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2/18

다빈치!지식지도 - 로카야타파 (Lokyaata派)

다빈치!지식지도 - 로카야타파 (Lokyaata派)

카야타파 (Lokyaata派)
인도 철학에서 유물론(唯物論)을 강조하였던 학파. 
로카야타란 '세태를 따르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며, 
불교에서는 '차르바카파' 또는 '순세외도'라고 일컫는다.
▣ 지식지도
◈ 요약정보
로카야타파(Lokyaata派)인도 철학인도 철학에서 유물론(唯物論)을 강조하였던 학파.로카야타란 '세태를 따르는 사람'이라는 의미불교에서는 '차르바카파' 또는 '순세외도'라고 일컫는다.땅·물·불·바람 등의 4 원소와 허공만이 실재로 존재한다고 믿음바라문교에서는 이단으로 취급
◈ 지식지도
로카야타파(Lokyaata派)브라만교베다브라마종교카스트 제도힌두교
▣ 백과사전[숨기기]  
인도 철학에서 유물론(唯物論)을 강조하였던 학파. 로카야타란 '세태를 따르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며, 불교에서는 '차르바카파' 또는 '순세외도'라고 일컫는다.
 
이 학파는 땅·물·불·바람 등의 4 원소와 이들 4 원소가 활동하는 장소로서의 허공만이 실재로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 때문에 그들은 인간에게 영혼이나 내세가 있다는 것을 믿지 않으며, 인간이 어떠한 정당하지 못한 행위를 하더라도 거기에 응하는 벌을 받을 일은 없다고 주장한다. 
  • 또, 인식론에 있어서는 오각을 일으키는 사람의 감각 기관, 곧 시각의 눈· 청각의 귀· 후각의 코· 미각의 혀· 촉각의 피부 등 오관에 의한 지각 외에는 인식이 있을 수 없다는 감각론적 입장을 주장하고 있다. 
  • 인간의 실천 생활에서는 쾌락주의를 내세우고 있으며,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늘어놓는 데에도 능하다고 한다.
 
로카야타파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기원전 5세기경의 자유 사상가이며, 육사외도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아지타 케샤캄발린이 있다. 로카야타파는 학파로서는 후대까지 계속 유지되었으나, 더 이상의 사상적인 발전 은 이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바라문교 정통 학파들은 로카야타파를 정통이 아닌 이단으로 여기고 있으며, 논의할 가치가 거의 없는 사상이라고 낮게 평가한다. 바라문교란 불교에 앞서 인도 바라문족을 중심으로 고대 인도의 경전인 베다의 신앙을 중심으로 발달한 종교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

[불교입문 3] 명상하는 인도, 우주의 근본 웃다라카(Uddalaka)의 사트(sat)론 / 정병조

[불교입문 3] 명상하는 인도, 우주의 근본 웃다라카(Uddalaka)의 사트(sat)론

[불교입문 3] 명상하는 인도, 우주의 근본 웃다라
카(Uddalaka)의 사트(sat)론 / 정병조 불교 첫걸음

불교 첫걸음 151개의 글 목록열기
2009. 11. 14 
https://blog.naver.com/viking999/40094176473

===
[불교입문 3] 명상하는 인도, 우주의 근본 웃다라카(Uddalaka)의 사트(sat)론 / 정
병조

철인(哲人)웃다라카는 우주를 움직이는 근원적인 원리를 '사트 (sat)'라는 용어로
써 설명하였다. 그는 이 사트야말로 우주의 근원이기 때문에 모든 인간들이 이 사
트를 올바로 인식하고, 이를 회복했을 때 비로소 해탈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는
말하기를, "태초에 모든 것은 사트에서 비롯되었다. 사트가 모든 것을 만들었고, 인
간 존재도 사트에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인간이 죽으면 사트로 다시 되돌아 간
다"고 하였다. 이것은 서양 철학의 영겁회귀(永劫回歸)라는 말과도 같이, 우주라는
거대하고 영원한 사이클이 사트에서 시작되어 사트로 되돌아가는 과정이라고 보았
다.
그 과정은 마치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것과 같다. 즉, 하늘에 구름이 모여서 비가
되어 내리면 빗물은 고여서 시냇물을 이룬다. 시냇물이 흘러서 강줄기가 되고, 강
은 흘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바다에서는 수증기들이 하늘로 올라가서 또 다시 구름
을 이룬다. 그 구름은 또 비가 되어서 대지를 적신다. 이 세상의 모 든 것들은 이와
같이 덧없는 윤회의 관계에 있고, 그 윤회의 실체를 사트로 본 것이다.

그의 아들 스베타케투(Svetaketu)가 어렸을 때, 집을 떠나 히말라야에서 신(神)에
대하여 공부하고 청년이 되어서 귀가한 후, 웃다라카와 나누는 대화중에 사트에 대
한 가르침이 있다.
"스베타케투여, 너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고 만질 수 없는 것을 만질 수 있는,
그런 법을 배웠는가?"
"어떻게 그런 가르침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다, 사랑하는 아들이여. 여기 도자기와 물그릇과 항아리가 있다고 하자.
그 모든 것들은 흙으로 빚은 것이다. 만일 그대가 흙이라는 본질을 알면 그 모든 것
은 변형된 이름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그 변형된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만약에
우주의 근본원리만 깨닫게 되면 모든 현상들은 저절로 알 수 있다. 우주의 근본원
리, 그것이 바로 사트이다."
그리고 웃다라카는 아들을 큰 무화과나무 아래로 데리고 갔다.
"아들아, 이 무화과나무는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무화과나무의 씨에서 비롯되었겠죠."
"그러면 무화과나무의 이 작은 씨앗 속에서 저 큰 무화과나무가 나왔겠느냐? 그 씨
앗을 잘라 보아라.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자꾸자꾸 잘라나가다 보니 가루가 되고 말았다.
"아들아, 그 씨앗 속에 무엇이 있어서 무화과나무가 되었겠느냐? 비록 볼 수도 없
고 만질 수도 없지만, 씨앗 속에 들어 있어 무화과나무가 되게 하는 그것이 바로 사
트이다."
스베타케투는 그제서야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웃다라카와 스베타케투의 이러한 대화 속에 여러 번 반복되는 인도 철학적 원리는
'네가 바로 그것이다(tat tvam asi)'명구로 요약할 수 있다. 많은 대화의 끝은 이 구
절로 결론지어져 있다. 또 다른 설명을 들어보자 웃다라카는 아들에게 말하였다.
"아들아, 물을 가져 오너라 거기에 소금을 넣어 물맛을 보아라. 용해된 소금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지만 짠맛을 나게 한다. 그것이 바로 사트이다. 네가
바로 그것이다."
이상과 같은 예에서 웃다라카가 강조하고 있는 점은, 사트란 근원자이면서 내재자
라는 것이다. 사트란 불가설(不可說), 불가지 (不可知)의 그 무엇이다. 이것은 불가
(佛家)에서 말하는 언어도단(言語道斷)과도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언어로서는 접
근할 수 없고 마음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형이상학적 실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 사트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웃다라카는 <우파니샤트>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살아 있을 때, 사트를 인식할 수도 있지만, 언어나 실행의 범주를
넘어서는 것이므로 살아 있으면서 그것을 알기는 어렵다. 다만 살아 있을 때는 숙
면의 상태에서 사트와 가깝게 될 수 있다. 사트를 인식하고 이해하는 것은 결국 죽
은 후의 세계라야 가능하다.
여기에서 염세적인 경향을 엿볼 수 있다. 인도 철학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은둔
적이고 명상적인 성격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또 현세중심적이기 보다는
내세지향적인 면이 강하다 고 볼 수 있다. 모든 인간은 사트에서 나와서 사트로 되
돌아가는 영겁회귀의 과정에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 사트를 이해하고 인식해서 해탈을 얻는 실천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웃다라카는 두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첫 번째는 무소유이다. 태양을 가리는 햇빛 가리개, 지팡이, 표주박과 삼의일발(三
衣一鉢)외에는 몸에 지닐 수 없고 오직 수행에만 정진해야 한다. 이것은 불교의 수
행 정신과도 합치한다. 인도의 출가수행 정신은 이러한 무소유의 이상을 토대로 하
고 있다.
둘째로 보시의 미덕을 내세우고 있다. 보시란 한없이 베푸는 것이다. 불교에서도
보시는 육바라밀 가운데 가장 먼저 꼽는 수행이다. 웃다라카도 베풂의 미덕을 중시
하였다.
이와 같이 웃다라카의 사트론은 현상을 보고 본체를 찾아가는 철학이며, 결과를 보
고 그 원인을 추구해 들어가는 철학이다. 이 사트를 불교적으로 말하면 일심(一心)
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모든 것은 일심에서 나오고, 다시 일심으로 되돌아간다. 또
한 플라톤 철학에서는 이데아가 될 것이다. 이 우주는 이데아의 그림자에 불과하고
현상 세계는 이데아 세계로 되돌아가는 과정이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동. 서양을 막론한 철학적 성찰에 있어서 어떤 일치점과 유사점을 확인할
수 있다. 웃다라카의 사트론은 우주의 본체를 해명하기 위한 철학적인 성찰임과 동
시에 그것을 해명해 들어가는 종교적인 실천행을 강조 했다는 점에서 힌두이즘의
원형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해탈의 길을 묻던 사람들, 부처님과 거의 동시대에 공존했던 육사외도라고 불리는
이들이 있다. 기원전 7-6세기, 대략 2천 5백여 년 전을 육사외도(六師外道)의 시대

라고 말한다. 외도라고 불리는 까닭은 힌두이즘의 입장에서뿐만 아니라 불교의 입
장에서도 외도(外道)이기 때문이다. 대체로 여섯 학파를 꼽을 수 있다.
첫째, 푸라나 카샤파(Prana Kassapa)를 들 수 있다. 그는 감각적 쾌락론을 주장하였
는데, 모든 도덕률을 부정하고 오직 감각적으로 쾌락을 얻는 것만이 인생의 목적이
라고 하였다.
둘째, 파쿠다 카차야나(Pakudha Kaccayana)의 7요소설이다. 그는 이 세상에 실재
하는 것은 일곱 가지에 불과하며, 그밖에는 모든 환영일 뿐이라고 하였다. 7요소란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의 사대와 고(苦). 락 (樂). 생명 등이다. 그 7요소 외
에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으며 허망하다고 주장한다.
셋째, 막칼리 고살라(Makkhali Gosala)의 결정론(운명론)이다. 우리의 삶이란 태어
나기 이전부터 예정된 것이며, 예정된 코스를 걸어가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
하였다. 불교에서는 이들을 사명외도(邪命外道)라 하여 그릇되게 목숨을 이어가는
자들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7요소설에 다섯을 더하여 12요소설을 주장하였다.
넷째, 아지타 케사캄발린(Ajita Kesakambalin)의 유물론이다. 유물론은 지수화풍의
사대만이 물질적으로 실재하며, 그 외의 것은 존재하지 않는 허망한 것이기 때문에
감각적인 쾌락을 누리면서 살아도 무방하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이들을 순세파(順
世派)라고 부른다. 즉 이 세상에 순응하는 무리들, 이 세상이 하자는 대로 살아가
는 잘못된 무리들이라는 뜻이다.
다섯째, 산쟈야 벨라티풋타(Sa~njaya Belatthiputta)의 결정론, 회의론이다. 결정적
인 판단을 유보하고 모든 것을 의혹, 의심하는 학파이다. 사리불과 목건련은 이 학
파의 거두들이었는데 그들이 제자들을 데리고 불교에 귀의함으로써 이 학파가 불
교에 흡수되었다.
여섯째, 니간타 나타푸트라(Nigantha Nataputra)의 자이냐교이다. 이는 위의 다섯
과는 성격이 다르다. 이 학파에서는 철학적으로 매우 독특한 성찰을 하였다. 또 니
간타의 생애 자체가 부처님과 흡사하다. 즉 왕의 아들이었고, 출가한 연령도 비슷
하며, 죽을 때도 비슷하다. 니간타는 깨달음을 얻은 후에 '마하비라', 즉 '위대한 승
리자'라고 자칭하였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교리 자체도 흡사한 점이 많다. 그런
까닭에 약 2백여 년 전 서양에서는 니간타나 타푸트라를 부처님과 혼동한 적도 있
다. 그들은 불상의 모습도 불교와 유사하지만 분명히 구별되는 점이 있다.
자이나교의 불상들은 한결 같이 나체인데 반하여 불교의 불상들은 가사장삼을 걸
치고 있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우선, 그들의 철학적인 기본 입장은 상대주의라 할
이야기꾼의 사랑방 수 있다. 절대적인 판단은 금물이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조건법이에블의로그하에여서존검색재하

고 있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죽었을 때, '죽었다'고 말하는 것은 살
아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본 절대적인 판단이다. 그러나 죽은 사람의 입장에서 보
면, 죽음으로 들어온 것이다. 따라서 모든 판단을 내릴 때, 조건반사적으로 상대적
인 판단을 해야 하며 절대적인 판단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다.
또, 그들은 카스트 제도를 부정한다. 태어날 때 이미 신분의 고하가 결정된다는 것
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 이런 입장은 불교와 같다. 부처님도 말하기를, "태
어날 때의 신분으로 인간의 고하가 결정 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그가 무엇을 하
고 있는가에 따라서 고귀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비천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고 하
였다. 이러한 사상은 후에 불교의 업사상으로 발전되기도 한다.
자이냐교의 세계관에 따르면, 이 세계의 근원은 지바(jiva, 영혼)라고 한다. 그리고
지바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는 것이 인간이 라고 보았다. 인간이 고통을 받는 까닭
은 영혼적인 면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왜 그러
한가? 물질적인 것이 영혼을 압박하기 때문이다. 이 물질적인 것을 아지바(ajiva,
비영혼)라고 한다. 지바, 즉 영혼이라고 부르는 순수한 것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물질적인 아지바가 영혼을 둘러싸고 있기 때문이다. 아지바를 없애기
위해서는 이 물질적인 것들의 감각적인 쾌락을 억제하는 방법밖에 없다. 그것을 억
제해서 지바, 즉 영혼이 제 기능을 발휘해야 한다. 요컨대 자이나교에서는 아지바,
즉 비영혼인 물질적인 것들로 말미암아 윤회하게 된다고 가르쳤다. 다만 불교에서
는 육도윤회를 말하는 데 반하여, 그들은 네 가지의 세상, 즉 지옥. 축생. 인간과 천
상을 윤회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열반이란 무엇인가? 자이냐교도들이 말하는 열반은 결국 육신적인 쾌락
을 억제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수행방법으로서 고행을 예찬하고 있다. 즉, 고행을
통해서만이 새로운 업의 유입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고행 가운데 가장 어
려운 것은 단식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계율을 철저히 지킨다는 면에서 자이나교에
서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다.
자이나교의 계율에 오계가 있는데, 이는 불교와도 유사하다. 즉 불살생, 불투도, 불
음행은 같으며, 불망어를 진실어라고 하고, 무소유를 오계 중의 하나로 넣고 있다.
특히 무소유의 계율을 너무 철저히 지키려 하는 까닭에 자이나교의 성직자들은 옷
을 벗고 지낸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그들을 나의행파(裸衣行派)라고 부른다. 또한
불살생의 계율 때문에 직업 선택의 애로가 있다. 어업, 농업에 종사하기는 어렵기
이야기꾼의 사랑방 때문에 주로 상업에 종사한다. 이와 관련된 재미있는 통계가 있다이.블영로그국에이서인검색도를 식민지화할 때, 인도의 민간자본을 조사하였더니 0.1%의 자이나교도가 전체인도 시장의 40%를 점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종교적인 조직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가를 간접적으로 제시해 주고 있다.
자이나교가 불교와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있다. 불교는 무아를 주장하고 이 세상에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하 는 반면에 자이나교는 지바, 즉 영혼을 실
체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인정했다는 점에서 실재론적 철학이다. 따라서 표현방법
상 유사한 몇 가지로 인해 불교와 자이나교를 혼동하거나, 그 교리 자체의 유사성
을 논하는 것은 부당하다.
결국 이 두 종교의 근원적인 차이점은 자이나교는 영혼의 실재를 주장하고 불교는
영혼의 비실재를 주장하는 데 있다. 이러한 시대적인 배경, 즉 제사만능의 신 중심
적인 사고 경향과 극단적인 퇴폐주의 등의 흐름이 풍미하는 그런 시대 속에서 부처
님은 출현하였다. 그리하여 그 시대의 어둠을 밝음의 불길로 바로 잡은 것이다.
불교, 그 영원한 생명, 영원한 진리의 고향은 바로 이와 같은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싹텄다. 부처님은 질식할 것 같은 신 중심적 사고에도 감각적인 쾌락만이 인생의
목표라고 생각하는 도덕부정론도 수긍할 수 없었다. 바로 여기에서 인도 종교가 가
지고 있는 한계와 특수성을 초월하는 불교의 보편성이 발견되는 것이다.

 「死の臨床」から得られる語りと仏教衽衲社会教化の実践の事例から衽衲

佐藤 雅彦

はじめに 「社会教化」の問題群のなかの実践

「社会教化」とは何か、どのような内容を指し示すのか、これらの地盤固めは、小山典勇先生らによって議論の上で積み重ねられてきた1)。総じていえば社会教

化には、現実の社会に生じている問題と仏教がどのように関わっていくかという、理念や指針、方法論が求められていることは言うまでもない。筆者は、そこにいくつかのテキストが認められると考える。その代表とされるものは、いうまでもなく仏教経典だろう。しかしそれに並んで重要と考えられるのは「ひとびとの声」だ。無論、声の確かめ方は文章や、直接、聴覚に届いた声、多様にある。つまり心の表現としての「声」に耳を傾ける、注意を払うことは、何が仏教に求められているか、何が問題とされているのか聴き取る姿勢であり、経典にみえるブッダの教えと、その声を結ぶ役割を担うことこそ、教化者のつとめといえるのではないだろうか。

多くの仏教研究は、仏教経典やその思想を扱うことが主たる領域を占めてきた。

しかしそれぞれの時代において、その各々の時代を生きることを「現代」として考えるとき、「ひとびとの声」を聴きとろうという努力や、社会の声に耳を傾ける努力をしなければ、我々は、仏教を学んでいても、仏教を実践するものとはいえないのではないだろうか。言い換えれば、社会教化は、社会に生きる人々の声を聴き、その声に仏教の立場から応えようとする作業の蓄積ともいうことができるのではないだろうか。

すでにさまざまな人文研究においては、「声を聴く」という方法論は、その対象となる当事者や関係する人々に「語り」(narrative)という行為を通して、広く用いられている。筆者は長年、「こころのケア・ボランティア」として末期がん患者や、さまざまな疾患にある患者の病床を訪問し、多様な患者の「語り」から学ばせていただいてきた2)。本稿ではそこから得られたことと仏教が、どのように関わっていくかということを、問題意識として述べてみたい。これらの作業は、具体的な、もしくは実践的な社会教化の事例と位置付けられると考える。

1 「死」を学ぶ時代から問う時代へ

1977年、日本死の臨床研究会は発足した。どんなに治療しても死ななければならない人間のクオリティ・オブ・ライフ(Quality of Life)を考えるためにも、治療に偏重した医療からケアを尊重する医療へと変遷していく中で、さまざまな職種の人々が患者のために「死」を学ぶ研究会が立ち上がったのは、当時、画期的であり時代のニーズでもあった。当時は、公の会場で「死」を表面に出して会合を持とうということ自体、抵抗のあった時代だったという。しかし今日、これに類した学会、研究会はあまたのごとく存在する。これはいかに死の問題が、個人的な問題から多くの人々が共有すべき社会の問題であり、死を語ることがタブーとされた時代から、死を学ぶ時代へと変化してきたことの顕われと受け止められよう。

さらには、これから先20年、団塊の世代の人々が老年を迎えていく時代は、日本人が未曾有の死者が増加する時代といわれ、否応なく死と向き合わねばならない時代が、すでに到来しているということを覚悟してかからなければならない。

死んだらどこに行くのだろうか?死後の世界はあるのか?この私の人生にはどんな意味があったのだろうか?なぜこんな病気にかかり、死んでいかなければならないのだろうか?今日これらの問題は、「スピリチュアル(spiritual)な問題」としてくくられる。医療に関わる人々は、死を間近にした人間には、上記のようなスピリチュアルな問題が、心の安心の上で重要な意味を持つということは、すでに知られるところのものである。

一方、人生の終わりにあたっての備えをする活動は「終活」という言葉を用いて、すっかり市民権を得たようで、今やそうした類の雑誌が、コンビニに並べられている。相続、生命保険、お葬式、お墓等についての情報や学びを得るための媒体がその具体的な内容のようだ。また死後に大切なことを伝えるための「エンディング・ノート」等も、一般的な文具店でも手にすることができるようになった。しかし、相続、葬儀、お墓等、そこで取り上げられている内容は、経済に関わる問題が目につき、もっと精神的なもの、心のあり方等については、おおよそ触れられていないように感じ、何か足りないような気がするのは、筆者だけだろうか。前述したスピリチュアルな問題は、おおよそ取り上げられてはいない。自分にとっての死、自らの死の問題は、各人が各々の立場で自らのいのちの問題として、問いかける時代と言ってもいいだろう。そこには仏教が支える、助けになるというような必要はないのだろうか。

2 心のケア・ボランティアとして

「心のケア・ボランティア」という名称を使いだして20年近くの歳月が経過する。さまざまな学びの場や、看護師として勤めていた妻の関係から、数名の医療従事者が「この患者さんには宗教家のケアが必要」と推察した場合、患者本人に

「こんなお坊さんがいるけれど会ってみますか?」と尋ねる。患者が「会いたい」と意思表示した場合、筆者に連絡が届くという仕組みだ。緩和ケア病棟もあれば、一般病棟や在宅の場合もある。

筆者の場合、仏教の教えを根本的な立場として聴聞するが、自分の所属する特定の宗派の布教や伝道をする目的ではなく、幅広く仏教思想を基にする態度で接することを主眼にしている。「宗教」「仏教」の言葉を用いると、特定の宗教の布教をされるのではないかという、懸念を持たせないようにするため「心のケア・ボランティア」という名称を用いている。ここでは以下に「心のケア・ボランティア」の実践活動を通し、患者からの語りを通して得られた、いくつかの学びを指摘する。

3 患者の語りから得られる仏教への問いかけ ①「なぜ私が」という根本的な問いかけ

「なぜ私が、こんな病気にならなければならないのか?」この問いかけは、もっとも医療従事者を窮する問いかけといわれる。患者ももちろんだが、若い看護師などから「こんな病気になぜなっちゃたんだろう」と言われて、なんとも慰めることもできなかったという言葉は、しばしば聞かれることだ。

さらにこの苦しみは、胃ガンや肺ガンといった、完治の難しい病気に出会ってしまったという問題だけではなく、思いも寄らぬ時期、タイミングに病気と出会ったことから生じる場合もある。新しい事業を興したばかりであったり、やりかけていた仕事が、あと一歩で成し遂げられる時期であったり、子育て盛りの婦人であったり、どうして人生の「この時期に病気になってしまったのか」と、悔しさや失望にみまわれるようだ。まさに人が生きるということには、こうした「予期せぬ」時期に狙ったようにやってくる苦しみがつきものだ。

病気の受け止め方というものは「親もガンだったし、同じ体質だから仕方がない」「いつかは、親と同じ病気になるのだろう」と、自分の体質について予め覚悟していて、病気になることは自然と受け入れられても、その発症する時期については「なんで今この時期に病気にならなければならないんだ」と、思い通りにならない人生に落胆する人は多いものだ。せっかくここまで懸命に生きてきたのに、なぜこの私が病気にならなければならないのかと、積み重ねてきた人生の努力に対して、報われないことと悲観して、悲しさや恨みさえ感じる人もいるものだ。

「生老病死」の苦しみを仏陀は説いたというが、

このような病気との出会いを、仏陀は「どのように受け止めよ」と教えたのだろうか。

筆者は、患者からの病気との出会いについて問われたとき、縁の話をすることにしている。

「つらいご縁と出会いましたね」と声をかける。すると

「こんなつらい出来事も『ご縁』というのですか?」

「私は健康にご縁が無かったのだと思っています」

患者は、しばしば自らのご縁に対する考え方を聞かせてくれる。どうやら仏陀の説かれた「ご縁」と世間一般的に理解されている「ご縁」には、いささか異なりがあることに、よく気づかされる。一般的には、良いこと、好ましいことに出会ったとき「ご縁がある」と言葉が用いられているように感じる。しかしこの良いこと、好ましいこととは、「誰にとって」良いこと、好ましいことなのだろうか。「私にとって」の良いこと、好ましいことであり、私の都合を中心にした考え方に他ならない。これに対して仏陀の考え方は、そういう自分を中心にしたものの見方ではないと教示されている。つまり現代の日本人の多くが用いている「ご縁」という言葉の使い方は、本意を歪めた「聞きかじり」の受け止め方であるといわざるを得ない。

仏教では、すべての成り立ちは「因縁」によると考えることはいうまでもない。

厳密には「因縁」は「因」と「縁」とに分けて考えられる。これは直接的に関わりあう「因」と、間接的に見えないちからで関わりあう「縁」との、結びついたはたらきを「因縁」と示す。

 

具体的には、どう考えてもあれだけタバコを吸ったのだから仕方ないというような人が肺ガンになった場合、その原因を考えると、確かにたくさんタバコを吸ったということは、直接的な原因となる「因」であるにちがいない。しかしこの時期にこのタイミングで発症したというのは、わからないけれど出会ってしまった「縁」のはたらきと受け止めることができるだろう。

このことは、私たちは、目に見えない縁のはたらきがあることを知らずに、目に見える原因のみを見つけようとし「なぜ?」「どうして?」と心を焦燥させる。さらには、これだけタバコを吸ったのだから、肺がんになって当たり前だと、その原因が明確なら納得できるけれども、酒もタバコもやらないこの私が、なんでガンにならなければならないのか、と直接的な原因が究明できないとなると、病気にかかったことそれ自体が納得できなくなってしまうものだ。私たちは、現代の科学の尺度でものを見、考える生活をしていると、何事も「原因」を目に見える形で確かめられないと、納得できない、気がすまない生き方になってしまいがちだ。しかしここでいう原因は、仏教の考え方からすれば、本来の物事の成り立ちの、一面的な意味だけしか指し示していないことになる。「どうしてかわからないけれど出会ってしまう」というご縁の考え方を受け入れていくとき、つらく思い通りにならない病気との出会いも「ご縁」と受け止めることが、きっとできることだろう。

仏陀の示したご縁の考え方を、もう少し身近なものにするために、患者の前では、患者自身の人生に例えて話をする場合もある。

振り返れると、私たちが生まれてきて、こうして今、存在するすべてのことは、みな因縁によって成り立っているというのだが、それはしっかり目に見えること、理路整然と納得のできることばかりだったろうか。父と母の結びつきから私たちは誕生した。これは目に見える原因だ。しかし父と母は、どうして出会ったのだろうか。これは目に見えないご縁といえる。いや両親は見合いで、必然的に結婚したのだという場合もある。仲人が引き合わせたという直接的な原因のなせることという。しかしなぜ、仲人は星の数ほどいる男女の中から、父と母とを選んだのだろうか。これもご縁のはたらきといえるはずだ。

自ら努力をして、人生の成功を勝ち取ったという人も、実は、見えない不思議なご縁の力に、支えられて生きてきたのではないだろうか。ご縁とは、元来、そういう不思議な出会いのはたらきをもつものなのだ。

93 )

「なぜ私が、病気になってしまったのだろうか?」

この問いかけの答えは「わからないけれど、そのようなご縁をいただいた」としか言うことができない。

わからないことをなんとかわかるように探究する努力は、無駄ではないと思う。

しかしわからないことを、何とかわかるようにしようとして、苦しみを増大させている人がいることも事実だと思われる。人が生きるということは、わからないけれど出会う「ご縁」のはたらきが大きく作用していることを認めることができるのならば、わからないことはわからないこととして謙虚に受け入れようとすることこそ、心に安楽を引き起こすことにつながると考えられる。人生を三十年生きた人も、八十年生きた人も、その間、私たちが学ばせていただいたことは、この広い世界の、宇宙の営みのほんのわずかなことでしかないのだ。謙虚にわからないことを、認める勇気をもつことこそ、生きる智慧というものではないだろうか。

②仏教に答えがあると知っている人々

たとえ自分の病気を受け入れられたとしても、迫りくる「死」については、病気の受容とは、また別の感慨があると思われる。宗教的なニーズが感じられるからこそ「心のケア・ボランティア」として筆者が呼ばれるわけだが、筆者は患者に会うと、まず最初にある質問を必ずすることにしている。

「どうしてお坊さんに会いたいと思ったのですか?」と尋ねるのだ。すると多くの60代から80代前半くらいの患者が、同じような言葉を返してくることに気付かされる。

「もっと仏教の話を聴いてみたかった」

「もっとお寺の行事などに参加して、仏教の教えを知りたかった」

「これから自分は、お経を読まれる立場(死んでお葬式にお経をあげられるの意味)になってしまうのだが、読まれるお経なら、そのお経の意味内容を一度くらい、自分も読んだり、たずねたりしたかった」等々。

おしなべて「仏教の何々がしたかった」というのだ。これは死期が迫った患者にとって、日本人として特別仏教の信仰をもっているとはいえないながら、求めるものの答えが仏教の中にあると感じている。「いのち」の瀬戸際の大事なところで、尋ねたい答えが仏教の中にあると察している、知っているということの顕われといえるのではないだろうか。しかし死に至るような病気や、寝たきりの状

94 )

態に至るまで、まだ自分には時間がある、今はこの仕事や趣味など、やることがあるので、まだ求めなくても後からで大丈夫だろうと、大切なものを求めたいと思っていても、大切なことを後回し、先送りにしてきたことの結果が、言わしめる言葉ではなかろうかといつも感じるのだ。

そのように感じるからこそ、元気なうちに「いのち」にとって、大切なことを考える時間、学ぶ時間が設けられたらと考えるのだ。いわば昨今の終活の言葉には、このような視点が欠けていると考える。しかし、そんなことは必要ない、なぜなら死はすべての終わりなのだから、精一杯、その時が来るまで楽しんだらいいじゃないか、死のことなんか、考える必要はないと考える人々もいるのは、もちろん当然のことだ。

③死んだら「無」になるのか

「仏教は[無]を説く教えだ」、しばしば耳にする言葉だが、これも「ご縁」同様に、聞きかじりの仏教語を知っているだけなのか、本来の意味を理解しているのか、二分されるところだ。医療従事者からも、この問いかけに付随して「どのように死のことを説明したらいいのか」という質問は、頻繁に受ける質問だ。

はじめに「仏教は無を説くのだから、死後の世界も何も無い」というのは、まさに聞きかじりの理解であり、混乱を招く表現だ。

確かにブッダは「無」を説いた。しかし「無」という漢字を「ない(nothing)」と受け止めるところから間違いは生じている。後世、仏陀の言葉が弟子によって編纂され、経典が成立し、さらにインドから中国へ伝えられていく。そのプロセスでブッダの時代の言葉・サンスクリット語は、中国語に翻訳されていく。そこで仏典の漢訳翻訳家たちは思想に相当する漢字を当てはめるという作業をする。そこでは「無」だけが説かれるのではなく、「有」に対する言葉として「無」が当てはめられたわけだ。では何を「有、無」といったのだろうか。仏陀が有るとか無いとか言いたかったのは、「煩悩」や「迷いの心」だ。また仏教以前の思想を否定していくために、しばしば「無」は説き示されている。もっと平易に言えば、仏陀が無という言葉を用いて表現したかったのは、「とらわれを離れた世界」を「無」の語を使って言いたかったといってよいと思われる。煩悩という執着、とらわれから離れた世界であり、こだわりや迷いを離れた世界を、無を使って言いたかったのだ。元来それは、死ななければ得られないというような世界ではなく、この世においても煩悩、執着を捨て去ることで、無の世界を体現できることを言われたのだ。

とりわけもっとも古い仏教の教えでは、ブッダは「死後の世界」についても、何も説かれなかった、と受け止められる説もある。しかしそれは、ブッダの最大

の関心事は、いかに今を生きることから苦しみを除去し、悟りを開くことであり、苦しみからの解脱であり、死んでからどうこうなるということよりも、「今の生き方」にその教説があふれていたからともいえる。その後、誰もがみな救われる道を求めた「大乗仏教」では、この世において解脱すること、悟りを開くことのできなかった人間に対して、死後、仏の世界に生まれて、それから悟りを開かれる道が、ブッダの教えとして示し残された。したがってブッダは「確かに無を説くが、死後が何もない世界と示されたわけではない」と理解すべきだろう。

④「仏さまの世界」を見る方法

ここで事例をひとつ紹介したい。

患者は、80代半ばの末期がんの男性。緩和ケアに勤務する医師からの電話は「仏さまの世界を見たい」と言っている患者がおられるので来てほしい、という要請だった。80代半ばという年齢や病状から、いつ変化があってもおかしくないので、なるべく早く来てほしいという。早速その緩和ケアを訪問すると、男性は個室のベッドに横になっていた。やせ衰えた面長な顔に大きな目でギョロッと、筆者を見つめてきた。

現役で働いていた頃は、大きな造船会社で、船の設計に長年携わってきたという。その性格は設計家らしく、何ごともきちっと自分で掌握できていないと気がすまない性分で、病気に関しても自分の病状、これから予測される容態、服用している薬の効き目や副作用にいたるまで、すべて自分の承知の上で、管理していないと嫌だということだった。そのために眠気を伴う鎮痛剤を拒否し、充分に痛みは緩和されているとはいえない状態だった。自分に迫ってきた死のことも、自分の納得のいくように心得ておきたいという欲求から「死後の世界、仏さまの世界を、どうしたら見ることができるか」という質問を、筆者に投げかけてきた。自己紹介の後、経典のなかに書かれている表現で、極楽の蓮の花や池、さえずる鳥や空、そういった世界から思い描いたらどうかと、話した。しかしそれは「空想を思い描くだけの世界に感じられる。現実に見たいと思っても、実感が伴わない」と反論してきた。経典の中に示されてある極楽浄土の観察の方法で、日の沈

み行く西方に思いを凝らす方法を説いても「西の方角に進んだら、地球を一周し

96 )

てもとに戻ってしまうだろう」と言う始末だ。この男性は、目に見えるものとして証明してほしいというのだ。死の世界のあちら側のことは、今、生きてこちら側にいる我々は、誰も行っていないのだから、それを見ることはできない、と私は、現実に戻して話をすることにした。「大切なことは、こういう世界であったらいいな、あってほしいなと「願いながら生きる」ことではないでしょうか。仏さまの世界を見ようとするならそれは、この目ではなく、私たちの「心の目」を開き、「心の目」を仏さまの方向に向けることによって、見ようとすることでは

ないでしょうか。」 こう続けて話していくと、男性は、「そうか、心の目でね」と、静かにささやき眠りだしてしまった。

人間は、死の間際になって、いきなり仏さまを探せといっても、なかなか見出すことのできるものではない。私たちの生きる世界というものは、目に見えるものと、目には見えないけれど、確かにあるな、あってほしいな、というような「あやふやな世界」があるものだ。この男性のように、目に見える、計算、証明のできる「科学」という物差しでしかものを見てこなかった人に、いきなり仏の世界に目を向けてといっても、なかなか難しかったのだろう。

たしかに経典の中には、池があり、鳥がうたい、花が咲き、穏やかな理想郷が描かれている。なぜ仏陀や経典の翻訳者たちは、そのような世界を描く必要があったのだろう。それは他ならない、そこに描かれるような世界こそが、少なくとも2千年ほど前の人々にとっては、理想的な誰もが憧れるような世界ではなかったのだろうか。おそらく仏陀や翻訳者たちは、苦しみの多い、大変な人生を生き抜いたのち、このような世界だったなら、心が休まる、平穏になれる世界を示したかったのではないだろうか。そこに眼差しを向けずに、単純に経典に解かれる情景のみに拘束されて「仏さまの世界」を語ったのなら、それこそ、とらわれのみの有の世界となってしまうのではないかと、この事例以後、心がけて語るようにしている。まさに筆者にとって、日常の元気なうちから、心の目で大切なものを見ること、感じることを修養しつつ生きることがいかに尊いかを教えてくれた出会いであった。

4 患者が「死を語る」ということ

「死後の世界はあるのか?」「死後とはどんなところだろうか?」「この私が行けるのか?」「生きることには、どんな意味があるのか?」等々、これらスピリ

 

チュアルな問題といわれる設問を、ターミナル期に関わっていても何も問われない医療従事者がいたり、それを頻繁に問われる看護師がいたりする。これは、どういう理由なのだろうか?上記のような設問を、元気な時に私たちは、笑いごとのように否定的に語ったりする。しかしターミナル期にある患者の言葉は、真にそれを求める魂からの言葉ともいえるだろう。そしてそれはどのような人に対して吐露されるのか?束の間の関わり合いといえども、患者は真剣に関われると信頼を寄せる相手だからこそ、これらの問題を投げかけるのではないだろうか。いわば、これらの設問には、声にはならないが「あなたのことを信頼しているからこそ尋ねるのですが」という前置きが隠されていると受け取ってもいいと思う。もちろん、時には「こういう質問をして、試してやろう」といった気持ちが隠されているときもあるだろう。

だからこそ、「死後の世界は、どんな世界なのでしょうね?」と尋ねられた医療従事者が、「あかね雲みたいな世界かもしれませんね」と言ったものなら、「先生がそう言うなら、私もあかね雲の世界に旅立って行こうと思います」と、同調する言葉を返してくるほどだ。その大前提に立つのは、医療行為に対する技術や人柄による信頼性が重要であることを、忘れてはならない。

医療従事者側が、死後の世界を認めようが、認めまいが、専門職として一人の人間の人生の最期に関わろうというのであれば、自分の主義や思想は傍らにおいても、患者の心情を支え、不満の残らない状態で支えられたならいいだろうと考える。そのためには、自身の考えとは異なる考え方であったとしても、先ずは寛容に受け入れるというのは、根本的な専門家としての前提ではないだろうか。患者が「こうであったらいいのになあ」と発した場合は、なかばオウム返しのようでも「そうであったらいいですね」と、患者の言葉から見える死に対する希望や願いを、受けとめる姿勢が、心の安寧につながるのだろうと考えている。

5 死の世界を語る表現

死んだ後の世界は、どのように表現したらいいだろう。日本人はしばしば「あの世」と言うが、あの世は、良い意味合いが込められた表現だろうか。

「天国」はキリスト教で、仏教だと「極楽」「浄土」「彼岸」「仏国」、さまざまな言葉に微妙な差異があるようだ。宗教的な感覚に疎い日本人は、その使用方法は、使う人の受け止め方によって異なるようだ。場合によっては、患者があの世へ行くのを「怖いこと、恐ろしいこと」と感じているのにもかかわらず、医療従事者の側は、良き世界に旅立つ思いで「あの世」と使っている場合などがある。そんな場合は、どういう言葉を選んで用いたらいいだろう。

特定の宗教の言葉や、何か文化的なことを思いはかって、考えすぎた言葉の用い方は反って意思のすれ違いを生みやすいのではないかと考えられる。私は患者から、「死の向こう側(死後)の世界とは、どう考えたらいいですか?」「どう思い描いたらいいですか?」という質問に対しては、次にあげる二通りの表現を用いている。

一つは「あなたのお母さんのいる世界」という表現だ。これは仏教経典にも仏さまの心遣いを例えるとき、ブッダはしばしば「仏心とは、母の心のような」という表現を用いている。キリスト教における聖母マリアのように、仏教でも母の愛情の深さは、普遍的にうなずくことのできる、最も気高い愛情のしるしであるといえる。しかし時には「母と子」という愛情の関係も一般的ではない関係の母子もあることは、注意しなければならない。苦い思いをした事例に、「仏の世界はどのようなところか?」という質問を末期がんの初老の男性から受けた時のことだ。筆者はいつものように「お母さんのおられる世界」と吞気に答えたところ、男性は「母のいるような世界なら、行きたくはない」と苦言を返してきた。「どうして?」と尋ねると、男性の妻から「この人(夫)は、幼年期に母親に捨てられるように、他家に養子に出されたのです。その為に母親に恨みを感じて生きてきたのです。」 と注釈されて、一度出た言葉を戻すことのできない苦しさにさいなまれた経験がある。筆者は患者との面談前に、担当スタッフから、最低限のライ

フヒストリーを聞かせてもらうようにしているが、それでも「母との関係性」は、注意深く尋ねるように、この出来事の以後は心がけている。

もう一つは「あなたの大切な人々がいる世界」という表現だ。筆者の接する最も多い世代は、60代から80代前半位までの方々が多いのだが、既に父、母のいずれか、または両親を亡くされている場合が圧倒的に多い。もちろん親の健在の場合もある。誰かとの死別の体験をしていない人の方が少なく、誰かしら大切な人との死別の体験はしている世代といえよう。そのような場合は、「あの人」と限定して思い起こすことのできる「大切な人」と、亡くなったのちの世界で再会できると、受け止められたなら、死別の苦しみからは、いささかなりとも緩和されることだと考えられる。その時大切なことは、そういったことを伝えている私たちも、元気なように見えるけれど「いずれ何年かの後に、必ずそちらに旅立っていきます」ということを伝えることだ。そのことで「あなただけの死」ではなく、共に死に向って生きている「いのち」だと、感じてもらうことができるものだ。「大切な人のいる世界」という表現は、人と人とが関わりあって生きる人間の特性として、「私だけが終わっていく死」のネガティブな受け止め方ではなく、

「大切な人とまた会える死」というポジティブな死の受け止め方を与えてくれると考えることが可能といえる。

さらに「死の世界はどんなところでしょうね?」という質問を受けた時には、患者のベッドサイドで歌を口ずさんでみせるとう表現方法もある。

「日本人の大切にしてきた心の情景が、仏さまの世界を思い起こさせてくれる歌がありますよ。ちょっと歌ってみましょうか」と、言葉をかける。

「ふるさと」 作詞:高野辰之、作曲:岡野貞一

1) うさぎ追いし かの山 小ぶな釣りし かの川夢は 今も めぐりて 忘れがたき ふるさと

2) いかにいます 父母 つつがなしや 友がき雨に 風に つけても 思いいづる ふるさと

3) こころざしを 果たして いつの日にか 帰らん山は 青き ふるさと 水は 清き ふるさと

思い出す自然の情景、大切な父母や友達、これらの歌詞には、大きな声を出す必要はなく、そっと患者の耳に聞こえるほどの声で口ずさめば、その情景はメロディにのって患者の心に届くと思われる。そしてこれからおもむく世界も「こうであったらいいな」と願わずにはおられない希望を持たせてくれる、歌には不思議なはたらきがあるといつも感じている。

結びとして

社会教化はさまざまな方法論を模索してきた。社会教化が対象とする現代の問題、人びとの声は多岐多様である。それだけに多様な方法論の実践が必要とされる。さまざまな実践の積み重ねを集積して宝庫とし、さらに有益な方法論を構築していかなければならないと考えられる。とりわけ東日本大震災以降、スピリチュアルケアワーカー、臨床宗教士、臨床仏教士等、心のありようにふれる臨床的な活動が認定資格としての展開も見せている。これはひとえに宗教的な言説が、求められていることの実証に相違ない。しかしそこでは日本人が宗教的な言説や宗派の特別な言葉を使わずとも、自然にその精神性をもって対処してきた「いのち」や、生と死の問題が、改めて普遍的でさまざまなアプローチから必要とされていると考えられる。欧米社会で「メメント・モリ(死を忘るることなかれ)」の辞があるように、仏陀も「生まれてきたという縁によりて死がある」と説き、死を正面から見つめることによって「いのちを生きること」を説かれた。これは人間

として、真実、必要だからこそ、こうした思索がなされてきたと疑うことはない。

一人の臨床家として、大切ないのちに寄り添う人々ともに、実践のネットワークを共有し、展開していけたらと望んでいる。

小山典勇先生への学恩に感謝をこめて 合掌

1) 小山典勇「社会教化とは何か〜その10年を省みて、仏教研究・教育の視点として

〜」大正大学研究紀要86、

2) 多くの事例は、拙著「また会える[さようなら]〜末期がん患者に仏教は何ができるのか〜」佼成出版2010にて表現した。

〈キーワード〉 死の臨床、ターミナルケア、社会教化、心のケア


"죽음의 임상"에서 얻은 이야기와 불교

智山学報 第65輯
"죽음의 임상"에서 얻은 이야기와 불교
「死の臨床」から得られる語りと仏教
衽衲社会教化の実践の事例から衽衲
佐藤 雅彦

==
はじめに
 「社会教化」の問題群のなかの実践//
「社会教化」とは何か、どのような内容を指し示すのか、これらの地盤固めは、
小山典勇先生らによって議論の上で積み重ねられてきた1)。総じていえば社会教
化には、現実の社会に生じている問題と仏教がどのように関わっていくかという、
理念や指針、方法論が求められていることは言うまでもない。筆者は、そこにい
くつかのテキストが認められると考える。その代表とされるものは、いうまでも
なく仏教経典だろう。しかしそれに並んで重要と考えられるのは「ひとびとの
声」だ。無論、声の確かめ方は文章や、直接、聴覚に届いた声、多様にある。つ
まり心の表現としての「声」に耳を傾ける、注意を払うことは、何が仏教に求め
られているか、何が問題とされているのか聴き取る姿勢であり、経典にみえるブ
ッダの教えと、その声を結ぶ役割を担うことこそ、教化者のつとめといえるので
はないだろうか。/
多くの仏教研究は、仏教経典やその思想を扱うことが主たる領域を占めてきた。
しかしそれぞれの時代において、その各々の時代を生きることを「現代」として
考えるとき、「ひとびとの声」を聴きとろうという努力や、社会の声に耳を傾け
る努力をしなければ、我々は、仏教を学んでいても、仏教を実践するものとはい
えないのではないだろうか。言い換えれば、社会教化は、社会に生きる人々の声
を聴き、その声に仏教の立場から応えようとする作業の蓄積ともいうことができ
るのではないだろうか。
すでにさまざまな人文研究においては、「声を聴く」という方法論は、その対
象となる当事者や関係する人々に「語り」(narrative)という行為を通して、広く用
いられている。筆者は長年、「こころのケア・ボランティア」として末期がん患
者や、さまざまな疾患にある患者の病床を訪問し、多様な患者の「語り」から学
ばせていただいてきた2)。本稿ではそこから得られたことと仏教が、どのように
関わっていくかということを、問題意識として述べてみたい。これらの作業は、
具体的な、もしくは実践的な社会教化の事例と位置付けられると考える。/
==

「사회교화」란 무엇인가, 어떠한 내용을 가리키는지, 이러한 지반 굳은 것은, 오야마 노리 유키 선생님들에 의해 논의 위에서 쌓여 왔다1). 전체적으로 말하면 사회교화에는 현실 사회에서 발생하는 문제와 불교가 어떻게 관련되어 가는가 하는 이념이나 지침, 방법론이 요구되고 있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필자는, 거기에 몇개의 텍스트가 인정된다고 생각한다. 그 대표로 여겨지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불교 경전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에 나란히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한사람의 목소리'다. 물론, 목소리를 확인하는 방법은 문장이나, 직접, 청각에 도착한 목소리, 다양하게 있다. 즉 마음의 표현으로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무엇이 불교에 요구되고 있는지, 무엇이 문제로 되고 있는지 듣는 자세이며, 경전으로 보이는 부처 의 가르침과 그 목소리를 잇는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야말로 교화자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많은 불교 연구는 불교 경전과 그 사상을 다루는 것이 주된 영역을 차지해 왔다. 그러나 각각의 시대에 있어서, 그 각각의 시대를 살 것을 「현대」라고 생각할 때, 「한사람의 목소리」를 듣고자 하는 노력이나, 사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 불교를 배우고 있어도 불교를 실천하는 것이 아닐까. 즉 사회교화는 사회에 사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 목소리에 불교의 입장에서 응하려 하는 작업의 축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이미 다양한 인문 연구에서 '목소리 듣기'라는 방법론은 그 대상이 되는 당사자나 관계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기'(narrative)라는 행위를 통해 널리 사용되고 있다. 필자는 오랜 세월, 「마음의 케어 자원봉사」로서 말기암환자나, 여러가지 질환에 있는 환자의 병상을 방문해, 다양한 환자의 「말하기」로부터 배워 왔다2). 본고에서는 거기에서 얻은 것과 불교가 어떻게 관련되어 가는가를 문제의식으로 말하고 싶다. 이러한 작업은 구체적이거나 실용적인 사회교화의 사례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死の臨床」から得られる語りと仏教衽衲社会教化の実践の事例から衽衲
佐藤 雅彦
==
はじめに 「社会教化」の問題群のなかの実践
「社会教化」とは何か、どのような内容を指し示すのか、これらの地盤固めは、小山典勇先生らによって議論の上で積み重ねられてきた1)。総じていえば社会教
化には、現実の社会に生じている問題と仏教がどのように関わっていくかという、理念や指針、方法論が求められていることは言うまでもない。筆者は、そこにいくつかのテキストが認められると考える。その代表とされるものは、いうまでもなく仏教経典だろう。しかしそれに並んで重要と考えられるのは「ひとびとの声」だ。無論、声の確かめ方は文章や、直接、聴覚に届いた声、多様にある。つまり心の表現としての「声」に耳を傾ける、注意を払うことは、何が仏教に求められているか、何が問題とされているのか聴き取る姿勢であり、経典にみえるブッダの教えと、その声を結ぶ役割を担うことこそ、教化者のつとめといえるのではないだろうか。
多くの仏教研究は、仏教経典やその思想を扱うことが主たる領域を占めてきた。
しかしそれぞれの時代において、その各々の時代を生きることを「現代」として考えるとき、「ひとびとの声」を聴きとろうという努力や、社会の声に耳を傾ける努力をしなければ、我々は、仏教を学んでいても、仏教を実践するものとはいえないのではないだろうか。言い換えれば、社会教化は、社会に生きる人々の声を聴き、その声に仏教の立場から応えようとする作業の蓄積ともいうことができるのではないだろうか。
すでにさまざまな人文研究においては、「声を聴く」という方法論は、その対象となる当事者や関係する人々に「語り」(narrative)という行為を通して、広く用いられている。筆者は長年、「こころのケア・ボランティア」として末期がん患者や、さまざまな疾患にある患者の病床を訪問し、多様な患者の「語り」から学ばせていただいてきた2)。本稿ではそこから得られたことと仏教が、どのように関わっていくかということを、問題意識として述べてみたい。これらの作業は、具体的な、もしくは実践的な社会教化の事例と位置付けられると考える。
1 「死」を学ぶ時代から問う時代へ
1977年、日本死の臨床研究会は発足した。どんなに治療しても死ななければならない人間のクオリティ・オブ・ライフ(Quality of Life)を考えるためにも、治療に偏重した医療からケアを尊重する医療へと変遷していく中で、さまざまな職種の人々が患者のために「死」を学ぶ研究会が立ち上がったのは、当時、画期的であり時代のニーズでもあった。当時は、公の会場で「死」を表面に出して会合を持とうということ自体、抵抗のあった時代だったという。しかし今日、これに類した学会、研究会はあまたのごとく存在する。これはいかに死の問題が、個人的な問題から多くの人々が共有すべき社会の問題であり、死を語ることがタブーとされた時代から、死を学ぶ時代へと変化してきたことの顕われと受け止められよう。
さらには、これから先20年、団塊の世代の人々が老年を迎えていく時代は、日本人が未曾有の死者が増加する時代といわれ、否応なく死と向き合わねばならない時代が、すでに到来しているということを覚悟してかからなければならない。
死んだらどこに行くのだろうか?死後の世界はあるのか?この私の人生にはどんな意味があったのだろうか?なぜこんな病気にかかり、死んでいかなければならないのだろうか?今日これらの問題は、「スピリチュアル(spiritual)な問題」としてくくられる。医療に関わる人々は、死を間近にした人間には、上記のようなスピリチュアルな問題が、心の安心の上で重要な意味を持つということは、すでに知られるところのものである。
一方、人生の終わりにあたっての備えをする活動は「終活」という言葉を用いて、すっかり市民権を得たようで、今やそうした類の雑誌が、コンビニに並べられている。相続、生命保険、お葬式、お墓等についての情報や学びを得るための媒体がその具体的な内容のようだ。また死後に大切なことを伝えるための「エンディング・ノート」等も、一般的な文具店でも手にすることができるようになった。しかし、相続、葬儀、お墓等、そこで取り上げられている内容は、経済に関わる問題が目につき、もっと精神的なもの、心のあり方等については、おおよそ触れられていないように感じ、何か足りないような気がするのは、筆者だけだろうか。前述したスピリチュアルな問題は、おおよそ取り上げられてはいない。自分にとっての死、自らの死の問題は、各人が各々の立場で自らのいのちの問題として、問いかける時代と言ってもいいだろう。そこには仏教が支える、助けになるというような必要はないのだろうか。
2 心のケア・ボランティアとして
「心のケア・ボランティア」という名称を使いだして20年近くの歳月が経過する。さまざまな学びの場や、看護師として勤めていた妻の関係から、数名の医療従事者が「この患者さんには宗教家のケアが必要」と推察した場合、患者本人に
「こんなお坊さんがいるけれど会ってみますか?」と尋ねる。患者が「会いたい」と意思表示した場合、筆者に連絡が届くという仕組みだ。緩和ケア病棟もあれば、一般病棟や在宅の場合もある。
筆者の場合、仏教の教えを根本的な立場として聴聞するが、自分の所属する特定の宗派の布教や伝道をする目的ではなく、幅広く仏教思想を基にする態度で接することを主眼にしている。「宗教」「仏教」の言葉を用いると、特定の宗教の布教をされるのではないかという、懸念を持たせないようにするため「心のケア・ボランティア」という名称を用いている。ここでは以下に「心のケア・ボランティア」の実践活動を通し、患者からの語りを通して得られた、いくつかの学びを指摘する。
3 患者の語りから得られる仏教への問いかけ ①「なぜ私が」という根本的な問いかけ
「なぜ私が、こんな病気にならなければならないのか?」この問いかけは、もっとも医療従事者を窮する問いかけといわれる。患者ももちろんだが、若い看護師などから「こんな病気になぜなっちゃたんだろう」と言われて、なんとも慰めることもできなかったという言葉は、しばしば聞かれることだ。
さらにこの苦しみは、胃ガンや肺ガンといった、完治の難しい病気に出会ってしまったという問題だけではなく、思いも寄らぬ時期、タイミングに病気と出会ったことから生じる場合もある。新しい事業を興したばかりであったり、やりかけていた仕事が、あと一歩で成し遂げられる時期であったり、子育て盛りの婦人であったり、どうして人生の「この時期に病気になってしまったのか」と、悔しさや失望にみまわれるようだ。まさに人が生きるということには、こうした「予期せぬ」時期に狙ったようにやってくる苦しみがつきものだ。
病気の受け止め方というものは「親もガンだったし、同じ体質だから仕方がない」「いつかは、親と同じ病気になるのだろう」と、自分の体質について予め覚悟していて、病気になることは自然と受け入れられても、その発症する時期については「なんで今この時期に病気にならなければならないんだ」と、思い通りにならない人生に落胆する人は多いものだ。せっかくここまで懸命に生きてきたのに、なぜこの私が病気にならなければならないのかと、積み重ねてきた人生の努力に対して、報われないことと悲観して、悲しさや恨みさえ感じる人もいるものだ。
「生老病死」の苦しみを仏陀は説いたというが、
このような病気との出会いを、仏陀は「どのように受け止めよ」と教えたのだろうか。
筆者は、患者からの病気との出会いについて問われたとき、縁の話をすることにしている。
「つらいご縁と出会いましたね」と声をかける。すると
「こんなつらい出来事も『ご縁』というのですか?」
「私は健康にご縁が無かったのだと思っています」
患者は、しばしば自らのご縁に対する考え方を聞かせてくれる。どうやら仏陀の説かれた「ご縁」と世間一般的に理解されている「ご縁」には、いささか異なりがあることに、よく気づかされる。一般的には、良いこと、好ましいことに出会ったとき「ご縁がある」と言葉が用いられているように感じる。しかしこの良いこと、好ましいこととは、「誰にとって」良いこと、好ましいことなのだろうか。「私にとって」の良いこと、好ましいことであり、私の都合を中心にした考え方に他ならない。これに対して仏陀の考え方は、そういう自分を中心にしたものの見方ではないと教示されている。つまり現代の日本人の多くが用いている「ご縁」という言葉の使い方は、本意を歪めた「聞きかじり」の受け止め方であるといわざるを得ない。
仏教では、すべての成り立ちは「因縁」によると考えることはいうまでもない。
厳密には「因縁」は「因」と「縁」とに分けて考えられる。これは直接的に関わりあう「因」と、間接的に見えないちからで関わりあう「縁」との、結びついたはたらきを「因縁」と示す。
 
具体的には、どう考えてもあれだけタバコを吸ったのだから仕方ないというような人が肺ガンになった場合、その原因を考えると、確かにたくさんタバコを吸ったということは、直接的な原因となる「因」であるにちがいない。しかしこの時期にこのタイミングで発症したというのは、わからないけれど出会ってしまった「縁」のはたらきと受け止めることができるだろう。
このことは、私たちは、目に見えない縁のはたらきがあることを知らずに、目に見える原因のみを見つけようとし「なぜ?」「どうして?」と心を焦燥させる。さらには、これだけタバコを吸ったのだから、肺がんになって当たり前だと、その原因が明確なら納得できるけれども、酒もタバコもやらないこの私が、なんでガンにならなければならないのか、と直接的な原因が究明できないとなると、病気にかかったことそれ自体が納得できなくなってしまうものだ。私たちは、現代の科学の尺度でものを見、考える生活をしていると、何事も「原因」を目に見える形で確かめられないと、納得できない、気がすまない生き方になってしまいがちだ。しかしここでいう原因は、仏教の考え方からすれば、本来の物事の成り立ちの、一面的な意味だけしか指し示していないことになる。「どうしてかわからないけれど出会ってしまう」というご縁の考え方を受け入れていくとき、つらく思い通りにならない病気との出会いも「ご縁」と受け止めることが、きっとできることだろう。
仏陀の示したご縁の考え方を、もう少し身近なものにするために、患者の前では、患者自身の人生に例えて話をする場合もある。
振り返れると、私たちが生まれてきて、こうして今、存在するすべてのことは、みな因縁によって成り立っているというのだが、それはしっかり目に見えること、理路整然と納得のできることばかりだったろうか。父と母の結びつきから私たちは誕生した。これは目に見える原因だ。しかし父と母は、どうして出会ったのだろうか。これは目に見えないご縁といえる。いや両親は見合いで、必然的に結婚したのだという場合もある。仲人が引き合わせたという直接的な原因のなせることという。しかしなぜ、仲人は星の数ほどいる男女の中から、父と母とを選んだのだろうか。これもご縁のはたらきといえるはずだ。
自ら努力をして、人生の成功を勝ち取ったという人も、実は、見えない不思議なご縁の力に、支えられて生きてきたのではないだろうか。ご縁とは、元来、そういう不思議な出会いのはたらきをもつものなのだ。
93 )
「なぜ私が、病気になってしまったのだろうか?」
この問いかけの答えは「わからないけれど、そのようなご縁をいただいた」としか言うことができない。
わからないことをなんとかわかるように探究する努力は、無駄ではないと思う。
しかしわからないことを、何とかわかるようにしようとして、苦しみを増大させている人がいることも事実だと思われる。人が生きるということは、わからないけれど出会う「ご縁」のはたらきが大きく作用していることを認めることができるのならば、わからないことはわからないこととして謙虚に受け入れようとすることこそ、心に安楽を引き起こすことにつながると考えられる。人生を三十年生きた人も、八十年生きた人も、その間、私たちが学ばせていただいたことは、この広い世界の、宇宙の営みのほんのわずかなことでしかないのだ。謙虚にわからないことを、認める勇気をもつことこそ、生きる智慧というものではないだろうか。
②仏教に答えがあると知っている人々
たとえ自分の病気を受け入れられたとしても、迫りくる「死」については、病気の受容とは、また別の感慨があると思われる。宗教的なニーズが感じられるからこそ「心のケア・ボランティア」として筆者が呼ばれるわけだが、筆者は患者に会うと、まず最初にある質問を必ずすることにしている。
「どうしてお坊さんに会いたいと思ったのですか?」と尋ねるのだ。すると多くの60代から80代前半くらいの患者が、同じような言葉を返してくることに気付かされる。
「もっと仏教の話を聴いてみたかった」
「もっとお寺の行事などに参加して、仏教の教えを知りたかった」
「これから自分は、お経を読まれる立場(死んでお葬式にお経をあげられるの意味)になってしまうのだが、読まれるお経なら、そのお経の意味内容を一度くらい、自分も読んだり、たずねたりしたかった」等々。
おしなべて「仏教の何々がしたかった」というのだ。これは死期が迫った患者にとって、日本人として特別仏教の信仰をもっているとはいえないながら、求めるものの答えが仏教の中にあると感じている。「いのち」の瀬戸際の大事なところで、尋ねたい答えが仏教の中にあると察している、知っているということの顕われといえるのではないだろうか。しかし死に至るような病気や、寝たきりの状
94 )
態に至るまで、まだ自分には時間がある、今はこの仕事や趣味など、やることがあるので、まだ求めなくても後からで大丈夫だろうと、大切なものを求めたいと思っていても、大切なことを後回し、先送りにしてきたことの結果が、言わしめる言葉ではなかろうかといつも感じるのだ。
そのように感じるからこそ、元気なうちに「いのち」にとって、大切なことを考える時間、学ぶ時間が設けられたらと考えるのだ。いわば昨今の終活の言葉には、このような視点が欠けていると考える。しかし、そんなことは必要ない、なぜなら死はすべての終わりなのだから、精一杯、その時が来るまで楽しんだらいいじゃないか、死のことなんか、考える必要はないと考える人々もいるのは、もちろん当然のことだ。
③死んだら「無」になるのか
「仏教は[無]を説く教えだ」、しばしば耳にする言葉だが、これも「ご縁」同様に、聞きかじりの仏教語を知っているだけなのか、本来の意味を理解しているのか、二分されるところだ。医療従事者からも、この問いかけに付随して「どのように死のことを説明したらいいのか」という質問は、頻繁に受ける質問だ。
はじめに「仏教は無を説くのだから、死後の世界も何も無い」というのは、まさに聞きかじりの理解であり、混乱を招く表現だ。
確かにブッダは「無」を説いた。しかし「無」という漢字を「ない(nothing)」と受け止めるところから間違いは生じている。後世、仏陀の言葉が弟子によって編纂され、経典が成立し、さらにインドから中国へ伝えられていく。そのプロセスでブッダの時代の言葉・サンスクリット語は、中国語に翻訳されていく。そこで仏典の漢訳翻訳家たちは思想に相当する漢字を当てはめるという作業をする。そこでは「無」だけが説かれるのではなく、「有」に対する言葉として「無」が当てはめられたわけだ。では何を「有、無」といったのだろうか。仏陀が有るとか無いとか言いたかったのは、「煩悩」や「迷いの心」だ。また仏教以前の思想を否定していくために、しばしば「無」は説き示されている。もっと平易に言えば、仏陀が無という言葉を用いて表現したかったのは、「とらわれを離れた世界」を「無」の語を使って言いたかったといってよいと思われる。煩悩という執着、とらわれから離れた世界であり、こだわりや迷いを離れた世界を、無を使って言いたかったのだ。元来それは、死ななければ得られないというような世界ではなく、この世においても煩悩、執着を捨て去ることで、無の世界を体現できることを言われたのだ。
とりわけもっとも古い仏教の教えでは、ブッダは「死後の世界」についても、何も説かれなかった、と受け止められる説もある。しかしそれは、ブッダの最大
の関心事は、いかに今を生きることから苦しみを除去し、悟りを開くことであり、苦しみからの解脱であり、死んでからどうこうなるということよりも、「今の生き方」にその教説があふれていたからともいえる。その後、誰もがみな救われる道を求めた「大乗仏教」では、この世において解脱すること、悟りを開くことのできなかった人間に対して、死後、仏の世界に生まれて、それから悟りを開かれる道が、ブッダの教えとして示し残された。したがってブッダは「確かに無を説くが、死後が何もない世界と示されたわけではない」と理解すべきだろう。
④「仏さまの世界」を見る方法
ここで事例をひとつ紹介したい。
患者は、80代半ばの末期がんの男性。緩和ケアに勤務する医師からの電話は「仏さまの世界を見たい」と言っている患者がおられるので来てほしい、という要請だった。80代半ばという年齢や病状から、いつ変化があってもおかしくないので、なるべく早く来てほしいという。早速その緩和ケアを訪問すると、男性は個室のベッドに横になっていた。やせ衰えた面長な顔に大きな目でギョロッと、筆者を見つめてきた。
現役で働いていた頃は、大きな造船会社で、船の設計に長年携わってきたという。その性格は設計家らしく、何ごともきちっと自分で掌握できていないと気がすまない性分で、病気に関しても自分の病状、これから予測される容態、服用している薬の効き目や副作用にいたるまで、すべて自分の承知の上で、管理していないと嫌だということだった。そのために眠気を伴う鎮痛剤を拒否し、充分に痛みは緩和されているとはいえない状態だった。自分に迫ってきた死のことも、自分の納得のいくように心得ておきたいという欲求から「死後の世界、仏さまの世界を、どうしたら見ることができるか」という質問を、筆者に投げかけてきた。自己紹介の後、経典のなかに書かれている表現で、極楽の蓮の花や池、さえずる鳥や空、そういった世界から思い描いたらどうかと、話した。しかしそれは「空想を思い描くだけの世界に感じられる。現実に見たいと思っても、実感が伴わない」と反論してきた。経典の中に示されてある極楽浄土の観察の方法で、日の沈
み行く西方に思いを凝らす方法を説いても「西の方角に進んだら、地球を一周し
96 )
てもとに戻ってしまうだろう」と言う始末だ。この男性は、目に見えるものとして証明してほしいというのだ。死の世界のあちら側のことは、今、生きてこちら側にいる我々は、誰も行っていないのだから、それを見ることはできない、と私は、現実に戻して話をすることにした。「大切なことは、こういう世界であったらいいな、あってほしいなと「願いながら生きる」ことではないでしょうか。仏さまの世界を見ようとするならそれは、この目ではなく、私たちの「心の目」を開き、「心の目」を仏さまの方向に向けることによって、見ようとすることでは
ないでしょうか。」 こう続けて話していくと、男性は、「そうか、心の目でね」と、静かにささやき眠りだしてしまった。
人間は、死の間際になって、いきなり仏さまを探せといっても、なかなか見出すことのできるものではない。私たちの生きる世界というものは、目に見えるものと、目には見えないけれど、確かにあるな、あってほしいな、というような「あやふやな世界」があるものだ。この男性のように、目に見える、計算、証明のできる「科学」という物差しでしかものを見てこなかった人に、いきなり仏の世界に目を向けてといっても、なかなか難しかったのだろう。
たしかに経典の中には、池があり、鳥がうたい、花が咲き、穏やかな理想郷が描かれている。なぜ仏陀や経典の翻訳者たちは、そのような世界を描く必要があったのだろう。それは他ならない、そこに描かれるような世界こそが、少なくとも2千年ほど前の人々にとっては、理想的な誰もが憧れるような世界ではなかったのだろうか。おそらく仏陀や翻訳者たちは、苦しみの多い、大変な人生を生き抜いたのち、このような世界だったなら、心が休まる、平穏になれる世界を示したかったのではないだろうか。そこに眼差しを向けずに、単純に経典に解かれる情景のみに拘束されて「仏さまの世界」を語ったのなら、それこそ、とらわれのみの有の世界となってしまうのではないかと、この事例以後、心がけて語るようにしている。まさに筆者にとって、日常の元気なうちから、心の目で大切なものを見ること、感じることを修養しつつ生きることがいかに尊いかを教えてくれた出会いであった。
4 患者が「死を語る」ということ
「死後の世界はあるのか?」「死後とはどんなところだろうか?」「この私が行けるのか?」「生きることには、どんな意味があるのか?」等々、これらスピリ
 
チュアルな問題といわれる設問を、ターミナル期に関わっていても何も問われない医療従事者がいたり、それを頻繁に問われる看護師がいたりする。これは、どういう理由なのだろうか?上記のような設問を、元気な時に私たちは、笑いごとのように否定的に語ったりする。しかしターミナル期にある患者の言葉は、真にそれを求める魂からの言葉ともいえるだろう。そしてそれはどのような人に対して吐露されるのか?束の間の関わり合いといえども、患者は真剣に関われると信頼を寄せる相手だからこそ、これらの問題を投げかけるのではないだろうか。いわば、これらの設問には、声にはならないが「あなたのことを信頼しているからこそ尋ねるのですが」という前置きが隠されていると受け取ってもいいと思う。もちろん、時には「こういう質問をして、試してやろう」といった気持ちが隠されているときもあるだろう。
だからこそ、「死後の世界は、どんな世界なのでしょうね?」と尋ねられた医療従事者が、「あかね雲みたいな世界かもしれませんね」と言ったものなら、「先生がそう言うなら、私もあかね雲の世界に旅立って行こうと思います」と、同調する言葉を返してくるほどだ。その大前提に立つのは、医療行為に対する技術や人柄による信頼性が重要であることを、忘れてはならない。
医療従事者側が、死後の世界を認めようが、認めまいが、専門職として一人の人間の人生の最期に関わろうというのであれば、自分の主義や思想は傍らにおいても、患者の心情を支え、不満の残らない状態で支えられたならいいだろうと考える。そのためには、自身の考えとは異なる考え方であったとしても、先ずは寛容に受け入れるというのは、根本的な専門家としての前提ではないだろうか。患者が「こうであったらいいのになあ」と発した場合は、なかばオウム返しのようでも「そうであったらいいですね」と、患者の言葉から見える死に対する希望や願いを、受けとめる姿勢が、心の安寧につながるのだろうと考えている。
5 死の世界を語る表現
死んだ後の世界は、どのように表現したらいいだろう。日本人はしばしば「あの世」と言うが、あの世は、良い意味合いが込められた表現だろうか。
「天国」はキリスト教で、仏教だと「極楽」「浄土」「彼岸」「仏国」、さまざまな言葉に微妙な差異があるようだ。宗教的な感覚に疎い日本人は、その使用方法は、使う人の受け止め方によって異なるようだ。場合によっては、患者があの世へ行くのを「怖いこと、恐ろしいこと」と感じているのにもかかわらず、医療従事者の側は、良き世界に旅立つ思いで「あの世」と使っている場合などがある。そんな場合は、どういう言葉を選んで用いたらいいだろう。
特定の宗教の言葉や、何か文化的なことを思いはかって、考えすぎた言葉の用い方は反って意思のすれ違いを生みやすいのではないかと考えられる。私は患者から、「死の向こう側(死後)の世界とは、どう考えたらいいですか?」「どう思い描いたらいいですか?」という質問に対しては、次にあげる二通りの表現を用いている。
一つは「あなたのお母さんのいる世界」という表現だ。これは仏教経典にも仏さまの心遣いを例えるとき、ブッダはしばしば「仏心とは、母の心のような」という表現を用いている。キリスト教における聖母マリアのように、仏教でも母の愛情の深さは、普遍的にうなずくことのできる、最も気高い愛情のしるしであるといえる。しかし時には「母と子」という愛情の関係も一般的ではない関係の母子もあることは、注意しなければならない。苦い思いをした事例に、「仏の世界はどのようなところか?」という質問を末期がんの初老の男性から受けた時のことだ。筆者はいつものように「お母さんのおられる世界」と吞気に答えたところ、男性は「母のいるような世界なら、行きたくはない」と苦言を返してきた。「どうして?」と尋ねると、男性の妻から「この人(夫)は、幼年期に母親に捨てられるように、他家に養子に出されたのです。その為に母親に恨みを感じて生きてきたのです。」 と注釈されて、一度出た言葉を戻すことのできない苦しさにさいなまれた経験がある。筆者は患者との面談前に、担当スタッフから、最低限のライ
フヒストリーを聞かせてもらうようにしているが、それでも「母との関係性」は、注意深く尋ねるように、この出来事の以後は心がけている。
もう一つは「あなたの大切な人々がいる世界」という表現だ。筆者の接する最も多い世代は、60代から80代前半位までの方々が多いのだが、既に父、母のいずれか、または両親を亡くされている場合が圧倒的に多い。もちろん親の健在の場合もある。誰かとの死別の体験をしていない人の方が少なく、誰かしら大切な人との死別の体験はしている世代といえよう。そのような場合は、「あの人」と限定して思い起こすことのできる「大切な人」と、亡くなったのちの世界で再会できると、受け止められたなら、死別の苦しみからは、いささかなりとも緩和されることだと考えられる。その時大切なことは、そういったことを伝えている私たちも、元気なように見えるけれど「いずれ何年かの後に、必ずそちらに旅立っていきます」ということを伝えることだ。そのことで「あなただけの死」ではなく、共に死に向って生きている「いのち」だと、感じてもらうことができるものだ。「大切な人のいる世界」という表現は、人と人とが関わりあって生きる人間の特性として、「私だけが終わっていく死」のネガティブな受け止め方ではなく、
「大切な人とまた会える死」というポジティブな死の受け止め方を与えてくれると考えることが可能といえる。
さらに「死の世界はどんなところでしょうね?」という質問を受けた時には、患者のベッドサイドで歌を口ずさんでみせるとう表現方法もある。
「日本人の大切にしてきた心の情景が、仏さまの世界を思い起こさせてくれる歌がありますよ。ちょっと歌ってみましょうか」と、言葉をかける。
「ふるさと」 作詞:高野辰之、作曲:岡野貞一
1) うさぎ追いし かの山 小ぶな釣りし かの川夢は 今も めぐりて 忘れがたき ふるさと
2) いかにいます 父母 つつがなしや 友がき雨に 風に つけても 思いいづる ふるさと
3) こころざしを 果たして いつの日にか 帰らん山は 青き ふるさと 水は 清き ふるさと
思い出す自然の情景、大切な父母や友達、これらの歌詞には、大きな声を出す必要はなく、そっと患者の耳に聞こえるほどの声で口ずさめば、その情景はメロディにのって患者の心に届くと思われる。そしてこれからおもむく世界も「こうであったらいいな」と願わずにはおられない希望を持たせてくれる、歌には不思議なはたらきがあるといつも感じている。
結びとして
社会教化はさまざまな方法論を模索してきた。社会教化が対象とする現代の問題、人びとの声は多岐多様である。それだけに多様な方法論の実践が必要とされる。さまざまな実践の積み重ねを集積して宝庫とし、さらに有益な方法論を構築していかなければならないと考えられる。とりわけ東日本大震災以降、スピリチュアルケアワーカー、臨床宗教士、臨床仏教士等、心のありようにふれる臨床的な活動が認定資格としての展開も見せている。これはひとえに宗教的な言説が、求められていることの実証に相違ない。しかしそこでは日本人が宗教的な言説や宗派の特別な言葉を使わずとも、自然にその精神性をもって対処してきた「いのち」や、生と死の問題が、改めて普遍的でさまざまなアプローチから必要とされていると考えられる。欧米社会で「メメント・モリ(死を忘るることなかれ)」の辞があるように、仏陀も「生まれてきたという縁によりて死がある」と説き、死を正面から見つめることによって「いのちを生きること」を説かれた。これは人間
として、真実、必要だからこそ、こうした思索がなされてきたと疑うことはない。
一人の臨床家として、大切ないのちに寄り添う人々ともに、実践のネットワークを共有し、展開していけたらと望んでいる。
==
小山典勇先生への学恩に感謝をこめて 合掌
1) 小山典勇「社会教化とは何か〜その10年を省みて、仏教研究・教育の視点として
〜」大正大学研究紀要86、
2) 多くの事例は、拙著「また会える[さようなら]〜末期がん患者に仏教は何ができるのか〜」佼成出版2010にて表現した。
〈キーワード〉 死の臨床、ターミナルケア、社会教化、心のケア

인간의 정신 세계와 사후 행방 - 개와 인간… 영혼의 공통성 개도

인간의 정신 세계와 사후 행방

HOME / 안녕히 가는 건너편… 애견들과 계속 함께

인간의 정신 세계와 사후 행방

개와 인간… 영혼의 공통성 개도

인간도 영혼의 존재. 인간과 개의 영혼은 「유사성이 높고, 형제 자매와 같은 관계에 가깝다」, 나아가 「명확한 경계선이 없는 동종과 같은 영혼」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상통하는 부분도 많다. 예를 들어, 애견과의 유대를 가진 사람이 죽었을 때, 상념의 파장이 연결되는 것으로, 죽은 애견이 천계에서 기다려 준다. 그리고 애견과 재회할 수 있는 것으로 죽은 것을 자각하고, 안심하고 사후의 세계에 익숙해질 수 있다. 물론 함께 행동하거나 살 수도 있다. 또, 죽기 전에 애견의 맞이 현상이 있던 사람은, 거의 1주일 이내에, 정말로 온화하게 잠들도록 여행 서 간다.
생각하면 나도 환갑을 지나 죽음은 친밀한 관심 있는 테마가 되었다. 애견들이 여행을 떠난 후 인간의 사후에 대해 여러가지 살펴보았다.

참조/개 정신세계와 사후 행방

인간의 사후를 찾은 많은 서적 중에서 유의하고 싶은 내용을 정리해 보았다.

인간의 사후에는 제설이 있어, 즉, 무엇이 맞는지는 죽어 보지 않으면 모른다.
다만 영혼은 영원. 현세와 사후 모두에 각각의 인생이 있다. 모순 투성이의 현세에서의 부진도, 사후를 포함한 긴 여행 속에서 접이 붙는다. 태어나면서 명시되어 있는 숙명의 길을, 최대의 노력과 선으로 정진하고, 순수하고 무욕이라면, 영혼의 길은 더러움이 없는 빛으로 비추어진다.
또한 신의 존재는 영원한 수수께끼. 확실한 것은 누구에게도 모른다. 창조주·근원, 섭리·법칙, 우주의 대령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원래 인간에게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을 리도 없다고도 알려져 있다. 사람은 누구나 육체에서 빠져 나와 영혼이 되었을 때 '신'이라는 존재를 처음으로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천계와 영원한 영혼
이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의식의 에너지. 그리고 빛의 존재. 성장도에 따라 눈부시게 빛나는 영혼, 어둡게 가라앉은 저휘도의 영혼 등이 있다.
또한 인간의 보편적인 목적은 '혼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 그리고 본질은 영원한 영혼. 의식도 영원, 우리를 움직이고 있는 에너지도 영원. 육체는 변해도 영혼은 계속 변하지 않는다. 기억·인품·인격·정과 같은 것을 계승해, 내세도 지금의 자신대로 영원히 살아간다. 죽음은 영혼이 하나의 도구로 온 육체의 사용을 그만 둔 것. 우리는 '영혼을 가진 신체'가 아니라 '신체를 가진 영혼'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즉 가장 중요한 것은 영혼의 불멸을 아는 것. 그러나 인간은 지상생활이 주로, 천계는 사후의 부속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실제로는 그 반대로 천계가 본래의 거처이며, 지상생활은 일시적인 가주거리와 같은 것. 말하자면 인간도, 가족 동연의 개들도 본래의 곳으로 돌아갈 뿐. 죽음은 「영원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기쁜 사건인 것이 진실의 모습. 육체를 떠난 영혼은 그 대부분이 자유와 기쁨으로 가득한 세계로 돌아가 행복을 느낀다. 이 세상에서의 죽음은 그 세상에서의 삶. 사후의 세계를 중간생(인생과 인생 사이에 있는 삶의 세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죽음은 죽어가는 자에게는 비극이 아니라, 나중에 남겨진 자에게는 비극에 불과하다…
또한 우리가 사는 세계는 '3차원' 또는 물적 차원이라고 부르며, 보이지 않는 세계는 '비물질적 세계'라고 불린다. 천계는 시간이나 공간이라는 개념이 없는 차원이 다른 세계. 우주와 연결되어 있거나 현세와의 사이에 얇은 베일이 1장 있을 뿐인 ‘표리 일체의 관계’라고도 한다.

<참고>
◆혼은 신도에서는 「분별어혼」, 불교에서는 「불성」이라고 불리는 신성한 것으로, 전생명의 근원과 연결된다. 또 많은 정신세계에의 액세스의 열쇠가 되어, 영혼과 신체가 하나에 협력하기 위한 최대 최강 툴이 호흡법. 호흡법에는 완전호흡법(요가의 복식호흡), 플라나야마의 비율호흡법(요가의 복식호흡), 숨결 영세의 호흡법(고신도 전승호흡), 천지를 연결하는 호흡법 등이 있다. 덧붙여서, 숨의 본래의 말은 「명기」, 영혼과 신체를 연결하고 있는 것이 호흡.

영혼의 성장
인생은 영혼의 여로. 그리고 모두가 영혼의 여행자. 지상의 인생도, 이 세상에 태어나 온 것도, 다양한 경험을 쌓아 영적 성장을 달성해 천계에서의 생활에 대비하기 위해. 말하자면 천계로 돌아가기 위한 훈련 기간과 같은 것. 누구나 많거나 적게 경험하는 ‘병, 이별, 실패, 좌절…’ 등의 고난에도 각각 의미가 있고, 경험을 쌓을 정도로 영혼은 성장한다.
영혼의 고향에서는 서울 메이트들과 재회한다. 다음 인생계획을 세우는데 서울메이트의 존재가 빼놓을 수 없다. 서울메이트란, 연결을 가지고 있는 동원의 영혼으로, 같은 곳에서 태어난 영혼의 가족과 같은 것. 서울메이트는 누구에게도 5-6명이 있으며, 각각 세계 각지에서 인생을 다한다. 천계에서는 그 귀중한 경험과 의견을 나누어 다음 인생계획에 활용된다.
또 영혼에는 "천계에서 만든 인생 계획을 갑자기 흐트러뜨리고 예정 밖의 사건을 일으킨다"는 것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설도 있다. 혼란 상태에서 배움을 얻는 것이 성장도는 훨씬 크다. 다만 예정외의 사건에 조우하는 것은 일정 레벨 이상의 성장하고 있는 영혼에 한정된다. 이유는 괴롭고 괴로운 시련에 맞서는 영혼이 필요하기 때문.
영혼은 성장 수준에 따라 색상이 다릅니다. 예를 들면 녹색은 배우고 성장을 잡는 영지로 가득 찬 영혼. 가장 성장한 영혼은 붉은 보라색을 띤다.

<참고>
◆해탈, 또는 깨달음이라고 불리는 「영혼의 본연의 방법」은, 일찌기 진화의 과정에서 광물·벌레·식물·동물이었던 것을 알고, 그 모든 의식을 기억해, 나를 아는 것. 성자라고 불리는 것이 자연 속에서 정신성을 높이고 깨달음에 이르는 것은 생명이 자연과 일체화되고 있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혼은 오랜 시간에 걸쳐 진화해 왔다. 물론 동물이었던 경험도 있다. 하지만 동물을 학대하는 사람도 있다. 한편 동물의 권리를 지키는 활동을 하거나 식육을 포기하고 채식주의자가 되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동물에 대해 애정이 깊은 사람은 성장한 영혼의 소유자인 경우가 많다.

픽업과 죽음
성장한 영혼은 픽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세의 7할은 미성장의 영혼. 그러므로 대부분은 만나는 사람이나 지도령 등이 2주일 전부터 며칠 전에 나타나 죽음을 예감한다. 마중 체험에 신불이 나타나는 것은 적고, 명확한 종교성을 띠지 않는 점에 특징이 있다.
또한 영혼이 육체를 벗을 때의 통증은 없다. 죽은 순간 옆에 있는 사람 중에는 하얀 모야·스팀 같은 것을 보거나 느끼는 사람도 있다. 체외로 나오면 잠시는 「뭐가 뭔지 모르겠다」라고 하는 상태가 되지만, 그 시간은 영혼의 성장 상태에 따라 다르다. 영혼은 인간의 모든 욕망과 고통에서 해방되어 순수한 무구한 상태로 회귀한다. 그리고 자유를 느끼고 다시 육체를 갖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물질사회나 세속사회에 고집하지 않고, 본질을 소중히 하는 마음의 소유자가 죽은 경우는, 영혼이 육체로부터 빠져나가는 것을 스스로 알 수 있다. 앞선 가족이나 사랑하는 애완동물들과도 곧바로 재회할 수 있어 새로운 세계에 원활하게 들어갈 수 있다. 인생에 아무 후회도 없고, 충분히 살았다, 잘 노력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집착이 있는 사람은 죽음의 과정이 고통으로 바뀌어 버릴 수도 있다.
한편 사람은 죽으면 잠시 꿈을 꾸는 설도 있다. 영혼은 육체와 떨어져 유체가 되지만, 유체를 사용할 수 있는 준비가 끝나면 꿈에서 깨어 천계에 들어간다. 이때 보는 꿈은 일본에서는 삼도의 강과 꽃밭, 서양에서는 계단, 스코틀랜드에서는 절벽, 중동에서는 사막, 남태평양에서는 황해 등 민족성과 지역성이 나타난다. 뇌에 새겨진 기억이 재료가 되고 있다고 하며, 임사 체험으로 보는 광경도 이때의 꿈에서는… 라는 설도 있다.
또 임사체험자의 대부분이 「그 세상과 이 세상의 경계」를 경험한 것을 전해, 안에는 미지의 우주 공간이나 이차원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사람, 빛의 존재를 만난 사람, 「배우고 성장해 타인 에 다한다. 사명을 완수한다"는 인생의 본질을 접한 사람,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라는 사람도 있다. 임사 체험을 경험하면 텔레파시 능력이 향상된다는 사실도 있는 것 같다.
또한 죽을 때 사람은 모두가 자신의 인생을 회고한다. 그리고 영상이 주마등처럼 달려오는 가운데 영혼은 몸을 빠져 나와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러 가거나 마지막 인사를 하고 돌아간다. 그것은 사후가 아니라 여행하기 조금 전이나 사망하기 직전에 이루어집니다. 「여행하는 사람이 베개 모습이나 꿈에 나타난, 이상한 꿈을 꿨다」라고 하는 이야기는, 영혼의 세계의 극히 보통의 사건…

<참고>
◆혼은 빛나는 에너지체. 영혼의 뒤로 육체와 연결되어 영혼에서 육체로 생명 에너지가 보내진다. 영혼의 서는 실버 코드, 또는 플라즈마 코드, 아스트랄 코드라고도 불리며, 은빛으로 빛나는 직경 5센티 정도의 코드라고합니다.
◆사후 며칠간 육체와 영혼을 연결하는 '영혼의 서'(실버코드)가 연결된 채로 되어 영혼은 유해 옆에 머무른다는 설도 있다.
◆체외 이탈이라고 하는 현상은, 영혼의 서가 연결된 채로 영혼이 육체로부터 떠나는 것. 특히 특별한 것이 아니라, 수면 중이나 무의식 상태일 때, 사람은 모두가 일시적으로 체외 이탈하고 있다고 말해져, 본인은 꿈을 꾸고 싶어도, 몇번이나 천계의 영역으로 여행한다 있습니다.
◆집에서 간취한 사람에게의 앙케이트 조사에서는, 고인의 4할이 여행하기 전에 사망 친족이나 인연 있는 사람, 또는 사랑하는 애완동물들과 재회해, 동행하는 가족들에게 그 모습을 전하고 있다. 여행 며칠 전에 재회하는 경우가 가장 많아 죽음을 예감한다고 한다. 이러한 픽업 현상이 있던 사람은 죽음에 대한 공포나 불안이 없어져 온화해진다. 또 "아무래도 저쪽에 가고 싶다. 어떻게 하면 무사히 갈 수 있을까"라는 인상적인 말을 하거나, 위쪽을 보는 사람도 많다. 마치 천계의 문이 열리고 그 저쪽에 퍼지는 광대한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인생은 교훈이 가득한 여행임을 깨닫는다고 한다. 덧붙여 1000년 이상이나 전, 히에이산에서는 「픽업」의 기록을 적어 두었다.

빛의 기둥과 망각의 막
죽으면 하늘에서 빛의 기둥이 내려온다. 빛의 색은 백색, 금색, 푸르스름한 은색이라는 설이 있다. 영혼은 한 번만 나타나는 빛 속으로 끌어올려져 얇은 모야 같은 구름이거나 빛나는 별이나 은하에 덮여 있는 느낌이 된다. 그리고 다시 태어나기 위한 장소로 돌아간다.
빛의 기둥 속에서는 영혼의 기억의 경계인 ‘망각의 막’을 지나간다. 여기를 통과함으로써 잃어버린 영으로서의 기억을 되찾고 천계에서 정한 약속사 등도 모두 기억한다. 또 영혼은 환생해도 천계에 그 일부를 남긴다. 이것은 천계로 돌아갈 때 말소된 기억을 부활시키기 위한 "영혼의 재결합"에 필요하기 때문. 그 때 별로 성장하지 않은 영혼은 최근의 환생밖에 기억을 추적할 수 없다는 설도 있다. 영혼이 성장함에 따라 전세의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는 능력은 늘어난다.
반대로 환생시에는 망각의 막을 통과한 순간에 모든 것을 잊게 된다. 전세와 과거세의 기억의 소멸은, 보다 진지하게 인생과 마주하고, 보다 순수한 경험을 쌓기 위해서 필요하기 때문. 그 때 천계에서 정한 인생의 사명이나 목적도 잊어버리지만, 영혼의 깊은 곳에서는 그 사실을 깨닫고 골로 향하기도 한다. 눈치채는 시기는 느리다. 다만, 눈치채지 않고 평생을 끝내는 사람도 있다. 우리 인간은 현실에 흐르고, 그러한 본질적인 것에서 도망치려고 버리기 때문에…
또한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도 망각의 막에 의해 영혼의 존재라는 기억을 잃고 사후가 전혀 모르는 것이 가장 큰 이유.

<참고>
◆ 천계에는 위와 같이 하늘로 끌어 올리는 "빛의 기둥"이라는 설 외에도 "빛의 터널"을 걸어 간다는 설, 어두운 터널 앞에 보이는 빛으로 향한다. 푹신푹신 떠도면서, 또는 걷고 나아간다는 설 등이 있다. 어쨌든 빛의 길을 빠져 천계의 입구에 도달하면 빛 속에 녹아있는 것 같은 느낌이 된다.
◆천계로 돌아갈 때의 빛의 기둥에는 일반용 외에 아기·태아용, 사악한 인용의 3종류가 있어 각각 색이 다르다는 설이 있다.

천계의 입구·수리와 검증 빛
의 기둥 끝에는 맑은 맑은 공간과 크리스탈처럼 눈부시게 빛나는 “끝없는 광장”이 나타난다. 여기가 천계의 입구.
입구에서는 먼저 앞선 가족이나 애완동물들, 인연 있는 사람들에게 맞이해 기분을 느끼고 죽음을 다시 자각한다.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맞이할 수도 있지만, 과거 세상의 가족이나 인연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곧바로 그들의 얼굴이나 이름을 알게 된다. 다만 성숙한 영혼은 이 과정을 통과할 수도 있다.
다음으로 지도령이 영혼의 데미지를 수복한다. 지도령의 거대한 에너지에 감싸져 비누 거품 속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거나 액체 형태의 에너지가 밀려오는 느낌이 든다. 데미지가 깊은 경우는 영혼의 특정 개소에 직접 에너지를 붓는 경우도 있다.
회복된 영혼은 영적인 환경에 익숙해지기 위해 치유의 공간으로 나아간다. 조용한 환경 속에서 환생시 정한 삶의 시나리오에서 '무엇을 달성했는지, 무엇을 할 수 없었는가'를 지도령과 함께 검증한다. 검증시에는 「어떻게 살았는지, 타인과 어떻게 접했는지」, 「충분하게 배우고, 사랑하고, 사명을 완수했는가」라는 점이 중점을 둔다. 아울러 「인간사회에서의 성공은 아무 가치도 없는 것」, 「물적인 풍요를 추구하는 것은 가난한 영혼인 것」을 다시 가르칠 수 있다는 설도 있다.
또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 볼 때, 과거의 사건이나 선택의 모습, 당인이나 주위의 사람의 생각이 리얼한 영상 속에 나타난다. 그러나 이것은 과거의 실수를 심리하거나 비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왜…라고 하는 사건의 진실을 알거나, 오해가 녹거나, 인생의 눈치채나 성장만을 확인하는 것이 그 목적. 영상은 빛의 스크린이나 홀로그램, 작은 비누방울 같은 구체에 비추어진다는 설이 있다.
검증 후, 도근에서 크게 벗어나 버린 영혼, 나쁜 영혼은, 다른 영혼에의 악영향을 생각해 일시적으로 격리된다. 그리고 교정되어 초기 단계에서 환생하고 다시 치유하게 된다. 자살한 경우는 사후 5년 이내에 환생하지만, 그 영혼은 천계에서 소중히 지켜져 마음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 비업의 죽음을 이룬 사람이 천계에서 시달리지 않는다. 아이의 영혼은 어른의 영이 동행하고, 어린 아이와 아기의 영혼은 진화한 영적 존재가 돌보는다.

<참고>
◆사후, 영혼은 분열. 일부는 땅으로 돌아가 소멸하고 나머지 영혼이 정령이 되어 하늘로 떠오른다는 설도 있다. 이끄는 역할의 영과 함께 천계 앞에 있는 '정령계'라는 장소로 가서 여기서 가족·친구·애완동물들과 재회하거나 정화와 심판이 이루어져 천계에 갈 준비를 한다. 매우 부드러운 장소에서 죽고 얼마 안되는 사람의 영혼을 쉬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다만 영혼의 성장도에 따라서는 스루하여 직접 천계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다.
◆천사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하위층에서 죄를 회개하고 상위층으로 이동을 완수한 인간들이라는 설이 있다. 한편 영계에 존재하는 인간이나 동물 이외의 생명체로 고급 영이라는 설도 있다. 옛부터 천사의 이미지와 전설은 많이 있지만, 실제로는 잘 모르고 있다.

천계의 계층
사후, 지상에서의 삶 방법·걷는 방법 등의 검증이 끝나면, 처음 가는 것은, 비슷한 사람끼리나 공통 의식을 가진 영혼의 그룹. 예를 들면 자기중심적인 사람, 수전인, 타산적인 사람… 등 15명 전후의 동등한 수준의 영혼으로 구성되지만 30~50명의 그룹이라는 설도 있다. 그 후 신성한 회의로 불리며 향후 자기 계발에 대해 토론하고 학습할 기회를 얻어 성장한다.
천계에는 무수한 계층이 존재하며 그 구조에는 여러 설이 있다. 한 설에서는 7~12개의 영역 안에 각각 12개의 서클이 있어 더욱 세세한 그룹으로 나뉜다. 각 계층에 칸막이가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상상하는 천국이나 지옥도 이 안에 포함된다. 영혼의 성장 상태에 따라 자동으로 상위층으로 승격하거나 하위층으로 강격한다. 즉 어떤 세계에 머무를까는 자신의 유의함에 따라다는 것.
영혼의 배분에는 독자적인 판단 기준이 있어 선인이기 때문에 위층, 악인이기 때문에 아래층이 아니라 나쁜 행위를 한 자각과 반성이 있는지 여부가 중점을 둔다. 본인의 자각이 없는 채, 선의가 불필요한 신세를 지고 있거나, 위로부터 시선의 우월감이 될 수도 있다. 괴롭힘을 당한 측은 원한이 남아, 괴롭힘을 당한 측은 기억에 없을 수도 있다. 더욱이 배려심을 갖고, 자신의 마음에 정직하게 살았는가. 자신의 느낌을 말로 행동으로 옮겼는가. 자신의 인생의 책임을 100% 취한다는 각오는 있었는가? 나름대로의 채워진 행복감을 얻었는가. 이들은 계층의 배분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일.
또한 번뇌와 집착에 사로잡히면 지박령이 되고, 물욕은 영혼의 성장을 방해한다. 그리고 이기주의의 극복, 공정하고 공정한 마음의 마음이 큰 주제가 되어 적을 용서하는 것이 관문이 된다. 또한 사후 세계의 실상은 종교적인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종교의 추억은 통용하지 않고, 천계에서의 지위 향상에 관계하지 않는다. 다만 「창조주인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있는지 여부」는 배정시의 갈라짐이 된다.
한편, 영혼이 가는 곳은 스스로 결정된다는 설도 있다. 자신이 가장 진정할 수 있는 장소를 선택할 수 있고, 영혼은 모두 같은 입장에서 일률평등이 되어 심판이라는 것도 없다. 천국·지옥은 없지만, 빛나는 장소·어두운 장소는 있다. 그러나, 스스로의 의사로 상위층에 들어가도 친숙하지 않고 아늑함도 나쁘기 때문에, 어느 어둠의 하위층에 온다. 하위층에서는 몸의 고통을 느끼고 상위층의 사람을 만날 수도 없다. 하위층에 있는 것은 물적 욕망·성적 욕망, 명예욕·지배욕, 자기 사랑·세속 사랑에 사로잡혀, 본질이나 진리를 없애 버린 사람들. 정치가·기업가 등이 하위층에 있는 것도 드물지 않다. 즉 자신이 가야 할 ‘거처’는 자신의 영혼이 가장 잘 알고 있다.
<참고>
◆ 다양한 계층에는 무수한 마을이 있으며, 현세와 같은 생활이 운영되고 있다는 설이 있다. 같은 영성 수준의 비슷한 사람이 모이는 크고 작은 마을에는 각각의 주거가 있으며, 스스로를 돕는 일도 있다. 한편 기본은 혼자, 가끔 사람을 만나는 정도라는 설도 있다.
◆천계의 별설에 따르면, 사후, 깨어나면 강이 흐르는 문 앞에 도착. 그 문 앞에서 천국인가 지옥인가…의 심판을 받는다. 문을 지나 강변을 행복과 희망을 느끼면서 오로지 걷는 세계가 천국. 인생을 되돌아 보면서 걷고, 다시 태어나 간다. 같은 시대에는 '배우기'가 되지 않기 때문에 100년 정도 먼저 다시 태어나는 경우가 많다. 「배우기」의 필요가 없는 사람은, 걷는 도중에 「빛」이 된다. 또 지옥이란 문 근처의 어둠 속에서 걷는 사람들을 모시면서 바라볼 희망이 없는 세계. 성불할 수 없는 영은, 영계의 앞에 있는 유계(현세에의 미련 등이 잔존하는 세계)에 머무른다.
◆사람은 욕망에 의해 스스로 지옥의 구멍을 파낸다. 즉 인간계의 이 세상 자체가 영혼이 배우기 위한 생지옥 같은 것. 그래서 그 세상은 이 세상에서 영혼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장소. 지옥은 '혼자만의 외로운 어둠의 세계'에서 스스로와 마주하고 반성하는 장소...라는 설도 있다.

천계의 생활
천계는 실로 장대한 경관. 덥지도 않고 추지도 않고 아침 낮 저녁이나 계절의 변화도 없다. 밝은 저녁의 광경이 계속 이어진다는 설도 있다.
천계에서는 생전의 모습, 성격이나 감성 등의 개성은 사후에도 변함없이 그대로의 자신이 이어져 고민이나 불안도 그대로 남는다. 인종·종교의 벽은 없고, 비슷한 성질을 가진 영혼끼리는 다가오고, 반대의 성질을 가진 영혼끼리는 반발하기 위해 서로 섞이지 않는다. 즉 영혼의 교류는 파장이 맞는 사람끼리의 틀 안에서만 행해진다. 접점이 전혀 없었던 사람이 이웃하는 일도 거의 없다.
또한 텔레파시로 대화하기 위해 언어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만약의 사용법을 기억하면 뭐든지 할 수 있고, 원하는 것도 상상하는 것만으로 손에 들어간다. 그리운 사람들이나 사랑하는 애완 동물들과도 재회할 수 있다. 보통 남성은 30세경, 여성은 20세경의 모습이지만, 되고 싶은 연령이나 모습이 되어 성별도 자유롭게 바꿀 수 있다.
또한 천계에서는 자유가 원칙. 정해진 일 없이, 무엇을 하든 무엇을 생각하든 자유. 배우고 싶으면 배우고 바라는 것을 일할 수 있다. 가고 싶은 곳에 가서 동시에 여러 다른 장소에 머물 수도 있습니다. 지상의 생활을 엿볼 수 있고, 텔레파시를 보낼 수도 있고, 지상에 내리는 것도 가능하다. 다만 미성숙한 영혼의 그룹에서는 행동범위가 한정되는 경우도 있지만, 어쨌든 성숙하면 자유자재를 극대화할 수 있다. 그리고 상위 계층에서는 빛과 성자에게 가까운 모습이 된다.
그런데 천계에는 지상과 같은 아름다운 풍경도 있다. 천계는 무형이 아니고, 지상에 있는 것은 멸망하면 이쪽의 세계에 형태를 나타낸다. 천계에서는 죽음은 존재하지 않고 무한한 생명이 있을 뿐. 천계의 아늑한 점에서 많은 사람들은 "태어나고 싶지 않다. 좀 더 여기에 싶다"고 생각한다.
또한 천계에서는 위선은 성립되지 않는다. 머리에 떠오른 생각은 텔레파시로서 발해, 간단하게 읽혀져 버리기 때문에. 게다가 본성이 드러나, 그 사람이 있는 그대로의 마음의 상태가 된다.

■개를 돌보는
인간계에서 좋아하는 개를 키울 수 없었던 사람등은, 천계에서 개를 돌보는 전문직에 취할 수 있다. 이 사람들은 트래커(추적하는 사람)라고 불리고 있다. 개에 대한 애정이 깊기 때문에 천계의 애견가로부터의 신뢰도 두껍다. 만약 천계에서 애견을 재회할 수 없는 경우, 트래커에 부탁하면 애견을 찾아 데려온다.

환생
혼은 테마와 과제, 사명을 주어지고 많은 시련과 어려움도 설정된다. 그리고 태어나는 환경과 수명도 결정하고 다른 육체로 다시 태어난다. 성장하지 않는 영혼은 세세한 부분까지를 결정하게 되지만, 성장하고 있는 영혼은 대략적인 시나리오에 머무른다는 설도 있다.
영혼과 육체의 결합은 출산시에 완성되고, 출산시에는 그 육체를 선택한 선택의 사실이 소거되어 새하얀 상태로 태어난다. 즉 육체와 영혼은 완전히 별개. 사고로 출산을 할 수 없었을 때, 그 영혼은 조금의 준비 기간을 거쳐 새로운 육체와 결합하여 출산한다. 또한 영혼이 육체에 가장 영향을 미치는 것이 눈. 눈은 '영혼의 거울'로 되어 영혼을 깨끗이 반영시킨다.
또한 탄생 시 전세의 기억이 희미하게 남는 경우가 있다. 어린 아이가 자신의 전세를 말하는 경우는 이 때문에.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전세의 기억은 자연스럽게 소멸한다. 북미 원주민의 육아에서는, 아이의 전세의 기억을 상기시키는 것이 역할의 하나가 되고 있다. 많은 경험과 배움을 가진 전세의 기억을 따르는 것으로 인격형성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 덧붙여서 사람은 누구나 3세 정도 지금은 동물이나 식물의 기분을 느끼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설도 있다.
그런데 과제를 달성할 수 없거나 보편적인 법칙을 깨뜨린 경우에는 완벽하게 클리어할 때까지 여러 번 환생을 반복한다. 사람이 되고 나서의 환생의 횟수는 통상 100회 정도. 많아서 150회, 적게 50회, 그 밖에도 여러 설이 있다. 환생 사이클은 고대 시절에는 1,000년 정도였던 것이, 현대에서는 길어도 100년으로 짧고, 자신이 살았던 연수분을 환생할 때까지의 준비 기간에 맞추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한다.
또한 환생은 영원히 계속되지 않습니다. 지상에서 많은 배움과 경험을 쌓아 고도의 영성을 갖출 수 있던 영혼은 환생을 졸업하고 신계 루트로 진행된다. 환생과는 다른 규칙에 따라 새로운 학습을 시작한다. 한편, 지상에서 더 큰 어려움과 외로움, 고통, 비참을 경험한 사람은 큰 배움을 얻기 때문에 환생하지 않고 신계의 스탭이 된다는 설도 있다. 그리고 신계의 스탭으로서 인간을 지도하는 역할을 끝내면, 신에 가까운 영역에 들어간다.

■개에서 인간으로
인간에서 인간으로의 환생 이외에는 개에서 인간으로의 환생이 있다. 모든 진화의 단계를 거쳐 영혼이 성장한 개는 정점인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다. 진화의 피라미드에서 "개는 인간에 이은 두 번째 존재"이기 때문. 인간으로부터의 환생은 베테랑, 개로부터의 환생은 신인이라고 하는 상태.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부다가 말한 5가지 방법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부다가 말한 5가지 방법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부다가 말한 5가지 방법

프레지던트 온라인 / 2021년 10월 27일 9시 15분


※사진은 이미지입니다 - 사진=iStock.com/nattrass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 후쿠이지사 주직으로 등록자 40만을 넘는 YouTube 채널이 인기인 오우치 모토카츠 씨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데는 고통스러워한다. 의 공양이 되면 설득하고 있다.
■죽음이라는 사실을 바라보는 것이 공양이 된다

이 기사에 눈을 떴다 당신은 어쩌면 사랑하는 사람을 죽은 적이 있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죽음을 아직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에 있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조금 깨달음으로이 기사를 읽어보십시오.

왜냐하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을 극복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받아 들일 수있을 때, 당신의 "생"이 바뀝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을 치유하고 '죽음'이라는 진실을 정면에서 바라보았을 때 당신의 '생'으로 변용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당신에게 일어나는 변용이야말로, 지금은 죽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공양이 되는 것입니다.
■ 사람들이 도망치려는 죽음에 도전한 석가님

나는 "사원의 아이"로 자랐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경본을 갖게 된 것은 3살 때였습니다.

처음 '장례'에 데려간 것은 5살 때였습니다.

이후, 스님으로서 지금까지 2000명 이상의 분들의 장송에 입회해 왔습니다.

지금, 다시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삶에 「확실」은 없다, 라고 하는 것.

우리의 삶에 '절대'가 없습니다. 유일하다면 "죽음"뿐입니다.

「죽음」만이 확실하고, 「죽음」만이 절대입니다.

또한 죽음은 평등합니다.

무엇 하나 평등하지 않은 인생이 있고, 죽음만은 평등합니다.

인종에 관계없이 성별 연령에 관계없이 국적에 관계없이 사회적 지위가 높거나 낮음에도 불구하고 돈이 있든 상관없이 성격의 선악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똑같이 죽습니다.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에서 벗어나려고 했습니다.

욕망을 채우는 것과 꿈을 쫓는 것에 의해 죽음을 푹 빠뜨리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결코 죽지 않는 영원한 것을 상상해 왔습니다.

천국, 극락, 신…….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죽음의 불안을 완화하기 위해 사람들은 다양한 환상을 만들어 왔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약 2500년 전의 인도에, 그 「죽음」을 어지럽히지 않고 정면에서 바라보고 도전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석가님입니다.
■ 철저하고 죽음에서 멀어진 석가님의 어린 시절

석가님은 오랫동안 아들에게 축복받지 못했던 석가족 왕, 슈드 다나와 어머니 마야 사이에 태어난 대망의 왕자였습니다.

아버지, 슈드 다나 왕은 그것이 기뻐하고 성대한 축제를 열고 유명한 점성술사에게 왕자의 미래를 차지했습니다.

그러자 점쟁이는 “이 아이는 장래 위대한 차크라바르틴(나라를 통치하는 자)이 될 것인가, 붓다(세상을 버리고, 광명을 얻은 것)가 될 것인가, 어느 쪽인가입니다”라고 예언 했습니다.

게다가 어머니 마야가 석가님을 낳고 곧 죽어버리는 비극이 일어납니다.

버려진 아버지, 슈드 다나에게 왕자의 성장만이 의지였습니다.

자신의 왕위를 이어받아 당시 임립하고 있던 나라들을 통치하는 위대한 왕이 되고 싶다고 강하게 바랐던 것이었습니다.

왕은 그렇게 하기 위해 절대 저지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점쟁이가 예언한, 우리 아이의 장래에 대한 또 다른 가능성, "부처가 될 수 있도록 출가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점쟁이는 알고 있었다. 「죽음」을 깨달은 것, 죽음의 현실을 받아들인 것에는, 근본적인 시프트가 방문할 가능성이 있는 것을.

거기서 왕자는 모든 사치와 쾌락을 주어 철저히 '죽음'을 알지 못하도록 키워졌습니다.

계절마다의 별장이 준비되어, 학문, 무예, 모든 지적 호기심이 채워져, 젊고 아름다운 여성들에 둘러싸인 감미로운 생활이, 왕자의 일상이었습니다.

그 뒤에서는 노인이나 죽음이라는 현실을 왕자에게 깨닫지 않도록 철저한 배려가 이루어졌습니다.

왕자의 생활 공간에 노인이 들어가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고, 왕자가 산책하는 정원에서는 죽은 잎이나 활짝 뿌린 꽃 등이 제거되었습니다.

왕자의 외출시에는 그 통행 예정의 길에 누워 거지와 노인, 병인이나 죽은 자, 죽은 자를 보내는 행렬까지도 쫓겨났다고합니다.
■29세에 출가하게 된 “어느 만남”

그러나 그러한 "생의 현실"에 대한 속임수는 영리한 왕자에게 언제까지나 통용되지 않을 것입니다.

훌륭하게 성인해, 공무에 나갈 기회도 늘어난 왕자는, 어느 날 그 길안에서, 그때까지의 인생에 있어서, 본 적도 없었던, 병인이나, 노인이나, 사인을 목격한 것이었습니다.

모두가 언젠가는 저처럼, 늙고, 병, 죽어 간다. 아무리 감미로운 생활을 즐기든, 어떤 대국의 왕이 되어도, 어떤 보물이 풍부해도, 그들은 영원히 계속되는 것은 아니다.

격렬하게 동요한 왕자는, 그 후의 외출시에, 사문이라고 불리는, 출가승을 보입니다.

사문의 품격과 청결함으로 가득한 당당한 곳으로 가자.

그 모습에 마음을 품은 왕자는 성을 나가기로 결심합니다. 29세의 해였습니다.

출가한 왕자는 요가의 마스터에게 사사하거나 모든 황행과 고행을 격려합니다.

사진=iStock.com/rudall30
※사진은 이미지입니다 - 사진=iStock.com/rudall30

그래도 덧붙여 고뇌를 떠날 수 없었던 왕자는, 자신의 밖에 해결을 요구해 돌아다니는 것을 그만두고, 하나의 큰 나무의 근원에 앉아, 자신의 안쪽의 고뇌와, 철저하게 마주 보았습니다. .

그리고 마침내, 부처(깨어난 것)가 된 것입니다. 35살 때였어요

이후 80세에 사망하기까지 약 45년. 붓다가 각지를 여행하면서 앞서 사람들의 고민에 대답하고 제자들에게 설교한 가르침이 불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5가지 방법

1. 고통을 떠나고 싶다면 현실을 알

불교의 근본에는, 언제나 「제행 무상(쇼교무조)」의 진리가 있습니다.

여러 행무상이란 “모든 사건이 사멸을 향해 계속 변화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여러 행무무상이기 때문에 생명은 태어난 순간부터 죽어가고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초당 두 명이 사망하고 있다고 합니다.

노쇠만이 사인이 아닙니다. 전쟁에서, 병으로, 사고로, 지진 재해로, 사람이 죽었다는 뉴스를, 매일과 같이 보고 듣고 있는 우리입니다만, 그 죽음은 언제나 타인사.

설마 자신의 몸에,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의 몸에, 죽음이 방문한다고는, 꿈에도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만은 죽지 않는다는 태도로 현실을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붓다는 그 태도를 '무지'라고 부르며 '무지야말로 고통을 낳는다'고 지적한 것입니다.

2, 죽음의 수용 과정을 아는

미국 정신과 의사는 엘리자베스 큐블러 로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녀는 '죽는 순간'이라는 책을 저술하고, 죽음에 처한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5개의 단계를 거쳐 스스로의 죽음을 수용해 나가는 것을 논했습니다.

제1단계: (부인) 죽음을 부정하고 주위 사람과 거리를 두게 되는
제2단계: (분노) 죽음을 부정할 수 없다고 자각하고, "왜 자신이"라고 분노를 기억하는
제3단계: (거래) 죽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언가에 걸쳐 거래하려는 심리
4단계: (
억울) 에 평화가 방문

"나"는 기억의 덩어리입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의, 심신에 새겨진 다양한 기억.

그것이 "나"입니다. 그러므로 오랫동안 함께 온 사람의 죽음은 '나'의 일부가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갑자기 왔을 때, 우리의 마음은 로스가 보여준 것처럼 격렬하게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알아 두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연습으로서의 장례

3, 장송의의식을 확실히 집행한다

제 대학원 시대의 은사에게 Tim Falsham이라는 영국인 교수가 있습니다.

팀 선생님은 승려로서 집의 연간 법요에 둘러싸인 저와 동행하여 “공양이 유족에게 가져오는 효능”을 연구하였습니다.

최근에는 상당히 간소화되어 버렸습니다만, 지금도 지방에 가면, 전통 불교 사원의 단가에서는, 가족의 사후, 베케이케이, 통야, 장례, 49일, 1주기, 3회기, 7회기… 라고, 50회기까지 법요를 실시하는 것이 관습입니다.

그러나, 최근, 특히 도시부에서는, 일련의 장송 의례를 간소화하거나 일절 행하지 않는 사람까지 나왔습니다.

그리고 학생 시절의 나도 승려의 끝이면서 장례식 의례의 간소화, 합리화에 대찬성이었습니다.

그러나 팀 선생님과 함께 조사하는 가운데, 장례식 의례에 큰 효능이 있다는 것을 다시 검토하였습니다.

팀 선생님에 따르면, 일본과 같은 일련의 장송 의례가 없는 문화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우울한 상태인 채 여생을 끝내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

사진=iStock.com/akiyoko
※사진은 이미지입니다 - 사진=iStock.com/akiyoko

한편, 일본 전통불교의, 일견 귀찮게조차 생각할 수 있는, 형태를 바꾸어 의식의 반복이, 유족에게 있어서는, 조금씩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는」연습이 되고 있다.

그것은, 49일을 「대련기(大練忌)」라고 부르는 것으로부터도 알 수 있습니다. 대련기란, "이제, 당신은 고인이 없어진 날들을, 매우 연습했습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이제 당신은 슬픔을 많이 연습했으니 이제 앞을 향해 자신의 인생을 살아주세요"라는 유족의 현실생활 복귀를 향해 등을 누르는 의식이 49일 대련기 입니다.

장례식, 법사 등 일련의 장례식 의례는 죽은 자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고통받는 유족을 위해.

의식에는 힘이 있습니다. 거기서 진지하게 손을 맞추는 것의 마음을 정화하고 슬픔을 치유하는 힘이 있습니다. 결코 화려하지 않아도 좋다. 스스로 하는 사경, 염불, 독경이라도 좋다.

제대로 공양하는 것으로, 슬픔이 치유되어 가는 것입니다.

4, 적극적으로 자연과 접촉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야산에 나가는 것이 좋습니다. 캠프에서도 산책이나 그곳의 공원으로의 산책이라도 좋다. 자연이 우리에게 생명의 진실을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식물의, 흙에서 새싹이 나오고, 줄기가 뻗어, 잎이 자란다, 꽃이 피고, 열매를 붙이고, 잎이 떨어지고, 흙으로 돌아가, 그 흙으로부터 또 새로운 새싹이 나오고, 라는 순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음 생명이 되어 자연계를 순환하고 있다.

지금은 사망하는 사람의 생명은 지금 무렵, 이 푸른 하늘이나, 큰 강이나, 상쾌한 바람이나, 무성한 나무들처럼, 대자연을 순환하고 있습니다.

5, 죽음을 부인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살아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부인하는 것을 계속하는 한, 당신도 고인도 구원받지 않습니다.

당신은 계속해서 죽음을 원망하고, 고인은 죽은 것을, 당신에게 계속 책임을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붓다의 아버지, 슈드 다나 왕이 필사적으로 우리 아이에게 알리지 않게 한 것은 "죽음"이었습니다. 아버지 슈드 다나 자신이 죽음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죽음은 두려워할 일은 아니다. 에 얽매여 미래를 우울해 지금을 제대로 살지 않는 것. 해야 할 일을 이루지 않고 게으름에 사는 것.

그것이 죽음을 받아들이고 죽음을 완전히 넘은 부처의 메시지였습니다.
■ 슬픔은 쉽게 치유되지 않지만

물론 그렇게 쉽게 슬픔이 치유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부처의 메시지를 진정으로 이해했다면 당신의 '생'이 바뀔 것입니다.

비록 울면서도, "해야 할 일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한탄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알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당신을 위해, 그리고 고인을 위해해야 ​​할 일은 제대로 사는 것입니다.

유족이 건강하고, 밝고, 사이 좋고, 강하게 사는 것. 그것이 고인에게 최고의 공양이기 때문입니다.

----------
오우치 모토카츠 (타구·겐쇼) 불심 종오총산
후쿠지지 주직, (주)자코그룹 대표
가라테가, 테라피스트, 사장, 작가 등 복수의 얼굴을 가지고 「승려에 속하지 않고」 를 구현하는 이색 승려. 승명은 대우(대바보자=아무에게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경지에 이른 자의 뜻). 유튜브 '오오와 카즈노의 일문일답'은 구독자 수 29만명, 5400만회 재생된 초인기 프로그램. 저서에 『고통의 풀어 놓는 방법』(다이아몬드사), 『마지막으로 당신을 구하는 선어』(후와사), 최신간으로서 YouTube 「오오와 카즈오의 일문 일답」의 베스트판으로서 서적화한 「인생이 확실 로 바뀐다 오우와 카즈오의 대답 일문일답 공식'(아스카 신사)이 있다.

----------

(불심종 대총산 후쿠고쿠지 주직, (주)자광그룹 대표 오우치 모토카츠)




외부 링크붓다의 가르침「절대로 사귀지 말아야 할 4종류의 사람, 사귀어야 할 4종류의 사람」
「좋은 사람만큼 고통하기 쉽다」마운팅되기 쉬운 사람으로 되기 어려운 사람의 결정적인 차이
붓다의 말에 배우는 '가로 무늬로 미칠 것 같은 사람'을 순식간에 침묵시키는 "어느 질문"
"일이나 돈을 잃어도 그만둘 수 없다"성욕의 힘과 관계없이 발병하는 "섹스 중독"의 무서움
"취급하기 쉬운 곳에서 철저히 취한다"정부가 담배 다음에 증세를 노리고 있는 "어느 기호품"

육사외도3 아지타 케사캄발라 : 순세파 : 네이버 블로그

육사외도3 아지타 케사캄발라 : 순세파 : 네이버 블로그

육사외도3 아지타 케사캄발라 : 순세파 

프로필
천석
2020. 9. 11. 8:51

 이웃추가본문 기타 기능
◈ 육사외도3 아지타 케사캄발라 : 순세파 

  아지타 케사캄발라(阿耆多翅舍欽婆羅, Ajita Kesakambalin)는 사후단멸론(斷滅論)자이자 유물론자로서 도덕을 부정하고 현실의 쾌락이 인생의 목적이라고 주장하여, 순세파(順世派) 또는 사탕발림파라는 별명을 얻었다.

 불교와 같이 물질적 구성의 최소 단위를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사대로 보았다. 그는 이 사대(四大)만이 참된 실재이며 독립 상주(常住)하는 것이라고 보았으며 이 파에서 내세우는 우주의 구성 원소, 흙·물·불·바람의 사대는 인도의 모든 사상체계가 인정하는 것이었다.

 삶은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사대 원소가 결합한 것이며 죽음이라는 것은 이 사대 원소가 각기 자기 자리로 흩어지는 것이므로 무(無)로 돌아간다고 보았다. 즉 사후(死後)세계나 영혼 같은 것은 완전히 부정했다.

 그러므로 현세도 없고 미래세도 없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윤회(輪廻)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선악(善惡)에 대한 과보(果報)도 없는 것으로 파악했다.

 그러니 자연히 도덕은 부정되는 것이며. 이 현세의 삶이 처음이자 끝이므로 인간은 그저 즐기고 살아야 한다는 쾌락주의(快樂主義)자이자 철저한 유물론자였다.

 이 일파는 사탕발림파라는 좋지 않은 별명을 얻었으나, 당시의 영향력으로 보아 퇴폐적인 도덕론으로 일관했다고는 볼 수 없다. 

 이러한 철학 사조를 인도철학에서는 순세파(順世派, Carvaka)라고 한다.

   세존이시여, 이와같이 묻자 아지타 케사캄발라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대왕이여, 보시한 것도 없고 제사 지낸 것도 없고 헌공한 것도 없습니다. 선행과 악행의 업들에 대한 열매도 과보도 없습니다.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습니다.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습니다. 화생하는 중생도 없고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여 드러내는 바른 도를 구족한 사문. 바라문들도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이 인간이란 것은 사대로 이루어진 것이어서 임종하면 땅은 땅의 몸으로 들어가고 돌아가고, 물은 물의 몸으로 들어가고 돌아가고, 불은 불의 몸으로 들어가고 돌아가고, 바람은 바람의 몸으로 들어가고 돌아가고, 감각 기능들은 허공으로 건너갑니다. 관을 다섯 번째로 한 네 사람이 이 시체를 메고 갑니다. 송덕문은 화장터까지만 읊어질 뿐입니다. 뼈다귀는 잿빛으로 변하고 헌공은 재로 끝날 뿐입니다. 보시란 어리석은 자의 교설일 뿐이니 누구든 보시 등의 과보가 있다고 설하는 자들의 교설은 공허하고 거짓되고 쓸데없는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자도 현자도 몸이 무너지면 단멸하고 멸절할 뿐이라서 죽고 난 다음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라고(붓다의 품안에서 발췌). 

 6
 공감한 사람 보러가기댓글 1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