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오대산문수신앙의 성립에 대한 재검토 2018 곽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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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학연구(Journal for Buddhist Studies) 제54호(2018.3) pp. 95∼118
신라 오대산문수신앙의 성립에 대한 재검토
곽뢰(郭磊)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dgugl@hanmail.net
I. 머리말
II. 당 오대산문수신앙의 성립시기
III. 삼국유사 속 오대산문수신앙 관련 기록
IV. 오대산문수신앙의 신라 전래
V.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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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어
화엄경(華嚴經), 화엄경탐현기(華嚴經探玄記), 오대산(五臺山), 의상(義相), 법장(法藏), 승전(勝詮), 성덕왕(聖德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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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문
오대산문수신앙과 문수신앙은 별개의 연원에서 출발하는 신앙들이며, 두 신앙은 구 분하여 보는 것이 타당하다. 문수신앙은 대승불교의 보살사상에 의거한 신앙이며, 오대 산문수신앙은 화엄경(華嚴經)「보살주처품(菩薩住處品)」에 나오는 청량산(淸凉山)을 중국의 대주(代州) 오대산으로 해석되는 과정을 통해 형성된 것이다.
중국 오대산문수신앙의 형성 과정은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동진시대부터 남 북조시기까지(418-581)를 ‘문수신앙의 출현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수부터 당까지 (581-798)를 ‘문수신앙의 흥성 및 오대산문수신앙의 출현 시기’라고 규정할 수 있다. 수 당 시기에 이르러 문수신앙이 군주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기 시작하였는데, 특히 오대 산이 7세기 후반에 당나라 군주가 지원하는 전국적인 성산(聖山)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신라 오대산문수신앙의 수용 시기는 8세기 중엽을 넘어서지 않는다. 법장(法藏,
643-712)이 편찬한 화엄경탐현기(華嚴經探玄記)권15에서 청량산이 대주 오대산이라
고 설명한 내용이 있다. 이러한 내용이 승전(勝詮, ?-?)을 통해 신라로 전래되었고, 이후 의상(義湘, 625-702)도 인지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청량산=오대산’이라는 인 식이 의상 현존시기에 전파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와 같은 가능성을 가진 전래 과정 을 통해 오대산문수신앙은 신라 중대에 전격 수용된 것으로 보인다.
8세기 초부터 중반까지 신라는 내부적으로 혼란했을 뿐만 아니라 외부의 위협으로 인해 불안정한 시기였다. 이러한 당시 신라의 정세를 생각해 볼 때, 오대산문수신앙을 수용한 정황이 좀더 명확해진다고 할 수 있다. 즉, 성덕왕이 즉위할 때와 즉위 이후에 왕 권 강화에 도움을 준 명주지역의 불교 세력을 규합하여 현세적 이익 측면의 성격이 강 한 오대산문수신앙을 체계화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화엄경「보살주처품」에는 청량산에서 문수보살이 상주설법(常住說法)하 고 있다고 기재되어 있다. 이 문수보살의 주처(住處) 청량산은 중국에서 불교 사상의 토착화가 진행되면서 중국 내에 있는 오대산을 지칭한다는 이해가 당 대(唐代)에 발생하였고,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오대산문수신앙이 출현하였 다. 중국 오대산은 산서 북부에 위치한 산으로서, 역사적으로 고대의 정치・사 회 발전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오대산이 성산신앙의 대상으로 자리매김된 것 은 정치적 영향이 심대하였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지역 신앙의 중심지였던 오대산이 당대 7세기 후반에 이르러 문수신앙과 결합하면서, 오대산문수신앙 으로 전개되었고 오대산은 전국적 위상을 가진 불교 성산(聖山)이 되었다.
신라에서는 구법승의 활약에 따라 본격적으로 한반도 전역에 불교가 전파
되기 시작하였고 많은 불교 경전과 사상들이 전승되었다. 이 과정에 화엄신앙
및 그 속에 오대산문수신앙도 포함되었는데, 신라 불교 발전에 많은 영향을 주 었다. 이 신앙은 화엄경의 유통 및 화엄종의 성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오대산문수신앙이 화엄경과 화엄신앙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 확립된 신라 중대에 성립된 것은 결코 시대적 상황과 어긋나지 않는다. 기존의 오대산신앙 중대 성립설은 ① 오대산 사적이 성덕왕(재위 702-727)의 즉위를 둘러싼 쟁탈전을 반영한 것이므로 성덕왕대에 성립되었다는 주장 )과 ② 오대 산에서 독송한 김광명경이 8권본이므로 오대산신앙 전체 성립 시기가 8세 기 중엽을 넘지 않은 것이라는 주장 )이 대표적인데, 오대산 기록 전체가 중대 의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본 것이다.
한편 신라의 오대산문수신앙이 자장에 의해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이미 널 리 알려져 있는 주장으로서 그동안 자장에 관한 연구가 선학들의 의해 많이 축 적되었다. ) 그러나 자장이 과연 중국 오대산을 참배하였는가에 대해서는 불 분명하다. 그동안 선학들은 자장이 오대산을 순례한 적이 없다는 견해를 제기 하기도 했다. ) 그러나 구체적인 논증을 제시하는 데까지는 미치지 못하였다 가 최근 연구에서 자장의 오대산문수신앙 수용설을 재검토하고 자장이 오대 산을 참배하여 문수보살을 만났다는 기록에 대해서 비판적 시각으로 바라보 고 구체적인 논증을 제시하게 되었다.5) 이에 본 논문에서는 이상의 선행 연구들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새로운 관점
에서 신라시대 오대산문수신앙의 성립에 관한 논제들에 접근해보고자 한다. 새로운 관점이란 오대산문수신앙과 관련된 국내외 특히 중국학계의 연구들 을 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기존의 한국의 오대산문수신앙 관련 연구와의 차이 점을 밝히고자 한다.
제II장에서는 당대 오대산문수신앙이 당대 초기가 아니라 측천무후 때 화엄
신앙에 의해 성립되었다는 것을 검토하고, 화엄경가운데 청량산이 어떻게 중국의 오대산으로 비정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인 논증을 제시하고 자 한다. 제III장에서는 신라 오대산문수 신앙의 기본 사료인 삼국유사를 통 해 관련 기사를 검토하고자 한다. 제IV장에서는 신라 오대산문수신앙의 전래 에 대해서 기존연구에서 대부분 자장과 관련이 있다고 서술하였던 것과 달리 신라 오대산문수신앙의 전래에 대해 두 가지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 번 째 가능성의 주인공은 의상과 그의 제자들이고, 두 번째 가능성의 주인공은 김 사양이다. 이상의 논의들을 통해 신라 오대산문수신앙의 형성에 대한 연구에 천견을 보태고자 한다.
II. 당 오대산문수신앙의 성립시기
그 동안 중국의 오대산문수신앙에 관한 국내에서의 연구가 진척되면서 연
(서울: 한국불교사연구소, 2009); 최연식, 「8세기 신라 불교의 동향과 동아시아 불교계」, 불교학 연구12(서울: 불교학연구회, 2005); 김복순, 「新羅 下代 華嚴의 1例 - 五臺山事蹟을 중심으로」, 史叢 33(서울: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1988); 신종원, 「慈藏의 佛敎思想에 대한 再檢討」, 한국사연구 39(서울: 한국사연구회, 1982).
5) 곽뢰, 「新羅 中古期 五臺山文殊信仰 受容說의 재검토 -慈藏의 唐 五臺山 參拜를 중심으로-」, 동국 사학 59(서울: 동국역사문화연구소, 2015).
구의 깊이를 더하게 되었다. ) 다만 기존연구에서는 문수신앙과 관련된 용어 에 대해 다소의 혼동이 있었다. 즉, ‘문수신앙’과 ‘오대산문수신앙’을 구분하 지 않은 채 사용하고 있었는데, 두 신앙을 분명히 구분하여 보는 것이 타당하 다고 판단된다.
‘문수신앙’은 일찍이 후한시기 문수에 대한 경전이 번역됨에 따라 발전되었 던 대승불교의 보살사상에 의거한 신앙이다. 한편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오대 산신앙’은 ‘오대산문수신앙’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오대산에 상주한다고 여기는 문수보살에 대한 신앙이다. 화엄경「보살주처품」에서 “동북방의 보살 주처에 ‘청량산’이라는 곳이 있다. 과거로부터 여러 보살이 항 상 머물고 있는데, 현재 그곳에는 문수사리보살이 있어 일만(一萬) 보살을 거 느리고 항상 설법하고 있다” )라는 구절이 있고, 당나라 때에 와서 문수보살의 주처인 청량산을 중국의 대주(代州) 오대산으로 비정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이 신앙은 화엄경의 유통 및 화엄종의 성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 다. 결국 두 신앙은 그 성립시기와 사상적 배경이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 전체적으로 보면 수나라에서 당나라에 이르는 시기에 오대산과 문수신앙
이 더욱 긴밀히 서로 결합하는 양상을 보였다. 한편 당 태종(재위 626-649)은 재위 초기에 불교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군사 정벌에 소 비하였기 때문에 진지하게 불교를 공부할 시간이 없었다. 그의 불교에 대한 태 도는 초기의 정책에 나타나 있다. 즉, 국가의 이익과 편의를 위하여 불교를 이 용하고자 한 것이다. ) 그는 그다지 불법을 지지하지 않다가 만년에 이르러서 야 자신의 마음을 고쳤다. 그가 명승대덕을 존중한 것은 곧 내외의 교리에 두
루 통달한 지사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 정관 19년(645) 현장의 귀국으로 인해 태종은 불교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현 장의 능력과 재학을 중시하였음을 보여준 것이었을 뿐, 전적으로 불교를 숭신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당태종은 불교를 정치적으로만 이 용했던 것이라 평가할 수 있다. )
그 후 당 고종(재위 649-683)까지는 불교신앙이 꾸준히 발전하였지만, 북조
시기부터 지역적 신앙 활동의 중심지였던 오대산은 아직 군주로부터 큰 관심 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 원래 오대산은 자연환경과 지리적 위치 때문에 북조시대부터 선수(禪修)와 정토의 측면에서 중시 받았고, 오대산에 주석한 수 행자들은 대체로 두타․참선을 주로 하였다고 추측할 수 있다.13)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 당시에 승려들이 입산하였지만 이들과 문수신앙과의 관련성은 크 지 않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런데 측천무후(재위 690-705) 시대에 이르러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특히 측천무후 시대에는 80권 화엄경의 번역이 이루어지고 법장에 의해서 화엄학이 흥기함에 따라 오대산문수신앙이 등장하게 되었다. 국가의 통일과 사회의 안정에 따라 오대산문수신앙은 지배층의 입장이나 군주의 제창과 지 지 하에 형성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오대산의 지위도 확립되었다. 오대산은 점점 북조시기의 지역단위 신앙에서 지배층이 지지하는 전국적으로 이름난 성지의 전형으로 되어갔고 문수보살의 주처로 확립되어 갔다.
측천무후는 화엄경을 중시하고 지지하는 면모를 보였는데 화엄경에서 의 전륜왕의 지위를 이용하여 그 영향력을 꾀했고 이를 통해 자기의 지위를 강 화시키려고 도모했다. 전륜왕 신앙은 측천무후 이전부터 발전해 왔었는데 전 륜왕이 곧 미륵의 전신이거나 혹은 그런 분신(分身)이었다는 설법은 경전에 존 재하지 않았다. 남북조 시기 화엄경과 분신사상이 중국에 유입되었는데 군 주가 화엄의 분신이라는 사상과 전륜왕사상을 혼합시켜 사용하기 이르렀고 이에 측천무후는 분신불 사상과 전륜왕 사상을 결합시켜 자칭 비로나자불의 분신이라거나 정광천녀(淨光天女)의 ‘전생(轉生)’, 심지어 미륵불이 하생하였 다고도 칭하였다. 측천무후는 전법을 활용하는 면모를 보이면서 불상을 조상 하거나 당시 제왕이 곧 전륜성왕이라는 점을 널리 부각시켰다.
측천무후가 재위한지 십 몇 년 사이, 화엄경의 번역과 강좌를 적극 지원
하였는데 화엄경연구가 이 시기에 이르러 정부의 집중적인 관심과 지지를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 가운데 특히 법장의 영향력이 가장 심대하였다.
법장은 측천무후 시기 화엄종의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80권본 화엄경을
번역하는 데에 참여하였고 이 경전을 적극적으로 유포시켰다. ) 법장은 화엄 경에 기반을 둔 화엄종을 성립시켰다고 칭송된다. 법장은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현존 23부이며 화엄과 관련한 것은 15부이다. 이러한 저술들은 내용에 따라 5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 그 중에서 오대산과 관련한 저술은 화엄경전기(華嚴經傳記), 화엄경탐현기이다. 이러한 저술 들 가운데 화엄경탐현기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화엄경탐현기는 60권본 화엄경의 총 34품에 대한 해석서이다. 법장은 화엄경탐현기권15에서 청 량산이 대주(代州) 오대산이라고 설명하였다. )법장은 측천무후의 명을 따라 서 많은 불사를 행하였고 동시에 그는 스스로 화엄학의 우세를 확인하기 위해 서 많은 노력을 하였다.
최치원이 편찬한 당대천복사고사주번경대덕법장화상전(唐大薦福寺故寺主翻經大德法藏和尚傳)에 따르면 법장은 상서(上書)하여 양도(兩都) 및 오(吳)・ 월(越)・청량산에 화엄사를 창립할 것을 청하였다.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그 를 ‘화엄화상(華嚴和尚)’이라고 불렀다. ) 그리고 이러한 화엄사의 건립 시기 는 늦어도 신룡(神龍) 원년(705)이라고 추정되었다.18) 또한 법장이 화엄과 관 련된 사찰 건립을 위해 상서한 것은 초당 시기 유일한 사례이다. 이것은 측천 무후의 정치적 요구와 부합해서 황실로부터 지지를 받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찰의 지역적 배정을 보면 양도 이외 오・월 지역은 경제적으로 발달 한 도시이고 청량산은 지역적 신앙의 중심지이다. 그렇다면 법장이 청량산에 화엄사를 건립한 이유는 무엇일까?
지김까지의 학계에서 진행된 중국 오대산문수신앙의 성립에 대한 연구를
살펴보면, 화엄경가운데 청량산이 어떻게 중국의 오대산으로 비정될 수 있 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있지만 이것에 대해서 구체적인 논증까지 나아가 지 못한 상황이다. 박노준의 연구에 따르면 청량산이 오대산으로 비정된 이유 는 오대산의 자연적인 여건이 경전 속의 조건에 적합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 다. 시기적으로는 북위 효문제 때부터 이러한 경향이 시작되어 수당시기에 이 르러 이러한 인식이 더욱 발전되었다고 한다. 측천무후 때에 보리유지가 문 수사리보장다라니경(文殊師利寶藏陀羅尼經)을 번역하면서 ‘오정(五頂)’이라 는 표현을 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인식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19)
하지만 남방에서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가 화엄경을 번역할 때, 북방에 서는 이미 호인(胡人)의 정권이 들어섰기 때문에 경전이 번역될 때는 굳이 청 량산이 곧 오대산이라고 인식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무주 연간(690-705)에 법 장이 편찬한 화엄경탐현기(華嚴經探玄記)에서 청량산이 오대산이라고 단정 한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법장이 활약하기 이전부터 오대산지역의 문수신앙이 성립되었다는 기록은 다소 확인할 수 있다.20) 속고승전(續高僧傳)에서 오대 산과 관련된 승려는 11명이고 그 중 문수신앙과 관련된 승려의 수가 5명이라
兩都及吳越清涼山五處起寺. 均牓華嚴之號. 仍寫摩訶衍三藏并諸家章疏貯之. 善願天從功侔踊出. 尋復請許. 雍洛閭閻爭趨梵筵. 普締香社. 於是乎像圖七處數越萬家. 南齊王之精修. 西蜀宏之善誘. 重興茲日. 敻掩前朝. 故人皆不名而稱華嚴和尚焉.”
18) 季愛民, 「從道宣的戒壇設計到法藏的華嚴寺造像」, 唐史論叢 1, 2009.
19) 박노준, 唐代五臺山文殊信仰과 그 東아시아的展開에 關한 硏究, 박사학위논문(성신여자대학교,
1997), pp.15-21.
20) 곽뢰, 新羅 五臺山文殊信仰 硏究, 박사학위논문(동국대학교대학원, 2016), pp.52-53.
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문수신앙이 지역적인 신앙에 속하였다는 것을 보여 주는 증거가 된다. 결국 법장 이전의 오대산문수신앙은 단지 그 지역의 신앙의 형태이고 아직 나라가 인정하는 성산신앙의 형태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즉, “청량산=오대산”이라는 인식은 확산되지 못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법장이 화엄경탐현기 권15에서 청량산이 대주(代州) 오대산이라고 설명 하였다는 것은 청량산[오대산]이 성산(聖山)이라는 인식과 화엄경의 신비 성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법장이 청량산에서 화 엄사를 건립하는 이유라고 할 수 있고 또한 이때 중국의 오대산이 화엄경속 의 청량산으로 확정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III. 삼국유사 속 오대산문수신앙 관련 기록
신라 오대산문수신앙에 대한 연구는 삼국유사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오대산문수신앙을 신라에 전한 이가 자장이고, 이후 보 천과 효명두 태자가 오대산에 머물며 수행하였고, 보천에 의해 결사와 예참 의 례가 정해졌다고 한다. )
그동안 신라 오대산문수신앙의 형성 시기와 구조를 둘러싸고 많은 논의가
있었는데, 쟁점은 삼국유사의 기록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에 대한 것이 었다. 지김까지 확인할 수 있는 자장과 오대산문수신앙을 연관시킨 문헌은 삼국유사가 최초이다. 자장에 관한 자료들 가운데 속고승전「자장전」과
삼국유사「자장정률」은 대체로 동일한 내용을 기술한 것으로 이해되어 왔
다. 속고승전은 편찬시기가 삼국유사보다 훨씬 빠르며, 그 내용면에서도 원형의 자료를 전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 이에 반해 삼국유사는 13세기 후 반까지 변천한 고려불교사가 일정수준 반영되어 편찬되었다.
자장에 대한 연구에서는, 자장의 오대산 방문과 문수 친견을 모두 인정하기 도 하고, ) 모두 부정하기도 하고, ) 오대산에는 안 갔지만 화엄사상 또는 문 수신앙과 관련 있는 것은 맞다고 보기도 하였다. )
자장이 오대산에서 문수보살과 감응했다는 이야기는 후대에 만들어진 이 야기로 밝혀지고 있다. 중국의 오대산문수신앙은 자장 사후(死後)인 7세기 말 에서야 범국가적인 신앙으로 성립되었고 이후에 신라에 전해진 것으로 보이 기 때문에 신라의 오대산문수신앙은 8세기 이후에나 성립되었을 것이다. ) 그 런데 왜 후대의 사람들은 자장에게 가탁해서 이러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던 것 일까? 아마도 자장이 신라 국왕의 진종을 주장하고 부처의 진신사리를 안치하 였으며, 또 신라에 처음 60권본 화엄경을 강의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것 같다. ) 신라와 불교의 인연을 강조하려 했던 자장에게 화엄경의 청량산 [=오대산] 문수신앙을 대입하기에 적당했을 것이다. 자장은 자신이 태어난 집 을 희사하여 원녕사로 고치고 法會를 베풀 때, 신라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화 엄경을 강의하기도 했다. 사상의 정립과 전파가 제일의 과제였겠지만, 깊은 철학적 이해 기반이 없는 일반인에게 사상을 전파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작 업이다. 이런 경우에 사상가는 자신의 사상체계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 신앙체 계를 가지고 대중 전파 작업을 추진하는 것이 방편법이다. 신앙이 사상의 일면 을 구체적으로 구현해 내는 것이라고 본다면 사상과 신앙은 상호보완적인 관 계에서 두 중심축을 이루며 종합적인 사상체계를 형성해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후대의 화엄신앙자들이 이러한 자장을 내세워 오대산 문수보살에 대한 신앙을 신라에 실현시키고 했던 것 같다. )
한역된 화엄경의 신라 전입은 6세기부터 시작되어 799년인 8세기 말까지
약 300여 년에 걸쳐 순차적으로 3가지의 번역본이 모두 유입되었다. ) 화엄 경과 연결되는 오대산문수신앙이 중고기에 활약한 자장에게서 비롯되었다 고 하는 전승은 후대의 윤색일 가능성이 있지만, 적어도 화엄경과 화엄신앙 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 확립된 신라중대에 오대산에서 화엄경을 독송하 는 사찰이 건립되는 것은 결코 시대적 상황과 어긋나지 않다. )
한편 오대산문수신앙의 사료는 삼국유사와 오대산사적 ) 두 계통으
로 나눌 수 있다. 삼국유사중의 오대산 기록과 유사한 내용이 민지 편찬의 오대산사적에도 나온다. 오대산사적은 삼국유사와 비교하면 기본 줄 거리는 비슷하지만, 글자 출입이 있고 표현의 차이가 있다고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두 기록이 참조했던 원자료가 달랐을 가능성이 크다. )
매일 이른 새벽에 문수보살이 진여원, 지김의 상원에 이르러 36가지 모 양으로 변신하여 나타났다. )
신룡 원년 乙巳 3월 초 4일에 처음으로 진여원을 개창하니, 대왕이 친히 백료를 거느리고 산에 이르러 전당을 세우고, 아울러 문수보살의 소상을 만들어 당 안에 모셨다. 지식, 영변 등 다섯 명으로 화엄경을 오랫동안 전독하였다. )
흥미로운 것은 오대산에서 행하는 예참의 신앙 대상 및 의례 내용에도 두 기 록이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삼국유 사의 원본과 오대산사적의 원본, 어느 기록이 먼저일까? 둘 다 가능성이 있 기 때문에, 흥미롭지만 더 이상의 추론은 무리다. 두 기록의 차이점보다 오히 려 공통점에 주목하여 작성 시기를 파악하는 것이 더 의미 있을 것 같다. 삼국 유사와 오대산사적의 공통 요소 가운데 ‘팔대보살’에 주목해 보면, 팔대 보살이 여래에 비견되는 위상으로 배정된 데는 불공(705-774)이 번역한 팔 대보살만다라경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신라 오대산의 구조에도 밀교의 영향이 있음을 감안하면 일연이나 민지가 보았던 원본들은 불공이 활동한 8세 기 후반 이후에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
IV. 오대산문수신앙의 신라 전래
1. 화엄신앙의 신라 전래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통합하고 새로운 시대를 연 7세기 후반기는 사회 전반에 걸쳐 큰 진전이 이루어진 시기였다. 이에 상응하여 불교계에서는 여러 가지 발전된 모습을 보였다. 화엄교학은 화엄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교학 이며 당나라 법장(643-712)과 징관(738-839)에 의해 이론 체계가 확립되었다. 신라 화엄종은 당에 유학하여 지엄(602-668)에게 수학한 의상(625-702)에 의해 확립되었다. 지엄은 의상의 자질이 ‘실천적 성향’이라면 법장의 그것은 ‘이론 적 성향’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두 제자의 상이한 개성을 주목하여 의상에게 는 ‘의지(義持)’, 법장에게는 ‘문지(文持)’라는 호를 내렸다.37)
의상이 일승법계도를 저술하여 일체의 제법이 연을 따라 이루어졌다는
중도적 바탕에서 일승법계도의 연기를 전개하여 일(一)과 다(多)의 상입상 즉(相入相卽)을 설하고 이를 수십전설(數十錢說)의 비유로 설명하였다. ) 그는 일승법계도를 통해 ‘성기(性起)’사상과 실천적 성격이 강한 교학체계를 정 립한 것이 사상적 특징이며 교단 운영에서도 평등과 실천을 중시하였다.
의상은 신라에 돌아온 후, 먼저 문무왕 16년(676) 태백산에 화엄의 근본도량 인 부석사를 창건하였다. ) 의상의 화엄사상은 그의 제자들에 의해 대대로 계 승되어 탐구되었으며 활발한 교단활동과 함께 신라 교학의 중추를 이루었다. 의상을 계승한 신라 화엄은 일승법계도에 대한 강의와 주석을 통해 사상적 토대를 다져갔다. 의상의 제자인 도신(道身)과 지통(智通)은 의상의 강의 내용 을 필록한 도신장(道身章)과 지통기(智通記)를 남겨 의상 화엄사상 전개의 첫머리를 장식하였고, 이런 경향은 8세기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법계도기총 수록(法界圖記叢髓錄)은 이런 해석서들을 가려 모아 편찬한 것이다. 의상의 화엄사상이 법장 등의 다른 화엄과 비교 탐구되며 중추를 이루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이 총수록은 신라 불교철학의 정립과 전개를 아울러 살펴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다. 그중의 하나로 들어야 할 화엄경문답(華嚴經問答)은 ) 의 상의 화엄사상은 물론 신라 화엄사상의 특성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 다. 화엄사상의 요체를 문답으로 풀이하면서 성기사상을 강조한 화엄경문답 은 의상 화엄사상의 처음 구상과 제자들과의 강론을 통해 유지 변화되는 양상 을 추적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의상의 화엄사상이 그의 제자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계승 연마되는 한편으 로 원효와 의상의 다소 다른 화엄사상의 경향과 중국의 교학까지 종합하여 이 후 신라 화엄교학에서는 상호 융섭적인 전승을 낳았다. 그 중의 하나가 명효 (明皛)의 해인삼매론(海印三昧論)이다. 명효는 원효의 화엄사상을 충실히 계
승하여 의상의 「법계도인」을 연상하는 28구의 게송으로 이루어진 해인삼매 론을 저술하였다. ) 그리고 8세기에 표원(表員)은 원효와 법장의 화엄교학을 융합한 화엄경문의요결문답(華嚴經文義要訣問答)을 지었다. ) 이러한 저술 은 신라 화엄교학이 복합적으로 계승되었음을 확인해 주는 것이며, 이는 나아 가 신라 불교사상의 다양성과 역동성을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화엄 사상[또는 교학]은 신라 불교에서 중추적 역할을 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유의할 사실은 왜 화엄계의 중심사찰이 왕경에서 멀리 떨
어진 태백산에 세워졌는가 하는 점이다. 화엄사상이 궁극적으로 사회 안정을 지향하므로 그것이 왕권 안정에 기여하는 바가 있었을 것이며, 특히 실천적인 신앙이 기층민의 정신적 일체감을 형성시켜 일정 부분 왕권 유지에 도움이 되 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제기되었다. ) 의상계와 신라 왕실의 관계에 대한 논의 들은 의상의 부석사 행에 대한 몇 가지 시각을 제공하고 있다. 첫째, 화엄경 의 세계관이 신라의 정치적 통일 및 전제 왕권의 형성과 표리를 이루는 사상적 통일의 표현이었다는 견해를 제시하면서, 의상의 법계도 정신은 전제왕권 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뒷받침하기에 적합하였다는 주장이 다. ) 곧 의상과 의상계 화엄세력이 중앙권력과 밀접한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 었다는 견해이다. 둘째, 여기에 대한 반론으로 신라 중대의 화엄종을 각 파별 로 분석하여 신라 중대의 화엄세력은 특히 문무왕과 소원한 상태에서 일반 서 민에 대한 교화와 저술 및 수행에 힘쓴 반면, 유가계 승려들이 신라 중대의 왕 실과 밀착되어 있었으므로, 화엄종과 전제왕권의 관계는 논할 여지가 없다고 주장한다.45)
이 견해들 중에서 의상의 부석사 행과 관련해서 주목할 것은 의상이 귀국한 문무왕대는 유가계가 왕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점과 의상의 문하에 들어 온 제자들 중에 기층민 출신이 많았다는 사실이다. 신라 사회의 상층부는 의상에 대해서 그다지 호의적인 것은 아니었다고 보아야 한다. 또 의상이 왕실 의 지원을 받아서 부석사를 창건한 시기도 귀국 후 6년이나 지나고 신라의 대 당전쟁이 끝날 즈음이었고, 왕실이 태백산이라는 지방에 부석사를 창건하도 록 공식적으로 후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의상은 여전히 ‘권종이부(權宗異部)’ 의 무리에게 방해를 받았다. 이것은 676년이 되도록 의상이 신라 불교의 중심 세력들에게 배척당하였던 것임을 말해준다. 이러한 상황에 의하면 의상은 신 라 왕실 내지 귀족 세력과 친밀하지 못하였던 것 같다. 문무왕이 부석사를 창 건하도록 하였다는 기사도 왕실과 귀족 세력 전체의 의지였다기보다는 문무 왕 개인의 의지가 더 많이 작용했던 것일 수 있다. 따라서 의상이 신라사회의 중앙부에 진출하지 못하고 지방인 부석사를 선택해야 했던 것은 자의보다는 타의가 훨씬 강하게 작용한 것이었다. )
한편 중대의 화엄종 계통 불교에는 의상의 문도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현재까지 의상의 문도들을 비롯하여 승전(勝詮)의 문도들, 그리고 오대산 지역 에서의 화엄신앙 등이 확인되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외 곽 지방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정병삼은 의상이 경주를 떠난 이유는 명확하지 않지만 유식학을 비롯하여 다양한 불교이론을 종합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주 류를 이루었던 당시 불교계에서 화엄경만 중시하고 다른 교학에 대하여는 관심을 갖지 않는 그의 가르침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때문으로 생각한 다고 밝혔다. ) 승전은 의상보다 조김 늦게 당에 유학하여 의상의 동문이자 중 국 화엄학의 이론체계를 확립한 법장의 문하에서 화엄종의 가르침을 배우고 692년에 귀국하였다. 그는 법장의 부탁으로 의상에게 법장의 저술과 그가 의 상에게 보낸 편지 「현수국사기해동서(賢首國師寄海東書)」를 전해주었다. 이후 의상계와는 별도로 문도를 육성하며 화엄사상을 가르쳤다. )
2. 오대산문수신앙의 신라 전래 분석 신라의 오대산문수신앙이 성립하기 전에 신라인들이 당나라의 오대산문수
신앙을 이미 알았다는 것에 대해서 두 가지 전래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 가능성의 주인공은 의상과 그의 제자들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신
라의 화엄종은 의상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의상 사상의 특징 중 하나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실천수행을 강조한 면이다. 이는 화엄경「입법계품」 중 관음신 앙과 연계된 것으로 실천적 화엄수행을 내세우는 것이다. 의상은 오대산문수 신앙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고 관음신앙을 강조하였다. 관음신앙은 「입법 계품」에서 선지식의 한 인물로 관세음보살이 등장한 것에 의거한 것이다. 「입 법계품」의 설주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고 「보살주처품」에서 문수보살이 청량산에 상주하고 있는 내용에 대해, 화엄경을 공부한 의상은 당연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즉 청량산에 상주한 문수보살에 대해서 의상이 알고 있었을 가 능성이 크다. 다만 여기의 청량산이 바로 당나라의 오대산을 지칭한다는 것은 인식하고 있지 않았던 것 같다. 의상의 재당시기(661-670) 당나라 오대산문수 신앙은 아직 범국가적인 성산신앙을 형성하지 못하던 시기였고 황실로부터 크게 중시 받지 못하던 상황이었다. ) 따라서 의상이 지엄 문하에서 공부하는 동안에 비록 60권화엄경 속에 문수보살이 청량산에 상주하는 내용을 알고 있었더라도 그 ‘청량산’을 ‘오대산’으로 인식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한편 의상이 태백산 부석사를 창건한 2년 후인 679년(당고종 조로 원년)에
당나라의 혜상은 고청량전을 편찬하였는데 이 책에서 초당(初唐)시기 오대 산지역 불교의 상황을 설명해 보여주고 있다. 그 결과 북조시기의 기초를 발판 으로 오대산이 점차 나날이 확고한 경지를 만들어 갔고 그 사이 문수보살주처 의 개념과 결합함으로써 지역적 신앙의 발전에 그쳤던 오대산은 점차 전국적 성격을 갖는 신앙의 중심지로 거듭났는데 그 초석이 바로 이 시기에 있었던 것 이다. 이때가 중국 오대산문수신앙이 널리 전파되는 기점이다.50) 법장은 이 고청량전을 매우 중시하였다. 이것은 법장이 편찬한 화엄경전기(692 무 렵)에서 고청량전의 내용을 많이 인용하는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의상은 만년에 많은 제자를 거느리고 있었다. 이들은 주로 신문왕대에 활동 하고 있었다. 앞서 언급한 승전은 귀국할 때 법장의 저술과 편지를 가지고 왔 는데, 이것은 의상과 그의 제자들의 화엄학 연구 경향을 아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법장은 이러한 자기의 저술을 의상에게 전하면서 잘 검토해 줄 것을 청 했다. 승전이 가져온 법장의 저서는 화엄경탐현기 18권(총 20권, 당시 두 권 은 아직 완성되지 못하였음)・일승교분기(一乘敎分記) 3권・화엄범어(華嚴梵語) 1권 등이다. ) 의상은 수순(數旬) 동안 법장의 서술을 검토한 끝에 제자 들에게 이 저술들을 널리 펴도록 했다. 특히 문인 진정(眞定)・상원(相圓)・양원 (亮元)・표훈(表訓) 등 4인을 불러서 법장의 화엄경탐현기를 각각 5권씩 강
(講)하게 하였다고 한다. ) 앞에 언급한 바와 같이 법장은 화엄경탐현기권15에서 청량산이 대주(代州) 오대산이라고 설명하였다. 이러한 인식이 승전을 통해 신라로 전래되고 의 상이 이를 인지했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때, 고청량전이나 화엄경탐현기 에 오대산과 관련한 내용이 승전을 통해 의상에게 전해졌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의상 또는 의상의 제자들이 법장의 화엄경탐현기와 혜상의 고청량전 등을 통해 당의 오대산문수신앙을 인식하였을 가능성을 연대적 으로 인정할 수 있을 것 같다. 의상은 부석사를 중심으로 태백산과 소백산 지 역 일대에서 제자들에게 법계도의 화엄사상을 강의하며 신라 화엄학의 기반 을 확대해 나갔다. 그 과정에서 ‘청량산=오대산’이라는 문수보살주처신앙의 사상이 정립되고 또한 전파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 가능성의 주인공은 김사양이다. 신라 중대 때 고구려를 정벌한 문무 왕 8년(668) 이후 신라는 백제・고구려 유민의 흡수와 고토 회복이라는 민족적 인 명제 앞에 놓이게 되었다. 당과 대립하였기에 조공은 있을 수 없었다. 그러 나 장기간의 대립이 지난 후, 상호간 냉정을 찾으면서 신문왕이 즉위할 때
(681), 당 중종(中宗)이 등장하여(684) 양국 국교 재개의 기운이 일어나게 되었다. 따라서 효소왕 8년(699)의 조공은 실로 30여 년만의 입조였던 것이다. 그 후
성덕왕과 현종 연간에 이르러 정상화된 양국의 교섭은 완전한 친선 관계로 발 전되어 정치・문화 전반에 걸쳐 조공 관계가 이룩된다.
장기간의 냉전 관계를 겪은 신라의 입장은 대당 교섭에 있어서 능동적인 자 세와 외교적 자주성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신라의 입장은 당의 정치 적 안정과 성장에 따른 한문화의 위상 속에서 새로운 통일왕국으로 출발한 신 라의 문화적 요구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당나라의 불교 발전을 보면 측천무후 의 화엄경중시 방책을 바탕으로 법장이 화엄종을 창립하고 화엄경에 대 한 여러 주석서가 편찬되는 양상을 띤다. 그 목적은 화엄경의 신비성을 강조 하는 의도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인식이 신라와 당의 교류활동 에 따라 전래되었다고 생각한다. 성덕왕 즉위 때 당과의 교류한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703년)봄 1월에 당(唐)에 사신을 보내 방물(方物)을 바쳤다. 아찬(阿湌) 김사양(金思讓)을 보내 당에 조회하게 하였다. (704년)3월에 당에 들어갔 던 김사양이 돌아왔는데, 김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을 바쳤다. )
김사양은 신라에 돌아와 성덕왕에게 불경을 바치면서 당시 당나라의 불교
발전 양상, 특히 측천무후가 화엄경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상 황을 성덕왕에게 전하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인다. 이때 당 오대산 문수보살 의 신이가 함께 전달되었을 것이다. ) 그렇다면 이때 당나라 대주 오대산이 문 수보살의 주처라는 새로운 불교신앙이 신라에 함께 전달되었을 가능성이 있 다고 할 수 있다.
이상으로 종합해보면 신라에 늦어도 8세기 초에 오대산문수신앙에 대한 인
식이 이미 확립되었다고 생각한다.
V. 맺음말
본문에서 문수신앙과 오대산[청량산]이 결합된 ‘오대산문수신앙’이 신라 에서 수용되고 정착하는 과정을 기존의 한국의 오대산문수신앙 관련 연구와 의 차이점을 밝히면서 정리해 보았다. 오대산문수신앙은 화엄경「보살주처 품」에 의거해서 성립된 신앙이다. 이 신앙은 화엄경의 유통 및 화엄종의 성 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법장의 많은 저술들 가운데 화엄경탐현기를 주목 할 필요가 있다. 화엄경탐현기는 60권본 화엄경총 34품에 대한 해석서이 다. 법장은 화엄경탐현기권15에서 청량산이 중국의 대주 오대산이라고 설 명하였다. 이는 청량산(오대산)이 성산이라는 인식과 화엄경의 신비성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법장이 청량산에서 화엄사 를 건립하는 이유라고 할 수 있고 또한 이때 중국의 오대산이 화엄경 속의 청량산으로 확정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장이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감응했다는 이야기는 후대에 만들어진 이 야기로 밝혀졌다. 중국의 오대산문수신앙은 자장 사후(死後)인 7세기 말에 측 천무후에 의해서 범국가적인 성산신앙으로 성립되었다. 따라서 신라의 오대 산문수신앙은 7세기말 8세기초에 성립되었을 것이다.
오대산문수신앙의 신라 전래에 대해서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첫 번째 가능 성의 주인공은 의상과 그의 제자들이다. 두 번째 가능성의 주인공은 김사양이 다. 오대산문수신앙의 수용 시기는 진여원이 개창된 전후의 시기로, 대외적으 로 이것은 당의 오대산문수신앙의 발전과 일치하고 있다. 또 대내적으로 성덕 왕의 즉위와 치세에 명주 세력이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기에, 정치적인 면에
서 오대산이 주목된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장기간의 냉전 관계를 겪은 신라의 입장은 대당 교섭에 있어서 능동적인 자 세와 외교적 자주성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신라의 입장은 당의 정치 적 안정과 성장에 따른 한문화의 위상 속에서 새로운 통일왕국으로 출발한 신 라의 문화적 요구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당나라의 불교 발전을 보면 측천무후 의 화엄경중시 방책을 바탕으로 법장이 화엄종을 창립하고 화엄경에 대 한 여러 주석서가 편찬되는 양상을 띤다. 이러한 인식이 신라와 당의 교류활동 에 따라 전래되었다고 생각한다.
8세기 초부터 중반까지 신라는 내부적으로 혼란했을 뿐만 아니라 외부의 위협으로 인해 불안정한 시기였다. 이러한 당시 신라의 정세를 생각해 볼 때, 오대산문수신앙을 수용한 정황이 좀더 명확해진다고 할 수 있다. 즉, 성덕왕이 즉위할 때와 즉위 이후에 왕권 강화에 도움을 준 명주지역의 불교 세력을 규합 하여 현세적 이익 측면의 성격이 강한 오대산문수신앙을 체계화한 것으로 이 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의상과 그의 제자들이 화엄경에 근거하여 법장의 화 엄경탐현기를 연구하였고 오대산문수신앙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관 점에서 파악할 수 있다.
이상으로 종합해보면 신라에 늦어도 8세기 초에 오대산문수신앙에 대한 인
식이 이미 확립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오대산문수신앙을 인식하는 것과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은 다른 차원의 논의이다. 의상이 오대산문수신 앙을 인식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신라에서 구현하려는 의지가 있었던 것이라고 증명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의상 또는 의상의 제자들이 구체적으로 오대산문수신앙과 어떻게 연결되었는가에 대해서 밝히기에는 많은 한계가 있다. 그리고 7세기말 8세기 초에 오대산으로 통하는 역로나 숙박시설이 구비 되었을지도 생각해보아야 하지만, 아쉽게도 자료의 부족으로 이 연구의 한계 가 나타나고 있어서 그 해답을 찾기는 어렵다. 이 부분에 대해서 새로운 자료 가 나오는 것을 기대하면서 앞으로 관련된 논의가 더 진행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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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 Review on the Mount Odae Mañjuśrī Belief of Silla Dynasty
Kwak, Roe
Academy of Buddhist Studies
Dongguk University
The Manjusri Belief and the Mount Wutai Manjusri Belief belong to different forms of religious belief systems. The former is categorized into the Bodhisattva school of Mahayana Buddhism and the latter has been established in accordance with the Avatamsaka Sutra.
The development of the Mount Wutai Manjusri Belief in China can be divided into two stages. First, the era of the Eastern Jin Dynasty and of the Southern and Northern Dynasties (418-581), which can be referred to as the “Emerging Period of the Manjusri Belief”. Second, the establishment period of the Mount Wutai Manjusri Belief from the Sui Dynasty to Tang Dynasty (581-798).
The time when the Mount Odae Manjusri Belief in Silla was established cannot be earlier than the middle of the 8th century. As Fazang accounted in the fifteenth volume of his Exploratory Notes to the Mystery of Avatamsaka Stutra, the Qingliang Mountain was also referred to Wutai Moutain of the Daizhou. Around 692, Fazang requested Seungjeon(勝詮), who was about to return to Silla, to deliver this work, as well as other letters, to Uisang for review. Later, as the King Seongdeok(聖德王) succeeded to the throne, much attention was attached to Odae Mountain areas due to the military and political importance.
From the early to mid-8th century, Silla was not only internally disturbed, but unstable due to external threats. Considering the situation in Silla at that time, the circumstances become clear under which Silla accepted the Mount Odae Manjusri Belief. It is understandable that King Seongdeok organized the Mount Odae Manjusri Belief by mobilizing Buddhist forces in the Myeongju(溟州) area that helped strengthen his kingship.
Keywords
Avatamsaka Sutra, Commentaries on the Avatamska Sutra, The Mount Odae , Uisang, Fazang, Seongjeon, the King Seongdeok
2018년 02월 20일 투고
2018년 03월 16일 심사완료
2018년 03월 16일 게재확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