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5/23

유달영 [새 역사를 위하여] 9 구국의 원동력인 교육

 새 역사를 위하여 - 9.구국의 원동력인 교육

유달영

9.구국(救國)의 원동력인 교육

1.위대(偉大)한 교육(敎育)의 개혁자(改革者) 그룬트비히

나는 위에서 덴마아크의 경이적 부흥의 업적을 말할 때마다 그 원동력과 그 근저(根低)가 교육과 종교임을 누누히 암시하여 왔다. 세기적 불행의 대표국이던 덴마아크가 오늘 인류 최고 농업 문화 건설에 성공하였고 20 세기 복지 국가의 대표가 되었는데 그 원동력인 교육을 우리는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검토해 불 필요가 있다. 우리가 해방 후에 현명함이 있었던들 덴마아크의 교육을 연구함에 있에서 이처럼 등한히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오늘까지 모든 정신을 큰 나라에만 빼앗기고 있었다.

"참 진리는 언제나 착은 것 가운데서 찾아낼 수가 있다." 라고 하였는례 그 말은 우리에게 성실한 반성올 촉구한다.

덴마아크의 교육의 생명은 국민 고등 학교이다. 이 국민고등 학교의 학제는 이 나라의 특유한 것으로서 덴마아크 농민의 용광로이며 국민 문화의 모태(母胎)인 것이다. 우리는 국민 고둥 학교를 떠나서 인류 최고 농업 문화국 덴마아크의 오늘을 생각할 수가 없고, 또 그 혁혁한 부흥의 참모습을 파악할 수도 없다. 황무지를 옥토화한 것도,전례가 없는 협동사업의 성공도,고도의 국민 교양도 모두다 이 교육의 뿌리에서 움터서 자라난 줄기와 꽃과 열매인 것이다.

그련데,이 위대한 교육의 횃불을 높이 든 이는 누구인가? 그는 이미 위에서 말한 바 캄캄한 밤에 덴마아크의 갈바롤 인도해 준 그룬트비히 그 사람이다. 덴마아크의 교육을 혁신하고 세계 교육사에 이채인 국민 고등 학교롤 창도한 선각자가 곧 이 사람이다.

이 위대한 인물의 생애를 교육과 종교의 혁신의 면에서 다시 한 번 살펴보고자 한다. 그룬트비히는 1783 년 10월 6 일에 슐란드섬에서 신교 루터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천성이 정직한 사람으로 심히 가난한 생활을 하였다. 어머니는 가다리네 방이라는 분으로 남편을 도와서 살림살이의 안팎을 잘 다스리고 심지어 밭일까지 모두 맡아서 혼자서 처리해 갔었다.

그룬트비히는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깊은 신앙의 품 안에서 자랐고 그의 아름다운 심정은 어머니의 노래로 북돋아진 것이다. 덴마아크의 위대한 조상들의 위업을 진심으로 사모함과 신을 경외하는 신앙이 얼마나 인생으로서 값있는 것인가를 부모에게서 배웠다.

어머니는 늘 어린 그룬트비히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사람이 목적이 없이 우유부단한 일생을 보내려면 차라리 죽옴올 택할 것이다."

그가 아홉 살 때에 라틴어 학교의 입학 준비를 위하여 남부 유틀란드의 츄레고라는 곳에 펠드 목사의 집에 가셔 6년동안이나 있게 되었다. 이 고장은 황무지와 소택이 많은 을씨년스러운 지대였다. 그러므로 막내동이로 자란 어린 그룬트비히는 낯설은 고장에서 농촌이란 곳이 얼마나 재미없고 쓸쓸한 곳인가를 깊이 느끼 었다. 이 쓸쓸한 농촌율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야겠다고 하는 생각이 싹튼 것은 이 시절의 일이었다고 한다.

그룬트벼히는 15세 해 목적한 아르후스의 라틴어 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학교에서 3년을 공부하는 동안에 그 당시의 일반 풍조인 펀협한 학자형의 교사들에게 큰 고통을 받았다. 기계적이며,형식적인 교육에 아무런 감동도 받지 뭇하였을 뿐만 아니라 융화하기 어려운 적으로 생각하기에까지 이르렀었다.

그는 덴마아크의 교육이 얼마나 무용 무익 (無用無益)한 것인가를 절실히 깨닫게 되었었다. 그는 늘 이 시절율 회상하고 빵대신 돌을 머이는 학교 생활이라고 술회하였다. 무미건조한 아르후스 시대를 거쳐서 1800 년에 고펜하겐 대학에 좋은 성적으로 입학하였다. 여기서 괴테, 피히데, 쉘링과 같은 세기적인 인물들의 새 사상에 접촉할 수 있었고, 또 그들과 친교가 두터운 스테펜스 교수를 만나게 되었다. 이것이 그의 일생을 통하여 인생의 가장 중요한 기회가 되었었다.

영감이 넘쳐 흐르는 스테펜스 교수의 강의를 듣고 고동치는 가슴에 넓은 새 천지가 전개되는 감명을 받았다. 그는 철학,문학,역사 등에서 새 사상올 도입하였고 사랑하는 조국을 새로운 각도에서 옹시하게 되었다. 스테펜스 교수는 순결하고 정열척인 청년 그룬트비히로 하여금 후일 덴마아크 국민의 사상과 생활을 혁신하여 조국을 멸망에서 구원하고 오늘에 지상 낙원을 건설하게 한 도화선을 그의 가슴 속에 만들어 준 것이다.

산 인격에서 솟아나오는 생명의 말씀이 그대로 사라지지 않는 역사적 실례를 우리가 그룬트비히의 일생에서 다시 찾아볼 수 있게 된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다. 마국의 시인 롱펠로우 읊은 「화살과 노래」라는 시는 그것이 진리임을 우리로 하여금 더욱 확신케 한다.

화살과 노래

내가 창궁(蒼穹)을 향하여 화살올 쏘았다

그 화살은 너무도 빨리 날라서

내 시력(視力)은 따라갈 수가 없었다.

정녕히 따위로 돌아왔으련만

화살의 간 곳을 알 길이 없었다

내가 창궁을 바라고 노래를 불렀다

저 빠르고 예민히 흘러가는 노래를

뉘라서 따라가 잡을 수 있으랴

그 노래도 정녕히 따위로 돌아왔으련만

노래의 간 곳을 알 길이 없었다.

오랜오랜 훗날의 일이다.

싱싱한 상수리나무 큰 줄기에서

아직도 꺾이지 않은 그 화살을

아,나는 찾아낸 것이다

오랜오랜 훗날의 일이다

나는 친구들의 가슴에서

내가부른 노래 그대로를

아,아는 다시 찾아낸 것이다.

〈홍펠로우 지옴〉

그훈트비히는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하였다. 이 시절에 그는 영국의 넬슨이 거느린 대함대가 위세 당당히 쿄펜하겐에 쳐들어와서 덴마아크 해군과 격전하는 처절한 광경을 목도(目睹)하였다.그는 조국의 해군이 용감하게 싸우는 것을 보고 크게 감격하였다. 1803년에 그가 대학을 졸업하고 가정 사정이 어려워 집에 돌아가 형의 교회를 도와 주고 있었다. 1805년에 해군 대위 레드씨의 초빙으로 그 집 가정 교사가 되어 란켈랜드에 가 있었다.

쾌활한 젊은 주인 레드 대위는 늘 분주하게 몰아다니는 성격으로 가정을 돌보지 않아서 그 부인 콘스탄스는 언제나 우울하고 쓸쓸하게 지내고 있었다. 그룬트비히는 마음 속 깊이 동정함을 마지 않았다. 큰 저택에서 쓸쓸한 두 사람만이 지내가는 중에 그룬트비히는 콘스단스 부인의 그 청초하고 가련하고 아름다움에 점차로 정신을 빼앗기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뜨거운 연모의 포로가 되어 버렸다. 이 불의의 첫사랑으로 그는 주야로 번뇌의 생활을 계속하였다.그는 결국 양심의 가책에 견디다 못하여 코펜하겐으로 떠났다.

그는 이 아픈 감정을 억제하기 위하여 괴테와 세익스피어를 연구하는 한편 그것을 번역하여 잡지에 싣기 시작하였다. 북유럽 신화(神話)의 대저가 간행되어 그의 이름이 온유럽에 덜치게 된 것도 이 해였다. 일부 인사들은 그를 덴마아크의 최대의 시인이라고까지 찬양하게 되었다.

그는 청년들이 벗어나기 매우 어려운 연정(戀情)의 불 속에서 용감히 탈출했을 뿐더러 그 실패를 보람있게 잘 살린 사람이었다.

1810년 3월 그는 아버지로부터 얼마동안 고향에 돌아와 늙은 자기를 도와달라는 간절한 편지를 받았다.

이제 사회에 널려 알려지기 시작하였고 또 지명의 학자들과도 사귀게 되었으므로 적막한 고향에 돌아가 지낼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부모를 생각하는 효심이 강한 그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곧 귀향의 준비를 하였다. 그는 원래 목사가 되지 않으려고 결심하였다. 당시 의식은 재같은 냉냉한 교회와 위선이 가득한 교직자들에게 실망하였던 까닭이다. 그러나,아버지의 소원에 따라서 목사시험에도 응하였다. 그 해의 시험관은 대학의 교관이었다.

그는 시험설교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은 교회 안에셔 절멸(絶滅)하다." 라는 제목으로 생명이 없는 차다찬 교회와 거짓이 가득한 교권자들을 통렬하게 공박한 것이다. 교관은 그 담대하고 열정적이고 진리을 사랑하는 신념과 생명이 창일한 탁견(卓見)에 대하여 크게 칭찬하였다.

그룬트비히는 그 설교문을 인쇄하여 배포하였는데 이것은 목사와 장로들의 큰 노여움을 사게 되어 목사 면허를 주지 말라는 맹렬한 여론이 일어났다. 그룬트비히는 그 고루한 비난에 대하여 더욱 불만을 품게 되었다. 그 당시에 덴마아크는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에 본의 아니게 가담하게 되었으므로 영국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1807년에 영국의 대함대는 쿄펜하겐을 포격하여 덴마아크는 완전히 패배를 당하였고 함대를 송두리째 몰수당하는 형편이었다. 한펀 덴마아크 남부 홀스타인에 주둔하고 있던 2만 3천의 불군(佛軍)의 주둔비롤 전부 덴마아크에 부담시켰다.제정의 궁핍과 해외 무역의 두절과 노르웨이의 분리 등으로 1811년에 국립 은행은 파산하게 되고 지폐의 남발로 물가는 천정부지로 뛰어 올라서 마치 제 1차 대천 후의 독일의 마르크 폭락이냐 우리 나라의 6·25후의 인플레와 같이 되었다.

그러므로, 중류 계급의 봉급 생활자들은 실로 극도의 생활고에 빠지게 되었다. 실연으로 받은 정신적 상처와 조국의 비운 등으로 인해 인생과 조국에 대하여 심각한 번민을 하고 있었다. 그 대에 세계사를 공부하면서 특히 십자군의 유래와 결과에 대하여 큰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그것은 기독교의 신앙이 국민의 생활 속에 아름답게 숨어 있는 많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 었다. 그는 또 스노레의 덴마아크사(史)에서 용감하고 고 아름다운 인생의 시와 조상들의 생활에 충만하였던 신앙의 빛을 발견하고 큰 용기롤 얻었다 그는 이 역사로부터 귀납하여 자기 자신의 건전한 신앙을 세우게 되었고 성서를 갈(渴)한자와 같이 읽었다고 술회하였다. 성서의 일언 일구는 모두 그의 신앙의 순수롤 위한 싸움의 무기가 되어 도전의 준비를 하였다. 그는 사색과 초려(焦慮)로 극도의 쇠약에 빠져 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당분간 휴양할 수밖에 없었다.

그푼트비히는 목사 시험에 합격한 다음 해에야 겨우 목사의 면허를 받게 되었다. 건강을 회복한 그는 향리의 교회에서 소박한 농민들과 친구가 되어서 그들의 신앙이 순수하고 바르게 자라도록 진력하였다.

1813년에 아벼지가 세상을 떠난 뒤에 그는 쿄펜하겐으로 다시 나가서 예언자적 경고를 거듭하여 신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멘마아크는 오래지 않아서 멸망할 것이라고 외쳤다. 이 강연은 젊은 청년들에게 많은 반향율 일으켰다. 그는 다시「조국의 위기」라는 글올 써서 널리 대중울 경고했다. 1816년으로부터 1819년에 걸쳐서 그는 「단네베야케(덴마아크의 보루(保壘) 라는 잡지를 발간하여 시와 평론과 역사로서 덴마아크 국민의 가슴 속에 잠든 정신을 깨우치고자 노력하였다.

덴마아크에서 수선(水山)은이른 봄 부활제 때에 피기 때문에 부활꽃이 라고 불리 운다. 그러 나 일반적으로는 「촌놈의 꽃」이라고 천시하였다. 그룬트비히는 수선화에 붙이어서 예언자적 시를 읊어 덴마아크의 장래를 상징하였다. 긴 겨울 동안 눈과 서리에 죽지 않고 견디었다가 이른 봄에 가장 일찍 피는 것처럼,천대받는 농민이야말로 덴마아크가 맞이할 봄날에 가장 먼저 필 부활 꽃이라고 비유로 노래 하였다

오, 그리워라 수선화

마율의 가난한 접 풀에

깨끗이 핀 수선화

천대받아온 수선화

장미 보다도 더 귀하여라

조상의 무덤가에 피어나는 부활꽃

온갖 꽃 모두 시들었는데

회망의 이른 봄을, 기쁨의 한 해를

알리는 사연 네 이름 부활초

그는 비참한 현실에서 북 유럽의 빛나는 장래롤 확신하였다. 그것을 우리는 다음 시에서도 엿볼 수가 있다.

사나운 눈보라와 폭풍우

대지를 온통 휩쓸어도

우뚝히 셔리라 큰 바위로

북유럽 황금 시대롤 위하여

그는 북 유럽의 역사를 알려 주고자 노력하였다. 모든 학교들이 쓸데없이 정력을 라틴어와 그리이스어 등에 쏟아넣을 해에 그는 순수한 덴마아크어의 교수의 필요를 절실히 느끼고 이의 실천을 주장하였다. 그는 역사 연구의 공로로 국왕으로 부터 장학금을 받았으므로 그는 약흔한지 7년만인 35세가 되어서 비로서 결혼을 하게 되었다. 이로 마루어 보아도 그의 생활이 얼마나 빈곤 속에 악전 고투하였는가를 우리는 짐작할 수가 있을 것이다.

1822 년에 그는 코펜하겐의 구주 교회(救主敎會)의 목사로 임명되었다. 그의 설교는 예언자처럼 높고 권위가 있었으며 사도와 같이 열렬하여서 점차로 사람들이 그의 설교롤 듣고자 모였다. 그는 교회를 널리 개방하여.누구나 자유로 설교를 듣게 하였다. 그 당시에는 목회도 일정한 구역이 정해져서 많은 구속을 받았다.

국민들도 자기 들의 소속된 교구이외의 목사의 설교는 들을 수 없었으며,더구나 자유 집회는 허용되지 않았다. 그룬트비히는 그 규정을 깨뜨리고 교회를 개방하여 설교와 집회의 자유를 주장하였다.

그는 한갓 관습척인 교회의 의식 편중과 부당한 교권자의 횡포와 신앙의 자유 속박을 배격하고 오직 성서의 진리의 말씀만이 인생의 생활에 빚과 힘을 주는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1825년 6월, 신학 교수안 크라우센이 「구교와 신교의 교회 정책 및 교지(敎冒)와 의례」라는 8백 면의 큰 저서를 출판하였다. 이 청년 교수는 상당한 인기롤 얻고 있는 중견이었므로 그의 그릇된 주장이 많은 후진들에게 적지 않게 미칠 것을 염려하여 그룬트비히는 이틀 동안에 반박 논문(反駁論文)을 탈고하여 「교회로부터의 답장」이라는 소책자률 출판하였다. 이것은 덴마아크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키게 되었다.

학자와 교직자들은 크라우센의 주장에 가담하였고 일반 대중들은 그푼트비히의 자유 사상에 찬성하였다. 크라우센은 성서의 합리적, 신학적 해석을 주장하였고, 그룬트비히는 자유로운 신앙적 해석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것을 기회로 반항적이며,개혁적인 그룬트비히를 미워하던 무리들이 일어 나서 1827년에 그는 교회에서 추방당하였고,적지 않은 벌금을 물었으며,그의 저술은 일일이 치안국의 검열과 허가를 얻도록 하였다. 이것은 그룬트비히에 대하여 가장 가흑한 구속이요,형벌이었다.

그는 다시 서재에 틀어박혀 역사 연구와 사색에 몰두하게 되었다. 역경에 처할수록 그의 지조와 주장은 더욱 굳어지고 확실하게 되었다. 뎀마아크의 살아날 길이 분명하건만 교육자들은 이 주장에 냉담하였고,성서의 가르침이 분명하건만 석상(石像)같은 교직자들의 심금은 울리지 않았다. 명예와 권력과 지위에 판계없는 소박한 민중만이 그에게 공명하였나 그들은 너무도 무지하였고 또 투쟁에 무력하였다.

직업종교가들이 교리와 신학적 해석만을 고집하는 것은 국민의 실생활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였고, 오히려 역경올 비관하는 심정만을 불붙일 뿐이었다.

그룬트비히가 제도와 의식에 포로가 되어 화석같이 된 그 때의 교회가 신앙의 중심에서 멀리 이탈하였옴을 경고하고,한갓 형체를 지키는 형식주의롤 반대하며 열렬히 성서 중심의 자유 신앙을 부르짖은 것은 얼마냐 자유스려운 주장이며 당연한 주장이었던가. 그는 1827년부터 7년 동안이나 설교를 금지당하였다. 그의 위대한 넋이 낡은 오랜 껍질올 깨뜨리고 하늘을 자유로이 날으는 까닭에 교직자들은 그를 정통이 아닌 이단(異端)으로 규정하고 이 당돌한 위험 분자를 봉쇄해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위대한 자유의 혼은 그렇게 쉽게 감금당하지는 않았다. 그는 거리낌없이 국민에게 또 다시 자유의 복음을 전파하였다. 다량의 시문을 발표하는 한편,교육의 개혁 운동,농민의 민권 확장 운동 기타 각 방면으로 활동하였다. 그의 정당한 구국 정열은 붓과 혀롤 통하여 요원의 불처럼 퍼져나가 날로 수많은 공명자를 얻게 되었다. 교권자들의 압박을 받으면서도 농민,직공,노동자들의 자유 신앙 운동이 일어나서 곳곳에서 자유 집회가 빈번히 개최되었다. 자유 신앙의 운동은 평신도들이 탄압을 무릅쓰고 맹렬히 싸우는고로 이것을 막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푼트비히는 사람의 생활을 무시하는 종교와 교리를 반대하였다. 그는 사람이 내세를 중히 여기는 동시에 또한 현세를 소훌히 보지 않아서 현재와 내세를 모두 건실히 여길 것이며 사랍의 영 (靈)과 육(肉)이 잘 조화되는 생활만이 정상의 신앙생활이라고 주장하였다. 곧 교리 해석에만 열중하고 실생활을 참되고 올바르게 발전시키고자 하지 않는 점을 강력하게 배격한 것이었다.

1839년에 국왕의 특지로 그룬트비히는 왈도 병원 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여기는 정부의 관할 구역 이외였으므로 자유신앙단을 만들어서 자유 신앙의 부활과 덴마아크 정신 고취(鼓吹)에 힘쓸 수가 있었다. 왕비 가타린 아마린은 그루트비히를 몹시 존경하는 분으로 항상 이 교회에 참석하여 설교를 듣고 음으로 양으로글르 돕기에 노력하였다. 이 후로 부터 자유 신앙단은 농촌으로 널리 퍼지게 되었다.

진리는 페닉스(不死鳥)의 넋과 같아서 그의 주장은 점점 끌 수 없는 불이 되어 전 국민의 지지를 얻게까지 되었다. 그리하여,결국 신앙의 자유가 국가적으로 법에 의하여 보장되기에 이르렀다. 1921년의 통계를 보연 루우터파의 자유신교인의 수는 322만 이상으로 98% 의 다수에 달하였다. 이신교는 결국 덴마아크의 국교가 되었고 후일에 중국과 인도에도 선교사롤 파견하여 복옴을 전파하기까지에 이르렀었다.

그룬트비히의 가장 큰 관심사는 당시의 교육계의 상황이었다. 그의 현명한 눈에는 교육계의 전반이 생명을 잃어 버린 "산 송장"으로 보였다. 덴마아크롤 구원할 유일의 희망인 모든 학원 안에는 약동하는 생명과 불타는 정열이 없었다.그의 가슴에는 교육의 본격적 요소인 인격의 불이 꺼져 있었다. 교사들은 월급을 위하여,학생들은 간판올 위하여 학교에 드나드는 것이었다. 이 공전 절후(空前絡後)의 난국을 어떻게 이러한 생명들이 개척해 나갈 수가 있을 것인가. 생명의 묘판(苗床)인 학원과 교회가 이렇게 무기력하여 낡은 껍질 속에 갇히어 잠자고만 있다면 결코 이 혈로(血路)를 열어갈 수는 없다고 그룬트비히는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룬트비히는 주야로 쉬지 않고 막대한 양의 글을 써서 국민을 깨우치고 격려하였다. 그는 정력을 기울여서 덴마아크의 예로부터의 위대한 민족성과 찬연한 과거를 국민에게 알리어 온갖 고난을 돌파할 용기와 신념을 기르고자 노력한 것이다. 그는 실로 3만 페이지에 달하는 글을 쓴 것이다. 그는 문학 자체롤 목적으로 하여 글을 쓰기보다는 문학으로서 국민의 심금을 울려 정신적 각성을 일으키고자 한 것이다. 시만도 l천 4백여 종이며,현재 덴마아크에서 부르는 찬송가도 백여펀에 달한다. 그러므로,오늘날에 있어서도 그의 시와 노래는 덴마아크 국민의 가슴에 감격을 일으켜 애국심을 북돋아주고 있다. 그러나, 그룬트비히는 아무리 훌륭한 저술이라도 그것은 결국 「산 말씀」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 었다.

그러므로, 문필만으로는 덴마아크 국민의 가슴 속에 뜨거운 애국 정신을 불붙여 자라나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고펜하겐에 덴에마아크 협회롤 조직하여 때때로 모여 강연회롤 개최하고 또 노래를 지어 민중과 함께 불렀다."산 말씀"의 운동은 점점 퍼져서 농민 계몽에 큰 효과롤 내기 시작하였다. 1년 동안에 천여 곳에 강연회가 열려 역사,과학,정치,경제,종교,문학 등올 연제로 「산 말씀」의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수많은 연사들은 모두 그룬트벼히의 주의(主義)아래 교육 받은 사람들이다. 이 강연회의 반향은 심히 커서 전 국민들의 여론을 좌우하게까지 이르렀다.

그는 참된 교육만이 덴마아크의 살아 나갈 수 있는 길이라고 믿었다. 덴마아크의 청년들이 복지 사회롤 바라보고 이상의 날개롤 퍼덕 일 수 있게, 그들의 가슴에 「산생명」의 말씀을 붙어 넣어서 직접 인격적 상응(相應)이 될 수 있는 정신 교육만이 정의와 사랑으로 민족과 국가를 건져낼 수 있는 길이라고 확신하였다. 교육이야말로 덴마아크의 전 국민을 힘 있게 결합시켜서 새로운 건설의 튼튼한 초석을 만들 수 있다는 신념이 굳을수록 당시의 썩은 교육계를 바라보고 건딜수가 없었다. 그는 교육의 근본적 혁신의 시급함을 통철히 느끼게 된 것이었다.

그룬트비히는 당시의 학교를 평하여 "죽은 학교" ,"암흑의 학교"라고 통렬히 공격하였다. 반가족적이며,반민족척인 당시의 유행하던 사조(思潮)는 북 유럽의 정신적 보옥(寶玉)을 파괴하고 있으며 학원도 또한 완전히 이 사조에 지배되고 있었던 까닭이다. 고상한 윤리(倫理)와 애국 애족의 정신은 모두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것으로 비웃는 풍조가 지배적이었다. 더구나 덴마아크의 그 찬란하던 역사는 여지없이 정복되고 짓밟히어 최후의 기름진 영토인 흘스타인과 슬레스버히를 상실한 비운의 날에 자포 자기의 국민은 고귀한 인생의 목표도 민족과 가정에 대한 진정한 사랑도 거의 잃어 버리고 있었다.

국민에게 생의 가치와 역사적인 자기를 각성시키는 것이 국가 부흥의 열쇠이며 그 밖의 모든 문제는 이 근본 문제의 확립이 된 후라야 바로소 풀리게 되는 것이라고 믿고 이 확고한 목적을 위하여 우선 종래의 교육을 근본저으로 혁신하고자 결심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혁신의 열쇠는 진리와 민족을 뜨겁게 사랑하는 교사의 양성과 그들의 헌신적인 활동에 있다고 확신하였다. 이는 참으로 그룬트비히의 탁월한 착안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지식있는 이기주의를 만드는 교육은 나라와 민족과 자신까지도 파멸의 심연(深淵으로 집어 넣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지식있는 이기주의와 황금 만능주의롤 강하게 배격한다. 우리는 민족 자신 뿐만 아니라 실로 인류의 자유를 등에 지고 이 전대 미문(前代末聞)의 난국을 걸어가고 있는 현금에 처하여 우리의 교육계를 철저하게 검토하고 나아갈 진로롤 분명히 해야 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룬트비히는 부르짖었다.

"먼저 참된 덴마아크 사람이 되라. 그 다음에 크리스챤이 되라. 조국 덴마아크롤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한 인간에게는 신의 축복은 있올 수 없다 ."

그는 애국적인 청년 교육올 위하여 자유 학교를 설립하고자 분투하였다. 그룬트비히가 직접 국왕에게 상주(上奏)한 말을 보연 그 뜻이 얼마나 간절하였던가를 우리는 쉽사리 엿볼 수가 있을 것이다.

"폐하께서 국민을 위하여 자유 학교를 세우신다면 확실히 도탄에 빠진 백성을 널리 건져낼 수가 있옵니다. 국민을 구원하고자 하는 이 샘물이 청순하기만 하다면 민중은 팔방으로부터 모여 와서 이 샘물을 마시고자 할 것이며, 그 가치와 명성은 세기를 통하여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이 샘물을 마시면 소경들은 불 것이요, 귀머거리들은 들을 것이요, 앉은뱅이는 지팡이를 던져 버리고 숲속으로 뛰어다닐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룬트비히는 자기의 지향하는 바 자유 학교는 능히 덴마아크를 구원하여 빈곤, 공포,죄악에서 벗어나 참 자유와 행복을 얻게 할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당시의 국왕인 크리스찬 8세와 왕후 아마련은 요두 진심으로 그의 선각적인 사상에 공명하여 목적하는 자유학교를 구체화시키고자 하였으나 완고한 정부 관리들과 편협한 일부 교육자들이 맹렬히 반대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그들은 그룬트비히를 비방하여 치자(癡者)의 꿈이 라고 욕하였다.

그룬트비히는 자유 학교 설립에 실패했으나 왕과 왕후의 호의에 감격하였다.그는 다시 왕에게,

"종래의 획일적 교육은 학생을 학문으로 중독시키고 용기와 정신을 위축시켜 활동을 상실하게 합니다. 자유 학교는 생명으로 청년과 접촉함으로써 흥미롭고, 유쾌하고,그리고 순직하게 성장할 것입니다. 그들은 인간으로서, 농민으로서,또 국민으로서 조국에 대한 관념이 명확하고 환희와 감사로써 국민적 공동 생활을 영위할 것입니다. "

라고 아뢰어 감사를 표시하였다.

오늘에 이 자유 학교의 실패를 바라보면 오히려 "새옹의 마 (塞翁之馬)" 가 된 것 같다. 그룬트비히의 이상은 권력을 중심으로 시작되지 않았고 민중 운동으로서 국민 가운데서 움터 나와 어느 것이나 사립 국민 고등 학교로 발전하게 되었다. 오늘에 있어 멀리 그 시대를 바라보면 오히려 자유 학교의 실패가 얼마나 다행한 일이었던가를 알 수 있게 한다.

그룬트비히는 조국의 발전을 위하여 분기할 줄 모르는 무위 안일(無爲安逸)한 청년들에게 이렇게 노래를 읊어 각성하라고 격려하였다.

아침 해는 숲 위에 떠올라서

만물은 황금의 지붕처럼 빛난다

닭들은 홰를 치며

아름다운 말을 고하지 않는가

깨어라 어서 깨어나라

덴마아크의 젊은 용사들아

쾌활하게 일어나 혁대롤 조여애라

역사는 찬연하게 고대시(古代詩)에서 빛난다

왕은 자유 민권 요구의 여론을 존중하여 국민의 참정권 실시롤 약속하었다. 그룬트비히는 몹시 감격하여 기뻐서 뛰기도 하였으나 농민들은 여전히 무지 몽매 하였고 교육도 여전히 생명 없는 죽은 교육이었다. 그는 농민 계몽과 교육 개혁을 더 한층 통감하게 되었다. 당시의 덴마아크의 교육은 청년들이 실생활에 있어서 아주 무능한 인간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또 교육은 국민 전체를 위한 것이 못되었으며 농민의 대다수는 아무런 혜택을 받지 못하였다.

학생들은 손에 괭이와 망치를 쥐고 실지로 일하기를 부끄러워했다. 결국 그 교육은 몇 사람의 학자와 관리를 양성하는데 지나지 뭇하였고 나머지 대부분은 가정에도,농촌에도,국가에도 쓸모없는 고등 유인(高等遊民)의 양성일 뿐이었다.

그들은 이 비현실적 교육으로 희생되는 사람들이었다. 국가가 막대한 재정을 들여 이러한 죽은 교육만을 하는 것을 생각하여 보연 한심한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1830년에 정치 개혁이 얼어나 정치의 실권이 왕으로부터 국민의 손으로 들어와 의회 정치가 되면서부터 그룬트비히는 국민 고등 학교의 새 안(案)을구체적으로 선전하여 급속한 국민 교육의 필요성을 더욱 역설하였다. 민중이 우매(愚昧)하면 민주 정치는 오히려 일부 야심가들에게 이용되어 덴마아크는 더욱 도탄에 빠지기 쉬움을 경고했다.

그룬트비히는 노년에 이르러 자신이 스스로 학교롤 세우는 것을 단념하고 열심히 교육의 모순을 지적하고 새 교육의 이상을 널리 고취하여 많은 청년들의 공명 (共鳴)을 얻기에 힘썼다. 그는 교육은 인생에 대한 열과 흥미를 일으켜서 보람있는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또 높은 교육과 문화의 향상을 목표로 하는 순수하고 분명한 것이라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인생의 공통된 갈망이어야 한다. 학원이 결코 자격증올 판매하는 곳이어서는 안된다. 간판을 얻기 위한 교육은 죽은 교육이다.

교육의 방법에 있어서도 교과서에 기계적으로 얽매어서 생명올 자유로이 자라지 못하게 하는 졸렬한 짓은 시급히 버려야 할 것이다. 교사들의 산 말씀이 교사 자신들의 높은 인격을 통하여 학생들의 인격을 소생시켜야 한다. 학생들로 하여금 인생의 고원한 목표를 갖게 하는 동시에 실생활에 유능한 인물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교재의 내용과 전달의 방법도 오두 혁신하여야 한다.

서로 도와 뭉치는 협동의 정신과,인격 평등의 사상과,뜨거운 애향,애족,애국의 정신을 올바르게 북돋아 길려야 한다. 청년들의 마음에 마덕과 여유가 있는 건실한 애국심을 길러 주려면 교육을 필연적으로 「역사와 시의 기초」위에 수립하여야 한다. 그룬트비히는 당시의 교육에 대하여 이러한 구상을 하였었다.

그룬트비히의 이같은 교육 이념은 날이 갈수록 많은 공명자를얻게 되어 그가 바라던대로 젊은 교육자들의 활동으로 세계에 유례없는 성과롤 거두어 국가롤 위기에서 구해내고 오늘의 번영의 기초를 만들게 되었다.

1848 년에 국왕은 보수당 내각을 총 사직시키고 재야(在野)의 정객들로 자유당 내각을 조직하게 하여 보통 선거를 단행케 하였다. 이것도 그룬트비히의 헌책(獻策)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는 65세 해에 출마하여 국회의원으로 피선되었다.

그는 선각자들의 상례와 같이 의회 안에서도 많은 정적(政敵)이 있어서 그의 정당한 주장이 여러번 부결되었으나,항상시간 문제이었을 뿐으로 조만간 그의 주장은 결국 실현을 보게 되었다. 그는 84세가 되는 1866 년까지 국회에서 활동하여 교육,종교,산업,토지 정잭의 개선에 진력하였다.

세계에 유례가 없는 덴마아크의 소농법도 결국 그룬트비히의 이상의 일부롤 실현한 것이라 할 것이다. 그는 국회에서 토지 문제에 대하여,

"어떠한 사람을 물론하고 자기가 태어난 조국 안에서 토지를 소유하고 살 권리가 있는 것이다. 어떠한 법률이라도 이 권리를 빼앗거나 저지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룬트비히는 언제나 l 인 l 당으로 자유,평등 사상에 배치하는 모든 악제도롤 분쇄하는 데 있어서 그 불굴의 의기는 이를 따를 사람이 없었다.

그는 진리를 위할뿐 한몸의 영욕을 돌봄이 없었고 정부 부패의 권세와 싸워 사회 정의를 수호(守護)하기 위하여는 생명을 던지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우리 나라의 국회 의원들은 이에 배울 바가 없을 것인가?

보신 (保身)과 차기 선거의 방편으로 잇 따른 무상한 변절(變節)은 어떻다 할 것인가? 현명하고 용기있는 국회 의원들이 있는 나라에 부패한 정부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룬트비히의 국회의원 생활에 있어서 우리들의 가슴을 후련하게 하는 이름다운 일화를 여기에 기록하지 않을 수가 없다. 선거에 있어서 전국적인 투표를 한다면 그룬트비히가 압도적으로 많은 표를 얻을 것을 의심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러나,소선거구에 있어서는 언제나 평탄하게 당선될 수는 없었다. 그룬트비히가 66세 해에 코펜하겐 11구에서 첫번 출마를 하였을 때의 일이다. 연설과 수단이 능수능란한 세무 관리출신자와 대결하였는데 불과 56표의 차로 낙선되어 전국의 큰 화제가 되었다.

그 때에 2천여 명의 애국자들이 연서하여 그를 칙선의원(勅選議員)으로 임명하도록 국왕께 호소한 일도 있었다. 그런데 표레스죠 선거구에서 당선된 한센은 스스로 사퇴하고 그푼트비히를 보선(補選)시키기에 열성을 다하였다. 이것은 덴마아크 정치사에 영원히 빛나는 아름다운 유산이 될 것이다. 또 어느 선거구에서는 모든 경쟁자들이 스스로 사퇴하고 그룬트버히를 무투표로 당선시킨 일도 있었다.

1866년 개원식 해에 83세의 최고령자안 그룬트비히는 임시 의장으로 등단하여, 다음과 같은 개회사를 하였다.

"나는 우리 나라의 첫번 의회가 개회되었을 때에 연장자로 여러분께 인사롤 드린 이래 이미 18년의 세월이 지나갔다. 그 동안에 국내의 모든 문제는 많이 개선되어 국민이 언론을 비롯한 모든 자유를향유하게 된데 대하여 감사하는 바이다. 오늘의 나의 인사는 이것이 마지막이 될지도 오른다. 그러나,상하 양원의 의원 여러분과 함께 내가 진심으로 기뻐하고 크게 위로되는 바는 자유가 죽었던 덴마아크는 물러가고 산 자유의 새 덴마아크가 이렇게 건설된 것을 크게 기뻐하여 마지 않는다."

그룬트비히는 1872년 10월 3일 89 세로 코펜하겐에서 세상을 떠났다. 세월이 지 나갈수록 더 많은 덴마아크 사람들의 가슴 속에 그 위대한 애국의 지성이 살아 움직이어 정치도, 산업도,교육도 원활히 발전되어 그의 이상이 꽃피어 갔다.

고펜하겐 북쪽에 거대한 그룬트비히 기념 교회가 서 있다. 1921년에서부터 1940 년까지 20년의 장기에 걸쳐서 건축된 특유한 덴마아크식 건물이 다. 이 교회 에 사용된 벽돌은 전국에서 그룬트비히를 존경하는 사람들이 한 장씩 모아다 지었다고 한다. 가정마다,학교마다,관청마다 이 위대한 구국 선각의 초상이 걸려 있음은 덴마아크 사람들이 얼마냐 그를 사모하고 기리고 있는가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참으로 위대한 덴마아크의 애국자는 어찌 덴마아크만의 자랑이겠는가. 실로 인류의 자랑이라 하겠다.

새 역사를 위하여- 9.구국의 원동력인 교육-2.

유달영

2.새 교육(敎育)의 선봉(先鋒) 크리스텐 콜

우리가 덴마아크의 교육을 연구하자면 필연적으로 크리스덴 콜(Kristen Kold) 이란 인물을 알아야 한다. 그 까닭은 크리스텐 콜이 야말로 그룬트비히의 이상을 순수하게 받아들여서 비상한 열성과 탁월한 역량으로 전 생애를 바쳐서 국민고등학교의 교육을 실천에 옮겨 발전시킨 선구자이기 때문이다.

국민고둥학교를 스스로 설립하고 또, 이 사업을 위하여 평생을 바친 사람들이 허다하건만 크리스덴 콜이 국민에게 특별한 존경과 찬사를 받으며 그 명망이 가장 높은 것은 그가 경영한 사업의 규모가 커서가 아니라 콜이 국민고등학교의 옳은 방향을 잡아 현명하게 실천한 까닭이다.

콜은 1816년에 유틀란드의 서부의 시골에서 구두장사(製靴商)의 아들로 태어 났다. 어려서부터 듵고 자란 교훈은「하찮은 물건이라도 소중히 여기고 아껴서 써라.」「듣는 사람들 의 마음을 즐겁게 하도록 선의로 말하기에 힘써라.」하는 말씀이었다. 집이 가난하여 학교에도 별로 다니지 못하였고 고생스럽게 국민학교를 졸업한 다음 양친을 열심히 설복하여 스네트스테트에서 2년제의 초등 교원 양성소롤 겨우 수료하였을 뿐이다.

이 양성소를 수료한 다음에 그는 가정교사가 되기도 하고 보조교사 노릇도 해보았다. 그가 독일과 인접한 슬레스비히에서 농민의 자제를 가르치고 있을 때에 덴마아크의 민 족적 각성을 위하여 맹활동을 하였다. 독창적이고 열렬한 성격의 콜에게는 그 관료적이며 형식적인 죽은 교육이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이동안 그는 학교의 교수법이 몹시 혹독하고 너무 기계적으로 많은 폐해(弊害)가 있음을 느꼈다. 어느날 한 소녀가 교리(敎理)의 문답(門答)이 너무 어려워서 이해할 수도 없고 의울 수도 없다고 흐느껴 우는 것을 보았다.

[저렇게 무리하게 암송을 강요하는 것이 과연 신의 뜻이겠는가? ] 하는 의심을 품게 되었다. 콜은 학생들에게 교리의 내용읍 알기 쉽게 먼저 설명하여 이해시키고 그 다음에 그들과 문답을 시작하여 보니 그들은 묻는 까닭을 아는대로 틀림없이 대답을 쉽게하고 또 기억도 잘 하였다. 그 후부터 콜은 교과서를 집어 던지고 독창적인 교안을 만든 다음에 학과의 내용을 될수 있는대로 쉽고 흥미있게 문답식으로 유도해서 싫증이 없도록 하여 목적한 바를 깨달아 알수있게 가르쳤다. 콜은 재래의 전통을 파괴해 버린 것이다.

실력 없는 교사들이 자신을 은폐하는 연막으로 불필요한 어려운 용어와 의국어를 무수히 나열하여 목적하는 내용을 깨닫기 어렵게 하며, 한편 이런 것을 오히려 박학한 교사로 알고 있는 학생들이 있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진리를 평이한 표현으로 이해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경모(敬慕) 하는 유명 한 어느 학자는 자기 의 쓴 글을 반드시 국민 학교 상급반 학생인 자기 딸에게 읽혀서 그가 모른다면 다시 고쳐서 쓴다고 한다.

콜의 이 파격적인 교수법 에 대 하여 문교부의 관리와 교수들을 비롯하여 교회의 목사 감독들은 반감을 갖게 되었다.이 관료적인 행정 관리들과 직업적인 편협(偏狹)한 종교가들은 콜을 교육의 이단자로 몰아서 추방해 버렸다. 교육에 비상한 흥미와 열성을 가지고 큰 사명감을 느껴 침식을 잊고 활동하던 콜은 마침내 어느 학원에서도 교편을 잡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콜은 이 수난시절에 인생의 자유에 대하여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정당한 자유가 억압받는 사회에는 아무리 큰 이익이 있다 할지라도 태양 없는 골짜기와 다를 것이 없다. 인생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보석은 자유이다. 인류의 역사는 자유를 찾아 헤메인 나그네의 역사이다, 인류는 자유를 찾기 위하여 무수한 생명을 대가로 지불하여 온 것이다.

[나에게 자유를 달라,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달라].고 외친 패트릭 헨리의 부르짖음은 결코 헨리 한 사람의 부르짖음이 아니다. 인류 전체의 시대를 초월한 절규라 할 것이다. 누구에게나 자유의 상실은 곧 죽음을 말하는 것이다.

콜은 자유를 사랑하는 청교도의 넋들이 죽음을 택하는 각오로 개척한 북미 신천지를 한없이 동경하여 마지 않았다. 그는 사람이 가진 바 천분을 자유로이 발휘할 수 있어야 함 은 얼마나 자연스럽고 정당한 권리인가를 생각한 것이다. 콜은 마침내 북미로 건너갈 결심을 하고 노력하였으나 또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는 거의 실망에 빠져 있을 때에 소아시아의 스머나로 떠나는 선교사를 만나게 되어 그 조수로 동행하게 되었다.터어키 사람들과 그리스 사람들이 섞여서 사는 이 지방에서 2년동안 노력해 보았으나 흥미를 얻지 못하였다. 다시 5년의 세월을 이역(異域)에서 무의미하게 보냈다. 이것은 혈기가 넘치는 젊은 콜에게 큰 정신적 시련기가 된 것이다.

때마침 덴마아크와 독일 사이에 풍운이 급하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애국심이 강한 콜은 의용병으로 곧 지원하였으나 귀국의 여비가 없어 배를 타지 못하였다.그는 초조해 견디다 못해서 작은 손수레 하나를구하여 약간의 짐을 싣고 2개월여에 걸쳐 도보로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 곤란한 여행 중에서 그는 인생에 대하여 많은 교훈을 얻었다. 이것이 그의 22세 때 일이었다.

1848년에 네덜란드와의 사이에 또다시 전쟁이 벌어져 콜은 사병으로 지원하여 출전하였다. 이 전쟁은 덴마아크의 승리로 끝났으므로 콜은 무한한 승리의 기쁨을 안고 돌아왔다. 그는 이 전쟁에서 국민들의 애국심이 자연스럽게 불붙음을 보았고,또 스스로 이것을 체험하였다. 콜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개인적 이해를 초월하여 국민으로서 의의 있는 생활을 영위하는 정신을 일으켜야 하겠다고 결심하였다.

콜이 명망이 높은 목사 월리 베르게달의 초빙 을 받아 그의 집의 가정 교사로 있을 때에 근처의 농민의 아들 네 명을 모아서 함께 가르쳐 보았다. 여기서 그는 자기의 생각하던 바가 확실히 좋은 교육적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1849년에 덴마아크의 헌법은 정치의 자유를 광범위하게 인정하였고, 따라서 교육에 있어서도 과거에 콜을 괴롭히던 모든 제약이 제거되었다.

콜은 마침내 학교 설립의 결심을 하고 오랫동안 저축한 전 재산을 던져서 학교 건축에 필요한 토지를 샀다. 그러나 콜이 가진 자금으로는 너무도 부족하였다. 그는 마침내 그룬트 비히를 방문하고 자기의 계획을 밝히고 지도를 받기로 하였 다. 그룬트비히는 즉석에서 그 훌륭한 특지(特志)를 칭찬하고 격려하였다, 그는 스스로 기부방명록(寄附芳名錄)을 만들어서 그 초두(初頭)에 자기의 이름을 기록하고 국민교육을 위한 새 학교의 창설을 바라는 친구들에게 콜을 소개하였다.

정성어린 찬조금이 상당히 모였으므로 콜은 1851년에 낡은 농가 한채를 사서 퓨넨주 리슬링계에 자유학교를 개교하였다. 콜이 처음으로 학교를 개교할 때에 있었던 이야기는 여원히 인류의 가슴에 큰 감명을 남길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콜이 천신만고하여 온갖 개교 준비를 마치고 나서 각지로 돌아다니면서 학생모집 광고를 붙여 놓고 초조하게 입학지원자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기 집이 학교이며 기숙사인데 최대한 20명을 수용할 수가 있어서 20명 정원의 학생모집 광고를 냈던 것이다.

그러나 날마다 기다려 보아도 지원자는 없었다. 개교 예정일 전날에야 겨우 한 명이 입학을 지원했던 것이다.

콜은 잠을 이룰 수가 없어서 밖에 나가 밤을 새워 하나님께 호소하는 기도를 했다는 것이다.「하나님 제가 희망하는 학생모집 인원이 너무 많다면 세 사람만으로 만족하겠으니 두 사람만 더 보내 주십시오. 덴마아크의 이 고난의 역사를 타개하기 위해서 심혈을 기울여 가르쳐 보겠읍니다.」

그가 이렇게 호소를 하면서 밤을 새웠다. 개학날의 아침을 맞이했을 때에 뜻밖에도 열 다섯 명의 학생들이 마차에 짐을 심고 자기집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것을 본 콜은 어린 아이처럼 뛰며 기뻐했다는 것이다. 콜의 국민고등학교의 개교날이야말로 덴마아크 역사에 새로운 기원을 긋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그처럼 외형적으로 빈약한 콜의 교육사업이 오늘에 이렇게 이렇게 큰 역사적 의의를 가지게 될 것을 안 사람은 없었다.

처음에 16세 이 상 33세까지의 학생 15명을 모집하여 수업을 시작하였다. 가르쳐 가는 중에 그는 그룬트비히의 충고가 옳음을 발견하고 18세 미만의 학생을 제외하였다. 국민적 정신교육을 하기에는 청년기에 달한 사람이 아니면 효과가 적은 까닭이다.

당시에 치충(置重)한 학과는 국사, 북유럽사, 성경사(聖經史), 북구 신화(北歌神話) 등의 역사와 덴마아크어, 스칸디나비아 문학, 음악(특히 국민가와 영웅 찬미의 노래) 등이었다. 그는 그룬트비히의 이상에 전적으로 찬동하여서 그의 뜻을 받아 건전한 국민정신 배양과 인격교육에 힘쓰고 또 배운 바가 그대로 생활에 살아 쓰일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또 교수법은 가장 평이(쭈易)한 방법 으로 학생들이 교육의 핵심을 놓치지 않게 하였다.

이 자유 학교는 후일에 덴마아크 갱생의 큰 원동력이 된 것은 물론이다. 자유 학교의 실적은 날로 뚜렷하여 마침내 퓨넨주의 여러 학교들이 교수법을 혁신하기에 이르게 끔 되었다. 그러나 평상시에 콜을 좋아하지 않는 무리들이 콜의 교육 방법을 음(陰)으로 양(陽)으로 비방하여 일시는 자유 학교를 존폐의 위기에까지 몰아넣었다. 오직 자유 학교의 학생들만이 모교의 은사 콜을 극진히 사랑하고 두둔하였다.

자유 학교는 결국 사회적으로 문제화 되어 문교부의 장학관이 직접 출장하여 신중히 학교의 내용과 운영을 조사하였다. 또 장학관은 학생들과 자리를 같이하여 문답을 시험해 보았다. 모든 학생들은 장학관이 놀랠만큼 우수하였다. 콜에 대한 중상과 혐의가 이것으로 일소(一掃)되 었을 뿐더러 자유 학교가 위대한 사업을 덴마아크에서 하고 있는 사실이 인정되었다. 이 장학관의 보고로 인하여 문교 위원회는 자유 학교에 국고금을 보조하도록 추천하기에 이르렀다.

리슬링게 시대의、콜의 생활은 극도의 빈곤(貧困)과 싸웠다. 부식물이 거의 없는 빵만으로 생활하였고 별로 차를 마셔보지도 못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교육 생활에서 그는 큰 만족을 느꼈고 더없이 즐거웠다.

콜의 자유 학교는 리슬링게에서 딸비로 이전되었고 여기서 9년만에 다시 다람으로 옮겨 갔다. 다람의 학교는 교사도 훌륭하고 또 상당한 면적의 농장이 부설(附設)되어 있었다. 다람 국민고등 학교는 참으로 공적이 혁혁 하고 또 많은 인물을 배양하였다. 1천 3백여 명의 학생들이 콜과 함께 생활하고 함께 공부하였던 것이다. 교문을 나가는 청년들은 모두 가슴에 포부를 가지고 보람 있게 살아 보려는 개조된 인물이다. 그들은 벌써 이기적 생활을 청산한 사람들이다. 으젓이 살아 개인보다 더 큰 것을 위하여 작은 나(小我)를 바친 애국 청년들이다.

콜의 교육 생활은 그대 로 발분망식(發憤忘食)의 지성스러운 생활이었다. 콜은 다람에서 8년 동안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학교를 경영하였다. 콜은 지식을 뇌신경에서 뇌신경으로 전달하는 기술자가 아니라, 생활과 인격을 통하여 영 (靈)에서 영으로, 가슴에서 가슴으로 뜨거운 이상을 불붙여 주고 일깨워 주는 스승이었다.

흐르만씨는 콜에 대하여 이렇게 평하였다.

『콜은 위대한 그리이스의 대철인(大哲人),곧 세계 진리를 가져 오게 한 진리의 산파(産婆) 소크라테스의 교수법을 상기 하게 한다. 콜은 그 시절의 덴마아크의 소크라테스이었다. 그의 교수법도 생활도 다 소크라테스를 방불(彷佛) 하게 한다』

콜은 모든 학생들의 가슴 속에 숨어있는 고귀한 것을 깨워 일으키는 능력이 있었다. 그는 순결하고 고상한 인생의 생활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가를 학생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능력이 있었다. 이 능력이야 말로 콜의 인격에서 솟아나오 는 힘이었다. 그는 교사임에 그치지 않고 실로 학생들의 다시없는 좋은 친구였다. 콜은 교육 생활의 대부분을 학생들과 한 식탁에서 먹고, 한 침실에서 자고, 함께 담화하고, 노래 부르고, 함께 일하고 살았다. 오늘의 국민고등학교가 특히 가정적인 특색을 띠우게 된 전통적 특색은 콜에게서 시작한 것이다. 여름에 젊은 여자들을 교육하게 된 것도 콜이 시작 한 것이다.

콜은 그룬트비히의 교육 이상을 그대로 실천한 위대한 스승이었다. 그는 한 권의 저서도 후세에 남기지 않았으나 그 교육의 성과는 시냇가에 자라는 무성한 나무처럼 자라나고 있다. 콜은 겨우 2년제의 초등 교원 양성소를 수료한 사람인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학벌을 코에 걸고 부당한 지위와 권세를 잡아서 일세 (一世)를 횡행해 보려는 무리들은 콜의 숭고한 인격 앞에 참괴(慙愧)함이 있어야 할것이다. 그들은 모두 세상을 독(毒)하고 자기를 해하여 마침내는 불 나비의 최후를 면치 못하게 된다. 우리가 세계사를 읽을 때에 실로 대다수의 위대한 인물들의 이력이 호화로운 학벌을 배경으로 함이 없음은 참으로 흥미있는 사실이라 할 것이다.

국민고등학교 중에는 콜에 비해서 심원(深遠)하고 진보 된 학문적 수양을 쌓은 인물들에 의해서 창설된 학교들이 많지마는 콜처럼 그렇게 큰 감화를 준이는 없었다. 콜은 1870년 다람에서 55세로 세상을 떠났다,

우리는 콜이 남기고 간 말을 더듬어서 그의 위대한 교육의 근저를 살펴 볼 필요를 느낀다. 콜이 재학 시절에 인생 문제로 몹시 번민하고 있을 때,우연히 한 농부의 소박한 신앙의 체험담을 듣고 그는 비로소 기독교를 믿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그 후부터 신앙이 그 전 생애를 한결같은 방향으로 이끌고 가서 그의 공적을 인류 교육사에 빛나게 한 것이다.

콜이 다람에서 교육 사업 에 열중하고 있을 때에 그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그의 교육 방침을 물어보면 그는 늘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나는 I8세 때에 신(神)과 이웃을 사랑하는 도리를 배워서 비로소 인간으로서의 참 행복을 느끼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다른 사람에게도 나와 같은 마음의 행복감을 가질 수 있는 신의 은혜를 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나는 나의 있는 힘과 시간을 바칠 결심을 하였다. 이 국민 고등 학교의 목적도 결국 신을 공경하고 나를 사랑하고 또 사람들을 형제처럼 사랑하는 길로 청년들을 인도할 따름이다]

콜의 이 말로 미루어 보면 청년 콜을 감격하게 한 예수의 정신이 그의 일생을 지배하였으며, 한결같이 교육 사업에 진력하게된 까닭도 알 수 있다. 경신 애린(敬神愛隣)의 정신이 없는 곳에 참 평화와 참 행복의 광명이 없음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이다.

우리는 어느 학자의 다음과 같은 말에 흥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칼 마르크스는 학대받는 사람들을 동정하기보다는 학대하는 사람들을 미워하는 분노가 강렬한 사람이 다, 그의 사회 학설은이 분노 위에 세워진 것이다. 또 격하기 쉬운 성격의 주인들이 그 밑에 모여든 것이다. 이 분노의 사상과 행동에 는 자연히 위협, 감시, 살륙(殺鐵), 밀정(密懷), 함정 등등 의 검은 그림자가 어디까지나 떨어지지 않고 따라 다닌다. 그리하여 이러한 것들로 쌓아올린 사회는 아무리 강한 힘을 자랑할 수 있더라도 또 공명 평등을 자랑할 수 있더라도 참평민적 평화와는 인연이 먼 것이다.]

참 평화는 전당같은 큰 집보다도 오히려 3간에 잘 깃드린다. 항상 분노로 가득찬 가슴 속에 따스한 태양이 비치는 평화의 동산이 있을리 없다.평화와 행복이 분노에서가 아니라, 자기를 희생하는 형제애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우리는 콜의 증언으로 더욱 확실히 깨달을 수가 있다.

콜이 자유학교의 교장으로 있었을 때에 그가 한 다음 말을 살펴보면 그 교육의 이념을 우리는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다.

[나의 자유 학교는 어느 학교보다도 가장 훌륭한 학교라고 나는 믿는다. 레딩에 세워진 학교는 독일에 대항하여 가장 강렬한 민족심을 기르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 학교는 독일과의 마찰이 가장 신한 국경지대 쉴레스비히에 설립된 것으로 그룬트비히도 덴마아크의 정신의 보루(保壘)라고 가지 칭찬한 학교이다. 이 학교는 아스코브 국민고등학교의 전신이다.

그러나 이 목적을 달성한 날에는 그 학교으 사명은 다 한 것이다.힌흐름에 세워진 학교는 농민의 권리를 확장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이 것도 그 목적을 이룬 날에는 벌써 그 학교의 존재의 필요는 없어지는 것이다.(이 학교는 후에 사실로 폐교되었다.)

그러나 나의 이 자유학교는 주검에 대한 생을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다. 이 세계가 존속하는 날 까지는 이 학교도 필연적으로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콜은 언제나 학생들에게 무엇이 보람 있는 인생인가에 대하여 가르쳤다. 어느날 한 학생이

[생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큰 감동을 줍니다 그러나 귀중한 말씀을 다 기억할 수가 없어서 큰 걱정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콜은 그 학생에게 곧 이렇게 대답하였다 『염려 말게,보통 지식이라면 모르거니와 내 말은 그것과는 다른 것일세. 땅속에 토관(土管)을 묻었다면 그위에 표지가 있어야 곧 찾아 낼 수 있겠지마는 씨를 심는 곳에는 표지가 없는 것일세. 씨를 심은 자리에서는 반드시 싹이 나오게 마련이니까, 깊이 느낀 것은 필요한 때에 틀림없이 다시 살아 나오는 것일세.]

얼마나 확고한 신념인가, 참으로 인생의 교사라고 할 것이다.

콜의 교육 방침은 결코 목전의 것을 위한 것이 아니며, 조국 번영의 영원한 동력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콜의 말 그 대로 국민 고등 학교의 생명은 역사와 함께 길 뿐만 아니라 오늘에는 국경을 넘어서 여러 나라로 퍼지고 있는 것이다. 콜의 견실한 신앙과 뛰어난 지능과 지성스러운 봉사의 협동 정신이 덴마아크의 교육사에는 물론 인류 문화사에 불멸의 공 적을 남겼다.

국민 고등 학교와 콜을 찬양한 어느 학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개인적인 자기를 뛰어 넘어서 더 큰 것에 몸과 마음을 바치는 진정한 애국심, 조국을 영원의 동력에 연결시키는 교육은 인류로서 참으로 자랑할 만한 것으로 덴마아크롤 부흥시키 공적의 반분(半分)은 콜에게 돌리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지식의 소매상을 교육으로 오인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은 참으로 한심하다.

유달영 [새 역사를 위하여] 8

유달영 [새 역사를 위하여] 6 협동사업의 번영-1

 새역사를 위하여 - 6.협동사업의 번영-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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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seph

2019. 2. 5.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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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역사를 위하여 - 6.협동사업의 번영-1


 


 


유달영


 


 


6.협동사업의 번영-1


 


 


1).협동사업의 발달 경로


덴마아크의 경제 발전의 직접적인 기초가 된 것은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협동조합의 발달이다.누구에게나 덴마아크와 즉시로 연상되는 것은 협동조합이다. 덴마아크는 협동조합의 왕국이다. 덴마아크의 거의 모든 사업이 협동조합화하였다. 작은 힘으로 큰 힘을 만들어서 가장 능률적으로 또 국민의 다대한 이익을 거두어 오늘의 번영의 기초를 만들었다.


 


모든 물품이 생산자로부터 소비자에게 주어지던 옛날에는 상인이라는 중간적인 특수존재가 없었다. 그러나 인구가 늘고 생활이 복잡해짐에 따라 이 직접적인 행동은 생산 소비 양자에게 모두 이익이 크기는 하나 양자가 먼거리에 떨어져 있을 때에는 교환이나 매매가 불가능하게 됨으로 이 두사이에 중개역을 하는 상인의 제3자의 존재가 있어서 대단한 편리를 주었다. 


 


그러나 상인의 수는 날로 증가하고 또 그 자본의 힘을 함부로 부려서 생산소비의 양자를 압박하며 이익을 독점하는 경향이 크게 되었다.  생산 소비 양자는 막대한 이익을 중간에서 탈취하는 상인을 거치지 않고 직접으로 연결하여 상인과 대항하며 서로를 옹호할 목적으로 생겨난 기관이 곧 협동조합인 것이다.


 


협동조합의 기원은 1844년에 영국 만체스타의 융(푸란넬)방직공장에서 일하는 28인의 직공들이 자기들의 일용물품을 싸게 구입하기 위하여 얼마식의 자금을 모아가지고 소비조합의 제도를 만든 것이 그 발단이 된 것이다.


덴마아크에는 1866년 한스 크리스찬 쏜네가 디스테스에서 조합을 조직하여 일용품과 종자등을 공동으로 사서 나누어 쓰면서부터 이것이 차차로 인근에 인식하게 되고, 그 후에 에반드 희그스브르가 평생을 이 사업에 바쳐서 적극적으로 조합의 물질적 정신적 이익이 큼을 널리 선전 계몽하였다. 이리하여 국민들은 이 조합제도에 흥미를 느끼게 되고 그 장점을 깨닫게 되어 갔다.


 


오늘에는 조합의 특점을 세계에서 가장 잘 발휘하여 인류사에 처음보는 조합의 나라가 되고 또 이리하여 고도의 문화를 이루게 되었다. 쏘련의 덴마아크 연구도 상당하여 농업의 정치최고 책임자들이 덴마아크의 조합과 공장을 시찰하기도 하고 또 모스코바에 덴마아크 농산물전람회를 열기도 하였다. 저들도 봉건적 왕국인 자본주의 국가에서 배우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덴마아크에는 생산, 판매, 구매, 신용등등의 각종의 조합이 있다. 이 것들은 그 구체적 필요성에 의하여 낙농조합, 돈육가공판매조합, 달걀수출조합, 종자수출조합, 생우수출조합, 일용품소비조합, 비료구매조합, 가축개량조합, 가축관리조합,생유검사조합, 농촌신용조합, 농촌저축조합, 등등 실로 헤일 수 없는 조합이 조직되어 활용되고 있으며, 농민들은 대개 십수종류의 조합에 가입하여 그 혜택을 입고 있다.


 


이 조합중에는 세계적으로 규모가 큰 것도 있으나 그 규모보다도 운영이 건실하며, 어디가지나 실질적이고 상호신뢰하여 협동하는 점이 모범할 것으로 우리가 높이 평가할 바이다. 덴마아크는 국민의 수보다 조합원의 수가 훨씬많다. 


 


다음에 농민들의 보편적으로 가입하고 있는 조합을 대체로 분류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농업일반에 관한 것


왕국농사협회, 농업조합, 농가조합, 농업계산협회 등


 


가축사양에 관한 것


말 사육조합, 소사육조합, 돼지사육조합, 면양사육조합, 가금사육조합, 산양사육조합, 가축번식조합, 유우검사조합, 가축결핵예방조합 등


 


축산물 가공판매에 관한 것


낙농조합, 돈육가공판매조합, 생축수출조합, 계란수출조합 등


 


산업경제용품구매에 관한 것


일용품소비조합, 비료구입조합, 사료구매조합, 석탄구입조합, 사료구매조합, 세멘트구입조합, 석탄공동조합등


 


경종(耕種)에 관한것


종자개량조합, 마령서(馬鈴薯)경작조합, 첨채(甛菜)개량조합, 니탄지개량조합, 식림조합등


 


보험에 관한 것


가축보험조합, 박해(雹害)예방조합, 화재예방조합, 상해보험조합, 폭풍손해보험조합 등


 


금융에 관한 것 


신용조합(제1종은 장기담보대부, 제2종은 단기담보대부)


 


기타에 관한 것


전기이용조합, 수도사용조합, 농업기계사용조합, 공동제분조합, 공동제빵조합, 공동제재조합, 정원조합, 과수재배조합, 과실판매조합, 양봉조합, 루산재배조합, 강연조합, 체조(體操)조합등


 


덴마아크의 농민들은 원료의 생산자로부터 자기들의 손으로 직접공장을 세워서 가공하고, 또 그 제품도 자기들의 손으로 판매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농민들은 원료의 생산자인 동시에 공장관리자이며 또 제품의 판매자이니 농민과 소비자(수요자)와의 사이에 부당이익을 노리는 상인과 자본가들이 틈을 타지 못하는 것이다.


덴마아크의 농민들은 동일한 생산을 하드라도 어느나라의 농민에 비하여서도 자연히 최고의 이윤을 거두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무리 조합의 제도에 장점이 있어서, 그 거두는 이익이 막대할 수있다 할찌라도, 국민의 건실한 협동의 단결력과 상호신뢰의 신의가 없이는 그 성공을 기할 수가 없는 것이다. 덴마아크에 조합이 발달하지 못하였을 시대에는 농가가 자본이 적은 것과 판매기술이 저열하고 또 생산품이 균일하지 못한 관계로 생산품판매에 있어서 그 손해가 컸으며, 질적 향상도 대단히 지지하였다.


 


그러나 오늘의 덴마아크 농민들은 다음과 같은 조합의 장점을 잘 알고 있다.


(1)소농들이 단결하여 소자본을 모아서 대자본을 만들어 협동하여 일하면 능히 대자본에 눌리지 않고 사업을 발전시킬 수가 있는 것.


(2)소농의 각 개인은 한 사람으로서는 외부의 신용을 얻기어려우나, 협동하여 단체를 만들면 신용을 얻기가 쉽고,은행과 외국과의 거래가 어렵지 않은 것


(3)개인으로서는 생산품을 균일히 할 수도 없고 또 생산과 가공의 모든 비용이 많이들어 뜻대로 할 수 없는 것.


(4)협동사업은 공동의 지도자를 두어 생산을 향상시키기가 쉬운 것.


(5)중간상인의 이익이 전부 조합으로 돌아옴으로 조합원들은 최고의 이익을 얻을 수가 있는 것.


(6)소비자에게 좋은 물품을 싸게 주어서(중간상인이 없음으로) 그 이익을 도모할 수 있는 것.


(7)생산자재와 그 밖에 필요한 물자를 싸고 쉽게 구할 수가 있는것.


 


조합원들은 시일이 지나감에 따라서 그 능력의 큼과 편리함과 이익의 많음을 늘 보고 또 스스로 체험하게 되었다. 저들은 적은 자본으로 단결하여 큰 자본의 기업에 대항하여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한편 국민고등학교는 열성을 다하여 협동정신을 고취하고 이 사업에 대한 교육을 베풀어 그 기반을 만들어 갔다. 덴마아크는 5리를 지나지 않아 반드시 농민들이 생산하는 우유를 모아 가공하는 협동조합의 제락(製酪)공장이 있다. 국내에 있는 이 공장들은 기천(幾千)에 달하며, 돈육가공공장도 전국도처에 있다. 또 달걀도 그 수집을 참으로 신속히 해서, 분류 판매 수출등도 덴마아크 특유의 유기적 방법으로 교묘히 처리한다.


 


농산물의 가공판매뿐 만이 아니라, 자료구입에서도 그 규모는 적을 지언정 비료, 사료, 종자, 일용품등 각 방면에 걸쳐 소비조합이 무수하며 또 농촌 신용조합도 공동경영되어 장기에 걸쳐 저리로 융자할 수가 있고, 다수한 공제보험조합이 있어 불의의 큰 손해에도 생의 안전을 넉넉히 보장하고 있다. 농구에 있어서도 탈곡기 같은 대형의 것은 공동으로 구입하는 조직이 되어있고, 가축번식에 있어서도 1000 이상의 번식조합이 있어서, 그 번식과 개량에 노력하고 있다.유우(乳牛) 등록조합만해도 1000에 달하는 성황이다.


 


각지에 산재해있는 조합들은 중앙연합회에 의하여 연락통제되고, 또 각종의 조합들은 협동조합중앙회의 최고기관으로서 다시 유기적으로 뭉치게 된다. [무슨 일을 시작할 때에 미국사람들은 먼저 기계를 생각하고 '덴마아크 사람들은 먼저 조합을 생각한다] 고 하는 말은 잘 표현된 말이다.


 


덴마아크의 농촌에는 심지어 체조(體操)조합, 강연(講演)조합까지 조직되어 있다. 이 나라 국민들은 만사를 협동으로 진행한다. 그러므로 저들은 동기(冬期)가 닥쳐올 때마다 이것을 극복하고 또 건실이 건실이 번영의 날을 자기들의 것으로 만들어 가고 있는 겄이다. 


 


덴마아크의 수출농산품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뻐터(乳酪), 베이컨, 달걀, 종자등인데 이 것들은 모두 조합을 통하여 외국시장으로 나가되 언제나 예외없이 최고급품의 영예를 획득하고 있다. 그러므로 덴마아크의 농산물을 가장 많이 소비하는 런던에서는 덴마아크의 나팔 상표가 붙어있기만 하면 덴마아크의 조합의 검사증만으로 상품을 뜯어보는 일이 없이안심하고 그대로 부린다고 한다.


 

유달영 [새 역사를 위하여] 7

유달영 [새 역사를 위하여] 5 히이드의 개척자들

 5.히이드의 개척자들 


 


1).극(劇)같은 조림사(造林史) 


히이드 협회(황무지개간협회)의 동지들의 동지들의 헌신적 활동은 날로 눈부신 성과를 거두어 같다.조국부흥사업의 영예에 참가하는 국민의 수는 점차로 늘어갔다. 달가스를 비롯한 히이드 동지들의 사업가운데 가장 고심(苦心)이 컸고 또 농업전반에 걸쳐서 초석이 된 사업은 식림사업(植林事業)이다. 이 덴마아크의 식림사업은 세계에 다시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난(難)사업이었었고, 또 그 억척스럼고 꾸준한 점과 그 난관의 해결이 거의 한개의 각본을 읽는 것 같은 극적흥미까지를 이르키게 하는 것이다.


 


이미 말한바와 같이 덴마아크는 예로부터 황무의 광야는 아니었다. 자연의 큰 혜택을 돌보지 않고 자연과의 협조를 무시한 사람들이 삼림(森林)을 함부로 버히기만 한 결과, 북해의 사나운 바람과 거친 물결과 무자비한 사풍(砂風)이 자연의 노한 채찍으로 되어 불모의 죽은 들로 변해 놓은 것이었다. 그리하여 뉘우쳐도 이미 및이지못하는 국민들이 이 동산에서 추방된 것이었다.


 


이와같은 실례는 덴마아크 뿐만이 아니라 우리는 중앙아시아의 광막한 사막에서도 찾아볼 수가 있다. 일찌기 중앙아세아는 동서문화의 중심지로 고대에는 인류발전의 따뜻한 보금자리었든 영광의 낙토이었다. 2000 년전만 하드라도 서역의 여러나라가 여기에서 번영하였고 중국에 불교와 서역의 문명을 제공하였다. 그뒤에는 대하국(大夏國)이 자리잡아 성장하였지마는 지금은 몇천만리의 끝없는 사막으로 화하여 오직 약대를 탄 대상들의 쓸쓸한 그림자를 간혹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면 그렇게 무서운 변화를 가져온 원인은 대체 무엇이었나?  중앙아시아의 옛 주민들이 건조한 기후에서 삼림의 관리를 게을리 하고 또 함부로 채벌(採伐)만 하였기 때문에, 무성한 삼림은 초원으로 바뀌었고 식물의 생육은 더욱 어렵게 되었으며, 또 초원은 차차로  사막으로 다시 사구(沙丘)로 변하였다. 다시 사구는 바람에 마음대로 이동하여 길과 촌과 도시들을 점차로 묻어버려 상전(桑田)이 벽해(碧海)라는 옛 문자대로 오늘의 대사막을 이루게 된 것이다. 20세기의 탐험가들이 옛 문헌을 더듬어 사구 밑에서 대도시를 파내고 있으니 우리가 어찌 느낌이 없이 이 사실(史實)을 바라볼 수 있으랴. 


 


자연을 무시하고 목전의 이익에 급급한 우리들의 저지르는 것의 결과가 어떠한 것인가를 알면, 다시 우리 자신으로 돌아와 헐벗은 산천을 이윽이 바라보고 마음에 결정함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근래(近來) 만주의 넓은 평원도 사막으로 인하여 년년이 좁혀지고 있다고 전하니 어찌 전률(戰慄)을 금할 수 있으랴.


 


달가스와 그 동지들은 제일 먼저 삼람을 만들어 북해로 부터 불어오는 사나운 북풍을 막고자 한 것이다. 이것은 모든 개척사업중에 가장 기본이 되는 사업이기 때문이다. 덴마크의 가장 잘 자라고 억세인 나무는 노르웨이산의 붉은 전나무이었다. 그러므로 이 붉은 전나무를 개척초기에 덴마아크 전토(全土)에 전력을 기우려 심으게 되었었다.


 


이 나무들은 제법 잘 자라서 푸른 숲을 이루고 국민들의 마음에 청신(淸新)한 희망의 싹을 움트게 하였다. 그러나 순조로이 자라던 숲들은 몇해 후에 일제이 성장을 정지하였다. 히이드 동지들은 물론 온 국민들의 가슴에 검은 그림자가 떠 돌았다.붉은 전나무조차 자라지못한다면 덴마아크이 식림은 방도가 없는 것이고  또 식림사업에 실패한다면 농지의 개척도 하나의 꿈으로 되는 까닭이다.


무엇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발틱 바다를 지나 휘모라쳐 오는 차고 거친 바람을 막을 것이며 또 저 사구(沙丘)의 이동을 방지할 수가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온 국민은 침울(侵鬱) 싸여 있었다. 


 


그러나 근기 있는 지성(至誠) 주밀한 연구는 마침내 그 원인을 찾아 내었다. 붉은 전나무들이 성장을 중지하는 이유는 그 붉은 전나무들이 자라다가 어느시기에 일으면 극도로 좋지못한 환경으로 인하여 질소(窒素)성분을 흡수하는 성분을 읽어버리게 되는 까닭이었다. 그러면 대체 이능력을 어떻게 이 굳게 닫힌 또 하나의  회복시켜서 다시 성장을 계속하게 하느냐 하는 것이 또 다시 부닥친 난문제인 것이다.


 


이 굳게 닫힌 또 하나의 문도 저들의 진실 앞에는 열리었다. 알프스 산에서 나는 프랑스 종의 산 전나무의 일종은 질소를 흡수하는 능력이 뛰어나게 강한 것을 알아내게 되었으므로 곧 이 나무들을 붉은 전나무의 숲에 혼식하여 본 것이다. 그 결과 과연 붉은 전나무는 신기롭게도 새 생명이 주입되어 싱싱한 빛으로 다시 자라나는 것이었다.죽엄의 모든 숲들은 차례로 생명의 푸른 빛이 넘치게 되었다.


이산(山)전나무 뿌리에 생기는 일종의 세균이 붉은 전나무에도 생기게 되어 질소 성분 흡수의 능력을 부활시키는 까닭에 붉은 전나무들은 다시 살아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으로 식림으 난관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생명이 창일(漲溢)하여 자라던 숲들은 또 다시 어느시기에 이르러 성장이 지지(遲遲)하게 되었다. 달가스의 장남인 푸레데릭 달가스의 열심스러운 실험과 연구끝에, 붉은 전나무의 고사를 방지하고 질소 성분 흡수의 능력을 회복시켜 주든 산전나무를 다시 간벌하여 냄으로 붉은 전나무는 다시 순조로운 성장을 계속하여 삼림을 완성할 수 있음을 발견하였다.


 


산전나무가 붉은 전나무의 성장을 순조롭게 하여 보모(保母)와 같은 구실을 함은 세계조림사(造林史)에 가장 흥미있는 발견으로 덴마아크의 조림사업에 참으로 획기적인 중대역할을 한 것이다. 간벌해낸 산 전나무는 재목으로 탄화수소의 원료로, 광산의 지주로, 연료로 빈틈없이 이용되고 있다. 


 


사시(四時)로 늘 푸른 전나무의 숲들은 모래와 티끌을 휘몰아오는 해풍의 광폭(狂暴)을 양처럼 순하게 만들었고 또 기후를 부드럽게 하였으며, 여름철에 나리는 무서운 서리를 완전히 막아서 황야의 빈들에 낙원의 노래를 드높게 하였다.


 


아, 


저 상록(常綠)의 푸른 빛은 그대로 덴마아크 애국자들의 산 넋의 상징인양, 이를 바라보는 가슴에엔 민족과 국가를 초월하여 무한한 감개를 자아낸다.


 



2).신앙의 등화(燈火), 과학의 무기


히이드 동지들의 열성으로 덴마아크의 부흥의 업적은 날을 따라 각방면으로 그 새로움을 더 하였다. 저들의 가슴에는 젖과 꿀이 흐르는 낙원 덴마아크의 모습이 더욱 확실하게 되었다. 승리를 눈앞에 보고 추격하는 장병들은 주검이 두렵지 않은 법이다. 성공을 확신하는 일군들에게는 비상한 용기가 생긴다. 덴마아크의 부흥은 식림사업의 성공으로 확호(確乎)한 자신이 서게 되었다.


 


국민들은 히이드 협회의 일원이 되는 것은 국민의 영예로 생각하게 되었다. 이 사업은 국민의 절대의 지지를 얻게 된 것이다. 이 열성은 위정자의 압력으로 일어난 것도 아니오 정치의 책략으로 부자연하게 불 달린 것도 아니다. 그대로 자연스러이 민족의 가슴속에서 타오른 것이다. 그러므로 저들은 개인의 손실을 돌보지 않고 고생을 달가이 참고 열중하여 마침내 부흥의 대사업을 성취한 것이다.


 


부흥사업중에 수위조정(水位調整)과 소택배수(沼澤排水)의 사업도 볼만한 것의 하나이다. 200 미터 이상의 고지(高地)가 없는 나라는 유럽에서 오직 덴마아크 뿐으로 이 나라는 가장 저습하기로 유명한 나라이다. 그러므로 강물의 흐르는 속도가 몹시느리고 따라서 강의 굴곡이 심하여 곳곳에 늪과 못이 널려있다.


 


하천을 곧게 하여 수위를 조정함으로 홍수의 피해를 막으며 늪과 못들을 메워 농지로 바꾸려는 이 사업은 국가적인 일대사업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 사업도 그리 오래지 않아서 백여개소의 건척(乾拓)사업을 훌륭히 완성하였고 이로 인하여 직접 6만에이카에 가까운 습지개간에 성공을 보게 되었다. 하천을 곧게하여 물을 빠르게 하고 운하를 깊게하여 수위를 나리게 하여 농경지의 표면에서 수분의 증발하는 과정과 흙의 모세혈관현상을 과학적으로 연구하여 그 학리를 실지에 활용한 것이다. 


 


수위를 낮추어 배수를 좋게 할 뿐 아니라 가물에 대비하여 서도 여러 곳에 저수지를 만들어 수위의 지나친 강하를 가늠하게 하였으니 그 사업이 얼마나 확실하고 또 생각이 얼마나 치밀한가를 볼 수 있다.이 과학적인 국토개척으로 기름진 농장은 날마다 그 면적이 넓어가고 국민의 기쁨과 감격은 나라안에 넘쳐 흘렀다.


 


이제 그 한 실례를 들어 그 실상을  스카르스 강(江)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이 스카르스 강은 45 마일 길이의 유역을 구불구불 돌아 흘러서 린호르트 만(灣)으로 들어가는 강이다. 이 강이 히이드 협회으 공사완성으로 말미암아 길이는 전장(全長)의 4분의 1인 10 마일이 짧아지고 강의 넓이는 25-50 피이트(1피트는 약1척)로 좁아지고 수위는 2-5 피이트나 낮아졌으며 그 결과로 14,500 에이카의 농장도 생겼으며 수리도 훌륭하게 된 것이다.


 


당시의 신문은 그 사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는 우리나라 국경안에 이 훌륭한 새 영토를 얻게 된 기록을 덴마아크의 역사에 영구히 남기게 되었다.이것은 우리 민족의 우리국민의 크나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이 막막하던 히이드(荒蕪地)는 이제 백성의 풍요한 옥토로 바뀌었고 쓸모없던 못과 늪들도 목장으로 농장으로 변하여 있다....]



이것은 이것은 덴마아크 전 국민을 대표하는 감격의 소리이다. 이밖에 관개배수(灌漑排水) 사업, 토지개량사업등 그 혁혁한 업적의 볼만한 것이 적지 않다.


저들은 [흙의 신성(神聖)]을 주장한다. 조상으로 부터 전해받은 귀중한 토지를 더욱 기름지게 만들어 자손에게 물려주는 것을 농민의 최상의 의무로 믿고 있는 것이다.



히이드 협회의 동지들의 걸은 길이야 말로 덴마아크 역사에 영구한 감격일 것이다.


신앙을 등(燈)으로 과학을 무기로 히이드의 정열들은 국토를 개조하였다.


 

유달영 [새 역사를 위하여] 4 광야는 옥야(沃野)로

 새역사를 위하여 - 4.광야는 옥야(沃野)로

유달영


 


4.광야는 옥야(沃野)로


 


1).구호에 맞추어서


[밖에서 잃은 것을 안에서 찾자]


[하나님과 가정과 국토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기초로]


[덴마아크의 건설은 광범한 지식위에]


 


이것은 덴마아크 국민의 갱생의 힘찬 구호이다. 이 신념에 불타는 국민들은 개척되지 않은 촌척(寸尺)의 땅이라도 이를 개간하여 잃어버린 국토를 회복하고자 전력을 다하였다.국내의 모든 황무지와 소택(沼澤)과 사구(沙丘)로 하여금 삼림으로 농장으로 목장으로 주택지로 만들기에 덴마아크 사람들은 시간과 재산을 아낌없이 바쳤다. 덴마아크 국민들의 이 꾸준하고 지성스러운 위업은 마침내 성공하였다.


 


[국민의 근본적 부원(富源)은 흙에서 온다]


[덴마아크의 부원을 보호함은 국민의 신성한 의문이오 특권이다]


이것은 덴마아크 사람들의 국토에 대한 한결같은 신념이다.


 


반세기전에 실망과 비애의 황막한 광야는 지금은 울창한 숲으로 풍요한 농장으로,목장으로, 아름다운 마을로 변하여 꽃과 노래와 우정으로 찬 즐거운 낙토(樂土)가 되었다.


옛날에 황무지이었던 곳들은 지금에 농장과 숲과 공원으로 바뀌었다. 이 위업을 완성하고 조국의 머리 위에 영예의 관을 빛나게한 애국자들의 기념비를 곳곳에 바라보는 오늘의 덴마아크 국민들의 감격이야 말로 어떠하랴.


 


저분 애국자들의 분투가 없었던들 오늘 인류문화의 위대한 공적을 자랑하는 농업의 나라 덴마아크는 역사에 그 이름이 없었을 것이다. 저들이야 말로 참 평화의 용사들로서 위대한 사람들이라 하겠다.


[배우(俳優)는 무대의 조건에 필연적으로 제약된다]이것은 유물사관(唯物史觀)의 주장이다. 그러나 우리는 덴마아크의 선각자들 특히 이엠 달가스와 그 동지들의 사업에서 위대한 배우는 무대를 자기의 품위에 어울리도록 고쳐간 것을 배울 수가 있는 것이다.


 


[의식이 족해야 예절을 알고 창고가 넘쳐야 영욕(榮辱)을 안다]과 관중(管仲)은 말했으나, 실상은 [사람다운 사람은 예절을 알므로 의식의 길을 도모 하고 영욕을 알므로 창고의 충실을 힘쓰는 것이니 이는 이미의심할 여지도 없다]라고 말한 내 스승의 말씀에 그대로 동감이다.


 



2).자연의 분노


우리는 덴마아크의 혹박(酷薄)한 거친들에서, 저들이 어떻게 무엇으로서 인류의 최고농업문화의 영광을 자기들의 것으로 하였는가 다음에 깊이 살펴보도록 하자.덴마아크의 본토 유트랜드는 사구(沙丘)와 저습지와 소택(沼澤)이 대부분을 차지한 큰 황무지이다. 


 


그러나 원래부터 이 고장이 이렇게 거친 곳은 아니었다. 옛날 석기시대로부터 청동시대에 걸쳐서는 사람이 살기에 대단히 좋았던 지방이었다.이것은 오늘에 남아있는 여러가지 유물로 추측할 수가 있으며, 적어도 기독교가 들어왔을 무렵만해도 삼림(森林)들이 곳곳에 울창하였던 것은 의심할 수가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독일과 덴마아크가 여러세기에 걸쳐서 전쟁을 계속하고 또 내부에는 추장(酋長)들이 끊임없이 서로 약탈을 일 삼는 동안에, 저들은 일체로 자연을 돌아보지 않았다. 더욱이 그 시절에는 저 무서운 흑사병(黑死病)이 크게 유행하여 모든 도시는 폐허가 되고 농장들은 초원으로 일변하여 버렸다.


 


이 엄혹(嚴酷)한 벌을 받고도 저들은 깨닳음이 없었다. 여러 곳에서 모여 들어온 사람들은 왕위와 영토의 쟁탈로 열광하여 역시 자기들의 사는 국토의 자연을 돌아보지 않았다. 울창하던 삼림을 아낌없이 함부로 베어서 자연과 협조할 생각은 전연 없었다.


덴마아크에서 가장 억센 전나무 종류도 수년이 못되어 전부 말라죽기에 이르렀다.


 


북해의 모진 바람이 성낸 물결과 사나운 사풍(砂風)을 몰아 목전의 이익만으로 눈이 뒤집힌 가증한 무리들을 징벌하기 시작하여 삽시간의 덴마아크의 아름다움과 기름짐을 앗아 버렸다. 그 황폐의 모양은 실로 처참하여 옛 모습을 상상할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물론 여기에 살던 사람들은 모두 집과 농장과 재물을 잃어버리고 빈곤의 나그네로 제 살던 고향에서 추방되었다.


 


18 세기에 덴마아크의 애국자들이 몇번이나 유트랜드의 황무지를 개척하려고 애썼으나 모든 시험이 수포로 돌아갔다. 최종의 방법으로서 외국인인 독일 사람들의 그 참을성과 치밀한 성격을 이용해보고자 1천명의 독일 사람들을 막대한 경비를 들여 초빙하여 식민(植民)을 시켜 보았다.


 


그러나 그 거친 땅은 인력의 미치지 못하는바요, 또 그 불순한 기후는 사람의 건강을 유지할 길이 없어서 마침내 그들은 전부 돌아가 버렸다. 독일 사람들의 근기와 과학적인 치밀성도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제가 저질은 것은 제 손으로 수습하라는 신의 뜻인 것처럼 느껴진다. 덴마아크 정부는 다액의 경비를 들여서 식림(植林)을 시험해 보았으나 또한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였다. 자연의 노여움은 그렇게 쉽게 풀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19세기 전반에 덴마아크의 시인인 스테센 푸리챠아는 그 황무의 초원을 걸어보았다. 몇마일을 걸어가도 걸어가도 끝 없는 초원에 강한 사풍이 얼굴을 후려치고 높은 하늘로 부터 부파 종달새의 소리만이 들려옴은 더 한칭 적막하였다. 이동하는 사구와 널려있는 소택들이 이 시인의 앞을 막을 뿐으로 전연 인영(人影)이 끊어진 빈 들이었다.


그는 울창하던 삼림과 기름진 농지로 가득하던 옛 국토를 회상하며 깊은 감개(感慨)에 잠겼다.



[이 참담한 조국 광야에 꽃 향기 풍겨나고 낙토구가(樂討謳歌) 드 높은 번영의 날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것인가] 하고 탄식과 명상에 잠겼었다.그는 [황무지의 이야기]라는 명작을 남기고 1848년에 세상을 떠났다.


 


자연을 학대하며 신의 은혜를 느낄줄 모르는 무리들이 저주받은 산천에서 모조리 쪼껴나온 후에 상당한 시일이 지나갔다. 어디를 막론하고 자연과 협조하지 않으며 자연을 학대하는 무리들은 자연이 주는 정확한 보복을 그대로 거두게 되는 것이다.


 


그 자손들도 또한 조상들이 뿌린 것으로 자연의 주는바 징벌을 면할 길은 없는 것이다. 그들이 다시 자연의 품에 안겨 행복을 누리랴면 곧쳐진 심정의 주인으로 다시 자연의 뜻에 협조하는 인격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자연을 정복한다는 말은 무식한 말이다. 어떠한 사람의 위대(偉大)도 자연의 법칙에서 한치도 벗어나서 생활할 수는 없다. 오늘의 자연 과학은 자연을 정복함이 아니다. 무한한 자연의 법칙의 바다에서 몇개의 진주를 선물로 받아서 법칙에 순종하여 이를 활용하는데 불과한 것이다.


우리는 자연과의 협조 여부로 인간이 거두는 바가 무엇인지를 뎅마아크의 역사에서 가장분명히 배울 수가 있는 것이다. 


 



3).문이 열리다.


[구하라 그러면 받을 것이요, 두다리라 그러면 문을 열리라.]는 기독교 진리의 말씀대로 대 황무지도 열리지 않는 문은 아니었다.


1866년에 무너진 전선에서 돌아온 공병대령 달가스의 가슴 속에는 유트란드 대황무지의 개척의 계획이 서 있었다. 그는 낙망하지 않는 영혼의 주인이었다. 그의 뜨거운 애국심과 열성과 진실에 움지겨 공명하는 동지들이 모여, 히이트 협회(Danish Heath Society) 곧 황무지 개간협회를 조직하고 활발히 사업에 착수하였다.


 


저들은 국민정신이 창일(漲溢)한 애국청년들이다.저들은 덴마아크의 살 길은, 전쟁으로 입은 치명적인 손실을 평화의 사업으로 내부에서 회복하는 것만이 가장 현명한 방책이라고 자각한 사람들이다. 저들은 달가스를 중심으로 굳게 뭉쳐 주위의 비평도 개인의 이해도 돌아보지 않는 동지들이었다.


 


저들의 사업이 실패한다면 조국 덴마아크이 앞날에는 얼마나 큰 비참이 기다리고 있는 가를 저들은 잘 알고 있었다. 식림사업, 토지개량사업,소택배수사업, 토탄사업 등등에 불면불휴(不眠不休) 전 정력을 기우렸다. 한편 다수의 농업기술원을 만들어 아모라도 곧 지도와 원조를 받을 수 있는 강력한 조직을 만들기에 성공하였다.


 


이 히이트 협회가 창설된지 불과 30년 만에 다음과 같은 놀라운 업적의 성공을 보게 되었다. 


 


218 평방마일의 소림(疎林)은 702 평방마일의 밀림으로


300 평방마일으 사구(沙丘)는 140 평방마일로


360 평방마일의 소택(沼澤)은 150 평방마일로


2065 평방마일의 황무지는 270 평방마일로 


이것은 1896년 까지에 유트랜드에서만 이루어진 업적이다.


 


달가스가 세상을 떠날 지음에는 사업은 전국민의 협조를 받아서 급속도로 발전하여 유트랜드와 그 밖의 섬에서 실로 2500 평방마일의 광대한 면적이 보람있게 개척되었다. 이것은 덴마아크의 거의 반이나 되는 넓은 면적이다.


수년전의 황무지와 소택과 사구등의 불모의 땅이든 국토는 가는 곳마다 삼림과 목장과  농장과 향촌의 새 산업지로 그 면목을 일신하였다.실망의 패잔(敗殘)국민이라는 덴마아크 민족은 이제 정열에 불타는 희망의 새 주인으로 바뀌었다. 옛날에 인영이 끊어진  조국의 광야에서 깊이 탄식하던 시인 푸리챠가 이 날에 다시 돌아와 낙토로 변한 조국의 모습을 바라본다면 그 감개가 과연 어떠하랴. 그의 시혼(詩魂)은 개척자들과 낙토화한 국토를 읊어 얼마나 찬양할 것이랴.


 


오늘에 이 개척은 최대한으로 발전되어 8할에 가가운 국토가 농경지로 이용되고 농촌 산지의 정돈은 세계의 무비(無比)로 일대 농업공원이 되었다.


 


1932년의 통계를 보면 주요 농작물의 재배면적은 다음과 같다.


보리           840,000 에이카


밀             240,000 에이카


연맥(燕麥)     980,000 에이카


라이           290,000 에이카


감자           170,000 에이카


(1에이카는 약 4단보(段步)



주요 가축통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33년                    1935-39년                    1950년


소       130,000                   3,196,000                    3,044,000


말       500,000                     567,000                      503,000


돼지   4,400,000                   3,163,000                    3,208,000


닭    26,000,000                  29,745,000                   24,433,000



참고로 해방직후인 1947년도 우리나라 가축통계를 보면 다음과 같다.


농우     33,000


유우      1,339


말       32,635  


돼지    508,628


닭    3,081,283


이 통게를 국민1인당 환산하면 더욱 큰 차이가 생길 것이다.(제2차 대전에 큰 타격을 받은 덴마아크의 가축이 또 급속히 회복하였음을 볼 수 있다).


 


달가스가 현실적으로 국토를 개조하여 국민의 영원한 복리를 끼친 공적은 위대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이 현실적인 업적 그 것보다도 달가스의 부동의 신념과 무사(無私)의 애국정열이 절망의 바닥에서 국민을 이끌어내어 그들의 가슴속에 불멸의 희망을 불을 달려 준 점을 우리는 더욱 높게 평가하고 기리는 바이다.


 


수 많은 덴마아크의 청년들이 그의 정신을 이어 받아 분기(奮起)활동할 것이니, 눈에 보이지 않는 이 고귀한 유산을 후세에 끼쳐주어 그의 생명은 민족의 위대한 불로 밝을 것이다.


 


한 알의 밀이 땅 속에서 썩어 백배로 다시 썩어 만배로 퍼지는 일상보는바 진리는 농사만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자기를 버리지 않는 곳에 번영이 없음을 2000년전의 젊은 성철(聖哲)이 이를 비유로 들어 인류에게 가르친바 영원의 진리이다.


 


우리 민족도 이 진리의 범주안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국민이 대아(大我)를 위한 희생과 봉사의 정신이 없고서는, 아모리 간절하다 할 지라도 갈망만으로는 참 평화와 행복과 고도의 문화가 우리의 것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농경지는 약 450만 정보로 전 국토의 2할에 불과하다. 아모리 산이 많은 산의 나라이라 할 지라도 우리의 개척의 여지는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근시안적인 경박한 생각과 이익을 위하여서는 신의를 헌 신짝 버리는 근일(近日)의 변태성(變態性)을 근본적으로 수정하지 않고서는, 우리의 국토도 틀림없이 노(怒)를 발할 것이요 또 세계 우방으로 부터 받을 대접도 명확할 것이니 생각해 볼 일이다.


우리는 시급히 일대국민운동을 이르키어 국토를 몸같이 아끼며 불의를 두려워하고 용납하지 않도록 함이 간절하다 할 것이다.


 


 


4).제2의 수난


고난(苦難)은 인생을 깊게하고 역사를 순화(純化)한다. 덴마아크는 단적으로 이를 증명한 나라이다. 나는 덴마아크의 역사에서 또, 하나의 수난에서 비약한 사실을 기록하고자 한다.


지금부터 팔구십년전인 1870년경에 덴마아크는 고심참담하여 개발한 국토를 기초로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서 산출된 곡물로 외화를 얻어 국민의 빈곤을 건지랴고 계획하였고 또 이밖에는 다른 길이 없었다. 1871년부터 1874년에 이르는 동안은 덴마아크 주곡농업의 전성시대로 년평균수확고는 4500만 크로너를 넘어섰다.


 


그러나 신흥 미국은 무진한 평원을 개척하여 현대적인 기계농업으로 막대한 곡식을 안가(安價)로 생산하고 유럽 각국에 대량 수출하였다. 이로 인하여 덴마아크는 시장 전부를 빼앗기게 된 것이다.노임에도 차지 못하는 싼 값인고로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고경에 빠지게 된 것이다.


미국뿐만이 아니라 쏘련과 남미에서도 또한 값 싼 곡물이 밀려 들었다. 이 대 자본과 기계의 의한 곡물의 대량에 생산과 경쟁할 수가 없어서 덴마아크는 다시 무서운 경제 파멸에 직면하였었다. 그러나 저들의 성실과 지혜는 이 것을 타개하기에 성공한 것이다.


 


그 것은 곧 유축(有畜)산업으로의 전환이니 값싼 사료의 구입, 축산물 가격의 안전성, 두엄에 의한 지력증진등의 유리한 점을 발견한 까닭이다. 이 것은 그 후에 순조로 진전하여 협동조합과 아울러 놀라운 발전으로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 부지런하고 규모있고 과학적이 경영은 인류 농업사의 찬란한 꽃이다.덴마아크 민족이 수난의 시기마다 실망하지 않고 새로운 비약으로 행복의 날을 창조함을 보고 이 수난의 시대에 처한 우리가 어찌 이에 무심할 수가 있을 것이랴. 덴마아크는 국토와 인심이 아울러 광야에서 옥야(沃野)로 바뀐 것이다.


 

유달영 [새 역사를 위하여] 3

유달영 [새 역사를 위하여]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