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계서 논란 있는 영화‘아바타’… 종교 담당 기자가 봤더니
중앙일보
입력 2010.01.28
업데이트 2010.01.28
제임스 캐머런 감독의 영화 ‘아바타’가 25일 ‘타이타닉’을 제치고 전 세계 역대 흥행 1위에 올라섰다. 교황청 기관지인 ‘로세르바토레 로마노’는 ‘아바타’에 대해 “시각적 효과는 매력적이다. 그러나 자연숭배와 연결된 정령주의에 빠져있다”고 평했다. 바티칸 라디오방송도 “생태학을 종교로 삼고, 자연을 신성화하는 ‘엉터리 교설’을 반영하는 것 같다”며 “‘아바타’는 해롭지 않지만 대중성에 있어서 새롭지도 않다”고 지적했다. 블록버스터 영화 ‘아바타’에 로마 교황청이 ‘딴죽’을 건 이유는 뭘까. 3D영화 ‘아바타’를 다시 들여다봤다. 종교를 렌즈로 ‘아바타’의 세상을 재해석했다.
영화‘아바타’에는 종교적 코드가 강하게 녹아 있다. 나비족은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모든 에너지는 잠시 빌린 것이며, 언젠가는 돌려줘야 한다”는 영적인 대사를 던지기도 한다. [20세기폭스 제공]
◆정말 기독교와 불편한 영화?=‘아바타’를 볼 때는 까만 안경을 쓴다.
그래야 영상이 입체가 된다. 영상뿐만 아니다. 종교도 그렇다. 어떤 종교의 안경을 쓰고 ‘아바타’를 보느냐에 따라 공간감이 달라진다.
먼저 가톨릭과 개신교의 안경이다. 도식적인 종교적 잣대를 들이댄다면 ‘아바타’는 거부감의 덩어리다. 나비족이 나무의 신, 자연의 영혼에 기도하는 장면이 영화의 절반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많은 기독교인이 영화에서 ‘우상숭배’ ‘물신숭배’ ‘정령주의’를 떠올리며 심기가 불편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아바타’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답하기 위해서는 기독교 역사를 관통하는 오랜 물음과 직면해야 한다. ‘신이 창조한 모든 창조물에도 신의 숨결이 흐르는가’라는 근원적 물음과 직결된다. 나무에, 들에, 강물에, 지구에, 이 우주에 과연 신의 숨결이 흐르는가의 문제다. 넘어야 할 물음은 또 있다. “신은 아니 계신 곳 없이 계시다. 세상의 모든 창조물이 신의 현존이자, 신의 표출이다”는 영성가의 메아리에도 답을 해야 한다.
같은 기독교인이라도 ‘아바타’를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할 수 있다.
먼저 가톨릭과 개신교의 안경이다. 도식적인 종교적 잣대를 들이댄다면 ‘아바타’는 거부감의 덩어리다. 나비족이 나무의 신, 자연의 영혼에 기도하는 장면이 영화의 절반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많은 기독교인이 영화에서 ‘우상숭배’ ‘물신숭배’ ‘정령주의’를 떠올리며 심기가 불편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아바타’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답하기 위해서는 기독교 역사를 관통하는 오랜 물음과 직면해야 한다. ‘신이 창조한 모든 창조물에도 신의 숨결이 흐르는가’라는 근원적 물음과 직결된다. 나무에, 들에, 강물에, 지구에, 이 우주에 과연 신의 숨결이 흐르는가의 문제다. 넘어야 할 물음은 또 있다. “신은 아니 계신 곳 없이 계시다. 세상의 모든 창조물이 신의 현존이자, 신의 표출이다”는 영성가의 메아리에도 답을 해야 한다.
같은 기독교인이라도 ‘아바타’를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할 수 있다.
남자 주인공 제이크 설리가 “지구인의 침략을 막을 수 있게 도와 달라”고 나무의 신에게 기도할 때 여 주인공 네이티리가 다가서며 말한다.
“대지의 어머니께선 편들지 않아. 오로지 세상의 균형을 지킬 뿐이야.” 기존의 상식을 깨는 대목이다.
이 장면은 오히려 창세기 ‘에덴 동산’의 의미를 묵상케 한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 선과 악은 둘로 쪼개졌다. 그로 인해 인간은 선악을 나누기 시작했다.
이 장면은 오히려 창세기 ‘에덴 동산’의 의미를 묵상케 한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 선과 악은 둘로 쪼개졌다. 그로 인해 인간은 선악을 나누기 시작했다.
그럼 따먹기 전에는 어땠을까. 선과 악은 ‘선악과(善惡果)’란 과일 안에서 하나로 존재했다.
그래서 에덴 동산이 온전했던 거다. 그런 ‘온전함’의 시선을 영화 속 나비족은 가지고 있다.
영화에는 기독교적 세계관을 통해서도 접속할 수 있는 코드가 곳곳에 있다.
결국 ‘아바타’에서 그런 온전함의 메시지를 읽을 건가, 아니면 위험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뉴에이지를 읽을 건가,
결국 ‘아바타’에서 그런 온전함의 메시지를 읽을 건가, 아니면 위험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뉴에이지를 읽을 건가,
그도 아니면 문명의 ‘문’자도 모르는 원주민의 미개한 신앙을 읽을 건가는 전적으로 관객의 몫이다.
똑같이 기독교의 창을 통해 영화를 본다 해도 말이다.
◆불교와 묘한 궁합?=불교의 안경을 쓰고 보면 어떨까.
◆불교와 묘한 궁합?=불교의 안경을 쓰고 보면 어떨까.
묘하게 ‘궁합’이 맞아떨어진다.
‘아바타(Avatar)’란 용어는 힌두교에서 나왔다.
신의 분신(分身), 화신(化神)이란 뜻이다.
힌두교를 딛고 성장한 불교에선 ‘천백억 화신불’을 말한다.
우리 안에 있는 하나의 본질이 천백억 개의 화신으로 세상에 드러난다는 뜻이다.
결국 눈에 보이는 현상(色)과 보이지 않는 본질(空)이 둘이 아니란 얘기다.
불교에선 이를 두고 ‘불이(不二)’라고 표현한다.
영화에서 나비족은 상대와 마음이 통할 때 이렇게 말한다.
영화에서 나비족은 상대와 마음이 통할 때 이렇게 말한다.
“나는 당신을 봅니다(I see you).” 무슨 뜻일까.
“나는 당신의 껍데기(현상)가 아니라 당신의 본질을 봅니다”란 의미다.
그 본질을 통해 나와 상대가 하나로 연결돼 있는 생명임을 깨닫는다는 말이다.
영화에는 이런 연결고리가 곳곳에 깔려있다.
사실 ‘아바타’는 짜임새가 ‘착, 착’ 들어맞는 영화는 아니다.
영화에는 이런 연결고리가 곳곳에 깔려있다.
땅 속의 모든 나무 뿌리는 신경망으로 연결돼 정보를 주고 받고,
나비족이 뛰는 말과 나는 새를 길들일 때도 ‘교감’을 통해서 하나가 된다.
또 나비족끼리는 멀리서도 말 없이 생각을 주고 받는다.
그렇게 하나로 연결된 세계, 하나의 생명으로 숨 쉬는 세계, 그게 바로 불교의 ‘화엄세계’다. 그걸 두고 만공 선사는 “세계는 한 송이 꽃(世界一花)”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불교에선 그 화엄세계가 따로 있지 않다고 말한다. 우리가 발을 딛고 선 ‘지금, 여기’가 화엄세계라는 거다.
불교에선 그 화엄세계가 따로 있지 않다고 말한다. 우리가 발을 딛고 선 ‘지금, 여기’가 화엄세계라는 거다.
‘나비족이 사는 행성’이 다름 아닌 ‘2010년의 지구’라는 거다. 불교는 물음을 던진다.
- “당신은 세상을 둘로 나누는 지구인(sky people)으로 살 건가,
- 아니면 우주의 생명과 하나로 흐르는 나비족으로 살 건가.”
사실 ‘아바타’는 짜임새가 ‘착, 착’ 들어맞는 영화는 아니다.
종교적 측면에서도 여러모로 삐걱거린다.
- 절반의 땅에선 영성을 말하지만,
- 나머지 절반의 땅에선 이분법적 통속성과 노골적인 상업성이 넘실댄다.
어쩌면 그게 우리가 사는 세상의 자화상일지도 모르겠다.
백성호 기자
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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