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 들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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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 들뢰즈 Gilles Deleuze | |
본명 | 질 루이 르네 들뢰즈 Gilles Louis René Deleuze |
출생 | |
사망 | |
국적 | |
모교 | 카르노 고등학교 앙리4세 고등학교 파리 대학교 |
경력 | 루이르그랑 고등학교 교사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센터 연구원 (1960-1964) 리옹 대학교 교수 (1964-1969) 파리 제8대학교 교수 (1969-1987) |
학파 | |
직업 | 철학자, 미학자, 작가 |
배우자 | 드니즈 폴 그랑주앙 |
1. 개요[편집]
"들뢰즈라는 번개가 일었다. 아마도 어느 날 20세기는 들뢰즈의 시대로 불릴 것이다."― 미셸 푸코
프랑스의 철학자.
펠릭스 가타리와의 철학 콤비로 여러 학문적 업적을 쌓았고, 들뢰즈-가타리 콤비는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와 더불어 가장 대표적인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로 알려져있다.[2]
차이와 생성의 철학자로 유명하며, 리좀과 수목, 탈영토화, 탈코드화 등 독창적인 어휘들을 창시하였다. 헤라클레이토스, 바뤼흐 스피노자, 프리드리히 니체, 앙리 베르그송 등 소위 철학사의 비주류적 계보를 탐색하고 발굴하며 그들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전개했다. 그는 철학을 넘어 과학, 수학, 회화, 영화, 문학, 건축, 지리학 등 매우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진 동시에 후대에 영향을 끼쳤다.
펠릭스 가타리와의 철학 콤비로 여러 학문적 업적을 쌓았고, 들뢰즈-가타리 콤비는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와 더불어 가장 대표적인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로 알려져있다.[2]
차이와 생성의 철학자로 유명하며, 리좀과 수목, 탈영토화, 탈코드화 등 독창적인 어휘들을 창시하였다. 헤라클레이토스, 바뤼흐 스피노자, 프리드리히 니체, 앙리 베르그송 등 소위 철학사의 비주류적 계보를 탐색하고 발굴하며 그들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전개했다. 그는 철학을 넘어 과학, 수학, 회화, 영화, 문학, 건축, 지리학 등 매우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진 동시에 후대에 영향을 끼쳤다.
2. 생애[편집]
들뢰즈는 파리의 보수적인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엔지니어이고 어머니는 가정주부였으며 형은 독일군 점령 당시 레지스탕스 활동 중 체포되어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가는 열차에서 사망했다.
10대의 들뢰즈는 파리 고등사범학교 진학을 목표로 입시 준비를 했으나 실패한다. 대신 1944년 파리 대학교에 진학해 철학을 공부했으며 페르디낭 알키에, 조르주 캉길렘, 장 이폴리트 등에게서 사사했다. 이 시기 마리마들렌 다비가 주관하는 지식인 모임에 참석해 자크 라캉, 피에르 클로소프스키, 장 폴라크 등과 교류했다. 이후 1947년, 흄에 관한 연구를 끝으로 대학을 졸업했으며, 이때 쓴 졸업 논문이 '경험론과 주체성: 흄에 따른 인간 본성에 관한 시론'으로 이후 1953년 책으로 출판된다. 이 책을 뒤로 하고 들뢰즈는 8년간의 침묵기를 가진 채 철학사 연구에 몰두하게 된다.
이듬해인 1948년 철학 교사 자격시험을 통과하고 아미앵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으로 오를레앙, 루이르그랑 고등학교 등 여러 학교를 전전하며 교사로 지내게 된다. 1956년에는 D.H. 로렌스의 불어 번역자이자 영미 문학 연구가인 드니즈 폴 그랑주앙과 결혼했으며, 이후 1960년에는 아들 쥘리앵을, 1964년에는 딸 에밀리를 얻는다. 1957년에는 소르본 대학에서 철학사학 조교로 일했으며 당시 독특했던 그의 강의가 주목받았다고 한다. 1960년에는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센터(CNRS) 연구원으로, 1964년에는 리옹 대학 강사로 재직했다.
60년대 들어서 들뢰즈는 그간의 침묵을 깨고 본격적인 활동에 나선다. 독창적인 니체 해석으로 평가받는 "니체와 철학"을 비롯해 "칸트의 비판 철학", "니체", "베르그송주의", "자허마조흐 소개" 등의 저작을 부지런히 출간했고, 미셸 푸코와 교류하며 함께 학생 운동에 가담하고 니체 유고 불역본 총책임을 맡아 작업했다.
1968년, 5월 혁명이 일어난다. 정치적 격변기를 겪으며 이를 계기로 들뢰즈는 동성애자 권리와 팔레스타인 해방 운동 같은 여러 단체와 운동에 적극 참여한다. 동시에 국가 박사 학위 논문인 '차이와 반복'과 부논문인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을 제출한다. '차이와 반복'은 들뢰즈의 주저이자 20세기 프랑스 철학의 대표작 중 하나로 그간의 철학사 연구를 벗어나 들뢰즈 고유의 독창적인 철학을 알리는 작품이며, 이듬해 출간하는 또다른 주저 '의미의 논리'와 함께 펠릭스 가타리와의 조우 이전 들뢰즈 단독 저작 시기를 마무리하는 저서였다.
1969년, 들뢰즈는 푸코의 뒤를 이어 파리 제8대학교의 주임교수가 된다. 당시 프랑스 제8대학은 교육 개혁을 위한 지적 실험의 장이었으며, 들뢰즈는 프랑수아 샤틀레,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미셸 푸코, 알랭 바디우 등과 함께 이러한 실험의 앞장섰다. 정신과 의사이자 정신분석학자였던 펠릭스 가타리와 처음으로 교류한다. 가타리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공격적인 마르크스주의자였으며 들뢰즈와 만나기 이전에 '정치와 무의식', '기계적 무의식' 등의 단독 저서들을 출간한 적이 있었다. 두 사람은 편지를 통해 서로 의견을 주고받았고 이윽고 공동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1970년 '스피노자: 실천철학'을 출간한다. 1971년에는 푸코, 다니엘 드페르가 창설한 '감옥정보모임(Groupe Information Prisons: GIP)'에 가담해 활동한다. 이 모임은 당시 프랑스 감옥의 열악한 상황을 폭로하고 감옥이라는 체제가 가진 권력의 유형을 연구하는데 목적을 두었다.
이듬해인 1972년, 가타리와 함께한 공저 '안티 오이디푸스'를 출간한다. 이 책은 68혁명의 영향이 짙게 드리운 저서로 특히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집중적으로 비판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1975년에는 두 번째 공저, '카프카: 소수 문학을 위하여'를 출간한다.
1978년, 오랜 동지였던 푸코와 결별하게 된다. 주된 이유는 테러리즘의 역할과 그에 대한 각 정부에 대처 방식에 대한 정치적 견해 차였으며, 당대의 반공주의적 사회주의자들인 '신철학자'들에 대한 입장 차이도 한 몫을 했다고 한다.[3] 이후 에이즈에 걸려 죽음을 목전에 둔 푸코와의 재회를 바랐으나 이뤄지진 못했다. 1984년 푸코가 사망한 이후, 푸코의 저서인 '성의 역사2: 쾌락의 활용'의 한 구절을 읽는 것으로 추도사를 대신한다.
1980년에는 가타리와의 세 번째 공저인 '천 개의 고원'을 출간한다. 전작인 '안티 오이디푸스'의 주제 의식을 확장시킨 작품이었으나 전작만큼의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진 못했다. 이탈리어판 서문에서 들뢰즈도 이에 대해 '안티 오이디푸스'가 68혁명 영향 아래 있었으나, '천 개의 고원'은 천박한 양상의 침체와 무관심의 시기에 출간되었다고 평가했다.
이후 '프란시스 베이컨: 감각의 논리', '시네마 1, 운동-이미지', '시네마 2, 시간-이미지'와 같은 미학 저서들을 출간한다. 1986년에는 푸코에 대해 다룬 '푸코'를 출간한다. 이 책에서 들뢰즈는 푸코에 대한 철학적, 학문적인 의미에서 뿐만 아니라 푸코에 대한 존경 때문에 책을 저술했다고 밝힌다.
1987년, 교수직을 은퇴한 후 저술 활동에 몰두하며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 '페리클레스와 베르디. 프랑수아 샤틀레의 철학', 그리고 가타리와의 마지막 공저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연이어 출간한다. 1992년 가타리가 사망하고 이듬해에 들뢰즈 역시 건강이 악화된다. 젊은 시절 폐 수술을 받은 전적이 있었음에도 지독한 골초였고 이 때문에 말년에는 폐암으로 고통받게 된다.
1995년 죽기 전에 『마르크스의 위대함 (La Grandeur de Marx)』이라는 제목의 책을 쓰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마지막 글인 「내재성: 하나의 삶...」을 미완성인 채로 남겨두고, 같은 해 11월 4일 자신의 아파트에서 스스로 호흡기를 뗀 후 투신 자살했다. 친구인 미셸 세르는 자살이 아니라 갑갑했던 들뢰즈가 호흡기를 떼고 창문을 열다가 숨이 안 쉬어져서 의식을 잃고 떨어진 것이라고 주장했다.[4]
10대의 들뢰즈는 파리 고등사범학교 진학을 목표로 입시 준비를 했으나 실패한다. 대신 1944년 파리 대학교에 진학해 철학을 공부했으며 페르디낭 알키에, 조르주 캉길렘, 장 이폴리트 등에게서 사사했다. 이 시기 마리마들렌 다비가 주관하는 지식인 모임에 참석해 자크 라캉, 피에르 클로소프스키, 장 폴라크 등과 교류했다. 이후 1947년, 흄에 관한 연구를 끝으로 대학을 졸업했으며, 이때 쓴 졸업 논문이 '경험론과 주체성: 흄에 따른 인간 본성에 관한 시론'으로 이후 1953년 책으로 출판된다. 이 책을 뒤로 하고 들뢰즈는 8년간의 침묵기를 가진 채 철학사 연구에 몰두하게 된다.
이듬해인 1948년 철학 교사 자격시험을 통과하고 아미앵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으로 오를레앙, 루이르그랑 고등학교 등 여러 학교를 전전하며 교사로 지내게 된다. 1956년에는 D.H. 로렌스의 불어 번역자이자 영미 문학 연구가인 드니즈 폴 그랑주앙과 결혼했으며, 이후 1960년에는 아들 쥘리앵을, 1964년에는 딸 에밀리를 얻는다. 1957년에는 소르본 대학에서 철학사학 조교로 일했으며 당시 독특했던 그의 강의가 주목받았다고 한다. 1960년에는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센터(CNRS) 연구원으로, 1964년에는 리옹 대학 강사로 재직했다.
60년대 들어서 들뢰즈는 그간의 침묵을 깨고 본격적인 활동에 나선다. 독창적인 니체 해석으로 평가받는 "니체와 철학"을 비롯해 "칸트의 비판 철학", "니체", "베르그송주의", "자허마조흐 소개" 등의 저작을 부지런히 출간했고, 미셸 푸코와 교류하며 함께 학생 운동에 가담하고 니체 유고 불역본 총책임을 맡아 작업했다.
1968년, 5월 혁명이 일어난다. 정치적 격변기를 겪으며 이를 계기로 들뢰즈는 동성애자 권리와 팔레스타인 해방 운동 같은 여러 단체와 운동에 적극 참여한다. 동시에 국가 박사 학위 논문인 '차이와 반복'과 부논문인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을 제출한다. '차이와 반복'은 들뢰즈의 주저이자 20세기 프랑스 철학의 대표작 중 하나로 그간의 철학사 연구를 벗어나 들뢰즈 고유의 독창적인 철학을 알리는 작품이며, 이듬해 출간하는 또다른 주저 '의미의 논리'와 함께 펠릭스 가타리와의 조우 이전 들뢰즈 단독 저작 시기를 마무리하는 저서였다.
1969년, 들뢰즈는 푸코의 뒤를 이어 파리 제8대학교의 주임교수가 된다. 당시 프랑스 제8대학은 교육 개혁을 위한 지적 실험의 장이었으며, 들뢰즈는 프랑수아 샤틀레,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미셸 푸코, 알랭 바디우 등과 함께 이러한 실험의 앞장섰다. 정신과 의사이자 정신분석학자였던 펠릭스 가타리와 처음으로 교류한다. 가타리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공격적인 마르크스주의자였으며 들뢰즈와 만나기 이전에 '정치와 무의식', '기계적 무의식' 등의 단독 저서들을 출간한 적이 있었다. 두 사람은 편지를 통해 서로 의견을 주고받았고 이윽고 공동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1970년 '스피노자: 실천철학'을 출간한다. 1971년에는 푸코, 다니엘 드페르가 창설한 '감옥정보모임(Groupe Information Prisons: GIP)'에 가담해 활동한다. 이 모임은 당시 프랑스 감옥의 열악한 상황을 폭로하고 감옥이라는 체제가 가진 권력의 유형을 연구하는데 목적을 두었다.
이듬해인 1972년, 가타리와 함께한 공저 '안티 오이디푸스'를 출간한다. 이 책은 68혁명의 영향이 짙게 드리운 저서로 특히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집중적으로 비판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1975년에는 두 번째 공저, '카프카: 소수 문학을 위하여'를 출간한다.
1978년, 오랜 동지였던 푸코와 결별하게 된다. 주된 이유는 테러리즘의 역할과 그에 대한 각 정부에 대처 방식에 대한 정치적 견해 차였으며, 당대의 반공주의적 사회주의자들인 '신철학자'들에 대한 입장 차이도 한 몫을 했다고 한다.[3] 이후 에이즈에 걸려 죽음을 목전에 둔 푸코와의 재회를 바랐으나 이뤄지진 못했다. 1984년 푸코가 사망한 이후, 푸코의 저서인 '성의 역사2: 쾌락의 활용'의 한 구절을 읽는 것으로 추도사를 대신한다.
1980년에는 가타리와의 세 번째 공저인 '천 개의 고원'을 출간한다. 전작인 '안티 오이디푸스'의 주제 의식을 확장시킨 작품이었으나 전작만큼의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진 못했다. 이탈리어판 서문에서 들뢰즈도 이에 대해 '안티 오이디푸스'가 68혁명 영향 아래 있었으나, '천 개의 고원'은 천박한 양상의 침체와 무관심의 시기에 출간되었다고 평가했다.
이후 '프란시스 베이컨: 감각의 논리', '시네마 1, 운동-이미지', '시네마 2, 시간-이미지'와 같은 미학 저서들을 출간한다. 1986년에는 푸코에 대해 다룬 '푸코'를 출간한다. 이 책에서 들뢰즈는 푸코에 대한 철학적, 학문적인 의미에서 뿐만 아니라 푸코에 대한 존경 때문에 책을 저술했다고 밝힌다.
1987년, 교수직을 은퇴한 후 저술 활동에 몰두하며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 '페리클레스와 베르디. 프랑수아 샤틀레의 철학', 그리고 가타리와의 마지막 공저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연이어 출간한다. 1992년 가타리가 사망하고 이듬해에 들뢰즈 역시 건강이 악화된다. 젊은 시절 폐 수술을 받은 전적이 있었음에도 지독한 골초였고 이 때문에 말년에는 폐암으로 고통받게 된다.
1995년 죽기 전에 『마르크스의 위대함 (La Grandeur de Marx)』이라는 제목의 책을 쓰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마지막 글인 「내재성: 하나의 삶...」을 미완성인 채로 남겨두고, 같은 해 11월 4일 자신의 아파트에서 스스로 호흡기를 뗀 후 투신 자살했다. 친구인 미셸 세르는 자살이 아니라 갑갑했던 들뢰즈가 호흡기를 떼고 창문을 열다가 숨이 안 쉬어져서 의식을 잃고 떨어진 것이라고 주장했다.[4]
3. 사상[편집]
3.1. 존재론: 내재적 일의성[편집]
차이와 반복 (Différence et répétition) (1968)
들뢰즈는 스스로가 바뤼흐 스피노자와 앙리 베르그송, 그리고 프리드리히 니체의 사상을 이어받고 있음을 반복하여 주장한다[5]. 이들의 공통점은 신에 대한 거부를 통해 나타나는 선험적이고 절대적인 원리에 대한 부정과 끊임없는 순환과 생성에 대한 상상에 있는데, 이는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해 왔던 '동일성'에 대한 거부로 이해될 수 있다. 들뢰즈는 이를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존재를 넘어서는 어떠한 보편적이거나 초월적인 개념, 원리도 없는 존재론을 이어간다.
예를 들자면, 사과 두 개를 앞에 두고 들뢰즈가 문제시하는 것은 이 사과 두 개의 존재에 앞서 존재하며 이 개체들에게 사과라는 정체성과 사과1, 사과2라는 동일성을 부여하는 '사과'라는 식물학적, 종분류학적인 개념과 범주 그 자체이다. 우리는 사과 한 개를 두고 식물의 일종으로, 사과나무의 한 열매로, 사과류의 한 품종으로, 먹을 수 있는 과일로 구분짓듯 존재는 존재에 앞서 정의되어있는 범주나 개념을 통해 다의적으로 해석한다. 반면 들뢰즈에게는 존재의 의미를 존재의 외부에서 찾는 것 자체가 근본적으로 사물에 대한 오해로, 존재의 의미는 존재의 외부가 아니라 그 내부에서, 외부적 규정 없이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들뢰즈가 존재의 다의성을 거부하고 '일의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존재를 '무엇무엇 임'으로 개념화함으로써 정태적인 것으로 규정짓는 대신, '되어가고 있음(being)'의 시선에서 존재를 설명할 때 우리에게 열리는 존재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철학 베이스가 좀 있는 사람을 위해 쓰자면, 들뢰즈는 동일성의 논리를 재현(representation)의 문제의 연장에서 이해한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에게 직관적으로 주어지는 사물들의 동일성과 차이를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해를 위해 빗대자면 들뢰즈는 세계를 오늘날 말하는 복잡계와 같이 바라본다. 물론 그 계의 구성요소를 비교적 자명한 실체로 상정하는 현대의 복잡계 이론과는 달리, 들뢰즈는 그 계를 구성하는(것 처럼 여겨지는) 개별적 요소 자체를 계의 "운동 과정"으로 바라본다. 들뢰즈는 이렇게 말한다.
들뢰즈는 스스로가 바뤼흐 스피노자와 앙리 베르그송, 그리고 프리드리히 니체의 사상을 이어받고 있음을 반복하여 주장한다[5]. 이들의 공통점은 신에 대한 거부를 통해 나타나는 선험적이고 절대적인 원리에 대한 부정과 끊임없는 순환과 생성에 대한 상상에 있는데, 이는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해 왔던 '동일성'에 대한 거부로 이해될 수 있다. 들뢰즈는 이를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존재를 넘어서는 어떠한 보편적이거나 초월적인 개념, 원리도 없는 존재론을 이어간다.
예를 들자면, 사과 두 개를 앞에 두고 들뢰즈가 문제시하는 것은 이 사과 두 개의 존재에 앞서 존재하며 이 개체들에게 사과라는 정체성과 사과1, 사과2라는 동일성을 부여하는 '사과'라는 식물학적, 종분류학적인 개념과 범주 그 자체이다. 우리는 사과 한 개를 두고 식물의 일종으로, 사과나무의 한 열매로, 사과류의 한 품종으로, 먹을 수 있는 과일로 구분짓듯 존재는 존재에 앞서 정의되어있는 범주나 개념을 통해 다의적으로 해석한다. 반면 들뢰즈에게는 존재의 의미를 존재의 외부에서 찾는 것 자체가 근본적으로 사물에 대한 오해로, 존재의 의미는 존재의 외부가 아니라 그 내부에서, 외부적 규정 없이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들뢰즈가 존재의 다의성을 거부하고 '일의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존재를 '무엇무엇 임'으로 개념화함으로써 정태적인 것으로 규정짓는 대신, '되어가고 있음(being)'의 시선에서 존재를 설명할 때 우리에게 열리는 존재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철학 베이스가 좀 있는 사람을 위해 쓰자면, 들뢰즈는 동일성의 논리를 재현(representation)의 문제의 연장에서 이해한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에게 직관적으로 주어지는 사물들의 동일성과 차이를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해를 위해 빗대자면 들뢰즈는 세계를 오늘날 말하는 복잡계와 같이 바라본다. 물론 그 계의 구성요소를 비교적 자명한 실체로 상정하는 현대의 복잡계 이론과는 달리, 들뢰즈는 그 계를 구성하는(것 처럼 여겨지는) 개별적 요소 자체를 계의 "운동 과정"으로 바라본다. 들뢰즈는 이렇게 말한다.
사물, 동물, 사람은 이제 움직임과 정지, 빠름과 느림, 변용태, 강도에 의해서만 정의됩니다. 이제 형식들은 없고, 형식화되지 않은 요소들간에 이루어지는 운동학적 관계들이 있습니다. 이제 주체들은 없고, 집합적 배치들을 구성하는, 주체 없는 역학적 개체화들이 있습니다. (디알로그, 1977)
들뢰즈는 우리가 독립체로 인식하는 '개체'가 사실은 무한히 뻗어있는 복잡한 계에서 끊임없이 운동하고 재배치되는 과정의 일부들이라고 본다[6]. 즉, 어떤 존재가 개체로 이해될 때, 그 존재의 의미는 외부적 관념이 아니라 그 개체가 그 순간에 내재성의 평면에서 접속되어있는 '배치의 상태' 또는 배치 그 자체인 것이다. 따라서 모든 동일성(이라고 인식되는 것들)이 '계(내재성의 평면)의 운동'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는 동일한 것이 아니며, 따라서 동일성에 근거하는 차이 역시 성립 자체가 불가능하게 된다. 차이는 오히려 '내재성의 평면'이 '운동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끊임없는 재배치의 효과이다.[7]
다시 사과의 예를 들자면, 들뢰즈의 존재로는 사과를 사과나무에서 떨어져 나온 하나의 독립체로 보는 것을 멈추고, 대신 사과와 사과를 둘러싸고 있는, 심지어는 사과 내부에 있는 대지, 대기, 물, 사람, 세포, 원소, 분자, 원자 등 모든 것으로 구성된 복잡한 관계망의 일시적 배치 형태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관점에서 '나무에 달린 사과'와 '나무에서 떨어진 사과'의 차이를 만드는 것은 외형적 형태, 내외부의 구분, 지식적 개념이 아니라 복잡한 관계망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배치를 만들어내는 관계망의 운동성이다. 들뢰즈의 시선에서 사과는(그리고 사실 모든 개체들은) 매 순간 끊임없이 생성-재생성되고 있는 것이다.
다시 사과의 예를 들자면, 들뢰즈의 존재로는 사과를 사과나무에서 떨어져 나온 하나의 독립체로 보는 것을 멈추고, 대신 사과와 사과를 둘러싸고 있는, 심지어는 사과 내부에 있는 대지, 대기, 물, 사람, 세포, 원소, 분자, 원자 등 모든 것으로 구성된 복잡한 관계망의 일시적 배치 형태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관점에서 '나무에 달린 사과'와 '나무에서 떨어진 사과'의 차이를 만드는 것은 외형적 형태, 내외부의 구분, 지식적 개념이 아니라 복잡한 관계망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배치를 만들어내는 관계망의 운동성이다. 들뢰즈의 시선에서 사과는(그리고 사실 모든 개체들은) 매 순간 끊임없이 생성-재생성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들뢰즈는 모든 개체, 개념을 마치 창발적 과정과 같이 인간의 인식적 틀 하에서는 거꾸로 추적될수도, 규칙에 의해 연역될수도 없는 (즉 인과관계를 규명할 수 없는) 일시적 상태로 이해하자고 한다. 때문에 들뢰즈의 존재론은 니체가 말한 "영겁회귀"에 대한 철학적 개념화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어쨌든 들뢰즈의 사유는 운동하는 물질의 계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없다고 본다는 점에서 이데아적 관념론, 칸트적 선험론, 헤겔적 유물론과 모두와 근본적으로 구분되는 새로운 유물론에 기초하는 것은 분명하다.
3.2. 권력: 욕망하는 기계[편집]
그런데 만약 내재성의 평면이 끊임없이 운동하고 있다면, 그 내재성의 평면을 운동하게 하는 힘은 무엇인가? 그 힘의 출처는 어디이며 외부적 힘이 아니라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을 그 힘으로 지칭한다. 여기서 욕망은 복잡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의 욕망 개념과의 비교를 통해 들뢰즈와 가타리의 욕망 개념을 비교적 쉽게 조망해 볼 수 있다.
프로이트나 라캉 등 정신분석학자들이 말하는 욕망은 무의식으로 잠재화된 '결핍'이다. 이는 생물학적 인간으로서 갖는 무의식적이고 원초적이면서 섹슈얼리티적인 결핍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보기에 정신분석학의 욕망 개념에는 크게 두 가지 문제가 있다. 하나는 욕망을 인간에게 내재되는 것으로, 즉 욕망을 인간에게 예속된 힘으로 보는 시선이다. 다른 하나는 욕망의 본질을 무언가의 결여나 결핍으로 지칭하는 구조주의적 결론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두 지점을 중심으로 욕망 개념을 새롭게 다진다. 이들은 먼저 욕망을 인간과 분리시키고 그 층위를 세계의 가장 근본적인 작동 양식으로 끌어내린다. 따라서 욕망이란 누군가에게 소유되거나, 개체의 존재 이후에 발생하는 힘이 아니게 된다. 욕망은 이미 개체의 개체화 이전에 내재성의 평면을 관통하며 흐르고 있는 힘, 내재성의 평면의 운동성 그 자체인 것이다. 이는 스피노자의 코나투스, 니체의 힘에의 의지와 같은 개념이 포괄하고자 했던 것과 유사한 물질계의 근본적 운동 원리에 가깝다. 즉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보다 더 작거나 더 근본적인 힘은 없다고 본다. 따라서 욕망은 단순한 '재현된 결핍' 이상의 의미와 역량을 갖게 된다
그 다음으로, 욕망을 운동성으로 바라봄으로써 욕망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생산적 힘으로 개념화된다. 욕망은 작동을 통해 무언가를 생산해낸다는 점에서 기계와 같다. 앞서 말했듯 이들에게 욕망보다 근본적인 것은 없다는 점에서 욕망은 세계를 형성하는 기초 단위이기도 하다. 이러한 점에서 세계는 운동성-기계의 이중성을 지닌 무수한 욕망이 배치-재배치되며 끊임없이 무언가를 생성해내고 있는 하나의 장(場)이라고 할 수 있다. 욕망하는 기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이 곧 기계[8]인 동시에 자가작동의 운동성이기도 한 것이다. 이처럼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을 원초적 힘이나 에너지, 역동성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지속적으로 주문한다.[9]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 개념을 재해석하며 당시 대륙철학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던 정신분석학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이들이 보기에 프로이트는 무의식 개념을 제시하여 이성과 합리성을 인간의 본질로 상정했던 근대의 이성주의적 시선을 때려 부순 위인이기도 했지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대변되는 무의식적 구조가 주체성을 결정한다고 정언해버림으로써 주체 해방의 가능성을 잠가버린 근대적 구조주의자에 불과하기도 했다. 정신분석학적 욕망 개념을 뒤집어 욕망을 유동적인 흐름이자 생산하는 힘으로 재개념화하려는 시도는 '안티 오이디푸스'라는 이들의 책 제목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이는 또한 '욕망의 활용 방식' 이라는 근대 자본주의의 중요한 분석지점을 노정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프로이트나 라캉 등 정신분석학자들이 말하는 욕망은 무의식으로 잠재화된 '결핍'이다. 이는 생물학적 인간으로서 갖는 무의식적이고 원초적이면서 섹슈얼리티적인 결핍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보기에 정신분석학의 욕망 개념에는 크게 두 가지 문제가 있다. 하나는 욕망을 인간에게 내재되는 것으로, 즉 욕망을 인간에게 예속된 힘으로 보는 시선이다. 다른 하나는 욕망의 본질을 무언가의 결여나 결핍으로 지칭하는 구조주의적 결론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두 지점을 중심으로 욕망 개념을 새롭게 다진다. 이들은 먼저 욕망을 인간과 분리시키고 그 층위를 세계의 가장 근본적인 작동 양식으로 끌어내린다. 따라서 욕망이란 누군가에게 소유되거나, 개체의 존재 이후에 발생하는 힘이 아니게 된다. 욕망은 이미 개체의 개체화 이전에 내재성의 평면을 관통하며 흐르고 있는 힘, 내재성의 평면의 운동성 그 자체인 것이다. 이는 스피노자의 코나투스, 니체의 힘에의 의지와 같은 개념이 포괄하고자 했던 것과 유사한 물질계의 근본적 운동 원리에 가깝다. 즉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보다 더 작거나 더 근본적인 힘은 없다고 본다. 따라서 욕망은 단순한 '재현된 결핍' 이상의 의미와 역량을 갖게 된다
그 다음으로, 욕망을 운동성으로 바라봄으로써 욕망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생산적 힘으로 개념화된다. 욕망은 작동을 통해 무언가를 생산해낸다는 점에서 기계와 같다. 앞서 말했듯 이들에게 욕망보다 근본적인 것은 없다는 점에서 욕망은 세계를 형성하는 기초 단위이기도 하다. 이러한 점에서 세계는 운동성-기계의 이중성을 지닌 무수한 욕망이 배치-재배치되며 끊임없이 무언가를 생성해내고 있는 하나의 장(場)이라고 할 수 있다. 욕망하는 기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이 곧 기계[8]인 동시에 자가작동의 운동성이기도 한 것이다. 이처럼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을 원초적 힘이나 에너지, 역동성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지속적으로 주문한다.[9]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 개념을 재해석하며 당시 대륙철학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던 정신분석학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이들이 보기에 프로이트는 무의식 개념을 제시하여 이성과 합리성을 인간의 본질로 상정했던 근대의 이성주의적 시선을 때려 부순 위인이기도 했지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대변되는 무의식적 구조가 주체성을 결정한다고 정언해버림으로써 주체 해방의 가능성을 잠가버린 근대적 구조주의자에 불과하기도 했다. 정신분석학적 욕망 개념을 뒤집어 욕망을 유동적인 흐름이자 생산하는 힘으로 재개념화하려는 시도는 '안티 오이디푸스'라는 이들의 책 제목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이는 또한 '욕망의 활용 방식' 이라는 근대 자본주의의 중요한 분석지점을 노정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3.3. 정동: 잠재태와 현실태[편집]
3.4. 윤리: (탈)영토화, 다양체, 리좀[편집]
"나무라면 진절머리가 난다"《천개의 고원》
여기서 나무란 서구의 전통적 사유방식[10] 을 의미한다. 나무를 떠올려보자. 나무는 뿌리에서부터 줄기-가지로 뻗어나간다. 모든 것을 사물의 본질이나 근거, 원인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는 사유로 서양의 형이상학적 전통, 근거지음(grunden)[11] 이다. 또, 위계적인 체계로 유목적인 체계인 리좀과 대비되는 사유방식이다.
들뢰즈/가타리는 통일성과 단일성을 버리거나 거기서 멀어지자고 말했다. 또 주체성도 털어내자고 했다. 그들은 기존의 나무 대신 리좀(rhizome, 뿌리줄기, 땅 밑 줄기, 헛뿌리)을 주장했는데 리좀은 내재적이고 유목적인 사유방식을 의미한다. 리좀은 어떤 것이 무엇과 관계하는가에 따라 본질이 달라지고 관계의 질이 달라진다. 그것은 어떤 중심뿌리 없이 접속되고 분기되는 줄기 식물처럼 특정한 사고의 기반 없이 다양한 것들의 차이와 복수성을 다원화하고 새롭게 번식한다. 하나의 중심(뿌리)에서 벗어날 수 없는 나무와 달리 뿌리도 없이 접속되고 분화되고 단절되고 연결되는 시작도 끝도 없는 가변적이고 역동적이며 유목적인 사유방식이다.
나무 중심의 사유 체계 혹은 지리서가 철저하게 이분법적 계통 혹은 분화를 따른다고 해서, 뿌리의 사고가 다만 이분법적으로만 존재했다는 것은 아니다. 수염뿌리 텍스트의 예로는 제임스 조이스와 프리드리히 니체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수염뿌리 체계 역시 주체와 객체의 상보성과 진정으로 결별하지 않는다.
들뢰즈/가타리는 통일성과 단일성을 버리거나 거기서 멀어지자고 말했다. 또 주체성도 털어내자고 했다. 그들은 기존의 나무 대신 리좀(rhizome, 뿌리줄기, 땅 밑 줄기, 헛뿌리)을 주장했는데 리좀은 내재적이고 유목적인 사유방식을 의미한다. 리좀은 어떤 것이 무엇과 관계하는가에 따라 본질이 달라지고 관계의 질이 달라진다. 그것은 어떤 중심뿌리 없이 접속되고 분기되는 줄기 식물처럼 특정한 사고의 기반 없이 다양한 것들의 차이와 복수성을 다원화하고 새롭게 번식한다. 하나의 중심(뿌리)에서 벗어날 수 없는 나무와 달리 뿌리도 없이 접속되고 분화되고 단절되고 연결되는 시작도 끝도 없는 가변적이고 역동적이며 유목적인 사유방식이다.
나무 중심의 사유 체계 혹은 지리서가 철저하게 이분법적 계통 혹은 분화를 따른다고 해서, 뿌리의 사고가 다만 이분법적으로만 존재했다는 것은 아니다. 수염뿌리 텍스트의 예로는 제임스 조이스와 프리드리히 니체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수염뿌리 체계 역시 주체와 객체의 상보성과 진정으로 결별하지 않는다.
3.5. 정치: 미시파시즘과 소수되기[편집]
좌파는 소수-되기에 관련시키는 과정을 배치하는 것이라네. 그러니까 아무도 다수가 아니며, 모든 사람이 소수라는 것. 바로 그게 좌파에 있다는 것이지. 모두가 소수라는 것을 아는 걸 말일세. 거기가 되기의 현상이 일어나는 곳이야. 때문에 모든 사상가들은 어쨌든간에 우리가 선거 등등으로 부르는 민주주의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것이라네. 모두가 그것을 알지.<들뢰즈의 A to Z>, "G"의 "Gauche"(좌파) 中 #
들뢰즈는 가타리와 만나면서 소수자에 대한 정치철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들뢰즈가 현실 정치에 비교적 관심을 적게 가졌기 때문에[12] 정치 철학은 흔히 주목되는 주제는 아니나 <카프카: 소수 문학을 위하여>와 <천 개의 고원>과 같이 가타리와 공저한 저서에서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다. 들뢰즈가 파악하는 자본주의의 핵심적인 문제점은 자본주의가 새로운 파시즘의 형태를 띄고 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 연작은 자본주의라는 탈을 쓴 미시 파시즘이 어떻게 68혁명을 좌절시켰는가를 규명하기 위해 쓰여진 저서였고, 이를 통해 들뢰즈는 자본주의를 포스트모더니즘의 측면에서 비판, 극복하려 했다.
들뢰즈에 의하면 자본주의는 전체주의와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다. 전체주의는 탈주하는 욕망을 억압하려는 코드화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면, 자본주의는 그런 욕망들을 오히려 자유롭게 풀어버리는 탈코드화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자본주의는 그러한 탈주된 욕망을 다시 상품성과 소비로 재코드화하며, 이 과정에서 모든 욕망은 스스로 탈주했다고 믿지만 소비 사회에서 자본이라는 하나의 가치로 다시 포섭됨으로써, 억압에 맞서 탈주를 하겠다는 목표 자체를 잃어버리게 된다. 이렇게 일원화된 욕망이 다른 형태로 코드화될 가능성을 잃은 체제가 파시즘이라는 것이다.
그것의 대안으로 들뢰즈는 끊임 없이 코드화에 저항하는 소수되기를 내세운다. 여기서 소수라는 것은 '표준이라는 권력에 반대한다'는 의미에서의 소수이다. 그래서 소수는 일순간 다수가 될 수 있다.[13] 즉, 표준이라는 일정한 코드를 만들어 내는 주체를, 소수-되기의 연대를 통하여 끊임 없이 재코드화하며 극복해 나가야 된다고 본 것이 들뢰즈의 정치철학이다.
들뢰즈에 의하면 자본주의는 전체주의와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다. 전체주의는 탈주하는 욕망을 억압하려는 코드화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면, 자본주의는 그런 욕망들을 오히려 자유롭게 풀어버리는 탈코드화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자본주의는 그러한 탈주된 욕망을 다시 상품성과 소비로 재코드화하며, 이 과정에서 모든 욕망은 스스로 탈주했다고 믿지만 소비 사회에서 자본이라는 하나의 가치로 다시 포섭됨으로써, 억압에 맞서 탈주를 하겠다는 목표 자체를 잃어버리게 된다. 이렇게 일원화된 욕망이 다른 형태로 코드화될 가능성을 잃은 체제가 파시즘이라는 것이다.
그것의 대안으로 들뢰즈는 끊임 없이 코드화에 저항하는 소수되기를 내세운다. 여기서 소수라는 것은 '표준이라는 권력에 반대한다'는 의미에서의 소수이다. 그래서 소수는 일순간 다수가 될 수 있다.[13] 즉, 표준이라는 일정한 코드를 만들어 내는 주체를, 소수-되기의 연대를 통하여 끊임 없이 재코드화하며 극복해 나가야 된다고 본 것이 들뢰즈의 정치철학이다.
3.6. 미학: 시네마 이론[편집]
4. 영향[편집]
들뢰즈는 정치철학, 미학, 순수 철학, 수리학, 심리학 등 인문학의 광범위한 범위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21세기 이후 그의 영향력은 더욱 커지고 있다.
특히 21세기 대륙철학에서 들뢰즈의 영향력이 두드러지는데, 신유물론이라 불리는 일련의 학파가 들뢰즈에게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마누엘 데란다, 브뤼노 라투르[14], 레비 브라이언트, 도나 해러웨이, 제인 베넷 등으로 대표되는 신유물론 학파는 들뢰즈의 일원론적 철학과 "생성의 철학" 그리고 리좀 등을 창조적으로 계승하여 발전시키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신유물론과 연관이 있는 캉탱 메이야수, 그레이엄 하먼 등의 사변적 유물론 학자들도 들뢰즈에게서 지대한 영향을 받았으며, 현대의 포스트 휴머니즘과 상호교차성 페미니즘 담론(특히 로지 브라이도티, 주디스 버틀러 등), 생태적 마르크스주의 등도 들뢰즈를 제외하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들뢰즈의 영향 아래에 놓여있다. 지리학자 나이절 스리프트[15], 과학자 존 프로테비 등이 들뢰즈의 연구를 계승한다. 보다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인물로는 클레어 콜브룩, 브라이언 마수미, 이안 뷰캐넌이 있다.
들뢰즈의 생전에 들뢰즈와 상호 교류하고 영향을 받은 철학자로는 안토니오 네그리가 있다. 네그리의 주요한 개념인 "다중"(multitude)은 들뢰즈의 개념인 "탈코드화의 욕망"에서 상당한 아이디어를 얻은 것으로 알려져있고, 그 외의 개념들도 창조적으로 변형되어 네그리의 철학에 계승되어있는데, 이런 점에서 착안해 들뢰즈와 마르크스를 통섭하려는 시도가 존재한다. 정치철학에 있어, 21세기 페미니즘과 아나키즘은 들뢰즈로부터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아나키즘 내부에서 거의 십자포화를 맞고 죽어있던 슈티르너식의 아나키즘이 들뢰즈의 영향을 받아 포스트-레프트 아나키즘이란 이름을 달고 부활한 건 덤이다. 슈티르너의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은 유아론이라는 특성상 관념론이라는 비판에 취약하기 마련인데, 들뢰즈의 이론이 일종의 대체제가 되어버렸기에...
반대로 슬라보예 지젝처럼 "신체 없는 기관 - 기관 없는 신체" 등의 개념을 통해 들뢰즈의 상대주의적 관점을 뒤집으려고 노력하는 철학자도 있는데, 바꿔 말하면 이는 들뢰즈가 여전히 철학에 있어 주요한 논의의 대상이 된다는 뜻이다. 알랭 바디우[16] 같이 모더니즘 성향이 강한 철학자들, 특히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서 들뢰즈에 대한 평가가 박하다. 그리고 분석철학 쪽에서 들뢰즈는 라캉, 데리다, 푸코와 마찬가지로 진지하게 받아들여질만한 사람은 아니라는 평가를 받는다. 대표적으로 존 설이 들뢰즈의 연구를 혹독하게 비판한 적이 있는데, 이러한 평가에는 들뢰즈의 연구 방식이 잘못되어서라기보다는 대륙철학과 분석철학의 성향 차이가 크게 작용한다. 애초에 들뢰즈도 생전에 분석철학에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한국에서는 1980년대가 마르크스의 시대, 1990년대가 푸코의 시대였다면 2000년대는 들뢰즈의 시대로 불릴만큼 들뢰즈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니체, 헤겔과 더불어 거의 모든 책이 완역된 몇 안되는 철학자이다. 일본에서도 들뢰즈는 상당한 히트를 쳤는데 이런 들뢰즈의 인기는 2008년 금융위기와 이로 인한 포스트모던의 쇠락과 모더니즘의 부활 시류로 인해 2010년대 이후로는 주춤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철학, 미학 등 여러 방면에 있어 들뢰즈는 여전히 끊임 없는 논쟁의 주제가 되고 있으며 2010년대와 2020년대에도 들뢰즈의 철학을 해설한 저서들은 많이 출간되고 있다.
특히 21세기 대륙철학에서 들뢰즈의 영향력이 두드러지는데, 신유물론이라 불리는 일련의 학파가 들뢰즈에게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마누엘 데란다, 브뤼노 라투르[14], 레비 브라이언트, 도나 해러웨이, 제인 베넷 등으로 대표되는 신유물론 학파는 들뢰즈의 일원론적 철학과 "생성의 철학" 그리고 리좀 등을 창조적으로 계승하여 발전시키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신유물론과 연관이 있는 캉탱 메이야수, 그레이엄 하먼 등의 사변적 유물론 학자들도 들뢰즈에게서 지대한 영향을 받았으며, 현대의 포스트 휴머니즘과 상호교차성 페미니즘 담론(특히 로지 브라이도티, 주디스 버틀러 등), 생태적 마르크스주의 등도 들뢰즈를 제외하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들뢰즈의 영향 아래에 놓여있다. 지리학자 나이절 스리프트[15], 과학자 존 프로테비 등이 들뢰즈의 연구를 계승한다. 보다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인물로는 클레어 콜브룩, 브라이언 마수미, 이안 뷰캐넌이 있다.
들뢰즈의 생전에 들뢰즈와 상호 교류하고 영향을 받은 철학자로는 안토니오 네그리가 있다. 네그리의 주요한 개념인 "다중"(multitude)은 들뢰즈의 개념인 "탈코드화의 욕망"에서 상당한 아이디어를 얻은 것으로 알려져있고, 그 외의 개념들도 창조적으로 변형되어 네그리의 철학에 계승되어있는데, 이런 점에서 착안해 들뢰즈와 마르크스를 통섭하려는 시도가 존재한다. 정치철학에 있어, 21세기 페미니즘과 아나키즘은 들뢰즈로부터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아나키즘 내부에서 거의 십자포화를 맞고 죽어있던 슈티르너식의 아나키즘이 들뢰즈의 영향을 받아 포스트-레프트 아나키즘이란 이름을 달고 부활한 건 덤이다. 슈티르너의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은 유아론이라는 특성상 관념론이라는 비판에 취약하기 마련인데, 들뢰즈의 이론이 일종의 대체제가 되어버렸기에...
반대로 슬라보예 지젝처럼 "신체 없는 기관 - 기관 없는 신체" 등의 개념을 통해 들뢰즈의 상대주의적 관점을 뒤집으려고 노력하는 철학자도 있는데, 바꿔 말하면 이는 들뢰즈가 여전히 철학에 있어 주요한 논의의 대상이 된다는 뜻이다. 알랭 바디우[16] 같이 모더니즘 성향이 강한 철학자들, 특히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서 들뢰즈에 대한 평가가 박하다. 그리고 분석철학 쪽에서 들뢰즈는 라캉, 데리다, 푸코와 마찬가지로 진지하게 받아들여질만한 사람은 아니라는 평가를 받는다. 대표적으로 존 설이 들뢰즈의 연구를 혹독하게 비판한 적이 있는데, 이러한 평가에는 들뢰즈의 연구 방식이 잘못되어서라기보다는 대륙철학과 분석철학의 성향 차이가 크게 작용한다. 애초에 들뢰즈도 생전에 분석철학에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한국에서는 1980년대가 마르크스의 시대, 1990년대가 푸코의 시대였다면 2000년대는 들뢰즈의 시대로 불릴만큼 들뢰즈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니체, 헤겔과 더불어 거의 모든 책이 완역된 몇 안되는 철학자이다. 일본에서도 들뢰즈는 상당한 히트를 쳤는데 이런 들뢰즈의 인기는 2008년 금융위기와 이로 인한 포스트모던의 쇠락과 모더니즘의 부활 시류로 인해 2010년대 이후로는 주춤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철학, 미학 등 여러 방면에 있어 들뢰즈는 여전히 끊임 없는 논쟁의 주제가 되고 있으며 2010년대와 2020년대에도 들뢰즈의 철학을 해설한 저서들은 많이 출간되고 있다.
5. 어록[편집]
철학이란 개념을 만들고, 개념을 사유하고, 개념을 해체하는 작업이다.『철학이란 무엇인가?』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우리의 게으른 삶이 바로 우리의 작품을 만들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내 전 생애가 하나의 천칙이다.프루스트와 기호들 中
어리석다는 것은 동물 같다는 뜻이 아니다. 동물성은 멍청함을 나타내지 않는다.차이와 반복 中
복수적인 것을 찬양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인쇄나 어휘, 혹은 통사적인 기교조차도 이를 이해시키는데 불충분할 것이다. 복수적인 것, 항상 하나의 우월한 차원을 덧붙임으로써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가장 간단하게 말해서, 절제에 의해, 우리가 자유롭게 다루는 차원들의 수준에서 언제나 감해짐으로써만 복수적인 것의 일부를 이루는 것으로써 만들어저야 한다. 구성되고 있는 다양성으로부터 유일자(l'unique)을 빼는 것, 이를 n-1로 이라고 쓰자. 이러한 체계를 리좀(rhizome)이라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뿌리나 곁뿌리를 갖는 식물은 이런 측면에서 땅밑의 줄기로서 리좀은 뿌리나 곁뿌리와 절대적으로 구별된다. 구근이나 덩이줄기는 리좀이다. 리좀적 형태(rhizomorphes)일 수 있다. 식물학이 그 특수성 속에서 전적으로 리좀형인가 아닌가를 아는 문제다. 동물들도 그들의 말없는 형태 속에서 보자면 그렇다. 쥐는 리좀이다. 테리어도 그들의 주거, 저장, 이동, 회피와 분열의 기능이란 점에서 본다면 마찬가지이다. 리좀 그 자체도 모든 의미로 가지쳐진 그 표면적인 확장으로부터 구근과 덩이줄기로 응고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리좀은 반계보학(antigénéologie)이다.천 개의 고원 中
나는 사람들이 마르크스가 틀렸다고 말하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마르크스가 죽었다고 주장하는 것에는 더더욱 이해하지 못하겠다. 오늘날 시급한 과제가 너무 많다. 우리는 세계 시장이 무엇인지, 어떻게 움직이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르크스에게 의지해야 한다.질 들뢰즈의 「나는 기억한다」 (생전 마지막 인터뷰[17])
6. 주요 저서[편집]
- 경험주의와 주체성 (Empirisme et subjectivité) (1953)
- 니체와 철학 (Nietzsche et la philosophie) (1962)
- 칸트의 비판철학 (La philosophie critique de Kant) (1963)
- 프루스트와 기호들 (Proust et les signes) (1964)
- 니체 (Nietzsche) (1965)
- 베르그송주의(Le Bergsonisme) (1966)
- 자허마조흐 소개 (Présentation de Sacher-Masoch) (1967)
- 차이와 반복 (Différence et répétition) (1968)
-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Spinoza et le problème de l'expression) (1968)
- 의미의 논리 (Logique du sens) (1969)
- 스피노자: 실천 철학 (Spinoza : Philosophie pratique) (1970)
- 안티-오이디푸스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1. L'Anti-Œdipe) (1972)[18]
- 카프카: 소수문학을 위하여 (Kafka: Pour une Littérature Mineure ) (1975)[19]
- 디알로그 (Dialogues) (1977)[20]
- 중첩 (Superpositions ) (1978)[21]
- 천개의 고원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2. Mille Plateaux) (1980)[22]
- 프란시스 베이컨: 감각의 논리 (Francis Bacon. Logique de la sensation) (1981)
- 시네마 이미지-운동 (Cinéma I : L'image-mouvement) (1983)
- 시네마 이미지-시간 (Cinéma II : L'image-temps) (1985)
- 푸코 (Foucault) (1986)
-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 (Le pli : Leibniz et le baroque) (1988)
- 페리클레스와 베르디: 프랑수아 샤틀레의 철학 (Périclès et Verdi: La philosophie de Francois Châtelet) (1988)
- 대담 (Pourparlers) (1990)
- 철학이란 무엇인가? (Qu'est-ce que la philosophie?) (1991)[23]
- 비평과 진단 (Critique et clinique) (1993)
7. 여담[편집]
- 글을 어렵게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수목" "뿌리" "영토화" "코드화" "기계" 등 일상 생활에서 쓰이는 단어가, 들뢰즈의 책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에 평범한 책을 읽는 방식으로 독해하면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장이 많다. 또 그 용어들의 의미를 이해하더라도, 그런 단어들이 왜 나왔는지에 대한 맥락, 즉 서양철학사에 대해 배경 지식이 없다면 문장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때문에 <안티 오이디푸스>와 <천개의 고원>은 그 명성에 비해 완독률이 정말 낮은 책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들뢰즈의 책들을 해설한 한국의 철학 책에서도 어려운 부분은 "들뢰즈가 이 책을 통해 무엇인가 명확한 결론을 내려고 한 것 같지 않다"라는 식으로 얼버무리는 경우가 많다.
들뢰즈의 이런 어려운 글쓰기 방식은 어느 정도 의도된 측면이 있는데, 들뢰즈는 언어라는 것이 가진 특성을 구조주의적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용어들을 계속 만들어내지 않는 이상은 근현대 철학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할 것이라고 보았다.[24] 따라서 자신의 생각과 철학적 사유를 온전히 담아내기 위해, 스스로만의 용어와 글쓰기 방식을 정해둔 것이라 할 수 있다. 의도는 좋았겠지만 읽는 사람 입장에서는 죽을 맛(...). 이는 프랑스 지식인들의 고질병이기도 한데[25], 그중에서도 들뢰즈는 자크 라캉, 루이 알튀세르, 자크 데리다 등과 더불어 독해가 난해한 철학자 끝판왕 급으로 불린다. 사실 이들 뿐만이 아니라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이 프랑스어의 미묘한 언어적인 특성과 맥락을 자신의 사유에 지속적으로 끌어들이기 때문에, 비 프랑스어 화자들이 이들의 사유를 온전하게 이해하는 것은 확실하게 어렵다.
- 1993년 들뢰즈는 마르크스주의자 안토니오 네그리와의 인터뷰에서 "가타리와 나는 두 가지 다른 방식으로 마르크스주의자로 남아있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우리가 자본주의와 그 발전에 대한 분석을 중심으로 하지 않는 정치철학은 믿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26] 즉, 정치철학은 자본주의를 분석해야 한다는 점에서 자신은 마르크스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를 분석한 정치철학을 했다고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불러야 되는가를 두고 많은 반박이 있었으며, 이 때문에 들뢰즈가 마르크스주의자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물론 들뢰즈는 죽기 전 다른 인터뷰에서 자신은 '완전한 마르크스주의자'이며[27] 앞으로 『마르크스의 위대함』이라는 책을 쓰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그 책이 마르크스를 따르는 것인지 아니면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분석을 이용해 자신의 '소수-되기' 프로젝트를 강화시킬 목적이었는지에 대해 의견이 갈리는 것이다. 네그리는 들뢰즈가 마르크스주의를 주장했다고 생각하고 이를 계승하고 발전시켜서, 자신의 자율주의를 "들뢰즈-마르크스주의"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알랭 바디우를 위시로 하는 대부분의 현대 마르크스주의 철학자들은 들뢰즈를 마르크스주의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 생전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을 싫어했다. 그는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언급 자체를 꺼리려고 하였으며 생전의 거의 유일한 인터뷰였던 "질 들뢰즈의 A to Z"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의 퇴행이자 철학의 암살자"이고 "그는 모든 것을 파괴해버리는 '테러의 시스템'을 세웠다"고 비난했다.[28]
[1] 신유물론 학파의 성립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2] 이중에서 가장 포스트모더니즘에 가까운 인물은 들뢰즈이다. 푸코는 구조주의자로도 분류되고, 데리다는 포스트모더니스트라기보다는 해체주의자였기 때문이다.[3] 푸코는 반마르크스주의의 입장에서 신철학파를 지지했는데, 들뢰즈는 마르크스주의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이들을 비난했다.[4] 1995년 1월 19일 미셸 세르는 그의 저서 『천사들의 전설 (La Légende des anges)』의 출간을 계기로 Wired 잡지의 Hari Kunzru와의 인터뷰에 응했다. 그는 이 인터뷰 말미에서 들뢰즈의 죽음을 언급한다.#[5] 그 외에도 들뢰즈는 화이트헤드, 가브리엘 타르드 등을 중요한 철학자로 보고 적극적으로 재조명했다.[6] 들뢰즈는 이를 '주름작용'이라고 표현할 때도 있다.[7] 흔히 보이는 "반복이 차이를 만든다"라는 표현은 이와 같은 들뢰즈의 사유를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 사용된다. 너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말자.[8] 들뢰즈는 욕망-기계라고 말하기도 한다[9] 욕망의 이러한 특성을 들뢰즈는 '분자적'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10] 들뢰즈는 플라톤주의나 마르크스주의 등 고전적인 서양 철학 뿐 아니라, 현대 철학인 실존주의,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촘스키의 언어 철학(분석 철학)도 모두 똑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진단했다.[11] 많은 인터넷 게시글에서 '근거지움'이라고 잘못 쓰고 있다. 하지만 '지우다'의 활용인 '지움'은 물론이고 ‘(책임 등을) 지다’의 사동사인 '지움'을 사용했다고 설명하기엔 'grunden'은 '~의 기초를 세우다'라는 의미의 독일어이다. 그러므로 '짓다'에서 온 '지음'이 옳다.[12] 동료 펠릭스 가타리가 말년까지 녹색당, 공산당, 사회당 등 좌파 진영에서 왕성한 활동을 한 것과는 반대로, 들뢰즈는 자신의 친구들 대부분이 프랑스 공산당에서 활동하고 있었음에도 본인 스스로는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하지 않았다. 다만 들뢰즈가 스스로를 좌파로 여겼음은 여러 인터뷰나 자료를 통해 확인된다.[13] 물론 영원히 다수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14] 라투르, 칼롱, 로에 의해 정립된 ANT 이론은 신유물론과 별개로 취급될 때도 있지만 대체로 신유물론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15] 데이비드 하비와 들뢰즈의 관점을 엮은 도시 지리학으로 유명하다.[16] 같은 8대학교 교수 출신인데, 생전에는 사적으로도 사이가 안좋았다.[17] I don't understand it when people try to say that Marx was wrong. And even less when they claim that Marx is dead. There are so many urgent tasks today: we need to try to understand the global market, what it is and how it moves. To do that, one must turn to Marx. ("Le ‘Je me souviens’ de Gilles Deleuze," Le Nouvel Observateur (Nov 16–22, 1995), 50-51.) #[18] 펠릭스 가타리와 공저[19] 펠릭스 가타리와 공저[20] 클레르 파르네와 공저[21] 카르멜로 베네와 공저[22] 펠릭스 가타리와 공저[23] 펠릭스 가타리와 공저[24] 현대로 갈 수록 언어가 오염되어 철학이 제한된다고 생각한 철학자들이 많다. 이를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파리잡는 꿀 유리병에 비유하며 언어를 규명하려 노력했고, 마르틴 하이데거는 그냥 손-안에-있음,현존재 같은 자기만의 단어를 적극적으로 만들어 버렸다...[25] 들뢰즈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26] "Je crois que Félix Guattari et moi, nous somme restés marxistes, de deux manières différentes peut-être, mais tous les deux. C’est que nous ne croyons pas à une philosophie politique qui ne serait pas centrée sur l’analyse du capitalisme et de ses développements." 인터뷰 전문, 인터뷰 영역본[27] 이렇게 말하면서 들뢰즈는 "니체와 마르크스를 동시에 읽는 것이 마르크스를 읽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나는 여전히 많은 개념에서 타당성을 찾았다" 등을 말했다. # 그런데 많은 개념에서 타당성을 찾았다는 것은, 마르크스의 모든 것에 동의한다는 말이 아니며, 니체와 마르크스를 동시에 읽었다는 것은 마르크스를 니체식으로 독해하겠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과연 '완전한 마르크스주의'라고 할 수 있냐는 또다른 문제가 된다.[28] 이는 비트겐슈타인이 속한 분석철학과 들뢰즈가 속한 대륙철학이 서로 사이가 안좋아서 그런 점도 있었다. 또한 비트겐슈타인이 유사점을 토대로 한 철학(가족 유사성)을 주장했다면 들뢰즈는 차이점을 토대로 한 철학(차이와 반복)을 전개하는 등 둘 사이에 매워질 수 없는 간격도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