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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섭, '동학 접포에서 새로운 문명전환 배운다"
21세기민족주의포럼 강연, 동학사상으로 풀어본 동학혁명 2주갑
기자명 이승현 기자
입력 2014.12.07
▲ 주요섭 한살림 모심과살림연구소 소장이 4일 오후 7시 서울 정동 민주노총 교육원에서 열린 21세기민족주의포럼(대표 정해랑) 강연에서 올해 2주갑(120년)을 맞는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동학사상을 중심으로 풀이하고 생명운동의 관점에서 현재적 의미에 대해 설명했다.[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1894년 동학혁명은 교조인 수운 최제우의 목이 잘린 1864년부터 2대 교조 해월 최시형이 최보따리라는 별명으로 불릴만큼 열성적으로 전국을 돌며 '접(接)'이라는 지하 공동체를 만들었던 것이 30년만에 폭발한 것이다. 이 공동체는 굶주림과 역병에 시달리던 당시 우리 민족이 중화질서의 붕괴라는 공황상태까지 더해진 가운데 찾았던 탈출구였다.'
주요섭 한살림 모심과살림연구소 소장은 4일 오후 7시 서울 정동 민주노총 교육원에서 열린 21세기민족주의포럼(대표 정해랑) 강연에서 올해 2주갑(120년)을 맞는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동학사상을 중심으로 풀이하고 생명운동의 관점에서 현재적 의미에 대해 설명했다.
주요섭 소장은 우리 사회에 통용되는 '동학농민혁명' 대신 '동학혁명'이라는 표현을 쓰겠다며, 동학농민혁명을 다루는 기존 사회경제사적, 계급적 입장과 동학의 사상을 중심으로 이 '사회개벽'을 해석하는 자신의 관점에 차이가 있다는 점을 전제로 했다.
주 소장에 따르면, 당시 조선은 양반·중인·평민·천민 할 것 없이 대부분의 백성들이 배고픔과 전염병에서 벗어나 십승지(十勝地, 전란이나 환란을 피해 숨어들어가 자급자족하며 살 수 있었던 곳)와 궁궁촌(弓弓村)을 찾아나서는 상황이었으며, 여기에 1840년 아편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하면서 발생한 중화질서의 붕괴로 인해 공황상태에 빠진 상태였다.
교조 수운 역시 경북 경주의 세도양반가 출신이었지만 재가녀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문과 과거를 볼 수 없는 신분적 제약속에 장사도 하고 도참서도 읽으면서 온갖 살길을 찾아 탈출구를 찾던 중 1859년 폐허가 된 경주 용담으로 돌아와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인내천(人乃天'의 깨달음을 바탕으로 동학을 창시하게 된다.
주 소장은 수운이 찾은 이 깨달음은 "굶주리는 백성과 차별받는 여종의 눈물이 자신의 아픔과 같으며, 온 백성이 찾아다니던 십승지와 궁궁촌은 현실에는 없고 죽어서야 도달할 수 있는 소설속 홍길동의 율도국이나 기독교의 천국같은 곳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또 깊은 산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마음인 자기 자신에게, 즉 저자거리에 있다는 것이었다고 해석했다.
수운에서 시작되고 해월이 발전시킨 '접(接)'공동체는 이같은 깨달음을 나누기 위해 생활과 수행을 함께 하던 곳이었다. 양반 상놈, 적서와 남녀의 차별없이 서로 존대하고 배고픈 자들과 밥을 나누어 먹으며 아픈 자를 고쳐주는 유무상자(有無相資, 가진 자와 없는 자가 서로 돕는다)의 생활속에서 이들은 단숨에 신분의 벽을 넘어서게 됐다.
"백정과 양반이 겸상을 하는 이 생활과 수행의 공동체는 30년의 세월을 지나면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신분 해방과 각성을 이뤄냈으며, 마침내 1894년 궁궁을을(弓弓乙乙)이라는 부적을 붙이고 봉건왕조와 일본에 맞서는 전쟁에 참가하는 정치공동체로 전변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주 소장은 말했다.
▲ 주요섭 한살림 모심과살림 연구소 소장. [사진-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주 소장은 19세기 조선이 처한 현실에서 성리학적 질서를 고쳐쓰려는 위정척사(衛正斥邪)의 길과 서구 열강의 문물을 받아들여 자강을 도모하려는 개화(開化)의 길을 압도하면서 안민(安民)을 목표로 한 보국(輔國, 그릇된 나라를 바르게 한다)의 수단을 내세워 제3의 길이라고 할 수 있는 후천개벽(後天開闢)이 강력히 진행됐던 것에 주목했다.
또한 120년전 동학혁명의 중심에 있던 '접'공동체가 '접'과 '접' 각각의 자율성을 인정하고 수평적으로 확대하는 방식의 '포(包)'로 연결되었으며, 결코 행정구역을 중심으로 하지 않고 철저히 사람을 위주로 조직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주 소장은 지금 "시스템으로서의 자본주의는 동력을 상실했"으며, "자본주의 이후의 삶의 양태를 고민해야 한다"며, 120년전 동학사상과 '접'공동체를 재현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지만 많은 시사점을 얻을 수는 있다고 주장했다.
먼저 주 소장은 오늘날 십승지, 궁궁촌을 찾는 제3의 모색은 왕조를 바꾸는 역성혁명도 아니고 정치구조를 혁신하는 정치개혁에도 머물지 않는 의식과 생활, 정치·경제 시스템, 기술의 전환을 모두 포괄하는 큰 틀의 문명전환운동이라고 설명했다.
그것은 120년 전 무장포고문과 같은 것이고 동학의 각지불이(各知不移, 세상 사람들 모두가 자기 내면에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여 그에 합당한 참된 경천의 실천을 해야 함)와 같은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 권력의 향배가 중심이 되는 '양의 정치'에서 민생이 중심이 되는 '음의 정치'로, 돈벌이와 성장이 중심이 되는 '양의 경제'에서 살림살이와 행복이 더 중요한 '음의 경제'로, 1인 1표의 기계적 민주주의에서 '깊은 민주주의(deep democracy)'로 중심을 이동해 균형을 되찾는 전환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무엇보다 새로운 모색으로서의 생명운동은 120년 전 혁명적 거사를 앞두고 동학이 그랬던 것처럼 공동체 중심의 '접'운동에서 공동체와 공동체를 연결하고 나아가 생명을 중심가치로 활동하는 다양한 그룹이 함께하는 '포'운동 전략, 즉 큰 연대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여기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역시 동학의 접포에서와 같이 사람에 대해 온전하고 입체적으로 이해하고 존중하면서 자신의 가치와 생활을 바꾸는 삶이 병행되는 일이라고 주 소장은 말했다.
요약하면, 동학혁명 2주갑을 맞아 우리는 120년 전 무장포고문처럼 큰 틀의 문명전환운동을 세상에 알리고 새로운 패러다임과 사회적 비전을 제시하며, 깊은 넓은 연대와 새로운 전략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정해랑 대표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포럼에는 장은기 우사김규식기념사업회 전 사무국장, 이계환 통일뉴스 대표를 비롯해 15명이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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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현 기자 shlee@tongil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