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国における西田幾多郎 Kitaro Nishida in South Korea
文学研究科人文学専攻博士前期課程修了
孫 惠 珍 Hyejin Son
===한국의 니시다 기타로 Kitaro Nishida in South Korea
손희진
문학연구과 인문학전공 박사 전기과정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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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Ⅰ. 한국에서 니시다 수용.
1. 한국에 있어서의 니시다 수용의 현상
1. 니시다의 역사 철학.
(1) "근대 일본의 두 얼굴 - 니시다 철학"에서.
(2) 이찬수의 "근대 일본의 두 얼굴 - 니시다 철학"에 대한 논평에서.
2. 니시다와 역사 철학과 황실.
(1) 니시다의 역사 철학과 황실.
(2) 니시다의 "일단 다"와 "국가와 국민".
3. 니시다의 일본 문화론과 황실.
4. 니시다와 전쟁에 대한 이데올로기를 제공합니다.
(1) 세계 신질서의 원리.
(2) 좌담회 “세계사적 입장과 일본” Ⅲ. 한국의 니시다 철학의 의미와 도전.
1. 한국의 니시다의 의미.
2. 한국의 니시다의 오늘의 도전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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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필자가 받은 니시다의 첫인상은 인간의 삶을 추구하는 구도자와 같은 모습이며, 사색 또 사색을 거듭해 나가는 철학자의 모습이었다. 난해한 니시다의 철학 용어나 철학에 친숙해지면서, 니시다의 연구 논문이나 서간이나 일기 등에 접해 가는 가운데, 인간적 매력이 넘치는 한 사람의 진지한 사람으로서의 니시다 기타로도 보여 왔다. 이것이 나 속의 니시다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문헌을 읽으면서 떠오른 니시다상은, 필자가 가진 니시다상과는 다른 관점으로부터의 것이 많았다.
본고에서 필자는 우선 한국에서 니시다의 수용현황을 개관하기로 했다. 그리고 니시다 수용의 현상으로부터 그 경향성을 파악한 후 논점이 되는 부분을 다루면서 한국에서의 니시다 이해에 대해 고찰하기로 했다. 가능한 한, 니시다의 본래의 의도와는 어떠한 것이었는가 하는 점도 염두에 두고 보기로 했다.
니시다의 철학은 「일본의 철학의 좌표축」이라고도 불리고 있다. 한국인에 있어서, 니시다의 철학·사상을 이해하는 것은, 일본의 정신의 안쪽에 있는 철학·사상을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단서가 될 것이다 . 이러한 점을 한국에서 니시다 연구의 중요성 중 하나로 확인하고 싶다.
Ⅰ. 한국에서 니시다 수용.
1. 한국에서 니시다 수용의 현상.
한국에서는 일본 사상·철학에 대한 관심은 거의 없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예를 들면, 대학의 전공에 일본어 일본문학과나 일본어교육과, 일본학과는 존재하고 있지만, 독립한 일본철학의 전공은 존재하지 않는 것에서도 말할 수 있다. 이러한 한국의 실상 속에서, 니시다 기타로의 수용이 되기 때문에, 니시다 기타로가 아직 충분히 인식되어 있지 않은 것이,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우선, 한국에 있어서의 니시다에 관한 문헌을 검토해 보기로 하자.
니시다의 저작 속에서 한국어로 번역하여 발간되고 있는 것은 불과 1권이다. 또한 니시다에 관한 연구서는 일본 연구자의 연구서를 한국어로 번역한 서적이 한 권, 한국인에 의한 연구서가 한 권, 총 두 권뿐이다. 이처럼 필자의 조사한 한에서는 서적 전체에 걸쳐 니시다 기타로를 주제로 하는 한국어로 발간된 서적은 이 3권밖에 존재하지 않음을 파악할 수 있었다.
니시다의 저작 중 한국어로 번역된 유일한 것은 '선의 연구'이다. '선의 연구'의 첫 발간은 최현(최현)의 번역에 의한 것으로, 1963년 창원사에서 1970년에 삼신서적에서 출판되었다. 그 후 1983년 김상선(김상선 : 김상선) 번역으로 명문단에서 발간됐다. 그리고 1990년 서석연(서석연)의 번역에 의한 '선의연구'가 본우사에서 발간되었다. 현재 일반 서점에서도 입수할 수 있는 것이 서는 '선의 연구'이다.
서는 "이 책에 처음 접했을 때는 약간 어려워서 거부감까지 느꼈지만, 반복해서 읽으면서 놓을 수 없는 매력과 함께 온몸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큰 감동에 습격당했다"고 "선의 연구』에 대한 감상과 함께 그 번역하게 된 계기를 말하고 있다.
니시다에 관한 연구서는, 2003년에, 오사카 국계의 「니시다 기타로의 사상」이, 「절대무의 견성 철학-니시다 기타로의 사상」이라는 제목으로 발간되고 있다. 번역은 深寂(신적:심적)에 의한다.
심후는 「역자의 이야기」에서 「근대 일본의 대표적인 철학자라고 할 수 있는 니시다 기타로의 생애와 그의 철학 세계를 통해 일본인의 심성과 일본적인 사유 방식을 알 수 있기 때문에 납치, 니시다는 특히 동양의 불교 철학을 중심으로 서양 철학의 개념을 도입하고 서양 철학과 비교하면서 그의 철학적 세계를 구축하여 동양 사상의 우수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된다 라고 생각된다」라고 말하고 있다.
다음으로 한국인에 의한 한국어로 쓰여진 니시다 연구서로서 '근대 일본의 두 얼굴-니시다 철학'이 있다. 이 책은 2000년 경희대학 교수인 허우성(허우성)이 편찬한 것이다.
이 '근대 일본의 두 얼굴-니시다 철학'은 557페이지로 이루어져 3부 8장의 구성이다.
저자의 용서는 “필자가 취한 방법은 니시다 철학에 3개의 발전 단계를 상정하고, 그 단계 중 거의 같은 시기에 발표된 일련의 논문을 집중적으로 읽고 정리하는 식으로 있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연구서를 '근대일본의 두 얼굴-니시다 철학'이라고 명명한 이유에 대해, “아니라도 우리 민족의 역사적 기억에 붙잡혀 있거나 단순한 민족 감정을 가지고 이 책을 쓰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필자는 이 책의 제목으로 '니시다 철학 비판' 대신에 '니시다 철학'으로 했다”고 말했다. 게다가, 「두 개의 얼굴」의 의미에 대해서는, 「니시다 철학은, 이렇게 우리에게 밟지 않아도 두 개의 얼굴로 다가온다.한쪽의 얼굴에는 생명의 약동이 보여지고, 또 다른 얼굴에는 제국 주의의 일본을 볼 수 있다. 역사 철학에 실망했다고 해도, 약동하는 생명의 얼굴을 무시해서는 안 되고, 생명 철학에 도취해 제국주의의 일본의 얼굴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고 설명해 있습니다. 또한 "니시다 철학에 대한 연구와 번역이 어느 정도 진행된 후에는 다른 방식으로 쓰고 싶다"고 새로운 니시다 연구에 대한 의사를 표명하고 있다. 이 '근대 일본의 두 얼굴 - 니시다 철학'은 한국에서는 최초이며 유일한 니시다 연구서가 된다.
그런데 허는 1988년 하와이 대학에서의 철학박사학위의 논문을 니시다철학을 테마로 집필하고 있다. 「A Critical Exposition of Nishida's Philosophy(니시다 철학의 비판적 해명)」라는 제목의 논문이다. 이 논문이 한국인에 의한 최초의 니시다 연구 논문이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허는 한국의 니시다 연구의 선구자라고도 할 수 있다. 그 의미에서는 허의 연구는 앞으로의 한국에서 니시다 연구의 하나의 출발점이 되는 것은 아닐까.
덧붙여 그 외에, 한국에 있어서의 니시다 기타로에 대해 접하고 있는 서적은, 구견서(구경서:구견서)의 「일본 민족주의사」와 「일본 지식인의 사상」을 들 수 있다. '일본민족주의사'에 있어서 니시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개소는, 한국에 있어서의 니시다상을 잡는 하나의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 '일본 민족주의사'는 일본학이라는 분야의 연구서이지만, 일본의 메이지에서 현재까지의 정치가, 경제인, 지식인 중에서 민족주의자를 다루고 일본의 민족주의와 그 의미에 대해 논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 지식인의 사상』에서는, 후쿠자와 유키치, 나카에 조민, 나츠메 소세키, 쓰다 좌우길, 미시마 유키오, 오에 켄사부로의 사상과 함께, 교토 학파와 신교토 학파의 사상을 논하는 가운데, 니시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 이 책에서는 교토 학파와 신 교토 학파의 사상의 역할에 대해 정치, 사회, 문화 등 일본의 모든 분야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 교토 학파와 신 교토 학파 원류가 되는 사람이 니시다 기타로라고 말하고 있다.
다음은, 본고 필자가 확인할 수 있었던 니시다에 관한 연구 논문을 보자.
한국에서 니시다 철학을 테마로 한 연구 논문은 학술지 등에 실려 있는 것은 5개였지만, 모두가 허에 의한 논문이었다. 이들 논문의 제목은 '니시다 철학의 베단타 철학에 대한 비판(1989년)', '니시다 철학의 회이적 성격(1993년)', '니시다와 서양 철학-시간관을 중심으로(1996년) ', '진리는 현해탄을 건너갈 수 없다-니시다 철학을 중심으로(1999년)', '기억간의 전쟁: 내셔널리즘의 충돌(2006년)'21이다.
또 다른 연구자에 의한 니시다와 관련된 논문은 2004년에 나와 있는 김성민(김성민)의 석사논문이 있다. 김 연구는 한국의 철학자인 박종홍(박종홍:박종홍)과 니시다 기타로가 헤겔의 변증법을 각각 어떻게 수용하고 있는지 비교한 논문이다. 제목은 '박종코와 니시다 지타로의 헤겔 변증법의 변용에 대한 비교연구'이다.
그 외, 미술의 작품 세계에의 니시다 철학의 영향을 다루는 석사 논문이 3개 있지만, 그 중 2개는, 재일 화가의 이우환(이우환:이우환)의 작품 세계와, 니시다 철학과의 관계에 관한 논문이다. 하나는 경북대학교에 재학한 하타노 신지의 '이우환의 작품에 나타난 정신성에 관한 연구(1994년)' 24라는 석사논문이며, 다른 하나는 서지영(서지영 : 서지영 ) '이우환의 작품에 나타난 '만남' 이론에 관한 연구(2002년)'라는 석사논문이다. 남은 미술 관련 논문은 민경채(민경채: 민경채)의 '한국모노크롬 회화의 양식적 특성에 관한 연구 : 미니멀 아트(2003년)'로 한국미술계의 모노크롬(monochrome) 회화의 연구 속에서 일본의 물건파와 니시다철학과의 관련성에 대해 논하고 있는 석사논문이다.
이상과 같이, 필자가 조사한 한, 니시다를 주제로 한 논문의 대부분은, 석사 논문이며, 한국에서의 니시다를 주제로 한 연구의 박사 논문은, 허의의 논문 이외에는 존재하고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또한 그 밖에 교토 학파의 학자나 철학을 주제로 한 논문 속에서 니시다와의 관계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하나님, 인간, 그리고 하늘: 칼 러너(Karl Rahner)와 니시타니 케이지의 비교 연구(1997년)」라는 이찬수(이찬수)의 박사논문이 있었다. 또 교토학파의 학자나 철학을 테마로 한 논문 속에서 니시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석사논문은 최현민(최현민:최현민)의 '쿠마츠 마이치의 선사상(1994년)'과 우문봉 (오문봉 : 오문범)의 '불교의 하늘에 대한 케노시스 신학의 조명(1996년)'이 있다.
이상으로부터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은, 박사 논문으로서는, 1988년, 허의 하와이 대학에서의 박사 논문과 함께, 1997년, 니시다 철학 자체를 테마로 한 논문은 아니지만, 리의 한국의 서강 대학에서의 박사 논문, 아울러 2개밖에 없는 것이다. 한국에 있어서의 니시다 연구의 논문은, 일년에 1개에도 이르지 않는 정도의 페이스이며, 몇 군데 없기 때문에, 한국의 니시다 연구가, 아직 본격적으로 행해지고 있지 않은 것이 분명하고 있다.
이러한 한국에 있어서의 니시다 수용의 현상에의 개관으로부터, 한일 양국의 긴 교류의 역사에 비해, 니시다 연구는, 그 역사가 아직 얕다는 것을 알았다. 또 용서를 제외하고는 니시다 전문 연구자의 이름은 들 수 없는 것이 한국의 니시다 연구의 현상이다. 한국에서 니시다 연구와 수용은 역사적으로도 양적으로도 시작되었다. 그리고 연구 이전의 문제로서 한국인 일반적으로 니시다 기타로라는 이름조차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2. 한국에서의 수용 경향
여기서는, 전술한 한국에 있어서의 니시다 수용의 현상에의 개관으로부터, 니시다 수용의 경향성을 고찰해 보기로 한다.
덧붙여 최초로, 한국에 있어서의 니시다 수용의 경향성을 말할 때, 우선, 한국 유일의 연구서인 허유모리의 「근대 일본의 2개의 얼굴-니시다 철학」을, 주요한 자료로서 이용하는 것을 언급해 두고 싶다. 이 연구서가 니시다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이용되고 있는 것은 2004년에 나온 김성규의 논문인 ‘박종코와 니시다 기타로의 헤겔 변증법의 변용에 대한 비교연구’에서도 보인다. 김의 논문으로부터, 코사카 국계의 연구서의 한국어판인 「절대무의 견성 철학-니시다 기타로의 사상」과 함께, 용서의 「근대 일본의 2개의 얼굴-니시다 철학」을 연구의 자료로서 사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것에서도 허의 연구는 선행 연구로서 한국의 니시다 연구의 방향에 중요한 입장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근대일본의 두 얼굴-니시다 철학'에 대한 논평을 이찬수는 '불교평론'이라는 잡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니시다 기타로(1870~1945)는, 근대의 일본철학의 대표자라고 불려도 어울리는 사람이다.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연구가 전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민족주의적인 반일 감정도 한몫했다고 생각되지만, 니시다 철학 자체가 매우 난해했던 것도 중요인일 것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결코 간단하지 않은 니시다 철학을 체계적이면서도 엄청난 양의 니시다 연구를 정리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허유모리 교수의 책 저작은, 국내의 철학계나 정치 사상계에 있어서, 앞으로도 계속 읽을 수 있는 작품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게다가, 단순한 민족 감정을 초월해, 니시다의 언어를 통해서 동양·서양의 철학의 문제점까지 보여준 것은 저자의 철학적 능력에 달려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이 책의 가치는 견고하다"고 높이 평가하면서,
"지금 겨우 우리 나라에서도 본격적으로 근대 일본철학에 대한 논의가 가능하게 된 것은 매우 기쁘다"고 말했다.
게다가 허의 '근대 일본의 두 얼굴 - 니시다 철학'에 대한 서평으로서 송피칠(송휘칠)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나라에는 아직도 뿌리깊은 반일 감정이 있어, 지식인조차 일본에 '사상 뭔가 있는가'라고 반문할 정도의 일본을 무시하는 풍토이기 때문에 오랫동안 고군분투하고 편하고 나온 한 허교수의 이 책이 우리 나라의 일본사상연구에, 부, 동양철학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여는 기폭제가 되었으면 한다”고.
여기에 든 리와 송의 이야기처럼 허의 '근대 일본의 두 얼굴 - 니시다 철학'은 한일의 특수한 관계 속에서 일본 철학·사상 연구로 이어지는 니시다 연구서로 나와 그 자체가 높이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앞으로 비평과 논의의 대상이 되는 것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근대 일본의 두 얼굴-니시다 철학』에서 허는 니시다의 후기 철학을 역사·정치 철학이라고 보고 있어 니시다 철학의 형성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니시다 철학은 그 생애와 함께 논의되어야 한다. 그의 철학은 그 생애로부터 주어진 것을 자료로 하고, 거기에서 반성과 사유를 더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생애를 논할 때에는 근대 일본의 역사도 더 고려해야 한다. 그가 내적 생명과 역사적 생명을 추구하고 있는 동안 그의 생애는 메이지·다이쇼·쇼와에 이어지는 근대 일본의 역사적 환경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니시다 철학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이 된 것으로, 처음에는 주로 개인적 비극이, 다음은 주로 충격과 격동의 시기를 살고 있던 일본인 전체가 직면하고 있던 역사적 운명과 이에 대한 일본인의 집단적 대응이 있었다.
이상과 같이 허는 니시다의 철학이 처음에는 개인적 비극에 역사 철학의 시대에는 일본인이 직면한 '역사적 운명'에 대한 '집단적 대응'이라는 시대 배경 속에서 형성되었다고 논한다. 있습니다. 즉, 니시다의 역사 철학은, 그러한 전쟁에 총동원된 일본의 역사적 배경하에 형성된 것이고, 전쟁에 니시다 철학이 관련되어 버렸다고 보는 것이, 용서의 큰 논점 중 하나가되었습니다.
그 외, 니시다 이해와 수용의 내용이 보이는 문헌으로서 들 수 있는 것은, 구견서의 「일본 민족주의사」와 「일본 지식인의 사상」이다. 이러한 문헌을 개관해 보면, 니시다의 철학이 독창성을 가진 세계적인 철학임을 인정하면서, 후기의 니시다와 니시다 철학에 대해서는 전쟁과 연계하여 철학적 내셔널리즘으로 있다고 단언하고 비판하고 있다. 게다가 교토학파와 신교토학파의 일부가 전쟁옹호의 발언을 한 것과 관련하여 니시다철학을 비판적으로 하는 경향이 있다.
니시다에 대한 비판이라고 하면 옹호하는 쪽의 목소리와 교제하면서 당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행해져 왔다. 본래, 철학자라면 누구나, 자신의 철학적 논리에 대한 비판의 화살은 피할 수 없는 것인데, 그렇다고 해도, 니시다 비판의 경우는, 논쟁의 초점의 하나가, 니시다 철학의 근대 일본의 제국주의의 침략전쟁에 대한 이데올로기 제공에 있는 것이 큰 특징일 것이다. 니시다와 전쟁과의 관계에 관한 니시다 비판은, 특히 일본 국내의 연구 중에도 엄격한 것이 있었지만, 니시다의 철학을 높이 평가하고 있는 해외의 연구, 특히 미국이나 유럽의 연구에 있어서도, 논의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미국이나 유럽의 니시다 연구의 접근 방식이 역사적·정치적 입장으로부터의 어프로치를 우선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던 것도 하나의 원인인 것으로 보인다.
마찬가지로, 현재 한국에서의 니시다 연구의 경우도, 니시다와 전쟁과의 관계에 대한 주목이 큰 경향의 하나인 것이, 선행 연구로부터 파악할 수 있었다. 이러한 니시다와 전쟁과의 관계에 대한 논쟁은 근대화라는 과제로 일본이 전쟁에 전력을 다한 시대를 살았던 니시다에서는 운명이라고도 할 수 있었고, 니시다 연구자라면 피하는 것 할 수 없는, 하나의 과제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니시다와 전쟁과의 관계에 대한 논쟁이 수많은 연구 속에서의 이야기가 되면 한일의 역사적 사실이 배경이 되어 니시다의 전체상에 편향된 이미지가 심어질 수 있다. 성도 충분히 생각된다. 니시다 철학·사상의 본래의 모습을 놓칠 우려가 있는 것도 예측할 수 있다.
본래, 철학이라는 것은 시간이나 장소에 의해 한정되지 않는 것이고, 진리와 보편성을 요구하는 학문인 곳에 그 성질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철학의 본래의 모습을 감안할 때, 니시다가 전쟁과 관련되어, 「니시다의 역사 철학은 철학적 내셔널리즘이다」, 「니시다의 문화관은 문화적 민족주의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니시다의 철학·사상에 있어서의 보편성이 의심되는 문제에도 관련되는 것은 아닐까.
Ⅱ. 한국에서 니시다 기타로의 이해
여기에서는, 니시다와 전쟁과의 관계를 둘러싼, 한국에 있어서의 니시다 이해를 고찰하기로 했다.
1. 니시다의 역사 철학
(1) "근대 일본의 두 얼굴 - 니시다 철학"에서
허는, 니시다가 중요한 두 개의 철학을 추구한 것을 니시다의 전집을 통해 확인해, 그 하나는 「내적 생명 철학」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 철학」이라고 한다. 그리고 '내적 생명 철학'은 종교적 구제론적이며, '역사 철학'은 역사·정치적이라고 논하면서 '그의 철학이 독창성과 보편성뿐만 아니라 내셔널리티까지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게다가 허는, 니시다 철학이 「내셔널리티」라고 하는 「비보편성」의 논리를 가지기 때문에, 「동아시아 근대사의 전체의 열정과 파멸에 깊게 관련지어졌다」
라고도 말해, 그 의미에서도 니시다의 철학은 세계에 연결되면, 비판적으로 니시다를 논하고 있다. 그러나 허는, 니시다의 「내적 생명 철학」도 「역사 철학」도, 본질적으로는 존재론이라고 지적해, 2개의 생명에 하나의 논리를 부여해, 그 논리를 추구한 철학자 로서 니시다에 대해 "일본의 대표에 그치지 않고 세계의 일류 철학자"라고 높이 평가한다.
그리고 그 존재론의 핵심에는 「자각의 형식」이 있다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자기가 자기에서 자기를 본다"는 자각의 형식, 이에 대한 완전한 이해는 1929~1930년경 성숙한 절대무의 자각의 철학에서 이루어져 있다. 자각의 형태가 적용되는 한, 어떠한 사건에서도 완전한 실재성을 얻게 된다. 이 형태의 싹은 순수 경험, 예술의 창조 행위와 같은 것이었지만, 마침내 순간적인 자각의 일행에 이르게 되어 역사의 한 시대, 국가, 천황 등 된다 .
허에 의하면, 니시다의 「자각의 형식」의 형성·적용에 있어서, 1904년경에는 「내적 생명 철학」이 최초 형성되어, 1929~1930년의 시점에서 성숙의 정점에 이르고 「절대무의 자각의 철학을 이루고, 또 1931~1932년경의 논문에서는 '역사 철학'이 정치적 개념과 결합하여 자각의 형식도 역사의 한 시대, 국가, 천황 등의 개념에까지 적용되었다고 한다. . 이러한 1931~1932년경의 니시다의 초기의 「내적 생명 철학」에서 후기의 「역사 철학」으로의 이행을 「니시다가, 내적 생명의 추구로부터 얻은 자각의 형식을, 역사적 생명의 활동 에까지, 그리고 시대나 국가 등의 비의식적 현상에까지 확대해 적응하게 된 것을, 필자는, 전회 turn이라고 불러 보았다」 라고 의미 붙인 것이다.
게다가 “전회와 함께 그는 자각의 일행위의 절대성과 자기한정 대신에 역사적 일시대의 절대성과 자기한정을 주장하게 되었다. 그는 또한 국가나 국가 등의 정치 적 개념을 논의했다”고 말해 “니시다의 정치 철학은 그의 역사 철학에서 나온다”고 논하고 있다.
여기서 과연 니시다 철학을 '내적 생명 철학'과 '역사 철학'이라는 성격이 다른 두 가지 철학으로 분리하는 것 자체가 성립될 수 있는지 여부라는 문제 의식을 제기할 수 있다.
이찬수는 '불교평론'이라는 잡지 속에서 '근대일본의 두 얼굴-니시다 철학'에 대한 논평을 발표하고, '근대 일본의 두 얼굴-니시다 철학'을 높이 평가하면서 몇 가지 문제의식을 제기하는 가운데 허에 의한 니시다의 「역사철학」을 둘러싸고 이견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2) 이찬수의 '근대 일본의 두 얼굴-니시다 철학'에 대한 논평에서 이찬수의 논평에 따르면, '근대 일본의 두 얼굴-니시다 철학'에서 허는 니시다 철학을 '역사·정치적 측면 으로 초점을 맞추어 문장을 전개해 나가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고,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니시타니 게이지는 니시다에서 시작된 교토 학파의 실질적 대표자에게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서 니시다로부터 「자신보다 더 자신에 가까운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은 제자이다. 이러한 니시타니가 니시다의 철학을 아마 종교 철학적 시점에서 규명하는 책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저자는 니시타니의 이러한 관점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저자에 따르면, 니시타니는 니시다의 역사 철학에서 모인 종교 철학적인 면에만 접근한다는 무의해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니시타니와는 반대로, 니시다 철학을 종교적 측면보다는 역사·정치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문장을 전개해 나가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는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이의 용서에 대한 비평은 다음과 같은 용서의 논의에 대한 것이다.
니시다의 역사철학에 대한 니시타니의 무이해 내지 무시는 일과성의 해석의 실패 정도로서 단순히 취급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종전 이후 니시다의 역사철학이 비판되고 무시되고 있는 현실을 대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세인의 관심은 대체로 그의 종교 철학에 집중되어 있었고 그의 역사 철학은 거의 무시되어 버렸다 .
즉, 니시타니 케이지가 니시다 철학을 종교적·구제론적인 맥락에 기울여 이해하고, 역사 철학의 맥락을 무시하고 해석한 것은 니시타니의 실패라고 보는 허에 대해, 리는, 허 니시다 이해에는 문제가 있다고 말하면서, 니시다의 사상을 종교적으로 파악한 니시타니의 이해가 잘못되었다고 해도, 역사·정치 철학 중심에 파악한 허의 접근법도, 완전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있다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리는 천황·국체 등을 강조하는 역사·정치철학을 중심으로 한 허의 니시다 이해는 독자에게는 니시다 철학을 총체적으로 보는 것을 불가능하게 할 우려가 있음을 밝혀 있다.
후기의 니시다가 사용하는 말에 천황·국체 등이 잘 나와 있는 것은 확실한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역사철학·정치철학적이라고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은 아닐까. 니시다의 「선의 연구」로부터 마지막 완성 논문인 「장소적 논리와 종교적 세계관」에 이르기까지 총체적으로 볼 때, 니시다의 철학에는 종교 철학적 성질을 가진다고 생각될 정도의 일관된 것이 보이는 것도 확실하다. 그러나 오히려, 필자의 니시다 이해로부터 말하면, 니시다의 철학은 「생」에 관한, 「인생」에 관한 철학이라고 정의해 보는 것도, 니시다에 가까워지는 이해가 된다고 생각된다.
니시다의 일기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다. 「학문은, 畢竟life를 위해서 되어, life가 제일등의 일이 되어, life없는 학문은 무용해. 평생에 걸쳐 학문을 무엇보다 소중히 하고, 학문을 중심으로 한 인생을 걸어온 니시다에게 있어서, 학문보다 더 중요한 것이 life인 것을 알 수 있다.
니시다의 사색 속에는 항상 life라는 것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이것이, 필자의 니시다 이해의 하나의 관점이며, 본고에서, 이 일관점도 한국에 있어서의 니시다상에 가하는 것을 시도해 보았다.
2. 니시다의 역사 철학과 황실
(1)니시다의 역사 철학과 황실
여기서는 한국의 니시다 이해 속에서 '니시다의 역사 철학과 황실과의 관계'에 대해 허의 이해를 중심으로 고찰해 보기로 한다. 용서는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일본이 전쟁기에 돌입하자 조국의 일본 운명에 깊이 공감해 역사철학을 전개해 나갔다. 니시다는 역사적 생명의 구현을 추구하려는 역사철학에서 천황과 국체, 그리고 전쟁을 옹호함으로써 일본 국민의 내셔널리즘을 가장 노골적으로 나타냈다. 그는 후기의 다양한 역사적·정치적 논문을 통해 일본의 국민은 어떠한 환경에서도 창조적 응전을 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1943년, 「역사 철학」을 테마로 쇼와 천황에 어진강 을 했다.
이 내용과 일맥상 통하는 문장으로서 허는 그의 논문 '기억간의 전쟁-내셔널리즘의 충돌' 속에서 '역사 철학 시기의 니시다는 천황을 경애하며 천황과 국체를 모두 철학적으로 옹호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구견서의 '일본지식인의 사상'에서도 "다수의 국민은 한 국가에 도입된다는 철학적 해석을 통해 당시 일본 국가와 천황의 존재를 인정했다"고 말했다. 즉, 허와 구는, 니시다가 역사·정치적 철학을 가지고 천황과 국체, 그리고 전쟁을 옹호하게 되어, 니시다의 역사 철학은, 철학적 내셔널리즘까지 제시했다고 니시다를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허는, 니시다의 철학적 내셔널리즘은 「황실을 절대화」하는 것에 이르렀다고,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 역사와 시대는 신성화되어 결국 절대무의 자각 및 내적 생명이 누릴 수 있는 최상위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고 시대를 비롯한 민족·국가·천황의 같은 역사적·정치적 개념이 절대화된다. 여기에, 니시다의 역사·정치 철학이 탄생한다” 라고. 그리고 「그의 국가론은, 천황 중심의 종교적 국가론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니시다의 「천황 중심의 종교적 국가론」은 「제정 일치」에 이르는 것이라고 논하고 있다. 그런데 니시다의 손자인 우에다 히사는 니시다의 황실에 대한 생각을 잘 엿볼 수 있는 이야기를 이렇게 쓴다.
“할아버지는 황실에 대해서는 메이지인답게, 일본 민족의 총본가라고 하는 의미로 친애의 정을 안고 있고, 정치를 떠난 문화의 패트론이라고 하는 존재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지만, 우리도 에는, 천황 개인은 보통의 인간으로, 자유를 가지지 않는 불쌍한 존재라고 하고, 중학교 시대 군국주의적인 교육을 받고 있던 우리를 당황하게 했다”고.
이런 이야기에서 봐도, 니시다는 확실히 황실에 대해 존경의 마음을 안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와 함께 천황 개인은 보통 인간인 것도 생각하고 있던 것 같다. 니시다 만년의 논문에는, 황실을 중심으로 한 세계 창조, 황실의 본연의 자세를 많이 논하고 있는 것도 확실합니다만, 그것이 「니시다의 국가론」을 「종교적 국가론」이라고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은 아닐까.
(2)니시다의 「일당 다」와 「국가와 국민」
허는, 니시다의 역사 철학 속에서의 논리로서 「일 즉 다」, 「절대 모순적 자기 동일」을 취해, 「국가(혹은, 황실)와 국민의 관계」에 어떻게 작용하고 있다 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논리의 요구에 따라 피로한 니시다의 다양한 정치적 주장과는 별도로, 일본의 실제 역사를 보면, 우리는 개인적 하나로서의 국민이, 전체적 하나로서의 국가와, 절대 모순적 자기 동일이라는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는지, 아니면 국가가 일방적으로 국민개개인을 종속과 지배의 대상으로 전락시켜 버렸는가 하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천황과 신민, 국가와 국민 사이에, 진정으로 대등한 관계가 성립했다고 하면, 니시다는 천황과 국가에 대해서 반드시 수순으로의 길 뿐만이 아니라, 저항과 반발, 그리고 비판에의 길 도 열어 두어야 했다고 생각된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허는 니시다의 논리에서 문제가되는 것은 "국가와 국민"과의 관계이며, 그 관계는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되어 상호 부정과 대등한 관계에 하지 말라고 한다. 그리고 결국 니시다는 철학의 논리적 힘으로 국가가 일방적으로 국민을 종속하고 지배하는 관계로 전락하는 것을 지지했다고 비판한다. 허는 니시다가 “서양철학서를 깊게 읽으면서 그가 서양의 대표논리로 여겨진 ‘이치노타’라는 논리를 비판하고 ‘일즉다’라는 생명논리를 창안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일 즉 다'로 '이치노 다'의 논리에 도전했지만 결국 서양의 논리의 '이치노 다'의 논리로 전락하게 되었다고 한다. '일 즉 다'의 논리는 제국주의 논리에 빠져 폭력적인 것으로 전락해 버렸기 때문에 니시다의 '일 즉 다'의 논리는 실패라고 논하고 있다. 그리고 허는 "강력한 물리력을 갖춘 천황과 국체의 자기 한정이 약자의 타자성을 박탈할 수 있다는 점, 그 점을 니시다는 무시했다"고 말하면서 천황제의 국가 체제에 의한 폭력은 "두 가지 방향으로 나아갔다. 하나는 일본 국민이고, 다른 하나는 동아시아의 다른 민족이다"고 말했다. 즉, 천황제라고 하는 국가 체제에 의한 폭력에, 니시다의 논리가 작용해 버렸다고 말해, 니시다를 비판하고 있다.
3. 니시다의 일본 문화론과 황실
여기서는 한국에서 니시다의 문화론과 황실과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고찰해 보기로 한다. 구견서는 「일본 민족주의사」에 있어서, 「니시다의 일본 문화론은, 일본 문화 우월주의의 발로에 지나지 않는 편협한 문화론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의 일본 문화관은 전전에 있어서 천황 문화관을 창출 다른 한편으로는 전후 일본문화론에도 사회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즉, 구는, 니시다가 황실을 중심으로 한 일본 국가가 역사적 세계를 이루고 세계 중심이 된다고 보고 있고, 그러한 니시다의 일본 문화론은, 전전에는 천황 문화관을 창출해, 전후에는 사회에 큰 영향을 주면서 제자들의 활약으로 천황문화로 발전하게 되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구는, 「일본 지식인의 사상」에 있어서도, 니시다가, 교토 학파의 선구자라고 말하면서, 니시다는 천황제와 일본 문화에 대한 견해를 선지, 「자신의 철학적 사고에 의해 천황 라고 일본 문화에 대한 철학적 기반을 제공했다”고 논하고 있다.
그런데 구는 니시다의 일본 문화론의 철학적 기반이 되는 논리가 니시다의 '일 즉 다' '절대 모순적 자기 동일'이라고 보고, 이러한 니시다의 철학적 논리가 일본 문화 우월 주의, 천황문화론을 철학적으로 정당화하고 마침내 민족차별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논하고 있다.
필자가 보러도 니시다는 확실히 문화의 발전을 위해 일본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황실을 중심으로 한 일본이 세계문화의 발전을 담당해 나가기를 바라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니시다의 본래의 의도에 전쟁이나 침략이라는 파괴적인 것이 있었는지 아닌지를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고, 어디까지나 문화와 학문의 흥능이라는 관점으로부터의 일본 중심의 세계성을 니시다는 주장했다고 본다 편이 오히려 본래의 니시다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4. 니시다와 전쟁에 대한 이데올로기 제공을 둘러싼
한국의 니시다 이해에 따르면 니시다가 전쟁에 이데올로기를 제공하고 전쟁을 지지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1) 세계 신질서의 원리
허는 니시다에 대해 “그는 서양제국주의에 대항한다는 명분하에 대동아공영권의 이념을 철학적으로 지지함으로써 이류제국주의에 빠진다”고 말했다. 이러한 견해는 구견서의 『일본지식인의 사상』에도 다음 ①과 ②와 같이 언급되어 있다.
① 니시다는 새로운 일본의 탄생과 함께 새로운 세계를 구성했다. 그것은 먼저 각각의 국가발전을 통해 결합하는 공영권을 구축하고, 궁극적으로는 공영권에 결합하는 세계를 연상했다. 이 관점에서 보면, 니시다는 세계 국가의 형성을 통한 세계 평화를 구상한 것으로 보인다. 문제점은 세계국가와 일본국가와의 관계이다. 당시 일본은 아시아의 통합을 일본을 중심으로 구성해 그 연장선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② 그 성명이란 일본이 행한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발표된 대동아공동선언(1943년)을 의미한다. 국가와 국민이 하나가 되어, 천황이 일본을 통치하는 유일한 존재이며, 황도는 세계의 지배 원리가 되어, 일본 문화는 세계 문화로 성장해야 할 것으로 보는 니시다가, 일본주의자였다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특히 니시다가 제시한 세계사적 세계이념은 일본을 중심으로 세계가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당시 침략을 통해 아시아를 통합하려는 군국주의자의 대동아공영권 구상에 이용 되기 위한 도움이 되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
여기서 구는 니시다의 「세계신질서의 원리」가 문제가 되는 것은, 세계국가의 형성을 통한 세계평화를 구상하는 것으로 해도, 일본을 중심으로 한 곳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게다가 “역시 일본 천황과 일본 민족을 다시 회생하려는 애국심의 발로였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그는 민족주의자였고 그의 철학은 민족주의 철학이었다고 평가하는 것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니시다의 「세계신질서의 원리」의 내용에 있어서 제일 문제가 되는 개소 하나는 「대동아전쟁은 동아제민족이 걸리는 세계적 사명의 수행하지 않는 성전이다」라고 하는 일절 이고 대동아전쟁을 '성전'으로 전쟁을 지지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에다 타카아키에 따르면 「세계 신질서의 원리」는 니시다가 쓴 것이 아니라고 한다. 「세계 신질서의 원리」는, 니시다 본인이 집필한 것과, 그것을 바탕으로 타나베 수리가 요약한 것의, 2개가 존재해, 실제로 「다이토아 선언」의 아래에 된 것은 타나베 슈리가 쓴 것이었다. 이러한 '세계신질서의 원리'를 둘러싼 문제에 대해서는 일본 국내에서도 니시다를 비판하는 입장과 옹호하는 입장 사이에 다양한 논쟁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의 니시다의 서한으로부터 니시다 본인의 의도와 심정은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보면, 「신문을 보고 실로 싫어졌다. 나의 이념은 아무것도 이해되지 못했다.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는다. 나는 표현은 어쨌든 근본의 이념의 확립을 중시한 것이다”라고도 철자하고, 그리고 “도조의 연설에는 실망했습니다”라고도 말한다. 일기나 서한 등은 개인적인 것이고, 생각이나 심정이 솔직하게 표현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세계 신질서의 원리」에 쓴 「성전」등은, 니시다 본인의 본래의 의도 꽤 멀리있다. 니시다의 철학이 군부에 의해 일부를 잡아 이용되었다고 생각된다.
(2)좌담회 “세계사적 입장과 일본”
그런데 니시다가 전쟁과 관련되어 논의되는 역사적 사건은 교토 학파가 중심이 된 좌담회 '세계사적 입장과 일본'이다. 대조적으로, 도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계사의 철학이 태평양전쟁이라는 시국적 과제에 대한 견해를 선보인 것이 “세계사적 입장과 일본(1943년)”이다. 이것은 “세계적 입장과 일본(1941년) )』 『동아공영권의 윤리성과 역사성(1942년)』『총력전의 철학(1942년)』 등 3편의 좌담회 기록으로 구성됐다」고. 이 3회의 좌담회에는, 니시다는 참가하고 있지 않았지만, 제자인 타카사카 마사히로, 니시타니 케이지, 다카야마 이와오와 함께, 스즈키 나리타카의 4명이 참가해, 내용은, 「중앙 공론」에 게재 되었습니다 . 도구는 다음과 같이 논의한다.
① 이와 같이 교토학파는 세계사의 철학에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반면, 그들의 세계관은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의 질서의 확립과 함께 세계적 질서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들은 일본의 아시아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왜곡된 민족관과 문화관을 제시했다. 특히 아시아를 침략한 서유럽과 전쟁을 하는 것이라고 위장하여 아시아 민족을 해방시키기 위한 성전이며, 영미와의 전쟁에 대해 유럽을 개방시키기 위한 성전이라고 나타내면서 일본이 일으킨 전쟁을 총체적으로 황전으로 규정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교토학파는 총이나 칼로 전쟁을 하지 않았지만 머리와 사상으로 치열한 생존경쟁과 민족전쟁을 우수하게 수행한 전사였다고 보는 것은 오판일까. 그것이 합리적입니다.
있다면 교토 학파의 학풍은 주관적이고 왜곡된 국수주의적 학풍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② 이와 같이 교토학파 제2세대는 사상연구를 학문적 발전과 미래지향적 사색보다는 국가를 위해 국수주의적 사상을 창출하여 권력복종적인 자세로서의 역할을 하지 아니하며, , 국가의 사상적 사무라이로 활동했다고 말할 수 있다. 교토학파는 세계사철학파라고도 불린다. 그들은 스즈키 나리코를 제외하고
니시다의 제자였고, 타나베 전의 제자였다.
위와 같이 구는 니시다의 제자들로 구성된 교토학파의 '세계사의 철학'은 좌담회 '세계사적 입장과 일본'을 통해 일본의 아시아 침략을 정당화하고 왜곡한 민족관 라고 문화관을 제시함으로써, 사상으로 전쟁을 수행했다고 논하고 있다. 게다가 교토학파의 국수주의적 학풍은 학생, 지식인 등에도 광범위하게 영향을 주면서 학문적 발전뿐만 아니라 권력복종적인 자세와 함께 국가의 사상적 시녀로 활동했다고 보고 하고 있는 것이다. 니시다는, 그 좌담회와는 직접적 관계가 없었다고 해도, 니시다의 제자들이 주로 되고 있는 교토 학파의 전쟁 옹호에의 발언이었기 때문에, 니시다에의 목목이 되어 붙잡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III. 한국에서의 니시다 철학의 의의와 과제
1. 한국에서 니시다의 의미
니시다의 철학은 독창적인 체계와 논리를 가지고 있는 철학이기 때문에 세계에서도 주목받고 있으며, 한국의 연구에서도 니시다의 철학은 세계적이라고 인정되고 있다. 사실 서양에서는 동양 철학·사상이 무시되어 온 상황 속에서 니시다라는 동양 철학자가 자신이 가진 사상·철학에 논리라는 서양적 사고 형식을 부여해 계속 사색한 것 자체가 세계적인 일이며, 세계철학사에 있어서도 업적을 이루는 것으로 이어질 것이다. 이러한 니시다가 세계에 대한 가능성을 개척한 것은 같은 동양의 일원으로서의 한국에게도 매우 기쁩니다. 을 안아준다. 이처럼 니시다와 니시다 철학의 의의는 일본만이 아니다. 한국에서의 니시다 연구는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런데 니시다는 난해로 여겨지는 철학적 논문 이외에도 방대한 양의 문장을 남기고 있다. 일기를 비롯해 수상, 한시, 그리고 서한 등 니시다의 인간 그 자체가 느껴지는 문장에서는 논문과는 다른 것을 맛볼 수 있다. 니시다의 난해한 논문이 산과 같이 연구에 대한 힘든 도전의 의지를 준다고 하면, 니시다의 일기, 서간 등은 바다처럼 포용력이 풍부한 모습으로 친하게 맞이해 주는 것이다. 니시다의 논문이 니시다의 철학적 논리를 말해준다고 하면, 니시다의 일기, 서한 등은 니시다의 실제 행동·실천으로서의 삶의 방식이 니시다의 희로애락과 함께, 훈훈하게 높게 전해 오는 것이다.
게다가 필자가 니시다에 매료되는 이유의 하나는, 그 많은 사람들과의 친교하는 교류와 그에 따른 니시다를 중심으로 하는 인맥이다. 이러한 점은 니시다의 철학의 훌륭함만에 의한 것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그의 사람 좋아하는 성격에 의하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니시다에는 정이 깊은 사람을 좋아하는 한국인의 정서에 있어서는 받을 수 있는 친근함을 느끼게 될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이런 것을 생각하면, 한국에도 재빨리 니시다의 철학 논문, 그리고 일기, 서간 등이 번역되어 발간되는 것이 기다려진다. 한국에 있어서의 독자들이 니시다의 폭넓은 저작에 접할 수 있으면, 반드시 니시다의 매력에 매료될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2. 한국에서 니시다의 오늘의 도전
향후, 한국에서의 본격적인 니시다 연구를 기대하면서, 한국에 있어서의 니시다 연구의 오늘날 과제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한다.
과제로서, 우선, 「니시다 저작의 번역·발간」이 급무인 것을 들 수 있다. 니시다의 전집은 물론이며, 일본 철학·일본 사상에 관한 「문헌의 번역・발간」도 필요하다. 문헌을 통해 일본 철학에 접할 기회가 많아지면 그에 따라 니시다에 대한 그리고 일본의 철학·사상에 대한 인식의 전환과 함께 학술적 관심도 높아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 한·일 양국의 서로의 인식과 의식의 전환을 들 수 있다. 무관심, 편견적 시선과 차별, 우월감으로부터 탈피하여 서로 대등한 입장에 서는 인식으로의 전환이 바람직하다.
세 번째는 학문적 방법과 인식의 문제이다. 우선 한·일 양국은 학문을 정치적 관계 등으로 이루어져 학문 본래의 순수한 입장에서 연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그러한 경우, 학문적 왜곡성이나 편협성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넷째는, 니시다의 연구 방식으로서, 니시다의 철학적 내용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우선, 니시다의 말의 의미로부터 하나하나 검토해 연구해 가는 착실한 작업도 필요할 것이다 . 니시다의 말은, 분명히 난해이며, 그것을 한글만의 표기로 했을 경우는, 의미가 정확하게 전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현재는 한글이 기조가 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밟지 않아도 니시다의 말이나 개념에 대한 정확한 파악이 필수라고 생각된다.
이상, 한국에 있어서의 니시다 연구, 나아가서는 일본 사상·철학의 수용, 연구를 위한 과제에 대해서, 필자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말해 보았다. 니시다에 접하는 사람은, 니시다 철학이 난해하다고 해서, 벽을 느끼는 일도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 벽과 과제를 하나하나 해결해 가는 사이에, 니시다가 가지는 매력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리고, 장래, 한국에 있어서의 니시다상은, 현재와는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전개해 나갈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한국에 있어서의 니시다 수용의 장래는, 우리의 노력에 의할지 모르지만, 한일 양국의 진정한 우정에 이어지는 밝은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고 전망된다.
매듭 본고에서는 한국에서의 니시다 수용과 그 이해의 양상을 고찰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했다. 본고에 임하는 가운데 필자가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우선, 한국에 있어서의 니시다가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지를 말하는 이전의 문제로서, 우선, 니시다 기타로와 니시다 철학은 낯선 존재인 것이었다.
그런데 니시다에 대한 한국의 연구 중 눈에 띄는 것은 역시 전쟁과 니시다를 연결해 이해하는 경향이다. 니시다는 전쟁에 철학을 제공한 내셔널리스트이며, 일본 문화 우월주의자라는 니시다상이 떠오른다. 그러나 향후 한국에서의 니시다 수용의 경향이 전쟁과 니시다를 연결하는 이해에 머물러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유명한 사상가인 김지하(김지하)는
“제국주의 철학이 되는 것은, 사상적 원액을 역사적으로 활용하는 것의 문제입니다. 일본의 경우가 그렇습니다.니시다 철학과 같은 것이 제국주의의 침략의 이데올로기로 변질된 것은 철학자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인들이 이용한 것일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한국에서의 니시다 연구의 선구의 허유모리도 현재와는 다른 방면으로부터의 연구에의 의지를 표명하고 있고, 니시다의 철학에 있는 종교성에 주목하는 이찬수와 같은 견해도 나와 있는 것이다. 즉, 다방면에서의 연구를 진행하면서 니시다의 전체상을 이해해 나갈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한일 양국 사이에 진정한 우호를 맺기 위해서도 서로의 철학·사상에 관심을 가지고 이해해 나가는 것이 중요한 일일 것이다. 이를 위해서도 한국에서는 니시다와 그 철학·사상을, 그리고 일본 사상을 진정으로 이해해 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현실적으로는 양국의 역사적 배경과 함께 극복해야 할 문제가 있는 것도 확실하다. 그러나 장래는 니시다의 전체상에 더 가까워진 연구를 기대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중요한국어 참고문헌】:본고에서는 한국어의 참고문헌만 들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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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채「한국모노크롬회화의 양식적특성에 관한 연구:미니멀아트」, 홍익대학, 2003.(민경채 '한국모노크롬 회화의 양식적 특성에 관한 연구: 미니멀 아트', 홍익대학)
・ 박규태『상대와 절대로서의 일본』, 제이앤씨, 2005.9. (박규태 '상대와 절대로서의 일본', 제이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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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수 「근대일본의 두 얼굴-니시다 철학논평」 「불교평론」,현대불교미디어센터, 2001. 봄호. 제6호. (이찬수 “근대 일본의 두 얼굴-니시다 철학 논평” “불교 평론”, 현대 불교 미디어 센터, 2001. 춘호. 제6호)
· 최현민 「쿠마츠 마이치의 선사상」, 서강대학교 대학원, 1994. (최현민 '쿠마츠 마이치의 선사상', 서강대학교대학원)
・코사카쿠니츠구・저, 심적・역 『절대무의 견성철학-니시다키타로의 사상』, 장경각 (코사카 국계·저, 심외·역 “절대무의 견성 철학-니시다 기타로의 사상”, 구라카쿠)
・ 하타노 신지 「이우환의 작품에 나타난 정신성에 관한 연구」, 경북대학교, 1994.(하타노 신지 「이우환의 작품에 나타난 정신성에 관한 연구」, 경북대학교)
・한상일『일본지식인과 한국』, 도서출판오름, 2000.8. (한상일 '일본지식인과 한국', 도서출판 올름)
・ 허우성「니시다철학의 비판적해명<A Critical Exposition of Nishida's Philosophy>」、『哲学と現実』、哲学文化研究所、1988.(허유모리 「니시다 철학의 비판적 해명<A Critical Exposition of Nishida's Philosophy>, 『철학과 현실』, 철학문화연구소)
변질된 것은 철학자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인들이 이용한 것입니다.”이다. ・ 허우성「니시다철학의 베단타철학에 대한 비판」『인도철학 제1권』, 인도철학회, 1989.1.(허유모리 「서
타철학의 베단타 철학에 대한 비판 ''인도 철학 제일', 인도 철학회)
・ 허우성「니시다 철학의 양이적 성격」, 「일본사상 제1호」, 한국일본사상사학회, 1993.3. (허유모리「니시다
철학의 회이적 성격」 「일본 사상 제1호」, 한국 일본 사상사 학회)
・ 허우성「니시다와 서양철학-시간관을 중심으로」, 「동양학 26호』, 단국대학교부설동양학연구소, 1996.10. (허유모리 「니시다와 서양 철학-시간관을 중심으로」, 「동양학26호』, 단국대학교 부설 동양학연구소)
・ 허우성「진리는 현해탄을 건널 수 없는-니시다 철학을 중심으로」, 「철학과 현실43호』, 철학문화연구소, 1999.12. (허유모리 「진리는 현해탄을 건너갈 수 없다-니시다 철학을 중심으로」, 「철학과 현실43호』, 철학문화연구소)
・ 허우성『근대일본의 두 얼굴-니시다철학』, 문학과 지성사, 2000.5.(허유모리 '근대 일본의 두 얼굴 - 서쪽다철학」, 문학과 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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はじめに.
Ⅰ.韓国における西田受容.
1.韓国における西田受容の現状 2.韓国における受容の傾向性 Ⅱ.韓国における西田幾多郎の理解
1.西田の歴史哲学.
(1) 『近代日本の二つの顔-西田哲学』から.
(2) 李賛洙の『近代日本の二つの顔-西田哲学』に対する論評から.
2.西田と歴史哲学と皇室.
(1) 西田の歴史哲学と皇室.
(2) 西田の「一即多」と「国家と国民」.
3.西田の日本文化論と皇室.
4.西田と戦争へのイデオロギー提供をめぐって.
(1) 世界新秩序の原理.
(2) 座談会「世界史的立場と日本」 Ⅲ.韓国における西田哲学の意義と課題.
1.韓国における西田の意義.
2.韓国における西田の今日的課題結び.
はじめに 近代日本の代表的な哲学者である西田幾多郎(1870~1945)は、その生涯と思想について多方面から多くの研究が行われ、西田の独創的な哲学の体系は世界的哲学としてその位置が示されつつある。本稿の筆者が西田にはじめて触れたのは『善の研究』である。西田は、彼の処女作『善の研究』において、「此書を特に『善の研究』と名づけた訳は、哲学的研究が其前半を占め居るにも拘らず、人生の問題が中心であり、終結であると考えた故である」 と語っている。
筆者が受けた西田の第一印象は、人間の生き方を追求する求道者のような姿であり、思索また思索を重ねていく哲学者の姿であった。難解な西田の哲学用語や哲学に尐しずつ馴染みながら、西田の研究論文や書簡や日記などに接していく中、人間的魅力のあふれる一人の真面目な人としての西田幾多郎もみえてきた。これが私のなかでの西田像ともいえるだろう。しかし、韓国の文献を読むにつれて浮かび上がってきた西田像は、筆者のもつ西田像とは異なる観点からのものが多かった。
本稿において筆者は、まず、韓国における西田の受容の現状を概観することにした。そして、西田受容の現状からその傾向性を把握した後、論点になる部分を取りあげながら、韓国における西田理解について考察することにした。できる限り、西田の本来の意図とはいかなるものであったのかという点も念頭においてみることにした。
西田の哲学は「日本の哲学の座標軸」 ともいわれている。韓国人にとって、西田の哲学・思想を理解することは、日本の精神の奥にある哲学・思想を理解するための、一つの手がかりになるのであろう。こうした点を、韓国において西田研究のもつ重要性の一つとして確認しておきたい。
Ⅰ.韓国における西田受容.
1.韓国における西田受容の現状.
韓国では、日本思想・哲学に対する関心は殆どなかったともいえる。それはたとえば、大学の専攻に、日本語日本文学科や日本語教育科、日本学科は存在しているが、独立した日本哲学の専攻は存在していないことからもいえよう。こうした韓国の実状のなかでの、西田幾多郎の受容のことになる故に、西田幾多郎がまだ十分に認識されていないことが、推測できるのではなかろうか。
まず、韓国における西田に関する文献を検討してみることにしよう。
西田の著作のなか、韓国語で翻訳して発刊されているものは、わずか一冊である。また、西田に関する研究書は、日本の研究者の研究書を韓国語で翻訳した書籍が一冊、韓国人による研究書が一冊、計二冊のみである。このように、筆者の調べた限りでは、書籍の全体にわたって西田幾多郎を主題とする韓国語で発刊されている書籍は、この三冊しか存在していないことが把握できた。
西田の著作のなか、韓国語で翻訳されている唯一のものは、『善の研究』である。『善の研究』の最初の発刊は、崔絃(チェ・ヒョン:최현)の翻訳によるものであって、1963年に創元社から、1970 年に三信書籍から出版された。その後、1983年に、金常善(キム・サンソン:김상선)の翻訳によって、ミョンムンダンから発刊された。そして1990年に、徐石演(ソ・ソクヨン:서석연)の翻訳による『善の研究』がボンウ社から発刊された。現在、一般の書店でも入手可能なものとなっているのは、徐による『善の研究』である。
徐は「この本に初めて接した時は、若干難しくて拒否感まで感じたが、繰り返し読んでいくと、手放せない魅力とともに全身に言葉では表現できない大きな感動に襲われた」と、『善の研究』に対する感想とともに、その翻訳することになったきっかけを述べている 。
西田に関する研究書は、2003年に、小坂国継の『西田幾多郎の思想』 が、『絶対無の見性哲学-西田幾多郎の思想』 という題名で発刊されている。翻訳は、深寂(シンジョク:심적) による。
深寂は「訳者の話」において、「近代日本の代表的な哲学者と言える西田幾多郎の生涯と、彼の哲学世界を通して、日本人の心性や日本的な思惟方式を知ることもできるのであろうが、西田はとくに、東洋の仏教哲学を中心として西洋の哲学の概念を導入し、西洋哲学と比較しながら彼の哲学的世界を構築したゆえに、東洋思想の優秀性を理解するのに役に立つと思われる」 と述べている。
次に、韓国人による韓国語で書かれた西田研究書として、『近代日本の二つの顔-西田哲学』 がある。本書は、2000年、慶熙大学の教授である許祐盛(ホ・ウソン:허우성)が編纂したものである。
この『近代日本の二つの顔-西田哲学』は、557ページからなり、3部8章の構成である。
著者の許は、「筆者が取った方法は、西田哲学に三つの発展段階を想定して、その段階のなか、ほぼ同じ時期に発表された一連の論文を集中的に読んで整理する式であった」 と述べている。そして、この研究書を『近代日本の二つの顔-西田哲学』と名づけた理由について、「尐なくとも、わが民族の歴史的記憶に押さえつけられて、又は単純な民族感情を持ってこの本を書きたくはなかったため、筆者はこの本の題名として『西田哲学批判』の代わりに、ただ『西田哲学』とした」 と述べている。さらに、「二つの顔」の意味については、「西田哲学は、こうして我々に尐なくとも二つの顔で近づいてくる。一つの顔には生命の躍動がみられ、もう一つの顔には帝国主義の日本が見られる。歴史哲学に失望したとしても、躍動する生命の顔を無視してはいけないし、生命哲学に陶酔して帝国主義の日本の顔を忘却してもいけない」 と説明している。また、「西田哲学に対する研究と翻訳が、ある程度進行した後には、異なる方式で書きたい」 と新しい西田研究への意思を表明している。この『近代日本の二つの顔-西田哲学』は、韓国では最初であり、唯一の西田研究書となる。
ところで、許は、1988年のハワイ大学での哲学博士学位 の論文を、西田哲学をテーマにして執筆している。「A Critical Exposition of Nishida’s Philosophy(西田哲学の批判的解明)」という題名の論文である。この論文が、韓国人による最初の西田研究論文になるのではなかろうか。そうした意味で、許は、韓国の西田研究の先駆けともいえよう。その意味では、許の研究は、今後の、韓国における西田研究の一つの出発点になるのではなかろうか。
なお、その他に、韓国における西田幾多郎について触れている書籍は、具見書(ク・キョンソ:구견서)の『日本民族主義史』 と『日本知識人の思想』 とが挙げられる。『日本民族主義史』における西田について言及している箇所は、韓国における西田像をつかむ一つの資料になると思われる。この『日本民族主義史』は、日本学という分野からの研究書であるが、日本の明治から現在までの政治家、経済人、知識人のなかから民族主義者を取り上げ、日本の民族主義とその意義について論じている。そして『日本知識人の思想』では、福沢諭吉、中江兆民、夏目漱石、津田左右吉、三島由紀夫、大江健三郎の思想とともに、京都学派と新京都学派の思想を論じるなかで、西田について言及している。この書籍においては、京都学派と新京都学派の思想の役割について、政治、社会、文化など日本のあらゆる分野に影響を与えていると評価しており、そのなかで、京都学派と新京都学派の源流になる人が西田幾多郎であると述べている。
次は、本稿筆者が確認できた西田に関する研究論文をみることにしよう。
韓国において西田哲学をテーマとした研究論文は、学術誌などに載せられているものは五本あったが、全部が許による論文であった。これらの論文の題名は、「西田哲学のべーダーンタ哲学に対する批判(1989年)」 、「西田哲学の攘夷的性格(1993年)」 、「西田と西洋哲学-時間観を中心に(1996 年)」 、「真理は玄海灘 を渡れない-西田哲学を中心に(1999年)」 、「記憶間の戦争:ナショナリズムの衝突(2006年)」21である。
また、その他の研究者による西田に関連した論文は、2004年に出されている金成珉(キム・ソンミン:김성민)の修士論文がある。金の研究は、韓国の哲学者である朴鐘鴻(バク・ジョンホン:박종홍)と西田幾多郎が、ヘーゲルの弁証法をそれぞれどういうふうに受容しているのかを比較した論文である。題名は、「朴鐘鴻と西田幾多郎のヘーゲル弁証法の変容に対する比較研究」 である。
その他、美術の作品世界への西田哲学の影響を扱う修士論文が三本あるが、そのうちの二本は、在日画家の李禹煥(イ・ウファン:이우환) の作品世界と、西田哲学との関係についての論文である。一つは、慶北大学校に在学した波多野慎二の「李禹煥の作品に現われた精神性に関する研究(1994年)」24という修士論文であり、もう一つは、徐智暎(ソ・ジヨン:서지영)の「李禹煥の作品に現われた『出会い』理論に関する研究(2002年)」 という修士論文である。残りの美術関連の論文は、閔キョンチェ(ミン・キョンチェ:민경채)の「韓国モノクロム絵画の様式的特性に関する研究:ミニマールアート(2003年)」 であって、韓国美術系のモノクロム(monochrome)絵画の研究のなか、日本のモノ(物)派と西田哲学との関連性について論じている修士論文である。
以上のように、筆者が調べた限り、西田を主題にした論文の殆どは、修士論文であって、韓国での西田を主題にしての研究の博士論文は、許の論文以外には存在していないことがわかった。
なおその他に、京都学派の学者や哲学をテーマとした論文のなか、西田との関係性について言及している「神、人間、そして,空:カール・ラーナー(Karl Rahner)と西谷啓治との比較研究(1997 年)」 という、李賛洙(イ・チァンス:이찬수)の博士論文があった。また京都学派の学者や哲学をテーマとした論文のなかで、西田について言及している修士論文は、崔ヒョンミン(チェ・ヒョンミン:최현민)の「久松眞一の禅思想(1994年)」 と呉ムンボン(オ・ムンボン:오문범)の「仏教の空に対するケノシス神学の照明(1996年)」 がある。
以上から把握できたことは、博士論文としては、1988年、許のハワイ大学での博士論文とともに、1997年、西田哲学自体をテーマにした論文ではないが、李の韓国の西江大学での博士論文、あわせて二本しかないことである。韓国においての西田研究の論文は、一年に一本にも至らない程度のペースであり、数尐ないことからも、韓国の西田研究が、まだ本格的には行われていないことが明らかである。
こうした韓国においての西田受容の現状への概観から、韓日両国の長い交流の歴史に比べて、西田研究は、その歴史がまだ浅いということがわかった。また許を除いては、西田専門の研究者の名前は挙げられないのが、韓国の西田研究の現状である。韓国において西田研究と受容は、歴史的にも量的にも始まったばかりである。そして研究以前の問題として、韓国人一般に西田幾多郎という名前すら充分に知られていないということも看過してはいけないことであろう。
2.韓国における受容の傾向性
ここでは、上述した韓国においての西田受容の現状への概観から、西田受容の傾向性を考察してみることにする。
なお最初に、韓国においての西田受容の傾向性を述べるとき、まず、韓国唯一の研究書である許祐盛の『近代日本の二つの顔-西田哲学』を、主な資料として用いることに言及しておきたい。この研究書が西田研究の貴重な資料として用いられているのは、2004年に出された金成珉の論文の「朴鐘鴻と西田幾多郎のヘーゲル弁証法の変容に対する比較研究」 からも見える。金の論文から、小坂国継の研究書の韓国語版である『絶対無の見性哲学-西田幾多郎の思想』とともに、許の『近代日本の二つの顔-西田哲学』を研究の資料として用いていることが確認できた。こうしたことからも許の研究は先行研究として、韓国の西田研究の方向づけに重要な立場にあることがわかる。
『近代日本の二つの顔-西田哲学』についての論評を、李賛洙は『仏教評論』という雑誌において 、次のように述べている。「西田幾多郎(1870~1945)は、近代の日本哲学の代表者と呼ばれてもふさわしい人である。しかしながら残念なことに、今まで我々の国においては、研究が皆無とも言えるほどであった。民族主義的な反日感情も一役かったと思われるが、西田哲学自体がとても難解であったことも重要因であるだろう。否、もしかしたら『近代日本哲学』というものを、どれほど真摯に考えてみたのかが疑われるところである。このような状況のなか、決して簡単ではない西田哲学を、体系的でありながらも、膨大な量の西田研究を整理しぬいたことだけでも、許祐盛教授の本著作は、国内の哲学界や政治思想界において、これからもずっと読み続けられる作品になるに間違いない。さらに、単純な民族感情を超越して、西田の言語を通じて東洋・西洋の哲学の問題点まで見せてくれたことは、著者の哲学的能力にもよるであろう」と。そして、「この本の価値は堅固である」と高く評価しながら、
「今やっと、我々の国においても、本格的に近代日本哲学に対する議論ができるようになったことは大変喜ばしい」と述べている。
さらに、許の『近代日本の二つの顔-西田哲学』についての書評として、宋フィチル(ソン・フィチル:송휘칠) は、こう述べている 。「我々の国には、未だに根強い反日感情があり、知識人さえ日本に『思想なんかあるか』と反問するほどの日本を無視する風土である故に、長い間、孤軍奮闘して編して出した許教授のこの本が、我々の国の日本思想研究に、否、東洋哲学研究に新しい地平を開く起爆剤になってほしい」と。
ここに挙げた李と宋の話のように、許の『近代日本の二つの顔-西田哲学』は、韓日の特殊な関係のなか、日本哲学・思想研究に繋がる西田研究書として出されたこと自体が高く評価できる。そして、これから批評と議論の対象になることも考えられることであろう。
ところで、『近代日本の二つの顔-西田哲学』において許は、西田の後期哲学を歴史・政治哲学であると見ていて、西田哲学の形成の背景について、次のように述べている。
西田哲学は、その生涯とともに議論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彼の哲学はその生涯から与えられたものを資料にして、そこから反省と思惟を加えて形成されたからである。彼の生涯を論じるときには、近代日本の歴史もさらに考慮しなければならない。彼が内的生命と歴史的生命を追及している間、彼の生涯は明治・大正・昭和へつづく近代日本の歴史的環境と密接に連関づけられていたからである。西田哲学の形成に重要な役割となったものとして、初めは主として個人的悲劇が、次は主として衝撃と激動の時期を生きていた日本人全体が直面していた歴史的運命と、これに対
しての日本人の集団的対応があった 。
以上のように許は、西田の哲学が、初めは個人的悲劇に、歴史哲学の時代には日本人が直面した「歴史的運命」に対する「集団的対応」という時代背景のなか形成されたと論じている。つまり、西田の歴史哲学は、そのような戦争へ総動員された日本の歴史的背景のもとで形成されたものであって、戦争に西田哲学が関わってしまったとみるのが、許の大きい論点の一つになっている。
その他、西田理解と受容の内容がみえる文献として挙げられるのは、具見書の『日本民族主義史』と『日本知識人の思想』である。これらの文献を概観してみると、西田の哲学が、独創性をもつ世界的な哲学であることは認めながら、後期の西田と西田哲学に対しては、戦争と結び付けて、哲学的ナショナリズムであると断言し、批判している。さらに、京都学派と新京都学派の一部が、戦争擁護の発言をしたことに関連して、西田哲学を批判の的にする傾向性をもっている。
西田に対する批判といえば、擁護する側の声と交じりながら、当時から現在に至るまで絶えず行われてきた。本来、哲学者なら誰でも、自分自身の哲学的論理への批判の矢は避けるのはできないことであるが、それにしても、西田批判の場合は、論争の焦点の一つが、西田哲学の近代日本の帝国主義の侵略戦争へのイデオロギー提供にあることが、大きい特徴であろう。西田と戦争との関わりについての西田批判は、特に日本国内の研究のなかにも厳しいものがあったが、西田の哲学を高く評価しつつある海外の研究、とくにアメリカやヨーロッパの研究においても、論じられているのが事実である。それは、アメリカやヨーロッパの西田研究の接近方式が、歴史的・政治的立場からのアプローチを優先する傾向をもっていたのも一つの原因であるとみられる。
同様に、現在韓国における西田研究の場合も、西田と戦争との関わりについての注目が大きい傾向の一つであることが、先行研究から把握できた。こうした西田と戦争との関わりについての論争は、近代化という課題をもって日本が戦争に全力を尽くした時代を生きていた西田においては運命ともいえるものであったし、西田研究者ならば避けることのできない、一つの課題になるだろう。
しかし、その西田と戦争との関わりについての論争が、数尐ない研究のなかでの話になると、韓日の歴史的事実が背景になって、西田の全体像に偏ったイメージが植え付けられる可能性も十分考えられる。西田哲学・思想の本来の姿を見逃す恐れをもつことも予測できる。
本来、哲学というものは、時間や場所によって限定されないものであり、真理と普遍性を求める学問であるところに、その性質があるといえる。こうした哲学の本来のあり方を勘案するとき、西田が戦争と関連付けられて、「西田の歴史哲学は哲学的ナショナリズムである」、「西田の文化観は文化的民族主義である」といわれることは、西田の哲学・思想においての普遍性が疑われる問題にも係わるのではなかろうか。
Ⅱ.韓国における西田幾多郎の理解
ここでは、西田と戦争との関わりをめぐっての、韓国における西田理解を考察することにした。
1.西田の歴史哲学
(1)『近代日本の二つの顔-西田哲学』から
許は、西田が重要な二つの哲学を追求したことを西田の全集を通して確認し、その一つは「内的生命哲学」であって、もう一つは「歴史哲学」であるという。そして、「内的生命哲学」は宗教的救済論的であって、「歴史哲学」は歴史・政治的であると論じながら、「彼の哲学が、独創性や普遍性のみならず、ナショナリティ まで見せている」 と述べている。さらに許は、西田哲学が「ナショナリティ」という「非普遍性」の論理をもつ故に、「東アジア近代史の全体の情熱と破滅に深く関連づけられた」
とも述べ、その意味からも西田の哲学は世界へ繋がると、批判的に西田を論じている。しかしながら許は、西田の「内的生命哲学」も「歴史哲学」も、本質的には存在論であると指摘し、二つの生命に一つの論理を付与し、その論理を追求した哲学者としての西田に対して、「日本の代表にとどまらず、世界の一流の哲学者だ」 と高く評価する。
そして、その存在論の核心には「自覚の形式」があると、次のように述べている。
「自己が自己において自己をみる」という自覚の形式、これに対する完全な理解は1929~1930年頃、成熟した絶対無の自覚の哲学において成している。自覚の形式が適用される限り、いかなる事象でも完全な実在性を得ることになる。この形式の芽は、純粋経験、芸術の創造行為のようなものにあったが、ついに瞬間的な自覚の一行為に至ることになり、歴史の一時代、国家、天皇などの概念にまで適用される 。
許によると、西田の「自覚の形式」の形成・適用において、1904年頃には「内的生命哲学」が最初形成され、1929~1930年の時点で成熟の頂点に至り「絶対無の自覚の哲学」を成し、また、1931~ 1932年頃の論文からは「歴史哲学」が政治的概念と結合して、自覚の形式も歴史の一時代、国家、天皇などの概念にまで適用されたという。こうした1931~1932年頃の、西田の初期の「内的生命哲学」から後期の「歴史哲学」への移行を「西田が、内的生命の追求から得た自覚の形式を、歴史的生命の活動にまで、そして時代や国家などの非意識的現象にまで拡大して適応するようになったことを、筆者は、転回turnと呼んでみた」 と、意味付けるのである。
さらに、「転回とともに彼は、自覚の一行為の絶対性と自己限定のかわりに、歴史的一時代の絶対性と自己限定を主張することになった。彼は、さらに国体や国家などの政治的概念を議論した」 と述べ、「西田の政治哲学は、彼の歴史哲学から出る」 と論じている。
ここで、果たして西田哲学を「内的生命哲学」と「歴史哲学」という、性格の異なる二つの哲学として分離すること自体が成り立ちうるかどうか、という問題意識が提起できる。
李賛洙は、『仏教評論』 という雑誌のなかで、『近代日本の二つの顔-西田哲学』に対する論評を発表し、『近代日本の二つの顔-西田哲学』を高く評価しながら、いくつかの問題意識を提起するなか、許による西田の「歴史哲学」をめぐって異見を示しているのである。(2)李賛洙の『近代日本の二つの顔-西田哲学』に対する論評から 李賛洙の論評によると、『近代日本の二つの顔-西田哲学』において許は、西田哲学を「歴史・政治的側面に焦点をあわせて文章を展開していく傾向」をもっていると、次のように指摘している。
西谷啓治は、西田から始まった京都学派の実質的代表者に値する人として、西田から「自分よりもっと自分に近い人」という評価をもらった一番弟子である。このような西谷が西田の哲学をおそらく宗教哲学的視点から究明する本を出している。しかし、あいにくなことに、著者は、西谷のこのような視点を批判している。著者によると、西谷は、西田の歴史哲学から斥けた宗教哲学的な面だけに接近するという無理解を示している。そして西谷とは逆に、西田哲学を宗教的側面よりは歴史・政治的側面に焦点をあわせて文章を展開していく傾向をみせる。しかし、ここには問題があるのではなかろうか 。
こうした李の許に対する批評は、次のような許の議論に対してのものである。
西田の歴史哲学に対する、西谷の無理解ないし無視は、一過性の解析の失敗程度として単純に取り扱うべきものではない。終戦以降の西田の歴史哲学が、批判されて無視されている現実を代弁していると言える。世人の関心は、大体に彼の宗教哲学に集中されていて、彼の歴史哲学は殆ど無視されてしまった 。
つまり、西谷啓治が西田哲学を宗教的・救済論的な脈絡に傾けて理解し、歴史哲学の脈絡を無視して解析したのは西谷の失敗であるとみる許に対して、李は、許の西田理解には問題があると述べながら、西田の思想を宗教的に把握した西谷の理解が間違ったとしても、歴史・政治哲学中心に把握した許の接近法も、完全なものとは言えないというのである。さらに、李は、天皇・国体などを強調する歴史・政治哲学を中心とした許の西田理解は、読者にとっては西田哲学を総体的にみることを不可能にする恐れがあることを明らかにしている。
後期の西田の使う言葉に天皇・国体などが良く出ているのは、確かなことである。しかし、それにしても歴史哲学・政治哲学的であると断定するには無理があるのではないか。西田の『善の研究』から最後の完成論文である『場所的論理と宗教的世界観』に至るまで総体的に見るとき、西田の哲学には、宗教哲学的性質を持つと思われるほどの一貫したものが見えることも確かである。しかしむしろ、筆者の西田理解からいえば、西田の哲学は「生」に関する、「人生」に関する哲学であると定義して見るのも、西田により近づく理解になると思われる。
西田の日記には、こう綴られている。「学問は、畢竟lifeの為なり、lifeが第一等の事なり、lifeなき学問は無用なり。急いで書物よむべからず」 と。生涯にかけて学問を何より大事にし、学問を中心とした人生を歩んできた西田にとって、学問よりも、もっと肝心なものがlifeであったことがわかる。
西田の思索のなかには、常にlifeというものがあったのに違いない。これが、筆者の西田理解の一つの観点であり、本稿で、この一観点も韓国における西田像に加えることを試してみた。
2.西田の歴史哲学と皇室
(1)西田の歴史哲学と皇室
ここでは、韓国における西田理解のなかで、「西田の歴史哲学と皇室との関係」について許の理解を中心にして考察してみることにする。許は、次のように論じている。
日本が戦争期に突入すると、祖国の日本の運命に深く共感して歴史哲学を展開していった。西田は、歴史的生命の具現を追及しようとする歴史哲学において、天皇と国体、そして戦争を擁護することによって、日本国民のナショナリズムを最も露骨に現した。彼は後期のいろいろな歴史的・政治的論文を通じて、日本の国民はいかなる環境においても創造的応戦を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力説し、1943年、「歴史哲学」をテーマとして昭和天皇に御進講をもした 。
この内容と一脈相通じる文章として、許は彼の論文「記憶間の戦争-ナショナリズムの衝突」のなかで「歴史哲学の時期の西田は、天皇を敬愛し、天皇と国体をすべて哲学的に擁護するようになる」 と述べている。具見書の『日本知識人の思想』においても、「多数の国民は、一の国家に取り入られるという哲学的解析を通して、当時の日本国家と天皇の存在を認めた」 と述べている。つまり、許と具は、西田が歴史・政治的哲学をもって天皇と国体、そして戦争を擁護することになり、西田の歴史哲学は、哲学的ナショナリズムまで提示したと西田を評価しているのである。
さらに、許は、西田の哲学的ナショナリズムは「皇室を絶対化」することにまで至ったとして、こう述べている。「このような方式で歴史と時代は神聖化され、結局、絶対無の自覚および内的生命が享受することができた最頂上に到達することになる。そして時代をはじめ民族・国家・天皇のような歴史的・政治的概念が絶対化される。ここに、西田の歴史・政治哲学が誕生する」 と。そして「彼の国家論は、天皇中心の宗教的国家論と言える」 と、西田の「天皇中心の宗教的国家論」は「祭政一致」にまで至るものであると論じている。 ところで、西田の孫である上田久は、西田の皇室に対する思いがよく窺えるような話を、こう綴る。
「祖父は皇室に対しては明治人らしく、日本民族の総本家というような意味で親愛の情を抱いて居り、政治を離れた文化のパトロンというような存在を考えていたようだが、私どもには、天皇個人は普通の人間で、自由を持たない可哀相な存在であるといい、中学校時代軍国主義的な教育を受けていた私たちを戸惑わせた」 と。
こうした一話からみても、西田は確かに皇室に対して尊敬の念を抱いていたに違いない。それとともに天皇個人は普通の人間であることも考えていたようである。西田晩年の論文には、皇室を中心とした世界創造、皇室のあり方を多く論じているのも確かであるが、しかしそれが「西田の国家論」を
「宗教的国家論」であると断定するには無理があるのではなかろうか。
(2)西田の「一即多」と「国家と国民」
許は、西田の歴史哲学のなかでの論理として「一即多」、「絶対矛盾的自己同一」をとりあげ、「国家(或は、皇室)と国民の関係」にどのように作用しているのかについて、次のように述べている。
論理の要求にしたがって披露した西田の様々な政治的主張とは別に、日本の実際の歴史を見ると、我々は、個物的一としての国民が、全体的一としての国家と、絶対矛盾的自己同一という関係を維持することができたか、それとも国家が一方的に、国民個々人を従属と支配の対象へ転落させてしまったか、という質問を投げかけざるを得ない。天皇と臣民、国家と国民の間に、真に対等な関係が成立したとすると、西田は天皇と国家に対して必ずしも随順への道だけではなく、抵抗と反発、そして批判への道も開けておか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と思われる。
上記のように、許は、西田の論理のなかで問題になるのは「国家と国民」との関係であって、その関係は支配と被支配の関係になり、相互否定と対等の関係にはならないと述べている。そして、結局西田は、哲学の論理的力で、国家が一方的に国民を従属し支配する関係に転落することを支持したと批判する。許は西田が、「西洋哲学書を深く読みながら、彼が西洋の代表論理とみなされた『一の多』という論理を批判して、『一即多』という生命論理を創案した」 と述べながら、「一即多」をもって「一の多」の論理に挑戦したが、結局、西洋の論理の「一の多」の論理へ転落することになったという。「一即多」の論理は帝国主義論理に陥り、暴力的なものへ転落してしまったので、西田の「一即多」の論理は失敗であると論じている。そして、許は、「強力な物理力を備えた天皇と国体の自己限定が弱者の他者性を剥奪することができるという点、その点を西田は無視した」 と述べながら、天皇制の国家体制による暴力は、「二つの方向へ進んでいた。一つは、日本国民であって、もう一つは、東アジアのほかの民族である」 と述べている。つまり、天皇制という国家体制による暴力に、西田の論理が作用してしまったと述べ、西田を批判している。
3.西田の日本文化論と皇室
ここでは、韓国における西田の文化論と皇室との関係についての理解を考察してみることにする。 具見書は『日本民族主義史』において、「西田の日本文化論は、日本文化優越主義の発露にすぎない偏狭な文化論と言えるが、彼の日本文化観は戦前において天皇文化観を創出して、他の一方には、戦後の日本文化論にも社会にも大きく影響を与えた」 と述べている。
つまり、具は、西田が皇室を中心とした日本国家が歴史的世界を成して世界中心になるとみていて、そうした西田の日本文化論は、戦前には天皇文化観を創出し、戦後には社会に多大な影響を与えながら、弟子たちの活躍によって天皇文化へ発展するようになったと見ているのである。
さらに、具は、『日本知識人の思想』においても、西田が、京都学派の先駆者であると述べながら、西田は天皇制と日本文化に対する見解を披瀝し、「自分の哲学的思考によって天皇と日本文化に対する哲学的基盤を提供した」 と論じている。
ところで具は、西田の日本文化論の哲学的基盤になる論理が、西田の「一即多」「絶対矛盾的自己同一」であるとみて、このような西田の哲学的論理が、日本文化優越主義、天皇文化論を哲学的に正当化し、ついに民族差別を促進させる役割をしたと論じている。
筆者が見るにも、西田は確かに文化の発展のため日本が中心にならなければならないと、皇室を中心にした日本が世界文化の発展を担っていくことを望んでいたと思われる。しかし西田の本来の意図に戦争や侵略という破壊的なものがあったかどうかを考えてみると、そうではなく、あくまでも文化と学問の興隆という観点からの日本中心の世界性を西田は主張したとみるほうが、むしろ本来の西田に近いと考えられる。
4.西田と戦争へのイデオロギー提供をめぐって
韓国の西田理解によると、西田が戦争にイデオロギーを提供し、戦争を支持したと批判している。
(1)世界新秩序の原理
許は、西田に対して「彼は西洋帝国主義に対抗するという名分の下、大東亜共栄圏の理念を哲学的に支持することによって、二流帝国主義に陥る」 と述べている。このような見方は、具見書の『日本知識人の思想 』にも、次の①と②のように述べられている。
① 西田は、新しい日本の誕生とともに新しい世界を構成した。それはまず、それぞれの国家発展を通して結合する共栄圏を構築して、究極的には共栄圏に結合する世界を連想した。この観点からみると、西田は世界国家の形成を通した世界平和を構想したと思われる。問題点は、世界国家と日本国家との関係である。当時日本はアジアの統合を、日本を中心として構成して、その延長線上で太平洋戦争をおこした 。
② その声明とは日本がおこした戦争を正当化するため発表された大東亜共同宣言(1943年)を意味する。国家と国民が一つになって、天皇が日本を統治する唯一の存在であり、皇道は世界の支配原理となり、日本文化は世界文化へ成長すべきものとしてみる西田が、日本主義者だったことは否定できない。特に西田が提示した世界史的世界理念は、日本を中心として世界が一つになることを意味する点で、当時、侵略を通してアジアを統合しようとする軍国主義者の大東亜共栄権構想に利用されるための役に立つイデオロギーとなった 。
ここで具は、西田の「世界新秩序の原理」が問題になるのは、世界国家の形成を通した世界平和を構想するものとしても、日本を中心としたところにあると述べている。さらに、「それはやはり、日本天皇と日本民族を改めて回生しようとする愛国心の発露であったとおもわれるので、彼は民族主義者であって、彼の哲学は民族主義哲学であったと評価することができる」 と述べている。
ところで、西田の「世界新秩序の原理」 の内容において一番問題になる箇所一つは、「大東亜戦争は、東亜諸民族がかかる世界的使命の遂行せんとする聖戦である」 としている一節であり、大東亜戦争を「聖戦」であるとして、戦争を支持したということである。
ところが、上田高昭によると 、「世界新秩序の原理」は、西田の書いたものではないとされている。「世界新秩序の原理」は、西田本人が執筆したものと、それをもとにして田辺寿利が要約したものとの、二つが存在して、実際に「大東亜宣言」のもとになったのは、田辺寿利が書いたものであった。こうした「世界新秩序の原理」をめぐる問題に対しては、日本国内でも、西田を批判する立場と擁護する立場との間に、さまざまな論争が起こっていた。
ところで、当時の西田の書簡から西田本人の意図と心情はいかなるものであったのかをみると、「新聞を見て実にいやになった。私の理念は何も理解せられてゐない。何も入ってゐない。私は表現はとにかく根本の理念の確立を重んじたのである」 とも綴り、そして「東条の演説には失望いたしました」 とも語る。日記や書簡などは個人的なものであって、考えや心情が素直に表現されている点を勘案すると、「世界新秩序の原理」に書いた「聖戦」などは、西田本人の本来の意図とはかなり離れている。西田の哲学が軍部によって一部をきりとられ、利用されたとも考えられる。
(2)座談会「世界史的立場と日本」
ところで、西田が戦争と関連づけられて議論になる歴史的出来事は、京都学派が中心になって行った座談会「世界史的立場と日本」である。これに対して、具は、こう述べている。「世界史の哲学が、太平洋戦争という時局的課題に対しての見解を披瀝したものが『世界史的立場と日本(1943年)』である。これは『世界的立場と日本(1941年)』『東亜共栄圏の倫理性と歴史性(1942年)』『総力戦の哲学(1942年)』など3編の座談会の記録で構成された」 と。この三回の座談会には、西田は参加していなかったが、弟子である高坂正顕、西谷啓治、高山岩男とともに、鈴木成高の四人が参加し、内容は、『中央公論』に掲載されている 。具は、次のように論じている。
① このように京都学派は世界史の哲学に共通点を持っている反面、彼らの世界観は日本を中心とする東アジアの秩序の確立とともに、世界的秩序を念頭においていた。彼らは日本のアジア侵略を正当化するために、歪曲された民族観と文化観を提示した。とくに、アジアを侵略した西欧と戦争をするのであると偽装して、アジア民族を解放させるための聖戦であり、英米との戦争に対してヨーロッパを開放させるための聖戦であると示しながら、日本が起こした戦争を総体的に皇戦と規定した。このような視点からみると、京都学派は銃や刀をもって戦争をしていなかったが、頭と思想で熾烈な生存競争と民族戦争を優秀に遂行した戦士だったとみるのは誤判であろうか。それが妥当で
あるとしたら、京都学派の学風は主観的であって歪曲された国粋主義的学風にすぎないといえる 。
② このように京都学派第二世代は思想研究を、学問的発展と未来志向的思索よりは、国家のために国粋主義的思想を創出して権力服従的な姿勢としての役割をにない、また、国家の思想的侍女として活動したと言える。京都学派は世界史哲学派とも言われる。彼らは、鈴木成高を除いてみ
な西田の弟子であり、田辺元の弟子であった 。
上記のように具は、西田の弟子たちによって構成された京都学派の「世界史の哲学」は、座談会「世界史的立場と日本」を通じて、日本のアジア侵略を正当化し、歪曲した民族観と文化観を提示することによって、思想をもって戦争を遂行したと論じている。さらに、京都学派の国粋主義的学風は、学生、知識人などにも広範囲に影響を与えながら、学問的発展だけではなく、権力服従的な姿勢とともに、国家の思想的侍女として活動したと見ているのである。西田は、その座談会とは直接的関係しなかったとしても、西田の弟子たちが主になっている京都学派の戦争擁護への発言であった故に、西田への匕首になって突きつけられたといえるだろう。
Ⅲ.韓国における西田哲学の意義と課題
1.韓国における西田の意義
西田の哲学は、独創的な体系と論理をもっている哲学である故に、世界からも注目されつつあるし、韓国の研究においても、西田の哲学は世界的であると認められている。実に西洋からは、東洋哲学・思想が無視されてきた状況の中、西田という東洋の哲学者が、自分のもつ思想・哲学に論理という西洋的思考形式を付与して思索し続けたこと自体が世界的なことであるし、世界哲学史においても業績を成すことに繋がるだろう。こうした西田が世界への可能性を拓いたことは、同じ東洋の一員としての韓国にとっても、大変喜ばしいことであり、将来、韓国にも世界的哲学者が出てくることにも、期待の思いを抱かせてくれる。このように、西田と西田哲学の意義は、日本だけのものではないのである。韓国における西田研究は意味をもつことになるだろう。
ところで、西田は難解とされる哲学的論文以外も、膨大な量の文章を残している。日記をはじめ、随想、漢詩、そして書簡など、西田の人間そのものが感じられる文章からは論文とは違うものが味わえる。西田の難解な論文が山のごとく研究へのきびしい挑戦の意志を与えてくれるものとすると、西田の日記、書簡などは、海のごとく包容力豊かな姿で親しく迎えてくれるのである。西田の論文が西田の哲学的論理を語ってくれるとすると、西田の日記、書簡などは西田の実際の行動・実践としての生き方が西田の喜怒哀楽とともに、薫り高く伝わってくるのである。
さらに、筆者が西田に惹かれる理由の一つは、その多くの人々との心交える交流と、それにともなう西田を中心とする人脈である。こうしたところは、西田の哲学の素晴らしさだけによるものではないだろう。それは、彼の人好きの性格にもよるのではなかろうか。こうした西田には、情の深い、人好きの韓国人の情緒にとっては受けいれやすい、親しみを感じることになると思われる。
筆者は、こうしたことを思うと、韓国にもいち早く西田の哲学論文、そして日記、書簡などが翻訳され、発刊されることが待ち遠しい。韓国においての読者たちが西田の幅広い著作に接することができたら、きっと西田の魅力に惹かれるに違いないだろう。
2.韓国における西田の今日的課題
今後の、韓国における本格的な西田研究を期待しながら、韓国における西田研究の今日的課題について考えてみることにする。
課題として、まず、「西田著作の翻訳・発刊」が急務であることが挙げられる。西田の全集はもちろんのことであり、日本哲学・日本思想に関する「文献の翻訳・発刊」も必要である。文献を通して日本哲学に接する機会が多くなれば、それにつれて、西田に対する、そして日本の哲学・思想に対する認識の転換とともに、学術的関心も高まってくるのは自然なことであると思われる。
二つ目は、より根本的な問題として、韓日両国のお互いの認識と意識の転換が挙げられる。無関心、偏見的視線と差別、優越感から脱皮して、お互いに対等な立場に立つ認識への転換が望ましい。
三つ目は、学問的方法と認識の問題である。まず、韓日両国は、学問を政治的関係などからはなれて、学問本来の純粋な立場から研究することが肝心であると思われる。そうしたとき、学問的歪曲性や偏狭性の問題も解決できるだろう。
四つ目は、西田の研究方式として、西田の哲学的内容に対する理解のためには、まず、西田の言葉のもつ意味から一つ一つ検討し研究していく着実な作業も必要であろう。西田の言葉は、たしかに難解であり、それをハングルだけの表記にした場合は、意味が正確に伝わらないかもしれない。しかし、韓国では現在はハングルが基調となっていることを考えると、尐なくとも西田の言葉や概念についての正確な把握が必須であると思われる。
以上、韓国においての西田研究、ひいては日本思想・哲学の受容、研究のための課題について、筆者が考えていることを述べてみた。西田に接する人は、西田哲学が難解である故に、壁を感じることもあるかもしれないが、その壁と課題を一つ一つ解決していくうちに、西田のもつ魅力も発見できるだろう。そして、将来、韓国における西田像は、現在とはかなり異なる方向へ展開していくに違いないだろう。韓国においての西田受容の将来は、私たちの努力にもよるのであろうが、韓日両国の真の友情に繋ぐ明るい方向に向かっていると展望される。
結び 本稿においては、韓国での西田受容とその理解の様相を考察することを主な目的にした。本稿に取り組むなか筆者が確認できたのは、まず、韓国においての西田がいかに理解されているかを語る以前の問題として、まず、西田幾多郎と西田哲学は見知らぬ存在であることであった。
ところで、西田についての韓国の研究のなか目立つのは、やはり戦争と西田とを結びつけて理解するという傾向である。西田は戦争に哲学を提供したナショナリストであり、日本文化優越主義者という西田像が浮かび上がる。しかし、今後の韓国での西田受容の傾向性が、戦争と西田とを結びつけての理解に留まるとは思わない。韓国において著名な思想家である金芝河(キム・ジハ:김지하) は、
「帝国主義哲学になるのは、思想的原液を歴史的にいかに活用するかの問題です。日本の場合がそうです。西田哲学のようなものが帝国主義の侵略のイデオロギーへ変質されたのは、哲学者自身の問題ではなく、政治家たちが利用したものでしょう」 と述べている。
韓国での西田研究の先駆けの許祐盛も現在とは異なる方面からの研究への意志を表明しているし、西田の哲学にある宗教性に注目する李賛洙のような見方も出ているのである。つまり、多方面からの研究を進めながら西田の全体像を理解していくに違いないだろう。
韓日両国の間に、真の友好を結んでいくためにも、互いの哲学・思想に関心を持ち、理解していくのが肝心なことであろう。そのためにも、韓国においては西田とその哲学・思想を、そして、日本思想を真に理解していくことが何よりも大事なことである。現実的には、両国の歴史的背景とともに乗り越えなければならない問題があるのも確かである。しかし将来は西田の全体像に、より近づいた研究が期待できると思われる。
【重要韓国語参考文献】:本稿では、韓国語の参考文献のみ挙げることにした。
・ 구견서『일본知識人의사상』、현대미학사、2001.10.(具見書、『日本知識人の思想』、現代美学社)・ 구견서『일본민족주의사』、논현、2004.8.(具見書、『日本民族主義史』、ノンヒョン)
・ 김성민「박종홍과 니시다키타로의 헤겔변증법의 변용에 대한비교연구」、성균관대학교, 2004.(金成珉、「朴鐘鴻と西田幾多郎のヘーゲル弁証法の変容に対する比較研究」、成均館大学校)
・ 김용덕『日本近代史를 보는 눈』、지식산업사、서울大学校東洋史学講義叢書、1991.6.(金容徳、『日本近代
史をみる目』,知識産業社、ソウル大学校東洋史学講義叢書)
・ 김지하「시인김지하의 마지막 담론-21세기에 단국사상이 인류를 구원한다」『신동아』、1992.2.(金芝河、「詩人金芝河の最後の談論-21世紀には壇君思想が人類を救済する」『新東亜』)
・ 니시다기타로・저、서석연・역『善의 연구』、범우사、2001.4.(西田幾多郎・著、徐石演・訳、『善の研究』、ボンウ社)
・ 민경채「한국 모노크롬회화의 양식적특성에 관한 연구:미니멀아트」、홍익대학、2003.(閔キョンチェ「韓国モノクロム絵画の様式的特性に関する研究:ミニマールアート」、弘益大学)
・ 박규태『상대와 절대로서의 일본』、제이앤씨、2005.9.(朴ギュテ『相対と絶対としての日本』、ゼイエンシ)
・ 박영재、박충석、김용덕『19세기 일본의 근대화』、서울대학교출판부、2003.3.(朴ヨンゼ、朴チュンソク、金容徳『19世紀日本の近代化』、ソウル大学校出版部)
・ 서지영「이우환의 작품에 나타난『만남』이론에 관한 연구」、경기대학교、2002.(徐智暎「李禹煥の作品に現われた『出会い』理論に関する研究」、京畿大学校)
・ 송휘칠『당대비평』、생각의 나무、2000.가을호.제12호.(宋 フ ィ チ ル 『当代批評』、考 え の木、2000.秋号.第12号)
・ 오문범「불교의 空에 대한 케노시스 신학의 照明」、한신대학교 신학・1996.(呉ムンボン「仏教の空に対するケノシス神学の照明」、韓神大学校神学)
・ 윤상인・박규태 엮음『일본의 발명과 근대』、이산、2006.7.(尹サンイン・朴ギュテ編『日本の発明と近代』、イサン)
・ 이찬수「神、人間、그리고 , 空:칼 러너와 니시타니케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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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불교평론』、현대불교미디어센터、2001.봄호.제6호.(李賛洙「近代日本の二つの顔-西田哲学論評」『仏教評論』、現代仏教メディアセンター、2001.春号.第六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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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타노신지「이우환의 작품에 나타난 정신성에 관한 연구」、경북대학교、1994.(波多野慎二「李禹煥の作品に現われた精神性に関する研究」、慶北大学校)
・ 한상일『일본지식인과 한국』、도서출판오름、2000.8.(ハン・サンイル『日本知識人と韓国』、図書出版オルム)
・ 허우성「니시다철학의 비판적해명<A Critical Exposition of Nishida’s Philosophy>」、『철학과 현실』、철학문화연구소、1988.(許祐盛「西田哲学の批判的解明<A Critical Exposition of Nishida’s Philosophy>、『哲学と現実』、哲学文化研究所)
変質されたのは哲学者自身の問題ではなく、政治家たちが利用したものでしょう」である。・ 허우성「니시다철학의 베단타철학에 대한 비판」『인도철학 제1권』、인도철학회、1989.1.(許祐盛「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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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우성「니시다철학의 양이적성격」、『일본사상 제1호』、한국일본사상사학회、1993.3.(許祐盛「西田
哲学の攘夷的性格」『日本思想第一号』、韓国日本思想史学会)
・ 허우성「니시다와 서양철학-시간관을 중심으로」、『동양학
26호』、단국대학교부설동양학연구소、1996.10.(許祐盛「西田と西洋哲学-時間観を中心に」、『東洋学
26号』、壇国大学校付設東洋学研究所)
・ 허우성「진리는 현해탄을 건널수 없다-니시다철학을 중심으로」、『철학과 현실
43호』、철학문화연구소、1999.12.(許祐盛「真理は玄海灘を渡れない-西田哲学を中心に」、『哲学と現実
43号』、哲学文化研究所)
・ 허우성『근대일본의 두 얼굴-니시다철학』、문학과지성사、2000.5.(許祐盛『近代日本の二つの顔-西
田哲学』、文学と知性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