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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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가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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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에 제정된 창가학회의 깃발[1]

1. 개요2. 역사3. 조직 구성 및 활동
3.1. 직책
4. 법화경 중시
4.1. 니치렌
5. 교세6. 교육기관7. 인식
7.1. 교단 내 유명인7.2. 한국과의 관계
7.2.1. 기성 한국 불교계의 시각7.2.2. 기타 종교의 시각7.2.3. 친한/혐한 논란을 둘러싼 각계의 반응7.2.4그것이 알고 싶다 '남묘호렌게쿄-한국 창가학회(SGI)' 방영
7.3니코니코 동화에서
8. 기타9.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そうがっかい
일본의 승려 니치렌(日蓮, 1222년~1282년)[2]이 주창한 불법(仏法)을 신앙의 근간으로 하는 불교계열의 신흥종교단체다.

1930년 11월 18일에 창립되었으며 정식 명칭은 국제창가학회[3], 영명은 SGI(Soka Gakkai International)다.[4] 1930년 11월 18일 설립 당시에는 명칭이 창가교육학회였고, 1947년에 창가학회로, 다시 1960년대 초에 국제창가학회(SGI)로 바뀌었다.

창가(創價, Soka)란 가치를 창조한다는 의미이다. 학회(學會, Gakkai)는 배우는 모임이라는 의미. 결국 종합하면 창가학회라는 조직명은 '가치를 창조하고, 배우기 위한 모임'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5]는 그들이 수행으로써 부르는 일종의 기도문이며,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종교의 이름을 남묘호렌게쿄라고 오해하지만[6] 이는 정식 명칭이 아니다. 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華經なむみょうほうれんげきょう)의 일본식 발음인 '나무묘호렌게쿄'에서 유래한 것으로 묘법연화경에 '귀의'[7]한다는 의미다.

본부는 도쿄도 신주쿠구 시나노마치에 있다.[8] 한국의 본부는 서울특별시 구로구 구로동에 위치하였고, 근방에 신도림역이 있다.

2. 역사[편집]

창가학회는 처음엔 종교단체가 아니라 창가교육학회(創價敎育學會)라는 교육자들의 모임이었다. 창가(創價)란 '가치를 창조한다'는 뜻으로, 초등학교 교장이었던 초대 회장 마키구치 쓰네사부로(牧口常三郞, 1871~1944)가 가진 교육 철학이 가치창조였다. 창가교육학회의 회원은 모두 각자 자신의 현장에서 마키구치의 창가교육을 실험하고 검증하며 교육이론을 더욱 발전시켰다. 마키구치 쓰네사부로는 자신의 독창적인 교육이론을 자신의 애제자 도다 조세이(戸田城聖)와 함께 체계화하여 남기고자 했다. 그래서 출판한 책이 바로 '창가교육학체계'이며 이 책의 발간일인 '1930년 11월 18일'을 훗날 창가교육학회의 창립일로 정했다.

그런데 창가교육학체계가 발간되기 전인 1928년, 마키구치와 도다는 함께 니치렌 불법에 귀의하게 된다. 이는 마키구치 쓰네사부로의 '가치론'과 '가치 창조'라는 교육이념이 니치렌 불법 사상과 매우 깊이 공명했기 때문이다. 교육의 목적을 '아이들의 행복'에 두고 교육 이론을 전개하여 만들어진 창가교육은 '만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법화경 철학과 매우 닮은 점이 많았다. 마키구치는 환갑에 이르러 고민 끝에 니치렌 불법에 귀의하게 된다. 이때부터 창가교육학회는 창가교육의 근저에 니치렌 불법의 사상과 수행을 두었다.

1947년에 도다 조세이가 조직을 창가학회로 개명한 후에는 니치렌 불법의 사상을 배우고 실천하는 종교단체로 거듭나게 된다. 도다는 20세기 초 앙리 베르그송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일본에서 떠오르던 생명주의를 통해 니치렌 불법을 이해하려 했고, '법신불(法身佛)은 곧 생명 그 자체'라고 보았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붓다는 생명력 그 자체이며, 현세의 이익을 실현시켜 준다. 이로 인해 창가학회는 불교계 단체 중에서도 유독 현세구복적이고 현실참여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한편, 일본에서는 1282년의 니치렌의 죽음 이후 니치렌 선사의 주장을 따르는 일련종(日蓮宗)[9]이 생겨났다. 일련종의 수십가지[10] 분파 중 하나가 일련정종(日蓮正宗)이다. 일련정종은 후지산에 위치한 대석사(大石寺)를 거점으로 하는, 니치렌이 직접 정한 본제자 여섯 명[11] 중에서 닛코(日興)가 세운 종파이다.

이 일련종과 일련정종 대석사(다이세키사)의 창건까지의 경위를 대략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1282년 10월 13일 니치렌은 부슈의 이케가미[12]에서 생을 마쳤다. 당초, 니치렌 대선사의 묘소는 본제자 6명을 비롯하여 총 18명이 매달 교대로 지키는 윤번제로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이 윤번제는 지켜지지 않았고, 이미 3회기 무렵이 되자 닛코를 제외한 나머지 17명은 모두 찾아오지 않았다. 닛코를 제외한 모든 제자들은 지두나 가마쿠라 막부 관리와 영합하여 자신을 천태사문이라 칭하고 니치렌 대선사의 글을 불태우거나, 물에 빠뜨려 지워버리는 폭거를 저질렀다. 결국 닛코는 일련종의 타락을 우려하여 니치렌의 저작[13]을 전부 모아 미노부를 떠났고, 후지산 일대에 일련정종이라는 이름으로 지금의 대석사(다이세키사)를 짓는다.

그렇게 일련종에서 일련정종으로 떨어져 나옴으로써 종교의 타락을 막는가 싶었지만, 제3대 법주인 니치모쿠(日目)의 죽음 이후 600여 년간 일련정종 또한 본래 미혼이어야 할 법주가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기 시작하고, 신도들에게 의식을 강요하여 돈을 빼앗는 등 종교적인 부패가 진행되어왔다.

그중에서 특필할 만한 사건이 바로 20세기 일본의 군국주의에 의하여 국가신토라는 사상 초유의 사상통일정책에 굴복하여 신찰을 허용하려 했던 일이다. 일제 군국주의 시절에 일본 정부가 신토(국가신토) 중심의 사상 통일과 종교 통일을 추진하자 이에 겁먹은 일련정종의 승려들은 '신도의 천조태신은 근본이고, 부처는 그림자'라는 주장의 신본불적론(神本佛迹論) 등의 주장을 하여 이에 반하는 어서(御書) 중 14곳을 스스로 삭제하는 추태를 부리기도 했다.[14]

그러나 이 당시(1940년대 초) 재가 조직(창가교육학회)의 초대 회장 마키구치 쓰네사부로와 그 제자인 도다 조세이는 니치렌 불법의 사상에 따라 신념을 굽히지 않고 이에 철저히 저항하며 신찰을 거부했다. 따라서 '치안유지법 위반'이라는 혐의와 천황에 대한 '불경죄'라는 두 가지 명목[15]으로 투옥(1943년 7월 경)되었고, 마키구치 쓰네사부로는 투옥 약 1년 4개월 후, 1944년 11월 18일[16]에 옥사했다. 전쟁이 끝나기 직전인 1945년 7월 3일에 혼자 병약한 몸으로[17] 출옥한 도다 조세이는 창가교육학회를 '창가학회'라고 이름하였다.[18] 그 후 도다 조세이는 1958년 임종까지 단 10년 동안 80만 명에 이르는 조직으로 발전시켜 종교 단체의 기반을 다졌다. 그 뒤를 이은 제3대 회장 이케다 다이사쿠 이후 창가학회는 더욱 급속히 성장하여 일본에서만 1000만이 넘는 인구가 신앙하는 거대 종교 단체로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19]

일련정종에서는 1979년 66대 법주가 의문스럽게 죽고 난 이후 66대 법주의 유언장에서 자신을 법주로 하라고 했다고 주장하는 닛켄이 그 증거인 유언장조차 보이지 않고 67대 법주 자리를 탈환한다. 그리고 돌연 회장이었던 이케다 다이사쿠를 파문하고 회원들을 만나는 것을 금지한다. 승려는 위, 재가신도들은 아래라는 오만한 사고방식을 깨지 못한 닛켄은 신도들이 자신을 숭배하기보다 오히려 일개 재가신도에 불과한 이케다 다이사쿠를 창가학회의 지도자로서 존경하자 그를 질투한 것이다. 게다가 창가학회 회원들에게도 자신을 따르지 않으면 이케다처럼 파문할 것이라고 협박했다.

하지만 오히려 대부분의 창가학회 회원들은 그 일을 계기로 일련정종과 연을 끊어 창가학회가 독립된 단체가 되었다. 일본의 패전 이후 국가신토에 의해 초토화되었던 일련정종은 한때 창가학회 회원들의 기증으로 전쟁 전의 수십 배 수준으로 급속히 번영했지만 이 파문사건 이후 창가학회와 단절되고 급격히 쇠퇴하게 되었다.

3. 조직 구성 및 활동[편집]

이 종교단체는 니치렌의 어록을 모은 책인 어서(御書)를 교리의 근본으로 하며, 회장의 말은 중요시하되 교리로 받들지는 않는다.

니치렌의 어록이자 창가학회의 교리의 근간인 어서(御書)에는 1359쪽 "지용(地涌)의 보살(菩薩)의 선구(先驅)는 니치렌(日蓮) 일인(一人)이로다. 지용(地涌)의 보살(菩薩)의 수(數)에도 들어가리라."라는 문장이 있다. 니치렌의 뒤를 이은 직제자인 닛코는 후대의 제자들에게 주의사항을 명시한 '닛코유계치문'에서 "때의 관수(貫首)라 할지라도 불법(佛法)에 상위(相違)하여 기의(己義)를 세우면 이를 받아 들이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하여 종교지도자의 말씀이더라도 불법정신이나 교리에 위배한 언사를 할 경우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고 명시했다.

즉, 회장의 지도보다 어서가 우선이다. 현 명예회장인 이케다 다이사쿠도 창가학회원에게 이렇게 지도했다.
"불법의 근본인 스승은 니치렌 대성인이시다. 그러므로 어디까지나 어서를 깊이 배독해야 한다."
(1990년 11월 7일)

"창가학회는 영원히 '대성인 직결'이다. 어본존 근본이자 어서 근본이다. 이 신심이 있기 때문에 이전에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계속 발전하고 있다. 한편 닛켄종은 대성인보다도 현재의 법주를 근본으로 하고 있다. 여기에 착오의 뿌리가 있고 전락(轉落)하는 원인이 있다."
(1993년 9월 9일)
회장인 본인이 창가학회의 교주는 자신이 아니고 니치렌임을 명확히 한 것이다. 그리고 일련정종(닛켄종)은 이를 어기고 교주인 니치렌보다 법주인 닛켄의 말을 우선시했기 때문에 종교단체가 닛켄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집단으로 변질되었다고 지적했다.

허나 현 회장인 이케다 다이사쿠(池田大作)의 영향력이 절대적인 것은 사실이다. 발간 잡지인 법련이나 화광신문을 보면 내용의 이케다 다이사쿠의 어록이나 행적에 관한 내용이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많다. 그러므로 이케다 다이사쿠에 대해 거부감을 느낄 수 있는 신도도 일부 존재하기도 한다.

본래는 후지산 대석사[20]에 위치한 일련정종[21]을 외호하는 단체였다. 하지만 이 일련정종의 재가신자(평신도) 집단으로 활동했던 창가학회는 일련정종과의 갈등 끝에 일련정종으로부터의 파문이라는 형태로 결별하여 1991년부터 독자적인 노선을 걷게 되었다. 자세한 과정은 바로 위의 '역사' 단락을 볼 것.

이는 오히려 창가학회가 순수한 재가신도 집단으로서 자유롭게 활동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현재는 창가학회의 규모가 훨씬 큰 편. 양 종파간 대립에 관해 90년대 후반에 법정 소송에서 창가학회가 승리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일련정종에서 축출된 부분에 관한 사건은 아니고 일련정종과 닛켄 자신의 범죄에 관한 것이다.[22]

조직 구조는 전형적인 피라미드형인데 조직 운영상의 편의로 인해 피라미드식으로 운영하는 것일 뿐 회원들 간에 따로 상하로 구분짓지는 않는다.[23] 전국 간부들은 수도권 지역에 밀집해있다. 간부는 별도의 경제적인 지원이 전혀 없는 봉사직이다.

매주 한 번씩 화광신문(和光新聞)이란 기관지와 월마다 법련이란 책을 발행하는데 내용은 '어서'에 대한 강의, 이케다 다이사쿠 스피치, 창가학회 회원들의 활동 등이 들어간다. 일반 가정이나 대학에서도 접할 수 있고,[24] 은행이나 관공서 같은데도 하나씩 던져놓고 가므로 오며가며 본 사람들도 꽤 많다.[25] 일본 내의 기관지는 세이쿄신문(聖教新聞)이다.[26]

참선방식이 좀 독특한데, 본래 "호흡 및 (호흡, 의식)관찰"로 대변되는 기존의 불가의 참선이 아니라, '자세를 취하고 묘법연화경을 독송하는 방식'에 더 가깝다. 내부에 '어본존'[27]을 놓은 '불단'[29]을 바라보고 정좌를 하거나 의자에 앉아 수주[30]를 낀 합장한 손을 가슴 높이에 둔 자세로 '남묘호렌게쿄'를 연달아 제창하는 것을 "창제"[31]라고 한다.[32] 창제는 매우 빠른 속도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창제 횟수가 많을수록 좋다는 이유도 있지만 집중명상의 효과도 있어서 그렇다. 이는 대중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장점으로서 급속한 신도증가를 이루어내기도 했다. "'불법과 생활은 같다.'"라는 신조로 자신들이 직업에서 노력하며 종교활동과 함께 병행하면서 이룬 성과를 무척 중요하게 생각한다. 종교활동 외에, 자신들의 구체적인 노력을 굉장히 강조하는 편인데 '올바른 불도수행과 실질적인 노력을 함께 병행하면 틀림없이 좋은 성과가 나온다'고 하며 이를 조직 차원에서 세심하게 관리해주고 격려해준다.

기원은 '이렇게 되게 해주세요.'보다는 '반드시 해내겠습니다.'라는 맹세를 하는 것이 좋다고 권한다. 여타 다른 종교에서 신에게 기원하는 것과 달리 내가 해내겠다라고 외치는 것은 석가모니의 말씀과 자신의 수양을 강조하는 불교의 측면에서 보면 당연한 것이다. 대승불교에서도 원래 서원(誓願, 산스크리트어 praṇidhāna, 팔리어 paṇidhāna[33])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34]

회원들끼리의 유대관계가 무척 깊은 편이다. 그리고 조직 내에선 회원들간의 이해관계나 금전적으로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굉장히 엄하게 관리하는 편인데, 특히 보험이나 영업 목적으로 회원에게 접근한다면 바로 퇴출이다. 교회처럼 이성 간의 교제를 목적으로 하는 종교활동도 굉장히 엄하게 단속하는 편이기에 조직력이 비상할 정도로 뛰어난 편이다. '부인부, 장년부, 남자부, 여자부, 미래부'와 같이 성별과 연령대에 따라 세심하게 부서를 구분하여 여타 종교보다 섬세하고 은밀하게 포교한다.[35]

창가학회는 종교라기 보다는 조직으로써의 색을 더 뚜렷하게 지니고 있으며[36][37], 종교활동 이상으로 사회활동을 강조한다.[38][39][40] 학회[41]는 매일 열리며 오전, 오후, 저녁으로 나뉘어서 진행된다. 시간은 대체로 1시간 전후로 끝이 난다. 참선[42] 방식이 굉장히 특이한데, 불교에서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듯 '남묘호렌게쿄'를 외운다.[43]

창가학회를 알리는 포교활동을 광선유포라고 하는데,기관지 등을 통해 '올해 광선유포 목표 3,000명'과 같은 식으로 대대적으로 장려하는 편이다. 포교활동 방식은 사람간의 1대1 대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여타 종교가 포교활동에서 사회적 문제[44]를 야기하는 것에 반해 은밀한 포교[45]를 지향한다.

최근 코로나19 사태와 관련해서는 코로나 확진자가 나오지 않았음에도 한국에 있는 모든 관련 시설들을 선제적으로 폐쇄했으며 한동안 일체 포교활동과 회원들의 활동도 전면 금지했다. 2022년 들어서는 각종 앱을 통한 비대면 방식으로 활동을 재개했다.

3.1. 직책[편집]

지역내 SGI 문화회관의 인원들은 소년부, 소녀부, 남중등부, 여중등부, 남고등부, 여고등부(이하 미래부), 남자부, 여자부, 장년부, 부인부 등으로 나뉘며, 미래부장, 부인부장 등의 이름으로 부서를 담당한다. 그리고 지부장이라는 직책도 있다. 지부총회라는 행사를 큰 행사로 간주하는 듯 한데, 이름만 봐서는 지부장이 관여하는 것 같다. 회관에서 간부를 맡으면 보성회라는 모임에 배속되는 것 같다. 보성회는 회관 내 당직 근무자로 추정된다.

4. 법화경 중시[편집]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은 한국 불교에서는 흔히 법화경(法華經)이라고 줄여부르는, 전 세계적으로 수백가지 언어로 번역되고 관련 문화 유산도 많아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진 대승불교 경전이다. 다른 경전들과 마찬가지로 대략 서기 1세기쯤부터 석존의 가르침을 정리하여 제자들이 글로 남긴 것으로 추정된다. 법화경은 총 10권이며, 개경인 무량의경과 결경인 보현보살행법경(普賢菩薩行法經) 각각 1권씩을 제외하면 총 8권 28품(品, 경전에서 장(章)의 구분을 나타내는 말)으로 구성되어 있다.[46] 권의 수와 품의 수는 듣기에 서로 헷갈릴 수 있기 때문에 권 수는 법화경 제0이라고 하고 품은 품의 제목을 이야기 한 후 제00이라고 품의 수를 이야기 한다.[47]

원어인 산스크리트어로는 सद्धर्म पुण्डरीक सूत्र (saddharma puṇḍarīka sūtra / 삿다르마 뿐다리까 수뜨라)[48] 정도의 발음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를 한어로 묘법연화경이라고 번역한 사람이 구마라습(鳩摩羅什)이다. 묘법연화경은 200가지가 넘는 한역 법화경 중에서도 최고의 문학성과 가치를 인정받으며 원작의 의미를 더 잘 살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 이유가 재미있는데, 구마라습은 혼자 혹은 소수의 지식인들끼리 모여 번역한 것이 아니다. 수백 명의 제자들에게 산스크리트어로 된 법화경을 강의하면서 함께 적절한 번역을 토론하여 번역을 진행했다고 한다. 따라서 딱딱하지 않고 대중들의 마음에 더 잘 와닿는 아름다운 비유와 예술성을 살린 것이 일품이다. 예를 들어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라는 제목의 '묘(妙)'라는 글자만 하더라도, 원어에서는 '살(바르다)'이라는 글자였으며 이를 다른 번역가들은 정(正, 바르다)이라는 글자로 번역했으나 구마라습은 묘(妙, 묘하다, 불가사의하다)라는 글자로 번역함으로써 정(正)이라는 글자가 가진 갑갑함을 없애면서도 법(法)의 고귀함을 살리고, 또한 불가사의하다는 뜻의 심오함을 내포하여 독자들의 예술적 상상력을 자극했음을 알 수 있다. 이 구마라습의 번역으로 인해 법화경은 '본전의 내용을 왜곡했을 가능성'과는 별개로 일단 동양에서 대히트를 치는 데에는 성공했다. 따라서 중국은 물론이고 한국와 일본의 문화유산에 법화경의 사상이 남겨진 것이 많다. 대표적인 것이 불국사[49]

법화경은 워낙 민중에게 많이 알려져 있기 때문에 법화경을 신앙하는 사찰은 한국에서도 아주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연꽃은 불교의 상징 꽃이라 이 연꽃으로 사찰 주변을 장식해 놓는 경우가 많은데,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의 연화가 바로 이 연꽃을 의미한다.[50][51] 부처를 형상화한 그림에서도 부처가 연꽃 위에 앉아있거나 연꽃을 들고 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는 석존이 연꽃을 자신의 깨달음을 대변하는 꽃으로 여겨 소중히 했기 때문이다.

창가학회의 교주 니치렌은 법화경을 지극히 중요하게 여겼으며 한어인 묘법연화경뿐만 아니라 산스크리트어로 된 법화경 원문까지 공부한 듯 하다.[52] 사실, 당시 승려라는 직업은 종교인이기도 했지만 경전을 읽기 위해 중국어나 인도의 언어에도 능통하다보니 상당한 지식인 층에 들었으며 대부분의 승려들이 각종 국가 업무에서 통역사 역할도 수행했다고 한다. 물론 그렇다고 법화경만 공부한 것은 아니고 일본 전역의 사찰을 돌며 화엄경, 아함경, 방등경, 반야경, 열반경, 정토삼부경, 대일경, 정명경, 대집경 등 당시 일본 각지에 있는 모든 경전을 젊은 나이에 독파했다. 그뿐만아니라, 용수의 대지도론이나 중국 천태대사 이후의 마하지관, 법화현의 등 주석서까지 방대하게 공부했다.[53] 전부 법화경의 서분과 유통분으로서.[54][55]

창가학회는 석가모니[56]의 법화경에 따라 모든 민중들이 성불할 수 있다고 말한다. 아니, 더 나아가서 사실은 모두 '지용보살(地涌菩薩)'[57]이라는 부처인데 겉으로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성불의 원리를 설명할 때 고생을 거듭하는 수행을 통해 중생이었던 자신이 부처로 바뀐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 감추어져 있는 부처의 생명을 열어서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한다는 점이 다르다. 그리고 행복의 원리를 설명할 때도 자신의 행복을 부처에게 대신 가져다 달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자신 스스로의 가능성을 열어 자기가 쟁취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전자와 같은 '기복신앙(祈福信仰, 행복을 자기가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가져다주기를 기다리는 신앙)'을 '일흉(一凶)'이라고 말하며 엄금한다. 이와 같은 법화경 철학과 교리를 가진 탓에 창가학회는 모두가 신앙생활과 직장생활을 병행하며 신앙생활과 함께 자신의 직장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되는 것을 중시하고 서로 격려한다.

창가학회의 교주 니치렌은 법화경의 제목을 따 '나무묘법연화경'이라고 독송하는 창제행(唱題行)[58]을 통해 누구나 자신의 내면에 있는 불성[59]을 몸에 나타내어 이번 생애에 행복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60] 일본어에 따라 읽으면 "남묘호렌게쿄"가 된다. 창가학회는 이 남묘호렌게쿄를 신앙하는 단체이므로, 니치렌의 저술을 모아 정리한 '어서(御書)'를 법화경보다 훨씬 더 많이 인용하며, 이를 공부한다. 니치렌은 그 누구보다도 법화경을 소중히하고 깊이 공부했기에 이 니치렌의 저술인 어서는 법화경의 해석과 인용이 주이며, 경전의 원문을 중시하여 어서공부는 그대로 법화경 공부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법화경은 방대하기 때문에 모든 내용을 다 독송하는 경우는 드물며, 주로 2방편품과 16여래수량품만을 일본어로 독송한다.[61] 이를 근행(勤行, 곤교)이라고 한다. 이 두 품 중에서도 2방편품의 십여시, 16여래수량품의 자아게는 특히 중요하게 다뤄지며 상세한 해설이 따라붙는다. 근행은 방편품-종 울림-자아게-종 울림-제목-종 울림-제목삼창-어본존에 보은감사-제목삼창-삼대 회장[62]에 대한 보은감사-제목삼창-세계 광선유포 기원문과 회향-회향 중 종 울림-제목삼창-광선유포 기원문 마무리-제목삼창의 순으로 이루어진다. 그 외에 중요하게 여겨지는 구절로는 20상불경보살품의 24자 구절이 있으며,[63] 이를 학회 내부에서는 "24문자의 법화경"이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창가학회의 교주가 석존이고 니치렌은 법화경을 공부한 일개 승려일 뿐이라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니치렌은 법화경을 비롯한 모든 경전을 섭렵한 후에 석존의 불법이 힘을 잃게 되는 말법(末法)에는 기성불교를 깊이 믿을수록 오히려 불행이 깊어진다고 통찰했다. 법화경에서는 석존 멸후 인간들의 성격이 더러워지는 말법시대에 다시 태어나 새로운 불법을 넓힐 것을 석존에게 약속하는 '지용보살(地涌菩薩)'이 출현하는데 니치렌은 법화경을 읽고 자신이 지용보살로서 법화경에 비침된 '남묘호렌게쿄'라는 법을 넓힐 사명이 있음을 자각했다. 그래서 만으로 서른 한 살이었던 1253년 음력 4월 28일 정오의 시각에 세이초사라고 하는 당시 일본 최고의 사찰에서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이를 입종선언(立宗宣言)이라고 하여 니치렌 불법의 시초가 되는 날로 정했다. 말법(末法)[64]인 지금은 석가모니가 이미 과거불이 되었기 때문에, 석가모니의 가피력에 의탁해보아야 공허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교리 때문에 대한불교 조계종 등에서는 창가학회가 석가모니를 부정하고 있다며 창가학회를 불교(佛敎)라고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한편 창가학회는 자신들이 석가모니를 부정한다면 애초에 석존의 가르침인 법화경을 이토록 중시하고[65], 남묘호렌게쿄[66]라고 말하는 것을 수행으로 삼을리 없었을 것이라며, 오히려 석존의 예언이었던 '투쟁견고(鬪爭堅固) · 백법은몰(百法隱沒)'[67][68]에 따르는 것이라 주장한다. 또한 자신을 지용보살이라고 자각하여 행동한 창가학회 교주 니치렌처럼, 창가학회 회원 모두가 내증(內證)의 경애[69]는 지용보살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남묘호렌게쿄라는 말법의 법화경을 믿고 실천하여 타인에게도 알리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한 마디로 창가학회는 법화경을 중시하되, 니치렌 대선사의 어록인 어서를 근본으로 하여 법화경을 읽는다. 창가학회에서는 이와 같은 니치렌 기준의 법화경 독해를 "문저(文底)에서 읽는다"고 표현한다.

4.1. 니치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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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치렌은 법화경 제일주의를 주장해 법화경(묘법연화경)을 제외한 다른 경전은 모두[70] 임시방편의 가르침이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쳤다. 이는 법화경에 나와있는 "사십여년 미현진실(四十餘年 未顯眞實)[71]", "정직사방편·당설무상도(正直捨方便·當說無上道)[72]”, "이금당(已今當)[73]" 등의 내용을 근거로 하는 것이다. 당시는 일본 전역에 정토삼부경, 대일경, 아함경, 화엄경, 반야경 등의 다양한 경전을 믿는 불교가 대단히 융성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이와 같은 발언은 굉장히 위험한 발언이었다.

또한 상대가 불도를 어지럽히고 자신의 명문명리를 위해 불법을 이용하는 악승(惡僧)이라면, 잠시 불살생계(不殺生戒)를 접어두더라도 죄업이 아니라는 이론도 펼쳤다. 단, 생명을 중시하는 불교이기 때문에 당연히 살인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에게 보시(밥이나 재물을 공양하는 것)를 중단하여 승려로서는 더이상 살아갈 수 없도록 하는 것이라고 입정안국론(立正安國論)[74] 등 곳곳의 저서에서 설명했다.

니치렌은 어릴 때 출가하여 사찰을 돌아다니며 수학했으며 그 유학의 계기는 두 가지 의문 때문이었다. 하나는, 그 당시 일본은 불교가 많이 융성한 불교국가였는데 "왜 자연재해가 심하고 기아와 전염병에 의해 목숨을 잃는 사람이 많으며, 1221년 막부와 조정의 대립으로 조큐의 난이 일어났을 때 왜 불교 승려들의 기원을 등에 업은 조정이 막부의 무사들에게 패배하여 쫓겨났는가"[75]였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교주 석존은 단 한 명인데 현재 불교의 가르침은 왜 수십 가지로 나뉘어져 서로 대립하는가"였다.

전국 각지를 돌면서 수많은 경전을 독파한 니치렌은 그 이유가 당시의 일본이 불교국가이긴 하지만 불교를 잘못 신앙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물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자연재해가 일어나고, 전염병이 돌며, 내전이 일어나고, 불교의 기원이 힘을 잃어 조정이 패배하고, 불교 종파가 갖가지로 나뉘어 서로 대립하는 등 당시 일본 사회의 어지러운 모습들은 전부 석존이 예언했던 '말법'이라는 시대의 모습과 완벽히 일치한다고 통찰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석존이 예언했던 말법시대에 태어났다는 점을 인지한 후, 석존이 예언한 대로 말법시대의 새로운 불법이 도래해야 한다는 것까지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을 처음 일으켜 넓히는 일은 다름 아닌 자신의 역할이라는 점을 자각했다.

그래서 고민 끝에 1253년 4월 28일 정오의 시각, 세이초사(清澄寺)에 모인 대중들 앞에 '남묘호렌게쿄'라는 말법의 법화경을 처음 선언했다. 그날의 입종선언(立宗宣言) 이후,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약 30여년간 온갖 종파의 지도자 결탁한 권력자들의 탄압을 받았다. 머리에 칼을 맞거나 팔이 부러지기도 했다.[76] 그의 제자들도 법화경을 신앙한다는 이유로 그 지방의 권력자에게 끌려가 고문당하다가 참수되고,[77] 니치렌 본인은 사형장에 끌려가거나[78] 두 번이나 유배 당하는 등[79] 갖은 고생과 협박에도 굴하지 않았다.

이런 모든 괴롭힘들은 당시 권력자와 결탁한 기성불교 지도자들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니치렌을 국주에게 모함하고 암살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니치렌 자신은 평생 아무런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위해를 가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사형장에 끌려가서도 참수당하기 직전에 모함이 드러나 풀려났고, 두 번의 유배도 모두 각각 2년 정도 귀양가 있다가 결국 무죄로 풀려났다. 다사다난한 인생이었지만 그는 말년엔 강의도 하고 후배도 육성하고 저작을 남기다가 1282년 10월 13일 제자의 집에서 요양하던 중에 편히 눈을 감았다고 한다.

입종 선언 이후의 그의 고생스러운 일생은 창가학회 회원이 아닌 일반인들조차 어떤 색다른 감명을 받을 정도로 스펙타클한 것이어서 그의 일생은 드라마와 역사서, 영화 등에서도 다룬 작품이 많다.

그러나 그가 한 일들을 살펴보면 그럴만했다 싶기도 하다. 니치렌은 1260년에 발표한 입정안국론(立正安國論,릿쇼안코쿠론)에서 나의 교리만을 국교로 삼고 여타 종파를 모조리 없애야 하고 이것을 거부하면 외세가 침공하는 등 환란을 겪을 것이다라고 하여 유배를 갔다. 이후 유배에서는 어찌어찌 풀려나게 되었는데, 마침 여몽 연합군이 일본을 침공하자, 이때에도 같은 주장을 되풀이 하다가 종국에 사형선고까지 받은 것이다.[80]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도 니치렌이라는 인물에 대해 평생 연구하여 책까지 낸 어느 학자는 비종교인으로서 그의 주장이나 종교적 논의에 대해서는 논외로 치더라도 박해에 굴하지 않는 신념이나 의지만큼은 일본 역사 속 인물 중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라고 평하기도 했다. 어쨌든 이런 점에서 일본 역사에서 큰 영향을 끼친 승려라는 사실은 확실하다.

5. 교세[편집]

창가학회에서는 전 세계 192개국에서 활동한다고 밝히고 있다. 2022년 기준으로 전 세계 신자수는 약 1200 만명 정도 된다고 한다. 본가 일본에서는 웬만한 일본인은 다 안다. JR그룹 시나노마치역에서 내려서 조금만 걸어가면 근처 건물 대다수가 창가학회 관련 건물들이다.

일본의 집권여당인 자민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공명당이 창가학회에 뿌리를 두고 있다. 애초에 시작은 창가학회에서 비롯되었으나, 종교의 정치 개입 논란이 일본에서도 지속되어 지금은 공식적으로는 창가학회에서 떨어져나왔다. 물론 일반인들은 여전히 창가학회 영향력이 큰 정당이라고 보는 경우가 많긴 하다. 편견인지 진실인지는 내부자들만 알 일.

한국에서는 일본 종교로는 천리교와 함께 거의 유이하게 뿌리내린 케이스인데, 2022년 기준 창가학회 측이 밝힌 바로는 추정 신도 수가 150만 명이 넘는다고 하지만 신도 수 통계가 으레 그렇듯 과장이 있어 보인다. 한국의 기성불교계는 '주변 지인들의 권유로 이름만 걸어놓은 유령 교인이 허다하기 때문에 50만도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실제로 다른 종교들도 기성불교의 주장을 납득하고 있다. 당장 SGI 본건물이 거대한 사이즈 대비 자주 유령건물 상태라는 점이 이를 입증하는듯. 물론 항상 관리하고 경비가 서있다.

통계청에서 주관하는 인구주택총조사에서는 불교와 같은 항목, 혹은 기타로 처리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정확한 수를 알기 어렵다. 인구주택총조사에서는 개신교와 가톨릭 이외의 종파를 구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창가학회의 회원이 되려면 해당 지역 문화회관에서 간부와의 대화를 통해 회원서를 작성하면 된다고 한다.

불교의 세가 상당히 미미한 아메리카 지역에도 창가학회 신도 수가 의외로 있는 편이다. 창가학회의 전신인 일련종 자체가 피지배층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교단이다보니 상류층보다는 하류층에서 믿는 비율이 높은 편이라고 한다.

6. 교육기관[편집]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창가대학 문서
 참고하십시오.
창가학회의 3대 회장 이케다 다이사쿠(池田大作, 1928 ∼ )가 창립한 소카대학(創価大學)이 도쿄 하치오지시와 미국 캘리포니아 주 앨리소 비에조 두 곳에 위치해 있고, 국내에 학교법인 창가학원을 설립하여 서울 동작구에서 '행복유치원'이라는 유치원도 운영하고 있다. 다른 나라에도 유치원을 설립한 전례가 있는데, 한국이 일본홍콩말레이시아싱가포르브라질에 이어 여섯 번째라고 한다. 유치원에서는 따로 종교와 관련된 활동은 하지 않는다.##

7. 인식[편집]

내부적으로 많이 성장한 종교이지만, 초기엔 대외적으로 이미지가 그리 좋진 않았다. 아무래도 신흥종교가 흔히 그렇듯 전통층에선 적의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들이 많은지라 더 그렇다.

한국창가학회(남묘호렌게쿄,한국SGI)는 한국 사회에서 왜색종교 논란이 끊이질 않았다. 당장 1964년 정부(문교부)는 창가학회(남묘호렌게쿄)가 간접적인 정신침략의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창가학회'에 대해 포교금지 조치를 취했다. 또한 1978년엔 주요 언론사들로부터 왜색이 짙은 사이비 종교가 한국을 침략한다며 십자포화를 받았다.

2000년 들어서는 통일교가 포문을 열고 MBC 'PD수첩'을 통해서 '대순진리회' 등 신흥종교가 안좋은 의미[81]로 공중파를 타면서 2005년 SGI도 SBS '그것이 알고 싶다'를 통해서 다시 한 번 이목이 집중되었다. 학회에 국회의원 여럿이 얼굴을 비추면서 일본처럼 정치에 개입하려는 게 아니냐는 의혹이 일기도 했다.

7.1. 교단 내 유명인[편집]

7.2. 한국과의 관계[편집]

한국 지부의 본부가 서울특별시 구로구 구로동에 있으며, 바로앞 버스정류장의 명칭은 한국 SGI.[86] 전국의 본산이니만큼 국내 웬만한 사찰 못지 않게 매우 큰 건물로 지어져 있고 교통편은 신도림역 3번출구에서 10분을 걸어오거나 5611번[87] / 5619번 / 6411번 / 6511번 / 영등포09번[88] 버스를 타면 된다. 본부 옆에는 창가학회에서 발간하는 화광신문사가 있으며, 그 옆에는 대한산업안전협회[89]가 있다. 언급하듯 교통편이 잘 된 편이지만 지방에서 본부로 올라오는 사람들이 많고 대다수가 단체로 오기 때문에 관광버스를 대여해서 단체로 오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일요일에는 어마어마하게 북적이는 사람들을 볼 수 있지만 시끄럽거나 통행에 방해되는 경우는 적으니 안심해도 된다. 다만 멀지 않은 곳에 결혼식장이 세 군데나 있고[90] 결혼식장 버스가 보통 KSGI 앞 갓길에 대기 때문에 결혼식 버스와 KSGI 버스 간 주차 문제로 통행에 혼선을 빚는 경우가 있다.

의외로 국내에 뿌리 내린 역사가 긴 편이다. 한국에는 1960년대에 들어와 언론을 통해 대중에 알려진 것은 1978년으로, 동아일보에서 왜색이 짙은 일본 종교가 국내에 상륙했다며 비판하는 기사가 나왔다. 이 때 비판 논조는 "이젠 종교도 일제가 들어오는가."였다. 1964년 1월에는 문교부에서 창가학회의 포교를 금지하기도 했다. 정부에서 특정 종교에 대해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면 제재를 가하는 것은 독일이나 프랑스 등 다른 나라들에서도 더러 있는 일이다.[91] 군, 읍 단위의 작은 행정구역에서도 한 개 이상의 지부를 가지고, 각 지역마다 문화회관 형태의 건물이 구비되어 있다. 회관은 대부분 좌담회 형식으로 백여 명쯤 모임을 크게 가질 수 있을 정도다.

게다가 지역 회관이 없는 지역에선 좌담회와 같은 정기 모임을 상호 회원들의 집에서 쉽게 치를 정도로 결속력이 강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회원들은 모임을 갖는 데 어려움을 겪진 않는다.

한국SGI에서는 니치렌의 어서 번역본을 제공하는데, 원문의 중세 일본어를 한국어로 일대일 직역하면서 실질적 형태소인 한자어는 일본식 그대로 남겨두다 보니 가독성이 좋지 않다. 영어로 번역된 어서는 아예 영어권 독자가 읽기 편하도록 어순이나 단어 선택을 다시 했기 때문에 읽기가 한결 수월하다.

참선 방식에서 제목을 올릴 때 제창하는 남묘호렌게쿄(나무묘법연화경)의 끝 글자가 "쿄"로 종교 이름 끝에 붙이는 '교'와 유사하여 종교 자체의 이름을 '남묘호렌게쿄교'라고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마저도 한국인에게는 특이하게 느껴지는 발음 때문에 몬데그린화 되어 '남녀호랭이교', '남녀호랑갱이교, '남녀호랑개교'로 바뀌기도 한다(...). 사실 초반엔 '남묘호랑개교'라고 알려졌는데, 이 발음이 한국어로 듣기에는 이질적이라 유명세를 탄 것. 하지만 이 중 어느 것도 정식 명칭이 아니며 정식 명칭은 국제창가학회 혹은 SGI이다.[92]

7.2.1. 기성 한국 불교계의 시각[편집]

창가학회가 일련정종과 다른 종교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1960년대에 창가학회가 한국으로 유입된 이후 청담, 성철, 법정과 같은 고승들이 정확히 어떤 종교인지 불교인지 아닌지에 대해 논하지는 않았다. 당시에는 한국에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많은 스님들은 '남묘호렌게쿄'라는 언어에 대해 비판을 내고는 한다. 부처님은 열반에 드시면서 유언하시기를 "나의 설법은 모두 각자 그 나라 언어에 맞게 하여라"고 했는데 창가학회는 한국에 들어왔음에도 나무묘법연화경이라 하지 않고 '남묘호렌게쿄'라는 일본어로 하는 점도 비판 대상이다.

조계종에서는 창가학회를 "왜래신종교 종단"으로 취급하고 있다. 동국대학교를 비롯한 곳에서도 학보를 통해 부정적 시각을 보이는 편이다. 2016년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원 학보 44권에 나온 내용. 다만 '동국대 문화연구원'의 의견이지 조계종과 동국대학교의 공식 의견이라고 보긴 어렵다.

2000년대 초중반까지만 하더라도 부정적인 기조가 있었다.법보신문의 내용. 2004년 기사. 주간 불교에서도 오래된 기사이긴 하지만 왜색불교를 우려한다고 했다. 역시 2004년 기사.

2010년대 들어선 불교계에서도 우호적인 언급이 나오고 있다. 일련종에서 출발한 재가불자 중심의 신흥불교운동단체인 창가학회(SGI)의 역동성과 다변화적 움직임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고. 2017년 현대불교 기사.

2018년 불광미디어 기사에선 "SGI는 미국내의 불교단체 중 인종적으로 가장 다양한 불교 조직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이러한 배경에는 이케다 회장이 1960년 미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부터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표명해 온 데에서 출발한다"고 밝히고 있다.

2019년 법보신문 기사에선 "SGI(창가학회)의 명예회장인 이케다 다이사쿠는 유관순 열사를 한국의 잔 다르크로, 한국을 문화대은인의 나라라고 칭송해 여러 단체에서 표창을 받기도 했다"며 한국불교가 SGI(창가학회)를 아베 내각의 폭주를 막는 활인검으로 활용할 방법은 없는지 진지하게 고민했으면 한다고 밝혔다.

7.2.2. 기타 종교의 시각[편집]

천주교와 개신교 등에서는 딱히 관심이 없다.[93] 교계 차원이 아니라 개별 교회에서는 뭐라 하는 경우도 있다. 웬만한 신자들은 왜색종교 취급하며 이단시하며 목사 개인적인 견해로 창가학회를 '이단'이라고 보는 경우도 있다.@ 다만 교단 총회에서는 이단 판정을 내리지 않았는데 상당수 나이 든 신자들은 창가학회를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이는 창가학회가 일본에서 생긴 종교라는 이유로 중노년층 세대의 반일 감정을 자극하는 부분도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7.2.3. 친한/혐한 논란을 둘러싼 각계의 반응[편집]

과거 SBS에서 이 종교에 대한 르포(그것이 알고 싶다)가 있었는데, 표면적으로 이케다 명예회장이나 당 종교의 대한(對韓)감정이 친한이라고는 하지만, 2차대전 때 알려진 이케다의 신사참배 거부 동기의 진실 등을 캐냄으로써 '사실은 그다지 친한이 아니다'라고 주장한 바가 있다. 그러나 도리어 일본 본토의 혐한층에서는 창가학회의 친한정책이나, 민주당이나 재일교포 단체 등과의 연관성 등 음모론에 가까운 논거를 들어서 대표적인 친한단체라고 까고 있다. 이에는 창가학회가 일본어 출판물에서 日韓대신 韓日을 써왔으며, 또 한국 내에서 반일집회를 주최한 사실이 몇 차례 발각된 데에 기인하고 있다.

심지어 일본 내의 SGI까들은 이케다 명예회장도 한국계라는 설을 퍼트리는데, 지들 맘에 안들면 일단 재일드립부터 치고 보는게 혐한이라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이케다 다이사쿠(池田大作)의 본명도, 지대작(池大作)이라는 설과 성대작(成大作)이라는 설이 있으며, 지대작이라는 설에 따르면 목포 출신의 승려라고 한다.[94] 그리고 부인 이케다 카네코(池田香峯子)가 한복 치마저고리를 입은 모습이 2004년도에 세이쿄신문에 보도된 적도 있었다. 물론 그 유명한 이토 히로부미조차도 가족이 모두 한복을 입고 기념사진을 찍은 게 남아있는 것처럼 한복 입고 찍은 사진이 있다고 한국계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결국 한일 양국의 반대파들은 창가학회가 서로 자기 편이 아니라고 하는 형국이다. 다만 이케다 명예회장은 공개적으로 한국을 긍정하는 발언을 많이 하긴 했다. 강연과 대화에서 유관순과 안창호의 훌륭함을 강의하고 한국을 '문화 대은인의 나라', '형님의 나라'로 공개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한국과 일본 사이를 일한(日韓)이 아닌 한일(韓日)로 표현하기도 하고. <감사합니다 한국>이라는 서적을 발간하기도 했다. 이케다 명예회장은 그 자신이 유년기 전쟁을 겪은 세대이고 또 그로 인해 형제를 잃은 경험도 있으니 이것이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있다.

이에 독립유공자협회에서는 특별현창을 수여하고[95], 2009년에는 한국 정부로부터 화관문화 훈장을 수여받기도 하였다.[96] 독립유공자협회에서 현창을 수여한 것을 보면, 최소한 역사 인식에서는 과거 일제의 부정적인 역사를 청산하려는 양심적인 일본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본 본토의 '혐한'층이 창가학회를 싫어하는 이유는 초대회장 때부터 창가학회가 군국주의에 대놓고 항거했기 때문이다. 태평양 전쟁 발발 당시 일본 정부는 모든 종교들을 '천황 중심' 신토로 통일하기 위해 종교단체에 압박을 가했는데, 이 때 당시 군부의 압박이 가해진 일본 전역 1,500여개 종교단체 중 반대한 종파는 불과 5곳에 불과했다. 그 중 간부가 체포된 곳은 총 3곳이었고 2곳은 취조 후 신토로 전향하여 풀려난데 반해, 군국주의에 반대하다 교주가 사망하고 조직이 붕괴된 곳은 창가학회뿐이었다고 한다. 물론 당시엔 오모토 탄압사건이 훨씬 유명해서 이 사건은 잘 알려지지도 않았는데, 이때 오모토나 창가학회 말고도 군국주의를 거부하다가 치안유지법에 박살난 신흥종교나 신사가 한두 개가 아니긴 했다. 또 군국주의에 항거하다가 교주가 사망한 종교는 창가학회뿐이라고는 하지만, 이 당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 당해서 감옥에서 옥사한 신흥종교, 신사 관계자는 제법 많았다. 오모토에서는 교단이 초법적 탄압을 받았으며, 고문의 여파로 3대 교주의 남편이 정신이상 증세를 보일 정도였다. 단, 교주 본인이 탄압받아 사망한 경우는 창가학회가 유일하다. 그러다보니 창가학회 교세가 급성장하면서 현대 들어 주목받고 있는 것.

2012년 9월 경에는 이케다 명예회장의 저서 <감사합니다 한국>이 도서 베스트셀러 순위 12위에 랭크되기도 하였다.# 이 책에서 이케다 명예회장은 일본인들이 한국의 역사에 끼친 누를 사죄하고 한국을 문화 대은인의 나라라고 부르고 있다. 또 한국 젊은이들이 자신의 역사, 특히 한국의 독립운동 역사를 잘 알아야 한다고 하는 지배국이었던 일본의 입장에서는 다소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한일관계가 영 좋지 않은 시기에 일본 스스로를 비판적으로 언급하는 이케다 회장의 태도가 한국인에게는 너무나도 낯설었기에 적잖은 충격을 가져왔다.

일본의 인터넷 언론 J-CAST에서 이를 다룬 기사가 나왔다. 번역된 기사.

7.2.4. 그것이 알고 싶다 '남묘호렌게쿄-한국 창가학회(SGI)' 방영[편집]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2005년 8월 27일, '남묘호렌게쿄 - 한국 창가학회(SGI)를 어떻게 볼 것인가'(352회)를 방영했다. SBS 홈페이지에서 무료로 다시 볼 수 있다.

방송에서 다룬 창가학회에 대한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 창가학회가 신앙의 대상으로 섬기고 있는 만다라 안에는 일본의 개국신과 가야를 침공했던 장군(八幡大菩薩)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결정문]
  • 일본에서 창가학회가 각종 사회적 문제와 사건을 일으킨바 있다는 것[98]
  • 한국 창가학회 역시 정관계와 결탁하여 불법적인 사기를 벌인 사건[99]
  • 지난 국내 선거에 한국 창가학회 신도가 대규모 동원되었다는 내부고발이 있다는 것[결정문]
  • 영국과 프랑스 언론에서 '창가학회가 화합과 인간 행복을 추구하는 종교라고 볼 수 없다'고 보도했다는 것
  • 창가학회 초대회장이 '일본의 침략전쟁 원인이 창가학회를 믿지 않은 피해국가들에 있다'는 망언을 했다는 것[결정문]
  • 창가학회 이케다 다이사쿠 회장이 어렸을 때부터 '천하를 손안에 쥐겠다'는 말을 자주 했으며, 그의 에세이에서 자신을 '국왕이자 대통령이며 최고 권력자'라고 표현했다는 것
  • 더불어 이케다 회장의 공식발언 중에는 '사악한 행위에 대한 원수를 갚는다, 악행, 사악한 악행의 원수를 갚는다, 비겁한 자를 때려눕혀라, 때려 쓰러뜨려라' 등의 종교인답지 않은 잔인하고 과격한 발언이 있다는 것
  • 일본에 창가학회 피해자 모임이 있으며 창가학회를 탈퇴한 신자에게 협박성 우편물이 보내졌다는 것[102] 등이다.

방영되기 전 한국 창가학회(한국SGI)는 SBS측에 해당 방송을 금지하는 요구를 해 왔다. 또한 방송 당일에는 SBS 앞으로 한국 창가학회(한국SGI) 신도 1만여명이 몰려온다는 첩보에 방송사 주위에 전경 4천여명이 동원되었고 이로인해 목동 일대 교통이 마비되기도 했다.

그리고 해당 회가 방영된 후 그것이 알고 싶다 게시판에는 한국 창가학회(SGI)를 비난하는 글과 이에 반박하는 신도들의 글이 올라와 논쟁을 벌인 바 있으며, 한국 창가학회 신도들이 SBS 본사 앞으로 몰려와 사과 방송을 요구하는 집회를 가지기도 했다.

이후 창가학회측은 언론중재위원회에 언론조정 신청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로인해 다음과 같은 언론중재위원회의 직권조정결정문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
지난 8월 27일 방영된 “남묘호렌게쿄, 한국 SGI를 어떻게 볼 것인가!” 프로그램에 대한 언론중재위원회 직권조정결정문입니다. 충청대학의 공식문서에 의하면 충청대학은 지난 1998년 이케다 다이사쿠(池田大作) SGI회장에게 창가대학의 설립자로서 세계평화 및 문화, 교육분야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여 왔고 국제적으로도 탁월한 학문적 업적과 덕망이 높아 세계 문화에 공헌한 공로로 명예교수 학위를 수여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한국SGI는 한국 국내 정치나 선거에 일절 관여하지 않고 있으며, 이케다 다이사쿠 SGI 회장의 지시를 받아 대통령 선거에 개입한 사실도 없으며, 또한 한국SGI는 인도로부터 중국을 거쳐 한국에서 전래된 법화경을 바탕으로 하는 니치렌(日蓮) 대성인의 불교를 신봉하고 있어 왜색종교가 아니며, 만다라에 나오는 천조대신과 팔번대보살은 SGI 신앙의 대상으로 섬기고 있지 않고, 마키구치 창가학회 초대 회장이 대동아전쟁의 책임을 한국 등 피해 국가들에게 있다고 전가한 사실은 없다고 밝혀왔습니다. 이 보도문은 언론중재위원회의 직권조정결정에 따른 것입니다.

7.3. 니코니코 동화에서[편집]

창가(唱歌)학회

일본 안티들은 이케다 다이사쿠(池田大作)를 이케다 이누사쿠(池田犬作)로 부르면서 까고 있다. 니코니코 동화의 몇몇 에어모토씨 동영상에서 "犬作"같은 코멘트를 볼 수 있다. 에어모토씨가 창가학회 관련 동영상이라 종종 이 사람의 얼굴이 나오기 때문이다. 혐한초딩 덕분에 혐한하고도 상당히 엮인다.

이케다 다이사쿠 뿐만 아니라 SGI와 관련된 각종 영상들을 소재로 SGI를 까기 위한 동영상들이 많이 만들어져 업로드되고 있는데, 애니메이션 팬들 사이에서는 주말의 황금 시간대에 방영되는 애니메이션들의 이름을 따서 '기동전사 건담 더블오도로키'[106], '컬트의 헌금술사 PRESIDENTAL CULITST'[107], '켄킨!'[108] 등의 이름으로, 이런 류의 패러디 동영상을 TV 애니메이션 한 편 분량(대략 23~25분)으로 모아놓은 동영상이 꼬박꼬박 올라오곤 한다. 이러한 동영상은 오프닝과 엔딩마저도 제대로 패러디로 만들어버리는 편이다(...).

니코니코 동화에서는 보통 '기타(その他)' 카테고리에 올라오다가, 2008년 12월경 'ひとこと動画(히토코토도가, '한 소리 동화(동영상)', '한 마디 동화' 정도로 해석될 수 있다)라는 정체불명의 카테고리가 생겼을 때 그 쪽으로 이주한 적이 있었다. 히토코토동화=히○○토동화=히사모토동화라는 황당한 이유였다. 히토코토동화가 히사모토동화가 되는 사태가 발생하자 운영측에서는 히토코토동화 카테고리를 포함한 이런저런 카테고리를 모아 '예의 그거'라는 카테고리를 만들었다.

자세한 정보는 에어모토씨 참조.

8. 기타[편집]

  • 한국SGI 산하에는 빅토리아 윈드오케스트라, 신세기 파이오니아 윈드 앙상블, 한강 윈드 오케스트라, 해돋이 합창단, 라이온 코러스 등 많은 문화 단체를 두고 있는데, 이와 같이 전 세계적으로도 많은 문화단체가 각국 SGI 산하에 있다고 한다.
  • 홍콩97의 스탭롤에도 이 단체의 이니셜이 나오는데, 이 이니셜이 실제로 이 종교 집단인지, 그리고 왜 스탭롤에 끼어 들어갔는지는 불명. 근데 이 게임의 상태를 생각하면 제작자가 허가받지 않고 무단으로 도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문예춘추에 의하면, 일본에 그리스도교를 비롯한 아브라함 계통의 일신교 신자가 드물게 된 여러 가지 원인중 하나라고 하며, 정확히는 전쟁 이후에서도 계속 그 원인으로 기능하게 된 요인이라고 설명한다. 즉 쇼와시대에 갑툭튀한 창가학회가 본의 아니게 기독교의 종교적 사회 순기능 역할까지 해서 그렇다는 듯. (번역1번역2)
  • 잭 니콜슨 주연의 1973년 영화 마지막 지령에 해당 종교와 교인들이 등장하고, 작품 내에서 여러 번 언급된다.
  • 사이비라고 인식되는 경우도 있는데, 일단 사이비 종교의 대표적인 문제인 교주 신격화, 돈 문제, 비상식적 행위는 아직 사회적으로 크게 보고된 적은 없다. 심지어 공양비도 직장인의 경우 연말정산에 기부항목으로 처리할 수 있다. 종교 교리를 따지는 사람들에 따라선 이단으로 볼 수는 있겠으나, 이단과 사이비는 의미가 다른 말이긴 하다. 다만 일부 국가에서 창가학회를 불법 단체로 규정한 경우는 있다고 한다.
  • 2022년 3월 9일, 20대 대선을 앞두고 윤석열 당시 대선 후보의 21년 5월 29일 강릉 외가 방문 사진이 공개되었는데#, 해당 링크에 나온 외가에 있는 한 액자에 南無妙法蓮華經(나무묘법연화경)이 쓰여있어 왜색 논란이 일기도 했다. 다만 윤석열의 외가와 창가학회는 관계가 없다. 애초에 묘법연화경을 외는 종파가 한둘인 것도 아닐 뿐더러, 창가학회는 이미 일련종-일련정종 시절부터 액자에 南無妙法蓮華經이라고 적어서 걸어놓는 관습이 없었다고 한다.
  • 임진왜란(1592) 시기에 일본 배들이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배를 타고 한반도에 건너왔는데, 이들이 이용한 배에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 써있는 깃발이 있었다고 알려졌다. 임진왜란 당시 각 왜군 장수들은 스스로를 상징하는 깃발(軍旗)을 달았는데, 일련종의 일파인 '미노부파' 신도였던 가토 기요마사가 자신의 군기에 무사히 살아 돌아갈 수 있도록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써넣었던 것. 다만 이 사례 역시 윤석열 외가 사례와 비슷하다. 선술했듯 창가학회에는 남묘호렌게쿄라고 적어서 복운을 비는 관습이 없다. 가토 기요마사의 그런 행동은 전쟁에 나가는 장수로서 무사귀환을 기원하기 위한 목적이 컸을 것으로 보인다. 또 묘법연화경은 일본뿐만 아니라 조선에서도 가장 많이 읽힌 불교 경전 중 하나였다.
  • 2005년 5월 15일, 잠실종합운동장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2005 나라사랑대축제를 개최했다. 가수 인순이, 주얼리, 김덕수 사물놀이 패 등이 참여했다.

9. 관련 문서[편집]


[1] 깃발 색상이 루마니아의 국기와 동일하다. 좀 더 정확히는 루마니아 국기 색상에 채도만 조금 올린 모습이다.[2] 창가학회에서는 니치렌 대성인(Nichiren Daishonin)으로 부른다.1222년 2월 16일 출생하여 만 60세인 1282년 10월 13일까지 살았다. 여러모로 일본 역사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는 음력이며 아래 내용 중에도 근대 이전의 날짜들은 전부 음력이라고 보면 된다.[3] 한국홈페이지.[4] 한국에서는 Korea의 앞글자를 넣어 KSGI라고 한다.[5] 묘법(妙法)의 이름이자 우주생명의 근본원리와 법칙으로, 이름의 뜻을 해설하자면 '남무(南無)'는 범어로, 한자로 풀이하면은 귀명(목숨을 바친다)를 뜻하고, "묘호(妙法)"는 미혹함과 깨달음을(일개 범부의 생명은 보잘것 없어보이나, 그 속에서는 부처의 생명인 불계도 자리잡는다라는 것), '렌게(蓮華)'는 우주와 만물을 꿰뚫는 원인과 결과가 동시에 내재된 인과구시의 법칙을 뜻하는데, 예시로 사람이 화가 났을 때 동시에 인상이 변하는 것처럼, 원인과 결과가 함께 나타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 거기에 봄에 씨앗을 뿌리면 가을에 열매를 맺는 것 또한 원인과 결과가 그 때를 달리하고 있기에 '인과이시'라고 하는 것이며, 좀 더 깊이 파고들면은 에 씨앗을 뿌렸을 때는 가을에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결과가 이미 내포되어져 있기에 결국에는 인과구시라고 부르며, 그렇기에 창가학회에서는 원인과 결과가 동시에 존재하는 지금 이 순간과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인생이라고 주장 및 가르친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쿄(經)'은 우주 삼라만상의 언어와 동작을 포함하는 것으로, 현명한 사람의 언행도 쿄이고, 어리석은 범부의 외침도 쿄에 해당되며, 정치가는 정치가대로, 목수는 목수대로, 기술자는 기술자대로 쿄를 읽다고 보는 것이라고 한다. 이 남묘호렌케쿄는, 우주를 움직이게 하는 근원의 에너지이면서도, 곧 만물을 변화시키는 근원으로, 이 묘법(남묘호렌케쿄)를 부르는 것만으로도 능히 만물을 움직일 수가 있는데, 그 이유는 이 남묘호렌케쿄가 바로 우주를 움직이는 리듬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진심으로 이 묘법으로 기원한다면, 우주의 법칙상 불가능한 일(대성인이 예시로 든 '대지를 가르켜서 빗나가는 것','허공을 동여매는 자가 생김','조수의 간만이 없는 일이 발생','해가 서쪽으로 돋는 일')이라고 해도, 소우주인 자기자신과 대우주의 생명과 기어를 맟추어 돌아가게 함으로써로써 불가능한 일이라고 해도 능히 반드시 이루게 할 수가 있게 된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 묘법으로 기원한다면은 그 어떠한 괴로움도 이겨내는 것이 가능한 무한한 힘이 생겨나며, 기원을 이루게 하여 전 우주에 존재하는 제천선신과 불보살들이 움직이게 되기까지 한다고 한다. 거기에, 이 묘법으로 기원하는 것 자체가 전 우주에 울러 퍼져, 전 우주의 에너지를 몰고 돌아오게 한다고 한다.[6] 심지어 과거 한국에서는 '남묘호렌게쿄'의 발음이 와전된 이름인 '남묘호랑교' 내지는 '남녀호랑이교/남녀호랑갱이교/남녀호랭이교'(...) 등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았으며, 지금도 나이 많은 어르신들 중에도 이 종교의 이름을 '남묘호랑교'라고 알고 있는 분이 상당히 많다.[7] 나무(南無)는 산스크리트어의 나마스라는 말을 한자로 음역한 것으로, '귀의(歸依, 믿고 따른다는 뜻을 가진 불교용어다. 귀명(歸命)이라고도 한다.)'와 같은 말. 한자 독음 자체는 "남무"지만 불교 용어로는 "나무"라고 읽는다. 나무아미타불의 나무도 같은 나무다. 다만 한국SGI에서는 나무묘호렌게쿄가 아니라 남묘호렌게쿄로 표기하고 있으며#, 글로벌 사이트에서도 Nam-myoho-renge-kyo라고 하고 있는데# 원류가 된 일본어 표기를 존중한 듯 보인다. 근대 이전의 일본어에서 む는 ん 발음으로 읽는데 이유는 역사적 가나 표기법을 참조.[8] 시나노마치 역에서 내리면 바로 갈 수 있다. 참고로 도쿄 신국립 경기장메이지진구 야구장,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에 나온 육교가 이 근처에 몰려있다.[9] 일본어 발음은 니치렌슈[10] 현재 일련정종을 포함하여 약 30여 개 정도의 분파가 있다고 한다.[11] 1282년 10월 8일에 닛쇼(日昭), 니치로(日郞), 닛코(日興), 니코(日向), 닛초(日頂), 니치지(日持)로 정했다.[12] 현재 도쿄도 오타구[13] 소식문(편지)과 논문 그리고 초(抄) 등. 지금은 니치렌대성인 어서전집(日蓮大聖人 御書全集)이라는 책에 집대성되어있다. 안타깝게도 편지 중에는 수신인이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14] 어서는 창가학회 및 일련정종을 비롯한 니치렌종(日蓮宗)의 교리의 근본이다. 자종의 교리를 삭제하는 행위는 종교적 신념도, 자존심도 완전히 버린 비굴한 행위라고 할 수 있다. 후술하겠지만 이 행위가 창가학회가 일련정종으로부터 독립하는 근본적인 계기가 된다.[15] 참고로 일제강점기 많은 독립운동가와 일본의 지식인, 종교인, 아나키스트들도 함께 이 죄목으로 잡혀들어갔다. 얼마나 부조리한 악법이었는지 알 수 있는 사례. 당시 미쳐 돌아가던 일본제국의 입맛에 맞지 않던 수천, 수만의 지식인, 언론인, 종교인들이 사상범이라고 불리며 이 죄목으로 투옥되었다. 그리고 국가신토의 부정과 그에 따른 불경죄는 타 종교들에게도 입막음 수준이였는데. 메이지 시대 신흥 3대 종교에서도 세력이 가장 컸던 오모토도 현세 부정의 교리와 급진파들의 교단장악으로 인해 정부에서 불경죄 명목으로 1차와 2차 오모토 사건을 일으켜 교단 자체가 완전히 박살이 났다.[16] 놀랍게도 자신의 필생의 저서인 '창가교육학체계'의 발간일에 옥사했다. 이는 창가학회의 창립일이기도 하다.[17] 출옥 전 약 75kg이었던 몸이 45kg 미만으로 줄었다고 한다. 키가 큰 편이었던 그의 체격에 비하면 뼈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는 물자가 귀한 전시였고 일본의 국민 대다수가 제대로 먹지 못할 때 범죄자 신분이었던 그에게 제대로 된 식사가 나올 리가 없었다. 영양실조뿐만 아니라 류머티즘 등의 온갖 병을 옥중에서 얻었다고 한다. 결국 도다 조세이는 이때 얻은 병들로 인하여 향년 58세에 사망했는데 인간의 평균적인 수명에 비하면 상당한 단명이다.[18] 이는 '니치렌 대성인의 남묘호렌게쿄라는 근본법은 본래 교육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생활을 아우르는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19] 그에 반하여 일련정종은 닛켄이 법주 자리를 빼앗은 이후 교세가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다. 현재 창가학회에서는 그런 닛켄종에서 자연히 분리되어 종교의 타락을 피한 것을 오히려 다행으로 여긴다.[20] 다이세키사(大石寺)라고도 한다. 일련정종의 거점.[21] 창가학회에서 부르는 명칭은 '닛켄종'이다. 아베 닛켄(阿部日顕, Abe Nikken, 1922~2019)은 일련정종의 67대 법주인데 창가학회에서는 일련정종이 닛켄의 사리사욕을 위한 교단으로 변질되었다고 보고 닛켄종이라고 부른다. 창가학회와 일련정종의 분리가 진행된 것도 닛켄 법주 시기이다. 아베 닛켄의 아버지는 아베 니치카이(阿部日開)인데, 60대 법주였다.[22] 닛켄은 자신의 거짓말로 최고재판소에서 2차례 배상금을 물었다. 명예훼손 사건에서 30만엔을 배상했고, 시애틀 사건을 둘러싼 소문에서는 닛켄과 종문에 연좌해서 400만 엔의 배상을 명하는 판결이 확정되어 있다. 이 밖의 사원 반환 재판은 종문측 패소. 유골 불법투기 사건은 대석사가 패소. 기생 사진 재판도 종문 측 전면 패소로 종결되는 등, 닛켄과 일련정종은 최고재판소로부터 7번이나 단죄를 받았다.[23] 회원끼리는 나이와 직업, 성별, 조직에서의 역할에 관계없이 서로 존댓말을 한다. 이는 '모든 사람은 전부 부처'라는 그들의 교리에 따른 것이다. 실제로 초등학생과 중학생에게도 50대 어른이 존댓말을 하는데 이를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꼭 존대를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종교활동 중에는 꼭 존댓말을 쓸 것을 권하지만 서로 친해진다면 종교 외적인 일에선 말을 놓더라도 큰 상관은 없다.[24] 대학교 동아리방마다 한 부씩 넣어주는 학교도 있다. 신도들이 자발적으로 대학가에 포교활동을 하는 것이다.[25] 화광신문을 왜구신문이라고 비난하는 경우도 있나보다. 和光와 倭寇는 일본어로 "와코", 즉 발음이 같기 때문이다.[26] 화광신문의 옛 이름도 '세이쿄타임즈'이다. 한자는 물론 똑같다.[27] 御本尊(ごほんぞん). 법화경 내용을 수지한 종이. 더욱 상세히 설명하자면 불교에서 나오는 생명론인 십계를 문자로 나열해 놓은 모습이다. 석가모니가 말했던것은 모든 사람이 가진 부처의 생명을가지고 있다라는 것이었는데 이를 말법시대에 들어와 처음으로 누구나 자신의 생명10가지중 가장 상위의 불계의 생명을 용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창시한것이 니치렌 대성인인데, 니치렌은 이 만다라를 보고 '남묘호렌게쿄(법화경의 뜻대로 살아가겠습니다)' 라고 봉창하면 불계의 생명을 용현할 수 있다고 하였다.[28] 창가학회 측에서는 최초로 니치렌 대성인이 만든 만다라를 목판본으로 하여 일반 가정집에 하부받아 민중불법이 가능하게 만든 단체가 창가학회라고 보며, 이에 반해 일련종은 하부비용을 받거나 티셔츠에 만다라를 인화하여 파는 등 기존의 취지를 상실하고 승려만이 만다라를 취급할 수 있다는 등 승속차별하는 모습을 보이는 점을 비판한다.[28] 봉창은 일본어로만 하는데, 이는 일본어식 발음이 우주의 리듬에 합치하기 때문이라고 창가학회 측에서는 설명한다. 비슷하게 6음절 진언인 옴 마니 반메 훔과 비슷한 이유인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니치렌은 진언을 외우며 수행하는 이들을 마구니로 보았다.[29] 仏壇(ぶつだん). 개개인이 구입해서 쓰는 형태라 크기가 다양하다. 회관은 대개 2~3 m 크기의 불단을 사용하는데 반해 일반 회원의 가정에서는 작은 불단을 사용하거나, 별도의 불단 없이 벽을 불단으로 삼는다.[30] 数珠(じゅず), 근래에 '염주'라고 용어를 바꾸었다.[31] 唱題行(しょうだいぎょう, 창제행). 이는 제목을 봉창한다는 의미이며 남묘호렌게쿄의 묘호렌게쿄라는 글자가 묘법연화경(묘호렌게쿄)의 제목이자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창제라는 말 대신 제목을 부른다고 말하기도 한다.[32] 제목(題目, だいもく)이라는 것은 일본 불교에서 그렇게 특별한 것은 아니다. 맛의 달인에서도 "나무묘법연화경"이라며 제목을 하는 장면이 나오고, 백귀야행에서도 견신이 원조사 승려에게 자신은 착한 요괴인데 "제목"으로 괴롭힌다고 불평하는 장면이 나온다.[33] 어원은 '마음을 (어딘가에) 고정시켜 두고 진실된 자세로 강렬히 소망하다'라는 뜻이다.[34] 상좌부 불교에서도 바람(icchamāno), 성스러운 추구(聖求, ariya-pariyesana), 결의바라밀다(adhiṭṭāna-pāramitā) 등 서원과 일부 유사점을 지닌 개념이 언급된다. 특히 결의바라밀다는 지혜를 일으키고야 말겠다는 결의, 진실만을 말하겠다는 결의, 기필코 보시를 베풀겠다는 결의, 열반에 이르고야 말겠다는 결의의 4가지로 구성되어 있어 대승불교의 사홍서원과 유사하다.[35] 비슷한 상황이나 나잇대에서 느끼는 공감, 고민 등을 적극적을 활용하여 관계를 만들고 지인으로까지 자리잡는다.[36] 학회에 참여하여 과거 70~80년 대 일본의 예배 영상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영상 내에서도 '조직'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며, '우리의 스승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 창가학회라는 것이다'라며 분명히 말하고 있다.(과거 조선의 붕당인 동인, 서인과 비슷하다.)[37] 실제로 한국 SGI 홈페이지에 소개된 역사 소개글에도 '조직'이라는 표현을 쓴다.[38] 대략적인 비율은 사회활동:종교활동=3:1[39] 창가학회 제2대 도다 조세이 회장은 "일은 3인분, 신심은 1인분으로 하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는 신앙생활에서 제 몫을 다 하면서 일은 남들보다 몇 배로 해내야 한다는 의미. 사실 이 의미보다는 종교활동을 한다고 일에 소홀하여 주변의 신뢰를 잃는 것이 아닌, 자신의 일을 최선을 다해 한 뒤 종교활동을 하라는 것이다.[40] 대부분의 종교가 종교활동에 더 치중되어 문제가 되는 반면 사회활동을 적극 권장한다는 점에서 반감이 덜하다.[41] 예배, 법회[42] 기도[43] 학회를 마칠 때도 교회에서 기도를 마치고 '아멘'을 하듯이 '남묘호렌게쿄'를 외치고 절하는 것을 3번 반복하고 반배한다.[44] 신천지가 되거나 인식이 나빠지는 것, 교회의 방문 포교 등으로 인한 종교 거부감 형성 등[45] 화광신문같은 월간지나 법련같은 기간지 책자를 작게는 대학 동아리방에서 부터 은행 등 각종 관공서에 잡지에 섞어놓는다.[46] 품을 전부 나열하자면, 1서품 / 2방편품 / 3비유품 / 4신해품 / 5약초유품 / 6수기품 / 7화성유품 / 8오백제자수기품 / 9수학무학인기품 / 10법사품 / 11견보탑품 / 12제바달다품 / 13권지품 / 14안락행품 / 15종지용출품 / 16여래수량품 / 17분별공덕품 / 18수희공덕품 / 19법사공덕품 / 20상불경보살품 / 21여래신력품 / 22촉루품 / 23약왕보살본사품 / 24묘음보살품 / 25관세음보살보문품 / 26다라니품 / 27묘장엄왕본사품 / 28보현보살권발품. 1~14품의 전반부를 적문, 15~28품의 후반부를 본문이라고 하여 후반부를 더 중시한다. 2방편품과 16여래수량품은 법화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품이며 각각 적문과 본문의 핵심이다. 나머지는 모두 지엽(枝葉)이다. 법화경 적문과 본문 각각을 서분과 정종분, 유통분으로 나눌 수도 있고 법화경 28품을 셋으로 나눌 수도 있다. 또한 법화경을 정종분으로 하여 개경을 서분, 결경을 유통분이라고 할 수도 있으며 위에서 말한대로 법화경 총 10권을 정종분으로 하여 그 이전의 경전을 서분, 열반경은 유통분으로 할 수도 있다. 이처럼 경전은 부분 속에 전체를 갖추고 전체가 부분이 되기도 하는 프랙탈을 이룬다.[47] 예를 들어서 법화경 1권에 해당하는 제2품인 방편품의 경우엔 '법화경 제1, 방편품 제2'라고 부른다. 수량품의 경우엔 6권에 있고 제16품이므로 '법화경 제6, 여래수량품 제16'이 된다.[48] 단어마다 구분하여 해석하자면 'sad'은 한국어로 '올바른' 정도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를 한역에서는 정(正, 바르다), 묘(妙 묘하다, 오묘하다) 등으로 번역한다. dharma는 한국어로 법, 법칙을 뜻한다.(달마대사의 달마와 같다.) puṇḍarīka는 한역에서 연화라고 번역되듯이 연꽃을 뜻한다. sūtra는 경(經), 경전을 의미한다.[49] 불국사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석가탑, 다보탑은 법화경 허공회의식에서 석가불과 다보불이 나란히 앉아있는 모습을 탑으로 형상화한 것이며 전체적인 형상과 구도가 법화경과 매우 밀접하다.[50]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연화라는 단어는 법화경을 비유적으로 상징한다는 차원을 넘어서 법화경의 이름이기도 하다. 법화경의 전승에서는 석존이 묘법연화경이 연화라는 꽃과 닮았다고 하여 '연화'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므로 연화 그 자체가 경전의 이름이다.[51] 영어권에서는 법화경을 연꽃을 뜻하는 'Lotus'와 경전을 뜻하는 'Sutra'와 뜻이 결합하여 'The Lotus Sutra'라고 부른다. 번역하면 그냥 연꽃 경전이다.[52] 그의 어록인 어서에는 법화경의 비유에 등장하는 내용을 한역 묘법연화경과 산스크리트어로 된 법화경을 비교하여 차이를 상세히 묘사하는 글도 남겨져 있다.[53] 심지어는 한 신자의 어린아이에게 유교의 가르침에 대해 가르치는 글도 있고 논어, 소학, 대학 등의 글도 인용하여 말하는 것으로 보아 불교경전에 한하지 않고 당시의 각종 서적을 폭 넓게 공부한 듯 하다.[54] 일반적으로 불교 경전은 그 내용에 따라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마치 지금의 글쓰기가 처음 중간 끝으로 이루어져 있듯이 경전도 각각 서분(序分), 정종분(正宗分), 유통분(流通分)이라는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당연히 정종분에 해당하는 내용이 그 경전의 가장 중요한 핵심부분이다. 하나의 경전을 서분, 정종분, 유통분으로 나누어 보는 것이 기본적인 구분법이지만 석존의 50여 년 일대성교를 통틀어 보았을 때도 법화경을 정종분으로 본다면 법화경 이전의 가르침을 서분, 법화경 이후를 유통분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또한 더욱 일반론적인 의미로 넓혔을 때, 어떤 주장이나 핵심을 정종분이라고 보았을 때 그 밑바탕이 되는 근거나 일체의 지식을 서분으로, 주장의 개별화된 사례나 구체적인 응용이 되는 지식은 유통분이라고도 이야기할 수도 있다. 니치렌은 다양한 경전과 주석서들을 깨달음을 얻기 위해 읽은 것이 아니라 결국 법화경을 객관적으로 남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공부한 것이다.[55] 그의 저작을 아무거나 하나 골라서 살펴 보아도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출처와 인용을 근본으로 논의를 전개시켜 나가는것을 쉽게 살펴볼 수 있다. 용수, 천친, 남악, 천태, 장안, 묘락, 전교와 같은, 아주 유명한 대논사들의 저서를 권과 장 수까지 정확하게 인용하고 또는 타종인 염불종의 호넨이 쓴 선택집이나 선종, 율종, 진언종, 등의 논사들의 책까지 공부해서 오히려 타종의 교리를 그 종파의 전문승려보다 잘 기억하기도 하며 법론 대결에서 상대방이 헷갈려서 실수로 잘못 인용한 부분이 있으면 바로잡은 후 반박하는 글까지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56] 창가학회에서는 '석존'이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한다.[57] 땅(地)에서 솟아(涌) 나타난 보살로 법화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고있는 부처다. 종지용출품 제15에서 땅에서 솟아올라 나타난 후 촉루품 제22에서 석존의 불법을 의탁받아 말법에 넓히기로 약속하고 다시 땅으로 들어간다. 그 경지는 오히려 석존보다 높다고 묘사될 정도로 심원하지만 겉으로는 부처가 되지 못하여 계속 수행을 하는 보살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에 부처이지만 보살이라고 불린다. 또한 그 숫자가 육만항하사(六萬恒河沙, 겐지스 강 모래알 수의 육만 배.)나 된다고 하고 각각의 지용보살들이 제각각 다시 1명에서 6만항하사의 권속(眷屬, 식구)을 데리고 다닌다. 법화경 신앙하는 불교종파는 많이 있지만 이 지용보살을 현 시대에 살고 있는 자기 자신이라고 파악하고 행동하는 단체는 니치렌 불법이 유일하다.[58] 니치렌은 세친과 용수 등도 창제를 했으나, 혼자서만 하는 선에서 그칠 뿐 널리 가르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59] 부처가 갖고 있는 성품이나 성질을 뜻한다.[60] 비슷한 경우는 한국에도 존재하는데 바로 삼국시대의 나무아미타불이 그것. 지금도 이 말은 한국 화엄종의 대표 문구이며 화엄종을 수용한 조계종 역시 이것을 주로 쓰고 있다. 따라서 이에 대해 의구심을 가질 이유는 없다. 나무아미타불의 뜻은 아미타불이라는 부처를 믿고 따른다는 뜻으로 이것만 외면 다음 생에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淨土, 깨끗한 땅이라는 뜻으로, 극락과 같은 말이다.)에서 왕생할 수 있다고 주장하여 이를 대중화한 것이 원효, 근본이 되는 경전은 정토삼부경이다. 밀교 계통에도 흔한 일이라 티벳 불교에서 "옴 마니 반메 훔"을 무수히 독창하는 것도 같은 취지다.[61] 이는 창가학회의 왜색 논란과 관련해서 자주 지적되는 요소이다. 창가학회에서는 대외적으로 '니치렌 대성인이 일본어로 독송했기에 우리도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해명하고 있으나, 창가학회의 교세 확장 역사를 되짚어 보면 외국인 신자들이 영험을 보기 위해서 일본어로 독송하던 습관이 그대로 유지되었다고 보는 쪽이 좀더 사실에 부합한다.[62] 마키구치 쓰네사부로, 도다 조세이, 이케다 다이사쿠.[63] "나는 깊이 그대들을 공경하여 감히 가볍게 여기거나 업신여기지 않는다. 그 까닭은, 그대들이 다 보살의 도를 행하여 마땅히 성불할 것이기 때문이다.(我 深敬汝等 不敢輕慢 所以者何 汝等 皆行菩薩道 當得作佛)"[64] 석존이 예언한 것으로 석존 멸 후 1000년간을 정법, 그 다음 1000년은 상법, 그 다음의 영겁에 걸친 시간을 말법이라고 정했다. 말법의 시대에는 석존의 영향력이 전부 사라져서 기성불교를 신앙해도 아무런 이득이 없다고 하였다. 이를 통틀어 정상말의 삼시(三時)라고도 한다. '세상이 말세다.'라는 말이 있는데 말세, 말대라는 말 모두 이 말법과 같은 뜻의 불교 용어다. 석존의 입멸년도가 계산 방식에 따라 몇 가지로 나뉘는 탓에 불분명한지라 말법의 시작 또한 다소 불분명하지만 대략 불기 2500쯤에 해당된다고 추정되는 현재는 어떤 계산법으로 계산해도 이미 말법에 접어들어있다고 판단된다. 현재는 말법이 시작한 지 대략 수백 년이 지난 시점이다.[65] 니치렌의 어록을 모은 어서를 보면, 니치렌은 석존의 경전인 법화경을 필두로 하여 다양한 경전의 글을 인용하며 철저히 경전 근본으로 말하고 있다. 이는 니치렌의 석존의 가르침을 가장 소중히 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또한 석존의 유언으로 알려진 '의법불의인(依法不依人, 법에 의하되 사람에 의하지 말라. 즉, 사람의 말이라도 경전 등의 근거가 없는 말은 받아들이지 말라.)'을 니치렌 자신이 매우 중시했다는 점을 들어 니치렌의 석가모니 존중양상을 증거하기도 한다.[66] 묘법연화경(묘호렌게쿄)에 귀의(나무)한다는 의미.[67] 위의 정법, 상법, 말법이라는 시간의 구분에서, 말법의 시대가 도래하면 '사람들이 반드시 서로 다투며, 백법(百法, 바른 가르침)이 은몰(隱沒, 자취를 감춘다)한다'는 뜻이다. '견고'란 부처의 예언은 틀림 없다는 의미다. 이 예언은 대집경(大集經) 제55권에 나온다.[68] 창가학회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핵무기의 사용과 냉전시대, 끊임없는 3차대전의 위협, IS의 테러행위 등은 모두 이 말법시대의 양상인 투쟁견고 · 백법은몰이라고 파악한다. 따라서 입정안국(立正安國)을 호소한 교주 니치렌의 주장과 같이, 올바른 사상과 철학과 종교가 세계민중에게 받아들여지는 일이 인류의 평화를 위해 인류의 갈등과 긴장을 해소할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이고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말한다.[69] 境涯, 수행으로 얻은 위치나 상태. 경지, 경계와 비슷한 뜻.[70] 법화경보다 나중에 설한 가르침인 열반경도 포함해서.[71] 40여년 동안 아직 진실을 밝히지 않았다.[72] 정직하게 방편을 버리고, 오직 무상도를 설함[73] 과거, 현재, 미래라는 뜻으로 법화경의 개경(開經)인 무량의경(無量意經)에서 나온 말이다. 무량의경에서 과거에 설한 경전들과 지금 이 경전(무량의경), 그리고 법화경 다음에 설할 경전(열반경)은 모두 법화경보다는 못하다고 말하는 구절을 가리킨다. 이금당(已今當)의 삼설(三說)이라고도 한다. 동아시아 종파불교에서는 소의경전을 설정하여 '미증유법(未曾有法, 지금까지는 없던 새로운 가르침)'에 의거해 자신의 경전이 최고라는 식의 설명을 왕왕 하곤 했는데, 이금당의 어조는 특히 좀 더 강한 감이 있다. 창가학회도 물론 자신들의 소의경전인만큼 법화경을 최고로치며, 시간 순서상 막바지에 설해진 것임을 들어 이전 경전들보다 상위일 수 밖에 없다는 맥락의 주장을한다. 다만, 법화경보다 나중에 설해졌을 수 밖에 없는 대반열반경(부처의 입멸 때를 묘사한 경전이므로)에 대해서만은 이 규칙을 철회한다. 법화경은 다소 파격적이다 싶을정도로 스스로를 높이므로, 이 점을 신봉하여 소의경전 삼았던 대승 종파가 상당수 있어왔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이 경전의 산스크리트어 원본이 존재하지 않고 한문역만 확인된다는 점 때문에 학계에서의 위경 논란이 매우 심하다. 때문에 대승의 입장에선 양날의 검이기도 하며, 실제로 대승안에서 이 문제로 인한 분열과 논쟁이 상당하다.[74] 당시(1260년 7월 16일)의 막부 최고 권력자인 호조 도키요리(北条時頼)에게 제출한 논문으로, 입정안국(立正安國)이란 ‘정(正)을 세워서 나라를 평안케 한다’는 것. 자신(니치렌)을 집의 주인으로, 호조 도키요리를 길을 지나가던 나그네로 대입하여 표현한다. 지나가던 나그네가 국토의 재난을 한탄하는 것에 응대하여 주인이 그 고민을 자신도 하고 있었다고 밝히고 입정안국의 원리를 말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나그네는 처음엔 주인의 파격적인 사상에 반발하여 욕하며 떠나려고 했지만 끝에는 수긍하고 "다만 나만이 믿을 뿐 아니라 타인의 잘못도 훈계하리라"하고 다짐하며 내용이 끝난다. 니치렌은 국주간효(國主諫曉, 나라의 주권자에게 잘못을 지적하고 정의를 밝혀 간언하는 일)를 평생 세 번이나 했는데 입정안국론은 이 중 처음에 해당하며 가장 유명하다. 이 논문은 현재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어있다.[75] 즉, 불교가 인간을 행복하게 해주는 종교라면, 왜 불교가 이토록 융성한 일본의 민중은 불행하게 살고있는가[76] 고마쓰바라 법난[77] 1279년 9월 21일 아쓰하라 법난. 이는 니치렌의 출세의 본회이기도 하다. 자세한 것은 성인어난사 참조[78] 다쓰노구치 법난. 이 법난을 계기로 발적현본 했다.[79] 이즈 유죄, 사도 유죄.[80] 다만 당시 조정 내에 니치렌을 지지하는 대신들이 있었던 덕에 그는 감면되어 다시 풀려났다.[81] 사이비, 이단, 범죄 등.[82] 의외라면 의외로 전원이 학회원인 것은 아니다. 공명당은 현재 공식적으로는 창가학회와의 관계를 단순 지지단체로 설정하고 있기 때문에, 당세 확장을 위해 비학회원 정치인도 다수 영입했다. 최초의 비학회원 의원인 쿠사카와 쇼조 의원 역시 사회당에서 영입된 케이스.[83] 불교를 믿게 되었다는 2004년 기사가 있는데, 그 불교가 사실 창가학회다.[84] 부모님은 일본 창가학회 기관지인 세이쿄 신문사의 임원이라고 한다. 또한 본인이 직접적으로 밝힌 적은 없으나 매체에 나온 어릴 적 사진의 교복 등으로 보았을 땐 창가학회에서 운영하는 학교의 교복과 유사한 것으로 보아 관련된 학교를 다녔을 것으로 추측된다. 실제로 소카 중학교 및 고교 출신이다.[85] 일본에 진출했던 것도 이런 영향이 있었을거라고 보기도 한다. 여러 논란만 남기고 안좋게 끝난게 문제였지만.[86] 한국지부는 과거에 'SGI 한국불교회', '불교문화회관'이란 명칭을 사용하였다.[87] 서울미래초등학교 정류장[88] 영등포역 방향만 경유, 거리공원.구로신협본점 정류장[89] 약칭 KISA, 한국인터넷진흥원과는 별개다.[90] 신도림역 옆에 있는 테크노마트에 두 곳, 구로역 옆 리치몰(구 나인스애비뉴)에 한 곳이 있다.[91] 예를 들면 사이언톨로지나 통일교는 나라들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여러 나라들에서 활동에 제약을 받았다.[92] 하지만 이 종교를 가진 사람들도 그냥 남묘호렌게쿄 믿는다고 하는 경우도 많다. 특히 나이 드신 분들은..[93] 천주교와 개신교계에서 말하는 '이단'이란 기독교계 종교에서 갈라진 이단들 뿐 아니라 사이비 종교를 포함하기도 하는데, 타종교계나 신흥종교의 경우 기독교에 적대적이거나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지 않는 한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94] 목포는 불교 일련종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지역이고, 일본인 일련종 교도의 출입이 꽤 있는 편이다.[95] 창가학회의 초대 회장인 마키구치 쓰네사브로는 군국주의에 항거해서 옥사했다. 죄목은 당시 독립투사들이 받은 죄명과 같은 불경죄, 치안유지법 위반.[96] 연합뉴스 2009년 11월 18일 기사.[결정문] 97.1 97.2 97.3 아래의 결정문으로 반박[98] 부정투표 및 일개 종교 회장의 직간접적인 선거 개입 등[99] 충북 진천군 SGI거리 조성 사기 사건 - 한 군위원이 한국SGI와 결탁하여 마을 이장들의 사인을 위조하여 마을거리 이름을 'SGI거리'로 만들려고 한 불법사기 사건[102] 우편물의 내용 - 해골그림에 악인박멸 기원이라고 적힘, 탈퇴자의 죽음을 바라는 동지가 몇 만명이 있다고 적힘[103] 이 결정문은 제작진측의 방송 내용에 대한 사과나 언론중재위원회가 방송 내용이 틀렸음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 '방송 내용에 대해서 상대측 입장은 이러하니 이에 대한 내용도 시청자들한테 보도하라'는 결정이다. SBS는 결정문에 의해 다음 회차 방송 전 위와 같이 보도하였다.[104] SBS의 1시간의 방송분량에 대해 창가학회의 입장을 약 2분 정도로 방영하였으며 이에 대해 각자가 판단할 것.[105] 창가학회는 몇가지 사안에 대해서 위와 같이 입장을 밝혔으며 나머지 방송 내용(일본내 사건사고, 피해자 모임, 충북 진천군 SGI 거리 조성 관련 사건 등)에 대한 입장은 결정문에 나타나지 않았다.[106] '에어모토씨' 동영상의 주인공인 일본 연예인 히사모토 마사미가 SGI 관련 동영상에서 했던 もうダブル驚きですよね("모우다부루오도로키데스요네"라고 읽으며, 구체적인 맥락에서 느껴지는 뉘앙스를 배제하고 말 뜻만 해석하면 "두 배로 놀랍군요!" 정도의 뜻)에서 유래. '기동전사 건담 더블오'의 패러디물이다.[107] '기동전사 건담 더블오도로키'의 후속 방송(...)으로, '강철의 연금술사 FULLMETAL ALCHEMIST'의 패러디물이다. SGI가 세간에서 '컬트 교단'이라고 조롱받고 있는 것이 이름의 유래 중 하나이다. 다른 유래는, SGI로부터 이케다 다이사쿠로 흘러간 헌금이 공명당과 SGI의 연결성과 정교일치 방침을 보여주는 것이라면서, 일본의 한 참의원(상원의원 정도에 해당)이 2007년 당시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언급했던 'P헌금'이라는 표현이다.[108] '케이온!'의 패러디물. 이 역시 각주의 'P헌금'이라는 표현으로부터 유래되었다. '켄킨(けんきん)'은 '헌금'이라는 단어의 일본식 발음.[109] 이 이름을 가져다 쓴 동명의 인디 아티스트가 있었으나, 사실은 권용만이 초기 창작하던 때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만들었던 프로젝트 밴드중 하나였다고 한다. 당시 권용만은 영생교 소재를 가져다 풍자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