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얼마나 불관용한가
◎ (허우성) 경희대학 철학과 명예교수·비폭력연구소장의 기고
티베트의 현대사는 비극적이다. 1950년 중국에 의한 티베트 침략 이후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점령과 탄압은 대일본 제국에 의한 조선통치보다 잔인해 보인다. 티베트 불교의 지도자 달라이 라마 14세(1935~)는 침략 후에 중국 정부가 실시한 정책의 결과로 100만명 이상의 티베트인이 죽었다고 말했다. 그는 1957년 중국인민해방군이 티베트의 자유의 투사에 더한 잔학행위에 대해 자서전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십자가형, 생체 해부, 희생자의 모습을 끌어내거나 손가락을 자르는 등은 보통이었다. ". 출가한 승려에 대한 추악한 성적 고문도 기록하고 있다.
민족주의자라면 대부분은 이런 비인간적 행위에 대해 분노와 적대심을 불태우고 중국 공산당 지도부를 '가타키'라고 규정하기 쉽다. 그리고 중국의 압정에 저항해 체포되어 처형된 저항군을 '의사'로 추모하고, 압정에 항의해 불신 자살한 100명 이상의 승려와 청년들의 영혼을 크게 찬양할 것이다.
하지만 달라이 라마는 전혀 다르다. 자서전에는 슬픔이 있어도 분노는 보이지 않는다. ‘간디에 대한 찬사’라는 제목의 노벨 평화상 수락 연설(1989년)에서도 그는 중국의 압정은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은 기도로 연설을 마무리하고 있다. "나는 억압자와 친구를 포함한 우리 모두를 위해 인간적인 이해와 사랑을 통해 좀 더 좋은 세계를 건설하는 데 우리가 함께 성공할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달라이 라마는 적대감이나 분노 없이 티베트의 참상을 세계에, 그리고 중국의 선한 인민에게 알리기 위해 자서전을 썼다고 말했다. 그에게 있어서 기록은 미래를 위한 것이고, 과거사에 대한 분노나 청산, 복수(후쿠슈) 마음 때문이 아니다.
그는 놀랍게도 때로는 중국의 관료를 명상(메이소)의 대상으로 삼아 “그들의 분노, 의심, 부정적인 감정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내 사랑, 나의 자비, 나의 용서를 주었다”고 말했다. 그에게 용서는 가해자가 반성한 후에 주는 것이 아니라 우선 주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과 자비의 기술법은 불교에서 유래한다. 그는 민족의 생존보다 티베트의 영적 전통, 즉 불교 문화를 중시하고 있다. 중시하는 이유는 특히 그 문화를 말살하려는 중국인 때문이라고 한다. 달라이 라마는 이렇게 불교를 다시 세상에 알렸다.
현대한국인은 지금 일본을 가리켜 '우리'에 포함할 수 있을까. 달라이 라마에게 물어보면, 파면 대소하면서 “일본과의 대립은 주로 과거사에 관한 것이고, 침략도 억압도 없는 지금, 함께 미래를 그려보는 것만 큼 쉬운 것이 어디일까 라고 되돌아올 것 같다. 민족주의라는 문화의 유전자가 견고한 이유는 생존 욕구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평소, 이웃과 평화를 유지하는 것도 생존에 유리하다. 한국 정부가 비자를 주지 않는 탓에 올 수 없는 달라이 라마를 생각하고 한국인의 마음이 조금 넓어진다면, 그것은 석가 생일을 축하하는 좋은 방법이 아닐까.
김어준 생각 한국 보수가 어떻게 일본의 이익에 충성하고 복무하고 있는가... 조선일보를 보라
핫이슈 2019. 7. 11
김어준 생각 한국 보수가 어떻게 일본의 이익에 충성하고 복무하고 있는가... 조선일보를 보라
'한국인은 얼마나 불관용한가'
야후재팬에 걸렸던 조선일본 얼본어판 기사의 일본어 제목입니다.
원제는 '우리는 얼마나 옹졸한가'인데 내용은 그렇습니다.
중국의 침략과 탄압을 겪는 티벳의 불교 지도자 달라이 라마는 압제자 중국 관리들까지도 같은 인간으로 우리로 포용하고 그들의 부정적 마음까지도 다 받아들이고 대신 사랑과 자비, 용서를 베푼다.
그렇게 용서는 가해자가 반성하고 주는 게 아니라 먼저 주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의 한국인들은 일본을 우리에 포함할 수 있겠는가.
달라이 라마라면 일본과의 갈등은 과거사에 불과하고, 침략이 없는 지금 같이 미래를 그려보는 것 만큼 쉬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할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옹졸한가.
그런 내용입니다.
아니 반성하지 않는 일본 군국주의 극우들을 위해 우리가 종교적 각성까지 해야 합니까?
그렇게 해탈의 경지까지 도달하지 않으면 우리가 옹졸한 거예요?
그냥 인류의 보편 상식선에서 일본 극우의 과거를 반성하라고 요구하면 왜 안되는 겁니까?
양보를 해서 '우리 스스로의 성찰을 위한 제안이다' 이렇게 이해하려 해도 기사 제목이 어떻게
'우리는 옹졸한가'가 될 수 있습니까?
이런 기사가 야후재팬에 걸려 일본인들이 가장 많이 읽는 한국 기사가 되고, 그렇게 일본 극우의 주장이 정당성을 얻는 사이에 피해자인 우리가 졸지에 못난 사람들이 되는 겁니다.
한국의 보수가 어떻게 일본 우익의 이익에 충성하고 복무하고 있는가,
궁금하면 조선일보를 보라.
김어준 생각이었습니다.
▲ 허우성 경희대 철학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