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2/25

필립 제이슨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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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제이슨

최근 수정 시각: 2017-12-22 19:15:05



Phillip Jaisohn / 피제손, 서재필(통칭)
1864년 1월 7일[1] ~ 1951년 1월 5일








1. 개요2. 이름3. 생애4. 논란5. 기타6.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이 글의 대부분의 소스는 시사저널 1994년 기사에서 발굴되었다.


사람은 모두 하나님께서 내셨다. 그러므로 사람은 사람을 짐승처럼 부려서는 안 되고 하나님께서 주신 그 사람의 권리를 존중해주어야 한다.


조선의 무신, 대한제국의 정치인, 언론인이자 미국 국적의 한국 독립운동가, 언론인, 군의관, 정치가, 의학자였다. 미국에서 해부학자, 시인, 소설가, 의사로 활동하였다. 본관은 달성이고, 자(字)는 윤경(允卿), 호는 송재(松齋)·쌍경(雙慶)이다.
2. 이름[편집]


'서재필'의 어순을 바꿔서 '필재서'로 만든 다음 영어화시켜서 필립 제이슨이 되었다. 성 표기가 일반적으로 '제이슨'에 많이 사용되는 'Jason'이 아닌, 'Jaisohn'으로 약간 특이한데 그 당시 그의 이름을 들은 미국인 기자들이 발음 나는 대로 적은 것이 변형된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 전 세계에서 이 사람 한 명만 갖고 있던 성씨였다. 덧붙여 서재필이라고 부르면 언짢아 했다고. 물론 jaisohn이 아닌 jason으로 불렀어도 서양인 입장에서는 굉장히 특이한 성이었을 것이다. 애초에 필립이나 제이슨 둘 다 이름으로 쓰지 성으로 쓰는 경우는 없으니까.
3. 생애[편집]


1864년 1월 7일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2] 가내마을에 있는 외가 성주이씨 집안에서 동복 현감[3] 서광효[4]과 이씨 부인의 셋째 아들 서재필로 태어났다.

뒤이어 어렸을 때 아버지 서광효의 6촌 형제이자 그의 7촌 아저씨인 충청남도 은진에 사는 서광하의 양자로 갔다. 서광하의 처가가 유명한 안동 김씨로, 양 외삼촌 김성근의 집에 갔다가 그의 친척 손자뻘 되는 김옥균을 만나면서 인생이 바뀌게 된다.

1879년에 임금이 친히 주관하는 전강에서 1등하고 1882년 별시문과에 합격, 교서관 부정자, 훈련원 부봉사 등을 지내고 일본으로 유학, 1884년 토야마 소년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귀국했다. 이때 양어머니 김씨의 상을 당했지만 특별히, 신식 군대를 창설할 목적으로 설립된 병조예하 신식 군대 훈련소 조련국 사관장이 되어 생도들을 양성하다가 갑신정변에 참여한다. 젊은데다가 생도들을 거느린 무관이었기 때문에 정변의 행동대장 격으로 활약하였다.

갑신정변 당시 약관의 나이로 참여하다가 말 그대로 집안이 멸문지화를 겪는데 아내는 자살하고 하나 있던 아들은 돌봐주는 이 없어 굶어죽는다. 양가(養家), 친가(親家) 가릴 것 없어 양아버지 서광하는 전재산을 몰수당하고 노비로 전락하였고[5], 생부 서광효는 자결하였다. 생가 형제들 중 맏형 서재춘은 감옥에 갇혔다 독약을 먹고 자살했고 이복 형 서재형은 관군에 살해당했다. 생모 이씨는 노비로 끌려갔다가 1885년 1월에 자살했고 서모와 이복 동생들 역시 죽임을 당했다. 이미 다른 집으로 양자로 간 동생 서재창 역시 도주하다 잡혀 처형당했으며 여동생 서기석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함경도로 피신한다. 화를 피한 사람들은 아직 어렸던 남동생 서재우와 큰 형 서재춘의 아들 서명원, 서재창의 유복자 서O석[6] 등이 있었고 결혼한 누나들도 출가외인이라 하여 화를 피했다. 당시 개화파를 지원해주던 일본의 후쿠자와 유키치는 당사자들은 몰라도 가족들까지 연좌제로 몰살당한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하며 조선을 경멸하게 되었고 이후 흑화하게 된 것에 갑신정변 후폭풍의 영향이 크다고 보여진다.

옛날 전제정치(專制政治) 아래서는 자칫 잘못하면 역적(逆賊)으로 몰리기도 일쑤였다. 심한 경우에는 그런 사람의 이름을 아예 족보(族譜)에서 빼어 버리기도 했고 또 항렬자도 바꾸기도 했다. 저 유명한 갑신정변(甲申政變) 1884년의 주동자들의 경우가 그랬다. 김옥균(金玉均)·홍영식(洪泳植)·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서재필(徐載弼) 등을 주축으로 한 개화당(開化黨)의 혁명이 3일 천하로 끝나면서 그들은 사대당(事大黨)인 민정권(閔政權)에 의해 역적으로 몰리게 된 것이다. 그래서 김옥균(안동 김씨)의 均자 항렬은 규(圭)로 홍영식(남양 홍씨)의 植자 항렬은 표(杓)로 박영효(반남 박씨)의 泳자 항렬은 승(勝)으로 서광범(달성 서씨)의 光자 항렬은 병(丙)으로 서재필(달성 서씨)의 載자 항렬은 정(廷)으로 각각 바꾸고 말았다.[7]

그는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등과 함께 제물포로 도망가 일본 상선에 오른다. 그러나 서재필 등을 인도하라는 고종의 요구에 다케조에 일본 공사가 이들을 내리라고 한다. 그러나 용기있는 일본 상선 선장의 거부로 다행히 목숨을 구하고[8]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서 1년간 생활하다가 미국으로 다시 건너간다.

후에 미국에서 시민권[9]을 취득하고 이름을 필립 제이슨으로 바꾼다. 의사 면허를 얻어서 의사로 활동하였다. 하지만 인종차별의식이 팽배했던 미국에서 동양인 의사가 먹힐 리는 없고, 도서관 사서로 근무하던 도중에 당시 김홍집 4차 내각[10]에 있던 왕년의 동지 박영효가 필립을 다시 부른다. 때문에 다시 조선을 문명화한다는 의식이 들었는지, 미국인 자격으로 귀국하여 조선 정부와 함께 독립문 건립을 시작으로 하는 일련의 활동을 벌인다. 그리고 이것이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으로 이어졌다. 피제손이란 이름으로 활동한 이 시기에는 조선정부에서 월급까지 받았다.

그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은 순 한글로 된 독립신문을 발행해 서민들도 문물을 접할 기회를 확대했다는 것. 그의 정치적 입장도 있었던 탓에 독립신문은 대부분 서민들이 많이 구독했다. 한글화에 도움을 준 인물이 국어학자 주시경. 당시 부책임자였다. 그의 자서전을 보면 독립신문 발행이 온전히 자신의 공로인 것처럼 되어 있고 국내 대부분의 교과서도 '독립신문=서재필 공로'로 거의 도식화되다시피 해 소개하고 있으나, 실상은 꽤 달랐다는 게 중론. 무엇보다 필립 제이슨은 신문 발행과 관련된 일을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다. 그가 독립신문에 관여한 것은 영문으로 발행되는 페이지의 논설을 작성한 정도가 아닐까 하고 생각되고 있다. 한편 그가 관직을 역임한 적도 없고 순수하게 나라를 위해 애국심으로 활동했다는 것도 논란의 소지가 있다. 중추원 관리로 추천되었고 귀국할 때는 당초 예정된 정부 관리로서의 봉급을 몽땅 챙겨서 떠났다. 이건 열정페이로 돈 안 받어야 했다가 아니다. 피제손의 행동이 당시 한중일에 넘치던 외국인 고문들과 전혀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그 외국인 고문들도 물주의 이익을 위해서 성실히 일했다. 독립신문 관련해서 언급 안되는 소재는, 미국으로 추방될 처기다 된 필립 제이슨이 자기 돈 들여서 설립한 것도 아닌 독립신문을 일본이나 러시아에 매각하려고 한 흔적도 있다는 것이다. 이 시도는 결국 실패하고 윤치호가 이어받는다.

더구나 그의 운동이 독립이라는 구호에도 불구하고 중국러시아를 견제하는 데에만 주력하고 미국일본 등의 이권 침탈에는 소극적이었다는 한계와 함께 그의 친일, 친미적 성향과 맞물려 결점으로 지적받기도 한다. 조선으로 돌아올 때도 필립 제이슨이라는 이름을 더 선호해서 한국계 미국인이나 다름없다는 말도 있다. 독립신문에서도 자신을 서재필이 아니라 필립 제이슨의 한역인 피제손이라고 적었다. 사실 본인은 한국에서의 연고가 전부 끊겨버린 탓에 본인은 미국인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그는 한국에 와서도 모국어보다 영어를 즐겨 썼다고 한다. 이 때문에 90년대에 본격적으로 친미 매국노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심지어 한국어 대신에 영어를 쓰고 김치 대신 빵을 먹자는 소리까지 했다고 한다.어륀지 파동이 100년 앞섰습니다. '미국인'인 필립 제이슨이 미국을 비난하지 않은 것은 그렇다쳐도, 일본의 입장까지 두둔한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더군다나 헐버트나 언더우드 같은 외국인도 한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조선 출신 미국인으로서 역시 비판받을 수밖에 없다. 독립협회 출신에서 친일파가 나온 것이 가장 결정적인 이유로 추정된다.[11] 어떤 사료에는 심지어 일본과는 계속 친하게 지내야한다는 등의 발언도 했던 듯.[12]

하지만 독립협회의 활동이 점점 정치화되었고, 초기에는 나름대로 양호하였던 정부와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필립 제이슨은 미국으로 추방되게 된다. 서울대 교수 신용하는 정부가 독립신문을 탄압한 이유로 "수구파 정부에 대한 비판, 제정 러시아의 침략간섭정책 비판, 탐관오리의 부정부패 고발, 전제군주권에 대한 비판, 국정개혁과 민권신장 주장, 서재필의 오만한 처신"을 뽑기도 했다.[출처] 나머지는 정치적 대립이지만, 마지막만은 서재필 개인의 문제이다. 하지만 독립협회 내부에서는 여전히 입지가 남아 있어서, 독립협회 인사들이 참여한 중추원 최초 의제에서 필립 제이슨을 각료로 추천하는 인물도 있었다.[14].

미국으로 추방된 이후에는 조용히 미국인 의사로 지냈다. 2차 대전 연간에 인쇄업을 하다가 망한 이후 궁핍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이승만식 편지보내기나 단파 라디오 방송 등의 최소한의 독립운동의 흔적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필립 제이슨을 독립운동가로 부르는 것은 터무니없는 이야기라는 의견이 있다.

하지만 독립운동 활동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였으며 미국에서 꾸준히 활동을 하였다. 다만 그 방법이란 게... 한마디로 편지보내기 운동이다. 외교론의 입장이었던 이런 활동은 이 시기에 굉장히 많다. 물론 아무런 성과도 없었고. 전시기도 아니고, 일정시기 이정도 활동으로 독립운동가로 강조하는 것은 상당한 무리수인 것도 사실이다. 이후 미 언론에도 꾸준히 기고활동을 했었으나 대공황으로 인한 보유주식 폭락으로 인한 실패와 그 이전의 사업의 실패등으로 인해 생활고에 시달렸고 대학 강사와 병원 의사를 하기도 했다.[15] 이와중에도 이상재, 안창호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조선에 방문하기도 하였으며 서재필이 미 시민권자였기 때문에 일제는 그를 구금할수가 없었다. 더불어 의사였기 때문에 미국의 태평양 전쟁 참전 이후 징병검사관으로 자원봉사했으며 1945년 1월 공로훈장을 수여받기도 하였다.

이승만의 경우는 미국에서 건너온 독립운동가라는 평판이 지배적[16]이며 이런 저런 루트를 통해서 일제 연간에 국내 미국 유학파 세력들에 충분히 어필했고 이것이 해방후 정치입지 구축에 나름대로 기여했고 또 영어, 친미파, 반공산주의, 미국 유학 경험 등을 배경으로 미국과의 연결고리를 가지면서 친일이 경력 없었다는 점으로 인해 대통령까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필립 제이슨의 경우는 가장 중요한 시기에 독립운동과 거리가 멀어진 것이다. 물론 가장 큰 원인은 20년대 이후 지속된 생활고로 인해 독립운동 지원이 힘들어 기고 활동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거지만.

8.15 광복 이후 미군정에 의해 귀국해서 라디오 방송으로 연설을 영어로 방송했다고 한다. 남한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기도 하였으나 고령으로 거절. 게다가 아무래도 해외에 오래 거주한 터라 당연히 민중의 지지도 그다지 높지 못했다(…). 당시 기록을 보면 반 평생을 미국에서 산 미국인인 본인에게 왜 그런 일을 시키냐며 미군에 항의까지 했던 모양이다. 그래도 지지자가 없지는 않았는지, 국회에서 간선으로 실시한 제1회 대통령 선거에서 1표를 얻긴 얻었다. 다만 왜 미국인을 뽑느냐 그럼 다음엔 트루먼도 뽑을 거냐하고 국회의원들이 단단히 반발하면서 무효표 처리되었다(...).

하지만 정반대로 미국으로 쫓겨난 이후에는 그냥저냥 미국인 의사로 잘 먹고 잘 살았으나, 독립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 자리 하려고 귀국했었다는 설도 있다. 미국에서 대통령 푸시가 들어온건 사실이다. 독립신문과 비극적 가정사로 대중의 지지[17]또한 얻고 있었다. 그러다 이승만과 경쟁구도로 국민 관심이 모아졌을 때 대놓고 영어로 연설을 해버린다. 필립 제이슨을 비판하는 쪽에서는 이를 까지만, 필립 제이슨이 의도적으로 행한 자폭이라 보는 것이 더 합당하다. 어린 나이에 급제하고 미국에서 의사고시에 합격하는 등 머리에는 일가견이 있는 양반이 한국어가 어려워서 연설을 영어로 한다는 건 '나 안하겠소~'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아니면 독립협회 시기 미국으로 추방된 이후 한국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아서 방송할 형편이 아니었거나.

어쨌든 필립 제이슨의 고사로 인해 이승만과 필립 제이슨을 경쟁시키려는 미국의 계획은 틀어졌고 이는 이승만이 추후 미국으로부터 많은 양보를 얻어내는데 도움이 된다.

그리고 미국인 여성과 결혼한 다음 미국에서 병원 차린게 잘 안 되니깐 다시 도로 한국으로 돌아와 버리는 만행(?)도 저질렀다.[18][19]

일제강점기의 전체를 미국인으로 조선의 독립 전선에 크게 기여하지는 못했지만(혹은 안했지만) 독립유공자로 추서된 필립 제이슨의 유해는 1994년 서울 국립서울현충원으로 환국되어 안장되었다. 이때 필립 제이슨의 영정을 운구한 외종증손 이상호 전 지방자치단체 국제화재단 이사장은 "나는 죽은 다음 '나쁜 놈, 더러운 놈' 소리 듣지 않아야겠다 생각했다"며 당시의 소회를 밝혔다. 관련기사 필립 제이슨에 대해서 비판적인 이들 사이에서는 그가 저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가로 추앙받는 이유는 일명 조중동 언론들이 그를 추앙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돈다. 실제로 조선일보의 기획기사 현대사 인물 재평가 시리즈의 두번째 인물이었고, 필립 제이슨의 운구가 현충원에 안장된 1994년에 한겨레신문에서 업적 없는 사람이 현충원 갔다고 깐 적도 있어, 정치 성향에 따라 그에 대한 평가가 크게 엇갈리는 것을 볼 수 있다.
4. 논란[편집]


2017년에 황태연 교수에 의해 일제의 밀정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링크) 놀랍게도 중앙일보에 이러한 주장이 실렸다. 앞 항목에서는 조중동이 그동안 서재필을 띄워 왔다고 기술되어 있었지만, 이와는 반대되는 주장이 소개된 것.

해당 기사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고종이 다시 없을 성군으로 묘사된다. 일제 밀정이였으면 일제시대에 떵떵거리고 잘 살았어야지 미국가서 그 고생하면서 의사가 되었겠나 해당 교수의 저서로는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 『공자와 세계』(전 5권·2011) 등이 있다.

5. 기타[편집]


흔히 서재필 '박사'라고 많이 언급하지만 필립 제이슨은 박사 학위를 받은 적이 없다. 이는 사람들이 Dr. Jaisohn을 '의사 서재필'이 아닌 '박사 서재필'로 잘못 알아들었기 때문이다.[20]

유일한 박사가 1926년에 설립한 제약 회사인 유한양행의 버드나무 마크는 서재필이 만들었다고 한다. 유일한이 회사 설립을 위해 귀국하기 전에 만난 자리에서 서재필이 주었다고 한다.

1896년 4월 23일 경성(서울)에 거주하는 미국인들과 미국 해병대원들의 야구 친선경기가 있었는데 그 중 서재필이 필립 제이슨이라는 미국이름으로 출전했다는 기록이 있다. 6번타자 중견수로 출전하여 2득점을 기록했다고 한다.

1950년 9월 14일 병석에서 존 하지에게 보낸 서신이 남아있다. # 요약하자면, '자신이 한국인들로부터 건네받은 한국의 정치 및 경제적 상황에 대한, 치우치지 않은 정보'를 월터 스미스 장군 산하의 육군정보처에 제공하고 싶다는 내용.

네이버에서 필립 제이슨을 13일의 금요일의 살인마 제이슨으로 만든 사건은 두고두고 회자될 일이다. #관련 포스트