아야한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문: 일본 동부신학교에서 신학을 접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유: 네, 1943년에 동부신학교에 입학했지요. 전시에 동경에 있던 아오야마, 명치, 일본, 루터 신학교가 동부신학교로 통합되었습니다. 관서, 동지사를 합쳐서 서부신학교라고 불렀고요. 그런데 입학하기 전에 성경과목에 자신이 없어서 신학교에 합격하지 못하면 미술을 해볼까 생각도 했었습니다. 미술에 자질이 있었거든요. 미술에 뛰어났던 동생으로부터 예술은 고난을 승화시킨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예술도 현실의 고난을 극복할 방안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민족적 열등의식과 전쟁 통의 규제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으로 신학과 예술에 모두 관심을 갖게 되었지요.
문: 실존적인 고민이 그러한 결정을 하게 하셨군요? 이것은 토착화 신학의 문제와 관련 있는 듯 들립니다. 젊었을 때부터 ‘토착화신학’에 대한 관심이 있으셨습니까? 감신대학보에 “복음의 토착화와 한국에서의 선교적 과제”란 논문을 게재해 일명 토착화 논쟁을 일으키셨지요?
▲유 교수가 신학을 하게 된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유 교수는 일제 강점기 하에 조선인으로 살았던 데서 비롯된 "열등의식"도 중요 원인 중 하나였다고 설명해 주목을 모았다. ⓒ사진=지유석 기자
유: 그것은 두 번째 열등의식과도 관련 있습니다. 625를 겪고 1956년도에 미국으로 공부를 하러갔는데, 한국에 있을 때는 기독교가 서양종교라는 인식이 없었어요. 미국에 가보니까 문화자체가 기독교적이더군요. 그러니까 또 하나의 열등의식이 내 속에 똬리를 틀었습니다. 말도 모자라고 글쓰기도 모자라고 늘 소외된 처지였거든요. 거기서 그야말로 민족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고민을 다시 하게 되었지요.
미국에서 기독교문화적인 소외감 혹은 열등의식이 닥쳐오게 되자 요한복음에 달라붙었지요. 배화학교 종교주임을 하는 동안 예수님의 교훈에 대해 요한복음에 관한 책을 쓰기도 했었는데, 문화적인 차원에서 복음서를 읽어보니까 요한복음이 탈유대주의적인 헬레니즘의 틀에서 씌어졌다는 사실이 매력적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불트만을 한국에서는 읽을 수는 없었는데, 미국에서 존 매커리(John Macquarrie) 성공회 신부가 하이데거와 비교하면서 불트만 신학개설서로서 집필한 『실존주의 신학: 하이덱거와 불트만 비교 연구』(An Existentialist Theology: A Comparison of Heidegger and Bultmann, 1955)를 발간한 것을 읽었습니다. 그것을 읽으니까 눈이 확 트였지요. 그후 나는 불트만에 대해서 석사논문을 썼습니다.
그러니까, 국내에서는 식민지인으로서의 열등의식, 미국에서는 문화적인 열등의식에 시달렸기 때문에 토착화 신학에 대한 생각이 든 것이지요.
문: 그러면 토착화 신학의 근거는 요한복음에서 찾으신 것입니까?
유: 그렇지요. 기원후 90년이면 예루살렘이 함락되었고 그리스 문화가 지배하는 상황이었거든요. 요한복음에서는 유대인을 죄인, 혹은 바리새인으로 취급했단 말입니다. 민족적인 한계를 벗어난 해석학적 토대가 거기서 밝혀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한국에 대해서 잘 모르는 거에요. 우리역사도 잘 모르고 우리말도 못 썼으니까. 그래서 미국에서 귀국한 뒤에 토착화 신학의 해석적 틀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1963년에 스위스 제네바의 보세이 에큐메니칼 센터에서 단기강좌를 듣게 되었는데 주제는 종교간의 대화였고 주 강사가 폴 틸리히였어요. 그때 2주간에 걸친 강의를 받으면서 나름대로 토착화 신학의 윤곽을 그렸습니다. 귀국하자마자 쓴 책이 『한국종교와 기독교』 (1965)입니다. 그 이후로 선교적 과제로서의 토착화를 주제로 논문을 썼고 그때부터 한국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문: 당시로서는 교수님의 논문이 큰 반향을 일으켰겠습니다?
유: 그랬었지요. 진리는 하나인데 민족적인 해석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요지의 반박이 주류였어요. 결국 불트만의 해석을 용납할 수 없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이단 시비도 일었지요.
2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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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 인터뷰2] “풍류신학, 우주적인 하나님의 복음의 실재를 추구”
[기획 대담] 문화신학자 유동식 교수- 2부
입력 Feb 27, 2015
[편집자 주] 문화신학자 유동식 교수의 자택은 숲속에 고즈넉하게 자리잡은 듯 나무들 사이로 비치는 햇볕이 따사로운 정원을 끼고 있었다. 목줄 달린 강아지 한 마리가 오랜 지인인 듯 기자를 반갑게 맞이했지만, 그 정원에서는 정원을 가득 메웠을 목향의 기억과 30년간 드나들던 인적의 기억도 약간의 낯설음을 실은 반가운 얼굴을 하고 문가에 서있었다. 나무와 토양의 향취, 그리고 사람살이의 흔적은 그 정원뿐만 아니라 집의 건물에도 스며있어서 실제로 그곳에서 살았음, 그리고 그곳에서 살고 있음의 의미를 넌지시 알려주었다. 유 교수의 토착화 신학은 이처럼 이곳에 우리가 살고 있음을 토대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토착화 신학은 하나님의 위상을 지역적으로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주적인 실체로 이해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유 교수로부터 그의 신학적 토대와 가능성에 대해 들어보기로 했다. 설 연휴를 맞이해 기획된 이 대담을 총 3부에 걸쳐 싣는다.
▲토착화 신학과 관련된 논란이 촉발된 지점은 어디였을까? 혹 제사 문제는 아니었을까? 유동식 교수는 "제사 문제는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며 오히려 "축자영감설, 즉 해석학의 문제가 주요 논란 거리였다"고 말했다. ⓒ사진=지유석 기자
문: 토착화 신학과 관련된 논란은 주로 어떤 문제에 대해서 전개되었습니까? 예를 들어, 제사와 관련하여 논란이 일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유: 제사 문제는 교회에서 거론조차 되지 않았어요. 교회에서는 축자영감설, 즉, 해석학의 문제가 주요 논란거리였습니다. 해석학을 허락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문제가 주요 초점이었던 것이지요. 그 당시에 교회 강단의 설교는 여전히 구약성서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한 분이신데 설교는 유대교의 전통에 매여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지요. 토착화 신학이 쑥스러웠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문화 속에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는데도 유대문화를 통해서만 하나님과 대화하려고 하는 것이 안타까웠던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유대인들을 통해서 계시하셨지만, 유대민족문화를 중요시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믿는 것은 우주적인 진리인데도 굳이 유대민족의 이야기를 문자대로 믿고서 설교를 하더란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전이해에 따라서 하나님을 설명해야 한다는 생각이 더 확고해졌었지요.
문: 토착화 신학에 대해서 좀 더 설명해주시겠습니까? 교수님께서 실제로 연구해오셨던 과정을 곁들여서 설명해주시면 시대상황적 이해에 도움이 되겠습니다.
유: 토착화(indigenization)라는 말은 스리랑카의 감리교 주교 나일스(D. T. Niles)가 처음 사용했어요. 나는 한국토착화신학으로서의 풍류신학을 연구했습니다. 풍류신학이란 일종의 해석의 틀이지요. 우리가 이해하는 진리도 모두 다 틀에 의한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영성의 틀에 의해서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진실에 가깝게 다가가는 길이 될 것입니다. 머리로 이해하기보다 우리의 존재로부터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68년에 샤머니즘을 공부하러 일본으로 갔습니다. 우리 민족정신의 뿌리가 샤머니즘이고 우리 민중의 가치관적 뿌리가 거기에 있다고 생각했었거든요.
당시 일본 동경 국학원대학의 호리 이치로 교수에게 편지를 했습니다. 그 분은 멀치아 엘리아데 교수의 친구인데 그 분이 함께 연구하자고 승낙해서 샤머니즘을 공부하게 되었지요. 등록금은 장학금으로 해결하고 약간의 해외장학금을 얻어서 생활비를 충당했습니다. 협동연구를 하는 동안 민간신앙 세미나를 주로 했습니다. 일본의 민간신앙 전통을 연구하면서 『한국 무교의 역사와 구조』를 썼지요. 여기서 주로 다룬 것이 화랑도이며 풍류도였습니다.
나는 화랑도, 풍류도를 천착하는 동안 그것이 기독교와도 연결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 한국의 기독교 인구가 전체 인구의 20%에 달하는데, 아시아에서도 특이한 일이거든요? 이것은 기독교가 샤머니즘의 유목문화(기마문화)적 구조와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예맥족이 기마민족이거든요? 부여, 고구려, 백제, 일본으로 그 문화가 전달된 것이에요. 우리 민족은 샤머니즘을 전수하면서 거기에 새로운 문화를 가미했습니다. 바이칼 호수 부근의 원시종교가 문화의 옷을 입고 전승되어온 것이 우리의 문화라는 말이지요. 아주 독특합니다.
두드러진 것은 가무를 즐기는 모습, 즉, 『위지동이전』에 나오는 대로 제천의식에서 연일 주야로 음주가무를 즐기는 풍습입니다. 이것은 성경 레위기에 나오는 초막절의 행사 풍습과 흡사해요. 그리고 구약에서는 갯버들 가지를 꺾어서 춤을 췄다고 하거든요? 갯버들이 생명을 상징하는데 우리 탈춤에서는 취발이가 버드나무 가지를 들고 춤을 춥니다.
▲유동식 교수는 풍류의 정신이 우리 민족 문화의 DNA로 보느냐는 질문에 "그렇다"며 현대 한국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정신을 무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진=지유석 기자
문: 이런 특성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것이 화랑도이고 풍류도라는 말씀이시군요? 거기서 풍류신학이 창출된 것입니까?
유: 그래요. 이런 특성을 국가교육이념화한 것이 화랑도입니다. 9세기경에 고운(孤雲) 최치원 선생이 화랑도에서 유불선(儒佛仙)의 이념을 포괄하는 민족의 얼을 확인했지요. 중국이나 일본에는 화랑이라는 말이 없어요. 고운 선생이 파악한 화랑의 교육과정에는 유불선의 철학적 사고를 훈련하는 상마이도의(相磨以道義)와 노래와 춤으로써 즐기게 만드는 상열이가락(相悅以歌樂) 그리고 명산대천을 다니며 심신을 단련하는 유오산수(遊娛山水)의 정신이 들어있습니다. 고운 선생이 이것을 풍류도라 명명했지요.
문: 이러한 풍류의 정신이 우리 민족 문화의 DNA라고 보시는 군요. 그러면 현대 한국의 기독교 문화 속에 그러한 문화의 DNA가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 풍류신학의 주지입니까?
유: 그렇습니다. 그러한 풍류의 정신이 우리의 기독교 문화에서도 드러나야 하는데, 현대 한국기독교는 그것을 무시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나라 사람만큼 찬송을 잘 부르는 민족이 없는데 한국 기독교는 답습되어온 유교적인 전통에 매달려서 그러한 DNA를 억압해 왔어요. 풍류신학이란 새로운 그 무엇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적인 DNA를 되살리는 것입니다. 유교적인 기독교, 율법적인 기독교가 우리의 본래적인 영성을 억압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 문서와 계율을 숭상하는 문화적 압력이 우리의 본래적인 영성에 작용했다는 말이군요?
유: 영성을 억압한 데는 그러한 문자숭상의 태도와 기복신앙이 영향을 미쳤습니다. 현대 한국의 기독교는 그 영향아래 복음 정신이 왜곡된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샤머니즘의 한 원리가 기복신앙인데 거기에 유교적인 형식주의가 결부되어서 현대 한국 기독교의 문화적 특성을 형성하게 된 것이지요. 나는 우리의 본래적인 모습을 복음의 이해와 연결시켜야 진정한 의미의 복음이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국의 기독교는 샤머니즘의 기복신앙과 유교의 형식주의를 결부시켜서 복음을 왜곡시켰습니다.
역사적으로는 1930년에 이용도라는 부흥사가 있었는데, 그이가 부흥회를 하면서 3년 동안 전국을 휩쓸며 성령의 불을 지폈지요. 그런데 한국교회는 그이를 이단으로 매장해버렸습니다. 하나의 역사적인 사례입니다. 우리의 신명에 와 닿는 복음, 우리가 흔쾌히 받아들이는 복음적 해석을 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사도 요한이 헬레니즘의 보편주의를 통해서 유대교의 계시내용을 신학화한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의 풍류도를 틀로 삼아서 복음을 해석해야 합니다.
문: 현재 한국의 교육은 거의 서구화되어 있고 생활풍습도 서구적인 경향을 띠고 있는데 이런 단계에서도 토착화 신학의 가능성을 전망하고 계십니까?
유: 지금은 2단계라고 생각해요. 1930년대만 해도 외국에서 공부하고 온 사람이 손으로 꼽을 정도였거든요. 이제는 외국박사가 넘치잖아요? 21세기에는 수입신학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인 풍류신학, 예술신학이 전개될 것이라 전망합니다. 내가 해마다 연초에는 연세대 대학교회에서 설교를 하는데 이번에는 풍류신학의 도표를 설명했어요. 풍류라고 하면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어서 요즘은 예술신학이라고 부릅니다. 어쨌든 외국의 신학이론을 수학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이 내용을 설교한 것이지요. 제대로 전달이 되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토착적인 신학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유동식 교수가 2015년 1월11일 연세대학교회 설교 시간에 활용한 복음적 실존의 도해 자료.
문: 우리의 신명에 와 닿는 복음 해석을 추구하는 것이 예술신학, 토착화 신학이라면, 그것은 통합적 세계관을 기반할 것으로 짐작합니다. 이 통합적 관점을 기독교 신앙과 접목할 때 제일 우려스러운 점은 그것이 혼합주의로 흐를 가능성이라고 생각합니다. 풍류신학은 혼합주의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갖고 있습니까?
유: 통합이라는 용어를 쓰면 혼합의 우려가 생기지요. 예술과 토착화 신학은 통합보다는 승화에 초점을 둡니다. 그래서 하는 말입니다만, 혼합주의는 종교 간에 쓰는 용어입니다. 한국에서의 혼합주의는 종교혼합을 말하지요.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길인데 그것을 흐리니까, 그 점에 대해서 이단시하는 것입니다. 내 입장은 로고스가 역사적 예수로 육화하는 공간, 즉, 도성인신(道成人身), 성육신의 단계가 ‘종교’의 세계인데 이것을 넘지 못하면 혼합주의가 되는 것입니다. ‘종교’의 세계는 도를 자율적으로 깨닫는 경지가 가능한 영역입니다. 불교가 이러한 ‘종교’의 세계를 대표하지요.
그러나 십자가와 부활은 ‘신’의 영역입니다. 도를 닦는 차원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믿음은 신율(神律, theonomy)적 경지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십계명)으로 다스리는 타율적 차원과 득도를 목표로 삼는 자율적 차원이 통합된 단계이기도 하구요. 대표적인 것이 성례전입니다. 성찬식에서는 눈에 보이는 포도주와 떡을 먹지만 영적인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내 몸에 지닌다는 의미가 있지 않아요? 이것은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한 은혜입니다. 신율, 즉, 신이 역사하는 경지이지요.
요한복음 14장20절은 이 신율적 경지의 완성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이것이 십자가와 부활의 궁극적 완성태인데 여기까지 오지 못하고 헤매면 혼합주의가 되지만, 아버지와 아들과 내가 하나가 되는, 소위 ‘삼태극’의 경지로 들어오면 십자가와 부활에 의한 인격적인 승화를 이루게 됩니다. 복음이 살아나지요. 불교는 여기까지 못 옵니다. 불교는 자율적인 깨달음에까지는 도달하지만 나를 영생으로 구원하는 경지,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은 하나님만이 주시는 것이에요. 니고데모는 불교의 차원까지는 갔어요. 율법을 넘어서 불교의 차원까지는 갔지만 마지막을 모르니까 예수님을 찾아온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지요? 거듭나야 한다고. 그 경지는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의 원리에 따라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늘이 주신 은혜를 받아야 도달할 수 있지 자신의 의로만 도달할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혼합주의는 자신의 의로 득도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경지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토착화 신학은 복음의 핵심을 문자나 제도의 틀에 따라 해석하는 것을 경계하고 우주적인 하나님을 전제로 이해할 것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얼로 나타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에요. 이 말은 하나님의 우주적 특성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우주 도처에 임재하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모든 종교가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다고 봅니다. 다만 서로 차원이 달라지는 것이 문제일 뿐입니다. 어느 단계에 와 있느냐의 문제라는 것이지요. 마지막 완성의 경지를 복음적 실존이라고 지칭한다면, 복음적 실존의 삶을 살 때 “하늘 저편에 가더라도 거기 또한 여기거늘”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3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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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 인터뷰3] “복음적 실존은 하나님의 예술이며 사랑이다”
[기획 대담] 문화신학자 유동식 교수- 3부
입력 Mar 05, 2015
[편집자 주] 문화신학자 유동식 교수의 자택은 숲속에 고즈넉하게 자리잡은 듯 나무들 사이로 비치는 햇볕이 따사로운 정원을 끼고 있었다. 목줄 달린 강아지 한 마리가 오랜 지인인 듯 기자를 반갑게 맞이했지만, 그 정원에서는 정원을 가득 메웠을 목향의 기억과 30년간 드나들던 인적의 기억도 약간의 낯설음을 실은 반가운 얼굴을 하고 문가에 서있었다. 나무와 토양의 향취, 그리고 사람살이의 흔적은 그 정원뿐만 아니라 집의 건물에도 스며있어서 실제로 그곳에서 살았음, 그리고 그곳에서 살고 있음의 의미를 넌지시 알려주었다. 유 교수의 토착화 신학은 이처럼 이곳에 우리가 살고 있음을 토대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토착화 신학은 하나님의 위상을 지역적으로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주적인 실체로 이해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유 교수로부터 그의 신학적 토대와 가능성에 대해 들어보기로 했다. 설 연휴를 맞이해 기획된 이 대담을 총 3부에 걸쳐 싣는다.
▲유동식 교수는 "우리는[그리스도인은] 복음의 핵심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존재"라며 "[그]승화의 한 과정으로서 우리의 영성에 의한 복음 이해를 주장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주장하는 신학의 방법론으로서의 풍류신학은 우리 민족이 이성 보다는 감성에 의한 존재 이해가 있다는 데에 근거한다. ⓒ사진=지유석 기자
문: 복음적 실존이 결국 예술적 성격을 띤다는 말씀이시군요. 고난의 승화가 예술의 원리라면 복음적 실존도 승화를 통해 가능한 영역이지 않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교수님께서는 현대 한국의 기독교가 타율과 자율의 차원을 넘어서 성령의 역사에 힘입어 승화의 경지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시는 것이지요?
유: 그렇습니다. 우리는 복음의 핵심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종교’의 차원에서 그러한 노력을 하다보면 득도는 하겠지만 성령의 은혜를 통한 승화는 불가능합니다. 승화의 한 과정으로서 나는 우리의 영성에 의한 복음 이해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게 풍류신학입니다. 서양철학사는 플라톤의 주석에 불과하다잖아요? 우리 민족은 이성보다는 감성에 의한 존재 이해가 있거든요? 그래서 우리의 실상에 대한 전이해를 토대로 복음의 핵심에 접근해야 합니다. 일종의 방법론인 셈이지요.
문: 그러면 풍류신학이 추구하는 복음적 실존이 무엇이냐의 문제가 남습니다.
유: 나는 복음적 실존이 삼태극의 경지라고 봅니다. 요한복음 14장20절에 나온 대로 아버지와 그리스도와 우리가 하나가 되는 경지입니다. 놀랍게도 그 말씀 뒤에 사랑의 이야기가 나와요. 저 삼태극적인 복음의 핵심이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사랑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얻는 통로라는 것입니다. 즉, 복음적 실존은 사랑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문: 복음적 실존의 내용이 사랑이라면, 그 사랑이 구현되는 공간이 바로 예술의 세계, 아름다움의 세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 풍류신학은 우리의 삶의 속성이 예술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겠군요?
유: 복음의 관점에서 보면 삶과 우주가 모두 예술입니다. 역사와 개인의 삶을 예술로 봐야지 합리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지요. 열심히 정직하게 사는데 가난해요... 이것을 어떻게 합리적으로 설명해요? 계명으로 따지면 십계명 잘 지키고 헌금 잘하면 잘 살아야 하잖아요? 예수님을 보세요. 하나님의 아들이 어떻게 고난을 당하지요? 예술이라는 것은 합리의 단계를 넘어선 승화의 경지인 것입니다.
그림을 그릴 때 아름답게 묘사하지만 저 그림 속의 현실에는 고난이 있거든요. 예술은 고난을 승화시키는 것이에요. 그래서 예술의 속성이 복음적인 것입니다.
대담 첫머리에 나에게 던진 첫 질문이 “<국제시장>을 봤느냐?” 였지요? 그 영화 속의 실상은 비극이잖습니까? 전쟁이 벌어진 것이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그 영화를 보고 감동을 받는단 말입니다. 예술화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요. 그 차원이 아니고는 복음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유동식 교수의 저서 『제3시대와 요한복음』 (동연, 2014) 28쪽에 나오는 '요한의 삼태극 복음' 도해 자료.
문: 승화가 복음의 세계에 토대를 구성하는 원리라는 말씀이시군요.
유: 나는 그것을 복음의 원리라고 말해요. 신앙은 나를 하나님께 맡기는 동시에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불가능한 경지입니다. 신율(神律, theonomy)이라는 말은 폴 틸리히가 쓴 말인데 내가 주관적으로 활용하기는 했지만, 자율과 타율이 결합된 경지라는 차원에서는 그 의미가 통합니다.
문: 교수님께서는 풍류신학, 예술신학을 신학적 방법론의 차원에서 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독자들을 위해서 풍류신학이란 이것이다라고 간명하게 정의를 내려줄 수 있으시겠습니까?
유: 다른 게 아니에요. 첫 번째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복음적 실존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풍류신학의 핵심입니다. 십자가에 나를 죽이고 부활에 동참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자기의 의로 득도의 경지에 이르려는 행위적 신앙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나는 풍류신학이 복음의 핵심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 복음 정신이 생활 속에서 구현되는 현장을 놓치면 복음의 핵심을 놓치게 된다고 보시는 것이지요?
유: 그렇습니다. 나는 요한이 매우 놀라운 통찰력을 가졌다고 봅니다. 예술적 통찰력을 가졌어요. 표현할 수 없는 야훼를 “빛이다, 영이다, 사랑이다”라고 전제하고서는 빛의 형상화, 영의 형상화, 사랑의 형상화를 논리적으로 전개하잖아요? 우리의 삶의 양상이 복음적 실존을 구현하는 쪽으로 가야한다는 사실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 예술이 현실을 초월하여 그것을 승화시키지만 그 본 바탕인 현실을 소실하지 않는 자세를 유지하듯이, 풍류신학도 바로 그러한 자세를 갖고 있어야 하겠지요?
▲유동식 교수가 풍류신학을 통해 추구하는 복음적 실존이란 무엇일까? 그의 복음적 실존은 현실을 초월하면서도 현실을 포용하는, 승화의 경지를 넘어 서 있다. ⓒ사진=지유석 기자
유: 나는 차원이라는 용어를 썼는데 초월된 본 바탕으로서의 차원을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갖고서 승화하는 것입니다. 일차원 없이 이차원이 없고 이차원 없이 삼차원이 없는 것 아니겠어요? 영의 세계인 5차원과 시간의 세계인 4차원이 하나가 된 것이 6차원의 세계, 즉, ‘종교’의 차원입니다. 성육신은 6차원적인 세계의 일입니다. 그리스도를 매개로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가 되는 것은 7차원적인 일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차원을 통과하지 않으면 4차원의 틀 안에서만 맴도는 것입니다. 4차원에서 7차원의 일을 도모하려면 장삿속으로 흐를 수밖에 없어요. 구원파 유병언이 대표적입니다. 4차원적인 생각들에 머물다보니 성적이거나 금전적인 문제들이 자꾸 생기는 것입니다.
문: 현실을 초월하면서도 현실을 포용하는 것이 승화의 경지라면 티끌 속에 우주가 있고 한 순간이 영원을 담보하는 경지가 복음적 실존의 세계인 것이지요?
유: 복음적 실존은 그 경지를 넘어섭니다. 예를 들어, 복음적 실존은 하루가 천 날 같고 천 날이 하루 같은 경지를 포함하지만 복음적 실존의 완성태를 고려한다면 천 날도 너무 짧아요. 그것은 영원의 세계이니까. 절대시간이자 절대공간을 지칭합니다. 나 정도의 나이가 되면 그 경지에 대한 이해가 절실해져요. 언제 부르실지 모르니까.
지금 내가 당신과 대화하는 순간이 영원에 기록되는 일이거든요? 이런 사실을 알아야 현재를 의미 있게 살 수 있어요. 복음적 실존을 구현하면서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사랑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문: 그런 복음적 실존이 교회 안에서 구현된다면 현재의 교계의 분열도 해결될 것 같습니다.
유: 그럼요. 교회일치는 복음 이해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사실은 개개인이 개성을 갖고 사는 것이니까 뜻 맞는 사람들끼리 모이다보면 분파가 생기기 마련이에요. 그것은 본질적으로 문제가 안 됩니다. 다만 복음의 핵심을 훼손하면 안 되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않다면 환경 따라서 문화 따라서 얼마든지 모임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큰 문제는 아니에요.
문: 지금은 너무 분열해서 탈입니다.
▲유동식 교수가 직접 그린 삼태극.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나가 하나로 되는 경지를 나타낸다. ⓒ사진=지유석 기자
유: 왜 남의 일에 간섭들을 하는지 몰라요. 원효의 글에 위관규천(葦管窺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갈대의 구멍으로 하늘을 본다는 말입니다. 각자는 갈대 구멍으로 하늘을 보면서 자기만 하늘을 봤다고 우기는 거에요, 다른 사람은 못 봤다고 말하면서. 자기가 세상을 알차게 봤다고 주장하는데 고작 갈대 구멍 속의 하늘이잖아요? 문제는 최종지향이 복음적 실존이냐 아니냐입니다. 사랑이냐 돈벌이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것을 판단해야 해요. 복음적 실존, 즉, 삼태극적 존재... 하나님이 계시고 우리 속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계신다는 것만 확실하면 그 이외는 문화운동일 따름이에요. 각자가 개성에 따라서 활동하는 것을 인정해야지요.
문: 결국은 복음적 실존에 대한 이해가 바탕이 되지 않은 채 신앙을 제도로서, 계율로서 이해하다보니 한국교회 자체가 형식주의, 기복신앙에 매달린다는 비판을 받게 된 것 같습니다. 이러한 비판을 극복하는 길은 복음적 실존에 대한 이해가 명백해야 한다! 이것이 기독교의 위기상황을 극복하는 길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유: 그래요. 복음으로 돌아가야 해요. 종교개혁에서 ‘믿음만으로, 성서만으로’라는 정신을 지금 말로 하면, ‘복음만으로’라고 해석할 수 있어요. 물론 해석의 틀이 여기서도 달라지겠지만, 나는 예술신학적인 차원에서 해석합니다. 바울도 믿음, 소망, 사랑 가운데 제일은 사랑이라 했듯이, 나는 복음적 실존이 창조적 사랑이라고 봅니다. 모든 행복과 기쁨은 거기서 나오거든요. 이것을 줄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면 밤낮 장삿속으로 교회가 운영되는 것입니다.
문: 귀한 말씀을 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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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 인터뷰2] “풍류신학, 우주적인 하나님의 복음의 실재를 추구”
[생전 인터뷰1] 유동식 교수, “신학의 동기는 초월의 의지”
“붓 놀림속에서 창조 세계와 복음의 실존을 깨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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