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순 is at Texas, USA. 23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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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원순 다큐 “첫 변론”: 나는 왜, 어떻게 인터뷰를 했는가>
1. 2023년 5월 17일 서울에서, 나는 박원순 전 시장 다큐멘터리 필름 <첫 변론 (The First Defense)>에 나올 인터뷰를 했다. 오래 전 박원순 전 시장의 죽음과 애도에 관한 페북 포스팅을 한 후, 소위 ‘페미니스트들’로부터 ‘페절(unfriend)’을 당했고, 나의 포스팅은 ‘가해자 편을 드는 사람’이라며 조리돌림당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던 적이 있다. 내가 한 지인에게 다큐멘터리 필름에 들어갈 인터뷰를 하기로 했다고 말하자, 그는 “이제 흙탕물 속으로 들어가겠군요, 또 사서 고생하시네요”라고 했다.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사서 고생’하는가.
2. 내가 <첫 변론>에 들어가는 인터뷰에 응하게 된 것은 단순하지는 않았다. 지난 2023년 봄학기의 마지막 달인 4월 10일 다큐멘터리 제작진으로부터 나와 인터뷰하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다. 인터뷰 제안을 받고서 여러 가지 생각한 후에 거절하는 회신을 보냈다. 대략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첫째, 무엇보다도 인터뷰에 응하기 위해서는 여러 자료를 리서치하고 읽고 정리해야 하는데, 학기 말에 그런 시간을 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둘째, 이 다큐 제작을 후원하고 있는 <박원순을 믿는 사람들>이라는 단체의 이름이 내가 함께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게 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만약 인터뷰에 응한다면 ‘박원순’이라는 사람을 ‘믿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질문을 ‘2차 가해’라고 차단하면서 그에게 쏟아지는 일방적 비난과 정죄가 부당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첫 요청을 거절했었다.
3. 그런데 봄학기를 끝내고 5월 5일 한국에 왔는데, 5월 9일 다시 인터뷰 제안이 왔다. 나는 이미 한번 거절했던 사람에게 다시 인터뷰 부탁을 하는 것이 지닌 그 함의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박원순 전 시장과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에 대하여 계속 주시해 왔고 관련 자료들을 읽어오면서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이나 여성운동에 대한 왜곡된 이해가 확산되고 있음을 우려해왔다. 그래서 페미니즘에 대한 한국사회에서의 오해와 왜곡을 귀퉁이에서라도 바로잡기 위해서 연속강좌를 열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2021년 3월 13일~5월 8일에 <이론 그룹>의 1학기를 "페미니즘: 이론과 실천"이라는 주제로 열게 된 배경이다. 페미니즘을 복합적으로 조명하는 그 첫 학기에 118명이 등록해서 5주간 함께 공부했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8월 26일 곧 8학기를 맞이하게 되는 <사유하는 시민 아카데미: 이론 그룹>의 탄생은 박원순 전 시장 사건이 불씨를 댕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4. 이러한 것들을 회상하면서 나는 인터뷰 요청을 재고하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내가 인터뷰에 응한다면 어떤 질문을 하고자 하는지 우선 인터뷰 질문을 보고 싶다고 했다. 이렇게 ‘까다로운 요청’을 하는 나에게 Daehyun Kim 김대현 감독님께서 7개의 인터뷰 질문을 보내셨다. 질문을 보면서, 내 마음이 움직였다. 나의 페미니즘을 이해하기 위해서 나의 책들을 섭렵하셨다는 것, 그리고 일방적 ‘편들기’의 입장에서 다큐를 제작하는 것이 아니라 진상규명의 의미로 다큐를 진행하는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결국 5월 11일에 인터뷰에 응하겠다는 회신을 보냈다. 그리고 다큐 제작 시간이 촉박하였기에 바로 스케줄을 잡았다. 5월 17일 오전 11시였다. 한 시간 조금 넘는 다큐에 들어간 내용보다 들어가지 않은 내용이 훨씬 많다. 7가지 질문 이외에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의미로운 시간을 가졌다.
5. 내가 미국에 있어서 한국에서 하는 시사회에 가지 못하기에 제작진에서 다큐를 볼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다. 다큐를 보니 상영시간 1시간 조금 넘는 <첫 변론>에 나의 인터뷰가 10여차례 나온다. 제한된 필름에서 실제 인터뷰에서 오고 간 내용들이 많이 누락되었지만, 중요한 주제들이 담겨 있다. 이 다큐가 예정대로 8월에 개봉된 후에, 나는 내가 인터뷰에서 다룬 주제를 가지고 연속강좌를 열 것에 대한 생각을 고려하고 있다. 왜냐하면 내가 인터뷰에서 전하고자 했던 주제의 내용은 ‘박원순’이라는 특정 인물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보다 큰 맥락에서 중요한 함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6. 짧은 길이의 장면들이지만 열 차례에 걸쳐 나온 나의 인터뷰에 등장한 주제들은 크게 다음과 같다. 1)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박원순을 믿는 사람들>이라는 단체 이름이 지닐 수 있는 한계를 조명하면서): 2) 존중받아야 하는 삶이란 ‘누구의 삶’인가 (미투 운동을 포함해서 여타의 문제들에서도 “무죄추정의 원칙”의 중요성 ): 3) ‘미투 운동’의 명암. <고소에 의한 죄: #미투 시대의 무죄 입증의 어려움>의 예 (Guilt by Accusation: The Challenge of Proving Innocence in the Age of #MeToo>): 4) 페미니즘과 여성운동의 변화 5) 대변의 정치학 (politics of representation)의 의미, 동질성의 연대의 위험성: 6) 특정한 ‘의견’에 대하여 동조하지 않는 것에 대한 부정적 표지 붙이기의 문제점: 7) 인간은 왜 자살하는가. ‘자살-일반’이란 존재하는가: 8)‘2차 가해’란 무엇인가. ‘1차 가해’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을 때 ‘2차 가해’가 가능한가. ‘2차 가해의 남용’의 위험성: 9)-10) 자살은 ‘가해 인정’인가
7. 나는 “페미니즘”을 다룬 책을 영어와 한국어로 총 7권 썼다. 1993년의 첫 책 출판 이후에 나온 책들의 개정판까지 포함하면 10권이다. 한국어로 쓴 페미니즘 관련 책 중 2권이 “세종도서”에 선정되기도 했다 (<안녕, 내 이름은 페미니즘이야 (동녘, 2019)> & < 페미니즘 앞에선 그대에게 (한길사, 2020)>). 1993년 이후 페미니즘에 대하여 한국과 미국에서 강의하고, 연구하고, 세계 19개가 넘는 나라에서 강연해 왔다. 그러나, 21세기 페미니즘에 대하여 나는 아는 것 보다 모르는 영역이 훨씬 많다. 새로운 문제와 주제들이 끊임없이 등장하고, 그것에 대한 연구들이 치열하게 이루어지면서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논문과 책들이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은 사적 영역과 공적영역은 물론,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 걸쳐서 관련된 문제를 다루는 이론이며 운동이다. 한국 사회는 물론 세계적인 문제들과 연결해서 페미니즘과 여성운동을 전개하고자 하는 이들이 지속해서 포괄적인 학습을 이어가야 하는 이유다.
8. “나는 내가 하는 일을 왜 하는가 (Why am I doing what I am doing?).” 내가 강의에서 비판적 사유가 어떻게 시작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 강조하는 것이다. 이 질문을 나에게 돌린다면, 나 강남순은 박원순 다큐 <첫 변론>에서 왜 인터뷰를 했는가. 많은 분들이 그러하겠지만, 나 역시 누군가가 ‘부탁’했다고 해서 내가 행동하거나, 이해되지 않는 것에 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쓰는 일은 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왔다. 그렇기에 나 스스로 이 일을 왜 하는가가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9. 오세훈 시장의 서울시가 “김잔디”씨와 함께 이 다큐의 상영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제출했다고 한다. 또한 여성단체들도 개봉 취소를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다른 단체들도 상영반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런 뉴스를 보도하는 미디어의 헤드라인을 보면 얼마나 왜곡된 해석을 ‘진실’처럼 재현하고 있는지를 보게 된다.
10. <첫 변론>의 상영은 “또 다른 2차 가해,” “변론 아니라 변명,” “변론은 끝났다, 가해를 멈춰라,” “첫 변론 개봉, 득보다 실이 크다” 등의 헤드라인을 보면, 오히려 이 다큐 상영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득’과 ‘실’은 누가, 어떤 기준에 의해서, 또한 어떤 방식으로 측정되는가. 아주 기본적인 질문을 해보면 이러한 기사 제목이 지닌 문제점을 볼 수 있다. 눈에 보이는 ‘이득’이 있어서가 아니라, ‘옳다’고 생각하기에 나는 인터뷰에 임했다. 이 다큐 제작에 힘쓰고 지지하는 분들 역시 이득과 실리를 따라서가 아니라, ‘옳다’고 생각하기에 이 험난한 여정에 함께 하실 것이다.
11. 민주사회에서 보다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를 위한 변혁운동은 “올바른 질문하기”를 통해서 전개되고, 확산되고, 성숙한다. 소위 ‘선진국’이라는 사회의 교육이 개별인들의 질문을 그 중심에 놓는 “소크라테스적 방식 (Socratic Method)”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다. 한국이 “정신적 후진국”이라고 내가 생각하는 이유는, 바로 여타의 ‘비판적 질문’을 봉쇄하여 ‘토론’을 차단하고, 질문자를 불온한 사람,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정죄하고 표지 (label)을 붙이는 “질문빈곤사회”의 모습을 여전히 벗어나고 있지 못한 이유다. 사건에 대하여 질문하는 것 자체를 ‘2차가해’라고 봉쇄하는 한, 페미니즘이나 여성운동을 포함 여타의 사회개혁운동의 미래는 암담하다. 그 운동은 또 다른 종류의 권력과 이권 에의 욕구의 자리로만 위치하기 때문이다.
12. 페미니즘과 여성운동 역시 모두가 당연하고 자연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에, “왜 그런 것인가(Why it is what it is?)”라는 근원적인 질문으로부터 그 불씨가 지펴졌다. 19세기에 소수의 여성은 다수가 묻지 않는 질문들, ‘왜 여성들에게는 참정권을 주지 않는가,’ 또는 ‘왜 여성들은 대학 입학이 금지되어 있는가’ 등과 같은 질문을 제기하기 시작한 것으로부터,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참정권과 교육권이 여성들에게도 주어졌다.
13. 페미니즘과 여성운동을 포함해서 모든 종류의 사회변혁운동은 누군가의 ‘선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치열한 질문하기와 대화하기를 통해서 서로의 관점을 비판적으로 점검하면서 도전받을 개방성을 지니고, 서로를 “설득”하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선동’과 ‘정죄적 비난’이 아니라, 합리적 설득과 설명을 통해서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질문과 관점을 주고 받는 과정을 거치면서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인식적 오류”와 인식의 사각지대를 수정되기도 하고 인식의 지평이 확장되기도 한다. 여성운동은 물론이고 사회변혁운동의 성숙성은 질문을 통한 토론, 서로에 대한 존중을 지켜내면서 인내심있는 대화를 통한 인식확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14. 나는 누군가를 무작정 지지하는 소위 “00빠”라는 한국 특유의 표지를 별로 바람직하게 생각하지도, 내가 누군가의 “빠”를 자처한 일도 없다. ‘인간은 누구인가’에 대한 종교적 철학적 이해를 다양한 측면에서 읽고 연구하면서 나는 그 어떤 인간도 흑백논리식의 단순한 “좋은 사람-나쁜 사람”으로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간의 복합성(complexity of human nature)’을 늘 인지하면서 한 사건에 대한 입장을 형성해야 하는 이유다.
15. 나의 대학에서 학생들이 붙여준 나의 별명이 몇 개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복합화하라!(Complexify!)”다. 학생들이 어떤 사안에 대하여 확신에 찬 결론에 이르렀을 때, 소크라테스적 질문하기를 통해서 나는 그가 미처 보지 못했던 측면들을 스스로 인지할 때까지 계속 질문을 한다. ‘취조의 질문하기’이 아니라, ‘인식확장의 예식으로서의 질문하기’다. 이러한 비판적이고 복합적인 ‘질문하기’는 나의 교수법에 매우 중요한 도구다. 그래서 나 역시 더욱 어느 특정 사건에 대한 입장을 가질 때에, 복합적인 질문과 조명을 통해서 ‘잠정적 결론’을 내릴 수 있을 뿐이다.
16. 소위 박원순 사건이 터지면서 나는 지속적으로 다양한 자료들과 성명서들을 읽어왔다. 박원순 시장에 관한 글만이 아니라, 피해 호소인에 대하여 한 신문에 칼럼을 쓰기도 했다. 오랜 시간 이문제와 관련하여 자료들을 읽고 조명해 왔었다. 그런데 그러한 무수한 주장들과 자료들을 살펴본 후에도, 박원순 전 시장이 신문 기사의 표제어들처럼 위압에 의한 “성폭력”이나 또는 국가 인권위의 ‘직권조사 결론’처럼 권력을 이용한 “성희롱”을 했다는 것에 나는 ‘설득’되기 어려웠다. (박원순 고소인의 주장, 국가 인권위의 판단과 그 증거”에 대한 상세한 팩트 체크는 다음의 링크를 참고: http://www.trustwonsoon.com/bbs/bbsView/40/6233127)
17. 내가 다양한 사실들과 정황을 담을 자료들을 점검하면서 그 가해 주장에 설득되지 않았기에 인터뷰에 응하게 되었다. 즉, 내가 인터뷰에 응하게 된 것은 내가 ‘박원순을 믿는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다. 이 사건이 ‘미투 운동’의 부정적 측면의 전형적인 예라고 보고, 그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권’ 즉 인간의 존엄성에 근거한 인간의 권리란 ‘누구에게나’ 적용되어야 한다. 설사 살인 현장에서 체포된 ‘자명한 범죄자’에게도, 다양한 검증 과정을 거쳐서 최종적으로 그 유죄가 확정될때까지는 인내심을 가지고 ‘무죄추정의 원칙’을 우선적으로 적용해야 하는 이유다.
18. 박원순 시장이 스스로 죽음으로 자신의 삶을 매듭지었다는 것이 그의 “유죄”를 인정하는 것인가. 많은 이들이 이렇게 쉽사리 결론 내리는 것은, 인간에 대한 지극히 단순한 이해에 근거한다. 그렇다면 무수한 생명을 살상하고, 무수한 이들의 삶을 파괴하고 인권 유린한 사람, 모두가 다 아는 고도의 위조, 사기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의 삶을 파괴한 이들이 자살하지 않고 버젓이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은 그들이 ‘무죄’라는 증거인가. “복합화하기 (complexify!)”가 요청되는 이유다.
19. 8월 6일로 예정된 서울 시사회 신청자가 많아서 상영관을 2개에서 3개로 늘렸음에도 바로 매진되어서, 시사회 신청 구글폼을 닫아야 했다고 한다. 한국 시각으로 8월 4일 12시<박원순 다큐를 지지하는 시민 모임>에는 “첫 변론” 상영을 지지하는 사람들, 4,463명이 서명을 했다고 한다 (https://docs.google.com/.../1FAIpQLSfikmF7HyH.../viewform...).
20. 나는 다양한 입장을 지닌 많은 분이 이 다큐를 보기를 바란다. 박원순을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복합적인 판단을 주체적으로 하기 위해서다. 한 사건에 대한 누군가의 ‘선동’과 ‘일방적 주장’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 각자가 비판적 사유하기와 비판적 질문하기, 그리고 비판적 판단하기를 통해서 스스로 이 사건이 지닌 미시적 의미, 한국 사회에서의 거시적 의미, 그리고 더 나아가서 ‘모두’의 인권을 지켜내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회를 만들어 가기 위한 우리의 과제를 상기하는 기회가 되기를 나는 바라고 있다.
21. 나는 2020년 7월 23일 “박원순 이후, 5가지 책임적 과제”라는 제목의 칼럼을 쓴 적이 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3825844). 지금도 나는 이 ‘책임적 과제’가 진행되어야 한다고 여전히 생각한다. 논쟁적 이슈가 되고 있는 사건일 수록, 각기 다른 입장의 사람들이 더욱 치열하게 질문하고, 논의하고, 또한 각자의 상이한 입장을 경청하는 과정에서 '진정한 미투'를 ‘가짜 미투’로부터 보호하게 될 것이다.
22. 2023년 <고소에 의한 죄: #미투 시대의 무죄 입증의 어려움>이라는 책을 쓴 하버드 법대 교수였던 저자의 경험이 드러내듯이, 인간은 갖가지 거짓과 왜곡으로 다른 사람을 곤경에 빠뜨리기도 한다. 또한 반대로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기투하기도 한다. 누군가에 대한 ‘악마화’ 또는 ‘이상화’가 아니라, 인간의 복합성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각자가 지닌 인식의 사각지대를 넘어서고자 하는 지난한 노력만이, 페미니즘과 여성운동의 미래는 물론 보다 한국 사회를 만들어 가는 초석을 놓게 될 것이다. 우리 모두의 중요한 과제다.
23. 왜 나는 이렇게 긴 단상을 나누는가. 우선 나의 삶의 자취를, 내가 개입하고 있는 일의 의미 부여를, 그리고 나의 동료 인간들과 나의 생각을 나누면서 ‘함께-따로따로’ 모든 이들이 인간으로 존중받는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 가기 위한 발걸음을 떼는 의미를 지닌다.
24. 마지막으로, 아렌트가 내게 상기시키는 것을 여러분과 나눈다:
“ 어떤 특정한 사안에 대한 ‘의견 조작들 (manipulations of opinion)’은, 특히 이 의견 조작이 특정 집단이나 개인의 이득에 의해서 규정된 것일 때, 지극히 제한된 목표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만약 그 조작들이 중요한 문제들을 다루는 것일 때, 그 의견조작의 영향력은 더 이상 그 의견조작들의 통제하에 두지 못하며, 의도하지 않았거나 또는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쉽게 초래할 수 있다.”
<첫 변론>이 한국 사회에 벌어지는 사건에 대하여 특정한 집단의 “의견 조작”을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 각자의 비판적 검증을 통해서 조명되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상기시키는 통로가 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