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식
제1·3·7·8대 경희대학교 총장 조영식 趙永植 | Dr. Young-Seek Choue | |
호 | 미원(美源) |
출생 | |
사망 | |
국적 | |
종교 | |
학력 | 도쿄체육대학 (중퇴[2])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 / 학사) |
가족 | |
경력 |
1. 소개[편집]
2. 생애[편집]
1943년 10월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잠시 귀국해 오정명과 결혼하는데, 신혼 3개월 만에 평양에 주둔한 일본군 48공병부대에 학병으로 강제 징집되고 만다. 훈련소로 끌려간 그는 일제의 총알받이가 될 수 없다는 생각에 학도병들을 규합하여 탈출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거사 직전 정보가 유출되는 바람에 일본 제국 육군 헌병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였는데 이것이 '평양 학도병 의거 모의사건'으로 1945년 1월의 일이었다.
1946년 월남하여 서울고에서 체육교사로 일하다가, 안정된 교사 생활을 내려놓고 '민주주의는 법치주의에 기초한다'는 생각에 법학을 공부하기로 마음먹고 1947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편입하였다. 재학 시절 '1만 시간 독서 계획'을 세우고 하루 평균 10시간 이상 독서에 몰두하였고, 1948년 27세 나이로 <민주주의 자유론>을 펴냈다.
1950년 서울법대를 졸업하고 6.25 전쟁 발발 당시 그는 정계에 입문하여 국회 원내교섭단체 중 하나인 '공화민정회'에서 조사국장 겸 법제사법 전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이시영으로부터 신흥초급대학을 인수해 달라는 제안을 받게 된다. 당시 신흥초급대학은 가인가로 설립된 2년제 대학으로 영어과, 중국어과, 체육과 3개 학과에 모집정원 각 50명씩 총 150명에 불과한데다 재정이 매우 어려워 건물도 대지도 없는 천막에서 졸업생조차 배출하지 못하던 상황이었다. 해운대 모래사장에서 학생모집을 진행하였고 그때 모은 등록금으로 학교를 운영했었다. (다만 그 당시 대학생은 징병 대상에서 제외되었기에 입학 경쟁률은 셌다고 한다.)
전쟁 중에 부실한 학교를 인수해 교육사업을 한다는 것은 큰 모험이었으나 학교를 인수하고 사재를 털어 부산역 맞은 편에 부지를 마련하고 교사 건물을 신축하였다.[3] 학교가 안정되면서 1952년 문교부로부터 초급대학 정식 인가를 받았고 그해 말에는 4년제 대학 설립 인가를 획득하였다.
재정을 확충하고 외부인사를 영입하는 등 종합대학 승격을 준비하던 중 화재가 발생하여 교사가 잿더미로 변하면서 4년제 종합대학의 꿈이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한다. 하지만 부산 동대신동에서 새 교사를 건립하고 재건에 나서 1953년에는 45명의 첫 졸업생(1회)을 배출하게 된다.
1953년 휴전이 이루어지고 정부가 서울로 환도하자 서울에서 학교 부지를 물색하던 중, 청량리역 인근에 위치해 있던 서울대 법대에서 편입시험을 볼 적에 홍릉 건너편 나지막한 산에 올라 산책하던 풍경을 떠올리고는 그 장소인 휘경동 천장산(고황산) 기슭으로 결정하고 은행에서 1,500만원을 대출 받아 30만평의 부지를 불하받는다.[4] 서울캠퍼스 조성에는 당시 국내 최대의 석조 건축물인 본관 석조전, 동양 최대 규모의 도서관이 포함되었다.
1955년 종합대학교 설립 인가를 받아 4개 단과대학과 대학원을 갖춘 종합대학교로 승격됨과 동시에 초대 총장으로 취임하였다.
1960년 학교의 이름을 경희대학교로 변경하였다. 영, 정조 때의 정궁인 경희궁에서 따온 것으로 경희궁터에 있던 서울고에 재직했던 것이 인연이 되었다고 한다.[5] 유치원부터 대학원까지 아우르는 종합학원을 목표로 하여 1960년 경희중/고등학교 설립이 시작되었고 이듬해 경희학원이 설립되면서 경희유치원, 경희초등학교, 경희초급대학이 문을 열었다.
5.16 이후 군사정부 실력자들이 찾아와 오월동지회 회장직을 맡아주길 요청하였으나 이에 협조하지 않자 문교부는 '교육에 관한 임시특례법'에 따라 총장 승인을 취소하였고, 2년 후에야 3대 총장으로 복귀하였다.
2012년 2월 18일, 경희의료원에서 향년 90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3. 사건[편집]
레닌은 카우츠키의 민주주의관을 비판하는 가운데에서 '민주주의는 변증법적 발전과정에 의하여 이렇게 발전한다. 즉 전제정치로부터 부르죠아 민주주의에로, 부르죠아 민주주의에서부터 푸로레타리아트의 민주주의에로, 푸로레타리아트의 민주주의에서 아무것도 없는 민주주의에'라고 말하였는데 현재 푸로레타리아트의 민주주의까지는 도달하였다고 볼 것이라면 '아무것도 없는 민주주의'라고 한 그 미도(未到)의 민주주의사회는 과연 어떠한 것을 의미한 것일까.
즉 그 민주주의사회라는 것은 민주주의의 완성된 형식의 사회를 의미한 것으로 추정되며 그야말로 진정한 민주주의요...(중략)...우리의 맞이할 다음의 세계라는 것은 레닌의 말과 같이 아무것도 없는 민주주의사회 즉 완성된 고도문화국가사회라는 것이 자명해지게 되는 것이다.
4. 평가[편집]
5. 경력[편집]
6. 주요저서[편집]
- 《민주주의 자유론》(1948년)
- 《문화세계의 창조》(1951년)
- 《인간과 창조》(1960년)
- 《우리도 잘 살 수 있다》(1963년)
- 《교육을 통한 세계평화의 구현》(1971년)
- 《새 한국 국민상의 모색》(1972년)
- 《인류사회의 재건》(1975년)
- 《창조의 의지》(1976년)
- 《오토피아》(1979년)
- 《하늘의 명상》(1981년)
- 《21세기 인류사회의 과제와 선택》(1991년)
-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 땅을 보라》(1991년)
- 《인류사회는 왜, 어떻게 재건되어야 하는가》(1993년)
- 《조국이여, 겨레여, 인류여》(1994년)
조영식
조영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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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21년 11월 22일 일제 강점기 평안북도 운산군 |
사망 | 2012년 2월 18일(90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성별 | 남성 |
국적 | 대한민국 |
본관 | 배천 |
자녀 | 조정원, 조인원, 조여원, 조미연 |
정당 | 무소속 |
조영식(趙永植, 1921년 11월 22일 ~ 2012년 2월 18일)은 대한민국의 교육인, 전 대학총장, 전 학교법인인이다. 본관은 배천. 호는 미원(美源)이다.
1951년에 신흥초급대학을 인수해 종합대학 경희대학교로 성장시키고, 학교법인 경희학원을 창립하여 교육활동을 펼쳤으며, ‘잘살기운동’과 ‘밝은사회운동’, ‘인류평화운동’, ‘네오르네상스운동’을 제창하여 세계평화를 중심으로 한 사회활동으로도 유명하다.
약력[편집]
1921년 평안북도 운산군에서 태어났다. 운산은 금 산지로 유명하며 그의 부친 조만덕(趙萬德)은 광산을 경영하였다. 해방 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체육대학에 입학하였으나, 결혼을 위해 잠시 귀국하였다가 1944년 1월 평양에 주둔한 일본군에 학도병으로 강제 징집되었다. 1945년 1월 조선인 학도병을 규합하여 탈출을 모의하다 발각되어 고초를 겪었다. 해방직후 김일성종합대학 교수 재임.[1] 1946년 월남하여 서울고등학교[2]에서 체육교사로 교편을 잡다가 1947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편입하였다.[3] 1950년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1951년에 신흥초급대학을 인수해 교육인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학교법인 경희학원을 중심으로 경희대학교와 경희고등학교, 경희중학교, 경희초등학교, 경희유치원 등 전일적 교육체제를 갖춘 교육기관을 구성하였다. 1950년대에 ‘잘살기운동’을 시작하면서 사회운동으로 나아갔다. 1955년에는 저작 "문화세계의 창조"의 국가보안법 위반혐위로 구속되었으나 1956년 6월 15일 불기소로 무혐의 처리되었다.[4]
세계대학총장회의의 창설을 주도하고, 1975년에 미국 보스턴에서 열린 제4차 세계대학총장회의 총회에서 인류사회의 올바른 방향 설정을 위한 보스턴 선언문을 채택하고 ‘밝은사회운동’(GCS운동)을 제창하였다. 이와 함께 1979년에는 밝은사회국제클럽을 조직하였다.
‘지구가 한덩어리인 것처럼 인류세계도 하나’[5]라는 대전제에서 1980년대부터 세계평화운동을 시작했다. 1981년의 제6차 세계대학총장회의 총회에서 평화의 날 제정을 제창하고, 코스타리카 정부의 협력을 얻어 안건을 유엔에 제출해 11월 30일 제36차 유엔 총회에서 9월 셋째 주 화요일을 ‘국제 평화의 날’로 제정·공표하게 되었다.
1990년대 이후에는 ‘제2의 르네상스’를 제창하고, ‘네오르네상스운동’을 전개하였다. 네오르네상스운동은 “정신적으로 아름답고, 물질적으로 풍요하며, 인간적으로 보람 있는 지구협력사회”를 이루자는 것으로, 이른바 ‘오토피아’(Oughtopia)의 구현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1943년에 오정명과 결혼하였으며, 자녀로는 조정원·조인원·조여원·조미연의 2남 2녀가 있다.
2012년 2월 18일, 경희의료원에서 향년 92세의 일기로 사망했다.[6]
조영식의 세계평화론[편집]
그는 인류역사의 발전과정에서 제4혁명의 시대에 해당하는 정보과학혁명시대[7]에는 세계화로 인해 민족국가가 유지되기 어렵다고 본다. 또한 이는 인간 자신이 유발한 것으로, 인류사회의 모든 제도와 관습 또한 인간이 구축한 것이기에 다른 체제로 전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어 전쟁의 원인은 인간의 마음, 즉 소수 지배층의 탐욕이며 이때문에 전쟁을 막기 위해서는 진정한 민주주의가 필요하며, 프랑스 혁명(제1 시민혁명)과 러시아 혁명(제2 시민혁명)에 이은 제3의 시민혁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유엔과 같은 기구를 중심으로 하는 지구협동사회와 유럽 연합과 같은 기구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협동사회를 거쳐 지역협동사회는 지구협동사회에 흡수되며, 이후에는 시민사회를 대표하는 NGO와 같은 비정부기구가 참여하는 국민주권하의 참여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한 범세계적인 지구시민사회가 등장한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보편적 민주주의에 바탕을 둔 국가연합인 지구공동사회로 발전하며, 보편적 민주주의는 만민에게 자유와 평등·공영을 보장하는 체제를 말한다.[8]
이러한 지구공동사회는 이른바 ‘오토피아’(Oughtopia)를 말한다. 오토피아는 유토피아와는 달리 추구하여 실현할 수 있는 사회로, ‘ought to be(do)’와 ‘topia’의 합성어이다. 오토피아는 각 민족간의 공존공영을 추구하는 새로운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경제적 평등과 호혜주의, 인권주의, 문화주의, 반전평화주의, 과학주의, 국제민주주의의 8개 원칙을 기반으로 한다. 조영식은 이 8개 원칙을 ‘문화적 복리주의’라고 지칭했다.[9]
주요 저서[편집]
- 《민주주의 자유론》(1948년)
- 《문화세계의 창조》(1951년)
- 《인간과 창조》(1960년)
- 《우리도 잘 살 수 있다》(1963년)
- 《교육을 통한 세계평화의 구현》(1971년)
- 《새 한국 국민상의 모색》(1972년)
- 《인류사회의 재건》(1975년)
- 《창조의 의지》(1976년)
- 《오토피아》(1979년)
- 《하늘의 명상》(1981년)
- 《21세기 인류사회의 과제와 선택》(1991년)
-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 땅을 보라》(1991년)
- 《인류사회는 왜, 어떻게 재건되어야 하는가》(1993년)
- 《조국이여, 겨레여, 인류여》(1994년)
각주[편집]
- ↑ “보안법에 걸린 대학교재”. 경향신문. 1955년 8월 5일.
- ↑ 일부 기사에 서울고 출신으로 나온 것은 서울고에서 교사를 했던 것이 와전된 것이다.
- ↑ “피난지 부산에서 경희의 초석을 다지다” (PDF). 1~2쪽. 2016년 3월 4일에 원본 문서 (PDF)에서 보존된 문서. 2015년 8월 16일에 확인함.
- ↑ “보안법에 걸린 대학교재”. 경향신문. 1955년 8월 5일.
- ↑ 조영식, 《문화세계의 창조》, 1951년, 268쪽.
- ↑ “경희학원 설립자 조영식 박사 별세, 향년 91세”. 아시아경제. 2012년 2월 19일.
- ↑ 조영식, 《인류사회의 재건》, 1975년, 106쪽~122쪽.
- ↑ 조영식, 《민주주의 자유론》, 1948년, 152쪽~158쪽.
- ↑ 조영식, 《문화세계의 창조》, 1951년, 169쪽~339쪽.
참고 자료[편집]
- 박상식, 〈문화체계와 세계평화〉, 《밝은사회연구》, 22/1, 2001년, 81쪽 ~ 9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