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0호 철학과의 만남 : 인간 본성에 대한 논의: 성선설과 성악설
인간 본성에 대한 논의: 성선설과 성악설
대순진리회 교무부 김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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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사상에서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인성(人性)의 본질은 양심(良心)이고, 양심은 천성(天性) 그대로의 본심(本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래서 “인성의 본질인 정직과 진실로써 일체의 죄악을 근절하라”01고 하였다. 이를 보면 대순사상의 입장은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나아가 도전님께서는 “완전한 도인이 되면 원래의 천성과 본성으로 돌아가 인간의 양심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욕심도 사심도 없으며 유리알 같이 깨끗하고 맑은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도통을 받을 수 있는 그릇이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수도를 한다는 것은 도통을 받을 수 있는 그릇을 만드는 것입니다.”02라고 하시며 본성을 회복하는 길이 곧 수도의 목적을 달성하는 길임을 말씀해 주셨다.
여기서 인성, 양심, 천성과 같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개념들이 어떤 맥락에서 쓰인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 기존의 본성에 대한 논의들을 성선설(性善說)과 성악설(性惡說)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인간의 본성이 선한 것인가 아니면 악한 것인가에 대한 물음은 철학적 사유가 시작된 이래 오래도록 회자 되어온 질문 중 하나이다. 인간의 본성을 규정하는 문제가 철학사에서 왜 중요하게 다루어졌을까? 그것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고, 인간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단서가 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성선설
인간 본성에 관한 본격적인 논의의 연원은 전국(戰國)시대를 살았던 맹자(孟子, 기원전 372?~기원전 289?)로 거슬러 올라간다. 맹자 하면 떠오르는 것이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는 성선설이다. 맹자는 성선설을 주장하기 위해 왜 인간의 본성이 선한지에 대한 나름의 근거를 제시한다. 그가 성선의 이유로 들었던 우물에 빠지는 아기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다.
지금 사람들이 갑자기 어린아이가 막 우물에 빠지는 것을 보고는 모두 깜짝 놀라서 측은(惻隱)해하는 마음을 가지니, 이것은 어린아이의 부모와 교분을 맺으려고 해서도 아니며, 동네 사람들이나 친구들에게 명예를 구해서도 아니며, (잔인하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 싫어서 그러한 것도 아니다. 이런 점을 살펴본다면 측은해 하는 마음[惻隱之心]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羞惡之心]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사양하는 마음[辭讓之心]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是非之心]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측은해 하는 마음은 인(仁)의 단서요,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은 의(義)의 단서요, 사양하는 마음은 예(禮)의 단서요,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은 지(智)의 단서이다. 사람이 이 사단(四端)을 가진 것은 마치 사지를 가지고 있음과 같다.03
맹자는 인간이 느끼는 4가지 감정, 즉 측은히 여기는 마음, 부끄러워하는 마음, 사양하는 마음,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마음이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단서가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인간 본성의 구체적인 내용을 인의예지(仁義禮智)의 4덕(四德)으로 보았다. 그러면서 예를 든 것이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를 보는 순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생기는 측은한 마음이었다. 맹자는 이러한 선한 본성이 인간에게 누구나 내재해 있어서 선천적으로 선한 것을 판단할 수 있고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태어났다고 생각했다. 그는 선을 판단할 수 있는 선천적 능력을 양지(良知)로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양능(良能)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맹자는 인간이 성선의 본성을 확충하여 종국에는 누구나 요순(堯舜)과 같은 성인이 될 수 있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러한 성선에 대한 생각이 맹자에 의해서 처음으로 창작된 것은 아니지만, 인간의 본성을 체계적으로 규명하고자 했던 최초의 사상가이기 때문에 그의 성선론은 후대에도 끊임없이 거론된다.
성악설
하지만 모든 사상가들이 성선의 입장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성선설과 대척점에선 인성론은 맹자보다 70여 년 뒤에 태어났던 순자(荀子, 기원전 298?~기원전 238?)에 의해서 정립되었다. 맹자와 순자는 구현하려는 정치적 목적에서부터 차이를 보인다. 맹자의 이상이 성선을 토대로 한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실현에 있었다면 순자는 규율과 형식을 통한 예치(禮治)의 방도를 찾으려 했던 인물이다.04 이러한 차이는 인간의 본성을 바라보는 시야에도 양보할 수 없는 견해차를 낳았다.
하지만 순자의 성악설도 악만을 쫓아가는 본성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본성을 쫓아가는 결과로서 악이 초래된다고 본 것이었다. 그가 말한 인간의 본성은 배고프면 먹고 싶고, 추우면 따뜻한 곳에 가고 싶고, 힘들면 쉬고 싶고, 이익을 좋아하고 손해는 싫어하는 본능과 같은 것이었다.05 그래서 본성대로만 쫓아가면 인간사에 반드시 분쟁이 발생하게 될 것이니 예법에 맞는 교육이 있어야 사람이 도리에 알맞게 다스려진다는 것이 순자의 주장이었다. 이것은 인간을 법으로써 다스려야 한다는 법치주의의 명분으로 활용되어 후대에 이사(李斯, ?~기원전 208)나 한비자(韓非子, 기원전 280?~ 기원전 233?) 등의 법가 사상가에 계승되었다.
순자가 말한 인간의 이기심은 분명히 인간의 모습에서 부정할 수 없는 적나라한 현실이었다. 그렇지만 일면 타당해 보이는 순자의 견해로 맹자의 주장이 온당하게 비판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맹자가 바라본 본성 개념은 순자의 그것과는 다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순자가 이해한 인간의 본성은 생물적 본능과 가까운 것이었던 반면 맹자가 설명한 인간의 본성은 인간만이 지닌 고유한 속성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맹자는 인간의 본성을 동물이나 여타 생물과 차별이 되는 인의(仁義)라는 사회 윤리적 속성으로 생각했다. 이러한 본성 개념에 대한 이해의 차이는 맹자의 성선설이 비판받는 가장 큰 원인이었다. 맹자와 동시대 인물이었던 고자(告子, ?~?)가 인간의 본성을 식욕이나 성욕처럼 타고난 생리적 본능으로 이해하며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고 주장했던 것도 본성 개념에 대한 이해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정리해보면 맹자의 성선설의 입장에는 인간의 생물적 본능에 관한 내용이 빠져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이 동물과는 다르게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고유한 속성은 무엇이냐는 본질적인 질문이 숨어있는 것임을 확인해볼 수 있다. 이러한 성선설이 지닌 의미는 후대에 이어지고 재해석 되면서 인간만의 고유한 삶의 방향을 제시하려는 본래의 목적을 환기하게 되었다.
후대에 이어진 성선설
맹자의 성선설은 중국 철학사에서 오랜 기간 침묵해 오다가 오히려 불교사상 속에서 인성론의 토대로 받아들여지는 사건을 겪었다. 중국은 동한(東漢) 시기 말엽부터 인도 불교의 거대한 지류에 서서히 젖어들기 시작했다. 정치적 혼란기인 남북조(南北朝) 시대에 이르러서는 유교에 대응하는 불교의 영향력을 더욱 키워갔는데, 불교도들은 이를 위해 중국 전통문화를 불교사상과 결합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맹자의 성선설을 불교적으로 해석하고자 했던 인물이 남북조 시대의 불교 사상가 도생(道生, ?~434)이었다.
도생은 현장(玄奘, 602?~664) 이전의 최대의 불교 번역가로 알려진 구마라습(鳩摩羅什, 344?~413?)의 문하에서 4철(四哲)중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핵심 사상은 인도 불교의 열반불성(涅槃佛性)사상과 성선설을 결합한 열반불성론이다. 다시 말해 이것은 인간의 본성이 모두 선하다는 맹자의 이론 위에 사람마다 모두 열반에 필요한 불성을 지니고 있다는 불교적 관점을 융합한 것이었다.06 인간의 본성이 모두 선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요순처럼 될 수 있다는 맹자의 주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여 중생들이 성불할 수 있는 합리적 근거가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에 따라 그는 “모든 중생은 불성이 있기에 또한 모두 열반에 들 수 있다.”07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사실을 통해 누구나 이상적 인간상에 도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려는 성선설의 본래 목적을 불교적 관점에서 재해석한 것이었다.
이후 본격적으로 맹자의 성선설이 후대 사상가에게 계승되어 빛을 발하게 된 것은 송명대(宋明代)에 들어서다. 주희(朱熹, 1130~1200)와 왕양명(王陽明, 1472~1529)은 성선설의 논의를 각각 자신만의 방법으로 더욱 세밀하게 가다듬었다. 주희는 인간의 생물적 본능을 순수한 본성에 포함 시키지 않았다. 그는 인간의 본성은 곧 천리(天理)와 같다는 ‘성즉리(性卽理)’를 주장하였고, 인간이 선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서는 혼탁한 기질에 오염되어 본래의 성이 발현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08 따라서 주희는 성을 천리와 같은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에 의해서 오염된 기질지성(氣質之性)의 둘로 구분하고 인간이 선하지 못한 이유를 기질지성으로 설명하였다. 그리고 본연지성이야 말로 하늘로부터 부여된 순진무구한 가치임을 내세웠다.
이와는 다르게 왕양명은 맹자가 말한 양지와 양능의 개념에 주목하며 인간의 마음에는 하늘로부터 부여된 천부적인 선한 마음이 있다고 하였다. 그에 따라 인간에게 내재한 천리를 도덕적 판단 능력인 양지로 보았고 이것의 작용을 양심이라고 보았다.09 양명과 주희의 주장은 선한 가치를 마음으로부터 찾을 것인가 아니면 본성으로부터 찾을 것인가에 대한 차이를 갖지만 순선한 인간의 가치가 하늘의 천리로부터 부여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인간의 선한 마음이나 본성에 천리와 같은 형이상학적 근거를 찾게 됨으로써 인간은 누구나 선한 삶의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처럼 도생과 주희, 왕양명으로 이어진 성선설의 논의는 인간이 도달해야 할 가능성을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찾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나가며
지금까지 살펴본 인간의 본성에 관한 논의를 보면 앞서 대순사상에서 언급된 인성과 양심, 천성과 같은 개념을 이해하는데도 많은 도움이 된다. 성선의 관점에서 인성은 동물적인 본능이 아니라 인간만이 지닌 고유한 속성과 같은 것이므로 인의예지와 같은 인륜 도덕으로 설명된다. 그리고 천성의 개념은 인륜 도덕의 선한 가치가 하늘로부터 부여된 것임을 말해준다. 일반적으로 천성이라고 할 때 선천적으로 지니고 태어난 본성이라는 의미가 있지만, 그 이면에는 선한 본성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양심은 바로 이러한 하늘로부터 품부받은 선한 본성이 마음의 작용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에 따라 정직하고 진실한 마음인 양심을 인간의 본성이라고 규정함으로써 우리가 지켜나가고 회복해야 할 것이 본성이라는 것을 밝혀주신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깨끗하고 맑은 인간 본래의 성품을 회복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완전한 도인으로 거듭나는 길이며, 수도의 목적을 이루는 길이기 때문이다. 하늘로부터 이어진 선한 본성이 내 안에 숨 쉬고 있다는 믿음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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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대순진리회요람』, p.19.
02 《대순회보》 12호, 「도전님 훈시」 (1989.3.17).
03 『맹자』, 「공손추(公孫丑)」上, “所以謂人皆有不忍人之心者, 今人, 乍見孺子將入於井, 皆有忧惕惻隱之心, 非所以內, 交於孺子之父母也, 非所以要譽於鄕黨朋友也, 非惡其聲而然也. 由是觀之, 無惻隱之心, 非人也, 無羞惡之心, 非人也, 無辭讓之心, 非人也, 無是非之心, 非人也. 惻隱之心, 仁之端也, 羞惡之心, 義之端也, 辭讓之心, 禮之端也, 是非之心, 智之端也. 人之有是四端也, 猶其有四體也, 有是四端而自謂不能者, 自賊者也, 謂其君不能者, 賊其君者也.” (전통문화 연구회의 성백효 번역을 참고하였으며,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의역하였음.)
04 홍일립, 『인간 본성의 역사』 (서울: 에피파니, 2017), p.125 참조.
05 『순자』 「영욕(榮辱)」, “凡人有所一同, 飢而欲食, 寒而欲煖, 勞而欲息, 好利而惡害, 是人之所生而有也.”
06 황윈밍, 「도생의 열반불성론에 대하여」, 『동서사상』 7 (2009), p.289 참조.
07 『묘법연화경주소(妙法蓮花經注疏)』 「비유품(譬喩品)」, “一切衆生莫不是佛, 亦皆泥洹.”
08 진래, 『주희의 철학』, 이종란 외 옮김 (서울: 예문서원, 2013), p.230 참조.
09 정인재, 『양명학의 정신』 (서울: 세창, 2014), p.182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