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06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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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빈드라나트 타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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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빈드라나트 타고르
রবীন্দ্রনাথ ঠাকুর[1] | Rabindranath Tagore
Rabindranath Tag...
출생
사망
1941년 8월 7일 (향년 80세)
국적
신장
학력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법학 / 명예 학사)
캘커타대학교 (벵골 문학 / 명예 학사)
캘커타대학교 (철학 / 명예 박사)
직업
종교
서명
Rabindranath Tag...

1. 개요2. 생애3. 한국과의 관계4. 기타

1. 개요[편집]

2. 생애[편집]

1861년 5월 7일, 인도 벵골주 캘커타의 저명한 브라만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19세기 초에 영국 동인도 회사가 해체되는 과정에서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으며, 부친 데벤드라나트 타고르(দেবেন্দ্রনাথ ঠাকুর, 1817~1905)는 힌두교의 개혁에 관심을 두어 '마하르시(মহর্ষি, 위대한 성자)'라는 호칭까지 얻은 인물이었다.

영국의 명문 대학이자 간디가 졸업한 런던 대학교 그룹 소속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서 법을 전공했으나 중퇴하였다. 벵골 문예 부흥의 중심이었던 집안 분위기 탓에 8살 때부터 벵골어로 시를 썼고 16세에는 첫 시집 《들꽃》을 냈다. 초기 작품은 유미적이었으나 갈수록 현실적이고 종교적인 색채가 강해졌다. 교육 및 독립 운동에도 힘을 쏟았다.

시집 《기탄잘리》(গীতাঞ্জলি, 신께 바치는 노래)로 1913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는데, 이는 아시아인 최초의 노벨상 수상 기록이다. 이는 직접 수상한 노벨 문학상 부문을 기준으로도 마찬가지.

3. 한국과의 관계[편집]

타고르는 한국을 소재로 한 시, 《동방의 등불》을 남겼다. 《동방의 등불》은 1929년 타고르가 일본에 들렀을 때, 동아일보 기자가 한국 방문을 요청하자 이에 응하지 못함을 미안하게 여겨 그 대신 동아일보 기자에게 전해준 짧은 시이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던 등촉의 하나인 조선
그 등불 한번 다시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1929년 4월 2일 동아일보 기사

다음날 동아일보는 타고르가 써줬던 영어 원문도 실었다.
In the golden age of Asia
Korea was one of its lamp-bearers,
and that lamp is waiting
to be lighted once again
for the illumination
in the East

1929년 4월 3일 동아일보 기사

이보다 더 긴 버전으로 돌아다니는 시는 누군가가 타고르의 다른 작품인 '기탄잘리 35'의 글귀를 짜깁기해 이어붙이고 마지막엔 출처도 알 수 없는 '나의 마음의 조국 코리아여 깨어나소서'라는 문구가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타고르의 또 다른 작품인《패자(敗者)의 노래》는 최남선의 요청에 따라 쓴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이전에 타고르 자신이 번역해 미국에서 발간한 시집인 '채과집(Fruit-Gathering)'에 실린 것을 그냥 보낸 것이다. 최남선이 이를 타고르가 한국을 위해 쓴 창작물로 오해한 것. 거기다 문구도 원문과 비교하면 오역이 들어가 있는 상황이니.
위의 시들로 인해 한국을 우대한 인물로 국내에 알려져 있지만, 실은 일본의 문화에 매료된 자포네스크적 기질의 인물로 '일본은 시심을 자아내는 나라'라든지 '일본은 아시아에 희망을 가져다주었다. 우리는 이 해 뜨는 나라에 감사한다'라든지 하는 말을 하며 일본을 5차례 방문하고 러일전쟁에 일본을 숭상하는 시를 써 기고하기도 했으며 군국주의를 밀어주던 일본 우익의 거물 도야마 미쓰루(頭山滿)와도 친분이 있는 인물이었다.[2]

다만 일본에서의 강연에서 "이 나라(일본)는 물질적으로는 진보했지만 정신적으로는 퇴보하고 있다"라고 하거나, "일본이 인도에도 야심을 품고 있는 듯하다.[3] 굶주린 그들은 지금 조선을 잠식하고 중국을 물어뜯고 있다"라고 일본 제국주의를 비판하기도 했다. 오히려 일본은 정신 면에 많이 낙후되었다고 비판하여 극우 일본인들에게 크게 미움을 사기도 했다. 그가 중시한 건 바로 마음과 정신이었다.

어쨌든 타고르에게 한국은 중국이나 일본보다 한참 관심없는 국가였다. 하지만 그 시절 고립무원의 처지에 있던 조선의 지식인들에게는 이 정도도 감지덕지한 수준이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방탄소년단이 서아프리카나 남아시아의 잘 알지도 못하는 약소국에서 팬이라고 계속 연락해오니 그 나라의 팬들을 위해 짧은 영상 하나 만들어 준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본인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을지 몰라도 그 나라의 팬들에게는 매우 대단하게 생각되는 일이었을 것이니, 이런 역사적 배경을 감안하고 왜 그 시절에 타고르 열풍이 일었는지를 해석해야 할 것이다.

그 외에 최인훈의 소설 광장에서 주인공 이명준이 그토록 찾던 중립국으로 가는 배 이름인 '타고르 호'로 언급된다.

4. 기타[편집]

  • 타고르의 고향은 지금의 인도 영토인 서벵골 콜카타이고 힌두교도임에도 불구하고 방글라데시인들에게 타고르는 독립영웅인 봉고본두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 다음가는 국가의 상징이다. 사실 종교만 힌두교와 이슬람교로 다를 뿐 타고르도 벵골인이고, 그가 벵골어로 수많은 문학작품을 남겼으며 노벨 문학상까지 받았기 때문. 그리고 타고르는 가문이 소유한 토지를 관리하는 일로 10여년간 현재의 방글라데시 쿨나 주에서 살았었다. 여기서도 작품을 상당히 많이 썼는데, 타고르에게 노벨상의 영광을 안겨 준 기탄잘리가 이곳에서 쓴 작품이다. 방글라데시인들에게 타고르는 벵골의 자존심이자 벵골인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문호기 때문에 그가 서벵골 콜카타 사람이란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는 방글라데시인의 자랑을 넘어서 방글라데시 민족주의를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이기도 하다.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의 중요한 계기 중 하나가, 파키스탄의 벵골어 탄압정책에 따라 1967년 타고르의 작품을 국영 언론에서 다루는걸 금지한 것이다. 비록 방글라데시의 역사와 함께하진 않았지만 방글라데시인의 정신세계를 만든 중요한 인물이라, 타고르가 죽고 인도와 방글라데시가 독립국가로 독립한 지 35년이나 지난 1976년에 방글라데시에서 타고르에게 명예 시민권을 추서하기도 했고, 타고르 박물관 8곳 중 5곳이 방글라데시에 있을 정도이다.
  • 노벨문학상을 받은 공적으로 영국으로부터 1915년에 기사 작위를 받았으나, 1919년 암리차르 학살사건에 대한 항의의 뜻으로 작위를 반납했다.
  • 대표작 기탄잘리에 수록된 시 중 "생명의 흐름(Stream of Life)"은 맷 하딩의 영상에 쓰인 Praan의 가사로 사용되었다.
  • 인도의 국가(國歌)인 자나 가나 마나방글라데시의 국가인 아마르 쇼나르 방라는 그의 작품이다. '자나 가나 마나'는 작사뿐만 아니라 직접 작곡까지 했고, 아마르 쇼나르 방라는 타고르의 작사에 벵골 지역의 가요 그를 어디서 만나야 합니까(কোথায় পাবো তারে ; Ami Kothay Pabo Tare)를 붙인 것이다.
  • 2003년 3월 바라티 대학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던 타고르의 노벨문학상 메달과 시계 등 일부 유품이 도난당했다. 경찰이 현상금까지 걸며 4년 넘게 수사했지만 결국 물건도 범인도 찾지 못한채 2007년 수사를 종결지었다. 한편 스웨덴 노벨재단은 2004년에 메달 복제품을 만들어 인도 정부에 전달했다.

[1] 벵골어식 발음은 로빈드로나트 타쿠르[2] 아마 일본의 힘이 커졌으니 일본이 (인도를 포함한) 대다수 국가들이 서양의 식민지로 전락해있는 아시아의 주권을 위해 서양 열강과 맞서 싸울 것이라고 생각한 듯하다.(아시아주의수카르노나 찬드라 보스처럼 아시아의 민족주의자들 중에서는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한국에서도 일본이 한일병탄을 하며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삼기 이전까지는 일본의 제국주의 야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여 그런 생각을 한 사람이 제법 많았었다. 한일병탄 이전에 쓰여진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에도 이런 시각이 어느 정도 담겨 있다. 이승만도 1903, 1904년 정도까지만 해도 일본을 그렇게 싫어하진 않았으며 일본에 우호적인 모습도 일부 있었으나, 일본이 스스로 서양 열강과 다름없이 같은 아시아 국가인 한국을 식민지화하는 모습을 드러내자 강경한 반일로 돌아선다.[3] 일본이 인도를 공격하려 한다는 이야기는 그 기원이 꽤 오래되었다. 이미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정복한 다음에 중국 명나라도 점령하고 그 다음으로 인도에까지 쳐들어가겠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리고 1882년 12월 일본의 지식인인 후쿠자와 유키치는 “언젠가 한 번은 인도, 중국의 현지인 등을 다스리는 것에서 영국인을 본받을 뿐만 아니라..."는 글을 남겼는데출처, 이는 중국과 인도에 대한 야심을 드러낸 대목이다.

[최은주의 내 인생의 책]③내셔널리즘 -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 경향신문

[최은주의 내 인생의 책]③내셔널리즘 -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 경향신문



③내셔널리즘 -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2020.06.23
 
최은주 | 대구미술관 관장


행운





식민지 조선에 대한 애틋함과 희망을 드러낸 시 ‘동방의 등불’로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진 인도의 시성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그에게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계기는 2005~2010년 사이에 ‘아시아 큐비즘’전과 ‘아시아 리얼리즘’전이라는 일련의 주제전을 기획하면서다. 한국의 근대미술을 집중적으로 다루기 위해 설립된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일하면서 아시아 여러 나라의 근대기 미술의 역사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근대미술과 긴밀한 상관관계를 갖고 있는 중국과 일본의 근대미술은 살피고 공부할 기회가 많았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인도와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의 근대미술에 관한 정보는 턱없이 부족했다. 거의 무지했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그러던 차에 타고르의 <내셔널리즘>을 만난 건 행운이었다. 그것도 출판사 글누림에서 손석주가 번역한 책을 구할 수 있어서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타고르가 이 책을 발간한 때는 1917년이다. 인도가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던 시기다. 타고르는 이 책을 통해 내셔널리즘이 갖고 있는 여러 문제점을 비판했다. 그리고 일본의 군국주의, 제국주의화를 예견했다. 일본이 내셔널리즘을 기반으로 한 군국주의로 무장하고 제국주의로 나아가면서 아시아 여러 나라들을 침략하고 또 고통을 주게 될 것임을 내다본 것이다.


이 책을 읽고 아시아 여러 나라의 식민 경험 상황, 일본 대동아 경영의 허구성을 깨달았다. 한국의 근대를 큰 틀에서 바라볼 수 있는 눈도 갖출 수 있었다. 타고르는 말년에 자신의 영지인 산티니케탄에 미술학교를 세웠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세계주의적 의식을 후대에 남겨놓은 것이다.

아마티아 센이 본 타고르와 간디 정호영 2015

| EMERiCs 신흥지역정보 종합지식포탈



아마티아 센이 본 타고르와 간디

인도 정호영 자다푸르대학 사회학과 박사 2015/01/10

첨부파일
[칼럼_20150110]정호영_아마티아 센이 본 타고르와 간디.pdf


2014년 12월 27일, 아마티아 센은 웨스트 벵갈의 산티니케탄의 비스바 바라티의 초대를 받고 방문했다. 비스바 바라티는 타고르가 세운 교육기관으로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다 있다. 아마티아 센은 동벵갈 다카(지금은 방글라데시 수도)에서 태어났지만, 부모가 산티니케탄의 비스바 바라티의 교사로 일하기 위해 서벵갈로 왔기에 산티니케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학교를 다녔다. 즉 비스바 바라티의 동문인 것이다. 이곳을 마치고 인도 최초의 대학인 콜카타의 프레지던시 컬리지로 대학 진학을 한 그는 이후 캠브리지 트리니티 컬리지에서 유학을 했고, 학자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콜카타의 컬리지 스트리트의 헌책방 골목에선 그가 세계적인 학자로 이름을 날리기 전, 60년대에 서벵갈 지역에서 출간된 책들을 가끔 볼 수 있는데, 그 글들을 발견하고 나면 “아!, 아마티아 센이 벵갈인이었지”라고 실감하게 된다.

이날 아마티아 센이 비스바 바라티를 방문한 이유는 타고르 노래 연구 센터 설립의 취임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타고르가 건립한 학교에 타고르 노래 연구 센터를 세우는데 학교 동문으로서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아마티아 센이 개회사를 하는 것은 의미가 있었다. 아마티아 센은 개회사에서 “우리의 좋았던 옛날 산티니케탄의 단순함과 평온함은 이제는 쉽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절 사람들이 나누었던 우애로운 관계들에 대한 기억은 여전히 우리 마음속에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아마티아 센이 타고르와 자신이 나온 학교에 대해서 말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아마티아 센은 인도인, 자신이 가진 벵갈인의 정체성에 기반하여 자신이 알고 있는 타고르를 알리려고 지속적으로 노력하였다. 아마티아 센의 타고르는 서구를 통해서 알려진 신비주의 시를 쓰는 도인 타고르가 아니다. 타고르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것은 신비주의적인 영적인 시집으로 알려진 [기탄잘리]였지만 영적인 시를 쓰는 타고르는 타고르의 아주 작은 한 부분일 뿐이다. 서구에 그를 알린 예이츠가 [기탄잘리]의 영번역 작업을 하면서 타고르는 영어를 모르고 영어를 아는 인도인은 하나도 없다고 말할 때에도 타고르는 크게 반박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탄잘리]는 타고르의 시 세계에서 그저 일부일 뿐이다. 타고르는 시만 쓴 것이 아니다. 타고르는 자신이 살던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을 적었고, 희곡을 쓰고 직접 무대에 올라 배우가 되기도 했으며, 노래를 직접 만들고 불렀다. 방글라데시 국가와 인도 국가는 그가 직접 만든 노래이며, 스리랑카 국가의 가사는 산티니케탄에 공부를 하러 온 스리랑카의 학생이 타고르에게서 받아간 시다. 그는 일년에 삼모작을 하는 벵갈 지방의 풍요로운 강가에서 흘러나오던 전통 민요에 기반을 둔 노래를 만들어 불렀는데 여기에는 남녀의 통속적인 사랑 이야기도 많다. 타고르가 만든 노래는 라빈드라 상짓(Rabindra Sangeet)으로 불린다. 콜카타 어느 음반가게에 가도 라빈드라 상짓은 수십 년 전 녹음된 것부터 새로 재즈나 락으로 편곡되어 최신 청춘영화에 삽입된 후 음반으로 나온 것까지 다양하게 구비되어 있다. 이번에 설립된 타고르 노래 연구 센터는 이 라빈드라 상짓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며 연구하는 곳이다. 아마티아 센은 서구에 의해 박제화되고 정적으로 보이는 노벨문학상 수상자 타고르의 모습이 아니라 인도의 근대 시대를 누구보다도 정열적으로 살았던 타고르의 다양한 모습을 알리고 싶어 했다. 그리고 아마티아 센이 가장 높게 평가하고 알리고 싶어 하는 타고르의 모습은 바로 근대 사상가로서의 타고르였다.

2013년, 아마티아 센은 오랜만에 장 드레즈와 공저인 [불확실한 영광 : 인도와 그 모순들(An Uncertain Glory: India and its Contradictions)]를 출간하였다. 1990년에 공저인 [기아와 퍼블릭 액션(Hunger and Public Action)]에서 이들은 퍼블릭 액션이라는 개념을 주장하였다. 퍼블릭 액션은 “발전은 국민을 위해 국가가 수행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국민 스스로에 의해 행해지는 것”이라는 개념이다. 발전에서 주체들의 참여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강조하는데 이는 결국 민주주의의 문제이기도 하다. [불확실한 영광 : 인도와 그 모순들]은 1990년에 나온 그들의 책의 연장선상에 있다. 아마티아 센은 책을 출간하고 나서 한 인터뷰에서 월터 베젓의 “민주주의는 토론에 의한 정부이다.”라는 주장은 인도에서 여전히 중요하다고 하였다. 토론을 하기 위한 토양은 문맹자들의 나라에서는 없다. 아마티아 센은 인도가 나아가야 할 길은 간디에게 있지 않고 타고르에게 있다고 단호하게 주장하였다. 간디를 마하트마(위대한 영혼)라고 부른 사람은 타고르였지만, 타고르는 근대화의 문제에 있어서는 간디와 날카롭게 대립하였다.

1934년 비하르에 대지진의 참사가 났을 때, 간디는 이 대지진을 불가촉천민해방운동을 억누르는 빌미로 이용하였다. 간디는 참사를 인도에서 카스트 제도를 깨려는 시도들 때문에 신이 “우리 죄에 대해서 내리는 신성한 징벌”이라고 하였다. 이 시기는 불가촉천민해방운동이 활발해지고 있던 시기였다. 1930년부터 1932년까지 영국의 인도원탁회의에 인도 식민지의 불가촉천민계층 대표로 참석하였던 불가촉천민 출신의 암베드카르는 총독부와 영국 정부를 향해 불가촉천민의 힌두 사원 강제 노역 금지를 건의하고, 여성의 참정권 허용, 여성 교육 허용, 불가촉천민에게도 학교 진학 기회를 줄 것을 요구하였으며 이후 불가촉천민의 힌두사원 강제 노역 금지운동, 여성 교육 운동, 천민과 여성의 참정권 허용 운동을 전개하였다. 불가촉천민의 참정권 획득은 카스트 제도를 신의 뜻으로 굳게 믿고 있는 간디로서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어서 이에 간디는 목숨을 건 단식을 통해 반대를 하였다. 타고르는 간디의 이 비하르 대지진 발언에 대해서 "이러한 종류의 비과학적인 관점이 우리나라의 다수의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무엇보다도 불행한 일이다."라고 격렬하게 분노하였다. 간디가 정치적 후계자로 뽑은 네루 또한 간디의 이 발언에 대해서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후 암베드카르와 간디의 대립이 있었고,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타고르의 중재에 의하여 불가촉천민이 정계에 진출할 수 있는 길도 추후 열렸다.

아마티아 센은 교육에 있어서 두 가지 문제를 구분하였다. 하나는 대중 교육에 있어서의 엘리트주의적 비관론이었고, 이는 불행하게도 인도에서는 너무나 강한 것이라고 하였다. 다른 하나는 고등교육에만 치우친 인도의 뿌리 깊은 전통이 현재는 IT나 제약에만 치우쳐 나타나고 있다고 하였다. 인도 독립운동시기에 마하트마 간디와 라빈드라나드 타고르는 공식 교육에 있어서 완전히 다른 입장을 취했다. 타고르는 읽기, 쓰기, 산수, 과학, 놀이를 강조했지만, 간디는 물레를 스스로 매일 돌리는 것만으로도 자기 계발은 할 수 있기에 공식 교육은 필요 없다고 보았다. 타고르는 이에 대해서 물레라는 오래된 물건을 끊임없이 돌리는 것은 생각은 최소로 하고, 지겨움은 최대화시키는 일이라고 반박하였다. 타고르는 “내 관점으로는 인도 가운데 서있는 불행의 탑은 교육의 부재에 의해 놓여 있다.”라고 하였다. 타고르의 발전에 대한 생각은 일본의 교육 체제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타고르는 일본을 방문하여 일본을 ‘동방의 빛나는 나라’라고 불렀고, 아시아 중 가장 먼저 근대화를 성취한 것과 거기에 기반이 되었던 공교육 의무화를 높게 평가하였다. 물론 타고르는 일본의 아시아 침략이 본격화될 무렵에는 일본에 대해서는 아주 비판적인 발언을 하며 반전의 입장에 섰다.

아마티아 센은 타고르가 강조한 교육을 통한 인간의 발전을 인간 역량 확장(Human Capability Expansion)을 통한 발전이라고 불렀다. 간디가 관심을 가진 것은 자기 계발이었고, 이는 독립 이후의 인도 국가 계획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 아마티아 센의 주장이다. 공교육에 회의적인 간디의 생각이 인도의 1차 경제개발계획 시기에 계획을 입안하는 이들로 하여금 학교 교육에 투자하지 않고 간디식의 기본교육(Basic Education)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간디에 따르면 이 기본교육이라는 것은 일을 하면서 알게 되는 지식인데 이 지식을 익히면 교육은 필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간디가 원했던 카스트 제도가 고착된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즉 청소부의 아들로 태어나 청소부로 살다 죽으면 되는 카스트 제도로 유지되는 사회에서는 청소부의 아들은 글을 배울 이유가 전혀 없고 청소부로서 할 일만 익히면 된다는 것이다. 간디의 기본교육은 교육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카스트로 사는데 필요한 일을 배우고 자기 계발은 물레를 돌리면 되니 교육이 전혀 필요 없다는 주장이다. 힌두교에는 하층 카스트가 경전을 배우려고 하면 귀에다가 뜨거운 쇳물을 부어버렸던 처벌도 있었다. 간디 자신은 공식 교육을 최고 수준까지 받은 사람이었지만, 절대 다수의 대중은 공식교육이 필요 없다고 본 것은, 절대 다수의 대중은 자신의 카스트처럼 공식교육을 받을 필요가 전혀 없는, 기본교육만으로 충분한 하층 카스트였기 때문이었다. 간디는 구자라트 지역에서는 최고의 카스트인 바니야 카스트 출신으로 대대로 재상을 하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에 반해 타고르는 물레를 돌리는 것을 부정했고 근대 기술이 인간을 고된 노동과 빈곤으로부터 해방시킨다고 주장하였다. 간디는 산아제한이 필요 없다고 했지만, 타고르는 가족 계획을 주장하면서 간디는 “[크로이체 소나타]의 작가만큼이나 섹스에 대해서 공포를 가지고 있다.”라고 비판했다. 톨스토이는 [크로이체 소나타]에서 결혼생활이란 섹스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며, 따라서 ‘참다운 사랑에 의하여 맺어진 결혼’ 따위는 한편의 사기행위라고 남녀관계에 대해서 극단적인 저주를 퍼부었다. 타고르가 간디를 마하트마라고 부르면서 존경한 것은 민족 운동의 지도자로서의 간디였을 것이다. 영국이 쳐들어오기 전에는 몇백 개의 언어와 문화로 나누어져 있으면서 서로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500여 개의 소왕국들을 하나로 묶어서 인도라는 민족국가의 깃발 아래 모이게 한 것은 간디의 위대한 업적이다. 그러나 타고르는 간디가 민족운동의 위대한 지도자일지라도 그의 뼛속 깊이 박힌 봉건적인 힌두사상은 인도의 미래에 재앙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아마티아 센은 [불확실한 영광 : 인도와 그 모순들]에서 인도 경제가 성장을 했으면서도, 불평등 문제는 왜 이렇게 해소되고 있지 않는가? 하고 묻고 있다. 카스트 제도가 의식 속에 뿌리 깊게 남아 있고, 문맹률이 높은 나라인 식민지 인도에서 타고르가 했던 질문을 아마티아 센이 이제 새롭게 다시 하고 있는 것이다.
첨부파일[칼럼_20150110]정호영_아마티아 센이 본 타고르와 간디.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