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8/08

[인문의 길] 공부 늦깎이들 삶의 무늬 -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2107

[인문의 길] 공부 늦깎이들 삶의 무늬 - 경향신문



공부 늦깎이들 삶의 무늬
입력 : 2021.07.08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저는 인문학 공부 공동체의 잡부입니다. 청소, 복사, 줌 강의나 세미나를 위한 온라인 접속, 회원 관리 등이 주로 하는 일입니다. 회원이 2~3명인 세미나 스터디에서 20명이 넘는 강의까지 매주 공부 모임이 80~90개에 이르는데 일할 사람은 없습니다. 잡부의 일이 적진 않습니다. 강의, 세미나, 스터디를 기획하고 선생님을 모셔오는 일도 제 몫입니다. 인문학으로 삶과 사회를 분석·진단하고 대안을 모색한다며 책도 몇 권 만들었지요.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여기 오는 분들이 하는 공부는 제가 하는 일보다 더 다양합니다. 10여년 전 공동체를 개설하며 철학과 문학을 중심으로 한 인문학과 함께 프랑스어, 독일어, 희랍어 등 외국어로 시작했으나 해가 거듭될수록 공부 종류가 늘었습니다. 문학, 철학 고전을 비롯한 책 읽기 모임은 여럿이고 영어 원서 읽기 모임도 많습니다. 불교 경전을 공부하는 모임도 있고 희랍어·히브리어 성서 읽기 모임도 있습니다. 여러 종류의 글쓰기, 영화감상, 미술사, 연극 비평, 풀과 나무를 공부하는 모임도 생겼습니다.


이 일을 하기 전 저는 신문기자였습니다. ‘수유너머’ ‘철학아카데미’ 같은 인문학 공동체 사람들과 가벼운 인연은 있었으나 이 일을 하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신문사에서 나와 인생 2막을 생각하며 저도 모르게 마음이 이쪽으로 향했겠지요. 우리의 몸과 머리는 늘 가슴이 향하는 곳에 머문다고 하잖아요. 수유너머나 철학아카데미가 그랬듯이 이곳에도 문제는 있었습니다. 인문학이 돈과는 좀 거리가 있었던 탓입니다. 문을 닫을 뻔한 고비도 몇 차례 있었습니다. 개설 이래 지금까지 직면한 여러 어려움을 넘길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여기 오는 분들이 물심양면으로 도운 덕분입니다.


가장 심각했던 위기는 지난해 봄에 만났습니다. 코로나19가 번진 겁니다. 두 달 동안이나 문을 닫고 사람들의 출입을 금했지요. 그래도 꼬박꼬박 내야 하는 건물 월세 등을 마련할 길이 없었습니다. 산사인 듯 인적이 끊긴 곳에 홀로 앉아 조용히 문 닫는 것을 준비했지요.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어느 날 확인해 본 통장에 적잖은 돈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여기서 공부하는 분들이 저 몰래 공동체 살리기를 위한 모금을 시작한 겁니다. 이런 분들을 보면서도 마음대로 문을 닫을 수는 없었습니다.


대학이나 도서관에 앞서 온라인 강의를 시작한 데 이어 방역수칙을 지키며 수시로 오프라인 모임도 재개했지요. 사람들은 출입을 시작하자마자 공동체 살리기를 위한 상설 벼룩시장을 열었습니다. 장신구 등 소품을 만들어 이곳에 내다 파는 분이 있는가 하면 소장했던 책이나 물건을 가져다 파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돈 한 푼 받지 않고 강의를 하는 학자도 있었고 역시 대가 없이 영어책 읽기 모임을 지도하는 분도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들은 입을 모아 말했습니다. 문을 닫으면 안 된다고요.


저는 이들에게 물었습니다. 왜 문을 닫으면 안 되는가, 도대체 공부는 왜 하는가? 이들의 대답은 제각각이었습니다.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던 공부를 뒤늦게 하며 행복하다는 분, 생각의 지평이 넓어지며 삶이 달라졌다는 분, 공부야말로 가장 재미있는 놀이라는 분, 철학 공부만큼 삶에 구체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이 없다는 분…. 이곳에서의 공부를 계기로 책을 쓴 분도 있고 작가나 화가가 된 분도 있습니다. 박사가 된 분도 있고 유학을 떠난 분도 있습니다.




어느 40대 여성은 “이곳에서 공부하고 집에 갈 때마다 행복감에 가슴이 벅차 오른다”고 하더군요. 그는 얼마 전, 결혼한 지 15년 만에 거실 창가에 자신만의 책상을 마련했다고 합니다. 이름하여 엄마의 책상. 때마침 시작하는 이 칼럼에 이들의 이야기를 쓰기로 했습니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 인문의 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뒤늦게 인문학과 문화예술을 공부하며 길을 묻는 사람들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인문의 길늦깎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